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이보 전진을 위해 (60/104)

8.이보 전진을 위해

양의신공으로 세워 둔 분심의 벽이 허물어졌다.

무공을 이해하는 천재성과 일반적인 무인들은 견줄 수 없는 경험으로 어떻게 세우기는 했지만 오랜 시간을 버틸 수가 없었던 것이다.

‘분심의 벽이 허물어지지만 않았어도 도마종과 권마종을 한꺼번에 잡을 수 있었을 텐데…….’

그 점이 못내 아쉽다.

정기신과 영육의 조화가 깨어지자 그 반응이 즉각 나타났기 때문이다.

운용할 수 있는 불사신기의 크기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확 줄어들고 어검술과 어도술 그리고 신검합일마저 무위로 돌아갔다.

그러니 어떻게 도마종과 권마종의 목숨을 마저 거둘 수가 있었겠는가?

다시 생각해보면 단 한 번의 시도에 양의신공이 말하는 분심의 벽을 세울 수 있었던 것만으로도 성공이라고 해야 하리라.

그런데…….

‘도마종의 내공, 꽤 지독한데?’

아쉬움이야 다음에 시간을 들여 양의신공의 성취를 이루면 해결이 되는 것이겠지만 남겨진 도마종의 흔적이 너무나 선명했다. 심장을 파고든 도마종의 내공이 터뜨릴 듯 마구 짓누르고 쑤셨던 거다.

‘내공도 꼭 주인을 닮아 지랄 맞군그래…….’

창백한 얼굴과 끊임없이 흘러나오는 핏줄기!

용무린은 한 눈에 봐도 범상치 않은 내상을 입은 것으로 보였고 사실이 또한 그랬다.

‘밀어 붙여! 박살을 내 버리라고!’

최선을 다해 불사신기를 심장으로 이끌었다.

도마종의 내공을 밖으로 밀어내기 위해 애썼다.

뭇 마공을 흩어내는 불사신기였지만 파고든 도마종의 내공에 비해 남아 있는 불사신기의 양이 너무도 적었다. 그래서 조금씩 뒤로 밀릴 수밖에 없었다.

쿵쿵쿵. 쿠웅. 쿵. 쿠웅. 쿵.

터질 듯 뛰던 심장이 조금씩 느려졌다.

이대로 조금만 더 뒤로 밀린다면 심장이 아예 멈춰버릴 수도 있으리라.

‘이런!’

도마종의 내공이 기세를 더 올렸다.

쿠웅. 쿠웅. 쿠우웅.

그 서슬에 심장의 박동이 한층 더 느려졌다.

참으로 비관적인 상황,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용무린의 의지는 꺾이지 않았다.

‘아니야. 그래도 나는 할 수 있어.’

심장에 깃든 도마종의 내공에 비해 터무니없을 만큼 양이 적었지만 그래도 불사신기 아닌가?

‘불사신기는 절대로 마공에 눌리지 않는다. 결코 마공 따위에 흩어지지 않는단 말이다.’

그 믿음과 불굴의 의지!

불사신기가 그 강력한 믿음과 의지에 호응했다.

화아악!

보이지 않는 힘을 얻은 듯 불사신기가 순식간에 확장하더니 그토록 거세게 밀어붙이고 짓쑤시던 도마종의 내공을 송두리째 감쌌다. 그대로 녹여 버렸다.

푸시시싯.

용무린의 귀에는 심장을 짓누르던 도마종의 내공이 녹아 없어지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과연 불사신기!’

불사신기의 가장 중요한 요체는 바로 불굴의 의지, 어떠한 일이 있어도 꺾이지 않는 투지라는 것을 다시 한 번 느끼는 순간이었다.

‘이제는 내, 외상만 다스리면 되겠구나.’

지금부터는 걱정할 것 없다.

갈가리 찢겼던 기혈과 피륙의 상처도 불사신기를 전력을 다해 운공하면 오래지 않아 회복되곤 했으니까.

반짝.

“후우우!”

긴 한숨을 내쉬며 용무린의 눈이 떠졌다.

“허허허. 다행이외다. 정말 다행이외다.”

노심초사 용무린이 눈을 뜨기만 기다리고 있던 자운진인의 얼굴에 미소가 되돌아왔다. 곧이라도 숨넘어갈 듯 창백했던 용무린의 얼굴에 회생의 빛이 번져가는 것을 확인했기 때문이었다.

“하하하. 걱정을 끼쳐 드렸네요.”

용무린은 이제 가뿐하다는 듯 마주 웃어 보였다.

갈라지고 터진 곳들이 아리고 욱신거렸지만 그대로 무시해버렸다.

‘어휴, 내 걱정 말고 먼저 몸이나 돌보시지…….’

내상이 심할 텐데 자신의 몸도 돌보지 아니한 채 주변을 뒤로 물리고 자신의 호법을 선 자운과 자영, 자성 도장들을 보자니 미안한 마음이 앞섰다.

“무탈한 모습을 보니 이제야 마음이 놓입니다.”

“허허허. 이제 마음 편히 쉴 수 있겠습니다.”

그렇게까지 대단한 사람이 아닌데 스스로의 안위보다 자신의 안위를 더 챙기는 무당파의 수뇌부들에게 마음이 쓰이지 않을 수 없었다.

“뒷정리가 얼추 되어가네요.”

태극검수들과 방건을 비롯한 정의개들이 벌써 주변을 거의 정리해가고 있었다.

안타깝게 희생당한 제자들의 주검을 잘 수습해 양지바른 곳에 모았으며 부상자들에게는 요상단을 쓴 후 응급조치에 들어갔다. 수라멸절단과 냉혈곡 마인들의 주검도 따로 모아 화장할 준비를 하는 중이었다.

“어수선하긴 하겠지만, 일단 안으로 드시죠.”

“허허허. 그럽시다, 용 대협. 할 이야기가 많긴 하지만, 일단 서로 몸을 좀 추스른 후 이야기를 나누도록 합시다.”

환하게 웃으며 일어나던 자운의 몸이 휘청거렸다.

자운의 내, 외상이 생각보다 심각했던 것이다.

“웃차.”

용무린이 잽싸게 자운진인을 부축했다.

“고맙소, 용 대협. 이리 함께하니 용 대협이 외인 같지가 않구려…….”

천기자와의 인연을 염두에 둔 말로 느껴졌다.

‘외인이지만 그 연을 생각하면 그냥 외인은 아니지.’

소림과 더불어 무당파는 용무린에게도 특별한 곳일 수밖에 없다.

“어서 들어가시죠.”

자운을 부축한 채 용무린은 냉혈곡 내부 전각으로 향했다. 자영과 자성이 조용히 그 뒤를 따랐다.

***

용무린이 운공요상에 빠져 있을 때 섬서성 일대의 무림은 용광로처럼 끓어오르고 있었다.

백리천월의 섬세한 주도로 용무린의 계획이 착착 진행되었던 것이다.

마영방에 둥지를 튼 혈수존과 음혈마가 혈교의 재림을 선포했고. 그에 호응하듯 화산파에 집결했던 정파인들이 전면전을 선포했다.

소림과 개방 그리고 백리검가의 주력이 당장에라도 들이칠 것처럼 목소리를 높였다.

물론 말만 그랬지 곧바로 실행에 옮기지는 않았다.

일부러 시간을 끌었다.

낙녕현 어귀의 평정산 일대에 있을 종남, 청성, 서문, 단목세가 등의 세력까지 집결할 시간을 벌기 위함이기도 했고 혈교가 그에 반응을 보여야 했기 때문이었다.

예상대로 청성파와 서문세가 등의 주력이 전력을 다해 섬서성을 향해 움직였다는 전갈이 왔다.

종남파만 예외였다.

낙녕현 어귀에서 겨우 마졸 몇몇을 잡아 죽이는 데 그쳤던 종남의 이인자 곽창휴는 무너져 버린 종남과 그 소식을 가지고 온 오대 제자 가량의 말에 눈이 뒤집혔다. 그대로 모든 전력을 휘몰아 종남으로 되돌아갔다.

종남이 빠지고 큰 타격을 입었던 화산 역시 동참하지 못했지만 섬서성으로 집결하는 정파 무림의 힘은 실로 무시무시할 정도였다.

소림, 개방, 백리검가, 청성, 서문세가, 단목세가의 주력들이 시시각각 집결하고 있었으니 칠십 년 전 일어났던 신마대전 이후 최대일 것이다.

“각개격파 당하기 싫으면 소굴에서 기어 나와야 할 것이다, 혈교의 마졸들아.”

“이곳에 모이는 전력이 눈에 보이지? 엇비슷하게만 맞추려고 해도 있는 힘, 없는 힘 죄다 쥐어짜야 할걸?”

