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평화를 원하면 (67/104)

7.평화를 원하면

용무린의 손이 살짝 흔들렸다. 혈뇌의 몸이 그대로 굳었다.

“저놈 잘 잡아 두세요.”

“염려하지 마십시오, 패주.”

양경홍이 고함을 지르듯 대답했다.

“아, 또 왜 그래요? 그냥 평소대로 해요 평소대로.”

“아, 아닙니다. 제가 어찌 감히!”

양경홍이 도리질을 쳤다. 고개를 푹 숙였다. 한쪽 무릎까지 꿇고 군례를 취했다.

공간이 통째 쪼개지는 모습과 심검이 박살나는 모습을 보며 용무린을 대하는 기본적인 관념 자체가 완전히 바뀌었기 때문이었다.

‘휴우. 앞으로 얼굴 보면 닭살깨나 돋겠구나.’

내심 고개를 흔든 용무린은 아직도 너부러져 있는 도독첨사 모위환에게로 다가갔다. 가만히 맥문을 잡았다. 불사신기 한 가닥을 밀어 넣어 내부를 살폈다.

‘다행이다. 완전히 죽지는 않았구나.’

백 보가 넘었던 거리가 그를 살렸다.

심즉살의 의지에 당했지만 거리가 원체 멀기 때문에 태상장로가 쏘아낸 내공에 손실이 발생했고 날카로움도 많이 무뎌져 목숨을 구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 정도면 살려낼 수 있어.’

용무린은 즉시 불사신기를 뭉텅 끌어 올렸다.

양손에 운집한 후 모위환의 전신을 가볍게 두들겨 나가기 시작했다.

타닷. 타다다닷.

용무린의 손가락 끝에 걸린 불사신기가 모위환의 몸을 파고들었다. 혈도를 따라 휘돌며 막힌 곳은 뚫어내고 잘린 곳은 이어나갔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울컥 한 덩어리의 피를 쏟으며 도독첨사 모위환이 눈을 떴다.

“아! 패, 패주. 이런 불경이…….”

용무린의 얼굴을 확인한 모위환이 버둥거렸다. 일어나 군례를 취하려 들었다.

“됐다. 일단 편히 쉬어라. 죽다 살아났으면서 예의는 개뿔! 몸조리나 해 인마!”

얼굴 한 가득 지어 보인 웃음과는 달리 핀잔을 준 후 용무린은 주변으로 시선을 돌렸다. 좌우 도독을 찾아보는 것이었다.

“흠. 아직도 그 잘난 면상을 보이지 않는다, 이거지?”

지휘관으로 보이는 자들은 아무데도 없었다.

겁이 나 도망을 쳤거나 깊숙이 숨어 일이 모두 끝나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리라.

용무린은 크게 숨을 들이켰다. 벼락처럼 고함을 질렀다.

“좌우도독은 듣거라!”

우르릉.

용무린의 목소리가 우레처럼 총군영 전체로 퍼졌다.

“나 황룡패주다. 너희들이 준비시켰던 혈교 나부랭이들은 깡그리 죽었다.”

용무린과 총병관 일행에게 죽은 혈의 차림의 마인들이 혈교 나부랭이라는 말과 그것을 준비한 범인이 좌우도독이라는 말에 병사들 사이에는 작은 소란이 일었다.

“뭐라고? 혈교 나부랭이?”

“그 붉은 옷을 입은 인상 더러운 놈들의 정체가 혈교의 마인들이었단 말이야?”

“맙소사. 혈교라니!”

병사들 사이에서 이는 소란이 고스란히 용무린의 귀에 들렸다.

‘다행이네. 애꿎은 애들 못살게 굴지 않아도 되겠어.’

처음부터 이런 반응이라면 조금만 더 일깨워주면 된다.

용무린은 한결 편안해진 마음으로 계속해서 목소리를 높였다.

“북원과 싸워야 할 후군도독부의 강군 삼만여 명을 이곳에 모았지? 내부 감사가 시작되자마자 준비한 것이니 역모에 다름이 아닐 터!”

우르릉.

우레와도 같은 외침과 함께 용무린은 주변을 한차례 슥 돌아보았다. 놀란 토끼눈을 하고 있는 병사들을 향해 싸늘한 시선을 던졌다. 마치 너희도 역모에 동참했지 하듯이…….

움찔.

병사들이 불에 덴 듯 몸을 떨었다.

“뭐, 뭐야? 우리가 모인 것이 역모 때문이었어?”

“이런 씨팔! 내가 왜? 나는 역모를 할 생각조차 없었어.”

“나도 마찬가지야!”

“내가 미쳤어?”

본의와는 상관없이 역모에 휘말린 셈이 된 병사들이 저마다 분노를 터뜨렸다. 지금껏 목숨을 다 바쳐 국경을 지켜온 자신들을 이런 어처구니없는 일에 빠뜨린 좌우 도독이 그 대상이었다.

“제기랄! 나는 상관없어!”

“나도! 나도 역모 따위와는 눈곱만큼도 관련이 없다고!”

“역모는 지랄!”

툭. 투두둑. 후두둑.

너 나 할 것 없이 병사들이 무기를 바닥에 던졌다. 뒤로 더 멀리 물러났다.

부장급들의 행동은 더욱 빨랐다.

그들은 숫자는 몇 되지 않아도 용무린이 있는 한 역모는 어림도 없다는 것을 공전절후의 대결을 보며 뼈저리게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여간 멍청한 대가리 때문에 엄한 우리만 역모로 몰리게 생겼구나.’

‘돼지 같은 것들이 후방에서 제 욕심만 챙기려다 걸리게 생기니 딴 마음을 품은 것이로구나.’

내부감사가 시작되자마자 병력의 이동이 발생했다는 용무린의 말이 그것을 증명한다. 그러니 용무린이 역모라고 단정한 것이다.

‘난 죽기 싫어.’

‘역모에 얽혀서 우리 집안 전체가 쓸려 나가게 할 수야 없는 일이지.’

판단을 빠르게 마친 부장급 이상 지휘관들이 잽싸게 무릎을 꿇었다. 그러자 병사들도 따라 무릎을 꿇었다. 그 모습이 마치 파도가 퍼지는 것 같았다.

씨익.

‘됐다. 이젠 놈들만 잡으면 돼.’

용무린의 입가에 작은 미소가 걸렸다.

