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천기자의 마지막 안배
음혈마가 늦지 않게 나섰다.
“마지막 놈이야. 살려서 보내야 혈교의 위업이 어떠했는지 세상이 알 수 있지 않겠어?”
“츱!”
그냥 살려 주기에는 입맛이 쓴지 혈수존이 혀를 찼다.
슬그머니 가량의 단전에 손바닥을 가져다 댔다. 혈수마공의 기운을 밀어 넣었다.
퉁.
“허억!”
가량이 학질에라도 걸린 듯 몸을 떨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며 혈수존이 입 꼬리를 길게 말아 올렸다. 싸늘한 목소리를 내뱉었다.
“당장 죽진 않을 게다. 내려가서 쓸개 빠진 정파 놈들 모두에게 알려라. 혈교가 재림을 했다고! 종남을 짓밟은 것은 그 증거니 알아서 고개를 조아리라 일러라. 알겠느냐?”
“크흡. 큭. 바, 반드시. 반드시 복수하겠다.”
고통에 힘겨워 하면서도 가량의 기개는 여전했다.
원독 어린 시선으로 혈수존과 음혈마를 노려보며 복수를 기약했다.
“푸흐흐. 거, 재미있겠군.”
“네놈의 무공이 내 손에 뒈진 장문인의 곱절이 되거든 오너라. 그 전에는 어림도 없다. 알겠느냐?”
아드득.
“반드시 복수한다. 반드시-이!”
가량은 이를 갈며 종남산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낄낄낄. 꼬맹아. 복수가 어쩌고 어째?”
“쥐 죽은 듯 살아 이 멍청아.”
“크크큭. 이 어르신께 오너라. 반드시 오너라. 혈신께 네놈의 피를 바쳐 거듭나야겠다.”
비틀거리며 걷는 가량을 향해 비웃음이 쏟아졌다.
아득.
그럴수록 가량은 이를 갈았다.
‘두고 봐. 반드시 네놈들을 찾을 거라고!’
가량의 뇌리에 한 사람의 이름이 떠올랐다.
‘용무린!’
삼절일학, 무림맹 총순찰, 황룡패주, 무림왕.
한 사람을 지칭하는 수식어로는 조금 과하다 싶을 만큼 거창한 이름들이었지만 가량은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라면, 용무린의 능력이라면 이 피맺힌 원한을 되갚아 주기에 부족함이 없을 것이라고.
‘불과 일 년 만에 비룡문을 무문으로 탈바꿈시켰다고 들었어. 어디 그 뿐이야? 무림맹에 드리웠던 마교의 암운도 거침없이 분쇄했다고!’
거기에 더해 황궁에서의 활약이란!
마교와 손을 잡은 것으로 알려진 신주오가의 두 곳도 용무린의 손에 무너진 것이나 마찬가지다. 이름난 초절정 고수들도 연거푸 용무린의 손에 쓰러졌다.
고아의 몸으로 떠돌다 운 좋게 종남에 인연이 닿아 몸을 담기는 했지만 소년 가량에게 있어서 용무린이란 거의 신과 동급이었다.
‘먼저 곽창휴 사조를 찾아 사문의 비보를 알린다. 그 뒤에는 용무린 그분을 찾는다. 복수할 길을 찾도록 도와달라고 부탁해보자.’
가량의 발걸음이 조금씩 빨라졌다.
하지만 안색은 갈수록 파리해져 갔다. 혈수존이 단전에 밀어 넣은 혈수마공의 내공 때문이었다.
비틀거리는 가량의 등 뒤로 야속한 밤이 내려앉았다.
***
시간이 훌쩍 지나 다시 아침이 밝아 올 무렵.
소림과 더불어 무림의 양대 산맥으로 추앙받는 무당산 동쪽 하늘에 푸름이 번졌다. 하지만 어쩐 일인지 그 안에 붉은 기운이 섞여 있었다. 마치 비구름이라도 잔뜩 몰려올 듯한 모양새였다.
“비라도 오려나?”
저벅 저벅.
이제 막 일어나 새벽 연공을 준비하던 청영 도장이 인기척에 놀라 고개를 돌렸다.
“응?”
청영이 눈을 크게 떴다. 자세를 바로 한 후 정중히 포권을 취했다.
“사숙을 뵙습니다.”
무당 칠협의 하나로 이름이 높은 자엽도장과 그 제자들인 청평, 청송이 찾아왔기 때문이었다. 사부인 자운진인이 무당의 장문인이자 자엽의 사형이니 청평과 청송은 그에게는 사제들이 된다.
“장문인께서는 기침하셨느냐?”
“저도 이제 막 일어나서 아직 잘…….”
청영도장이 어색하게 웃으며 뒷덜미를 긁었다.
그때 안에서 나직하면서도 묵직한 목소리가 흘러 나왔다.
“일어났네. 들어오시게, 사제.”
“예, 사형.”
오늘은 사적으로 찾아왔다고 시위하려는지 장문인이라는 호칭 대신 사형이라 답하며 들어서는 자엽이었다.
“청평. 청송. 이쪽이야. 이쪽이라고-오!”
어느 틈에 멀어졌을까?
청영은 장문인의 처소에서 멀찍이 떨어진 곳에서 청평, 청송 두 사제를 향해 속삭이듯 불렀다. 열심히 손을 휘저었다.
청평과 청송이 싱겁게 웃으며 다가왔다.
“유운신법의 경지가 갈수록 높아지네요, 사형.”
“꽤 따라잡았다고 여겼는데, 되레 거리가 더 벌어진 느낌인데요, 사형?”
두 사제의 칭찬을 청영은 질문으로 받았다.
“무슨 일이야? 사숙께서 안색이 별로이신데?”
서로의 얼굴을 한 번 바라본 청평과 청송은 어깨를 한 번 으쓱여 보였다. 청영이 그러했듯 나직한 목소리로 속삭이듯 답했다.
“요사이 사부님께서 자소궁에서 여러 어르신들과 대립각을 세우셨잖아요?”
“그것 때문에 그래요. 마음이 불편하셨던 것 같아요. 어제는 밤새 잠도 이루지 못하시고 내공수련에도 마음을 쏟지 못하시더니 갑자기 차를 끓이시더라고요.”
“응? 차? 갑자기?”
청영은 다소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청평과 청송이 풀썩 웃었다.
“예. 장문인께서 기침하시면 대접을 하시겠다고 손수 끓이셨어요.”
