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난세
매화검진에서 뻗어 나온 검들이 거의 동시에 쇠구슬을 베었다.
바로 그 순간!
태양이 내려앉기라도 한 것일까?
진홍빛 광채가 터져 나왔다.
동시에 강렬한 충격파가 해일처럼 밀려왔다. 매화검진을 통째 집어 삼켰다.
출렁! 우지끈!
옥허와 노군각주 그리고 옥인도장까지 참여한 매화검진이 한차례 휘청거리는가 싶더니 그대로 부서졌다.
제일 먼저 쇠구슬을 베었던 검들이 터져 나갔다.
수수깡이라도 되듯 바스러져 어디론가 날려 사라졌다. 그리고도 모자라 밀려든 충격파에 쇠구슬을 때렸던 팔이 어깨 어림까지 날아갔다.
끝이 아니었다. 피부가 쩍쩍 터지고 갈라졌다. 마지막으로 밀려든 지독한 화염에 순간적으로 검게 타들어갔다.
“크아악!”
“커허-억!”
“우와악!”
뒤늦게 터지는 비명과 함께 옥허와 노군도장과 옥인의 몸이 뒤로 훌훌 날렸다. 그들과 함께 매화검진을 이루고 있던 매화검수들 역시 피투성이가 되어 나뒹굴었다.
이윽고 드러난 참상이라니!
선두에서 쇠구슬을 베어냈던 옥허의 가슴과 복부가 온통 찢기고 갈라져 있었다. 초절정에 이르는 내공으로 보호하고 있었음에도 이 모양이었다. 살아 있어도 살아 있다고 할 수가 없었다.
노군각주와 옥인도장 역시 마찬가지.
검을 휘둘렀던 팔이 어깨까지 짓뭉개져 있었으며 가슴은 물론이고 얼굴과 목뼈까지 몽땅 터지고 부러지고 갈라졌다. 검게 그을린 채 절명했다.
실로 놀라운 결과였다.
쇠구슬 스무 개를 던져 매화검진 다섯 개를 한순간에 풍비박산 내다니!
“끄으으-.”
“사, 살려줘-어…….”
그나마 목숨을 부지하고 있는 도사들의 상태도 처참하긴 매한가지였다. 폭발 순간, 깊게 파인 선을 따라 조각나 사방으로 비산한 겉면의 쇠 조각들이 암기가 되어 파고들었기 때문이었다.
“크크큭. 이거, 정말 괜찮은 물건이었군 그래?”
“푸흐흐. 그러게 말이야.”
“이 물건만 있으면 소림이나 무당이라고 해도 반나절이면 무너뜨릴 수 있었겠는걸?”
“에이, 반나절씩이나 걸리려고? 위력을 보니 한 시진이면 족하지 싶은데?”
“크크큭. 그런가?”
혈루단주 진몽과 혈풍단주 은도평은 뇌화탄의 위력에 만족한다는 듯 웃음을 터뜨렸다.
“사숙!”
“각주니-임!”
외길 절벽을 온통 채우고 있던 검수들이 앞쪽으로 달려 나왔다. 비통한 얼굴로 폭사당한 사문의 어른들과 사형제들의 주검을 챙겨 뒤로 물러났다. 매화검진을 다시 펼쳐 방어태세를 갖췄다.
“져, 졌다-아…….”
겨우 겨우 목숨을 부지하고 있던 옥허가 피가래 끓는 목소리를 내었다.
“사숙! 보중하십시오. 지금부터는 저희가 맡겠습니다.”
몇 남지 않은 매화검수들을 이끌던 옥초 도장이 이를 갈며 외쳤다. 옥허를 뒤로 끌어당겼다. 진몽과 은도평을 향해 서슬파란 시선을 보냈다.
옥허는 하나 남은 팔을 힘없이 흔들었다. 마지막 힘을 쥐어짜 목소리에 보탰다. 진몽과 은도평을 향해 외쳤다.
“화, 화산이 져, 졌다.”
마음만 같아서는 비겁한 놈들이라고 욕을 해주고 싶었다.
하지만 저 무시무시한 위력의 새로운 무기 앞에 그럴 용기가 없었다. 자신조차 이러할진대 나머지 제자들이야 불을 보듯 빤하지 않은가?
“그, 그러니 제발…… 제바-알…….”
그래서 참담한 마음을 겨우 추슬렀다. 떨어지지 않는 입술을 힘겹게 떼어 애원했다.
“제발 뭐?”
“나머지 말코들은 살려달라고?”
빈정거리며 옥허의 말을 받던 진몽과 은도평의 눈가에 지독한 살기가 번졌다.
“산다는 것은 곧 피로 거듭난다는 것!”
“살려주지. 단, 혈신의 가호를 받아 새로운 삶으로 거듭나 살 수 있도록 만들어 주마.”
절대로 살려줄 수 없다는 뜻에 다름 아니다.
애초에 말이 안 되는 바람이었던 것이다.
혈교의 재림을 화려하게 세상에 알리는 순간이거늘 어찌 화산의 무인들을 살려두어 후환을 남기겠는가? 게다가 뇌화탄을 사용했다는 사실도 감추어야만 한다.
“말코들에게 피의 거듭남을 선사해라!”
“가라, 혈교의 전사들이여-어!”
후욱. 훅. 휘릭.
그때만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혈교의 마인들이 쏟아져 나왔다. 매화검진을 향해 밀려갔다. 옥허의 눈이 절망으로 물들었다.
“태, 태상 노군이시여……. 화산을, 화산으-을…….”
눈도 감지 못한 채 옥허의 숨이 끊겼다.
“사숙! 사수-욱!”
숨이 끊긴 옥허를 끌어안은 채 옥초가 피눈물을 뿌렸다.
카앙. 카카캉. 쉬각. 피쉿.
“크악!”
“커헉!”
그 순간에도 화산의 검수들이 허무하게 피를 뿌리며 쓰러지고 있었다. 매화검진을 펴지 않고 있는 검수들은 혈영대법을 펼친 마인들의 손에 맥을 추지 못했다.
따앙! 쉬각.
“크악!”
후웅. 퍼퍼펑.
“커허억!”
매화검수들이라 할지라도 혈영대법을 바탕으로 마공을 펼치는 혈교의 마인들 앞에 무력했다. 작은 생채기를 내는 것을 끝으로 쓰러졌다.
“으아아-아!”
휘슷.
옥허를 가만히 땅에 내려놓은 옥초도장이 발악을 하듯 검을 들고 달려들었다. 이십사 수 매화검법을 펼쳐 혈교의 마인들을 휩쓸었다.
