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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도주 (51/104)

8.도주

십만대산 불회곡의 가장 깊숙한 곳.

같은 마인들조차 숨쉬기가 버거울 정도로 강렬한 마기가 들끓는 그곳에 음양자가 머리를 조아리고 있었다.

“혈교?”

“그러합니다, 신마시여.”

“웃기는 노릇이군. 크크크큭.”

참을 수 없을 만큼 우습다는 듯 신마가 괴소를 터뜨렸다. 그때마다 주변의 모든 것이 몸살을 앓았다. 대공의 완성이 목전에 이르렀다는 뜻이었다.

잠자코 고개를 조아리고 있던 음양자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나쁘지 않은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신마시여.”

“나쁘지 않아? 나 신마가 그깟 피에 미친 혈교 나부랭이와 손을 잡으란 말인가?”

불쾌한 듯 신마의 목소리가 점점 더 커다래졌다.

그때마다 천정에서 돌가루가 푸스스 떨어져 내렸다.

음양자가 급히 말을 이었다.

“고정하소서, 신마시여.”

“…….”

“손을 잡는 것이 아닙니다. 그저 놈들이 소림을 치겠다는 것을 묵인하는 정도면 족합니다.”

“묵인한다?”

“그러합니다. 냄새나는 땡중과 혈교의 미친 것들이 서로 상잔하겠다는데 굳이 본교가 나서서 방해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하긴…….”

신마의 목소리가 잦아들었다. 음양자가 기다렸다는 듯 말을 이었다.

“무당을 짓밟는 일 역시 그런 취지에서 생각하면 충분합니다. 일전에 무당의 중진에 신교의 수족 하나를 심지 않았습니까?”

“아아, 그랬었지.”

“그에게 마지막 혈고를 보냈습니다.”

“마지막 혈고를?”

“그러합니다. 혈고가 원체 구하기가 힘든 마물인지라……. 운남을 샅샅이 뒤져 찾고 있지만 쉽지 않은 형국입니다. 시간을 필요로 합니다.”

“흠. 신경 꺼라. 그간 수족으로 만들었던 이들을 모두 잃지 않았더냐? 다루기도 쉽지 않고 시간만 많이 걸리는 일에 더는 목맬 필요가 없다. 차라리 그 시간에 실혼인들의 수를 늘리는 일에 더 힘을 기울이는 편이 좋겠다.”

“그렇긴 합니다. 생각보다 혈고의 효용이 없었습니다. 설마 하니 그렇게 한꺼번에 쓸려 나갈 줄은…….”

물론 용무린 때문이다.

용무린에게 혈고에 종속된 사람들을 구분하고 파훼하는 능력이 있지 않았다면 혈고는 마지막 순간 온 무림을 혼란의 도가니에 빠뜨릴 정도로 엄청난 파급력을 발휘했을 것이다.

“걱정할 것 없다. 내가 대공을 이루어 출관한 후 힘으로 모든 것을 깨뜨리면 되는 거야.”

“알겠습니다, 신마시여.”

“그래, 마지막으로 보낸 혈고는 결과가 어떠하냐?”

“무당의 중진 몇을 더 수족으로 삼을 수 있었습니다. 그들을 움직여 분란을 일으킨다면 그리 큰 어려움 없이 무당에 큰 타격을 입힐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푸흐흐. 신교의 수족이 된 무당의 중진과 몇몇 무당의 말코들이 분란을 일으킨다? 거, 좋구나.”

“지금 마지막 동남동녀가 들어오고 있습니다. 머지않아 신마께서 모든 대공을 이루고 나오시게 될 터, 대업을 조금이라도 빨리 이루기 위한 조치일 뿐입니다.”

“크흐흐. 좋다. 뜻대로 진행하라. 무당에 심어 놓은 우리 수족을 아낌없이 사용해도 좋다.”

“충!”

씨익.

오체투지한 음양자의 입꼬리가 기분 좋게 말려 올라갔다. 스르르 떠올라 뒤로 물러났다.

“용무린 이놈!”

밖으로 나온 음양자의 두 눈이 섬뜩하게 빛났다.

그동안 용무린에게 잃어왔던 제자들과 자꾸만 실패한 일들이 떠오른 것이었다.

“무당파를 끝장 낸 후에 비룡문을 쓸어 주마.”

그동안 정말 무던히 참은 셈이다.

비장의 무기로 사용하기 위해 무림에 뿌려둔 혈고가 대부분 소용이 없게 된 것부터 황궁의 일이 어그러진 것까지 용무린의 죄는 너무나 컸다.

“지금까지야 대공의 완성 때문에 모든 신경을 기울이느라 그놈의 일 까지는 관심을 끄고 지냈지만 이제는 더 참을 필요가 없지.”

대업의 시작이 코앞이니 이제는 슬슬 이를 드러내도 되는 것이다. 놈에게 본때를 보여주리라.

“수라멸절단이 이미 출발한 지 오래다. 그들이라면 그간 당해온 것들을 열 배 백배로 되돌려 줄 수 있겠지.”

신마에게 하는 보고는 형식적인 것이다.

황제가 주색에 빠지면 실권을 틀어쥔 자가 모든 것을 좌지우지하듯 자신 또한 마찬가지였다. 오래 전부터 대공을 이루기 위해 신마가 모든 일에서 손을 뗀 사이 자신이 신교의 대소사를 모두 처리했다.

교주 직속의 수라멸절단이었지만 자신이 움직이는 데 아무런 걸림이 없었다.

“지금쯤 근처에 도착해 있겠지?”

혈교에서 연락을 취해 온 즉시 결정을 내리고 움직이기 시작했으니 그들의 능력이라면 지금쯤 충분히 호북성에 들어섰으리라.

“남존무당의 끝이다.”

그 다음은 비룡문이었다.

“크흐흐흐.”

신교의 이인자를 자처하는 음양자가 기분 좋게 웃었다.

오래지 않아 불회곡에서 비응이 날아올랐다.

신교의 비밀 교두보인 호북성 남단의 형문산을 향해서 힘차게 날갯짓을 했다.

***

대화를 모두 마친 화운장로는 은밀히 모습을 감추었다.

그림자가 되어 화산으로 스며들었다.

쉬운 일은 아니었지만 최대한의 신법과 경공술을 발휘해 천리검향 옥풍이 구금되어 있을 만한 곳을 찾아다니기 시작했다.

‘하여간 화산은 힘든 곳이야.’

천장단애에 피어난 소나무 그늘에 몸을 숨기고 있던 화운이 고개를 흔들었다. 화산파가 자리한 연화봉 정상은 온통 암반으로 이뤄진 곳, 몸을 숨기기조차 여의치 않은 곳이었기 때문이었다.