“그동안 속이 여간 불편하셨던 모양이에요.”
“사숙도 차암…….”
청영이 싱겁게 웃으며 장문인의 처소로 고개를 돌릴 때였다.
반짝.
청평과 청송 두 사제의 눈에 심상치 않은 빛이 번지기 시작했다.
자엽도장은 장문사형인 자운진인 앞에 작은 잔과 죽통을 꺼냈다. 죽통의 마개를 따더니 향긋한 내음을 풍기는 차를 적당히 따랐다.
“소제가 아끼는 우롱차외다, 사형. 한잔 드시지요.”
“……!”
하지만 자운은 우롱차를 입에도 대지 않았다. 그저 물끄러미 바라볼 뿐이었다. 정성껏 차를 다려 와 내밀었던 자엽의 목소리가 뾰족해졌다.
“차가 다 식어서 그러시는 겝니까? 아니면 아직도 소제에게 화가 덜 풀려 그러는 것입니까?”
재촉하듯 목소리를 높이는 자엽을 향한 자운의 눈빛이 점점 더 무거워지고 엄해졌다. 모든 것을 꿰뚫어 보듯 날카롭기까지 했다.
“사형! 정말…….”
자엽이 다시 목소리를 높이는 순간 자운이 그 말을 잘랐다. 생각지도 못한 말을 뱉었다.
“밤공기가 차가워지고 있긴 하지만 아직 눈 나리는 계절은 아니지. 사제의 처소에서 차를 다려 바로 왔다고는 도저히 믿기 어려울 만큼의 냉기가 사제 주변에 맺혔네.”
움찔!
걸리는 것이 있는 모양인지 자엽이 흠칫 몸을 떨었다.
“묻겠네. 내게 오기 전까지 대체 몇 곳이나 들렀나?”
“무,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게요 사형?”
자엽이 고함을 지르듯 목소리를 높였다. 하지만 이상하게 갈라져 있었다. 자운의 시선이 찻잔으로 향했다.
“독인가?”
“……!”
자엽은 말을 잃었고 자운은 씁쓸한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크게 끄덕였다.
“그렇군.”
“……!”
자엽은 여전히 답을 못했다. 자운은 계속해서 자신의 짐작을 확신으로 바꾸어갔다.
“지독한 독 종류는 아닐 거야. 그런 것을 썼다가는 바로 정체가 들통 날 테니까……. 지인을 상대로 함부로 내공을 끌어 올려 확인하지는 않을 테니 산공독 종류인가? 흠, 아무래도 그게 가능성이 높겠군.”
그때 자엽의 입에서 놀라운 말이 흘러나왔다.
“어떻게 알았지?”
전혀 다른 사람이 된 것만 같은 표정과 말투.
자엽의 눈에는 도저히 무당칠협이라고 볼 수 없는 종류의 살기가 넘실대고 있었다.
씨이익.
자운진인의 입가에 보기 좋은 미소가 걸렸다.
“천기자!”
“……!”
“전대 태상장로님이신 현진도장께서 남기신 유훈이 무당의 전대 장문인께 전해져 내게까지 이어졌네.”
이런 상황까지 꿰뚫어보고 준비를 해 놓다니!
과연 천기자라고 할 수밖에 없었다.
-무당의 제자이되 검은 색으로 물든 자가 수뇌부에 깃들 테니 언제나 깨어 있어라. 무당이 남존이라 추앙받는 이유는 그만큼의 역할을 했기 때문, 무당을 무당답지 않은 일로 이끄는 자가 바로 검게 물들어 깃든 자다.
“무당을 무당답지 않은 일로 이끄는 자가 바로 검게 물들어 깃든 자! 너무나 직접적인 유훈이어서 헷갈리지도 않았지. 마교가 동남동녀를 납치하는 가운데 혈교가 재림을 했음에도 헛소리라 치부하며 경거망동 하지 말자 하니 알아보기 쉬웠어.”
후우우-웅.
자운진인에게서 부드러우면서도 강력한 기운이 뿜어지기 시작했다.
“혈고라 했던가? 무림맹을 잠식했던 마물이? 며칠 전 괴이한 피리 소리가 들렸다는 보고가 들어왔네. 그 후 완전히 뒤바뀐 사제의 행동을 보고 확신을 했지.”
“그랬군. 젠장, 이미 다 알고 있었던 거야.”
제갈세가를 방문했을 당시 상관엽을 통해 전해진 것만을 모를 뿐이었다.
웅웅. 우-웅.
자엽에게서도 비슷한 종류의 내공이 몰려들었다.
“늦었다, 말코. 너야 천기자 그 빌어먹을 늙은이 덕에 무탈했겠지만, 무당의 수뇌부 중 어느 누구도 산공독의 마수에서 벗어날 수 없다.”
“과연 그럴까?”
자운의 입가에 묘한 미소가 걸렸다.
후우웅. 웅웅웅우-웅.
마주 앉은 두 사람 사이에 폭풍 같은 기류가 형성되었다.
언제든 출수가 가능한 상태!
바로 그때 밖에서부터 처절한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퍼펑. 빠아악.
“크아아악!”
“커허억!”
그것이 신호였다.
자운진인과 자엽도장이 동시에 서로를 향해 내력을 쏟아냈다.
“죽어엇!”
자엽의 주먹이 일곱 번이나 허공을 때렸다. 무당의 일절로 불리는 칠성권의 절초.
콰아아아-웅.
일곱 번이나 중첩이 되어 커다랗게 뭉쳐진 권강 덩어리가 자운진인을 짓이기려 들었다.
“사제의 본의가 아님을 아네.”
그에 맞서는 자운진인은 활짝 편 두 손을 나래 짓 하듯 부드럽게 흔들었다. 지금 펼쳐지는 무공 역시 무당의 절기, 그 이름도 유명한 면장이었다.
후웅. 후웅. 후우우웅.
태풍을 만난 파도 위의 배 같다고나 할까?
무려 일곱 번이나 중첩이 된 권강이었지만 자운진인이 펼친 면장의 방어를 뚫지 못했다. 흔들리다 옆으로 흘렀다. 애꿎은 장문인의 거처만 부쉈다.
쿠와앙. 콰아앙. 쿠콰콰쾅.
한 순간에 자운진인의 거처가 박살이 났다. 힘없이 무너져 내렸다.
퍼엉. 휘스슷.
무너져 내리는 자운진인의 처소를 뚫고 두 개의 인영이 하늘 높이 솟구쳐 올랐다. 장문인인 자운진인과 자엽도장이었다.
