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동상이몽
감숙성 성도 난주.
“여긴가?”
성도 외곽에 위치한 후군도독부 앞에 도착한 용무린이 생사대적을 대하듯 건물을 노려보았다.
“새끼들. 다 죽었어.”
성큼.
용무린은 씩씩대며 후군도독부 안으로 들었다.
처척.
“누구냐? 신분을 밝혀라.”
정문을 지키던 병사들이 창을 교차해 용무린을 막아섰다.
용무린은 품속에서 황룡패를 꺼내들었다.
싸늘하기 짝이 없는 목소리로 외쳤다.
“나? 황룡패주.”
“화, 황룡……. 뭐?”
“뭔가 거창한 것 같은데……. 그게 뭐지?”
확실히 외진 곳은 외진 곳이다.
황룡패를 눈앞에 보면서도 그게 뭔지를 모르다니!
‘말단 병사들까지 다 알기는 힘들 수도 있지.’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다.
이곳의 수장인 좌우 도독이 내게 어마무시한 죄를 지었다는 것이 중요한 거다.
‘총병관 일행은 아직 도착하지 않은 모양이네?’
도착했다면 말단 병사 따위가 감히 앞을 막을 리 없다.
미리 다 명령이 내려와 있었을 테니까.
‘내가 조금 빨랐나 보네?’
사실이었다. 어찌나 화가 나는지, 성질대로 신법을 펼쳤고 예정보다 이틀이나 먼저 도착했다.
“됐고, 모르겠으면 가서 대가리 데려와!”
말과 동시에 용무린은 안으로 들어섰다.
쭉 늘어서 있던 위병들이 와락 달려와 창을 겨누었다. 눈을 부라리며 고함을 질렀다.
“감히, 이곳이 어디라…….”
“멈추어…….”
“신분이 확인될 때까지 들어가지 못한…….”
파가각. 와작. 뻐버버버벅.
용무린을 향해 내밀어졌던 창 십여 자루가 동시에 부러졌다. 병사들의 턱과 갈비뼈가 동시에 부서졌다. 뒤로 훌훌 나가 떨어졌다.
“크크큭. 아오, 속 시원해라.”
조금은 마음이 풀린 듯 용무린이 웃어댔다.
“뭐, 뭐야?”
“습격이다!”
“적이다!”
땡땡땡땡땡. 삐익. 삐익.
후군도독부 정문에 난리가 났다.
경고종이 울리고 여기저기에서 호각소리가 요란하게 퍼졌다. 몇몇 건물 뒤편에서 창과 검을 든 병사들이 우르르 몰려나왔다.
처처척.
“이놈!”
“네놈은 누구냐?”
삽시간에 용무린을 에워쌌다. 고함을 질렀다.
‘흠. 전장이 코앞이라 그런지 훈련들이 잘 되어 있네.’
감상이야 그랬지만 그렇다고 고이 돌아가 줄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었다.
“멍청한 놈들아, 귓구멍 후비고 잘 들어라.”
다시 한 번 황룡패를 높이 들어 올렸다.
“내가 바로 금서철권의 주인 황룡패주다.”
동시에 황룡패에 내공을 주입했다.
버언쩍.
운철로 만들어진 황룡패에서 신비로운 빛이 뿜어졌다.
“어헉! 저, 저것은 분명히…….”
그제야 알아보는 녀석이 나타났다.
차림새로 보아 천호장쯤 되어 보이는 녀석이었다.
“화, 황룡패주를 배알하나이다!”
쿵!
즉시 무릎을 꿇었다. 목이 터져라 외쳤다.
그제야 어떻게 된 상황인지 접수가 된 병사들이 따라서 행동했다.
쿠쿠쿵. 철퍽.
너 나 할 것 없이 한쪽 무릎을 꿇었다. 군례를 취하며 크게 고함을 질렀다.
“황룡패주를 배알하나이다!”
용무린의 시선이 처음에 황룡패주의 신분을 알아본 무장에게로 향했다.
“너! 관등성명이 뭐냐?”
“좌도독 예하의 도독첨사 모위환이옵니다, 패주.”
똑 소리 나는 대답이 흘러나왔다.
“좋아, 도독첨사 모위환.”
“예, 패주. 하명하소서.”
“좌, 우 도독은 지금 안에 있나?”
“아닙니다, 패주. 두 분 도독께오선 현재 하루 거리의 총군영에 나아가 화포사격 훈련을 진행 중입니다.”
피식.
“그래?”
용무린의 입꼬리가 슬쩍 말려 올라갔다.
“앞장서라.”
