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연정만리 (62/104)

2.연정만리

“흐흑!”

뜨거운 눈물을 흘리며 백리소옥이 용무린을 향해 달려왔다. 나비처럼 날아 품에 안겼다.

‘이런!’

용무린의 눈이 동그래졌다.

제갈영령의 얼굴이 순간적으로 떠올랐던 것이다.

‘이런 걸 바란 게 아니야.’

턱.

떼어내기 위해 백리소옥의 어깨를 붙잡았다.

하지만 힘을 주어 떼어낼 수가 없었다. 죽어가면서도 나만을 바라보던 그녀의 전생이 다시 한 번 눈앞을 스쳐 지났기 때문이었다.

‘후우.’

토닥. 토닥.

떼어내기 위해 들렸던 손은 가만히 등을 두들겨 주는 손길로 바뀌었다.

“괜찮아. 다 끝났어.”

“흐흐흑.”

백리소옥이 도리질을 쳤다. 기다렸다는 듯 더 심하게 울었다. 그냥 떼어낼 것을, 하는 후회가 들었다.

‘어쩌겠어?’

그녀가 진정하길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

토닥토닥.

용무린은 그냥 말없이 백리소옥의 등만 두들겼다.

“흐흐흑. 허어엉.”

그럴수록 울음소리가 커졌다. 대성통곡으로 바뀌었다.

백리소옥도 스스로 놀랐다.

‘내가 대체 왜 이러지?’

지금 이 행동이 전혀 자신답지 않다는 것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어떻게 된 영문인지 절제가 전혀 되질 않았다.

수많은 밤 홀로 애끓던 연정이 한 순간에 터져 나왔기 때문일까?

거기에 더해 허무하게 가버린 사부님과 동문사형제들의 죽음, 더 나아가 죽음에 한 발 다가섰던 설움까지 한꺼번에 쏟아져 나와 어쩔 수 없었다.

팡! 팡!

“미워. 미워-어. 왜 이제야……. 흐흐흑.”

이제는 용무린의 가슴을 주먹으로 때리기까지 했다.

마치 용무린이 연인의 마음을 아프게 한 못난 사내처럼 보였다.

‘이거 오해하겠는데?’

모르는 사람들 눈에는 오래된 연인들의 흔한 애정 싸움으로 보일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쩝!’

용무린은 입맛이 썼다.

“……!”

“……!”

당현을 비롯한 당가의 고수들과 영은, 영선까지 놀란 토끼눈을 하고 있어서 더욱 그랬다.

훌쩍!

이제 어느 정도 감정을 쏟아냈는지 백리소옥이 빠르게 안정을 되찾았다.

‘난 몰라!’

빨갛게 물든 얼굴을 숨기려 고개를 푹 숙였다.

비로소 제정신이 든 것이다.

그제야 번득 사부님의 죽음이 떠올랐다.

“사부님!”

재빨리 보현의 주검을 향해 달렸다. 보현의 주검을 끌어안고 다시 울기 시작했다.

“흐흑. 사부니-임.”

“사부니-임. 흑흑흑.”

이번에는 영선과 영은도 합세했다.

싸늘하게 식어버린 보현의 주검을 부여잡고 참으로 서럽게 울었다.

“……!”

“……!”

용무린이나 당현을 비롯한 당가의 고수들도 뭐라고 할 말이 없어 그냥 지켜보기만 했다.

그녀들의 슬픔이 어느 정도 잦아지길 기다린 용무린이 당현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포권을 취해 보인 후 자신을 밝혔다.

“비룡문의 용무린입니다.”

“용 대협!”

당현의 눈이 동그래졌다.

드디어 마주한 당가의 은인을 향해 고함을 지르듯 포권을 취했다.

“당가의 가주 당현이 은인 용 대협을 뵈오!”

“은인 용 대협을 뵈오!”

“용 대협을…….”

당가의 고수들이 일제히 포권을 취하며 고개를 숙였다.

그 정중함이 피부에 와 닿을 정도였다.

‘당건에게 건넨 구환살 때문이로구나.’

그래도 예상을 뛰어 넘는 환대에 살짝 낯간지러웠지만 신세를 져야 하니 참기로 했다.

“상황이 이래서 당가의 신세를 조금 져야 할 듯합니다.”

“신세라니! 그 무슨 말씀을!”

그딴 소리 하면 되레 서운하다는 듯 당현이 눈을 부릅떴다. 고개를 흔들었다.

