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혼돈
사흘 후 정주 어림.
터벅터벅.
용무린은 힘없는 발걸음으로 한 객잔에 들었다.
‘젠장. 그 괴리감과 간극을 어떻게 좁히지?’
아무리 노력해도 그어 내릴 수 없었던 풍뢰.
지난 사흘 내내 계속된 실패를 겪으며 용무린은 어렴풋이 그 이유를 이해할 수 있었다.
‘내 전생이 신마 진무량이라고 착각을 하고 있었을 때조차 현재의 육체와의 괴리가 와서 한동안 힘이 들었는데 이제는 그걸 다시 바꿔서 절대검신 독고황이 나라는 것을 받아들여야 하는 거잖아.’
풍뢰나 소검비연을 다룰 때도 신마 진무량 시절을 떠올리곤 다시 지금의 육체에 대입해 익숙해지려 애를 썼었는데 그걸 또 반복해야만 하는 거다.
‘내 진짜 전생인 절대검신 독고황과 지금의 나인 용무린의 육체와는 또 살짝 다르니까…….’
신체의 길이나 근육의 강함이나 유연함 따위도 물론 미묘하게 다르다.
하지만 그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근본적인 영역에서 아직 하나가 되지 못한 이유가 더 컸다. 그래서 풍뢰를 그어 내릴 수가 없었던 것이다.
검을 다루는 깨달음과 내공은 같은 것이었지만 영육의 조화가 깨어진 상태라고 볼 수 있다.
“젠장. 유진을 얻어 더 강해지는 것이 아니라 되레 훨씬 더 약해지다니!”
불사신기를 처음 받아들인 후 육체를 단련할 때가 떠올랐다. 스스로를 신마 진무량으로 알고 있던 그때, 미세하게 차이 나는 기억과 실제 신체상의 간극을 메우기 위해 흑웅과 호랑이를 상대로 목숨을 걸고 싸웠었다.
그 결과 이제는 한 호흡 어림에 신검합일을 쓸 수 있을 만큼 신마 진무량이라는 의식과 지금의 육신이 하나가 되었는데 그것이 통째 뒤흔들린 셈이다.
“그 탓에 어검술은커녕 신검합일 아니 신도합일도 불가능해져 버렸잖아!”
영육의 조화가 깨어진 탓이다.
지금의 육신을 지배하고 있는 용무린으로서의 자아와 그동안 나를 지탱해왔던 신마 진무량의 의식의 합일을 깨고 완전히 바꾸어야만 한다.
다시금 나 스스로를 완벽한 절대검신 독고황으로 받아들인 후 육체와 정신을 하나로 만들지 못하는 한 불사대천검의 수련은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당연히 어검술은 물론이고 밥 먹는 것만큼이나 쉬웠던 신도합일의 수도 펼치기 어려워질 것이다.
“머릿속으로 이해가 다 되는데, 그게 사실 단순히 이해만 되었다고 끝나는 것이 아니란 말이지.”
영육의 조화란 상승으로 가는 가장 중요한 기본.
영육의 조화도 이뤄내지 못한 채 절대의 경지를 넘기란 애당초 무리다.
“운위영의 손에 생사의 기로에 섰을 때는 아예 혼란 따위가 없었으니 펼칠 수 있었겠지.”
그렇다면 다시금 그런 기로에 서야만, 아니 그런 기로에 서 있을 때여야만 아무런 혼란 없이 불사대천검을 펼칠 수 있다는 뜻인가?
“모르겠다, 젠장.”
위급한 상황이 또 닥친다면 모르되 일부러 목숨을 위태로운 상황으로 몰고 갈 수는 없는 일이다.
“일단은 영육의 조화부터 다시 시작해야만 해.”
물론 처음 무공을 배우기 시작했을 때처럼 육체적인 단련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어떻게 보면 쉽고, 어떻게 보면 죽을 때까지 이룰 수 없을지도 모르고…….”
나 스스로의 정체성에 관한 질문과 비슷했다.
머리로는 이해했지만 가슴으로 완전히 받아들이지는 못했다는 것을 인정한다.
“지금부터는 가슴으로도 받아들일 수 있도록 바꿔야 한다는 뜻인데…….”
하지만 그래서 더욱 묘하게 난해한 일이었다.
단어나 문장의 뜻을 알기에 머리로는 이해할 수 있지만 가슴으로 선뜻 받아들여지지 않는 것을 어떻게 쉽사리 하나로 만들 수 있겠는가?
피식.
