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성동격서 (54/104)

2.성동격서

성남현의 마영방.

“놈들이 소림을 향해 출발했구나. 다행이다.”

무려 오백여 명에 달하는 화산의 검수들을 휘몰아 온 옥진은 텅 비어 있는 마영방을 확인한 후 재빨리 제자들을 주변으로 보냈다. 목격자들을 찾았다.

제자들은 오래지 않아 혈교의 이동을 목격한 사람들로부터 정보를 물어왔다.

“하루 전 붉은 옷을 입은 무인들이 동쪽을 향해 떠났다고 합니다.”

“붉은 옷을 입은 무인들의 숫자가 수백을 가볍게 넘어 선다는 목격자들의 말입니다.”

“좋아!”

움켜쥔 옥진의 주먹에 불끈 힘이 들어갔다.

혈교에서 보내왔던 전서에 대한 답신으로 여태 그래왔던 것처럼 자신이 직접 전서를 보냈던 것이 보기 좋게 들어맞았다고 믿었다.

-마영방에서 벌어졌던 일은 모두 우발적인 사고였을 뿐이다. 계획은 변함없다. 화산과 종남과 여러 세가들은 혈교의 재림 자체를 부정할 것이고 현재 소림과 무당은 아무것도 모르고 있다. 계획대로 진행하라.

‘다행이다. 놈들이 생각대로 움직여 주었어.’

무림인들의 움직임을 양민들이 다 알아볼 수 없는 일.

수백을 상회한다는 말은 곧 혈교의 주력이 일제히 움직였다는 말로 받아들여도 된다.

‘놈들을 평정산 아래에서 끝장낸다.’

자신의 연락을 받은 소림이 이미 움직였을 것이다.

종남과 청성파는 물론이고 여러 문파에서도 돕고자 나설 것이 틀림없다.

‘혈교를 소멸시키는 것으로 화산의 오욕을 씻어낸다.’

그렇게 만들기 위해 미안하지만 정보를 제한했다.

거듭난 화산의 분위기와 소림과 무당에 소식을 전한 사실을 종남이나 청성에는 알리지 않았다.

‘혈교를 치는 일이니 그 두 문파에게도 그간의 과오를 씻을 기회를 주는 셈이 되겠지.’

불의의 습격을 당한 소림과 무당을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 혈교와의 전면전을 벌이게 된 두 문파로서는 배신감을 느낄 수도 있으리라.

‘그런 배신감 따위 얼마든지 감내한다. 욕을 해도 웃으며 받아들일 것이다.’

중요한 것은 소림과 무당에 사실을 밝혔다는 것이다.

더불어 모든 일의 원흉이었던 화산이 전면에 나서서 혈교와 맞섬으로 그간의 과오를 씻어내면 되리라는 것이 바로 옥진과 화산 수뇌부들의 결심이었다.

“우리도 출발하자.”

“가자!”

옥진을 선두로 화산의 검수 오백여 명이 파도처럼 동쪽을 향해 밀려갔다.

하지만…….

“크크큭. 더러운 말코 놈들.”

“역시 우리 뒤를 치려고 했다 이거네?”

“혈뇌가 아주 멍청이는 아닌데?”

“그러게 말이야. 마영방의 일이 단순한 우발적 사고가 아니라 혈교의 재림을 막으려는 수작임이 확실해졌어.”

은은한 혈광을 흘리는 마인들이 화산파 고수들의 움직임을 먼 곳에서 지켜보며 웃고 있었다. 혈뇌의 작전에 따라 소림과 무당이 아니라 화산과 종남파로 목표를 바꾼 혈교의 정예들이었다.

“놈들이 충분히 멀어지면 우리도 움직인다.”

“좋아. 더러운 말코 놈들을 박살내자고!”

살기 가득한 눈빛들은 다시 깊은 숲속으로 사라졌다.

방금 뱉었던 말대로 동쪽을 향해 움직이는 화산의 고수들이 충분할 만큼 멀어지면 절반은 화산으로, 다시 절반은 종남으로 움직일 것이다.

“배신의 대가는 죽음이다, 말코들아.”

“종남의 떨거지들도 이젠 끝이야.”

“소림과 무당을 무너뜨리는 것도 좋겠지만 섬서성을 통째 먹는 것으로 화려하게 등장하는 것도 그리 나쁘지 않지. 크크크크큭.”

살기 가득한 목소리들만 을씨년스럽게 흘러나왔다.

***

이틀이란 시간이 훌쩍 지났다.

“……!”

청성의 태상장로 서금도장은 황망함이 역력한 얼굴로 연신 포권을 취해야만 했다.

“반갑습니다. 백리검가의 장로 백리건후입니다.”

“아미타불! 이리 나서 주셔서 감사할 따름입니다. 살계승 효정이라 합니다.”

생각지도 못했던 백리검가와 숭산에 틀어박혀 있어야 할 소림의 무승들이라니!

‘뭐야? 백리검가야 그렇다고 치고, 왜 소림의 무승들이 그것도 정예고수들이 여기에 와 있는 거야?’

소림은 혈교의 움직임을 모르고 있어야만 한다.

그래서 놈들의 기습에 엄청난 피해를 입고 비틀거려야만 된다. 그래야만 자신들이 멋지게 나서서 구원해 줄 테니까.

‘뭔가 잘못됐어.’

잘못돼도 크게 잘못됐다는 것을 느꼈지만 서금도장은 열심히 어색한 얼굴을 감추며 포권을 취했다. 짐짓 호탕한 웃음을 터뜨렸다.

“와하하하. 의당 청성이 두 팔 걷어 붙여야 할 일 아니겠습니까?”

물론 그래도 얼굴에는 당황한 빛이 남아 있었고 목소리도 어색했다.

“서금! 오랜만이네? 잘 있었어, 말코?”

“이놈의 거지! 죽지도 않고 또 왔구나?!”

안면이 있던 화운을 향해 장난스럽게 눈까지 부라려 보였지만 용무린과 화운의 눈을 속일 수는 없었다.

‘당황하긴!’

‘화산과 종남, 끽해야 서문세가와 단목세가만 모일 줄 알았는데 소림과 백리검가까지 몰려와서 놀랐나?’

‘비밀스럽게 오느라 상황이 많이 바뀐 것을 알지 못하는가 보구나. 아니, 어쩌면 옥진 도장께서 일부러 많은 것을 감추었을 수도 있긴 하네.’

‘좀 있으면 무림맹의 무력단체까지 올 텐데, 그땐 더 놀라겠지?’

‘표정을 보니 저 인간이 옥현 그 인간과 붙어먹은 장본인인 모양이네?’

