소설리스트

5.성산에서 (48/104)

5.성산에서

정색하고 낮아진 용무린의 목소리에 황제의 표정 역시 살짝 굳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그것은 불가합니다.”

“어째서? 그대라면, 저 혈고라는 마물조차 마음먹은 대로 솎아낼 수 있는 능력을 지닌 패주의 강대한 무력이라면 가능하지 않은가?”

“저는 혼자지요. 제가 감당할 수 있는 숫자는 솔직히 한계가 있습니다.”

“그래서 총병관을 붙여주었지 않은가? 그와 오군도독부의 정병들이 함께 한다면 능히 이룰 수 있을 걸세. 어째서 해보지도 아니하고 불가하다고 하는가?”

안되겠다고 느낀 용무린은 조금 더 적나라한 대답을 해주기 시작했다.

“제게도 한계가 있다고 했었지요? 제가 총병관과 함께 무림에 나가 있을 때 이곳 황성에 무부들이 짓쳐들면 대체 어떻게 막으시려는 것입니까?”

“어림친위들이…….”

“아니요! 어림친위를 폄훼하려는 것은 아니지만 그들의 힘으로는 어림도 없습니다, 폐하.”

“분하지만 사실입니다, 폐하. 저희는 상관세가나 운룡장의 무인들을 감당할 수가 없었습니다.”

“……!”

관일영의 피 토하는 듯한 대답에 황제는 말을 잃었다.

자신조차 상관초웅의 손에 목줄이 잡혀 있었던 기억이 다시 떠올랐던 것이다.

“무림을 피로 씻으려 들면 그들은 결코 참지 않을 것입니다. 일제히 들고 일어나 자신들의 자유를 쟁취하려 들겠지요. 그 힘은 가히 추측불가. 그래서 역대 선황들께서도 관과 무림은 별개라는 현실을 인정하신 것입니다.”

“저, 정녕 그 수밖에는 없는 것인가?”

“그렇습니다, 폐하. 소림이나 개방을 비롯한 정파인들이야 어찌어찌 자제를 한다고 하더라도 사파인들이나 마도인들 같은 경우 일제히 황성의 담을 넘을 것입니다. 그때는 정말 답이 없습니다.”

솔직히 그것이 사실이었다.

물론 결국에 가서는 수와 장비의 우세를 내세운 군의 승리로 끝날 것이다.

아무리 무림인 개개인의 실력이 우세하다고는 하지만 백만에 달하는 대군이 일제히 창을 돌리면 그 힘을 감당할 수 있는 개개인이나 무력 단체란 없었으니까.

무림은 멸망할 것이다.

모든 가문과 문파가 멸문해 버리고 대가 끊기리라.

‘하지만 황제나 이 나라도 끝장 나.’

무림이 망하기 전에 황제의 목숨과 황태자를 비롯한 황실 직계의 목숨 또한 끝이 날 것이다. 작정하고 달려드는 소수의 절대무인들을 감당할 수 있는 고수가 자금성에는 없을 테니까.

‘공멸인 셈이지.’

그런 참담한 상황만은 막아야했다.

용무린은 계속해서 황제를 어르고 달랬다.

“하여간 무림의 일은 무림인들에게 맡겨 주십시오, 폐하. 어차피 확실히 정리할 생각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마교든 뭐든 제가 싹 다 쓸어버릴 생각입니다. 그냥 믿고 지켜봐 주시기만 하십시오.”

“…….”

황제는 심각한 얼굴로 생각에 잠겼다.

황제인 자신의 힘으로도 어찌할 수 없는 곳이 무림이라는 생각에 답답함 심정이면서도 용무린이 싹 쓸어버릴 생각이라니 기대도 되는 모양이었다.

“……정녕 그럴 생각으로 무림에 나서려는 것인가?”

“예?”

“마교든 뭐든 싹 다 쓸어버릴 생각으로 돌아가는 것이라 하지 않았나?”

“아, 예. 물론입니다, 폐하. 어차피 황성으로 오기 전부터 계속해서 하던 일이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무림을 정복하는 데 그놈들이 방해가 되거든요.’

용무린의 입과 생각이 따로 놀았다.

“나가서도 제 일은 변함없이 마교 놈들과 그들의 수작을 분쇄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제가 무림을 정복하는 데 수월하니까요. 솔직히 놈들이 방해가 되지 않는다면 저도 귀찮고 성가셔서 안 건드릴지 몰라요. 여간 독한 놈들이 아니거든요.’

