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혈교와의 첫 대면
쩌렁쩌렁한 고함소리에 모두의 시선이 허공으로 향했다. 눈을 동그랗게 떴다.
“뭐야, 저 자식은?”
“도끼를 들었네? 산적이야 뭐야?”
“허리 좀 봐. 검과 도까지 함께 차고 있는데?”
그러는 사이 용무린이 도끼를 아래로 찍어 눌렀다.
후우웅.
적당히 밀어 넣은 불사신기 덕에 미친놈으로 치부할 수만은 없는 파공음이 일었다.
“운광! 저 미친놈 잡아와!”
“갑니다-앗!”
스릉. 후욱.
운룡의 명령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운광이 검을 뽑아 솟구쳤다. 용무린을 맞아갔다.
타아앙. 카랑. 카라랑.
운광의 검과 용무린의 도끼가 얽히며 무섭게 불똥을 피워 올렸다. 우열은 단숨에 갈렸다. 위에서 떨어져 내린 힘을 더했음에도 용무린이 뒤로 밀린 것이다.
“이놈!”
이번에는 운광이 기세등등한 태도로 용무린을 향해 떨어져 내렸다.
피잇. 쉬리리릭.
간결하기 짝이 없는 옥천검법을 펼쳐 용무린의 어깨를 쳐갔다. 사로잡으려는 것이다.
‘그래서야 어디 파리라도 잡겠냐?’
속으로 실컷 비웃으며 용무린은 다시 도끼를 휘둘렀다.
카앙. 카카카-앙.
한 뼘 남짓한 도끼의 날로 잘도 운광이 펼쳐낸 옥청검법을 막아냈다. 그러면서 슬금슬금 뒤로 물러났다. 감당하지 못하는 체했다.
“저 산적의 정체가 뭐지?”
“제법 하는데요?”
“그러게 말이야. 도끼의 좁은 날로 저토록 수월하게 사제의 검법을 막아내다니! 나는 저런 부법의 고수에 대해 들어본 적이 없어.”
“저도 궁금하네요. 정말 누굴까요?”
운룡이 사제 운양과 그런 말을 주고받을 때 사달이 났다.
운광의 검을 교묘히 옆으로 흘려낸 용무린이 야무지게 운광의 얼굴을 후려친 것이다.
따앙. 철퍽!
“우왁!”
외마디 비명과 함께 뒤로 밀려난 운광의 코에서 분수와 같은 피 두 줄기가 뿜어졌다. 이른 바 쌍코피가 터진 거다.
그뿐만이 아니다.
둥실. 둥실.
운광의 입에서 하얀 색의 조각 두 개가 튀어 나왔다. 앞니 두 개가 쏙 빠진 것이다.
“푸흐흐흐. 맛이 어때?”
용무린이 느물거리며 비웃었다.
“이, 이뤈 샹-!”
운광의 발음이 살짝 샜다. 앞니 두 개가 빠졌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운광의 눈이 홱 뒤집어졌다.
“야! 너는 이만 됐으니까 다른 놈 나오라고 해!”
용무린은 파리를 쫓듯 손을 휘저었다. 도끼를 들어 운광의 뒤를 가리켰다. 자신을 향해 까딱였다.
“이, 이노-옹. 쥬, 쥬겨퍼륀다-앙!”
휘슷. 파아아-.
서슬 파란 독기를 흩날리며 운광이 달려들었다. 검 끝에서 매화를 한꺼번에 세 송이나 피워 올렸다. 저 유명한 화산파의 매화검법이었다.
파카캉! 휘리릭.
용무린은 대뜸 밀려드는 매화 세 송이를 튕겨낸 후 뒤도 돌아보지 않고 신법을 전개했다.
툭. 투둑.
용무린이 서 있던 자리에 몇 방울의 피가 떨어져 내렸다.
그 한 수의 교환에 용무린 역시 적지 않은 상처를 입은 것이었다.
히죽.
‘이 정도면 따라오려나?’
신나게 도망치며 용무린은 미소를 지었다.
흘렸던 피는 물론 가짜였다.
미리 준비한 닭의 피에 경면주사를 섞은 것을 조금 흘려낸 것인데 그렇게 하면 피가 굳지 않고 오래 가기에 무당들이 부적을 그릴 수 있는 거다.
“거기 셔랴!”
타닷. 휘리릭.
여전히 발음이 새는 외침과 함께 운광이 바람처럼 용무린의 뒤를 쫓았다. 용무린이 흘려낸 피를 통해 자신의 승리를 예감했기 때문이다.
“멈춰 사제! 뭔가 이상하다!”
“사형! 멈추세요. 우릴 유인하려는 것 같습니다-아!”
운룡과 운양은 바보가 아니었다.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감지한 후 즉시 운광의 추격을 만류했다. 고함을 질렀다.
하지만,
휘리릭. 스파아앙.
운광은 이미 꼭지가 돌아 버렸다.
한 사람의 무인으로서 주먹에 얻어맞아 이빨까지 빠졌는데도 냉정을 유지하기란 그만큼 힘든 일이다. 동문의 사형제들이 모두 지켜보고 있을 때는 더더욱 그러할 것이다.
쌔애앵.
잠깐 사이 운광의 모습은 까마득한 곳으로 멀어졌다.
“사제가 위험하다. 쫓아라.”
“사혀-엉!”
“멈추세요, 사형!”
운룡과 운양을 시작해 나머지 매화검수들과 매화검대의 검수들이 다투어 신법을 펼쳤다.
‘푸흐흐. 다행히 오는구나.’
슬쩍 뒤를 돌아본 용무린이 헤실 웃었다. 여유롭게 마영방을 향해 길을 잡았다.
“이 나푼 너망. 거기 셔랴-아!”
그 뒤를 여전한 발음으로 외치며 운광이 쫓았다.
사뭇 치열한 추격전이 벌어졌다.
하지만 절대로 거리는 좁혀지지 않았고 결국 뭔가 이상함을 깨닫게 된 운광마저 추격을 멈추었지만 그럴 때마다 용무린이 다시 달려들었다.
카캉. 철퍽.
“커헉!”
“메롱!”
야무지게 운광을 한 대 때려준 후 혀를 내밀었다. 약을 올린 후 길을 재촉했다. 또 한 번은 주먹이 아니라 따귀를 후려갈기기까지 했다.
휘릭. 쫘아악.
다시금 쭉 터져 나오는 쌍코피라니!
“푸흐흐. 어때? 얼큰하지?”
그야말로 환장할 노릇이었다.
“우와아-악!”
타닷. 스파앙.
운광은 미친 듯이 신법을 전개했다. 용무린을 향해 달려들었다.
“운광! 그만! 멈춰-어!”
“사혀-엉!”
운룡과 운양이 고함을 아무리 질러도 소용이 없었다.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은 데다 운광이 악에 바친 검을 휘두를 때마다 조금씩 닭 피를 흘리는 절묘한 연기에 넘어간 나머지 일직선으로 용무린의 뒤를 쫓았다.