“그간 북방을 지켜온 네놈들의 공을 생각해 마지막으로 피를 적게 흘릴 기회를 주마!”

우르릉.

용무린의 입에서 놀라운 제안이 이어졌다.

“내가 열 셀 동안에 튀어 나와 순순히 포박을 당해라. 그러면 내 너희들의 죽음을 끝으로 너희 가족의 목숨을 보장해주마.”

용무린은 즉시 숫자를 헤아리기 시작했다.

“하나! 둘! 셋…….”

용무린의 입에서 천천히 숫자가 헤아려졌다.

넷, 다섯, 여섯……. 숫자는 거침없이 아홉까지 이어졌다.

‘이런 멍청한 놈들 같으니!’

용무린의 눈에 서슬 파란 살기가 튀었다.

아홉까지 헤아리는 동안에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다니!

“여얼……!”

“여, 여기 있습니다.”

“나, 나갑니다.”

총군영 마지막 군막 뒤쪽에서 두 사람이 불쑥 모습을 드러냈다. 후군도독부의 머리라고 할 수 있는 좌우 도독들이었다.

“새끼들…….”

휘슷.

두 사람의 모습이 보이기가 무섭게 용무린은 말꼬리를 흐리며 달려들었다.

“일단 맞고 시작하자.”

퍼억. 빠악. 뻐버버벅.

좌우 도독을 무참하게 짓밟기 시작했다.

“커헉! 큽!”

“크아악. 허억.”

비명소리도 요란하게 흘리며 좌우 도독은 비 오는 날 먼지가 날 만큼 두들겨 맞았다.

“허으으.”

“끄으으…….”

정신을 잃는 것도 용납되지 않았다.

“어디서 개수작이야?”

맞다, 맞다 못 견딘 좌우 도독이 정신을 잃자 용무린은 불사신기를 살짝 돋워 두 사람의 기혈을 다시 틔웠다. 울혈을 토하게 해 정신을 차리게 만들었다. 그런 후 다시금 폭력을 행사했다.

“흑색 화약 같은 것을! 혈교 따위 놈들에게! 주고 싶디? 그래?!”

뻐어억. 빠악. 퍼버버벅.

“황금에 넘겼냐? 그거 쥐약이야, 이 멍청이들아! 말해! 얼마나 받아 처먹었어?”

대답을 할 수 있을 리 없다.

퍼퍼퍼퍼퍽.

“크아악. 커헉. 크흡!”

“어헉. 끄아악.”

좌우 도독은 그 뒤로도 한참을 더 두들겨 맞고 욕을 얻어먹어야 했다.

“……!”

“……!”

철퍼덕. 털썩.

한계를 넘어설 만큼 두들겨 맞은 후 좌우 도독은 마침내 의식의 끈을 놓아버렸다.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바닥에 너부러졌다.

두 사람을 한차례 싸늘한 시선으로 노려본 용무린의 눈이 혈뇌에게로 향했다.

흠칫! 파르르.

혈뇌가 소스라치게 놀랐다. 몸을 떨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용무린은 혈뇌 앞으로 다가갔다. 한 손으로 놈의 목줄을 잡아채 들어 올렸다. 막사 안으로 들어가며 툭 내뱉었다.

“아무도 들어오지 마!”

“알겠습니다, 패주.”

여전히 고함을 지르듯 대답하는 양경홍의 목소리를 들으며 용무린은 군막 안으로 사라졌다.

잠시 후.

“끄, 끄아아아-악!”

군막 안에서 처절한 비명소리가 흘러나왔다.

혈뇌가 지르는 것이었다.

양문광과 양경홍은 안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대충 감을 잡았다. 하지만 정파 무림인들과는 사뭇 반응이 달랐다. 용무린의 행동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

‘어쩔 수 없는 일이야.’

‘흑색화약을 어떻게 다뤘는지, 뇌화탄을 어떻게 만들었는지 자진해서 입을 열지는 않을 테니…….’

혈뇌가 지르는 비명은 용무린이 장담했던 것처럼 이각을 넘기지 않았다. 양문광과 양경홍은 즉시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놈이 입을 열었다.’

‘흑색화약을 대체 어떻게 가공을 했기에 뇌화탄이라는 기물을 만들어 낼 수 있었을까?’

두 사람은 혈뇌의 말을 함께 듣고 싶어 조바심이 났다.

하지만 서슬 파란 얼굴로 출입을 금지한 용무린 때문에 들어가 볼 엄두가 나질 않았다.

내공을 집중해 귀를 쫑긋 세워봤지만 소용이 없었다.

따로 조치를 취했는지 천막 안에서는 그 어떠한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혈뇌가 죽는다고 비명을 지를 때와는 완전히 반대였다.

그렇게 두 사람이 궁금해 하고 있을 때 용무린이 불쑥 군막을 나섰다.

“노고가 많으셨습니다, 패주.”

“다음부터는 저희 손에 맡겨 주십시오, 패주.”

용무린이 하찮은 일까지 하게 만들어 송구하다는 듯 양문광과 양경홍이 고개를 숙였다.

“그러죠 뭐.”

용무린이 씽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저…….”

“그, 그런데…….”

그런 용무린을 보며 두 사람은 똥 마려운 강아지처럼 어쩔 줄 몰라 했다. 혈뇌가 어떤 정보를 토해 냈는지 알고 싶었던 것이다.

‘특히 뇌화탄에 대해 알고 싶겠지?’

알아내긴 했다.

하지만 용무린은 절대로 알아낸 모든 것을 두 사람과 공유할 생각이 없었다.

‘아니 될 말이야. 자칫 잘못하다가는 무림과 관 사이의 균형이 송두리째 무너지게 돼.’

지금도 황제의 마음만 같다면 군을 동원해 무림을 송두리째 쓸어버리고 싶을 것이다.

‘그런 판국에 황제의 손에 뇌화탄까지 쥐어져 봐. 어떻게 되겠어?’

혈교의 무리가 뇌화탄 수십 개를 던지는 것 정도는 애교에 불과한 일이 될 것이다.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숫자의 뇌화탄으로 무장을 하게 될 거야.’

수십만의 대군이 뇌화탄을 쥐고 움직인다?

무림을 넘어 북원을 쓸어버리고도 모자라 정복전쟁을 벌인답시고 온 천하를 휩쓸고 다니게 될 것이 틀림없다.

“혈뇌가 아는 것은 별 거 없었어요.”