쉬이익. 쉬가가각. 패애액.
일초식 매화노방으로부터 시작해 이십사초 매화만리향까지 단 한 호흡에 전력을 다해 펼쳤다.
“크악!”
“컥!”
옥초도장의 검이 스쳐 지난 혈교의 마인들이 픽픽 쓰러졌다. 금방이라도 무너질 듯하던 매화검진 두 개가 다시 힘을 되찾았다.
“힘을 내라 화산의 정기여!”
“혈교의 악적들을 무찔러라!”
수뇌부가 참여한 매화검진마저 단숨에 박살을 내던 뇌화탄의 위력을 보았으면서 화산파의 누구도 물러나려 들지 않았다. 목숨을 내던지듯 분전하는 옥초를 보며 힘을 냈다. 사력을 다했다.
피식.
“피라미가 용이 되려 애를 쓰는구나.”
“제가 상대하겠습니다.”
지켜보던 혈루단 부단주 추생이 대뜸 나섰다. 혈루단주 진몽이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혈교의 재림을 알리는 자리다. 단숨에 끝내라.”
“명!”
짧은 대답과 함께 추생은 나직한 목소리로 혈영대법을 불러일으키기 시작했다.
웅웅웅. 화아악.
혈신을 찬양하는 주문이 이어짐에 따라 추생의 전신에서 예의 피처럼 붉은 색의 기운이 번져 나왔다.
반짝.
추생의 검이 요사스런 붉은 빛을 뿜어내었다.
“놈! 네 상대는 나다!”
후욱.
준비가 끝나기가 무섭게 떠올라 옥초 도장을 향해 떨어져 내렸다.
“오너라-아!”
옥초의 검이 춤을 추듯 사선으로 거슬러 올랐다.
검 끝에서 피어난 다섯 송이의 매화가 덩달아 나풀거리며 함께 날았다.
타앙. 타타타타-앙.
둔중한 타격음과 함께 굵은 핏방울이 사방으로 튀었다. 전력을 다했음에도 채 흘려내지 못한 혈영대법의 파괴력에 피부가 터지고 갈라진 것이다.
“으아-합!”
그럼에도 불구하고 옥초는 물러서지 않았다.
이를 악물고 단전을 쥐어짜 검에 실었다. 사십오 년 동안 갈고 닦아온 이십사 수 매화검법에 오롯이 담아 펼쳤다.
후웅. 화아악.
눈부시게 피어오르는 아홉 송이의 매화꽃.
변화가 극심하여 실초와 허초를 구분하기 난해하다는 매화구변의 초식이었다.
피잉. 피잉. 휘스슷.
아홉 송이의 매화꽃이 춤을 추듯 이리저리 얽혔다. 추생을 향해 밀려갔다.
“꺼져라-아!”
후우웅. 콰아아-.
핏빛 안개와도 같은 기운이 추생 앞을 철벽처럼 모여들었다. 아니, 방패라도 된 듯 그대로 밀고 들어왔다. 실초와 허초를 가리지 않고 후려쳤다.
쿠왕. 콰앙. 터터터터텅.
아홉 송이 매화꽃이 씻은 듯 사라졌다.
난해하기 짝이 없는 변초식을 힘으로 뭉개버린 것!
“크허억!”
옥초 도장이 덩어리 피를 쏟으며 뒤로 쭉 밀려갔다.
휘슷.
때를 놓치지 않고 거리를 좁힌 추생이 하얀 이를 드러내며 외쳤다.
“놈! 혈신께 아뢰거라. 내가 바로 혈루단의 부단주 추생이니라!”
스각.
옥초도장의 목이 둥실 떠올랐다.
“……!”
사람의 목숨은 참으로 모질고 질기다.
목이 잘렸지만 아직 의식이 끊기기 전!
훌쩍 떠오른 옥초도장의 눈에 형편없이 부러지는 매화검진과 제자들의 모습이 들어왔다.
뜨거운 눈물이 저절로 흘렀다.
하지만 결코 꺾이지 않는 투지를 뿜어내는 제자들의 모습을 보며 옥초는 희망을 품었다.
‘언제고 알게 되리, 화산의 검이 어떠하다는 것을…….’
화산에 검향이 다시 일었다.
홀연히 연화각을 찾아와 검향지기를 뿜어냈던 옥진 사숙의 모습이 아직도 생생했다. 그분이 돌아오고 함께 떠났던 많은 사형제들이 되돌아오는 날!
‘화산은 천추에 우뚝 서게 되…….’
옥초의 의식이 그대로 끊어졌다.
“크아악!”
“커허억!”
“큽!”
옥초의 희망이 이뤄지려면 아직 멀었다는 듯 화산의 검수들은 계속해서 쓰러져갔다.
그러나 옥초가 자신했듯 누구 한 사람 비겁한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끝없는 투지로 진몽과 은도평의 가슴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이거, 뇌화탄이 아니었다면 피해가 만만치 않았겠는데?’
‘화산 따위가 이 정도인데 소림과 무당이었다면……?’
혈교의 재림을 선포하는 시기가 십 년만 더 뒤로 미뤄졌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마저 들 정도였다.
“뭣들 하느냐?”
“빨리 길에서 놈들을 치워라.”
“승리가 눈앞이다.”
“혈영대법을 최고로 끌어 올려라.”
진몽과 은도평이 나약한 마음을 털어내겠다는 듯 살기 어린 목소리로 수하들을 독려했다.
카앙. 카카캉. 스각. 서걱.
“크악!”
“커억!”
외마디 비명과 함께 쓰러져 가는 사람들.
분명 그 안에는 혈교의 마인들도 있었지만 화산의 검수들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허어억!”
털썩.
마지막으로 쓰러진 매화검수를 끝으로 길이 뻥 뚫렸다.
추생과 마전석을 선두로 한 혈교의 마인들이 화산파의 전각들이 있는 연화봉을 향해 밀려들었다.
“깡그리 때려 부숴라!”
“불을 질러라! 다 태워 버리는 거다!”
“충!”
화산파 점령!
승리에 신이 난 혈교의 마인들이 닥치는 대로 건물을 부쉈다. 불을 질렀다.
쾅. 쾅. 콰쾅. 화르륵. 화르륵.
수백 년은 족히 넘은 유서 깊은 화산파의 건물들이 무너져 내렸다. 많은 부분이 돌로 만들어졌지만 그래도 탈 것은 다 탔다.
“그런데 말코 놈들 숫자가 생각보다 많이 적지 않았나?”
“자네도 그렇게 생각했나?”