“천양현 서쪽 외곽의 홍화장이라고 했지? 푸흐흐. 이미 거지들을 쫙 깔아 뒀다.”

“나오기만 해라. 빈집을 털어주마.”

백리천월을 비롯한 사람들 모두 느긋하게 혈교가 용무린이 짜둔 그물에 걸려들기만을 기다렸다.

***

쾅!

“이런 멍청한!”

혈교주 혈마 나령이 가감 없이 분노를 터뜨렸다.

화산에서 무력단체 둘을 잃어버린 것으로도 모자라 머리가 지끈거릴 만큼의 정파 무림이 몰려들고 있다는 소식 때문이었다.

“고, 고정하소서 혈마시여…….”

혈뇌가 벌벌 떨며 고개를 조아렸다.

“뭐? 고정? 고저-엉?!”

혈마 나령의 목소리가 점점 더 뾰족해졌다. 후광처럼 뿜어져 나온 피처럼 붉은 색의 기운이 두 팔로 몰려 들어갔다. 여차하면 뿌릴 기세였다.

“흥! 혈교 재림 선포 후 섬서성을 통째 집어삼킬 수 있다고 장담하더니 꼴좋군그래.”

“이제 어떻게 할 생각인가?”

“가증스런 정파 놈들이 밀려오고 있어. 빨리 대책을 내놓아야 하지 않을까?”

혈신을 받드는 대사제와 내, 외 총관들이 때를 놓치지 않고 책임추궁을 했다.

‘빌어먹을 놈들. 애초에 내 말대로 힘을 나누지 않았으면 그렇듯 허무하게 무너질 일도 없었거늘…….’

혈뇌의 가슴은 터질 것만 같았다.

전력을 둘로 나누어 화산과 종남을 동시에 공략하자는 제안을 한 사람은 대사제였기 때문이다.

‘내 말대로 화산을 시작으로 종남까지 차근차근 치고 내려왔으면 조금의 어려움은 있어도 무력단체들을 몽땅 잃는 결과까지는 안 나왔을 거란 말이야.’

그렇게 고함이라도 지를 수 있으면 좋으련만!

-빈집에 가깝다는 혈뇌의 말이 맞는다는 전제 하에 그렇게 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혈마시여.

영약하게도 대사제와 내외 총관이 그런 전제를 미리 달아두었기 때문에 그럴 수도 없었다. 예상과는 달리 용무린 때문에 화산은 빈집이 아닌 것이 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실수하면 진짜 죽는다.’

어째서 계획하는 일마다 이 모양이 되는지 알 수는 없지만 혈뇌는 살기위해, 혈교천하라고 하는 세상에서 일인지하만인지상이라는 꿈을 이루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재빨리 계산을 마친 후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안타깝지만 이보 전진을 위한 일보 후퇴, 아니 우회를 선택해야 할 듯합니다.”

“뭐야?!”

후욱. 휘스스스.

후퇴라는 말에 혈뇌를 향해 쏘아졌던 그 무엇인가가 다시금 되돌아갔다. 혈마존공의 힘이었다.

‘주, 죽을 뻔했다.’

식은 땀 한 방울이 혈뇌의 등줄기를 타고 흘렀다.

하지만 한편으로 생각하면 든든했다.

그 엄청난 기운이 순간적으로 밀려들었다가 그토록 손쉽게 거둬질 수 있다니! 그것은 곧 교주인 혈마 나령의 무위가 절대의 경지에 이르러 있다는 것을 뜻하지 않은가?

“우회라니? 자세히 설명해 봐.”

“일단 마영방에 모여 있는 본교의 주력을 정파 놈들의 시선을 피해 흩어내야 합니다.”

그 말에 대뜸 대사제가 딴죽을 걸었다.

“후퇴하자는 말이잖아!”

“후퇴는 무슨! 내 말은 혈교의 재림을 선포했으니 이제는 포교를 해야 한다는 말이오!”

“포교?”

“흐음…….”

다소 뜬금없는 말이었지만 혈신을 모시는 독특한 혈교의 입장에서 보면 구미가 당기는 말이었다.

혈마와 대사제가 흥미가 동하는 눈빛으로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거야 나쁘지 않은 생각이라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화산의 일이 의외이긴 했지만 예상했었던 것처럼 종남은 괴멸을 시켰습니다. 그 후 예정대로 마영방에 둥지를 틀고 혈교의 재림을 선포했지요.”

“계속해.”

혈마 나령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혈뇌가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여기서부터 문제입니다. 예상과 달리 화산에 진입한 본교의 주력 무력단체를 무너뜨린 놈들의 힘이라면 말이 필요 없이 마영방을 향해 달려들었어야 합니다. 종남이 괴멸 당했고 화산 역시 피해가 크니 그것이 수순입니다.”

“정파 놈들이 지금 그렇게 하려고 하지 않나?”

“금방이라도 들이칠 것처럼 몰려오고 있어! 낙녕현에 몰려 있던 놈들까지 시시각각 뭉친다던데?”

씨익.

혈뇌의 입가에 흰 선이 쭉 그어졌다. 자신만만하게 입을 열었다.

“얼핏 보면 그렇지요.”

“얼핏 보면?”

혈마의 고개가 갸우뚱 기울었다.

“그렇습니다. 제가 방금 말했듯 정상적인 상황이라면 화산을 막아낸 힘으로 선제공격을 함과 동시에 낙녕현 어귀에 뭉쳐진 놈들로 후위를 차단하며 협공하는 게 마영방에 모인 본교의 중진들을 상대하기에는 가장 좋은 방법입니다.”

“흐음.”

“하긴…….”

혈마 나령과 대사제의 고개가 동시에 끄덕여졌다.

곰곰이 생각하니 그 말이 맞았던 것이다.

“하지만 놈들은 보란 듯 떠들어대며 공격을 미루고 있습니다. 얼핏 보면 낙녕현의 힘까지 함께 모일 순간을 기다리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럼 놈들이 노리는 것은 따로 있다는 뜻?”

“노림수가 있군.”

혈마와 대사제의 눈이 동그래졌다.

무엇인가를 깨달았다는 듯 연이어 말을 쏟아냈다.

“혹시 놈들이 여길 노리나?”

“성동격서?”

기다렸다는 듯 혈뇌가 목소리를 높였다.

“바로 그겁니다. 본교가 화산과 종남이 빈집이라는 것을 알고 공격했듯, 놈들 역시 마영방을 칠 것처럼 유도해 본교에서 구원군을 증파하기를 기다리고 있다고 봐야 합니다. 텅 비어버릴 본교 총단, 즉 이곳 홍화장을 공격하기 위해서 말입니다.”

과연 아무도 몰래 혈교의 재림을 이끌어낸 혈뇌다.

용무린의 노림수를 정확히 꿰뚫어 보았다.

혈뇌는 다시 한 번 자신의 존재 이유를 증명했다. 스스로의 목숨과 혈교를 구했다.

“이런 육시할 놈들!”

“허어!”

혈마 나령이 얼굴이 한층 더 붉어졌다. 대사제는 뒤통수를 한 대 얻어맞은 것처럼 탄성을 발했다. 생각하면 할수록 혈뇌의 판단이 옳다고 느꼈던 것이다.

“그래서 마영방의 본교 중진고수들을 우회시키자는 것입니다.”

“크흐흐. 놈들의 뒤통수를 우리가 다시 쳐주자는 거지? 좋아, 말해봐.”

혈마 나령이 나직한 괴소를 흘렸다. 신이 나서 혈뇌를 재촉했다.

‘살았다.’

내심 가슴을 쓸어내린 혈뇌의 말이 이어졌다.

“본교의 숙원이었던 재림 선포는 이미 이루어졌습니다. 총단이 너무 외진 곳에 있었던 터라 세력 확장의 근거지로는 부적합해 마영방을 원했던 것인데, 굳이 작은 일에 목을 맬 필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맞는 말이었다.

재림 선포는 이미 이루어졌고 남은 것은 정파와의 피비린내 나는 싸움뿐인데 굳이 불리한 위치를 지키겠다고 위험을 자초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놈들이 이곳에서 증원군을 이끌어내기 위해 포위망을 천천히 조이고 있으니 마영방의 본교 중진고수들을 흩어내기에 오히려 좋습니다. 그러니 그렇게 흩어낸 후…….”

“크흐흐. 그래, 그게 더 좋겠다.”

“과연 혈뇌로군.”

혈뇌의 말이 이어질수록 혈마 나령의 미소가 짙어졌다. 언제나 혈뇌의 꼬투리만 잡던 대사제마저도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

용무린이 무당파와 함께 냉혈곡으로 향할 때 마영방에 진을 치고 있던 혈교의 마인들도 움직이기 시작했다.