“예? 총군영으로 가오리까?”
“아니. 기밀문건 보관실로 먼저 가자.”
“……!”
도독첨사 모위환이 뜨악한 표정을 지었다.
난데없이 황룡패주가 등장한 것만으로도 정신이 하나도 없는데 갑자기 서류를 보자고 했기 때문이었다.
용무린이 가늘게 뜬 눈으로 되물었다.
“왜? 싫어?”
“아, 아닙니다. 이쪽으로 오십시오, 패주.”
모위환이 똥 마려운 강아지처럼 어색하게 움직였다.
문건들을 보자는 말은 감사를 하겠다는 뜻인데, 지위가 깡패이니 거절할 수는 없고 그렇다고 보여주면 왕창 깨질 것 같고 진퇴양난이었던 것이다.
“이곳이옵니다, 패주.”
한참을 이동한 모위환이 용무린을 작은 전각으로 이끌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수십여 명의 정보를 다루는 군 관리들이 전장에서 날아든 각종 전서를 비롯한 서류들을 산더미처럼 쌓아두고 부산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주목!”
“……!”
용무린의 외침에 모두의 시선이 몰려들었다.
“하던 일 멈추고 모두 다 나가!”
“예? 하지만……?”
부장급들로서는 날벼락을 맞은 셈.
항명은 아니었지만 목소리를 높일 수밖에 없었다.
물론 이해하면서도 봐줄 용무린이 아니었다.
“황룡패주의 명이다. 지금 즉시 밖으로 나가지 않는 놈들은 역모 죄로 다스리겠다.”
“어헉!”
“떠업!”
와다닥. 파다다닥.
하여간 역모 죄라는 말이 만사형통이었다.
그 한마디에 얼굴이 파랗게 질린 군 관리들이 메뚜기 튀듯 전각 밖으로 사라져갔다.
용무린의 시선이 모위환에게로 향했다.
“너는 지금 즉시 좌, 우 도독에게 파발을 보내라. 나 황룡패주가 왕림한 사실을 알려라.”
“충!”
“나가! 그동안 나는 서류를 보고 있을 테니까.”
쾅!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문을 쳐 닫는 용무린.
‘난리 났다.’
후다닥.
도독첨사 모위환은 발등에 불이 떨어진 듯 다급히 부하들을 소집했다. 하루 거리에 위치한 총군영의 좌우 도독에게 파발을 보냈다. 물론 전서를 먼저 날렸다.
“상황이 이러니 지금 당장 오셔야 할 것이라 일러라. 내 말 무슨 뜻인지 알겠느냐?”
“예, 첨사!”
콰두두두.
일기필마가 뽀얀 먼지를 일으키며 후군도독부를 나섰다.
모위환의 눈에 두려움이 어렸다.
“젠장. 트집거리가 조금이라도 덜 나왔으면 좋겠네.”
어째서 황룡패주가 이곳을 찾았는지, 또 어째서 오자마자 기밀서류 보관실에 들어 서류부터 훑어보는 것인지 모르는 모위환은 그저 조금이라도 덜 깨지기만을 바랐다.
***
난주 북쪽에 위치한 백은평원.
닷새 거리에 늘어선 북원과의 전장을 뒷받침하는 허리에 해당하는 전략요충지로써 이곳에 후군도독부의 총군영이 들어서 있었다.
“뭐, 뭐라고? 황룡패주?”
“금서철권의 그 황룡패주가 지금 후군도독부에 도착했다는 말이더냐?”
동쪽 끝에 위치한 거대한 군막에서 고성이 터져 나왔다.
후군도독부를 이끄는 두 수뇌, 좌도독과 우도독이 깜짝 놀란 것이었다.
“그러합니다, 도독.”
“오자마자 기밀문건 보관실로 들어가 관리들을 죄 쫓아냈다고 합니다.”
좌우 도독을 보좌하는 두 명의 도독동지가 앞서거니 뒤서거니 보고를 했다.
“빌어먹을! 이틀 정도의 여유가 있을 줄로만 알았거늘!”
“그러게 말이외다. 총병관 일행의 움직임만 신경을 쓰고 있었는데……. 뒤통수를 맞은 셈이오.”
좌우 도독의 얼굴에 낭패의 기색이 역력했다.
오자마자 기밀문건을 챙겼다는 것은 감사를 한다는 말에 다름 아니었고, 서류 좀 훑어보는 것으로는 끝나지 않는다는 것을 뜻했기 때문이었다.
‘아직 힘의 집결이 이루어지기 전인데 어쩌지?’
