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강림 절대검신
화포가 조준된 곳에 있던 병사들 사이에 일대 소란이 일었다.
“어어어!”
“서, 설마?!”
“우와악. 우릴 겨눴어!”
“어, 어째서……?”
소스라치게 놀라 화포를 피해 이리저리 튀었다.
오직 한 사람, 용무린이 찍었던 투구를 깊이 눌러 쓴 병사만이 굳은 듯 서 있을 뿐이었다.
피식.
“자존심이 상해서 다른 애들처럼 그렇게 이리저리 튀어 다니지는 못하겠지?!”
쉬각. 번쩍.
번갯불이 화포 상단을 스쳤다. 소검비연으로 긁어내린 것이다. 그 서슬에 불똥이 튀었다. 도화선에 불이 붙었다.
치이이.
도화선이 점점 짧아졌다.
“푸흐흐. 그러면 뜨거운 맛을 봐야지.”
“피, 피해.”
“우와악. 도망쳐!”
소란은 여러 곳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일었다.
용무린의 행동을 보며 양문광과 양경홍을 비롯한 오군도독부의 수뇌부들이 저마다 하나씩 화포를 잡고 의심스러운 놈들을 향해 겨누었던 것이다.
“……!”
“……!”
자존심 때문에 일반 병사들처럼 이리저리 도망치지는 않았지만 당황하기는 했는지 변장을 한 혈교의 고수들이 서로 눈을 마주봤다.
바로 그 순간,
치이잇. 쿠와아아앙.
가장 먼저 겨누었던 용무린의 화포가 불을 뿜었다. 어지간한 사내 머리통만 한 쇳덩이가 눈에 보이지도 않는 속도로 허공을 갈랐다.
타닷. 휘슷.
그대로 화포에 맞을 수는 없었던 모양인지 놈이 신법을 펼쳤다. 순간적으로 십여 장 옆으로 이동했다. 엄청난 속도로 쏘아진 포탄이었지만 역시 거리가 문제였던 것이다.
“아오, 아까워.”
목소리는 무지 아쉬워했지만 행동은 마냥 재미있어 보였다. 어차피 놀려줄 의도였던 것이지 이것으로 놈들을 쓸어버릴 수 있다고는 애초에 생각하지 않았다.
‘황궁비고에서야 지하의 좁은 통로에 몽땅 몰려 있어 피할 곳도 없었던 데다가 미리 조준까지 되어 그만큼 큰 위력을 발휘했던 것이고 지금이야 상황이 조금 다르지.’
그것이 정답이었다.
물론 아무것도 모른 채 군막 안에 들어가 십여 문의 화포에 집중사격을 당했다면 또 이야기가 달라진다.
쿠와앙. 콰아앙. 쿠콰콰콰-앙.
양문광을 비롯해 십여 문의 화포가 연이어 불을 뿜었지만 죽어 나자빠지는 놈들은 아무도 없었다.
재수 없게 백자연주포의 자잘한 철환에 걸린 몇몇 놈들만 옷이 살짝 찢어진 정도였다. 그 흔한 찰과상도 입지 않을 정도.
‘고수들이다.’
‘우리 못지않은 놈들이야.’
양문광과 양경홍의 얼굴에 긴장의 빛이 어렸다.
백 보의 거리가 있다지만 화포탄을 저렇듯 쉬이 피해낸 것만으로도 그 능력을 가늠할 수 있는 거다.
그때 군막 넘어 누군가가 모습을 드러냈다.
혈뇌였다.
‘빌어먹을! 안으로 유인한 후 집중사격을 가하고 공격하려 했었는데…….’
애초에 자신이 제안했었던 것처럼 두 명의 도독이 마중을 나와 놈들을 군막 안으로 끌어 들였다면 상황은 많이 달라졌으리라.
‘후군도독부의 도독씩이나 되는 놈들이 겁은 어찌 그리 많은 것인지!’
하지만 상관은 없다.
자신과 함께 온 사람들은 혈마 나령을 제외한 혈교 최강의 무력, 저 무시무시한 위력의 화포 세례 앞에서도 무탈한 존재들인 것이다.
“감히 황룡패주와 총병관 일행을 참칭한 놈들입니다.”
어째 어디선가 한 번쯤 들어본 말 같았다.
‘저놈이 오늘 일의 주제자인 모양이지?’
슬쩍 바라본 용무린이 고개를 끄덕이고 있을 때 혈뇌의 입에서 스산한 말이 쏟아졌다.
“즉참을 해야 합니다. 바로 지금!”
화아악. 휘우우웅.
혈뇌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혈교 마인들의 몸에서 엄청난 기운이 뿜어졌다.
“크흐흐. 그 말만을 기다렸소이다.”