“그 일이 쉽게 된다면 누구나 부처가 될 수도 있겠지.”
백팔번뇌를 끊어라. 그러면 해탈하리라.
그 문장의 뜻을 단순히 이해하는 것과 오롯이 자신의 것으로 만든 것의 차이와 같은 셈이니 용무린이 이토록 힘들어하는 것이었다.
“모르겠다, 젠장. 시간이 해결해 주겠지.”
지금 당장은 무리다.
용무린은 편하게 생각하기로 마음을 굳혔다.
그러자 홀연히 이런 자각이 일었다.
“잠깐만, 그러면 내가 전생에 꽤 질펀하게 놀아봤다고 생각했던 것도 다 헛것이었던 거네?”
어쩐지!
“령매 손만 잡았는데 심장이 터질 듯 뛰더라니!”
너무 오랜만에 손을 잡아봐서 그런 줄로만 알았는데 아니었다. 전생이나 지금이나 너무 경험이 없어서 탈이었던 것이다.
그렇다. 나는 숫총각이다.
“그것도 무려 수백 년 동안이나!”
절대검신 독고황의 나이 추측불가에 그의 사후 칠십 년이 지났으며 지금 자신의 나이가 해가 바뀌었으니 스물둘이 되었다.
그 많은 세월 동안 여자 경험이 없었다니!
울컥.
용무린의 심장이 울분을 쏟아냈다.
“아오, 몰라.”
용무린은 다소 신경질적인 태도로 방향을 융중산으로 돌렸다.
“무림 정복이고 뭐고 우리 령매 얼굴 좀 보고 난 후 다시 생각해 보자.”
솔직히 이젠 무림정복이라는 것도 조금 웃겼다.
신마 진무량으로서의 의식이 섞여 있었을 때는 무림정복에의 의지가 강했다. 하지만 사실은 절대검신 독고황이 ‘참된 나’라를 것을 알게 되니 대뜸 수그러들었다.
수백 년 동안 동자공을 익힌 듯 여자 경험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자마자 제갈영령을 보기 위해 발걸음을 돌린 것과 같은 이치였다.
“언제든 오라고 했었지?”
그녀가 분명히 그랬었다.
세상을 훨훨 날아다니다 쉴 곳이 필요하면 오라고, 자신이 쉴 곳이 되어 주겠다고 말이다.
“기다려 령매. 내가 간닷!”
두근두근. 쿵쾅쿵쾅.
제갈영령 생각만 했을 뿐인데 심장이 미칠 듯 뛰기 시작했다. 애초에는 흑야방으로 가서 애들을 재정비한 후 다른 성으로 세력을 확장하려 했었지만 깨끗이 뒤로 미뤘다. 그 일은 자신이 나서지 않아도 스스로 알아서 굴러갈 것이다.
“힘든 일이 생기면 알아서 도움을 요청해 오겠지 뭐.”
자신은 그때 나서면 된다.
지금은 제갈영령의 얼굴을 보는 것이 급선무였다.
***
열흘 후 융중산 어귀.
용무린은 밤잠을 줄여가며 신법을 전개한 끝에 제갈세가의 초입에 이르렀다.
멈칫!
문을 두들기려던 용무린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정말 이래도 될까? 사람들이 흉보지는 않겠지?’
한편으로는 웃기기도 했다.
대체 언제부터 이런 소심한 성격이었다고 이리 망설이는 것일까?
‘혼란스러워서 그래, 혼란스러워서…….’
슬그머니 스스로에게 핑계를 댔지만 스스로도 뭔가 달라졌음을 자각할 수 있었다. 신마 진무량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을 때와 절대검신 독고황이라고 생각한 지금은 행동조차도 제약을 받았다.
“모르겠다. 일단 가슴이 시키는 대로 하자.”
가슴이 시키는 것은 지금 당장 제갈영령을 보는 것이다.
쾅쾅쾅.
가슴이 시키는 대로 용무린은 힘껏 문을 두들겼다.
“뉘시…… 어엇? 고, 공자님!”
문을 열었던 청지기가 용무린의 얼굴을 알아보곤 눈을 부릅떴다.
“어서 들어오세요, 공자님. 어서요.”
활짝 문을 열더니 고함에 가까운 소리를 질렀다.
“공자님이 오셨습니다. 용무린 공자님께서 오셨습니다.”
“뭐라고?”
“용무린 공자?”
“제갈세가의 사위?”
“황룡패주이자 무림왕께서?”
일대 소란이 일었다.