‘빌어먹을!’
한눈에 주변을 살핀 자엽의 얼굴이 굳어졌다.
자신이 공격을 개시하는 순간 청영을 제압하기로 되어 있던 청평과 청송 두 제자가 피를 쏟은 채 정신을 잃고 있었던 것이다.
‘저 늙은이들이 왜 저기에 있어!’
청평과 청송 주변에는 자신이 밤새 들렀던, 그래서 산공독이 든 차를 따라 마셨던 수뇌부들이 형형한 안광을 빛내며 서 있었다.
만독불침도 아닐 텐데 멀쩡한 이유가 궁금할 뿐이다.
청영 역시 무탈했다.
청평과 청송의 기습에 다소 놀라기는 했지만, 그러리라 이미 짐작하고 있었고 수뇌부들이 나타나 도와주었기 때문이었다.
“사제의 계획은 다 틀어졌다. 얌전히 제압을 당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혈고 때문임을 안다, 사제.”
“용무린, 용 대협이라면 혈고를 제거할 수 있습니다. 이제 그만 멈추십시오, 사숙.”
장문제자인 청영과 팔궁의 주인들 그리고 이관인 팔선관과 진무관의 주인들까지 몰려나와 노려보고 있었다. 그야말로 끝인 거다.
하지만…….
“크크큭. 크하하하하-!”
자엽도장은 갑자기 미친 듯 웃기 시작했다.
“틀리긴 개뿔! 네놈들의 교만이 화를 불렀다. 내 정체를 알면서도 그냥 두었으렷다? 식수원은? 무당의 모두가 마시는 우물은 어떻게 할 건데? 크크크큭.”
이미 식수원에도 손을 썼다는 뜻!
“오늘이 바로 무당파의 끝이다!”
자엽이 갑자기 소매 끝에서 무엇인가를 꺼냈다. 내공까지 담아 힘껏 던졌다.
삐이이익-.
소리화살과 비슷한 물건이었던지 날카로운 소리가 멀리, 아주 멀리까지 퍼져나갔다.
“응?”
하지만 이내 자엽의 눈은 휘둥그레질 수밖에 없었다.
식수원에까지 손을 썼다고 말했음에도 누구도 격동하거나 겁을 내는 사람이 없었던 것이다.
“서, 설마…….”
“그 설마가 맞다, 사제. 사제가 우물에 산공독을 풀고 난 직후 의약당의 당주인 영선이 해독을 했다.”
“……!”
자엽의 얼굴이 무섭게 일그러졌다.
그런 자엽을 향해 자운진인은 여전한 목소리를 발했다.
“오시게 사제! 혈고 때문임을 잘 알고 있으나, 용 대협이 올 때까지는 구속을 해야 하겠네.”
스릉.
자운진인이 드디어 검을 빼들었다.
무당파의 장문인들에게만 전해져 내려온다는 태극혜검의 기수식을 취했다.
‘빌어먹을…….’
자엽도장의 얼굴이 더할 나위 없이 어두워졌다.
***
무당파의 관문이랄 수 있는 치세현악문.
차츰 고개를 내미는 태양에 밀려난 것인지 주변에 퍼져 있던 어둠이 한곳으로 모여들었다.
반짝. 반짝.
해뜨기 직전의 어둠을 뚫고 번득이는 살기 가득한 눈들.
이들이 바로 마교 교주 직속 무력단체인 수라멸절단!
신마 진무량이 교주의 자리에 오르기 전까지 몸을 담았으며 혈교, 배교와 치렀던 십 년간의 전투에서 언제나 선두에 섰던 무력집단이 바로 이들이었다.
삐이이이-익.
새벽을 관통하듯 날카로운 소리가 들리자 선두의 사내가 하얀 이를 드러내었다.
“크흐흐. 성공했다. 가자.
“충!”
스스스슷.
검은 물결이 무당산을 거슬러 오르기 시작했다.
폭풍처럼 무당산 기슭을 거슬러 오르는 일단의 무리들.
선두에서 신법을 전개하던 사내가 갑자기 손을 위로 치켜들었다. 그대로 멈춰 섰다.
타닷. 스스슷. 탓.
사내를 따라 나머지 오백 명의 수라멸절단원들이 그 자리에 멈췄다.
“무당파가 코앞입니다, 단주님!”
“단주님. 어찌하여……?”
두 명의 부단주가 앞을 다투어 나섰다.
하지만 수라멸절단의 단주 진철산은 갑자기 싱겁게 웃으며 돌아서 버렸다.
“기습은 틀렸다. 무당은 혼란에 빠지지 않았어.”
웃고 있긴 하지만 짜증이 가득한 얼굴이었다.
그 이유는 오직 하나, 무당파가 예상과 달리 혼란에 빠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신교의 수족이 자신의 일을 모두 성공시켰다면 지금쯤 무당파 이곳저곳이 활활 불에 타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보거라. 불에 타고 있는 곳이 한 곳이라도 보이느냐?”
불길에 휩싸여 소란하기는커녕 고요하기만 했다.
십중팔구는 무당파의 수뇌부에게 산공독을 중독 시키는 일마저 실패했을 가능성이 컸다.
산공독을 썼던 신교의 수족이 혼란을 위해 장문인을 비롯한 몇몇을 암살하기로 되어 있었으니 뭔가 요란한 반응이 있어야 했지만 무당산은 깊은 잠에 빠진 듯 적막하기만 했다.
“하아! 그렇군요. 신교의 수족이 일을 실패한 것이 틀림없습니다.”
“수뇌부들에게 산공독 푸는 일 역시 무위로 돌아갔을 가능성이 크군요. 클클클.”
두 부단주의 목소리에 안타까움이 가득했다.
진철산은 결정을 내려야만 했다.
‘어떻게 하지? 그냥 이대로 공격을 해? 아니면 천마께서 머지않아 출관을 하면 어차피 쓸어버리게 되어 있으니 그때 다시 와?’
천하의 신교 교주 직속 무력 단체 수라멸절단이다.
칠십 년 전 신마대전 이후 첫 공식 출동인데 무당파가 혼란에 빠지지 않았다는 이유로 그냥 발길을 돌리는 것도 우스운 일인 거다.
‘하지만 이대로 공격을 하면 전멸이란 말이지.’
소림과 더불어 남존으로 불리는 무당파다.
