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옛 것과 거듭난 것의 대결
용무린의 뇌리에 홀연히 노도장의 웃는 얼굴 하나가 스쳐 지났다.
소림의 전대 장문인인 혜월과 더불어 전생의 나였던 절대검신 독고황과 뜻이 맞았던 사람, 바로 천기자의 얼굴이었다.
‘친우. 아니 도반(道伴)이라 해야 할까?’
전생의 나 절대검신처럼 등선을 목전에 두고 있었을 만큼 도력이 높은 사람이었다.
하지만 천기를 통해 역천자의 도래를 알게 된 후 모든 것을 버리고 역천자를 막기 위한 삶을 살았던 기인!
‘그 얼굴이 확실히 기억나!’
이번 생에서는 한 번도 만나보지 못한 사이였지만 놀랍게도 천기자의 얼굴이 또렷이 떠올랐다.
구름인 듯 물든 은색 머리를 감추듯 눌러 쓴 도관에 언제나 만족한 듯 푸근한 미소 짓던 밝은 얼굴…….
두근두근.
그의 얼굴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고동치는 가슴을 애써 누르며 용무린은 붉은 색의 주머니를 열었다. 안에 고이 접힌 서신을 꺼내 들었다.
툭.
붉은 색으로 된 밀납 봉인을 끊어낸 후 안의 내용을 천천히 읽어 나갔다.
“……!”
용무린의 눈이 튀어나오기라도 할 듯 부릅떠졌다.
미소를 지었다가 심각해지기를 반복했다.
마지막에 가서는 혀를 내두르기라도 하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어, 어째 그러느냐?”
궁금한 것을 참을 수 없다는 듯 화운이 애가 단 목소리로 물어왔다. 하지만 용무린은 입가에 옅은 미소만 지을 뿐 화운의 궁금증을 풀어주지 않았다.
보다 못한 일각대사가 다독였다.
“천기자 선배의 마지막 안배일 것입니다, 선배.”
“누가 그걸 몰라 이러느냐? 그냥 궁금하니까 그러는 거야, 궁금하니까!”
화운을 향해 용무린은 짤막한 대답만 해주었다.
“지금의 제게 너무나도 필요한 것입니다.”
생각지도 못했던 안배였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어째서 이 생각을 진즉 해보지 못했을까? 싶을 정도로 지금의 자신에게 절실하게 필요한 안배가 주머니 안에 들어 있었다.
용무린의 시선이 일각에게로 향했다. 정중한 태도로 포권을 취해 보였다. 그동안 천기자의 서신을 잘 지니고 있다가 잊지 않고 전해준 것에 대한 감사의 표시였다.
“감사합니다, 대사님.”
“그 무슨 말씀을! 천기자 선배의 안배를 제대로 이행할 수 있게 되어 되레 제가 영광입니다, 용 대협!”
“그럼 저는 이만 가보도록 하겠습니다.”
“흥! 가든지 말든지!”
화운장로가 짐짓 토라진 체했다.
“부탁해요, 장로님. 효정대사님 아시죠?”
“이곳은 염려 말거라.”
“천월아. 믿고 간다.”
“그래. 여긴 걱정 마. 놈들이 본거지에서 병력을 빼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난리를 쳐둘게.”
“좋았어! 그럼, 다음에 봐!”
스파앙.
용무린의 신형이 시위를 떠난 화살처럼 동쪽을 향해 쏘아졌다.
***
날이 어두워질 무렵.
‘어떻게 하지?’
전력을 다해 신법을 펼치던 용무린은 멈춰서야만 했다. 잠시 고민에 빠졌다.
머지않아 밀어닥칠 비룡문의 위기를 생각하면 촌음의 시간이라도 아껴 형문산으로 달려가야 하는 용무린으로서는 어려운 결정이었다.
‘놈들이 형문산을 벗어나기 전에 결판을 내야만 해.’
하지만 바로 그 결판을 내야만 하는 상황 때문에 고민이 되는 것이다.
‘화산파의 옥현도장을 상대했을 때는 힘으로 누르는 작전이 통했지만, 과연 형문산에 깃든 놈들을 상대로도 그게 먹힐까?’
상대는 무당파의 장문인이 몸소 출전해 무당파의 전력을 기울였음에도 불구하고 그 힘을 당당히 뚫고 나간 마교의 무력단체였다.
‘단순히 무당파만을 상대하기 위해 신교를 벗어난 놈들이라면 절대로 꼬리를 자르고 도주하지는 않았을 거야. 마지막 하나가 죽는 한이 있더라도 끝장을 보았겠지.’
그런 상황이었다면 무당파의 장문인인 자운진인의 생사 역시 장담할 수 없었을 것이다.
마교 무력단체의 진실한 힘을 자신만큼 잘 알고 있는 사람도 세상에 드물다. 장담컨대 그 짐작은 사실이 될 가능성이 높다.
‘그렇게 따지면 형편없이 줄어든 내 무위를 정상으로 되돌려 놓아야만 한단 말이지.’
불사대천검은 뒤로 미뤄놓더라도 최소한 어검술, 더 정확히는 목어검술과 신검합일의 수를 자유자재로 사용하던 수준으로 돌려놓아야 한다.
‘그런데 문제는 절대검신 독고황과 신마 진무량, 그리고 지금의 나인 삼절일학 용무린의 의식 사이에서 발생한 괴리감이란 말이지.’
그 괴리감을 극복하기 전에는 한 발자국도 앞으로 나아갈 수 없고 어검술이나 신검합일의 수 역시 펼칠 수 없다.
‘불사대천검은 더더욱 말할 필요조차 없지.’
하지만 그 모든 어려움을 단숨에 극복할 수 있는 길이 존재한다. 바로 천기자가 남긴 마지막 붉은 주머니에 들어 있었다.
‘양의신공이 들어 있을 줄이야!’
정말 생각지도 못했다.
무당파의 장문에게만 비밀리에 전해진다는 태극혜검, 태극신공과 더불어 존재 여부조차 비밀에 붙여진 무공이 바로 양의신공이었다.
한데 그 구결과 주해가 들어 있다니!
대체 천기자가 내다 본 미래는 어디까지란 말인가?
“하여간 정말 대단하단 말이야…….”
용무린의 입에서 순수한 감탄성이 절로 터졌다.
“확실히 양의신공을 사용하면 괴리감으로 인해 무공을 펼치지 못하는 현상 자체는 극복할 수 있어.”
양의신공은 두 가지 생각을 동시에 할 수 있도록 해준다.