사방에서 제갈세가의 직계와 방계 일족들이 튀어 나와 용무린을 환영했다.
‘제길, 이건 생각 못 했네.’
황룡패주와 무림왕에 대한 소문이 이곳까지 벌써 퍼져 있을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저런 소리가 자꾸 들리니 얼굴이 다 화끈거렸다.
“가가!”
오래지 않아 소식을 들은 제갈영령이 날 듯이 달려 나왔다. 전력을 다해 달려 나왔는지 이마에는 송골송골 땀이 맺혀 있었고 숨소리가 거칠었다.
“령매!”
씨익.
용무린의 얼굴에 하나 가득 미소가 걸렸다. 그냥 웃음이 났다. 그동안 자신을 괴롭혀 왔던 모든 혼란이 한꺼번에 가시는 느낌이었다.
심지어는 황룡패주와 무림왕에 대한 언급으로 인해 화끈거렸던 얼굴도 가라앉았다. 머릿속이 온통 그녀로 가득 차올랐다.
용무린의 손을 꼬옥 잡고 제갈영령이 물어왔다.
“연락도 없이 어쩐 일이세요, 가가?”
“지나가는 길이라서 그냥…….”
용무린은 제대로 말을 하지 못했다. 얼버무렸다.
가슴 속에서야 ‘령매가 너무 보고 싶어서 왔지.’ 라고 외치고 있었지만 지켜보는 눈들이 너무 많아 입 밖에 낼 수가 없었다.
하지만 제갈영령은 용케 그 가슴 속 말을 알아들었다.
함박웃음을 지으며 잡은 손에 힘을 더했다.
그 간단한 동작이 용무린에게는 ‘일부러 찾아와 줘서 고마워요.’로 읽혔다.
“아버님은?”
“아버지요? 지금 안 계세요.”
“어디 가셨어?”
용무린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제갈영령이 고개를 갸웃하며 되물었다.
“가가께서 황제폐하께 천거하셨던 것 잊으셨어요?”
“아하!”
그제야 기억이 났다는 듯 용무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내가 그랬었지.’
황궁보고의 파손된 기관을 다시 복구해야 함은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 정도 수준의 기관을 완벽하게 다룰 수 있는 능력을 지닌 곳은 한정이 되어 있었고 자신이 아는 한 가장 적합한 곳은 비룡문과 제갈세가였다.
“아버지께서는 지금 자금성에 들어가 계시겠구나.”
“예. 가문의 중진들과 오라버니까지 모두 함께 움직이셨어요. 지금쯤이면 도착하셨을 거예요.”
제갈영령이 환하게 웃어 보였다.
그 미소로 보아 제갈문군이 자금성으로 떠나가며 얼마나 기뻐했을지 잘 알 수 있었다.
“잘됐네.”
여러모로 잘된 일이다.
우환을 완전히 걷어낸 곳에서 용대명과 제갈문군이 함께 웃으며 손발을 맞추고 있을 것을 생각하니 덩달아 기분이 좋았다.
“고마워요, 가가. 덕분에 저희 제갈세가가 자금성까지 진출을 할 수 있게 되었네요.”
“무슨 소리?! 능력이 되니 내가 천거한 거야. 굳이 내 천거가 아니었더라도 아버님께서는 틀림없이 자금성에 올 수밖에 없으셨을 거야.”
사실이었다.
내관감이나 어용감의 환관들이 실력이 있어봐야 얼마나 있겠는가? 황제가 사용할 가구 따위나 만들던 실력으로는 절대로 그런 기관 장치를 수리할 능력은 되지 못한다. 비룡문과 제갈세가의 자금성 진출은 필연적인 일이었다.
“그래도요.”
“그래도는 무슨…….”
“들어가세요, 가가. 어머니께서 기다리고 계세요.”
“어머니께서?”
“예. 가가께서 방문하셨다는 말을 듣기가 무섭게 부엌으로 달려가셨거든요.”
“아니 왜?”
영문을 알 수 없다는 듯 동그랗게 눈을 뜬 용무린을 향해 제갈영령이 살짝 볼을 붉히며 답했다.
“사위가 왔으니 씨앗닭을 잡아 직접 대접해야 한다면서 나서셨어요.”
“아하!”
용무린의 입에서 절로 탄성이 터졌다.
‘뭔가를 아시는 분이시네 우리 장모님은.’
보통은 씨암탉을 잡는 것이라 와전되게 알고 있겠지만 진짜는 씨앗닭, 곧 장닭을 잡는 것이다. 암탉 열댓 마리를 거느리는 것이 보통인 장닭의 힘을 고스란히 이어 자손을 번성하라는 뜻이 담긴 것이다.