입 밖으로 튀어 나오는 말과 속내가 다른 것을 모르는 황제는 용무린의 포부를 자신에 대한 또 다른 충성으로 받아들였다.

‘모든 위험은 자신이 홀로 감당할 것이라는 뜻인 게지?’

황제의 안위를 위해 모든 위험을 홀로 감당하는 자!

황룡패주라는 막강한 지위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황제와 종묘사직을 위해 몸소 세상 속으로 뛰어든 사내!

‘황제의 목숨까지 구한 공이 더해져, 이제는 편히 누리기만 하며 살아도 될 터인데 굳이 세상 속으로 들어가 마교의 악적들을 제어하겠다니!’

어찌 어여삐 여기지 않겠는가?

“믿겠다, 황룡패주. 무림의 일은 오롯이 그대의 손에 맡기도록 하겠다.”

“감사합니다, 폐하.”

“하지만 패주 혼자 고생하는 것을 두고 볼 수만은 없는 법, 예정대로 황룡패주에게 무림왕의 지위를 내리노라.”

“예에? 무림왕이요?”

그런 낯간지러운 직위 따위 필요 없다고!

고함이라도 버럭 지르고 싶었지만 진지하기 짝이 없는 황제의 선언에 나설 수가 없었다. 문무백관이 오체투지하며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따위를 부르짖고 있어서 더욱 그러했다.

“황룡패주 용무린을 무림왕에 봉하니 그에게 필요시 군을 동원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하는 바이다. 그대의 명령이 곧 나의 명령이 될 지니, 황권을 수호하는 일에 필요하면 거침없이 쓰라.”

그야말로 파격의 연속이다.

무림왕의 지위에 군을 동원할 수 있는 권한까지 부여해준다니! 그것도 용무린의 명령이 황제인 자신의 명령과 같다고까지 하면서?

평화로운 때였다면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사림과 유림을 가리지 않고 문무백관이 하나가 되어 용무린의 무림왕 책봉과 군사지휘권의 수여를 막으려 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미 혈고에 종속당했거나 자의로 상관초웅과 손을 잡은 사람들이 칠 할에 가까운 것으로 밝혀진 지금 죽음이 두려운 대신들은 황제의 비위를 맞춰주기에 바빴다. 너나할 것 없이 찬성들을 했다.

“황은이 망극하옵니다, 폐하.”

“무림이라는 치외법권 지역에 왕을 둠은 곧 무림 역시 황제폐하의 권역으로 선포하는 것과 다름이 없사옵니다.”

“현명하신 판단입니다, 폐하.”

물론 황제는 바보가 아니었다.

대신들이 자신의 뜻에 동조 좀 했다고 역적질을 한 것을 모두 눈감아 줄 수는 없는 노릇 아니겠는가?

“그건 그렇고, 지금부터는 너희 역적 무리들에게 대한 판결을 내리겠노라!”

“……!”

“……!”

태화전에 죽음과도 같은 정적이 흘렀다.

“혈고에 종속이 되었던 대신들은 그 강직성 때문에 혈고를 투여한 것으로 판단, 혈고로 인해 저지른 죄는 묻지 않겠노라!”

털썩. 털썩.

“아아, 폐하!”

“황은이 망극하옵니다, 폐하.”

“이 한 목숨 다 바쳐 황제폐하를 위해 바치겠나이다-아.”

혈고에 종속되었던 대신들이 감격해 오체투지를 했다.

자신과 가문 모두가 살게 되니 감격하지 않을 수 없었다.

“반대로 혈고에 종속이 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자의로 역적의 무리에 부화뇌동한 무리들은 그 죄과에 따라 중형과 극형 혹은 귀향으로 마무리하겠노라.”

황제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병부상서가 앞으로 나섰다.

두루마기를 쫙 펼쳤다. 황제가 친히 분류를 해 둔 생사부를 읽어 내려갔다.

“호부상서 참형, 좌시랑 참형, 이부 우시랑 참형, 예부 우시랑 귀향…….”

“폐-에-하!”

“사, 살려주시옵소서.”

“억울하옵니다, 폐하.”

판결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고함을 지르며 죄과를 부인했지만 황제가 사라졌던 서너 달 동안 저질렀던 일들이 너무나 확실했던 터라 죄상을 증명하기에는 어려움이 없었다.

“이놈! 얌전히 나오너라.”

“역적아, 순순히 죄 값을 받으렷다.”

반항을 하든 아니면 부인을 하든 어림친위군의 손에 질질 끌려 나와 처형장으로 끌려가거나 귀향을 갔다.