“갑갑해 죽는 줄 알았소.”
쫘악. 쫘아악. 우드득.
혈뇌의 마인들이 변장을 위해 입고 있던 군복을 잡아 뜯었다. 순식간에 타는 듯 붉은 혈의로 바뀌었다.
“어헉!”
“다, 당신들은 누구야?”
상황을 모르는 몇몇 병사들이 놀라 고함을 질렀다.
“닥쳐!”
“작전이야. 그냥 뒤로 물러나!”
“……!”
“……!”
하지만 뒤이어 외쳐지는 부장급 무장들의 목소리에 잠잠해졌다. 부리나케 뒤로 물러났다.
그 서슬에 군막을 중심으로 커다란 공간이 생겨났다.
집단으로 군사훈련을 실시하는 대연무장 같은 공간 속으로 혈교의 마인들이 들어섰다. 용무린을 향해 하나같이 살기를 집중시켰다.
“크흐흐. 네놈이 바로 용가 애송이렷다?”
“감히 우리에게 화포를 쏘았다 이거지?”
“크크큭. 놈, 갈기갈기 찢어주마.”
멀찌감치 물러나 있던 병사들이 오들오들 떨 정도의 살기였건만 용무린은 그저 비웃을 뿐이었다. 모두 들으라는 듯 툴툴댔다.
“하여간, 말들 참 많아.”
저렇게 분위기 좀 잡으면 뭐가 달라지나?
“싸우러 왔으면 닥치고 덤벼 임마-앗!”
버언쩍.
용무린의 목소리가 끝나기가 무섭게 한 줄기 벼락이 일었다. 허리에서부터 시작된 빛줄기는 선두의 용가 애송이 운운했던 마인의 심장에까지 흰 선을 그려내었다.
빠아아앙.
그 속도가 어찌나 빠르던지 뒤늦게 공간이 울부짖는 굉음을 터뜨렸다.
“시건방진 놈. 내가 오늘 네 놈의 목을……. 으응?”
몇 마디 더 거드름을 피우려던 마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심장이 아릿한 것이 구멍이 뻥 뚫리는 듯한 착각이 인 것이다.
‘맙소사. 어검술이다.’
늦었다. 피할 수가 없다.
거드름 피우던 마인의 얼굴이 시커멓게 죽어가는 순간이었다.
“이런 멍청한 놈!”
스스슷.
애초부터 그 자리에 서 있었던 듯 흐릿한 붉은 그림자가 나타나는가 싶더니 벼락처럼 쏘아진 풍뢰를 향해 짧게 손을 그었다.
차라라랑. 파카-앙.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어도술로 펼쳐진 수라비격일뢰의 초식이 너무나도 쉽게 뒤로 튕겨진 것이다.
“전장에서 방심을 하다니! 그렇게 죽고 싶은 게냐?”
“죄, 죄송합니다.”
죽다 살아난 놈이 머쓱한 얼굴로 뒷덜미를 긁었다.
용무린의 눈이 동그래졌다. 진심 어린 탄성을 발했다.
“호오! 진짜 왕건이는 따로 있었네.”
보는 순간 바로 알 수 있었다.
‘도마종 정도는 어림도 없는 수준의 강자!’
나를 넘어설 정도는 아닌 것 같지만 그렇다고 아래로도 보이지 않는다.
‘붙어 봐야 확실히 알 수 있겠어. 대체 누구지?’
상대의 정체를 바로 알 수 있었다.
“태상장로님. 저놈입니다. 저 애송이가 바로 혈교의 앞길을 막았던 용무린, 바로 그 애송입니다. 저놈을 가장 먼저 정리해 주십시오.”
혈뇌가 신이 나서 외쳤던 것이다.
“저 늙은이가 혈교의 태상장로라고?”
용무린의 목소리가 살짝 높아졌다.
겁이 나서가 절대로 아니었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우와, 땡 잡았다.”
상대가 혈교주 혈마 나령을 길러낸 전전대의 거마라는 사실은 아직 알 수 없었지만 안다고 해도 용무린의 태도에는 변함이 없을 것이다.
휘슷.
“이놈! 죽어랏!”
양문광이 상대를 향해 짓쳐들었다. 중단을 거머쥔 창으로 허공을 가볍게 툭툭 찍었다.
물론 그 결과도 가볍지는 않았다.
후우웅. 콰르르. 콰르르.
묵직한 파공성과 함께 만근거암을 가루로 만들 법한 강기가 툭툭 튀어 나갔다.
“양가창의 정수를 보여주마!”
스파아앙. 콰앙. 콰앙. 쾅! 쾅! 쾅!
