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과잉 충성도 때로는 쓸모가 있다
한차례 큰 홍역을 겪고 난 이후 자금성은 평온한 나날의 연속이었다.
용무린 덕에 완전히 건강을 되찾은 황제가 내치에 힘을 쓰고, 신하들 역시 그간 지은 죄를 갚느라 열심이어서 저절로 돌아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
새로이 사례감의 수장인 장인태감의 위에 오른 채홍 역시 그런 부류에 속했다.
전임자인 여군위가 상관초웅에 붙어 온갖 전횡을 저지르는 동안 그것을 막지 못한 죄가 있던 채홍은 모든 눈과 귀를 기울여 황제의 주변을 살폈다. 조금이라도 황제에게 해가 될 것을 찾아 정리해 나갔다.
사례감 내 장인태감 집무실.
야심한 밤임에도 불구하고 채홍은 자리에 앉아 두툼한 서류 뭉치를 뒤적이고 있었다.
“흐음. 환관 조직의 물갈이는 이렇게 하는 것으로 마무리가 다 되었군.”
업무시간이었다면 황제 뒤에 시립해 황제의 일상사를 보조했을 것이나 황제가 침전에 들면 이렇게 집무실에 나와 각종 보고서를 읽고 일을 처리해 나갔던 것이다.
“됐어. 이제는 마지막으로 외부만 단속하면 되겠어.”
들고 있던 보고서를 한쪽으로 치워 놓은 채홍은 다시금 그와 비슷한 두께의 보고서를 집어 들었다. 한 장 한 장 집중해서 읽었다.
“음?”
한참 보고서를 읽어 나가던 채홍의 눈이 가느다래졌다.
보고서에서 지금껏 생각지도 못했던 무엇인가를 발견했던 거다.
“만금상단이라…….”
이른 바 칠대 상단의 하나인 만금상단은 문어발처럼 손대지 않은 품목이 없는 곳이었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큰 거래처를 꼽으라면 단연코 자금성이었다.
“그동안 내관감, 어용감, 사설감에서 필요한 모든 품목을 만금상단에서 독점공급 해오고 있었단 말이야.”
내관감은 토목, 건축공사 관리에서부터 황실에서 사용하는 모든 집기를 만드는 곳으로 구리, 놋쇠는 물론이고 종이까지 다루는 곳이다.
어용감은 황족들이 사용하는 가구와 나전세공을, 사설감은 황제의 순행 시 필요한 의전용품과 생활용품들을 주로 만드는 곳으로 평소 소모되는 필요 자재의 양이 어마어마한 수준이다.
“전임 내관감, 어용감, 사설감의 태감들 역시 여군위의 수족이 되어 감히 황룡패주를 상대로 황궁무고에서의 일을 획책한 놈들이란 말이야?”
그런 놈들이 그토록 애용하던 곳이 바로 만금상단이었다.
채홍은 어쩐지 만금상단이 꺼림칙하게 생각되었다.
“크흠. 직접적인 관련은 없다 하여도 놈들 역시 황상을 억압한 무리에 일조를 한 것만은 틀림이 없을 터, 어찌하여 아직까지 거래가 계속된단 말인가?”
그렇게 생각하니 더욱 불쾌했다.
만금상단은 내관, 어용, 사설감 말고도 의복을 담당하는 상의감과 궁정 내 식사와 연회, 그리고 황상의 식사까지 담당하는 상선감에 필요한 모든 식료품까지 독점거래를 계속해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바꿔야 할 때야.”
과거와의 단절을 위해서라도 다른 거래선을 확보할 필요성을 느꼈다.
하지만 아직 계약기간이 남아 있다는 것이 약점이다.
아무리 자금성의 일이라지만 계약 자체를 무시하고 멋대로 처리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흠, 한 번쯤 조사해 볼 필요가 있겠어.”
뭔가 꼬투리를 잡는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계약기간이 남아 있다고 해도 귀책사유만 확실하다면 단칼에 잘라내 버릴 수 있는 것이다.
채홍은 심복인 중감 고염무를 불렀다.
“찾아 계시옵니까, 대인.”
“그래. 내 한 가지 네게 맡길 일이 있어 불렀다.”
채홍이 낮은 목소리로 손을 까딱였다.
중감 고염무가 조용히 앞으로 다가왔다. 침묵 속에 귀를 활짝 열었다.
채홍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계속해서 이어졌다.