‘어떤 면에서는 자금성이 무림보다 더욱 잔인한 곳인 것 같구나.’

모든 일을 빠짐없이 지켜보며 용무린은 다시 한 번 이곳이 자신이 있을 곳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빨리 나가야지, 최대한 빨리.’

마음이야 그랬지만 실제로는 그렇게 하질 못했다.

마음 한 구석이 불안했는지 황제가 계속해서 용무린을 곁에 두려고 했기 때문이었다.

“무림왕은 잠시만 더 내 곁에 있으라.”

“마교 놈들 빨리 때려잡는 게 더 낫지 않을까요?”

“그거야 그렇긴 하지만……. 어쨌든 나는 무림왕을 이렇게 보내고 싶지가 않구나. 본 천자의 목숨을 구해주고 단숨에 낫게 만들어 준 이인데 아직 변변한 환영식도 못해주지 않았는가?”

“괜찮습니다, 폐하. 저 하나도 원하는 것이 없어요.”

‘그냥 보내주는 것이 저를 돕는 거라니까요?!’

차마 그 말까지는 할 수 없었던 용무린은 부득불 황제 곁에 며칠 더 잡혀 있었어만 했다.

그 사이 성대한 연회를 열어주려 했지만 자금성 곳곳에서 피바람이 부는 판국에 무슨 술맛이 나겠는가? 용무린이 적절히 주청을 해서 취소했다.

***

사흘 후.

용무린과 총병광 양문광과 양경홍 그리고 양가장의 세 장로가 보무도 당당하게 말을 타고 자금성을 빠져나왔다.

“무림왕 천세, 천세, 천천세!”

“무림왕 천세, 천세, 천천세!”

환송을 나온 금의위와 근위병 그리고 어림친위군이 고함을 질렀다.

흠칫. 부르르.

용무린이 몸을 가늘게 떨며 괴로워했다.

“아오, 내 저놈의 무림왕 소리 조금만 더 들었다가는 제명에 죽지 못할 거라니까요?!”

“허허허, 그것이 그렇게 싫으십니까?”

“익숙해지셔야 합니다, 무림왕이시여. 세상에 오직 한 사람에게만 허락된 영광된 호칭입니다.”

양문광과 양경홍이 웃으며 입을 열었다.

하지만 어찌나 낯이 간질였는지 용무린은 고함을 버럭 지르고 말았다.

“두 분까지 정말 그러시긴가요?”

“하하하. 황제폐하의 명이 지엄하시니 어쩝니까?”

“궁중의 법도란 그런 것입니다, 무림왕이시여. 한 번 결정이 되면 싫어도 해야 하는 법이지요.”

어쩐지 용무린을 자꾸만 놀리는 듯싶다.

“차라리 패주라고 부르세요.”

“정 그러시다면 사적인 자리에서는 패주라 칭하겠습니다.”

“알겠습니다, 패주.”

“후우. 살 것 같네.”

그나마 낫다는 듯 용무린은 고개를 흔들었다.

그런 용무린을 보며 양문광이 은근한 어조로 물었다.

“이제 어디로 가실 작정이십니까, 패주?”

용무린의 뇌리에 한 곳이 불쑥 떠올랐다.

전부터 계속해서 가보고 싶었던 곳이었다.

“구련산이요.”

“구련산? 태행산맥 끝자락에 위치한 그 구련산 말씀입니까, 패주?”

“예.”

“……딱히 이유라도 있으십니까?”

당연히 있다.

‘천기자란 양반이 쪽지까지 남겨서 당부했잖아. 모든 것은 있을 자리에 그대로 다 있다고 말이야.’

구련산 초입에 자리한 천문!

성산지약의 그 천문이 아니라면 대체 있을 자리가 이 하늘 아래 어디이겠는가?

‘틀림없어. 있다면 그곳에 뭔가가 있을 거야. 성산의 기문진을 파훼한 놈도 찾아내지 못한 무엇인가가 말이야.’

그때는 찾아내지 못했지만 지금은 다르다.

그때는 이류 언저리의 내공에 눈도 탁했지만 지금은 초절정의 내공에 걸맞도록 눈이 밝아졌단 말이다.

‘있으면 찾아낼 수 있을 거야.’

뭔가가 있다면 말이지.

“예. 꼭 찾아가 봐야만 해요.”

“흐음. 구련산으로 가려면 어차피 하남성 쪽으로 내려가셔야 할 터, 반나절 거리에 저희 일가가 살고 있으니 바쁜 걸음만 아니라면 패주를 잠시 모시고 싶습니다만…….”