“자시를 기해 이인 일조로 움직인다.”

“속도보다는 놈들의 감시를 피하는 것에 전력을 다해야 할 것이다.”

“목표는 명확하다. 집결지에서 보자.”

“모두 조심해라. 본교에서의 증원은 없다!”

“충!”

혈수존과 음혈마의 명령에 한 목소리로 답하는 마인들의 표정은 환했다. 지금까지는 정파연합이 언제 쳐들어올지 몰라 바짝 긴장하고 있었지만 본교에서 온 전서구로 인해 걱정을 완전히 덜어낸 것이다.

“이곳을 감시하는 거지들은 신경 쓰지 마라.”

“마음 같아서야 단숨에 목을 따주고 싶다만, 공연히 경각심을 높일 이유가 없다.”

“충!”

어느 곳에서 누가 어떤 형태로 돌아가며 감시하고 있는지 이미 다 파악하고 있다. 전투의 조짐이라도 보였다면 가장 먼저 제거할 대상이었지만 지금은 필요에 의해 그냥 두고 볼 뿐이었다.

“허드렛일꾼들에게는 평상시와 다름없이 행동하라고 전해야 한다.”

“그래야 시간을 더 벌 수 있다. 허드렛일꾼들을 최대한 이용해야 하니 이달 녹봉을 미리 지급해라.”

“충!”

그렇게 밤이 깊어 갔다.

기다리던 야반삼경 자시가 도래했다.

혈신이 돕는 것인지 짙은 밤안개가 일었다. 마영방은 물론이고 주변을 송두리째 감쌌다. 달빛마저 숨죽이듯 구름 뒤로 숨었다.

스스슷. 스슷.

조심스레 담을 넘은 혈교의 마인들은 이인 일조를 이룬 채 어디론가 떠나갔다.

“크흐흐. 멍청한 놈들.”

“어디 한 번 실컷 뒷북이나 쳐 보거라.”

혈수존과 음혈마의 으스스한 목소리를 끝으로 마영방은 텅 비었다. 하나도 남지 않고 빠져 나갔다. 약속된 미지의 장소로 향했다.

추격은 없었다.

혈교의 재림까지 선포한 마당에 몸을 뺄 것이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던 방심도 한몫했지만, 성동격서의 완성을 위해 느릿한 진격과 헐렁해진 포위망, 마지막으로 짙은 안개와 구름 속에 숨은 달도 도움을 줬다.

그렇게 해가 밝아왔다.

“뭐지? 시간이 꽤 흘렀는데 오늘은 어째 아무런 움직임이 없네?”

“새끼들, 다들 늦잠 쳐 자나?”

다소 먼 위치에서 마영방을 감시하던 정의개들이 자꾸만 고개를 갸웃거렸다. 동이 터오기가 무섭게 활동을 개시하던 평소와 너무 상반된 고요함 때문이었다.

“뭐, 별 일 있겠어?”

“하긴, 기껏 해봐야 저마다 숙소에 처박혀 내공 수련이나 하고 있겠지.”

그렇게 생각하고 말았던 것이 첫 번째 실책이었다.

슬슬 태양이 머리 위까지 올랐는데도 불구하고 허드렛일꾼들만 보이고 있음에도 주저한 것이 두 번째 실책이다.

“아침식사 차렸을 때도 그러더니 점심나절 다 됐는데 또 그러네?”

“그러게 말이야. 분명히 밥 짓는 연기랑 요리 냄새는 나는데 왜 처먹으러 나오는 놈들이 없지?”

수뇌부야 주방찬모나 수하들이 가져다 줄 수도 있겠지만 수뇌부를 제외하면 모두 식당으로 몰려들어야 맞다.

하지만 아무도 움직이는 마졸들이 없었다.

너무나 이상했다. 이쯤 되면 보고와 함께 안으로 직접 들어가 살펴보거나 시비를 비롯한 허드렛일꾼들을 탐문하는 수밖에 없다.

“특별 내공수련을 하나?”

“그럴 수도 있긴 한데…….”

정의개 한 사람이 말꼬리를 늘였다.

곁에 있던 정의개 역시 마찬가지 심정이라는 듯 말을 바꾸었다.

“역시 찜찜하지?”

“응.”

“들어가 볼까?”

“……!”

그것이 정답이었지만 누구도 먼저 그러자고 말하지 못했다. 자칫 잘못하면 그대로 목이 달아난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더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탐문 정도가 괜찮겠지?”

“주방일 하는 아낙네나 허드렛일꾼들은 어때?”

동병상련이었다.

피식. 씨익.

두 정의개는 멋쩍은 듯 서로를 향해 싱겁게 웃었다.

나름 현명한 판단이었다.

피에 미친 혈교라고는 하지만 재림을 선포한 이상 세를 늘려야 했고 그러기 위해서는 양민들까지 닥치는 대로 죽일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그거 좋은 생각이네.”

“그렇지?”

“응. 주방일 하는 아낙이나 일꾼들에게 물어보자.”

“좋아!”

자신들이 허드렛일까지 뭐든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으니 성남현 주변에서 주방일과 허드렛일을 도맡아 해줄 사람들을 구할 수밖에 없었고 마영방 시절부터 드나들었던 사람들이 다시 모였던 것이다.

“시간아 어서 가라.”

“그래, 빨리 좀 가라.”

두 정의개는 그렇게 날이 저물기만을 기다렸다.

그것이 마지막 세 번째 실책.

해가 기울어 주방 일을 보던 아낙네와 허드렛일꾼들이 돌아가기 위해 마영방을 나섰을 때…….

“무사님들이요?”

“아침부터 한 분도 안 뵈던뎁쇼?”

“월봉도 미리 받았겠다, 식사는 저희들 먹으려고 지은 것입니다요.”

“저희도 먹고는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요?”

철렁!

그따위 말을 듣게 된 두 정의개는 심장이 내려앉는 소리를 귀로 들을 수 있었다.

“마, 망했다.”

“허어!”

탄식도 잠시, 두 정의개는 와다닥 달려 마영방에 진입했다. 불에 불을 켜고 마영방 곳곳을 뒤졌다.

휘잉.

하지만 두 정의개를 맞아주는 것은 텅 빈 공간과 싸늘한 바람뿐이었다.

***

사흘이라는 시간이 훌쩍 지났다.

그 시간 내내 불사신기를 통한 운공요상에 빠져들어 있던 용무린의 눈이 떠졌다.

“흠, 기경팔맥은 이상 없고……. 남은 것은 피륙의 상처뿐인가?”

역시 불사신기였다.

도마종의 도강에 찢기고 뭉개졌던 혈맥과 혈도들이 언제 그랬느냐 싶게 이어졌다. 아니, 도마종의 내공에 당한 것이 자존심이라도 상했는지 전보다 더욱 강해진 느낌이었다.

“외상은 이제 시간문제일 뿐이로구나.”

이 정도라면 다시 달려도 충분했다. 쉼 없이 섬서성을 향해 신법을 전개해도 무리가 없으리라.

‘혈교 쪽은 어떻게 되었을까?’

냉혈곡이 비록 외진 곳이지만 방건이 함께 있으니 어쩌면 지금쯤 연락이 도착해 있을지도 모른다.

용무린은 성큼 밖으로 나섰다.

“어? 용 대협!”

붕대로 이마와 복부를 감은 채 태극검수들과 담소를 나누던 방건이 용무린을 발견했다. 신나게 달려왔다. 다짜고짜 엄지를 척 들어 보였다.

“이야, 용 대협! 최고야, 최고.”

“뭐가?”

“도마종이라는 괴물의 팔 하나를 날름 잡쉈다며? 그것으로도 모자라 권마종의 팔도 마구 썰어 버렸다던데? 크으, 멋지다. 정말 멋져.”

추켜세운 엄지를 연신 흔드는 방건의 얼굴은 방심이 흔들린 사춘기 소녀의 그것과 닮아 있었다.

“우와! 용 대협께서 드디어 밖으로 나오셨다.”

“도마종과 권마종을 동시에 밀어냈다지?”

“정말 대단하신 분이야.”

주변의 있던 태극검수나 무당파 제자들의 경외감이나 동경과는 그 격이 달랐다. 눈빛이 너무 초롱초롱했다. 솔직히 부담스러웠다.

“싱겁긴. 운이 좋았을 뿐이야.”

“운? 도마종과 권마종을 싸잡아 눌렀는데 그게 어떻게 운이야?”

본인이 겸손한데 방건이 오히려 목에 핏대를 세웠다.