“응. 확실히 생각보다 많이 적었어.”
“혈세단의 뒤를 쫓았던 놈들 숫자를 감안해도 듣던 것에 비해 많이 모자랐지? 겨우 이백여 명이나 되었을까?”
느긋하게 화산파가 무너지고 불에 타오르는 것을 지켜보던 두 사람의 눈이 허공에서 마주쳤다.
“혹시?”
“설마……?”
두 사람의 눈이 동시에 동그래졌다.
초록은 동색이라고, 서로 같은 생각을 한 것이다.
진몽과 은도평은 즉시 새로운 명령을 내렸다.
“감히 도망친 말코들이 있다.”
“놈들을 쫓아라!”
“화산파는 외길이다!”
“우리가 올라온 곳과는 반대 방향으로 갔을 것이다.”
추생과 마전석이 살기 띤 눈으로 나섰다.
“제가 가겠습니다.”
“깡그리 죽이고 오겠습니다.”
진몽과 은도평의 고개가 동시에 끄덕여졌다.
“가라!”
“혈교의 재림을 알릴 재물 한 놈만 남기면 된다.”
“충!”
“충!”
추생과 마전석이 동시에 답하며 돌아섰다. 혈루단과 혈풍단에서 백 명씩 뚝 떼어 추격을 개시했다.
***
타닷. 휘리릭.
전력을 다해 화산을 오르는 무인들.
그 중 선두에서 신법을 전개하던 옥진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화, 화산이…….”
저 멀리 연화봉에서 검은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정녕 혈교의 마인들이 들이쳤단 말인가? 정녕?”
용무린의 말을 듣고 방향을 바꾸었으면서도 사실 혈교의 화산 침공이 우려로 인한 과도한 추측에 불과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용무린의 추측은 사실이었다. 혈교는 침공을 해왔고 빈집이나 다름이 없던 화산은 불길에 휩싸였다. 옥진의 정신이 아득해졌다.
‘내 죄다. 내 죄야.’
모든 것이 다 자신의 잘못만 같았다.
백척간두에서 한 발을 내딛어 회심을 하고 검향지경에까지 이르렀지만 옥현의 뜻에 동조해 혈교와 손을 잡은 것을 눈감았던 원죄 때문이었다.
아득.
“사숙! 사형제들을 구해야 합니다.”
뒤에서 따라오던 매화검수 옥명이 이를 갈며 외치는 소리에 옥진은 겨우 정신을 차렸다.
‘그래. 그래야지.’
내가 죽더라도 사형제들과 제자들을 살려낼 것이다.
반짝!
옥진의 눈에 도사답지 않은 살기가 걸렸다.
“화산의 제자들은 전력으로 신법을 전개하라!”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암향표의 신법에 내공이 가일층되었다.
스파-앙.
옥진의 신형이 길게 늘어지듯 보였다.
옥명을 비롯한 화산의 검수들이 얼음장 같은 시선으로 그 뒤를 따랐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용무린의 입이 불쑥 열렸다.
“우리는 한 박자 속도를 줄입니다.”
“잘 생각했다.”
“분통이 터지지만 호흡을 고르는 것이 현명한 일이지. 그러자꾸나.”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용무린의 우려를 알고 있다는 듯 화운과 효정대사가 뒤를 향해 외쳤다.
“모두 속도를 줄이고 호흡을 골라라.”
“체력과 내공의 안배에 유념하거라. 싸움이 벌어지면 한 줌의 내공이 아까울 게다.”
그 즉시 신법의 속도가 줄었다.
모두 호흡을 조절했다. 내공과 체력 안배에 들어갔다.
‘하아, 찜찜해라.’
용무린은 입맛이 무척 썼다.
혈교가 소림과 무당 대신 화산을 목표로 잡은 것은 분명히 자신이 화산과 종남을 꼬여내 마영방에서 서로 상잔을 시킨 영향이 클 것이기 때문이었다.
‘어쩌겠어? 자승자박이지 뭐.’
그것이 사실이긴 하지만 찜찜함은 여전했다. 사라지지 않았다.
“자, 한시가 급하니 능력이 되는 사람들만 먼저 가도록 하죠.”
스파-앙!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용무린의 신형이 앞으로 쭉 뻗어나갔다.
“한 사람이라도 더 살리고 싶다 그거지? 좋다. 내가 빠질 수야 없지.”
화운이 뒤를 이어 신법에 내공을 더했다.
“허허허. 선재, 선재라…….”
효정 대사도 합세했다. 소림 일절 금강부동신법을 펼쳐 바짝 따라붙었다.
“아미타불!”
사대금강의 하나인 일각이 질세라 신법을 전개했다.
***
검붉은 화염을 내뿜던 불길이 어느새 잦아들었다.
원체 돌로 이뤄진 것이 많다보니 탈 것이 금세 동이 난 것이다.
“챙길 것 대충 다 챙겼으면 빠져 나가도록 하지.”
“그래. 돌아가서 축배나 들도록 하자고.”
서고를 나서는 진몽과 은도평의 얼굴에 만족감이 어렸다.
도가 검문의 양대 산맥으로 추앙받는 화산파의 서고에서 막대한 양의 비급을 챙겼기 때문이었다.
조양봉 쪽으로 도주했던 도사들의 처리가 아직 남았지만 추생과 마전석이 수하들을 이끌고 달려갔으니 오래지 않아 마무리하고 돌아올 것이다.
“자하신공이 없어서 아쉽군.”
“중요비급 몇 권이 빠지긴 했지만, 그래도 말코 놈들이 목숨처럼 생각하는 이십사 수 매화검법과 다른 것들은 손에 넣었지 않나? 그럼 됐지 뭐.”
“그래. 가서 연구하도록 하자고.”
“다시 부활할지 안 할지는 모르겠지만, 앞으로 화산파 놈들은 본교의 고수들 앞에서는 기를 펴지 못하겠지?”
“당연하지. 우리가 챙겨간 비급을 연구하면 놈들 무공의 장단점을 죄 파악하게 되지 않나? 한데 놈들이 어찌 기를 펴겠나?”
“크크큭. 좋아, 좋은 일이야.”
진몽과 은도평이 주변을 향해 큰 소리로 외쳤다.
“뭣들 하느냐? 이제 가자!”
“가서 축배들 들도록 하자. 내가 거하게 쏘겠다.”
“우와아!”
“혈교 만세!”
혈교의 마인들이 환호했다.
그렇게 화산파의 파괴와 약탈이 마무리가 되어 갔다.