그 또한 사실이었다.

혈뇌가 알고 있는 사실은 전체적인 그림과 이론일 뿐 가장 중요한 핵심은 혈교 안에 존재하는 화기당의 당주와 그의 수하들이었다.

‘하지만 그 정도 정보만으로도 위험해. 시간의 문제일 뿐, 총병관 산하 화기창의 화약을 다루는 기술자들이라면 그 정도 정보만으로도 충분히 뇌화탄을 만들어낼 수 있을 것이란 말이지.’

그러면 무림은 끝이다. 안 될 말이다.

“예?”

“그, 그렇습니까?”

양문광과 양경홍이 조금은 미심쩍은 시선으로 되물었다.

용무린 역시 안타까운 표정을 지어보이며 답했다.

“혈교 내부 깊숙한 곳에 화기를 다루는 특수한 장소와 기술자들이 있다고 하네요.”

“아! 그곳에……?”

“허어, 그렇다면 이번 기회에 군을 움직여서……?”

이어지는 두 사람의 말을 용무린이 칼처럼 중간에 잘라 버렸다.

“불가!”

“……!”

“……?”

양문광과 양경홍이 머쓱한 얼굴이 되었다. 용무린은 여전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자꾸 잊으시는 것 같은데, 혈교든 마교든 무림의 일이에요. 군이 나서면 놈들 역시 참지 않고 황궁의 담을 넘을 것이라고요.”

그 사실을 잊을 리 없다.

‘하긴, 패주께서 상대한 그 무지막지한 늙은이와 같은 괴물이 자금성의 담을 넘는다면……?’

‘양가장의 힘만으로는 절대로 막을 수가 없지.’

두 사람은 동시에 용무린을 맞상대했던 혈교 태상장로를 떠올렸다.

부르르.

저절로 몸이 떨렸다.

아무것도 없는 빈손에서 찬란히 솟구치던 심검의 광채와 그 무지막지한 파괴력을 떠올렸던 것이다.

‘패주의 무력이 아니라면 과연 천하에 누가 있어 그런 괴물들을 막을 수 있을까?’

‘공연히 화를 자초할 필요는 없겠지.’

결국엔 제자리걸음이었다.

두 사람은 용무린을 믿고 맡기는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였다.

“그저, 패주만 믿고 있겠습니다.”

“황제폐하를 향한 패주의 충심만 믿고 기다리겠습니다.”

혈교를 박살낸 후 뇌화탄의 비전을 군에 전달해 달라는 부탁에 다름이 아니었다.

‘아 글쎄 어림없다니까?!’

“그래주면 고맙겠네요.”

용무린은 알 듯 말 듯 묘한 미소만 지을 뿐이었다.

“끄으으.”

“흐으으…….”

그러는 사이 좌우 도독의 정신이 천천히 돌아왔다.

“저 인간들은 두 분께서 알아서 하세요.”

“알겠습니다, 패주.”

“그렇지 않아도 이참에 후군도독부를 확실하게 단속해 둘 참이었습니다.”

“그럼 두 분만 믿고 가볼게요.”

더 있을 필요가 없다는 듯 용무린은 즉시 뒤돌아섰다.

“어디로 가시는 것이옵니까, 패주?”

“시간만 괜찮으시다면, 황제폐하께 문안이라도 드리시면 좋겠습니다만…….”

양문광과 양경홍이 잽싸게 속에 든 말을 꺼냈다.

“황제 폐하께 문안이요?”

“예, 패주.”

“그렇지 않아도 폐하께오서 틈이 날 때마다 저희에게 패주가 보고 싶다고 푸념을 하셨습니다.”

사실이었다.

황궁이 안정을 되찾은 후 정사를 돌보는 틈틈이 황제는 용무린을 찾았다.

실로 영광스러운 일!

하지만 용무린의 얼굴은 대뜸 찌푸려졌다. 귀찮았던 기억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싫어. 가 봐야 또 곁에 바짝 붙어 있다가 조금만 피곤해지면 불사신기 넣어달라고 보챌 게 빤해.’

생각만 해도 귀찮다. 인간 보약이라도 된 듯한 느낌에 짜증까지 난다.

“다음에 갈게요. 지금은 조금 더 급한 일이 있어서…….”

황제에게 문안을 하는 일보다 더욱 급한 일이라니!

“조금 더 급한 일?”

“그게 무엇인지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양문광 양경홍 두 사람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어왔다.

용무린은 풀썩 웃으며 되물었다.

“평화를 원하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두 사람은 거의 동시에 답을 떠올릴 수 있었다.

무가로서의 면모도 가지고 있기는 하지만 양가장은 역시 군부와 더 가깝기 때문이었다.

“전쟁을 준비해야 합니다.”

“전쟁 준비입니다.”

두 사람이 거의 동시에 답변을 했다. 말은 살짝 달랐지만 결국 같은 말이었다.

용무린은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잘 아시네요. 저 역시 그래서 준비를 좀 하려고요.”

“예에?”

“거기에서 더요?”

양문광과 양경홍 두 사람의 입이 쩍 벌어졌다.

평화를 위해 전쟁 준비를 한다는 말은 곧 지금 가진 무력으로도 모자라 수련을 한다는 말이었기 때문이다.

“예. 이번에 혈교 태상장로를 상대하며 그 필요성을 더 절실히 느껴서 말이죠.”

“하, 하지만…….”

“결국엔 패주께서 승리를 하시지 않았습니까?”

양문광과 양경홍이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목소리를 높였다. 심검을 자유자재로 뿜어내던 그 무시무시한 적까지 이겨냈는데 그보다 더한 힘을 필요로 한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장강후랑추전랑이라고들 하지. 그렇다고 보면 혈교의 교주인 혈마 나령의 무위는 나와 맞붙었던 태상장로보다 한 수는 위라고 봐야만 해.’

심검을 펑펑 뿌리던 혈교 태상장로보다 더 무서운 무공을 뿌리는 마인이라! 어느 정도의 힘을 지니고 있을지 선뜻 파악이 힘들 정도다.

‘혈교의 교주가 그 정도야. 그런데 나는 혈교를 넘어 역천자라는 놈과도 엮이게 될지도 모른다고.’

아니, 거의 확정적이지 않을까?

천기자와 혜월 그리고 전생의 나인 절대검신이 그토록 우려하던 일이다. 아마도 머지않은 장래에 그와 맞서는 날이 오고야 말 것이다.

