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마귀환 6권
서경 신무협 소설
1.화산풍운
용무린의 얼굴을 보자 긴장이 풀린 것일까?
비틀. 쿠당탕.
신법을 전개하던 다리가 꼬이며 화운의 몸이 흔들렸다. 거칠게 바닥을 굴렀다.
“이런!”
용무린의 눈에 다급함이 어렸다.
바닥을 구르는 화운의 뒤편에서 살기로 번들거리는 누군가의 눈동자가 훌쩍 날아올랐던 것이다.
화아악. 휘류류류-류.
밤하늘 높이 피어오르는 매화꽃송이들.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숫자의 매화꽃송이가 화운의 목숨을 노리고 쏟아져 내렸다.
“꿈 깨 이 말코야-아!”
용무린은 즉시 신법을 전개했다. 불사신기를 휘몰아 땅을 박찼다.
천마탄신의 신법!
스파아앙-!
압축된 공기가 터져 나오며 주변 공기가 몸살을 앓았다.
스릉. 파아아-!
단숨에 공간을 단축한 용무린이 풍뢰를 뽑아들었다.
‘죽인다!’
딱히 신마 진무량의 의식을 끌어오지도 않았지만 몸은 너무나도 자연스레 죽음에 걸맞은 초식을 끌어왔다. 진천수라도의 절초 중 하나인 수라비격일뢰였다.
후우웅. 버언쩍.
뇌전을 닮은 강기 일초가 상대의 목을 노렸다.
화운의 목에 미련을 계속 둔다면 공격한 놈의 목도 날아가 버릴 터!
“우웃!”
휘우웅.
짧은 기함성과 함께 매화꽃들이 방향을 바꾸었다. 화운의 전신요혈을 노리던 것에서 급격히 휘어지더니 수라비격일뢰를 후려쳤다.
파카-앙. 카카카카-앙!
요란한 폭음과 불똥이 사방으로 튀었다. 두 가지의 초식이 서로 상쇄되어 사라졌다.
“괜찮으세요?”
그 사이 용무린은 화운을 등지고 내려섰다.
얼음장 같은 시선으로 전면에 모습을 드러낸 노 도장을 쓸어 보았다.
거친 숨을 몰아쉬며 화운이 겨우 입술을 떼었다.
“허억. 허억. 조, 조심하거라.”
“조심은 무슨?!”
한차례 픽 웃어 보인 용무린이 거칠게 말을 이었다.
“걱정 말고 푹 쉬세요. 이 빚은 제가 대신 이자까지 쳐서 갚아줄게요.”
“이, 이 녀석아. 그가 바로 화, 화산의…….”
“발칙한 애송이. 네놈이 바로 용무린이란 애송이인 모양이로…….”
옥현이 화운의 말을 자르고 들어왔다. 용무린 역시 옥현의 말을 싹둑 잘라 버렸다.
“그래서 뭐?”
“……구나.”
“네가 화산 꼰대들의 수장이래도 상관없어.”
“이런 시건방진 놈!”
시정잡배들이나 쏟아낼 법한 말투에 옥현의 눈꼬리가 파르르 떨렸다. 물론 용무린은 하얀 이를 드러내며 한껏 비웃어 주었다.
“이 판국에 무슨 말이 필요해? 덤벼 늙은이. 모가지를 예쁘게 잘라주지.”
“이노-옴. 네가 감히 본 장문인과 화산을 싸잡아 능멸하다니! 내 기필코 네놈과 네놈의 가문에 이 죄를 묻…….”
주절주절 떠드는 옥현을 보며 용무린은 생각했다.
‘하여간 정파 놈들은 할 수 없단 말이야.’
무슨 말이 이렇게 많단 말인가?
‘거들먹거리며 자신이 누군지 밝히면 뭐가 달라져? 이 상황에 내가 고개라도 숙이며 알랑방귀라도 뀌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거야?’
타고난 본성인지 신마 진무량의 의식에 아직 더 가깝기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용무린은 상대가 같잖기만 했다.
‘미안. 내가 좀 심했지? 잘 좀 치료해줘.’ 라고 말하며 돌아갈 것도 아니면서 이 판국에 훈계는 개뿔!
‘백날 떠들어 봐라. 내가 그냥 고이 보내주나?’
화운장로 대신 원금과 이자를 받아낼 때까지는 절대로 그냥 보내줄 수가 없는 거다.
“이봐, 말코!”
“……겠다.”
“됐고, 이거나 받아봐-앗!”
후욱.
순간적으로 거리를 좁히며 용무린은 공격을 개시했다.
버언쩍. 피이이-잉.
풍뢰에서는 진천수라도의 초식이, 소검비연에서는 비연오식이 동시에 뿜어졌다.
“하아아-앗!”
옥현도 지체 없이 검을 흔들었다.
오행매화검법의 초식이 펼쳐지며 매화꽃을 닮은 강기 조각이 쏟아졌다.
파캉. 타타타-앙.
격렬한 폭음과 함께 밤하늘에 요란한 불꽃이 튀었다.
‘제법인데?’
용무린의 눈가에 작은 탄성의 빛이 흘렀다.
풍뢰에 이어 소검비연이 천잠사의 변화까지 일으켰음에도 불구하고 상대가 남김없이 받아쳐 버렸기 때문이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방어를 해내는 것으로도 모자라 그 짧은 순간에 반격까지 해왔다.
“화산의 검이 어떤 것인지 똑똑히 보여주마-아!”
화아악. 쐐애애액.
어둠을 밝히는 자하강기의 빛과 더불어 커다란 매화꽃 한 송이가 떠올랐다. 용무린을 향해 쏟아졌다.
“흥!”
코웃음과 함께 풍뢰가 용무린의 손을 떠났다.
피이유-웃! 콰아아우-웅.
전면을 틀어막더니 돌개바람처럼 휘돌기 시작했다. 그 끝을 따라 피어오른 용권풍이 매화꽃 덩어리를 그대로 집어 삼켰다.
“크아압!”
“하아아-아!”
두 사람이 동시에 고함을 질렀다. 절대로 질 수 없다는 듯 단전을 쥐어짰다. 공력을 배가시켰다.
카라라-락. 파팡. 휘스스슷.
한 치도 뒤로 밀리지 않고 있던 두 초식이 상쇄되어 사라져 버렸다. 수라전륜아의 초식이 매화꽃을 갈아 없애버린 것이다. 물론 더 뻗어 나가지도 못했다.