양문광이 정중히 용무린을 청했다.

“왜요?”

양경홍이 조금은 쑥스러운 얼굴로 대답 답했다.

“함께 생사를 나눴음에도 변변히 식사 한 끼니를 나누지 못한 듯하여 마음에 걸렸습니다.”

그런 것이라면 얼마든지!

‘어차피 내려가는 길인데 뭐가 어렵겠어?’

“예, 좋아요.”

“감사합니다, 패주.”

“하하하. 절대로 실망시켜드리지 않겠습니다, 패주.”

양문광과 양경홍의 시선이 허공에서 마주쳤다.

회심의 빛이 번득였다.

***

자금성에서 반나절 거리에 위치한 양가장.

가주인 양문광과 소가주인 양경홍의 당당한 개선에 세가 전체가 잔치분위기에 돌입했다.

소와 돼지를 잡고 아껴둔 술을 개봉했으며 온갖 요리들을 하는 사이 용무린은 양가장의 식솔들과 인사를 나누었다.

양문광의 아내 되는 분을 시작으로 차례차례 인사를 나누기 시작해서 마지막으로 눈이 번쩍 뜨일 듯 아리따운 여인 앞에 서게 되었다.

“하하하. 제 여식입니다, 패주. 인사 올려라 하린아. 무림왕이시자 황룡패주시니라.”

“아이고, 왜 자꾸 이러십니까?”

용무린이 손사래를 쳐보았지만 소용없는 일이었다.

양가장은 무림세가라기보다는 관부의 성격이 짙은 곳이어서 무림왕이나 황룡패주라는 이름 앞에 강호의 무부와 같은 초연함을 취하기가 어려웠다.

“양가의 여식 하린이라 하옵니다, 패주.”

눈치가 비상한지 아니면 미리 귀띔을 받은 것인지 양하린은 대뜸 용무린을 패주라 칭했다.

“하하하. 편하게 대해주시오, 소저. 본래 허울 따위와는 거리가 먼 사람입니다.”

용무린이 양하린을 향해 환하게 웃어 보였다.

‘됐다. 패주께서 우리 하린이에게 관심을 보였어.’

‘마음에 드신 것 같아.’

‘잘만 하면 일이 술술 풀릴 것 같은데?’

모두가 용무린의 미소를 그렇게 받아들였다.

‘호호홍. 패주께서도 역시 사내로구나.’

양하린마저도 그렇게 생각했다. 자신의 미모야 익히 잘 알고 있는 것이었고 사내라면 누구든 자신에게 반할 것이라 생각했지만 실상은 완전히 달랐다.

‘아! 령매 보고 싶다.’

용무린은 불현듯 떠올라 사라지지 않는 제갈영령의 얼굴을 떨쳐내느라 무진 애를 써야만 했다.

양하린이 아름답지 않아서가 아니었다.

양하린은 양문광이나 양경홍이 믿고 내세웠을 만큼 아름다웠으며 무림세가의 안주인으로도 손색이 없을 만큼의 무예와 양식을 갖춘 여인이었다.

‘령매. 령매 말대로 훨훨 날아다니고 있어. 조만간 쉴 곳을 찾아 들를게.’

문제는 용무린의 마음이 온통 제갈영령에게로 향해 있다는 것인데 더 놀라운 것은, 여자만 보면 무조건적으로 유혹해보려던 추근거림 시도조차 사라졌다는 점이다.

‘어여쁘긴 한데, 그래 봤자 소용없지. 내게는 령매가 있으니까.’

마음을 주고받지 않았다면 모르되, 이미 마음을 주고받은 이상 의리가 있어야 하는 것이다.

‘사내는 의리지, 암.’

용무린이 달라졌다.

지금 마음가짐이나 행동 양식으로 보면 전생이 신마 진무량이었다기보다는 절대검신 독고황 쪽이 훨씬 더 가까워 보일 것이다.

하루해가 지고 다시 떠올랐다.

용무린은 자존심이 상해 어쩔 줄 몰라 하는 양하린의 시선을 아는지 모르는지 구련산을 향해 길을 재촉했다.

“아깝다. 내 집을 찾아들었던 용이 그냥 떠나는 구나.”

“모사는 사람이 꾸미지만 성사는 하늘에 달려 있다고 하지 않습니까? 우리 하린이와는 그저 인연이 닿지 않은 것뿐입니다, 아버지.”

양문광의 고개가 천천히 끄덕여졌다.

“안다. 내가 어찌 그걸 모르겠느냐? 나는 그저 저렇게 훌훌 떠나가는 용을 잡지 못해 안타까울 뿐이란다.”