“당연히 당가로 가셔야지요.”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뒤돌아 외쳤다.

“세가로 돌아갈 것이다. 세현이 너는 어서 달려가 손님 맞을 차비를 하라 이르고, 또 여자 식솔들을 선별해 이곳으로 데려 와라. 아미파 여승들의 주검을 수습해야 한다.”

“예, 가주님!”

타닷.

대답과 동시에 당세현이 남쪽을 향해 신법을 펼쳤다.

“세중이는 형제들과 함께 이곳 뒷정리를 맡긴다.”

“알겠습니다, 가주님!”

똑 소리 나는 대답과 함께 당세중이 뒤돌아섰다. 형제들을 지휘해 혈교 마인들의 주검을 한데 모았다. 불에 태우려는 것이었다.

“먼저 가 있겠습니다, 은인. 천천히 오시지요.”

인사와 함께 당현이 먼저 출발했다.

심상치 않은 장면을 연출했던 백리소옥을 염두에 둔 배려였다.

“예? 아, 예.”

뭐라고 대답하기가 곤란했던 용무린은 그저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당가의 고수들이 엄청난 양의 나무를 구해와 쌓았다.

약소하지만 아미파의 여승들을 위해 다비식을 거행하려는 것이었다.

화르륵. 화륵. 화르르륵.

영은 영선의 처연한 염불소리와 함께 보현과 아미파의 제자들이 한 줌 재로 변해갔다.

***

서산에 해가 질 무렵이 다 되어서야 다비식이 끝났다.

보현과 사형제들의 뼛가루를 항아리에 고이 담아 든 백리소옥과 영선, 영은은 용무린의 뒤를 따라 성도 중심의 당가로 향했다.

그다지 활약한 것은 없지만 혈교와의 전투에서 승리한 것과 은인인 용무린의 방문에 당가는 모처럼 만의 활기에 차 있었다.

아미파의 피해를 생각해 잔치 분위기까지는 낼 수 없었지만 그에 준한 음식들이 준비되었고 엄청난 양의 술이 상에 놓였다.

물론 백리소옥과 영선, 영은은 무관했다.

인사만 한 후 조용히 자신들의 거처에 틀어박혀 내, 외상을 다스리는 일에 주력했다.

당가에서 제공한 치상단과 아미파의 중후한 내력 덕에 내상은 빠르게 잡혔지만 사부와 사형제들을 잃은 마음의 상처는 쉬이 가라앉지 않았다.

출가를 한 승려였지만 완전한 깨달음을 얻기 전인지라 죽음에 초연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백리소옥이 특히 그러했다.

“……!”

산사에서 오래 생활했던 영선과 영은은 비교적 냉정을 빨리 되찾았는데 백리소옥은 여전히 말이 없었다. 멍하니 창밖만 바라볼 뿐이었다.

“생사일여……. 삶과 죽음은 둘이 아니니 너무 슬퍼하지 말거라, 소옥아.”

“사부님과 사형제들은 모두 부처님 전에 드셨다. 슬픔 또한 허상, 너무 오래 붙들고 있어서는 아니 될 것이야.”

영선과 영은이 법문을 입에 올렸다.

“알아요. 하지만…….”

백리소옥이 말꼬리를 늘였다.

말 자체야 당연히 이해했지만 불가에 귀의한 사람이 아닌지라 가슴 깊이 와 닿지가 않았던 거다.

더더구나 용무린 때문에 너무 혼란스럽다.

사부님과 사형제들을 잃은 슬픔에 용무린으로 인한 혼란까지 더해져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모든 것을 이해한다는 듯 영선과 영은이 고개를 끄덕였다.

“안다, 알아.”

“혼란스러울 테지…….”

서로의 눈을 바라보며 빙그레 웃었다. 그러더니 생각지도 못했던 말을 입에 담았다.

“너는 우리와 함께 아미로 돌아갈 필요가 없다.”

“용무린, 용 대협을 쫓아가거라.”

“예에?”

백리소옥의 얼굴이 확 붉어졌다.

내심을 들킬 것 같아 부끄럽기도 했고 파문을 당했나 싶어 걱정도 되었다.

영선과 영은이 가만히 웃었다. 고개를 흔들었다.

“차마 떨쳐내지 못한 연정이 이제야 확실하게 존재감을 드러내었는데 어찌 인연이 다할 때까지 그와 함께하지 못하겠느냐?”

“용 대협과 함께 하여라, 소옥아.”