아무리 수라멸절단이라 하더라도 단독으로 무당파를 치는 것은 자살행위다. 인정하기는 싫지만 무당파는 그만큼 큰 곳이었다.
‘전멸이 두려운 것이 아니야. 성질대로 그냥 짓쳐드는 것은 좋은데, 그렇게 했다가는 두 번째 임무조차 제대로 이행할 수 없게 된다는 거야.’
천하의 수라멸절단이 칠십 년 만의 공식 출동을 했으면서도 두 가지 임무 중 하나도 제대로 이루지 못한 채 그대로 전멸당하는 일만큼은 없어야 하지 않을까?
‘젠장. 젠자-앙!’
진철산은 결국 힘든 명령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자존심은 몹시 상하지만 전반의 성공이라도 거두는 편이 더 낫다고 생각한 것이다. 가슴에 새겨진 아수라의 문장을 부끄럽게 만들 수는 없다.
“돌아서라! 무당은 다음 기회를 노릴 수밖에 없다.”
어떤 생각에서 내려진 결단인지 알면서도 두 명의 부단주는 허탈하기만 했다.
‘혈고가 이렇게까지 무용지물인 마물이었던가?’
‘그 말코라면 능히 산공독을 모두 풀고 수뇌부의 상당수를 암습해 쓰러뜨리며 무당파에 불을 지를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어떻게 된 것이 혈고로 재미를 본 적이 없는 것 같다.
진행상황이야 음양자의 입을 통해 익히 들어 알고 있었지만 정작 성과를 거둔 것은 단 한 군데도 없었고 애꿎은 혈고만 소진한 꼴이다.
‘그래서 그 빌어먹을 놈의 용가 애송이에게 대가를 치러주려 하는 거란 말이지.’
신교가 수십 년 동안 애써 길러 준비하고 온갖 노력을 기울여 퍼뜨린 혈고가 한순간에 무용지물이 된 이유가 바로 용무린 그 애송이였다.
“다들 어깨를 펴라. 우리에게는 아직 두 번째 임무가 남아 있질 않느냐?”
애초에 음양자의 명령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혈고로 만든 수족이 일을 제대로 처리했다고 판단이 된다면 혼란을 틈타 무당을 쳐 무너뜨리는 것이었고, 두 번째는 마교의 일을 사사건건 방해하고 훼방을 놓은 용무린의 본가 비룡문을 짓밟아 주는 것이었다.
“하긴, 그곳에서 재미를 보면 되긴 합니다.”
“어서 갔으면 좋겠습니다. 잔뜩 끌어 올렸던 이 긴장감이 다 가셔 버리기 전에 말입니다.”
진철산의 말에 두 명의 부단주의 얼굴이 조금은 밝아졌다. 이곳에서야 내공 한번 끌어올려 보지 못했지만 그곳에는 확실히 전투가 기다리고 있었으니까.
“이곳은 정파 놈들의 세력권, 조심해야 한다. 일단 흩어진 후 그곳에 몸을 숨긴다. 정파 놈들의 움직임이 뜸해지면 두 번째 임무지로 간다.”
그때였다.
“올 때는 쉬웠겠지만 갈 때는 힘들 것이다.”
휘슷.
청수한 인상의 노도장이 묵직한 목소리를 발하며 수라멸절단의 앞을 막아섰다. 바로 현 무당의 장문인인 자운진인이었다.
스슷. 휘스슷.
“허허허. 무당산 앞마당이 마교의 놀이터가 되어줄 수는 없는 일 아니겠는가?”
“천하인 모두가 자유로이 오갈 수 있으나 마교인들은 그와는 반댈세. 허허허…….”
속속 내려서는 무당의 고수들.
무당파의 주력이라고 할 수 있는 팔궁의 주인들과 이관의 주인들, 그리고 어지간해서는 코빼기조차 보이지 않는다는 칠십이 암묘의 주인들을 비롯해서 그 유명한 태극검수들과 각 궁 소속의 검수들까지 파도처럼 밀려오고 있었다.
후웅. 우우웅.
그들이 뿜어내는 정명한 기운이 무당산 일대를 덮어버릴 지경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철산의 입가에는 서늘한 미소가 떠올랐다. 힘든 결정을 내리며 상처받은 자존심이 다시금 고개를 쳐든 것이다.
“우리가 누구인지 알면서도 그따위 소릴 한단 말이야? 우릴 쓰러뜨리려면 무당파도 모든 것을 걸어야만 할 텐데? 제자들의 죽음 따위 아무렇지도 않은 모양이지?”
“그럴 리야 있나?”
자운진인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담담하지만 묵직한 목소리를 발했다.
“쓰러져 갈 제자들의 목숨이 아까운 것이야 당연하네만, 여기서 마졸들을 막지 않으면 아까운 인명이 얼마나 더 스러질지 모르기에 나설 수밖에 없다네. 그것이 마를 제어하는 도문의 숙명 아니겠는가?”
인명 피해가 얼마가 발생하든 이곳에서 끝을 보자는 뜻!
쿵쿵쿵.
진철산의 심장이 터질 듯 빠르게 뛰었다. 다시 한 번 심한 갈등이 일었다.
‘그냥 이 자리에서 끝을 봐?’
그 순간, 포위망이 거의 완성되어 가는 것이 느껴졌다. 진철산의 마음이 다급해졌다.
‘젠장. 둘러싸이면 이대로 끝이다.’
무슨 일이 있어도 포위당하는 것만큼은 막아야 한다.
알면서도 이리 몰려나왔다는 것은 그만큼의 자신이 무당파에 있다는 뜻, 이 일대를 덮은 기운이 절대로 허세가 아니라는 것을 말한다.
진철산의 입이 크게 열렸다. 뒤를 향해 고함을 버럭 질렀다.
“전력을 다해 포위망을 뚫어라.”
그 명령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두 명의 부단주가 자운진인을 향해 짓쳐들었다.
“자전마검 맛을 보여주마-앗!”
“이것이 바로 십절마검이다아-앗!”
버언쩍. 번쩍. 후웅. 후우우웅.
필생의 공력을 불러일으킨 듯 부 단주들의 검 끝에서는 거창한 강기가 솟구쳐 올랐다. 이름만큼이나 위력적인 초식이 쏟아졌다.
하지만 자운진인은 눈 한 번 깜박이지 않았다.
오히려 넉넉하게 웃었다.
“허허허. 강하기만 해서는 결코 무당의 검을 넘어설 수 없느니……. 마졸아, 이것이 바로 태극혜검이니라!”