‘어서 빨리 불사대천검의 수련을 끝내 놓아야만 해.’

불사대천검의 수련이 더디게 된다면 차선책인 양의신공만이라도 원하는 경지인 두 의식의 동시개방에 성공해 두어야만 하리라.

‘불완전하긴 하지만 불사대천검은 지금도 두 번째 움직임까지는 펼칠 수 있으니 그 와중에 신마의 의식으로 어검술과 어도술을 연거푸 펼치면 훨씬 더 낫겠지.’

그 정도만 해도 혈교의 교주에게는 지지 않을 것 같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역천자라고 하는 괴물을 상대하기에는 뭔가 조금 부족하게 느껴졌다.

-역천자는 사람을 통째 먹는다.

아니, 집어 삼킨다는 표현이 더 정확하리라.

자신보다 강한 상대, 자신의 힘으로 도저히 극복할 수 없는 상대, 그래서 탐이 나는 상대라면 즉시 자신의 육신을 버리고 상대의 육신을 빼앗는다. 그 대상으로 갈아타버리는 것이다.

전생의 나 절대검신 독고황이 죽음으로 남겨둔 글이 사실이라면 역천자의 능력은 인간의 잣대로는 결코 잴 수 없을 것이다.

자신보다 강한 상대를 통째 잡아먹음으로써 계속해서 능력을 키워 온 그야말로 역천의 괴물이기 때문이다.

‘등선을 앞두고 있던 절대검신의 능력마저 결국에는 흡수한 존재란 말이지.’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어 다시 나타난 역천자가 얼마나 더 강력해져 있을 것인지 상상조차 되지 않는다.

“하여간, 무림에는 그보다 더 강한 괴물이 최소한 둘이나 버티고 있어요.”

“허억. 그, 그보다 더 강한 괴물이 정녕 둘이나 더 있다는 말입니까?”

“어, 어찌 그럴 수가…….”

너무 놀랐는지 양문광과 양경홍은 말을 끝까지 잇지 못할 정도였다.

“그래서 무림과 관은 별개라고 자꾸만 말을 하는 거예요. 놈들에게 빌미를 주지 않으려고요.”

“……!”

“……!”

양문광과 양경혼은 입을 열지 못했다. 용무린이 빙그레 웃으며 말을 이었다.

“너무 걱정하지는 마요. 제가 있잖아요. 미리 알고 대비하려는 제가요.”

양문광과 양경홍의 얼굴이 갑자기 밝아졌다.

용무린이라면 틀림없이 그들을 뛰어넘어 세상을 평안하게 만들 수 있으리라 확신한 것이다.

‘그렇다면?’

‘맞아! 그게 좋겠다.’

이번에도 역시 같은 생각을 떠올린 것인지 두 사람은 앞다투어 용무린에게 한 가지 제안을 했다.

“양가장에 수련하기 안성맞춤인 곳이 있습니다, 패주.”

“양가장의 수련동을 이용하시면 좋을 듯합니다, 패주.”

두 사람 모두 양하린을 떠올린 것이다.

“양가장이요?”

“예, 패주.”

“그렇습니다. 양가장만큼 수련하기에 좋은 곳도 사실 천하에 드뭅니다, 패주.”

“청석으로 만들어진 수련동입니다.”

“내부의 크기가 무려 십오 장이나 됩니다. 어떤 무공이든 수련하실 수 있으실 겁니다.”

양문광과 양경홍이 계속해서 목소리를 높였다. 어찌나 열성적인지 기이한 열기마저 느껴질 정도였다.

“흐음. 십오 장 크기의 수련동이라…….”

구미가 당긴 용무린이 말꼬리를 늘였다.

반짝.

양문광과 양경홍의 눈에 회심의 빛이 돌았다.

‘기회다.’

‘패주께서 수련을 하는 동안 하린이에게 수발을 들도록 하면?’

‘푸흐흐. 어쩌면 이참에 가까워질 지도 몰라.’

‘혈기 넘치는 나이니 틀림없이 서로 눈이 맞을 거야.’

역시나 김칫국부터 사발째 들이켜는 두 사람이었다.

‘어? 두 사람 눈빛이 어째……?’

고민을 하던 용무린은 두 사람의 눈빛에서 무엇인가를 느꼈다.

‘아하!’

그리고 곧바로 양하린을 떠올렸다.

‘큰일 날 뻔했다.’

수련은 고사하고 귀찮은 일에 휩싸일 게 빤히 보였다.

‘차 마시며 대화나 할까 했는데 덥석 내 손부터 잡아끌고 갔었지?’

그때 느낄 수 있었다.

양하린 역시 백리소옥과 같은 부류라는 사실을…….

‘아오, 또 시험에 빠지긴 싫다.’

양하린이 백리소옥처럼 저돌적인 공세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만으로도 아찔했다.

‘그런 시험에서 나를 지킨다는 것은 정말 너무, 너무 힘든 일이야.’

아예 처음부터 그런 상황을 만들지 않는 게 가장 좋다.

용무린은 힘차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그, 그러면 혹 제갈세가로 가시는 것인지……?”

“아니면 백리검가로……?”

양문광과 양경홍이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되물었다.

용무린의 얼굴이 팍 구겨졌다.

‘이 양반들이 정말!’

자신과 관련이 있는 여인들의 본가만 콕 짚어 묻다니!

그 속이 너무 빤히 보였던 거다.

“다 아니에요. 저 혼자 조용히 있을 곳을 찾아 수련을 할 겁니다.”

“아아, 알겠습니다, 패주.”

“그렇게 알고 있겠습니다, 패주.”

그나마 다행이라는 듯 양문광과 양경홍은 내심 가슴을 쓸어내렸다.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다음에 봬요.”

휘슷.

그대로 몸을 돌린 용무린은 신법을 펼쳤다.

눈 깜박할 사이 까마득히 멀어졌다.

“휘유, 다행이다. 아직은 우리 린아에게도 기회가 있어.”

“정말 다행입니다. 패주께서 제갈세가나 백리검가로 가실 줄 알고 어찌나 놀랐는지…….”

두 사람의 얼굴에 미소가 걸려 있는 것은 그때까지 뿐이었다. 이제야 정신이 돌아와 오만상을 다 찌푸리고 있는 좌우 도독을 향해 얼굴을 돌렸을 때는 냉기가 풀풀 날렸다.

