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잃은 것과 얻은 것
휘슷.
순간적으로 거리를 좁혀 달려드는 용무린.
그 뒤를 따라 화운과 효정대사와 일각이 동시에 짓쳐들었다. 매섭게 주먹을 쳐냈다. 선장을 휘둘렀다.
뿌아악. 빠악. 뻐버벅.
“크아악!”
“커헉!”
전면에 쭉 늘어섰던 혈교 마인들의 한 축이 그대로 무너졌다.
“으아아!”
치이이.
겁에 질린 혈교 마인 하나가 지니고 있던 뇌화탄에 불을 당겼다. 발악을 하듯 던졌다.
“나야 고맙지-이!”
후우웅. 화아악. 투웅.
용무린이 대뜸 뇌화탄을 되돌렸다. 저만큼 떨어진 곳에 뭉쳐 있던 혈교 마인들을 노리고 쏘았다.
쿠와아아아-앙!
화끈한 화염과 충격파가 일었다.
그 아래 뭉쳐 있던 혈교의 마인 십여 명이 비명 한 번 질러 보지 못하고 갈가리 찢겨 나갔다.
“이노-옴!”
“이제는 그 못된 짓을 하지 못하도록 만들어 주마. 하아아-앗!”
“뭣들 하느냐? 이리 오너라!”
파앙. 빠악. 뻐버버벅.
사자처럼 사위를 휘몰아치는 화운과 효정 그리고 일각 세 사람의 무위에 그 어떠한 혈교의 마인들도 접근을 할 수 없었다.
“이 땡중아 죽어라-앗!”
“빌어먹을 거지야 뒈져-엇!”
피잇. 쌔애애액. 패액.
보다 못한 혈루단과 혈풍단의 조장급들이 악을 쓰며 공격을 쏟아냈지만…….
“이런 싸가지 없는 놈을 그냥!”
파캉!
진득한 욕설과 함께 파옥권을 쏟아낸 화운의 주먹에 검이 힘없이 뒤로 튕겼다. 그 틈에 화운은 녀석의 가슴 어림에 전광연화장을 보기 좋게 적중시켰다.
와득.
“컥!”
혈루단 이조장 곁에서 공격해 들어왔던 혈풍단의 조장 두 명은 효정대사와 일각대사가 맡았다.
“허어, 생긴 것만큼이나 독한 수가 몸에 배인 마졸이로구나. 썩 물러가거라.”
카카카-앙.
바람개비처럼 휘돌린 선장에 혈풍사혈검의 초식이 깡그리 튕겼다. 효정대사의 내공을 감당하지 못해 활짝 열린 녀석의 가슴에 선장의 용두가 꽂혔다.
뿌아아-악!
“커헉!”
일각은 자신의 목을 노리고 밀려들었던 검을 일지관수로 때려낸 후 나한십팔수의 이초식인 회두망월의 초식으로 턱을 부쉈다.
따앙. 빠아아-악!
“끄아악!”
믿었던 조장급들 다수가 허무하게 뒤로 밀리는 모습에 학습능력 더럽게 없는 마인 하나가 다시금 뇌화탄에 불을 붙였다. 냅다 던졌다.
“야, 이 멍청한 놈아!”
“그걸 왜 던져?”
“아차!”
주변에서 쏟아지는 악다구니에 녀석이 뒤늦게 반성을 해보았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허허허. 미안하구나.”
후우웅. 투웅.
효정대사가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금강반약장을 부드럽게 운용해 뇌화탄을 튕겨내 버렸다. 그나마 가장 사람이 적어 보이는 곳을 향해서였다.
“자업자득일 터, 본승을 원망할 필요가 없느니…….”
쿠와아아-앙!
진홍빛 화염과 충격파가 다시 한 번 일었다. 가장 사람이 적은 곳이었지만 십여 명에 이르는 혈교의 마인들이 한꺼번에 쓰러졌다.
‘다 잡은 승리였는데 대체 왜 이렇게 된 거지?’
‘혈교의 재림을 알리는 영광된 순간을 이렇게 망쳐 버리다니!’
마음만 같았다면 후일을 도모하기라도 하련만 도망칠 곳도 없다. 화산에 이르는 길은 외길, 만년거암으로 이뤄진 바위를 깎아 만든 돌계단을 제외하면 천 길 낭떠러지였기 때문이었다.
“화산의 검이여! 본산을 짓밟은 혈교의 마인들을 모두 물리쳐라!”
상황이 뒤바뀐 것을 목격한 옥진이 화산의 검수들을 모두 되돌렸다. 옥녀봉으로 복귀했다.
“놈들이 쇠구슬을 던지면 유능제강의 내공을 운용할 수 있는 선배들만 앞으로 나서서 받아내라. 놈들에게 되돌려 주는 거다.”
“명심해라. 나머지는 공간을 비운다.”
“한 사람으로 부족하면 곁에서 힘을 보태라! 최대한 내공에 힘을 빼서 부드럽게 운용해야 한다!”
모두가 용무린과 효정대사가 다시금 뇌화탄을 되돌리는 것을 보았다. 거침없이 뇌화탄이 던져졌을 때의 대비책까지 모두에게 알렸다.
“쳐라!”
“이제야 말로 갚아줄 때다-아!”
“하아아!”
쌔애액. 피쉬쉬쉿. 스각. 서걱.
“크악!”
“아아악!”
옥녀봉의 작은 공터 앞에 다시금 격렬한 난전이 펼쳐졌다. 하지만 화산의 핵심고수들답게 죽더라도 혈교의 마인 하나는 반드시 끌고 갔다.
“아미타불!”
“혈교의 마인들을 계도하라!”
그 사이 소림의 무승들마저 도착했다. 전투에 합세했다.
무승들의 불문 내공과 깊은 초식이 함께하자 화산의 검과 어우러져 혈교의 마인들을 효율적으로 압박했다. 거침없이 무너뜨렸다.
이대로라면 전멸을 면치 못할 터!
반짝. 번쩍.
진몽과 은도평의 눈에 독기가 어렸다.
‘죽는다. 하지만 절대로 그냥 죽지는 않으리라.’
‘죽음으로 혈교의 재림을 화려하게 알린다.’
서로의 눈빛에서 같은 결심을 읽은 두 사람이 목이 터져라 고함을 질렀다.
“혈신강령의 주문을 외워라!”
“우리는 이제 피로써 거듭날 것이다-아!”
그 말이 끝나는 순간이었다.
패색이 짙던 혈교 마인들의 기세가 일시에 달라졌다.
“혈신에게 영광을!”
“피로써 혈신에게 다가가리라!”
“오오, 혈신이여. 피로써 거듭나는 저를 받아주소서.”
피에 미친놈들답게 섬뜩한 외침을 쏟아내더니 자신들이 믿는 혈신의 그림자가 아닌 혈신 자체를 몸에 불러오는 주문을 외웠다.
