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유연천리래상회(有緣千里來相會).(7권) (61/104)

신마귀환 7권

서경 신무협 소설

1.유연천리래상회(有緣千里來相會).

인연이 있으면 천 리나 떨어져 있어도 다시 만나게 된다.

‘왜 갑자기 화가 치솟았지?’

전력을 다해 신법을 펼치면서 갑자기 치민 생각이었다.

‘내가 백리소옥을 좋아하나?’

그것은 아니다.

자신이 사랑하는 여인은 분명히 제갈영령이었다. 그녀에게 마음을 열었고 비밀을 나누었으며 함께 행복한 미래를 약속했다.

‘그럼 왜?’

그걸 당최 모르겠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백리소옥이 위험에 처해 있다는 전서를 보자마자 제어할 수 없을 만큼의 분노가 치솟았다는 것이다.

‘아직도 그녀에게 빚을 지고 있다고 생각하나?’

어쩌면 그럴지도 모른다.

그녀가 파문까지 각오한 채 백리검가를 뛰쳐나와 아미파에 몸을 의탁한 이면에는 자신의 충동질이 큰 역할을 했으니까.

‘그래도 뭔가 핑계로는 조금 부족한 듯싶은데?’

그 순간이었다.

용무린의 눈앞에 홀연히 하나의 환영이 스쳐 지났다.

제 사부의 등 뒤에 숨어 얼굴을 붉힌 채 어쩔 줄 몰라 하는 고운 얼굴의 여인, 아무리 봐도 나를 연모하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울컥.

그 모습을 보는 순간 심장이 반응을 보였다.

안타까움. 미안함.

두 가지 감정이 폭발하듯 치솟았다.

그 이유를 알려주겠다는 듯 환영은 바로 다음 장면을 펼쳤다. 얼음처럼 차가운 표정으로 그녀에게서 돌아서는 중년인의 모습이었다.

보는 순간 바로 알 수 있었다.

돌아서는 그 중년인이 신마대전이 벌어지기 직전, 신마의 힘에 잠식당해 한꺼번에 세월을 먹어 머리가 하얗게 세기 전의 자신이라는 것을…….

‘내가 받아주지 않았구나. 매몰차게 거절했어.’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나이 차이도 나이 차이거니와 신마와의 마지막 대결을 앞두고 있던 때였지 않은가?

다시 돌아올 기약도 없는데 어찌 미래를 약속할 수 있었겠는가? 등선을 포기한 상태였지만 그래도 그것은 안 되는 일이었다.

‘몇 차례의 위기에서 내가 구해준 덕에 연모의 감정이 싹 튼 모양이로구나.’

그래서 더더욱 받아주지 않은 듯하다.

취할 생각에 구해준 것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드디어 벌어진 신마대전.

여인은 자신이 신마를 맞아 혈투를 벌이던 전장에서 용감히 싸우다 산화했다.

그녀의 눈에 마지막 담긴 장면은 바로 나!

신마와 싸우는 내 모습만 바라보다 숨이 끊겼다.

그녀가 죽어가는 장면을 보지는 못했지만 오직 나만을 바라보던 그녀의 안타까운 마음은 시간과 공간을 뛰어 넘어 지금 이렇게 전해졌다.

‘닮았다. 그녀와…….’

환영 속 여인과 백리소옥이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분명히 전혀 다른 얼굴이었지만 본능은 두 사람이 같은 사람이라고 외쳤다.

‘보면 알겠지. 보면…….’

예전에는 몰랐지만 지금은 다르다.

천기자가 말했던 껍질이 거의 다 깨진 상태이니까.

스파아-앙!

신법의 속도가 조금 더 빨라졌다.

***

아미파로 퇴각하던 제자들은 다행히 모두 구조가 되었다.

분노에 눈이 뒤집힌 청성파의 고수들이 즉시 움직였고 무당파의 고수들까지 합세했기 때문이었다.

“이 죽일 놈들아-아!”

쩌러렁. 쩌렁.

“크아악!”

“커헉!”

서금도장의 손에서 청운적하검법이 펼쳐질 때마다 혈교의 마인들이 피를 뿌렸다. 혈영대법까지 펼쳤지만 소용없는 일이었다.

한 발 늦게 합류했지만 무당파의 도움이 가장 컸다.

청성에 비해 그 수는 적어도 무당파의 수뇌부들답게 막강한 위력을 발휘했다.

“허허허. 이것이 태극혜검이라네.”

스치는 빛의 여운이 허공에 태극의 문양을 그려냈다.

후웅. 버언쩍. 타탕! 스각.

“큭!”

밀려드는 핏빛 강기 덩어리를 대뜸 양쪽으로 흩어낸 후 상대의 가슴을 가르는 자운진인!

“이놈들! 깡그리 지옥으로 돌려보내주마!”

“하아앗!”

자영과 자성 역시 구궁신행검법과 구궁연환검법을 펼쳐 혈교의 마인들을 마구 베었다.

마교의 절대 고수들인 오마종의 하나와 겨루고도 살아남은 그들의 무위는 혈영대법을 펼친 것 정도로는 막을 수가 없었다.

파캉. 스가각.

“크아악!”

버언쩍. 패애액. 서걱.

“허억!”

혈교 마인들의 숫자가 빠르게 줄어들었다.

아득.

‘빌어먹을!’

혈수존이 이를 갈았다.

빠른 추격과 다음 수순인 분탕질을 위해 힘을 몇 개로 나눈 것이 뼈아팠던 것이다.

“뭐해 이 병신들아! 여기서 다 뒈지고 싶어? 던져!”

“충!”

불과 오십 명 남짓으로 줄어든 수하들 얼굴이 환해졌다.

이제 살았다는 얼굴로 뇌화탄을 꺼내 불을 당겼다. 앞다투어 던졌다.

치이이. 치이이. 후욱. 후욱.

하지만 무당파의 고수들, 특히 용무린으로부터 귀에 딱지가 내려앉을 만큼 자세한 설명을 들었던 자운진인과 자영 자성이 그 자리에 있었던 것이 불운이었다.

“허허허. 이것이 바로 그 뇌화탄인가? 하압!”

후우웅. 후웅. 투우웅. 투투-웅.

무당의 장문인 자운진인의 손에서 부드러운 장법의 대명사인 면장이 펼쳐졌다. 뇌화탄의 충격을 최소화해 감싼 후 그대로 되돌렸다.

“서쪽은 제가 맡겠습니다.”

“동쪽은 제 차지입니다. 하아아!”

후웅. 투웅. 휘우웅. 투웅.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혈교의 마인들에게 되돌려주었다.

그 결과는!

쿠와앙. 콰아앙. 쿠콰콰쾅!

“커헉!”

“크아악!”

이십여 명에 달하는 혈교 마인들이 한꺼번에 쓰러졌다.

“젠장! 젠자-앙!”

분노 때문에 혈수존의 심장이 터질 듯 뛰었다.