‘겉으로 봐서는 별다른 움직임이 전혀 없는데 말이야.’

화산파는 여느 문파와 다름없이 평온했다.

워낙 가파르고 거친 곳이다 보니 조금이라도 평평한 바위만 있으면 그곳을 연무장으로 삼아 무공을 수련하고 있었고 가부좌를 틀고 내공수련에 빠져 있었다.

‘본산이랄 수 있는 저 취운궁과 연화각 주변에 옥풍을 가둬둘 만한 곳이 있을까?’

잠자코 화산파를 살피던 화운은 천천히 고개를 흔들었다.

죄인을 가둘 만한 곳이라면 통상 땅을 파 수감실을 만들곤 하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화산파는 암반 위에 겨우 돌과 벽돌을 쌓아 올려 세워진 곳이라 그럴 만한 장소가 따로 없었던 것이다.

‘내가 화산파를 한두 번 방문한 것도 아니고…….’

이곳 연화봉 주변이 화산파를 이루는 본산이다.

화산파 대부분의 검수들, 무려 일천에 가까운 무인들이 이곳 주변에 진을 치고 있는데 옥풍을 인근에 가뒀다면 모를 리 없는 것이다.

‘그걸 안다면 일말의 소란이라도 있어야만 해.’

천리검향 옥풍은 무림맹의 부맹주이자 이곳 화산의 장로 중 하나이다.

그런 그가 석연찮은 이유로 구금이 되어 있다는 것을 다들 안다면 하다못해 목소리를 높이는 사람이라도 몇몇 있을 수밖에 없는 거다.

‘옥풍을 가두었다면 확실히 여기 취운궁과 연화각 주변은 아니야.’

그렇다면 차라리 화산파를 둘러싸고 있는 다섯 봉우리 중 나머지 네 봉우리를 뒤지는 편이 더 좋을 것이다.

그때였다.

‘으응?’

막 시선을 다른 봉우리들로 돌리던 화운의 눈에 무엇인가가 걸렸다.

‘저 사람은?’

도관을 높이 쓴 하얀 수염의 도인.

화산파의 장로이자 자신과도 익히 안면이 있는 옥진도장이었다.

‘어딜 가려고 저리 은밀하게 움직이는 것이지?’

옥진도장은 화산파의 수련 삼매경에 빠진 무인들 눈에 띄지 않도록 그늘에 몸을 숨기며 천천히 움직여 조양봉을 향해 움직이고 있었다.

‘혹시?’

뭔가 감이 왔는지 화운은 옥진의 뒤를 조심스럽게 밟기 시작했다.

***

누구도 몰래 조양봉 북면의 암굴을 다시 찾은 옥진은 복잡한 얼굴로 옥풍 앞에 섰다.

“사형!”

“……!”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고개만 겨우 들어 올린 옥풍의 모습에 옥진은 가슴이 미어지는 듯했다. 안타까움 가득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어째서 이렇게 변하신 것입니까, 사형? 화산파의 발전과 군림을 위해 그토록 열정적으로 애써 오셨던 분께서 도대체 왜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 돌아오신 것입니까?”

아혈이 제압되어 말은 하지 못했지만 옥풍의 가슴은 터질 듯 말을 쏟아내고 있었다.

‘다른 사람이 된 것이 아니다, 사제. 나는 그동안 혈고에 당해 있었다. 그리고 이제야 겨우 본래의 나로 돌아왔단 말이다.’

혈고에 종속당해 교묘히 무림맹과 정파무림의 분열을 꾀했다. 그 첫 번째 시도가 바로 화산파의 발전과 군림이라는 허명을 내세워 화산파를 그릇된 일로 인도했던 것이다.

‘어쨌듯 내가 저지른 일, 그간 저질러왔던 화산파의 잘못을 바로잡으려 했을 뿐이거늘 어찌 내가 전혀 다른 사람이 되었다 하는 것이란 말이냐?’

피토하고픈 그 심정을 알 리 없는 옥진의 목소리가 계속해서 이어졌다.

“화산군림. 그 명예로운 순간이 코앞으로 다가오고 있습니다. 함께 하십시다, 사형. 혈교의 전진을 그저 잠시만 눈을 감고 있으면 된단 말입니다.”

‘사제. 그래서는 안 돼. 어서 빨리 소림과 무당 그리고 무림맹에 알려 혈교의 출현과 중원무림진출에 대비를 하도록 해야 한단 말이야.’

옥진의 말과 옥풍의 마음은 계속해서 평행선을 그렸다.

서로 다른 감정을 쏟아냈다.

“사형께서도 잘 아실 것입니다. 유년 시절, 신마대전으로 인해 스러진 사문의 어른들과 유실된 절기로 인해 화산파가 어떤 대접을 받아왔는지 말입니다.”

트드득.

생각만 해도 피가 거꾸로 솟는 듯 옥진은 주먹을 터질 것처럼 세게 쥐었다.

“이름뿐인 천덕꾸러기 삼류문파 취급이었습니다, 사형. 한데 소림과 무당은 어떻습니까? 피해는 우리 화산보다 훨씬 적었으면서 명예는 그들이 모두 차지했습니다. 그건 정말 불공평한 일 아닙니까?”

‘그들의 피해가 우리보다 작다고 누가 그러더냐? 그것은 어디까지나 상대적인 것이다, 사제. 또한 그것은 자격지심에서 비롯된 것임을 자각해야 해. 어째 그걸 몰라?’

“초대 무림맹주의 자리는 소림이 가져갔습니다. 두 번째는 무당파가 차지했지요. 그렇다면 세 번째만큼은 우리 화산파가 그 명예를 차지했어야 합니다. 한데 그들은 어떻게 했습니까?”

옥진의 목소리가 점점 더 커다래졌다. 분노와 울분이 섞인 고함이 되었다.

“소림과 무당이 개방과 손을 잡더니 이제 겨우 이름이나 알리고 있던 풍가 애송이를 맹주로 떡하니 세워버렸습니다. 그게 말이나 되는 일입니까? 그것은 화산파에 대한 모욕이자 치욕이었습니다, 사형.”

‘이제야 비로소 안다. 비천검제 풍연호는 그만한 자질이 되는 이다. 무림맹주로서 손색이 없는 인품과 실력을 지닌 사내란 말이다. 제발 이름이나 명예 따위의 허울에 더는 연연하지 말아다오, 사제.’

“화산파가 받았던 치욕과 모욕에 대한 응분의 보답을 바랄 뿐 소림과 무당이 멸문하는 것을 바라지는 않는다고 이미 말씀드렸습니다. 우연히 알게 된 혈교의 재림, 그리고 소림과 무당 침공 소식을 조금 늦게 알리는 것뿐입니다.”