“지금부터 너는 다른 모든 일에 앞서 만금상단에 대해 살펴야겠다.”
“어느 선까지 하오리까?”
“만금상단은 일전의 무림인들로 비롯된 자금성의 홍역이 지나갈 당시부터 그들에게 모든 충성을 다하던 여군위의 총애를 받아왔다.”
반짝.
채홍의 눈에 싸늘한 빛이 돌았다.
“새 술은 언제나 새 항아리에 담아야하는 법. 이참에 만금상단을 쳐낼 것이다. 새롭게 뽑은 동창의 고수들을 네게 붙여 주겠다. 만금상단과 관련된 것을 샅샅이 훑어라. 알겠느냐?”
“대인의 명을 따르오리다.”
중감 고염무가 깊게 읍한 후 집무실을 나섰다.
***
다시 보름이란 시간이 흘렀다.
야심한 밤 중감 고염무가 채홍을 다시 찾았고 그간의 조사 결과를 보고했다.
“뭐, 뭐라? 그놈들이 만금상단의 뇌물을 통해 들어온 놈들이었다고?”
“그러합니다, 대인. 일전의 그 일에 연루된 벼슬아치들 중 상당수가 매관매직을 통해 자금성에 입성한 놈들로 판명이 났사옵니다.”
“허어. 돈줄은 만금상단이 확실하고?”
“예, 대인. 만금상단의 북경지부에서 금자와 은자를 대량으로 풀었고 자금성을 한 바퀴 휘돌아 다시 전장을 통해 회수한 것을 확인했사옵니다.”
이른바 자금세탁의 흔적까지 찾아낸 것이다.
‘크흠. 보통 일이 아니로구나.’
채홍의 안색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매관매직이야 늘 있는 일이었지만 그 주체가 만금상단이고 그들이 애써서 밀어 넣었던 관리들이 마교의 내홍과 관련이 있다는 사실은 한 가지 놀라운 결론을 시사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마교……. 설마하니 만금상단이 그 마교와 무슨 관련이 있다는 말인가?’
아직은 섣부른 추론에 불과하다.
하지만 생각하면 할수록 만금상단과 마교와의 연계가 피부로 와 닿는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찌 매관매직을 통해 그 많은 수의 관리들을 자금성에 집어넣었을 것이며, 또 어떻게 그 관리들이 몽땅 상관초웅의 수족이 되어 황상을 억압하고 황룡패주를 도모하는 일에 전력으로 나섰단 말인가?’
더욱이 놀라운 사실은 매관매직을 통해 자금성에 출사하고 상관초웅의 수족이 되었던 자들에게서는 그 무서운 혈고조차 나오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 말은 곧 그들은 혈고를 쓸 필요조차 없었다는 뜻이 아니겠는가?’
다시 말해서 그들은 처음부터 그 일을 하려고 자금성에 발을 디뎠다고 봐도 좋은 것이다.
‘그렇다면?’
채홍은 즉시 고염무에게 다시 명령을 내렸다.
“만금상단에 드리운 눈을 지금 즉시 거두어라.”
“예? 무슨 말씀이신지……?”
당최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고염무가 고개를 들어 올렸다. 동그랗게 뜬 눈을 깜박였다. 채홍이 다급한 목소리를 이었다.
“위험하다. 보고 내용이 정녕 사실이라면 놈들은 마교라는 사특한 무리와 관련이 있을 터, 동창 고수들의 접근을 모를 리 없다. 뒤로 빼라. 지금 당장.”
채홍의 말에 고염무의 안색도 크게 변했다.
하지만 이내 생각을 정리한 후 자신의 의견을 밝혔다.
“되레 타초경사가 아닐까 합니다.”
“응? 뭐라고?”
채홍이 고개를 갸웃했다.
고염무가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급격하게 수족을 거두면 놈들 역시 이쪽에서 무슨 낌새를 챈 것이라 생각할 것입니다. 그렇게 된다면 차후 일이 힘들어지게 됩니다.”
“아! 그렇구나. 네 말이 맞다.”
채홍이 활짝 웃었다.
급한 마음에 명령을 내렸는데 다시 생각해보니 고염무의 말이 맞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즉시 명령을 바꾸었다.
“새로이 바뀐 자금성의 분위기 쇄신 작업의 일환으로 보이는 것이 좋겠다.”
“말씀하신 쇄신 작업으로 인한 통상감찰 정도로 분위기를 풍기며 빠져 나오도록 조치하겠습니다.”