“운이라는 건 말이야, 용 대협에게 잃어버렸던 가전무공들을 되돌려 받았던 무림맹의 특무순찰조장들에게나 해당이 되는 말이라고!”

말을 잇는 방건의 눈이 까닭모를 기대감으로 반짝반짝 빛이 났다.

용무린은 대뜸 그 의미를 알아차렸다.

‘결론은 그것이었군.’

그들처럼 혹여 자신에게도 무엇인가를 줄 수 있느냐는 간절한 눈빛과 기대감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하지만 밉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비룡문을 지켜주려 찾아와 준 사람이기도 했거니와 벽소추와 함께 했던 여러 일들 또한 있었으니까.

‘있으면 주지 뭐.’

벽소추나 방건, 백리천월에게 그 정도가 아까울 리 없다.

“쫌 기다려봐. 뭔가 쓸 만한 것이 떠오르면 잊지 않고 알려줄게.”

“정말? 그거 정말이지? 약속하는 거다?”

“계속 그렇게 설레발치면 입 싹 씻어 버릴 테니까 어디 한 번 계속해봐.”

“떱!”

방건이 멀쩡한 왼손으로 자신의 입을 틀어막았다.

“됐고, 섬서성에서 뭐 연락 온 건 없어?”

“섬서성?”

방건의 얼굴이 묘해졌다.

‘뭔가 있구나.’

“빨리 말해. 뭐야?”

숨길 일도 아니고 숨긴다고 해도 어차피 용무린은 알게 된다. 방건은 냉큼 사실대로 털어 놓았다.

“그게 말이지…….”

“……!”

방건의 말이 이어짐에 따라 용무린의 얼굴은 시시각각 변했다. 혈뇌가 대뜸 용무린의 내심을 읽었듯 용무린 역시 혈뇌의 마음을 읽었기 때문이었다.

‘젠장. 혈교에 바보들만 있는 것은 아니라 이거네?’

소리 소문 없이 빠져나간 것이 좋은 증거다.

그러지 않았다면 혈교 총단에서 고수들을 확충해 마영방에서 일전을 겨뤘으리라.

‘집결되고 있는 정파에 대항해 힘겨루기를 하기보다는 보다 먼 미래를 생각해 장기전으로 갈 생각이겠지?’

그것도 그것이지만 이곳저곳 마구 치고 다닐 것이라는 생각이 번득 들었다.

그 첫 번째 목표를 찾아야만 했다.

그래야만 피해를 줄일 수 있다.

‘그곳이 어딜까? 나라면 다음 목표로 어느 곳을 노릴까?’

용무린의 머리가 무서운 속도로 회전했다.

상대방의 입장에 서서 생각했다. 가장 쉽고 안전한 먹잇감을 고르기 시작했다.

반짝!

오래지 않아 용무린의 눈이 빛을 발했다.

가장 가능성이 높은 곳 한 곳을 짚어낸 것이다.

“청성…….”

“응? 청성이 뭐?”

방건이 동그란 눈으로 물었지만 용무린은 대답대신 반문을 했다.

“자운진인께서는 지금 어디 계셔?”

“날 따라와.”

심상치 않은 느낌이 들었는지 방건은 즉시 앞장섰다.

자운진인과 자영, 자성도장을 비롯해 무당파 수뇌부가 기거하는 곳을 찾은 용무린은 방건에게 들었던 정보를 토대로 세운 자신의 의견을 밝혔다.

“허어, 청성이 위험하다니!”

“개방으로부터 받은 전서를 읽고 그렇지 않아도 뭔가 찜찜하던 참이었소이다.”

“그런데 용 대협의 말씀을 들으니 확실히 알겠구려.”

“혈교는 전면전의 위험을 피해 장기전을 벌일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려.”

자운진인은 침묵 속에 생각을 정리하고 있었고 자영과 자성을 비롯한 무당의 수뇌부들은 하나 같이 깊은 우려를 표했다.

용무린이 짚어준 청성의 환난이 눈에 보이는 듯했다.

청성 역시 이인자인 서금도장이 전력의 태반을 이끌고 낙녕현에 있었으니 화산이나 종남과 다르지 않다. 빈집이나 다름이 없었던 것이다.

혈교의 정보망이 조금만 가동되었어도 그 사실을 알 것이고 입장을 바꿔보면 자신 같아도 청성을 노릴 것이라고 생각되어졌다.

“섬서성과 이곳 냉혈곡과의 거리를 감안하면 시간이 없습니다. 지금 당장 청성에 경고를 해줘야만 합니다. 그래야 종남과 같은 참사를 피할 수 있습니다.”

“알았어. 내가 지금 당장 조치를 취할게.”

방건이 즉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밖을 향해 성큼 걸음을 내디뎠다.

“그 망할 놈의 뇌화탄이 또 나올 거야. 화산에서 내가 어떻게 대처했는지 알지? 대처법도 알려줘야만 해.”

“맡겨 둬!”

염려 말라는 듯 큰 소리로 대답한 방건이 문 밖으로 사라졌다.

“저도 그만 일어나 보겠습니다.”

용무린도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두 손을 정중히 앞에 모은 후 하직인사를 했다.

“용 대협께서 직접 청성으로 가시려는 게요?”

“이런! 아직 우리들은 중론도 모으지 못했는데…….”

“잠시만 더 있다가 중론을 모은 후 함께 움직이는 것이 좋을 듯하외다.”

자영과 자성을 비롯한 무당파의 수뇌부들이 용무린의 움직임을 완곡히 만류했다. 아직 많은 수의 제자들이 부상을 회복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용무린의 태도는 변함이 없었다.

“아닙니다. 한시가 급하니 저라도 먼저 출발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렇게 말을 하면서도 용무린은 스스로가 많이 변했다는 것을 인지했다.

‘거 참, 화운장로님이 화산파를 도와야 하니 화음현으로 와 달라는 전언을 보냈을 때는 듣자마자 내가 왜? 라고 했었는데…….’

그런데 지금은 누가 먼저 등을 떠밀지도 않았는데 스스로 알아서 일어서고 있다!

‘이것 역시 절대검신 독고황의 영향인가?’

아무래도 그런 듯싶다.

‘에잇, 몰라. 그러거나 말거나 일단 내 마음이 그렇게 움직이는 걸 어쩌라고!’

마음이 이미 결정을 내렸다.

‘흑야방의 일로 시작해 혈교 놈들과는 엮인 게 좀 있으니 청성까지는 해결하는 게 좋아!’

말도 뱉었다.

그렇다면 남은 것은 행동뿐이다.

“그러면…….”

마지막으로 두 손을 모아 보인 후 용무린은 몸을 돌렸다. 성큼 발을 내디뎠다.

“용 대협!”

내내 아무런 말이 없던 자운진인이 용무린을 불렀다.

“예?”

다른 사람도 아닌 무당의 장문 자운이다.

침묵을 깨고 사람이 불렀을 때는 그만한 이유가 있으리라 짐작한 용무린이 몸을 돌려 세웠다.

“이보 전진을 위한 일보 후퇴라는 말의 의미를 아시오?”

모를 리가 있나?

‘지금 왜 저런 말을 하는 것이지?’

나보고 지금 청성으로 가지 말라는 걸까?

‘대체 왜?’

그 이유가 궁금했다.

“아니, 이 경우에는 후퇴가 아니라 우회라고 해야 하겠구려…….”

“말씀하시지요.”

용무린이 자세를 바로 했다. 자운진인의 입에서 생각지도 못했던 말이 흘러나왔다.

“용 대협께서 무림의 모든 환난을 홀로 다 감당할 수 있다 생각하시오?”

“예?”

용무린의 눈이 동그래졌다.

단 한 번도 생각해보지도 못했던 너무나 뜻밖의 말이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가겠소이다. 우리 무당이 청성을 돕기 위해 움직이겠단 말이외다.”

“허허허. 옳으신 결정입니다, 장문인.”

“껄껄껄. 청성은 같은 도가의 맹방, 의당 그래야지요.”

“그 말씀만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자영과 자성을 비롯한 무당파의 수뇌부들이 웃음으로 자운의 결정을 반겼다.

과연 남존무당이라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냉혈곡의 일로 많은 제자들을 잃었음에도 불구하고 저렇듯 주저 없이 다시 나서다니!

“물론 시간이 촉박하니 수뇌부들과 태극검수들 중 부상의 정도가 심하지 않은 사람들만 선별해 갈 것이오.”

하지만 그 정도만으로도 충분하리라.

지금 이 자리에는 무당칠협 중 사 인이 있었고 칠십이 암묘의 주인들 중 절반과 팔궁이관의 주인들 역시 있었으니까.