‘틀렸다, 사제. 장문사형이 그 사실을 우연히 알게 된 것이 아니다. 장문사형과 혈교가 손을 잡고 꾸민 계획이란 말이다.’

“화산파는 혈교의 뒤를 쳐 소림과 무당의 구원자가 될 것입니다. 청성과 종남의 도우들 그리고 몇몇 세가들과 손을 잡고 함께 화산파의 명예를 드높일 것입니다. 차후, 화산파의 이름은 소림과 무당에 앞서 천하제일로 세인들의 뇌리에 기억이 될 것입니다.”

그 찬란한 미래가 눈앞에 보이는 것인지 옥진은 얼굴 하나 가득 행복한 미소를 지었다.

“오늘 다시 사형을 찾은 이유는 과거 화산군림의 꿈을 함께 꾸었던 사형을, 이제는 변절자가 되어 버린 사형을 제 기억 속에서 지우기 위함입니다.”

옥진의 얼굴이 싸늘해졌다.

“마지막 변명을 들어드리지요. 두 번 다시는 이곳을 찾지 않을 것입니다.”

철혈의 판관 같은 표정을 한 채 옥풍의 아혈을 풀었다.

아혈이 풀리자마자 옥풍은 다급히 외쳤다.

“혀, 혈교는 장문사형과 손을 잡았다. 우연히 소림과 무당의 침공 소식을 듣게 된 게 아니야. 그것은 장문사형과 혈마가 손을 잡고 함께 꾸민 계획…… 흡.”

다급히 말을 쏟아내던 옥풍의 입이 돌연 굳었다.

너무나 무서운 말에 당황한 옥진이 다시 아혈을 제압해 버렸던 것이다.

‘뭐, 뭐라고? 그 사실을 우연히 알게 된 것이 아니라 장문사형께서 혈마와 함께 꾸민 일이라고?’

당황스러운 말이다.

우연히 알게 된 사실을 조금 이용하려는 것과 아예 처음부터 그렇게 계획을 세워 소림과 무당을 짓밟으려는 것은 차원이 다른 이야기였기 때문이었다.

‘장문사형이, 우리 화산파가 혈교 따위와 손을 잡고 일을 꾸민 것이라고? 정말?’

전혀 다른 무게를 지닌 사실에 옥진은 당황했다.

그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쉽사리 판단이 서질 않았다.

바로 그 순간,

“옥진!”

암굴 입구 쪽에서 귀에 익은 목소리 하나가 들려왔다.

“헛!”

화들짝 놀란 옥진이 뒤돌아서며 검을 잡아갔다.

“잘 지냈는가, 옥진. 나 화운일세.”

“아! 화운 도우…….”

잠시 반가움이 떠올랐던 옥진의 얼굴은 급격히 어두워졌다. 화운의 표정에서 그가 자신과 옥풍의 대화를 모두 들었음을 직감했던 것이다.

“다 들었네, 옥진.”

역시 맞았다!

꿈틀. 키릭.

눈두덩을 요란하게 움직였던 옥진이 기어코 검을 뽑아들었다. 하지만 화운은 여전히 침착했다. 싸울 의지가 없다는 것을 드러내듯 두 손을 앞으로 들어 보이며 천천히 다가왔다. 말을 이었다.

“하지만 나는 아무것도 듣지 못한 것으로 할 생각이라네. 내 말 뜻 아시겠는가?”

“…….”

차마 출수를 하지 못하고 있던 옥진의 검 끝이 부르르 떨렸다. 화운의 제안에 내심 극심한 번뇌를 겪고 있다는 뜻이었다.

화운이 넉넉한 미소와 함께 말을 이었다.

“나는 사람만 구하면 되네. 자네의 사형이자 나의 오랜 친우인 옥풍 말이네.”

“……!”

“더불어 소림과 무당에도 알릴 생각이네. 물론 화산파의 이름은 뺄 생각이야. 알다시피 그런 이야기는 다른 사람들이 알아서 좋을 게 하나도 없거든. 아니 그런가?”

“진심이오?”

옥진이 간절한 시선으로 물어왔다.

화운은 흔들리지 않는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당연하지. 나를 모르는 겐가?”

안다. 자신이 왜 화운의 성격을 모르겠는가?

소싯적 옥풍 사형과 자신 그리고 화운은 함께 천하를 돌며 협행을 하고 다니기도 했었다. 대사형이자 장문사형인 옥현만이 후계를 잇기 위한 수련으로 함께하지 못했다.

화운과 옥진 옥풍 셋은 그렇듯 제법 많은 전투를 함께한 전우이기도 했다. 화운의 성품을 모를 리가 없는 거다.

“그 피에 미친 종자들이 어떻게 다시 돌아왔는지는 모르겠으나, 내 이 것 하나만은 확실히 말할 수 있네. 혈교를 막아내는 일에 가장 공이 큰 곳은 화산파라고 말이네. 내 말 뜻 아시겠는가?”

그 누구도 모르고 있던 혈교의 재림을 미리 감지해낸 곳이 바로 화산파이니만큼 화운이 입을 놀리기에 따라 그것은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그것이 비록 소림과 무당이 작은 피해를 입었다고 할지라도 말이야.’

어쩌면 그것이 가장 좋은 귀결이라고 생각되어졌다.

아무리 화산의 천하군림이 좋다지만 아예 대놓고 혈교와 손을 잡고 일을 꾸미는 것은 어쩐지 꺼려졌다.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본능적으로 거부감이 일었다.

‘무림의 문파에 속하지만 결국 우리들은 도인들이란 말이야. 혈교와 대놓고 손을 잡아서는 역대 조사님들을 뵐 면목이 없지 않겠어?’

우연히 알게 된 혈교의 소림과 무당 침공을 기회로 이용하는 것과 아예 처음부터 혈교와 손을 잡고 같은 구파의 일원인 소림과 무당에 해를 가하는 흉계를 꾸미는 것은 그만큼이나 큰 차이로 다가왔다.

스르르.

옥진의 검이 자신도 모르는 사이 아래로 향했다.

“고맙네, 옥진. 나는 그대가 화산을 위해 이런 결심을 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네.”

어느새 곁으로 다가온 화운은 옥풍의 아혈을 풀었다.

“나를 믿어주게. 화산은 명예를 잃지 않을 것이네. 그리고 혈교는 다시금 어둠속으로 사라지게 될 거네.”

내공을 운집해 사지를 결박하고 있던 쇠사슬까지 모두 끊어냈다. 재빨리 손을 놀려 마혈까지 풀어낸 후 사해백지에 박혀 있던 침까지 모두 뽑아냈다.

“화, 화운…….”

풀려난 옥풍이 눈물을 글썽였다.