뇌화탄까지 무용지물이 되었으니 답은 한 가지밖에 남지 않았기 때문이다.

‘모두가 혈신강령대법을 펼치면 좋으련만!’

혈신강령대법을 펼치면 평생을 두고 사용할 인체의 잠력이 일시에 터져 나오게 된다. 중간에 거둔다고 해도 후유증이 너무 심하니 조심해야 하는 거다.

‘두 번째 임무인 분탕질을 생각해야만 해.’

그것을 생각하면 이 자리에서 끝을 보자는 듯 혈신강령대법을 펼칠 수는 없었다. 정파 세력권의 분탕질과 포교가 물 건너간다.

‘별 수 없군.’

오늘만 날이 아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아직 죽고 싶지가 않았다. 살아서 혈교의 깃발 아래 영화를 누리고 싶었다.

‘언제고 이 빚을 갚을 날이 올 거다, 말코야!’

한 차례 자운을 노려본 혈수존의 입에서 후퇴의 명령이 떨어졌다.

“1조! 2조! 혈신강령대법을 펼쳐라! 3조, 4조는 그 틈을 타 빠져 나간다.”

“충!”

“충!”

1, 2조가 기다렸다는 듯 혈신강령대법을 펼쳤다.

“오오, 혈신이시여 강림하소서. 피로써 거듭나 당신께로 가겠나이다.”

“오오, 혈신이시여 저를 받아주소서. 당신의 제자가 피로써 부르옵나이다.”

화아악!

폭발하듯 치솟는 혈기라니!

“우아아악!”

“차아아!”

후우웅. 쿠와앙. 파캉. 서걱.

“크악!”

버언쩍. 콰쾅. 카가각.

“허어억!”

청성파가 담당하던 방위가 단숨에 무너졌다. 포위망에 커다란 구멍이 뻥 뚫렸다.

“가자!”

스파앙. 스각. 서거걱.

그 틈으로 혈수존이 빠져 나갔다. 주변에 있던 청성파 검수들을 마구 베었다. 구멍을 더 넓히기까지 했다.

타닷. 스스슷. 파바박.

그 뒤를 따라 혈교의 마인들 삼십여 명이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추격도 바로 할 수가 없었다.

혈신강령대법을 사용해 평생을 사용할 잠력을 일시에 터뜨린 혈교 마인들 이십여 명이 뒤를 차단했기 때문이었다.

“혈신이시여!”

“저를 받아주소서-!”

파카카캉. 스걱. 후웅. 콰아앙.

“크아악!”

“커헉!”

혈신강령대법을 펼친 마인들은 마지막 하나까지 발악했다. 추격을 저지했다.

“허어, 참으로 지독한 마인들이로고…….”

혀를 내두르는 자운진인.

“어찌 보면, 마교의 종자들보다 이들이 더 독한 듯싶습니다, 장문인.”

“그렇습니다. 갑자기 내공을 폭증시키는 사이한 대법도 대법이지만, 독하기만 따지면 이들이 마교 놈들보다 더 지독합니다.”

수라멸절단과 이미 한 번 겨루어 봤던 자영과 자성이 고개를 끄덕였다.

“놈들을 쫓아야 합니다, 장문인!”

청성의 서금도장이 앙칼지게 외쳤다.

자운진인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답했다.

“무당이 하겠소이다.”

“예?”

“놈들에게 불탄 본산의 뒷수습도 아직 끝내지 못했을 터, 서금도장께선 제자들을 이끌고 본산의 정리와 재건에 힘을 기울여야 할 것 같소이다.”

“크흠.”

서금도장이 이를 악물었다.

생각 같아서는 놈들을 추격해 마저 죽여 버리고 싶었지만 자운의 말이 옳았기 때문이다.

서금도장은 결국 자운의 말에 따랐다.

정중히 포권을 취해 보이며 고개를 숙였다.

“오늘의 도움, 청성은 결코 잊지 않을 것입니다.”

“사해가 동도이거늘, 무슨 말씀을!”

자운 역시 마주 포권을 취해 보였다.

“힘이 들겠지만, 아미파의 호위만 부탁합니다.”

“당연히 해야 할 일입니다. 염려하지 마십시오.”

“그러면…….”

휘슷.

자운은 즉시 남쪽을 향해 신법을 펼쳤다.

연락이 두절된 보현을 비롯한 아미파의 여승 스무 명을 찾아서였다.

‘남쪽으로 향했다는 것은 결국 당가의 힘에 기대보겠다는 뜻 아니겠나? 의외로 쉽게 찾을 수 있겠군.’

자운진인의 판단이 옳았다.

보현은 분명 그런 의도로 성도를 향해 움직였다.

하지만 혈교의 추격을 뿌리치기 위해 직진을 선택할 리가 없었다.

아미파는 사천의 명문, 이곳의 지리를 누구보다도 더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몸을 숨길 곳과 피할 곳 역시 잘 알고 있었다.

그 때문에 자운진인의 생각과는 달리 보현의 종적은 쉬이 드러나지 않았다. 개방과 연락을 취해 보았지만 개방 역시 찾지 못할 정도였다.

사천당가 역시 마찬가지였다.

보현이 신출귀몰하며 이리저리 숨어 이동하는 터라 찾아낼 수가 없었다.

그래서 결국 이런 결정을 내려야만 했다.

“어차피 성도를 향해 올 수밖에 없다. 차라리 그 길목을 지키자.”

북쪽의 높은 산들을 뚫고 성도에 닿을 수 있는 길목은 한정되어 있으니 그곳들을 지킬 생각이었다.

***

비슷한 시각 중량산 인근.

“이런 빌어먹을! 대체 하늘로 솟은 거야? 아니면 땅으로 꺼진 거야?”

벌써 며칠째 중량산을 비롯해 인근을 뒤지고 다니던 혈살마군이 노성을 터뜨렸다.

“이봐. 그냥 포기하지 그래?”

귀혈마가 은근한 목소리로 만류했다.

그깟 여승 몇 잡아 죽이는 일에 시간을 허비하느니 다음 단계인 분탕질에 주력하자는 뜻이었다.

“그년들을 살려주면? ‘고맙습니다.’ 하고 돌아갈 것 같아서 그러나? 분탕질 할 때 다시 고스란히 우리 적으로 고개를 내밀 년들이야. 그러니 기회가 닿았을 때 손쉽게 잡아 죽여야지. 안 그래?”

“하긴!”

딴은 그랬다.

아미파의 고수가 살려준다고 감사하며 두 번 다시 자신들 앞에 나타나지 않겠나? 언제고 다시 적이 되어 자신이나 수하들 목숨을 노릴 것이다.

“그러면 이렇게 하지.”

“뭘 어떻게?”

“저기 보이는 중량산을 넘으면 성도가 지척이야.”

“흐음. 성도에는 당가가 있지.”