“끌고 들어와!”

“도독 동지를 비롯해 후군도독부의 수뇌부를 앞에 대기시켜라. 차례대로 심문하겠다.”

“예, 총병관!”

도독첨사 모위환이 목이 터져라 대답했다.

“……!”

“……!”

좌우 도독의 얼굴이 검게 썩어 들어갔다.

***

심문은 하루 밤낮 동안 이어졌다.

그 후 후군도독부에 피바람이 불었다. 좌우 도독은 물론이고 예하의 도독동지를 비롯한 후군도독부의 수뇌부들 중 혈교와 관련이 있던 모두가 참수형을 당했다.

다행스러운 일은 죄 지은 사람들을 참수하는 것을 끝으로 더 이상의 피가 흐르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역모의 죄를 씌웠다면 절대 불가능한 일이었으나, 용무린이 내뱉은 말도 있고 해서 군 내부의 비리 사건으로 처리를 했기 때문이다.

물론 흑색화약을 내어준 후 혈교에게 받았던 황금은 해당 가문을 탈탈 털어 깡그리 회수했다. 그것으로도 모자라 평소 저질렀던 비리로 형성한 재산까지 남김없이 계산한 후 압수해 버렸다.

하지만 어느 누구도 그러한 조치에 대해 심하다거나 너무한 처사라고 하지는 않았다. 다들 가문 전체가 쓸려 나갈 수도 있는 일을 그 정도에서 멈춰주는 것을 다행으로 받아들였다.

모든 조치가 끝나기까지 보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순환배치라는 명목으로 좌우 도독이 전선에서 빼낸 강병들 역시 다시 제자리를 찾았다.

“자, 이제 돌아가 볼까?”

말에 오른 양문광이 한마디를 하자 도독첨사 모위환이 기쁜 얼굴로 튀어 나갔다.

“제가 길을 트겠습니다, 대장군. 이럇!”

콰두두두.

한 손에 총병관을 상징하는 깃발을 든 모위환이 신나게 말을 몰았다. 저만큼 앞서 나갔다.

“눈치도 있고 용기도 제법이고…… 쓸 만한 녀석인 듯합니다.”

양경홍의 말에 양문광이 동감을 표했다.

“괜찮은 녀석이야. 패주께서 위험할 때 대포를 쏘아 엄호를 할 정도니 조금만 더 가르친다면 앞으로 일군을 맡겨도 되겠어.”

“알아서 팍팍 굴리겠습니다.”

“푸흐흐. 당연하지. 일군을 이끌 정도가 되려면 온갖 상황에 대처할 줄 알아야 하잖아?”

콰두두두.

자신의 앞날에 어떤 고난이 기다리고 있는 줄도 모른 체 도독첨사 모위환은 여전히 신나게 말을 달리며 외쳤다.

“모두 물렀거라! 총병관 납신다!”

***

홍화장이 깊은 침묵에 휩싸였다.

감숙에서부터 날아든 급보 때문이었다.

부르르.

전서를 받아 든 혈교의 교주 혈마 나령의 손이 격렬하게 떨리고 있었다.

“이, 이게 대체…….”

보고 또 봤지만 믿기지가 않았다.

그토록 강한 분이, 자신을 지금의 위치까지 이끌어준 분이, 심검까지 자유자재로 펼칠 수 있으신 분이 어찌 그렇게 쉽게 가실 수가 있단 말인가?

“수신호위 여섯과 대사제 예하의 무사제 여덟까지 함께하고 있으면서도 모두 당했다? 이게 지금 말이 돼? 태상장로님까지 가셨는데?”

“……!”

“……!”

사람은 많았지만 대전은 여전히 조용했다. 누구도 혈마 나령의 말에 대꾸하지 않았다.

언제나 여유를 잡던 대사제 역시 마찬가지였다.

자신이 아끼던 제자들의 죽음에 분노하긴 매한가지였지만 감히 사부를 잃고 분노에 몸을 떠는 혈마 나령 앞에서까지 빈정댈 수는 없는 일이었다.

‘인정해야만 하나?’

문득 혈마 나령의 뇌리를 스친 생각이었다.

상대하면 단순히 재미있을 정도일 뿐이라 생각했던 애송이가 천근같은 무게로 느껴진 것이다.

‘그 애송이가, 무림왕이라는 우스운 이름으로 불리는 용무린이라는 놈이 정녕 내 숙적이라는 사실을 인정해야만 하는 것인가?’

지금껏 자신을 맞상대할 수 있는 존재는 마교의 교주일 뿐이라 생각했다.

‘전체적인 세력에서만 밀릴 뿐 무림맹의 맹주도 내 상대라고는 생각하지 않았거늘…….’

하지만 이제는 인정해야만 할 것 같았다.

누가 뭐라고 해도 용무린은 자신의 사부였던 태상장로를 넘어선 강자였으니까.

‘이대로는 나 역시 장담을 하지 못한다.’

현재 자신의 경지는 사부와 백중지세.

용가 애송이가 사부를 거꾸러뜨렸으니 그보다 한 발 더 나아가지 못한다면 놈 앞에 설 수 없음이다.

‘그것을 쓸 때인가?’

홀연히 모험을 해야 할 때가 왔음을 느꼈다.

혈마 나령이 불쑥 입을 열었다.

“혈신령을 받겠다.”

부르르.

격동한 듯 몸을 떨어 보인 대사제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혈마 나령 앞에 부복하며 목이 터져라 외쳤다.

“혈신 강림. 혈교 천세 천천세!”

쿠쿠쿵.

대전에 모인 모두가 동시에 무릎을 꿇었다. 대사제의 말을 따라 고함을 질렀다.

“혈신 강림. 혈교 천세 천천세!”

우르릉.

외침의 여운이 가시자 대사제는 조심스레 몸을 일으켰다.

홍화장 가장 깊은 곳에 마련된 혈신의 제단으로 달려가 제단의 가장 위에 걸려 있단 붉은 색의 귀면 탈을 조심스레 두 손으로 받들었다.

이 귀면 탈이야말로 혈교의 모든 것!

혈신이 이 땅에 자신의 힘을 과시하기 위해 내린 신물이라는 전설이 깃든 물건으로 혈교의 교주를 상징하는 신물임과 동시에 아직까지 깨지지 않은 전설이었다.

“부디 혈신의 가호가 깃들기를 바라나이다.”