“쥬, 쥬긴당. 기퓔커 쥬기고야 먄다.”
결국 눈까지 홱 돌아간 운광은 모든 것을 잊고 용무린의 뒤를 쫓는 일에 사력을 다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며 운룡도 생각을 달리 해야만 했다.
“후우. 별 수 없다. 화산의 제자들은 모두 마음을 단단히 먹고 전투에 대비하라.”
“흑야방 놈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운룡과 운양이 경고성을 발했다.
거듭된 유인을 직접 목격했던 화산의 검수들 역시 그러리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걱정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자신들이 아는 한 마영방을 짓밟았던 흑야방의 흑도 나부랭이들은 절대로 자신들을 막아낼 능력이 없었으니까.
‘저놈의 신법이 제법이긴 하지만 그것이 다일 게다.’
‘흑야방 따위 놈들이 숨어 있어 봤자 아니겠어?’
‘봐봐. 도망치긴 해도 피를 제법 많이 흘리잖아?’
기습도 실력이 뒷받침되어야 효과를 발휘하는 법이다.
흑야방의 흑도 놈들 따위가 숨어 있다가 뛰쳐나와 봤자 나오는 족족 잡아 죽일 자신이 있었다.
‘우리를 유인하는 것이 바로 그 증거야.’
‘자신이 있는 놈들이라면 유인 따위가 무슨 필요겠어? 기습에 이은 정면대결을 해왔겠지.’
그런 확신이 있었기에 운룡과 운양은 용무린과 운광의 뒤를 쫓으면서도 아무런 걱정을 하지 않았다.
‘푸흐흐. 이것도 꽤 재미있는데?’
오직 용무린만이 마음 놓고 웃었다.
화산파의 고수들이 아무리 뒤를 쫓는다고 한들 얼마든지 빠져 나갈 능력이 있음에야 그럴 수밖에 없는 거다.
지금 이 순간 용무린의 걱정은 한 가지뿐이었다.
‘어떤 놈들인지는 몰라도 마영방에 그대로 죽치고 있어야 하는데 말이야…….’
성남현의 외곽을 돌며 약속된 장소에 걸린 붉은 깃발을 이미 확인했다. 의문의 고수들이 마영방에 진입하는 것을 확인한 노백인과 독사가 걸어둔 것이다. 깃발을 거는 즉시 노백인과 독사는 꽁지가 빠져라 무한으로 튀었으리라.
‘이젠 싸움만 붙이면 되는 건가?’
화운장로에게 혈교에 대한 말을 듣는 순간 떠올린 생각이었다. 화산파가 혈교와 정말 한 배를 탔다고 한다면 자신들이 나서지 않고 그들을 시킬 가능성이 높다는 생각으로 짜낸 계책이었다.
‘진짜 혈교 놈들일까?’
진짜 놈들이라면 바라던 대로 된 것일 테고 아니라고 해도 상관은 없다.
‘그래봐야 화산파와 붙어먹는 잡것들일 테니 말이야.’
그놈이 그놈인 거다.
끽 해봐야 무림맹이 기르던 백마사와 뭐가 다르겠는가?
오래지 않아 마영방의 정문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씨익.
천천히 신법의 속도를 줄이던 용무린의 입가에 흰 선이 쭉 그어졌다.
“푸흐흐. 나는 이럴 때가 정말 좋더라!”
불사신기를 휘몰아 담아낸 용무린의 주먹이 굳게 닫혀 있는 마영방의 정문을 향해 뻗었다.
쿠와아아-앙.
그 한 방에 마영방의 두꺼운 문이 박살이 났다.
나뭇조각들이 하늘 높이 훌훌 날렸다.
하여간 남의 문파 정문 때려 부수는 일은 용무린이 전문이었다.
휘슷.
더불어 하늘 높이 뛰어 오르며 용무린이 고함을 질렀다.
“다 덤벼 이 자식들아-아!”
목청은 또 어찌나 좋은지!
“웬 놈이냐?”
“적이다!”
조용히 마영방에 깃들어 있던 혈교의 선발대 혈마단의 고수들이 벌떼처럼 튀어나왔다.
그러거나 말거나 용무린은 다시 한 번 고함을 질렀다.
혈마단의 고수들이 생각지도 못했던 말이었다.
“화산의 정기가 살아 있음을 보여라-아!”
휘리릭.
그 외침을 끝으로 용무린은 마영방의 전각들을 가로지르기 시작했다. 눈 깜박할 사이 시야에서 사라졌다.
“뭐, 뭣? 화산?”
“화산파가 뭐가 어쨌다고?”
혈마단의 고수들이 어리둥절해할 때였다.
“이 샹! 거기 셔라-아!”
여전히 새는 발음의 운광이 들이닥쳤다.
그 서슬 파란 눈에 번들거리는 진득한 살기라니!
“네 놈은 또 뭐냐?”
“차아아-앗!”
두 번 연속으로 침입자를 놓치지 않겠다는 듯 혈마단의 고수 중 하나가 운광을 막아섰다. 섬뜩하기 짝이 없는 검기를 쏘아냈다.
“허엇!”
화들짝 놀란 운광은 재빨리 매화검법을 펼쳐냈다. 창졸지간에 벌어진 일이었지만 혈마단 고수의 기습을 훌륭하게 막아냈다.
카앙. 카카카캉. 따당.
운광과 혈마단의 고수가 격렬하게 얽혀들었다.
물론 그것이 시작이었다.
“이런!”
“역시 놈들이 매복하고 있었습니다, 사형.”
바로 뒤따라 들어온 운룡과 운양이 눈을 부릅떴다.
한눈에 봐도 범상치 않아 보이는 적들이 떼거리로 자신들을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미 운광은 싸움을 시작했다.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운룡의 입에서 공격 명령이 떨어지고야 말았다.
“쳐라! 화산파의 맛을 보여주어라!”
“놈들의 수가 많다. 매화검진을 펴라.”
“알겠습니다. 하아아!”
타닷. 타다다닷.
과연 화산이었다.
촌각의 짧은 시간에 매화검진이 펼쳐졌다.
다섯 명씩 짝을 이뤄 제각각 매화꽃을 연상시키는 방위를 밟았다. 빠르게 꽃잎을 펼쳤다 좁히며 서로 다른 방위와 각도로 공격을 퍼붓고 방어를 했다.
카캉. 타타탕. 쉬각. 스각.
“흡!”
“허업!”
화산파의 이름이 공연히 높은 것이 아니었다.
매화검진에 휘말린 혈마단의 마인들 입에서 비명소리가 연이어 터졌다.
“이 자식들이 정말!”
혈마단의 부단주 사공표의 굵은 눈썹이 위로 홱 치솟았다. 아직까지는 한 배를 타고 있다는 생각에 살수를 자제했지만 피해가 삽시간에 커졌기 때문이었다.
“화산의 정기 앞에 사마외도는 무릎을 꿇을 것이다-아!”