그 사이 양경홍과 세 장로가 남아 있던 혈교 마인들과 격렬하게 얽혀 들었다. 협수부총병을 비롯한 오군도독부의 수뇌들 역시 전투를 개시했다.
‘숫자는 딸리지만, 그렇다고 쉽게 당할 사람들은 아니야.’
용무린은 눈앞의 적에 집중했다.
“뭐해 영감?”
꿈틀.
평생 들어보지 못한 대거리에 혈교 태상장로의 볼살이 요란하게 씰룩거렸다.
물론 용무린으로서는 알 바 아니었다.
“안 들어와? 그러면 내가 먼저 간닷!”
버언쩍. 번쩍.
이번에는 두 줄기 벼락이 일었다.
풍뢰와 소검비연으로 어도술과 어검술을 동시에 펼쳐낸 것이었다.
“흥!”
차라랑.
혈교 태상장로가 허리춤에서 무엇인가를 뽑아 들었다. 낭창낭창한 연검, 수라비격일뢰의 초식을 단숨에 뒤로 튕겨낸 것으로 보아 보기 드문 수준의 보검이리라.
스파아앙. 스파팡. 차라랑. 차리라랑.
어도술과 어검술 그리고 연검이 한데 얽혔다.
쿠와앙. 콰아앙. 쾅! 쾅! 쾅!
고막이 터질 듯한 폭음이 연신 일었다.
참으로 놀라운 일이었다.
“마, 맙소사.”
“이, 이런 경지의 무인들이 존재하고 있었다니!”
멀리 물러서 있던 병사들 중 백호장 이상 되는 무장들, 그러니까 뭘 좀 아는 것이 있는 무장들은 누구를 막론하고 경외심을 가졌다.
어도술과 어검술을 동시에 펼치는 용무린의 무위에 처음으로 넋을 잃었고, 그것을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내는 태상장로의 무위에 또 한 번 놀랐다.
쿠와앙. 콰아앙.
“크헉!”
“헉!”
“내 귀! 내 귀-이!”
수십여 장이나 떨어져 있건만 귀에서 피를 흘리며 나뒹구는 병사들이 속출했다.
“뒤, 뒤로 더 물러서!”
“아예 잘 보이지 않는 곳까지 떨어져!”
화들짝 놀란 부장급들이 고함을 질렀다. 병사들을 안전한 곳까지 뒤로 물렸다.
버언쩍. 버번쩍. 쿠와앙. 콰콰쾅!
벼락같은 광채가 번득이고 창공과 대지가 몸살을 앓는다.
오래도록 군부에 회자될 전투가 본격적으로 전개되기 시작했다.
쾅! 쾅! 쾅! 주춤. 주춤.
조금씩이지만 격돌이 계속될수록 용무린이 뒤로 밀렸다.
놀랍게도 상대의 무위가 어도술과 어검술을 동시에 펼쳐내는 용무린을 능가하는 것이다.
‘늙은 생강이 확실히 맵네.’
부딪혀 보니 알 수 있었다.
무공자체는 백중세였지만 내공이 상대보다 부족했다. 태상장로의 내공이 확실히 더 강했다.
“크흐흐. 그게 네 전부면 너는 오늘 죽는다, 애송아!”
차라랑. 차리라랑. 쿠콰콰쾅.
연검이 만들어낸 파도에 풍뢰와 소검비연이 연신 뒤로 튕겼다. 그 모습을 보며 태상장로가 비릿하게 웃었다. 승리를 자신했다.
‘당연히 전부가 아니지, 이 망할 영감탱이야.’
양의신공의 경지가 완전하지 않아 지금은 하나만 선택한 상태다. 신마 진무량의 의식으로 싸우는 중이었다.
‘그냥 처음부터 절대검신을 택할 것을…….’
불사대천검의 수련이 아직 되지 않았기에 신마 쪽을 택한 것이었다. 후회가 되었지만 지금으로서는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도 한두 번 정도는 검을 그어 내릴 수 있어.’
한두 번으로도 충분하리라 생각한다.
상대가 의식을 바꿀 정도의 틈을 줄지는 모르겠지만, 어떻게든 분심의 벽을 돌려 절대검신의 의식을 끌어온 후 불사대천검을 펼쳐야만 한다.
“크흐흐. 죽어라, 애송아!”
버언쩌저적. 차라라라-랑!
태상장로의 손에 들린 연검이 급변했다.
마치 피로 이뤄진 해일이라도 되는 것처럼 끝도 없이 강기의 파도를 밀어냈다.
콰르르. 콰르르르.
강기로 이뤄진 해일이 용무린을 집어 삼키려 들었다.
“저, 저것은?”
용무린의 눈이 부릅떠졌다.