‘일단 이곳에 모인 삼만여 명만 가지고 이를 드러내야만 하나?’
‘그 정도로는 조금 힘들지 않을까?’
‘그럼 어떻게 해? 두 눈 멀거니 뜨고 당해?’
어려운 선택을 해야만 했다.
파발이 도착하는데 하루, 가는데 다시 하루가 걸리니 파발이 당도할 때쯤이면 총병관 일행까지 후군도독부에 도착해 있을 것이다.
시간이 너무 촉박했다.
삼만 명 정도로 총병관을 어찌해 보려 하다가는 오래 버티지도 못하고 쓸려나가기 때문이었다.
중앙에서 멀리 떨어져 입김이 잘 닿지 않는 곳이 이곳 감숙이라고는 하지만 총병관은 절대충신 양업의 후손, 그의 말이라면 집결된 힘도 흔들릴 터였다.
‘그런 점을 방지하려면 더욱 많이 힘을 모아야만 돼.’
‘최소 오만 명 이상은 되어야 집결된 힘을 보고 총병관의 이름에 흔들리지 않을 거야.’
그때였다.
좌우 도독의 옆에서 묵직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두 분 영웅께서 이리 낭패해 하시는 연유를 알 수 없습니다. 두 분께는 제가 있질 않습니까?”
혈뇌였다.
뇌화탄을 만들어낼 흑색화약의 수급을 위해 그가 고수들을 이끌고 도착해 있었던 것이다.
“무슨 좋은 수라도 있나?”
“황룡패주의 무위가 만만치 않다 들었는데?”
씨익.
혈뇌가 번들거리는 시선으로 대답했다.
“기회만 주신다면 저희가 두 분 영웅의 우려를 깨끗이 거두어 드리겠습니다.”
“호오!”
“구미가 당기는군그래…….”
좌우 도독의 눈이 반짝반짝 빛나기 시작했다.
“제 생각은 이렇습니다. 먼저…….”
“오!”
“크흐흣. 그거 좋군. 맞아. 그러면 되겠어.”
혈뇌의 말이 이어질수록 좌우 도독의 얼굴에 피어난 미소가 짙어졌다.
***
다시 또 하루가 지났다.
그 시간 동안 용무린은 계속해서 서류만 뒤졌다.
‘흠. 대충 북원과의 전투가 어떻게 이뤄지고 있는지 알 것 같군.’
수많은 전서들과 그것을 바탕으로 기록해둔 보고서를 살펴보다보니 저절로 알 수 있었다.
‘평소에 훈련 상태가 어땠는지 까지 다 알게 되었으니 훈련을 핑계로 흑색화약을 몽땅 사용했다는 말은 하지 못할 테고…….’
아직 좌우 도독을 만나보기 전이었지만 두 사람이 어떤 핑계를 댈 것인지 빤히 그려졌다. 물론 그를 추궁할 충분한 문서도 이미 확보했다.
‘문제는 지금도 계속해서 모여드는 군사들인데 말이야.’
북원과 벌어지는 자잘한 국지전으로 단련이 되어온 강병들이 예비로 모아 훈련시키고 있는 병사들과 자리를 바꾸어 몰려드는 것이 문제였다.
‘겨우 삼만여 명 정도로 이 나라를 어떻게 해 볼 수 있다고 생각하나? 아니겠지?’
아무리 못해도 오만 명 이상은 되어야 숨겨둔 이를 드러낼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그 정도로 모아도 부족하기는 매한가지였다.
‘정말 나라를 뒤엎으려고 수작을 부리는 것일까? 아니면 위력시위를 통해 과오를 덮으려고 들까?’
그것이 미지수였다.
아니, 어쩌면 사고를 위장해 자신과 총병관 일행을 지워버리려고 들 수도 있는 일이었다.
“나라면 그렇게 할 것 같은데?”
궁지에 몰린 좌우 도독으로서는 그것이 사실 가장 좋은 해결책이었다.
죽은 자는 말이 없으니 그 엄청난 병력을 동원해 자신과 총병관 일행을 쓸어버린 후 오리발을 내민다면 황궁에서도 할 말이 없게 되는 것이다.
“혹여 강군인 이곳의 군세가 역심이라도 품을까 저어한 나머지 그대로 묻어 버리겠지.”
황제가 자신과 총병관을 총애하긴 하지만 그래도 왕좌와 바꿀 정도는 아닐 테니까.
“함정을 판다면 어떻게 팔까?”
용무린의 머리에서 금세 몇 가지 방법들이 떠올랐다.