‘저 능구렁이 같은 말코가 옥현과 붙어먹었거나 최소한 깊은 관계가 있겠지?’

두 사람의 짐작은 모두 사실이었다.

서금도장이 내심 많이 놀란 것도, 옥진이 모든 것을 알리지 않은 사실도, 옥현과 계획을 주도했던 장본인인 것까지 모두 맞았다.

‘옥현처럼 청성파의 군림을 꿈꾸었겠지?’

‘네 알량한 계획은 이미 끝났어, 서금!’

최선의 마무리는 어차피 이렇게 된 일, 이끌고 온 청성의 검수들을 독려해 혈교와의 싸움에서 누구나 인정할 만큼의 공을 세우는 것뿐이다.

‘청성에게는 그게 최선이야!’

시간이 갈수록 고수들의 숫자가 불어났다.

종남파가 도착하고 서문세가와 단목세가에서 제각각 무력단체들을 이끌고 당도했다.

“장로님은 처음 뵙네요? 용무린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오거나 말거나 신경 쓰고 싶지 않았던 용무린은 오랜만에 보는 백리검가의 무인들을 향해 달려가 먼저 인사를 건넸다.

어쨌거나 신마 진무량으로서 처음 자각했을 무렵 시간을 보냈던 곳이 바로 백리검가였고 바로 그곳에서 군림을 향한 첫 발을 떼었기 때문이었다.

“오! 반갑네, 용 대협. 무명은 많이 들었네.”

웃는 낯으로 마주 포권을 취해 보이는 백리건후와는 달리 백리천월은 용무린과 눈도 마주치려 하지 않았다.

‘하여간 속을 알 수 없는 녀석이라니까?!’

용무린으로서는 백리천월이 느끼는 좌절감과 패배감을 절대로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용무린은 자신보다 뛰어난 누군가를 보게 되면 꺼지지 않는 투지를 불태우며 상대를 넘어설 방법을 찾아내는 성향을 지녔기 때문이었다.

그 사이 알게 모르게 묘한 분할이 일어났다.

청성과 종남파와 서문, 단목 두 세가가 한 덩어리가 되어 움직였고 백리검가와 소림과 뒤늦게 도착한 무림맹의 무력단체 대정단이 또 한 덩어리가 되었다.

‘하여간 웃기는 종자들이야.’

하나가 되어도 모자랄 판에 둘로 나뉘다니!

용무린은 가볍게 그들을 비웃어주곤 반가운 얼굴인 일각과 해후했다.

“오셨나요, 스님?”

“허허허. 용 시주…….”

“왔느냐? 오느라 수고했다.”

“선배! 그간 강녕하셨습니까?”

간단하지만 진심이 담긴 인사가 오가고 일각은 용무린의 지난 발자취를 축하해 마지않았다.

“이제는 어엿한 대협이 되셨소이다, 용 시주. 황룡패주에 무림왕이라니요!”

“스님까지 그러시면 어떻게 해요? 제발 참아주세요.”

용무린은 격렬하게 손사래를 쳤다. 눈을 질끈 감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그 모습이 마냥 좋아만 보이는지 일각은 웃음을 거두지 않았다.

“산문이 활짝 열리고 많은 무승들이 내려왔습니다. 이 기회에 인사나 나누면 좋을 듯합니다, 용 대협.”

일각까지 이제 대놓고 용무린을 대협이라 칭했다. 용무린을 소림의 무승들이 있는 곳으로 이끌었다.

“좋지요. 아! 원각스님!”

냉큼 대답하며 따라 나서던 용무린은 소림의 내원으로 향한 길목에서 만난 적이 있던 원각을 알아보고 반갑게 먼저 인사를 건넸다.

“하하하! 용 대협께서도 오셨구려! 그간 용 대협의 무명을 귀가 따갑도록 들었습니다.”

“후우. 스님께서도 그 말씀이네요.”

이젠 포기했다는 듯 용무린은 긴 한숨을 내쉬어 보였다.

“용 대협! 이분께서 이번에 소림의 무승들을 이끌고 오신 분입니다. 인사드리시지요. 십계십승 중 살계승이신 효정대사님이십니다.”

소림에서 십계십승의 지위는 상당히 높았다.

불가의 계율을 지켜나가는 계율원 보다도 원초적으로 우위에 선 승려들이 바로 십계십승인데 세속으로 따지면 한 문파의 장로들쯤으로 보면 된다.

“처음 뵙겠습니다, 스님. 비룡문의 용무린입니다.”

용무린이 먼저 정중한 태도로 포권을 취했다. 효정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혜월로부터 이어온 소림과의 인연을 생각해서였다.

효정대사가 살계승이라는 살벌한 이름답지 않게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반갑구나. 네 녀석이 바로 녹옥불장을 면전에서 거절했다던 바로 그 녀석이로구나.”

“아! 그거요?”

용무린은 풀썩 웃으며 가볍게 대꾸했다.

“제 체질이 아니라서요.”

“이놈아! 체질에 맞아 땡중을 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 주면 냉큼 받았어야지.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고, 받았으면 땡중 노릇도 다 잘해냈을 것이야.”

아무래도 용무린이 녹옥불장을 거절한 사실이 못내 아쉬운 모양이었다.

“정정할게요. 체질이 아니라 길이 달라서 안 받았어요.”

“안다, 이놈아.”

“……?”

“살기가 너무 짙어. 그걸 알기에 네게 녹옥불장을 주려 했던 게야.”

용무린은 뭐라 할 말이 없었다.

살기가 너무 짙다는 말은 자신이 생각해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었기 때문이었다.

“언제고 일을 마치면 다시 오너라. 아무리 순천을 한다 해도 몸에 피 냄새가 너무 짙게 배이면 좋지 못하다. 언제고 씻어내야만 해. 알겠느냐?”

소림과의 인연이 깊음은 이미 잘 알고 있다.

전대 장문방장인 혜월 때부터 비롯된 인연이었으니 자신에게 쏟아지는 소림의 마음 씀을 곡해할 리가 없다.

“예. 일 다 마치면 한 번 갈게요.”

용무린은 고개를 끄덕여 흔쾌히 답했다.

“전서가 또 왔습니다.”

그 즈음 혈교의 움직임에 대한 전서가 다시 도착했다.

“적 추정인원 삼백오십에서 오백여 명. 적의 선발대로 추정되는 혈교의 무리가 빠른 속도로 이곳으로 접근하고 있다는 소식입니다.”

혈교의 접근!

천오백 명을 훌쩍 넘겨 이천에 이르는 고수들 사이에 팽팽한 긴장이 흐르기 시작했다.