기억에 들어 있는 초식이었다. 주입된 것이긴 하지만 신마 진무량이 수라멸절단의 단주 신분으로 혈교를 정벌할 때 분명히 겪어 보았던 바로 그 초식이었다!
‘어설픈 대처로는 막을 수 없어!’
즉시 사력을 다해 불사신기를 끌어 올렸다.
“흐아아압!”
악을 쓰며 풍뢰와 소검비연에 밀어 넣었다. 힘없이 뒤로 튕기던 풍뢰와 소검비연이 겨우 힘을 되찾았다.
‘수라멸절! 비연폭뢰!’
머릿속으로 두 가지 초식을 떠올렸다.
버언쩍. 푸화아-학!
풍뢰가 지금껏 한 번도 펼쳐내지 않았던 진천수라도의 마지막 초식을 펼쳐내었다. 소검비연 역시 비연오식의 마지막 초식인 비연폭뢰의 초식을 뿜었다.
“으응? 이건 어째……?”
혈교의 태상장로의 눈빛이 변했다.
용무린이 그의 정체를 알아차린 것처럼 그 역시 두 가지 초식을 보며 아득한 과거 어느 때를 떠올린 모양이었다.
마치 도마종이 용무린과 도를 맞댄 후 수라멸절단주의 도법을 떠올린 것과 같은 경우였다.
‘정파의 애송이가 어떻게 이 무공을……?!’
많은 것이 달라져 있었지만 근본은 그대로였던 거다.
도마종조차 정확히 들여다 볼 수 없었지만 이 무공에 죽을 고비를 넘겼던 태상장로는 누구보다도 더 정확히 용무린이 펼치는 무공의 정체를 알아볼 수 있었다.
‘궁금한 것은 일단 녀석을 박살내고 난 후 물어봐야 하겠군그래.’
“하아아아-아!”
차랑. 튀아앙. 차차-앙!
혈교 태상장로의 연검이 급변했다. 연검이 부러질 듯 뒤틀렸다가 펼쳐지며 기묘한 검명을 쏟아냈다.
파카앙! 쿠와앙! 쾅! 쾅! 쾅!
무시무시한 폭음이 연이어 터졌다.
초식과 초식, 내공과 내공이 맞부딪치며 추측하기도 힘들 만큼의 충격파를 주변으로 흘렸다.
“어헉!”
“크아악!”
오십여 장도 넘게 떨어져 있었지만 병사들 몇몇이 피를 토할 정도로 무지막지한 충격파였다.
“커헉! 쿨럭. 쿠울럭.”
용무린도 피를 게워냈다.
상대가 내공도 훨씬 더 강력한데다 펼쳐낸 초식도 그만큼 무서운 것이기 때문이었다.
“크흐……. 혈마멸천오검. 오랜만이군.”
스슷.
파리한 안색의 혈교태상장로가 용무린의 십여 장 앞에 소리도 없이 내려섰다. 치밀어 오르는 피를 그대로 꿀꺽 삼키며 입을 열었다.
“이 무공을 어떻게 알지? 아니, 네놈은 대체 어떻게 그 빌어먹을 놈의 수라진천도를 익히게 된 것이냐?”
역시 꿰뚫어 보았다.
용무린의 무공인 진천수라도가 사실은 수라진천도의 변형이라는 사실을.
“……!”
용무린은 대답하지 않았다.
혈교 태상장로가 궁금증을 풀기 위해 약간의 시간을 끄는 사이 분심의 벽을 반대쪽으로 틀어 절대검신의 의식을 불러오기 위해서였다.
섬뜩!
알 수 없는 그 어떤 감각이 혈교 태상장로의 등줄기를 타고 전신으로 쫙 퍼졌다.
‘뭐지?’
아직 분심의 벽을 완전히 되돌리지 못했는데도 혈교 태상장로는 본능적으로 위기를 감지했다.
‘위험한 놈이야.’
시간을 더 끌 필요가 없었다.
‘궁금증이고 뭐고 그냥 죽이고 본다.
버언쩍!
마음이 일자 손에 들린 연검이 다시금 피처럼 붉은 혈기를 줄기줄기 쏟아내기 시작했다.
“……!”
용무린은 여전히 변함이 없는 얼굴로 쏘아볼 뿐이었다.
“잘 가라, 애송아. 재미있었다.”
말과 동시에 혈교 태상장로의 검이 움직이는 순간이었다.
“죽어라, 이 괴물아아-아!”
쿠와아앙!
한 발의 벽력탄이 혈교 태상장로를 노리고 쏘아졌다.
사력을 다해 용기를 낸 도독첨사 모위환의 작품이었다.
“흥!”
차라랑! 파카-앙!
눈에 보이지도 않는 속도로 쏘아진 벽력탄이었건만 연검을 가볍게 한 번 휘두르는 것만으로 어이없이 두 조각으로 나뉘어 버렸다.
