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짧은 평화 그리고 억울함 (63/104)

3.짧은 평화 그리고 억울함

천양현 외곽, 혈교 본산 홍화장.

교주전의 분위기는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사천성에서의 일이 틀어진 것 때문이었다.

혈뇌는 두 볼을 타고 흘러내리는 땀을 닦아낼 엄두도 내지 못했다.

‘청성을 불태운 것까지는 좋았는데…….’

그 뒤가 문제였다.

남존 무당파가 가세했다고는 하지만 어떻게 그리 쉽게 다 쓰러져 버릴 수가 있나? 혈수존, 음혈마, 귀혈마, 혈살마군의 무위와 중진고수들의 힘을 생각하면 너무 기가 막혀 믿기지가 않을 정도다.

“현재 상황은?”

분노로 억눌린 혈마의 목소리에 혈뇌는 바짝 긴장했다.

바닥에 납작 엎드려 조심스레 말을 이었다.

“안타깝지만 귀혈마와 혈살마군은 산화한 것으로 파악되고 있습니다.”

꿈틀!

혈마의 눈두덩이 사납게 요동쳤다.

혈뇌가 살얼음판을 걷는 심정으로 보고를 이었다.

“두 사람이 이끌던 중진고수들까지 정파 놈들의 손에 당한 것으로 보입니다.”

후웅.

형언할 수 없는 힘이 혈뇌의 코앞으로 밀려왔다.

‘죽었구나.’

혈뇌가 눈을 질끈 감았다.

‘응? 왜 아직도 살아 있지?’

하지만 예상과는 달리 짓쳐들었던 힘은 자신에게 해를 끼치지 않았다.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되돌아갔다. 혈마가 마음을 바꾼 것이다.

“잘 나가던 계획이 뒤에 틀어졌으니 네 잘못만은 아니겠지. 혈뇌.”

쾅!

“말씀하소서, 혈마시여.”

혈뇌가 바닥에 머리를 찧으며 외쳤다.

“이번에는 문제가 뭐였느냐?”

“미지의 힘 때문입니다.”

혈뇌가 즉답을 토해냈다.

“미지의 힘? 그게 대체 뭐냐?”

“무당파의 저력이 큰 힘을 발휘한 것만은 사실일 것입니다. 아미파의 잔당들을 정리할 당시 청성과 합류를 한 무당파의 고수들 손에 밀려 혈신강령대법을 펼쳤음에도 많이 힘들었다는 전갈입니다.”

“그런데?”

“물론 그것 역시 계산에 들어 있던 것입니다. 무당파의 합류 소식에 뇌화탄이 그다지 큰 힘을 발휘할 수 없을 것이라는 생각 정도는 저도 했습니다.”

무당파 하면 떠오르는 무공인 면장!

부드러운 장법의 대명사인 그 공력으로 대응한다면 뇌화탄을 다시 되돌릴 수 있을 것이고 그러면 어느 정도 피해를 입으리라 생각했었다.

“하지만 귀혈마와 혈살마군은 그 경우가 완전히 다릅니다. 중량산 일대에는 무당파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미지의 힘이 개입을 했다?”

“그러합니다, 혈마시여.”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혈마가 불쑥 물어왔다.

“……그래서, 그 미지의 힘이란 게 대체 누군데?”

“속하는 그 힘의 정체가 요사이 무림을 뒤흔들고 있는 무림왕이라는 애송이일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무림왕? 황룡패주라던 그 애송이?”

“그러합니다.”

혈마의 고개가 갸우뚱 기울었다.

“그 애송이는 화산 인근에 있는 것 아니었어? 우리가 마영방에 있던 우리 애들을 구원하기 위해 지원군을 파견하면 뒤통수치려고 기다리고 있다고 했잖아!”

마영방 인근과 사천 성도와의 거리를 생각하면 그 짧은 시간에 장소를 옮겨 귀혈마와 혈살마군을 잡아냈다고 도저히 생각할 수 없었다.

‘나라면 모를까, 한낱 애송이가 어떻게…….’

이야기책에나 나오는 공청석유나 만년삼왕 따위로 삼시세끼를 때웠거나 뱃속에서부터 계속 무공을 익혀오지 않았다면 불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혈뇌는 단호했다.

흔들림 없는 목소리로 용무린에게 모든 화를 돌렸다. 물고 늘어졌다.

“마교가 오랫동안 공을 들였던 혈고를 무림맹과 황궁에서 일시에 거둬낸 장본인입니다. 이제는 그 애송이의 능력을 인정해야만 합니다.”

그때였다.

혈뇌의 판단이 옳다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겠다는 듯 전서가 도착했다. 무당파와 아미파 그리고 당가의 고수들에게 사냥당하며 쫓겨 다니던 혈교 중진고수들 것이었다.

-당가에 삼절일학 용무린 도착 확인. 당가 주변에 그 소문이 자자함.

-아미파를 구원하고 귀혈마와 혈살마군을 패퇴시킨 주역이자 당가의 은인이라 불리는 용무린이 당가에 머물고 있는 중임.

-사천의 무림인들과 무당파의 수뇌부들에게 쫓기고 있음. 용무린에게 귀혈마와 혈살마군을 잃은 형제들의 수난이 심각함. 쫓겨 다니다 하나씩 잡혀 죽어가는 형편임.

하나같이 용무린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이제는 의심의 여지가 없는 거다.

‘그 짧은 시간에 그 거리를 돌파했다고?’

혈교의 교주 혈마 나령의 눈매가 가느다래졌다.

무공에 입문한 지 이제 겨우 일 년 반 정도밖에 되지 않는 애송이의 무위가 자신과 비슷하다는 사실을 선뜻 받아들이기 힘들었던 것이다.

피식.

갑자기 혈교주 나령이 풀썩 웃었다.

“재미있겠군.”

혈뇌가 내심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휴우. 받아들이셨구나. 적의 존재를 인정하셨어.’

다행이었다. 적의 존재를 인정하지 못한다면 앞으로도 계속해서 뒤통수를 맞을 염려가 있지만 지금부터는 달라질 것이기 때문이다.

“혈뇌!”

“말씀하소서 혈마시여.”

“지금부터는 모든 계획에 용무린이란 애송이의 존재와 능력을 상정한 후 세워야 할 것이다.”

쾅!

“명심하겠나이다!”

혈뇌가 바닥에 머리를 찧는 모습을 지켜보던 혈뇌가 턱을 괴었다.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그러면 어쩐다? 본교의 중진고수들이 정파 놈들에게 사냥당하고 있다는데 이곳에 계속 틀어박혀 있을 수도 없고, 그렇다고 지원군을 파견하자니 뒤통수가 가렵고…….”

운신의 폭이 너무 좁았다.

한두 명 보내봐야 소용없는 일이었다. 적들의 숫자를 생각하면 몽땅 보내야 체면도 세우고 수하들의 목숨도 더 많이 살려서 돌아오게 될 것이다.

‘그렇게 하자니 녀석들이 빈집털이를 시도할 게 너무 빤히 보인단 말이야.’

빈집을 노려 쳐들어오는 정파 놈들을 물리칠 힘이야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기껏 키워놓은 세력이 소진되는 점이 아까운 것이다.

잠자코 듣고만 있던 대사제가 불쑥 입을 열었다.

“이번에야 말로 이보 전진을 위한 일보 후퇴를 할 때가 아닌가 합니다, 교주.”

꿈틀.

혈교주의 볼살이 요란하게 움직였지만 결국 화를 내지는 않았다. 혈교주 역시 상황 파악이 끝났기 때문이다.

대사제의 말을 혈뇌가 받았다.

“사냥당하는 중진 고수들은 분탕질을 위해 사천성에 남아 있으려니 그런 것입니다. 뒤로 물리소서, 혈마시여. 현재 상황으로는 제대로 된 분탕질도 치지 못합니다. 사냥당할 뿐입니다. 본교 복귀를 명하소서.”

한 사람 한 사람이 혈교의 중진 고수들이다.

분탕질을 위해 모습을 숨기지 않아서 그렇지 사천성이라는 공간의 제약과 분탕질이라는 특명을 거두면 오래지 않아 혈교로 돌아올 충분한 능력들이 있었다.

“재정비에 들어가야 할 때입니다. 화산과 종남 그리고 청성파와의 접전을 벌이며 뇌화탄의 재고가 많이 줄어들었습니다.”

그 문제의 해결이 사실 가장 시급했다.

조금 이른 감이 있는 혈교의 재림 선포의 자신감이 바로 그 뇌화탄인데 재고가 바닥나서야 말이 되겠나?

끄덕 끄덕.

결국 혈교주 나령의 고개가 끄덕여졌다.

“좋아. 그렇게 하지.”

입맛이 썼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사천성의 교도들에게는 본교 복귀 명령을 내리겠다.”

“충!”