“……!”

양경홍 역시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 역시 양문광과 같은 심정이었기 때문이었다.

***

이레 후 구련산 초입 천문.

밤낮을 가리지 않고 내달려 이곳에 도착한 용무린은 긴 숨을 내쉬며 주변을 살폈다.

“후우. 그대로구나.”

일 년 정도가 흘렀지만 변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대자연진은 파괴가 되었고 축을 이루던 나무들은 마기의 침습을 받아 검게 말라 죽었으며 바닥에서 뽑혀 나왔던 쇠말뚝들은 빨갛게 녹이 슬어 있었다.

“어디 한 번 살펴볼까?”

먼저 절대검신 독고황이 살았던 것으로 추정되는 초막으로 향했다.

그곳 역시 전과 같았다.

작은 서탁과 상자가 있던 자리로 짐작되는 바닥의 구멍까지, 변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나무들의 배치도 그대로고 딱히 눈에 띄는 것은 하나도 없다 이 말이지.”

이대로라면 과거와 같을 뿐이다.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해 빈손을 쥐고 다시 떠나야 할 것이다.

“그럴 수야 없지.”

이럴 때를 위해 한 가지 방법을 생각해 뒀다.

과거 성산지약을 위해 이곳을 오를 때 아버지께서 하셨던 말씀에 착안한 방법이었다.

“분명히 그러셨어. 성산의 대자연진이 불사신기에 호응하듯 반응을 보였다고 말이야.”

그때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을 만큼 막대한 불사신기가 자신 안에 내재되어 있다.

“쓰읍. 후우우. 쓰으읍. 후우우우-.”

깊은 심호흡과 함께 용무린은 불사신기를 끌어올렸다.

그것도 있는 힘껏!

전력을 다해 끌어올린 후 성산 전역을 향해 강력하게 뿜어냈다.

휘이이-. 쏴아아아-!

밑 빠진 독에 물 붓기라고나 할까?

아무리 불사신기를 쏟아 부어도 아무런 반응이 나오지 않았다. 쓸데없는 짓을 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내가 잘못 생각한 것일까? 정말?’

그 생각과 함께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어째서 이곳에서는 운명적인 어떤 느낌이 들지 않는 것이지?’

낙성곡을 찾았을 때나 소림의 오도암을 찾았을 때가 바로 그러했다. 들어서는 순간 느낄 수 있었던 아련한 그리움과 함께 선연히 환영 같은 기억이 떠올랐다. 그리고 모든 것이 현실과 부합했다.

‘그런데 어째서 이곳에서는 그런 느낌이 들지 않는 것이냐는 말이…….’

그렇게 투덜거릴 때였다.

투웅.

성산 전역으로 퍼져나간 불사신기에 호응하듯 어떤 울림이 메아리쳐 되돌아왔다.

그와 함께 어떤 영상 하나가 문득 떠올랐다.

하늘거리는 나뭇잎, 만 년은 족히 그 자리를 지켰음직한 거대한 바위와 그 위로 쏟아지던 노을. 그리고 그 위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는 선풍도골의 노인.

“어? 이 풍경은?”

용무린의 눈이 재빨리 주변을 다시 훑었다.

들어오자마자 한 바퀴 둘러보았을 때 분명히 그와 흡사한 풍경을 봤던 기억이 있었다.

“저기다!”

거대한 바위와 나무는 바로 찾을 수 있었다.

그리고…….

투-웅.

놀랍게도 그곳에서부터 방금 전에 쏘아 보냈던 불사신기가 되돌아오고 있었다. 심상치가 않았다. 그곳에 뭔가가 있을 것만 같았다.

타닷. 휘리릭.

용무린은 신법을 전개해 즉시 해당 풍경 앞으로 갔다.

“이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지?”

도무지 분간을 할 수가 없다.

어째서 과거에는 이런 느낌 자체가 들지 않았다가 지금에서야 드는 것이며 환영까지 되살아나는 것일까?

“정말 때가 되어가니 그러는 것일까? 아니면 불사신기의 수련 정도에 따라 다르기 때문에 이러는 걸까? 그것도 아니면 잃었던 기억이 되돌아오고 있는 건가?”

궁금하긴 했지만 지금 중요한 것은 그것이 아니었다.

반짝.

다시 한 번 환영이 떠올랐다.

바위 위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던 선풍도골의 노인이 힘겨운 얼굴을 한 채 일어서더니 손방을 향해 묘한 보법을 밟으며 사라져간 것이다.