그 사이 빛도 소리도 없는 무엇인가가 옥현의 심장을 향해 날아들었다. 비연오식의 절초 비연무흔단이었다.
“놈! 주둥이 놀리는 솜씨만큼이나 실력이 제법…… 응?”
용무린의 무력에 감탄한 듯 입을 열던 옥현이 눈을 부릅떴다. 찌르듯 아려오는 심장,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대로 있으면 죽으리란 본능이 육신을 통제했다.
휘슷.
몸을 던지듯 옆을 향해 신법을 펼쳤다.
바로 그 순간,
찌익.
심장 어림의 옷이 길게 옆으로 찢어졌다. 뒤이어 왼팔이 팔꿈치 어림부터 뚝 떨어져 내렸다.
“어헉!”
옥현이 기겁을 했다.
회심의 일격이 갈아 없어지는 것으로도 모자라 팔 하나를 잃을 줄은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거다.
“호오! 그걸 피했어?”
이번에는 용무린의 입에서 순수한 감탄성이 흘러나왔다.
부일기를 포함한 상관세가의 세 장로를 한꺼번에 쓸어버렸던 수라전륜아와 비연무흔단의 연계초식이 겨우 팔 하나로 끝날 줄은 몰랐던 것이다.
“화산이란 이름값을 하긴 하네?”
“……!”
잠시 입을 쩍 벌리고 있던 옥현의 눈에 독기가 다시 어렸다. 옥현은 대꾸도 없이 혈도를 막아 분수처럼 뿜어지는 피를 멈추었다. 한 손으로 검을 들어 용무린에게로 겨누었다. 스산하게 으르렁댔다.
“반드시 죽인다.”
“무, 무린아. 그가, 그가 바로 화산의 장문인이다. 조심해야 한다.”
화운이 한층 더 파리해진 얼굴로 외쳤다. 목소리가 힘없이 가느다래진 것으로 보아 부상이 점점 더 심각해지는 모양이었다.
‘빨리 끝내야겠구나.’
용무린이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답했다.
“대충 그럴 거라 생각했어요.”
수라전륜아와 비연무흔단의 연계초식을 피할 수 있는 사람이 어디 흔할까? 초면이었지만 눈앞의 상대가 화산에서도 수뇌부에 속할 것이란 생각은 이미 했다.
‘그래도 설마하니 장문인일 줄은 몰랐네.’
그렇다고 변하는 것은 없다.
씨익.
“덤벼. 마지막 발악을 받아주도록 하지.”
용무린 역시 자세를 낮추었다.
이번에야말로 승부를 볼 생각이었다.
옆으로 비켜 내린 풍뢰에 옅은 빛이 맺혔다. 최대한의 도강이 풍뢰에 걸리기 시작한 거다.
“……!”
어지간만 해도 방심을 하건만 물끄러미 그 모습을 지켜보던 옥현은 도사리듯 더욱 검을 틀어쥔 손에 힘을 더했다. 십중팔구 풍뢰에 걸린 힘을 감지한 듯했다.
‘한 번 피했으니 두 번도 피하겠지?’
저렇게까지 조심을 하니 두 번째는 더욱 잘 피해낼 거다. 공연한 초식으로 내공을 낭비할 필요가 없다.
‘좋아!’
상대는 이름 높은 검의 명문 화산파의 장문인, 초식의 우위를 누릴 수 없다면 그에 맞는 방법을 찾으면 된다.
‘힘으로 눌러준다.’
과거에는 힘으로 눌렸지만 지금은 다르다.
자신의 내공 역시 상대와 같은 수준인 초절정의 경지!
어검술이나 신검합일의 수를 쉬이 쓸 수 없는 상황인 지금, 대결 시간을 단축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었다.
화아악!
화산의 장문인이든 뭐든 그대로 갈라 주리란 패기가 폭발했다. 풍뢰의 도신에 맺힌 은은한 빛이 조금씩 더 내부로 침잠했다.
옥현 역시 최선을 다했다.
웅웅웅. 버번쩍!
전신에 피어 오른 자하의 빛이 검으로 자리를 옮겼다. 집중되어 감에 따라 가슴까지 서늘해지는 공명음과 함께 불쑥 검강이 되어 솟구쳤다.
무려 일 장을 뛰어 넘는 크기의 검강!
무식하리만큼 강대한 그 힘이 용무린을 향해 겨누어졌다.
‘그래. 그 정도는 되어 주어야지!’
그래야 어디 가서 화산파의 장문인이라 할 수 있지 않겠는가?
‘그래도 박살을 내준다!’
“하아아아-아!”
휘슷.
용무린의 신형이 전면으로 쏘아졌다. 풍뢰를 사선으로 그어 올렸다.
“끼야아-하!”
마주 기합을 발하며 옥현 또한 짓쳐들었다. 자하의 빛으로 이뤄낸 검강으로 후려쳤다. 매화검법 따위가 아닌 단순하기 짝이 없는 힘의 맞대응이었다.
쿠와아아앙.
둔중한 폭음과 함께 두 사람의 신형이 움찔 뒤로 밀렸다. 하지만 언제 그랬냐는 듯 벼락처럼 다시 짓쳐들었다. 쉼 없이 서로를 향해 검과 도를 휘둘렀다.
콰아앙. 터어엉. 카카카카-앙!
고막이 터져 버릴 것만 같은 폭음과 함께 눈에 보이지 않는 충격파가 주변을 휩쓸었다.
“크읍! 쿨럭. 쿠울럭.”
저만큼 떨어져 있던 화운이 검게 죽은피를 게워내며 뒤로 쭉 밀렸다.
콰앙. 쾅쾅쾅!
강력한 충돌이 계속해서 이어졌다.
피슷. 후두둑.
도강과 검강이 맞부딪히는 여파에 용무린과 옥현 두 사람의 피부가 저절로 터졌다. 피를 뿌렸다.
“이야아-하!”
“하아앗!”
한 치의 물러섬도 없이 마주 도와 검을 뿌리는 두 사람.
놀랍게도 용무린이 조금씩 뒤로 밀렸고 옥현이 한 발씩 전진했다. 언뜻 보면 옥현이 용무린을 압도하고 있는 것으로 보일 정도였다.