“흠. 놈들이 이렇게 하면 저렇게 하고……. 또 저런 방법으로 나오는 것 같으면 그렇게…….”
용무린의 머릿속에서 여러 가지 방법들이 조합되고 해체가 되길 반복했다.
그러는 사이 해가 저물었다.
도독첨사 모위환이 문밖에서 총병관 일행의 도착 사실을 알려왔다.
“패주께 아룁니다! 총병관 양문광 대장군 입실이옵니다.”
“그래? 어서 모셔라!”
“충!”
바로 문이 열리고 총병관 양문광과 양경홍 그리고 황궁무고의 일로 안면을 익혔던 양가장의 세 장로를 비롯해 오군도독부의 수뇌부들이 안으로 들어섰다.
처척!
“황룡패주를 뵈오이다!”
“황룡패주를……!”
양문광 일행이 들어서자마자 군례를 올렸다.
용무린은 황급히 손을 흔들었다.
“됐어요. 그냥 앉아요.”
“허허허. 감사합니다, 패주.”
반가운 미소와 함께 모두가 둘러앉았다.
“빨리 온다고 온 것인데, 어떻게 패주께서 이틀이나 더 빨리 도착하셨습니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패주.”
양문광과 양경홍이 고개를 살짝 숙여 보였다.
“그 정도를 가지고 뭘요!”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손사래를 치던 용무린의 고개가 갸우뚱 기울었다.
‘어라? 그러고 보면 이틀 정도 여유가 있었잖아!’
그 생각이 불현듯 들었다.
‘뭔가 조금 이상한데?’
전서에 분명히 화급을 요하는 일이니 먼저 출발한다고까지 되어 있지 않았던가?
‘그런데 왜 나보다 이틀이나 더 느리지?’
보름 후에 후군도독부에 도착할 것이라 이미 운을 띄워놓았으니까?
‘아니지. 운이야 그렇게 띄워놓았을망정 허를 노리려면 먼저 왔어야 맞지. 나처럼 말이야.’
능력이 모자란 것은 분명 아니다.
양문광이나 양경홍은 물론이고 양가장의 세 장로 역시 초절정의 고수들 아니던가?
협수부총병을 비롯한 나머지 오군도독부의 수뇌부들 무공이 살짝 떨어지긴 하지만 그래도 나와 엇비슷한 시간에 도착했어야 옳다. 그게 아니라면 최소한 어제 저녁에는 당도했어야 맞다.
‘거리도 훨씬 더 가깝고 나보다 먼저 출발했으니까 그래야만 하지 않을까?’
스윽.
용무린의 시선이 양문광과 양경홍을 차례로 훑었다.
의심이 점점 더 구체화가 되었다.
가슴 깊은 곳에서 뭔가 간질간질 했다. 조금만 더 생각하면 그 이유가 떠오를 것만 같았다.
“커험험. 어, 어째 그러십니까, 패주?”
“큼. 험험. 하, 하명하십시오, 패주.”
두 사람의 대답이 몹시 수상쩍었다.
휙!
이번에는 양가장의 세 장로와 협수부총병을 비롯한 오군도독부의 수뇌부를 보았다.
움찔! 흠칫!
내심 놀란 것이 틀림없다. 평정을 가장하고는 있지만 내 눈을 속이지는 못한다.
‘대체 왜……?’
용무린의 머리가 놀라운 속도로 회전하기 시작했다.
몇 가지 가능성을 떠올린 후 하나씩 살펴 가짓수를 줄여 나갔다.
‘불안하다.’
‘서, 설마 눈치 채시는 것은 아니겠지?’
양문광과 양경홍이 불안 초조해 할 때였다.
생각지도 못한 구원자가 등장했다.
“백은평원의 총군영에서부터 파발마가 당도했습니다.”
도독첨사 모위환이었다.
“어엇! 그래?”
“어서 들여라! 어서!”
양문광과 양경홍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손수 문을 활짝 연 후 전령을 맞이했다.
“여기 좌우도독의 서한입니다, 패주시여.”
전령이 용무린에게 공손히 봉서를 올렸다.
용무린의 상념은 그것으로 끝이 났다. 모든 신경이 편지로 옮아갔다.
툭툭툭.
그 사이 양문광은 모위환의 어깨를 가볍게 두들겨 치하를 해 주었다.
“……?”
무슨 뜻인지 알지 못해 눈만 동그랗게 뜨는 모위환.
양문광은 그런 모위환을 향해 빙그레 웃었다. 고개를 슬쩍 끄덕여 보였다.
‘잘 했다. 마침 잘 들어와 주었어.’