진몽과 은도평은 느긋한 태도로 화산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들이 외길을 따라 옥녀봉에 이르렀을 때였다.
“이, 이놈들!”
“이 악독한 놈들!”
진몽과 은도평은 정신없이 달려 온 옥진과 화산파의 검수들과 다시금 마주해야만 했다.
침공했을 때와는 완전히 뒤바뀐 자리의 배치.
너른 곳은 옥진을 비롯한 화산파의 검수들이 이미 차지를 했고 자신들은 옥허 등이 그러했듯 좁은 곳에 자리를 잡아 갇힌 모양새가 되었다.
더구나 옥진이 이끌고 있는 검수들은 화산의 정예.
그것도 육 할에 이르는 무서운 힘이었다.
‘큿. 그게 뭐가 어때서?’
‘숫자 따윈 우리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어.’
진몽과 은도평의 얼굴에 자신만만한 미소가 걸렸다.
뇌화탄의 위력을 그만큼 믿는 것이다.
‘그것도 그것이지만, 화산파 수뇌부와 검을 한 번 섞어 보긴 해야 하지 않을까?’
‘하긴, 아까는 너무 쉬워서 조금 아쉽긴 했어.’
고수들끼리 벌이는 생사투에서 살아남으면 언제나 큰 발전이 따라 오는 법, 그 점을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진몽과 은도평은 약간의 여유를 즐겨보기로 마음먹었다.
‘어차피 조양봉으로 향했던 애들도 합류시켜야 하니 잠시 즐겨 볼까?’
‘여차하면 그걸 쓰지 뭐.’
애당초 패배 따윈 생각지도 않는 두 사람이었다.
스릉. 촹.
“덤벼라, 말코.”
“아까는 너무 실망했어. 이번에는 조금 더 힘을 내봐.”
진몽과 은도평이 동시에 검을 빼들었다. 한 발 성큼 앞으로 나섰다.
하지만 화산파의 도사들은 아직 두 사람이 안중에 없었다. 너무나도 충격적인 옥녀봉의 모습에 적지 않은 충격을 받았던 것이다.
화산파 도인들의 피로 물든 옥녀봉이라니!
‘옥허. 노군각주. 옥인아…….’
옥진의 눈가에 그렁그렁 눈물이 맺혔다.
평생을 함께 했던 다정한 사형제들, 옥허를 비롯해 노군각주와 막내사제이던 옥인도장까지 싸늘하게 식은 주검이 되었다. 함부로 바닥을 나뒹굴고 있었다. 그 모습이 도무지 믿기지 않았다.
‘내 죄다. 모두 다 내 죄야.’
자신의 사형제들뿐만이 아니었다.
올해가 되어야 비로소 매화검수에 오를 수 있었던 제자와 언제나 활기찬 얼굴로 매화검진을 연습하던 많은 제자들이 깡그리 피 속에 누웠다.
“이, 이 빚을 어이…… 이 빚을 어이 갚을꼬?”
“덤비라니까 말코?”
“이번에는 힘을 더 내 보라고!”
진몽과 은도평이 다시 한 번 느물거렸다.
“……!”
그제야 옥진의 얼굴이 천천히 두 사람에게로 향했다.
옥진의 눈가에 지독한 살기가 어렸다.
그리고…….
스릉. 휘슷.
아무런 말도 예비 동작도 없이 그대로 검을 뽑아들며 거리를 좁혔다. 진몽과 은도평을 향해 검을 쭉 찔러 넣었다.
쉬리릭. 쉬리릭. 후웅. 후웅. 후우웅.
파르르 떨리는 옥진의 검 끝에서 대뜸 매화꽃이 수도 없이 피어올랐다. 이십사 수 매화검법의 마지막 초식인 매화만리향이었다.
꽃송이 하나하나가 모두 실체화된 강기.
하지만 진몽과 은도평의 입가에는 진득한 비웃음이 가득 고였다.
“이런 시건방진 말코를 봤나? 차아아-앗!”
“감히 우리 둘을 모두 상대하려고 들어? 하아앗!”
후웅. 화아악.
진몽의 전신에서 피어오른 핏빛의 강기가 불꽃의 형상으로 넘실거리다가 검으로 밀려들었다. 검 끝을 타고 폭발하듯 뿜어졌다. 혈염마공에 이은 혈세참천검법이었다.
우우웅. 버언쩍.
은도평의 단전에서는 음산한 검은 기운이 섞인 혈기가 솟구쳐 올라 검에 스몄다. 귀혈마공으로 펼치는 귀혈대마검이 팔십 년 만에 세상에 등장했다.
세 사람의 검이 순간적으로 얽혔다.
쿠와앙. 콰아앙. 타타타아-앙!
쇠북 찢어지듯 요란한 폭음과 함께 삼장 어림 뒤로 튕겼던 세 사람은 다시금 격렬하게 맞부딪혀 갔다. 서로의 목숨을 노렸다.
“오늘! 화산의 정기를 바로 세운다!”
“혈교의 마인들을 몰아내라!”
“쳐라-아!”
“하아아!”
기다렸다는 듯 화산의 검수들이 혈교의 마인들을 향해 밀려들었다.
“혈영대법을 펼쳐라!”
“사정 볼 것 없다. 깡그리 죽여라!”
“이야아-하!”
“차아앗!”
혈교의 마인들 역시 살기로 번들거리는 눈을 한 채 달려들었다. 혈신의 강림과 가호를 비는 주문을 외웠다. 피처럼 붉은 색의 기운을 흩날리며 검과 도와 주먹을 휘둘러왔다.
파캉. 스각. 퍼퍼펑. 뻐어억.
“크악!”
“커헉!”
전력을 다한 한 번의 부딪힘에 십여 명의 도사와 혈교의 마인들이 피를 뿜었다. 숨이 끊겨 거칠게 바닥에 패대기쳐졌다.
옥진이 펼치는 이십사 수 매화검법은 어느새 상청검법으로 넘어가 있었다.
피쉬잇. 쐐애액. 촤촤촤-악!
변화보다는 속도와 힘에 중점을 둔 상청검법의 파괴력이 진몽과 은도평을 거칠게 몰아붙였다.
카앙. 타앙. 터터터-엉.
그 힘을 다 흘려내지 못한 두 사람의 몸 이곳저곳에서 굵은 핏줄기가 툭툭 튀었다.
“이런 빌어먹을 말코가 정말!”
“오냐, 진짜 혈교의 힘을 보여주도록 하마!”
자존심이 팍 상한 두 사람이 혈영대법까지 발동했다.
뭉클뭉클. 화아악.
