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훼방꾼의 정체 (64/104)

4.훼방꾼의 정체

양하린은 확실히 매력이 있는 여인이었다.

“그래서 그때 할아버님과 제가 어떻게 했느냐 하면 말이에요……?!”

쫑알쫑알 꾸밈없이 어린 시절의 추억을 이야기하는데 표정과 몸짓에서 활기가 흘러 넘쳤다. 목소리도 통통 튀는 것이 남다른 귀여움이 있었다.

‘령매가 품위 있는 국화라면 백리소옥은 풍요로운 모란과 같고 쟤는 귀여운 살구꽃이 연상이 되네.’

하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살구꽃이고 나발이고 자신의 인생에 또 다른 여인이 끼어들어 골머리를 썩이는 것은 절대 사절이다.

‘미안하지만 이제 끝내야겠다.’

용무린은 얼굴에서 웃음기를 거둔 후 양하린에게 묵직한 목소리를 발했다.

“소저. 이야기는 잘 들었소만, 내가 지금은 총병관님께 긴히 드릴 말이 있소이다.”

“아! 그래요? 미안해요. 저는 그런 줄도 모르고…….”

양하린이 얼굴을 살짝 붉혔다.

조금은 당황스러운 얼굴로 자리에서 발딱 일어났다.

“그, 그러면 말씀 나누세요.”

허둥지둥 문을 찾는 모습을 보니 마음이 불편했다.

괜스레 자신이 나쁜 남자가 된 듯해서였다.

그래서 잽싸게 말을 덧붙였다.

“나머지 말씀은 대화가 끝난 후 들려주시면 좋지 않을까 합니다만…….”

“예?”

“물론 소저만 좋으시다면 말이오.”

“예! 좋아요. 그럴게요.”

붉어진 얼굴에 울상이었던 양하린의 얼굴이 복사꽃 피듯 확 피어났다.

‘젠장. 또 실수한 것 같은데…….’

양문광의 체면을 생각해서 그렇게 이야기를 꺼낸 것인데 왠지 또 한 번 내 발등을 찍은 기분이다.

‘에잇, 몰라. 그냥 이야기만 들어주고 끝내지 뭐.’

별 거 없다. 딱 거기까지만 할 거다.

“그러면 말씀 나누세요. 용 대협, 이따 봬요. 꼭이요.”

웃음을 되찾은 양하린이 활짝 웃으며 밖으로 나섰다.

그때만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얼마 있지도 않아서 양경홍이 서재 안으로 들어섰다. 그 모습을 보자마자 느낌이 팍 왔다.

‘양 소저가 나가자마자 바로 밀고 들어와?’

일부러 때를 맞추지 않았다면 불가능한 상황이다.

‘이 양반들이 지금!’

양하린에게 일부러 기회를 주었다는 뜻!

신경질이 팍 솟구쳤다.

‘그렇지 않아도 백리소옥의 일로 골머리가 다 아파 죽겠는데…….’

물론 양문광이나 양경홍이 그걸 알 리가 없다.

그래서 이번에는 그냥 넘어가기로 했다.

양하린이 귀여운 가운데 가슴도 풍만하고 허리는 잘록하며 다리로 이어지는 선이 아름답게 쭉 빠졌고 피부는 백옥 같으며 치아 또한 하얗고 가지런해 상큼한 매력을 풍기는 데다 커다란 눈동자 또한 초롱초롱한 빛을 마구 뿜어낸다고는 하지만 그래봤자 흔들릴 자신도 아니었으니까.

‘음. 내가 너무 자세히 봤나?’

잠시 반성을 한 용무린은 이내 용건을 꺼내들었다.

“마교에 이어 혈교라는 사이한 단체가 팔십여 년 만에 재림을 선포했습니다.”

용무린은 혈교가 재림을 선포하게 되기까지 과정과 그 뒤에 벌어진 여러 전투, 그때 등장한 뇌화탄의 위력 등을 간략하게 간추려 말했다.

“……!”

“……!”

양문광과 양경홍의 안색이 시시각각 어두워졌다.

보고를 들어 이미 알고 있긴 했지만 설마하니 뇌화탄이란 기물의 위력이 그 정도일 줄은 미처 몰랐던 것이다.

‘흑색 화약을 그렇게까지 발전시킬 수 있었군.’

‘정말 놀라운 발명품이지 않은가? 이용하기에 따라서는 한 나라의 운명까지 뒤바꿀 수 있겠어.’

군과 군이 맞붙는 대단위 전투야 당연히 화포를 능가하는 병기는 없다. 하지만 화포 공격 이후 대단위 병사들이 맞붙는 전투에서는 이야기가 달라진다.

‘뇌화탄을 소지한 일종의 특공조를 편성해 대기시킨 후 병사들과 병사들이 맞붙을 때를 노려 일제히 던지게 하면 어떨까?’

‘대충 천 명쯤 준비하고 있다가 한꺼번에 던지면 적의 선봉을, 아니 주력의 일각이라 해도 단숨에 무너뜨릴 수 있을 것 같은데?’

선봉과 주력의 일각을 단숨에 무너뜨린다?

그렇게 할 수만 있다면 전쟁은 그것으로 끝이 난다.

무너져버린 선봉과 주력의 일각 속으로 밀려든 기마대와 창병들이 종횡무진 휩쓸 수 있으니 적들은 사분오열해 뿔뿔이 흩어지리라.

‘실로 무서운 물건이야.’

‘절대로 강호의 무부들이 가져서는 안 되는 무기지.’

그런 귀물이 있다면 오직 군부에서만 가지고 나라를 지키는 일에만 사용해야 한다.

“아시겠지만, 군부의 정보망 역시 개방 못지않습니다.”

“아! 맞다. 그랬지요?”

양문광이 운을 떼자마자 용무린은 탄성을 쏟아냈다.

‘이런 멍청이. 왜 그 생각을 하지 못했담?’

혈고로 인한 혼란 때문에 아직은 무림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었을 것이다.

‘전서만 한 장 보내놓고 나는 그대로 제갈세가로 가도 됐었는데…….’

그랬다면 백리소옥이 헛소리를 하지 못하도록 막을 수도 있었으리라.

‘음. 그건 좀 힘들었을까?’

과거와는 완전히 달라진 백리소옥의 행동을 생각하면 자신이 제갈세가에 함께 있었어도 그녀를 말리지 못했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더 심난했을 수도 있었겠구나.’

헛소리를 펑펑 쏟아낼 백리소옥.

그 소리를 들으며 당황하거나 혹은 분노할 제갈영령의 눈빛을 어떻게 감당하겠는가?

‘그냥 여기로 온 것을 다행으로 알아야 할 수도 있겠네.’