“더불어 혈뇌에게 전권을 위임하니 뇌화탄 수급에 차질이 없도록 신명을 다해라. 내 수신호위는 물론이고 태상장로님까지……. 필요하다 생각되면 누구든 말을 해라.”

“감사합니다. 명심 또 명심하여 이루겠나이다.”

혈뇌가 감격한 목소리로 크게 외쳤다.

***

저 멀리 성남현이 눈앞에 들어왔다.

목적지였던 마영방이 그야말로 코앞인 거다.

‘크흑. 다 와 간다. 수고했다, 무린아.’

용무린은 감개무량했다.

백리소옥과 함께 오는 동안 그야말로 고난의 연속이었기 때문이었다.

품에 안고 신법 펼치는 것 정도는 이제 기본이었다.

시간 단축을 위해 직선경로를 택했는데 그 선상에 제대로 된 객잔이 있을 리 만무하지 않은가?

당연히 풍찬노숙을 했다.

잠들기 전, 백리소옥은 여자라는 이유로 강가나 냇가에서 씻었는데 그때마다 꼭 문제가 생겼다.

‘아오, 왜 꼭 수건을 안 챙겨 가냐고!’

함께 한 첫날 밤이었다.

장옷 소매에 넣어둔 수건 좀 가져다 달라는 말에 아무 생각 없이 들고 갔다가 놀란 것을 생각하면!

‘홀라당 벗고 목욕하고 있으면서 날 불렀을 줄은 정말 꿈에도 몰랐지.’

옷이란 옷은 깡그리 강변에 있었다.

설마, 설마 했다.

그런데 백리소옥이 물살을 가르며 다가오는 순간 비로소 알 수 있었다. 그녀의 몸이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나신이라는 사실을…….

반짝 반짝.

달빛이 반사되어 아름다운 빛을 뿌리는 강 물결.

그 사이 언뜻 언뜻 드러나는 백옥 같은 살결이라니!

넋이 나간 듯 굳을 수밖에 없었다.

어깨 어림까지만 내어 놓은 채 ‘거기에 놓아두세요.’ 라고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는 그녀를 보았을 때 내 몸이 어떤 반응을 보였겠는가?

어딘가에 터질 듯 힘이 들어갔다.

활화산처럼 후끈 달아올랐다.

‘령매! 내게 힘을 줘-어!’

불사신기 구결 외듯 제갈영령의 이름을 부르며 겨우 버틸 수 있었다.

피식.

“바보.”

어기적어기적 되돌아가는 나를 보며 백리소옥이 한 말이었다.

‘백리소옥이 그렇게 대담하고 화끈한 성격을 지녔는지 그때 처음 알았지.’

백리검가에서 봤을 때와 지금의 백리소옥은 전혀 다른 사람이라고 생각될 정도였다. 노력할 것이라는 말은 들었지만 그것이 이런 종류의 노력일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불을 피우고 잠이 들 때도 힘들기는 매한가지였다.

그래, 여자라도 잠버릇이 고약하면 이리저리 뒹굴거리며 잘 수도 있겠지.

‘그런데 구렁이 담 넘듯 다가와선 왜 꼭 내 허벅지를 베고 자려고 하는 거냐고!’

매정하게 내치려고도 했다.

실제로도 몇 번 멀찌감치 밀어 놓았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 어느 사이엔가 다가와 또 내 허벅지를 베고 잠을 청했다. 당최 불사신기 운공을 할 수가 없었다.

“사부님. 너무 보고 싶어요. 흐흐흑.”

그렇게 우는 통에 차마 끝까지 밀어내질 못했다.

솔직히 마음 한 쪽이 짠하기도 했다.

‘내가 그렇게 좋은가?’

전생에서부터 이어진 인연!

백리소옥은 모르겠지만 자신은 환영을 통해 똑똑히 지켜보았다. 전생의 내가 그녀를 얼마나 차갑게 대했는지, 또 얼마나 매정하게 잘라냈는지를…….

‘그래서 결국 따듯한 손길 한 번 받아보지 못하고 그렇게 전장의 이슬로 사라져야만 했었지.’

그 생각을 하면 마음이 편치 않았다. 밀어 내려다가도 손이 멈춰졌다.

‘그건 그런데…… 잠을 자려면 그냥 곱게나 잘 것이지 왜 나를 그렇게 자극을 하냐고!’

이제 잠들었다 싶으면 어김없이 팔을 벌렸다. 나를 끌어안았다. 내 몸에 얼굴을 최대한 밀착함과 동시에 부비부비를 시전했다.

그래, 산속이라 추운 것 다 안다.

하지만 그거 아냐? 나 그때 정말 너무나 힘들었다.

‘그때만 생각하면 정말?!’

수백 년 만의 일에 놀란 신체가 의지를 앞서 다시 반응을 보였다. 백리소옥이 부비부비를 할 때마다 그곳에 얼굴이 닿을까봐 얼마나 신경을 곤두세웠는지…….

‘내가 양의신공만 할 줄 몰랐어도 불사신공 일주천하다 주화입마에 빠졌을 거야.’

분심의 벽을 세워 절대검신의 의식에게 불사신공의 운공을 맡겼기에망정이지, 정말 위험한 순간이었다.

‘하지만 이젠 다 끝났어. 도착했다고!’

상념이 끝나는 순간 마영방의 정문이 눈앞에 있었다.

활짝 열린 정문이 어찌나 반가운지!

용무린은 냉큼 안으로 들어섰다. 기쁨에 겨워 웃음을 터뜨렸다. 크게 외쳤다.

“푸하하하. 화운 장로님! 효정 대사님! 일각 스님! 저 왔습니다.”

용무린의 등장에 마영방에는 일대 소란이 일었다.

이곳저곳에서 사람들이 마구 쏟아져 나왔다. 용무린을 반겨 주었다.

“왔나, 친……구?!”

“용 대협 오셨습니……?”

“오셨군요, 용 대……협?!”

“왔느냐? 수고했……?”

“……?!”

어째 사람들의 반응이 이상했다.

반가운 얼굴로 인사를 건네던 사람들이 하나 같이 뜨악한 얼굴로 바라보는 것이 아닌가?

백리천월도, 화운장로님과 효정 대사님도, 일각 스님까지도 모두 그랬다. 모두 입을 쩍 벌리고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뭐야? 대체 뭔데 그래?’

용무린이 영문을 몰라 고개만 갸웃 거릴 때였다.

백리천월이 불쑥 입을 열었다.

“친구. 도대체 내 여동생은 언제까지 품에 안고 있을 작정인가?”

“어헉!”

용무린의 입에서 비명이 터졌다.

이레 동안 내내 품에 안고만 다녔기 때문에 너무나 익숙해진 나머지 지금도 그녀를 안고 있다는 사실을 그만 깜박 잊어버렸던 것이다.

‘이 웬수야! 너라도 말을 하지. 어쩌자고 말도 안 했어?’

철퍽!

“악!”

백리소옥이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

너무 놀란 용무린이 급하게 내려놓는다는 것이 지나쳐 아예 던져 버렸기 때문이었다.

“소옥아!”

백리천월의 눈이 부릅떠졌다.

내던져졌으면 허리나 엉덩이가 아파야 정상일 터, 그런데 백리소옥은 어째서 아랫배를 보호하듯 손을 올려 감싸는 것일까?

그 동작이 의미하는 것은 오직 하나였다!

회임 말고는 없는 거다.

훅. 슥.

“……!”

“……!”

모두의 시선이 용무린에게로 향했다.

용무린은 당황한 표정으로 열심히 손사래를 쳤다.

“아, 아냐. 난 억울해. 아니라고!”

목이 터져라 외쳐 보았지만 어림없는 일이었다.

스르릉.

백리천월이 검을 뽑아들었다. 사납게 으르렁댔다.

“나와 대화를 좀 나눠야겠네, 친구.”

“나는 억울해! 정말 아니라니까?!”

“시끄럿!”

스파앙. 버언쩍.

다짜고짜 짓쳐 든 백리천월의 검 끝에서 백리검가의 비전검법 육양귀일검의 초식이 쏟아졌다.

***

신교 조사동.

가장 깊숙한 곳의 바닥에 찰랑 찰랑 피가 고여 있었다.

자시 생 동남동녀 일천의 정혈인 것.

실로 천인공노할 일이었지만 신마와 음양자는 무림정복에의 야욕에 아무렇지도 않게 그 일을 벌였다.

핏물의 중앙에 서른 남짓한 사내가 지그시 눈을 감은 채 운공수련 중이었다.

바로 당대 신마였다.

후우우. 휘이이.

바람 한 점 들어올 수 없는 곳이었지만 신마의 호흡에 따라 대기가 통째 움직였다. 끊임없이 빨려 들어갔다 밀려나오는 것을 반복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자시가 되었다.

보름달이 중천에 우뚝 선 시간, 갑자기 핏물이 부글부글 끓기 시작했다.