모위환이 너무 예뻐 보였던 거다.
한참을 말없이 전서를 읽던 용무린이 갑자기 샐쭉 하고 웃었다.
“아예 무덤을 파는구나…….”
그렇게 중얼거리며 편지를 양문광에게 내밀었다.
“한 번 읽어 보세요.”
“예, 패주.”
양문광이 잽싸게 받아 편지를 읽었다.
-황룡패주께 아룁니다.
북원의 잔당들과 지금껏 싸워왔던 정병들의 피로도가 너무 심하여 현재 새로운 힘으로 바꿔 넣는 순환 배치가 진행되고 있습니다.
전선으로 나아갈 신병들의 훈련이 중요한 바, 연일 강도 높은 훈련을 실시하고 있기에 황룡패주께 당장 나아가 엎드리지 못하는 점 해량해 주시길 바랍니다.
하지만 황룡패주께오서 군세를 살피시기에는 지속적인 훈련을 실시하는 지금이 적기이오니 한 번 왕림해 주시면 삼생의 영광으로 알겠나이다.
좌군 도독 우문술 배상.
우군 도독 사마초 배상.
와락.
“이런 시건방진 놈들을 그냥!”
양문광이 두 눈에 불을 밝혔다.
글이야 공손하기 짝이 없었지만 ‘날 보고 싶으면 네가 와.’ 라는 뜻이었기 때문이었다.
“함정이 틀림없습니다, 패주!”
뒤이어 편지를 읽었던 양경홍까지 흥분했다.
총군영에서 전장까지의 거리는 말로 달려 닷새가 걸린다.
그 정도 거리라면 훈련이 아니라 그보다 더한 것을 하고 있다 하더라도 달려와야만 한다. 애초에 이때쯤 감사를 나오겠다고 미리 알려두었기 때문이다.
움찔! 파르르.
멀거니 끝자리에서 부동자세로 시립하고 있던 도독첨사 모위환의 몸이 마구 떨렸다.
‘이, 이게 대체 무슨 소리야? 함정이라니?’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제 아무리 후군도독부가 강병들로 구성이 되어 있다지만 총병관과 오군도독부의 수뇌부들을 상대로, 황룡패주께서도 왕림해 있는데 딴 마음을 먹었다는 말인가?
‘좌, 우 도독이 미치지 않고서야……. 아!’
거기까지 생각하던 모위환의 입이 쩍 벌어졌다.
얼마 전 보고 받았던 의심스러운 인물들의 총군영 진입 소식이 떠올랐던 것이다.
피식.
모위환의 행동을 살피던 용무린이 풀썩 웃었다.
“이봐, 모 첨사!”
“예, 예? 하, 하명하소서, 패주.”
화들짝 놀란 모위환이 즉시 한쪽 무릎을 꿇었다.
“표정을 보아하니 뭔가 알고 있는 것 같은데?”
“예? 그, 그것이…….”
“괜찮아. 안 잡아먹을 테니 말해봐. 뭔데 그래?”
모위환이 잠시 생각에 잠겼다.
‘뭔지는 몰라도 여기서 까딱 잘못하면 죽는다.’
일이 심상치 않게 돌아가고 있었다.
황룡패주와 총병관 그리고 유격장군이 동시에 함정 운운을 하고 있다.
‘좋아. 사실대로 밝힌다.’
어차피 이곳 군영에 들어온 지 일 년 남짓밖에 안 되는 터라 정말 중요한 회의에는 아직 참석하지도 못하는 처지 아니던가?
‘그런 판국에 의리 지킨답시고 입을 닫았다가는 나까지 한통속으로 몰린다.’
나만 죽는 것으로 끝이 아니다. 함정이라는 말까지 나온 이상 가문마저 깡그리 박살이 날 것이다.
생각을 정리한 모위환의 입이 열렸다.
“육 개월 전쯤의 일이옵니다. 한 무리의 무림인들이 좌우 도독을 찾아 총군영을 방문한 적이 있사옵니다.”
“호오!”
용무린의 눈이 동그래졌다.
계속해서 이어지는 모위환의 이야기가 용무린의 흥미를 계속 자극했다.
그때 방문한 무림인들은 휘장을 둘러 내용물을 감춘 수레 열 개를 끌고 나갔다고 한다.
한데 용무린이 도착하기 하루 전, 또 다시 그들이 방문을 했고 초병들의 검문과 검색도 무사통과해 총군영에 들었다는 소식이었다.
“푸흐흐. 거 재미있는 소식이네.”
“이런 죽일 놈들이!”