용무린의 상념은 오래가지 않았다. 양문광의 목소리가 바로 이어졌기 때문이다.

“뇌화탄이라는 기물이 등장했다는 정보에 군부가 관련되어 있음을 직감했습니다.”

“아시다시피 뇌화탄의 기본은 흑색화약. 그것은 오로지 군부에서만 생산하고 유통할 수 있는 품목이니 당연한 일입니다.”

“흑색화약을 만들어내는 화기창은 오군도독부의 관할 하에 이만 명의 정병이 철통같이 에워싸고 있으니 비밀이 밖으로 새어 나갈 수는 없습니다.”

“가능성이 있다면 오직 하나뿐이지요.”

“완성된 흑색화약이 필요한 곳에 배치된 후 사후관리에 구멍이 생겼을 때뿐입니다.”

용무린의 고개가 크게 끄덕여졌다.

“저와 같은 생각을 하셨군요. 저 역시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사후관리가 잘 못 되는 곳을 통해 흑색화약이 흘러나왔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양문광이 빙그레 웃으며 되물었다.

“혹시 그곳이 어디쯤인지 짐작이 되십니까?”

용무린이 기다렸다는 듯 즉답을 했다.

“흑색화약 자체야 군의 화포에서 사용하는 귀물이니 화포가 있는 곳이라면 어느 곳에나 존재하겠지만 가장 많이 쓰는 곳은 역시 전장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저는 흑색화약이 감숙의 전장에서 흘러 나왔다고 확신합니다.”

자잘한 국지전이 벌어지는 곳은 북원과 맞닿아 있는 국경선을 따라 쭉 펼쳐져 있지만 그래도 전투의 규모가 가장 큰 곳은 역시 감숙의 전장이었다.

“역시 같은 생각이었군요.”

“저희도 패주와 같은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지금 은밀히 내사를 진행하고 있는 중입니다.”

“수개월 전 황궁의 일로 내렸던 전시체제 전환의 명령을 빌미로 전시물자 일제 점검을 계획하고 있습니다.”

“장부와 실제 보유 물품과 그 양을 일일이 대조해 볼 생각입니다.”

“어떤 놈이 감히 혈교와 내통하고 있는지는 몰라도 백일하에 드러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렇겠네요.”

만족스러운 조치라는 듯 용무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장부와 실제 보유 물품을 일일이 대조해 보면 빼돌린 곳이 나올 수밖에 없으니까.

“하지만 시간이 문제네요.”

감숙의 방대한 전장을 활보하는 군부의 수와 장비가 좀 많겠는가? 그것을 일제히 들여다본다는 것은 의도는 좋지만 사실 불가능에 가까운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제가 머리를 조금 굴렸습니다, 패주.”

양경홍이 빙그레 웃어 보였다.

용무린 역시 비슷한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타초경사!”

“와하하! 역시 말이 잘 통해서 좋습니다, 패주.”

용무린의 대답에 양경홍이 화통하게 웃었다.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그동안의 행실로 미루어 의심이 가는 몇몇 장군들을 대상으로 은밀히 내사 정보를 흘렸습니다.”

“걸리는 게 있는 놈이라면 미끼를 물겠네요.”

“그렇습니다. 느닷없이 화포 훈련을 한다고 법석을 떨어댈 것입니다.”

“아니면 전투 시 적의 수를 부풀려 과도한 양의 화약을 사용한다든지 하겠지요. 심한 경우에는 화재 사고가 발생해 잃었다고 할 수도 있고요.”

누가 혈교와 손을 잡았든지 움직일 수밖에 없다.

가만히 앉아 있다가 일제 점검을 할 때 그 재고의 차이가 너무 심하다면 그날로 본인은 물론이고 자신의 가문까지 한꺼번에 쓸려나갈 테니까.

“살기 위해 함정을 파고 기다릴 수도 있어요. 그것만 조심하면 충분히 솎아낼 수 있겠는데요?”

“그렇지 않아도 그 점을 염려해 모든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습니다, 패주.”

“후방의 병사들과는 달리 감숙의 전장을 누비는 정예 중의 정예들이라 함정에 빠지면 저희들이라 하더라도 장담을 할 수 없는 형편입니다.”

씨익.

용무린이 활짝 웃었다. 조금의 주저함도 없이 나섰다.

“제가 함께 가지요.”

“정말 그래주시겠습니까, 패주?”

“패주께서 함께 가주시기만 한다면 천군만마를 얻은 것과 같을 터! 감사합니다, 패주.”

양문광과 양경홍이 반색을 했다.

황궁무고의 일을 겪으며 용무린의 진정한 힘을 직접 눈으로 보았기 때문이었다.

용무린은 한 발 더 나아갔다.

“다른 사람들을 많이 끌고 갈 필요도 없어요. 저와 두 분 장군. 그리고 전에 보았던 양가장의 세 분 장로님이면 충분할 듯싶네요.”

“정녕 그 정도로 되겠습니까?”

“감숙에 있는 군사들의 숫자만 해도…….”

양문광과 양경홍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하지만 용무린은 슬쩍 웃어 보였다. 자신만만한 목소리로 장담을 했다.

“걱정하지 마세요. 놈들이 어떤 함정을 파든 저를 감당할 수는 없으니까요.”

혈교의 교주인 혈마 나령이 직접 나선다고 해도 상관없다. 양의신공을 통해 두 가지 의식을 자유자재로 가리거나 동시에 끌어올 수 있게 된 이상 그는 자신의 적수가 될 수 없다.

‘역천자라 불리는 마교의 교주 놈이라면 또 몰라.’

마교에 생각이 미치자 문득 궁금해졌다.

‘그놈은 지금쯤 어떻게 하고 있을까?’

훼방을 놓는다고 놓긴 했는데 결국 필요한 숫자의 동남동녀 납치는 다 끝냈겠지?

‘필요해서 모았을 텐데……. 그 아까운 아이들 목숨으로 뭔가를 이뤄냈을까? 이뤄냈다면 그 경지는 어떤 수준인 것일까?’

놈이 어떤 수준까지 이뤘는지 궁금했다.

절대검신과 소림의 법정, 무당의 천기자가 그만큼이나 두려워하며 대비를 해온 만큼 감히 추측하기도 어려운 수준의 그 무엇이라는 것만큼은 확실할 거다.

‘그건 그거고 지금은 뇌화탄에나 집중하자.’

일단 혈교의 뇌화탄 재보급을 막아야 한다.

그래야만 수적 열세인 놈들이 쉬이 홍화장 밖으로 밀려나오지 못하게 된다.

‘위치도 알고 있으니 점점 더 내부 정보가 쌓이겠지.’