후우우웅. 휘이우우웅.

신마의 호흡에 따라 일렁이는 대기의 폭도 더 넓어졌다.

대기의 움직임은 조사동을 벗어나 불회곡 전체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일렁이는 기류를 따라 소름끼치는 마기가 소용돌이치며 조사동을 향해 빨려들었다.

그러던 어느 한 순간이었다.

쭈와악!

핏물에 포함된 붉은 색의 기운이 신마를 향해 쭉 빨려드는 것이 아닌가?!

환영이 아니었다.

신마는 자시 생 동남동녀 일천의 정혈을 자신의 몸으로 빨아들이고 있었다.

쭈악. 쭈와아악.

신마의 몸속에 무저갱이라도 열린 듯 그 핏물은 끝도 없이 흡수되었다.

쪼르륵.

마지막 한 방울의 피까지 깡그리 신마의 몸으로 자리를 옮겼다.

번쩍. 버언쩍.

신마의 몸에 기괴한 두 종류의 빛이 일렁이기 시작했다.

얼굴 한 쪽은 더 없이 상서로운 빛을 띠었다. 표정도 살아 있는 부처인 듯 온화하고 자비로워 보였다.

반대쪽 얼굴은 정 반대였다.

악마 그 자체!

보는 순간 오금이 저릴 만큼 무서운 얼굴에 마기와 악기가 엉겨 붙어 있었고 피부까지 어둠 그 자체인 양 검은 색이었다.

트드드. 트드드드드.

조사동 전체가 무너질 듯 몸살을 앓았다.

신마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미증유의 힘 때문이었다.

콰드드. 휘이우우웅. 콰아아-.

미증유의 힘은 조사동 밖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불회곡 전체가 덜덜 떨었다. 대기가 파도처럼 이리저리 출렁였다.

감히 상상조차 하지 못할 정도의 거력!

그때 다시 한 번의 놀라운 변화가 일어났다.

두 가지 상반된 기운이 어느 한 순간 신마의 내부로 스며드는가 싶더니 이내 완전히 사라져 버린 것이다.

그제야 신마의 눈이 떠졌다.

강렬한 광채도, 산을 뒤엎을 정도의 힘도 내비쳐지지 않는 눈동자. 맑기만 할 뿐 너무나도 평범해서 백면서생과 다를 바 없는 눈이 주변을 훑어보았다.

그 순간, 지진이라도 난 듯 몸살을 앓던 조사동과 불회곡 주변의 대기가 고요해졌다.

“……!”

너무나도 평범해진 자신의 육신이 신기한 듯 이리저리 살펴보는 신마!

샐쭉!

이윽고 신마의 입꼬리가 슬쩍 말려 올라갔다.

“크흐, 크흐흐흐. 흐하하하하!”

미소는 이내 광소가 되었다. 통쾌한 외침으로 바뀌었다.

“드디어 이루었다! 드디어!”

우르릉. 트드드드.

한 번 웃고 외쳤을 뿐인데 조사동이 다시 몸살을 앓았다.

불회곡의 대기도 그러할 것이다.

“규천마력과 불사신기를 완전히 하나로 엮었다. 이 힘이야말로 하늘도 무너뜨릴 수 있는 거력! 나는 이 힘을 불사마력이라 부르리라.”

쿠와아앙. 푸스스슷.

그저 한 번 외쳤을 뿐인데 조사동의 두터운 청강석 입구가 박살이 났다. 먼지가 되어 흩어졌다.

의형상인의 힘!

하지만 그 파괴력이 실로 무서웠다.

마음만 한 번 일으킨 것으로 석 자 남짓한 청강석 덩어리를 가루로 만들어 버리다니!

스르르.

신마의 몸이 떠올랐다.

깃털처럼 부드럽게 바닥에 내려섰다.

그렇게 하려 따로 내공을 움직이지도 않았는데도 저절로 그렇게 되었다. 신마의 의지에 동조된 대자연의 기가 알아서 움직인 결과였다.

신마가 조사동 밖으로 나섰다.

쾅!

내내 가슴 졸이며 기다리고 있던 음양자가 바닥에 이마를 찧었다. 감격에 겨운 목소리로 크게 외쳤다.

“대공을 이루심에 감축 드립니다, 신마시여!”

“……!”

신마가 음양자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빙그레 웃었다.

그러자 놀랍게도 고개를 처박고 있던 음양자의 몸이 저절로 일으켜졌다.

“그간 애썼다. 네 공이 컸어.”

“그 무슨 말씀을……. 속하, 그저 신마의 등천을 위해 신명을 다할 뿐입니다.”

신마의 칭찬에 음양자의 허리가 다시 숙여졌다.

이인자였지만 자신 앞에서는 한없이 낮추기만 하는 음양자의 모습에 흡족해졌는지 신마는 짐짓 엄한 목소리로 경고를 했다.

“너는 일인지하 만인지상이다. 절대 함부로 허리를 숙이지 말라.”

“가, 감당하기 어렵습니다, 신마시여. 저는 그저 신마의 종복일 뿐입니다.”

“하하하. 겸양은 그만하면 되었다.”

“……!”

“자, 나가 볼까?”

신마가 조사동 밖을 향해 몸을 돌려 세웠다.

기다렸다는 듯 음양자가 두 손으로 받쳐 들고 있던 정갈한 흑의를 입혀주었다.

스르르.

신마의 몸이 둥실 떠올랐다.

바닥에서부터 한 뼘 남짓 떠오른 후 조사동 밖을 향해 미끄러져 나갔다.

그 순간,

“신마 천세 천천세.”

“신마군림 천하앙복!”

우르릉. 쩌러렁.

신마의 출관만을 기다리고 있던 마인들이 오체투지를 한 채 부르짖었다. 그 소리가 어찌나 큰지 불회곡 전체가 떨릴 정도였다.

“……!”

신마가 제왕처럼 마인들을 굽어보았다.

흡족한 듯 고개를 끄덕이더니 이내 목소리를 높였다.

“오래 기다렸다, 나의 수족들이여. 이제는 아무것도 걱정할 것 없다. 나만 믿으면 된다. 나는 하늘에 올라 세상을 한 손에 틀어쥘 신마. 불사마력이 나와 함께하니 그 무엇도 신교의 앞을 가로막지 못하리라.”

“우와아아!”

“신마시여-!”

“믿나이다. 마신의 화신이시여.”

“신마군림! 천하앙복!”

신교의 마인들이 격정에 울부짖었다.

기다림은 이제 끝났다. 지금부터는 영원한 승리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

십만 마도인의 경배를 받은 신마가 태사의에 앉았다.

고개를 조아린 오궁이원의 주인과 오마종 그리고 신교의 핵심 수뇌부들을 굽어보았다.

그 위엄이라니!

오궁이원의 주인들의 허리가 더 깊이 숙여졌다.

그들보다 무공이 우위였던 오마종 역시 마찬가지, 감히 고개도 들지 못했다. 예하 마도인들의 생사를 관장하던 수뇌부들은 숨도 잘 쉬지 못했다.

너무나도 평범해 보이는 삼십 대 청년이었지만 그 안에 도사린 불사마력의 광포함을 본능적으로 알아차렸다. 다들 알아서 기었다.

신마가 갑자기 풀썩 웃었다.

수뇌부들과는 동떨어진 존재, 수뇌부라 할 수는 없지만 아니라고도 할 수 없는 애매한 존재와 눈이 마주쳤기 때문이었다.

신교 성녀!

마신이 내리는 신탁을 받는 상징적인 존재이되 사실은 신마의 핏줄을 이어야 하는 임무를 타고난 존재가 바로 성녀라는 여인인 것이다.

“모두 고개를 들어라.”

“감사합니다, 신마시여.”

“명을 따르나이다.”

그제야 고개를 드는 신교의 수뇌부.

신마가 대공을 이루기 전에는 그래도 제법 당당한 모습을 보여주던 그들이었지만 불사마력을 완성한 지금은 그 태도가 완전히 달라졌다.

마치 지옥에서 뛰쳐나온 자신들의 마신을 대하듯 경외감을 가지고 행동했다. 감히 신마를 향해 고개도 못 돌릴 정도로 몸을 사렸다.

물론 예외도 있긴 했다.

‘어멋?! 어, 어떻게 해. 눈이 마주쳤어.’

여인 특유의 호기심 때문인지 살그머니 신마를 바라보았던 성녀가 신마와 눈이 마주쳤다. 화들짝 놀라 다시 고개를 푹 숙였다.

성녀가 수줍은 소녀처럼 발갛게 두 볼을 물들였다.

도드라진 가슴과 뽀얀 살결을 함께 보니 어찌나 어여쁜지 신마의 시선이 한참을 성녀에게 머물렀다. 가슴을 타고 내려와 허리와 아래를 훑었다.

꿈틀!