화아아악!
폭발하듯 일어나는 피 같은 내공이 한데 뭉쳤다. 구름처럼 넘실대기 시작했다. 혈영대법을 펼쳤을 때에 비해 족히 두 배를 뛰어 넘는 거력이었다.
꿈틀.
‘나올 게 나왔네.’
용무린의 눈살이 잔뜩 찌푸려졌다.
혈영대법에 이은 혈교 마인들의 마지막 수단을 한눈에 알아 본 것이다.
‘마영방에서 그랬던 것처럼 애초에 저 짓을 못하게 했어야 했는데…….’
마영방에 진을 치고 있던 혈마단의 힘을 화산과 종남의 무인들이 비교적 잘 상대할 수 있었던 이유가 바로 저 혈신강령대법을 펼치지 않아서였다.
혈영대법만으로도 충분하다 여겼었고 혈마단주였던 조유와 부단주 사공표를 용무린이 먼저 제거했기에 그나마 화산과 종남의 무인들이 혈세단이 올 때까지 버틸 수 있었던 것이다.
‘이 싸움의 주역이 화산파라 옥진도장에게 기회를 주려고 했던 것이 되레 피해를 키운 게 됐나?’
입맛이 썼지만 별 수 없는 일이다.
일은 이미 벌어졌고 화산은 이 고난을 감당해야만 한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소림이 있다는 거네.’
보라, 넘실대는 혈신강령대법을 뚫고 솟아나는 힘을.
단숨에 화산을 집어 삼킬 듯 밀려들고 있다가도 불에 덴 듯 화들짝 놀라 뒤로 물러나지 않는가?
“아미타불!”
“삿된 것들아! 물러가라!”
“하아앗! 대라범천수!”
그곳에는 어김없이 소림의 무승들이 불문내공의 위력을 발휘하고 있었다.
“차아앗! 매화토염!”
“하앗! 매개이도!”
쐐애액. 스가가각. 차차창. 스각.
소림의 무승들이 불문내공으로 방어를 전담하다시피 하고 있는 가운데 화산의 검수들이 날카로운 초식을 마음껏 펼쳐내고 있었다.
“크아악!”
“커헉!”
그 덕에 쓰러지는 것은 태반이 혈교의 마인들이었다.
마교의 정예들을 숱하게 쓰러뜨린 혈교의 마공도 불문 내공의 벽 앞에 맥을 추지 못했다.
반짝!
그 모습을 똑똑히 지켜보고 있던 옥진의 눈이 맑은 빛을 뿌리기 시작했다. 한겨울 추위를 이겨낸 매화와 같은 기상이 그 안에 담겨 있었다.
스릉.
“오너라, 마졸아. 내 너에게 진정한 화산의 검이 무엇인지 보여주리라.”
검을 빼든 옥진에게서는 더 이상 분노나 살기가 느껴지지 않았다. 하늘 같은 기상과 함께 화산의 무인이라면 누구라도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을 정도의 매화향기만 뿜어내고 있을 뿐이었다.
“허허허. 도문의 향기가 바로 선 자리라면 불문의 자비 또한 함께해야 마땅할 터!”
휘리릭.
효정대사가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옥진도장 곁으로 내려섰다. 중단을 거머쥔 선장을 옆으로 뉘여 앞으로 뻗었다. 남은 한 손으로는 달마십팔수의 기수식을 취했다.
후우웅.
담담하며 묵직한 불문내공의 힘이 검향지기와 화합하며 무럭무럭 자라났다. 혈신강령대법으로 폭증한 마공의 힘을 저만큼 밀어냈다.
“크크큭. 역시 땡중과 말코들은 이 세상에서 모두 지워 버려야만 해.”
“아무렴. 저 냄새나는 것들 때문에 우리 혈교가 어둠속을 전전해야 한단 말이지.”
검향지기와 불문내공의 거력 앞에서도 죽음을 각오한 진몽과 은도평의 눈빛은 흔들리지 않았다. 혈신의 힘을 불러온 자신들의 능력을 믿었다.
피식.
용무린이 풀썩 웃었다.
“틀렸어, 인마. 검향과 불문지기가 오롯이 서 있는데 세상에서 모두 지우기는 개뿔!”
굳이 지켜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혈신강령대법을 펼친 혈교 무력단체의 수뇌가 한 사람 더 있다 하더라도 결코 지금의 옥진과 효정대사의 연수합공을 감당해낼 수는 없을 것임을…….
‘혈마를 자처하는 미친놈들의 두목과 대사제쯤 되는 놈이 직접 저 대법을 펼치지 않는 한 어림도 없지. 암.’
용무린은 자신이 더는 이곳에 있을 필요가 없음을 깨달았다. 저 싸움에 함께하고 싶어 움켜쥔 주먹을 꼼지락대는 화운을 향해 불쑥 입을 열었다.
“여긴 저 두 분께 맡기고 우린 다른 놈들 패러 가죠.”
“뭐? 다른 놈들?”
“아, 조양봉 쪽으로 갔을 게 빤한 놈들 있잖아요.”
“아하! 그렇지!”
“빨리 가 봐요. 저 빌어먹을 놈의 쇠구슬 때문에 화산파는 물론이고 백리검가와 진무단의 피해도 클 거예요.”
“오냐, 어서 가자!”
스파앙. 휘슷.
용무린과 화운 두 사람은 전장을 벗어나기 시작했다. 연화봉까지 이르는 외길을 혈교의 마인들이 단단히 틀어막고 있었지만 누구도 두 사람을 막지 못했다.
“비켜, 이 자식들아 나 바빠-아!”
버언쩍. 피이이잉.
동시에 펼쳐지는 진천수라도와 비연오식.
“크아악!”
“커헉!”
혈신강령대법이고 뭐고 혈교의 마인들은 비명을 지르며 자빠지기 바빴다.
“어쭈? 나는 만만하다 이거냐? 이거나 먹어-엇!”
퍼어엉. 프파파팡. 빠바박.
화운이 파옥권과 전광연화장을 펼쳐서 그 뒤를 바짝 따라 붙었다.
***
조양봉 산허리에서도 치열한 전투가 한창이었다.
추생과 마전석이 이끌고 온 혈루단과 혈풍단 이백여 명이 화산의 사, 오대 제자들을 따라잡는 순간 백리검가와 진무단이 합세했기 때문이었다.
차앙. 차차창. 카캉. 스각.
“커헉!”
피쉬쉿. 카라락. 서걱.
“크아악!”
격렬한 소리를 내며 검과 도를 비롯한 각종 무기들이 서로의 목숨을 노렸다.
쿠와아아앙. 콰아앙.
간간이 뇌화탄도 터졌다. 한순간에 많은 수의 목숨을 앗아가 버렸지만 백리검가와 진무단의 무인들은 쉽게 무너지지 않았다.
