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누구나 다 그럴싸한 계획이 있다. (50/104)

7.누구나 다 그럴싸한 계획이 있다.

더 무슨 말이 필요하냐는 듯 용무린은 벌떡 일어섰다.

밖을 향해 나가며 고함을 질렀다.

“빨리 안 나오면 이야기고 뭐고 그대로 축객령을 내려 버릴 테니 그리 알아!”

“아, 알았어. 알았다고.”

울며 겨자 먹기가 바로 이런 것이다!

멋모르고 엉겨 붙었다가 처참하게 몇 번 깨진 이후 두 번 다시는 용무린과 실전비무 따윈 하고 싶지 않았던 방건이었지만 별 수 없이 따라 나서야 했다.

퍼어억. 퍼퍼퍼퍼퍽.

“크악. 우와악. 커어억.”

빈객청 뒤에 자리한 조그만 공간에 끌려 나온 방건은 용무린으로부터 실전 비무를 빙자한 구타를 당해야만 했다.

“왜, 하필!”

퍼억. 퍽퍽퍽.

“내, 내가 뭘? 우와악! 어떻게 했…… 커헉!”

빠악. 빠바박.

“지금 찾아와서 방해야, 방해가!”

신마 진무량으로서의 의식과 감정이었다.

지금 이 순간 그 의식과 감정이 필요하다고 생각한 용무린이 그 의식과 감정을 끌어온 것이었다. 간단했다. 분노에 몸을 맡기니 자연스럽게 되었다.

“미, 미안. 커헉. 뭔지는 몰라도 방해해서 정말 미안……. 크읍! 허억!”

결국 방건이 정신을 잃고 나서야 용무린은 절대검신 독고황으로서의 의식을 끌어 올렸다. 놀랍게도 화가 스르르 가라앉았다.

“이 방법이 썩 괜찮네.”

풀리지 않을 듯 맺혔던 감정의 응어리를 필요한 의식을 가져다 씀으로써 쉽게 해소할 수 있었다. 제갈영령의 조언이 나쁘지 않게 작용한 것이다.

“전투를 벌일 때는 어떨지 또 모르니 일단 이 방법에 익숙해져야만 하겠다.”

뭐든 익숙해지기 전까지는 수련이 필요한 법이었다.

지금이야 실전비무를 빙자한 구타로 분노가 해결이 된 덕에 절대검신의 의식이 쉽게 올라올 수 있었지만 전투가 벌어졌을 때도 이렇게 부드럽게 되진 않을 것이다.

‘분기탱천해서 신마 진무량의 의식을 끌어 올려 싸우다가 불사대천검을 쓰겠다고 느닷없이 완전히 반대의 성향을 끌어 올리는 것이 쉬울 리가 없겠지.’

그게 쉬우면 정신병자일 것이다.

용무린은 방건을 짐짝처럼 어깨에 메고 빈객청에 들었다.

타닷. 타다닷.

불사신기를 끌어 올려 방건의 전신을 두들겨갔다.

미안한 마음 따윈 전혀 들지 않았다.

‘이 정도로 용서해 주는 것을 다행으로 알아야지.’

불사신기로 추궁과혈까지 해주었다.

모르긴 몰라도 깨어나면 기혈이 한층 더 수월하게 움직일 것이다.

반짝.

그 사실을 증명이라도 해주겠다는 것인지 방건이 눈을 번쩍 떴다. 검게 죽은피를 울컥 쏟아냈다.

흠칫!

“요, 용 대협!”

고개를 들다가 용무린과 눈을 마주치고는 화들짝 놀랐다. 몸을 가늘게 떨었다.

“왜 왔는데?”

“그, 그게 그러니까…….”

방건의 입에서 긴 이야기가 흘러 나왔다.

무림맹에서 벌어졌던 혈사 후 제각각 자신들의 문파를 깨끗했던 과거로 되돌리기 위해 돌아갔던 천리검향 옥풍과 청성의 서보도장, 그리고 종남의 곡양 도장으로부터 모두 도움을 요청하는 급보가 들어왔던 것이다.

“그 소식을 접하자마자 태상장로님께서는…….”

“말 끊어서 미안한데, 화운 장로님께서 대체 언제 태상장로님이 되셨지?”

“……아, 그거? 지난달에. 하여간 태상장로님께서 즉각 방주님과 면담 후 용 대협을 찾아야 한다고 명령을 내리셔서 모든 거지들이 눈에 불을 켜고…….”

“일 절만 해, 일 절만. 그래서 뭐? 어쩌라고?”

다 귀찮다는 듯 용무린은 다시금 방건의 말을 잘랐다.

‘하여간 성질머리 하곤.’

속에서 울컥 무엇인가가 치밀어 올랐지만 방건은 용케 잘도 눌러 참았다.

“옥풍 부맹주님을 도와야 하니 연락이 닿는 대로 즉시 화산 초입인 화음현에서 만나자고…….”

“싫어. 내가 왜 거길 가야 하는데?”

용무린은 대뜸 거부하고 봤다.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살짝 끄덕여 보였던 방건이 급히 말을 이었다.

“안 오면 흑야방이 박살날 거라고 전하래.”

“……!”

용무린의 눈이 대번에 찌푸려졌다. 하얀 이를 드러냈다. 거칠게 으르렁댔다.

“누가 박살낸다고 그래? 개방? 화운 장로님께서 직접 손을 쓰신다고 그러든?”

용무린의 목소리가 점점 더 날카로워졌다.

방건이 급히 손사래를 쳤다.

“그럴 리가 있나?”

“그럼?”

“화산파!”

“……?”

용무린은 잘못 들은 줄 알고 귀를 후볐다. 도저히 믿기 어렵다는 듯 다시 물었다.

“뭐라고? 다시 한 번 말해봐.”

“화! 산! 파!”

역시나 제대로 들은 게 맞다.

화산파가 흑야방을 때려 부순다고 난리인가보다.

“화산파가 왜 흑야방을 못 잡아먹어서 난리인데?”

“거기까진 나도 몰라.”

“……!”

용무린은 생각에 잠겼고 방건은 소임을 다했다는 듯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추궁과혈 고마워. 턱하고 가슴은 아직 조금 뻐근한데 덕분에 내공수발이 더 빨라진 것 같아.”

“고맙긴.”

“태상장로님께는 뭐라고 전해?”

“일단 내게 여유가 며칠이나 있는지 알려줄 수 있어?”

“별로 없을걸? 총순찰의 놀라운 경공 실력을 감안한다고 해도 겨우 하루, 많아 봐야 이틀이나 여유가 있을까?”