놈들이 홍화장에 갇혀 있는 동안 개방과 여러 눈을 통해 혈교의 힘을 정확히 알 수 있게 되리라. 정보를 통해 필승의 확신이 들면 그만한 준비를 갖춘 후 한꺼번에 밀어버리면 되는 거다.

“감사합니다, 패주.”

“그러면 놈들이 미끼를 물 동안 패주께서는 본가에서 저희와 함께…….”

양문광과 양경홍이 대뜸 용무린의 발목을 잡았다.

미끼를 물면 곧바로 행동하기 위함도 있었지만 양하린을 위해서이기도 했다.

‘킁, 어림없지.’

이미 두 사람이 양하린에게 일부러 기회를 줬던 것을 아는데 또 말려들 수야 없는 일!

“저는 잠시 어딜 좀 다녀와야 할 듯합니다.”

“예? 어디를……?”

“개인적인 볼 일입니다. 다녀오는데 한 보름 정도 걸릴 것 같네요.”

제갈세가를 다녀올 생각이었다.

‘백리소옥 그 대책 없는 여자가 령매에게 대체 뭐라고 했는지가 궁금해서 견딜 수가 있어야지.’

대충 견적이 나온다.

그 때문에 제갈영령은 아마 지금 화가 무척 많이 나 있으리라.

‘뭔지는 몰라도 그건 다 오해야 령매.’

오해는 그때그때 푸는 것이 상책이다.

오래 묵혀둬 봐야 곪아 터지기만 하고 상처와 흉터만 깊게 남는다.

“중간 중간에 천호소에 들리겠습니다. 저와의 연락이 끊기지 않게 말이지요. 미끼를 물면 바로 연락을 주세요. 받는 즉시 달려오겠습니다.”

“그러시다면야…….”

“알겠습니다. 그렇게 알고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그러면 이만…….”

용무린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기다려, 령매. 내가 간다.’

제갈세가를 향해 곧장 달려가고 싶었지만 이번에도 역시 그럴 수가 없었다. 서재 밖에서 이제나 저제나 기다리고 있던 양하린에게 잡힌 것이다.

“용 대협!”

움찔!

‘아, 놀라라. 쟤가 있었지?’

뱉어 놓은 말 때문에 면전에서 돌아서기가 조금 그랬다.

‘아오, 배웅한답시고 저 두 사람만 따라 나오지 않았어도 그냥 제쳐버리는 건데…….’

이미 늦었다. 양문광과 양경홍이 따라 나와 이 상황을 지켜보기 시작했다.

“말씀은 다 나누셨나요?”

“허허허. 우리 린아가 많이 기다렸나 보구나.”

“그래, 중요한 이야기는 다 끝이 났구나.”

그러면서 용무린을 슬쩍 돌아다보는 양문광과 양경홍.

반짝반짝.

부담스럽게 반짝이는 두 사람의 눈을 보자니 뱉어 놓은 말을 면전에서 나 몰라라 하기는 조금 그랬다. 어쨌거나 뇌화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두 사람의 힘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때가 아니던가?

‘그래. 실컷 떠들어라.’

“차나 한 잔 더 마실까요?”

까짓 것 경극 보는 셈 치지 뭐.

그런데,

덥석.

양하린이 대뜸 용무린의 손을 잡는 것이 아닌가?

“우리 걸어요. 걸으면서 이야기해요.”

그때 알았다.

아, 얘도 백리소옥과 같은 부류로구나.

“예? 아, 예.”

용무린은 다 포기한 채 양하린의 손에 잡혀 한참 동안이나 이리저리 끌려 다녔다.

삐질.

질질 끌려가는 용무린의 이마를 비집고 식은땀 한 방울이 흘러내렸다.

“허허허. 참으로 잘 어울리는 한 쌍이로다.”

“하하하. 제 생각도 그렇습니다, 아버지.”

멀어져가는 두 사람을 보며 양문광과 양경홍이 김칫국을 한 사발이나 퍼마셨다.

***

섬서성으로 백리소옥을 구하기 위해 갈 때처럼 이번에도 용무린은 전력을 다해 신법을 펼쳤다. 단 한 번도 쉬지 않고 제갈세가로 향했다.

방향을 잡은 후 산이고 강이고 다 필요 없이 무작정 직진을 했다.

그렇게 달려 이레가 흘렀다.

오는 도중 몇 곳의 천호소를 들리기까지 했으니 그야말로 무지막지한 속도였다.

‘드디어!’

융중산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저만큼 앞에 제갈세가의 고풍스러운 전각들이 보였다.

두근두근.

용무린의 심장이 고동치기 시작했다.

‘이게 좋아서 그러는 것인지 아니면 불안해서 그러는 것인지 나도 잘 모르겠다.’

급한 불을 끄고 냅다 달려오긴 했는데, 과연 백리소옥이 제갈영령에게 무슨 말을 했을까? 그 말로 인해 제갈영령은 또 얼마나 화가 나 있을까?

‘설마, 아직도 이곳에 백리소옥이 있는 것은 아니겠지?’

불안. 초조. 우려.

세 가지 부정적인 감정이 용무린을 지배했다.

‘에잇, 몰라. 일단 부딪혀 보자.’

여기까지 왔는데 뭘 어쩌겠는가?

용무린은 활짝 열린 제갈세가의 정문으로 당당하게 들어섰다.

“령매! 나 왔어!”

일단 아무렇지도 않은 듯 목소리를 높였다.

***

그때 제갈영령은 손청하와 함께 있었다.

“정말 말 안 할 거니?”

“……!”

백리소옥이 인사도 없이 떠나간 직후 제갈영령이 말을 잃었다. 무슨 고민이 그리 깊은지 방 밖으로 잘 나오지도 않았다.

손청하는 무슨 일이 있었음을 직감했다.

‘현명한 아이니 잘 추스를 수 있겠지.’

그렇게 믿고 시간을 주었다.

하지만 그렇게 흐른 시간이 벌써 이레가 되었다. 더는 곤란하다 생각한 손청하가 나선 것이다.

“백리소옥, 그 아이 때문이지?”

반짝!

확실했다. 제갈영령의 눈이 반응을 보였다.

‘그렇구나. 그 문제 때문이었어.’

손청하는 단숨에 어떤 문제가 제갈영령을 괴롭히고 있는 것인지 알아차렸다.

“소옥, 그 아이가 네 낭군을 사모한다고 했니?”

단도직입적인 질문.

제갈영령의 눈빛이 살짝 흔들렸고 손청하는 그것을 놓치지 않았다.