전각 가장 깊은 곳에서 들려온 커다란 외침이 불에 기름을 끼얹은 셈이 되었다.
혈마단주 조유를 맞이한 용무린의 외침이었는데, 신법을 전개하는 사이 아교로 붙여 놓은 수염을 떼어내고 청강검을 빼어들었기 때문에 조유는 용무린을 완벽한 화산파의 고수로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크아아! 이 버러지 같은 말코 놈을 봤나? 약조를 헌신짝처럼 버리고 함정을 파다니?!”
혈마단주 조유가 이를 갈며 외쳤다.
아득.
“혈마단은 전력을 다해 화산의 말코들을 해치워라.”
조유의 외침을 들은 사공표가 따라 고함을 질렀다.
“배신자의 말로를 보여줘라!”
“쳐라.”
“하아아!”
그동안 미온적으로 상대하던 혈마단의 움직임이 돌변했다. 마교의 마기와는 사뭇 다른 종류의 마기가 폭발하듯 치솟았다. 매화검진을 압박했다.
콰앙. 터터터-엉!
매화검진이 금방이라도 깨어질 듯 출렁였다.
‘배신자의 말로?’
‘이게 대체 무슨 소리야?’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거지?’
운룡과 운광 그리고 운양의 고개가 갸웃하고 기울었다. 하지만 더 깊이 생각할 수 없었다. 부단주 사공표를 비롯한 혈마단의 조장급들이 한꺼번에 들이닥쳤던 것이다.
“죽어엇!”
“차아!”
후웅. 후우웅. 피쉬쉬쉿.
‘아차’ 하는 순간 목숨을 빼앗길 법한 파공음들이 덮쳐들었다. 목과 심장을 비롯해 치명적인 사혈들을 노렸다.
“매화검수들은 모두 매화검진을 등져라.”
“매화검진은 매화검수들을 보조한다.”
명령은 즉시 이뤄졌다.
오 인 일 조의 매화검진이 빙글빙글 돌며 매화검수들의 등 뒤를 지켰다. 오직 정면만 상대하면 되는 매화검수들의 기세가 하늘을 찔렀다. 혈교의 정예인 혈마단을 맞아서 결코 뒤로 밀리지 않았다.
물론 용무린의 도움이 컸다.
“내가 왔다, 화산의 도우들아. 힘을 내라!”
처음부터 이럴 생각이었다는 듯 혈마단주의 손을 가볍게 벗어나 달려온 용무린이 오해 받기 딱 좋은 외침과 함께 주변을 휩쓸고 돌아다녔던 것이다.
스각.
“헉!”
서걱.
“크악!”
일 검에 한 사람의 몸에 치명상을 남겼다. 혈마단의 고수들이 종이 인형처럼 잘도 넘어갔다.
“이놈! 네 상대는 나 아니었더냐? 오너라!”
“싫어. 나는 이놈들이랑 놀 거야.”
조유가 찔러낸 검을 가볍게 떨쳐내곤 혈마단의 고수들만 골라 일 검씩 먹여대는 용무린 덕에 매화검수와 매화검대의 사기가 크게 올랐다.
“모두 힘내라.”
“오늘 화산의 이름으로 저 사악한 놈들을 처단하리라-!”
“우와아!”
“하아아압!”
모두가 사기 충전해 힘을 냈다.
물론 속으로는 다들 한 번씩 이렇게 생각했다.
‘홀연히 나타나 우리를 돕는 저 고수는 대체 누구지?’
‘복장은 꽤 눈에 익은데 말이야…….’
용무린을 지켜본 모두의 시선이 아리송해졌다.
복장은 분명히 눈에 익은데 얼굴은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도끼를 버리고 청강검까지 들고 있으니 더더욱 정체를 알 리 없었다.
하지만 그런 생각도 잠시뿐이었다.
혈마단의 마인들이 파도처럼 밀려들었고 그것을 상대하기 위해서는 어서 빨리 정신을 집중해야만 했다.
“정(正)!”
운룡의 외침에 매화검진을 이루는 다섯 꽃송이가 동시에 밖으로 튀어 나오며 검을 뿌렸다.
패액. 쉬쉬쉬쉭.
“커헉.”
“큽!”
순간적으로 다섯 혈마단 고수가 쓰러졌다.
“반(反)!”
매화검진을 이루는 다섯 꽃송이가 처음처럼 되돌려졌다. 그 틈을 노려 전면으로 짓쳐든 매화검수들이 벼락처럼 매화검법을 펼쳤다.
스가각. 서걱. 서걱.
“흡!”
“허억!”
다시 댓 명의 혈마단원들이 고꾸라졌다.
“오냐, 이놈들아. 네놈들이 자초한 일, 혈교의 진면목을 보여주도록 하마.”
버언쩍.
혈마단주 조유의 눈에서 섬뜩하기 짝이 없는 불꽃이 튀었다. 정말 뭔가를 보여줄 생각인 것이다.
피식.
용무린은 싱겁게 웃으며 생각했다.
‘웃기고 있네. 진면목이고 뭐고 다 필요 없어. 너희들은 그냥 동귀어진 해야만 해.’
혈마단주 조유가 벼락처럼 외쳤다.
“혈영대법을 펴라!”
그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혈마단의 마인들이 뜻을 알 수 없는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후우우-!
한 줄기 바람이 휘몰려 들더니 이내 붉은 안개로 변했다.
혈교 특유의 내공이 외부로 집단 발산했기 때문에 보이는 현상인데 용무린마저 눈을 가느다랗게 떴다.
‘바로 저거야. 저 피에 미친 놈들의 회심의 한 수.’
80년 전 마교와의 전쟁 당시 마교에게 가장 많은 피해를 입혔던 사이한 대법. 혈영대법은 혈교도들의 내공과 반응력을 적지 않은 시간 동안 터무니없을 만큼 높게 올려준다.
‘저 대법 때문에 마교도 엄청난 피해를 입었었다고.’
주입된 것이긴 하지만 그때의 기억이 오롯이 떠올랐다.
위기의 순간이면 펼쳐지던 저 대법으로 인해 죽어간 사람이 얼마던가?
후우우웅-! 촤아악. 촤촤촥. 쌔애애액.
파캉. 서걱.
“크악!”
차창. 스각.
“우와악!”
눈 깜박할 사이 매화검수 다섯이 고꾸라졌다.
터어엉. 우지끈.
오 인 일 조로 이뤄진 매화검진 세 곳이 금방이라도 깨어질 듯 출렁였다.
“이, 이런!”
운룡의 얼굴이 까맣게 타들어갔다.
그제야 알게 된 것이다. 상대가 흑야방 나부랭이들이 아니라 혈교의 정예들이라는 사실을.
“혈교가 왜 여기에…….”
혼란스러웠다. 혈교라면 분명히 소림과 무당을 공격하기로 약조가 되어 있지 않았던가?
하지만 오래 생각에 잠겨 있을 틈이 없었다.