“그래, 그래. 너만 믿겠다.”
“맡겨 주십시오.”
중감 고염무가 길게 읍하고 물러났다.
‘녀석. 저 정도 심계라면 내 뒤를 맡겨도 충분하겠어.’
물러나는 고염무를 지켜보는 채홍의 얼굴이 밝았다. 진흙 밭에서 진주를 발견한 기분이었다.
“그건 그거고, 내가 지금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지.”
채홍은 즉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상대가 정녕 마교와 관련이 있는 곳이라면 자신의 힘만으로는 당해낼 수 없기 때문이었다.
“그들이라면 믿고 상의할 수 있어.”
아직 장인태감의 위에 오른 지 얼마 되지 않는다.
그래서 지금 당장 가슴을 터놓고 정사를 논할 상대가 몇 되지 않는 상태였다.
‘총병관께 알린다면 당장에 오군도독부를 움직이려 들 테니 아니 되고…… 새로이 내각 대학사에 오르신 진대인 역시 역부족이란 말이야.’
호유용의 빈자리를 병부상서였던 진후상이 채웠다.
하지만 그 역시 마교를 상대로 큰 도움을 기대할 수는 없는 일이다. 상대가 마교라면 문무백관이 한 목소리를 내는 것보다는 강대한 무력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놈들을 몰아내기 위해서는 물론 문무백관이 한 목소리를 내는 것이 중요하지. 그러나 지금 당장에는 그분들의 도움이 필요하다.”
채홍의 뇌리에 두 사람의 이름이 떠올랐다.
바로 용대명과 제갈문군이었다.
‘비룡문의 문주 용대명은 황룡패주의 부친 되시는 분이고 제갈세가의 가주 제갈문군은 황룡패주의 빙장어른이 될 가능성이 농후한 분이지.’
그 두 사람이라면 마교의 일을 논의하기에 충분하다.
여차하면 무림왕이자 황룡패주인 분에게 도움을 요청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황룡패주께서 움직이신다면 중원 무림 전체가 움직일 터, 이 일을 논의하기에 그 두 분보다 더 좋은 사람은 어디에도 없다.’
“가자.”
채홍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황궁비고 기관 공사 마무리 작업이 한창인 곤녕궁 북쪽의 어화원을 향해 움직였다.
‘그나마 환관들 물갈이 작업이 다 끝난 뒤라서 다행이로구나.’
움직이며 든 생각이었다.
상관초웅의 잔재를 거둬내기 위한 인적 쇄신 작업을 통해 거의 모든 환관들을 물갈이 했다. 조금이라도 의심스러운 구석이 있는 자들은 가차 없이 궁 밖으로 내보냈다. 그 덕에 지금 이렇듯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는 것이다.
“아직도 작업 중이로구나.”
채홍의 얼굴이 환하게 밝아졌다.
비고의 입구로 알려진 흠안전에 아직도 불이 밝혀져 있었던 것이다. 그 앞에 무언가 열띤 목소리로 토의를 거듭하는 용대명과 제갈문군의 모습이 보였다.
“하하하. 수고들 하십니다.”
채홍이 먼저 두 손을 공손히 말아 쥐며 인사를 건넸다.
장인태감으로서 과례였다.
하지만 용대명과 제갈문군의 신분을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도 그것을 과례라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누가 뭐라고 해도 두 사람은 무림왕 황룡패주 용무린과 가장 가까운 사람들이었으니까.
***
하북성도의 만금상단 총단.
중원 칠대 상단에서도 수위에 꼽히는 곳인 만큼 총단은 자금성 못지않은 위용을 뽐내고 있었다.
끝도 없이 늘어선 전각과 누각.
곳곳에 가산과 연못이 파여 기화요초가 심어져 있어 아름답기 짝이 없는 곳이다.
그 중심에 십층이나 되는 거대한 전각이 있는데 그곳이 바로 만금상단의 총수인 정관호가 집무를 보는 공간인 만금각이었다.
만금각 십층.
불 하나 밝히지 않은 가운데 하얀 머리와 쭈글쭈글한 얼굴을 한 추레한 인상의 노인이 앉아 있었다.
그 노인이 바로 만금상단의 총수인 금왕 정관호였다.
반짝.
정관호의 눈에서 어둠을 뚫고 서슬 파란 빛이 뿜어졌다.