금방이라도 옥현의 검강에 두 조각이 날 것처럼 위태롭게 보이던 용무린의 모습과는 달리 대결의 우열은 정반대의 결과를 보였다.
일 장도 넘게 뿜어져 나왔던 옥현의 검강은 갈수록 줄어드는 반면 빛마저 사라진 풍뢰는 멀쩡했던 것이다.
서로간의 거리가 검강이 줄어든 만큼 좁혀졌다.
쿠와앙. 콰앙. 카카카카-앙!
“크읍!”
“컥. 쿨러억!”
용무린과 옥현의 입술을 비집고 굵은 핏줄기가 새어 나오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은 여전히 힘의 격돌을 이어나갔다.
‘과연 화산의 검과 내공은 맵구나.’
특별한 초식을 서로 펼쳐내는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서로를 향해 그어내는 도와 찔러내는 검 끝에는 검법이나 초식을 넘어선 깨달음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정형화된 초식은 아니었지만 초식을 뛰어넘는 도법과 검법의 정수가 서로의 목숨을 노렸다는 뜻이다.
‘과연 화산의 장문인다워.’
옥현이 마공을 펼치는 중이었거나 용무린이 옥진처럼 검향을 뿜어냈다면 결과가 훨씬 더 극명하고 빠르게 나타났을 것이다.
하지만 마음이 뒤틀어졌을 뿐 무당과 더불어 도가검문의 양대 산맥 중 하나인 화산의 장문인이 평생을 닦아 온 힘으로 검을 뿌리니 정말 만만치 않았다.
“그래도 짓밟아주마-아!”
쾅쾅콰-앙!
몇 차례의 폭음이 더 흐른 후 결과가 드러났다.
카앙!
짧아질 대로 짧아졌던 검강을 마침내 완전히 뚫어낸 풍뢰가 옥현의 검을 두 조각 내버린 것이다.
튀이잉. 스각.
잘려버린 검 조각이 하늘 높이 날아오른 사이 풍뢰가 옥현의 몸을 스쳐 지났다.
움찔!
옥현이 감전이라도 된 듯 몸을 떨었다. 더듬거리며 입을 열었다.
“어, 어떻게……? 그 나이에 어떻게 평생을 쌓아 온 내 내공을 뛰어 넘을 수 있어? 어떻게?”
자신이 졌다는 사실을 옥현은 도무지 믿을 수가 없었다.
만년삼왕 따위의 기연은 서책에나 나오는 법, 엄마 뱃속에서부터 내공심법을 이어왔다 하더라도 자신을 뛰어넘을 수는 없다 생각했었던 것이다.
쿨럭. 퉤엣.
“어떻게는 뭐가 어떻게야?”
한 차례 덩어리 피를 뱉어낸 용무린이 돌아올 수 없는 길을 떠나는 옥현의 궁금증을 조금 풀어주었다.
“나는 아꼈고 당신은 낭비했을 뿐이야.”
“……!”
옥현이 눈을 부릅떴다. 무슨 소린지 선뜻 알아들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게 쉽게 깨달아지는 게 아니야 인간아.’
당연한 일이다.
신마 진무량이 평생 전장을 거쳐 오며 실전을 통해 채득한 깨달음이 아니던가?
‘아니, 절대검신 독고황의 것이던가?’
하여간 불쑥 한마디 해줬다고 알아낼 성질의 것이 아닌 거다.
스르륵. 터얼썩.
옥현의 상반신이 사선으로 미끄러져 내렸다.
검강이 깨어지며 잘려버린 검과 함께 두 조각으로 나뉜 것이다.
“잘 가. 제법이었어.”
비웃음과 비슷한 칭찬을 끝으로 용무린은 옥현에게서 관심을 거두었다.
“장로님!”
이미 정신을 잃어버린 화운을 향해 날 듯이 다가왔다.
옥현과의 힘겨룸으로 인해 입은 내상 따윈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불사신기를 끌어 올렸다. 화운의 전신에 추궁과혈을 해나갔다.
‘불사신기를 믿는다.’
비록 구결을 알아서 운공을 할 수는 없겠지만 초절정에 이른 불사신기의 힘이라면, 죽음까지 거슬러버리는 불사신기의 힘이라면 화운의 목숨 또한 구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타라라락.
전신을 두들겨 나가는 용무린의 손가락 끝에 걸린 막대한 양의 불사신기가 실처럼 가느다래진 형태가 되었다. 그대로 화운의 혈도를 파고들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용무린의 얼굴까지 핼쑥해질 무렵에야 비로소 화운의 눈이 번쩍 떠졌다.
“으웁! 쿨럭. 웨애액!”
검게 죽은피를 덩어리째 게워내며 정신을 차렸다.
***
드러난 진실 앞에 연화각은 침묵에 휩싸였다.
우연히 알게 된 사실을 이용하는 정도가 아니라 장문인인 옥현과 혈교가 처음부터 손을 잡고 흉계를 꾸몄다는 진실에 누구도 입을 열지 못했다.
‘맙소사. 도가 명문 화산이 혈교와 처음부터 한 몸이 되어 일을 꾸몄다니?’
‘그동안 장문인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던 이유가 개방의 화운 태상장로의 뒤를 쫓아 사라졌기 때문이라고?’
‘옥풍 장로님이 그렇게 가시다니…….’
진실 확인 작업은 비교적 빠르게 이뤄졌다.
무림맹의 부맹주이자 화산파의 장로인 옥풍이 조양봉의 암굴에서 비통하게 생을 마쳤다는 말에 제자들이 달려 올라갔고 옥풍의 주검을 확인했던 것이다.
화산파의 검수라면 모를 수가 없는 매화검법 특유의 상흔에 옥풍을 죽인 흉수가 장문인인 옥현이라는 것을 부인할 수 없었다.
옥진의 목소리가 근엄하게 이어졌다.
“무당과 더불어 도가의 양대 검문인 우리 화산이 헛된 명예와 군림이라는 욕망에 사로잡혀 있는 동안 우리가 잃어버린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아야 할 때다.”
후우-웅. 화아악.
옥진이 뿜어내는 묵직한 내공과 함께 매화향이 연화각을 다시 채웠다.
화산파의 도사라면 누구라도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는 청아한 매화향이 잊고 지낸 양심을 찔렀다. 부끄러움을 일깨웠다.