“사저! 그는 이미…….”

백리소옥이 목소리를 높였다.

그 순간 영은과 영선이 단호한 태도로 백리소옥의 말을 잘랐다.

“무얼 걱정하는 것이냐? 혼처가 결정이 됐다 하지만 정작 이루어진 것은 아무것도 없지 않느냐? 그는 아직 혼자의 몸이다.”

“영웅은 본디 삼 처를 거느리는 법. 그에게 반려가 있다고는 하나, 그를 향한 너의 마음이 전혀 거두어질 성질의 것이 아니라면 어찌 또 다른 반려가 될 생각은 하지 못한단 말이냐?”

“그와 함께하면 확실히 알게 되겠지. 속가제자를 탈피해 본산제자로 들어오게 될 것인지 아니면 그대로 인연이 오롯이 이어져 속세에 머물 것인지 말이야.”

“끊어낸 것으로 알았던 연정도 오늘과 같은 계기를 만나면 터져 나와 다시 이어진다. 반대로 영원할 것만 같던 사랑도 부질없이 끊어져 사라지기도 하지.”

“용 대협과의 인연이 어디까지 이어질 것인지 네가 직접 확인하거라.”

“후회와 미련만 품고 사는 것처럼 어리석은 것은 없다. 그럴 바에야 잠시의 슬픔을 맛볼지라도 차리라 확실히 확인해서 정리하는 편이 낫다.”

이어지면 그와 행복한 삶을 누리면 될 것이오, 그와의 인연이 아주 끊어지면 아미와의 인연이 다시 이어지는 셈이 된다.

‘그때는 속가제자가 아닌 본산의 작전제자로서의 인연이 다시 이어지게 되겠지.’

백리소옥의 삭발을 방해하는 것은 백리검가가 아닌 용무린이었으니까.

“……!”

백리소옥은 뭐라고 할 말이 없었다.

구구절절 맞는 조언들이 심장 깊숙이 스며들었다.

‘그 사람이 나를 받아 줄까? 내가 따라가는 것을 허락해 줄까? 제갈영령이 있으면서도 내가 곁에 다가오는 것을 그냥 두고 볼까?’

와락 걱정이 앞섰다.

‘그가 나를 받아 줬으면 정말 좋겠다.’

그래주면 얼마나 좋을까?

그를 쏙 빼닮은 아들과 딸을 낳아 함께 키우고 가시버시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다면?! 아마 이 세상을 다 가진 기분이리라.

그와 동시에 이런 생각도 들었다.

제갈영령과 혼사가 오가고 있으면서도 나를 받아들인다면 어쩐지 실망할 듯싶다. 양손에 떡을 쥔 사내의 바람기가 마음에 걸리는 것이다.

‘제갈영령을 제치고 나를 선택한다면, 그건 그것대로 또 걱정이 되겠지. 또 다른 여인이 나타나면 나 또한 제갈영령의 처지가 될 가능성이 있다는 뜻이 되니까.’

사저들의 말대로 영웅은 삼 처를 거느린다고 한다.

용무린이야말로 희대의 영웅!

그가 나와 제갈영령 중 누구 하날 선택하는 것 대신에 둘을 동시에 선택해 줬으면 하는 마음도 들었다.

‘그러면 령매의 얼굴을 내가 어떻게 봐?’

신주오가의 또래들 중 가장 마음이 잘 맞았던 동생이 바로 제갈영령이다. 그의 사내를 나눠가지게 되면 그녀의 마음이 얼마나 아프겠는가?

‘모르겠다. 정말 모르겠어.’

생각하면 할수록 머리가 아프기만 했다.

그러나 중요한 사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용무린을 포기해야겠다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는다는 점이다.

‘좋아! 일단은 그의 곁에 서겠어.’

사실 답은 이미 그렇게 나와 있었다.

‘인연이 이어지거나 완전히 끝이 나겠지.’

어느 쪽이 되든지 후회와 미련은 절대로 남기지 않을 생각이었다.

***

“하하하! 은인, 제 잔을 한 잔 받으시지요.”

“아, 예.”

꿀꺽!

“와하하. 역시 호쾌하십니다, 은인! 이번에는 저와 함께 잔을…….”

“예? 아, 예.”

꿀꺽!

백리소옥이 고민 끝에 중대한 결정을 내리고 있는 사이 용무린은 계속해서 당가의 수뇌부들과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젠장. 술 못 마셔 죽은 귀신이 붙었나? 왜들 이렇게 퍼마시는 거야?’