“가요. 어서요.”
“그래.”
용무린은 제갈영령의 손에 이끌려 내원으로 들었다.
“어서 오시게 사위.”
낙양의 명망 높은 가문의 자손이자 제갈세가의 가모답게 손청하는 넉넉한 미소로 용무린을 맞았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어머니.”
“그래, 그래. 자주 좀 오시게. 우리 령아가 눈이 빠지려고 한다네.”
“엄마!”
“호호홋. 고함지를 것 없다. 사실이잖니.”
“몰라욧!”
넉넉한 이 분위기가 마냥 좋아 용무린은 그저 웃을 뿐이었다.
그러는 사이 씨앗닭 요리가 내어져 왔다.
“많이 드시게 사위. 씨앗닭을 잡는 의미는 알고 있지? 많이 먹고 번성하라는 뜻이네. 물론 암탉을 많이 거느리라는 뜻은 아니야. 알지? 우리 령아와 함께 자손들을 그만큼 많이…….”
“엄마! 자꾸 왜 그래-에!”
제갈영령이 발개진 얼굴로 고함을 빽 질렀다.
제갈세가의 가모 손청하가 코웃음을 쳤다.
“가만히 있어 요것아. 씨앗닭이 남자에게 얼마나 좋은 것인 줄도 모르면서 왜 큰 소리야? 잔소리 말고 네 신랑 많이 먹이기나 해. 다, 너 좋으라고 하는 거야. 알아?”
“어휴. 난 몰라.”
완전히 붉어진 얼굴을 제갈영령이 감싸 쥐었다.
‘아, 얹힐 것 같다.’
어쩐지 자신의 어머니 조연옥이 눈앞에 있는 듯했다. 말하는 투나 행동 모든 것이 비슷했다.
“많이 먹어 사위. 응? 다 먹어야 해. 국물까지 싹 다.”
“예? 아, 예.”
거의 독수리만 한 씨앗닭을 잡았던 것인지 요리는 세숫대야만 한 그릇에 가득 담겨 있었다.
‘다 먹으면 배가 터져서 죽을 것 같은데?’
그렇다고 남기자니 장모님의 초롱초롱한 눈망울이 너무나 부담스러웠다.
‘에라, 모르겠다. 먹자. 먹고 죽은 귀신은 때깔도 곱다고 하더라.’
용무린은 정신없이 씨앗닭을 씹고 뜯고 맛보고 즐겼다.
아니, 즐겼다는 말은 취소다.
손수 요리를 한 장모님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전투적으로 식사를 했다. 대충 씹어 마구 삼켰다. 꾸역꾸역 입으로 구겨 넣었다.
***
한 시진 후 제갈영령의 방.
“아이고, 죽겠다.”
“그러게 왜 그걸 다 먹었어요.”
용무린은 남산처럼 부풀어 오른 배를 부여잡고 괴로워하고 있었고 제갈영령은 그 곁에 앉아 용무린의 엄지와 검지 사이의 합곡혈을 지압하느라 바빴다.
“장모님께서 해주신 첫 요리인데 어떻게 남겨?”
“그래도…….”
뒷말을 흐리면서도 제갈영령은 얼굴을 붉혔다.
장모님이라는 말이 달콤하게 느껴진 모양이었다.
“풋.”
용무린은 풀썩 웃었다.
진실한 나에 대한 정체성의 혼란으로 괴로웠던 마음이 어느새 희미해져 있음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무슨 일이 있었군요.”
여인의 예민함 때문일까?
제갈영령은 용무린의 얼굴을 보며 대뜸 그에게 무슨 일이 있었음을 직감했다.
“말해 봐요, 가가.”
“말해 보라고?”
용무린의 말꼬리가 살짝 치솟았다.
겨우 희미해진 것을 다시 끄집어내기 싫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제갈영령은 단호한 태도로 고개를 끄덕였다. 확신이 어린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예. 저와 함께 나눠요 가가. 속에 품고 있기만 한다고 해결되는 것은 없으니까요.”
옳은 말이다.
지금은 잠시 희미해졌지만 곧 다시 떠오를 것이다.
‘그리고 나를 다시 괴롭히겠지.’
정신적으로 힘든 것이야 아무렇지도 않다.