“공간을 더 넓히세요. 넓혀야만 놈들이 던진 화탄에도 피할 수 있습니다.”
계속해서 주의를 주는 백리천월 덕이었다.
그 역시 뇌화탄을 처음 보는 것이었지만 처음 한 발이 터지는 것을 보는 순간 그 위력과 미치는 범위를 파악해 피해를 줄이는 방법을 생각해낸 것이다.
“수는 우리가 훨씬 더 많다.”
“넓혀라. 놈들이 화탄을 던져도 소용이 없도록 더 넓혀!”
조양봉을 다 내려와 놈들을 만난 것이 천만다행이었다.
정상 부근과는 달리 산허리인 곳이라 들판도 많고 싸울 곳 역시 천지였기 때문이었다.
‘할 수 있어. 이겨낼 수 있단 말이야.’
백리천월의 눈이 반짝반짝 빛을 발했다.
용무린 때문에 곤두박질 쳤던 자존심과 패배감을 완전히 떨쳐낸 듯 눈부신 활약을 보여줬다.
카앙. 카카카-앙. 쉬각.
“크아악!”
이미 혈영대법을 펼친 마인들이었음에도 서너 초식에 한 사람씩 착실히 눕혔다. 그 와중에도 주변을 살피며 혈교와 뇌화탄의 움직임을 살폈다.
“좌상단 진무단 쪽으로 뇌화탄 갑니다-아! 지금 당장 거리를 넓히세요!”
“고맙소이다, 백리공자!”
백리천월의 진두지휘에 진무단의 피해도 생각보다 크지 않았다.
쿠와아앙! 후두두둑.
뇌화탄은 애꿎은 땅만 후벼 팠다. 흙더미를 비처럼 흩날릴 뿐이었다.
물론 쇠구슬 겉면의 깊게 파인 선 때문에 조각난 철편들은 여전히 위력적이었다. 눈에 보이지도 않을 속도로 주변을 휩쓸었다.
“큽!”
“헉!”
철편 한 조각에 사람이 죽지는 않는다. 하지만 움직임은 느려질 수밖에 없었다.
“이놈!”
“죽어라-앗!”
그런 틈을 어찌 놓치겠는가?
휘슷. 쉬가악. 패애액. 서걱. 서걱.
뇌화탄이 폭발할 때마다 백리검가와 진무단 고수들의 숫자는 자꾸만 줄었다.
뇌화탄으로 인한 피해가 백리검가와 진무단의 고수들에게만 국한된 것은 아니었다.
“헉!”
“흐읍!”
철편들에 눈이 달려 있을 리 만무하다.
피한다고 피했지만 눈앞의 상대에 발목이 잡혀 제때 피하지 못한 마인들은 철편을 똑같이 뒤집어썼고 그로 인해 자세가 무너져야만 했다.
백리검가와 진무단의 고수들 역시 그 기회를 놓칠 까닭이 없다.
“이 더러운 자식들아-아!”
“받아라-앗!”
쉬각. 쉬각. 쉬가각.
“커헉!”
“큽!”
뇌화탄을 던질 때마다 혈교의 마인들 역시 비슷한 숫자가 계속해서 줄어들었다.
아득. 빠드득.
“이런 빌어먹을!”
“어떻게 이런 개 같은 일이 벌어질 수 있지?”
추격대를 책임지고 있던 추생과 마전석이 이를 갈았다.
혈교의 재림을 알리는 이 영광된 전투가 자신들의 무능으로 인해 퇴색이 될까 염려되었다.
“……!”
“……!”
두 사람의 눈이 허공에서 부딪혔다.
같은 생각인지 알 듯 말 듯 고개를 끄덕여 보인 두 사람의 입이 크게 열렸다.
“혈교의 전사들이여. 피로써 거듭나도록 하자!”
“혈신강령대법을 펼쳐라.”
“남은 뇌화탄에 모두 불을 당겨라.”
“던지지 마라. 그대로 이교도 놈들을 향해 덤벼들어라.”
혈신강령대법에 이은 자살 폭탄 공격이라니!
명령의 효과는 바로 나타났다.
“피로써 거듭난다-아!”
“혈신이여!”
“우와아아-아!”
이제 불과 백여 명 남짓 남아 있던 혈교의 기세가 폭발하듯 증가했다. 무려 오백 명을 넘어선 백리검가와 진무단에 맞먹었다.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치이이. 치이이이-.
불이 당겨진 뇌화탄을 던져내지 않았다. 그대로 백리검가와 진무단을 향해 돌진했다.
맞서 싸울 수도 없다.
그렇다고 피하자니 육탄돌격이라 계속해서 쫓아온다.
“이런 미친!”
백리천월의 얼굴이 검은빛으로 물들었다.
용무린이 도착한 것이 바로 그 순간이었다.
조양봉 정상에서 날 듯이 내려오며 백리검가와 진무단의 움직임과 대처를 확인했다. 내심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지만 더는 참지 못하고 고함을 터뜨렸다.
“모두 뒤로 물러서-어! 도화선에 불이 붙었으니 곧 폭발할 거야. 그냥 냅다 신법만 전개하면 다들 스스로 알아서 죽어줄 거라고-오!”
지금 이 순간 가장 적절한 대처였다.
그냥 죽어라 신법만 펼치면 스스로 알아서 죽어줄 것이라니 그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스파-앙. 휘슷. 후우욱.
고함을 지른 것이 용무린이라는 것을 알아차리자 백리검가와 진무단의 고수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한꺼번에 뒤로 쭉 빠졌다.
“이, 이놈들아 어딜 가느냐-아!”
“나와 같이 피로써 거듭나자!”
“함께 거듭나자-아!”
쉬가각. 패애액. 쌔애액.
물론 동귀어진을 할 놈들이 그냥 보고만 있지는 않았다. 기를 쓰고 무공을 펼쳤다. 어떻게 해서라도 백리검가와 진무단의 발목을 잡고 늘어지려고 했다.
카카캉. 스각.
“커억!”
패액. 쉬각.
“허어억!”
그 서슬에 몇몇 무인들이 검을 맞고 쓰러지기는 했다.
하지만 작정하고 뒤로 신법을 전개하는 절정의 무인들을 어디 그리 쉽게 따라 잡을 수 있겠는가?
치이이. 치이이잇.
결국 도화선이 쇠구슬을 파고들었다.
쿠와앙. 콰아앙. 쿠콰콰콰-앙!
스무 명 남짓의 혈교도들이 한순간에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크아악!”
“커헉!”
감히 맞받을 수 없는 충격파와 불길과 철편이 죽어라 뒤를 향해 신법을 전개하는 백리검가와 진무단의 등을 노렸지만 그 피해는 미미했다.