하지만 그 한 발의 벽력탄의 효과는 죽여줬다.
반짝!
용무린의 눈빛이 완벽히 뒤바뀌었다.
분심의 벽을 완전히 돌려놓는 일이 끝난 것이다.
반짝.
혈교 태상장로의 눈가에 서슬 파란 살기가 걸렸다. 도독첨사 모위환을 노려보았다.
“이런 시건방진 애송이가!”
짧게 내공을 휘돌렸다.
용무린이 앞에 있으니 검 끝을 돌려내는 대신 살의 자체를 내공에 담아 쏘아 보냈다.
콰앙.
“크허억!”
백 보 어림이나 떨어져 있던 모위환이 피를 토했다. 뒤로 훌훌 날아갔다. 그 한 수에 의식이 끊겼는지 더는 움직이지 않았다.
심즉살! 의형상인의 경지!
그런 놀라운 경지를 보면서도 용무린은 샐쭉 웃었다.
불쑥 입을 열었다.
“이봐, 영감.”
“……?”
“상대가 되는 사람에게나 힘을 써. 거, 왜 애들을 못살게 굴고 난리야?
“이 노-옴. 네놈이 감히…….”
혈교 태상장로가 몇 마디 더 뭐라고 하려 했지만 용무린이 중간에 툭 잘랐다.
“됐고, 이거나 받아봐.”
말과 동시에 휘둘러지는 풍뢰!
슬쩍 하늘로 들어 올려진 후 가볍게 뚝 떨어졌다. 그 동작이 어찌나 간결하던지 검을 든 사람이라면 누구나 처음에 배우는 태산압정의 초식을 펼친 것만 같았다.
휘슷.
그 동작이 너무나도 가벼워 바람도 겨우 한 줄기만 일어났을 정도!
처음에 혈교 태상장로가 보인 반응은 비웃음이었다.
피식.
“정신 나간 놈. 겨우 그 정도로 본좌를 어찌해 볼……?”
그러다가 갑자기 눈을 부릅떴다.
오싹!
등줄기를 타고 전신에 소름이 쫙 돋아난 것이다.
심즉살의 경지를 이뤄냈던 감각이 경고를 해 준 것!
‘뭐, 뭐지?’
안력을 집중하니 그제야 보였다. 가볍게 내려 그어진 풍뢰를 따라 어긋나는 공간이!
“……!”
혈교 태상장로의 눈이 튀어나오기라도 할 듯 부릅떠졌다.
믿을 수가 없었다. 공간 자체가 어긋나다니!
‘허, 허공이 둘로 쪼개졌어.’
환영이 아니다. 분명히 보았다. 허공에 금이 간 후 한쪽이 아래로 미끄러져 내렸다. 어긋났던 양쪽 모두가 허무할 정도로 쉽게 바스러졌다.
그 모습을 확인한 순간 저절로 몸이 움직였다. 격렬하게 반응했다.
“우와아악!”
비명과도 같은 고함을 내질렀다. 사력을 다해 내공을 끌어 올렸다. 연검에 주입한 후 혈마멸천오검의 마지막 초식을 펼쳤다.
“혈! 신! 강! 세-에!”
차라랑. 차라라랑. 콰르르. 콰르르.
전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을 만큼 자라난 피 같은 색의 강기가 뿜어졌다. 피할 공간을 주지 않겠다는 듯 상하좌우 십여 장이나 늘어났다. 그 상태로 밀려들어왔다.
바로 그때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쫘아아악!
그 무엇으로도 훼손할 수 없었던 붉은 해일의 중심이 갈라지기 시작했다. 환영처럼 보았던 장면이 고스란히 재현되었다.
풍뢰의 움직임을 따라 어긋난 붉은 해일의 한쪽이 아래를 향해 스르르 미끄러져 내리는가 싶더니 유리처럼 산산이 바스러졌던 것이다.
푸스스. 푸스스슷. 휘이이잉.
혈신강세의 초식은 그렇듯 허무하게 바람이 되었다. 어디론가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그리고…….
파카-앙!
한차례 강렬한 폭음과 함께 혈신강세의 초식을 펼쳐냈던 연검이 와그작 뒤틀렸다. 어긋난 공간에 맞섰던 부위에 금이 쩍 갔다.
“크허억! 쿨럭. 쿨러-억.”
쿵쿵쿵. 콰드드득.
그것으로도 모자라 혈교 태상장로가 세 걸음이나 뒤로 밀렸다. 그 뒤에는 밭고랑 같은 흔적을 삼 장이나 더 남겨야 했다.
“흐으으읍!”