“바로 그거야. 아미의 냄새나는 비구니들이 무슨 생각에 남하를 했겠어? 아무리 잘 숨어 있어도 결국에 그년들이 갈 곳은 하나야. 당가가 자리한 성도지.”

“오호.”

혈살마군의 눈이 둥그렇게 휘었다.

귀혈마가 자운진인과 비슷한 생각을 해낸 거다.

“길이 몇 개 안 돼. 그러니 직선으로 산을 타 넘자. 가장 가까운 봉우리를 찾아 우리와 주력이 서 있고 나머지 아이들에게 길목을 지켜보라고 하잔 말이다.”

“어느 길목이든 걸리면 그때 움직이자는 말이지? 그래, 그게 좋겠다.”

“가자!”

타닷. 휘스슷.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귀혈마가 중량산 정상을 향해 신법을 펼쳤다.

타닷. 휘리리릭.

“크흐흐. 계집들, 이젠 끝이다.”

혈살마군이 나직한 괴소를 흘리며 그 뒤를 따랐다.

***

비슷한 시각 용무린은 성도 인근의 중강현에 도착했다.

냉혈곡과의 거리를 감안하면 닷새 만에 돌파한 것이니 실로 놀라운 속도였다.

하지만 지난 닷새 동안 한 번도 쉬지도, 눈을 붙여 보지도 못했다는 것을 생각하면 그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전력을 다한 강행군이었다.

‘후우. 그래도 몸 상태가 생각보다 좋아 다행이군.’

양의신공 덕이었다.

신마 진무량의 의식을 통해서는 끝없이 천마탄신의 신법을 펼쳤고 절대검신 독고황의 의식을 통해서는 한 순간도 쉬지 않고 불사신기를 휘돌렸다.

그러니 내공이 계속해서 제자리였던 것이다.

어찌 보면 무한의 내공을 지닌 것과 마찬가지인 셈.

백리소옥의 구출이라는 대명제에 집중한 덕에 두 가지 의식이 서로 시끄럽게 떠들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덕분에 좋은 수련이 되었다.

‘여기에도 개방이 있을까?’

잠시 중강현을 훑어본 용무린은 고개를 흔들었다.

사천 성도가 가까운 곳이다 보니 이곳에는 개방의 분타가 없었다. 사천당가의 체면을 생각해 분타를 세우지 않았던 것이다.

‘그렇다면 천호소라도 찾아가보자.’

언제나 무림의 동향에 촉각을 세우고 있는 것이 바로 군!

그들의 정보망이라면 틀림없이 무엇인가 움직임을 잡아냈으리라.

용무린은 즉시 중강현 외곽의 천호소를 찾았다.

무림왕을 증명하는 황룡패를 내밀고 성도 주변의 무림동향 정보를 요청했다.

답은 즉시 나왔다.

이미 여러 날 주변을 맴돌았기 때문에 군의 정보망에 혈교의 존재가 감지된 것이다.

“중량산?!”

“그러하옵니다, 패주시여. 붉은 옷의 무리들이 이곳 중강현을 비롯해 주변 현을 뒤지고 다니다 중량산으로 들어갔다는 보고이옵니다.”

그 정도면 충분했다.

“고마워. 잊지 않고 황상께 네 도움에 대해 올릴게.”

“충!”

쾅.

천호장이 바닥에 머리를 처박았다.

휘슷.

그러든지 말든지 용무린은 즉시 중량산을 향해 신법을 펼쳤다. 높고 깊고 넓은 중량산 어느 곳에 그녀가 있을지 아찔할 수도 있건만 걱정하지 않았다.

‘이끌릴 거야. 중량산에 있기만 하다면 말이야.’

유연천리래상회.

인연이 있으면 천 리나 떨어져 있어도 서로 만나게 되듯 전생의 그녀가 정녕 백리소옥이라면 본능이 그녀에게로 이끌어 줄 것이다.

‘기다려라, 백리소옥. 내가 간다.’

스파아-앙!

중량산이 빠른 속도로 용무린의 눈앞에 다가왔다.

성도를 감싸듯 길게 이어진 중량산의 허리.

휘슷. 휘리리릭.

이십여 명의 여승들이 전력을 다해 남하하는 중이었다. 혈교와의 일전에 연락이 끊겼다던 아미파의 보현과 백리소옥 일행이었다.

“조금만 더 힘을 내라. 이 산만 돌파하면 성도가 지척이다. 틀림없이 당가에서 구원을 나와 줄 게다.”

성도로 진입하는 길목이 여러 개였지만 사천당가라면 놓칠 리가 없다. 틀림없이 그곳을 지킬 것이다.

타다닷. 스스슷.

“……!”

“……!”

대답할 기력도 아끼려는지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하긴, 그만큼 여승들의 상태는 좋지 못했다.

승복 곳곳이 찢어지고 갈라졌다. 피와 먼지가 엉겨 붙어 너덜거렸다.

‘뇌화탄의 위력이 그 정도일 줄이야……’

보현의 가슴은 무겁게 가라앉았다.

연락을 받아 알고는 있었지만 시작과 동시에 날아온 뇌화탄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한 것이 뼈아팠다.

이십여 발의 뇌화탄 중 되돌린 것은 겨우 십여 발.

열 발은 고스란히 제자들 가운데 떨어졌다.

복호승과 멸절승, 일대제자들을 가리지 않고 폭발력이 휘감았다.

‘영인아, 영화야…….’

그 서슬에 아끼던 제자들이 쓰러졌다.

그 수가 무려 서른 남짓이나 된다.

비통하게 스러진 제자들의 주검조차 수습해주지 못하고 이렇게 도망치는 심정이라니!

‘후퇴하라 했는데, 대체 몇이나 살아남았을꼬?’

뇌화탄이 터진 후 학살이 벌어졌다.

개개인의 무위는 비슷했지만 그 수에서 너무나 밀렸다. 한 사람에 세 명 혹은 네 명이 달라붙으니 견딜 수가 없었던 거다.

별 수 없이 후퇴 명령을 내려야만 했다.

그러지 않았다면 오래지 않아 전멸 당했으리라.

‘놈들이 나를 많이 따라왔어야 하는데…….’

아미파가 자리한 북쪽을 뚫었다.

놈들의 포위망을 돌파한 순간 더 많은 제자들을 살리기 위해 유인을 자처했다. 뒤를 차단하고 싸우다가 아미파와는 정반대인 남쪽을 향해 방향을 틀었다.

예상대로 놈들은 수뇌부라 할 수 있는 자신과 일대제자들이 포함된 쪽을 향해 달려들었다. 놓칠 수 없다는 듯 따라붙었다.

두려웠다. 하지만 그만큼 위안도 되었다.

자신을 쫓는 적들이 많으면 많을수록 살아남는 제자들의 숫자가 늘어날 테니까.

‘미안하구나.’

보현은 한 발 뒤에서 말없이 신법을 펼치는 백리소옥을 돌아보았다.