그때 다시 한 장의 전서가 도착했다.

“화산파로부터의 연락입니다. 혈교의 뒤를 은밀히 쫓아오고 있다고 합니다. 공격이 개시되면 뒤에서 공격해 들어오겠다고 쓰여 있습니다.”

이른바 양면 협공의 작전!

‘완전히 속았군.’

서금도장의 얼굴이 무섭게 일그러졌다.

화산파의 전언은 그나마 조금 남아 있던 믿음을 완전히 털어내게 했다.

‘감히 우리 청성을 꼬여내 혈교와 전면전을 벌이게 만들다니!’

서금도장은 재빨리 냉정을 되찾았다.

‘이곳에 집결된 힘이라면 마교와의 일전도 가능할 정도란 말이지!’

구원자로 나서는 것이 가장 통쾌한 일이었지만 일은 혈교와의 전면전으로 흐르게 되었다.

‘호기롭게 제자들을 몽땅 이끌고 나왔으니 전공이라도 많이 세워야 하지 않겠나?’

그래야만 서보도장을 구금한 일도, 만류하는 장문인에게 큰 소리를 치고 나선 것도 다 해결이 된다.

‘뒤에는 소림과 백리검가와 무림맹의 무력단체까지 도사리고 있다.’

더불어 놈들의 뒤를 화산파가 협공해 들 것이다.

‘개방의 눈을 피하느라 세력을 나눠 오고 있겠다?’

그 중 하나를 맡는 것 정도라면 제자들의 희생도 크지 않으면서 전공은 전공대로 챙길 수 있다. 또한 놈들이 다른 길을 통과해 소림과 백리검가와 진무단과 먼저 붙기라도 한다면 그 뒤를 노리면 된다.

“관도를 타지 않고 주변 숲을 가로질러 오고 있다고 합니다. 놈들의 본대와 후발대가 숲에 숨어 오고 있음이 틀림없습니다.”

판단을 마친 서금도장이 목소리를 높였다.

공을 세우고 싶은 마음만큼 주도권을 역시 놓치기 싫었던 것이다.

“그러면 우리 역시 인원을 나누어야 할 것이외다.”

같은 심정이었던 종남의 이인자 곽창휴가 그 말을 받았다.

질 수 없다는 듯 서금도장이 선수를 쳤다.

“우리 청성이 평정산의 허리에 진을 치겠소이다.”

종남의 곽창휴도 비슷한 생각이었다.

“종남의 검수들은 서쪽 능선을 지키고 있겠습니다.”

상황이 그렇게 흐르자 서문세가와 단목세가에서도 제각각 좋은 위치를 선점하고 나섰다. 조금씩 나뉜 혈교의 마인들이 숨어들기 좋은 곳들을 먼저 찍었다.

“서문세가는 동쪽의 샛길을 지키고 있도록 하겠습니다.”

“그렇다면 서로간의 연락이 중요하니 단목세가에서 각 문파들 간의 연락을 전담하겠습니다.”

정작 당사자랄 수 있는 소림까지 쏙 뺐다.

백리검가와 지원을 나온 무림맹의 무력단체 진무단은 대충 손가락이나 빨고 있다가 뒤처리나 해달라는 뜻이었다. 하지만 정파 연합의 지도부가 따로 정해지지 않은 이상 별 수 없었다.

적이 코앞으로 다가오고 있는 이때 서로 좋은 자리를 차지하겠다고 싸울 수는 없는 노릇이었으니까.

“……!”

옥현과 손을 잡았던 문파들이 유리한 기회와 장소를 찾아 목청을 돋우는 사이 용무린은 계속해서 깊은 생각에 잠겨 있었다.

다가오는 혈교의 숫자가 눈에 띄게 늘어나지 않았다는 소식을 접할 때부터였다.

‘어째서 계속 그 숫자지?’

추정인원 삼백오십 명에서 오백 명.

그 정도라면 정확하게 숫자를 셀 수 없는 현실로 미루어 보건대, 마영방에서 쓴 맛을 보고 남았던 패잔병들과 마지막 순간 도착했던 삼백여 명을 합한 숫자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수준이었다.

‘소림과 무당을 동시에 상대한다고 큰소리를 뻥뻥 치던 놈들의 숫자가 어째서 계속 그 모양이냐고?!’

잠자코 지켜보고 있던 화운이 불쑥 물어왔다.

“며칠 전에도 그러더니, 자꾸 왜 그러냐? 무슨 문제라도 있는 게냐?”

용무린은 심각한 목소리로 반문했다.

“장로님. 혈교에는 죄 바보들만 있을까요?”

지극히 당연하고 다소 엉뚱한 질문이었지만 듣는 순간 화운은 등줄기를 타고 소름이 돋는 것을 느껴야만 했다.

질문을 하는 사람이 바로 자신이 천재라고 생각하는 용무린이었기 때문이었다.

“당연히 그럴 리는 없지.”

“그렇죠?”

효정대사마저 흥미가 돋는지 대화에 끼어들었다.

“놈들이 신비롭게 사라지긴 했지만 결코 바보는 아닐 게다. 더욱이 수십여 년만의 재림이 아니더냐? 뭔가 단단히 준비를 했다고 봐야 하겠지.”

용무린이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래요. 그런데 왜 저렇게 바보 같은 짓만 하는 거죠? 이렇게 대놓고 소림을 향해 밀려오다니요? 제가 보기엔 죽고 싶어 환장한 것으로밖에는 안 보인단 말이죠.”

화운이 목소리를 높였다.

“놈들 작전도 나름 괜찮다. 소림으로 향하는 듯하다 무당을 향해 방향을 틀 수도 있었단 말이다. 바로 그 점을 우려해서 우리 개방과 소림과 백리검가와 진무단이 잠자코 있는 것 아니겠느냐?”

옥현에게 동조했던 문파들이 서로 공을 차지하겠다고 나서는 것을 보면서도 화운이 잠자코 있었던 이유가 바로 그것이었다.

“이곳으로 오는 혈교 마인들 숫자가 삼백오십에서 오백 명이 다라면요?”

“그럴 리가 있느냐? 겨우 그 정도 숫자로는 소림 한 곳도 절대로 감당하지 못한다!”

“반드시 후발대가 따라붙을 것이다. 화산파가 그 후발대의 뒤를 쫓아오는 중이라고 했으니 틀림없을 게다.”

화운과 효정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용무린이 다시 반문을 던졌다.

“화산이 그 후발대라고 생각했던 놈들이 사실은 개방이 확인했던 놈들이었다면 어쩌죠? 거리와 시간상의 차이와 분산된 놈들의 이동 경로, 그리고 철저히 계산된 움직임 때문에 화산파가 착각한 것이면요?”