“그 정도면 충분해.”

“화음현 중심부로 와.”

“마중 나온다는 뜻이네?”

“당연하지. 우리 개방에서 알아서 마중 나갈 거야.”

“알았어.”

“그럼…….”

정중히 포권을 취해보인 방건이 밖으로 사라졌다.

아무리 생각해도 화산파가 흑야방을 노릴 이유가 생각나지 않았던 용무린은 결국 자신이 나서야만 한다는 것을 깨닫고 일어섰다.

“흑야방을 비롯한 호북성의 밤을 내가 손아귀에 넣었다는 것을 알고 계시니 그나마 기회를 주는 것이라고 생각해야 하겠군그래.”

도대체 화산파가 왜 흑야방을 노리는 것일까?

“가 보자. 가보면 알겠지.”

무림맹의 부맹주이자 화산파의 장로인 천리검향 옥풍이 지급으로 도움을 요청할 정도이니 아마 그 일과 관련이 있을 듯싶었다.

그 길로 내원으로 향한 용무린은 제갈영령과 제갈세가의 가모를 찾아 하직인사를 올린 후 곧장 화산의 초입인 화음현을 향해 달렸다.

***

화산의 지리적인 위치는 섬서성이었지만 정확히는 하남성과 호북성의 경계선상에 자리해 있다.

제갈세가가 자리한 융중산은 호북성의 북서쪽 끝자락, 화산까지는 불과 닷새밖에 걸리지 않지만 용무린은 이틀을 더 소모했다.

영육의 조화가 깨어진 이후 신검합일은 물론이고 어검술까지 쉬이 사용할 수 없게 되었기 때문에 어떻게 하든 방법을 찾아 놓아야 했기 때문이었다.

“후우, 쉽지가 않은 일이네.”

용무린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필요에 따라 서로 다른 의식을 끌어 온다는 것은 자청해서 조울증 환자가 되는 느낌이었다.

“확실히 신마 진무량으로서의 의식이 훨씬 더 강해.”

당연한 일이었다.

눈을 떴을 때부터 지금까지 쭉 신마 진무량이라고 생각하며 살아 왔다. 요즘에야 비로소 용무린으로서의 의식이 더 강해졌다고 봐야 할 것이다.

“확실히 지금은 용무린이 신마 진무량의 의식을 끌어다 쓰고 있는 형편이야. 그것을 바꾸려면?”

무슨 말이 필요하겠는가?

강제로라도 가능하도록 계속해서 연습을 해보는 수밖에 없다.

“더는 지체할 시간이 없어. 날이 완전히 밝을 때까지만 더 연습해보고 이젠 끝내자.”

벌써 동이 터 오르고 있었다.

날이 밝으면 화음현을 향해 달려야 한다.

스릉.

용무린은 융중산 아래 대장간에서 구한 평범한 청강검을 뽑아 들었다. 중천에 곧추세웠다. 답답하던 기분이 조금쯤 가라앉는 것이 느껴졌다.

“확실히 도움이 되네.”

궁여지책이었다.

불사대천검을 구현해 내기에 풍뢰는 적합한 선택이 아니었다.

풍뢰와 소검비연 두 가지 모두 신마 진무량이 신교의 교주의 자리에 오르기 직전까지 사용하던 기병들로써 그것들을 사용한다는 것은 신마 진무량으로서 싸운다는 것을 뜻하기 때문이었다.

“평범한 청강검을 손에 쥐니 느낌이 꽤 남달라.”

용무린은 지그시 눈을 감았다.

완전하게 돌아오지 못한 절대검신 독고황의 기억들을 떠올리기 시작했다.

몇몇 환영이 단편적으로 흘렀다.

고려의 멸망과 함께 떠나온 여정의 시작, 그리고 등선의 시기를 저울질 할 무렵 홀연히 떠오른 무서운 천기.

역천자의 등장을 알게 된 후 시작된 여정, 오도암에서 혜월을 만난 후 함께 무당을 찾아 현진도장을 만나고 흉금을 터놓고 교우한 일…….

그 뒤로도 많은 기억이 스쳤다.

용무린은 그 기억을 고스란히 끌어안은 채 절대검신 독고황의 기억과 의지를 자신과 하나로 이었다.

“나 용무린과 절대검신 독고황은 하나다. 내가 곧 절대검신 독고황이고 절대검신 독고황이 바로 나 비룡문의 용무린이다.”

끊임없이 그렇게 되뇌며 불사대천검의 구결을 암송했다.

불사신기를 불러 일으켜 청강검에 불어 넣었다.

그리고 천천히 그어 내렸…….

부들부들. 부르르.

떨기만 할 뿐 청강검을 그어 내릴 수가 없었다.

아무리 불사대천검의 구결을 암송해도 절대검신 독고황이 전생의 나였다고 되뇌었어도 좁힐 수 없는 괴리감에 펼치지 못한 것이다.

툭. 투둑.

용무린의 이마를 타고 굵은 땀방울이 마구 흘렀다.

얼마나 큰 심력을 소모하고 있는 것인지!

그러는 사이 태양이 불쑥 고개를 내밀었다.

“후우…….”

긴 한숨과 함께 용무린은 결국 청강검을 허리로 되돌려야만 했다.

“시간이 필요해, 시간이…….”

신마 진무량인 줄로만 알고 살다가 용무린으로서의 자각이 더욱 강해진 것이 요즈음이다. 불과 얼마 되지 않는다. 절대검신 독고황으로서의 의식과 기억을 다시 용무린과 합일 시키는 것 역시 그만한 시간이 걸리리라.

“일단, 가자.”

용무린은 화음현을 향해 신법을 전개했다.

***

섬서성 화음현.

남존무당과 함께 도문의 양대 검파로 추앙받는 화산파가 지척에 있다 보니 흑도문파나 사파 따위가 들어설 수 없는 곳이라 사람들의 얼굴이 모두 밝은 편이었다.

대로를 따라 걸으며 주변을 살피던 용무린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화산파가 그래도 화음현에서만큼은 독하게 굴지 않는 모양이로구나.’

천리검향 옥풍을 등에 업고 온갖 이권에 개입해 사리사욕을 채웠다는 화산파였지만 텃밭이라고 할 수 있는 화음현만큼은 예외로 둔 것을 보면 그래도 아주 생각이 없는 사람들은 아니라고 판단되어졌다.

‘그런데 왜 흑야방에 관심을 둔 것일까?’

그 궁금증에 해답이라도 주겠다는 듯 앳된 거지 하나가 앞으로 다가왔다.