“반나절의 여유만 있으면 충분할 것이라 생각하오. 왜냐하면 내가 지닌 자소단을 풀 생각이기 때문이오.”

“장문사형!”

“장문인! 그것은…….”

자소단까지 풀 것이라는 자운의 말에 자영과 자성이 화들짝 놀랐다.

자소단은 무당파에서도 성약으로 취급 받는 영단으로 재료의 희귀함으로 인해 십 년에서 이십 년 정도에 겨우 열 알 남짓 만들 수 있는 귀물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자운진인은 단호했다.

만년거암 같은 태도로 자신의 의사를 분명히 했다.

“혈교와 같은 마졸들을 상대하러 가는 길, 그깟 자소단을 아껴 무엇 하리! 다만 두 개밖에는 없으니 물에 희석해야 한다는 점이 안타까울 뿐!”

부상자는 아직도 많고 내상을 완전히 회복하지 못한 수뇌부도 상당수였다. 하지만 자소단을 쓴다면 단숨에 극복할 수 있다. 물에 희석한다고는 해도 천하의 영단으로 추앙받는 자소단이었기 때문이었다.

‘대체 왜 이렇게까지 하시는 거지?’

용무린은 자운의 내심이 궁금하기만 했다.

영문을 알 수 없어 눈만 동그랗게 뜨고 있는 사이 자운진인은 품속에서 작은 목갑 두 개를 꺼냈다.

무당파를 대표하는 영단 자소단이었다.

“받으시게, 사제.”

“예, 장문사형.”

“명을 따릅니다.”

자영과 자성이 공손히 자소단을 받아들었다.

“지금 당장 물에 희석해서 골고루 나누시게. 아직 내상을 완전히 회복하지 못한 사람들이 많을 게야.”

“그렇게 하겠습니다.”

“심려치 마십시오, 장문사형.”

자영과 자성이 공손한 태도로 밖으로 나섰다.

자운진인이 좌중을 쓸어 보았다.

“자, 이제 다들 준비를 해야 할 것이외다. 시간이 반나절밖에 없으니 청성으로 출정하실 분들은 최선을 다해 내상을 다스려야 할 것이오.”

“장문인의 명을 따르오!”

“명을 따릅니다.”

뭇 수뇌부가 공손히 답을 했다. 일제히 고개를 숙여 보인 후 밖으로 나섰다.

“……!”

그동안 용무린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한 채 지켜보고만 있었다. 한 가지 짐작이 가는 바가 있었지만 섣불리 입을 열 수 없어 잠자코 자운의 말을 기다렸다.

용무린을 향해 시선을 돌린 자운이 빙그레 웃었다.

불쑥 입을 열었다.

“양의신공!”

‘역시 그것인가?’

천기자를 생각하면 자운진인이 그 사실을 알고 있는 게 어쩌면 당연한 일이기도 했다.

“알고 계셨군요.”

“……!”

자운진인의 고개가 천천히 끄덕여졌다.

용무린은 내심 고함을 질렀다.

‘에잇, 훔친 것도 아닌데 뭐가 어때서? 천기자가 줬잖아, 천기자가!’

혹여 내놓으라고 하면 배 째라고 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자운진인은 계속해서 상상 밖의 말만 이었다.

“도마종을 상대할 당시 생사를 헤맬 정도로 위급했던 것을 잘 알고 있소이다, 용 대협. 허허허. 빈도 역시 마찬가지이기는 했소이다만…….”

잔잔히 맺혔던 미소가 사라지더니 엄한 표정이 되었다.

용무린의 눈을 똑바로 들여다보며 무거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역천자를 상대해야 할 용 대협이 일개 마종을 상대로 목숨이 위태롭다니! 무림, 아니 억조창생을 위해서도 더는 그런 일은 없어야 하오. 이보 전진을 위해 용 대협은 우회를 하시오. 지금 즉시 양의신공을 익혀야 할 것이오.”

역천자라는 말까지 알고 있다니!

“그 말씀은……?”

자운진인이 다시 환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여보였다.

“그렇소. 무당파의 장문인으로서 용 대협이 양의신공을 익히는 것을 허락하는 바요.”

씨익.

용무린의 입가에 절로 시원한 미소가 걸렸다.

“감사합니다.”

감사인사 후 한차례 짓궂게 웃어 보인 용무린은 자신의 내심을 적나라하게 밝혔다.

“사실, 안된다고 해도 그냥 익히려고 했어요.”

“허허허. 그럴 줄 알고 있었소이다.”

웃음 뒤 자운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무엇인가를 가늠하는 듯 고개를 끄덕이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도마종과 권마종을 그대로 살려 보낸 이유가 바로 양의신공이 완전하지 않기 때문일 터, 더 늦기 전에 양의신공을 이루시오. 적어도 분심의 벽을 자유자재로 세워 어느 한 쪽만이라도 마음먹은 대로 가릴 수 있어야만 할 것이오.”

이번에는 정말 놀랐다.

‘어느 한 쪽만이라도 가릴 수 있어야만 한다고? 그, 그 말은 곧……?’

자운진인의 말은 한 가지를 뜻한다.

바로 자신의 상태를 정확히 꿰뚫어 보고 있는 것!

다시 말해 용무린이 절대검신 독고황과 신마 진무량의 의식 사이에 생긴 괴리감 때문에 퇴보를 겪고 있음을 알고 있다는 뜻이다.

‘그것도 천기자가 알려준 것일까?’

그것밖에는 답이 없다.

“양의신공은 깨달음의 무공, 어찌 보면 태극혜검보다도 더 난해한 무공이지만 용 대협이라면 가능할 것이오. 적어도 분심의 벽을 자유자재로 세워 어느 한 쪽을 마음먹은 대로 가리는 일쯤은 단시일에 이룰 수 있을 것이외다.”

자운진인은 지그시 눈을 감았다. 현기 가득한 목소리를 이었다.

“인연이 닿질 않아 빈도조차 익히지 못한 것이 양의신공, 하나 만류는 귀종인 법! 무극에서 음양이 나온 것과 분심의 벽으로 마음을 나누는 양의신공이 어찌 다를까? 태극은 그 자체로 분절이요 분절은 섞이지 않음이니 그러기 위해서는…….”

“……!”

용무린의 눈이 동그래졌다.

‘이, 이것은?

양의신공과 비슷하지만 전혀 다른 구결, 아니 주해!

정체가 무엇인지 단숨에 알 수 있었다.

‘태극혜검이다!’

용무린은 즉시 눈을 감았다. 전력을 다해 자운진인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서로가 서로에게 벽으로 작용하게 될지니 이것을 분절이라 한다. 분절로 인해 비로소 제각각의 완전한 자유가 생성되니 이를 음과 양이라 하며…….”

자운진인의 말이 계속해서 이어졌다.

지금껏 자신이 익히고 깨달아 온 태극혜검의 구결과 그 무리를 장문제자에게 전수하듯 친절하게 풀어서 설명하고 양의신공으로 예를 들었다.

그렇게 하길 무려 세 번.

아직 자신의 장문제자인 청영도장에게도 전수하지 않은 깨달음이었지만 용무린의 대공을 위해 아낌없이 베풀었다. 송두리째 건넸다.

“……!”

용무린은 오래지 않아 깊은 삼매에 들었다.

무극에서 태어나 태극으로 진화된 두 가지 무리, 태극혜검과 양의신공을 탐닉했다.

삼매에 든 용무린을 바라보며 자운진인은 환하게 웃었다.

‘허허허, 부디 사숙조라 부르지 못하는 못난 제자를 혜량하시길…….’

천기자는 자신에게 있어 하늘과 같은 사조였다.

그런 천기자와 함께 교분을 나누며 무당파와도 깊은 왕래를 했던 절대검신 독고황 역시 같은 배분, 절대검신이 무당의 검수들에게 끼친 영향과 가르침은 결코 작지 않다.

‘하지만 그것은 이미 지나간 인연…….’

새 술은 언제나 새 항아리에 담기는 법이다.

‘부디 대공을 이루시길!’

삼매에 든 용무린을 향해 공손히 포권을 취해 보인 자운은 이내 조용히 일어나 밖으로 향했다.

자운진인의 예상대로 반나절 만에 모든 준비가 끝났다.

물에 희석되긴 했지만 자소단 두 알의 위력은 대단한 것이어서 사흘 동안 채 치유하지 못했던 수뇌부들의 내상을 거의 모두 다스릴 수 있었다.

자운진인을 선두로 무당파의 수뇌부와 태극검수들은 청성을 향해 길을 떠났다.

부상이 심한 대부분의 제자들은 화장을 치른 동문사형제들의 뼛가루를 고이 모시고 무당산을 향해 돌아갔다.