용무린의 고개가 환영과 같은 방향으로 움직였다.

노인의 움직임을 각인이라도 하듯 허공에서 밟았던 방위를 곱씹었다.

“손방을 향해 사선으로 뛰어 내리며 보법은 분명히 북두칠성의 형태를 취했지?”

분명히 어떤 진법의 정확한 진입 방법일 것이라 생각되어졌다.

“설마 여기에 또 다른 진법이 겹쳐져 펼쳐 있다는 뜻인가? 정말?”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아무리 눈을 씻고 주변을 살펴봐도 평범한 나무와 바위일 뿐 진법으로 인한 주변 경물의 어그러짐 따위는 찾아볼 수 없었던 거다.

“있다면 애초에 이곳 성산에 펼쳐져 있었다던 대자연진과 같은 수준의 진법이라는 건데…….”

쿵쿵쿵

낙성곡에서처럼 심장이 두방망이질 치기 시작했다.

‘밑져야 본전이야.’

용무린은 대뜸 환영 속에서 보았던 거대한 바위 위로 뛰어 올라갔다.

쿵쿵쿵쿵쿵.

심장 박동이 점점 더 빨라졌다.

아련한 그 무엇인가가 마구 끌어당기는 것만 같았다.

복숭아나무 숲 저 편 넘어 존재하는 그 무엇인가가 자신을 부르고 있었다. 어서 오라고, 참 오래 기다렸다고 말하는 듯 느껴졌다.

‘좋아, 간다.’

타닷. 휘릭.

용무린은 바위를 박차고 신형을 날렸다.

환영에서 봤던 끝부분의 한 점에 선 후 손방을 향해 뛰어 내렸다. 칠성의 방위를 허공에서 정확히 밟았다.

바로 그 순간,

“어헉!”

용무린의 입에서 놀라움 가득한 소리가 튀어 나왔다.

주변 경물이 순간적으로 뒤바뀌었던 것이다.

“이, 이럴 수가……. 정말 있었잖아?!”

혹시라도 정말 숨겨진 대자연진이 있어 이렇게라도 통과하면 좋고 아니면 말고, 라는 심정으로 뛰어 내렸는데 진짜 진법을 통과해 안으로 들어올 수 있다니!

“여긴 대체 어떤 곳이지?”

참으로 신비로운 공간이었다.

나이를 추측할 수 없는 복숭아나무가 중앙에 자리한 채 팔을 벌려 주변을 아늑하게 만들고 있었다. 외부와 완벽하게 차단이 되었지만 나무 위쪽으로는 햇빛이 쏟아져 내리고 있어 보석이 반짝이는 듯 보였다.

“저, 저 노인은……?”

용무린의 시선에 복숭아나무 아래 가부좌를 틀고 좌화한 한 노인의 유해가 보였다.

“서, 설마. 내 기억 속의 바로 그 노인?”

치렁치렁한 은빛 머리칼과 영웅건, 놀랍게도 의문의 유해는 용무린의 환영 같은 기억 속에서 몇 번 마주했던 바로 그 노인이었다.

쿵쿵쿵쿵쿵쿵쿵-.

용무린은 터질 듯 뛰는 심장을 애써 누르며 천천히 앞으로 다가갔다. 한 걸음 다가갈수록 심장이 터질 것만 같았다. 절대적인 이끌림이 유해에서 느껴졌다.

하지만,

“뭐야? 상태가 왜 저래?”

실망도 적지 않았다. 눈살이 절로 찌푸려졌다.

오도암에서 마주했던 혜월대사의 등신불과는 달리 눈앞의 노인의 상태는 너무 심했기 때문이었다. 육탈도 되는 둥 마는 둥해서 악취도 너무 고약했고 듬성듬성 유골이 드러나 있어 보기에도 흉했다.

“내 짐작이 맞다면 절대검신 독고황의 유해일 텐데 어째서 이모양인거지?”

진정 이 유해가 절대검신 독고황이라면, 그의 실력이 정말 절대적인 그것이었다면 이럴 수가 없을 터인데 정말이지 이상했다.

“서책이라.”

그 안에 해답이 적혀 있길 바라며 용무린은 유해의 무릎에 놓여 있는 서책을 집어 들었다.

-독고황이 남긴다.

용무린의 두 눈이 부릅떠졌다.

“정말 절대검신이었어? 정말로?”

용무린은 빠른 속도로 안의 내용을 읽어 내려갔다.

내용은 정말 흥미진진했다.