권커니 잣거니 마신 술이 벌써 서 말이 넘는다.

그동안 들었던 칭송과 감사 인사를 술로 따지면 서너 곱은 족히 더해야 하리라.

“……당가는 그런 식으로 눈에 보이지 않는 차별을 받아와야만 했습니다.”

그동안 무림맹으로부터 받아왔던 냉대에 대한 푸념도 들어줘야 했고,

“하지만 이젠 상관없습니다. 용 대협께서 당가와 친구가 되었으니 그 따위 냉대, 까짓것 해 보라지요!”

“와하하! 맞습니다. 은인께서 당가와 함께이거늘 무엇이 두렵겠습니까?”

칭송에 버무려진 청탁 엇비슷한 말도 계속해서 들어줘야만 했다.

‘아 씨, 더는 못 들어주겠다.’

좋은 말도 한두 번이지!

“저는 이만 들어가 쉬어야 할 듯합니다.”

용무린은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지를 남기지 않기 위해 누구와도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 정중히 포권만 취했다.

당가주 당현이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하긴, 오늘 전투가 조금 힘이 들었지요.”

힘들긴 개뿔!

‘멀거니 서서 풍뢰와 소검비연을 째려만 본 게 다인데?’

어디까지나 그건 내 입장이다.

전투야 풍뢰와 소검비연이 어도술과 어검술로 날아다니며 다 치렀지만 지금은 힘든 척이라도 해야 한다.

“그러게요. 조금 쉬고 싶군요.”

공연히 약한 체했나 싶다.

“혹여, 내상이라도?”

“당가의 치상단을 내어 드리리까?”

“운공요상을 할 생각이시면 호법이 필요할 터! 제가…….”

당가의 수뇌부가 요란법석을 떨었다. 여기저기에서 용무린의 휴식을 방해하려 들었다.

‘이러다가는 맘 편히 쉬지도 못하겠다.’

용무린은 손사래를 쳤다.

“호법은 필요치 않습니다. 그냥 주변만 조용하면 족합니다. 조용하기만 하면요…….”

닥치고, 그냥 나 혼자 있게 내버려 두라고 쫌!

“오오, 역시…….”

“운공요상에 호법도 필요 없는 경지라니!”

“정말이지 대단하십니다, 용 대협!”

여기저기에서 다시 찬사가 쏟아졌다.

‘그만 해라. 자꾸 그러니까 속이 더부룩한 게 당최 소화가 안 된단 말이다.’

“그럼!”

용무린은 잽싸게 그 자리를 벗어났다.

“보중하십시오, 용 대협!”

“필요한 것이 있으면 무엇이든 말씀만 해주십시오, 용 대협! 무엇이든 말입니다-아!”

용무린의 뒤통수에 끝까지 뜨거운 시선이 따라붙었다.

총총총.

용무린의 발걸음이 점점 더 빨라졌다.

***

외원의 가장 깊은 곳인 영빈각.

‘응?’

자신의 처소를 향해 들어서던 용무린의 눈이 살짝 가느다래졌다. 이제 좀 쉬겠구나 하는 찰나에 인기척이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누구냐 또?’

대번에 눈살이 찌푸려졌다.

하지만 찌푸려졌던 눈은 바로 동그래졌다. 생각지도 못했던 사람이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백리소옥!”

그녀였다.

미련과 후회를 남기지 않기 위한 걸음이었다.

“몸은 좀 어때? 괜찮아?”

어색한 미소와 함께 안부부터 물었다.

“……!”

대답 대신 백리소옥은 용무린의 눈에 시선을 고정했다.

말도 없이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했다.

‘와아! 정말 예쁘기는 하구나.’

제갈영령을 사랑하는 마음이야 변함은 없지만 인정할 것은 인정해야만 했다. 아미파의 보상신니가 금정이라 칭할 정도로 그녀의 미모는 독보적이었다.

‘령매와 우열을 가리기 힘든걸?’

갑자기 머리가 복잡해졌다.

어쩌자고 전생의 인연이, 굳이 떠오르지 않아도 되는 여인의 기억까지 떠올라 사람 마음을 시험에 들게 만드는 것일까?

왜 내 심장은 책임지지도 못할 말을 함부로 쏟아냈을까?

이제는 내가 지켜 주겠다니!

제갈영령이 두 눈 시퍼렇게 뜨고 있는데 그게 지금 가당키나 한 말인가?