방건과 몇몇 정의개 그리고 이제야 겨우 죽이나 떠먹을 수 있을 정도가 된 의성 신우량만이 냉혈곡에 남아 용무린의 눈이 떠지길 기다렸다.

***

방건이 날린 전서구는 불과 이틀 만에 청성파와 섬서성의 서금도장 손에 도착했다.

빈집이나 다름없는 곳을 지키던 청성파 장문인 서학은 제자들을 독려해 전투준비로 법석을 떨었다.

그 즉시 향화객들의 입산을 막았으며 인근 현에 내려간 제자들을 불러 모았다. 무기를 점검하고 중요 봉우리에 보초를 세웠다.

청성의 전력 태반을 이끌고 나선 서금도장 역시 성남현의 마영방을 향해 이동하다 연락을 받고는 부리나케 청성의 무인들을 되돌렸다.

“전력을 다해 신법을 펼쳐라! 본산이 위험하다!”

제자들을 다그쳐 청성산을 향해 신법을 펼쳤다.

그러다 문득 이대로는 안 되겠다고 생각했는지 전력을 둘로 나누었다.

전공을 세워 차기 장문인에 오를 욕망이야 변함이 없었지만 그의 본질은 청성의 검수, 본산의 위기는 전혀 다른 문제였다.

“이러다가는 늦는다. 수뇌부들과 청운검수, 백운검수들이라도 먼저 가야 하겠다.”

모든 제자들을 이끌고 가느라 시간을 맞추지 못하느니 차라리 이 편이 더 낫다고 생각했다.

“명을 따릅니다.”

본산을 생각하는 마음은 다들 같은지 한 목소리로 답했다.

그 즉시 전력을 둘로 나누었다. 전력을 다해 청성으로 내달렸다.

***

청성이 위급하다는 소식은 사천의 또 다른 명문인 당가와 아미파에게도 전해졌다.

사천당가의 가주실.

도착한 전서로 인해 격론이 한창이었다.

“흥! 부맹주를 등에 업은 채 온갖 이권에 개입했던 놈들 아니던가?”

“꼴좋게 되지 않았습니까, 가주님.”

“그렇습니다. 같은 무림맹에 소속되어 있기는 하지만 그간의 행실을 생각하면 우리가 굳이 나설 필요가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저 역시 같은 생각입니다. 청성 따위 이참에 혼 좀 나봐야 합니다.”

물론 순망치한의 고사를 모르는 것은 아니다.

혈교의 마졸들이 빈집이나 다름없는 청성을 무너뜨린 후 어디로 튈지 모른다. 다음 먹잇감으로 당가를 생각할 수도 있는 일이었다.

반짝!

가주 당현의 눈에서 불똥이 튀었다. 순망치한 이전에 그동안 너무 빈정 상했던 것이다.

“흥! 겨우 오백여 명 남짓이라고 했지?”

“맞습니다. 종남의 마지막 생존자인 오대 제자 말을 빌자면 그것이 전부라고 합니다.”

불끈!

당현의 주먹에 힘이 실렸다. 자신 만만하게 외쳤다.

“그 정도 힘으로 본가를 넘볼 수는 없을 터! 우리는 이 기회에 청성의 교만이 한풀 꺾이기를 기다린다.”

살려달라고 애원하면 못이기는 척 들어줄 생각이었다.

당연히 그간 부맹주였던 옥풍을 등에 업고 갖은 위세를 떨며 챙겼던 이권 몇을 회수하는 조건에 승낙해야만 들어줄 것이다.

“하하하. 그것 참 좋은 생각입니다!”

“찬성입니다.”

당가는 만장일치로 모른 체할 것을 결정했다.

따지고 보면 이 결정도 마교의 작품이다.

옥풍이나 서보도장의 헛된 욕망이 혈고로 인했던 것이었으니 크게 틀리지 않을 것이다.

물론 당가 역시 그런 사실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어쨌거나 정사 중간으로 취급받으며 알게 모르게 배척당해왔던 당가는 자신들도 모르게 생긴 깊은 마음의 상처를 단숨에 뛰어넘을 수 없었다.

그러나 사천의 또 다른 명문대파인 아미는 조금 달랐다.

전서를 받기가 무섭게 떨쳐 일어났다.

“제마는 불가의 임무 아니던가? 비록 불가와는 다른 길을 걷는 도문이기는 하지만 청성이 그간 무림에 공헌한 일은 결코 적지 않다. 산문을 활짝 열어라, 아미여. 혈교의 마인들을 제압하라.”

아미의 장문인인 보상신니의 일갈에 즉시 선발대의 면면이 결정되었다.

보상신니의 장문제자이자 계율원주인 보현을 책임자로 아미파의 대표적인 무승들인 복호승 오십 명과 멸절승 오십 명, 그리고 무사부들과 일대제자 오십 명을 선발했다.

속가제자임에도 불구하고 복호사에서 계율원주인 보현의 직접적인 가르침을 받던 백리소옥이 선발대에 속한 것만이 의외였다.

하지만 예상과는 다르게 빠른 출발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불가의 색채와 속가의 색채를 함께 지니고 있는 것이 아미파인데, 복호승과 멸절승들은 평상시 속가의 법도에 따라 제각각 제자들을 거느리고 아미산 곳곳에 흩어져 수련을 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들을 모두 한 자리에 불러 모으는 일에 허비한 시간을 제외하면 아미파의 결정과 행동은 단호했다.

모이는 즉시 차비를 갖추고 청성을 향해 출발했다.

***

무심한 것이 시간이다.

청성의 태상장로 서금도장이 이끄는 선발대가 아직 도착하기도 전에, 무당파나 아미파의 원군이 도착하기도 전에 혈교의 마인들이 청성산에 먼저 도착했다.

“크흐흐. 왔는가?”

“혹여 시간을 맞추지 못할까 봐 걱정했네. 종남에서 뇌화탄을 거의 다 사용해서 말이지.”

혈교 중진 고수들을 이끄는 혈수존과 음혈마가 같은 반열의 마인들을 반겼다.

뇌화탄의 수급과 정파 분탕질을 위해 본교에서 은밀히 파견 나온 귀혈마와 혈살마군, 그리고 대사제 직속 호위대 십 인이었다.

“크크큭. 이런 기회를 놓칠 리가 있나?”

“푸흐흐. 오래 살다 보니 청성의 말코 놈들을 밟아 줄 기회도 다 얻게 되는구먼.”

귀혈마와 혈살마군이 살기 가득한 눈으로 웃었다.

청성산을 슥 바라본 후 혈수존과 음혈마에게 혈뇌의 말을 전달했다.

“잘 알고 있겠지만 굳이 청성의 전멸을 노릴 필요까지는 없네.”

“우리의 목표는 어디까지나 분탕질이야.”

혈수존과 음혈마가 고개를 끄덕였다.

“잘 알고 있네. 우리가 최대한 정파 놈들을 휘저어 놓아야만 본교의 숨통이 트인다는 것을…….”

“염려 말게. 최대한 빠르게 치고 빠질 터이니 항상 준비해두라고 이미 다 알려 두었네.”

“길게 말할 필요가 없어 편하군.”

“자, 그러면 이제 재미를 볼 시간인가?”

타닷. 휘슷.

말이 끝나기 무섭게 청성산을 향해 신법을 펼쳤다.

“좋지!”

“놀아 보자고!”

혈수존과 음혈마가 그 뒤를 따랐다.

타다닷. 스스스스슷.

혈교의 중진 고수들로 이뤄진 마인들이 청성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

땡땡땡땡땡!

청성산에 종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서학도장이 청성산 봉우리에 미리 배치시켜둔 제자들이 짓쳐드는 혈교의 마인들을 발견했던 것이다.

당연히 본산이 발칵 뒤집혔다.

“혈교의 마인들이다! 제자들은 모두 나서라!”

“건곤대라진을 펼쳐라!”

“진법을 중심으로 이인 일조를 이뤄 대처한다.”

천금 같은 시간동안 준비한 방어진이다.

하지만 서금도장과 함께 빠져나간 전력의 공백은 너무나도 컸다. 아무리 효율적으로 배치했어도 허술했다. 곳곳에 빈공간이 보였다.

“크흐흐! 시건방진 말코 놈들!”

“다 죽어버려-엇!”

패애액. 쌔액. 촤촤촥.

스각.

“커헉!”

푹푹푹.

“크아악!”

혈교 마인들의 거침없는 손속에 청성의 제자들은 허무하게 쓰러져 갔다.

“건곤대라진은 전면으로 나서라!”

“모두 진법 뒤로 숨어 보조에 주력하라.”

“힘을 내라. 조금만 더 버티면 사형제들이 우리를 구하기 위해 와줄 것이다.”