하지만 그 혼란으로 인해 무공이 약해진 것은 정말 큰 문제였다. 영육의 조화가 깨어진 탓에 불사대천검은 고사하고 어검술 아니 신도합일의 수까지 펼치기 힘들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아예 펼치지 못하게 되지는 않았겠지만 힘들어진 것만은 사실이야. 이대로 두고 볼 수는 없는 노릇이지.’
용무린은 제갈영령의 눈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자신의 모든 비밀을 빠짐없이 알고 있는 이 세상 유일한 사람에게 흉금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용무린은 천기자의 쪽지에 담긴 암시와 실마리를 가지고 찾아간 성산에서의 일을 천천히 입에 담았다.
불사신기를 뿜어내 만년거암과 나무를 찾고 그 뒤로 펼쳐져 있던 숨겨진 대자연진의 존재를 발견했으며, 동시에 다른 곳과는 달리 반응이 없었던 그곳에서도 과거의 환영이 떠오르기 시작했고 결국 그로 인해 대자연진을 돌파했던 일을 하나도 빠짐없이 말했다.
“와, 정말 신기해요 가가. 그래서요? 그 안에서는 어떤 신기한 일이 있었는데요?”
“그것은 말이지…….”
신주오가의 공통 조사인 절대검신 독고황의 유해를 찾았다. 그 무릎에 있던 서책을 통해 내 전생이 사실은 신마 진무량이 아니라 절대검신 독고황이었다는 것을 알았다. 칠십 년 전 벌어졌던 신마대전의 절대영웅이 바로 나다.
이렇게 그냥 간단하게 말할 수도 있었지만 용무린은 구구절절하게 설명을 곁들였다.
“저, 절대검신 독고황 조사님의 유해를요? 와아! 그런데요? 그래서 어떻게 했는데요?”
더없이 신비한 이야기를 듣는 듯, 아니 경극 공연을 보는 듯 초롱초롱한 눈빛을 한 채 귀를 기울이는 제갈영령의 반응에 대충 말할 수가 없었다.
“그 안의 내용은 이랬어.”
눈을 감고 서책에 적혀 있던 절대검신 독고황의 유훈까지 남김없이 떠올려 알려줬다.
그 순간 느낄 수 있었던 용무린의 감정과 생각 그리고 미묘한 느낌까지 남김없이 밝혔기에 제갈영령은 용무린이 지금 어째서 힘들어하는 것인지 너무나도 잘 알 수 있게 되었다.
“머리로는 충분히 이해를 하고 있어. 내 전생이 신마 진무량이 아니라 사실은 적으로만 생각했던 절대검신 독고황이었다는 것을 말이야.”
“그런데 가슴은 그 진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다는 말씀이지요? 충분히 이해할 수 있어요. 당연히 혼란스러울 수밖에요…….”
“그치? 내가 조금 헷갈리겠지?”
“당연하지요. 저였다면 대체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 것인지 혼란스러워 정신을 놓았을 수도 있겠는걸요?”
“에이, 그 정도까지는 아니고…….”
“아니요. 그 이상이에요.”
제갈영령은 단호한 태도로 고개를 끄덕였다.
“머리로는 이해하지만 성격은 신마 진무량의 것이 고스란히 남아 있음을 느끼고 있을 거예요. 그 말은 곧 절대검신께서 밝혔듯 역천자가 절대검신을 흡수하려 했기 때문이겠지요.”
“아마도…….”
“스물두 해 살아온 현재 삶의 주인으로서의 의식과 흡수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레 스며든 신마 진마량으로서의 의식과 기억, 그리고 ‘참 나’라고 할 수 있는 절대검신 독고황으로서의 의식과 기억까지 뒤섞여 버리다니요!”
어떻게 견딜 것인지 자신으로서는 엄두도 나지 않는다는 듯 제갈영령은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이젠 솔직히 뭘 해야 할지도 잘 모르겠어.”
“무림정복은요?”
제갈영령의 질문에 잠시 생각에 잠겼던 용무린은 천천히 고개를 흔들었다.
“그것도 다 내가 신마 진무량인 줄 알았을 때의 이야기지. 낙성곡과 특히 오도암을 다녀온 후 절대검신 독고황이 진짜 내 전생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고 난 후부터는 솔직히 조금 시들해졌어.”
사실이었다. 흑야방의 노백인과 독사를 시켜 밤을 통일해나가고 있는 지금에도 의무감 같은 생각만 있을 뿐 특별한 욕망은 느껴지지 않았다.
“그럴 수도 있겠네요. 어차피 그 욕망 역시 가가의 의지와는 달리 절대검신을 흡수하는 과정에서 스며들게 된 신마 진무량의 의식과 기억 때문일 테니까요.”