“……!”
“……!”
하나같이 얼굴을 붉혔다.
화산군림이라는 명예와 욕망에 애써 감추려 했던 지난날의 실수를 되짚어보도록 만들었다.
‘함께 삿된 무리에 맞서 싸웠던 소림과 무당을 기만하려 했다니!’
‘부끄럽다. 어쩌자고 우리가 그리 졸렬한 계획에 동조하고 눈을 감았더란 말이냐?’
물론 옥풍이 그동안 타락시켜 놓은 탓도 컸다.
무림맹의 부맹주라는 지위에 올랐지만 맹주의 자리를 빼앗긴 분노를 자극해 화산을 변질시키려 했다. 혈고를 통한 마교의 의지에 옥현은 움직일 수밖에 없었고 더더욱 화산의 일탈을 부채질했다.
“불가에 이런 말이 있음을 모두 알 것이다.”
모두가 고개를 들어 옥진을 바라보았다.
부드러운 미소와 함께 옥진이 자신의 깨달음을 건넸다.
“백척간두에서 한 발을 내밀면 피안 아니더냐?”
“……?”
“……?”
도사들이 알 듯 말 듯한 표정을 지었다.
너무나도 유명한 말이니 그 말의 뜻이야 알지만 아직은 가슴 깊이 와 닿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해한다는 듯 가만히 미소 지어 보인 옥진의 목소리가 모두의 가슴으로 스며들었다.
“내가 그와 같았다. 옥풍 사형께서 매화청심장을 통해 검향을 구현한 기적을 눈앞에서 목격한 순간 나는 내 잘못을 인정했다. 모든 것을 내려놓았다.”
“아아-!”
“원시천존이시여…….”
연화각에 모인 화산의 수뇌부들이 거의 동시에 탄성을 쏟아냈다.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헛된 명예욕과 화산의 군림과 같은 미망을 완전히 씻어냈을 때 나는 비로소 화산의 검이 어떤 것인지 홀연히 알 수 있게 되었다.”
지그시 눈을 감는 옥진!
깨달음을 음미하자 연화각 내부를 채운 매화향이 더더욱 짙어졌다.
“새롭게 태어나라 화산이여! 헛된 명예와 욕망에 더는 혼을 팔지 말 지어다!”
투우웅!
옥진의 말은 작은 파문을 일으켰다.
하지만 그 파문을 받아들인 가슴속에서는 격랑이 일었다. 그동안 화산의 정신을 잠식해 든 헛된 명예와 군림에의 욕망을 씻어낼 만큼 큰 격랑이었다.
“……!”
“……!”
모두가 눈을 감았다.
옥진이 일으킨 깨달음의 격랑으로 알게 모르게 심령에 잠식해 들었던 삿됨을 씻어내기 시작했다.
‘다행이로구나. 원시천존께서 화산을 아직 버리지 않았음이야…….’
화산은 변할 것이다.
윗물이 변하면 아랫물도 변할 수밖에 없으니 어쩌면 지금 이 순간이 바로 화산 전체가 과거 찬란했던 시절로 다시 돌아가고 있는 것이라 해야 하리라.
옥진은 소리 없이 일어섰다.
조용히 문을 닫고 밖으로 향했다. 전서구 관리하는 곳을 찾았고 몇 장의 전서를 써서 날렸다.
“허허허!”
힘차게 날아오르는 비응을 바라보는 옥진의 얼굴은 더없이 밝기만 했다.
***
혈마 나령의 눈에서 붉은 광채가 넘실댔다.
“뭐라? 화산의 냄새나는 말코들이 배신을 했다?”
“그러합니다, 혈마시여.”
혈뇌가 땀을 뻘뻘 흘리며 고개를 조아렸다. 다급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하지만 옥현이 배신한 것은 아닌 듯합니다. 화산에 급변사태가 발생한 탓입니다. 지금 화산을 지배하고 있는 사람은 옥진, 그가 옥현을 밀어냈으며 일을 이렇게 만든 원흉인 듯합니다.”
이때다 싶었는지 평소 혈뇌를 고깝게 보던 모두가 한마디씩 했다.
“말코들 따위와 손을 잡자는 계획, 처음부터 마음에 들지 않았어.”
“혈교가 대체 언제부터 정파 그것도 말코들 따위와 함께 손을 잡고 일을 했단 말이야?”
“그러게 처음부터 본교의 힘으로 차근차근 정파 놈들을 쳐 나가야만 했어. 놈들의 신경이 마교에 곤두서 있는 때를 노렸다면 충분했을걸?”
혈신을 받드는 대사제와 내 외원의 총관들이었다.
평소 혈마의 총애를 받는 혈뇌가 눈엣가시 같던 그들은 살기 띤 눈으로 혈뇌를 노려보았다.
“크흠!”
동조된 듯 혈마 나령마저 붉은 눈으로 혈뇌를 노려봤다.
‘잘못하면 죽는다.’
심장이 철렁 내려앉은 혈뇌가 필사적으로 목소리를 높였다. 대처법을 내놓았다.
“오히려 잘 되었습니다.”
“뭐야?”
당장에라도 쳐 죽이겠다는 듯 혈마가 태사의에서 슬쩍 몸을 일으켰다.
“화산이 배신했다는 말은 곧 소림과 무당 역시 본교의 공격 계획을 알고 있다는 뜻이 됩니다. 당연히 정파 놈들도 소림과 무당에 힘을 집중할 것입니다.”
“계속해봐.”
그럴 듯하다는 듯 혈마가 다시 태사의에 몸을 묻었다.
“마영방의 전력을 일단 하남성으로 진입시킵니다. 당연히 정파 놈들은 본교가 소림을 거쳐 무당까지 내려 올 것으로 판단할 것입니다.”
“그렇겠지.”
“그 사이 본교의 나머지 무력은 화산으로 방향을 트는 것입니다.”
“화산으로?”
“예, 그렇습니다. 놈들 역시 마영방에서 출발한 혈세단과 혈마단의 잔존세력의 뒤를 쫓아 제자들을 파견할 터, 화산은 빈집이나 다름이 없을 것입니다.”
“푸흐흐. 거 괜찮군.”
나쁘지 않다는 듯 혈마 나령이 웃음을 터뜨렸다.
‘사, 살았다.’