어느새 풍뢰를 옆으로 비켜 든 용무린이 이번에는 횡으로 긋기 위해 애를 썼다. 하지만 제대로 되지 않았다.
‘젠장. 역시 수련이 안 되어 있으니 마음대로 긋는 것조차 잘 안 되네.’
위에서 아래로 긋는 것 하나는 수월하게 성공시킬 수 있었지만 그 뒤는 어림도 없었다. 역시 공을 들여 수련을 해야만 하는 것이다.
‘아깝다. 공연한 짓 하느라 시간만 주었네.’
그냥 재차 위에서 아래로 긋기만 했으면 저 밉상스런 혈교 태상장로를 깔끔하게 둘로 가를 수 있었으리라.
“이이, 이야아아-하!”
혈교 태상장로가 미친 듯이 공격을 퍼붓기 시작했다.
방금 전에 맛볼 수 있었던 그 무서운 공격을 두 번 다시 펼칠 수 없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버언쩍. 차라라랑. 콰르르. 콰르르르.
금이 가 있었지만 보기 드문 수준의 명검이었던 연검이 예의 그 해일 같은 강기를 다시 일으켰다. 용무린을 향해 뿜었다.
“흥! 죽어라, 이 영감탱이야-하!!”
휘슷!
다시 한 번 가볍게 내리 그어지는 풍뢰.
그 가벼운 움직임에 다시 한 번 공간이 둘로 나뉘기 시작했다.
쫘아아아-악!
풍뢰가 내려오는 선상에 놓여 있던 모든 것이 갈라졌다.
혈마멸천오검의 초식도 예외는 아니었다. 만년 거암도 단숨에 무너뜨릴 것만 같던 핏빛 강기의 해일이 너무나도 쉽게 갈라졌다.
쩍. 스르르. 푸스스. 파스스.
한 순간에 어긋나 미끄러졌다. 유리처럼 바스러져 허무로 되돌아가 버렸다.
파카-앙!
“크허-억! 쿨럭. 쿠울럭.”
쿵쿵쿵쿵쿵. 콰드득.
이번에는 다섯 걸음이나 뒤로 물러나야만 했다. 그러고도 모자라 다시 삼 장이나 땅에 밭고랑을 내었다. 연검의 금이 간 부분이 티딕 소리를 내며 조금 깨졌다.
파카아-앙! 쩌어엉.
“크아아악!”
다음번에는 연검마저 깨졌다.
혈교 태상장로의 가슴 어림에서 붉은 피가 확 튀었다. 모르긴 몰라도 갈비뼈 서너 대는 족히 두 쪽으로 나뉘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혈교 태상장로는 포기하지 않았다. 승려라도 된 듯 합장을 했다. 그 상태로 혈신강령대법을 불러 일으켰다.
“오오, 혈신이시여-!”
외침과 함께 백오십여 년을 훌쩍 넘는 세월을 살아올 수 있게 만들어준 근본적인 힘과 모든 잠력이 두 손으로 한꺼번에 몰려들었다.
화아아악. 버번쩌저적.
합장을 한 혈교 태상장로의 손끝에서 화려한 빛이 일었다. 분명히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지만, 한 자루의 핏빛 검이 솟아났다.
심검!
틀림없는 심검이었다!
웅웅웅. 우우우우웅. 트득. 트드드득.
대체 얼마만큼의 힘이 고인 것인지 하늘과 땅이 몸살을 앓았다. 대기가 미친 듯이 울부짖었고 대지는 계속해서 가늘게 몸을 떨었다.
반짝!
용무린의 두 눈에 변함없는 투기가 솟구쳤다. 당당하게 선포했다.
“불사대천검은 삼라만상을 가른다. 오라!”
휘슷.
그대로 전면을 향해 신법을 전개했다. 하늘에까지 닿을 듯 들어 올린 풍뢰를 힘껏 그어 내렸다.
쩌어억. 쫘아아악!
풍뢰의 움직임을 따라 모든 것이 둘로 나뉘기 시작했다. 어긋났다. 미끄러져 내리며 바스러졌다.
“혈신의 적에게 죽음을 내리소서. 흐아아아-!”
혈교 태상장로 역시 심검을 비스듬히 내려쳤다.
휘오오우우-웅!
심검의 움직임을 따라 공간이 마구 일그러졌다. 이번만큼은 절대로 질 수 없다는 듯 뻗어나갔다. 그렇게 핏빛 선명한 심검이 불사대천검과 부딪혔다.
버언쩌저적! 투화아아-악!
두 눈이 멀어버릴 것 같은 광채와 함께 상상하기조차 힘들 만큼의 압력이 주변으로 터져나갔다.
“크아악!”
“커헉!”