“맞아. 그런 것 같아.”
용무린이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내 전생이 절대검신 독고황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자 솔직히 다 귀찮아졌어. 웃기지? 그 전에는 그토록 기를 쓰고 무림이란 곳을 정복하고 싶어 했었는데 말이야.”
“그러면 가가는 무얼 하고 싶은데요? 가슴이 이끄는 것을 말해보세요.”
“뭘 하고 싶으냐고?”
솔직히 잘 모르겠다.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그냥 떠오르는 생각대로라면 역천자를 찾아 없애야 한다는 막연한 책임감을 들 수 있었는데 그 일도 솔직히 그렇게까지 가슴에 와 닿지는 않았다.
“잘 모르겠어. 역천자란 놈을 찾아 없애야 할 것도 같은데, 막상 그놈이 지금 내게 뭘 어떻게 한 것도 아니라서 말이야…….”
“그 역천자가 마교의 교주가 아닐까요?”
“그놈이 어디의 누구로 환생을 했을지는 눈곱만큼도 짐작이 안가. 그런데 일단 내 가문에 직접적인 위해를 가한 것은 상관세가와 운룡장이었단 말이야.”
그것만이 가장 확실한 현실이었다.
하지만 상관세가와 운룡장에게는 이미 원금에 이자까지 두둑하게 쳐서 다 갚아줬다. 가주와 직계 혈족 거의 모두를 깔끔하게 정리했으니 남은 응어리 따윈 없었다.
“그러면 일단은 쉬세요, 가가.”
“쉬어?”
“예. 지난 일 년여를 숨 쉴 틈도 없이 바쁘게 살아 오셨잖아요.”
그거야 맞는 말이었다.
운적풍의 손에 죽기 직전까지 맞아 정신을 잃은 후 신마 진무량의 의식을 가진 채 깨어나 사실은 절대검신 독고황이 진짜 나라는 것을 알게 되기까지 죽을 고비를 넘긴 것만 벌써 수차례였다.
“장부가 천하를 경영하기 위해서는 쉬며 재충전해야 할 때도 있는 법이에요. 일단은 아무 걱정할 것 없이 쉬면서 생각을 정리하세요, 가가.”
“생각을 정리하라고?”
말이야 쉽지만 절대로 쉬운 일이 아닌 것이 바로 생각이란 것의 정리다.
그때 그것이 쉽다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는 듯 제갈영령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얼마 전에도 가가와 이런 대화를 했었지요?”
“응. 그랬지.”
신마 진무량이 참 나인 줄로 알고 있었던 때 누구에게도 밝힐 수 없었던 그 사실을 제갈영령에게 털어 놓고 함께 나누었다.
“그때도 제가 이런 말을 했었던 것 같은데요?”
“어떤……?”
“전생에 어떤 사람이었든 지금 가가께서는 비룡문의 소가주 용무린이에요. 그것을 자꾸 잊으시는 것 같아요.”
“……?!”
용무린의 입이 쩍 벌어졌다.
뒤통수를 한 대 얻어맞기라도 한 듯 눈을 부릅떴다. 제갈영령의 눈만 홀린 듯 응시했다. 제갈영령의 잔잔한 목소리가 계속해서 이어졌다.
“과거가 무엇이든 현재는 비룡문의 소주인임과 동시에 저의 지아비이며 무림맹의 총순찰이세요. 더불어 황룡패주이시고 이제는 무림왕이라는 지고한 위치에 올라서신 분이에요. 왜 자꾸 그 사실을 잊으시나요?”
지독한 안개가 천천히 사라지는 느낌이었다.
머릿속을 가득 메우고 있던 혼란과 복잡함이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느껴지기 시작했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슴 깊은 곳에서는 그 일이 쉽지 않으리란 막연한 앎이 공존했다.
“잊지 마세요, 가가. 가가께서는 용무린이에요. 절대검신? 신마? 둘 다 아니에요. 더는 혼란스러워 마세요. 절대검신이든 신마든 필요하면 그 능력을 끌어다 쓰면 되지 않겠어요? 어디까지나 이 삶의 주재자는 용무린이라고요!”
맞는 말이다.
가장 좋은 것이야 당연히 절대검신 독고황의 의식과 기억에 나를 합일 시키는 것이지만 저렇게 생각하면 적어도 차선책은 된다.
씨익.
용무린의 입가에 절로 미소가 맺혔다.