“이노-옴!”
휘슷. 촤아악.
혈마단주 조유가 순간적으로 거리를 좁히며 검을 횡으로 쓸어 왔던 것이다. 조유가 휘돌려낸 검 끝을 따라 붉은 구름이 폭발하듯 덮쳐왔다.
“혈영강기다. 멍청아, 피해!”
“우웃!”
화들짝 놀란 운룡이 본능적으로 매화 다섯 송이를 쏟았다. 물론 어림도 없었다. 철벽이라도 되는 듯 붉은 구름의 혈영강기는 매화를 집어 삼켰다. 여전히 배가 고픈 듯 계속해서 밀려왔다.
바로 그 순간,
후우우. 씨시시-잇.
옆에서부터 강대하고도 날카로운 기운이 밀려들었다. 혈영강기의 옆구리를 후려쳤다.
퍼어엉. 타타타-앙.
그 서슬에 혈영강기가 씻은 듯 사라졌다.
“네놈은? 아까 그……?”
용무린을 향해 혈마단주 조유가 눈을 부라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용무린은 운룡 옆에 내려서며 핀잔부터 했다.
“싸우다 말고 어따 정신을 파는 거야? 죽고 싶어서 그래?”
“귀, 귀하는 뉘십니까?”
운룡이 얼떨떨한 얼굴로 물어왔다.
“나?”
아까 그 산적이라곤 죽어도 말 못한다. 그래서 대뜸 쏘아 붙였다.
“보면 몰라? 너네편이잖아!”
맞는 말이다. 적어도 지금 이 순간만큼은 같은 편이다.
‘동귀어진 작업이 끝날 때까지는 내가 함께 해줄게.’
“혈영강기를 알고 있다니! 네놈의 정체가 뭐냐?”
“알아서 뭐하게?”
혈마단주의 질문에도 한마디 톡 쏘아 붙였다.
“……!”
살짝 머쓱해진 혈마단주 조유가 입을 다물었다. 눈만 가늘게 떴다. 용무린은 그런 조유를 향해 샐쭉 웃어 보이며 청강검을 들어 올렸다.
“닥치고 덤벼 인마.”
“크허엉!”
뚜껑이 열렸는지 조유가 득달같이 달려들었다. 검을 쭉 찔러왔다.
“뭐해? 싸워!”
툭.
용무린은 자신이 튀어나가는 대신 운룡의 등을 떠밀었다.
“어어? 어헉!”
생각지도 못하는 사이 전면으로 튀어나간 운룡의 전신이 조유의 검에 노출되었다.
“우와악!”
죽음의 공포 앞에 운룡은 본능적으로 매화검법을 펼쳐내야만 했다. 그것도 전력을 다해서.
파캉. 카카캉.
격렬한 초식의 교환!
“큽. 커헉.”
상대는 혈교의 무력단체인 혈마단의 단주. 운룡은 당연히 뒤로 쭉 밀릴 수밖에 없었다. 어깨와 허리와 허벅지 어림에서 굵은 핏줄기가 잘도 튀어 올랐다.
“힘내. 내가 도와줄게.”
휘슷. 파아아-!
한 발 늦게 옆을 파고든 용무린이 다시 혈영강기의 옆구리를 후려쳤다. 그 서슬에 운룡을 완전히 베지 못한 혈마단주 조유가 이를 갈며 뒤로 물러나야만 했다.
아득.
“이런 쥐새끼 같은 노-옴.”
파아아-앗!
용무린을 향해 거리를 좁혔다. 검을 쭉 찔러 넣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용무린은 신경도 쓰지 않았다. 다짜고짜 운룡을 칭찬했다.
“잘 한다-아.”
툭.
칭찬과 동시에 떠미는 등.
“우와악!”
본의 아니게 용무린 대신 공격에 맞서게 된 운룡이 다시 목이 터져라 악을 썼다. 사력을 다해 매화검법을 펼쳤다.
후웅. 후웅. 후우우웅.
이번에는 십여 개에 이르는 매화꽃이 떠올랐다. 혈마단주 조유를 향해 쏟아졌다.
퍼엉. 퍼퍼퍼퍼펑.
이번에는 조유도 충격을 받았는지 혈영강기의 붉은 구름이 크게 출렁였다.
휘슷.
그 틈을 노려 용무린이 파고들었다. 청강검을 가볍게 찔러 넣으며 불사신기를 터뜨렸다.
콰아아-앙! 휘이이-.
출렁이던 혈영강기가 깨끗이 날아가 버렸다.
“크흡. 쿨럭. 쿠울럭.”
혈마단주 조유가 덩어리 피를 왈칵 토해냈다.
“봤지?”
“뭐, 뭘……?”
얼떨떨한 얼굴로 반문을 하는 운룡을 향해 용무린은 짧게 혈영강기를 상대하는 법을 알려주었다.
“혈영강기는 강대 강으로 맞서는 게 아니야. 강보다는 유, 유보다는 폭. 정면보다는 사선과 옆을 노려야만 상대하기 편해.”
“아하!”
그제야 용무린이 자신을 앞으로 내밀고 옆을 노린 이유를 알겠다는 듯 운룡이 눈을 크게 떴다. 고개를 끄덕였다. 감탄하는 얼굴로 용무린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씨익.
환하게 웃어 보인 용무린의 입에서 천만뜻밖의 말이 흘러 나왔다.
“혼자서도 잘할 수 있겠지?”
“예에? 저 혼자서요?”
중년의 매화검수 운룡이 사문의 어른을 대하듯 어린아이 같은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런 운룡을 향해 용무린이 혀를 찼다.
“쯧쯧쯧. 너 하나 살리자고 다른 애들 다 죽일래?”
“……!”
운룡의 눈이 부릅떠졌다.
주위를 돌아보니 자신의 사형제들 상당수가 쓰러지기 일보 직전이었던 것이다.
‘운광! 운양!’
두 사제뿐만이 아니었다.
매화검진 다섯 개가 이미 깨어졌다. 그만큼의 매화검대 검수들의 목숨도 끊어진 것이다. 더불어 매화검수들의 숫자도 많이 줄어들었다. 이대로 조금만 더 시간이 지나면 전멸을 면치 못한다.
‘도와줘야 해. 지금 당장.’
그리고 지금 이 순간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은 오직 한 사람, 눈앞의 정체 모를 은인뿐이었다.
“잠깐만 버티고 있어. 쟤들 좀 도와주고 올게.”
“알겠습니다. 다녀오십시오.”
운룡이 전의를 불태우며 외쳤다.
피식.
“내가 알려준 방법만 염두에 두고 있다면 내가 올 때까지 충분히 버틸 수 있을 거야.”
휘슷.
그 말이 끝나자마자 용무린은 혈영대법과 함께 매화검수와 매화검진을 부숴나가는 혈마단을 향해 쏘아졌다.
촤악. 촤촤촤-악.
“크헉!”
“크아악!”