바꿔 말하면 절대검신 독고황의 의식과 신마 진무량의 의식을 제각각 개별적인 개체로 인식할 수 있도록 벽을 세워 구분 지어주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물론 최선은 아니지. 더 높은 곳을 향해 가려면 생각을 둘로 나누는 것으로 끝이 아니라 영육과 정기신의 완벽한 조화를 이뤄야만 하니까 말이야.”
이를테면 양의신공은 미봉책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도저도 아닌 지금의 용무린으로서는 차선책은 된다는 뜻이다.
“시간을 들여 익혀 두기만 한다면 확실히 당분간 걱정할 필요는 없을 거야.”
하지만 지금 이 순간 양의신공에 투자할 시간이 자신에게는 없었다.
형문산에 깃든 놈들은 무당파의 모든 힘이 집중된 상태에서도 쉽사리 꼬리를 자르고 빠져 나갔듯 다시 빠져나갈지도 모르기 때문이었다.
‘그래서는 안 돼. 비룡문이 위험해져.’
비룡문에는 머릿속에 그려보는 것만으로도 미소가 지어지는 어머니 조연옥과 여동생 용설화가 있다.
‘어머니와 설화가 위험해질지도 모르는 도박을 하느니 차라리 내가 목숨을 건 줄다리기를 한 번 더 하는 편이 낫지. 암.’
그렇게 생각하니 자연스레 결단이 내려졌다.
양의신공을 익히는 것보다는 역시 전력질주가 우선인 것이다.
‘불사신기를 믿는 거야.’
상대는 마공을 익힌 존재들!
화산파의 옥현에게는 단순한 내공의 우위였었던 것이 놈들에게는 더한 것으로 작용할 것이다.
“간다-앗!”
천마탄신의 신법이 다시 발동했다.
공간에 한 줄기 선을 그리듯 용무린의 신형이 동쪽을 향해 나아갔다.
***
닷새 후 형문산 인근.
용무린은 개방의 연락을 받자마자 하산을 한 무당파의 본진과 추격을 멈추고 돌아온 태극검수들 그리고 의창 분타에서 달려온 정의개들과 합류할 수 있었다.
“용 대혀-업!”
몇 달 사이 의창현의 개방 분타주가 된 방건이 용무린을 보자마자 달려 나와 반겼다. 오랫동안 떨어져 있던 연인 만나듯 고함을 길게 질렀다.
“아! 저분이 바로 용 대협!”
“용 대협을 뵈오.”
“용 대협을…….”
방건의 인사에 모두가 일제히 포권을 취했다.
“허허허. 이 말코가 바로 무당의 장문인인 자운이라오.”
“하하하! 무림에 명성이 자자한 신진고수를 이제야 뵙게 되는구려. 무당 현천옥허궁의 자성이오.”
“미력하지만 팔선관을 맡고 있는 자영이라 하오.”
“우진궁의…….”
무당파의 수뇌부들조차 환한 얼굴로 웃으며 용무린을 향해 예를 갖추었다. 나이와는 상관없이 그만한 능력을 갖춘 사내로 인정해 준 것이다.
‘화산과는 또 느낌이 다르네.’
천기자도 천기자였지만 자신을 향한 정중함 때문에 용무린 역시 정중해질 수밖에 없었다. 자운진인과 무당의 수뇌부들을 향해 공손히 두 손을 모았다.
“반갑습니다. 비룡문의 용무린입니다.”
기다렸다는 듯 방건이 나섰다. 지금까지의 상황을 쭉 보고했다.
“급한 대로 의창 분타의 거지들을 냉혈곡 주변에 몽땅 깔아 뒀습니다. 태극검수들 역시 적절히 배분했으니 놈들이 움직이면 바로 소식이 올 겁니다.”
“낯간지럽게 왜 이래? 평소대로 해, 평소대로.”
용무린이 살짝 눈을 흘겼다.
실전 비무도 알아서 챙겨서 해주고 추궁과혈까지 해주었던 방건마저 말을 너무 높이자 불편했던 거다.
“그, 그래도 돼?”
“싫으면 그냥 그대로 계속 예예 거리던지.”
그제야 방건의 얼굴에 예전의 그 깐족거림이 되살아났다.
“푸흐흐. 예전 그대로인데 괜히 쫄았네.”
“뭐가?”
“황룡패주에 무림왕의 지위까지 하사 받았다고 하니 보는 순간 오줌이 찔끔 나올 것 같아서 말이야…….”
피식.
용무린은 싱겁게 웃을 수밖에 없었다.
“됐고, 내가 요구했던 것처럼 냉혈곡 입구에서 서성거리기는 했지?”
“당연하지. 태극검수들과 함께 돌아가며 얼굴 내밀었어. 모두 갔나 싶으면 또 들여다보고, 이제는 갔겠지 싶으면 다시 또 접근해서 쳐다보고……. 크크큭, 모르긴 몰라도 바짝 긴장하고 있을걸?”
“좋았어!”
계획대로 잘 해주었다. 그 덕에 시간을 벌었다.
‘애매했을 거다.’
기껏 종적을 감췄는데 튀어나오기도 뭣하고 그냥 무시하자니 들킨 것 같아 가슴이 쪼일 것이다.
‘푸흐흐.’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기에도 옹색할 냉혈곡 속 마인들을 생각하니 절로 웃음이 나왔다.
“한데, 저 안에 정말 마교 놈들이 있기는 한 것이오?”
“냉혈곡이 어떤 곳인데 놈들이 이곳으로 숨어 들어온 것입니까?”
자운진인과 수뇌부들이 궁금한 것들을 물어왔다.
태극검수들과 개방 정의개들마저 종적을 놓친 놈들의 흔적을 어떻게 그 먼 거리에서 정확하게 알 수 있었는지 궁금했던 거다.
“그것은…….”
용무린은 간략하게 황궁에서 있었던 일을 밝혔다.
“아하! 상관세가의 일장로 입을 통해서?!”
“허어, 의성으로 추앙받던 분께서 저 안에 갇혀 계시다니…….”
“참으로 불행한 일이오. 쯧쯧쯧…….”
화운과 효정대사가 그러했듯 자운진인과 무당의 수뇌부들 역시 탄식을 쏟았다.
냉혈곡을 향해 시선을 던지고 있던 자운진인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한 치 앞을 보기 힘든 운무. 이 안에 어떤 흉험함이 숨어 있을꼬?’
이런 곳이 있는 줄도 솔직히 몰랐다.
무공과 숫자만 믿고 무턱대고 들어가기에는 허무하게 스러질 제자들의 목숨이 너무 무겁게 느껴졌다.
‘용무린 대협을 믿는 수밖에.’