-고려의 멸망 후 나라를 잃은 무상함에 그대로 등선을 하려 했었다. 하지만 마지막 순간 하나의 천기를 읽을 수 있었던 나는 등선을 뒤로 미룰 수밖에 없었다.

역천자의 등장이라는 무서운 천기!

그를 막지 못하면 새롭게 거듭난 내 고향마저 피에 잠길 것임이 너무 명백했기에 나는 곧장 등선을 하려던 계획을 접고 이곳으로 와 이 땅의 우두머리라 할 수 있는 소림의 혜월과 무당의 현진을 만났다.

비슷한 시기에 나와 같은 천기를 읽은 그들과 나는 곧 흉금을 터놓는 사이가 되었고 함께 역천자의 강림과 세상을 피로 물들이려는 의지를 가로막기로 의기를 투합했다.

과연 때가 되어 마교가 일어났다.

마교가 무림을 침공했고 많은 수의 문파와 무인들이 속수무책으로 무너져야만 했다. 그 과정에서 피가 강이 되어 흘렀다. 수많은 인명이 스러졌다.

마교의 교주를 역천자라 판단한 나와 혜월과 현진은 그들의 앞을 가로막았고 내가 직접 손을 썼다.

고려의 옛 법을 사용해 마교주의 목을 베었지만 역천자라는 존재가 그로 인해 탄생되기 시작한다는 것까지는 그 순간 나를 비롯해 누구도 몰랐다.

역천자는 사람을 통째 먹는다.

아니, 집어 삼킨다는 표현이 더 정확하리라.

자신보다 강한 상대, 자신의 힘으로 도저히 극복할 수 없는 상대, 그래서 탐이 나는 상대라면 즉시 자신의 육신을 버리고 상대의 육신을 빼앗는다. 그 대상으로 갈아 타버리는 것이다.

“맙소사. 그, 그런 게 대체 어떻게 가능할 수 있단 말이야?”

용무린의 고개가 천천히 흔들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도무지 믿을 수 없었던 것이다.

-믿을 수 없을 것임을 잘 안다.

나 역시 그러했다.

그러나 마교의 야욕을 막아낸 후 일 년이 지났을 즈음에야 비로소 알 수 있었다. 역천자가 뱉어낸 타액, 무심하게 뿌려낸 흙먼지 속에 깃든 원념이 시나브로 내게 스며들기 시작했다는 것을…….

나는 내게 스며든 역천자의 모든 것과 나를 잠식하고 내 육신을 빼앗아 차지하려는 그와 끝도 없는 싸움을 계속해야만 했다.

용무린에게 작은 앎이 찾아들었다.

“그렇구나! 이제야 알겠다. 어째서 신교의 조사동에 불사신기의 구결이 남겨져 있었는지 이제야 알겠어.”

절대검신 독고황이 남긴 글이 사실이라면, 역천자가 스며들어 잠식하고 빨아들였다면 무공구결 또한 흡수했을 터! 그래서 납득할 수 있도록 책자가 남아 있었다고 왜곡된 형태로 기억 속에 남았을 것이다.

“신마 진무량으로만 알았던 내가 어떻게 해서 그렇듯 많은 정파무림의 실전절기를 기억하고 있었던 것인지도 이제야 알겠다. 나는 정말 절대검신 독고황이었구나.”

그랬기에 옛 전진파의 무공과 이미 멸문해 사라졌던 유성검문의 무공과 오대세가의 옛 가전무공들을 속속들이 알고 있었던 것이었다.

“녀석이 나를 빼앗지 못했던 거야. 흡수하려 했었지만 나를 완전히 흡수할 수 없었기에 내가 다시 이 땅에 되돌아 올 수 있었던 것이로구나.”

흡수하려 했었기에, 절대검신 독고황의 몸을 통째 빼앗으려 했기에 자각의 순간 내 스스로를 신마 진무량이라 생각했었던 것이다.

참으로 놀랍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더 알고 싶었다. 용무린의 눈은 계속해서 책자의 글귀를 빠른 속도로 읽어 나갔다.

-나를 잠식하려는 역천자를 몰아내기 위해, 내 유년시절의 기억과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던 비밀마저 빨아들여 점점 더 강해져만 가는 그 무서운 역천자에 대항하기 위해 나는 고려의 옛 법을 한층 더 발전시켜야만 했다.

한 겹 한 겹 비밀이 풀리기 시작했다.

“확실해졌어. 그래서 내 전생이 신마 진무량이라고 생각했었던 거야.”