화산의 명예를 지켜주려는 그의 진심이 한없이 고마웠고 한편으로는 부끄러웠던 것이다.

“가세, 옥풍. 가서 그 망할 놈의 혈교 놈들이 허튼짓을 하기 전에 밟아버리도록 하자고.”

“그, 그래. 그렇게 하세…….”

옥풍이 눈물을 훔치며 비틀비틀 일어나는 순간이었다.

“가긴 어딜 가-아!”

버언쩍. 피쉬쉬쉬-잇!

암동 전체가 자색 광채로 가득 차올랐다. 화운과 옥풍을 향해 매화꽃의 형태로 쏟아져 내렸다. 자하신공을 바탕으로 한 매화검법의 검초였다. 화산파의 장문인인 옥현이 암습에 가까운 공격을 가해온 것이다.

“허억!”

화들짝 놀란 화운이 황급히 공력을 끌어 올렸다. 전광연화장을 연거푸 뿜어내 앞을 가렸다.

파카카카-앙!

“크읍. 큭.”

창졸지간의 기습에 화운은 정신없이 뒤로 밀렸다.

완벽한 공력의 운집이 이뤄지지 않아 매화검법을 받아낸 두 손이 쩍쩍 갈라졌다. 팔목 어림까지 길게 파였다. 내공이 진탕되어 속까지 거북했다.

스각.

“허으…….”

그 사이 옥풍이 가슴에서 피를 뿌리며 무너져 내렸다.

“자, 장문사형! 어찌…….”

“닥쳐, 이 멍청아!”

옥진의 말을 단숨에 잘라 버린 옥현이 고함을 버럭 질렀다. 계속해서 옥진을 나무랐다.

“저 따위 거지 나부랭이의 말을 어찌 믿고 변절자와 함께 내보내려 한단 말이냐? 이 일이 밖으로 새어 나가면 우리 화산파의 명예가 어떻게 될지 몰라서 그런 어리석은 판단을 내렸단 말이냐?”

“…….”

옥진은 말을 잇지 못했다.

옥현의 말대로 화산파가 혈교와 손을 잡고 소림과 무당을 치는 일을 꾸민 사실이 드러나게 된다면 화산파의 이름은 시궁창에 처박히는 꼴이 되기 때문이다.

‘하, 하지만…….’

옥진은 어찌해야 할 바를 몰랐다.

화산파가 혈교와 처음부터 한 배를 탔다는 사실을 받아들여 옥현의 편을 들 수도 없었으며 그렇다고 지금까지 화산파를 위해 헌신해왔던 장문사형을 향해 검을 들어 올릴 수도 없었다.

“무엇 하는 것이냐 옥진! 네가 정녕 나와 생각이 같다면, 화산파를 천하제일의 문파로 우뚝 세울 생각이라면 어서 저 거지를 쳐라!”

“……!”

옥현이 서슬 파랗게 외쳤지만 옥진은 그마저도 할 수 없었다. 화운과의 친분도 친분이었지만 화산파의 명예를 지켜주겠다던 그의 말을 믿기 때문이었다.

‘내가 그를 공격한다는 것은 나 또한 혈교와 손을 잡는 것을 뜻하지 않을까?’

그 생각이 계속해서 옥진을 괴롭혔다.

옥현이 재촉해왔지만 화운을 향해 검을 들어 올릴 수가 없었다.

그때를 노려 화운과 옥풍이 말을 보탰다.

“옥진! 화산파를 위한다면 어떤 길이 진정으로 화산파의 명예를 지키고 대대로 화산파의 성세를 잇는 길인지 생각해 보시게.”

“사제. 손바닥으로는 하늘을 가릴 수 없어. 여기서 멈춰야만 해. 그래야 우리 화산을 지킬 수 있는 거야.”

두 사람의 말이 옥진의 가슴 깊은 곳을 마구 들쑤셨다.

움직이지 못하도록 붙잡았다.

“이런 멍청한! 차아아-하!”

휘슷. 촤라락.

바람인 양 앞으로 짓쳐드는 옥현의 검 끝에서 다시금 매화송이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버언쩍.

더불어 암굴을 메우는 자하신공의 빛이라니!

꿈틀.

옥진의 눈두덩이 까닭 모를 위화감에 요동쳤다. 옥진은 그 이유를 바로 알아차릴 수 있었다.

‘매화향이, 매화향기가 전혀 나질 않고 있어…….’

극성에 다다른 매화검법이 펼쳐지면 사위가 진한 매화향으로 가득차야 옳지만 옥현의 매화검법에선 전혀 매화향이 맡아지지 않았다. 화산파의 자랑인 자하신공을 바탕으로 펼쳤음에도 말이다.

‘검향지경이 깨어지다니. 검향지경이 어찌…….’

생각해보니 장문사형이 펼치는 화산파의 절기를 통해 매화향기를 맡아 본 적이 한 번도 없는 것 같았다. 자신 있게 검향지경을 이룩했다는 장문사형의 말은 들어 봤지만 자신이 직접 확인했던 적은 없었던 것이다.

파캉. 쉬가가각.

“큽. 크흡.”

짧은 비명을 흘리며 화운은 계속해서 뒤로 밀리기만 했다. 아직 몸을 가누지 못하는 옥풍도 보호해야만 했고 기습을 받으며 두 손이 상하고 내상마저 입었기 때문이었다.

“죽어라, 거지. 하앗. 하아아압!”

매화검법은 어느새 오행매화검법으로 넘어가 있었다.

장문인에게만 전해 내려오는 검법답게 매서운 오행매화검법의 초식들은 화운의 몸을 금세 넝마처럼 만들어 놓았다. 한 수 한 수가 날카로운 만년 거암의 무게로 다가와 화운이 펼친 초식을 짓이겼다.

파캉. 파가가각. 퍼펑.

요란한 폭음과 함께 뒤로 주르륵 밀린 화운은 검게 죽은피를 게워냈다.

“쿨럭.”

비틀거리기 시작하는 화운.

혼원귀일신공을 바탕으로 한 파옥권이 아니었다면 이만큼 버티지도 못했을 것이다.

‘빌어먹을 자식. 선기 한 번 잡았다고 틈을 안주네.’

가슴이 묵직해졌다. 그만큼 상황이 좋지 못했다.

옥풍을 구하는 것은 고사하고 자칫 잘못하면 자신까지 이곳 암굴에서 뼈를 묻게 생긴 것이다.

‘그 녀석이라면 이런 약한 생각 따윈 절대로 하지 않을 텐데 말이야.’

돌연 용무린의 얼굴이 불쑥 떠올랐다.