정녕 놈들이 이곳에 숨어 있다면, 단숨에 이곳을 짚어내고 미리 준비를 시킨 용무린의 뛰어남을 믿어야 한다는 판단이 섰다.
자운진인은 넌지시 용무린에게 질문을 던졌다.
“놈들은 무당이 전력을 기울였음에도 간단히 뚫고 도주했던 실력자들이외다. 보시다시피 냉혈곡은 운무로 덮여 있어 안쪽의 흉험함을 알 수 없는 상태요. 용 대협께선 어찌 할 생각이오?”
“놈들의 왼쪽 가슴에 아수라의 문장이 새겨져 있다고 하셨지요?”
“그렇소. 내 기억이 아주 틀리지 않는다면 놈들은 마교의 무력단체 중에서도 교주 직속의 수라멸절단일 게요.”
용무린의 뇌리에 신마 진무량이 주입했던 기억의 일부가 스쳐 지났다.
‘수라멸절단…….’
다른 놈들이 아니라 그놈들이라면 의외로 간단하게 머리를 쳐 없앨 수 있다.
‘신마 진무량이 수라멸절단의 단주로 있을 때부터였었지? 놈들의 자존심이 하늘을 찌르게 된 것이?’
마인들이되 자신들의 무력에 대한 자부심이 강한 놈들.
이미 무당산에서 자존심이 한 번 크게 상한 놈들이니 다시 자존심을 건드리면 놈들은 참지 못하고 모습을 드러낼 수밖에 없으리라.
“안에서부터 심상치 않은 기운이 넘실거리고 있소이다.”
“놈들 이외에 어떤 마졸들이 더 숨어 있을지 모르는데 그냥 공격해 들어가기에는 제자들의 피해가 너무 클까 걱정이 되는 군요.”
자성도장과 자영도장이 우려를 토해냈다.
무당산에서 이미 수라멸절단의 무서움을 한 번 겪어 본 사람들은 자성과 자영의 우려를 비웃지 못했다. 함께 걱정을 했다.
잠자코 있던 용무린이 자신만만하게 입을 열었다.
“제가 놈들을 밖으로 끌어낼게요.”
“밖으로 말이오? 그게 가능하겠소?”
자운진인의 고개가 갸우뚱하고 기울었다.
수라멸절단이 정말 안에 있는지의 여부는 둘째 치고, 그들이 지리적인 이점을 버리고 밖으로 나올 이유를 찾을 수 없었던 것이다.
용무린은 여전히 자신했다.
“놈들을 밖으로 끌어낸 후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흔들어 놓을게요.”
어떻게 한다는 것인지 감도 잡히지 않는다.
하지만 용무린은 수라멸절단의 생리를 누구보다도 더 정확히 읽고 있었다.
‘자존심을 긁으면 나올 수밖에 없어.’
그것이 바로 교주 직속 무력단체 수라멸절단이다.
‘자부심이 컸던 만큼 처참하게 짓밟히면 급격하게 무너지게 될 거야.’
냉혈곡 안으로 모든 힘을 밀어 넣어 전투를 벌이든 밖으로 끌어내어 붙든 전면전이 벌어지게 되면 어차피 많은 피가 흐를 수밖에 없다.
‘천기자에 진 빚을 갚는다고 생각하자.’
위험부담이 크긴 하지만 무당파와 개방의 피해를 줄이려면 이 방법이 가장 좋았다.
“제가 일을 시작하면 장문인께서는…….”
자운진인에게 나직한 목소리로 무엇인가를 부탁한 용무린이 흔쾌히 돌아서며 외쳤다.
“자, 이제 마졸 사냥에 나서 볼까나?”
냉혈곡을 향해 성큼 발을 내디뎠다.
냉혈곡 내부.
사시사철 부는 찬바람 덕에 언제나 내부를 감춰주는 안개가 이는 곳이다.
하지만 쥐구멍에도 볕이 뜨는 자리가 존재하듯 안개로부터 자유로운 곳이 존재한다.
가히 작은 산이라 불릴 만큼 거대한 바위.
그 위에 선 진철산은 예리한 시선으로 밖을 살피고 있었다. 햇빛의 각도와 높은 위치로 인해 외부가 흐릿하게나마 보이기 때문이었다.
“빌어먹을! 무당의 말코와 거지들이 이곳을 포위할 줄은 정말 꿈에도 몰랐네.”
냉혈곡 밖을 노려보는 진철산의 눈에서 독기가 뿜어졌다.
한 놈씩 번갈아 보일 때는 그러려니 했는데 어느새 무당산 허리에서 봤던 놈들까지 죄 몰려와 있었다.
‘최초에 한 놈이 모습을 보였을 때 그놈을 잡아 죽였다면 상황이 좀 달라졌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그건 아니었다.
놈들은 종적이 끊겼을 때부터 이곳에 자신들이 숨어들었다는 것을 확실히 인지한 채 포위망을 조였다. 계속해서 번갈아가며 얼굴을 들이민 것이 바로 그 증거였다.
‘죽인 후 흔적을 지웠다 해도 실종된 놈을 찾아 더 빨리 몰려들었을 테지.’
그게 답이었다.
“대체 놈들이 이곳을 어떻게 알게 됐을까요?”
뒤에 시립해 있던 냉혈곡주 마관중이 은근한 목소리로 진철산에게 물었다.
마치 ‘너희들이 칠칠맞게 흔적을 흘린 것 아니냐? 냉혈곡이 노출된 것은 다 너희들 책임이다.’ 라고 책임 추궁을 하는 듯 느껴졌다.
‘시건방진 놈!’
진철산이 그 정도 내심을 짐작하지 못할 리 없다.
당장에라도 목을 베어 버릴 듯 냉혈곡주 마관중을 매섭게 노려보았다. 거친 목소리로 으르렁댔다.
“나로 하여금 고민을 하게 만들지 마라.”
움찔.
냉혈곡주의 목이 바짝 움츠려들었다. 진철산의 목소리가 계속해서 이어졌다.
“무당파의 냄새나는 말코들과 생사결을 벌일 처지만 아니었다면 이런 곳에 처박혀 숨어 지내기만 해온 네놈들 따위 단숨에 목을 베어버렸을 것이다.”
하다못해 포위만 당하지 않았어도 벌써 목을 쳤다.
신교의 품을 벗어나 그동안 독자 생존해 왔기 때문인지 냉혈곡의 마인들은 너무 마인답지 않았다. 의성 신우량의 비전을 바탕으로 기괴한 실험을 즐겨하는 놈들의 집합이 바로 지금의 냉혈곡이었다.
‘그건 그런데, 참 많이도 몰려왔다 정말.’