신마는 생소한 기운이 치솟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수련에 몰두하느라 지금껏 단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종류의 기운, 바로 음욕이었다.

“음양자. 지금 상황은?”

음욕은 음욕, 할 일은 해야 했던 신마가 질문을 던졌다.

신마의 등 뒤에 시립하고 있던 음양자가 즉시 답변을 시작했다.

“오궁 소속의 힘이 이미 집결을 마쳤습니다. 그 세력이 각각 일천, 총 오천 명의 수족이 출동대기 상태입니다.”

“좋군.”

“내, 외원의 중진 고수들 역시 중원진출을 위한 선발을 마친 상태입니다. 그 수가 각각 일천오백, 합해서 삼천이 되옵니다.”

“오궁이원의 힘이 모두 합해 팔천이 되나? 그 정도면 충분하겠군. 모두 애썼어.”

신마의 진심 어린 칭찬이다. 늘어서 있던 모두가 몸을 떨었다. 감읍해 했다.

“그것이 끝인가?”

“아닙니다. 계속된 실험 끝에 마령인들을 목표로 했던 광마인의 수준까지 끌어 올렸습니다. 그 수가 오백입니다, 신마시여.”

“광마인 오백이라……. 크흣. 훌륭하다.”

“더불어 신교의 중원진출과 동시에 광동, 광서에 난립한 십여 개의 마도 문파들이 일제히 진격을 개시할 것입니다. 신마께옵선 적의 피를 밟고 군림만 하시면 될 것이라 사료됩니다.”

“자금 상황은?”

“누구도 몰래 운영 중인 상단과 흑상, 염상이 아직 건재합니다. 신교의 재정상황은 지금 최고수준으로, 가장 중요한 병장기의 수급과 각종 약재들의 수급은 항상 백 일 이상 버틸 수 있는 여유분을 확보하고 있습니다.”

“녹봉은 어떻게 하고 있지? 이렇게 다들 애를 써줬는데……. 섭섭지는 않게 주고 있겠지?”

“물론입니다. 그 어떠한 정파 놈들과 비교해도 대우가 좋을 것입니다.”

“그렇군.”

흡족하다는 듯 신마가 고개를 끄덕였다.

준비는 이미 완벽 그 자체였다. 더는 확인할 필요도 없을 정도였다. 그래서 아픈 곳을 한 번 찔렀다.

“몇 번의 실패가 있었지 아마?”

용무린을 두고 하는 말이었다.

“그 덕에 내 대공의 완성도 반년이나 뒤로 미루어졌는데…….”

신마가 말꼬리를 늘이자 모두 바짝 긴장을 했다.

불사신기와 규천마력이 합일을 한 불사마력 앞에 도무지 오금을 펼 수가 없었던 거다.

“그래도 이만하면 수고했다. 모두 애썼어.”

그것으로 점검은 모두 끝이 났다.

두근두근.

모두의 심장이 고동치기 시작했다

이제 신마의 입에서 명령만 떨어지면 언제나 꿈꿔왔던 중원 정복의 깃발을 세울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흠, 어떻게 할까나?”

어째서인지 신마의 입에서는 선뜻 중원 진출의 명령이 떨어지지 않았다.

신마가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불회곡을 벗어나 백 일. 그 정도면 충분히 천하를 내 것으로 바꿀 수 있는데……. 그 뒤에는 무얼 하지?”

신마의 고민은 바로 그것이었다.

가장 맛있고 탐나는 과일이 눈앞에 있었지만 그것을 취하고 난 뒤에 찾아올 권태감과 자극이 없는 삶이 눈에 보일 듯 그려졌던 것이다.

그리고 계속해서 성녀의 가슴이 눈에 밟혔다. 하늘같은 경지에 이르렀지만 신체는 이제 겨우 서른 살, 남자로서 혈기가 폭발할 때 아닌가?

‘그동안 내가 너무 금욕적인 생활을 했군.’

자신의 힘과 현재 신교의 전력이라면 천하는 주머니 안에 들어 있는 물건 신세와 다르지 않다. 언제든 마음먹고 진격 명령을 내리면 백 일을 넘기지 않고 거머쥘 수 있는 능력이 있다.

‘하나밖에 남지 않은 금단의 과일을 성급하게 먹고 난 후 아쉬워하고 권태로운 삶을 사는 것보다는 달콤한 기대감을 조금 더 유지하는 것이 더 좋지 않을까?’

신교의 숙원이야 누구보다도 더 잘 안다.

하지만 중원 정복은 현재 자신에게 남은 마지막 자극이자 활력소인 셈, 그것을 성급하게 이루면 그 뒤가 너무 심심할 것만 같았다.

‘크흐흐. 아껴 먹는 것도 나쁠 것은 없지.’

꿀꺽.

신마가 마른침을 삼켰다.

시선은 계속해서 성녀의 가슴과 둔부를 향해 있었다. 풍만하고 탐스러운 모습이 계속해서 생소한 무엇인가를 자극했다.

‘그래. 모든 것은 나의 뜻 아니던가? 그동안 수련에만 집중하느라 금욕적인 생활만 했으니 당분간만 몸과 마음을 편히 쉬도록 하자.’

쉬고 있노라면 중원 정복에의 달콤한 기대감 역시 점점 더 높아지리라.

“신교의 중원 정복에의 숙원을 익히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지난 세월 수련에만 전념하느라 심신이 조금 피곤하구나. 잠시만, 아주 잠시만 쉬어야겠다.”

“……!”

“……!”

모두의 눈이 동그래졌다.

지금 당장에라도 출동을 할 줄로만 알고 있던 음양자 역시 놀라 얼굴색이 살짝 변할 정도였다.

하지만 감히 뉘라서 신마의 의지에 반대할 수 있겠나?

일제히 고개를 조아리며 복종했다.

어차피 신마가 대공을 이루고 출관했으니 중원 정복은 시간문제일 뿐이었으니까.

“뜻대로 하소서, 신마시여.”

“신마군림. 천하앙복.”

스르르.

수하들의 경배를 받으며 신마는 허공에 몸을 띄웠다.

신마각을 향해 방향을 튼 후 지나가는 말처럼 불쑥 입을 열었다.

“성녀는 나와 면담을 좀 하자.”

“예? 아, 알겠습니다, 신마시여.”

어떤 의미를 지닌 면담인지 단숨에 알아차린 듯 성녀가 활짝 웃었다. 보기 좋게 붉어진 얼굴로 신마의 뒤를 따라 사라졌다.

***

용무린에게 쏟아졌던 오해는 한 시진을 넘기지 않고 모두 해소되었다.

의원은 아니었지만 이곳에 모인 고수들의 능력은 맥문을 통해 내공을 흘려 넣어 회임의 여부를 가려내기에 충분했기 때문이었다.

“아오, 그러게 내가 아니라고 했잖아!”

“……!”

“……!”

아무도 용무린의 신경질에 반박하는 사람이 없었다.

화운대사나 효정대사를 비롯해 모두가 용무린의 시선을 피했다.

“오해도 유분수지, 누구 혼삿길을 막으려고…….”

“혼삿길을 막긴? 그냥 데리고 살면 되지.”

“뭐야?!”

“……!”

불쑥 토를 단 백리천월은 용무린이 째려보자 먼산바라기를 했다.

“거 좋소, 용 대협. 나는 찬성이외다. 모르긴 몰라도 우리 가주 역시 쌍수를 들고 환영할 것이오.”

백리건후마저 가세했다.

“장로님!”

물론 용무린이 목소리를 높이자마자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모른 체했다.

‘아 놔…….’

용무린의 신경질은 오래가지 못했다.

몇 장의 전서가 연거푸 날아들었기 때문이었다.

-홍화장의 움직임은 잠잠함.

식재료를 비롯한 생필품 구매의 유동인력만 있을 뿐 우려할 정도의 이동은 없음.

-사천성 일대에서 포교랍시고 분탕질을 치던 혈교의 고수들이 일제히 북상 중. 아무래도 홍화장으로 복귀하려는 것으로 보임.

-도주하는 혈교 잔당 추격 중.

하지만 적들의 실력이 만만치 않기에 전 무림의 힘을 모아 천라지망을 펼치지 않는 한 모두 다 잡아내기 힘들 것으로 보임.

‘이것 봐라? 실컷 재림선포를 한 놈들이 다시 홍화장으로 기어들어 간다고?’

거기에 더해 홍화장은 잠잠하기만 하단다.

‘그렇다면 가능성은 크게 두 가지로 집약되나?’

하나는 첫 번째 시도가 실패로 돌아간 것을 인정한 후 홍화장을 중심으로 점진적으로 세력을 넓혀간다.

‘둘은 재정비 후 힘을 모아 다시금 섬서성이나 사천성을 도모한다, 쯤 되겠지.’

용무린은 어쩐지 놈들의 내심을 알 것만 같았다.

뭘 하려는 것인지 빤히 들여다보였다.