“네가 이렇게 심란해하는 것을 보니 소옥 그 아이의 마음을 사위도 모르지는 않는 것 같고……. 그래서 사위는 어떻게 한다고 했어? 설마, 벌써 쌀이 익어서 밥이 되어 버린 것 아니야?”

생각만으로도 화가 치미는 듯 손청하의 목소리가 날카로워졌다.

“아니야, 그런 거!”

간만에 제갈영령이 입을 열었다.

“그러면?”

잠시 뜸을 들인 후 제갈영령이 천천히 대답을 했다.

“온갖 유혹을 다 했다고 하는데, 용 가가께서는 끄떡도 하지 않으셨다고 해.”

“호오! 역시 내 사위! 장하다!”

제갈영령의 옆에 털썩 앉으며 탄성을 발한 손청하가 딸의 어깨를 툭 건드렸다.

“그러면 염려할 것 없는데 뭐가 그리 심란해서 이레 동안이나 방에 틀어박혀 있는 건데?”

잠시 침묵하던 제갈영령이 말을 이었다.

“……그 언니가 했던 말 중에 걸리는 것이 좀 있어서.”

“걸리는 거? 그게 뭔데?”

어차피 터진 말문이다.

제갈영령은 이내 백리소옥과 나누었던 대화내용을 간추려서 해주었다. 흥미진진한 얼굴로 듣고 있던 손청하의 얼굴 역시 심각해졌다.

“흐음. ‘이제는 내가 지켜주겠다.’ 라고 외쳤다? 그건 좀 그런데?”

“그렇지? 그 말이 너무 마음에 걸려.”

“그래. 그러겠다.”

“나 어떻게 하지? 용 가가께서 내가 아닌 그 언니를 선택하면?”

“무슨! 그럴 리 없어. 엄마가 사람 볼 줄 아는데, 네 신랑은 절대로 그런 사람이 아니야.”

“그런데 왜 그런 말을 했을까? 그 이유가 뭘까? 정말 소옥 언니가 말했었던 것처럼 그 언니와 나 두 사람을 모두 원하고 있기 때문에 그런 걸까?”

어쩌면 그럴 수도 있으리란 의심이 들었다.

사람이니까, 여린 마음의 여인이고 결정적으로 용무린이 진짜 그런 말을 했다고 하니 그런 의심이 들 수밖에 없는 일이다.

“그 사람, 누구하고도 나눠가지기 싫은데……. 너무 소중해서 나만 보고 싶은데……. 그런데 결국 나눠가져야 하는 상황이 생기면 어떻게 해야 하지?”

“아니야. 그럴 리 없어.”

“솔직히 삼처사첩이 흉은 아니잖아. 막말로 그분은 무림왕이야. 누가 뭐라고 하겠어?”

제갈영령의 눈에 그렁그렁 눈물이 고였다.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손청하가 목소리를 높였다.

“별 수 없다. 그 방법밖에는…….”

“응? 뭔데? 무슨 좋은 방법이 있어?”

손청하가 제갈영령 곁으로 바짝 다가앉았다.

귓가에 입을 대고는 은밀하기 짝이 없는 목소리로 자신의 생각을 밝혔다.

“다 필요 없고, 그냥 네가 먼저 차지해버려.”

“응?”

대체 그게 무슨 뜻인지 접수가 되지 않았던 제갈영령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답답하다는 듯 얼굴을 살짝 찌푸려 보였던 손청하가 부연설명을 덧붙였다. 그것도 적나라하게.

“소옥 그 앙큼한 것은 옷까지 홀라당 벗고 유혹을 했다며? 그때야 어떻게 버텨냈다지만 계속해서 버틸 수 있다고 누가 장담하겠니? 그러니 그냥 너도 육탄공세를 해 버려. 기회만 오면 합방을 하라고 요것아!”

“엄마!”

제갈영령의 얼굴이 타오르듯 발개졌다.

하지만 손청하는 ‘그게 뭐 어때서?’ 하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목에 핏대를 세웠다.

“어차피 가문끼리 혼사 이야기도 다 끝나 있는데 뭘 그리 놀라? 나 같으면 혼수로다가 떡두꺼비 같은 손주 하나 떡하니 안겨드리겠다.”

“아유, 몰라! 엄마도 참…….”

붉어진 두 볼을 감싸 쥐고 제갈영령은 어쩔 줄 몰라 했다. 하지만 손주 이야기가 그리 나쁘게 다가오지는 않았는지 크게 반박하지는 않았다.

손청하가 계속해서 열변을 토했다.

“그게 제일이야, 요 맹추야.”

“……!”

“생각해봐. 용무린 같은 잘난 사내가 아직 혼사도 치르지 않았는데 여자들이 가만히 두겠니? 다 필요 없고, 그냥 기회만 닿는다면 내 것으로 만들어 놓는 게 최고야. 소옥 고 앙큼한 것이 똑똑한 거라고!”

그쯤이면 충분히 알아들었을 것이라 생각한 손청하가 자리에서 일어날 때였다.

타다다닷.

밖이 소란해지는가 싶더니 시비 청아가 날듯이 달려와 외쳤다.

“그분이 오셨어요, 아가씨! 용무린, 무림왕에 황룡패주인 그분이 오셨다고요!”

“뭐? 그분이?”

제갈영령이 자리를 박차고 벌떡 일어났다.

쾅! 휘스슷.

방문을 부숴버릴 듯 열어젖힌 후 정문을 향해 신법을 펼쳤다.

“호호홋! 엄마의 충고를 잊지 마렴. 콱, 네 것으로 만들어 버리란 말이야.”

멀어지는 제갈영령의 뒷모습을 보며 주먹을 불끈 움켜쥐어 보이는 손청하였다.

“호호홍. 그러면 나는 우리 사위 먹일 씨앗닭이나 잡으러 가 볼까나?”

어쩌면 오늘 밤 제갈영령이 진정한 의미의 첫날밤을 치를 수도 있는 일, 손청하는 용무린을 위해 약재창고에 고이 모셔둔 고려홍삼을 몽땅 넣고 삶아야겠다고 생각했다.

***

용무린의 얼굴이 환해졌다.

날듯이 신법을 전개해 오고 있는 제갈영령을 보는 순간 불안, 초조, 우려가 모두 날아가 버렸기 때문이다.

“령매!”

“가가!”

굳게 맞잡은 손!

전해지는 서로의 온기를 통해 변함없는 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상한데? 백리소옥이 분명 이곳을 방문한다고 했었는데? 아직 도착하지 않은 건가?’

그녀가 방문했다면 틀림없이 엄한 소리를 했을 터, 제갈영령이 이렇듯 나를 반겨주지는 않을…….

“흥!”

갑자기 제갈영령의 태도가 급변했다.