“용무린 대협?”

“그런데?”

“태상장로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저를 따르시지요.”

“그래 가자. 앞장서라.”

앳된 거지는 용무린을 큼직한 객잔으로 이끌었다.

이제나저제나 초조한 얼굴로 죽엽청을 들이켜던 화운이 용무린을 보자마자 벌떡 일어났다.

“이 녀석아! 오랜만이로구나.”

앞으로 달려 나왔다. 활짝 웃으며 용무린을 반겼다. 손을 잡고 자리로 이끌었다. 화운이 개방 소속이라는 것을 아는 모양들인지 누구 하나 눈을 찌푸리는 사람이 없었다.

“그간 잘 지내셨어요?”

“거지가 잘 지낼 게 뭐가 있냐? 나야 늘 똑같다.”

“출세하셨던데요? 태상장로 되신 것 축하드려요.”

피식.

“황룡패주에 무림왕까지 오른 너만 하겠냐?”

화운 태상장로가 짓궂게 웃으며 손사래를 쳤다.

다른 사람이었다면 대뜸 턱주가리를 부숴놓았겠지만 악의가 없는 분이라는 것을 잘 알기에 용무린도 그냥 살짝 웃고 말았다.

“어떻게 된 일이에요? 화산파에서 왜 흑야방을 친다는 것인데요?”

용무린은 대뜸 본론부터 꺼내들었다.

화운이 인상을 찌푸리며 고개를 살짝 흔들었다.

“일이 고약하게 꼬였다.”

이어지는 화운의 말은 실로 뜻밖이었다.

용무린이 키우기 시작한 흑도세력의 중심인 흑야방은 용무린이 짐작했었던 것처럼 스스로 커지기 시작했다.

호북성의 밤을 통일한 것으로도 모자라 주변으로 손을 뻗기 시작했는데 그 첫 걸음이 섬서성이었던 것이다.

“너도 알다시피 화산파가 그동안 옥풍 그 인간의 비호를 받아 온갖 이권에 개입을 했지 않니?”

“그렇지요. 한데, 천리검향 옥풍 부맹주가 되돌린다고 화산파로 떠나지 않았던가요?”

용무린이 고개를 갸우뚱하며 되물었다. 화운의 목소리가 급하게 꼬리를 물었다.

“바로 그 일에 흑야방이 엮였다.”

“……?”

“네가 흑야방을 키운 이유가 무엇이더냐? 제어와 관리를 통해 양민들을 고통 받지 않게 하겠다는 취지 아니었더냐? 화산파도 똑같은 일을 하고 있었다.”

“헐.”

용무린의 입이 쩍 벌어졌다. 무슨 뜻인지 대충 감이 온 것이다.

“텃밭인 화음현에는 아예 발을 붙이지 못하도록 했지만 성도인 서안을 중심으로 위남현과 여산현 그리고 성남현의 밤을 비밀리에 통제했던 모양이다.”

“그런데 흑야방이 화산파가 관리하는 흑도문파 중 하나를 쳤다 이건가요?”

“그래. 서안으로 향한 길목인 성남현의 흑도문파를 아예 작살내 버렸다. 그야말로 화산파의 코털을 제대로 뽑아버린 셈이지.”

“나 참, 기가 차서……. 그래서 그 보복으로다가 흑야방을 박살내시겠다?! 그것이 화산파의 의지다, 뭐 이런 겁니까?”

“표면적인 것을 보면 그렇다. 하지만 그 안에 옥풍 그 사람의 일이 뒤섞여 있다.”

화운의 이야기가 계속해서 이어졌다.

“옥풍 그 사람은 이 기회에 화산파가 흑도들 통합하는 것에서 손을 떼자고 주장한 모양이다.”

“그런데요?”

“그와의 연락이 끊겼다.”

“……?”

“아무래도 현 화산파의 장문인 옥양진인의 손에 구금된 듯싶구나.”

“구금이요? 그만한 일로 무림맹의 부맹주이자 자파의 장로인 옥풍도장을요?”

“옥풍뿐만이 아니다. 혈고에서 벗어난 후 그동안 자신들이 망쳐놓은 문파를 되돌려 놓겠다고 떠나간 대부분의 사람들이 연락이 안 된다. 청성의 서보도장과 종남의 곡양도장까지 생사가 불분명해.”

뭔가 너무 이상했다.

‘흑야방 하나 잡는 걸 반대했다고 구금 혹은 제거하기에는 핑계가 너무 빈약하지 않나?’

옥풍은 흑야방 제거에 반대했으니 그렇다고 치고, 아무런 접점도 없는 청성과 종남은 어째서 서보 도장과 곡양도장을 구금 혹은 제거했단 말인가?

구린내가 풀풀 풍겼다.

‘그걸 먼저 확인해야 하겠군.’

가만히 화운장로의 눈을 들여다보던 용무린은 묵직한 목소리로 채근을 했다.

“뭔가 더 있죠?”

“……!”

화운장로는 즉시 답을 하지 못했다.

얼굴까지 살짝 붉히는 모양새로 보아 선뜻 입에 담지 못할 치부가 드러날 것을 염려하는 듯 보였다.

“뭐가 그리 고민인데요? 날 불렀잖아요, 도와달라고. 빨리 털어 놓지 않으면 그냥 제 성질대로 합니다.”

협박이 아니다. 진짜 성질대로 할 것이다.

‘화산파고 나발이고 내 것을 건드리면 가만두지 않아.’

무림 정복에의 의지가 흐려졌기는 하지만 흑야방은 내 수족이나 다름없는 곳이다.

‘달마다 보름이 돌아오면 입금되는 보호비가 얼만데 그걸 망치려고 해? 어림도 없지.’

해보자고?

‘좋다, 이거야. 화산파고 뭐고 아예 지도상에서 지워주지.’

흑야방의 전력과 비룡문의 힘에 내 힘을 더하면 화산파 한 곳 정도 감당하지 못할 바도 아니다.

“이 녀석아! 그러면 안 돼.”

“왜요?”

“몰라서 물어? 그랬다가는 무림에서 너와 비룡문의 입지가 바닥으로 떨어진단 말이다. 종남과 청성까지 하나가 되어 달려들 게야. 자중지난을 염려한 소림과 개방을 비롯해 누구도 너를 도울 수가 없어.”

“도움 필요 없습니다.”

용무린의 목소리는 칼날 같았다.

애초에 도움 따위를 생각하고 있지 않았다는 듯 거침이 없었다.

“종남과 청성까지 함께 한다고요?”