뇌화탄의 압력과 충격파에 직접 노출된 몇몇은 피를 토하고 쓰러졌지만 대부분의 무인들은 철편 한두 개에 스치는 것으로 끝났다.
“이이익!”
“하아앗!”
휘익. 화악.
몇몇 마인들이 다급한 마음에 뇌화탄을 암기처럼 던졌다.
“놈들이 또 던졌다!”
“넓혀-어!”
“공간 확보해-에!”
이미 여러 번 경험이 있었던 모양인지 대처가 빨랐다.
뇌화탄이 던져진 길목으로 신법을 전개하던 백리검가와 진무단의 무인들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쿠와아앙. 콰아아아-앙!
이번에도 역시 뇌화탄은 땅만 후벼 팠다.
물론 눈에 보이지 않는 속도로 비산하는 철편으로 인한 피해는 있었지만 뇌화탄을 고스란히 맞았을 때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작은 피해였다.
“커헉!”
“큽!”
되레 자신들이 던져낸 뇌화탄의 철편에 피해를 입은 혈교 마인들 몇이 비틀댔다.
백리검가와 진무단의 무인들이 즉시 파고들었다.
“이놈!”
“차아-핫!”
차창. 스각. 쉬각.
“크악!”
“허억!”
십여 명을 더 쓰러뜨렸지만 혈신강령대법으로 인한 피해가 눈덩이처럼 계속해서 불어났다.
파캉! 서걱.
“크악!”
콰창! 스각!
“헉!”
혈영대법에 비해 족히 두 배로 늘어난 내공을 감당하지 못해 병장기까지 통째 잘렸다. 연수합공을 제대로 펼치지 못한 사람은 여지없이 몇 수 버티지 못하고 쓰러졌다.
물론 가장 피해가 큰 것은 운초와 함께 화산을 내려 온 사, 오대 제자들이었다.
차창. 스각. 패애액. 서걱.
“억!”
“끄으윽!”
검 한 번 제대로 맞대어 보지도 못한 채 속수무책으로 쓰러져갔다.
“영인! 영풍! 으아아아-!”
피쉬잇. 패애애액.
운초도장이 피눈물을 뿌리며 분전을 해보았지만 역부족이었다.
쓰러져가는 제자들의 죽음을 막을 수 없는 절망적인 상황에 용무린이 천신처럼 나타났다. 화운과 함께 폭풍처럼 주변을 휩쓸었다.
버언쩌저적.
초승달에서부터 시작해 만월에 이르는 진천수라도의 초식과 소검비연은 농부가 과일을 수확하듯 너무나도 쉽게 혈교 마인들의 목을 거뒀다.
패애액. 투두둑.
진천수라도 한 초식에 셋의 목이 동시에 떠올랐다.
피이이잉. 쉬리리릭. 서걱. 서거걱.
소검비연이 굴비 엮듯 혈교 마인들의 가슴을 꿰면 뒤를 이어 밀려든 천잠사가 모든 것을 갈라버렸다. 거짓말처럼 혈교 마인들이 쓰러졌다.
“놈들은 내가 맡을 테니 제자들이나 안전지대 뒤로 물리도록 해.”
“매화검수의 막내 운초구나! 기억이 난다. 옥허의 사질이었지?”
“아!”
용무린과 화운의 따뜻한 말에 그만 운초는 기쁨의 눈물을 터뜨릴 수밖에 없었다.
조양봉을 통해 내려온 것이 분명한데, 그 말은 곧 화산을 점령했던 혈교 마인들의 손에서 본산을 수복했다는 말과 같았기 때문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화운이 기쁜 소식을 전해주었다.
“이제 염려 마라. 지금쯤이면 연화봉에서 혈교 놈들을 싹 쓸어버렸을 게다.”
그 말을 끝으로 화운은 다시금 화산의 사, 오대 제자들 주변의 혈교 마인들을 정리했다. 용무린과 함께 거침없이 혈교 마인들의 목숨을 거뒀다.
일이 이지경이 되었는데 어찌 추생과 마전석이 모를까?
두 사람 역시 살아 돌아가는 것을 포기했다. 혈신강령대법을 불러 일으켜 자신들의 모든 잠력을 폭발시켰다.
“네놈은 반드시 죽인다-아!”
추생은 자신의 임무를 그르치게 만든 최초의 원인제공자 백리천월을 향해 짓쳐들었다.
검을 쭉 그었다. 그 끝에서 섬뜩하리만큼 붉은 색의 기운이 폭발하듯 터져 나왔다.
“우웃!”
백리천월이 화들짝 놀라며 육양귀일검의 일초 회륜단금을 펼쳤다.
“안 돼-에!”
멀지 않은 곳에 있던 백리검가의 장로 백리건후가 재빨리 합류했다. 백리검가의 직계들만이 전수받을 수 있는 천양진명검법을 펼쳐 추생의 검에 맞섰다.
파카-앙. 콰콰쾅.
혈신강령대법을 받아 펼쳐진 검강은 실로 무서웠다.
한 수에 회륜단금의 초식이 깨어졌고 두 번째 초식에 천양진명검법의 검초마저 형편없이 뒤로 밀렸다.
“크읍!”
“흡!”
백리천월과 백리건후 두 사람이 동시에 답답한 신음성을 토해냈다. 입가에는 작은 핏줄기까지 흘러내렸다.
추생도 무탈할 수만은 없었다.
상대 중 하나는 신주오가에서도 수위를 차지하는 백리검가의 장로. 초절정의 고수이며 백리검가에서도 장로급만이 익힐 수 있는 천양진명검법을 구성까지 익힌 강자였기 때문이었다.
“크흡. 바, 반드시 죽인다-아!”
휘슷. 파아아-.
치밀어 오르는 피를 꿀꺽 삼키며 추생은 다시 짓쳐들었다. 연거푸 혈신강령대법의 힘을 검초에 담아 뿌렸다.
콰앙. 쾅쾅쾅.
누구도 감히 끼어들 수 없는 생사결이 펼쳐졌다.
백리천월은 숙부인 백리건후와 함께 힘겨운 싸움을 벌여야만 했다.
마전석은 진무단주를 상대로 골랐다.
“크흐흐. 피로써 거듭나리라!”
뭉클. 콰르르-.
피처럼 붉은 강기 덩어리가 진무단주를 향해 뭉텅 쏟아졌다. 이른바 혈천마검. 자욱한 혈무 속에 감춰진 혈강 덩어리가 번개와 같은 속도로 튀어나왔다. 진무단주의 머리와 목과 심장을 노렸다.
“흐아압!”
진무단주가 혼신의 공력을 쏟아 검에 집중했다. 한 자 남짓한 유형화 된 검강이 보란 듯 솟구쳤다. 혈천마검을 베어갔다.
파캉. 터엉. 쾅쾅쾅.
“커헉!”
쿵쿵쿵.