서학도장을 비롯한 청성의 수뇌부들은 최선을 다해 용병술을 발휘했다.

하지만 용무린이 알려준 대처법을 염두에 두지 않았던 것이 가장 큰 실책이었다. 진법을 중심으로 한곳에 뭉쳐버린 먹잇감을 놓칠 혈교가 아니었다.

“쓸어 버렷!”

“던져!”

치이이. 치이이. 후욱. 후욱.

대뜸 십여 발의 뇌화탄이 건곤대라진과 그 주변으로 날아들었다.

“어헉!”

“뇌, 뇌화탄이다.”

그제야 실수를 깨닫고 고함을 질러 보았지만 이미 너무 늦었다.

버언쩌저적. 쿠와아앙. 콰아앙. 쿠콰콰쾅.

뇌화탄의 엄청난 파괴력에 건곤대라진법은 단숨에 깨어졌다. 와르르 쓸려 나갔다.

“크아악!”

“커억!”

비명이라도 지르고 있는 제자들은 그나마 운이 좋았다.

폭발력에 휘말려 비명 한 번 질러보지 못하고 그대로 죽어나간 제자들만 해도 벌써 백여 명에 달했다.

덜덜덜.

“어, 어떻게 이런…….”

청성의 장문인 서학도장의 몸이 저절로 떨렸다.

분노 때문일까? 두려움 때문일까?

쿠와앙. 콰아앙.

계속해서 뇌화탄이 터졌다. 청성의 검수들이 뭉쳐 있는 곳만 눈에 보였다 하면 곧바로 굉음이 터졌다.

“흐, 흩어져!”

“뭉치지 마라! 뇌화탄의 먹이가 된다.”

몇몇 수뇌부들이 대응책이랍시고 내놓았다.

“크흐흐. 손맛을 볼 시간인가?”

“쳐라!”

흩어진 검수들은 더욱 좋은 먹잇감이 될 뿐이었다.

득달같이 달려든 혈교 마인들 손에 몇 수 대항해 보지도 못한 채 쓰러져갔다. 기본적인 무력의 차이가 너무나 크기 때문이었다.

청성산에 오른 혈교 마인들은 모두가 혈교의 중진들로 이뤄진 고수들, 개개인의 무력은 화산의 태극검수에 준할 정도이니 더 말해 무엇하랴?

차차창. 스각.

“컥!”

패애액. 서걱.

“허억!”

죽어 나자빠지는 거의 대부분의 사람이 청성의 제자들이었다. 반면에 혈교 마인들은 거의 수십 명에 하나 쓰러질까 말까다. 학살이었다.

“으아아-아!”

청성의 장문 서학도장이 피눈물을 뿌리며 달려들었다.

쩌러렁.

웅장한 울림과 함께 구름을 닮은 검강 덩어리가 확 튀어 나왔다. 전면을 휩쓸었다. 청성을 대표하는 검법인 청운적하검법이었다.

“크아악!”

“커헉!”

혈교의 마인 서너 명이 한꺼번에 쓰러졌다.

“이 악적들!”

“태상노군께서 결코 용서치 않을 것이다-아!”

몇 남지 않은 수뇌부들이 용기백배해 맹위를 떨쳤다.

칠십이파검법과 청풍검법, 벽운도법을 펼쳐 혈교 마인들의 한 축을 들쑤셨다.

“큽!”

“커흐…….”

요란한 비명을 흘리며 혈교 마인들 서너 명이 한꺼번에 쓰러졌지만 그것으로 끝이었다.

스슷. 스스슷.

장문인 서학을 비롯한 수뇌부들 앞을 감히 함부로 움직일 수 없는 위압감을 뿌리는 몇몇 사내가 가로막아 섰기 때문이었다.

“크흐흐. 파닥파닥한 것이 제법 손맛이 있겠구나.”

“저놈은 내 거야.”

“그러면 나는 저 도법을 펼치는 놈을 맡지.”

“시간 없어. 아무나 맡아. 나는 저 말코를 상대하지.”

스파앙.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짓쳐든 혈수존의 손이 장문인 서학도장을 쳐갔다.

번쩍. 콰르르르.

팔목 어림까지 피처럼 붉게 물든 혈수존의 손에서 혈옥강기가 쏟아졌다.

“하앗!”

“차아아!”

음혈마와 귀혈존, 혈살마존도 제각각 상대를 찾아 공격을 개시했다.

“오라!”

“악적들!”

서학과 수뇌부들도 물러서지 않았다. 전력을 다해 검을 부딪혀갔다.

콰앙. 쾅쾅쾅. 파파팡.

하지만 몇 수 지나지 않아 형편없이 뒤로 밀렸다.

그동안 온갖 이권에 개입해 단물을 취하느라 무공수련을 등한시했기 때문이었다.

***

반짝!

내내 감겨 있던 용무린의 눈이 떠졌다.

그동안 아무것도 입에 대지도 않았기 때문에 얼굴이 홀쭉해질 정도였지만 표정만은 밝았다.

‘목표까지는 이룬 것인가?’

양의신공이 말하는 분심의 벽!

무극에서 음과 양이 나오듯 한 마음에서 두 마음이 나오도록 해주는 근본!

‘어디 한 번 시험해볼까?’

용무린은 즉시 양의신공의 구결을 떠올렸다.

용무린이라고 하는 자아의식 가운데 가상이지만 분명히 실존하는 분심의 벽을 만들어 세웠다.

‘먼저 신마를 가린다.’

분심의 벽으로 신마 진무량의 의식을 가렸다.

그러자 절대검신 독고황으로서의 자의식이 오롯이 분명해졌다. 벽 넘어 신마 진무량이 있음을 인지하긴 하지만 그의 존재감은 한 점도 느껴지지 않았다.

‘어디…….’

용무린은 자리에서 일어나 풍뢰를 뽑아들었다.

신마의 무기를 뽑아 들었기 때문에 예전 같았다면 신마로서의 자의식이 득달같이 몰려나와야 정상이련만 그런 기미조차 없었다.

‘불사대천검!’

수련은 고사하고 지금껏 단 일 검도 그어내려 본 적도 없는 불사대천검의 구결을 떠올렸다.

천천히 풍뢰를 들어 올린 후 불사대천검의 첫 동작을 풍뢰를 통해 구현해 보았다. 들어 올린 풍뢰를 구결에 따라 천천히 내려 그었다.

바로 그 순간,

후우우우-웅.

순간적으로 하늘과 땅에서 추측하기 어려운 기가 몰려오는가 싶더니 단전의 불사신기와 호응했다. 단전을 한 바퀴 휘돌아 불사신기로 환원되더니 풍뢰로 빨려들었다.

쩌어어-억!

눈앞에 보이지 않는 그 무엇인가가 힘없이 갈라졌다.

맙소사!

공간 자체가 두 조각이 나 버린 것이다.

‘트, 틀림없어. 분명히 봤어.’

신기루 같긴 하지만 사실이었다.

눈앞의 허공이 살짝 어긋나는가 싶더니 와르르 무너져 내리는 환상이 들었다.

훗!

갑자기 웃음이 났다.

왜인지는 모른다. 그냥 홀가분했고 기뻤다.

아주 머나먼 길을 떠났다가 이제야 비로소 내 고향집으로 돌아온 것처럼 아늑하고 편안한 느낌이었다.

‘하여튼 이제야말로 불사대천검을 마음껏 수련할 수 있게 됐구나.’

가볍게 휘두른 일 검에 공간이 갈린다.

그것도 신마의 애병이었던 풍뢰로 펼쳤는데도 성공했다.

그런데 불사대천검의 경지가 전생의 나인 절대검신 수준으로 올라서 봐라. 어떤 일이 벌어지겠는가?

‘자, 이제 마지막 목표를 시험해 볼 차례인가?’

애초에 목표는 분심의 벽을 이용해 어느 한쪽을 자유자재로 가리는 것이었지만 자운진인이 건넨 태극혜검의 깨달음과 주해 덕에 조금 더 욕심을 내었다.

‘어느 한쪽을 가리는 것이 아니라 분심의 벽을 세운 후 두 의식 모두를 연다!’

두근두근.

어떤 결과가 나올지 몰라 심장이 마구 뛰었다.

항상 풍뢰와 소검비연을 동시에 사용해왔기에 살짝 자신감도 들었지만 혹시 또 모르는 일이다.

‘간다!’

용무린은 신마 진무량을 가리고 있던 분심의 벽의 방향을 조심스레 틀었다. 의식의 중심에 굳건히 세웠다. 그런 후 신마 진무량의 의식까지 개방했다.

“……!”

용무린의 눈이 동그래졌다.