진철산은 내심 기가 막혔다.
무당산 어귀에서 무당파의 포위망을 돌파할 때도 이 정도까지는 아니었다. 한데 지금은 무당파의 무인들에 이어 개방의 정의개들까지 함께였다.
‘어떻게 알았는지 나도 궁금하긴 하다.’
분명히 지겹게 따라 붙던 태극검수들의 추격을 뿌리쳤다.
말코와 거지들은 호남성에 이르러서야 종적을 드러낼 유인조의 출현에 놀라 우르르 몰려가야만 했다.
‘그래야만 했는데, 그래서 안전하게 무한으로 스며들어가 비룡문을 부숴버렸어야만 했는데 대체 여길 어떻게 알고 포위망을 좁혀왔을까?’
그 이유를 알 수 없어 진철산이 눈살을 찌푸릴 때였다.
냉혈곡 입구 중앙에 사내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애송이로 보이는데, 발걸음을 보니 겁도 없이 냉혈곡 안으로 들어오려는 듯 보였다.
“오냐 좋다. 들어와라. 지옥을 보여주마.”
진철산이 이를 드러냈다. 으스스하게 웃었다.
냉혈곡은 언제나 자욱한 안개가 자연적인 진법의 역할을 해준다. 미리 지리를 익히고 좋은 위치를 선점한 채 기습을 준비하고 있는 쪽이 절대적인 우위를 차지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네놈을 시작으로 들어오는 족족 죽여주마. 크흐흐.”
이미 곡 진입로에 수라멸절단 전부를 깔아 두었다.
애송이에 이어 무당의 말코들과 개방의 떨거지들이 몽땅 밀려든다고 해도 짓밟아줄 자신이 있었다.
‘아, 그 애송이 정말……. 들어오려면 빨리 들어와 뒈질 것이지 뭘 저리 꾸물대는 거야?’
기대와는 달리 애송이는 들어오지 않았다.
냉혈곡 입구의 공터에 당당히 버티고 섰다. 고함을 버럭 질렀다.
“수라멸절단! 마지막 선택을 해라!”
선택? 무슨 선택?
밑도 끝도 없이 던져진 질문 같았지만 진철산은 애송이가 말하는 마지막 선택이 무엇을 뜻하는 것인지 알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 짐작이 맞다는 듯 애송이가 다시 말을 이었다.
“후련하게 싸우다 죽을래? 아니면 냉혈곡에 확 다 불을 싸질러 버릴 테니 쥐죽은 듯 타 죽을래?”
씨이익.
말끝에 시원한 미소를 지어 보이는 애송이의 이름은 바로 용무린이었다.
꿈틀.
진철산의 눈두덩이 요란하게 움직였다.
잠자코 듣고 있자니 자존심이 너무 상했던 거다.
‘두 번째 임무를 성공시킬 욕심만 아니었어도 무당산에서 끝을 봤을 것인데…….’
그때도 자존심이 몹시 상했었는데 또 다시 긁어댄다.
두 명의 부단주를 비롯해 아끼던 수하 백오십여 명을 잃어버렸던 상처가 다시 도지는 느낌이다.
진철산의 엉덩이가 들썩였다.
당장에라도 뛰어 나가 저 밉상 맞은 애송이의 목을 시원하게 날려 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지리적인 이점을 버리고 뛰쳐나갔다가 되레 말코와 거지의 함정에 빠지게 되면?’
그러면 두 번째 임무도 실패다.
그 가능성이 진철산의 발목을 잡았다. 당장에라도 튀어 나가고 싶은 마음을 다시 한 번 억눌렀다.
‘놈! 운 좋은 줄 알아라. 절반의 성공이라도 거둬보려고 참는 거란 말이다.’
마교도들도 아닌 정파인들이 산불을 지를 리는 없다.
그랬다가는 거침없이 번진 산불에 양민들이 피해를 입을 수도 있는 문제였으니까.
그때 용무린이 진철산의 고민을 없애 주었다.
“내가 바로 용무린이야. 어때? 그래도 안에 처박혀 있고 싶냐?”
용무린!
칠십 년 만에 공식 출정한 수라멸절단의 발길을 허무하게 되돌리게 만든 이유! 무당산에서 백오십여 명에 달하는 수하들의 목숨을 잃게 만든 수모의 장본인!
‘저, 저 애송이가 바로……?’
툭.
억누르고 억눌렸던 진철산의 인내가 소리 없이 끊겼다.
진철산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 바위 아래로 몸을 날렸다. 무엇인가에 홀린 듯 냉혈곡 밖으로 나아갔다.
‘신교의 심모원려를 무위로 돌린 원흉.’
‘수라멸절단의 하나 남은 표적!’
진철산의 마음에 동화라도 된 것일까?
수라멸절단의 조장들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 앞으로 나섰다. 진철산을 따라 움직였다.
‘크큿. 이젠 숨을 필요가 없다.’
‘표적이 우릴 부르고 있는데 숨어서 뭐하겠어?’
‘후훗. 후련하게 싸울 일만 남았구나.’
단주인 진철산과 조장들이 움직이자 나머지 수라멸절단의 마인들 역시 일제히 앞으로 나섰다.
‘저저 어리석은!’
냉혈곡주 마관중이 인상을 찌푸렸다.
애송이의 말 몇 마디에 지리적인 이점을 모두 버리고 넓고 밝은 곳으로 나가는 꼴이라니!
‘안 되겠다. 나라도 준비를 해야지.’
마관중은 잽싸게 냉혈곡 안을 향해 신법을 펼쳤다.
자리를 비운 수라멸절단을 대신해 자신의 수하들로 채울 생각이었던 것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진철산은 신경도 쓰지 않았다.
명령을 내리지도 않았어도 자신을 따라 잠복 위치를 벗어나는 수하들의 행동을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활활 타오르는 투지를 가감 없이 드러냈다. 안개도 없는 환하고 밝고 넓은 곳으로 나아갔다.
씨이익.
짙은 안개 사이 흐릿한 그림자 하나가 점점 밖으로 나오는 것을 확인한 용무린이 환하게 웃었다. 그 뒤에 수백의 그림자가 따라 붙었기 때문이었다.
수라멸절단이다.
생각대로 놈들을 지리적인 이점을 버리고 싸우기 좋은 곳으로 끌어내는데 성공한 거다.
“그래야지! 그래야 수라멸절단이지!”
저렇게 당당히 나올 줄 알았다.
놈들이 참으로 비룡문을 노렸던 것이라면 용무린이라는 이름 석 자에 반응을 보일 수밖에 없을 것이라 생각했고 보기 좋게 맞아 들어갔다.