용무린의 눈에서 섬뜩한 빛이 번득이기 시작했다.

원하지 않았지만 신마 진무량의 의식과 성격이 불쑥 치솟아 올랐다. 용무린을 잠식했다. 굴복 따위 모르는 철혈의 의지가 용솟음쳤다.

“얼마든지 맞서주지요. 단, 각오하라고 하십시오. 깡그리 쓸어버릴 겁니다. 내게 맞서는 모두를, 그것이 설령 정파 무림의 중진인 화산파와 청성 그리고 종남파라고 해도 주저 없이 짓밟아 버릴 것입니다.”

“이 녀석아! 너는 지금 그게 무슨 소린 줄 알고 하는 소리냐?”

“당연히!”

간단히 고개를 까딱해 보인 용무린이 얼음장 같은 목소리로 덧붙였다.

“기껏 해봐야 무림공적으로 몰리는 것이겠지요.”

놀랍기 짝이 없는 말의 연속이었다.

웅성거리던 객잔의 소란이 일시에 가라앉았다. 이번에는 목소리가 조금 컸던 것이다.

무림 공적이란 말에 주변이 죽음처럼 고요해졌다. 두려움이 가득한 시선을 담아 용무린을 힐끔 거렸다.

“이 녀석아 지금 그걸 말이라고…….”

화운장로가 뭐라 더 말을 이으려 했지만 용무린이 중간에 싹둑 잘랐다.

“지금껏 많은 도움을 준 소림과 개방이 상대라면 모르겠으나 다른 문파들 중 어느 곳에도 양보 따위 할 생각이 없습니다. 제 모든 것을 걸고서라도 저를 건드린 문파들을 상대할 생각입니다.”

“……!”

화운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그도 그럴 것이 용무린이 진정으로 분노하면 함께할 문파들이 상당하다는 것을 이미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제갈세가는 당연하고 실전된 비급을 돌려받은 다섯 문파에서도 나서겠지. 실추된 문파의 위상을 다시 높이기에 꽤 좋은 기회니까.’

그 자체로 정파 무림이 쪼개지는 일이다.

소림과 개방을 비롯해 이해관계가 없는 문파들은 정파 무림의 자중지난을 피하기 위해 나서지 못할 테고 그 사이 많은 피가 흐를 것이다.

‘그래서는 안 돼. 마교가 가만히 지켜보고만 있지는 않을 것이란 말이야.’

그렇게 일이 커지는 것을 막아야만 한다.

용무린만 홀로 이곳에 부른 이유가 바로 그것이었다.

“이곳에서는 더 깊은 이야기를 할 수가 없구나. 일단 밖으로 나가자. 가면서 내가 이야기를 해주마.”

주변을 슬쩍 돌아본 화운이 먼저 자리에서 일어섰다.

가만히 그 모습을 지켜보던 용무린은 못을 박듯 차가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제게만 양보하라는 말씀이라면 거절입니다.”

“후우, 그래 알았다.”

긴 한숨과 함께 화운은 화산을 향해 움직였다.

용무린이 천천히 그 뒤를 따랐다.

***

화산 조양봉 중턱에 자리한 암굴.

본디 화산파의 도인들이 죽음을 앞두면 찾아들어 수련을 하다 세상을 등지게 되는 곳, 이를테면 소림의 장생전인 오도암과 비슷한 곳이었으나 언제부터인지 이곳 암굴은 화산파의 죄지은 자들을 가둬두는 곳으로 바뀌었다.

어찌나 깊이 파놓은 굴인지 빛 한 점 들지 않는 그곳에 최근 한 사람의 도인이 갇혔다. 화산을 과거로 되돌리기 위해 사문을 찾았던 천리검향 옥풍이었다.

“옥풍. 정말 입을 열지 않을 텐가?”

“……!”

청수한 인상의 노도장이 타이르듯 물었지만 옥풍은 굳게 다문 입을 열지 않았다.

“우리 화산파의 웅비가 코앞이야, 옥풍. 사문의 미래를 정녕 망쳐 놓을 작정인가?”

실망과 회한 그리고 자괴감이 섞인 복잡한 눈빛의 옥풍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장문사형. 사문의 미래를 망치는 것은 내가 아니고 바로 장문사형이시오. 이제 그만 그들과의 손을 끊으시오. 제발 화산을 도가의 향기 가득한 진정한 화산으로 되돌려 주시오, 장문사형.”

옥풍 앞에선 노 도장은 화산파의 장문인인 옥현이었다.

옥현은 여전히 따뜻한 시선으로 옥풍을 내려다보며 혀를 찼다.

“쯧쯧쯧…….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나와 뜻이 잘 맞아 사문에 큰 도움이 되던 사제가 어떻게 하루아침에 이렇게 변했는지 나는 알 수가 없군그래.”

목소리마저 부드러웠지만 옥풍은 알 수 있었다.

자신의 장문사형인 옥현의 속에 북풍한설과 같은 냉기와 폭발하는 화산처럼 뜨거운 욕망이 동시에 자리하고 있다는 것을…….

‘장문사형이 내게 이렇게 손을 쓸 줄이야.’

옥풍의 현재 상태는 꽤 처참했다.

고문에 가깝게 손을 썼는지 전신 곳곳이 갈라져 피를 흘리고 있었으며 암반에 매어 놓은 쇠사슬이 사지를 결박하고 있었고 전신 백팔대혈에 가는 침이 꽂혀 있어 내공의 운용이 불가능했다.

그간 세웠던 공로 때문인지 아직은 단전을 파훼하지도 사지근맥을 자르지도 않았지만 외부에서의 도움이 없는 한 옥풍은 절대로 암굴을 벗어날 수 없도록 철저히 결박되어 있는 상태였다.

‘내가 변화시킨 것이 아니야. 장문사형과는 처음부터 죽이 잘 맞았어. 혈고를 쓸 필요도 없이 내 뜻대로 이권을 취함에 거리낌이 없었단 말이야.’

그 점이 더욱 놀라운 일이었다.

자신은 혈고에 당해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그런 일들을 벌였는데 화산파의 장문인인 자신의 사형은 도대체 왜 이렇게 변한 것일까?

‘그렇지 않아도 핑계가 필요로 했을 뿐인데, 때마침 내가 잘도 부추겼지. 나야 혈고 때문에, 정파 무림을 망치려는 마교 놈들의 수작 때문에 그런 것이지만 장문사형은 원래부터 성격이 그랬어. 내 제안에 옳다구나 하고 못 이기는 척 따라 준 것 뿐이야.’