날듯이 돌아온 대사제가 공손히 혈신령을 두 손 높이 들어 올렸다.

번쩍. 버번쩍.

귀면 탈 안쪽에 피처럼 붉은 색의 광채가 번들거리고 있었다. 추측하기 힘들 만큼 거대한 힘이 언제라도 튀어 나올 듯 꿈틀거렸다.

‘이것만큼은 쓰지 않으려 했거늘…….’

역대 혈교의 교주들 중 혈신령을 받고 살아남은 자는 아무도 없다. 쓰는 족족 백일을 넘기지 못하고 한 줌 핏물로 변했다고 한다.

‘하지만 백일 후에도 살아남는다면 그때는 천상천하유아독존이 된다고 하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쓰기가 꺼려지는 이유는 바로 혈신령에 따라 붙는 전설 때문이다.

-그릇에 혈신이 채워지니 인간이되 혈신이 되리라.

혈영대법, 혈신강령대법에 이은 마지막 전설이 실현되는 순간 자신은 인간이되 인간이 아니게 되는 셈이니 꺼려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좋다고, 사부와 더불어 내가 다시 혈교를 일으켜 세운 이유가 뭔데?’

그게 다 살아서 영화를 누리기 위함이다.

한데, 인간이되 인간이 아닌 혈신 그 자체가 된다?

희로애락과는 거리가 멀어지게 됨은 불문가지다.

그 두 가지 이유로 인해 과거에도 혈교가 마교의 힘에 무릎을 꿇었던 것이다.

역대 교주들 중 혈신령을 받아 살아남은 사람이 아무도 없었고 살아남는다고 해도 인간이되 인간이 아닌 존재가 되니 혈신령을 받기 꺼려했던 거다.

‘그래도 좋아. 이대로 멀거니 앉아 정파 놈들에게 짓눌려 비참하게 지내느니 나는 도전하겠어.’

살아남아 인간이되 인간이 아닌 존재가 되어도 좋다.

희로애락과는 거리가 멀어지겠지만 그래도 패배자가 아닌 승리자가 되고 싶다.

혈신령이 혈마 나령의 손으로 자리를 옮겼다.

번쩍. 버번쩍.

혈신령 안에서 꿈틀거리는 피처럼 붉은 색의 혈기가 금방이라도 쏟아져 나올 듯 느껴졌다.

“백일…….”

혈마 나령이 혈신령을 서서히 얼굴로 가져갔다.

혈신령 내부에서 소름끼칠 만큼 끈적한 기운이 튀어 나와 혈마 나령의 얼굴에 척척 달라붙었다. 오랜만의 먹잇감을 놓칠 수 없다는 듯 끌어당겼다.

“백일 후면 알게 되리…….”

촤라락. 철썩.

혈신령이 혈마 나령의 얼굴에 완벽하게 달라붙었다.

“혈신강림. 혈교 천세 천천세!”

대사제가 격동한 목소리로 부르짖었다.

“혈신강림. 혈교 천세 천천세!”

대전의 모두가 목이 터져라 고함을 질렀다.

외침의 여운이 사라지는 순간 대전에는 누구도 남아 있지 않았다. 대전은 봉인이 되었고 백일이 지나기 전에는 열리지 않을 것이다.

***

구련산 초입 천문 인근.

“드디어 도착했군.”

용무린은 저만큼 앞에 보이는 성산의 입구를 보며 활짝 웃어 보였다.

“그래, 아무리 생각해도 이곳이 제일이야.”

이곳까지 오는데 보름이나 걸렸다.

더 빨리 올 수도 있었지만 호북으로 향했다가 되돌아오는 바람에 늦은 것이다.

“평화를 원한다면, 령매와 함께 가시버시 행복하게 살길 바란다면, 아무리 생각해도 무공부터 완성해 두어야 할 것 같단 말이지.”

들끓는 욕망은 자꾸만 발길을 제갈세가로 돌렸다. 수련이 아무리 급하다지만 시간을 내려면 하루 이틀이야 내지 못할 것도 없었기 때문이다.

“아니지, 아니야. 그랬다가는 너무 달콤해서 차일피일 미루다가 시간만 훌쩍 흘러버릴 가능성이 커.”

제갈영령과 함께 꿈같은 밤을 보낸다.

그런 후 과연 쉬이 떨어지고 싶을까? 혈교는 함부로 튀어나올 수 없는 상태이고 마교 역시 잠잠하며 역천자는 흔적조차 보이지 않고 있는 요즘에?

“욕망이란 그런 거야.”

밑 빠진 독에 물을 붓는 일에 다름 아닐 것이다.

무려 수백 년 만에 맛보는 달콤함에 빠져 언제까지나 제갈영령과 함께 있고 싶어 하리라.

“그러다가 불쑥 역천자가 나타나면?”

상상만으로도 끔찍하다.

발등을 찍으며 후회해도 그때는 이미 늦는다. 달콤한 욕망에 시간을 허비한 대가로 사랑하는 사람과 가족은 물론이고 내 목숨마저 내놓아야만 하리라.

“들어가자! 평화를 원하면 역시 전쟁 준비를 먼저 해놓아야만 해.”

그것이 만고불변의 진리일 터!

휘슷.

마지막으로 결의를 다진 용무린은 천문 안쪽 가장 깊은 곳에 펼쳐진 대자연진법을 향해 신법을 펼쳤다.

오래지 않아 예의 그 커다란 바위가 보였다.

“그대로구나.”

용무린은 대뜸 바위 위로 올라섰다.

대자연진법이 시작되는 곳으로 다가가 북두칠성의 방위를 밟으며 떨어져 내렸다.

흔들.

주변 경물이 살짝 흔들리는가 싶더니 이내 절대검신 독고황의 안식처가 눈앞에 다가왔다. 모든 것은 떠날 때 그대로였다.

용무린의 시선이 한 곳으로 향했다.

“언제 봐도 기분이 묘하단 말이야.”

커다란 봉분.

전생의 나를 현생의 내가 묻은 곳.

묻을 때도 그랬지만 봉분을 지켜보는 지금도 기분이 상당히 복잡하고 미묘했다.

여러 가지 생각이 마구 스쳤다.

전생의 절대검신과 현생의 내가 정말 같은 사람일까?