진철산은 십여 장 앞에서야 걸음을 멈추었다.
그 뒤에 조장들을 비롯해 수라멸절단의 마인들이 횡으로 길게 늘어섰다.
수백 명 대 한 사람의 대치.
용무린 뒤에도 무당과 개방의 무인들이 구름처럼 지켜 서 있었지만 수라멸절단의 기세가 오롯이 집중되는 곳은 오직 한 곳 용무린이었으니 가히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용무린은 겁이라는 단어 자체를 모르는 것인지 싱겁게 웃을 뿐이었다.
기가 막힌 듯 진철산은 질문부터 던졌다.
“애송이! 네가 정말 용무린이냐?”
“그래. 내가 바로 무림맹에서 혈고를 몰아내고 상관세가와 운룡장을 지웠으며 황궁에 깃든 마교의 그림자까지 싹 씻어낸 어르신이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어떻게 알았는지 훗날 정파 요인들을 암살하기 위해 고이 숨겨 두었던 혈루곡마저 찾아내 박살내었고 그 와중에 음양자가 노심초사하며 공을 들인 동남동녀의 수급에도 막대한 차질을 빚었다.
마교에게 있어 용무린이 죽을 이유란 차고 넘쳤다.
그런데 이렇게 제 발로 나타나다니!
“크흐흐. 그렇군. 좋아. 아주 좋아.”
진철산이 하얀 이를 드러냈다. 답답하던 속이 후련해졌다는 듯 환하게 웃었다.
“너는 뭐냐? 수라멸절단의 단주쯤 되냐?”
용무린의 질문에 진철산이 가슴을 활짝 폈다.
“그래. 본좌가 바로 수라멸절단의 단주 진철산이다.”
후우욱.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보기 드문 수준의 기세가 뿜어졌다. 용무린을 향해 집중되었다.
‘자운진인과 비슷한 수준!’
기세를 마주한 순간 용무린은 바로 알아차렸다. 피부가 수백 개의 송곳에라도 찔리는 듯 아렸다.
진철산이 두 번째 임무라도 성공시킬 욕심이 없었다면 무당파의 피해는 상상하기 힘들 만큼 컸으리라.
‘결국엔 이겼겠지만, 무당파의 전력 중 절반은 족히 갉아 먹었겠지.’
칭찬은 여기까지!
‘그래도 넌 내 밥이야.’
싸움 시작도 안 했는데 쓸데없이 기세를 일으켜 집중하는 것도 하나의 허영이고 낭비다. 이유야 어쨌든 그런 놈은 나를 넘어설 수 없다.
스르릉.
천천히 풍뢰를 뽑아들며 용무린이 말을 이었다.
“무당산에서는 자존심 좀 상했다며? 회복할 기회를 주지. 어때?”
“크크큭. 크하하하-!”
뭐가 그리 좋은 것인지 진철산은 목이 터져라 웃었다. 고개를 끄덕이며 도를 움켜쥐었다.
창!
군더더기 하나 없는 동작으로 뽑아 용무린을 향해 겨누었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고함을 질렀다.
“아무도 나서지 마라. 놈은 내가…….”
용무린이 진철산의 말허리를 잘라 먹었다.
“괜찮아. 괜히 체면 차리다 망신당하지 말고 몇 놈 더 들어와도 돼.”
“……직접 죽인다.”
말허리가 잘리니 김이 팍 새는 느낌이다.
찡긋.
말끝에 용무린이 한쪽 눈까지 깜박여 보이니 약까지 바짝 올랐다.
“이놈! 그 무슨 말이냐?”
“너 따위 애송이를 상대로 수라멸절단이 합공이라도 하라는 게냐?”
진철산의 뒤에 늘어서 있던 조장들이 대신 분노했다.
모욕을 당한 진철산 역시 마찬가지.
아득.
이를 갈며 도 끝을 용무린의 천돌혈을 향해 겨누었다. 내력을 집중했다.
웅웅웅.
진철산의 도가 묵직하게 울기 시작했다.
“놈! 단숨에 목을 날려주마. 그런 후 네놈 뒤에 늘어 선 말코와 거지들까지 깡그리 죽여줄…….”
“하, 그 자식. 생긴 것 답지 않게 말 많네. 간다-앗!”
스파앙. 패애액.
순간적으로 거리를 좁힌 용무린이 풍뢰를 가볍게 휘돌렸다. 회두망월, 고월침강, 삼환투월에 이은 태산압정의 삼재검법, 아니 삼재도법 연환기가 쏟아졌다.
“우웃!”
화들짝 놀란 진철산이 황급히 도법을 펼쳤다.
피이유윳. 버번쩍. 카카카카캉.
바람 쪼개지는 소리와 함께 번갯불이 일었다. 불똥이 튀었다. 수라멸절단의 단주답게 용무린의 기습을 훌륭히 막아내었다.
쿵쿵쿵.
하지만 선수를 빼앗긴 탓에 형편없이 뒤로 밀리는 것만큼은 어쩔 수 없었다.
저만큼 앞에 선 용무린이 느물거렸다.
“푸흐흐. 어때? 정신이 바짝 들지?”
“이, 이노-옴!”
“욕한다고 누가 네 도에 맞아 주냐? 덤벼 인마! 차아앗!”
말로는 먼저 덤비라고 했으면서 용무린은 잘도 먼저 선공을 취했다.
후웅. 패애애액.
불사신기가 묵직하게 걸린 풍뢰가 백사토신의 초식으로 진철산의 심장을 노렸다. 하지만 도 끝이 심하게 팔방으로 떨리고 있어 언제든 다른 치명적인 요혈을 노릴 수 있다는 것이 일반적인 삼재검법과 다른 점이었다.
‘하지만 그 정도로는 어림없다, 이놈!’
“차아앗!”
진철산의 도에서 제대로 된 도법이 펼쳐지기 시작했다.
피이잇. 버번쩍.
작열하듯 쏟아지는 아홉 줄기의 광채가 다시 제각각 아홉 개로 분화했다. 용무린을 에워싸듯 한꺼번에 밀려들었다. 진철산을 오늘날 수라멸절단의 단주에 올린 절기 구구사혼도의 절초였다.
‘이건 좀 위험한데?’
용무린의 위기감지 능력이 발동했다.
이대로 계속해서 삼재검법의 연환기만 펼친다면 절대로 상대의 초식을 모두 받아낼 수 없다는 것을 직감했다.
‘진천수라도를 펼쳐야만 해.’
아니면 비연오식이라도 펼쳐야만 별다른 피해 없이 막아낼 수 있으며 반격도 할 수 있다.