진몽과 은도평의 내공이 폭발하듯 증가했다.
혈염마공과 귀혈마공에 현신의 가호가 서린 듯 놀라운 파괴력으로 옥진을 때렸다.
쿠와앙. 콰아앙. 터터터-엉.
옥진이 펼치던 상청검법의 초식은 끝까지 뻗어나가지를 못했다. 힘에 눌렸다. 형편없이 뒤로 밀렸다. 되레 옥진의 몸을 상하게 만들었다.
촤촥. 퍼퍼퍼-억.
뒤이어 밀려든 두 사람의 초식이 피륙을 갈랐다. 옥진의 몸은 금세 피에 젖었다.
“커흑. 쿨럭. 쿨러-억.”
옥진의 몸이 가랑잎처럼 흔들렸다. 다시 뒤로 밀렸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진몽과 은도평이 거리를 좁혔다. 양쪽에서 파고들었다.
“죽어라 말코!”
“마지막이다아-아!”
진몽과 은도평이 휘돌린 검 끝에서 강대한 기운이 옥진의 목과 심장을 동시에 노렸다.
‘끝인가?’
마지막임을 직감한 옥진의 눈이 암울하게 젖었다.
분했다. 억울했다. 눈앞의 적을 죽이고 싶어 가슴이 터질 듯했다. 더불어 이 모든 게 자신 탓인 것만 같아 참담하기 짝이 없었다.
‘검향이 어찌 잠잠한 것인가?’
혼자서도 둘을 상대할 수 있다고 여겼거늘 어째서 검향이 침묵하는 것인지! 옥진은 태상노군에게조차 버림을 받은 기분이 들었다.
‘놈들과 함께 간다.’
죽을 때 죽더라도 허무하게 혼자 갈 수는 없는 일!
동귀어진을 해서라도 진몽과 은도평 두 사람을 끌고 갈 생각이었다.
“반드시! 반드시-이!”
적들의 수괴로 보이는 이 두 사람을 처리해야만 화산을 되찾을 희망이 있다!
후우우우웅. 화아악.
옥진이 단전을 쥐어짰다. 마지막 한 방울의 내공까지 긁어모을 때였다.
“욕심도 많지……. 한 놈만 맡아요.”
버언쩍.
다소 짓궂은 목소리와 함께 번갯불이 곁을 스쳤다. 동시에 거창한 용권풍이 일어났다. 진몽이 쏟아낸 혈염강기 앞을 가로막았다. 갈아 없앴다.
카라라라-락!
진천수라도의 일초 수라전륜아였다.
‘용무린! 용 대협의 목소리다!’
휘슷.
옥진의 검 끝이 본능적으로 방향을 틀었다. 오른쪽을 파고들던 은도평에게로 향했다. 한계까지 끌어 모았던 내공을 검에 실어 시원하게 쏟아냈다.
화아악. 투우웅.
강기로 이뤄진 매화꽃 한 송이가 커다랗게 피어올랐다. 은도평이 작정하고 펼쳐낸 귀혈대마검의 초식을 거칠게 들이받았다.
쿠와아-앙!
귀청이 찢어지는 듯한 폭음과 함께 옥진과 은도평이 뒤로 쭉 밀렸다. 거의 동시에 검게 죽은피를 토했다.
“크흡!”
“컥!”
스슷. 척.
진몽과 은도평 앞을 막으며 내려서는 두 사람.
화운과 효정대사였다.
“괜찮은가?”
“각혈이 심했네. 보중하시게.”
두 사람은 진몽과 은도평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 옥진에게만 신경을 썼다.
“소림?”
“땡중이 여길 어떻게?”
진몽과 은도평이 눈을 크게 치켜떴다.
생각지도 못했던 효정대사의 등장 때문이었다.
“아미타불!”
뒤이어 사대금강의 일인인 일각대사마저 도착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진몽과 은도평의 가슴이 서늘해졌다.
‘서, 설마 소림이 우리의 작전을 간파한 것인가?’
‘땡중 두 놈만 온 것이면 좋으련만…….’
‘혈세단의 뒤를 쫓아 소림으로 향하던 화산의 말코들이 달려온 것과 관계가 있는 모양이로구나.’
‘제길, 피해가 만만치 않겠구나.’
화운과 효정대사를 보았으면서도 진몽과 은도평은 패배를 떠올리지 않았다.
“킁킁. 이거 뭔 냄새야?”
뜬금없이 코를 벌름거리는 용무린을 향해 이를 드러냈다.
“땡중과 거지는 그렇다고 치고, 네놈은 대체 뭐하는 애송이냐?”
“정체를 밝혀라.”
용무린은 두 사람의 질문을 무시했다. 계속해서 고개를 갸웃했다.
“하, 이 알싸한 냄새. 분명히 기억 속에 있는 건데……. 뭐지?”
피 냄새는 분명히 아니었다.
무엇인가 더 화끈하고 불길하기 짝이 없는 냄새였다.
카캉. 스파팡. 스각. 카각.
“크악!”
“커헉!”
그 사이에도 화산의 검수들과 혈교의 마인들이 여기저기에서 쓰러지고 있었다.
“아, 정신 사나워.”
대뜸 불사신기를 끌어 올린 용무린이 고함을 질렀다.
“조용히 좀 해-애!”
우르릉!
용무린이 터뜨린 사자후가 옥녀봉을 뒤흔들었다.
흠칫. 움찔.
화들짝 놀란 두 진영의 고수들이 거의 동시에 뒤로 쑥 물러났다. 산발적으로 전투에 심취해 있던 사람들마저 분위기에 압도당해 싸움을 멈출 정도였다.
“잘했다, 무린아.”
“재정비를 하는 것이 좋겠지.”
화운과 효정대사가 용무린을 칭찬했다.
어차피 오래지 않아 소림의 무승들이 올라올 터, 그들과 함께 다시 진용을 갖추는 것이 희생을 줄이는 한 방편일 것이다.
‘재정비?’
‘소림의 땡중들이 몽땅 몰려오는 모양이로구나.’
진몽과 은도평의 심장이 한차례 크게 뛰었다.
‘땡중들이 오기만 기다리고 있어서는 안 돼.’
‘놈들을 최대한 빨리 쓸어버린 후 다시 밀려오는 놈들을 상대하는 편이 좋아.’
진몽과 은도평이 은밀한 시선을 주고받았다. 슬그머니 뒤를 향해 시선을 던졌다. 앞을 향해 까딱해 보였다.
“……!”
“……!”