“그, 그것은……?”

“설마?”

“소림과 무당을 동시에 치겠다고 공언한 녀석들이 겨우 그 정도 숫자로 일을 도모했겠느냐?”

화운은 대답을 하지 못했고 효정대사는 다시 한 번 용무린에게 반문했다.

“제 말이 바로 그 말이에요 대사님.”

“…….”

“천하에 어떤 바보들이 소림과 무당을 동시에 치겠다고 공언을 할 것이며, 당당히 공언을 해놓고 이렇게 숨어서 소수로 나뉘어 들어오겠느냐는 말이죠?!”

그것 역시 작전이라면 할 말은 없지만 자신 같으면 마영방에서 정체가 들통 나고 상당한 피해를 입게 만든 화산의 옥현에게서 별다른 해명도 없었다면 계획을 전면 수정했을 것이다.

‘옥현이 내 손에 죽었으니 화산파가 마영방에서 혈교의 선발대와 서로 상잔했던 일에 대해 따로 변명을 하거나 설득했을 리 없잖아?’

화운이 탈출을 하던 마지막 순간 옥진도장이 회심을 했다고는 하지만 아직 그로부터 자세한 내심을 들어본 것도, 그가 어떤 조치를 취했는지도 모른다.

‘아니 다른 것을 다 제껴두더라도 나 같으면 틀림없이 이렇게 했을 것 같아.’

“성동격서!”

움찔! 흠칫!

용무린의 말 한마디에 화운과 효정대사가 동시에 몸을 떨었다. 눈을 크게 떴다. 용무린은 그런 두 사람을 돌아보며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저 같으면 이 기회에 화산과 종남을 치겠어요. 마영방에 있던 놈들을 주력인 것처럼 잘게 나누어서 사람들 눈에 많이 뜨이도록 만들어 놓고 진짜 주력은 빈집이나 다름없는 화산과 종남을 노리겠단 말이에요.”

“무, 무린아!”

“이런!”

화들짝 놀라 목소리를 높이는 두 사람을 보면서도 용무린은 눈 하나 깜박하지 않았다. 계속해서 섬뜩한 말들을 쏟아냈다.

“며칠 전부터 계속해서 생각한 건데요, 혈교가 저렇듯 공공연하게 소림과 무당을 동시에 치겠다고 나선 것은 그만한 자신감이 있기 때문일 것이에요.”

생각이 점점 확신으로 굳어지는 듯 용무린의 입가에는 묘한 미소가 걸렸다.

“그 자신감이 자신들의 힘을 믿는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소림과 무당은, 아니 소림 한 곳만 따져도 저 마교조차 숙적으로 생각하는 마당이니 얼토당토않다고 봐야 하겠지요.”

“그러면 소림과 무당을 공격하겠다는 말 자체가 거짓이었다는 것이냐?”

“아니요?”

“그럼?”

“그거야 저는 모르지요.”

옥현과 혈교가 세운 계획은 처음에는 알려진 사실 그대로였을 것이다.

‘내가 마영방으로 화산과 종남의 고수들을 끌어들여 서로 상잔시킨 것 때문에 최근에 틀어졌을 거야.’

그렇다고 효정대사가 있는 앞에서 옥현의 이야기를, 화산의 치부를 입에 담기에는 조금 그랬다.

“당당히 공언한 이상 소림과 무당을 동시에 도모하기 위해서는 그만한 힘이 있어야만 하는데, 천하에 그만한 힘이 있는 곳은 마교밖에는 없어요.”

“마, 마교?”

“맙소사…….”

잠자코 흥미롭게 듣고만 있던 진무단의 단주가 입을 쩍 벌렸다.

“혈교 놈들이 은밀히 마교와 손을 잡았다면 말이 돼요. 충분히 소림과 무당을 동시에 도모할 수 있죠.”

“하지만 마교 놈들의 움직임은 아직 없단 말이다.”

“맹에서 예의 주시하고 있습니다. 광서성과 광동성에서부터의 대규모 무인들의 이동은 아직 눈에 띄지 않았습니다, 총순찰.”

진무단주가 용무린을 총순찰로 깍듯이 예우하며 보고하듯 답했다.

아무리 마교라 하나 소림이나 무당의 한 곳을 감당하기 위해서는 일이백 명의 숫자로는 어림도 없을 터, 그 몇 곱절의 고수들이 필요할 것인데 일정 이상 규모의 무인들의 이동은 감지되지 않았다.

피식.

용무린이 풀썩 웃으며 더욱 확고해진 얼굴로 말했다.

“그러니 성동격서인 거죠.”

“……!”

“……!”

모두가 얼이 빠진 듯 입을 벌렸다. 용무린은 계속해서 자신의 생각을 밝혔다.

“놈들이 처음에 마교와 손을 잡고 시작을 했든 하지 않았든 그것은 지금 중요하지 않아요. 마영방에서의 일로 놈들의 계획에 변동이 생겼다는 것이죠.”

‘아! 맞다! 그게 저 녀석 작품이었지?’

화운 장로가 고개를 끄덕이며 감탄하는 표정을 지었다.

더불어 가슴이 더욱 서늘해졌다.

화산과 종남의 무인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유인해 혈교와 상잔시킨 사람이 바로 용무린이었기 때문이었다.

‘어쩐지 저 녀석의 판단이 맞을 것만 같단 말이야.’

용무린의 말이 무슨 뜻인지 아직 모르는 사람들은 고개만 갸웃했다.

“지금 현재 마교의 움직임은 어디에서도 포착되지 않았고 혈교 놈들의 움직임은 눈에 빤히 보인다는 것이죠. 그게 중요한 거예요.”

서늘한 미소와 함께 용무린은 화운에게 물었다.

“어때요, 장로님? 저와 화산에 가 보실래요? 아니면 종남으로 가 보실래요?”

맛깔스런 당과 하나 골라 보라는 듯 던져진 질문.

“그, 그러다가 혈교 놈들이 정녕 이곳을 향해 밀려들면? 놈들의 본진이 몽땅 소림을 향해 달려오고 있으면 어떻게 하려고?”

화운장로의 얼굴에는 불안함이 아직 남아 있었다.

그런 화운을 향해 용무린은 톡 쏘아 붙였다.

“아니 장로님. 지금 소림사 무시해요?”

“……?”

화운이 눈을 동그랗게 뜨는 사이 용무린의 시선은 효정대사에게로 향했다.