용무린이 짓쳐든 방향에 있던 혈마단원 댓 명이 거의 동시에 피를 뿜으며 무너져 내렸다.
‘대, 대단하다…….’
순수한 감탄과 동시에 한 가지 의문이 떠올랐다.
‘저 정도의 실력을 지닌 분이 어째서 내 앞에 있는 적의 수괴는 살려 두었지?’
분명히 혈영강기라는 무공을 상대할 방법까지 꿰뚫고 있는 사람이었다. 실전을 통해 자신을 가르치려는 것이라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어쩌면 그 순간에 상대를 완전히 끝장낼 수도 있지 않았을까?
생각은 길지 못했다.
“죽어어-엇!”
혈마단주 조유가 독기로 번들거리는 눈으로 짓쳐들었기 때문이었다. 예의 붉은 구름과도 같은 혈영강기가 운룡을 통째 휘감으려 들었다.
“하아아아-!”
카앙. 카카카카-앙.
용무린의 가르침을 떠올린 운룡은 혈마단주를 맞아 버티기에 돌입했다. 위태로운 것은 전과 다름없어 보였지만 용무린의 말처럼 어느 정도 버티기에는 충분해 보였다.
그 사이 용무린은 혈마단 사이를 누볐다.
스각. 서걱. 퍼억. 빠아악.
검으로 베고 찌르는 것으로도 모자라 주먹으로 후려쳤고 팔꿈치로 목을 찍었다.
“커헉.”
“큽!”
삼재검법에나 나오는 간단한 동작에 이은 무투술의 연속이었지만 용무린이 스쳐 지난 곳마다 혈마단 마인들이 속절없이 무너져 내렸다.
“은공이 우릴 돕기 위해 오셨다!”
“힘을 내라!”
“하아아!”
용무린의 활약에 고무된 매화검수와 매화검대의 기세가 되살아났다. 절망을 딛고 용기를 냈다. 그 모습이 용무린의 마음을 살짝 흔들었다.
‘얘들은 아직 혈교와 화산의 밀월을 모르는 것 같은데 말이야…….’
용무린은 살짝 고민이 되었다.
혈교와 손을 잡고 화산의 군림을 꾀한 수뇌부 몇 때문에 공연히 애꿎은 화산의 일반 도사들까지 도매금으로 넘어가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절대검신 독고황의 의식과 성격이 조금 영향을 미친 것인데 용무린이 고민하는 사이 중요한 변화가 일었다.
“여기 종남의 검이 왔다!”
“시건방진 흑도의 무리를 제압하라!”
“이놈들! 종남의 검을 맛보아라!”
“어디 그 주둥이를 다시 놀려보아라 흑도 나부랭이들아.”
놀랍게도 종남산의 검수들도 하산을 했던 것이다.
운룡, 운광, 운양 사형제들이 옥허에게도 비밀로 한 채 흑야방을 치기 위해 검수들을 모아 출동했듯 그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상하게 사문의 어른들은 출동을 반대했다.
그저 화산과 함께 발을 맞추어 모든 일을 결정할 것이라는 어이없는 이유로 관망을 택했다.
그 사이 떨어질 종남의 명예를 도저히 두고 볼 수 없었던 혈기왕성한 중진고수들이 검수들을 따로 선별한 후 출동을 했던 것이다.
“하아아!”
“끼야아-앗!”
“이놈드-을!”
하지만 그 덕에 더욱 더 맹공을 퍼부을 수 있었다.
상대가 혈교의 정예 중 하나인 혈마단의 마인들이라는 것을 사전에 알고 있었다면 몸이 굳었을 수도 있었으리라.
하지만 단지 상대가 껄렁한 흑도 나부랭이라는 사실과 실추된 문파의 자존심 회복이라는 사명 때문에 물불 가리지 않고 열심히 검법을 펼쳤다.
쌔액. 촤촥. 스아악. 서걱. 서거걱.
“크악!”
“헉!”
“으아악!”
매화검진과 매화검수들을 둥그렇게 에워쌓은 채 압박하던 혈마단의 포위망 한 축이 그대로 무너졌다.
“종남의 도우들이 왔다.”
“힘을 내라 화산이여!”
“하아아!”
화산파의 도사들 역시 힘차게 검을 휘둘렀다.
절망을 딛고 일어난 용기는 이제 희망으로 물들었다. 그로 인해 전세는 양쪽 진영 모두가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을 정도로 팽팽해졌다.
새롭게 합류한 종남파의 검수와 권사 일백오십여 명과 남아 있던 화산파의 검수 오십여 명이 혈마단의 마인 이백여 명과 정확히 맞섰다.
‘이제 내 결정에 달렸구나.’
거리가 제법 먼 탓 때문인지 계획에서 청성이 빠졌지만 이만하면 조건은 충분히 갖추어졌다. 이제 결정을 해야만 할 때다.
‘예정대로 화산파의 도사들과 종남파의 고수들을 혈교의 마인들과 동귀어진 시킬까, 아니면 화산과 종남의 승리로 끝날 수 있게 조금만 더 도와줄까?’
그때 용무린의 결정을 돕는 고함소리가 어디선가 터져 나왔다.
“흑야방의 흑도 나부랭이들이 혈교와 손을 잡았다. 놈들을 쓸어버려라 종남이여.”
구파 중 속가의 대표적인 명문인 종남의 일대 제자 풍조산의 목소리였다.
이제 겨우 사십 대 중반의 나이에 벌써 종남의 차기 장문인에 거론되는 고수답게 풍조산은 천하삼십육검의 달인으로 알려져 있는 사내였다.
“이야아-아!”
“힘을 내라. 흑야방과 혈교 놈들을 물리쳐라.”
물론 어쩔 수 없는 부분도 있다.
운룡을 제외한다면 이곳의 화산파 도사들 중 누구도 화산이 혈교의 중원 진출을 사전에 알고 눈을 감아주려 한다는 것을 알지 못할 정도였기 때문이었다.
더 놀라운 사실은 그 운룡조차 마영방을 혈교의 교두보로 내어준 사실은 알지 못했다는 거다. 아마 그 사실을 알았다면 오늘과 같은 사달은 나지 않았을 것이다.
종남의 고수들이 고함을 지르자 화산의 도사들까지 그 대열에 합류했다.
“흑야방과 혈교를 쓸어버리자.”
“할 수 있다, 화산이여.”
흑야방이 혈교와 손을 잡았다는 말은 곧 그 뒤에 있는 용무린과 비룡문 역시 혈교와 한통속이라는 뜻이 된다. 어찌 그 따위 말이 퍼져나가도록 그냥 두겠는가?
‘너희들이 스스로의 운명을 결정지었구나.’
용무린의 눈매가 가느다래졌다. 역 팔자를 그리며 확 치솟았다.
‘그냥 동귀어진이나 해라.’
그렇게 만들기 위해서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저놈만 치워주면 되려나?”
용무린의 시선이 사정없이 운룡을 몰아붙이고 있는 혈마단주 조유에게로 향했다.