“그게 사실이냐? 정말 고자 나부랭이들이 내 집을 지켜보고 있어?”
“그렇습니다, 대인.”
저만큼 앞에서 고개를 조아리고 있는 사내가 바로 만금상단의 총관인 구진기였다.
“동창 놈들이겠군.”
“어쭙잖은 무공으로 보아 틀림없어 보였습니다.”
“내 집을 지켜보는 이유는?”
“미적대며 천천히 물러가고 있었습니다. 확실치는 않으나 이곳저곳 둘러보는 것으로 보아 무엇인가 딱 찍어 살피는 것이 아니라 일상적인 감찰로 보였습니다.”
“크흠. 그래-에?”
정관호의 말꼬리가 슬그머니 올라갔다.
상대의 말에 의심이 들 때마다 나오는 버릇이었다.
“알았다. 그만 물러가 보아라.”
“예, 대인.”
공손히 읍한 총관이 뒤로 물러났다.
홀로 남아 있던 정관호의 입이 불쑥 열렸다.
“어떻게 생각하나?”
분명히 집무실 안에는 정관호 혼자만 있었는데 갑자기 어디선가 걸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자 놈들이 전장의 담을 넘었다가 나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전장? 만금전장 말이더냐?”
“그렇습니다.”
꿈틀.
정관호의 눈두덩이 크게 움직였다.
“냄새를 맡았군. 자금세탁의 흔적을 따라온 게야.”
잠시 뜸을 들인 후 예의 그 걸걸한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아직까지는 모릅니다. 현재 자금성 내부는 상관세가로 인한 후폭풍으로 인적쇄신의 바람이 불고 있습니다. 환관 조직 같은 경우 기존의 비선까지 깡그리 쓸려 나갔고 말단 관작들조차 대부분 떨어졌습니다.”
“크흠. 그렇지. 오랫동안 애써 침투시켜 놓은 녀석들인데 아깝게 됐어.”
“상관세가의 흔적을 지우는 과정에 살아남기 위한 과잉충성이 인적쇄신의 형태로 나타났고 본장을 살피는 일 역시 그 일의 연속일 수도 있기는 합니다.”
“다만 확신할 수가 없다 그 말 아닌가?”
“그렇습니다.”
잠시 동안의 침묵 후 정관호의 목소리가 무겁게 흘러 나왔다.
“우리의 진정한 정체에 대해 눈치 챈 것은 아니겠지?”
“지금으로서는 알 수 없습니다.”
“하긴…….”
정관호가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그러더니 갑자기 날카로운 눈빛으로 바뀌었다.
“앞으로 보면 알겠지.”
“그렇습니다. 놈들이 행동으로 대답을 해줄 것입니다.”
“그래. 어디까지 눈치를 챈 것인지, 과연 우리의 진정한 정체를 알아차린 것인지 앞으로 놈들의 행동을 지켜보면 알게 될 거야.”
정관호의 날카로운 시선이 북쪽으로 향했다.
북쪽으로 이레를 달리면 자금성이 나온다. 정관호의 시선은 그곳을 향해 있었다.
‘만에 하나, 놈들이 우리의 정체를 눈치 챘다면?’
선택의 폭은 좁았다.
싸우든지 그대로 속절없이 물러나든지 둘 중 하나다.
‘그 중 내가 선택할 것은 하나밖에 없어.’
싸운다. 아니, 응징을 한다.
‘마침 기회가 좋아.’
용대명과 제갈문군이 모두 자금성에 있다.
자금성 내부에서 작업을 해야 하는 일의 특성상 무기조차 가지고 다니지 않는다.
씨익.
‘그분께서 그토록 애써왔음에도 해내지 못한 일을 내가 해낼 수도 있음이야.’
정관호의 눈가에 옅은 살기가 스쳐 지났다.
***
비슷한 시간 용무린 역시 하늘로 시선을 돌렸다.
“갑자기 왜 이러지?”
두근두근.
심장이 속절없이 거칠게 뛰었다.
더불어 까닭 모를 불안함이 엄습했다. 무엇인가 아주 나쁜 일이 벌어질 것만 같았다.
“껍질이 다 깨어져 가니 전생의 내가 지니고 있던 천기를 보는 능력까지 되살아나려고 그러는 걸까?”
하늘에 보이는 수많은 별들.
그 어느 귀퉁이에 천기가 깃들어 있는 것일까?
용무린은 그 뒤로도 한참 동안이나 하늘을 바라보았다.