두 사람이 마주친 공간을 중심으로 둥그렇게 원을 그리며 많은 수의 병사들과 무장들이 피를 토했다.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뒤, 뒤로 물러나!”
“도망쳐!”
겨우 살아남은 무장들이 고함을 질렀다. 병사들을 훨씬 더 뒤로 물렸다.
용무린은 계속해서 풍뢰를 위에서 아래로 그었다.
단순하기 짝이 없는 초식이었지만 혈교의 태상장로는 피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사력을 다해 심검을 펼쳐 맞받을 뿐이었다.
버언쩍. 버번쩍. 쿠와앙. 콰아앙. 쿠콰콰쾅.
그때마다 눈부신 섬광과 충격파와 폭음이 주변을 휩쓸었다. 엉망으로 만들었다.
“마, 맙소사.”
“어떻게 인간의 힘으로 저런 위력을 낼 수 있지?”
양문광과 양경홍을 비롯한 무인들의 전투도 어느덧 멈춰졌다. 그들과 상대하던 혈교 마인들까지 싸움을 멈추고 뒤로 물러났다.
용무린과 혈교 태상장로와의 대결만 바라보았다. 무인의 한 사람으로써 넋을 잃은 것이다.
“쿨럭. 쿠울럭.”
용무린의 입에서도 덩어리 피가 쏟아졌다.
하지만 그럴수록 용무린의 입가에 떠오른 미소는 짙어져갔다. 솟아오르는 희열을 주체할 수 없었다.
‘아아아! 이것이로구나. 불사대천검을 펼친다는 것은 바로 이런 것이었어.’
불사대천검의 구결에 따라 계속해서 풍뢰를 그어 내리다 보니 어느덧 익숙해진 것이다. 그러면서 전생의 감각이 조금씩 되돌아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용무린의 움직임이 조금씩 바뀌기 시작했다.
덩실. 휘슷.
하늘에서 땅까지 내리치는 단순한 동작만 펼쳐내던 것에서 탈피해 하나의 춤사위를 펼치듯 발이 튕겨져 올랐다가 살포시 내려앉았다.
휘스슷. 휘스슷.
풍뢰 역시 생소한 나선을 그렸다. 다시 사선으로 거슬러 올랐다가 휘어져 감기우고 폭발하듯 내뻗어 부드럽게 전면을 훑었다.
이것이 바로 두 번째 움직임!
용무린이 사력을 다해 횡으로 긋으려 했던 본디 모습인 것이다.
‘이런 것이었어. 옆으로 긋는 단순한 움직임이 아니었던 것이야. 이 안에는 나선도 들어 있고 사선도 들어 있으며 흡수했다가 다시 퉁겨내는 힘과 함께 공간 자체를 갈라낼 만큼의 힘을 압축해야만 해.’
이제야 한 걸음 더 나아갔다. 그리고 그 결과는 바로 나타났다.
파카아아-앙! 스걱.
혈교 태상장로가 혈신강령대법의 힘을 빌려 펼친 심검의 중단이 그대로 잘려버렸다. 불사대천검의 두 번째 동작에 걸린 모든 것이 위 아래로 어긋났다.
“……!”
혈교 태상장로의 눈이 부릅떠졌다.
이백 년 가깝게 살아오며 쌓아온 모든 힘과 혈신강령대법의 잠력까지 한 순간에 베어지다니!
“어, 어떻게…….”
그 엄청난 힘이 바스러져 없어지는 이 현실을 당최 믿을 수가 없었던 거다.
우뚝!
더는 움직일 필요가 없다는 듯 용무린은 고요히 멈춰서 있었다.
퍼억! 푸스슷!
용무린을 바라보던 혈교 태상장로의 몸이 한 줌 피 모래로 변했다. 공간이 으스러지듯 부서져 흩어졌다. 혈교주 혈마 나령을 키워 혈교의 재림까지 일궈낸 전전대 혈교 대사제의 최후였다.
“어헉!”
“컥!”
지켜보던 혈교 마인들이 헛숨을 들이켰다.
혈교주를 제외하면 감히 그 누구도 맞상대를 할 수 없으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던 태상장로의 죽음에 모두 충격을 받았다.
‘이때다!’
그들이 내지른 경악성에 양문광의 정신이 되돌아왔다.
“죽어랏!”
그대로 창을 내던졌다.
양가창법의 극의 절대투환살의 초식이었다.
후우웅. 큐우우웃!
양문광의 내공을 잔뜩 머금은 창이 작살처럼 바람을 갈랐다. 목표의 심장을 향해 스며들었다.
“우웃!”
휘슷.
화들짝 놀란 마인이 신법을 펼쳤다. 한 걸음에 창끝을 벗어났다.
“흥!”