내심 길게 한숨을 내쉰 혈뇌의 이마에서 식은땀 한 방울이 떨어져 내렸다.
“화산을 시작으로 종남을 치면 됩니다. 종남 역시 화산과 한 배를 탄 상태이니 십중팔구 쭉정이들만 남아 있을 터, 큰 힘 들이지 않고 불태울 수 있을 것입니다.”
그때였다.
잠자코 고개를 끄덕이던 대사제가 불쑥 입을 열었다.
“정녕 네 판단이 옳다면, 시간 낭비할 필요 없이 아예 처음부터 본교의 힘을 둘로 나누어 화산과 종남을 치면 되지 않을까?”
“빈집에 가깝다고 하니 실패할 리가 없습니다.”
“혈뇌의 말이 맞다는 전제 하에 저 역시 그 편이 더 좋다고 생각합니다, 혈마시여.”
더는 혈뇌만 총애를 받는 상황이 싫은 것이다.
대사제는 성공하면 자신의 공적이 될 계책을 내밀었고, 실패했을 때까지 대비해 혈뇌의 판단이 옳다면 이라는 조건을 달았다.
내 외원의 총관들 역시 그 계획에 찬성을 하고 나섰다. 물론 그들 역시 혈뇌의 말이 맞아야 한다는 것을 바닥에 깔아 두었다.
‘나쁜 새끼들.’
혈뇌가 내심 이를 갈았다. 하지만 별 수 없었다. 지금 당장 죽지 않으려면 어떻게 하든 시간을 벌고 만회를 해야만 했기 때문이었다.
“옳으신 말씀입니다. 대사제님의 말씀대로 하는 것이 더 좋을 듯합니다.”
혈마를 향해 고개를 조아린 혈뇌는 슬그머니 대사제라는 단어에 힘을 주었다. 그 수작을 모를 리 없는 대사제의 입꼬리가 슬쩍 말려 올라갔지만 더는 나서지 않았다. 나름대로의 생각이 또 있는 모양이었다.
‘목표가 바뀌긴 했지만 여전히 우리는 정파 놈들을 향해 공격을 개시하는 것이니 마교 놈들 또한 무당파를 알아서 처리하겠지?’
정파 놈들은 그들의 공격을 혈교 혼자만의 힘으로 알고 두려워할 것이다. 재림과 동시에 단단히 뿌리를 내리려는 혈교나 웅크리고 있던 마교 모두에게 좋은 일이다.
“좋아!”
혈마의 결단이 내려졌다.
“이참에 말코들과의 연계를 끊어 낸다.”
“현명하신 판단이십니다, 혈마시여.”
“당연한 일입니다, 혈마시여.”
대사제와 내 외원의 총관들이 고개를 조아렸다.
혈마의 추상같은 명령이 뒤를 이었다.
“화산의 말코들과 종남의 떨거지들을 친다. 그것으로 혈교의 재림을 세상에 화려하게 알리는 거다.”
“혈교 천세 천천세!”
“혈교 천세 천천세!”
대사제를 비롯한 모두가 고개를 조아리며 외쳤다.
***
관도를 버린 용무린과 화운은 삼문협의 수로를 가르는 상선에 몸을 실었다.
화운은 물론이고 용무린 역시 내상을 완전히 다스리지 못한 상황이라 제대로 된 운공과 휴식이 절실했기 때문이었다.
거칠고 빠른 삼문협의 물줄기 덕에 상선은 불과 사흘 만에 목표로 했던 제원현에 이르렀다.
“휴우. 다 왔구나.”
섬서성에서 호남성으로 들어오는 길목에 자리한 제원현은 개방의 연락소가 있는 곳으로, 소림이 자리한 숭산은 이틀만 더 가면 된다.
“개방의 연락망이 제대로 가동됐겠지요?”
“당연하지!”
말은 자신 있게 하면서도 정작 불안했는지 화운은 목을 길게 뺐다. 선착장에 가득 서 있는 사람들 틈에서 개방의 인물을 찾았다.
‘늦지는 않았겠지?’
배에 오르기 전 조방의 연락망을 이용해 화산에서 겪었던 사건의 전말을 개방에 이미 알렸다.
하지만 상대는 혈교.
개방이 아무리 바삐 움직인다 해도 채 연락을 받기 전 공격을 받을 수도 있는 일이다.
‘아니면 턱 밑까지 몰려와 공격을 코앞에 두고 있을 수도 있겠지.’
어느 쪽이 되었든 큰일이었다.
불안함에 심장이 절로 두 근 반 세 근 반이 되었다.
“아! 있다!”
용무린이 먼저 누군가를 발견했다.
거지 중에서도 상거지 하나가 넉살도 좋게 구걸을 하고 있는 모습이었다.
다행이라는 듯 슬쩍 웃어 보인 화운은 배가 선착장에 닿기가 무섭게 거지를 향해 달렸다.
“헛! 자, 장로님을 뵙습니…….”
“가자!”
화운은 화들짝 놀라 허리를 숙이는 거지의 뒷덜미를 잡아챘다. 인적이 드문 곳으로 끌었다.
“자, 장로님. 이것 좀…….”
“시끄러.”
“넵.”
체통이고 뭐고 다 필요 없다는 듯 제자를 질질 끌고 간 화운은 인적이 드문 숲속에 도착하고 나서야 틀어쥐고 있던 손을 놓았다.
“어떻게 돌아가고 있냐?”
“와아, 저분께서 그 유명한 무림왕 황룡패주 용무린 대협이신가요? 반갑습니다, 대협. 저는…….”
“급해 죽겠는데 이 녀석이 정말!”
철퍽!
화운이 거지의 뒤통수를 야무지게 후려갈겼다.
“악!”
“인사는 나중에 하고 빨리 대답부터 못하겠냐?”
엄살 따위 받아 줄 시간이 없다는 듯 화운이 거지의 귀밑머리를 잡아 올렸다.
“아아! 태, 태상장로님. 이, 이것 좀…….”
“이 녀석이 그래도!”
확!
다시 손에 힘을 더하는 화운.
찔끔 눈물을 흘리며 털어 놓는 거지의 말은 놀라웠다.
전격적으로 보내진 화산파의 전서!
그 안에는 혈교의 재림을 알리는 소식과 함께 그들이 소림과 무당을 치려고 한다는 사실이 적혀 있었고 더불어 혈교의 주력이 성남현의 마영방에 몰려들고 있으니 함께 처단하자고 쓰여 있었다.