‘어휴, 머리 아파라.’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무렵 백리소옥의 입이 가만히 열렸다.

“그때부터였어요.”

“응?”

“음적 요여립의 손에 낭패를 겪고 있을 때…….”

“아하, 그때?”

올 게 왔다.

예상하긴 했지만 절대로 나오지 않기를 바랐던 말이 백리소옥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나, 당신을 좋아해요!”

철렁!

용무린의 심장이 한 번 크게 내려앉았다가 겨우 다시 되돌아왔다.

‘빨리 좀 말할 것이지. 그랬다면 완전히 입장이 바뀌었을 텐데…….’

백리검가에서 내가 신마 진무량인 줄로만 알았을 때, 여인의 향기에 취해 아무에게나 산책을 가자고 하고 있었을 때 받아줬으면 좀 좋았겠는가?!

‘아니지. 그랬다면 내가 령매를 사랑하게 되지 않았을 거 아닌가?’

그건 안 될 말이다.

제갈영령이야말로 내 마음을 활짝 연 여인이다.

그녀에게 내 모든 비밀을 털어 놓았으며 함께 고민했고 해결책을 마련했으며 미래를 약속했다.

‘사내자식이 미색에 취해 내 여자를 배신하는 짓을 할 수는 없는 일이야.’

그런데 이상도 하지?

두근두근.

한 번 크게 출렁인 심장은 이내 기분 좋은 고동으로 바뀌었다. 너무 설렜다. 백리소옥의 반짝이는 눈에 한없이 빠져드는 것만 같았다.

‘전생의 인연 때문이야. 그 망할 놈의 환영이 하필이면 그때 쏟아져 나온 탓이라고.’

듣는 이 없는 변명을 해봤자 바뀌는 것은 없었다.

점점 고조되는 용무린의 심장소리를 들었는지 백리소옥의 입에서 더욱 대담한 말이 쏟아져 나왔다.

“나, 노력해 볼래요.”

“안 돼. 노력하지 마.”

나도 모르는 사이 차갑게 선을 그어 버렸다.

-이제는…… 이제는 내가 지켜 주겠다.

심장의 부르짖음을 번복하는 것 같아 마음이 걸렸지만 하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백리소옥이 생각지도 못한 반응을 보였다.

“싫어요.”

응? 싫다니?!

‘거기서 싫다는 소리가 왜 나와?’

안 된다고 하면 울면서 ‘미워요.’ 하고 도망치듯 사라져야 되는 거 아냐?

“……!”

황당함에 입이 쩍 벌어졌지만 백리소옥은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제 할 말만 했다.

“제갈영령. 참 좋은 아이예요. 순수하고 아름다우며 현명하고 사려가 깊죠. 이 세상에 현모양처가 한 사람만 존재한다면 바로 그 아이일 거예요.”

“그런데도 이래? 령매에게 미안하지도 않아?”

“그래서 내가 직접 만나보려고 해요.”

“뭐라고?”

거의 고함을 지르듯 되물었지만 백리소옥의 반응은 시종여일했다.

“인연이 어디까지 이어지는지 내가 직접 확인해 볼 거예요. 그 순간 죽는다고 해도 후회나 미련이 남지 않도록 말이에요.”

휙.

그 말을 끝으로 백리소옥은 다시 자신의 방으로 돌아갔다. 도망치듯 뛰지도 않았다. 당당하게 걸었다. 선전포고 후 돌아서는 장수의 기백이 느껴졌다.

“……!”

용무린은 한동안 멍하니 그 모습을 바라봐야만 했다.

***

다음 날 아침.

용무린은 백리소옥과 눈이 마주칠까 두려운 나머지 식사도 방으로 가져다 달라고 해서 먹었다.

섬서성과 아미파에서 전서가 당도했다는 소식을 받고 가주전으로 가는 와중에도 혹여 백리소옥을 보게 될까 이리저리 주변을 살폈다.

모두 우려였다.

어젯밤 이후 백리소옥의 모습을 볼 수 없었다.

‘아직도 내상이 다 낫질 않았나?’

슬그머니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내가 왜 걜 걱정해? 그거 사랑 아니야. 수컷으로서 가지는 욕망이야. 욕정이라고.’

홀연히 드는 생각을 떨치려 고개를 마구 흔들었다.

그렇게 도착한 가주전.

“다행입니다, 용 대협. 후퇴하던 아미파의 고수들을 모두 구했다는 소식입니다.”