하지만,
“삼재도법도 내가 펼치면 신공이야 인마-앗!”
어찌 된 영문인지 용무린은 진천수라도나 비연오식을 펼치지 않았다. 계속해서 삼재도법의 연환식만 펼쳤다.
후웅. 후웅. 후우우웅.
물론 불사신기가 가득 걸려 구구사혼도 못지않은 위력을 쏟아내긴 했다.
파캉. 따앙. 카카-캉!
커다란 쇳소리와 함께 굵은 핏줄기가 두 사람 모두의 몸에서 튀었다. 놀랍게도 삼재검법의 연환식만으로 구구사혼도의 초식을 받아내고 뚫어낸 것이다.
‘빌어먹을! 삼재검법 따위가 어떻게 저럴 수 있어?!’
진철산의 눈이 동그래졌다.
구구사혼도의 초식이 삼재검법 아니 삼재도법을 뚫어낸 것보다 삼재도법 따위의 초식으로 자신의 몸에 생채기를 낸 사실이 더욱 놀랐던 것이다.
“크아아-압!”
독기가 오를 대로 오른 진철산이 작정하고 내공을 더 끌어냈다. 물 흐르듯 연이어 펼쳐지는 구구사혼도의 초식에 보탰다.
패애액. 쉬가가각. 후웅. 후웅. 후우웅.
도에 걸린 광채는 어느덧 유형의 빛 덩어리로 뭉쳐들었다. 초식 전체가 도강으로 바뀐 것이다.
구구는 팔십일.
무려 팔십일 방위가 구구사혼도의 초식에 찢겨나가기 시작했다.
실로 무시무시한 광경!
하지만 용무린은 헤실 웃었다. 강기의 소나기를 보면서도 겁을 내지 않았다.
‘바보 같은 놈. 그것으로는 안 된다는 것을 아직도 모르겠어? 그거 있잖아 그거! 그걸 꺼내란 말이야!’
그게 대체 뭘까?
‘그걸 꺼내기 전에는 안 된다는 걸 보여주지!’
위험하지만 그래도 해낼 거다.
용무린은 풍뢰에 불사신기를 뭉텅 밀어 넣었다.
“도강이 대수냐 인마-아?!”
다시 펼치는 것은 여전히 삼재검법 아니 삼재도법!
후우우-. 버번쩍.
기합인 듯 약 올리는 외침과 함께 풍뢰에도 유형의 빛 덩어리가 걸렸다.
평소에 펼치던 것과 완전히 다른 종류의 도강이었지만 개의치 않았다. 한 치의 물러섬도 없이 진철산의 도와 맞부딪혔다.
콰앙. 타타타-앙!
무인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삼재검법으로 어떻게 저런 위력을 발휘할 수 있는 것인지 알 수 없었지만 용무린은 잘도 삼재검법의 초식에 도강을 걸어 구구사혼도의 흉험한 초식을 헤집었다.
퍼억. 쉬각.
산산이 부서지는 빛의 편린.
그 사이 피어오르는 선연한 붉은 핏줄기.
치명상은 서로 입힐 수 없었지만 채 해소하지 못한 도강의 편린들이 마구 몸을 할퀸 것이다.
적절히 주고받은 셈.
타닷. 슥.
이대로는 안 되겠다는 것을 서로 직감한 모양인지 두 사람은 약속이라도 한 듯 삼 장 밖으로 물러났다. 서로를 향해 도를 겨눈 채 도사렸다.
“그 정도로는 안 된다니까?!”
피를 뚝뚝 흘리면서도 여전히 빈정거리는 용무린을 보며 진철산은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인정하지.”
휘이유우우-.
말과 동시에 진철산의 기세가 달라졌다. 폭발하듯 솟구쳐 나오던 도강의 유형화된 빛이 점점 작아지는가 싶더니 이내 도신 내부로 침잠했다.
“네놈에게 보여주긴 아까운 무공이긴 하다만……. 보여주지. 진짜 도법을…….”
진철산의 도는 도강이 걸린 듯 말 듯 해보일 뿐!
하지만 터지기 직전의 화산처럼 기세는 더 강렬해졌다.
반짝!
‘드디어 나오는군!’
용무린의 눈에 회심의 빛이 걸렸다.
지금 진철산이 펼치려는 도법이 어떤 것인지 누구보다도 더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진천수라도!’
더 정확히 말하자면 자신의 주요 무공인 진천수라도의 뜯어 고치기 전의 모습인 원형!
‘신마 진무량이 수라멸절단의 단주로 있을 때 후대를 생각해 남겨 놓은 도법이었지!’
마교의 교주로 오르며 충성을 이끌어내기 위해 남겨 놓은 저 도법이 나올 줄 알았다.
‘꽤 열심히 익혔네. 유형화된 강기를 낭비하지 않고 도에 휘돌려 붙여둘 정도까지는 되니 말이야.’
물론 어설프다.
제대로 경지에 이르렀다면 자신처럼 도기나 겨우 일으킨 듯 은은해야만 한다. 그래야만 눈곱만큼의 낭비도 없다. 최강의 위력을 발휘한다.
‘어쩔 수 없었겠지. 남겨둔 것은 그것이 전부였으니.’
진짜배기를 보여준다!
쭈와-악! 반짝!
풍뢰에 걸려 있던 유형화된 도강이 도신 속으로 쭉 빨려들었다. 씻은 듯 사라졌다. 이제 겨우 도기나 걸린 것처럼 은은한 빛만을 발산했다.
“어헉!”
진철산의 눈이 부릅떠졌다.
“그, 그것은……?”
기절할 만큼 놀랐다. 설마하니 자신과 비슷한, 아니 비교조차 할 수 없을 만큼 발전된 모습이라니! 아무리 노력해도 다다를 수 없었던 이상향의 모습이라니!
“아, 아니야. 그럴 리 없어.”
진철산이 고개를 흔들었다. 믿을 수가 없었던 거다.
‘저놈이 나를 또 놀리는 거야.’
용서할 수 없다.
다른 것도 아닌 자신의 자부심, 수라멸절단에 내린 전대 신마의 유산을 흉내 내다니!
“죽어라-아!”
휘슷. 버언쩌저적!
쏘아지듯 거리를 좁힌 진철산의 도 끝에서 검은 빛의 달이 둥실 떠올랐다. 하나가 아니었다. 난도질을 하겠다는 듯 수십 개가 연이어 피었다.
‘크흣. 내가 저래서 완전히 뜯어 고쳤지.’
정파인의 허울을 쓰고는 도저히 펼칠 수 없는 잔인한 도법이 바로 진천수라도!