그 전서에 종남파와 청성이 벌써 호응했다고 한다.
특히 청성 같은 경우는 어떻게 알았는지 사천성과 섬서성의 경계를 이미 넘었고 며칠 안에 약속장소에 다다를 것이라고 했다.
“어떻게 그리 갑자기 변했지?”
화운이 고개를 갸웃했다.
옥현의 진면목을 확인했을 때의 암담함을 생각하면 화산의 급변한 모습은 확실히 의외였기 때문이었다.
“옥진 장로께서 화산의 대소사를 관장하기 시작하셨다고 합니다.”
“허, 참. 지위야 그럴 법한 지위지만 옥현 그 인간을 추종하는 무리들도 만만치 않았을 터인데…….”
화운의 궁금증을 풀어주기라도 하겠다는 듯 사내가 계속해서 입을 열었다.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는 확실히 모르겠지만, 화산은 옥진을 중심으로 전례 없이 똘똘 뭉치고 있는 모양새입니다. 장문인인 옥현의 모습이 보이지 않아도 결단과 움직임에 거침이 없습니다.”
그 사실이 시사하는 바는 한 가지 밖에 없다.
“설마, 옥진 그 사람이 매화검령의 주인이 되었나?”
매화검령은 화산파의 장문인을 상징하는 신물.
그러지 않고서야 화산파가 옥진을 중심으로 똘똘 뭉칠 수가 없는 거다.
화운이 고개를 갸우뚱하는 사이 용무린이 나섰다.
“혈교의 움직임은? 그리고 화산의 전서를 받은 각 문파와 무림맹의 판단과 계획은?”
그것이 사실 가장 중요하다.
혈교가 어떻게 움직이는가에 따라 자신을 비롯한 다른 문파들의 대응이 결정이 될 것이다.
“혈교는…….”
피식.
자신이 생각해도 어이가 없다는 듯 풀썩 웃어 보인 사내의 목소리가 계속해서 이어졌다.
“당당하게 마영방을 나섰습니다. 겁을 상실한 것인지 아니면 따로 믿는 구석이 있는 것인지는 몰라도 소림을 향해 방향을 잡았습니다.”
“소림을 향해서?”
“예. 비록 하남성에 진입한 후 종적을 놓치긴 했습니다만 머지않아 모습을 드러낼 것 같습니다. 하남성에 진입했으니 결국 목표는 숭산이 될 테니까요.”
“삼백수십 명 정도로 소림을 친다?”
용무린이 혼잣말처럼 읊조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무리였기 때문이었다.
‘후발대가 틀림없이 따라붙을 거야.’
혈교에 바보들만 있는 것이 아니라면 그것은 필연적이라고 봐도 좋을 것이다.
‘그런데 왜 하남성에 진입을 하자마자 종적을 감췄지?’
개방의 눈을 피할 만큼 고수들이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이미 자신들의 재림이 드러났고 화산의 변심으로 목표까지 밝혀진 이상 종적을 감추는 것은 별 의미 없는 짓이다.
‘소림을 치는 것처럼 움직임만 하남성으로 보인 후 남하해서 무당파를 노리려는 걸까?’
후발대가 따라 붙는다는 것을 감안하면 그 또한 노려봄직한 수작이었다. 어차피 소림과 무당 두 곳을 치겠노라 공언을 해 놓은 상태였으니까.
‘뭔가 께름칙해!’
용무린이 생각에 잠긴 사이 사내는 신이 나서 목소리를 높였다.
“소림의 산문이 열렸습니다, 대협. 나한전의 무승과 삼십육방 출신들로 이뤄진 무승들 그리고 십계십승 중 살계승과 금강전의 고수들까지 나섰다고 합니다.”
숫자가 몇인지는 아직 모르겠지만 소림은 그야말로 고수들만 뽑아 보냈다. 숭산에 혈교 무리가 발을 디디기 전에 제거하겠다는 뜻이다.
잠자코 있던 화운이 질문을 던졌다.
“무당은?”
“지금 당장은 움직이지 않을 듯합니다.”
사내는 고개를 갸웃하며 말을 이었다.
“아직까지도 결론이 나지 않은 것으로 파악됩니다. 나아가 맞서 싸워야 한다는 측과 아직 실존의 증거도 빈약한 혈교 따위에 신경 쓸 필요 없다는 온건파들로 나뉘어 아직도 격론을 벌이고 있다고 합니다.”
“웃기는 사람들이네.”
용무린의 입가에 비웃음이 살짝 걸렸다.
“실존의 증거라니? 아니 그러면 지금 개방의 태상장로씩이나 되는 분이 거짓이라도 입에 담았다는 말이야?”
발등에 불이 떨어졌는데도 갑론을박 따위나 하고 있는 무당파의 행동이나 대처가 용무린으로서는 전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 대신 무림맹이 나섰습니다. 마교의 움직임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대비해야 하지만 작은 힘이나마 보태주겠다는 말씀과 함께 대정단을 소림으로, 진무단을 무당에 파견해주겠다 하셨습니다.”
“무리하시네, 맹주님.”
용무린이 풀썩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혈고로 인해 풍파를 겪은 무림맹이 모든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는 상대는 바로 마교다.
그들의 공격에 대비해 힘을 비축해야만 하는 풍연호로서는 두 무력단체를 파견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신경을 쓴 셈이다.
“백리검가 역시 나서기로 했습니다. 가주의 아우인 백리검가의 장로 한 명과 장손인 백리천월이 백의검대 200명을 이끌고 이미 출발했다는 소식입니다.”
‘백리천월까지?’
그리 살가운 성격은 아니지만 어쨌거나 반가운 얼굴이었다. 용무린의 고개가 절로 끄덕여졌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화산파의 연락은 받은 서문세가와 단목세가에서도 고수들을 출발시켰습니다.”
가히 작은 무림맹의 탄생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각 문파의 거력이 집중되는 상황이다.
화산, 청성의 도가문파를 시작으로 속가의 대표 격인 종남과 신주오가의 일원인 백리검가가 힘을 보탤 것이며 서문세가와 단목세가까지 함께한다.
‘거기에 더해서 무림맹과 소림의 뛰어난 고수들까지 모두 포함하면?’
이미 일천수백여 명에 이르는 거력이다.