무언의 명령을 알아차린 마인들 이십여 명이 품에 손을 집어넣었다. 주먹만 한 쇠구슬을 움켜쥔 채 천천히 거리를 좁혔다.
뇌화탄이다.
매화검진 다섯 개와 옥허를 포함한 화산파의 수뇌부를 한꺼번에 죽음으로 몰아넣었던 뇌화탄이 용무린과 화운과 효정대사의 목숨을 노리기 시작했다.
그런 줄도 모르는 효정대사는 옥진도장을 향해 따뜻한 목소리를 내었다.
“이제 그만 살기를 내려놓으시게. 지금부터는 우리가 맡도록 하겠네.”
“……!”
옥진의 눈이 돌연 부릅떠졌다.
스치듯 지나간 효정대사의 말 한마디 때문이었다.
‘살기를 내려놓으라고?’
그 말 한마디에 어째서 검향지기가 뿜어지지 않았는지 비로소 알 수 있었다.
‘살기에 찌든 도사는 도사가 아니었던 것이로구나.’
증오와 분노를 바탕으로 펼쳐내는 도가의 검이 어찌 도에 이를 수 있을까?
‘맞아. 살기와 증오와 분노로 뭉쳐진 검이 혈교의 그것과 무엇이 다를까?’
초식의 정묘함이 정사마를 가를 수 없다.
둘을 나누는 중요한 본질은 반듯한 의지와 함께하는 정명한 내공과의 일체!
조양봉 중턱의 암굴에서 검향지기를 피워 올릴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화산의 명예와 군림에의 욕망을 깡그리 내려놓았기 때문이었다.
그때 반듯한 의지와 내공이 혼연일체가 되었다.
지금이라고 다를 바 없다.
화산의 검은 살기와 증오 혹은 분노를 바탕으로 펼쳐서는 아니 되는 것이다. 펼친다고 해도 제 위력을 발휘할 수 없게 된다.
“자, 그럼 이 땡중은 혈교의 아해들을 계도시켜 볼까나?”
효정대사가 헤실 웃으며 돌아섰다.
살계승이란 무시무시한 지위를 맡고 있는 소림의 승려답지 않은 미소였다.
“……!”
옥진의 입가에도 비슷한 미소가 걸리기 시작했다.
‘살계승임에도 계도를 염두에 두고 무공을 펼친다. 그것이 바로 소림의 무공을 정종제일로 이끈 바탕이겠지.’
작은 깨달음과 함께 옥진의 전신에서는 사라졌던 매화꽃내음이 다시 넘실대기 시작했다.
바로 그때였다.
치잇. 치이이잇. 휙. 휘릭. 후욱. 훅.
무엇인가 타들어가는 듯한 소리와 함께 큼직한 쇠구슬 스무 개 남짓이 떠올랐다.
“……!”
용무린의 눈이 튀어나올 듯 부릅떠졌다.
용무린의 뇌리에 섬광처럼 한 장면이 떠올랐다.
황궁보고!
화포에서 뿜어지던 매캐한 내음과 함께 양문광과 양경홍을 비롯한 양가장의 세 장로가 바닥에 선을 그렸던 검은색의 화약!
‘화탄? 아니면 포탄?’
그 무엇이든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용무린의 입에서 다급한 고함이 터져 나왔다.
“모두 뒤로 물러서-어!”
말로만 끝나지 않았다. 외침과 동시에 움직였다.
순간적으로 거리를 좁힌 후 옥진을 잡아챘다. 그 곁에 있던 화운의 옷깃까지 붙잡고선 뒤를 향해 전력으로 신법을 전개했다.
“대사님 빨리-이!”
움찔. 휘슷.
급박한 용무린의 목소리에 한발 늦었지만 효정대사도 뒤를 향해 던지듯 신법을 펼쳤다. 얼굴을 잔뜩 굳힌 일각대사가 그 뒤를 따랐다.
“뭐, 뭐야?”
“대체 왜 그러는데?”
얼떨떨한 표정을 하면서도 화산의 검수들 상당수가 뒤로 물러났다.
바로 그 순간!
버언쩍. 버번쩌저적.
쿠와앙. 콰아앙. 쿠콰콰콰아-앙!
진홍빛 화염과 함께 거창한 충격파가 일었다. 그 어떤 신법보다도 더 빨리 주변을 휩쓸었다.
“크아악!”
“커헉!”
멀뚱한 얼굴로 느릿하게 물러나던 화산의 검수 십여 명이 폭발에 휘말렸다. 추측하기 어려운 압력과 충격에 순간적으로 전신이 찢겼다. 끈 떨어진 인형처럼 힘없이 뒤로 날려 떨어졌다. 움직이지 못했다.
“하아압!”
후웅. 콰아아-!
풍뢰가 전면을 틀어막았다.
바람개비처럼 맹렬하게 휘돌더니 눈 깜박할 사이 용권풍으로 자라났다. 눈에 보이지도 않는 속도로 날아드는 쇠구슬 겉면의 파편을 깡그리 갈아 없앴다.
휘이이이-!
옥녀봉을 스치는 바람이 검붉은 연기와 불꽃을 거두었다.
이윽고 드러나는 참상이라니!
용무린이 어째서 그렇듯 급박한 목소리로 뒤로 물러나라 외쳤는지 몰라 꾸물대던 매화검진 하나와 주변에 있던 검수 십여 명이 처참한 모습으로 죽어 있었다.
“이런 개자식들! 그거 어디에서 구했어? 군문에서만 만들 수 있는 검은 화약을 대체 어디에서 구했냐고?”
용무린이 서슬 파랗게 외쳤다.
물론 대답해 줄 진몽과 은도평이 아니었다.
피식.
“왜? 너도 하나 사려고?”
“꿈 깨라 애송아. 우리도 그거 사느라 허리가 휘어 죽는 줄 알았으니까 말이야.”
말이야 바른 말이지. 사실 허리가 휘는 정도가 아니었다.
저 뇌화탄을 마련하기 위해 혈교의 기둥뿌리가 댓 개는 족히 사라졌다고 봐야 한다.
‘뇌화탄만 포기했어도 무력 단체 두 개는 더 만들어 운용할 수 있었어 인마!’
‘수백 명에 이르는 절정 고수와 두세 명의 초절정 고수는 능히 키워낼 수 있었을걸?’
섬서성은 외진 곳이다.
전통의 명문대파가 존재하지 않는 감숙의 전장이 지척이며 그 너머 청해와 신강, 서장이 자리 잡고 있다.
뇌화탄을 마련할 황금이라면 그곳들에서 충분히 온갖 약재를 사들이고 인재를 모아 그만큼의 고수들을 키워낼 수 있었으리라.