‘보여 주마!’
투웅.
시위를 떠난 화살처럼 거리를 좁히는 용무린.
‘이것이 바로 거듭난 진천수라도다!’
비스듬히 들린 풍뢰가 허공에 하나의 초승달을 그리기 시작했다.
버언쩍.
초승달에서 시작해 만월이 되어 떠오른 수라잔월의 초식이 원조 진천수라도의 난폭함을 감싸 안았다. 난도질하듯 거친 초식 사이의 결을 파고들었다.
파캉! 카카카카-앙. 스각.
“……!”
거친 쇳소리와 함께 진철산의 몸이 흠칫 굳었다.
부릅떠진 눈으로 천천히 자신의 몸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보였다. 초승달의 가녀린 궤적을 따라 울컥울컥 흘러나오는 굵은 핏줄기가.
“어, 어떻게 이 도법을…….”
말을 잇다 말고 진철산은 고개를 거칠게 흔들었다.
닮았는데 다시 생각하니 그건 또 아니었다. 쌍둥이처럼 비슷했지만 완전히 다른 그 무엇이었다.
“뭐지? 전혀 다른데……. 어떻게 초식의 연계 사이를 정확히 찔러 들 수 있었지?”
빈틈을 공략해 당했으면 이해라도 하지.
방금 전의 것은 초식과 초식의 연계 사이를 비집고 들어왔다. 그것은 자신이 펼친 도법의 정확한 이해와 깊은 성찰이 없으면 불가능한 일인 것이다.
‘귀신에라도 홀린 기분이겠지.’
그래도 어쩌겠냐?
‘내 전생이, 아니 내 전생인 줄로만 알았던 신마 진무량이 발전시켜 완성한 것이 바로 그 도법인 것을…….’
그것을 알기에 그나마 이런 기회라도 준 것이다.
물론 혼란을 유도할 욕심에 손해를 자초한 일이기도 했지만…….
“궁금해 할 것 없다. 조금 있으면 다 알게 돼.”
염라대왕이 친절히 알려 줄 거다.
‘안 가르쳐 주면 할 수 없고.’
“잘 가라!”
스각!
진철산의 목이 둥실 떠올랐다.
수라멸절단 단주의 죽음이라고 보기에는 너무 허무했다.
자운진인과 비슷한 무위를 지녔던 진철산이 저렇듯 쉽게 갈 줄이야!
용무린에게 신마 진무량의 기억이 주입되어 있지 않았다면 어림도 없는 일일 것이다.
“……!”
“……!”
하나 같이 경악한 얼굴로 굳어 있는 수라멸절단.
그러다가 누군가가 절규했다.
“단주니-임!”
“으아아!”
휘슷. 촤아아악!
용무린을 향해 짓쳐들었다. 똑같이 만들어 주겠다는 듯 검을 내리 그었다.
그것이 시작이었다.
“죽어엇!”
“단주님의 원수!”
“죽인다. 반드시 죽인다-앗!”
수라멸절단원 모두가 용무린의 목숨을 노렸다.
그 지독한 살기에 보통 사람이라면 겁이라도 나련만 용무린은 되레 웃었다.
“크크큭. 다 덤벼-엇!”
휘슷.
오히려 수라멸절단을 향해 달려들었다.
촤아아악. 스각. 스가각.
“크악!”
“커헉!”
전면에서 용무린의 목과 심장을 노렸던 조장 두 명이 허무하게 무너져 내렸다.
“이때다! 쳐라!”
“공겨-억!”
무당과 개방의 고수들이 가세했다.
지휘체계가 무너지고 혼란에 빠진 수라멸절단을 휩쓸었다. 이래서 전투 초기의 일기토가 중요한 거다.
카앙. 파카캉. 스각.
“크아악!”
차차창. 피잇.
“허억!”
수라멸절단은 변변한 대응조차 하지 못했다.
태극검수들을 비롯한 무당파의 정예와 정의개의 합공에 속수무책으로 쓰러져갔다. 구심점이라고 할 수 있는 진철산의 죽음이 너무 컸다.
“뭉쳐! 서로 등을 맞대!”
“수라멸절단! 냉혈곡 안으로 후퇴!”
뒤늦게 냉정을 찾은 조장 몇이 고함을 질렀다.
“뭉쳐라!”
“힘을 내라. 안개 속에서 싸우자!”
역시 교주 직속 무력단체 수라멸절단.
조장들의 몇 마디 외침에 금세 진열을 갖추었다. 태극검수와 정의개에 맞섰다.
“크흡!”
“컥!”
그때부터 태극검수와 정의개들의 피해가 눈덩이처럼 불어나기 시작했다.
물론 용무린에게는 해당사항이 없었다.
“뭉치면 나야 편하지!”
용무린은 수라멸절단을 규합하는 조장들만 골라 공격했다. 안개 속으로 들어가려는 놈들의 발목을 잡았다.
피이이-잉. 쉬각.
“커헉!”
소검비연을 날려 잘도 쓰러뜨렸다.
“조장! 컥!”
소리도 없이 날아든 비연무흔단의 초식을 피할 능력이 그들에게는 없었다. 속절없이 쓰러졌다.
“이대로 돌파!”
“놈들을 부숴버린다-아!”
우지끈!
일렬로 늘어서 있던 수라멸절단의 대형 몇 곳이 부러졌다. 그 사이로 터져 나온 무당과 개방의 고수들이 안개 속으로 진격했다.
전투와 승리의 기운에 흥분한 것이다.
‘이런! 저 안까지 파고들 거라고는 하지 않았는데…….’
용무린은 아차 싶었다.
냉혈곡 내부에 본래부터 있던 마교의 무리가 이 좋은 기회를 그냥 두고 보지는 않을 것이다.
피쉬잇. 카캉. 스각.
“커헉!”
차차창. 서걱.
“허억!”
아니나 다를까?
안개 속에 들어갔던 무당과 개방의 고수들이 얼마 버티지도 못하고 쓰러져갔다.
짙은 안개에 가려진 바위와 나무 뒤에 숨어 기습을 한 냉혈곡 마인들의 공격은 그만큼 받아내기 힘들었던 거다.
‘별 수 없다.’
시력과는 상관없는 경지에 오른 고수들을 제외하면 안개 속에서의 전투는 자살행위였다. 안개에 숨어 가만히 검이나 도만 내밀고 있어도 달려와 스스로 죽어 줄 것이기 때문이었다.
도기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수리검 정도만 소리가 나는 방향으로 던져도 무방했다. 태극검수와 개방 고수들의 많은 수가 쓰러져갔다.