콧방귀를 요란하게 뀌더니 홱 돌아섰다. 어찌나 쌀쌀맞은지, 찬바람 부는 게 눈에 보일 정도였다.

‘젠장. 벌써 왔다 갔구나.’

용무린의 얼굴이 확 구겨졌다.

‘그래도 혹시 몰라.’

헛소리는 하지 않고 말 그대로 얼굴만 보고 갔을 수도 있다. 그래서 모르는 체 제갈영령의 어깨를 살그머니 잡았다. 자신을 향해 돌려 세우며 물었다.

“왜 그래 령매?!”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제갈영령은 용무린의 손을 뿌리치곤 계속해서 앙칼진 목소리로 되물었다.

“그걸 몰라서 물어욧?”

“내, 내가 뭘?”

“몰라욧!”

앙탈을 부리며 휙 멀어졌다. 자신의 방을 향해 쿵쾅쿵쾅 소리를 내며 걸었다.

‘젠장. 어떻게 하지?’

이런 상황에서는 따라가서 열심히 화를 풀어줘야 하는 거야, 아니면 그냥 제풀에 풀릴 때까지 혼자 있게 놔둬야 하는 거야?

그때 용무린의 머리를 스치고 지나는 목소리가 있었다.

-아들, 여인들의 대화법에 대해 알아?

어머니 조연옥의 선견지명이 이때 빛을 발했다.

주입식 교육이었지만, 졸음을 참고 들어 두었던 대처법이 떠올랐던 것이다.

“그래, 맞아! 어머니께선 이런 경우가 두고 이렇게 말씀하셨었지!”

-아들. 여인이 토라져서 ‘몰라요.’ 하고 멀어지는 행동의 의미는 말이야. 면전에서 아예 결별을 고하지 않는 한 그것은 곧 ‘네가 하는 걸 봐서 화를 풀지 말지 결정하겠다.’ 라는 것을 뜻해.

그래서 어떻게 하면 되냐고?

어떻게 하긴? 화가 풀릴 때까지 열심히 곁에서 달래주고 아양을 떨어줘야지.

싫다고? 그러면 제 풀에 풀릴 때까지 찬밥에 청경채 하나만 가지고 이레 정도 밥을 먹든지……. 하지만 명심해 아들. 그래봤자 결국 아들만 손해야.

도리에 어긋나지 않는 일이라면 져주는 것이 곧 이기는 것임을 명심해, 아들.

“좋아. 한 번 해보자.”

어떻게 달래주고 어떤 아양을 떨어야할지는 모르겠지만 용무린은 즉시 움직였다. 제갈영령의 뒤로 바짝 따라 붙으며 열심히 달래기 시작했다.

“왜 그래, 령매. 무슨 일 있었어?”

“흥!”

그저 콧방귀만 뀌는 제갈영령.

“말해봐. 내가 지금 듣고 있잖아.”

“흥!”

제갈영령의 방으로 오는 내내 용무린은 제갈영령의 콧방귀 소리만 들어야 했다.

‘어휴. 끓는다, 끓어.’

속이 터지려고 했지만 그래도 할 일은 해야 했다.

“잠시만 있어. 어머님께 인사 좀 드리고 올게.”

“……!”

인사드리고 온다는 말에는 콧방귀를 안 뀌었다.

제갈영령. 그래도 구분할 것은 구분하는 여자였던 거다.

“사위! 오셨는가?”

“예, 어머님. 그간 강녕하셨…….”

손청하는 용무린의 인사를 끝까지 듣지도 않았다. 툭 자른 후 마구 손을 휘저었다.

“됐어. 어서 가서 영령이 마음이나 풀어줘.”

망했다. 어머니까지 무슨 일인지 다 알고 계신다.

“예? 아, 예.”

용무린은 어색한 미소로 답하며 그 자리를 벗어났다.

손청하의 목소리가 길게 이어졌다.

“사위! 저녁은 방으로 가져다 줄 테니까, 그냥 영령이 방에 있어. 편히 쉬어. 알았지?”

영령이 방에 그냥 있으면서 편히 쉬라고?

어쩐지 느낌이 묘했다.

‘모르겠다. 령매 화나 잘 풀어 주라는 소리겠지 뭐.’

그렇게 받아들인 용무린은 다시 전의를 다지며 제갈영령의 방으로 향했다.

‘그런데 대체 어떻게 풀어줘야 하지?’

생각하면 할수록 암담했다. 한숨만 나왔다. 어떻게 해야 화가 풀릴까?

‘후우. 너무 걱정하지 말자. 뭐, 어떻게든 되지 않겠어?’

오산이었다.

그 어떠한 무공구결보다도 더 난해한 질문들이 용무린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만 화 풀어 령매. 내가 잘못했어.”

“뭘 잘못했는데요?”

“응?”

“말해 봐요. 뭘 잘못했는지.”

“그, 그게 말이야…….”

정말 환장할 노릇이었다.

어머니의 말씀대로 그냥 져주려고 던진 말이었는데 되물을 줄이야!

“령매가 무엇 때문에 화가 났는지 내가 알아야…….”

“방금 그랬잖아요. 내가 잘못했다고.”

“아, 그거? 그건 그냥…….”

“그냥 뭐죠? 저를 놀리시는 것이었어요?”

“절대로 아니지. 내가 잘못하긴 했는데. 그게 말이야.”

“그럼 말해 봐요. 가가께서 잘못한 것이 무엇인지요.”

하! 정말 미치겠다.

어떻게 해도 저 질문으로 돌아오는 통에 양의신공까지 익힌 내 머리가 터지려고 했다. 분심의 벽이고 나발이고 다 소용없었다.

‘별 수 없다. 처음부터 다 이야기를 해주는 수밖에.’

용무린은 천천히 자신이 보았던 환영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했다.

“내가 아미파의 위기를 들었을 때 말이야……. 그 전서를 보자마자 왜 그렇게 화가 났는지 이해할 수 없었어. 그런데 곧 알게 됐어. 전생에서부터 이어졌던 인연에 대한 자각이 있었거든…….”

“……!”

용무린의 비밀을 오롯이 알고 있던 제갈영령은 그 말에 바로 빠져들었다.

전생부터 이어진 백리소옥과의 인연.

같은 여인의 입장에서 생각하니 그 애끓는 심정을 이해할 수 있었다.

‘전생에도 그만큼이나 사모했던 것이구나.’

그때는 용무린이 차갑게 내쳤다. 매정하게 잘랐다.

그래서 백리소옥은 따뜻한 손길이나 눈길 한 번 받아보지 못한 채 전장에서 용무린만 바라보다가 숨이 끊겼다니 어찌 가련하지 않으랴?