“어때요 대사님? 남아 있는 소림의 무력이 혈교 본진을 상대할 수 없을 정도인가요? 입만 살아 있긴 하지만 그래도 청성과 종남, 서문세가와 단목세가의 주력을 뚫고 온 지치고 다친 녀석들인데도요?”

무슨 뜻인지 잘 알겠다는 듯 효정대사가 빙그레 웃으며 답했다.

“소림은 약하지 않다, 아이야. 혈교의 마인들이 상처 하나 없는 상태로 밀고 올라온다 한들 소림의 위엄을 상하게 할 수는 없단다.”

그야말로 하늘 같은 자신감의 표출이다.

하지만 효정대사는 절대로 거짓을 입에 담지 않았다.

소림의 산문을 나선 고수들은 그야말로 빙산의 일각에 지나지 않는다.

학승을 제외한 소림의 무승 모두가 마공을 상대하기에 최적인 불문 내공을 쌓은 사람들, 더불어 고수 아닌 자가 드문 곳이 바로 소림인 것이다.

‘오죽하면 소림사의 주방장 손에 국자만 들려 있어도 어지간한 마두 한둘쯤 때려잡을 수 있다는 말까지 떠돌아다니겠어?!’

용무린의 입가에 떠오른 미소가 점점 더 짙어졌다.

그 모습에서 여차하면 혼자서라도 가겠다는 의지를 읽은 화운 역시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네가 골라 인석아. 너는 어딜 먼저 가고 싶은데?”

“저요? 흐음, 저는 화산이요.”

화운을 위험에 빠뜨린 곳이 바로 화산이었지만 마지막 순간 마음을 돌려 화운을 구해준 옥진도장 역시 화산의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옥현을 베어 빚은 갚았으니 이제 화운장로님을 구해준 보답을 해줘야지.’

은과 원은 확실하게 갚는 것이 자신의 영업방침이다.

“소림도 함께 한다!”

살계승 효정대사가 불쑥 참가의사를 밝혔다.

“아미타불!”

“아미타불!”

뒤에 늘어서 있던 사대금강의 일인인 일각과 나한전의 원각이 불호성을 발했다. 그들의 전신에서 사마외도 따위는 절대로 소림의 산문을 넘을 수 없으리란 자신감과 믿음이 넘쳐흘렀다.

“진무단도 함께 하겠습니다, 총순찰!”

진무단주까지 나섰다.

“좋아요. 모두 함께 가 봐요. 대신 각오해야 할 거예요. 모르긴 몰라도 여기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을 만큼 화끈할 거거든요.”

팔십 년 만의 재등장에 이어 소림과 무당을 동시에 상대한다고 공언했던 놈들이다. 필시 비장의 한 수가 감추어져 있다고 봐야 한다.

용무린의 말에 자극을 받았을까?

“나도 간다!”

저만큼 뒤에 있던 백리천월이 불쑥 나섰다.

“그래. 환영한다.”

용무린이 활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너는 실전 경험 조금만 더 쌓으면 되겠더라.’

이 기회에 사람을 만들어 줄 작정이었다.

자신의 충동질 덕에 여동생이 아미파의 속가 제자로 떠나간 것에 대한 빚을 갚는다고 생각했다.

“천월아! 어째서 그런…….”

백리검가의 고수들을 이끌고 온 책임자 백리건후가 화들짝 놀라 목소리를 높였다.

하지만 백리천월의 태도는 확고했다. 흔들림 없는 목소리로 자신의 의사를 재확인했다.

“말려도 소용없습니다, 숙부님. 저는 화산으로 갈 것입니다. 가서 백리검가의 검이 어떤 것인지 혈교 놈들에게 똑똑히 보여줄 생각입니다.”

잠시 말을 잃었던 백리건후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모두가 간다.”

“숙부님!”

“되었다. 백리검가의 장손이 미래를 위해 결정한 일인데 도와주어야 하지 않겠느냐? 지금의 책임자는 나지만 백리검가의 미래를 결정짓는 사람은 너다! 그 점을 잊지 말고 항상 행동하거라.”

“예, 숙부님!”

백리천월의 얼굴에 천천히 자신감이 차올랐다.

“자, 그럼 가 볼까요?”

“잠깐만 기다려라. 그래도 함께 싸우기 위해 모인 사람들 아니냐? 우리의 결정을 알려는 줘야지.”

화운은 개방의 고수를 찾아 이리저리 흩어진 청성과 종남파, 서문세가와 단목세가에 전할 말을 알려주었다.

“알겠습니다, 태상장로님. 그렇게 전하겠습니다.”

타다닷.

고개를 숙이기가 무섭게 정의개는 단목세가가 사라진 방향으로 뛰었다. 화운장로가 건넨 말들은 연락을 자청한 단목세가에 의해 오래지 않아 모두에게 퍼질 것이다.

“다, 되었다. 가자!”

“출바-알!”

휘슷. 휘스슷. 타다다닷.

용무린과 화운을 선두로 백리검가와 소림과 진무단이 화산을 향해 일제히 신법을 펼쳤다. 혈뇌가 알았다면 그야말로 펄쩍 뛸 일이었다.

***

화산은 이름 높은 도문임에도 불구하고 향화객들의 방문이 드문 편이었다. 화산파 자체가 연화봉 정상에 자리 잡고 있으며 산세가 너무나 험난했기 때문이었다.

“흠냐-아!”

그 덕에 화산파의 오대 제자인 오흠은 오늘도 변함없이 산문인 옥천문에 앉아 졸음을 이겨내기 위한 정신수련을 하고 있었다.

“사부님께서는 지금쯤 혈교 놈들을 죄 무찌르셨을까? 사형들은 공을 얼마나 세웠을까?”

오흠의 사부는 화산의 이대 제자인 영산도장.

매화검령을 거머쥔 옥진이 영산을 비롯한 화산의 검수 육 할을 이끌고 하산한 지 벌써 닷새가 넘었다. 지금쯤이면 찰나에 생사가 갈리는 무시무시한 대결을 벌이고 있으리라 생각했다.

“으아아-. 졸려라.”

몇 번 더 늘어지게 하품을 한 오흠은 결국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화산의 제자라면 누구나 배우는 난화수의 수련에 들어갔다.

팡. 파팡. 쉬쉭.

제법 날카로운 면모가 엿보이는 난화수가 옥천문을 배경으로 펼쳐졌는데 오래지 않아 보법이 꼬인 오흠은 보기 좋게 넘어졌다. 무릎을 찧었다.

“아이쿠 무르팍이야.”

절로 눈물이 글썽일 만큼 아픈 무릎을 주무르던 오흠은 고개를 돌려 연화봉을 올려다보았다. 조금만 더 있으면 같은 항렬의 사형인 오연이 내려올 시간이었기 때문이었다.