‘하지만 지금도 좋아. 만족해.’
‘봐봐. 거지와 소림의 땡중조차 감히 뇌화탄의 위력 앞에 맞설 수가 없잖아?’
혈교가 팔십 년 전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약해졌음에도 불구하고 소림과 무당을 동시에 공략한다고 공언하고 재림을 꿈꾸었던 이유가 바로 뇌화탄이었다.
‘무한정 지니고 있을 리는 없고……. 놈들 손에 몇 개나 남아 있을까?’
반짝이는 눈으로 그 사실을 가늠하고 있던 용무린의 모습이 진몽과 은도평의 눈에 들어왔다.
‘저 자식, 눈 돌아가는 것이 왠지 위험해 보이는데?’
‘빌어먹을 애송이 때문에 뇌화탄 스무 발을 던져내고도 겨우 매화검진 하나와 말코 십여 명으로 끝났단 말이지.’
계속해서 반짝이는 용무린의 눈빛이 마음에 걸렸다.
자신들의 공격을 막아냈던 그 신묘한 검법도 서늘하게 다가왔고 이제 얼마 남지 않은 뇌화탄의 숫자는 더더욱 두 사람의 마음을 다급하게 만들었다.
“쳐라! 혈교의 전사들아!”
“화산의 잔재를 싹 쓸어버려라!”
“와아아!”
“죽여라!”
두 사람의 외침에 혈교의 마인들이 호응했다. 목이 터져라 고함을 지르며 밀려왔다.
“어, 어쩌지?”
“어떻게 하지?”
“우리도 달려 나가야 하나?”
“그러다 그 무시무시한 물건이 또 날아오면?”
“그러면……?”
대답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
경험이 풍부한 화운이나 효정대사 조차도 어찌해야 할 바를 몰라 시선을 한 곳으로 돌렸다. 그 시선을 좇아 모두의 시선이 움직였다. 바로 용무린을 향해서였다.
‘그래? 그러면 내가 통솔하지 뭐!’
용무린의 입에서 가장 현명한 명령이 떨어졌다.
“삼십육계를 펴라!”
“응?”
“그, 그 말은?”
말뜻이야 알지만 무인들은 쉽사리 움직이지 않았다.
화산의 검수들이 특히 그랬다.
자신들의 본산이 불에 타고 있는 이때 쉬이 뒤로 물러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때 다시 용무린의 목소리가 터졌다.
“죽고 싶어 환장한 놈들은 남아서 시간을 벌어 줘. 안 말릴게. 놈들이 지닌 화탄 물량이나 소모시키고 죽어. 나머지 살고 싶은 사람은 당장 뒤로 빠져-어!”
죽고 싶은 놈들은 안 말릴 테니 남으라는 매정한 명령.
세상에 죽고 싶어 환장한 놈이 누가 있겠는가?
문파의 재건과 복수도 내가 살아 있어야만 이룰 수 있는 법이다.
휘슷. 타닷.
뒤쪽에서부터 냅다 먼저 움직였다. 뒤를 향해 신법을 펼쳤다. 터진 물꼬를 따라 나머지 화산의 검수들이 움직였다.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물론 이대로 도망치기만 하면 모양새가 살지 않겠지?’
모양새만 살지 않는 것이 아니라 자칫 뒤에서 올라오는 소림의 무승들과 뒤섞여 외길에 뭉친다. 기세등등하게 쫓아오는 혈교 마인들의 좋은 먹잇감이 된다.
‘외길이라 피할 곳도 없어.’
한데 뭉쳐진 소림과 화산의 무인들 위로 떨어져 내리는 화탄을 생각해보라. 상상만으로도 아찔하지 않은가?
“장로님! 대사님!”
타닷. 휘슷.
화산의 전력을 뒤로 물린 후 만들어진 공간을 용무린이 가로막아 섰다.
“오냐! 우리가 막자꾸나!”
“알겠다. 우리가 시간을 벌어 주도록 하자!”
휘슷. 휘릭.
화운과 효정대사가 용무린의 내심을 읽었다. 용무린의 좌우로 퍼졌다. 산문인 옥천문으로 향한 계단을 단단히 틀어막았다.
“아미타불!”
불호성과 함께 일각이 계단 끝에 버티고 섰다.
이로써 열십자 형태로 된 단출한 방어진이 완성되었다. 물론 단출하긴 해도 진을 구성하는 사람이 용무린과 화운 효정대사와 일각이니 천하에 보기 드문 방어진이었다.
“이야아-아!”
“하앗!”
강렬한 기합과 함께 혈교의 마인들이 검을 쓸어왔다. 주먹을 뻗었다. 장력을 날렸다.
“어딜 꼬챙이를 들이밀어?”
스각. 서걱. 푹푹푹.
“크악!”
“커헉!”
“끄아악!”
용무린을 향해 밀려들던 혈교의 마인들이 너무나도 간단히 쓰러졌다.
따앙! 빠바박. 후웅. 퍼어억.
“아악!”
“허어억!”
화운장로와 효정대사를 향해 밀려든 놈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제 아무리 혈영대법을 펼쳐 내공을 증폭시켰어도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내공과 초식의 연계에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쓰러졌다.
“이런 빌어먹을!”
“길이 외길이라 좁으니 숫자로 밀어 붙일 수도 없고…….”
약이 바짝 올랐는지 진몽과 은도평이 발을 굴렀다.
그 사이에도 수하들이 피를 뿌렸다. 외길 옆 절벽으로 잘도 떨어져 내렸다.
“뒤로 빠져라!”
“뇌화탄을 던져라!”
“충!”
명령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혈교의 마인들이 뒤로 쭉 빠져나갔다.
치이이. 치이이. 휘익. 휘익.
그 사이를 노려 뇌화탄 두 개가 매캐한 냄새를 흘리며 날아들었다.
“불꽃놀이하자고? 좋지.”
불꽃놀이에는 거리 확보가 필수.
용무린의 손짓에 따라 화운과 효정 일각이 한 몸이라도 된 듯 일시에 뒤로 물러났다. 공간을 넓혔다. 수라전륜아의 초식을 펼쳐 방어를 했다.
쿠와앙. 콰아아아-앙.
화끈한 화염과 충격파가 애꿎은 돌계단만 뭉텅 날렸다.
한참이나 뒤로 물러난 용무린 등에게는 아무런 해를 끼칠 수가 없었다.
‘저것?!’
찰나에 불과했지만 용무린은 똑똑히 보았다.