내가 전생이라고 생각했던 모든 것은 신마 진무량이 절대검신 독고황을 흡수 혹은 잠식하며 뒤섞인 기억이었던 것, 진실된 내 전생의 기억이 아니었던 것임이 확실해졌다.

-그것이 바로 불사신기이며 하나의 검무이다.

“불사신기이며 하나의 검무!”

운위영의 손에 숨이 끊긴 순간 단단한 껍질에 금이 갔고 그 사이 흘러나온 기억에 나도 모르는 사이 펼쳤다는 검무가 바로 절대검신 독고황의 마지막 유산이었던 것이다.

“그 검무를 오롯이 내 것으로 만들어 내야만 해.”

그래야만 역천자고 뭣이고 두 번 다시 기어 나올 수 없도록 만들 수 있을 것이다.

용무린은 숨도 크게 쉬지 못한 채 계속해서 글을 읽어 내려갔다.

-그로부터 다시 일 년.

역천자를 가까스로 내게서 몰아낼 수 있었다.

하지만 나는 알 수 있었다.

역천자를 완전히 말살하지 못했음을, 그가 시간을 뛰어넘어 이 땅에 다시 돌아올 것임을…….

전생의 신마 진무량을 압살했던 나 독고황의 모든 것을, 고려의 옛 법을 흡수해 더욱 강해져 되돌아올 그를 막을 능력이 되는 사람은 세상에 오직 하나, 나밖에 없기에 나는 등선을 완전히 포기해야만 했다.

나 역시 다시 돌아올 것이다.

역천자가 흡수한 내 것은 그를 몰아냈던 순간까지의 것, 그를 몰아낸 후 나는 불사신기와 하나의 검무를 완전히 합일시켰으니 그 이름을 불사대천검이라 부르리라.

“불사대천검!”

버언쩍.

그 글을 읽은 순간 용무린의 뇌리에 한 줄기 벼락이 일었다. 살짝 금만 가 있던 단단한 껍질이 한층 더 넓게 갈라지는 기분이었다.

동시에 안개 속에 모호하게 가려져 있던 춤사위가 오롯이 되살아났다. 운위영에게 당해 숨이 끊어졌던 당시 홀연히 펼쳐냈던 바로 그 춤사위였다.

“아아아!”

용무린의 입에서 절로 탄성이 흘러 나왔다.

휘어져 감기우고 다시 접어 뻗는 끝을 따라 하늘과 땅이 아니 걸리는 모든 것이 둘로 나뉜다. 심지어는 공간마저 예외가 아니었다.

“기억난다. 기억이 나. 모든 것이 다 기억이 난다고.”

천기자가 쪽지에 적어줬던 말들의 의미를 이제야 오롯이 알 수 있었다.

-너 자신을 찾아라. 네가 원하지 않는다 해도 반드시 그리 될 게다.

-때가 되면 스스로 알게 될 테지만……. 명심해라. 그리고 잊지 마라. 모든 것은 있을 자리에 그대로 다 있다.

‘이런 뜻이었어. 내가 나 자신을 알게 되면 자연스레 망각의 껍질이 깨어지고 전생의 내가 안배해 둔 기억들이 솟아나게 되어 있었던 거야.’

그러하기에 모든 것은 있을 자리에 그대로 다 있다고 했으리라.

불사대천검의 구결과 모든 깨달음이 폭발하듯 머릿속을 가득 메웠다. 어떤 의지를 담아 어떤 깨달음으로 불사신기를 농축했는지의 과정까지 낱낱이 떠올랐다.

스릉. 촤아아-아!

허리에 걸려 있던 풍뢰가 똑같은 모습으로 하늘까지 치솟아 올랐다. 우뚝 서기가 무섭게 그어 내리려 힘을 주었다.

움찔! 부르르.

하지만 놀랍게도 풍뢰는 그대로 굳었다.

그 뒤를 재현해 낼 수가 없었다. 어떤 의미를 담아야 하는지도 알고 있으며 풍뢰에 깨달음을 담을 능력까지 충분했지만 그럼에도 안 되었다. 그어 내릴 수 없었다.

안타까웠다. 분통이 터졌다.

“왜? 왜 안 돼? 어째서? 내가 바로 절대검신 독고황이야. 내가 바로 고려의 옛 법을 저렇게 진화시켜 놓은 장본인이라고!”

도무지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내공이 부족해서일까? 아니면 아직 인지하지 못하는 다른 문제가 있는 것일까?

부르르!

풍뢰를 움켜쥔 손이 가늘게 떨려왔다.

그 상태 그대로 영겁과도 같은 시간이 흐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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