자운진인의 검이 태극의 도형을 그리는 순간 자전마검과 십절마검의 검강이 어이없을 만큼 쉽게 방향을 바꾸었다. 엉뚱한 곳을 후려쳤다.
스각. 서걱.
그 사이 두 부단주의 가슴과 복부 어림에서 굵은 핏줄기가 치솟았다. 공격을 흘려냄과 동시에 순간적으로 갈라버린 것이다.
다행이라면 그 상처가 그리 깊지는 않다는 것!
“이야아-하!”
“차아-앗!”
두 부단주가 자운진인을 계속해서 공략했다.
“허허허. 손속이 너무 독하구나.”
자운진인은 두 명의 초절정 고수를 상대하면서도 넉넉한 미소를 잃지 않았다.
‘과연 무당!’
어째서 음양자가 그토록 조심을 시켰는지 다시 한 번 느끼는 진철산이었다.
내심 무당의 검법을 칭찬하는 말이 절로 튀어 나왔다.
내부에서부터 무너지지 않았거든 그 즉시 뒤로 물러나 두 번째 임무에 집중하라는 명령의 의미가 확실하게 피부로 다가왔다.
“흐아아압! 나를 죽여야 할 것이다, 말코!”
“무당의 검 따위 기필코 넘어줄 테다. 차아앗!”
두 명의 부단주가 자운진인을 꽁꽁 묶고 있는 사이 진철산은 포위망을 뚫기 시작했다.
“꺼져랏!”
버언쩍. 후우웅.
전력을 다한 흑살마공이 검은 색의 검강을 피워 올렸고 완성 직전의 포위망을 그대로 후려쳤다.
쾅! 쾅! 쾅! 콰-앙!
“크억!”
“커헉!”
완성 직전의 포위망이 와르르 무너졌다.
그 사이로 수라멸절단이 밀려 나갔다. 포위망을 뚫고 어디론가 사라져갔다.
“무엇들 하느냐? 어서 쫓아라!”
“놈들을 추격하라!”
“무당산의 흙을 밟은 마인들은 절대로 살아 돌아가지 못한다는 것을 알게 해줘라.”
팔궁 이관의 주인들이 목소리를 높였다.
무당파의 숨겨진 힘이랄 수 있는 칠십이 암묘의 주인들이 실로 무서운 기운들을 쏟아냈다.
하지만 두 명의 부단주와 백여 명에 이르는 마인들이 목숨을 내던지다시피 추격을 차단하고 버티니 쉽사리 넘을 수가 없었다.
카캉. 차차창. 스각. 서걱.
“커헉!”
“크아악!”
태극검수를 제외한 일반 제자들 정도로는 수라멸절단의 검을 제대로 받을 수가 없었다. 불과 세 초식을 넘기지 못하고 피를 뿌리며 나뒹굴었다.
“이노-옴!”
“마졸들 따위가 감힛!”
물론 수라멸절단의 피해 역시 무척이나 컸다. 마교의 침입에 대비해 미리 대기시켜 둔 태극검수들의 합공에 잘도 쓰러졌다.
하지만 자신만만하게 나섰듯 수라멸절단을 일망타진 할 수는 없었다. 수라멸절단은 교주 직속의 무력 단체, 마교에서도 가장 상위에 속하는 무력단체이기 때문이었다.
“크악!”
“커허억!”
추격을 하다 불시에 반격을 당해 쓰러지는 제자들을 더는 볼 수 없었던 자운진인은 결국 중대한 결정을 내려야만 했다.
‘전멸시키려다가는 애꿎은 제자들의 피해가 돌이킬 수 없을 만큼 커지겠다. 패퇴시키는 것으로 가닥을 잡자.’
즉시 공격 중지 명령을 내렸다.
“공격을 멈추어라! 길을 열어주어라!”
자운의 명이 있고 나서야 무당의 검수들은 뒤로 물러났다. 주변을 돌아보기 시작했다. 그 사이로 수라멸절단이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허어, 미리 준비까지 해 두었거늘 실로 피해가 크구나.”
주변을 돌아본 자운진인이 혀를 내둘렀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불과 한 식경 남짓의 격돌이었지만 죽은 제자들의 수가 상상 밖이었고 중상자들은 더더욱 그 수가 많았던 것이다.
“그래도 이만하길 다행입니다, 장문인.”
“맞습니다. 장문인께서 미리 준비를 하고 있었으니 이 정도로 끝이 난 것이지, 산공독에 모두 당한 후 놈들을 맞이했다면?!”
파르르.
상상만으로도 두려웠던 모양인지 모두가 가늘게 몸을 떨었다.
“마교에서 저렇듯 대놓고 무당산을 침습했습니다. 혈교의 재림을 밝힌 용무린 도우의 전서 내용 역시 모두 사실일 것입니다.”
“어서 이 일을 무림맹에 알려야 합니다.”
“맞습니다. 함께 상의한 후 신중히 결정을 내려야 할 것입니다.”
“재림을 선포한 혈교에 맞서 제자들을 파견할 것인지 아니면 마교 놈들의 뒤를 쫓을 것인지 결정할 때입니다.”
팔궁 이관의 주인들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 있던 자운 진인의 입이 열렸다.
“태극검수들은 원거리에서 놈들의 움직임을 추격하라. 개방과의 협조로 감시만 하는 것이다. 알겠느냐?”
“명!”
“명!”
똑 소리 나는 대답과 함께 태극검수들이 일제히 신법을 전개했다. 끝까지 싸울 것이라는 예상과는 달리 후퇴를 선택한 수라멸절단의 뒤를 쫓았다.
“일단은 들어가십시다. 제자들 치료도 하고 전서도 보낸 후 함께 머리를 맞대고 상의를 하십시다.”
“좋습니다.”
“알겠습니다.”
수라멸절단을 몰아내기는 했지만 본산으로 돌아가는 무당파 고수들의 안색은 밝지 못했다.
생각보다 피해가 너무 컸다.
그리고 마교와 혈교 그리고 정파와의 본격적인 전쟁은 아직 시작조차 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
이틀이라는 시간이 훌쩍 지나갔다.
화산 어귀에서 내상과 상처를 돌보았던 용무린과 일행들은 그 사이 화음현을 지나쳐 상주현에 이르렀다.
“장로님!”
“태상장로님!”
화음현에서 가동된 연락망 덕인지 개방의 제자들이 쏜살같이 달려와 일행을 반겼다.