한 번의 부딪힘이 다섯 걸음이나 뒤로 밀리는 진무단주. 한 자 남짓 치솟았던 검강은 이미 어디론가 사라진 뒤다.
“단주니-임.”
부단주가 깜짝 놀라 가세했다.
쾅!
아직도 밀려드는 혈천마검의 여력을 중간에서 끊어냈다.
“부끄럽군.”
진무단주가 입가에 흐르는 피를 쓱 닦아내며 쑥스럽게 고마움을 표현했다.
“상대는 이미 오래 전에 살아진 것으로만 알려진 혈교의 주구입니다, 단주. 함께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진무단주는 자존심을 세우지 않았다. 잔뜩 굳은 얼굴로 검을 중단에 세웠다.
“부탁하지. 하아앗!”
“염려 마십시오. 차아아-아!”
진무단주와 부단주가 동시에 마전석을 향해 짓쳐들었다.
“오너라! 깡그리 죽여주마-아!”
뭉클. 콰르르.
상대가 죽어야만 끝나는 생사결이 계속되었다.
‘이겨도 피해가 너무 크겠는데?’
화산파의 사, 오대 제자들을 조양봉 아래 안전한 곳까지 이끌어 놓은 용무린이 전장에 복귀하며 든 감상이었다.
‘하여간 지독한 놈들이란 말이야.’
신마 진무량의 기억 속에서도 혈교의 마인들은 독특한 존재였다. 쉽사리 상대할 수 있을 것이라 방심하기만 하면 어김없이 자신을 불사르는 주문과 함께 상상하기 힘든 거력을 뿜었다.
‘백리천월 녀석이 저렇게 집중하고 있는 앞에서 먹잇감을 빼앗기는 조금 그렇고…….’
백리천월에게 필요한 것은 생사가 오가는 실전이다.
지금 백리검가의 장로와 함께 돈을 주고도 사지 못하는 경험을 하는 백리천월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방법은 상대의 독기만 살짝 빼주는 것이다.
피식.
“좋아! 놈의 이빨만 살짝 무디게 만들어 주지.”
“응? 그게 무슨 소리냐 무린아?”
화운이 동그래진 눈으로 물어왔지만 용무린은 대답대신 숨을 크게 들이켜기 시작했다.
“쓰으읍. 쓰으으읍. 쓰으으으으-읍!”
휘이이. 쑤우욱. 쭈와아아-악!
용무린이 숨을 들이켬에 따라 주변에 가득한 대자연의 기가 무식할 정도로 빨려들었다. 지켜보던 화운의 입이 쩍 벌어질 정도로 급격한 속도였다.
한껏 들이켠 숨결에 불사신기를 보탰다. 그 후 한꺼번에 토해냈다.
“크아아-앙!”
우레와 같은 사자후가 주변을 휩쓸었다.
그 안에 가득 서린 불사신기가 혈신강령대법의 힘을 받아 넘실대는 핏빛 기운을 후려쳤다.
“커헉!”
“흡!”
흠칫! 움찔!
주변에서 동료가 죽어도, 자신의 팔이 뚝 떨어졌어도 상관하지 않던 마인들이 동시에 멈칫했다.
모든 마공에 상극인 불사신기의 위력이었다.
백리검가와 진무단의 고수들을 공격하던 마공의 맥이 찰나에 불과한 순간이지만 툭 끊겼다. 짓쳐들던 초식에 빈틈이 생기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지금이다!”
“허점!”
“차아아!”
불사신기는 정종 내공을 익히고 있던 백리검가와 진무단의 고수들에게는 약이 되었다.
호연지기를 돋웠다고나 할까?
용기백배해 때를 놓치지 않고 파고들었다. 저마다의 절기를 펼쳐내었다.
백리검가의 대표적인 검법인 육양귀일검의 절초와 진무단의 무인이라면 누구나 익히고 있는 진무파랑검의 초식이 혈교 마인들에게 쏟아졌다.
패액. 스각. 쉬리릭. 서걱.
“크악!”
“커허억!”
살상력은 없는 사자후였지만 그 서슬에 죽음을 맞이한 혈교 마인들 숫자가 사십여 명에 달했다.
“승기를 잡았다!”
“지금 더 몰아쳐야 한다.”
“힘을 내라!”
그렇지 않아도 얼마 남아 있지 않은 혈교의 마인들은 더더욱 빠른 속도로 줄어들었다.
불사신기가 가득한 사자후는 혈신강령대법을 펼쳐 자신들의 모든 잠력을 폭발시킨 추생과 마전석에게까지 영향을 끼쳤다.
흔들. 멈칫.
막 백리천월과 백리건후를 향해 동귀어진의 수를 펼쳤던 추생의 내공이 찰나지만 끊겼다.
‘보인다!’
초식이 뒤흔들리는 과정에서 두 사람은 추생이 펼친 동귀어진의 초식을 똑똑히 볼 수 있었다.
‘심장을 향해 밀려들지만 위로 비스듬히 뒤틀렸어. 내 목을 노리고 있어. 그대로 거슬러 오를 거야.’
오싹!
백리천월의 전신에 소름이 돋았다.
심장 부위만 단단히 지키면 된다고 생각했지만 오산이었다. 죽음을 각오한 상대의 초식이 어떤 것인지, 초식이 어떻게 상대의 목숨을 노려야 효율적인 것인지 똑똑히 느낄 수 있었다.
“차아아-하!”
백리천월은 단전을 쥐어 짜 일양추혼의 초식의 검로를 비스듬히 위로 틀었다.
동시에 허리를 뒤로 틀며 목을 빼냈다. 자신이 익히고 있는 검법 중 가장 강력한 천양진명검법의 초식을 펼쳐 검을 긁어 내렸다.
비슷한 경험을 백리건후도 했다.
‘내가 아니라 천월이의 목숨을 노리고 있었어.’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가 겨우 돌아왔다.
자신에게 쏟아졌던 그 무서운 검강이 사실은 허초였고 실은 백리검가의 미래인 백리천월의 심장, 아니 목을 노린 공격이었다니!
그대로 초식을 펼쳐내면 추생의 심장을 두 쪽으로 갈라버릴 수 있다.
하지만 그랬다가는 백리천월을 잃게 된다.
백리건후가 급격히 검을 옆으로 틀었다. 추생과 백리천월 사이를 갈랐다.
파카아-앙. 콰앙.
굉음과 함께 백리천월의 목을 노리고 위를 향해 거슬러 오르던 추생의 검이 옆으로 흘렀다.
“차아앗!”
반면에 이미 반격할 준비를 마친 백리천월의 검 끝에서는 천양진명검법이 펼쳐졌다. 한 줄기 번개처럼 추생의 목에서 하복부까지 이어지는 붉은 선을 그렸다.
촤아악! 푸우웃.
“커헉. 바, 방해만 받지 않았어도…….”
터얼썩.