“에이, 사형이 오면 난화수와 보법이나 가르쳐 달라고 해야겠다.”

그 말이 끝나는 순간이었다.

“기회를 주겠다, 말코야.”

움찔!

놀라 뒤를 돌아 본 오흠의 눈에 두 사람의 사내가 보였다. 타는 듯 붉은 적의에 두 눈에서는 은은한 혈광이 엿보이는 사내들, 바로 혈루단주 진몽과 혈풍단주 은도평이었다.

“뉘, 뉘십니까?”

“우리? 혈신의 제자들?”

“혈신의 가호로 거듭난 사람들?”

“허억! 혀, 혀, 혈교!”

오흠의 눈이 튀어나올 듯 부릅떠졌다.

씨이익.

한 차례 징그럽게 웃어 보인 진몽과 은도평이 다시금 질문을 던졌다.

“말코들은 검의 수련을 통해 도를 이루겠다고 하지? 화산의 말코 중에 등선한 놈이 있느냐?”

“없지? 하지만 우리 혈교는 피를 통한 거듭남으로 인해 마선이 되신 분이 존재한다.”

“바로 우리 혈마님이시지.”

“어떠냐? 피를 통해 거듭나고 싶지 않으냐?”

“나, 나, 나는…….”

아직 어린 오흠은 뭐라고 해야 할지를 몰랐다.

사내들의 등 뒤로 붉은 파도처럼 밀려드는 혈교의 마인들이 두 눈 가득히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너무 고마워할 것 없어.”

“너뿐만이 아니라 우린 화산의 말코 전부를 피를 통해 거듭나게 해 주려고 이곳에 온 것이니까 말이야.”

퍼어억! 푸스스.

오흠의 여린 몸이 순간적으로 찢겼다. 혈우가 되어 옥천문을 붉게 물들였다.

“사제-에!”

저 멀리서 교대를 위해 내려오던 오흠의 사형 오연이 그 모습을 보고 울부짖었다.

땡! 땡! 땡! 땡! 땡!

비상을 알리는 종소리가 요란하게 연화봉을 향해 이어지기 시작했다.

“그래, 실컷 울려라. 크하하핫!”

“오늘 피로써 깡그리 거듭나게 되면 치고 싶어도 치지 못하게 될 테니 말이야. 크크크큭.”

휘스슷. 스스슷.

통쾌하게 웃어젖히는 진몽과 은도평의 곁을 붉은 파도가 스쳐 지났다. 연화봉을 향해 거슬러 오르기 시작했다. 혈교의 화산침공 서막이 열렸다.

땡땡땡땡땡!

비상종은 외길을 타고 번져 순식간에 연화봉 정상까지 이르렀다.

“뭐야? 비상종이잖아?”

“무슨 일이야?”

하필이면 옥진 도장이 화산의 전력 태반을 거느리고 하산한 이때 비상종이 울리다니!

‘안되겠다. 내가 직접 가서 보고 와야지.’

타닷.

심상치 않은 느낌에 본산을 지키려 남아있던 매화검수 중 한 명인 운화도장은 즉시 옥녀봉을 향해 신법을 전개했다.

옥녀봉은 산문인 옥천문에서 화산파가 자리한 연화봉까지 이어진 삼천구백구십구 개의 돌계단을 한눈에 내려다 볼 수 있는 곳으로, 그곳엘 가면 무슨 일인지 알 수 있으리라.

“허억!”

옥녀봉에 도착한 운화도장의 눈이 튀어나오기라도 할 듯 부릅떠졌다.

붉은 물결.

타오르듯 붉은 적의를 입은 무리가 보무도 당당하게 화산을 오르고 있었다.

“혀, 혈교!”

서두르는 기색도 없었다.

남아있는 도사들의 수가 얼마나 되던 어차피 결과는 변하지 않는다는 듯 체력과 내공을 보존하며 천천히 오르는 중이었다.

그 수가 무려 수백여 명!

화산에 큰 위기가 찾아온 것이다.

“큰일 났다.”

혈교의 침공을 확인한 운화도장은 즉시 연화봉을 향해 신법을 전개했다.

스파앙.

전력을 다해 연화봉으로 되돌아온 운화도장은 그대로 연화각 앞에서 고함을 질렀다.

“혈교다! 혈교가 쳐들어오고 있다!”

단 한 번도 생각해보지 못한 놀라운 말에 모두가 혼비백산 놀랐다.

“혀, 혈교!”

“놈들이 여길 쳐들어오고 있다고?”

땡땡땡땡땡!

미친 듯이 울려 퍼지는 비상종 소리와 운화 도장의 고함 소리!

“혈교라니!”

“놈들 숫자는?”

“시간은 얼마나 남았느냐?”

제각기 초조한 마음으로 옥진에게서 좋은 소식이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던 수뇌부들이 그대로 튀어 나왔다. 목소리를 높였다.

“중간 지점을 지나고 있었습니다. 놈들의 숫자는 오백 이상, 남은 시간은 아무리 길게 잡아도 한 시진을 넘지 않을 것입니다.”

암담한 보고였다.

화산파에 남아 있는 전력은 평소의 사 할 정도에 불과한 상태, 혈교의 정예 오백 명 이상이 상대라면 전멸도 각오해야만 하는 것이다.

피식.

“그나마 다행이군.”

남아 있는 사람들 중 가장 어른인 옥허도장이 돌연 가볍게 웃었다. 며칠 전만 같아도 허둥지둥 어찌할 바를 몰랐을 것이나 옥진 덕에 화산의 검에 대해 새로운 자각을 한 보람이 있었다.

“최소한 화산의 미래를 걱정할 일은 없지 않은가?”

옥진도장이 화산의 검수 육 할을 거느리고 하산한 것을 두고 하는 말이었다.

노군각주가 빙그레 웃으며 옥허의 말을 받았다.

“맞습니다. 옥진사형께서 화산의 미래 태반을 거느리고 있으니 우리는 아무런 걱정 없이 후련하게 싸우기만 하면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스르릉.

“허허허. 오늘 막내의 검에서 검향이 피어오르는지 아닌지 사형들께 똑똑히 보여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옥자 배분의 마지막 장로인 옥인도장이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검을 뽑아들었다.

이런 때를 맞아 수뇌부의 행동이란 그야말로 천금의 무게를 가진다. 사소한 행동 하나로 단체의 분위기를 좌우하게 되는 거다.

일말의 주저함도 없이 전의를 불사르는 옥허와 수뇌부의 태도에 운화도장을 비롯한 화산의 검수들 분위기까지 덩달아 변했다.