‘아무리 아미파의 무공과 잘 맞는 너라고 해도, 보기 드물게 빠른 성취를 거뒀다고는 해도 이번 일에 함께 하는 것이 아니었는데…….’

뒤늦게 받아들인 속가제자였지만 백리소옥의 성취는 실로 놀라웠다.

하나를 가르치면 열을 깨달았다.

마치 아미파의 무공을 익히기 위해 태어난 것처럼 짧은 시간에 단계를 높여 갔다. 내공만 아직 절정 상급이었지, 무공의 이해도는 일대제자의 누구보다도 더 높았다.

‘내가 너무 안일하게 생각했던 거야.’

자신뿐만이 아니다.

아미파 전체가 혈교의 힘을 너무 낮추어 보았다.

화산에 치명적인 상처를 입히고 종남을 무너뜨렸으며 청성마저 짓밟기 위해 움직인 적들을 상대로 겨우 일백오십여 명만 파견하다니!

‘아니, 염두에 두었던 당가의 고수가 하나도 오지 않았던 게 너무 치명적이었어.’

아미, 청성과 함께 사천을 대표하는 명문인 사천당가.

감히 사천의 땅을 짓밟은 혈교의 소식에 당가라면 분연히 일어날 줄 알았지만 예상 밖이었다. 누구도 청성산 인근에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믿을 곳은 당가밖에 없어. 청성과는 사이가 좋지 못하니 그럴 수 있다고 해도 우리는 다를 거야.’

사실이었다.

청성산이 불길에 휩싸일 때까지만 해도 망부석처럼 꿈쩍하지 않던 당가였지만 아미파가 위험에 처했다는 소식에는 즉각 반응했다.

가주인 당현이 두 팔을 걷어붙이고 나섰다.

백여 명에 이르는 고수들을 휘몰아 북쪽을 향해 달렸으며 지금 이 순간에도 자신을 비롯한 제자들을 찾아내기 위해 사력을 다하는 중이었다.

어느새 중량산 허리에서 완전히 내려왔다.

보현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이 쉬어졌다.

‘후우. 이제 야트막한 구릉 몇 개만 넘으면 되는구나.’

그때부터 성도까지는 비교적 경사가 완만한 구릉에 평지가 이어진다.

당가까지는 불과 반나절 거리!

이 주변에는 농사를 짓는 양민들도 많고 하니 혈교라고 해도 추격을 멈출 수밖에 없으리라.

‘다행이다. 정말 다행이야.’

놈들을 유인해 제자들의 목숨을 구한 것만이 아니라 추격까지 떨쳐낸 것이다.

정말 고단한 시간들이었다.

풀숲에 몸을 숨기기도 했고, 동굴에 숨어보기도 했으며 추격을 떨치기 위해 잠 한숨 자지 못했다. 주린 배를 물로 달래며 이리저리 휘 돌았다.

‘되었어. 조금만 더 가면 편히 쉴 수 있겠어.’

당가의 도움을 받는다면 상처도 치료하고 유인하느라 뒤에 남겨둔 제자들의 소식도 알아볼 수 있으리라.

그때였다.

“겨우 여기까지밖에 오지 못했느냐?”

“크하하핫. 그렇다면 죽어야지.”

서쪽에서부터 살기 가득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끔찍한 힘들이 놀라운 속도로 다가왔다.

혈교다. 기어이 놈들이 따라잡은 거다.

‘어떻게?’

질문과 동시에 답을 알 것 같았다.

남하를 했으니 최종 목적지는 결국 성도의 당가!

그 점을 꿰뚫어 본 놈들이 시간을 단축하기 위해 어렵지만 중량산을 직선으로 가로질렀으리라.

‘여러 개로 조를 나누었는데 운수 사납게 저놈들 눈에 걸린 것이로구나.’

놈들의 숫자가 겨우 오십여 명밖에 되지 않는 것이 좋은 증거였다.

‘그래도 이대로는 안 돼. 당해낼 수 없어.’

꼬리를 잡히면 모두 죽는다.

보현은 즉시 신법을 멈추었다. 혈교를 향해 돌아섰다. 길목을 막으며 소리 높여 외쳤다.

“그대로 달려라. 돌아보지 마.”

죽음으로 추격을 차단할 작정이었다.

‘아미파의 피가 더 필요하다면 내가 흘리리라.’

제자들의 목숨을 살릴 수 있다면 기꺼이 흘려줄 생각이다. 죽는 한이 있다 하더라도.

차창!

허리춤의 검을 뽑아 전면에 세웠다. 얼마 남지 않은 내공을 쥐어짜듯 불러 일으켜 검에 밀어 넣었다.

웅웅웅.

주인의 의지를 오롯이 받아들인 검이 맑은 소리를 내었다. 꺼지기 직전의 촛불처럼 환한 빛을 뿜었다.

“사부님 혼자서는 안 돼요.”

그때 백리소옥이 되돌아왔다. 보현의 곁에 늘어섰다. 금정검법의 기수식을 취했다.

스스슷. 타닷.

“그럴 수야 없지요.”

“어찌 평생 아픔을 안고 살아가라 하십니까?”

“부처님께는 제가 먼저 갈 것입니다.”

나머지 제자들 역시 마찬가지, 한 사람도 빠지지 않고 뒤돌아섰다. 보현과 백리소옥 곁에 나란히 서서 결전의 의지를 다졌다.

더 무슨 말을 하랴!

울컥!

보현의 심장 깊은 곳에서 뜨거운 무엇인가가 치밀었다.

‘그래. 그러자꾸나. 우리 사이좋게 부처님 전으로 가자꾸나. 아무도 외롭지 않도록 함께 말이야.’

웅웅웅. 화아악.

마지막을 장식하려는 듯 보현의 검에 석 자 남짓한 검강이 걸렸다.

“금정광휘!”

버언쩍. 쉬아아-악!

보현의 손에서 금정검법이 펼쳐졌다.

시리도록 밝은 빛이 피처럼 붉은 색으로 물든 귀혈마의 목을 향해 뻗어나갔다.

“계집! 여전히 앙칼지구나!”

귀혈마의 손톱에서 조강이 불쑥 자라났다. 거침없이 보현의 검을 맞받았다.

따아앙. 카카카-앙.

“크읍. 큭.”

조강과 검을 부딪칠 때마다 보현은 뒤로 밀렸다. 겨우 가라앉힌 내상이 다시 도졌는지 덩어리 피를 게워냈다.

“크하하하. 어디 나도 놀아볼까?”

휘슷. 파아아-!

보현이 귀혈마를 상대하는 사이 혈살마군은 백리소옥과 영선 그리고 영은을 노렸다. 혈살초혼기라 불리는 깃발을 꺼내 횡으로 쓸어냈다.

파라라라락!

연검이라도 되듯 심한 굴곡을 일으킨 깃발이 세 사람을 덮쳤다.

“어림없다, 노괴야.”

백리소옥이 금정만리세의 초식으로 맞섰다.