피식.

‘새끼들, 머리 굴려 봤자 거기서 거기야 인마.’

나였어도 그런 선택을 내렸을 것이다.

‘두 번째를 택하겠지?’

놈들의 호전성으로 보아 어쩌면 당연한 결론이리라.

‘어떤 식으로 재정비를 할까? 놈들이 어떤 점을 보강하려고 들까?’

첫 번째 가능성을 택한다고 해도 재정비는 필수다.

답이 나오기까지 오래 걸리지 않았다.

피식.

“그거구나.”

용무린이 풀썩 웃음을 터뜨렸다.

“뭔데 그래?”

“같이 좀 알자꾸나 무린아.”

백리천월과 화운장로가 바로 보채기 시작했다.

용무린이 한마디 툭 뱉었다.

“뇌화탄!”

“제길, 말만 들어도 섬뜩하다야.”

“크흠. 무서운 물건이지.”

이 자리의 모두가 화산의 일을 직접 겪었으며 뇌화탄의 위력을 똑똑히 보았다.

화산은 겨우 지쳐낼 수 있었지만 종남과 청성은 본산이 불타올랐다. 아미파 역시 뇌화탄 때문에 멸절승과 복호승이 많은 피해를 입었다.

뇌화탄은 그만큼 큰 위력을 지닌 무기였다.

우려하지 않을 수 없는 거다.

“일단 제 생각은 이래요.”

용무린은 자신의 생각을 하나하나 풀어 보였다.

놈들의 현재 움직임을 보면 점진적인 진격과 재정비 후 다소 공격적인 거점 확보로 요약되는데 자신 같으면 후자를 선택할 것이라고 밝혔다.

“그러기 위해서는 당연히 뇌화탄의 수급이 필수라고 봐요. 제깟 것들이 마교도 아니고, 숫자에서 이미 엄청난 열세잖아요. 그 공백을 메우기 위해 뇌화탄은 필수예요.”

“그렇다면 뇌화탄의 수급을 막으면 되겠구나.”

“당연하지. 부족한 고수의 숫자와 틀어진 몇 번의 일을 원하는 방향으로 되돌리기 위해서는 가장 먼저 뇌화탄 수량부터 채우려 할 거야.”

효정대사와 화운장로가 우려를 쏟아냈다.

“걱정이로구나. 네 말대로라면 뇌화탄은 군부, 그것도 감숙의 전장에서 흘러나온 것일 텐데…….”

“군부의 실세가 제멋대로 하는 일을 우리 무림인이 어떻게 제어한다는 것이……?”

무엇을 떠올린 것인지 말을 잇던 살계승 효정대사와 화운장로의 시선이 한 곳으로 향했다. 용무린을 발견하곤 빙그레 웃었다.

“맞아. 우리에게는 황룡패주가 있었지?”

“거, 무림왕이라고 해줍시다.”

효정대사의 중얼거림에 화운이 토를 달았다.

‘젠장. 그 말이 왜 안 나오나 했다.’

내심 한숨을 한 번 내쉰 용무린이 목소리를 높였다.

“그렇지 않아도 제가 직접 총병관을 만날 생각이었어요. 그분이라면 틀림없이 감숙성의 군부를 발칵 뒤집어 놓을 수 있을 거예요.”

“오오, 양업장군의 후손인 양문광 장군 말인가?”

“확실히 그 사람밖에는 없겠지.”

“총병관 양문광 장군이라면 틀림없이 감숙의 거친 군부세력도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총병관이라는 말을 입에 담자마자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사람됨과 능력을 믿는 것이었다.

“뇌화탄이야 네가 총병관을 만나 해결을 한다고 하고……. 우리는 어떻게 해야 좋으냐?”

“홍화장에 웅크리고 있는 놈들의 전력이 얼마나 되는지 알지도 못하는 처지에 그냥 공격해 들어가기에는 피해가 너무 클 것 같은데.”

“그렇다고 홍화장으로 집결하려는 놈들의 중진고수들을 잡기 위해 움직이기도 뭣해. 이곳에 모인 힘을 빼내면 놈들이 이때다 하고 몰려나와 이곳의 거점을 확고히 하려 들 테니까.”

놈들 태도가 너무 급격히 바뀐 탓에 이렇게도 어설펐고 저렇게도 우려가 되었다.

용무린이 명쾌한 해답을 내놓았다.

“그냥 현 상태만 유지하고 계시면 돼요.”

“……응? 현 상태만?”

“정말 이대로 있어도 된다고?”

효정 대사와 화운의 고개가 갸웃하고 기울었다.

언뜻 이해가 되질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백리천월은 달랐다. 듣는 순간 그 말이 무슨 뜻인지 바로 깨달았다.

“그렇군. 일종의 고착상태에 빠진 것이니 그냥 지키고 있기만 하면 되는 것이었어.”

“바로 그거지.”

용무린이 환하게 웃어 보였다.

“아군의 피해를 줄이고 퇴각하는 놈들에게 더욱 심한 타격을 주려면 길 두 개 정도는 열어 놓아야 하겠지?”

“맞아. 퇴로 한 개는 너무 빤해. 몰려드는 놈들이 발악을 할 거야. 그런데 퇴로가 두 개라면 이야기가 달라지지. 다른 쪽 숨구멍도 있으니 어지간만 하면 몸을 빼내려 할 거야. 전투의지에 구멍이 생기는 거지.”

“그때를 노리면 확실히 피해가 적겠군. 알았어.”

척하면 착이었다.

용무린과 백리천월은 굳이 자세한 설명이 없이도 서로의 마음을 잘 읽어냈다.

“허허허. 선재, 선재라…….”

“클클클. 이제 조금만 더 있으면 나는 뒷방에서 편히 쉬고만 있어도 되겠구나. 좋다. 좋은 일이야.”

효정대사와 화운장로가 흡족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회의는 그렇게 마무리가 되었다.

홍화장의 포위망은 그대로 고착시켜 둘 것이다.

더불어 퇴각하는 혈교 중진고수들에게 더 큰 피해를 입히며 정파연합의 피해를 덜기 위해 두 곳을 완전히 비워두기로 했다.

퇴각하는 혈교 고수들은 그 두 곳으로 빠져나가기 위해 몰려들 것이고 막다른 길이 아님을 알기에 전투의지 역시 느슨해지리라.

놈들의 힘을 뭉쳐지지 않고 분산시키는 효과도 있으니 그 효과는 배가 될 거다.

그 사이 용무린은 혈교의 뇌화탄 재보급 문제를 가로막기로 했다. 총병관을 찾아 전말을 밝히고 그의 힘을 움직이려는 것이었다.

‘그분이라면 틀림없이 움직여 줄 거야.’

양문광은 황제와 나라만 생각하는 무장이었다.

그런 성격에 감숙의 군부실세가 흑색화약을 대량으로 빼돌린 사실을 알게 된다면 절대 그냥 두고 보고만 있지는 않을 터였다.

“그러면 저는 출발해 보겠습니다.”

더 기다릴 것도 없다는 듯 용무린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벌써 가려느냐?”

“하루라도 쉬었다가 가지 그러냐?”

효정대사와 화운장로가 아쉬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

물론 용무린은 아니었다.

‘하루라도 빨리 이 귀찮은 일을 마무리 지어야 내가 우리 령매랑 알콩달콩 지낼 수 있단 말이지.’

어쩌다 보니 엮인 일, 어서 빨리 마무리를 짓고 제갈영령을 찾아가고 싶었다.

‘방건 그 망할 놈의 인간 때문에 방해 받았던 역사적인 순간만 생각하면!’

지금도 울화가 치밀어 오른다.

무려 수백 년 만에 찾아온 기회였고 거사 성공 일보직전이었다.

한데 그 역사적인 순간을 방해 받다니!

‘그런데 의성은 어느 곳을 택했을까?’

지금쯤이면 방건이 원하는 곳으로 잘 모셔다 드렸을 시간이었다.

“화운장로님. 방건 그 망할 놈의 인간에게서 연락 온 것 있나요?”

“응? 방건?”

용무린이 어재서 방건에게 적의를 드러내는 것인지 알 수 없었던 화운장로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면서도 즉시 말을 이었다.

“그 녀석, 지금 네 집에 가 있다.”

“예? 저희 집이요? 비룡문?”

“그래.”

“거긴 또 왜요?”

“왜긴? 네가 그랬다며? 의성 그 양반에게 물어서 원하는 곳에 모셔다 주라고 말이야.”

“그러면…….”

의성 신우량이 비룡문을 택한 모양이다.

짐작이 맞는다는 듯 화운이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그래. 의성이 비룡문을 선택했어. 네가 혈고에게서 자유롭게 해줬고 또 너만이 혈고라는 마물을 자유자재로 제어할 수 있으니 네 곁에서 안전을 보장받으며 평생 무림에 진 빚을 갚고 싶다고 했다.”