못내 떨쳐내지 못하는 신마 진무량으로서의 의식은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떨쳐내야만 할 헛된 망상에 다름이 아닐까? 아니면 잠식하며 스며들어 하나로 섞인 이상 그것도 나의 일부분이라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하나?

그 사이에 끼인 용무린으로서의 자의식은 또 어찌 확립해야 좋을까?

제갈영령과 나눴던 대화처럼 나는 나일뿐이니 앞서의 두 가지 의식을 모두 다 무시해야 하는 것인가?

다 무시했다고 치자.

그때도 용무린 본연의 자각만으로 불사대천검을 펼치는 것이 가능할까? 신마의 의식을 끌어 왔을 때 가장 강력한 위력을 보이던 진천수라도까지 지금처럼 자유롭게 쓸 수 있을까?

온갖 생각이 한꺼번에 몰려들어 머리가 지끈거렸다.

“아오, 모르겠다. 시간이 해결해 주겠지. 일단은 불사대천검의 수련부터 해두자.”

용무린은 머리를 흔들어 잡념을 털어냈다.

풍뢰를 뽑아들었다. 양의신공의 구결에 따라 분심의 벽을 세웠다. 이제는 거의 나라고 해도 좋을 만큼 자연스럽게 녹아든 신마의 의식을 가렸다.

반짝.

용무린의 눈이 맑은 빛을 뿜었다.

절대검신으로서의 자의식만 남기자 혼란이 사라져 버린 것이다.

아니, 솔직히 절대검신 쪽을 가려도 결과는 동일했다.

절대검신을 삼키기 위해 스며든 신마의 의식 역시 전생에서부터 비롯된 것이기 때문인지 나라고 해도 좋을 만큼 하나가 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불사대천검. 삼라만상을 베는 절대무적의 검…….”

풍뢰가 천천히 하늘로 올라갔다.

풍뢰는 도였지만 그런 것은 이제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오직 의지일 뿐, 손에 들고 있는 것이 무엇이든 아무런 상관이 없다.

화아악.

자연스레 일어난 불사신기가 풍뢰로 스몄다.

웅웅웅.

기분 좋게 몸을 떠는 풍뢰를 부드럽게 그어 내렸다. 풍뢰가 그리는 선을 따라 모든 것이 어긋나기 시작했다. 스르르 미끄러졌다. 바스러져 허무로 되돌아갔다.

촤아악! 촤아아-악!

한 가지 동작에 만 번의 고련을 하려는 듯 용무린은 끝도 없이 같은 동작을 반복해 나갔다. 그러는 사이 서산 너머 해가 기울었다.

***

같은 시각 불회곡.

음양자는 답답하기 짝이 없었다.

신마가 아직도 중원정복에 나설 생각조차 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었다.

“신마께서는 아직도 침전에 계시는 것인가?”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

곁에 있던 유령궁의 궁주 양극이 조심스럽게 답했다.

신마를 대할 때와는 비교할 수 없었지만 지극히 공경하는 자세였다. 신마가 선언했듯 일인지하 만인지상이 음양자임을 인정하는 것이었다.

“허어, 아직도…….”

기가 막혔는지 음양자가 끝까지 말을 잇지 못했다.

같은 심정이었는지 얼굴을 살짝 붉히고 있던 유령궁주가 슬그머니 운을 떼었다.

“성녀 한 분으로는 만족하지 못하시는 듯합니다.”

“뭐라?”

“성녀께서 더는 버티지 못하고 몸이 아프다 하시자 신마께서 며칠 휴식을 주셨습니다.”

“쯧쯧쯧. 허구한 날 그 짓이니 강철인들 버틸까? 병이 날 만도 하지…….”

음양자가 혀를 찼다.

민망한지 유령궁주가 얼굴을 살짝 붉히며 말을 이었다.

“신마께서 잠자리가 허전하셨던지 어제부터는 성녀 대신 환희궁의 궁주와 두 명의 부궁주까지 불러 한꺼번에 동침을 하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

음양자의 입이 쩍 벌어졌다.

성녀야 어차피 신마의 대를 이어야 할 몸이니 그렇다고 하지만 환희궁의 궁주와 두 명의 부궁주라니!

‘대업을 목전에 두고 어찌하여!’

물론 이해는 한다.

대공을 성취한 후 십만 마도인의 경배를 받을 당시 했던 말처럼 무림정복이란 신마에게 있어서 마지막 남은 달콤한 금단의 과일 같은 것이었으니까.

‘하지만 너무 심해.’

자각 후 십여 년이란 세월 동안 참아만 오던 회포이니 푸는 것이야 당연한 일이겠지만 색욕에 너무나 깊이 빠져서는 곤란하다고 생각했다.

“그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환희궁의 기세가 등등합니다. 마치 신교 제일세력이 자신들이라도 되는 양 안하무인으로 행동하고 있습니다.”

“겨우 하루 만에?”

보고를 이어가는 유령궁주의 목소리에 일말의 분노가 담겨 있었다.

“예. 침전인 성녀전의 경계도 내원 고수들이 서야 할 것인데 자신들이 자진해서 추가 병력을 파견해 지키고 있을 정도입니다.”

“이런 발칙한 것들이!”

음양자의 허연 눈썹이 위로 확 치솟았다.

“안 되겠다. 내가 가서 직접 뵈어야겠다.”

음양자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그대로 침전인 성녀전으로 향했다.

***

신마가 침전으로 사용하고 있는 성녀전.

오궁 이원 예하의 이전 중 한 곳인 성녀전은 당연히 성녀의 거처이자 명목상 마신에게 신탁을 받는 곳이었으나 지금은 환희궁의 고수들에 싸여 있었다.

“음양자를 뵙습니다.”

“음양자를…….”

내원의 고수들을 제치고 경계라도 서듯 입구를 막아서고 있던 환희궁의 여 고수들이 음양자의 등장에 화들짝 놀랐다. 공손히 고개를 숙였다.

“크흠.”

하지만 음양자의 얼굴에는 노기가 어렸다.

환희궁 소속 여 고수들이 이내 빳빳이 고개를 쳐들고 음양자를 바라보았기 때문이었다.

‘예전 같았으면 내 말이 끝나기 전까지 고개도 들지 못하던 것들이 감히!’

확실히 유령궁주의 말이 맞아 보였다.

환희궁주와 두 명의 부궁주까지 신마의 은총을 받다보니 눈에 보이는 게 없는 모양이었다.