“감히 군영에 외인을, 그것도 무림인들을 들여?”
용무린은 그저 웃을 뿐이었고 양문광과 양경홍을 비롯한 오군도독부의 수뇌부들은 분노했다.
“무림인들이라. 어떤 놈들일까?”
답은 바로 나왔다.
‘그놈들이겠지.’
혈교 놈들이 뇌화탄을 재보급하기 위해 흑색화약을 가지러 온 것일 게다.
“혹시 말이야. 놈들 중에 화려한 적의를 입은 놈들은 없었나?”
“예? 아, 예. 그렇습니다, 패주. 놈들 중 이십여 명은 타는 듯 붉은 혈의를 입었다 들었습니다.”
확실하다. 더 들어볼 것도 없다.
“됐다. 그 정도면 충분해.”
“패주. 그놈들인 것입니까?”
“예.”
양문광의 질문에 용무린의 고개가 흔쾌히 끄덕여졌다.
“이런 시건방진!”
“함정이 틀림없어졌습니다, 패주.”
양문광과 양경홍이 목소리를 높였다.
“대책을 세워야만 합니다.”
“이대로 호굴에 들어갈 수는 없는 일입니다.”
“아직은 전시체제가 유지되고 있습니다. 지금 즉시 전서를 보내 오군도독부를 움직여야만 합니다.”
양가장의 세 장로 역시 부산을 떨었다.
잠자코 듣고만 있던 용무린이 풀썩 웃었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말했다.
“늦어요. 그 시간이면 놈들이 물건 갖고 튀고도 남을 시간이에요.”
“늦지 않습니다, 패주. 일단 오군도독부가 움직인다면 그 힘으로 저 무도한 혈교를 한꺼번에 쓸어…….”
“아니요!”
양문광의 주장을 용무린이 바로 잘랐다.
“잊으셨나요? 관과 무림은 별개예요. 정파가 아닌 혈교라 더 위험해요. 군의 힘으로 놈들을 상대하면 황제폐하께서 위험해지실 수 있어요.”
“끄응.”
용무린의 말에 양문광이 앓는 소리를 내며 입을 닫았다.
그런 양문광을 향해 용무린이 풀썩 웃어 보였다. 자신만만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뭘 그리 걱정하세요?”
“예?”
양문광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용무린의 목소리가 계속해서 이어졌다.
“내가 보기엔 총병관님이라면 초절정 급 고수 두 명은 능히 상대할 수 있어요. 양경홍 유격장군 역시 마찬가지. 거기에 더해 세 분 장로님도 하나씩은 맡을 수 있고 오군도독부의 가장 강력한 무력을 지닌 사람들이 죄 여기 있잖아요.”
딴은 그렇다.
함께 도착한 이십여 명 중 신분을 나타낼 기수를 제외한 십여 명은 어지간한 대문파의 수뇌부라고 봐도 과언이 아닐 정도의 무력을 지녔다.
“거기에 더해 내가 있잖아요, 내가.”
씨이익.
입꼬리를 슬쩍 말아 올리며 용무린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신나 죽겠다는 듯 외쳤다.
“가죠. 놈들 박살내러…….”
쿵! 쿵! 쿵! 쿵! 쿵!
용무린의 모습을 지켜보던 양문광의 심장이 마구 뜀박질을 쳤다.
‘내가 군부에 너무 오래 있었나 보구나.’
총병관의 신분이었지만 양가장은 본디 무가였다.
‘그리고 나는 한 사람의 당당한 무인이었지.’
모든 일을 군 관료의 시선으로만 보던 고정관념이 한 순간에 씻겨나가는 느낌이었다. 한 사람의 무인으로서의 기백이 되돌아오고 있었다.
양문광이 용무린과 비슷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용무린을 따라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푸흐흐. 좋습니다, 패주.”
양문광의 의지가 모두에게 퍼졌다.
양경홍을 시작으로 세 장로와 오군도독부의 수뇌부들이 하나같이 비슷한 표정으로 외쳤다.
“언제나 제가 선봉입니다, 패주.”
“저희도 잊으시면 아니 될 것입니다, 패주.”
“와하하. 군부의 창술 역시 혈교의 마공에 못지않다는 것을 보여드리겠습니다, 패주.”
그 기상! 그 패기!
두근두근.
도독첨사 모위환의 가슴에도 불이 붙었다.
“저, 저도…….”
“응?”
“저도 함께 가고 싶습니다, 패주!”
용무린의 시선을 받은 모위환이 고래고래 고함을 질렀다. 군례를 올렸다.
“저도 데려가 주십시오, 패주!”