‘그래서 그런 말이 튀어나왔던 것이로구나.’

그제야 용무린이 말했다던 ‘이제는 내가 지켜주겠다.’ 는 말의 의미를 알 수 있었다.

용무린이 제갈영령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당당한 태도로 말을 이었다.

“백리소옥에게 어떤 이야기를 들었는지 몰라. 하지만 이것 하나만은 말해둘게. 하늘과 땅과 령매 앞에 맹세하건대, 나는 한 점 부끄럼이 없어.”

“알아요.”

“그 숱한 유혹에도……. 응? 알아?”

“예. 소옥 언니가 다 말해 줬어요.”

“……!”

의외였다. 거짓이 아닌 진실만을 말하고 갔다니!

‘진실만 말했던 것이 더 주효했나?’

백리소옥을 원망하던 마음이 한 순간에 모두 씻겨 내려가는 느낌이었다.

그때였다.

잠자코 무엇인가를 생각하던 제갈영령이 홀연히 일어났다. 어둠을 밝히고 있던 방 안의 등불을 하나씩 하나씩 꺼나가기 시작했다.

“령매? 갑자기 불을 왜……?”

바보 같은 질문이었다.

신체는 이미 알고 반응하기 시작했다.

쿵쿵쿵.

용무린의 심장이 터질 듯 뛰었다. 알 수 없는 기대감에 몸이 뜨거워졌다.

스르르.

제갈영령이 용무린을 향해 다가왔다.

***

“호호홍. 우리 사위가 좋아하려나?”

간만에 솜씨를 부려 만든 씨앗닭 요리를 앞세워 손청하는 제갈영령의 방으로 향했다.

그런데…….

“응?”

굳은 듯 멈춰 설 수밖에 없었다.

갑자기 제갈영령의 방을 밝히고 있던 등불이 하나 둘 꺼지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기회를 잡기로 했구나!’

제갈영령이 자신의 충고를 받아들였다는 것을 손청하는 즉시 알 수 있었다.

‘잘 생각했다, 딸아. 기회가 오면 잡아야 하는 거야.’

용무린만 한 사내가 어디 또 있을까?

빼앗기지 않으려면 선수를 치는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것은 내일 아침에 우리 사위 보양식으로 줘야겠다.’

손청하는 즉시 뒤돌아섰다.

“가모님! 어찌…….”

“쉿!”

영문을 몰라 동그랗게 눈을 뜨는 시비 청아를 향해 손청하는 입술에 손가락을 가져다 대 보였다. 나직하지만 너무나도 분명한 명령을 내렸다.

“지금부터 이 주변에 누구도 접근을 하지 못하도록 해야 해. 내 말 무슨 뜻인지 알지?”

“아! 예, 알아요.”

그제야 감을 잡았다는 듯 청아가 얼굴을 붉히며 답했다.

“가자!”

“예, 가모님.”

두 사람은 기분 좋게 오던 길을 되돌아갔다.

***

훅.

하나씩 불을 끌 때마다 스스로에게 물었다.

‘나는 저 사내를 진심으로 사랑하는가?’

대답은 ‘너무나도 그렇다’이다.

훅.

‘용무린이라는 사내를 지아비로 모시며 그를 닮은 아들과 딸을 낳고 평생을 가시버시 행복하게 살고 싶은가?’

그렇다. 그것이 바로 내가 원하는 삶이다.

이번에도 역시 너무나 확실하고 분명한 답이 심장에서부터 치솟아 올랐다.

훅.

‘다른 어떤 여자에게 저 사람을 빼앗기고 싶은가?’

절대로 그렇지 않다.

용무린과 함께 하는 삶이 아니라면 차라리 그냥 죽는 것이 낫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무엇을 망설일까?’

서로의 마음도 이미 너무 잘 알고 있다.

혼사라는 일종의 허례의식만이 남은 상태, 망설일 필요도 주저할 필요도 없다.

훅.

드디어 마지막 등불까지 모두 꺼졌다.

“려, 령매!”

열기까지 느껴지는 용무린의 목소리가 살짝 흔들렸다.

어떤 상황인지 그 역시 아는 듯했지만 경험이 없는 탓에 당황한 모양이었다.

후훗.

목소리까지 떨며 눈을 동그랗게 뜬 용무린의 모습이 어찌나 사랑스럽게 보이던지 괜스레 웃음이 나왔다. 심장 깊은 곳에서부터 하고픈 말이 저절로 쏟아졌다.

“사랑해요. 사랑해요, 가가.”

그렇게 속삭이며 용무린 앞으로 나아갔다.

용무린도 심장에서부터 솟아오른 말로 화답을 해주었다.

“사랑해. 내가 더 많이…….”

더는 말이 필요가 없었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용무린이 제갈영령을 꽉 껴안았다. 두 사람은 절대로 떨어질 수 없다는 듯 껴안은 채 떨어지지 않았다.

그 상태로 자연스럽게 서로의 입술을 찾았다.

서툴렀지만 누구보다도 더 열정적으로 서로의 입술을 탐닉했다.

스륵.

제갈영령의 볼을 감싸 쥐고 있던 용무린의 손이 아래로 향했다. 탐스러운 볼을 지나 목으로, 어깨를 지나쳐 겨드랑이로 그리고 그 옆으로…….

용무린의 손이 풍요로움을 만끽했다.

한참을 그곳에서 머무르다 이번에는 더 아래로 움직였다.

허리를 스쳐 그 아래로 내려갔다.

그리고…….

부르르.

제갈영령의 몸이 가늘게 떨렸다.

거부의 몸짓이 아니었다. 그저 원초적인 두려움의 떨림이었다.

용무린이 가만히 입술을 떼었다.

제갈영령의 눈을 가만히 들여다보며 뜨거운 목소리로 속삭였다.

“사랑해, 령매. 내 목숨보다도 더 많이 사랑해.”

그 한마디에 두려움이 씻은 듯 사라졌다.

지금껏 그 누구에게도 허락한 적 없는 미지의 대지로 스며드는 용무린의 손길을 기꺼이 받아들였다.

와락.

다시 탐닉하는 서로의 입술.

사락.

제갈영령의 옷이 하나씩 벗겨지기 시작했다.

그런데…….

“안 된다니까요! 패주께서는 지금 침소에 드셨으니 그냥 내일 아침까지 기다리셔야 해요.”

“아니 될 말이오. 나를 막지 마시오, 소저. 이것은 군령, 소장은 지금 즉시 황룡패주께 급보를 전하라는 총병관의 명령을 수행해야만 하외다.”

갑자기 밖이 소란스러워졌다.