당현이 전서를 내밀었다.

용무린은 재빨리 전서의 내용을 읽었다.

-아미파의 멸절승과 복호승 칠십이 명 구조.

무당파와 청성파의 합류로 혈교의 마인 팔십여 명 주살.

현재 인근을 돌며 혈교의 잔당이 남아 있는지 수색작업을 하고 있는 중임.

좋은 소식이었다.

보현의 희생으로 혈교의 많은 수를 유인한 덕이었다.

“이 기쁜 소식을 어서 빨리 백리소옥 소저께 전하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당현이 기쁜 목소리로 전서를 용무린에게 내밀었다.

품에 안긴 채 울고불고하던 백리소옥과의 사이를 지레짐작한 것이었다.

용무린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죄송하지만, 전서는 가주께서 다른 사람을 통해 보내주셨으면 합니다.”

‘후훗. 사랑싸움 했구나?’

“……흠. 알겠습니다.”

뭔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여 보인 당현의 입가에 작은 미소가 걸렸다.

‘그런 거 아니야! 아니라고-!’

용무린은 고함이라도 지르고 싶은 것을 겨우 참았다.

그때 당현이 다시 한 장의 전서를 내밀었다.

“여기 이것은 섬서성에 계신 개방의 화운 태상장로님께서 보내오신 것입니다.”

가장 궁금하던 전서였다.

‘보자, 놈들이 어떻게 움직이고 있을까?’

전서에 적힌 내용은 이러했다.

-보름 전 이십여 명의 고수들이 튀어나온 것을 제외하면 움직임이 없음. 이상하리만큼 고요한 상태임. 홍화장 인근에 포교활동을 하러 다니는 사제복 차림의 혈교인을 제외하면 이동사항 없음.

‘이 자식들 봐라?’

생각보다 장기전이 될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자신이 세워둔 성동격서의 계책도 단숨에 간파해낸 놈들이 지금껏 잠잠하다는 말은 또 다른 수작을 펴기 시작했다는 말과 같았기 때문이다.

‘또 무슨 짓을 하려고 잠잠하지?’

답답했다.

전서에 적힌 몇 줄 소식으로는 자세한 분위기를 파악할 수 없었던 것이다.

‘현장에 직접 있어야만 해.’

그래야만 시시각각 전해지는 개방과 각 문파의 정보들을 취합해 뭔가를 잡아낼 수 있다.

‘더 기다릴 필요가 있나? 가자.’

놈들이 움직이지 않는다고 나도 그럴 생각은 없다.

마교 놈들이 언제 튀어나올지 모르는 상황.

뒤통수 맞을 염려는 없어야 한다.

‘비룡문을 위해서도 그게 좋아.’

용무린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당현을 향해 하직인사를 했다.

“그간 고마웠습니다, 가주님. 저는 이대로 출발을 해야 할 듯싶습니다.”

“섬서성으로 가시렵니까?”

“예. 당장은 그래야 할 것 같습니다.”

“섬서성에 당가의 힘이 필요하시면 말씀하십시오, 용 대협. 즉시 달려가겠습니다.”

고마운 말이었다.

섬서성 아닌 그 어떤 곳이라 해도 독과 암기를 자유자재로 사용하는 당가의 고수라면 큰 힘이 되니까.

‘그래도 당가는 이곳을 정리하는 편이 좋아.’

무당파와 청성이 혈교의 잔당을 쫓고 있다고는 하지만 힘이 부칠 것이다. 청성은 본산이 불에 타고 그 뒷정리조차 끝나지 않았을 테니까.

‘청성의 고수들은 태반이 청성산으로 되돌아 갈 거야.’

불타버린 본산을 재건하려면 당연한 일이다.

‘그렇게 되면 무당파 혼자 남는데, 무당파는 수뇌부들 위주라 숫자에서 너무 부족하지.’

아미파에서 추가 고수들이 나온다 해도 마찬가지다.

넓디넓은 사천을 뒤지고 다니며 잔당을 정리하기 위해서는 더 많은 숫자가 필요하다.

‘더불어 막강한 정보망도 필요해.’

믿을 만한 많은 고수들과 정보력!

무당파에게 부족한 부분을 채우기 위해서는 당가가 적임이었다.

“가주께서는 사천의 기둥이 되셔야 할 것입니다.”

“사천의 기둥이요?”