그 모습이 너무 보기 좋았다.
슬그머니 곁으로 다가선 양문광이 모위환의 등을 토닥이며 용무린을 바라보았다.
“쓸 만한 무장 같습니다, 패주. 이 기회에 데려가 시험을 해 보시고 한 번 키워봐야 할 듯합니다.”
흐뭇한 얼굴로 그 모습을 지켜보던 용무린의 눈매가 살짝 가느다래졌다.
‘역시 수상해.’
뒤이어 생각지도 못했던 말을 불쑥 내뱉었다.
“아까도 등을 두들겨 주시던데, 어째 총병관께서 모 첨사에게 빚이 있는 듯합니…….”
움찔!
화들짝 놀란 양문광이 거머쥔 창을 높이 들며 외쳤다.
“황룡패주 천세천세 천천세!”
마찬가지 심정이었던 양경홍과 세 장로와 오군도독부의 수뇌부들이 뒤따라 악을 썼다.
“황룡패주 천세천세 천천세!”
“……!”
용무린의 입이 쩍 벌어졌다.
난데없이 천세 삼창이라니! 손발이 오그라드는 일이었다.
“됐어요. 천세는 개뿔! 가요. 어서.”
듣기 싫다는 듯 성큼 문밖으로 나섰다.
‘후우. 놀랐다.’
‘하마터면 큰일 날 뻔했습니다, 아버지.’
양문광과 양경홍이 내심 가슴을 쓸어내리며 그 뒤를 따랐다. 비슷한 심정이었던 세 장로와 오군도독부 수뇌부 역시 나직하게 숨을 몰아쉬어야만 했다.
콰두두두. 콰두두두두.
후군도독부의 정문이 활짝 열렸다.
총병관의 깃발을 높이 쳐든 모위환을 선두로 이십여 필마가 총군영을 향해 내달렸다.
***
용무린과 총병관 일행의 출발 소식은 전서를 통해 한 시진 만에 전해졌다.
“뭐라? 놈들이 지금 총군영으로 오고 있다고?”
“황룡패주와 총병관 일행까지 전부?”
두 도독의 질문에 도독동지가 목소리를 높였다.
“그렇다고 합니다. 늦어도 명일 신시 말까지는 도착을 할 것으로 짐작이 되어집니다.”
씨익. 히죽.
도독동지의 대답에 두 도독이 서늘하게 웃어 보였다.
슬쩍 뒤를 돌아다보았다.
혈뇌가 자신만만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계획대로 간다.”
“놈들이 도착하기 전까지 배치를 끝내라.”
“황룡패주와 총병관이 도착하거든 후군도독부와 오군도독부에 황룡패주와 총병관이 전선시찰을 떠났다고 알리는 것도 잊어서는 안 된다.”
“명심해라. 그게 가장 중요하다.”
“충!”
“염려하지 마십시오.”
두 명의 도독동지가 절도 있게 고개를 끄덕여 보인 후 휘장 밖으로 사라졌다.
‘크흐흐. 이런 곳에서 황룡패주를 잡게 될 줄이야.’
혈뇌의 입가에 으스스한 미소가 떠올랐다.
혈교 재림 후 그간 어긋났던 모든 일을 한 번에 바로잡을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했다.
‘어쩐지 몽땅 데려오고 싶더라니…….’
혈교주 혈마 나령에게 전권을 부여받은 순간 어쩐지 쌔한 기분이 들었다.
‘그래서 최대한의 힘을 이끌고 왔더니 끝내 기회를 잡게 되는구나.’
교주인 혈마 나령의 수신호위 중 절반을 이끌고 왔다.
한 사람 한 사람이 혈수존에 못지않은 초절정의 고수들로 모두 여섯이나 된다.
‘그뿐이 아니지.’
혈교의 재림을 일궈낸 일등공신인 태상장로님까지 모셔왔다. 혈마 나령을 지금까지 키우고 가르쳐 혈교주의 위에 올린 전전대의 거물이자 혈교의 살아 있는 전설을…….
‘거기에 더해 대사제가 내어준 무사제 열 명의 힘까지 더한다면?’
황룡패주고 나발이고 다 죽은 목숨인거다.
‘푸흐흐. 어서 와라, 애송아. 이곳이 바로 네 묏자리니라.’
혈뇌의 입가에 떠오른 비릿한 미소가 점점 더 짙어져만 갔다.
***
다시 하루가 지나갔다.
콰두두두.
바쁠 것도 없다는 듯 용무린과 총병관 일행은 제 시간에 정확히 맞추어 후군도독부의 총군영에 도착했다.