“크하하핫. 죽어라-앗!”
콰르르. 콰르르르.
폭풍과도 같은 혈영강기를 연거푸 쏟아내는 조유.
“크읍! 큭!”
운룡은 곧이라도 쓰러질 듯 겨우겨우 버텨내고 있었다. 매화꽃을 아무리 많이 피워 올려도 소용이 없었다.
검향이 함께하지 않는 한, 아니 최소한 장로급의 초절정 경지에 오른 검수의 내공이 아니라면 혈영강기를 완전히 헤집을 수도 파훼할 수도 없으리라.
“끝이다-아!”
혈마단주 조유가 연신 비틀대는 운룡을 향해 훅 거리를 좁혔다. 검을 찔러 넣었다. 붉은 구름을 닮은 혈영강기가 폭발하듯 터져 나왔다.
“벌써 나를 잊었으면 곤란해.”
기다렸다는 듯 용무린이 옆을 파고들었다.
청강검이 아닌 왼손을 가볍게 뻗었다. 소검비연이 오랜만에 빛을 머금고 쏘아졌다.
버언쩍.
한 줄기 벼락과도 같은 광채가 조유의 목까지 그어졌다.
제대로 된 비연일섬의 초식.
“어헉!”
이름값을 하겠다는 듯 조유가 본능적으로 검을 휘돌려 방어초식으로 바꾸었다. 혈영강기가 뭉텅 쏟아져 나왔다. 코앞으로 파고드는 빛을 후려쳤다.
따아앙.
소검비연이 하늘 높이 치솟았다. 공격을 막아내긴 했지만 참으로 섬뜩한 한 수였다.
“이놈을 정말……?!”
튕기듯 일어나 용무린을 찾던 조유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씨시시싯.
잘 들리지도 않는 나직한 소리와 함께 한없이 얇은 그 무엇인가가 목에 감긴 것을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씨익.
“잘 가라!”
서늘한 미소와 함께 용무린은 천잠사를 콱 잡아당겼다.
서걱. 스르르. 투욱.
혈마단주 조유의 목이 미끄러지듯 바닥에 떨어졌다.
팔십 년 만에 재림한 혈교의 선발대장으로서 상당히 허무한 죽음이었다.
물론 상대가 나빴다.
혈마단주 아니라 혈마단주 할아비라 해도 상대가 용무린이었다면 어쩔 수 없었을 것이다.
“……!”
입을 쩍 벌린 채 그 놀라운 장면을 지켜보던 운룡이 불쑥 질문을 던져왔다.
“으, 은인은 대체 뉘십니까?”
소검비연을 회수하며 용무린은 가벼운 목소리로 답했다.
“나? 아까 그 산적!”
무슨 뜻인지 바로 알아듣지 못해 눈만 껌벅이던 운룡의 눈이 서서히 부릅떠졌다. 떨리는 손가락을 들어 용무린을 가리켜 보인 후 더듬더듬 입을 열었다.
“수, 수염투성이에 도, 도끼를 들었던 바로 그…….”
“응. 그게 바로 나였어.”
해맑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는 용무린.
황당하다는 듯 말을 잃었던 운룡의 눈에서 이내 독기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너, 너 이노-옴!”
“하아, 그 자식. 도와줘도 지랄이네.”
“……!”
운룡은 다시 말을 잃었다.
사제인 운광을 시작으로 자신들을 이곳으로 유인한 것은 변함이 없었지만 당당하게 내뱉었던 말처럼 용무린이 자신들을 도와준 것은 사실이었으니까.
“너는 인마, 나 아니었으면 죽어도 벌써 죽었어. 알아?”
“그, 그거야 그렇지만……. 너는 대체 누구냐? 왜 우리를 이곳으로 유인했느냐? 이곳은 원래…….”
“원래 뭐? 흑야방의 흑도 나부랭이들이 있었어야 할 곳이었다고? 그래서 저 혈교 놈들 손에 너희 대신 죽었어야 옳은 일이었다고?”
“……?!”
운룡의 눈이 점점 더 커다래졌다.
그제야 용무린의 정체에 대해 짐작이 된 것이다.
그런 운룡을 향해 풀썩 웃어 보인 용무린은 운룡으로서는 생각지도 못했던 말을 불쑥 내뱉었다.
“화산과 혈교가 한 배를 타고 있다는 것을 아무도 모르고 있는 것 같지?”
움찔!
운룡의 눈동자가 눈에 띄게 떨렸다.
“화운 태상장로가 이미 알고 있어 인마.”
철렁.
운룡의 심장이 밑으로 뚝 떨어졌다가 겨우 되돌아왔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내가 알고 있지. 바로 나 삼절일학 용무린이 말이야.”
“이놈! 네, 네가 바로…….”
“흑야방을 넘어 비룡문까지 쓸어버리겠다고? 크크큭. 어림도 없어 인마.”
“이, 이놈!”
휘슷.
운룡이 용무린을 향해 검을 돌려 세웠다.
“잘 가라 말코야. 오늘은 재미있었다.”
용무린의 왼손이 가볍게 움직였다. 소검비연이 다시금 운룡의 심장까지 이어지는 흰 선을 그려내었다.
퍼억.
운룡의 심장에 구멍이 뻥 뚫렸다.
혈마단주였던 조유는 본능적으로 튕겨낼 수 있었지만 운룡은 어림도 없었던 거다.
터얼썩.
힘없이 바닥을 나뒹구는 운룡의 뇌리로 문득 이런 생각이 스쳐 지났다.
‘개방이 알면 천하가 다 알게 된다는 뜻인데 어쩌지? 어떻게 해야 화산의 명예를 지킬 수 있…… 지……?’
마지막 순간까지 화산파의 명예만 생각하던 운룡의 숨이 그대로 멈추었다.
“외로워하지는 마. 곧 네놈의 뒤를 말코들과 종남의 떨거지들이 몽땅 뒤따를 거거든. 아! 물론 혈교 놈들도 깨나 많이 따라갈 거야.”
“으, 은인! 커헉.”
“어, 어째서? 크아악.”
용무린이 운룡을 쓰러뜨리는 모습을 지켜보고 화들짝 놀라 고함을 지르던 매화검수 두 명이 혈마단의 마인들 손에 의해 동시에 쓰러졌다.
“대체 네 놈의 정체는 뭐냐?”
조유에 이어 운룡마저 가차 없이 죽여 버리는 용무린의 정체를 부단주 사공표마저 궁금해했다.
씨익.
용무린은 얼음장 같은 미소를 피워 올리며 답했다.
“곧 알게 돼.”
어떻게?
“저승에 가보면 말이야-앗!”
스파앙.
용무린이 순간적으로 공간을 단축했다. 매화검수를 거칠게 몰아붙이던 사공표의 앞으로 짓쳐들었다.
버언쩍.
허공에 섬광으로 이뤄진 달이 떠올랐다. 진천수라도의 일초 수라잔월이었다.