화산파의 이권을 챙기기 위한 불의한 요구를 장문사형인 옥현은 한 번도 거절을 한 일이 없었다. 겉으로야 힘들어하는 듯했지만 결국엔 자신의 요구를 다 따랐다.

화산에 복귀하자마자 그 사실을 깨달은 옥풍은 은밀히 그 연유를 캐기 시작했고 각고의 노력 끝에 하나의 꼬리를 잡을 수 있었다.

‘혈교라니! 이미 오래 전에 세상에서 사라진 줄로만 알았던 그들이 이곳 섬서성에 둥지를 틀고 있었다니!’

혈교의 생존보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그들과 화산파가 손을 잡고 있었다는 점이었다.

‘세상에, 그 혈교와 내 사문이 공생을 하고 있을 줄이야!’

화산파와 혈교의 밀월.

너무나도 놀란 옥풍은 즉시 화운에게 연락을 취했다.

무림맹주와 개방과 소림과 같은 거대문파와 상의한 후 대책을 강구하려 한 것이다.

“대체 어디까지 알고 있는 거야 사제?”

“…….”

“아니, 질문이 잘못되었나?”

일인극을 하듯 옥현이 스스로 답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렇게 물어야 하겠군그래.”

“…….”

“개방에 어디까지 알렸지? 무림맹과 소림과 개방의 계획은 뭐야? 그들이 언제 움직이지? 이미 움직였나? 쥐새끼들을 파견했어?”

“그게 그렇게 궁금하시오?”

“당연하지. 그걸 알아야 계획을 수정할 테니까.”

“포기하시오, 사형. 개방은…… 개방은 이미 혈교의 존재를 알고 있소.”

피식.

옥현이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되물었다.

“겨우 그거야?”

“무, 무슨 뜻이오?”

옥풍의 질문에 옥현은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 정도라면 안심할 수 있다는 듯 길게 숨을 내쉬며 느물거렸다.

“겨우 그거라면 계획에 큰 변화를 주지 않아도 될 것 같아서 말이야.”

“사형! 도대체 무슨 일을 꾸미고 있는 것이오?”

궁금증을 도저히 참을 수가 없다는 듯 옥풍이 소리쳤다.

그 순간 옥현의 눈에서 감출 길 없는 욕망의 불꽃이 확 뻗어 나왔다.

“무슨 일을 꾸미긴? 우리 화산파를 천하제일의 문파로 만들려고 그러는 게지.”

“……?!”

욕망으로 타오르는 눈을 번들거리며 옥현은 광기 어린 말을 계속해서 쏟아냈다.

“나는 말이야, 언제나 이해할 수 없었어. 북숭소림 남존무당……. 대체, 그런 말라비틀어진 공식이 언제부터 무림에 자리 잡게 된 것일까 하고 말이야.”

그동안 옥풍의 위세에 못 이겨 화산파의 대소사를 처리해왔던 줏대 없는 옥현의 진실한 모습이 가감 없이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칠십 년 전에도 그랬다지? 신마대전 당시 괴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은 것은 우리 화산파 역시 마찬가지인데 사람들은 언제나 소림과 무당파의 희생을 가장 먼저 입에 올렸다더라고. 뭐, 그것은 지금도 마찬가지지.”

“사형! 그, 그게 지금 무슨 말씀이…….”

“아아, 끝까지 들어 옥풍. 내가 말을 하잖아!”

더는 들어줄 수 없다는 듯 옥현이 손을 뻗었다. 옥풍의 목줄을 잡아챘다. 지그시 힘을 주었다.

우두둑. 우둑.

“커헉. 사, 사형…….”

곧이라도 숨이 끊길 듯 숨을 몰아쉬는 옥풍을 보며 옥현은 즐겁다는 듯 손아귀에 힘을 쥐었다가 푸는 것을 반복했다. 말을 이었다.

“무림 역사상 단 한 번도 없었어. 단 한 번도 말이야.”

“끄윽. 사…… 혀엉…….”

“우리 화산은 어째서 무림에서 제일이 되지 못하지? 이 빌어먹을 놈의 무림에 환란이 찾아오면 언제나 같은 양의 피를 흘리는데 어째서 우리 화산파는 사람들에게 천하제일로 기억되지 못하느냔 말이야, 어째서!”

“흐으…….”

옥풍의 숨이 끊어질 듯 가늘어졌다.

그제야 옥현은 목에서 손을 떼었다. 검게 죽어가던 옥풍의 얼굴빛이 겨우 되돌아왔다.

“마교가 먼저 접촉해 왔으면 좋았을 것을……. 소림과 무당을 짓밟기에는 그놈들이 더 확실하니까 말이야.”

하지만 아무래도 상관이 없다는 듯 옥현은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풀썩 웃으며 말을 이었다.

“훗! 그렇지만 괜찮아. 소림과 무당을 짓밟기에는 혈교도 쓸 만한 패거든. 아니, 오히려 더 좋지. 그 뒤에 우리가 나서서 정리하기 위해서는 이미 한 번 실하게 망해 버린 혈교가 더 편하니까 말이야.”

실로 무지막지한 계획이었다.

혈교를 내세워 소림과 무당을 비롯한 주요 문파들을 쓸어버린 후 화산파를 비롯한 청성과 종남파와 몇몇 세가를 휘몰아 혈교를 청소한다!

“앞으로 중원 무림에는 우리 화산파만 오롯이 우뚝 서게 될 거야. 암! 물론이고말고.”

소림과 무당을 피로 씻은 혈교를 화산파가 말살한다!

청성과 종남을 비롯한 몇몇 떨거지들이 그 공을 조금 나눠가지겠지만 상관없다. 그 문파들 역시 그 과정에서 된서리를 맞게 만들 생각이었으니까…….

부르르.

‘미쳤다. 장문사형은 미쳤어.’

무림최고를 지향하는 것은 어느 문파나 같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마도문파와 손을 잡고 정파 무림의 뒤통수를 쳐서 중원제일을 꿈꾸는 짓은 정파가 취해서는 안 되는 일이다.

“흑야방? 용무린이라는 애송이가 흑도를 관리한답시고 키웠다지? 그놈들이 활개 치는 꼴을 내가 계속해서 지켜볼 것 같아?”

“사, 사형. 용무린 총순찰은……. 컥!”

듣기 싫다는 듯 옥현이 손아귀에 힘을 주었다.

옥풍의 얼굴이 금세 새빨갛게 변했다.

“그 어린놈이 벌써 총순찰이라 불려. 그것으로도 모자라 황룡패주에 무림왕의 칭호까지 얻었지. 더는 곤란해. 맹세하건대, 앞으로 화산파의 이름 앞에 걸리적거리는 것들은 지체 없이 치워버릴 거야.”