“고마워 령매.”
참으로 새삼스럽다.
‘내가 왜 그 사실을 자꾸 잊는 것일까?’
오도암에서 얻었던 깨달음이 사실 이와 비슷하다.
하지만 대오각성이 아닌 작은 수준의 자각이었기에 이렇듯 뒤흔들리기도 하는 것이리라.
‘그러하기에 아직 완성된 인간이 아닌 것이겠지.’
어쨌든 혼란을 잠재울 수 있는 길을 찾았다.
제갈영령의 말대로 필요할 때마다 필요한 의식을 꺼내 써먹으면 되는 것이다. 마치 전투 시 필요한 상황에 안성맞춤인 초식을 찾아 펼치는 것과 같다.
‘할 수 있어.’
나아가야 할 길은 분명히 현재의 내 기억과 의식에 절대검신으로서의 의식과 기억을 일치시키는 것이겠지만 그것이 지금 당장 이룰 수 없는 길이라면 차선책이라도 택해 움직여야만 한다.
‘전생의 내가 무엇이었든 지금의 나는 여자 하난 정말 잘 얻었구나.’
제갈영령은 정말 나를 위해 하늘이 내려준 선물과도 같았다. 어쩜 그리 내게 필요한 말만 쏙쏙 골라서 해 줄 수 있단 말인가?
“령매. 고마워.”
“제가 도움이 되었나요?”
“당연하지, 령매. 짙은 안개가 머릿속에 서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았는데 지금은 보이기 시작해.”
“기뻐요. 많이.”
사랑하는 이에게 도움이 된다는 사실이 정말 많이 기뻤던 모양이었다. 제갈영령은 얼굴을 발갛게 물들이며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예쁘구나.’
정말 너무나 어여뻤다. 그리고 사랑스러웠다.
두근두근.
갑자기 심장이 두방망이질을 쳤다. 제갈영령의 도톰한 입술이 참을 수 없을 만큼 탐스럽게 느껴졌다.
“……!”
용무린의 뜨거운 시선을 느낀 제갈영령이 살포시 눈을 감았다.
무언의 허락!
쿵쿵쿵.
터질 듯 뛰는 심장을 애써 억누르며 용무린은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제갈영령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포개었다. 그 순간,
짜릿!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관통하는 한 줄기 전율이 일었다.
제갈영령을 물속에서 구할 때와는 전혀 다른 느낌이었다.
너무나도 보드랍고 달콤하며 짜릿한 느낌에 용무린은 정신없이 제갈영령의 입술을 탐닉했다.
‘부족해. 더 원해 더.’
갈증이 가시지를 않았다.
용무린은 본능적으로 더욱 많은 것을 원했다. 저절로 손이 움직였다.
스르르.
자연스레 볼을 감싸 쥐고 있던 손이 아래를 향해 움직였다. 목을 지나 어깨로, 어깨를 스쳐 겨드랑이로 그리고 그 옆으로…….
덥석.
전설의 금나수라도 펼친 듯 제갈영령의 손이 용무린의 손을 잡았다. 그때까지 포개어져 있던 입술을 겨우 떼어내곤 간신이 이렇게 소곤댔다.
“너, 너무 빨라요 가가.”
아직 혼례도 올리기 전이다.
이보다 더한 진도는 욕심이다. 빠른 게 맞다.
하지만 용무린의 뇌리에 적절한 대답이 떠올랐다. 언젠가 황학루 강변에서 들어봤던 말이었다. 용무린은 제갈영령의 눈을 뜨겁게 바라보며 반문했다.
“오빠 못 믿어?”
“……믿어요.”
발갛게 물든 얼굴을 들어 용무린의 눈을 들여다 본 제갈영령이 다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이 어찌나 예쁜지 와락 안아줄 수밖에 없었다.
“사랑해 령매.”
“저도요.”
용무린은 다시금 제갈영령의 입술을 탐닉했다.
손이 슬그머니 낙원 속으로 스며들었다. 제갈영령은 이번에는 금나수를 펼치지 않았다. 용무린의 손은 낙원 속에서 풍요로움을 만끽했다.
하지만,
‘아직도 모자라. 아직도…….’
한 번 불이 붙은 욕망은 더욱 더 많은 것을 바랐다.
풍요로움을 벗어난 용무린의 손이 더 큰 낙원을 찾아 점점 더 아래를 향해 이동했다.
쿵쿵쿵쿵쿵.
용무린의 심장이 터질 듯 뛰었다.