신기한 일이었다. 용무린의 얼굴을 떠올리자 자신도 모르는 사이 입꼬리가 슬쩍 말려 올라갔다.

그 모습이 옥현의 비위를 긁었다.

“웃어? 오냐, 끝을 내주마-앗!”

옥현이 이를 갈며 짓쳐들었다. 벼락처럼 검을 앞으로 내밀었다. 자하신공의 힘을 더했다.

버언쩍. 파아아-.

자하신공의 빛이 검의 형태로 뭉쳐 일 장도 넘게 뻗어 나왔다. 화운의 심장을 노렸다.

바로 그 순간,

“나를 먼저 베시오, 사형. 으아아아-!”

화운의 뒤에 몸을 숨기고 있던 옥풍이 눈물을 뿌리며 뛰쳐나왔다. 가능한 만큼의 공력을 운집해 화산의 자랑 중 하나인 매화청심장을 떨쳐냈다.

바로 그 순간,

화악.

매화검법도 아니었지만, 충분할 만큼의 내공이 담긴 것도 아니었지만 한 줄기 매화향이 피어올랐다. 암굴 전체로 번져갔다.

“옥풍! 안 돼!”

화운이 화들짝 놀라 고함을 지르는 사이 장문인 옥현이 하얀 이를 드러냈다. 질투로 번들거리는 눈으로 외쳤다.

“화산을 망치려는 변절자! 너부터 죽어랏!”

검향지경이라니! 그것도 매화청심장으로!

‘받아들일 수 없다. 화산제일검은 바로 나다. 나여야만 하는 것이란 말이다.’

후웅. 화아악.

화운에게 향하던 검강 덩어리가 방향을 틀었다. 옥풍이 쏟아낸 매화청심장을 단숨에 쪼개버린 후 짓쳐들었다. 사정없이 갈랐다.

촤악. 촤촤촥.

옥풍의 도복에 붉은 색의 선이 이리저리 얽혔다.

“으아아-! 옥풍-!”

그 사이 화운은 눈물을 머금고 도주를 감행했다.

자신을 위해 목숨을 내어 준 옥풍의 희생을 헛되게 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스파아-앙!

화운은 공간을 접듯 암굴 밖으로 튀어 나갔다. 옥진의 곁을 스쳤다.

“뭐하나 옥진! 놈을 베! 베란 말이야!”

“……!”

옥진이 흠칫 놀라 눈을 부릅떴다.

후두둑.

그런 옥진의 눈에 십수 조각으로 나뉘어 떨어져 내리는 옥풍의 모습이 들어왔다.

후욱.

그와 함께 아직도 코끝을 맴도는 매화향이라니!

‘오, 옥풍 사형…….’

장법으로 구현해낸 검향지경.

그런 말도 되지 않는 일을 장문사형이 변절자라 외치는 옥풍이 만들어 내는 모습을 보며 옥진은 화산파의 정수가 무엇인지 오롯이 느낄 수 있었다.

‘어째서 당신의 검에서는 매화향이 나지 않는지도 비로소 알 것 같소, 장문 사형.’

명예와 군림이라는 헛된 욕망에 사로잡혀 있는 동안 화산이 무엇을 잃어버렸는지 피부로 느껴졌다.

쉬익.

“옥진, 이 멍청아. 그 거지를 베란 말이다, 빨리-이!”

검향지경 따윈 알 바 아니라는 듯 짓쳐드는 옥현의 눈이 번들거렸다. 악귀처럼 독한 빛을 뿜어내었다.

‘당신은 화산파의 장문인 자격이 없어.’

스슷.

옥진이 검을 들어 올렸다.

무엇인가에 홀린 듯 하나의 검결을 취한 후 짧게 검 끝을 휘돌려 내었다.

‘검향은 화산의 정수. 도가의 향기는 절대로 혈교 따위와 하나로 어우러질 수 없음이야.’

인정한다. 자신 역시 한때 잘못 생각하고 있었음을.

하지만 백척간두에서 한 발을 내밀면 피안 아니던가?

검으로 도를 추구하는 화산의 무인이 검향을 깨닫는 것이야말로 그와 같으리라.

‘나는 화산의 검이다.’

화산의 검은 더 이상 헛된 명예나 이름 그리고 허망한 군림 따위에 얽매이지 않는다.

쏴아아아-!

옥진이 휘돌려낸 검 끝에서 매화꽃이 한 송이 두 송이, 아니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수가 피어올랐다. 놀라운 속도로 거리를 좁히는 옥현을 향해 쏟아져 내렸다.

화아악.

그와 함께 휘도는 진한 매화 향 한 줄기!

꿈틀.

옥현의 눈두덩이 거칠게 요동쳤다. 다시금 질투로 번들거렸다.

“이런 빌어먹을 자식이! 차아-앗!”

버언쩍. 후우웅.

다시 한 번 거창한 자하신공의 빛이 암굴을 메웠다.

일 장에 이르는 검강 덩어리가 번개와 같은 속도로 매화꽃을 갈랐다. 거칠게 헤집음과 동시에 옥진의 몸까지 통째 휘감았다.

하지만,

콰릉. 콰릉. 콰르르르릉.

놀랍게도 옥진을 조각내지 못했다. 아니 도리어 내상까지 입은 듯 비릿한 핏덩어리가 목 끝까지 차오르는 것을 느껴야만 했다. 우뚝 멈춰 설 수밖에 없었다.

“어, 어떻게…….”

옥현이 눈을 부릅떴다. 몇 수나 아래였던 옥진의 급격한 변화를 믿을 수가 없었다.

“……!”

옥진은 대답하지 않았다.

눈을 지그시 감은 채 석상처럼 검을 들고 그 자리를 지키고 서 있을 뿐이었다.

‘기절이라도 했나? 아니면 죽었나?’

확인해 보기에는 어쩐지 켕겼다.

지금까지도 계속해서 코끝을 맴도는 진한 매화 향이 알게 모르게 두려움을 자극했다. 자하신공의 내공마저 짓눌렀다. 어쨌거나 옥현 역시 화산파에서 뻗어 나온 한 가지였기 때문이었다.

‘이럴 때가 아니야. 어서 그 거지 놈을 잡아야만 해.’

그 생각이 번쩍 들었다.

“화산파의 자랑거리가 하나 더 늘었군. 훌륭해 사제. 아주 멋졌어.”

말을 하며 옥현은 슬금슬금 옥진 옆으로 휘 돌았다.

암굴 밖으로 조금씩 이동했다.

“우리 사이의 일은 나중에 대화로 풀기로 하지. 우리 화산파의 앞날을 위해서는 어서 빨리 그 거지를 잡아야 해서 말이야.”

이윽고 자리가 완전히 바뀌었다. 옥진은 여전히 암굴 안쪽을 향해 있었고 옥현은 입구를 향해 있었다.