스릉. 스릉. 스르릉.

모두가 검을 빼들었다. 결사의 의지를 불태웠다.

‘싸운다!’

‘기왕 이렇게 된 것 후련하게 싸워줄 테다.’

‘죽더라도 후회 없이!’

‘배운바 모든 것을 펼쳐 보이고 죽으리라.’

전투를 맞이하는 긴장감이야 어쩔 수 없었지만 최소한 공포 따위에 몸이 굳을 염려는 사라졌다.

“화산의 제자들이여-!”

우릉.

옥허의 고함이 우레처럼 연화봉 정상을 떨어 울렸다.

“혈교의 사특한 무리가 화산을 향해 오고 있다. 그들에게 화산의 검이 어떤 것인지 보여줄 의향이 있느냐?”

“있습니다.”

“화산의 검이 어떤 것인지 똑똑히 보여줄 것입니다.”

우르릉.

남아 있던 화산의 제자들이 우레와 같은 목소리로 옥허의 부름에 화답했다.

옥허의 시선이 운화도장에게로 향했다.

“운화!”

“예, 사숙!”

“네게 특명을 내리겠다.”

“하명만 하십시오. 제자, 신명을 다해 이루고 말겠습니다.”

“좋다. 너는 지금 즉시 사, 오대 제자들을 이끌고 조양봉을 넘어 화산을 내려가도록 해라.”

“예, 옛? 지, 지금 그게 무슨…….”

운화도장이 눈을 부릅떴다.

말도 되지 않는다는 듯 고개까지 강하게 흔들었다.

그때 옥허의 목소리가 따뜻하게 이어졌다.

“잘 알지 않느냐? 사, 오대 제자들은 혈교에 맞설 실력이 되지 않는다.”

“사숙.”

“안 되는 것을 빤히 알면서도 그들을 앞세우는 것은 도인이 할 짓이 못된다.”

“……!”

운화도장의 고개가 푹 숙여졌다.

“더불어 장문인의 방을 뒤져 가장 중요한 비급 몇 권을 찾아와 네게 맡길 터이니 제자들과 함께 몸을 피해라. 화산의 길은 모두 외길, 우리가 앞을 막으면 너희들은 충분히 살아서 후일을 도모할 수 있을 것이다.”

“사숙!”

운화도장의 눈에 그렁그렁 눈물이 고여 들었다.

“어허! 네가 정녕 일을 그르치고 싶은 것이냐? 시간이 없다. 어서 움직이거라.”

옥허가 짐짓 목청을 돋웠다.

하지만 그 안에 담긴 진심을 어찌 모르랴?

“반드시, 반드시 화산의 진정한 검을 깨달아 화산의 이름을 드높이고 천추만대까지 잇도록 하겠습니다.”

“오냐, 오냐. 그러면 된다. 그러면 돼…….”

옥허가 인자한 얼굴로 미소를 지었다.

재빨리 주인 없는 옥현의 방으로 달려가 자하신공을 비롯한 몇 권의 비급을 꺼내온 후 운화도장의 손에 건넸다. 길을 재촉했다.

“가거라. 어서!”

그사이 사, 오대 제자들을 불러 모은 운화도장이 고개를 깊이 숙여 보였다.

“사숙…… 그럼 안녕히…….”

운화도장이 뜨거운 눈물을 쏟았다. 연화각 뒤로 길게 난 외길을 따라 움직이기 시작했다.

“허허허! 되었다. 이제 홀가분하게 싸우기만 하면 되는 것이로구나.”

“하하하. 사형, 기다리지 말고 나아가 싸우는 것은 어떻겠습니까?”

“그것 참 좋은 생각입니다. 화산의 주인은 우리 아니겠습니까? 가만히 앉아 기다리느니 길목을 지켜야지요!”

옥허의 말에 노군각주와 옥인도장이 호응했다.

“그거 좋겠군. 놈들을 일망타진할 수 있는 옥녀봉 앞 절벽이 좋겠어!”

운화 도장이 혈교의 움직임을 살폈던 곳.

그나마 넓던 폭이 급격이 좁아지는 절벽으로 소수로써 많은 수의 적을 맞기에 안성맞춤인 곳이었다.

스릉.

검을 뽑아 든 옥허 도장이 큰 소리로 외쳤다.

“나아가자, 화산의 검들아! 혈교의 무리들에게 화산의 검이 어떤 것인지 똑똑히 보여주도록 하자꾸나!”

“와아아-!”

“검향천추!”

“화산무궁!”

“가자!”

불과 삼백 명 남짓한 화산의 검수들이 연화봉 아래를 향해 밀고 내려가기 시작했다.

***

화산의 초입인 화음현.

“여기서 잠깐 정지!”

용무린은 계속된 강행군을 잠시 멈춰 세웠다.

“어째서 그러느냐?”

“무슨 문제라도 있느냐?”

화운장로와 효정대사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어왔다.

저 멀리 운무에 가려진 화산을 한 번 돌아 본 용무린의 눈살이 살짝 찌푸려졌다.

“한시가 급하오이다, 용 대협!”

옥진도장이 목소리를 높였다.

본진인 줄로만 알았던 혈교 선발대의 뒤를 쫓아오던 것을 용무린이 설득을 해 함께 되돌아오고 있었는데, 사문의 위기 앞에 애가 달았다.

“급한 이유가 생명을 구하기 위함이지 않던가요?”

“당연하오!”

“그래서 이러는 거예요. 잠시만 생각 좀 정리하게 가만히 계세요, 쫌.”

“…….”

옥진은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용무린은 조용히 생각을 정리했다.

‘모두가 옥쇄를 할까? 아니면 힘없는 후인들을 살리기 위한 조치를 취했을까?’

전자라면 그냥 이대로 달려가면 된다.

하지만 후자의 경우라면 이대로 달려가서는 시간상 그들을 구할 도리가 없다.

‘여기서 화산파가 있는 연화봉 정상까지는 아무리 애써도 반나절 거리란 말이야…….’

놈들이 진짜 빈집을 털기 위해 왔다고 가정하면 우리가 도착할 때까지 버틸 수가 없다. 소림과 무당을 동시에 무너뜨리겠다고 공언했던 힘까지 쏟아 부으면 더더욱 빨리 정리가 될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이렇게 달려온 의미가 없지.’

기껏 살리려고 달려왔는데 모두가 죽은 후다?

복수도 복수지만 조금이라도 살려야만 애써 달려온 의미가 있는 거다.

용무린의 입이 불쑥 열렸다.

“사, 오대 제자들을 살리려고 할까요? 아니면 모두 함께 죽자고 할까요?”