***
다시 사흘이라는 시간이 지났다.
그동안 용대명과 제갈문군 두 사람과 상의 끝에 장인태감 채홍은 한 가지 묘안을 마련했다.
만금상단이 진정 마교와 관련이 있는 곳인지 아닌지를 알아볼 계책이었다.
그 뒤 채홍은 황제와의 독대시간을 가졌다.
그런 후 동창을 움직여 지금까지 조사한 모든 것과 용대명과 제갈문군과 나눈 대화를 세세히 아뢰고 전권을 움직일 권한을 받아냈다.
“그런 무도한 놈들을 내 당장!”
황제가 가감 없는 분노를 쏟았지만 채홍의 한마디에 바로 누그러뜨렸다.
“너무 심려치 마시옵소서, 폐하. 결국 황룡패주가 나설 것이옵니다.”
“오오, 황룡패주가 말이더냐?”
“그러하옵니다, 폐하. 마교의 사특한 무리가 다시금 황궁을 노리려 할 수도 있는 상황입니다. 황상의 마음을 평안케 하기 위해서라도 패주가 나설 수밖에 없을 것이옵니다.”
“좋다. 황룡패주가 나설 것이라면 내 이번에도 지켜보기만 하도록 하겠다.”
“황은이 망극하옵니다, 폐하.”
채홍이 고개를 조아리며 길게 읍했다.
그때다 싶었는지 황제가 그동안 쌓인 불평불만을 쏟아냈다.
“황룡패주가 나서게 되면 꼭 과인의 얼굴을 보고 가야 한다고 이르도록 하라.”
“예에, 폐하.”
“사람이 말이야, 과인이 그토록 아끼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 너무한단 말이지. 이레에 한 번이라도 얼굴을 보여주면 좀 좋아? 그렇지 않아도 요사이 정무에 힘을 썼더니 피곤한데…… 거, 불사신기 팍팍 넣어주면 좋잖아!”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애써 눌러 참으며 채홍은 다시 한 번 고개를 깊이 조아렸다.
“필히 그리 하도록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그래. 내 사례감만 믿고 있겠어.”
채홍의 장담에 황제의 얼굴이 환하게 밝아졌다. 미소를 감추지 않고 헤벌쭉 웃었다.
건청궁을 나선 채홍은 집무실로 돌아와 중감 고염무를 다시 불렀다.
“찾아 계시옵니까, 대인!”
“그래. 네가 해주어야 할 일이 있다.”
“말씀하십시오.”
채홍의 목소리가 한층 더 은밀해졌다.
“지금 당장 상선감의 태감을 찾아가거라. 그런 후 그와 함께…….”
“예. 예, 알겠습니다, 대인.”
채홍의 말이 이어질 때마다 고염무가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
하루해가 밝았다.
이른 아침, 사례감의 장인태감이 황제의 조식을 직접 만들기 위해 전담부서인 광록사를 찾았다.
황제의 식사는 원칙적으로 사례감의 장인태감인 자신과 병필수당태감 그리고 동창의 제독이 돌아가며 만드는 것으로 오늘 조식은 그의 차례였던 것이다.
그런데…….
“이런 발칙한 것들!”
광록사에 들어가기가 무섭게 채홍의 노성이 터져 나왔다.
“감히 황상께서 드셔야 할 봉미의 품질이 이따위라니!”
“어떻게 이런 일이!”
“분명히 오늘 새로이 개봉한 쌀 이온데…….”
곁을 지키고 있던 상선태감과 중감을 비롯한 환관들이 사색이 된 얼굴로 벌벌 떨었다. 새로 개봉한 쌀가마니 안에 오래된 쌀이 섞였는지 거뭇거뭇했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하면 되오리까?’
‘좋아, 연기 잘 하고 있어.’
상선태감과 채홍이 서로 얼굴을 마주친 후 슬쩍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물론 그 뒤로도 불꽃 연기는 계속되었다.
“황상께서 드셔야 할 봉미를 납품한 놈들이 대관절 어떤 놈이냐?”
“만금상단입니다.”
“뭐라? 만금상단?”
“그렇사옵니다. 벌써 이십여 년이나 독점공급을 해오던 상단으로써 지금껏 실수는 없었사옵니다.”
아드득.
“이 미천한 상인 놈들이 겁을 상실했구나. 이십여 년 동안이나 독점공급을 해오니 이젠 황상께서 드실 봉미의 품질을 이따위로 대충 보내도 된다고 생각하는 게야?”