상당히 먼 곳에서 일어난 소란이었지만 밤이라서 그런지 제갈영령의 방에까지 잘도 스며들었다.

움찔!

제갈영령의 몸이 굳었다.

‘아, 아니야. 이러지마. 누군지는 몰라도 저 자식은 그냥 무시해 버리자고.’

다급해진 용무린의 손이 조금 더 바쁘게 움직였다. 상의에 이어 하의에 손을 가져다댔다.

덥석.

제갈영령의 손이 그것을 막았다.

그런 후 용무린의 가슴을 가만히 밀어 내었다. 아쉬움 가득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저는 사내의 앞길을 막는 여자가 아니에요, 가가. 나가 보세요.”

“아니야. 괜찮아. 그냥 내일 아침에 만나 봐도 돼. 진짜라니까?”

용무린이 간절한 목소리로 외쳤다.

하지만 제갈영령의 태도는 요지부동이었다. 공적인 일의 개입에 이미 냉정을 되찾은 것이다.

“군령이라 하잖아요. 이 밤중에 찾아온 것으로 보아 정말 위급한 일일 거예요. 나가 보셔야 해요.”

“……!”

용무린의 얼굴이 마구 일그러졌다.

제갈영령이 저렇듯 냉정을 되찾은 후라면 애원해도 소용없다는 것을 일전의 경험으로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보시게, 천호장. 나는 제갈세가의 가모일세. 지금 패주께서 침소에 들었다 하지 않는가? 그냥 내일 아침에 전달하면 아니 되겠나? 정녕 지금이 아니면 아니 되는 내용의 급보인가?”

“물론입니다. 패주께서가 아니라면 누구에게도 발설할 수 없는 내용이지만, 화급을 요하는 급보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손청하와 천호장이라는 인간의 대화가 적막한 밤하늘을 날아 용무린의 귀에 들려오고 있었다.

‘화급을 요해? 급보라고?’

아니기만 해봐라.

아득.

“다 죽는 거야 자식들아.”

이를 갈며 돌아서는 용무린의 귓가에 제갈영령의 단호한 목소리가 스몄다.

“전장이 아니라 하여 요사이 천호소의 군기가 많이 풀어져 있다 들었습니다.”

“……!”

“패주께서 단단히 주의를 주고 강한 훈련을 명해야 긴급 상황이 발생했을 때 흩뜨려지지 않는 군기를 보이리라 생각합니다.”

한마디로 빡세게 굴려라 그 말이었다.

씨익.

용무린의 입가에 흰 선이 쭉 그어졌다.

“맞아. 옳은 말이야.”

주먹을 불끈 쥐어 보이며 밖으로 나서던 용무린이 멈칫했다. 생각지도 못한 말을 불쑥 이었다.

“다녀올게. 조금 오래 걸릴지도 몰라. 하지만 걱정 마. 내가 돌아올 곳은 바로 령매니까…….”

두근두근.

그 말에 제갈영령은 애써 차갑게 가라앉혔던 열기가 되살아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기뻤다. 왈칵 눈물이 쏟아질 만큼.

이미 보이지 않는 용무린을 향해 가만히 대답했다.

“고마워요. 믿고 기다릴게요.”

누구보다 먼저 용무린을 차지하려던 계획은 물거품이 되었지만 제갈영령은 비로소 알게 되었다. 그럴 필요조차 없었다는 것을…….

***

“별 거 아니기만 해 봐. 다 죽는 거야.”

스파앙.

용무린은 씩씩대며 소란스런 곳을 향해 신법을 펼쳤다.

단 몇 걸음에 그곳에 도착했다.

“사위! 어떻게 알고…….”

손청하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피식.

용무린은 쑥스럽게 웃어 보이며 대답했다.

“쓸데없이 귀가 밝아서요.”

“아!”

“게다가 밤이잖아요. 밤에는 소리가 멀리까지 잘 퍼지죠.”

그러면서 자신을 향해 벌떡 일어나 군례를 올리는 천호장을 죽일 듯 노려보았다.

“패주께 인사 올립니다. 양양천호소의 천호장 임정영이라 하옵…….”

“됐고, 뭐냐?”

“……니다. 예?”

“대체 무슨 소식이기에 오밤중에 밀고 들어와 쌩 난리를 쳤느냐 그 말이다!”

“아! 여, 여기 있사옵니다.”

용무린의 싸늘한 시선과 목소리에 주눅이 들었는지 임정영 천호장이 말까지 더듬으며 전서를 빼들었다. 공손하게 두 손으로 올렸다.

홱.

잡아채듯 전서를 받아 읽어나가는 용무린의 표정이 점점 심각해졌다.

-패주께 아룁니다.

미끼를 물었습니다. 상대는 후군도독부 좌, 우 도독으로 평소에는 하지도 않던 화포사격 훈련을 연일 개시하고 있다는 소식입니다.

하지만 그것으로 끝이 아닙니다.

무슨 생각에선지 지금껏 전선을 지키고 있던 강병들과 후군도독부의 예비 병력 삼만여 명이 서로 자리를 바꾸고 있습니다.

전선을 지키던 강병들을 한곳으로 모으는 중입니다.

자칫 큰 피가 흐를 수 있습니다.

말씀하셨던 것처럼 소수의 힘으로 머리를 쳐야 할 때가 아닌가 합니다.

화급을 요하는 일입니다. 저희들은 지금 즉시 감숙으로 출발할 것이옵니다.

보름 후로 약속을 잡았습니다.

감숙성도 난주의 후군도독부에서 뵙겠습니다.

총병관 양문광 배상.

‘그렇군. 말 그대로야.’

일전에 나눴던 대화가 현실이 된 것이다.

‘화포사격 훈련만으로는 의심의 눈길을 거두기가 힘들 것이라고 생각했겠지.’

나라를 지키라고 보내 준 흑색화약을 사리사욕을 채우기 위해, 그것도 혈교와 같은 사특한 무리들에게 천금을 주고 팔았으니 걱정도 되긴 할 것이다.

‘어차피 걸리면 자신의 가문까지 깡그리 쓸려나가게 되니 마지막까지 발악을 해보겠다는 것이겠지?’

그러니 삼만에 달하는 예비 병력을 전선으로 보내버린 후 강병들을 빼내서 한데 모으는 것이리라.

이해한다. 충분히 그럴 수 있다.

궁지에 몰리게 된다면 가진 힘이 있질 않은가? 힘이 있다면 누구라도 고양이의 콧등을 물기 위해 노력을 하고 볼 것이다.

‘하지만 넌 잘못 걸렸어.’

살아보겠다는 노력 자체를 말하는 게 아니다.