“응?”

“아!”

화운과 효정대사는 단숨에 그 말의 의미를 알아차렸다.

“후자다!”

“당연히 살리려고 했을 게다.”

“예로부터 화산에 이르는 길은 하나라 했다. 암벽으로 이뤄진 외길이지. 전면을 틀어막고 뒷길을 통해 내려 보냈을 거다.”

“조양봉을 휘돌아 내려오는 길이 있다. 산문인 옥천문으로 가는 길은 직진, 조양봉을 통해 내려오는 길은 여기서 오른쪽으로 돌아가야 한다.”

잠자코 듣고 있던 옥진도장이 벼락처럼 명령을 내렸다.

“운초!”

“예, 사숙!”

“매화검수 절반과 매화검대 절반을 내어줄 터이니 지금 즉시 조양봉을 향해 나아가거라!”

척하면 착이다.

“기필코 제자들을 구하겠습니다.”

지금까지 나눴던 대화를 듣고 있던 운초는 더 이상의 말이 필요 없다는 듯 매화검수와 매화검대를 이끌고 조양봉을 향해 신법을 펼쳤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용무린의 시선이 진무단과 백리검가에게로 돌려졌다.

“조양봉을 향해 돌아가 주세요. 혈교 놈들이 본산을 돌파하면 틀림없이 사람을 나눠 쫓을 거예요. 매화검수와 매화검진만으로는 부족할 테니 지켜보다 밀릴 때 옆을 치세요.”

“염려 마십시오, 총순찰.”

진무단주가 즉시 포권을 취하며 답했다.

같은 신주오가의 일원인 용무린으로부터 명령을 받는 것 같아 언짢았던 모양인지 백리건후가 대답을 망설였다. 그 사이 백리천월이 나섰다.

“확실하냐? 놈들이 그곳으로 오는 것이냐?”

“당연하지. 각오 단단히 해. 소림과 무당을 동시에 상대하겠다고 공언한 놈들이야.”

“흥! 놈들에게 백리검가의 검이 어떤 것인지 똑똑히 보여줄 것이다.”

백리천월이 두려움 없이 외쳤다.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던 백리건후가 만족한 듯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조양봉 쪽은 염려 마라. 우리가 가겠다. 가자!”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돌아서는 백리건후.

타닷. 휘릭. 휘리릭.

대뜸 신법을 전개하는 백리건후와 백리천월을 따라 백리검가의 정예가 움직였다.

“연화봉에서 뵙도록 하겠습니다, 총순찰!”

“상황이 급하면 연기를 피워 올리세요. 어떻게든 해보도록 할게요.”

“알겠습니다. 그럼!”

휘슷.

진무단주 역시 조양봉을 향해 떠났다. 진무단이 절도 있는 태도로 그 뒤를 따랐다.

“아무래도 안 되겠소. 우린 먼저 가겠소이다. 가자!”

마음이 급한 옥진 도장이 먼저 신법을 펼쳤다.

그 뒤를 화산의 매화검수와 매화검대 그리고 상청검대가 따라 움직였다.

“우리도 가죠!”

“그래!”

“허허허. 앞장서거라.”

날 듯이 신법을 전개하는 용무린의 모습을 화운과 효정대사가 흐뭇한 얼굴로 따랐다. 어쩐지 오늘 화산에 일어난 혈풍이 미풍으로 그칠 것만 같았다.

***

옥녀봉 정상.

좁디좁은 암벽 외길을 틀어막은 화산의 검수들 앞에 드디어 혈교의 정예가 모습을 드러냈다.

“오! 이렇게 친절할 수가 있나?”

“마중까지 나와 줬네?”

“크흐흐. 약속하마. 아프지 않게 죽여주마.”

“푸흐흐. 목을 길게 빼거라.”

말이야 비웃듯 했지만 혈루단주 진몽과 혈풍단주 은도평은 내심 감탄하고 있었다.

옥허와 노군각주와 옥인도장 그리고 두 명의 매화검수로 이뤄진 매화검진을 중심으로 다시 네 개의 매화검진이 펼쳐져 있었다. 모두 합해 다섯 개인 매화검진의 기세가 만만치 않았다.

‘이빨이 빠졌어도 호랑이는 역시 호랑이라 이건가?’

‘앞에 나선 놈들을 죄 쓰러뜨려도 하나 밖에 없는 외길을 온통 매화검진이 차지하고 있잖아?’

‘검진이 대체 몇 개야? 이대로 힘으로 돌파하면 피해가 만만치 않겠는데?’

‘혈교의 화려한 재림을 선포해야 하거늘 피해가 너무 커서야 체면이 서겠나?’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마주쳤다. 보일 듯 말 듯 슬그머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걸 쓴다!’

‘단숨에 놈들을 깨뜨린다.’

혈교의 야심작.

팔십 년 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적은 세력으로도 화려한 재림을 꿈꾸게 만든 귀물을 오늘 쓸 생각이었다.

“추생!”

“마전석!”

두 사람은 동시에 부단주의 이름을 크게 불렀다.

그 외침이 무슨 뜻인지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는 듯 추생과 마전석은 휘하의 마인들 중 열 명에게 제각각 시선을 던졌다.

시선을 받은 마인들이 품속에서 주먹 크기의 쇠구슬을 꺼내들었다.

칼금이 먹여져 이리저리 깊은 선이 파여진 쇠구슬이었는데 마인들은 길게 튀어 나와 있는 끈에 발화석을 당겨 불을 붙였다.

치이이. 치이이이.

매캐한 냄새와 함께 무엇인가 타들어가는 소리가 들렸다.

“뭐하는 수작이냐?”

“냉큼 나서라 이놈들! 내 너희들에게 화산의 검이 어떤 것인지 똑똑히 보여주겠노라.”

“덤벼라!”

옥허와 노군각주와 옥인도장이 노성을 발했다.

화산을 침범한 혈교의 마인들이 당당히 싸우려는 대신 괴이한 수작을 부리자 까닭 모를 위기감이 치밀어 올랐던 것이다.

휙. 화악. 휘릭.

화답이라도 하듯 앞으로 나선 혈교의 마인 스무 명은 일제히 손에 들고 있던 쇠구슬을 던졌다. 꽁지가 빠져라 뒤로 물러났다.

“이까짓 것!”

“단숨에 베어 주마!”

“개진하라! 매화검진 회(回)!”

휘리릭. 휘리리릭.

다섯 개의 매화검진이 일제히 회전을 시작했다.

톱니바퀴 맞물리듯 돌아가며 떨어져 내리는 쇠구슬을 향해 검을 뻗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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