“……!”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는 듯 용무린은 그저 고개만 끄덕여 보일 뿐이었다.

‘나쁜 선택은 아니네.’

그 정도가 아니다.

의성으로서는 일생일대의 패를 잡은 셈이다.

용무린의 신념은 아생연후살타, 그 누가 되었든 비룡문의 식솔이 된 의성을 건드린다면 그 순간 놈은 죽었다고 봐야 하는 거다.

“그러면 고생들 하고 계세요.”

“그래, 너도 수고하려무나.”

“다녀와, 친구. 이곳은 빈틈없이 지키고 있을게.”

“그래. 믿고 간다.”

용무린은 그렇게 마무리를 짓고 밖으로 나섰다.

‘어서 가서 총병관을 뵌 후 제갈세가로 가자.’

예상대로라면 폭풍전야처럼 잠시간의 평화로운 시간이 이어질 터, 그 사이 생각만으로도 절로 미소가 지어지는 제갈영령과 함께 방해받았던 역사적인 순간을 다시 되살려 볼 작정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도 역시 바로 출발할 수 없었다.

어찌 알았는지 마영방의 정문 앞에 백리소옥이 떡하니 버티고 서 있었던 것이다.

‘젠장. 불안하게시리 왜 또 서 있는 거야?’

이제는 백리소옥의 얼굴만 봐도 가슴이 조마조마하다.

어떤 핑계로 들러붙을지 또 어떤 당돌한 행동으로 나를 놀라게 할지 몰라서였다.

“잘 지내. 나는 좀 바빠서…….”

휙.

말과 동시에 용무린은 찬바람을 일으키며 백리소옥을 지나쳤다. 그런데…….

성큼.

백리소옥이 함께 걸음을 내디뎠다. 어림없는 수작 말라는 듯 말을 이었다.

“잘 지내기는요? 저도 갈 건데요?”

“네가? 벌써? 오랜만에 오라버니와 숙부님 뵈려고 온 거잖아?”

백리소옥은 당당하기만 했다.

“아까 뵀잖아요.”

그거야 그렇다. 분명히 보긴 봤다, 진맥하면서.

그건 그런데…….

“하룻밤도 안 지났잖아. 대체 어딜 가려는 건데?”

“그걸 왜 궁금해 해요? 혹시 막 나 따라다니려고 그러는 거예요?”

그걸 지금 말이라고!

“아오, 모르겠다. 맘대로 해, 맘대로.”

성큼.

용무린은 신경질적으로 발을 내디뎠다.

그때 백리소옥이 지나가는 말처럼 뜻밖의 말을 쏟아냈다.

“아! 우리 령매 보고 싶다. 이참에 제갈세가로 놀러나 가 볼까?”

움찔! 휘청!

정신적인 충격에 용무린은 다시금 발을 헛디뎌야만 했다.

홱 고개를 돌려 백리소옥을 노려보았다.

“너……!”

백리소옥이 되레 고함을 빽 질렀다.

“왜요? 내가 평소 친하게 지내고 좋아하는 령매를 보고 싶어서 찾아가 보겠다는데 왜 노려보고 난리예요?”

“……!”

그렇게 말하니 할 말이 없었다.

평소 친하게 지내는 사이, 보고 싶어서 찾아가겠다는데 말리고 나설 명분이 없는 거다.

“아, 어서 갈 길 가요. 나는 나대로 갈 길 갈 테니까.”

젠장. 발이 떨어지질 않는다.

‘가서 령매에게 무슨 소릴 하려고…….’

그 걱정에 길을 떠날 수가 없다.

졸졸졸.

백리소옥의 뒤를 따라 움직였다.

“갈 길 가라는데 왜 따라오고 난리예요? 안 바빠요? 무지 바쁜 척했잖아요.”

“바빠. 무지. 그런데……. 에잇, 몰라. 하여간 나도 이쪽 길로 가야만 해.”

총병관이 있는 곳은 북경에서 반나절 거리.

시간을 줄이려면 직선으로 달려야만 했지만 용무린은 결국 돌아가는 길을 택했다.

피식.

“힘내라, 동생아. 잘 하고 있다.”

멀어져가는 백리소옥과 용무린을 바라보며 백리천월은 흐뭇하게 웃었다.

***

“불안해. 불안해. 불안해…….”

북경으로 가는 내내 용무린은 그 말을 되풀이했다.

백리소옥의 뒤를 따라 돌아가는 길을 택했지만 결국 제갈세가까지 함께 가지는 못했다.

백리소옥이 제갈영령에게 무슨 헛소리를 할 것인지 궁금하고 걱정도 되었지만 혈교의 뇌화탄 재보급을 막는 일이 더 중요했기 때문이었다.

“정보의 성격상 전서를 보낼 수는 없어. 내가 직접 찾아가서 대화를 나누는 편이 더 좋아.”

군부의 일이었지만 자신의 도움이 필요해질 수도 있다.

감숙의 전장을 휘젓는 실세들이라면 중앙이라고 할 수 있는 총병관의 입김도 큰 위력을 발휘하지 못할 테고 또 여차하면 칼을 돌릴 수도 있는 일이었으니까.

“분위기를 봐서 여차하면 고수급들만 따로 움직여야 할 수도 있어.”

감숙의 지휘권자들이 검을 거꾸로 돌리면 그야말로 큰일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나갈 것이며 그 혼란을 노려 혈교와 마교 역시 행동을 개시하리라.

“나와 양총병관과 유격장군 양경홍이면 되겠지?”

조금 더 편하려면 양가장의 세 장로까지 함께 움직이면 충분할 것이다. 상황이 어떻게 바뀐다 하더라도 충분히 머리를 쳐버린 후 판도를 바꿀 수 있다.

“백리소옥. 제발 헛소리만 하지 마라. 부탁이다.”

간절한 마음을 담아 기원하며 용무린은 북경 인근에 자리한 양가장으로 향했다.

***

이레 후.

용무린이 북경 어귀에 도착할 무렵 백리소옥은 제갈세가에 도착할 수 있었다.

“언니!”

“영령아!”

백리소옥의 방문 소식에 제갈영령이 한 걸음에 달려 나왔다. 서로 손을 맞잡고 방방 뛰었다. 일 년 육 개월만의 해후를 만끽했다.

“언니가 아미파로 가셨다는 말을 듣고 깜짝 놀랐어요. 곧장 머리라도 깎으실 줄 알고, 다시는 볼 수 없나 싶어 걱정했단 말이에요.”

“걱정은……. 아직은 속가제자 신분이야.”

“호홋. 그 찰랑찰랑한 머리 보니 알겠네요.”

“머리를 깎고 싶기도 했는데, 차마 떨쳐내지 못한 것이 있어서 아직은 고민만 하고 있어.”

“그러셨구나. 일단 안으로 들어가요, 언니.”

“그래. 고마워.”

제갈영령과 함께 백리소옥은 제갈세가 안으로 들어섰다.

두근두근. 쿵쾅쿵쾅.

전장으로 입성하는 듯 백리소옥의 심장이 마구 두방망이질 쳤다.

‘잘 하자 소옥아. 힘내. 너는 할 수 있어.’

백리소옥은 계속해서 전의를 다졌다.

용무린의 마음을 돌리는 것도 어려운 일이었지만, 제갈영령을 설득하는 것 역시 그에 못지않게 지난한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같은 여인의 입장에서 생각해봐도 보통 일이 아니었다.

생각해 봐라.

사랑하는 사내를 나눠가지겠다는데 그 어떤 여자가 흔쾌히 허락해주겠는가?

“……?!”

백리소옥을 힐끗 돌아보는 제갈영령의 고개가 갸우뚱 기울었다. 어쩐지 백리소옥에게서 전과는 아주 다른 그 무엇인가가 느껴진 것이다.

‘설마?’

제갈영령의 뇌리에 몇 가지 정보가 스쳐 지났다.

용무린이 요여립의 손에서 백리소옥을 구해줬던 일과 청성산 인근에서 용무린이 다시 한 번 목숨을 구해줬다는 정보였다.

‘아냐. 아닐 거야.’

제갈영령은 애써 치밀어 오르는 우려를 털어냈다.

하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자꾸만 불안해졌다.

여인의 예감이란 이렇듯 무서웠다.

제갈세가의 가모인 손청하에게 먼저 인사를 드리고 난 후 제갈영령과 백리소옥은 나란히 방으로 향했다.

“……!”

제갈영령이 말없이 차를 끓였다.

그토록 반갑게 백리소옥을 맞았을 때와는 사뭇 다른 분위기였다.

“……!”

백리소옥 역시 어색한 듯 입을 열지 못했다.

그 어색함이 싫었던지 제갈영령이 불쑥 질문을 던졌다.

“아미파는 어때요?”

“아미파?”

백리소옥의 표정이 묘해졌다.