“……!”

타닷. 휘슷.

마지막으로 옥진을 못마땅한 시선으로 한차례 노려보던 옥현은 한시가 바쁘다는 듯 암굴 밖으로 신형을 날렸다. 화운의 뒤를 쫓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옥진은 계속해서 눈을 감고 있었다.

누군가 공격을 하지 않는다면 깨달음을 갈무리 할 때까지 계속해서 그러고 있으리라.

휘이이.

한 줄기 진한 매화 향기가 끊임없이 옥진의 주변을 맴돌았다.

***

화운과 헤어진 용무린은 성남현의 마영방으로 향했다.

무림의 밤을 통째 거머쥐겠다는 용무린의 뜻을 착실히 수행하고 있는 노백인과 독사를 만났다.

“두, 두목님!”

“두목!”

“쓰읍!”

“주군을 뵙습니다.”

“주군을……!”

“됐어. 그만해. 불편하니까 빨리 일어나.”

오체투지하며 복종하는 두 사람을 용무린은 얼른 일으켜 세웠다. 풀썩 웃으며 질문을 던졌다.

“마영방 치는 것은 누구 계획이었냐?”

“저, 제, 제가…….”

노백인이 슬그머니 손을 들었다.

혹시나 혼이라도 날까 봐 두려운 모양인지 목이 잔뜩 움츠려져 있었다.

‘뭐라고 할까나?’

기분이 참으로 묘했다.

자신의 명령을 충실히 수행하고 있는 수하들을 보며 즐거워하기에는 무림정복에의 의지가 많이 희미해져 조금 뭣했고 그렇다고 추궁을 하거나 말리자니 또 뭔가 미묘하게 아쉬웠던 것이다.

‘모르겠다. 일단은 흘러가는 대로 가보자.’

지금 당장은 화산파의 계획을, 아니 화산의 장문인인 옥현의 계획을 망쳐 놓는 일이 더 급했다.

***

마음을 굳힌 용무린은 짧지만 진심을 담아 칭찬을 던졌다.

“잘 했다.”

“헤헤헤.”

“푸흐흐.”

노백인과 독사가 그제야 활짝 웃었다.

“피해는 얼마나 입었냐?”

“죽은 놈은 한 놈도 없습니다, 주군.”

“실력이 되는 놈들로만 가려 뽑았거든요.”

“중상 입은 녀석 다섯에 경상이 열 놈 정도일 뿐입니다, 주군.”

“호오!”

용무린의 눈이 동그래졌다.

마영방이라고 하면 화산파의 비호 아래 상당한 세력을 모았던 놈들로 알려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유성검보 수련 열심히들 했나보네?”

씨익.

“하루 한 시진, 잠자는 시간을 빼면 밥 먹는 시간도 아껴가며 수련 했습니다, 주군.”

“모두가 그렇게 노력하고 있습니다. 언제든 주군의 명이 떨어지면 짐이 되지 않기 위해서 말입니다.”

노백인과 독사가 하얀 이를 드러내며 답했다. 용무린 역시 만족스럽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중상자만 근처 의원에 맡긴 후 우리끼리는 다시 재미를 보러 가 볼까?”

“좋습니다, 주군.”

“어딥니까?”

“하루 이틀 거리 이내에 자리한 위남현과 여산현에 꽤 악독한 놈들이 있어. 절검방과 사사방이라고……. 전에 우리가 작업했던 귀도방 같은 놈들이라고 보면 돼.”

“귀도방이요?”

“멀쩡한 여염집 처자들 잡아다 기루에 팔아먹던 그놈들과 같다고요?”

“킁, 알겠습니다.”

“당장 치죠.”

노백인과 독사 두 사내의 코 평수가 넓어졌다. 눈에 불을 뿜었다. 이젠 그런 놈들을 못 견뎌 한다. 처음 봤을 때와는 전혀 다른 사람들이 된 듯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껄렁한 기운이 많이 엿보였었는데 지금은 그런 성격도 거의 보이지 않네?’

이제는 흑도보다는 당당한 패도에 더 가깝게 느껴졌다.

‘좋지, 뭐.’

발전하고 있다는 증거였으니까.

“그런데 한 가지 일 좀 처리하고 가자.”

“한 가지 일?”

“그게 뭡니까?”

“애들 몽땅 풀어서 소문을 좀 내야겠다.”

“소문요?”

“소문이라면 어떤……?”

노백인과 독사가 고개를 갸웃했다.

“뭐, 별 거 아니야. 간단해. 뭐냐 하면…….”

이어지는 용무린의 말에 노백인과 독사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입을 쩍 벌린 채 되물어 왔다.

“저, 정말 그렇게 합니까?”

“그래도 정말 괜찮겠습니까, 주군?”

“괜찮지 않으면?”

용무린은 한 번 풀썩 웃어 보인 후 다음 지시사항을 전달했다.

“잘 들어…….”

“……!”

“……!”

노백인과 독사가 귀를 쫑긋 세웠다.

***

성남현에 괴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마영방의 사갈과 같은 놈들을 쳤는데 어째서 화산파가 대신 복수를 하겠다고 선전포고를 하고 난리야?

-화산파? 마영방이 속가제자가 세운 곳이었어? 그래서 복수한답시고 핏대 세우는 거야?

-청성파와 종남파는 또 왜 껄떡대는 건데? 마영방이 너희들에게도 상납하고 있었냐?

-아오, 귀찮아. 화산파고 청성이고 종남이고 다 덤벼라. 마음껏 밟아주마.

-기다리고 있을 테니 덤벼 이 자식들아.

-이해한다. 겁이 나면 다들 그냥 산에 처박혀 있어라.

정말 말도 되지 않는 소문.

화산파는 물론이고 청성과 종남까지 싸잡아 폄훼하는 소문에 화음현이 들끓었다.

“마영방 자식들을 처리한 것은 좋은데 왜 화산파를 들먹이고 지랄들이래?”

“그러게 말이야.”

“그것들이 미쳤나봐. 청성이나 종남은 그렇다고 쳐도 화산파라니!”

“마영방의 껄렁한 것들을 상대로 작은 승리를 거두니 감히 화산파도 넘어설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나 보지?”

“웃기는 자식들 같으니라고.”

소문을 듣게 된 화음현의 양민들이 먼저 반응했다.

마영방을 친 일에 대해서는 잘했다고 입을 모으면서도 화산파를 욕하는 말에 대해서는 하나 같이 자신의 일처럼 분노했다.

화산파의 터전이자 텃밭인 화음현의 특징이었다.

자신들과 화산파를 동일시하는 경향 때문에 청성파나 종남파를 폄훼하면서까지 화산파의 이름이 더럽혀진 것만 가지고 분노했다.