“절대로 묵과할 수 없습니다, 장인태감!”
“그렇사옵니다. 일벌백계를 해야만 합니다.”
그 다음부터는 일사천리였다.
다른 곳들이야 아직 드러난 귀책사유가 없으니 남은 계약기간을 유지해야 하지만 상선감은 단단히 건수를 잡은 셈이라 즉각 계약을 해지했다.
기다렸다는 듯 하나의 상단이 그 자리를 메웠다.
그 규모가 칠대 상단에는 미치지 못한 곳이지만 상단을 운용하는 곳의 이름값이 높아 안전성 하나 만큼은 여느 상단 못지않은 곳이었다.
오성상단!
차후 칠대 상단의 수위에 올라설 상단의 이름이었다.
***
자금성에서 벌어진 소식은 하루를 넘기지 않고 만금상단의 총단에 알려졌다.
“이런, 빌어먹을!”
총관은 지급으로 전해진 전서를 손에 쥐고 만금각 십층을 향해 내달렸다. 잽싸게 정관호 앞에 조아리고 자금성에서 벌어진 변고를 알렸다.
“뭐라고? 황상께서 드실 봉미의 품질이 몇 년이나 묵어 거무튀튀해진 것이었다고?”
어찌나 어이가 없던지 정관호의 입이 다물어지지 않을 정도였다.
총관이 분통을 터뜨리며 말을 이었다.
“음모입니다. 분명 납품한 물건에는 하자가 없는 것들입니다. 각 지역 특산미 중에서도 최상등품만을 따로 선별해 납품하던 것을 잘 아시지 않습니까?”
“크흠.”
어찌된 영문인지 금왕 정관호는 노성을 터뜨리지 않았다.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는가 싶더니 이내 조용히 사실 확인만 했다.
“북경 지부장의 확인은? 그가 직접 물건의 이상 유무를 확인했다 하더냐?”
“그렇습니다. 그래서 더욱 억울해 하는 중입니다. 황실에 납품하는 품목은 언제나 북경 지부장이 일일이 검수를 한 후 넘기기 때문입니다.”
총관의 눈이 분노와 독기로 번들거리기 시작했다.
“본 상단의 빈자리를 오성상단이 채웠다고 합니다. 북경지부장이 있는 자리에서 봉미의 이상 유무를 확인한 후 면전에서 남아 있는 계약을 해지한 후 그들과 납품 계약을 맺었다고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총관이 음모라고 부르짖으며 이렇듯 가감 없이 분노를 터뜨리는 것이었다.
“명령만 내리십시오. 제가 즉시 일을 꾸며 놈들의 납품을 무위로 돌려버리겠습니다.”
오성상단이 납품을 하는 물건에 해코지를 하겠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되었다. 이제 그만 나가 보거라.”
“예에?”
뜻밖이었는지 총관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오성상단의 음모를 어찌 그냥 두고 볼…….”
그래서 말꼬리를 늘여서라도 자신의 의중을 밝혔다.
오성상단 따위의 음모에 이대로 꼬리를 말기에는 너무 자존심이 상했기 때문이었는데…….
번쩍.
금왕 정관호의 눈에서 서슬 파란 불꽃이 튀었다.
어찌나 무서운지!
총관은 잽싸게 고개를 바닥에 처박았다.
“이 일은 내가 알아서 할 테니 너는 이만 신경을 꺼라. 알겠느냐?”
“예, 대인.”
즉답을 하면서도 총관은 의아해했다.
‘대체 왜 이러시는 거지?’
그간의 전례에 미루어 봐도 금왕 정관호의 이런 태도는 상식 밖이었던 것이다.
‘예전에는 황실과의 거래를 트려는 기미만 보여도 혹독하게 복수를 하곤 하셨는데 오성상단 따위가 대체 뭐라고 그냥 참으시는 것일까?’
“그, 그럼 소인은 이만 물러가도록 하겠습니다.”
총관은 참으로 알다가도 모를 일이라고 생각하며 그 자리를 물러났다.
“……!”
홀로 남은 금왕 정관호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불쑥 입을 열었다.
“어떻게 생각하나?”
보이지도 않는 어딘가에서 예의 그 걸걸한 목소리가 흘러 나왔다.
“이것으로 확실해졌습니다. 고자들이 본 상단과 대산과의 관계를 눈치 챈 것입니다.”