보현의 따뜻한 가르침과 영선 영은과의 우애를 비롯해 행복했던 기억이 스쳐 지났다. 그리고 이어서 청성산에서 비통하게 간 보현과 많은 사매들까지 떠올랐던 것이다.

찌릿.

그 생각만 하면 심장이 아려온다. 먹먹했다.

백리소옥은 애써 감정을 추슬렀다. 일부러 환하게 웃으며 답했다.

“좋은 곳이야. 너무…….”

“……!”

제갈영령은 아미파의 이야기를 더는 물을 수가 없었다.

백리소옥의 눈가에 그렁그렁 고여 드는 눈물을 봤기 때문이었다.

‘내 실수구나.’

어색한 분위기를 벗어나려 던진 질문이었는데, 미처 보현을 염두에 넣지 못했다.

‘이런 맹추. 청성산 인근에서 벌어진 일을 이미 알고 있는데 어째서 그런 질문을 했담?’

평소라면 저지르지 않을 실수였다.

그만큼 제갈영령의 마음에 여유가 없다는 뜻이었다.

눈앞의 여인이 자신의 남자를 탐내고 있다는 여인의 직감은 이렇듯 평소 현명한 제갈영령마저 조바심에 실수를 하도록 만들었다.

“……!”

“……!”

다시금 어색한 침묵이 찾아들었다.

잠시 후 이번에는 백리소옥이 먼저 활로를 찾았다. 옛 이야기로 분위기 반전을 시도했다.

“그때 령매가 우리 집에 왔을 때 말이야…….”

“아! 맞다. 그랬었지요? 호호호호.”

일 년 육 개월 전의 이야기로 먼저 웃음꽃을 피웠다.

어렸을 때부터 서로 왕래를 해온 터라 추억도 많았기에 제법 많은 시간을 옛이야기로 채울 수 있었다.

하지만 누구도 용무린이라는 이름을 먼저 입에 올리지 않았다. 마치 그러기로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본능적으로 입에 올리길 꺼려했다.

‘설마, 아닐 거야. 소옥 언니가 그럴 리 없어. 언니는 용 가가를 싫어했었단 말이야.’

그렇게 생각을 하면서 제갈영령은 용무린의 이야기를 일부러 피했고,

‘미안해, 령매. 하지만 나도 어쩔 수가 없어.’

백리소옥은 백리소옥대로 밀려드는 죄책감에 선뜻 먼저 말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

“……!”

옛 이야깃거리가 떨어지자 다시 한 번 침묵이 찾아왔다.

백리소옥이 입술을 깨물었다.

‘언제까지 이렇게 있을 수는 없어.’

결심을 굳힌 백리소옥이 먼저 입을 열었다.

“있잖아, 령매. 나……. 령매에게 할 말이 있…….”

“듣고 싶지 않아요.”

제갈영령이 냉정하게 말을 잘랐다. 발딱 일어나 창가로 갔다. 창밖에 보이는 화원을 바라보며 부탁했다.

“그냥……. 예전처럼 그냥 좋은 언니로 남아 있어줘요.”

제갈영령의 목소리가 찌르듯 백리소옥의 심장 속으로 파고들었다.

‘눈치 챘구나.’

너무 미안했다. 하지만 해야만 했다.

그렇게 하려 이곳까지 찾아 온 것이기 때문이었다.

“후회나 미련 따위 하나도 남기지 않기로 했어. 그러니 들어줘 령매.”

“……!”

“나, 그 사람 좋아해. 아니 사랑해.”

철렁!

제갈영령의 심장이 한 차례 크게 뛰었다.

‘역시 그랬어. 소옥 언니 역시 용 가가를 사모하고 있었던 거야.’

예감이 어쩜 이리 잘 들어맞는 것인지!

백리소옥의 말이 계속해서 이어졌다.

“성산지약을 앞두고 있을 때였어. 령매도 알다시피 그 당시 나는 선대의 약속에 얽매어 원하지도 않는 사내와의 혼사를 강요받았었지.”

제갈영령도 잘 아는 이야기였다.

당시 그 혼사를 너무나 싫어했던 백리소옥이 자신에게 한탄을 하며 괴로워했었기 때문이다.

“그 혼사를 피하기 위해 아미로 떠나려 했었어. 그러다가 요여립이라는 음적과 혈견사흉에게 붙잡혔었지. 늑대를 피하려다가 대호에게 걸린 셈이랄까?”

그때가 다시 생각나는지 백리소옥이 눈을 감았다.

환상처럼 악적을 뒤로 밀어내고 나타난 용무린의 당당한 뒷모습이 떠올랐다.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 했었지. 그런데 잘 안 됐어. 검을 목에 가져다 댔는데……. 마음은 벌써 열 번도 넘게 베었는데……. 현실은 달랐어. 벨 수가 없었어.”

“……!”

“그렇게 음적 요여립의 손에 청백지신을 더럽혀질 처지에 용무린 그 사람이 나타난 거야. 그리고 놀라운 무력과 기지로 나를 구해줬어.”

“이제 그만. 듣기 싫…….”

고함을 지르며 돌아선 제갈영령은 끝까지 말을 잇지 못했다. 백리소옥이 환하게 웃는 얼굴로 뜨거운 눈물을 펑펑 흘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때부터 사랑하게 됐어. 운명처럼.”

“……!”

“청성산 인근에서도 그랬어. 혈살마군이라는 음적이 사부님을 해한 후 또 내 몸을 탐했어. 하지만 염려 없었어. 이번에는 정말 잘 죽을 자신이 있었거든. 한 번 경험이 있었기 때문이야. 그런데 그 사람이 또 나를 살렸어.”

아미파에서 수행을 하면서도 못내 잊지 못한 사내.

달 밝은 밤이면 떠올라 수련을 방해하던 바로 그 사내가 나를 향해 뜨겁게 외쳤다.

“이제는, 이제는 자신이 나를 지켜준다고 했어.”

분명히 그랬었다.

용무린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심장에서부터 치솟아 오른 말이었다.

“그게 무슨! 그, 그럴 리 없어요. 내가 있는데 용 가가께서 왜 언니에게 그런 약속을 한단 말이에요?”

“사실이야.”

“……!”

제갈영령의 눈에도 뜨거운 눈물이 흘렀다.

백리소옥의 눈물과는 종류가 달랐다. 배신감과 상심 그리고 비련의 눈물이었다.

“물론, 그 뒤에는 전혀 다른 태도를 취했어. 령매 이야기를 하며 나를 잘라냈어. 무턱대고 밀어냈지. 내가 아무리 유혹해도 끄떡없었어.”

백리소옥은 하나도 거짓 없이 사실을 이야기했다.

섬서성으로 가면서 자신이 유혹했던 방법과 용무린의 반응과 대처를 가감 없이 밝혔다.

‘그러면 그렇지!’

그제야 제갈영령의 얼굴에 빛이 되돌아왔다.

멈춰버리려던 심장이 겨우 다시 힘을 찾아 뛰었다. 눈물을 훔쳐내며 백리소옥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백리소옥의 목소리가 계속해서 이어졌다.

“지금 이 자리는 내 마지막 노력이야.”

“……!”

“령매. 나는……. 나는 앞으로 령매를 언니라고 부르고 싶어. 부탁이야. 허락해줘.”

털썩.

백리소옥이 제갈영령 앞에 무릎을 꿇었다.

“이렇게 애원할게. 내가 령매를 언니라 부르는 것을 허락해줘. 아니라면, 그게 죽을 만큼 너무 싫다면, 그냥 내 머리카락을 잘라줘. 그대로 속세를 떠날게. 아미파로 떠나 비구승이 되어 영원히 사라져줄게.”

“……!”

제갈영령은 뭐라고 말을 할 수가 없었다.

허락해주지 않는다면 그 길로 비구승이 되어 버리겠다니!

‘정말 너무 간절하구나. 나만큼이나 용 가가를 사랑하고 있는 것이었어.’

백리소옥의 절절한 마음을 그제야 모두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감성일 뿐 이성은 여전했다. 절대로 용납할 수 없었다.

‘내 님을 나눠가지게 해 달라고? 안 돼. 싫어.’

남은 나누어도 님을 나눌 수는 없는 거다.

제갈영령은 마구 고개를 흔들었다.

그때 백리소옥이 불쑥 이런 말을 했다.

“내가 낮출게. 아니, 지금부터 언니라고 할게요. 언니라고 부를 수 있게 해줘요.”

“소옥 언니! 어떻게 그런…….”

“다른 사람이 나를 어떻게 보든 그건 상관없어요. 영웅은 삼 처를 거느린다고 하잖아요. 언니만 괜찮다면 내가 두 번째가 될게요.”

“말이야 그렇죠. 하지만 삼처사첩을 거느리는 것은 한 나라의 왕에게나 해당되는 이야기예요. 대체 누가…….”

“그분도 왕인데요? 무림왕?!”