그 덕에 소문은 빠르게 퍼졌다.

발 없는 말이 천리를 간다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곧장 화산파에 까지 닿았다.

하도 어이가 없는 말이라 처음에는 화산파에서도 소문을 믿지 않았다. 하지만 위남현의 절검방이 박살난 후 다시 같은 소문이 꼬리를 물자 반응을 보이지 않으려야 않을 수가 없었다.

“이 시건방진 놈들을 당장 처리해야만 합니다.”

화산파를 대표하는 매화검수들의 수좌인 운룡이 대갈일성을 토해냈다.

“맞습니다. 장문인께서 어차피 그리 주장하시지 않았습니까? 흑야방을 치자고 말이지요!”

“더 기다릴 것 없습니다. 당장 출발해야만 합니다. 감히 흑도 나부랭이들이 대 화산파를 폄훼하다니요!”

운광과 운양마저 동조하고 나섰다.

그들뿐만이 아니었다.

화산파의 도사들이라면, 저 점잖기로 유명한 삼원궁의 주인 옥허도장 마저 굵은 눈썹을 꿈틀거리며 불편한 심기를 드러낼 정도였다.

“대놓고 절검방을 또 쳤어. 마영방에 이어 다시 한 번 화산의 코털을 뽑을 게야.”

“맞습니다. 드러내 놓을 수는 없지만 아는 사람들은 마영방과 절검방이 화산의 그늘 아래에 있음을 알고 있을 터. 이것은 선전포고입니다.”

“그렇습니다. 더는 참을 수 없습니다.”

모두가 분노를 쏟았다. 당장에라도 제자들을 파견해 흑야방을 치자고 외쳤다.

하지만 옥허는 경거망동을 할 수가 없었다.

‘뭔가 이상해.’

콕 집어 말할 수는 없지만 무엇인가 잘못 되어가고 있는 듯한 느낌 때문이었다.

장문인이자 사형인 옥현이 느닷없이 모습을 감추고 뒤이어 옥진마저 모습을 보이지 않자 그 불안감은 더더욱 커져만 갔다.

‘아무런 언질도 없이 대체 어딜 가셨단 말인가? 옥진 사형은 또 어째서 모습을 보이질 않고 계시는 걸까?’

사형임과 동시에 화산군림의 급진적인 중추세력인 옥진이라도 곁에 있었다면 결론을 내리는 일에 주저함이 없었을 것이다.

‘옥진 사형 역시 옥풍 사형이 의문의 실종을 당한 일과 관련이 있는 것일까?’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 돌아온 옥풍은 화산파가 과거로 되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세속의 이권 따위 이제 그만 놓아 버린 후 도가의 명문으로 다시 태어나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러다가 갑자기 사라지셨지.’

그 사이 흑야방이 마영방을 쳤고 장문사형인 옥현은 옥진과 더불어 시건방진 흑야방과 그 배후에 자리한 비룡문을 치자고 주장했다.

‘혈교의 중원 진출에 대한 정보를 살짝 늦게 알리는 것으로 화산파의 군림을 시작하자고 하셨지.’

그런 일련의 일들을 생각하니 아무래도 꺼림칙했다.

“일단은 자중하거라.”

“사숙!”

“어찌하여…….”

“화산파의 체통이 땅에 떨어졌습니다, 사숙.”

운룡과 운광 그리고 운양이 대뜸 볼멘소리를 쏟았다.

계속해서 장문인 옥현의 계획대로 나아갈 것을 주문했다.

“찬밥 신세가 되다 못해 이젠 흑도 나부랭이들까지 화산파를 무시하는 지경이 이르렀습니다, 사숙. 대체 언제까지 더 참아야만 합니까?”

“맞습니다. 흑야방을 짓밟아야만 합니다.”

“배후에 있는 비룡문까지 쓸어버려야만 땅에 떨어진 화산의 명예를 다시 되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러다가 청성이나 종남이 먼저 움직여 흑야방을 치게 된다면 우리 화산파는 바닥에 떨어진 체면을 회복할 길이 없게 됩니다.”

“제발 허락해 주십시오, 사숙. 우리가 먼저 움직여야만 한단 말입니다.”

목소리를 높이지 않고 있는 대다수의 도사들 역시 같은 생각인 듯 눈을 빛냈다.

하지만 옥허의 태도는 단호했다.

“장문인을 비롯해 옥진 장로님마저도 부재중이시다. 자중하거라.”

“사숙!”

“어허! 더는 다른 말은 용납하지 않겠다. 장문인과 옥진 장로님의 행방을 알게 되기 전까지는, 그분들의 명이 떨어지기 전까지는 모두 수련에만 힘을 쓰도록!”

그 말을 끝으로 옥허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버렸다.

그런 옥허의 귀에 나지막이 투덜대는 소리들이 들려왔다.

“하아, 물러 터진 화산이라니…….”

“이러니 구파의 동도들이 화산파를 제치고 자신들끼리만 한 자리씩 다 해먹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답답합니다. 답답해 죽을 것만 같습니다, 사형.”

그 심정을 어찌 모를까?

하고픈 말은 많았지만 옥허는 그냥 듣지 못한 체했다.

‘너희가 혈교에 얽힌 이야기를 알고 있어도 그런 말을 할 수 있었을까?’

혈교의 등장과 함께 그들이 소림과 무당파를 치려 한다는 것을, 그 사실을 화산파가 알고 있으면서도 일부러 늦게 알려 화산파의 군림을 도모한다는 것을 알아도 저런 말을 할 수 있을까?

옥허는 입을 꾹 다물었다. 찬바람을 일으키며 밖으로 나설 뿐이었다.

하지만 옥허의 바람대로 되지 않았다.

며칠이 지나지 않아 화산파가 은밀히 관리를 하던 여산현의 사사방마저 무너졌고 다시금 화산파의 자존심을 후벼 파는 괴 소문이 돌았기 때문이었다.

-화산파면 다냐?

-청성파와 종남파도 같은 생각이라며?

-양민들 괴롭히는 흑도 나부랭이들 족치는데 왜 너희들이 지랄이야?

-덤벼, 이 자식들아.

-겁나면 그냥 산에 처박혀 있어. 대신 그만 짖어라. 알아들었냐?

이번에는 회의랄 것도 없었다.

실질적으로 화산파를 움직이는 가장 큰 힘 중 하나인 매화검수들이 독단적으로 결단을 내렸기 때문이었다.

아득.

“이 빌어먹을 자식들을 더는 내버려 둘 수 없다.”

매화검수들의 수좌인 운룡이 이를 갈았다.

“맞습니다, 사형. 우리라도 나서야 합니다.”