휘우웅. 버언쩍.

놀랍게도 백리소옥의 검 끝에 검강이 걸렸다. 이제 불과 한 자 남짓했지만 틀림없었다. 과연 보현이 놀라워 할 만큼 백리소옥의 아미파에 대한 무공의 이해도와 성취는 남달랐던 것이다.

-네가 바로 아미일보 금정이로구나.

초식의 깊은 이해와 깨달음만으로도 검강을 피워 올릴 수 있다는 말을 들어보긴 했다만, 절정 수위의 내공으로 그것을 실현한 것은 내 평생 처음 보았다.

금정은 아미파가 자리한 금정봉을 이르는 말로 아미파의 후대를 이를 장문인감을 뜻한다. 오죽 놀랐으면 장문인인 보상신니가 그런 말을 했겠는가?

하지만 백리소옥은 속가제자 신분이었다.

속세와의 인연이 다하지 않는다면 아무리 뛰어난 인재라 해도 장문영부인 백팔염주를 물려줄 수가 없다. 보상신니는 늘 그 점을 안타까워했다.

“꺼져라, 마군!”

“이야아합!”

영선이 항룡복호권을, 영은은 항룡복마인과 공공일지선을 펼쳐서 좌우를 노렸다.

파카아앙. 퍼퍼퍼퍼엉.

한 번의 접전에 우열은 바로 갈렸다.

“허억!”

“흡!”

“아윽.”

나직한 비명을 흘리며 백리소옥과 영선, 영은 세 사람이 뒤로 밀렸다.

백리소옥이 피워 올렸던 검강이 단숨에 박살났다. 결코 뒤지지 않는 위력을 지녔던 항룡복호권과 복마인, 공공일지선의 초식도 깨졌다.

툭. 투둑.

어디를 어떻게 베였는지 세 사람의 소매 끝을 타고 가는 핏줄기가 계속해서 흘렀다.

차차창. 파캉. 스각.

“아아악!”

후우웅. 카라락. 서걱.

“허억!”

스무 명밖에 남지 않았던 아미파의 여승들 숫자가 빠른 속도로 줄어들었다. 애초에 숫자에서 너무 밀렸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북쪽으로 도주한 아미파를 잡기 위해 힘을 잘게 나누었는지 혈수존과 음혈마는 보이지 않았지만 그래도 오십 명이나 되는 숫자다.

혈살마군을 맞아 싸우는 백리소옥과 영선, 영은의 목숨이 아직도 붙어 있다는 것이 의아할 정도!

차차창. 쾅쾅쾅.

“으하하, 고년들 참……. 꿀꺽.”

쉼 없이 초식을 쏟아내면서도 혈살마군은 연신 침을 삼켰다. 백리소옥과 영선, 영은의 갈라진 옷 사이로 보이는 뽀얀 피부 때문이었다.

특히 영선은 가슴 부위가 갈라져 있었는데 초식을 펼칠 때마다 살짝 드러나는 봉긋한 가슴 때문에 혈살마군의 음심이 마구 들끓었다.

아득.

“이 악적!”

후우웅. 파아아-.

영선이 이를 악물고 항룡복호권의 초식에 내공을 더했다.

“죽어라 음적!”

피잉. 피피피-잉.

영은 역시 사력을 다해 항룡복마인과 공공일지선의 절기를 펼쳤다.

“크크큭. 좋구나, 좋아!”

혈살마군이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단숨에 목숨을 거둘 수 있음에도 질질 끌었다. 벌어진 옷 틈을 훔쳐보는 게 그만큼 재미있었던 거다.

파라라락. 스각. 서걱.

“흡!”

“헉!”

영선과 영은의 가슴과 복부의 승복이 점점 더 많이 갈라졌다. 그만큼 속살이 드러났다.

“푸흐흐흐.”

혈살마군의 비릿한 웃음소리가 갈수록 짙어졌다.

‘오냐, 계속 웃어라.’

영선과 영은이 분전하는 사이 살짝 뒤로 물러난 백리소옥은 마지막 한 수를 펼치기 위해 이를 악물었다.

‘죽을 때 죽더라도 한 칼 제대로 먹여준다.’

한 방울의 내공까지 모두 긁어모아 검에 밀어 넣었다.

휘이우우-웅.

백리소옥의 검에 점점 더 강력한 힘이 걸렸다.

‘푸흐흐. 애쓰는구나…….’

혈살마존의 눈이 둥그렇게 휘었다.

산전수전 다 겪은 혈교의 고수가 백리소옥의 마음을 읽지 못할 리 없는 거다.

‘네년은 잠시 후에 손 봐 주마.’

혈살마존의 시선이 다시 영선에게 향했다. 더 정확히는 움직일 때마다 출렁이는 모습이 빤히 들여다뵈는 가슴을 향해서였다.

‘운우지락은 비구승과 나눠야 제 맛이라지?’

누가 혈교의 마인 아니랄까봐 어디서 들어도 꼭 저 같은 말만 듣고 다니는 혈살마존이었다.

‘일단은 저년들부터…….’

미모야 당연히 백리소옥이 제일이었지만 그릇된 욕망은 비구승들인 영선과 영은에게로 향했다. 중년의 완숙함이 살아 있는 그녀들의 미색 역시 범상치 않은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흐아압!”

파라락. 파라라락!

혈살초혼기가 더욱 격렬하게 움직였다. 눈으로는 도저히 파악할 수 없는 속도와 변화로 영선과 영은을 휘감았다. 마구 베었다.

***

중량산 정상!

거센 바람을 맞받으며 우뚝 선 용무린은 간절한 마음으로 백리소옥을 불렀다.

‘나를 불러. 내가 알아들을 수 있도록!’

전생에서부터 이어져 온 인연.

백리검가에서 처음 마주했을 때는 미처 몰랐다.

하지만 지금은 안다.

마음을 받아주지 않았기에 전생에 그녀가 외롭게 죽어갔다는 것을…….

‘이번에도 구해 줄게. 아무도 너를 건드리지 못하도록 할게. 그러니 나를 불러라, 백리소옥. 지금 당장.’

용무린의 애타는 마음이 와 닿을 것일까?

찌릿!

용무린의 시선이 중량산의 남쪽 산허리에 닿았을 때 심장이 요동쳤다. 그곳이라고 노래를 불렀다.

“간다-앗!”

스파아-앙!

용무린의 신형이 중량산 남쪽 산허리를 향해 빨려들 듯 나아갔다.

***

파캉. 따다다당. 스각.

“아흑!”

콰아앙. 서걱.

“흡!”

결국 영선과 영은이 견디지 못하고 쓰러졌다.

혈살마군의 입이 헤벌쭉 벌어졌다. 더욱 크게 입을 벌린 승복 사이로 드러난 영선의 가슴과 영은의 하복부를 뚫어져라 보았다.

바로 그때,

“금. 정. 제. 마-!”