“신마께서 안에 계시다 들었다.”

“그렇습니다.”

“지금 뵐 것이다. 내가 왔다 아뢰거라.”

노여움을 꾹 참고 한 말이건만 입구를 지켜 섰던 여 고수들 입에서는 생각지도 못한 대답이 흘러나왔다.

“아니 될 말입니다.”

“뭐라? 아니 돼?”

“예. 신마께서는 지금 환희궁주님과 두 부궁주님들과 함께 환담중이십니다.”

환담은 개뿔!

지금도 끈적한 신음소리가 계속해서 흘러나오고 있거늘!

‘안 되겠다.’

불사마력을 완성한 신마에게 그나마 바른 말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자신밖에 없지 않던가? 음양자는 대뜸 한줄기 내공을 끌어 올렸다.

“이런 시건방진 것들이 감히!”

단호하게 손을 휘둘렀다.

휘슷. 퍼엉. 퍼퍼펑.

“아학!”

“허어억!”

가벼운 손길 한 번에 전면을 막아섰던 다섯 여인이 동시에 피를 토했다. 훌훌 뒤로 날렸다.

뒤로 물러나 있던 내원소속 고수들이 쌤통이라는 듯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성큼.

활짝 열린 길로 음양자가 발을 내디뎠다.

하루 전부터 계속해서 이어지던 신음소리가 약속이라도 한 듯 뚝 끊겼다.

쿵.

침전 앞에 도착한 음양자가 무릎을 꿇었다.

소리 높여 외쳤다.

“신마시여. 음양자이옵니다.”

스르르.

문이 열렸다. 땀에 젖은 몸을 꿈틀대며 신마를 휘감고 있던 환희궁주와 두 명의 부궁주가 못마땅한 시선으로 음양자를 노려보았다.

음양자는 고개도 들지 않았다.

감히 지존의 여흥을 깬 죄를 물어달라는 듯 계속해서 고개를 바닥에 처박은 채 목소리를 높였다.

“신마시여, 신교의 꿈인 중원정복이 코앞입니다. 한데, 어찌하여 이리도 시간을 허비하시는 것인지 속하는 정녕 모르겠나이다.”

피식.

누군가가 풀썩 웃는 소리가 들렸다.

신마였다.

“십여 년의 세월 동안 쌓인 회포 좀 풀고 움직이겠다는데 그게 그렇게 큰 죄라도 되는 것인가?”

나직하지만 분명히 문책성 발언이었다.

하지만 음양자는 뒤로 물러나지 않았다. 계속해서 목소리를 높였다.

“십 년이 아니라 천년을 기다려 온 신교의 숙원이 바로 중원정복입니다. 그만 육욕에서 벗어나 어서 중원정복의 거보를 내딛으소서.”

“……!”

십여 년의 세월과 천년의 기다림!

신마는 뭐라 반박할 말이 옹색해졌다.

하지만 동시에 묘한 반발심이 치밀어 오르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조금 귀찮군.’

지금의 자신을 만들어 준 일등공신이 음양자라는 것을 인정은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멋대로 제어하려 드는 것이 살짝 거슬린 것이다.

“음양자는 고개를 들어 내 눈을 보라.”

“어맛!”

“시, 신마시여…….”

환희궁주와 두 부궁주가 화들짝 놀라 몸을 가렸다.

아직도 벌거벗고 있는데 음양자에게 고개를 들라고 했기 때문이었다.

놀라거나 말거나 음양자가 고개를 들었다.

여인들의 육체 따윈 관심도 없다는 듯 신마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신마가 툭 내뱉었다.

“내 눈이 육욕에 물든 것으로 보이는가?”

“……!”

이번에는 음양자가 할 말을 잃었다.

신마의 눈은 육욕 따위와는 거리가 멀었다. 어찌나 차갑고 맑은지 선승의 눈을 보는 것만 같았다.

“마지막으로 말하지.”

쿵!

“하명하소서, 신마시여.”

음양자가 다시 고개를 땅에 처박았다.

빙그레 웃어 보인 신마의 목소리가 천천히 이어졌다.

“이제는 잊지 말도록. 나는 단지 아껴 먹을 생각일 뿐이네.”

대공을 이루고 나왔을 때 했던 말과 똑같았다.

“신마의 존안을 뵈니 비로소 알겠나이다.”

음양자가 소리 높여 외쳤다.

신마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중원정복을 마치면 내 삶은 권태로움만 남아 있을 뿐, 그 권태로움을 이겨내기 위해서는 끝없는 피가 흘러야 할 테지.”

중원을 넘어선 정복전쟁을 말함이다.

“내가 끝없는 피로 천하를 물들이고 다닐 때 천하를 경영하는 것은 일인지하 만인지상인 그대가 될 터이니 내 마지막 여흥을 더는 방해치 말도록!”

“충!”

쿵!

음양자의 이마가 바닥을 찧었다.

스르르.

소리도 없이 다시 문이 닫혔다.

“신마시여. 어서…….”

“아흥…….”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자리가 여전히 불변하다는 신마의 선언에 살짝 실망한 표정이던 환희궁주와 두 명의 부궁주가 다시 열정적으로 신마를 휘감았다. 어떻게 해서든 그 자리를 자신들의 것으로 바꾸고 싶은 것이었다.

‘어리석은 것들이 가당치도 않은 꿈을 꾸고 있군.’

쓴웃음을 지으며 음양자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조용히 성녀전 밖으로 물러나왔다.

‘아껴 먹을 생각일 뿐이다?’

음양자는 신마의 말을 다시 한 번 곱씹었다.

‘좋아. 조금만 더 기다린다.’

신마의 눈이 육욕에 물들지 않았으니 여흥이 오래 걸리지는 않으리라 생각했다.

‘지금껏 기다려 온 세월이 얼마인데 그 조금의 시간을 더 못 기다리겠는가?’

하지만 한계를 정해 놓아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백일! 앞으로 정확히 백일만 더 참는다.’

상상하기 힘들 만큼의 세월을 기다려 온 조바심의 한계가 바로 그 시간이다.

‘만에 하나 백일이 넘어서도 신마께서 지금과 변함이 없으시다면?’

반짝.

음양자의 눈에 묘한 빛이 일렁였다.

‘그 방법이라도 쓰겠다. 그 방법이라도…….’

음양자의 뇌리에 신마의 마음을 움직일 비장의 한 수가 떠올랐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