“어차피 장문인께서도 흑야방을 치려 하시지 않았습니까?”

“그렇습니다. 장문인이시라면 혹여 이 일을 나중에 알게 되셔도 뭐라 하시지는 않을 것입니다.”

“더 지체했다가는 종남이나 청성의 도우들에게 선수를 뺐길 겁니다.”

“지금 당장 움직여야 합니다.”

반짝.

운룡이 서슬 파란 눈을 빛내며 외쳤다.

“좋아. 가자.”

사제들인 운광과 운양을 돌아보며 명령을 내렸다.

“옥허 사숙께서 알아차리지 못하도록 매화검수의 일부와 매화검대의 일부만 차출하도록 하자. 운광과 운양 두 사제는 지금 즉시 우리 뜻에 동조하는 제자들을 모아라.”

“예, 사형.”

“알겠습니다, 사형.”

운광과 운양 두 사람이 환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화음현의 속가에게 전서 띄우는 것도 잊지 마라. 놈들의 현 위치가 어디인지 알아내야만 한다.”

운룡은 흑야방의 위치 탐문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마영방을 짓밟은 것으로도 모자라 주변 두 현의 흑도문파를 더 쓸어버린 놈들의 기동력이라면 한곳에 가만히 있지 않을 가능성이 더 높았기 때문이었다.

“염려 마십시오, 사형. 지금 당장 속가들에게 전서를 날려 두겠습니다.”

“놈들의 움직임을 가장 잘 아는 속가들이 길잡이를 하도록 조치해 두겠습니다, 사형.”

“그래, 알았다.”

운룡이 하얀 이를 드러내며 환하게 웃었다.

비슷하게 웃어 보인 운광과 운양이 바쁜 걸음으로 밖으로 나섰다.

그로부터 반나절 후 야반삼경.

운룡과 운광, 운양 세 사람을 시작으로 스무 명의 매화검수와 일백에 달하는 매화검대의 검수들이 화산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깊은 고민에 빠진 옥허 도장이 알지 못하는 사이 벌어진 전격적인 행동이었다.

***

“거참…….”

혈마단주 조유가 자꾸만 고개를 갸웃거렸다.

분명히 성남현의 마영방에 흑야방의 흑도 나부랭이들이 진을 치고 있다고 들었는데 막상 와보니 빈집이었기 때문이었다.

“왜 없지? 또 다른 곳을 털러 갔나?”

곁에 있던 부단주 사공표가 풀썩 웃으며 동감을 표했다.

“그럴지도 모르겠습니다, 단주. 불과 며칠 사이 인근 두 현을 박살내며 돌아다닌 놈들 아닙니까? 아마 지금 이 순간에도 여느 만만한 현의 흑도 놈들을 상대하고 있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그럴 듯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여 보이던 혈마단주 조유가 불쑥 입을 열었다.

“쫓아야 하나?”

타당한 고민이었다.

화산파의 장문인 옥현과 했던 약조가 살짝 애매했기 때문이었다.

“굳이 그럴 필요까지 있겠습니까? 애초에 약조는 마영방을 교두보로 내주는 대신 이곳에 둥지를 틀고 있던 흑야방 놈들을 짓밟아 달라는 것이었잖습니까?”

“그야, 그렇지.”

놈들의 뒤를 쫓아 말살해 달라는 말은 분명히 없었다.

고개를 주억거리던 조유가 이윽고 결정을 했다.

“일단 애들 몇 풀어서 놈들 위치나 좀 알아보도록 하자고. 그동안 우리는 후발대 맞을 준비와 소림으로 진격할 교두보나 확실히 다져두면 되지 않을까?”

“그러면 되겠습니다, 단주.”

부단주 사공표가 동감을 표했다.

혈교가 세상에 완전히 드러난 상태라면 아무래도 상관이 없겠지만 아직은 아니었다. 혈교는 소림을 무너뜨리는 것으로 세상에 화려하게 복귀를 신고하게 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 교두보에서 전열을 정비한 후 은밀히 숭산으로 힘을 집중시키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한 법, 굳이 흑야방의 뒤를 쫓아 소란을 자초할 필요가 없었다.

“애들 몇 풀어서 흑야방 위치 탐문하고 나머지 애들 중 인상 덜 험악한 애들 골라서 마영방인가 뭔가 하는 놈들이 관리하던 업소들로 보내 둬.”

교두보의 전제조건은 주변 장악이었다.

혈교의 정체를 들키지 않기 위한 위장으로도 마영방이 관리하던 업소들의 흡수는 필수였다.

“예, 단주님.”

부단주 사공표가 밖으로 나섰다.

홀로 남은 혈마단주 조유가 의자에 깊게 몸을 묻었다.

“뭐, 별다른 일이야 있겠어?”

화음현을 중심으로 돌고 있는 괴 소문을 그 역시 들어 알고 있었다. 화산파와 청성 그리고 종남파까지 싸잡아 폄훼하는 소문은 그들 세 문파를 충동질하고 있었다. 고수들의 파견을 종용했다.

“화산파와 청성과 종남은 이미 우리와 한 배를 타고 있단 말이야.”

소문 따위에 그들이 움직이지는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물론 화산의 장문인 옥현이 화운의 뒤를 쫓아 화산에 없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 상태에서 내린 판단이었다.

“천하삼분지계라…….”

피식.

그 끝이 무엇인지 잘 아는 혈마단주 조유가 풀썩 웃었다. 혈교 천하를 꿈꾸며 휴식에 빠져 들었다.

***

‘짜식들, 웃기는?!’

덥수룩한 수염에 큼직한 도끼를 들고 있던 사내가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흑도의 고수로 변장을 한답시고 산적으로 변신한 용무린이었다. 이미 한 번 산적으로 분장을 한 경험이 있어서인지 혼자서도 완벽하게 분장을 마쳤다.

‘곧 울게 만들어 주마.’

수하들을 남김없이 흩어서 무한으로 되돌려 보낸 후 성남현 인근으로 돌아오던 용무린의 눈에 눈썹을 휘날리며 신법을 전개하는 화산파의 검수들이 걸린 거다.

‘흑야방 정도야 언제든 밟아줄 수 있다 이거지?’

물론 흑야방 하나로만 보면 맞는 말이다.

지금 밀려오고 있는 매화검수 20명과 매화검대 100명으로 충분히 짓밟고도 남는다. 흑야방의 수하들이 아무리 유성검보를 열심히 수련했어도 아직은 무리였다.

‘하지만 어림도 없어 이 자식들아!’

후욱.

용무린이 야조처럼 날아올랐다. 뚝 떨어져 내리며 크게 고함을 질렀다.

“다 덤벼 이 자식들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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