후우웅. 버언쩌저적!

백리소옥이 그동안 사력을 다해 모은 힘을 떨쳐냈다.

그 한 수에 모든 것을 건 듯 두 자나 치솟은 검강이 시린 빛을 뿌렸다.

“크흐흐. 기다렸다 계집!”

후우웅. 파라락.

이미 알고 있었다는 듯 혈살마존 손에 들린 혈살초혼기가 회전을 시작했다. 검보다 더 날카로운 깃발이 검강을 순식간에 갉아버렸다.

그리고…….

스가가각.

백리소옥의 옷 십여 군데가 갈렸다. 그만큼의 핏줄기가 치솟았다.

“큽!”

짧은 비명과 함께 쓰러지는 백리소옥.

“소옥아!”

콰앙. 퍼퍼펑.

“크으으…….”

길게 백리소옥을 불렀던 보현도 결국 쓰러졌다. 더는 검을 들 힘이 남아 있지 않았다. 입도 뻥끗하지 못한 채 분루만 삼켰다.

“크흐흐. 오랜만에 즐겨볼까?”

혈살초혼기를 거둬들인 혈살마군이 느긋하게 걸음을 옮겼다. 사냥이 끝났으니 이젠 즐길 일만 남은 거다.

“시간이 없으니 이곳에서는 즐기지 못할 테고, 어느 년을 잡아 가야 흡족할까?”

끌고 갔다가 적당한 곳이 나오면 그때 즐길 생각이다.

스윽.

뱀 같은 혈살마군의 시선이 백리소옥과 영선, 영은을 차례차례 훑었다. 그러다가 한 사람 앞에 멈췄다.

씨익.

음욕이 번들거리는 눈으로 외쳤다.

“너!”

***

비슷한 시각, 당가주 당현 역시 보현 등의 아미파 고수들을 찾았다는 보고를 받고 있었다.

“뭐라? 남동쪽 산허리 아래?”

“그러합니다, 가주님. 혈교의 마인들로 보이는 적의 차림의 오십여 명이 비구승 이십여 명을 포위한 채 맹공을 퍼붓고 있었습니다.”

“오래 버티지 못할 듯 보였습니다. 불과 서너 초식의 교환에 아미의 여승들이 쓰러졌습니다.”

더 들을 것도 없다는 듯 당현이 행동을 개시했다.

“가자!”

“충!”

타닷. 스스스슷.

당현을 선두로 한 당가의 고수들이 남동쪽 산허리를 향해 밀려가기 시작했다.

***

혈살마군의 시선이 닿아 있는 사람은 영선이었다.

“크흐흐. 네년은 나와 함께 가줘야겠다.”

할짝!

말과 함께 입술을 핥았다.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어찌나 불쾌한지!

“퉤! 어림도 없다. 네놈 따위에게 청빈을 더럽히느니 차라리 죽겠다.”

영선이 침을 뱉었다. 혀를 이빨 사이에 끼웠다. 그대로 힘을 주었다.

피식.

“하여간, 계집이란!”

어디 한 번 해보라는 듯 혈살마군이 비웃었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지켜보았다.

“……이익!”

말과는 다르게 영선은 혀를 물지 못했다. 힘을 주어 피를 내긴 했으나 차마 완전히 자를 수가 없었던 것이다.

‘역시 그건 힘든 일이야…….’

지켜보던 백리소옥은 내심 고개를 끄덕였다.

동병상련, 과거 요여립의 손에 잡혔을 당시가 떠올랐던 것이다.

‘입장이 바뀌었다면 나는 할 수 있을까?’

그 생각을 하자니 자연스레 용무린의 얼굴이 떠올랐다.

-내가 왔다, 백리소옥.

네 삶의 주인을 너로 정했다면…… 싸워라. 뒤는 내가 막아 주마.

달 밝은 밤이면 떠오르던 그의 목소리가 귓가를 스쳤다.

어찌나 달콤했던지!

두근두근.

생각만으로도 심장이 요동쳤다.

완전히 사라진 줄로만 알았던 힘과 용기가 솟구쳤다. 바닥이 나버렸던 단전에 한 줄기 내공이 일었다. 느리지만 천천히 사해백지로 흘렀다.

‘그래. 싸우는 거야. 마지막 순간까지.’

죽었던 투지까지 다시 살아났다.

그때 잠자코 지켜보던 귀혈마가 한마디 했다.

“대충해. 성도가 지척이야.”

사천의 명문 당가를 염두에 둔 말이다.

그 말을 끝으로 귀혈마는 돌아서 버렸다.

피를 보는 일에나 관심이 있지 자신은 여색 따위에는 별 관심이 없었던 것이다.

“잘 가라. 간만에 재미있었다.”

서걱!

무심한 인사를 끝으로 귀혈마가 보현의 목을 베었다.

“……!”

한마디 말도 건네지 못하고 스러진 보현의 눈에 마지막 남은 세 제자들이 담겼다.

스르르. 터얼썩.

둘로 나뉘어 버린 보현의 육신이 땅을 뒹굴었다.

“사부님!”

그 모습을 지켜보던 백리소옥과 영선, 영은이 한 목소리로 울부짖었다.

“요년!”

후욱. 타다닷.

그 틈을 노려 단번에 거리를 좁힌 혈살마군이 영선의 마혈을 제압했다. 한 팔로 안아 들었다. 영선의 둔부를 마구 주물렀다.

“잠시만 기다려라. 부처 따위는 결코 주지 못할 쾌락을 안겨주마.”

마무리를 위해 혈살마군의 손에 들린 혈살초혼기가 백리소옥과 영은에게로 향할 때였다.

“사, 사부님의 원수!”

갑자기 백리소옥이 검으로 몸을 지탱해서 일어나기 시작하는 게 아닌가?

치잉. 치잉.

백리소옥의 몸무게를 지탱하는 검이 바르르 떨며 울었다. 그 소리가 점점 더 커졌다.

“반드시 죽인다!”

혈살마군을 쏘아보는 백리소옥의 눈에 독기가 어렸다. 필살의 의지가 그 안에 담겨 있었다.

“호오!”

혈살마군의 눈에 호기심의 빛이 돌았다.

“계집치고는 강단이 있는데?”

잠시 갈등이 일었다.

비구승을 겁간하는 것도 구미가 당기는 일이지만, 저렇듯 독기 가득한 여인을 짓밟는 재미 역시 특별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얼굴도 훨씬 더 반반하고 말이야.”

할짝.

솟구치는 음욕을 주체하지 못할 혈살마군이 다시 혀를 핥았다.

‘나로 바뀌었어? 그래?’

피식.

혈살마군의 내심을 알아차린 백리소옥의 입가에 비웃음이 맺혔다.

“어디 한 번 해봐.”

백리소옥이 금정검법의 기수식을 취했다.

반짝.

그녀의 검에 다시금 빛이 고이기 시작했다.

“고년, 정말 구미가 당기게 하는구먼.”