“문을 열어라! 황룡패주께서 당도하셨다!”
도독첨사 모위환이 목청을 돋웠다.
“문을 열어라!”
“황룡패주께서 당도하셨다.”
요란한 복창 소리와 함께 통나무로 만들어진 군문이 활짝 열렸다.
“황룡패주를 뵙습니다. 수문위장 정백호 표충영이라 합니다.”
“그래, 수고한다.”
“이쪽입니다.”
절도 있는 인사와 함께 표충영이 뒤돌아섰다.
용무린과 총병관 일행을 동쪽 끝에 위치한 거대한 군막으로 이끌었다.
‘그놈들 참, 티나 내지 말든지…….’
감춘다고 감췄지만 용무린의 눈에 다 보였다.
거대한 군막을 중심으로 백 보 거리 내에 다수의 나무더미들이 존재했다.
한눈에 봐도 수상했다.
진중에 새파란 나뭇가지 더미가 있을 이유가 없는 거다.
‘그걸 숨겼겠지?’
장작이라면 감출 이유도 없거니와 군막에서 먼 외곽에 쌓아 놓아야 맞다. 의심을 피하기 위해 상당한 거리를 두었겠지만, 둥그렇게 원을 그리며 배치가 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화포이리라.
‘군막에 들어가면 냅다 쏘려고?’
꿈도 야무졌다.
용무린은 즉시 말고삐를 잡아 당겼다.
히히힝.
말이 투레질을 하며 그 자리에 멈춰 섰다.
“어, 어째서 그러시는지…….”
피식.
풀썩 웃어 보인 용무린의 입에서 싸늘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저 군막 안에 좌우 도독이 있나?”
“그렇사옵니다, 패주.”
“그런데도 튀어 나오지 않아? 나 황룡패주와 총병관을 비롯한 오군도독부의 수뇌부가 친히 왕림을 했는데? 너는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 하냐?”
“그, 그것은…….”
대답이 옹색해진 정백호 표충영이 말을 더듬었다.
“이놈! 말을 똑바로 하라!”
“황룡패주께서 친히 왕림하셨는데, 마중은 나오지 못할망정 패주께서 먼저 군막에 들어가 기다리고 있어야 한다는 게 말이나 되느냐?”
양문광과 양경홍이 목청을 돋웠다.
얼음가루가 묻어날 듯 목소리는 싸늘했지만 입가에는 다들 비릿한 미소가 걸렸다. 용무린과 같은 것을 보고 느꼈기 때문이었다.
“보자…….”
용무린의 시선이 군막 주변에 흩어져 있는 병사들에게로 돌아갔다.
“푸흐흐. 왕건이들 숫자가 꽤 되는구나.”
흥미로운 눈으로 병사들을 훑어보던 용무린이 재미있다는 듯 웃었다.
감쪽같이 내공을 숨겼지만 그럼에도 불사신기는 속일 수 없었던 거다. 단전 깊숙이 꽁꽁 숨겨둔 마공의 힘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한 놈, 두 놈, 세 놈……. 흐흐흐 얼추 숫자가 맞네.’
이쪽의 숫자가 조금 부족하지만 그거야 상관이 없는 일이었다. 이쪽에는 내가 있으니까.
“뭐, 더 기다릴 필요가 있나?”
휘릭.
판단을 마친 용무린이 말에서 내렸다.
신법을 펼쳐 한 걸음에 나뭇가지더미 앞으로 갔다.
“화포겠지?”
와작. 화악. 와르르.
쌓아둔 나뭇가지를 대뜸 걷어냈다. 안쪽의 무명천을 끌어냈다. 내용물을 확인한 후 풀썩 웃었다.
“맞네, 화포. 크크크크큭.”
“패, 패주시여. 그, 그것은…….”
뻐억. 철퍼덕.
사색이 된 정백호 표충영이 다가와 주절거리다가 턱이 박살이 났다. 비명 한 번 질러보지 못한 채 땅바닥에 너부러졌다.
“본색을 드러내지 않으면 힘들걸?”
그렇게 중얼대며 화포의 방향을 한 쪽으로 틀었다.
“제가 돕겠습니다, 패주.”
도독첨사 모위환이 잽싸게 다가와서 용무린을 돕기 시작했다.
“그래, 그게 좋겠다. 저어기, 저놈 보이지? 저기 서 있는 열 놈들 중 눈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투구를 깊게 눌러 쓴 놈을 겨누어라.”
“예, 패주.”
용무린이 찍어준 놈을 향해 화포의 끝이 정확이 겨누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