물론 흑도의 떨거지들을 규합해 대리인으로 내세운 후 빨아들이는 단물 또한 포기할 수 없다. 흑야방은 그래서 없어져야 하는 것이다.

“전서구가 이미 날아갔어. 혈교가 곧 움직일 거야. 개방이라면 충분히 눈치 채겠지. 사제에게 얻은 정보가 있으니 혈교의 준동을 막기 위해 꽁지 빠진 듯 움직일 거야. 클클클, 하지만 누가 따라주겠어? 지금껏 혈교의 존재조차 몰랐던 놈들이 말이야.”

옥현의 목소리가 점점 더 광기를 띠어갈 때였다. 암굴 밖에서 메아리치듯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장문사형, 안에 계십니까?”

흠칫!

몸을 떨었던 옥현의 얼굴이 놀랍도록 빠르게 인자한 표정으로 바뀌었다.

옥현은 순간적으로 옥풍의 아혈을 제압한 후 근엄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무슨 일인가 사제?”

“화음현에서 개방의 화운 태상장로와 용무린 총순찰의 모습이 보였다는 전서가 도착했습니다.”

“그래? 알았네. 먼저 가 계시게. 내 곧 감세.”

말을 하면서도 옥현은 계속해서 밖을 향해 신경을 곤두세웠다. 자신의 말을 옥진이 어디까지 들었는지 궁금해하는 듯 보였다.

“예, 사형.”

잠시 뜸을 들인 후 옥진의 목소리가 다시 이어졌다.

“……옥풍 사형께선 아직도 화산의 웅비를, 그동안 참아오기만 했던 그 치욕을 이해하지 못하시는 것입니까?”

“후우, 그런 모양이야. 혈교의 준동을, 그놈들이 소림과 무당을 치는 일을 그저 잠시만 뒤에 알리자는 우리의 뜻을 그렇게 이해하지 못하다니 원…….”

“어쩔 수 없지요. 하지만 옥풍 사형께서도 훗날 이해할 날이 오리라 믿습니다, 사형. 우리 화산파가 천하무림의 종주로 우뚝 서게 되는 날 말입니다.”

“암! 그럴 걸세. 그렇고말고.”

“그러면 연화각에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장문사형.”

“알겠네.”

그것으로 대화는 끝이었다.

옥현은 옥풍을 돌아보며 풀썩 웃었다. 긴장이 확 풀린 얼굴로 옥풍의 아혈을 풀었다. 느물거리며 말을 이었다.

“들었지? 옥진도 아직 다는 몰라. 혈교가 소림과 무당을 치려 한다는 것만 알지 그 혈교를 사실상 움직이는 사람이 나라는 것을 알지는 못해. 크크큭.”

옥현이 속이 후련한 듯 괴소를 터뜨렸다.

임금님 귀가 당나귀 귀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유일한 사람과도 비슷한 심리였다. 누구에겐가 이 사실을 알리고 화산파를 천하무림의 종주로 우뚝 세운 사람이 자신이라는 인정을 받고 싶은 것이었다.

“어, 어찌 혈교 같은 무리와 손을 잡으신 겁니까, 장문사형! 대체 어찌하려고…….”

옥풍이 비통한 목소리로 부르짖었다.

하지만 옥현은 눈을 동그랗게 뜨며 그 말을 되받았다.

“무림맹이 백마사를 키워 은밀히 사리사욕을 챙긴 것은 괜찮고 우리가 혈교를 부리는 것은 안 된다고?”

“그, 그것은…….”

옥풍은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백마사를 키워 온갖 더러운 일에 사용한 배후가 바로 혈고에 당했던 당시의 자신이었으니까.

“그거야말로 웃기는 개 소리지.”

“…….”

“그에 대해서는 용무린이라는 애송이를 처리한 후 다시 와서 대화를 나눠보도록 하지. 그동안 잘 지내게 사제.”

그 말을 끝으로 옥현은 다시금 옥풍의 아혈을 제압했다. 만족한 얼굴로 암굴을 나섰다.

‘초, 총순찰……. 부디, 부디 조심하시게…….’

옥풍은 가물거리는 의식을 붙잡고 간절히 기원을 했다.

용무린이 옥현의 수에 넘어가지 않기를, 또한 화산파가 완전히 무너지지 않기만을 바랐다.

***

감숙성과 맞닿아 있는 섬서성의 서쪽 끝자락 천양현.

그 외곽에 홍화장이라는 이름의 커다란 장원이 자리하고 있었다.

색주가도 아닌 이곳에 피처럼 붉은 홍등이 주렁주렁 달려 있는 이유는 오직 하나, 이곳 홍화장이 바로 다시 일어선 혈교의 본산이었기 때문이었다.

홍화장 내원 깊숙한 곳.

이글이글 타오르는 눈빛의 노인이 태사의에 앉아 방금 도착한 전서를 읽고 있었다.

이 노인이 바로 당대 혈교의 교주인 혈마 나령.

과거 마교의 손에 멸망을 당할 때 겨우 도주할 수 있었던 몇몇 장로의 손에 길러진 최후의 혈교 적통이자 모든 것인 사내였다.

“크흐흐. 드디어 때가 도래했구나…….”

꾸깃. 파스스스.

움켜쥔 전서구가 순간적으로 가루가 되어 사라졌다.

가히 절대 경지에 다다른 혈마존공이었다.

“감축 드리옵니다, 교주시여.”

“감축 드리옵니다.”

“감축 드립니다.”

태사의 아래 오체투지하고 있던 혈의인들이 소리 높여 외쳤다. 만족스러운 얼굴로 아래를 굽어보던 혈마 나령이 말을 이었다.

“준비는 어찌 되어 가고 있느냐?”

“혈마단, 혈세단, 혈루단, 혈풍단 각 삼백 명 총 일천이백여 명이 출동 준비를 갖추었고 본교의 중진고수들로 이뤄진 혈영단 삼백 명이 하명만 기다리고 있습니다.”

“일천오백여 명의 혈교 전사들이라……. 좋군.”

혈마 나령이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과거 마교와도 자웅을 겨룰 당시와는 비교할 수 없었지만 팔십 년 만에 재건한 세력 치고는 이 정도면 훌륭했다.

나령이 고개를 끄덕이며 재차 말을 이었다.

“이번에야말로 과거의 빚까지 모두 청산해야 한다. 혈뇌는 계획을 다시 점검해 봐라.”

“충!”