싸늘한 얼굴을 한 양문광이 두 손을 모았다. 자신의 창을 향해 뻗었다. 보이지 않는 무엇인가를 움켜쥔 듯 힘을 주더니 옆으로 틀었다.
바로 그때 놀라운 변화가 일었다.
휘우웅. 퍼어어억!
헛되이 흐를 것만 같던 양문광의 창이 허공에서 스스로 방향을 틀어 보이더니 안심하고 공격 준비를 하던 마인의 심장을 뻥 뚫어버린 것이다.
어검술이나 어도술과 같은 어창술은 분명 아니었다.
그 전 단계로써 비창술이라고나 할까?
그렇지만 스스로 방향을 바꿀 수가 있으니 절대로 만만한 경지라고 할 수 없는 일이다.
“이노-옴!”
양문광이 나머지 수신호위를 향해 쏘아졌다.
땅에 박혀 있는 자신의 창을 냉큼 거머쥔 후 양가창법의 정수를 아낌없이 펼쳐 내었다.
반짝.
잠시 눈을 감고 있던 용무린의 눈이 떠졌다.
사색이 된 얼굴로 도망칠 준비를 하던 혈뇌를 정확히 노려보았다. 헤실 웃었다.
“할 일도 많은데 빨리 끝내는 것이 좋겠지?”
소검비연이 스르르 떠올라 손에 잡혔다.
용무린은 손에 쥔 소검비연에 불사신기를 듬뿍 먹였다.
“제대로 된 어검술이 어떤 것인지 내가 보여주도록 하지.”
용무린의 시선이 아직도 살아 양문광 일행과 싸우고 있던 혈교 마인들을 차례차례 훑었다.
자신으로부터 시작해서 그들의 목과 심장, 단전까지 이어지는 선을 머릿속으로 그려낸 후 소검비연에 그 의지를 전달했다.
그리고…….
“가라!”
버언쩍.
소검비연이 날아올랐다. 스스로의 의지를 가진 듯 거침없이 첫 번째 목표를 향해 짓쳐들었다. 초식의 한계를 넘어선 움직임으로 사각을 노려 파고들었다.
퍼어어억!
“크헉!”
양경홍이 상대하던 혈교 무사제의 단전에 커다란 구멍을 뚫어 버렸다.
“죽어랏!”
투확! 푸스슷.
그 틈을 노려 찔러진 창에 머리가 수박처럼 터졌다.
씨이유우-웅!
소검비연은 스스로 다음 상대를 찾아 움직였다.
신마 진무량의 의식으로 펼쳤던 어도술이나 어검술은 용무린의 시선이 닿아 의지를 받아야만 그대로 움직일 수 있었지만 절대검신의 의식으로 펼쳐진 어검술은 완전히 차원이 달랐다.
용무린의 시선이 닿지 않아도 스스로 알아서 움직였고 초식을 전개했다.
이것이 바로 완성된 형태의 어검술인 것!
한 번 의지를 각인하면 주입한 내공이 모두 떨어질 때까지 끝도 없이 적을 찾아 스스로 움직이고 원하는 초식을 펼친다.
씨이유우-웅! 콰아앙!
“커허억!”
휘웅. 쐐애액. 스각.
“컥!”
혈교주의 수신호위 두 사람이 연거푸 쓰러졌다.
한 사람은 심장에 커다란 구멍이 뻥 뚫려 있었고 다른 하나는 목이 잘렸다. 그렇게 혈교 마인들의 숫자가 빠르게 줄어들었다.
“너는 잠깐 나 좀 보자.”
용무린이 신법을 전개했다.
스파아-앙.
저 혼자 살길을 찾으려 돌아섰던 혈뇌의 앞을 막아섰다.
“아으으.”
딱딱딱딱딱.
혈뇌가 사신을 본 듯 가늘게 몸을 떨었다. 연신 이를 부딪쳤다.
지닌바 무위가 상당했지만 감히 덤벼들 엄두도 내지 못했다. 역시 혈뇌는 무인이라기보다 책사였던 거다.
그러거나 말거나 용무린은 씨익 웃었다. 혈뇌를 향해 툭 내뱉었다.
“네게 궁금한 게 참 많다.”
“크아아악!”
마지막 수신호위가 내지른 비명을 끝으로 전투는 모두 끝이 났다.
휘릭. 스르르. 척.
할 일을 모두 마친 소검비연이 날아와 용무린의 손아귀에 가만히 쥐어졌다.
기다렸다는 듯 용무린은 분심의 벽을 돌렸다.
절대검신의 의식을 가리고 신마 진무량의 의식을 전면으로 내세웠다.
“약속하지. 이 각, 그 안에 네가 아는 모든 것을 털어 놓게 만들어 주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