분하기 짝이 없다는 눈빛을 감추지 않은 채 추생은 바닥을 나뒹굴었다. 그대로 의식이 끊겼다.
“크아악!”
바로 뒤를 이어 처절한 비명과 함께 마전석의 목이 둥실 떠올랐다. 상체와 하체도 분리되어 버렸다. 진무단주와 부단주의 합작품이었다.
“후우우.”
“허억. 허억.”
하마터면 동귀어진의 초식에 당할 뻔했던 놀람이 가라앉지 않는지 두 사람은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추생과 마전석의 죽음을 끝으로 전투는 모두 끝이 났다.
용무린과 화운이 다가와 공치사를 건넸다.
“이야, 멋졌어. 동귀어진의 초식을 간파하고 반격하기가 여간 힘든 것이 아닌데 대단한걸?”
“허허허. 백리검가의 미래가 아주 밝군그래. 아니 그런가, 백리건후 장로.”
‘또 너구나!’
자신이 승리할 수 있었던 이유가 바로 사자후라는 것을 모를 리 없다.
백리천월의 표정은 밝지 않았다.
비룡문에서 이미 한 번 들어 보았던 사자후라 바로 알아차렸던 것이다.
“하하하. 이렇게 잘 자라주어 얼마나 자랑스러운지 모르겠습니다, 선배.”
백리천월과는 달리 백리건후는 화운을 향해 공치사를 한 후 용무린에게도 가볍게 포권을 취해 보였다.
“큰 신세를 졌군.”
말을 마친 백리건후가 재빨리 고개를 흔들었다. 다시 말을 이었다.
“아니, 이러면 내가 너무 교만한 것인가?”
백리건후가 자세를 바로 했다. 용무린을 향해 정중한 태도로 다시 손을 모았다. 포권을 취했다.
“용 대협. 백리검가는 오늘의 도움을 절대로 잊지 않겠소이다.”
백리건후의 말투마저 바뀌었다.
그전까지는 같은 신주오가의 일원 중 후기지수를 대하듯 했다면 지금부터는 강호의 법칙을 따라 자신보다 월등한 무력에 많은 것을 이룬 용무린을 대협으로 인정해주겠다는 뜻이었다.
“하아! 장로님도 참……. 그전처럼 편하게 대해주세요, 편하게.”
용무린이 손사래를 쳤지만 백리건후의 태도는 변하지 않았다. 무거운 목소리로 답했다.
“자부심을 충분히 가져도 되오, 용 대협. 대협의 빠른 대처와 사자후가 아니었다면 우리 중 살아서 숨 쉴 수 있는 이는 손가락에 꼽을 것이오.”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전투 초기와 중반까지는 백리천월의 대처가 탁월했지만 혈신강령대법에 이은 뇌화탄의 자살공격을 막은 것은 용무린의 기지였으니까.
게다가 가장 위급한 순간에 터진 사자후의 값은 따질 수도 없었다.
“일단 화산파로 오르죠. 지금쯤이면 정리가 다 끝나 있을 거예요.”
“오! 그거 반가운 소리요, 용 대협.”
“에혀…….”
나직이 한숨을 내쉬며 돌아서는 용무린에게로 뉘엿뉘엿 넘어가는 태양이 빛을 비추었다.
그 모습이 어찌나 눈이 부신지!
공명심이나 자부심과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 먼 그 행동에서 백리천월은 무엇인가 느낄 수 있었다.
“내가 졌다, 용무린.”
자신도 모르게 그 말이 툭 튀어 나왔다.
말을 하고 나서 흠칫 놀랐지만 희한한 것은 입가에 작은 미소가 돋았다는 것이다.
성큼.
발을 내디딘 백리천월은 용무린의 뒤로 바짝 따라 붙었다. 그 이상은 절대로 뒤지지 않겠다는 듯…….
용무린의 예상대로였다.
옥녀봉의 혈투는 검향지기를 완전히 자신의 것으로 만든 옥진도장과 선승다운 면모를 보였던 살계승 효정대사의 승리로 돌아갔다.
혈신강령대법을 불러 일으켜 전신의 잠력을 격발시킨 진몽과 은도평의 내공은 실로 무시무시할 정도였으나 상극의 내공이라 할 수 있는 검향지기와 불문의 내공마저 넘어설 정도는 아니었다.
그래도 남아 있던 혈교 마인들의 숫자는 상당했다.
모두가 혈신강령대법으로 잠력을 격발한 상태였지만 역시 소림의 무승들과 함께 조화를 이룬 화산의 검수들을 당해낼 수는 없었다.
불문의 웅혼한 내공과 묵직하고 철벽같은 초식에 경쾌하며 날카로운 화산의 검초가 더해지자 더할 나위가 없는 상승효과를 보였던 것이다.
진몽과 은도평이 쓰러지고 난 후 오래지 않아 혈교의 잔당까지 모두 정리가 되었다.
불에 타고 엉망이 된 본산에 돌아온 화산파 도사들은 참담했지만 가슴속에 희망 또한 품었다. 저 무시무시한 진몽을 쓰러뜨리는 사이 모두의 가슴에 시나브로 스며든 검향지기 때문이었다.
누가 먼저 등을 떠밀지는 않았지만 옥진은 자연스레 화산파의 장문인의 위에 올랐다. 매화검령을 거머쥔 옥진을 향해 모두가 진심으로 고개를 조아렸다.
“허허허. 화산이 거듭난 것을 축하합니다, 옥진 도장. 아니, 이제는 장문인이 되셨지요. 소림을 대신해서 축원하는 바외다.”
“감사합니다, 효정대사님. 눈 속에서 피어나는 매화처럼, 힘든 현실이지만 화산의 정기를 오롯이 되살려 놓도록 하겠습니다.”
“허허허. 그렇게 되리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아무렴! 화산의 검에 매화향기가 흐르기 시작했으니 그걸 뉘라서 함부로 보겠어? 안 그런가, 옥진? 아, 아니 옥진 장문인?”
화운 태상장로마저 말을 슬쩍 높였다.
과거에는 의좋은 선후배 사이였지만 지금은 어엿한 화산파의 장문인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축하합니다, 옥진 장문인. 화산파의 앞날에 무궁한 영광과 발전이 있을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감축 드립니다, 옥진 장문인! 화산은 머지않아 우뚝 설 수 있을 것입니다.”
“비록 많은 피를 흘렸지만 혈교의 마인들을 훌륭히 물리친 화산의 정기는 많은 무림 동도들의 귀감이 되기에 충분합니다, 옥진 장문님.”
백리건후와 백리천월에 이어 진무단주도 덕담을 건넸다.
모두가 화산파의 빠른 재건을 믿었다.
검향지경을 단단히 다진 옥진도장이 장문인의 자리에 오른 것도 이유겠지만, 혈교의 마인들 주검을 수습하며 되찾은 비급들 덕도 컸다.