마교가 도발을 했다 하더라도 코웃음을 치며 한 번 붙어보자고 할 상황인데 그 거력에 혈교가 혼자 맞선다니!
‘합세하는 문파는 제외하고 소림과 무당만 따져도 솔직히 그 두 곳을 동시에 상대한다는 것은 무리야. 아무리 혈교라지만 그것은 불가능하다고!’
그들의 무력 자체는 인정한다.
마영방에서도 겪어 봤었고 신마 진무량의 기억 속에서도 혈교의 무력은 막강했다.
‘전성기의 혈교로 판단한다면 소림과 무당을 동시에 상대할 수도 있겠지.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할 수도 있다는 것뿐이야.’
진짜 그렇게 했다가는 그날로 혈교는 멸망이다.
소림과 무당파는 큰 손실은 입을지언정 살아남아 다시금 성세를 이룩할 테고 말이다.
‘소림의 저력은 그만큼 커.’
하나를 보면 열은 몰라도 최소한 둘은 안다.
굳이 일각이나 원각의 뛰어남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소림은 혈교 따위의 단일 세력에 망할 곳이 아니다.
‘오도암의 인연을 얻었던 날 오가며 보고 느꼈던 것만으로도 충분해.’
‘과연’이라는 말이 절로 나오는 곳.
저 막강한 마교조차 지금껏 단 한 번도 넘을 수 없었던 곳이 바로 소림이라는 곳이다. 하물며 그런 소림과 함께 남존으로 불리는 곳이 바로 무당이니 무당파의 숨은 거력은 또 얼마나 클까?
‘단일 세력으로 소림과 무당을 상대할 수 있는 곳은 오직 하나밖에 없어…….’
용무린의 뇌리에 홀연히 하나의 이름이 떠올랐다.
그것은 바로 마교!
십 년간의 전쟁을 통해 혈교를 깡그리 짓밟고 배교를 흡수하는 것으로 당당히 마도의 종주 자리를 차지한 마교라면 가능하다.
혈교와 배교가 십 년간이나 버틸 수 있었던 것도 전면전이 아닌 유격전을 펼쳐서 버틸 수 있었던 것이지 힘 대 힘으로 붙었다면 단숨에 박살이 났을 것이다.
‘마교의 저력은 그만큼 강대해.’
그때 말도 되지 않는 하나의 가정이 머릿속을 스쳤다.
생각만으로도 섬뜩한 가정, 마교와 혈교가 손을 잡는다는 그림이었다.
‘에이, 설마…….’
자존심 드높은 마교가 그럴 리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심장 어림이 계속해서 선뜩한 이유는 뭘까?
“그래서 각 문파들이 모이는 곳은 어디야?”
“이틀 거리에 자리한 낙녕현 어귀입니다.”
“낙녕현 어귀? 그 앞에 자리한 평정산을 끼고 전투를 벌이자는 뜻이로군그래.”
“그런 듯합니다.”
섬서성에서 호남성을 향할 때 수로를 통한 관문을 제원현이라고 하면 육로를 통한 관문 같은 곳이 바로 낙녕현이었고 평정산은 수문장처럼 그 앞에 자리하고 있다.
호남성의 지형은 전형적인 서고동저의 지형으로 그나마 낮은 축에 속하는 평정산 옆의 관도를 통과하지 않는다면 까마득히 높은 산맥을 가로질러야 함으로 혈교가 숭산으로 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 옆을 거쳐야만 한다.
그러니 혈교와 일전을 겨루기 위해서 그보다 더 좋은 장소는 사실상 없다고 봐야 하리라.
“호남성으로 들어서자마자 종적을 감췄던 놈들이 섬서성으로 다시 되돌아 나오지 않는 한 그곳에서 보게 되겠군. 알았다. 수고했다.”
“넵, 장로님. 수고하십시오. 무운을 빕니다, 용 대협!”
사내는 뭔가 깊은 생각에 잠겨 대답이 없는 용무린을 향해 포권을 취해 보인 후 다시 연락소로 돌아갔다.
“가자, 무린아.”
“예? 어디로요?”
화운이 툭 건드리고 나서야 용무린은 생각에서 깨어났다.
“어디긴? 낙녕현 어귀지.”
“낙녕현 어귀요?”
“그래. 그곳에서 혈교 놈들과 붙게 될 거야. 가자. 일각이 목이 빠져라 기다리겠다.”
“아, 예.”
고개를 살짝 끄덕여 보인 용무린은 잠자코 화운의 뒤를 따라 움직였다. 표정은 여전히 꺼림칙했지만 딱히 자신의 우려를 증명할 방법이 아직 없기에 뒤를 따르는 것이었다.
***
‘이크! 놈들이다.’
땅을 파고 들어간 후 눈만 살짝 내밀고 주변을 살피던 개방의 정의개가 처박히듯 땅속으로 눈을 감췄다.
‘제발 그냥 지나가라.’
한 낮임에도 확연히 뿜어지는 안광!
혈교 특유의 붉은 무복이 날 듯이 거리를 좁히는 모습에 정의개는 고개를 들어 올릴 엄두도 내지 못했다. 숨까지 참고 사력을 다해 기척을 감추었다.
타닷. 휘릭. 휘리릭.
대여섯 명의 혈교 고수는 눈 깜박 할 사이 정의개가 숨어 있는 땅굴 아래를 스쳐 지나갔다.
바로 그때,
피식.
혈교의 고수 하나가 정의개가 숨어 있던 땅굴을 보며 비릿하게 웃었다. 나뭇가지와 풀로 위를 덮었지만 그의 눈을 속일 수는 없었던 거다.
하지만 더 놀라운 것은, 분명히 그 안에 누군가가 숨어 자신들을 지켜봤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무시했다는 것이다.
‘다 갔나?’
한참을 기다려도 아무런 소리가 들려오지 않자 정의개는 용기를 냈다. 살그머니 땅굴 밖으로 고개를 들어 올렸다. 세심하게 주변을 살폈다.
‘휴, 다 갔네.’
정의개는 재빨리 품속에서 간단한 종이를 꺼내 자신이 본 것을 적었다. 미리 준비해 온 전서구의 발에 매어 날려 보냈다.
푸드득.
힘차게 날아오른 비둘기는 한 마리가 아니었다. 십여 리 떨어진 옆 봉우리에서도 떠올랐고 다시 십오 리 떨어진 봉우리에서도 날아올랐다.