‘혈교 놈들에게 흑색화약을 팔아넘긴 것도 넘긴 것이지만 하필이면 오늘같이 중차대한 날에 이 소식을 알게 한 죄가 너무 커.’

기왕 들킨 거 그런다고 뭐가 달라지나?

‘며칠만 더 미적거리지!’

아니, 하다못해 하루 이틀만 뒤로 미뤘다가 행동했다면 내 분노만이라도 덜 사게 될 것을…….

콱! 쿠우우우후-웅!

움켜쥔 용무린의 주먹에 강대한 힘이 고여 들었다.

백일하에 드러난 훼방꾼의 정체에 분노한 것이다.

“허업!”

추측조차 할 수 없을 만큼의 거력의 파동에 천호장 임정영이 기겁을 했다. 고개를 땅에 처박았다.

그 빠른 움직임이 용무린의 눈에 걸렸다. 용무린의 눈에 회심의 빛이 번졌다.

‘맞다. 이놈도 한몫했지?’

녀석도 훼방꾼, 용서해 줄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다. 아직도 귓가에 제갈영령의 단호한 목소리가 남아 있다.

“너! 천호장 임정영이라 했나?”

“충! 그러하옵니다, 패주.”

씨익.

“지금부터 양양천호소 역시 준비태세를 갖춘다.”

“준비태세 말씀이십니까?”

“그래. 언제 어느 때 명령이 떨어져도 즉시 출병할 수 있도록 완전군장을 갖추어야 할 게야.”

“충! 말씀만 하소서. 천호장 임정영과 양양천호소의 정병들은 언제든 패주의 명령에 따라 타오르는 불길 속이라 해도 뛰어들겠습니다.”

울컥.

양양천호소 천호장 임정영의 가슴에 뜨거운 것이 치밀어 올랐다.

‘되었다. 황룡패주께서 나를 눈여겨보셨어. 나를 등용해 무엇인가를 하려 하신다고.’

그야말로 감격스러운 순간이었다.

무슨 임무를 주려는 것인지는 몰라도 황룡패주의 명령을 충실히 수행하면 황제 폐하 앞으로 품신이 올라갈 것이고 오래지 않아 자신의 품계 역시 올라갈 것이다.

그런데…….

“그래, 그렇게 완벽히 준비를 한 다음에 말이야.”

용무린의 입에서 생각지도 못한 말이 튀어 나왔다.

“뛰어!”

“예?”

외람되지만 되묻지 않을 수가 없다.

다짜고짜 뛰라니?!

“뭘 그리 놀라? 뛰라고 연무장을!”

“연……무장을 말씀이십니까?”

“응. 완전군장을 하고…….”

꿀꺽.

천호장 임정영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 마른침을 집어 삼켰다. 더듬거리며 물었다.

“어, 언제까지……?”

“언제까지?! 흐음. 보자, 한 달포쯤?”

“떠헙!”

천호장 임정영이 헛숨을 들이켰다.

한 달 보름 동안이나 연무장 뺑뺑이를 돌라는 명령에 기겁을 한 것이다.

용무린의 눈이 가느다래졌다.

“왜? 싫어?”

“아, 아닙니다. 뜁니다. 뛰겠습니다.”

“푸흐흐. 확실히 해야 할 거야. 나중에 내가 다 확인해 볼 테니까.”

“……예, 패주.”

그토록 패기 넘치던 임정영의 목소리가 축 쳐졌다.

‘호호홋. 꼴좋다.’

어찌나 속이 시원한지 지켜보던 손청하가 웃음을 참지 못했다. 곱게 웃었다. 숨기기 위해 손으로 입을 가려야만 할 정도였다.

양양천호소에 날벼락이 떨어졌다.

“……!”

천호장 임정영의 얼굴이 썩어 들어갔다.

그러거나 말거나 용무린은 손청하를 향해 고개를 깊이 숙여 보였다.

“다녀오겠습니다.”

“다녀오시게 사위.”

“예, 어머니.”

휘슷.

인사를 끝으로 신법을 펼쳤다. 감숙성 성도 난주를 향해 방향을 잡았다.

***

콰두두. 콰두두두.

무서운 속도로 말을 몰아가는 일단의 무인들.

양문광과 양경홍을 비롯한 양가장의 무인들이었다.

협수부총병을 비롯해 군부의 몇몇 고수들까지 대동한 그들은 난주를 향해 말을 몰았다.

하지만 과격한 움직임에 미루어 속도는 다소 느렸다.

아직 쌩쌩한데도 불구하고 군영의 역참에 자주 들러 말을 교체했고 식사도 제때 다 찾아 먹었으며 운기행공 역시 잊지 않았다.

일부러 원하는 시간을 맞추려는 기색이 역력했다.

아침이 밝아올 때 그 이유가 밝혀졌다.

“자, 또 가볼까?”

운기행공을 마치고 난 양문광이 말에 오를 때 곁에 다가온 양경홍이 지나가는 말처럼 불쑥 입을 열었다.

“양양천호소의 천호장 녀석이 패주께 허튼 소리를 하지는 않았겠지요?”

움찔!

마찬가지 심정이었는지 양문광이 살짝 몸을 떨었다.

그러더니 굳은 얼굴로 고개를 흔들었다.

“놈은 잘 했을 게다. 패주께서 즉참하지만 않으신다면 내 이름을 걸고 중앙으로 올려준다 하였으니 잘 참고 견뎌낼 것이다.”

“그래도 우리가 조금 심했나 싶어 걱정이 됩니다. 하루 이틀 정도는 여유가 있사온데 무턱대고 제갈세가로 밀고 들어가 전서를 전하라고 군령을 내렸으니…….”

그랬다. 수백 년 만에 찾아 온 용무린의 기회를 무위로 돌린 진정한 훼방꾼은 바로 이들 두 사람이었던 것이다.

“쉿!”

양문광이 잽싸게 손가락을 세워 입에 가져다 대었다.

“하린이를 생각해라.”

“예, 아버지. 그렇지 않아도 그 생각만 하며 도박을 한 것입니다.”

용무린이 제갈세가로 향하고 있다는 것은 너무 자명했다.

시간을 계산하니 용무린이 제갈세가에서 이틀 정도 머물다가 올 것은 기정사실, 그 사이 쌀이 익어 밥이 될 것이라 생각한 두 사람이 훼방을 놓았던 것이다.

이유는 오직 하나, 양하린에게 마지막까지 기회를 주기 위해서였다.

“모두 명심해라. 이 사실은 무덤까지 가져가야만 한다. 알겠느냐?”

“물론입니다.”

“염려 마십시오. 린아는 저희들에게도 소중합니다.”

양가장의 세 장로와 군부의 수뇌부들이 일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도 한통속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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