“허억!”
화들짝 놀란 사공표가 다급히 검을 되돌렸다. 혈영강기를 밀어 넣었다. 확 뿜어냈다.
후우웅. 파아아-!
조유가 펼친 것보다는 떨어지지만 감히 아무나 받아낼 수 없는 일초가 수라잔월의 초식을 맞아갔다.
하지만,
파캉! 스각.
풍뢰는 두부라도 스치는 듯 너무나도 가볍게 혈영강기를 갈랐다. 그리고도 모자라 사공표의 검을 잘라낸 후 목까지 베어버렸다. 도면에 어린 빛은 은은했지만 그것이야말로 도강의 정수였기 때문이었다.
“쥬거랴-아!”
방금 쓰러진 것은 혈교의 사공표였는데 반격을 해 오는 것은 발음이 새는 운광이었다.
쏴아아.
날카로운 바람소리와 함께 매화꽃 열 송이가 용무린을 향해 밀려들었다.
파캉. 카카카-앙.
수라광망의 초식을 펼쳐 단숨에 매화검법의 초식을 날려버린 용무린이 운광 앞으로 파고들었다. 야무지게 따귀를 올려붙였다.
쫘아아악.
“커헉!”
따귀 한 방에 다시 멈췄던 쌍코피가 터졌다.
“죽어엇!”
후욱. 촤라락.
용무린에게 맞은 따귀 탓에 흔들리는 운광을 쫓아 혈마단 마인 하나가 들어왔다. 어지럽게 검을 흔들었다. 그 검 끝을 따라 피어난 검기 다발이 운광의 목과 심장을 노렸다.
“얌체 짓은 좀 그렇지 않냐?”
파카카캉. 스각.
대뜸 그 검기 다발을 베어낸 풍뢰가 덤으로 혈마단 마인의 목까지 그었다.
“컥!”
용무린의 시선이 운광에게로 향했다.
“뭐, 여기까지 애들 끌고 와 준 것도 있고 하니 너만큼은 내가 죽이지 않겠다.”
“시, 시퍄! 쥬겨랴 이뇨마-!”
운광이 분하다는 듯 원독 어린 시선을 보냈다.
“애써 봐. 혹시 아냐? 여기서 살아남아 다시 나를 보는 날이 오게 될지?”
휘슷.
용무린이 몸을 솟구쳐 올렸다.
“그러면 수고해-애!”
길게 이어지는 염장질을 끝으로 용무린은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볼 일 다 봤으니 홀가분한 마음으로 자리를 뜬 것이다.
물론 전투는 그 뒤로도 한참 더 이어졌다.
혈교에게는 이곳이 세력을 집결시킨 후 소림을 치기 위한 교두보였기 때문에 절대로 물러설 수 없었고 화산과 종남은 그놈의 자존심과 허무하게 죽어간 사형제들의 복수 때문이었다.
“크악!”
“커허억!”
그놈의 자존심과 복수심 때문에 화산파와 종남의 고수들이 이십여 명이나 더 유명을 달리했다.
“퇴각하라.”
종남의 고수들을 이끌고 온 주동자 풍조산의 일갈이었다.
용무린의 개입으로 인해 싸움의 주체가 모호한데다 피해가 너무나 커진 통에 어쩔 수 없이 내린 명령이었다.
“쫓지 마라!”
“놈들의 또 다른 흉계가 있을지 모른다. 자리를 지켜라.”
“교두보를 지켜내야만 한다. 멈추어라.”
혈마단의 마인들 역시 전투를 멈추었다. 피눈물을 흘리며 도주하는 화산파의 도사들과 종남의 무인들 뒤를 쫓지 않았다.
그 틈을 타 살아 남은 화산파와 종남의 고수들이 썰물처럼 빠져 나갔다. 이대로라면 동귀어진 시키려는 용무린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갈 터!
‘결국 내가 또 나서야 하나?’
인근의 전각 꼭대기에 서 있던 용무린의 갈등은 오래가지 않았다. 서쪽 끝에서부터 혈마단과 비교해 전혀 뒤지지 않는 기운을 뿜어내는 무리가 다가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피식.
‘또 혈교 놈들인가?’
맞았다. 선발대에 이은 혈교의 이차 전력인 혈세단 삼백 명이었다.
잠시 생각에 잠겼던 용무린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싸움은 이미 붙여 놓았으니 이곳에 혈교가 둥지를 틀어도 나쁘지는 않겠군.”
본래 계획이 무엇인지는 아직 알지 못하지만 한 배를 타고 있는 것으로만 알았던 혈교와 화산파 그리고 종남과의 사이에 커다란 고랑을 내어 놓았으니 그만 만족해도 될 듯싶은 것이다.
“쯧쯧쯧. 그러게 왜 가만히 있는 나를 건드려서 화를 자초하는 거야?”
용무린이 혀를 찼다.
오늘 입은 화산과 종남의 인명피해는 솔직히 그들이 자초한 일이었다. 흑야방을 건드리려고 하지만 않았어도, 아니 최소한 비룡문만 들먹이지 않았어도 이렇게까지는 하지 않았을 것이다.
“본래는 혈교와 붙어먹든 말든 상관하지 않으려고 했었는데, 하여간 조심들 해라. 내가 지켜보기 시작했다.”
나직한 경고를 마지막으로 용무린은 신법을 전개했다.
소기의 목적을 달성했으니 그 자리를 완전히 벗어나 화운장로와의 약속 장소로 가는 것이었다.
“크아악.”
“커헉!”
“조, 종남이여 이 복수를…….”
풍조산의 처절한 외침을 끝으로 치열했던 마영방에서의 전투도 끝이 났다.
마영방은 여전히 혈교의 교두보로 남아 있었지만 그 의미가 크게 퇴색되었고 화산파와 종남은 생각지도 못했던 피해를 입었다.
물론 입은 피해로만 따지자면 혈교 쪽도 만만치 않기 때문에 어느 곳이 딱히 더 분노해야 마땅하다고 논할 수 없을 정도이긴 했다.
“대체 뭐가 어떻게 된 일이야? 본교와 한 배를 탄 것으로 알려진 화산과 종남의 떨거지들이 어째서 우리를 공격해 온 거냐고!”
혈세단주 악관후의 악다구니가 허무하게 메아리쳤다.
***
검을 쥐고 선 채 삼매에 들었던 옥진의 눈이 떠졌다.
삼매에 빠져 있는 동안의 금식으로 인해 얼굴은 홀쭉해졌지만 눈빛은 한없이 높고 푸른 가을 하늘을 닮아 맑기만 했다.
“사형. 이제야 깨우치게 된 우제를 용서하시오.”
과거와는 완전히 다른 허허로운 눈빛으로 변한 옥진은 이미 부패하기 시작한 옥풍도장의 주검을 정성스럽게 다시 모았다. 본래대로 맞추었다.
“화산은…… 이제 다시 태어나게 될 것입니다, 사형. 그러니 아무런 걱정 마시고 편히 가십시오.”