“웃기지 마, 개자식아. 하늘이 두 쪽 나도 너는 나를 가질 수 없어.”

털썩.

결국 혈살마군이 영은을 바닥에 던졌다.

뱀 같은 시선으로 백리소옥의 몸매를 훑어보았다.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역시 네가 좋겠다.”

“하앗!”

혈살마군의 말이 끝나는 순간을 노려 백리소옥의 공격이 시작되었다.

버언쩍. 피유우-웃!

금정검법의 마지막 초식인 금정제마의 초식.

검에 빛이 되돌아왔지만 그것은 겨우 검사,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날카롭긴 해도 혈살마군을 어찌 해보기에는 어림도 없는 수준이었다.

물론 백리소옥도 잘 안다.

‘고마워요. 죽을 용기를 줘서.’

백리소옥은 슬쩍 초식을 되돌려낼 준비를 했다. 공격이 무위로 돌아가는 즉시 방향을 돌려 자신의 심장을 찌르려는 것이다.

“푸흐흐…….”

그것도 모르는 혈살마군이 비릿하게 웃었다.

느긋하게 혈살초혼기를 뻗었다.

“고년 팔딱팔딱 뛰는 것이, 짓밟는 재미가 정말 좋겠구……. 으응?!”

막 백리소옥을 향해 혈살초혼기를 뻗어내려던 혈살마군이 무엇인가에 화들짝 놀랐다. 재빨리 몸을 틀어 뒤를 돌아다보았다.

***

‘그녀다!’

용무린의 눈이 부릅떠졌다.

아직 수십여 장이나 거리가 떨어져 있었지만 한 눈에 백리소옥을 알아볼 수 있었다.

동시에 깨달았다.

백리소옥이 바로 전생의 그녀라는 사실을!

두근두근!

심장이 알려주었다.

아련한 그리움과 함께 미안함과 후회의 감정을 마구 뿜어 올렸던 것이다.

‘죽일 놈! 네가 감힛!’

용무린의 눈이 위를 향해 쭉 찢어졌다.

용서할 수 없었다.

감히 그녀를, 백리소옥에게 상처를 입히다니! 그녀의 몸에서 피를 흘리게 만들다니!

‘죽인다!’

스릉. 버언쩌저적.

살심이 일자마자 풍뢰가 저절로 도갑을 벗어났다.

한 줄기 낙뢰가 되어 공간을 단축했다.

빠아아앙!

그 속도가 어찌나 빠르던지 한 발 늦게 굉음이 터졌다.

***

“어헉!”

혈살마군의 입이 크게 벌어졌다.

버언쩌저적.

천신의 분노이련가?

한 줄기 벼락이 자신을 향해 짓쳐들고 있었던 것이다.

‘피, 피할 수 없어.’

벼락의 정체는 바로 풍뢰!

수라비격일뢰의 초식이 어도술로 펼쳐져 혈살마군의 목숨을 노렸다.

그 속도! 그 파괴력!

어떻게 피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피한다고 해도 따라와 벨 것이다.

‘막지 못하면 죽는다!’

뒤를 생각하고 자시고 할 것도 없었다.

“혈신이시여! 저를 받아주소서! 가엾은 이 종을 피로써 거듭나게 하소서!”

혈살마군은 즉시 혈신강령대법을 펼쳤다.

평생을 두고 사용해야만 할 잠력을 한꺼번에 불러왔다. 혈살초혼기에 담았다.

“흐아아아-압!”

콰르르! 콰르르! 촤라라라락!

필생의 힘이 담긴 혈살초혼기가 전면을 틀어막았다. 그 무엇이든 갈아 없애겠다는 듯 무섭게 회전했다.

그러나…….

버언쩍! 콰아아앙!

어도술로 날아든 풍뢰는 혈살초혼기에 담긴 혈신강령대법의 공력을 너무나도 쉽게 관통해 버렸다.

두부라도 되는 양 파고들더니 그 뒤에 숨어 있던 혈살마군의 오른손을 집어 삼켰다.

스각! 둥실.

혈살초혼기를 움켜쥐고 있던 혈살마군의 오른팔이 하늘 높이 떠올랐다.

“크아아악!”

혈살마군의 입을 뚫고 처절한 비명이 터졌다.

“아!”

그 비현실적인 모습에 백리소옥이 탄성을 쏟았다.

하지만 이내 백리소옥의 눈에는 맑은 눈물이 그렁그렁 차올랐다.

휘슷. 타닷.

꿈에서 그리던 사내의 뒷모습이 자신 앞을 가로 막아섰기 때문이었다.

‘무린!’

용무린이었다.

보이는 것은 뒷모습뿐이었지만 어찌 모르겠는가?

달 밝은 밤이면 언제나 꿈속에 나왔던 그 모습 그대로인 것을!

용무린이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입을 열었다.

“내가 왔다, 백리소옥.”

그때와 같다.

요여립의 손에 잡혔을 때와 똑 같았다. 그때처럼 자신을 구하기 위해 와준 것이다.

쿵쿵쿵쿵쿵!

백리소옥의 심장이 마구 뛰었다.

너무 놀라 펼치던 초식이 중간에 멈춰 사라진 후유증 때문에 심장이 이리 뛰는 것일까?

용무린의 목소리가 계속해서 이어졌다. 머리를 거치지 않고 심장에서 바로 쏟아진 말이었다.

“이제는…… 이제는 내가 지켜주겠다.”

그 말이 어떤 의미를 지녔는지, 왜 그런 말을 했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심장이 그 말을 하길 원했다는 것이다.

‘모르겠다. 일단 이놈들부터 정리한 후 생각하자.’

고민은 잠시 후에 해도 좋은 거다.

“네, 네놈은 누구냐?”

귀혈마마저 놀라서 말을 더듬었다.

그만큼 용무린의 존재감이 압도적이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때,

“혈교의 무리다. 쳐라!”

“감히 사천 땅을 밟은 대가를 치러줘라!”

“차아앗!”

당현이 이끄는 당가의 고수들이 도착했다. 즉시 혈교의 배후를 쳤다.

피시싯. 패애액.

“커헉!”

“크아아악!”

당가를 대표하는 각종 암기가 비처럼 쏟아졌다.

혈교의 마인들은 비명을 지르며 쓰러지기에 바빴다.

용무린의 등장에 놀라 주변을 경계하지 못했던 이유가 가장 컸다.

‘젠장. 잘못하면 이곳에 뼈를 묻을 수도 있겠다.’

귀혈마는 이곳에서 죽을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즉시 최선의 명령을 내렸다.

“모두 혈신강령대법을 펼쳐라. 이곳을 벗어나 약속장소에서 헤쳐 모인다.”

“오오, 혈신이시여 피로써…….”

“혈신께 바라나이다…….”

같은 마음이었는지 혈교의 마인 모두가 혈신강령대법을 펼쳤다.

뭉클. 뭉클. 콰르르.