오체투지하고 있던 사람들 중 중앙의 독안노괴가 조심스레 고개를 들었다. 그가 바로 혈교의 두뇌인 혈뇌였다.

“화산파와 손을 잡고 진행하는 이 계획은 교주님께서 친히 천하삼분지계라 명명하신 바 있습니다.”

“우리 혈교와 마교 그리고 냄새나는 화산파 그렇게 셋으로 천하를 나누는 것이지.”

“맞습니다, 교주님. 하지만 본 혈교와 마교로 천하는 양분되는 양상을 보이다가 결국에는 혈교천하로 일통되는 것이 바로 핵심입니다.”

“계속해 봐.”

혈마 나령이 눈을 지그시 감았다.

혈뇌가 목소리를 높였다.

“먼저 정파 놈들의 태산북두인 소림과 무당을 지우는 일입니다.”

“빌어먹을 놈의 땡중과 말코 놈들…….”

“아시다시피 소림과 무당을 먼저 치는 이유는 과거에도 그랬듯 그들을 무너뜨리지 않고서는 혈교천하를 이룰 수 없기 때문입니다.”

“맞아. 놈들을 무너뜨려야만 정파 놈들이 똘똘 뭉치지 못하게 돼. 구심점이 사라지게 되는 셈이니까.”

“그 일에는 본교의 정예인 혈마, 혈세, 혈루, 혈풍 등의 무력단체를 모두 투입합니다. 물론 마교와의 연합을 통해 동시에 진행할 것입니다.”

마교와의 연합이라는 소리가 거슬렸는지 혈교주 나령이 눈두덩을 요란하게 움직였다.

그 기색을 알아차린 혈뇌가 다급히 목소리를 높였다.

“혈교천하를 위해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교주. 당분간만 참으소서. 오월동주라는 말도 있지 않습니까?”

“크흠. 알고 있다. 하지만 잊지 마라. 마교와 우리는 절대로 공생을 할 수 없다.”

“물론입니다.”

“우리가 소림을 맡고 마교가 무당을 맡기로 했나?”

“지리적인 위치로 보아 그것이 합당합니다. 다만 한날한시에 공격을 개시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래야 정파가 혼란에 휩싸이게 될 것입니다. 북숭소림 남존무당 두 곳이 동시에 깨어진 혼란을 틈타야 합니다.”

“정파 놈들이 하나로 뭉치는 일에 대한 대비는?”

“이미 화산파의 장문인 옥현과 이야기가 끝나 있습니다. 화산파와 청성과 종남의 세 문파와 무림맹의 핵심이었던 서문세가와 단목세가가 함께 뭉쳐 있습니다. 그들이 무림맹의 반대편에 설 것입니다.”

“좋아, 좋아. 소림과 무당이 고립무원의 상태에 빠지게 되겠군그래.”

“맞습니다. 화산파를 시작으로 그간 무림맹의 주축이었던 문파와 세가들이 모두 나서서 본 혈교의 이름과 도발을 말도 안 되는 일로 치부할 것입니다.”

“본교와 마교와의 협력은 모르게 해야 해. 소림과 무당을 한날한시에 사라지게 만든 힘이 우리 혈교에 오롯이 있다고 믿게 만들어야 할 거야.”

“당연합니다. 그래야 정파 놈들이 감히 본교의 뒤를 치려는 시건방진 마음을 먹지 못할 것입니다.”

“소림으로 나아가는 교두보는?”

“섬서성 동쪽 끝자락에 자리한 성남현에 흑도 문파인 마영방이 있습니다. 한데 얼마 전 흑야방이라고 하는 놈들의 침습을 받아 멸망했습니다. 그 점을 노리라는 연락이 화산의 옥현으로부터 왔습니다.”

“모른 척 해줄 테니 마영방을 밀어버리고 교두보로 사용하라 이건가?”

“그러합니다, 교주.”

“흑야방은 어떤 놈들이지?”

“무림맹의 총순찰 용무린이라는 애송이가 있습니다. 어쭙잖은 신주오가의 일원인 비룡문의 소주인인데, 그 애송이가 하는 짓이 발칙합니다. 겉으로는 정파의 허울을 쓰고 있으면서 뒤로는 호북성의 흑도문파를 하나로 통합해 재미를 보고 있었습니다.”

“푸흐흐. 재미있는 놈이군.”

“그렇습니다, 교주님.”

“어쨌든 놈도 흑야방이 밀렸다고 사생결단 내지는 못하겠군. 드러내놓고 자신이 흑야방의 주인 행세를 하지는 못할 테니까 말이야.”

“흑야방으로부터 마영방을 되찾은 후 그곳을 교두보로 사용할 것입니다. 마영방이 자리한 성남현에서 하남성의 경계까지는 불과 반나절, 성의 경계를 통과하면 소림까지는 불과 이레 거리입니다.”

“좋아, 좋아.”

정파의 상징이랄 수 있는 소림과 무당을 동시에 무너뜨리는 것으로 혈교의 화려한 재림을 선포한다!

나쁘지 않았다.

만족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던 혈마 나령이 슬쩍 목소리를 높였다.

“아참, 그 물건은 도착했나?”

“감숙의 경계를 어제 돌파했다고 합니다. 하니 머지않아 도착할 것입니다, 교주님.”

“좋아. 차질 없이 준비해서 소림의 땡중들에게 제대로 된 맛을 보여주도록! 마교 놈들을 상대할 때도 그 물건을 필요로 하니 감숙의 군부 놈들에게 뇌물 넉넉하게 주는 것 잊지 말도록 하고.”

“충!”

혈뇌가 크게 외치며 다시금 머리를 처박았다.

“크흐흐. 천하삼분지계는 다시 천하이분지계로……. 하지만 마지막 순간 천하에 우뚝 설 곳은 오직 하나 본교뿐이리라. 크흐흐하하하하!”

혈교주 나령의 나직한 웃음은 곧 광소로 바뀌었다.

***

우뚝.

“혈교요?”

가던 걸음마저 멈춘 용무린이 동그랗게 눈을 떴다. 큰 소리로 되물었다. 우려 가득한 얼굴로 화운이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응, 혈교.”

“신마대전 전에,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팔십여 년 전에 마교의 손에 멸망한 그 혈교요?”

“뭐? 혈교가 마교의 손에 멸망을 했었다고?”

이번에는 화운이 눈을 크게 떴다. 자신조차 처음 듣는 말이라는 듯 되물었다. 용무린을 다그쳤다.

“소리 없이 사라진 것으로만 알려져 있었는데, 대체 그건 또 어떻게 알았지? 마교가 혈교를 왜 공격했는데?”