“……!”

제갈영령이 순간적으로 할 말을 잃었다.

‘그거 말 되는데?’

한 나라를 지배하는 왕은 아니었지만 용무린은 황제로부터 직접 무림왕을 제수 받았다. 오군도독부를 한 손에 틀어쥔 전시총병관 양문광조차 무림왕이라 인정한 사내가 바로 용무린인 것이다.

‘지금도 용 가가께서 무림의 중대사를 거의 좌우하시고 있지. 마교의 음모를 분쇄했고 혈교가 재림했어도 기를 펴지 못하고 있는 것 역시 용 가가의 공이 가장 커.’

머지않은 미래, 용무린은 모든 무림인들로부터 진정한 의미의 무림왕으로 추앙받게 될 것이다. 그것은 희망이나 막연한 추정이 아닌 기정사실이다.

‘에잇, 몰라. 그래도 아닌 건 아닌 거야.’

그래서 결국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미안해요, 언니. 언니의 마음은 너무나 잘 알겠지만, 그래도 싫어요. 거절하겠어요.”

“……!”

백리소옥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한 채 그저 뜨거운 눈물만 펑펑 흘렸다.

“하지만 머리도 자르지 않을 거예요. 연모하는 사내를 얻지 못했다 하여 머리를 자르다니요? 그것은 부처님을 속이는 일이라 생각해요.”

한참을 더 흐느끼던 백리소옥이 이내 마음을 추슬렀다.

눈물을 닦고 입을 열었다.

“그래도 여지는 남겨 주시네요.”

백리소옥은 여전히 말을 높였다.

‘내 말 어디에 여지가 있지?’

제갈영령의 아미가 위로 살짝 치솟았다.

“더 노력하라는 의미로 받아들일 게요.”

“소옥 언니. 내 말은 지금…….”

기가 막힌 제갈영령이 다시 목소리를 높일 때 백리소옥이 자르고 들어왔다.

“그분도 그랬어요. ‘이제는 내가 지켜주겠다.’ 고 하셨지요. 그런 후 한순간에 돌변해서 저를 차갑게 대했어요. 하지만 결정적으로 밀어내진 않으셨죠.”

“……!”

“그분께 제가 그랬어요. 후회나 미련을 남기지 않을 정도로 노력해 보겠다고요. 언니에게도 마찬가지 말씀을 드리겠어요.”

“소옥 언니!”

“손수 머리를 잘라주지 않았으니 노력해 볼게요. 언니가 저를 두 번째로 받아들이도록 말이에요.”

그 말을 끝으로 백리소옥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밖으로 나섰다. 손청하에게 하직 인사도 하지 않은 채 그대로 길을 떠났다. 백리검가를 향해서였다.

“……!”

한참동안 멍하니 있던 제갈영령의 눈에 점점 빛이 되돌아왔다.

“뭐가 어쩌고 어째? ‘이제는 내가 지켜주겠다.’ 라는 말까지 하셨다?!”

생각하면 할수록 열이 뻗쳤다.

그 뒤에는 물론 앞에서의 말이 무색할 정도로 냉정하고 차갑게 대했다지만 그래도 화가 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나를 두고 어쩌자고 그런 말을 해?”

백리소옥은 육탄공세까지 펼쳤다고 한다.

달밤에 강가에서 알몸 목욕을 했고 그녀의 나신을 자신의 남자에게 다 보였다고 했다.

생각만 해도 아찔하다.

그 유혹에 용무린이 헬렐레 넘어갔어 봐라.

“게다가 허벅지를 베고 자게 해줬다고? 아직 나도 베어보지 못한 내 낭군의 허벅지인데?”

어쩌나 화가 나는지!

“오기만 해봐. 주-욱-었어!”

손톱에 절로 힘이 들어갔다.

상상 속에서는 벌써 용무린을 열 번도 넘게 꼬집고 할퀴었다.

***

오싹! 부르르.

활짝 열린 양가장으로 들어서던 용무린이 돌연 몸을 가늘게 떨었다.

“어찌 그러십니까?”

“예? 아닙니다, 아무것도.”

“……?”

“요즘 하도 풍찬노숙을 많이 했더니 고뿔이 오려나 봅니다. 하! 하! 하!”

의아한 듯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어오는 양문광을 향해 용무린은 어색한 웃음을 터뜨렸다.

양문광은 그냥 한 번 풀썩 웃고 말았다.

용무린 정도 되는 무위를 지닌 사내가 고뿔이라니!

‘이미 한서가 불침일 터인데…….’

한마디로 말도 안 되는 이야기인 거다.

‘흐음. 나를 찾은 이유가 그 물건 때문인가?’

한 가지가 번득 떠올랐다.

‘뇌화탄!’

십중팔구는 그 물건 때문일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굳이 자신을 찾아 올 이유가 없다.

어지간한 일이라면 그 놀라운 일신의 무력과 무림맹을 비롯한 정파 무림의 힘만으로도 충분히 해결이 가능했을 테니까.

‘일단 확실한 이야기를 들어보자.’

어서 빨리 용무린의 이야기가 들어보고 싶어졌다.

군부의 정보망을 통해 이미 들어 본 이야기였지만 눈으로 직접 보고 겪은 용무린의 판단은 또 다를 테니까.

하지만 어쩔 수 없이 뒤로 미뤄야만 했다.

“용 대혀-업!”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자신의 손녀 양하린이 나는 듯 뛰어 나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잘 한다, 내 손녀! 기회가 찾아오면 놓치지 않고 잡아야 하는 거야.’

용무린의 입에서 나올 이야기가 중요한 것임을 모르는 바는 아니나 자신의 손녀딸에게 이 정도의 기회도 주지 못할 정도는 아니다.

‘그 문제 때문이라면 이미 움직이고 있지.’

양문광은 슬그머니 먼저 차를 권유했다.

“일단 서재에 가서 차를 나누시지요, 패주. 보통 중한 사안을 가지고 오신 것이 아닌 듯한데, 잠시 기다렸다가 경홍이와 함께 듣는 것이 좋겠습니다.”

“예? 아, 예. 그게 좋겠네요. 어차피 유격장군님께서도 아셔야 될 이야기니까요.”

그렇게 양문광의 서재로 이끌린 용무린.

“용 대협! 오늘은 무슨 일로 오셨나요? 설마, 제가 보고 싶어서 오신 건가요?”

용무린의 코앞까지 바짝 얼굴을 들이민 양하린이 되도 않는 말을 지껄였다.

‘야! 말이 되는 소릴 해라. 네가 보기 싶기는 무슨!’

백리소옥의 일만 해도 머리가 복잡한 상태다.

지금쯤 제갈세가를 찾아 령매와 만났을 터인데 어떤 말을 했을지 상상하기도 버겁다.

‘그런데 거기에 너까지 끼려고?’

제갈영령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짐작도 안 간다.

오싹.

그냥 등에 소름만 돋을 뿐이다.

“용 대협. 강호는 어떤 곳이죠? 궁금해요. 강호 이야기 좀 해주세요.”

곁에 붙어서는 귀찮을 정도로 질문을 던져댔다.

‘아오, 그냥 좀 가라. 귀찮다.’

성질 같아서야 눈이라도 부라리고 싶지만 빙그레 웃고 있는 양문광 때문에 그럴 수도 없다.

“강호요? 뭐, 다 똑같습니다. 무림도 역시 사람 사는 곳이니까요.”

그래서 대충 얼버무렸다.

“피이.”

양하린이 실망한 듯 예쁘게 입을 삐쭉였다.

그런데 참 이상도 하지.

‘거, 예쁘긴 하네.’

귀찮긴 무지 귀찮은데, 제갈영령 때문에 온 신경이 곤두서 있기는 한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눈앞의 양하린이 어여쁘게 느껴졌다.

물론 양하린을 어떻게 해야겠다, 혹은 양하린이라는 여인에게 욕심이 생겼다, 라는 뜻은 아니다.

‘나는 지금 령매와 백리소옥의 일만으로도 머리가 복잡해 인마. 너는 제발 좀 빠져줘라. 응?’

한 사람의 사내로서 계속해서 옆에서 쫑알거리고 웃어대는 그 모습이 예쁘게 보이긴 한다는 뜻이다.

“뭐? 용 대협이 오셨다고?”

“그렇습니다. 지금 서재에서 가주님과 영애와 함께 담소를 나누고 계십니다.”

“뭐라? 하린이 말이더냐?”

“그렇습니다.”

“호오.”

막 퇴청해서 집에 들어온 양경홍의 눈이 가느다래졌다.

“그렇단 말이지?”

양경홍 역시 양문광과 비슷한 생각을 한 것이다.

“푸흐흐. 잘 하고 있다, 하린아. 자주 오는 기회가 아니니 마음껏 매력 발산을 해 보거라.”

용무린의 고난은 그렇게 조금 더 길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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