“그래, 내가 당부한 것들은 알아냈느냐?”
“예, 장로님.”
“어떻다고 하냐? 종남은?”
보고를 하던 개방의 제자들의 얼굴이 대번에 어두워졌다. 비통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종남은 참화를 맞았다고 합니다.”
“혈교의 침습 직후 구원을 청하는 전서를 여러 군데로 보냈는데 결국 무너진 것으로 파악되고 있습니다.”
결국 용무린의 예상대로였다.
“저런 나쁜 놈들을 그냥!”
“허어, 결국 그렇게 되었는가?”
화운과 효정대사가 혀를 찼다. 안타까워했다.
개방도의 목소리가 계속해서 이어졌다.
“혈교의 무도한 놈들은 종남산을 짓밟은 후 천하를 향해 당당히 혈교의 재림을 선포했다고 합니다.”
“장소는 상남현의 마영방입니다. 그곳을 섬서성의 혈교 중심 거점으로 삼을 모양입니다.”
피식.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용무린이 싱겁게 웃었다.
“좋은 위치지. 섬서성을 도모하기에도, 하남이나 산서, 호북으로 나가기에도 나쁘지 않은 곳이야.”
마영방의 지리적인 위치는 그만큼 중요했다.
그래서 흑야방의 노백인과 독사가 마영방을 가장 먼저 쳤던 것이다.
‘그래봤자 독 안에 든 쥐다, 이 자식들아!’
이젠 반대로 우리가 갚아 줄 차례인 거다.
반짝.
용무린의 눈가에 서슬파란 빛이 번득였다.
“놈들의 움직임은?”
용무린의 질문에 예상 밖의 대답이 나왔다.
“아직은 잠잠합니다.”
“마영방에 자리 잡고 있는 놈들이야 그렇다고 치고, 당당히 재림을 선포했으니 공격해 들어올지도 모르는 정파인들의 공격에 대비하기 위해서라도 뭔가 추가적으로 인원을 충당해야만 할 텐데?”
“주변에 섬서성의 거지들을 몽당 깔아 두었습니다.”
“혈교 놈들이 움직이기만 하면 오래지 않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제자들의 말을 듣고 있던 화운장로가 고개를 갸웃했다. 용무린을 향해 질문을 던졌다.
“무린아!”
“예?”
“그런데 어째서 개방의 모든 이목을 사천성과 맞닿아 있는 남부 경계를 향해 돌리라고 했느냐?”
“……?!”
그렇지 않아도 궁금했던 모양인지 모두의 시선이 용무린에게로 쏠렸다. 용무린은 멋쩍은 듯 한차례 픽 웃으며 답을 했다.
“혈교 놈들의 본거지 좀 찾으려고 그랬어요.”
“놈들의 본거지?”
“혈교의 본거지가 사천성과 맞닿아 있는 남부 경계에 있느냐?”
“아니요? 그건 아직 몰라요.”
아무렇지도 않게 고개를 흔드는 용무린을 보며 화운과 효정대사는 고개를 갸웃했다. 오직 한 사람 백리천월만이 대충 알아차린 듯 미소 지었다.
“방심을 노린 것이로구나? 성동격서의 다른 응용?!”
“바로 그거지!”
백리천월의 말에 용무린이 활짝 웃었다.
“아하! 사천성의 경계에 놈들의 본거지가 있으면 좋고, 없어도 좋은 것이로구나?”
화운 장로가 그제야 알겠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무슨 뜻인지 알아차린 것은 효정대사 역시 마찬가지였으나 한 가지 의문점이 남은 듯 반문을 했다.
“남쪽의 사천성과의 경계야 개방이 맡는다고 치고, 동쪽은 우리를 비롯한 정파 연합이 있으니 상관없다만 서쪽이 비게 되질 않느냐?”
북쪽은 북원과 맞닿아 있는 곳이니 군에서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는 곳이다. 그래서 효정대사는 서쪽만 입에 담은 것이다.
“서쪽이요? 걱정 마세요.”
용무린이 큰소리를 쳤다.
서쪽이야말로 그 누구도 무시할 수 없는 세력이 샅샅이 뒤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서쪽은 벽력도가에서 이미 샅샅이 훑고 다니고 있어요. 조금이라도 이상한 것이 눈에 띄면 바로 걸릴 거예요.”
“오!”
“아!”
화운과 효정대사를 비롯한 사람들이 탄성을 발했다.
“요, 앙실방실한 녀석! 대체 벽력도가에는 언제 연락을 해 두었느냐?”
“혈교에 대해 듣자마자 했죠.”
“하여튼, 네 잔머린 못 당하겠구나.”
“허허허. 어쩐지 이곳 섬서성의 또 다른 터줏대감인 벽력도가에서 화산의 싸움에 얼굴을 내밀지 않는다 하였더니 이미 그런 일을 수행하고 있었던 것이구나.”
효정대사마저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용무린이 하얀 이를 드러내었다. 주먹을 움켜쥐어 보였다.
“우리만 빈 집 털리라는 법이 어디 있겠어요? 우리도 빈 집 한번 털어보자고요.”
재림을 선포한 혈교는 전체 고수의 수가 얼마이든 본거지에서 고수들을 한참 더 내보내야만 할 것이다.
“종남파를 무너뜨리고 마영방에 자리 잡은 혈교 마인들 숫자가 오, 육백여 명에 이른다지만 섬서성을 통째 삼키기에는 터무니없이 부족한 숫자지요. 틀림없이 오백 명, 아니 그 이상 더 빠져 나와야만 할 거예요.”
주요 고수 일천 명 이상이 빠져나간 혈교의 본진이라!
한 번쯤 노려 볼 법한 일인 거다.
‘빠져 나오지 않는다면, 독 안의 쥐 신세인 마영방의 혈교 놈들을 잡으면 되는 거야.’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은 일이다.
“아마 벽력도가에서 담당한 서쪽 지역에서 혈교의 본산이 드러날 공산이 커요.”
“그것은 어째서 그러냐?”
“혈교 놈들이 화기를 썼잖아요. 폭발력이 강력한 그런 화약은 군문에서밖에는 만들어내지 못해요. 그렇다면 그 화약을 손에 쥐기 위해서는 감숙의 군 수뇌부와 모종의 거래를 해야만 할 것이고…….”
“그렇게 따지면 당연히 친근하며 교류가 잦았을 서쪽밖에 없겠구나.”