“돌파! 방어만 하면서 그냥 안개를 돌파해!”
용무린이 고함을 버럭 질렀다.
무슨 뜻인지 알겠다는 듯 바로 호응이 뒤따랐다.
“돌파! 냉혈곡 내부에서 다시 전열을 가다듬는다. 안개가 없는 곳까지 그냥 달려라!”
“멈춰서 싸우려 들지 마라. 방어에만 전념하고 뛰엇!”
“일부는 밖으로 나와 도주를 차단해라. 그러면 놈들은 독 안에 든 쥐다!”
무당과 개방의 수뇌부들이 다투어 고함을 질렀다.
지금으로써 가장 적절한 대처였다.
‘피해를 줄이려면 별 수 없다.’
단숨에 안개지역을 돌파한 용무린은 냉혈곡 내부에 들어서자마자 마른 풀에 불을 질렀다. 열기로 안개를 밀어내려는 것이었다.
화르륵. 화르르륵.
거칠게 타오르는 불꽃에 안개가 힘을 잃었다. 힘없이 뒤로 밀렸다. 용무린의 뒤를 따라 냉혈곡에 진입한 태극검수들이 그 모습을 보았다.
“불을 놓아라!”
“나무에 불을 붙여 안개로 집어 던져!”
크게 외치며 따라서 불을 붙였다. 활활 타오르는 나무를 안개 속으로 마구 집어 던졌다.
화르륵. 화르르륵.
활활 타는 나무가 안개 속에 떨어져 내리는 숫자가 늘면 늘수록 안개는 빠른 속도로 사라져 갔다.
물론 한꺼번에 씻은 듯 사라지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전처럼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던 상황만큼은 해결됐다.
쉬익!
“이놈! 어림없다!”
파카카캉. 차창.
흐릿한 가운데 상대가 몸을 숨긴 곳과 공격이 보였다. 충분히 감지하고 방어와 반격을 할 정도가 되었다.
‘이 정도면 충분하겠네.’
용무린은 자신이 빠져도 무당과 개방이 충분히 감당할 것이라는 확신이 섰다.
아직은 수라멸절단이 상당수 남아 있었고 안개 속의 적도 건재했지만 무당과 개방의 정예들이라면 충분히 압도하고도 남는다고 생각했다.
스파아앙.
용무린은 즉시 냉혈곡 내부에 세워져 있던 전각을 향해 움직였다. 부일기 장로에게 정보를 얻었을 때부터 구하고 싶었던 사람을 찾기 위해서였다.
‘장문인께서 잘 찾아냈을까?’
수라멸절단에 맞서기에 앞서 자운진인에게 부탁을 했었다. 상관세가의 일장로 부일기에게 들었던 우회진입로를 알려 준 후 그곳을 통해 들어가 의성 신우량을 구해달라고 했던 것이다.
‘늦지는 않았겠지?’
그러기를 바랐다. 놈들이 의성 신우량을 또 다른 곳으로 빼돌리기 전에 자운진인과 수뇌부가 길을 차단하고 구했기를 원했다.
‘어쩌면 혈고가 몸에 들어와도 정신을 빼앗기지 않을 방법 혹은 바로 죽일 수 있는 약을 만들 수도 있겠지.’
비록 의성이 활생단의 비방을 실토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혈고에 중독이 되었지만 그 뛰어난 의술을 바르게 사용하면 마교의 수작을 원천봉쇄할 수도 있는 것이다.
바로 그때였다.
쿠와아앙. 퍼퍼펑.
냉혈곡 가장 안쪽의 커다란 전각 중앙이 박살이 났다.
용무린의 눈이 가느다래졌다.
전각이 박살이 나며 몇몇 인영이 뒤로 튕겨 나왔는데 하나 같이 내상을 입은 모습이었기 때문이었다.
‘대체 안에 누가 있기에…….’
핼쑥한 얼굴로 입가에 굵은 핏물을 흘리고 있는 사람들은 바로 무당의 장문인인 자운진인과 현천옥허궁의 주인인 자성 그리고 팔선관의 주인인 자영이었다.
“후우우. 의성을 부탁하네, 사제.”
자운진인은 품에 안고 있던 왜소한 체구의 노인을 자영에게 넘겼다. 들끓는 기혈을 애써 가라앉히며 다시 검을 고쳐 잡았다.
“예, 사형.”
자신이 감당할 수 없음을 인정하며 자영진인이 뒤로 빠졌다. 넘겨받은 노인을 등 뒤로 돌렸다.
“조, 조심하시오!”
왜소한 체구의 노인이 벌벌 떨면서도 모두의 안위를 빌었다.
이 노인이 바로 의성 신우량.
마교에 납치당해 온갖 고초를 겪은 장본인이었다.
“크크큭. 태극혜검도 별 것 아니군.”
“나머지 두 떨거지들은 손맛이 영, 별로야.”
“이봐. 아직 손맛도 못 본 나도 있다고!”
뒤이어 느긋하게 전각을 나서는 세 명의 노인!
‘후광처럼 뿜어지는 마기! 강적이다.’
마주하기만 했음에도 전신의 솜털이 곤두섰다.
대체 누굴까?
“성질 깨나 고약하게 생겼네. 정체가 뭐지?”
자운진인 곁에 내려선 용무린이 궁금하다는 듯 질문을 던졌다.
“혀, 혈마종이시여. 저놈입니다. 저놈이 바로 용무린이라는 애송이입니다.”
마지막으로 나선 냉혈곡주 마관중이 용무린을 향해 손가락질을 했다. 신이 나서 일렀다.
‘혈마종!’
용무린의 심장에 작은 파문이 일었다.
혈마종이라고 하면 오궁이원의 주인들과 같은 배분인 오마종의 일인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그 옆에 있는 늙은이들 역시?’
자성과 자영을 향해 손맛이 별로라는 망발을 했던 붉은 얼굴의 노괴는 권마종일 테고 한 자루 도를 비켜 맨 노괴는 도마종일 것이다.
‘강적이다!’
그것도 지금껏 상대해 본 적 없는 강적들의 등장이다.
배분이야 오궁이원의 주인들과 같다지만 그들과는 달리 무공에 미쳐 따로 세력조차 두지 않을 정도의 괴물들이기 때문이다.
한 사람의 등장으로도 놀라운 일인데 저런 괴물이 셋씩이나 한꺼번에 나타나다니!
쿵쿵쿵.
용무린의 심장이 터질 듯 뛰기 시작했다.
하지만 자신도 모르는 사이 입꼬리가 말려 올라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상대가 누구든 주눅 드는 대신 싸워 짓밟으려는 투지가 발동한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