옥진의 손이 아직도 눈을 감지 못하고 있는 옥풍의 눈을 가만히 쓸어내렸다. 그 손길에 담긴 화산의 내공 때문인지 옥풍의 눈이 편안히 감겼다.
우뚝 선 옥진이 검을 뽑아 들었다.
사형이 가는 길을 배웅하겠다는 듯 하나의 검법을 펼쳐 보였다.
버언쩍. 번쩍. 쉬리리릭. 스가각.
매화검법 같기도 하고 오행매화검법 같기도 하지만 두 검법 중 어느 검법과도 완전히 다른 신묘한 검법이었다.
화아악.
하지만 이토록 진한 검향이라니!
장미나 국화처럼 사람을 유혹하는 향은 아니었지만, 한 번 맡게 되면 절대로 잊을 수 없는 청명한 매화의 향기가 동굴 전체를 휘감았다.
파각. 파가각. 후두둑. 후두두둑.
옥진이 펼치는 신묘한 검초가 스칠 때마다 만년거암이 힘없이 조각나 떨어져 내렸다. 조금씩 그리고 따뜻하게 옥풍의 주검을 덮었다.
푸스스스.
마침내 돌조각들이 옥풍의 주검을 완전히 덮었다.
“화산을 다시 완전한 화산으로 되돌려 놓은 후 돌아오겠소, 사형.”
잠시 옥풍의 돌무덤을 바라본 후 옥진은 몸을 되돌렸다.
화산 본산인 연화봉으로 향했다.
덩그러니 남게 된 옥풍의 돌무덤 상단에 옥진이 검법을 펼쳐 새겨놓은 글귀가 이렇게 적혀 있었다.
-검향천추 화산제일검 옥풍 지묘.
그 사이 화산파에서는 난리가 났다.
옥허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을 뽑아 하산한 옥룡과 제자들이 깡그리 죽었다는 속가제자의 전서 때문이었다.
“이이, 이런! 내 그렇게 만류했거늘 어찌?!”
옥허가 대노했다.
하산했으면 계획대로 흑야방의 흑도 나부랭이들이나 징치하고 돌아올 일이지 무슨 공명심에 혈교와 전면전을 벌였단 말인가?
‘어떻게 하지? 대체 어떻게…….’
제자들의 죽음으로 인한 분노도 분노였지만 선전포고를 하듯 화끈한 전서를 보내온 혈교와의 관계를 어찌 풀어야 할지 가늠도 되지 않았다.
-소림과 무당을 치기 전에 너희들과 먼저 해보자는 거냐?
혈교와의 일은 모두 다 장문사형인 옥현이 처리를 해왔었는데 며칠 전부터 종적을 감춰 버렸으니 자신으로서는 감당이 안 되었던 것이다.
‘거기에 더해 가감 없이 분노를 쏟아내며 정벌을 주장하는 제자들의 행동은 또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인가?’
지금 이 순간에도 연화각에 모인 화산의 수뇌부들 대다수는 흑야방과의 전면전을 주장했다.
“참을 수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지금 당장 출동해야 합니다.”
“흑도 나부랭이들 손에 화산의 정기가 훼손당했습니다. 대체 언제까지 참아야 한단 말입니까?”
정말 미칠 일이었다.
대다수의 제자들은 아직 운룡을 비롯한 제자들이 상대한 것이 흑야방이 아닌 혈교의 정예라는 사실을 모르고 있기 때문이었다.
‘종남의 장문인도 마찬가지 심정이겠지?’
안 봐도 빤했다.
그 역시 몇몇 심복에게만 혈교와의 연수를 알렸을 터, 종남의 명예를 위해 몰래 하산한 제자들의 죽음에 대한 처리 때문에 골머리를 앓고 있으리라.
바로 그 순간 옥진이 등장했다.
“화산은 움직이지 않는다.”
벌컥 문을 열고 들어 선 옥진의 일갈에도 제자들의 흑야방 정벌 요구는 사그라지지 않았다.
“재고해 주십시오, 사숙.”
“흑도 나부랭이 손에 대 화산파의 귀한 검수들이 백 수십여 명이나 쓰러졌습니다.”
“그 혈채를 받아내지 않고서야 어찌 화산이 천하 군림을 논할 수 있단 말입니까?”
수뇌부들의 피 끓는 외침에도 흔들리지 않은 시선으로 쓸어 보던 옥진이 돌연 내공을 뭉텅 끌어 올렸다.
화아아악.
회의가 이뤄지고 있던 연화각 내부를 옥진의 웅혼한 내력이 순간적으로 장악해 버렸다.
더불어 코끝을 스치는 청아한 매화향!
“어억?”
“이, 이 향기는?”
옥허를 시작으로 서현, 노군, 옥녀각의 주인들이 눈을 부릅떴다. 이미 기억 속에서 사라진 지 오래된 검향의 내공 앞에 심령이 제압당해 버린 것이다.
“지금부터 내 말을 잘 듣도록.”
누구도 감히 입을 열지 못하는 사이 옥진은 그동안 화산이 무슨 잘못을 했고 어째서 장문인인 옥현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지 밝혔다.
더불어 흑야방으로만 알고 있는 제자들의 죽음 배후에 숨어 있는 진정한 적이 누구인지까지도 낱낱이 밝히기 시작했다.
“……!”
“……!”
이야기를 듣게 된 모두의 입이 쩍 벌어졌다.
아연실색한 채 홀린 듯 옥진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
성남현에서 하남성으로 들어서는 길목의 작은 야산.
관도에서 조금만 벗어나 초목이 우거진 곳으로 들면 관제묘가 하나 나오는데 용무린은 그 관제묘에서 모닥불을 켜두고 화운을 기다리고 있었다.
“왜 이렇게 늦으시는 거야?”
나지막이 툴툴대며 용무린은 나무에 꿰어 놓은 토끼 고기만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기름이 뚝뚝 떨어지는 고기를 보자니 절로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일각만 더 기다려 준다.”
그래도 안 오면 혼자 먹어 버릴 작정이었다.
일각이여삼추 같은 시간이 흘렀다.
꼬르륵.
용무린의 뱃속에서 천둥치는 소리가 새어나왔다.
“에라, 모르겠다.”
더는 참을 수 없게 된 용무린이 군침 돌게 익은 고기를 향해 손을 뻗을 때였다.
쫑긋.
용무린의 귀가 먼저 반응을 보였다.
바람을 가르는 파공음. 누군가가 놀라운 수준의 신법을 펼쳐 자신이 있는 곳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피식.
“하여간 먹을 복은 있단 말이……?!”
싱겁게 웃으며 일어선 용무린의 표정이 급변했다.
반원을 그리던 눈이 거칠게 위를 향해 확 치솟았다.
저만큼 앞에 혈인이 다된 몰골의 화운이 검게 죽어가는 얼굴로 다가오고 있었던 것이다.
신마귀환 5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