본산이 불에 타고 무너지고 비급까지 도둑맞았지만 하나도 빠짐없이 되찾을 수 있었던 것은 정말 천운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옥녀봉의 외길 절벽에서 아래로 떨어진 마인들의 주검까지도 샅샅이 뒤져 하나도 유실된 것 없이 되찾았기에 재건은 시간문제일 뿐이었다.
화산은 잃은 것도 많았지만 얻은 것 역시 적지 않았다. 비온 후 땅이 굳듯, 도가 명문 검파로써의 화산의 위치는 검향으로 인해 더욱 높아지리라.
넉넉한 미소로 그 모습을 지켜보던 일각대사의 시선이 용무린에게로 향했다.
“왜요?”
“상처가 크긴 하지만 화산은 머지않아 다시 우뚝 설 것이 분명할 터, 용 대협의 다음 행보가 어디로 향할지 그것이 궁금해서 그러오.”
기다렸다는 듯 모두의 시선이 용무린에게로 향했다.
화산을 오르기 전에 비해 많은 것이 달라진 백리천월의 눈에도 호기심이 떠올랐다.
‘이거 어째 분위기가 수상한데?’
자신에게 쏟아지는 시선에 무언의 청이 깃들어 있음을 용무린이 놓칠 리 없다.
이때다 싶은 듯 옥진의 입이 열렸다.
“혈교가 침공한다고 공언했던 곳은 소림과 무당 두 곳이었습니다, 대협.”
심각한 얼굴이 된 효정대사와 화운이 그 말을 받았다.
“화산을 침범했던 혈교 마인들의 숫자는 겨우 육백 명 남짓. 허허허, 소림과 무당을 동시에 노렸던 마인들이 그게 전부이고 이곳으로 몽땅 몰려왔다고 누가 믿을까?”
“무당은 아니겠지? 소림에서 이곳으로 목표를 바꾸었듯 역시 다른 곳을 노렸을 것 같단 말이야.”
계속해서 말을 잇는 화운의 목소리가 은근해졌다.
“낙녕현 어귀에서 네가 그랬었지? 성동격서, 나 같으면 차라리 화산과 종남을 치겠다고 말이야.”
결국 용무린은 싱겁게 웃으며 되물었다.
“함께 종남으로 가자는 말씀이죠?”
“그래.”
“그럼 그냥 함께 가자고 하면 될 일이지 무슨 말을 그리 힘들게 해요, 다들?”
“네 녀석이 함께 가지 않을까봐 그러는 게지.”
“처음 보는 뇌화탄 같은 무기가 떡 하니 나타나도 대뜸 대처법을 찾아내 박살을 내버리는 용 대협이 빠지면 어디 무서워서 쉽게 움직일 수 있겠는가?”
화운에 이어 효정대사마저 은근히 말을 높이며 압박했다.
용무린의 고개가 천천히 끄덕여졌다.
하지만 흔쾌하게 끄덕여지는 고개와는 달리 표정은 많이 어두웠다.
“어째 그러느냐? 종남으로는 가기 싫어서 그러냐?”
“아니요.”
용무린이 고개를 흔들었다.
“그러면?”
“일단 종남으로 가는 것 자체는 동의해요. 그런데…….”
용무린이 말꼬리를 늘였다.
어째서 그러는 것인지 알 수 없다는 듯 모두의 눈이 동그래졌다.
그 때 용무린의 입에서 비관적인 예상이 흘러나왔다.
“종남은, 제 예상이 이번에도 맞는다면 늦었어요.”
“뭐야?”
“그 말은…….”
모두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용무린은 계속해서 심각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거리상의 문제가 있긴 하지만, 혈교는 아마 비슷한 시간에 출격을 했을 거예요.”
“그럴 가능성이 크긴 하지.”
“허어 듣고 보니 우려가 크구나. 종남의 시주들이 얼마나 고통스러울꼬?”
용무린의 목소리가 확정적으로 바뀌었다.
“우리가 승리에 기뻐하고 있는 이 시각, 놈들도 기뻐하고 있을걸요? 종남이 낙녕현 어귀로 이끌고 나온 전력을 감안하면 역시 빈집이나 다름없었을 테니까요.”
종남의 이인자인 곽창휴가 이끌고 온 전력 역시 청성과 비슷할 정도, 육 할에 이르는 힘이 한꺼번에 빠져 나왔으니 빈집이 맞다.
“정말 큰일이로군.”
“젠장. 그러면 어떻게 하지? 지금 달려가 봐야 헛일이 아닌가?”
효정대사와 화운이 안타까워했다.
용무린이 빙그레 웃는 얼굴로 백리천월을 바라보았다.
‘내 생각이 따로 있긴 하다만, 너라면 어떻게 할래?’
제대로 빚을 갚겠다는 생각인지 용무린은 자꾸만 백리천월에게 기회를 주었다.
‘좋지!’
전과 달리 그 호의를 기쁘게 받아들인 백리천월이 자신의 생각을 밝혔다.
“제 생각은 이렇습니다.”
“……!”
“……!”
모두의 시선이 백리천월에게로 쏠렸다. 백리천월은 당당한 태도로 말을 이었다.
“저 역시 종남은 지금 아무리 빨리 달려가 봐야 구원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복수라면 가능합니다. 놈들이 마냥 종남에 눌러 있지는 않을 터, 종남산 밖으로 나오는 순간의 방심을 노려야 합니다.”
이 정도면 어때?
되묻듯 백리천월의 시선이 용무린에게로 향했다.
“좋아, 내 생각과 비슷하군.”
용무린이 백리천월의 말을 받았다.
“놈들이 화산과 종남을 동시에 염두에 두었다고 가정하면 그 내심은 빤해. 무주공산이 된 섬서성을 통째 집어 삼키겠다는 것이겠지.”
“이런 발칙한!”
“어림도 없다, 이놈들!”
다혈질인 화운과 진무단주가 가장 먼저 반응을 보였다.
“놈들은 화산에서 패배할 것은 생각지도 못하고 있을 거야. 핏빛 기운을 뭉텅 쏟아내는 그 사이한 대법은 둘째 치고 뇌화탄이라고 하는 신무기까지 가지고 출정했으니 어쩌면 당연한 일이겠지.”
“아하! 그러면 놈들은 이제 당당히 혈교의 재림을 선포한 후 섬서성에 자신들의 세력을 넓힐 거점을 확보하려 들겠구나?!”
“바로 그거지!”
주거니 받거니 척척 혈교의 내심을 까발리는 용무린과 백리천월을 보며 효정대사와 화운이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진심으로 기꺼워했다.
“허허허. 선재, 선재라…….”
“이것 참, 장강후랑추전랑이라더니……. 마교에 이어 혈교마저 재림을 했지만 무림의 앞날은 밝구나. 허허허.”