어떤 혼란스러운 느낌이 몰려올지 몰라 걱정했었는데 아무런 반응이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뭐지? 왜 아무런 느낌이 없지?”

아무런 느낌이 없으니 이게 성공을 한 것인지 실패인지조차 모르겠다.

“두 가지 무공을 동시에 펼쳐도 그대로일까?”

용무린은 풍뢰에 이어 소검비연마저 꺼내 쥐었다.

왼손으로는 신마 진무량을 통해 얻은 최상의 것인 어도술을, 소검비연을 통해서는 다시 한 번 절대검신 독고황의 불사대천검의 기수식을 취했다.

“우웃!”

그때부터 혼란이 시작되었다.

-고려의 옛 법을 초월한 이것이 바로 불사대천검이리니, 세상이여 평안하여라-.

-푸흐흐. 내 앞을 가로막는 것은 깡그리 쓸어버리리라. 덤벼라. 짓밟아주마.

두 가지 서로 상반된 생각이 마구 쏟아졌다.

애초에 걱정했었던 것처럼 정신병자가 될 정도는 아니었지만 상반된 의식이 서로 잘났다는 듯 자신을 앞세우는 바람에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아오, 시장통에 들어와 있는 것 같잖아!’

용무린은 재빨리 개방했던 두 가지 의식을 얌전히 가라앉혔다. 뒤로 물렸다.

“휴우. 이제야 살 것 같네.”

깊은 한숨이 절로 새어 나왔다.

“아직 갈 길이 멀구나.”

그나마 다행인 것은 분심의 벽을 세워 언제든 한 가지 의식은 자유자재로 쓸 수 있게 됐다는 점이라고나 할까?

“역시 수련 시간이 너무 짧았어.”

남존이라 불리는 무당파에서조차 익힐 수 있었던 천재가 극히 드문 양의신공을, 불과 며칠 만에 이 정도까지라도 익혀 냈다는 것을 위안으로 삼아야 하리라.

‘신마 진무량이 진천수라도와 비연오식을 동시에 펼치는 무공을 익히고 있었던 것이 다행이었구나.’

그 경험이 양의신공 수련에 막대한 도움이 되었다.

“그래도 수련뿐이야. 첫째도 수련, 둘째도 수련.”

끝없는 수련만이 양의신공의 경지를 깨달음으로 이끌어 줄 것이다.

“일단은 평상시에도 혼란이 없도록 양의신공을 운용하자. 분심의 벽을 의식 중간에 세운 후 천천히 조금씩 열도록 하자고.”

그렇게 조금씩 강도를 높여야만 두 가지 의식을 한꺼번에 모두 개방했을 때 혼란이 덜할 것 같았다.

“일단 여기까지!”

욕심 같아서야 주야장천 계속해 끝을 보고 싶다.

하지만 그럴 수가 없다.

지금 이 순간, 무당파가 자신을 대신해 피를 쏟고 있을지도 모르기 때문이었다.

용무린은 문을 열고 밖으로 나섰다.

끼이익. 철컥.

그때였다.

끽. 끼익. 트드드드. 쿠콰콰쾅.

지금까지 멀쩡하게 잘 서 있던 전각이 가운데 부분부터 안으로 함몰되듯 와르르 무너졌다.

“헐. 아까 펼쳤던 불사대천검 때문인 거야?”

그랬다. 간단히 그어 내렸던 불사대천검 한 동작이 전각을 통째 잘라버렸던 것이다.

“뭐, 뭐야?”

호법을 핑계 삼아 전각 뒤편에서 꾸벅꾸벅 졸고 있던 방건이 화들짝 놀라 튀어 나왔다.

“저, 적입니까?”

“대체 무슨 일이…….”

방건과 함께 남아 있던 정의개들도 토끼눈을 한 채 튀어나왔다.

“아무것도 아니야. 내가 뭘 좀 연습해 보다가……. 아니야. 됐어. 그냥 잠이나 더 자!”

움찔!

“자, 자긴 누가 잤다고 그래?”

“마, 맞습니다.”

“저희들이 얼마나 열심히 호법을 섰는뎁쇼.”

방건과 정의개들이 목에 핏대를 세웠다. 결백을 주장했다.

물론 소용없는 일이었다.

“침이나 흘리고 자질 말든지……. 침 때문에 주둥이 주변에 먼지 엄청 묻었어.”

“후릅!”

“에, 퉤퉤.”

그제야 자각이 들었는지 방건과 정의개들은 침과 달라붙은 흙먼지를 털어내느라 법석을 떨었다.

“연락 온 것은?”

“연락? 아직 없었어.”

“흠. 올 때가 된 것 같은데…….”

연락이 오든 말든 목표로 했던 수련을 마쳤으니 훌쩍 떠나면 된다.

‘한 가지만 처리하면 말이지.’

“의성 신우량은 좀 어때?”

“아, 그 양반? 이제 겨우 죽이나 먹을 정도야.”

혈고 때문에 마혈을 계속 제압해 둔 상태라 치유가 더딜 수밖에 없었다.

“가자! 앞장서.”

“알았어. 저쪽이야.”

방건이 냉큼 앞장섰다.

잠시 후 용무린은 며칠 만에 십여 년의 세월을 먹은 듯 변해버린 의성 신우량을 만날 수 있었다.

스릉.

대뜸 소검비연을 꺼내든 용무린.

불사신기를 끌어 올린 후 묵직한 목소리를 발했다.

“정신을 차리게 되면 힘이 들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 하나만 생각하시길 바랍니다. 모든 것은 혈고로 인한 것, 꿈을 꾸었다고 생각하십시오.”

따아아-앙!

불사신기가 가득 깃든 검명이 의성에게 집중되었다.

“커헉!”

작살이라도 맞은 듯 의성이 몸을 떨었다.

따앙. 따앙. 따리라랑.

황궁비고 안에서 완성된 탄주에 혈고가 버틸 수 없는 것은 당연지사. 오래지 않아 귓속에서 한 줄기 피가 흘러나오는가 싶더니 그 피에 섞여 모습을 드러냈다.

푸스슷.

밀려나오기가 무섭게 불사신기에 휘말려 흩어졌다.

소검비연을 되돌린 용무린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혼란스럽고 힘드실 것입니다. 하지만 의성의 힘으로 목숨을 구함 받을 미래의 사람들만 생각하시면 되리라 생각합니다.”

말을 마친 용무린의 시선이 방건에게로 향했다.

“마혈까지 다 풀렸을 거야. 정신을 차리면 스스로 치료해서 금방 일어날 테니 어디든 원하는 곳으로 모셔다 드리면 좋겠다.”

“어디든지?”

“내가 들었던 의성의 본래 성품은 의롭고 자애로웠으며 애민정신이 강한 분이었다고 들었어. 힘들겠지만 잘 이겨내고 양민들을 돕는 방향으로 움직일 가능성이 커. 그때까지만 지켜드려.”

“알았어. 염려 마.”

가만히 의성 신우량을 한 번 내려다본 용무린은 청성으로 가기 위해 다시 밖으로 나섰다.

그때였다.

한 마리의 해동청이 전각 끝에 내려앉았다.

기다리고 기다리던 전서구였다.

“왔구나!”

방건이 날듯이 달려가 발목에서 전서구를 분리했다. 용무린에게 가져왔다.

“응? 으응? 제엔-장!”

용무린의 목소리가 점점 더 커지더니 이내 진득한 욕설을 쏟아냈다.

“개자식들! 다 죽었어!”

스파아-앙!

강렬한 파공음과 함께 용무린은 쏘아진 화살처럼 남쪽을 향해 사라지고 말았다.

“뭐, 뭐야? 대체 뭐라고 적혀 있는데 저래?”

팔랑.

방건은 그제야 떨어져 내리는 전서를 잡아챘다. 재빨리 읽어 내려갔다.

-청성 괴멸. 구원을 위해 출발했던 아미파의 선발대 역시 뇌화탄으로 인해 치명적인 타격을 입었음.

퇴각 도중 연락이 끊긴 제자들도 부지기수. 그중 특히 선발대의 책임자였던 계율원주 보현과 속가제자 백리소옥의 실종에 충격이 이만저만이 아님.

“백리소옥의 실종이라…….”

방건의 고개가 그제야 끄덕여졌다.

전서의 내용 중 어떤 대목이 용무린의 분노를 자초했는지 확실히 알 것 같았다. 화운 태상장로에게 백리검가에서 있었던 일을 들었던 기억이 난 거다.

“새끼들, 그나마 편하게 죽고 싶으면 백리소옥 소저만큼은 건드리지 마라.”

방건의 입에서 진심 어린 충고가 흘러나왔다.

신마귀환 6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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