“……!”

용무린은 대답을 하지 못했다.

궁금증을 해소하려는 듯 화운이 계속해서 다그쳤다.

“마교에 멸망당한 혈교가 섬서성 귀퉁이에 둥지를 튼 이유와 현재 규모 그리고 속셈까지 아는 거야? 놈들이 왜 화산파와 손을 잡았는지까지 다 알아?”

“아,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요?”

용무린은 고함을 버럭 질렀다.

하지만 화운장로는 여전히 가늘게 뜬 눈으로 용무린을 보며 구시렁댔다.

“제길, 잘 아는 것처럼 말하니 물어보는 걸 가지고 왜 고함을 지르고 난리람?”

“……!”

그러거나 말거나 용무린은 깊은 생각에 잠겨있었다.

절대검신 독고황을 잠식하는 동안 스며들었던 신마 진무량의 기억을 열심히 더듬었다.

‘신마대전을 벌이기 전 마교는 마도의 종주를 자처하던 혈교와 배교를 먼저 쳤어.’

십여 년에 걸친 대 혈투.

세간에 알려지지 않았지만 마교는 마도의 종주 자리를 놓고 벌어진 전쟁으로 혈교, 배교와 많은 피를 흘렸다.

‘혈교를 먼저 쓰러뜨렸고 그 뒤가 배교였어. 혈교 놈들은 피를 통해 새롭게 거듭날 수 있다는 희한한 교리를 내세워 살육만 일삼는 놈들이라 전투 자체는 간단했거든.’

무공의 평균 수위는 혈교가 더 높았지만 상대하기에는 배교 놈들이 훨씬 더 까다로웠던 것으로 떠올랐다. 마도의 종주라고 자부했던 마교에서조차 구경해보지 못한 온갖 사이한 대법과 술법들이 배교에는 가득했기 때문이었다.

‘당시 혈교주는 분명히 당대 마교주의 손에 죽었어. 일천여 초를 넘는 시간 동안이나 겨뤘으니 확실히 대단한 무위였지. 그리고 나머지 수족들은…….’

많은 수의 혈교 수뇌부가 강소성 림고산 중턱에서 목숨을 잃었다.

‘그 중 태반이 나를 비롯한, 아니 신마 진무량과 신교오궁의 궁주 손에 죽었는데 말이야…….’

그때 살아서 빠져나간 수뇌부가 있다는 뜻이다.

혈교의 멸망으로부터 팔십 년.

다시 천하를 노릴 생각으로 화산파와 손을 잡았다면 그때만큼은 아니어도 그만한 역량은 갖추었다는 것을 뜻한다.

‘그렇다면 굳이 내가 화산파로 가서 분위기를 살필 필요도 없어.’

진정 혈교가 다시 등장했고 옥풍이 그 사실을 알아차렸다면 화산파로 오르는 것은 용담호혈에 대책 없이 뛰어드는 것과 같다.

“화산파로 가는 이유가 장문인을 만나 옥풍의 소재를 대놓고 묻기 위해서라고 했지요? 그때의 반응으로 미루어 혈교와 화산파와의 연계에 대한 기습 질문을 던질 생각이고 말이에요?”

“그래. 그런 저런 반응을 본 후 흑야방의 일도 겸사겸사 해결할 생각이었지. 섬서성에서의 화산파의 이권을 보장하고 물러날 테니 더는 일을 확대시키지 말자고 말이야.”

“그런 생각이라면 화산파에 갈 필요가 없어요. 아니, 가더라도 우리 두 사람이 이렇게 대놓고 가면 안 돼요.”

“아니, 왜?”

잠시 생각을 정리한 용무린이 화운에게 반문을 했다.

“화운장로님께서는 어떤 숨겨진 비사를 알게 되었을 때 확인도 하지 않고 냉큼 소림이나 무림맹에 알릴 자신이 있어요?”

“그, 그거야…….”

화운이 말꼬리를 늘였다.

용무린의 반문에 갑자기 어떤 감이 팍 왔던 것이다.

“자신으로 인해 본산이 잘못된 길을 걷기 시작했다는 자괴감에 모든 것을 바로 잡으려고 떠난 분이 확신도 없이 전서에 혈교라는 단어를 쓰지는 않았을 것이라 생각해요.”

“흐음.”

화운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어찌된 영문인지는 모르겠지만 화산파가 혈교와 한 배를 탄 것만큼은 사실일 것이에요. 그래서 옥풍 부맹주가 구금 혹은 제거된 것일 테고요.”

“그러면 나는 은밀히…….”

“예. 태상장로님께서는 차라리 그림자가 되는 게 나아요. 아무도 몰래 스며든 후 옥풍 부맹주가 구금된 위치를 파악해 이야기를 들어 보시거나, 아예 혈교와 관련된 증거를 확인하는 거예요.”

“그러면 너는? 흑야방은 어쩌고? 화산파의 장문인인 옥현의 분노를 빨리 풀지 못하면 늦어도 하루 이틀 안에 화산파에서 마영방에 둥지를 튼 흑야방을 작살낼 텐데?”

“틀렸어요.”

용무린은 단언했다.

화운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고개를 갸웃했다.

“틀려?”

“예.”

“어째서?”

“장로님께서는 그런 경우 대놓고 개방의 고수들을 출동시켜 흑도문파의 수복을 돕겠어요?”

“…….”

“혈교가 대신해서 움직일 가능성이 가장 커요.”

“크흠. 그러면 너는 어찌할 테냐? 시간이 촉박한 듯한데, 네 말대로라면 흑야방의 네 가솔들을 구할 대책이 없질 않느냐?”

피식.

용무린이 풀썩 웃으며 반문했다.

“왜 대책이 없어요? 그깟 놈의 마영방 따위 손 털고 나오면 그만이지요.”

“그 후에는? 놈들이 만족하지 못하고 뒤를 쫓을 때는?”

“어떻게 뒤를 쫓아요? 놈들이 빈집에 허탈해하고 있을 때 내가 칠 텐데요.”

“……!”

화운이 입을 쩍 벌렸다.

어쩐지 용무린과 이야기만 하면 자꾸 자신이 강호초출이 되는 것만 같아 기분이 묘했던 것이다.

“말이야 좋다만, 무슨 여력으로? 흑야방의 아이들만으로는 어림도 없을 텐데?”

“당연하지요. 걔들은 뺄 거예요.”

“그럼 어쩌려고?”

씨익.

“보면 알아요.”

용무린은 그저 환하게 웃기만 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