노강호들의 칭찬에 백리천월의 가슴이 벅차올랐다.
‘고마워 친구.’
오늘 하루 참 많은 것이 바뀌었다고 느끼는 백리천월이었다. 과거 패배감에 집착하던 때라면 시기와 질투심에 배려조차 곡해했겠지만 지금은 자꾸만 기회를 주는 용무린의 마음이 똑똑히 보였다.
‘나이는 내가 몇 년 위지만 너는 내가 인정한 내 친구다. 변치 않는 우의로 너를 대하겠다. 그동안 속 좁게 행동해서 많이 미안하다.’
소리 없는 사과가 이어지는 가운데 용무린의 예견이 계속되었다.
“그러니 종남을 향해 가면서 놈들이 세력 확장의 거점으로 삼을 만한 곳을 눈여겨보는 동시에 놈들의 움직임을 탐지하면 쉽게 찾을 수 있을 거야.”
“맞아. 낙녕현으로 향할 때와는 달리 이번에는 숨어서 움직이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해. 재림 선포와 함께 당당하게 행동할 가능성이 커.”
“당연하지. 재림 선포까지 한 마당에 숨어 다니거나 피해 다녀서야 혈교 체면이 서질 않을 테니까. 들키면 정면 승부를 택할 가능성이 높지 않겠어?”
“듣고 보니 너희들 말이 옳구나. 알겠다. 산을 내려가는 즉시 개방의 연락망을 총 가동해서 놈들의 움직임과 현재 위치를 알아내자꾸나.”
당장이라도 움직이고 싶다는 듯 화운이 엉덩이를 들썩거렸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내려가는 즉시 전서부터 몇 장 보내야 해요.”
“무림맹에 보고하는 것 말이냐?”
“아니요! 종남을 시작으로 소림, 무당, 청성, 무림맹에 혈교의 재림과 뇌화탄의 존재, 그리고 그에 대처하는 방법들을 알려야지요.”
“아! 맞다! 그래야지. 암!”
하마터면 큰 실수를 할 뻔했다는 듯 화운이 가슴을 쓸어내렸다.
“자! 그러면 일이 급하니 지금 당장 일어나도록 하지요.”
용무린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당연하지.”
“헐헐헐. 그래, 가야지.”
화운과 효정대사가 따라 몸을 일으켰다.
“돌보아야 할 일들이 많아 멀리 나가지는 않겠습니다. 하지만 여러분들께서 오늘 보여주신 후의는 화산이 결코 잊지 않을 것입니다.”
“그 무슨 말씀을!”
“우리는 신경 쓰지 마시오, 장문인. 그저 화산의 재건에 모든 심력을 기울이시오.”
화운과 효정대사가 강한 어조로 손사래를 쳤다.
용무린을 포함해 모두가 이심전심이었다.
불타버린 세간살이.
자신들 한 몸 뉘일 곳 찾기도 힘든 판국에 소림과 백리검가와 진무단까지 어디에서 쉴 곳을 찾을 것이며 먹을 것은 또 어떻게 구하겠는가? 이럴 때는 그저 빨리 빠져주는 것이 돕는 것이다.
척. 처척.
“무운을 비오이다!”
“무운을…….”
하산하는 용무린과 고수들을 향해 화산의 뭍 고수들이 정중히 포권을 취해 보였다. 쉬지도 못하고 내려가는 길이었지만 그들의 진심 어린 환송에 상처가 낫는 착각마저 들 정도였다.
하지만 그래도 입은 내상들이 다들 만만치 않았다.
그래서 용무린이 화산의 산문인 옥천문 어귀의 공터가 나오자마자 쉬어 가자는 말을 꺼냈을 때 아무도 반대하는 사람이 없었다.
돌아가며 번을 서는 사람들을 제외하면 모두가 제자리에 앉아 제각각 문파의 요상단을 복용했다. 가부좌를 틀고 내상을 다스리는 일에 전력을 기울였다.
오직 용무린만이 아무런 치료약을 먹지 않았다.
‘불사신기! 죽음까지 거슬렀던 그 힘을 나는 믿는다.’
휘이이. 휘이이이. 휘이이이이-.
불사신기를 끌어 올린 용무린을 향해 대자연의 기가 밀려들기 시작했다.
***
그렇게 밤이 지나가고 먼동이 터오를 무렵.
화르륵. 화륵. 화르르륵.
유서 깊은 종남의 전각들은 하나도 남기지 않고 화마에 휩싸였다.
용무린의 예상이 이번에도 맞았던 것이다.
“크크큭. 어때? 멋지지 않나?”
“푸흐흐. 그래, 잘 타는군. 속이 다 후련할 정도야.”
혈교의 대 종남 공격의 선봉장인 혈수존과 동년배인 음혈마가 살기를 흩뿌리며 웃었다.
“화산도 이미 끝나 있겠지?”
“그랬겠지. 아마 지금쯤이면 총단을 향해 승전보가 떠오르지 않았을까?”
“츱! 우리 승전보는 하루 정도 늦겠군.”
“별 수 없지. 이동한 거리가 있는데…….”
화산에서 종남 사이의 거리는 닷새 남짓.
거리를 감안해서 먼저 떠나왔지만 그래도 하루 정도의 차이가 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크크큭. 병신 같은 말코 놈들 같으니. 뇌화탄 열 발에 발발 떠는 모습이라니!”
“푸흐흐. 덜덜 떨리는 손으로 검법이랍시고 펼치던 종남 장문인의 얼굴 봤나? 어찌나 우스운지!”
무공보다는 너그러운 인품으로 종남의 장문인에 올랐던 천성쾌검 관중양으로서는 사력을 다한 용기였고 무공이었지만 이들에게는 한낱 웃음거리가 되었다.
어차피 종남의 제일고수는 곽창휴였고 전력 중 육 할이 화산파처럼 밖에 나가버린 터라 변변한 반항조차 할 수가 없었다.
화산파와는 달리 종남파는 예전의 성세를 되찾기 힘들 것이다.
무고의 비급은 물론 장문인인 관중양의 처소에 숨겨져 있던 천하삼십육검과 오뢰정인 그리고 현천강기의 비급마저 강탈당했기 때문이었다.
“끌고 오너라!”
“충!”
혈수존의 명령에 대답한 수하가 아직 앳된 종남의 오대 제자 중 한 사람을 끌고 왔다. 종남파의 마지막 생존자이자 목격자인 가량이었다.
“사문의 악적! 퉤! 나도 죽여라! 당장!”
이제 불과 십오 세인 가량은 사문의 종말을 목격했으면서도 아직 기개가 넘쳤다. 장문인이었던 관중양마저도 겁을 집어 먹게 만들었던 혈수존과 음혈마 면전에 대놓고 욕을 하고 침을 뱉었다.
꿈틀.
혈수존의 눈가에 살기가 넘실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