화운이 고개를 크게 끄덕이며 용무린의 말을 받았다.
“바로 그거죠. 누구의 눈에 띄지 않은 채 일을 도모하기 위해서는 아마 섬서성과 감숙성의 경계선상에 놈들의 본거지가 위치해 있을 가능성이 가장 높아요.”
용무린이 주먹을 불끈 움켜쥐어 보였다.
“벽력도가야말로 군문에도 연줄이 많은 섬서성의 실세 중의 실세, 놈들이 제 아무리 돈을 먹었다고 해도 벽력도가의 눈을 피할 순 없어요.”
벽력도가에 그동안 해왔던 것 이상의 경계심을 보인 놈이 있다면 그놈이 바로 범인일 터, 혈교와 내통한 놈들까지 한꺼번에 잡아낼 것이다.
‘그런 후 양가장에 황룡패주의 이름으로 된 전서를 날려야지.’
군부에서 엄격히 통제하는 흑색화약을 몰래 빼돌린 놈이니 격렬히 반항할 터, 벽력도가의 힘만으로는 무리다. 양가장을 비롯한 군부의 힘이 필요한 때였다.
“하여간, 우리도 빈집털이라는 걸 한 번 해보자고요.”
“껄껄껄. 그래, 그러자꾸나.”
“허허허. 그거 정말 재미있겠다.”
화운장로와 효정대사가 호탕하게 웃을 때였다.
놀라운 소식이 연거푸 도착했다.
하나는 벽소추의 이름으로 된 것으로써 모두가 기다리던 혈교의 본거지에 관한 소식이었고 다른 하나는 무당파의 장문인 이름으로 발신된 전서였는데 놀랍게도 마교의 정예인 수라멸절대의 대 무당 침공에 관한 것이었다.
-감숙성과 맞닿아 있는 섬서성 서쪽 끝자락의 천양현.
그 중에서도 서쪽 외곽의 홍화장에 타는 듯 붉은 적의 차림의 무인들이 자주 모습을 드러낸다고 함.
근처 주민들의 말을 들어보면 언제나 괴이한 기운이 가득한 곳이라 수십 년 전부터 사람의 왕래가 거의 없다시피 했고 시시때때로 피처럼 붉은 운무가 끼는 곳이라 대표적인 흉가로 알려졌다고 함.
‘혈교다! 놈들의 본거지야!’
타는 듯 붉은 적의 차림의 무인들.
괴이한 기운과 수십 년 전부터 사람의 왕래가 없고 때때로 피처럼 붉은 운무가 끼는 곳! 그보다 더 혈교와 비슷한 곳은 드물 것이다.
“이, 이것!”
“여기 같은데?”
화운과 효정대사를 비롯해서 벽소추의 전서를 읽은 사람은 누구라도 그렇게 생각했다. 홍화장이 최소한 혈교와 깊은 관계가 있는 곳이라고 생각되어졌다.
“혈교입니다.”
“놈들의 본거지가 틀림없습니다.”
“일단 무당파에서 보내온 전서마저 읽고 판단을 내리도록 하죠.”
언제부터인가 자연스럽게 최종 결정을 내리는 위치가 된 용무린은 결론을 내리기에 앞서 무당파에서 보내온 전서를 읽어 내려갔다.
-며칠 전 괴이한 피리소리와 함께 완벽히 다른 사람이 된 자엽도장과 그 제자들이 수뇌부에 산공독을 썼으며 식수원에마저 산공독을 풀었지만 다행히 중독 전에 모두 해독.
그 틈을 노려 마교의 무력단체로 보이는 적 침입.
가슴의 아수라 문장으로 보아 수라멸절단으로 보임.
숫자는 오, 육백여 명.
무당산 어귀에서 놈들과 결전을 벌였으나 꼬리를 자르고 도주함. 적 백오십여 명 주살. 닷새 동안 추격 했으나 나머지 삼백오십여 명은 형문산 어귀에서 종적을 놓쳤음.
소수로 나뉘어 추격을 차단하는 방법으로 십만대산을 향해 도주하는 것으로 파악됨.
‘소수로 나뉘어 십만대산으로 도주를 한다고?’
아니다. 마교의 정예가 그럴 리 없다.
‘한 번 빼든 검이라면 썩은 무라도 갈라야만 직성이 풀리는 것이 바로 신교의 무력단체란 말이야. 한데 무당파와의 결전에서 밀렸다고 곧바로 불회곡으로 도주를 한다? 어림도 없지, 암.’
놈들이 종적을 감췄다면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신마 진무량이 주입해 놓은 기억만 더듬어도 그런 판단이 내려지지만 놈들이 하필이면 형문산 어귀에서 종적을 감추었다는 말을 들으니 더더욱 의심이 갔다.
‘그곳인가? 그곳에 잠시 몸을 숨길 생각인가?’
종적을 감추었다지만 자신은 놈들의 정확한 위치를 알 것 같았다.
‘상관세가의 일장로 부일기가 실토한 정보 중에 분명히 형문산에 대한 비밀이 있었지.’
의성 신우량.
그를 잡아 가둔 곳, 의성의 가족들을 함께 잡아와 고문하고 정신을 파괴해 결국 활생단의 비방을 알아낸 곳이 바로 형문산 중턱에 존재했다.
‘놈들은 분명히 그곳에 숨어들었을 거야.’
그런 후 추격이 잠잠해지면 슬그머니 기어 나와 자신들의 목적을 달성한 후 보란 듯 당당하게 남하할 것이다.
‘형문산을 나서면 놈들이 어딜 노릴까?’
겨우 삼백오십여 명 남짓으로 무림맹 총단을 노리겠는가? 아니면 다시 기습을 한답시고 기껏 도망쳐 온 길을 거슬러 올라가 무당파를 공격하겠는가?
모두 아니다. 답은 비교적 간단하다.
‘제갈세가, 아니면 내 본가인 비룡문이겠지.’
두 곳 중 무게가 확실히 더 실리는 곳은 비룡문이었다.
입장이 바뀌어 내가 적이었다고 해도 비룡문을 노릴 것 같았다.
피식.
‘그동안 내가 놈들의 일을 좀 많이 망쳤어야지…….’
그간 당한 일들에 대한 앙갚음과 마교의 사기 진작 그리고 미래에 대한 경고 차원에서라도 비룡문을 철저하게 짓밟는 것이 마교 입장에서 필요했을 게다.