수십여 명이 동시에 혈신강령대법을 펼치니 핏빛 운무가 피어오르는 듯했다.

“비켜-엇!”

우웅. 촤촤촤-악.

귀혈마 역시 혈신강령대법을 펼쳤다. 일 장도 넘게 자라난 조강으로 전면을 할퀴었다.

“어림없다! 하아앗!”

후웅. 후웅. 후우-웅.

당현의 손에서 구환살의 절기가 펼쳐졌다.

콰앙. 콰앙. 쾅쾅쾅.

조금씩 밀리기는 했지만 귀혈마의 조강을 훌륭히 받아 넘겼다.

‘과연 구환살!’

당현의 가슴에 자신감이 솟구쳤다.

무림맹에 보내 둔 셋째 아들 당건이 구환살을 입수한 후 즉시 수련에 돌입했고 바로 큰 성과를 거두었다. 오랫동안 참오만 해오던 만천화우가 구환살을 만나 너무나 쉽게 껍질을 깨버린 것이다.

‘만천화우라면 충분히 이길 수 있어.’

밀리고 있기는 하지만 극복할 자신이 있었다.

당가의 전설인 만천화우라면 그럴 자격이 충분히 있었으니까.

콰앙. 쾅쾅쾅.

피싯. 피시시싯.

“크악.”

“커헉!”

당현과 맞붙은 귀혈마를 시작해서 혼전이 벌어졌다.

잠시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용무린의 입에서 얼음장 같은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이곳을 벗어나겠다고? 푸흐흐. 제 값을 치르기 전에는 한 놈도 못가.”

스르르. 스르르.

풍뢰와 소검비연이 동시에 떠올랐다.

“백리소옥이 흘린 피 한 방울에 네놈들 목숨 하나로 계산해주지.”

반짝!

용무린의 눈에 살기가 어렸다.

그 순간 심령이 연결된 풍뢰와 소검비연이 제 스스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휘웅. 퍼억. 버언쩍. 스각.

“크아악!”

“커헉!”

어떻게 막고 자시고 할 수가 없었다.

딱히 특별한 초식을 펼치는 것이 아니었지만 그 누구도 풍뢰와 소검비연을 막지 못했다.

“이야아-하!”

화아악. 콰르르.

조장 급 마인이 기를 쓰고 혈신강령대법의 공력을 쏟아 보았지만,

퍼억.

풍뢰는 너무나도 쉽게 그것을 뚫었다.

“허으으.”

심장에 구멍이 뻥 뚫린 녀석이 나지막한 비명을 흘리며 쓰러졌다.

“이, 이게 대체…….”

“뭐, 뭐야?”

“어떻게 저런…….”

퍼억. 퍼퍼퍼-억!

혈교의 마인들을 거세게 몰아붙이던 당가의 고수들마저 움직임을 멈추었다. 바느질을 하듯 이리저리 움직이며 혈교의 마인들을 꿰어 버리는 풍뢰와 소검비연의 위용에 넋을 잃었다.

꿀꺽!

당가주 당현도 너무 놀라 마른침을 집어 삼켰다. 뒤로 훌쩍 물러나 용무린만 바라보았다.

‘대, 대체 누구이기에?’

의문은 곧 하나의 이름을 떠올리게 했다.

‘서, 설마 용 대협?’

당금 천하에 그를 제외하고 누가 있어 이 정도의 무위를 뽐낼 수 있겠는가?

“크아아! 혈조참룡-!”

귀혈마가 필생의 공력을 담아 풍뢰에 맞섰다. 풍뢰와 소검비연을 넘어서지 못하면 어차피 도망칠 수도 없는 것이니 혈신강령대법의 공력까지 깡그리 담았다.

후우웅. 버언쩍. 촤촤촤촤-악.

이장 가까이 치솟은 핏빛 광채가 풍뢰와 소검비연을 동시에 휘감았다.

그러나…….

퍼어엉. 퍼퍼펑. 쉬가가가각.

풍뢰와 소검비연은 너무나도 손쉽게 귀혈마의 마지막 일초를 갈라버렸다. 마구 찢어낸 것으로도 모자라 귀혈마를 직접 공격했다.

푸화학.

풍뢰가 귀혈마의 심장에 구멍을 뻥 뚫고 지나갔다.

촤촤촤-악.

소검비연은 귀혈마를 난도질했다.

‘혀, 혈교천하가 눈앞에 있었거늘…….’

의식이 끊기던 귀혈마는 천신처럼 우뚝 서 있는 용무린을 보며 혈교천하가 한낱 꿈에 불과하리라는 예감을 받아야만 했다.

그것으로 끝. 귀혈마의 의식이 끊겼다.

쌔애애액. 버번쩍.

“크아악!”

“커헉!”

풍뢰와 소검비연은 계속해서 혈교의 마인들을 골라 굴비 엮듯 마구 뚫었다.

용무린의 시선에 걸리면 여지없었다. 그 즉시 풍뢰와 소검비연이 날아들었다. 처절한 비명소리와 함께 혈교인들의 숫자가 빠르게 줄어들었다.

“아으으.”

혈살마군은 움직이지도 못한 채 벌벌 떨고만 있었다.

팔 하나를 잃은 충격 때문이 아니었다. 마공의 근본을 파고든 불사신기 때문이었다.

팔을 가를 때 스며든 불사신기는 마교의 도마종을 상대할 때와는 또 달랐다. 혈살마군의 단전을 향해 밀려들었다. 평생 쌓아 올린 내공부터 시작해서 혈신강령대법의 힘까지 마구 지워버렸다.

“어, 어떻게……. 어떻게 이럴 수가…….”

혈살마군은 대호의 이빨에 걸린 연약한 사슴에 지나지 않았다. 옴짝달싹하지도 못한 채 용무린의 처분만 기다려야 했다.

싸움, 아니 학살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

“크아악!”

마지막 남은 혈교 마인의 심장마저 뚫어버린 풍뢰가 혈살마군을 향해 쏟아져 내렸다.

쫘아악!

벌벌 떨며 굳어 있던 혈살마군의 몸이 정수리에부터 사타구니까지 갈라졌다. 비명 한 번 질러보지 못하고 혈살마군의 목숨이 끊어졌다.

‘혀, 혈신이시여…….’

혈신이 자신의 목숨을 받아주길 바라며 혈살마군의 의식이 흐려졌다.

방건의 예감이 맞았다.

백리소옥을 건드렸던 혈살마군은 그나마 곱게 죽지도 못한 것이다.

그것으로 학살은 끝이 났다.

“흥! 나머지 이자는 혈교의 교주 놈에게 받겠다.”

이자는 언제나 몇 곱으로 받아내는 것이 영업방침이다.

용무린이 백리소옥을 향해 돌아섰다.

언제 학살을 벌였냐는 듯 해맑은 미소가 용무린의 얼굴에 걸렸다.

“내가 조금 늦었지? 미안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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