뇌화탄이 바닥에 떨어지기 직전, 쇠구슬 하나가 돌계단 곁에 돋아난 나뭇가지에 튕겨 살짝 옆으로 방향을 바꾼 것을…….
‘돌계단에 떨어진 놈은 충격에 바로 터졌는데 나뭇가지에 튕겨진 녀석은 즉시 터지지 않고 미세한 차이를 두고 늦게 터졌어.’
한 가지 생각이 번개처럼 스쳤다.
‘유능제강. 이화접목.’
시도해 볼 만한 일이다.
“또 놀아 볼까?”
휘슷. 타닷. 패애액. 스각.
“컥!”
“크아악!”
폭발의 열기가 채 가시기도 전에 짓쳐들어 풍뢰를 휘두르는 용무린. 그 서슬에 혈교의 마인 셋이 허무하게 또 쓰러졌다.
“뭣들 하는 것이냐?”
“뇌화탄을 더 쏟아내라. 놈들을 가루로 만들어 버리란 말이다.”
진몽과 은도평이 악을 썼다.
용무린의 약삭빠른 행동에 약이 오를 대로 올라 있던 혈교의 마인들이 기꺼이 호응했다. 뇌화탄을 꺼내들고는 앞을 다투어 불을 붙여 던졌다.
‘봐! 놈들은 잘도 손에 쥐고 불을 붙이고 힘껏 던져 내고 있잖아!’
놈들이 손에 쥐고 불을 붙여 힘껏 던질 정도!
그 정도의 힘에는 폭발을 하지 않는다는 확실한 증거이지 않을까?
‘저 정도라면 충분해!’
우박처럼 떨어져 내리는 뇌화탄을 향해 용무린은 신법을 전개했다. 바람처럼 솟구쳐 올랐다.
“무, 무린아-아!”
“위험하다!”
“요, 용 대협!”
화운과 효정대사와 일각이 비명처럼 고함을 질렀다.
“걸렸다!”
“너는 이제 뒈졌다-아!”
진몽과 은도평이 쾌재를 불렀다. 용무린의 죽음이 기정사실이라는 듯 주먹까지 불끈 움켜쥐었다. 하늘을 향해 번쩍 들어올렸다.
바로 그 순간,
‘유능제강!’
어느새 풍뢰를 허리로 되돌린 용무린의 손이 전면을 부드럽게 쓸었다. 불사신기를 압축해 쏘아 내거나 터뜨리지 않았다. 어루만지듯 휘감았다.
‘여기서 이화접목!’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둥실. 두둥실.
암기라도 되듯 쏘아졌던 뇌화탄들이 멈칫 하는가 싶더니 다시금 하늘로 날아올랐던 것이다.
씨이익.
‘됐다! 통했어!’
용무린의 얼굴에 시원한 미소가 걸렸다.
“이거 너희들 것이지? 도로 가져가!”
후욱. 퉁. 투두두-웅.
거짓말처럼 방향을 바꾼 뇌화탄들이 다시금 혈교의 마인들에게 되돌아갔다.
“어헉!”
“저, 저럴 수가…….”
진몽과 은도평이 입을 쩍 벌린 채 놀라고 있는 사이 외길 돌계단을 향해 몽땅 밀려 내려왔던 혈교의 마인들은 난리가 났다.
“우와악!”
“뒤, 뒤로 물러나-아!”
“빨리 뒤로 빠지라고-오!”
“미, 밀지 마!”
동시에 뒤로 빠지려니 좁은 외길에 병목현상이 생겼다. 사이좋게 한 덩어리로 뭉쳤다.
“미, 밀지 말라고, 씨바-알! 아아악!”
“으, 으아아악!”
“살려줘-어!”
외길 옆 천 길 낭떠러지로 밀려 떨어지는 숫자만 열댓 명이 넘었다.
쿠와아아-앙!
그런 놈들의 머리 바로 위에서 뇌화탄이 터졌다.
단 한 발에 떼로 뭉쳐져 있던 혈교의 마인 서른 남짓이 짓뭉개졌다. 형체도 제대로 남기지 못하고 찢겨졌다. 절벽으로 떨어졌다.
콰아앙. 쿠콰콰콰-앙!
되돌려진 뇌화탄들이 연이어 터졌다.
만년거암을 깎아 만든 돌계단마저 힘없이 조각나고 깊이 파이고 갈라졌다.
그 위에 남아 있던 혈교의 마인들은 말할 것도 없었다.
폭발력의 범위 안에 들어 있던 모든 마인이 종말을 맞았다. 한꺼번에 쓸려 나갔다.
휘이잉.
다시 불어온 바람에 검붉은 불꽃과 검은 연기가 모두 사라졌다.
피와 고깃덩어리만 남은 외길!
그 놀라운 모습을 보며 넋이 나간 듯 입을 벌리고 있는 진몽과 은도평을 향해 용무린은 시리게 웃었다.
“푸흐흐. 재미있다. 또 던져봐.”
움찔! 펄쩍!
혈교의 마인들이 격렬한 움직임을 보였다.
‘싫어!’
‘그 위험한 걸 또?’
‘미쳤어?’
‘누구 좋으라고?’
화들짝 놀라 뒤로 물러났다.
“……!”
“……!”
하도 어이가 없었는지 진몽과 은도평은 아직도 멍하니 보고만 있었다.
용무린이 픽하고 웃으며 풍뢰를 뽑아들었다.
“싫음 말고.”
후욱.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짓쳐드는 용무린!
뇌화탄을 던지지 않으면 직접 칼로 베어 죽인다는 의지의 표명에 혈교의 마인들은 다시 한 번 혼비백산 놀라 뒤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으, 으아아!”
“괴, 괴물이다-아!”
우르르.
뒤로 밀려나는 혈교의 전사들.
덕분에 옥녀봉 정상에 다시 작은 공간이 마련되었다.
“크크큭!”
입가에 시린 미소를 베어 물고 있던 용무린 옆으로 화운과 효정대사와 일각이 내려앉았다.
용무린이 어떻게 뇌화탄을 다시 되돌렸는지 똑똑히 눈으로 보았던 것이다.
‘나도 할 수 있지. 암!’
‘유능제강에 이화접목이라……. 어찌 그 간단한 방법을 생각해 내지 못했을꼬?’
‘용 대협처럼 십여 개를 동시에 다룰 수야 없겠지만, 한두 개라면 나도 충분해!’
방법을 알았으니 이제 뒤로 도망칠 필요가 없는 거다.
용무린이 벼락처럼 고함을 질렀다.
“다 덤벼-엇!”