‘일부러 그런 것은 아닌데, 어쩌다 보니 놈들하고 자꾸만 엮이게 되네?’
입가에 쓴 웃음이 절로 맺히는 용무린이었다.
화운과 효정대사를 시작으로 무당파에서 온 전서를 읽은 사람들은 하나 같이 우려를 쏟아냈다.
“허어, 마교가 무당산을 침범했다니!”
“참으로 무도한 놈들이로고! 다시 그 피비린내 나는 전쟁을 시작하겠다는 말인가? 쯧쯧쯧…….”
“도고일척 마고일장이라더니! 혈교의 재림에 이어 마교마저 대놓고 명문정파를 공격하다니요!”
“정말 큰일입니다. 무당 칠협의 하나인 자엽도장과 그 제자들마저 혈고에 당하다니! 이를 대체 어쩐단 말입니까?”
“난세입니다. 혈교와 마교가 동시대에 준동을 했습니다. 어서 정파의 힘을 하나로 모아야만 합니다.”
모든 이들의 얼굴이 심각해졌다.
같은 목소리로 무림의 안위를 걱정했다.
그때까지 생각을 정리한 용무린의 입이 천천히 열렸다.
“저는 지금 즉시 형문산을 향해 가야할 것 같습니다.”
“응? 무린아, 그곳 어귀에서 놈들의 종적을 놓쳤다고 하질 않았느냐?”
“놈들의 뒤를 쫓기 위해서는 형문산 넘어 남쪽의 호남성으로 바로 가는 것이 더 현명하지 않을까?”
부일기의 입을 통해 미리 알고 있던 정보가 아니었다면 용무린 역시 화운장로와 효정대사처럼 생각했을 지도 모른다.
“아니요. 놈들은 형문산에 틀어박혀 있습니다.”
하지만 다행히 부일기의 입을 통해 놈들의 비밀 한 가지를 알고 있다.
‘내가 어디까지 알고 있는지, 그걸 모르고 있다는 것이 놈들의 비극인 셈이지.’
용무린의 확신에 찬 목소리에 화운과 효정대사를 비롯한 모두의 눈에는 궁금증이 차올랐다.
“형문산에?”
“그것이 확실한 것이냐?”
“예, 대사님. 장로님.”
용무린은 황궁에서의 일을 간략하게 모두에게 알렸다.
고문은 살짝 빼고 상관세가의 일장로 부일기의 입을 통해 형문산의 비밀을 알게 된 일을 밝혔다. 이야기를 듣게 된 이들의 고개가 절로 끄덕여졌다.
“허어. 형문산에 의성 신우량 그 사람이 갇혀 있다니!”
“안타까운 일이구나. 필시 곡절이 있겠지만, 수많은 사람의 목숨을 살린 의성과 같은 이가 활생단의 비밀을 넘겨줌으로 인해 혈고가 그리 퍼진 것이 아니더냐?”
“뭐, 그것도 그것이지만 지금 중요한 것은 오직 한 가지, 마교의 무력단체가 그곳에 숨죽이고 있다가 기어 나와 제 본가인 비룡문을 노릴 것이라는 겁니다.”
“하긴, 나라도 그러겠다.”
“허허허. 놈들 입장에서는 네가 밉기도 하겠지…….”
충분히 이해가 간다는 듯 화운과 효정대사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러면 혈교의 본거지는 어떻게 하냐?”
“어떻게 하긴? 놈들은 그냥 우리끼리 알아서 하면 되는 게지.”
우려가 다분한 화운의 말에 효정대사가 면박을 주었다.
하지만 용무린의 생각은 달랐다.
“그곳은 아직 시간이 있어요. 제대로 된 빈집털이를 위해서는 더 많은 놈들이 기어 나와야만 해요. 물론 놈들의 추가 병력이 나오는 기미가 없다면 그대로 마영방의 놈들을 공격해도 무방하고요.”
“아!”
“그도 그렇겠구나…….”
“아무리 그래도 혈교의 본진을 때려 부숴놓는 것이 더 확실하겠지.”
“맞아. 그래야 잔챙이들 처리로 모든 것이 끝나는 게야.”
중론은 역시 혈교 본진의 빈집털이였다.
“그러니 놈들이 추가병력을 내보내기 싫어도 내보낼 수밖에 없도록 분위기를 착실히 만들고 계세요.”
용무린은 차근차근 자신의 생각을 모두에게 밝혔다.
용무린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모두 알아들었다는 듯 백리천월이 눈을 반짝였다.
“알았어. 그렇게 하면 확실히 놈들이 병력을 마영방에 집중시킬 수밖에 없을 것 같아.”
“그러면 나는 잠깐 다녀와도 되지?”
“그래. 다녀와.”
백리천월을 향해 환하게 웃어 보인 용무린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늠름한 태도로 포권을 취해 보인 후 형문산을 향해 돌아섰다.
바로 그 순간,
“용 대협!”
“아! 일각대사님!”
그동안 한마디도 하지 않고 있던 일각대사가 넉넉한 미소와 함께 다가왔다. 품속에서 무엇인가를 꺼내 용무린을 향해 내밀었다.
“뭔가요?”
붉은 색의 주머니가 뭔지 알 리 없다. 용무린의 고개가 갸웃하고 기울었다. 하지만 푸른 주머니와 더불어 이미 한 번 본 기억이 있던 화운장로가 반가운 목소리로 나섰다.
“천기자 선배가 주신 주머니! 푸른 주머니는 심장이 터지려 할 때, 붉은 주머니는 무림에 큰 일이 도래했다고 느껴질 때 열어 보라 하셨지.”
“……!”
용무린의 눈이 동그래졌다.
일각대사가 부드럽게 웃으며 붉은 색의 주머니를 용무린에게 내밀었다.
“안의 내용물은 봉인이 되어 있었습니다. 겉면에 ‘순천자에게…….’ 라고 쓰여 있었으니 용 대협 외에 누구도 볼 자격이 없지요.”
“마교 놈들이 보란 듯 전면에 나서기 시작했고 혈교마저 재림을 했지. 암, 천기자 선배의 마지막 안배를 펼쳐 볼 때가 됐어!”
화운장로가 고개를 크게 끄덕이며 중얼거렸다.
“내가 왜 지금까지 그걸 잊고 있었지?”
화운은 궁금해 죽겠다는 듯 붉은 색의 주머니를 바라봤다.
용무린의 두 눈에도 호기심의 빛이 번졌다.
‘천기자의 마지막 안배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