“청성이 무너지고 아미 역시 피해가 큽니다. 혈교의 잔당을 뒤쫓아 주살하는 일을 할 능력이 당가 이외에 어디 또 있겠습니까?”

“맞습니다. 오직 당가만이 그럴 능력이 있지요.”

당현의 목소리가 불쑥 높아졌다.

용무린의 칭찬에 자부심이 폭발한 것이다.

“가주님만 믿고 가겠습니다. 무당파와 함께 혈교의 잔당들을 몰아내 주십시오.”

“염려하지 마십시오, 용 대협! 혈교의 잔당 따위 당가에서 책임질 것이외다!”

“유념하실 사실 한 가지는…….”

무당파의 자운진인에게도 그러했듯 용무린은 당현의 귀에 못이 박히도록 뇌화탄의 무서움과 대처법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

가주전을 나선 용무린은 백리소옥의 거처를 힐끗 한 번 보았다.

“그냥 가는 게 낫겠지?”

인사하러 들렀다가 괜히 엉겨 붙으면 곤란하다.

제갈영령을 볼 면목이 없게 된다.

“다음에 보자, 백리소옥. 그냥……. 그냥 행복해라.”

나와 함께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그녀가 행복했으면 좋겠다.

그런데…….

“어라?”

당가를 나선 용무린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왜 여기 나와 있어?”

방에 있는 줄로만 알았던 백리소옥이 떡하니 기다리고 있을 줄이야!

“왜 나와 있긴요? 나도 내 갈 길 가려고 그러는 거죠.”

내 갈 길 가긴 개뿔!

‘나 따라 오려고 그러는 거면서…….’

제 갈 길 가는 것이었으면 그냥 떠나면 된다. 나를 기다릴 필요가 없는 거다.

“그래? 그럼 잘 가.”

백리소옥을 무시하고 신법을 펼칠 생각이었다.

‘중간에 멈출 필요가 없는 나야. 내가 전력을 다해 신법을 펼치면 네가 따라올 수 있을 것 같아?’

그때 백리소옥의 입이 불쑥 열렸다.

“나도 섬서성이나 가봐야겠다.”

휘청!

막 신법을 펼치려던 용무린은 땅을 박차지 못했다. 허를 찔린 듯 비틀거렸다.

“섬서성에 우리 가문의 고수들도 함께 있다고 들었어요. 천월 오라버니와 숙부님이 계신다던데…….”

젠장. 그걸 깜박했다.

‘핑계로는 완벽하구나.’

백리소옥의 말이 계속해서 이어졌다.

“저도 오라버니와 숙부님 좀 뵈려고요. 다들 뵌 지 너무 오래 돼서…….”

에잇, 신경 끄자.

“그러시든지!”

용무린이 재차 신법을 펼치려 할 때였다.

백리소옥이 계속해서 용무린을 시험에 빠지게 만들었다.

“근처에 혈교 잔당들이 많다고 하던데 나 혼자 가도 괜찮을지 몰라…….”

부르르.

‘아오, 저걸 그냥!’

차마 신법을 펼칠 수 없었다.

지켜보던 백리소옥의 입꼬리가 보기 좋게 위로 말려 올라갔다.

“아, 몰라. 싸우다 안 되겠으면 그냥 죽지 뭐. 어차피 혈교의 악적이 내 몸을 탐하고 있을 때도 심장을 찔러 죽으려고 했었잖아.”

아예 대놓고 들으라는 말이다.

그러더니 용무린을 향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 아직도 안 갔어요? 가요, 어서.”

이런 씨, 너 같으면 갈 수 있겠냐?

별 수 없어진 용무린은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내가 좀 빠르다. 뒤처지지 않게 잘 따라와라.”

“어머? 저를 보호해 주시려고요? 호호호. 고마워라.”

어차피 그럴 생각으로 들러붙은 것이면서 저 여우 같은 표정 짓는 것 봐라! 사르르 녹을 것처럼 가느다래진 눈과 미소라니!

‘젠장. 그 와중에도 예쁘긴 참 더럽게 예쁘네.’

사내들이란 참 어쩔 수 없는 모양이다.

떨쳐내야 하는 것을 너무나도 잘 알면서도 여인의 아름다움에 눈이 쏠린다.

“간다!”

휘스스슷.

용무린이 먼저 신법을 펼쳤다.

“같이 가요!”

타다닷. 휘릭.

한 발 늦게 신법을 펼친 백리소옥이 그 뒤를 바짝 따라 붙었다.