날아오른 전서구들은 재수 없이 매에게 사냥당한 한 마리를 제외하고 모두 개방의 연락소로 돌아왔다.
“놈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역시 평정산을 향해 가고 있었어.”
“소수로 나뉘었어. 그래서 종적이 사라진 것처럼 보였던 거야.”
“평정산 관도 근처로 움직이고 있으니 놈들의 목표는 소림이다.”
혈교의 종적이 잡힌 이상 그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그런데 눈에 띈 놈들의 숫자가 어째서 오십 명 남짓밖에 안 되지?”
“상대는 마교와도 견주는 혈교야. 그만큼이라도 눈에 뜨인 걸 다행으로 알아야지.”
“맞아. 더 뛰어난 놈들은 아예 모습을 보이지 않고 스며들었을 거야. 정의개들의 이목에서 완전히 벗어날 정도라고 봐야해.”
“이제 시작이야. 놈들의 숫자는 계속해서 늘어날 거야.”
“지금 중요한 것은 빨리 이 사실을 평정산에 알리는 거야. 시간 없어.”
개방의 고수들은 촌음을 아껴 정보를 취합해 전서를 적었다.
오래지 않아 백여 마리가 넘는 전서구가 한꺼번에 날아올랐다. 혈교의 소림을 향한 진격 소식을 사방에 알렸다.
***
반나절 후 낙녕현 어귀의 약속 장소.
가장 먼 곳에 있으면서도 가장 빨리 도착한 청성의 고수들이 개방으로부터 이 급보를 전해 들었다.
“놈들이 오고 있다고?”
“그렇습니다, 태상장로님.”
“거리는?”
“속도와 은밀한 행동으로 보아 사흘 후쯤 놈들과 마주할 수 있을 것으로 파악됩니다.”
“사흘 후라……. 놈들의 숫자는?”
“척후로 보이는 인원만 오십여 명이 된다고 합니다. 하니 선발대는 수백 명을 상회할 것으로 보입니다.”
“좋아, 좋아.”
청성의 태상장로인 서금도장이 활짝 웃었다.
‘이제 며칠만 더 참으면 청성의 명성이 소림과 무당을 넘어설 수 있게 되는 거야.’
옥현과 함께 세웠던 첫 계획과는 살짝 달라졌다.
거리가 먼 탓에 먼저 출발했고 오는 동안 기밀을 유지하느라 옥현과 교감을 나누지 못하는 사이 화산과 혈교에 작은 다툼이 벌어졌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괜찮아. 옥진도장의 말이라면 믿을 수 있어.’
개방을 통해 받아들게 된 화산파 옥진도장의 전서!
옥현과 함께 지금껏 의견을 주고받으며 계획을 세웠던 옥진의 말이니 틀림없을 것이라 믿었다.
-혈교가 소림과 무당을 치기 위해 움직이고 있습니다. 때를 놓치지 않아야 합니다. 지금 당장 낙녕현 어귀로 와 주십시오. 화산과 함께 놈들을 쳐 도가의 명문에 무당만이 아닌 화산과 청성도 있음을 알립시다.
혈교의 공격을 받는 소림과 무당을 구원한다?!
그것도 서로 힘을 합쳐 느긋하게 기다리고 있다가 힘이 다 빠진 놈들의 뒤를 쳐서?
“푸흐흐. 좋구나.”
어찌나 즐거운지 생각만 해도 웃음이 절로 터졌다.
놈들이 평정산을 지나쳐 소림으로 향하면 반나절 거리를 두고 느긋하게 뒤를 따르면 되는 것이다.
“늦어도 이레 후 큰 싸움이 있을 것이다. 그때까지 제자들은 모두 부족함이 없도록 정신무장을 한 후 스스로를 갈고 닦도록 해라.”
“명!”
보고를 마친 젊은 도장이 큰 소리로 답하며 물러갔다.
“쯧, 어리석은 녀석 같으니…….”
다된 밥에 코를 빠뜨리겠다는 듯 훼방을 놓았던 서보도장이 떠올랐는지 서금은 혀를 찼다.
“참회동에서 반성이나 하고 있도록. 대사형께서 청성의 명예를 드높이는 동안 말이야. 하하하하.”
완전히 사람이 바뀌어져 돌아온 서보도장을 참회동에 가둔 것은 바로 자신이었다.
어째서 그렇듯 돌변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서금도장은 화산 그리고 종남파와 함께 손을 잡고 추진한 이 계획이 망가지는 것을 바라지 않았다.
“아무렴! 도가의 명문에는 화산도 있고 청성도 있지.”
야심은 그 정도로 끝이 아니다.
최대한 공을 세워 청성의 이름이 화산조차도 뛰어넘게 만드는 것, 바로 그렇게 만들기 위해 청성의 검수를 육 할이나 끌고 온 것이다.
“혈교야, 혈교야. 어서 와 목을 길게 빼거라.”
서금도장은 이미 이겼다고 생각했다.
화산과 청성 종남의 세 문파가 힘을 모은다면 소림을 상대하느라 힘이 빠진 혈교 따위 순간적으로 짓밟아 줄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런 뒤에 바로 움직여서 무당을 공격하고 힘이 빠진 놈들까지 쓸어버려야지.”
그 역시 손쉬운 일이 될 것이다.
무당파가 어째서 남존이라는 영광된 이름으로 무림에 회자되겠는가?
자신만만하게 나섰으니 혈교가 승리를 하겠지만 무당을 상대하는 사이 죄 이가 빠질 터, 그때를 노린다면 청성의 명예를 드높이는 것은 일도 아니었다.
“이제는 남존 청성이라 불릴 때도 되었지. 암!”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이는 서금도장.
그의 생각대로 종남파가 정예를 파견했다. 마영방에서 전사한 풍조산과 제자들의 복수까지 할 생각에 그들 역시 많은 전력을 보낸 것이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달려오는 것은 종남뿐만이 아니었다. 넋 놓고 당해야 할 소림이 달려오고 있었고 무림맹이 나섰으며 백리검가와 용무린까지 달려오는 중이었다.
“푸허허허! 남존 청성이라……. 푸허허허허!”
그것도 아직 모르는 청성의 태상장로 서금도장은 통쾌하다는 듯 웃어 젖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