바로 그때,
“아가씨! 공자님!”
밖에서 시비 청아의 목소리가 크게 들려왔다.
움찔! 파다닥.
화들짝 놀란 두 사람은 놀라운 속도로 떨어졌다. 딴청을 했다.
“으, 으응! 왜-애?”
“무, 무슨 일이냐?”
얼떨결에 대답을 한 두 사람의 얼굴에는 진한 아쉬움이 가득했다. 특히 욕망을 채 해소해내지 못했던 용무린은 목소리마저 갈라져 나왔다.
그러거나 말거나 청아의 목소리가 계속해서 이어졌다.
“개방에서 사람을 보내왔어요. 화운장로 아니 화운 태상장로님의 전언이라고 해요.”
화운장로가 그새 태상장로로 지위가 올라간 모양이었다.
‘젠장. 그건 그렇다고 치고 왜 하필이면 지금이냐고?!’
짜증이 확 치밀어 올랐다.
반면 제갈영령은 냉정을 되찾았는지 재빨리 옷매무새를 정리했다. 목소리를 가다듬은 후 외쳤다.
“잠시만 기다리라 전해줘. 가가께서 곧 빈객청으로 찾아가실 거야.”
“예, 아가씨.”
“나, 안 가!”
용무린은 심통이 가득한 목소리로 불퉁거렸다.
제갈영령이 불쑥 얼굴을 들이밀었다. 여전히 사랑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제가 가가의 앞길을 막는 부족한 사람이길 바라나요?”
“당연히 아니지! 그런 말을 왜 해?”
“그러면 얼른 일어나세요. 빈객청으로 나아가 개방의 사람을 만나세요. 화운 태상장로님께서 무슨 전언을 보냈는지 들어보시고 그에 맞게 움직이세요.”
그래야 하는 걸 물론 잘 안다.
‘젠장. 젠장. 젠자-앙!’
다만 용무린은 해소되지 못한 욕망에 짜증이 날 뿐이었다. 수백 년 만에 찾아온 기회가 이렇게 날아가 버리다니!
“어서요!”
쪼옥.
그런 용무린의 마음을 풀어주겠다는 듯 제갈영령은 가볍게 입을 맞추어주었다.
피식.
용무린의 입가에 절로 미소가 돋아났다.
“한 번 더.”
“그러면 두 말하지 않기예요.”
“응.”
어린아이처럼 행동하는 용무린을 향해 제갈영령은 환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쪼옥.
다시 한 번 가볍게 입을 맞춰 주었다.
“이제 됐죠?”
용무린은 별 수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야만 했다.
물론 주먹을 불끈 쥐고 전의를 다졌다.
“어떤 녀석인지 몰라도 시답잖은 일이면 죽었어!”
어떤 핑계를 대든 실전 비무를 할 생각이었다.
수백 년 만에 이뤄질 뻔했던 꿈같은 시간을 방해한 죄를 물을 작정이었다.
***
용무린의 등장에 초조한 얼굴로 앉아 있던 방건이 활짝 웃으며 일어섰다.
“여어, 용 대협! 아니, 이제는 어떻게 불러야 할지 나도 잘 모르겠군. 황룡패주? 무림왕?”
마지막 무림왕이란 단어를 입에 담은 방건이 풀썩 웃었다. 무림인의 한 사람으로서 아무리 생각해도 그 호칭이 웃겼던 것이었다.
아득.
용무린이 이를 갈아 붙였다.
‘너, 잘 걸렸다.’
그렇지 않아도 좋은 시간을 방해 받아 짜증이 나서 죽을 지경이었는데 감히 빈정거려?
‘누가 황룡패주에 무림왕이란 지위를 원했다고 비웃고 지랄이야?’
버르장머릴 고쳐준다.
영육의 불일치로 인해 어검술도 신검합일도 손쉽게 쓸 수 없었지만 그럼에도 나는 절대로 지지 않는다. 불사신기와 손에 익을 대로 익은 풍뢰와 소검비연을 다루는 감각만큼은 그대로였기 때문이었다.
“됐고, 오랜만이니 한 번 손이나 섞어본 후 대화를 해도 하자고.”
“어-엉? 갑자기?”
“갑자기는 무슨! 실전비무가 얼마나 도움이 되는지 몰라서 그래? 빨리 따라 나와. 빨리.”
재촉하는 목소리가 어찌나 차갑던지.
‘저, 저 인간이 대체 왜 저러지?’
자신의 죄가 무엇인지 알지 못하는 방건은 그저 심란하기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