“잘 한다, 백리소옥!”

“힘내!”

저만큼 뒤에서 지켜보고 있던 영선과 영은이 주먹을 불끈 움켜쥐었다.

“절대로 후회를 남기지 마렴.”

“최선을 다해라 소옥아. 인연이 이어지든 결국 끊어지든 그래야 미련이 남지 않는단다.”

기분이 묘했다.

속가제자였지만 너무나도 아끼던 형제자매를 잃어버린 느낌이랄까?

“인연이 이어질까?”

“부처님만이 아시겠지…….”

“이어졌으면 좋겠어. 소옥이를 위해서 말이야.”

“아니라면 본산의 직전제자로 다시 만날 수 있겠지. 아끼는 사매로서…….”

백리소옥이 다시 돌아오게 된다면 아미파는 쌍수를 들어 환영할 것이다. 아미일보 금정의 귀환이니 보상신니 역시 기꺼이 백팔염주를 물려주며 난피풍검법을 사사하리라.

***

‘아오, 내가 미쳐.’

얼마 가지도 못하고 용무린은 신법을 멈추어야만 했다.

예상했었던 것처럼 백리소옥이 자신의 뒤를 제대로 따라올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조금만 쉬었다가 가요.”

“운공을 좀 해야겠어요. 호법 좀 서주세요.”

“배가 너무 고픈데요? 뭘 좀 먹으면 안 될까요?”

신법을 펼친 후 두어 시진만 지나면 어김없이 저런 말들을 쫑알댔다.

‘혈교 잔당 운운하며 자진하겠다고 협박을 해대니 떼어 놓고 가기도 그렇고…….’

별 수 없이 그때마다 멈춰서야만 했다.

물론 이해를 하긴 한다.

혈교와 싸우며 입었던 내상이 아직 완전해지지 않았을 것이고 체력 역시 다 돌아오진 않았을 테니까.

“시간이 촉박하죠? 그런데 저 때문에 많이 늦어져서 어떻게 해요?”

백리소옥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바라봤다.

‘눈은 왜 그렇게 깜박거리는 건데?’

토끼 눈처럼 동그란 눈으로 깜박이니 그 와중에도 정말 오라지게 귀엽다. 아니 깨물어 먹고 싶을 정도로 어여쁘게 느껴졌다.

“어쩌라고?! 별 수 없잖아!”

내심을 감추기 위해 일부러 퉁명스럽게 말해야만 했다.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백리소옥이 배시시 웃으며 말을 이었다.

“좋은 방법이 있는데…….”

“좋은 방법? 뭔데?”

“날 안고 가요.”

“……!”

용무린의 입이 쩍 벌어졌다.

설마하니 그런 대담한 요구를 해 올 줄이야!

“꿈 깨라. 어지간히 내공 돌아왔으면 가자.”

매정하게 홱 돌아섰다.

백리소옥이 귀엽게 입을 삐쭉였다. 나직하지만 듣기에 충분할 만큼의 목소리로 쫑알댔다.

“피이, 바보. 좋은 기회인데…….”

움찔!

용무린이 눈에 뜨게 몸을 떨었다.

‘참자. 참는 자에게 복이 있다고 했다.’

용무린은 이를 악물고 신법을 펼쳤다.

물론 이번에도 역시 오래 달릴 수가 없었다. 두어 시진이 지나자 다시 백리소옥에게서 쉬어가자는 말이 쏟아져 나왔던 것이다.

결국 용무린은 백리소옥의 말대로 그녀를 안고 신법을 펼쳐야만 했다.

‘섬서성의 일이 급해서 그래. 정말이야. 믿어줘 령매.’

용무린은 제갈영령에게 끊임없이 소리 없는 변명을 하며 달렸다. 계속되는 백리소옥의 정신 고문에서 살아남으려면 별 수 없었다.

“속도가 너무 빨라요. 떨어질 것 같아요. 조금만 더 꼬옥 안아줘요.”

이러니 신법에 속도가 나려야 날 수가 없는 거다.

“손의 위치가 불편해요. 겨드랑이 안쪽으로 팔을 조금 더 밀어 넣어 보세요. 반대편 손도 허벅지 쪽으로 더 올려 주시고요…….”

무려 수백 년 동안이나 여인을 접해보지 못한 신세!

신체가 의지를 이겼다.

하초 어딘가에 불끈 힘이 들어갔다.

용무린은 속으로 울부짖었다.

‘령매! 내게 힘을 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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