“그렇지?”
되묻는 금왕 정관호의 입가에 서늘한 미소가 걸렸다.
그랬다. 만금상단은 확실히 마교와 연관이 있었다.
아니, 그 정도가 아니다.
음양자가 신마에게 했던 보고 내용 중 비밀리에 운용하고 있다는 상단이 바로 만금상단이었던 것이다.
“오성상단은 필시 미끼일 것입니다. 오성상단의 모든 표행에 제갈, 황보, 팽가, 남궁, 당문 다섯 세가의 고수들이 함께하기 때문입니다.”
과거 찬란한 무명을 떨쳤던 이른바 오대세가가 오성상단의 뒤를 봐주고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오성상단이 칠대 상단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상단의 신뢰도와 명성만큼은 타의 추종을 불허할 만큼 높았다.
“크크큭. 채홍, 그자의 심계가 깊군.”
그림이 바로 그려졌다.
품질이 떨어지는 봉미는 그가 바꿔치기를 했으리라.
그런 후 만금상단의 북경지부장을 불러들여 확인을 시키고 면전에서 계약 해지를 통보하고 일부러 그가 보는 앞에서 오성상단과 계약을 했을 거다.
“그렇게 되면 누구나 오성상단이 음모를 꾸몄다고 보겠지. 아마 평소 같았으면 나 역시 두고 볼 것도 없이 놈들의 상단을 일일이 쫓아다니며 훼방을 놓았을 거야.”
몇 번의 상행만 박살내면 끝이다.
자금성에의 납품은 더 말할 것도 없다. 상선감에 납품할 물건들이 들어오는 길목을 노려 표사들과 쟁자수들을 학살하고 물건을 빼돌리면 오성상단은 그날로 자금성에서 떨어져 나갈 것이다.
“채홍이 노리는 것이 바로 그것일 것입니다.”
“그래. 오대세가의 주력이 표행을 이끌고 보호를 할 테니 어지간한 놈들을 투입해서는 훼방을 놓을 수가 없을 터, 우리 역시 주력을 투입해야만 할 테지.”
그 과정에서 마교의 무공이 조금이라도 섞여 나오는지 눈을 부릅뜨고 지켜볼 생각이리라.
“흑상과 염상의 주력을 살짝 빼서 놈들에게 경고를 하는 것은 어떻습니까?”
걸걸한 목소리가 한 가지 계책을 내놓았다.
하지만 금왕 정관호의 고개는 천천히 좌우로 흔들렸다.
“아니야. 흑상과 염상의 아이들이 독하기는 하지만 그런 놈들 정도로는 오대세가의 주력에게 큰 타격을 입힐 수 없어.”
“설마, 그 정도입니까? 옛날에야 오대세가였지 지금 그들의 무위는 예전에 비해 절반 아래로 뚝 떨어져 있는 상태 아닙니까?”
“틀렸어.”
정관호의 목소리에 힘이 실렸다.
“네 말은 용무린이라고 하는 애송이가 나타나기 전까지만 소급해 맞는 말이야.”
“용무린…….”
걸걸한 목소리가 앓는 듯 변해갔다.
그 역시 용무린이라는 이름과 그가 지금껏 이뤄낸 많은 것들을 들어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애송이가 무림맹을 찾은 후 많은 것들이 변했다. 무림맹이 대산의 손아귀에서 벗어났고 오대세가의 무공이 갑자기 일취월장을 했어. 천안각의 판단이 확실하다면 오대세가는 과거의 무위를 거의 되찾았다고 봐야 한다.”
“그, 그러면……?”
“그래. 놈들을 상대하기 위해서는 우리 역시 주력을 투입할 수밖에 없어.”
주력을 투입하면 그 중 몇몇은 마공을 드러낼 수밖에 없게 된다. 칠십년 전 신마대전까지 참여했던 오대세가이니만큼 정확한 것은 몰라도 마교에서 비롯된 마공이라는 것 정도는 충분히 알아볼 것이다.
‘그렇게 어설픈 짓을 하다가 정체가 드러나느니 나는 차라리 용무린이라는 애송이의 심장을 후벼 파겠다.’
용대명과 제갈문군을 비롯한 비룡문과 제갈세가의 직계들이 지금 이 순간에도 무기도 없이 자금성을 오가는 생활을 하고 있지 않던가?
“걸려도 상관없다. 응징을 준비해라. 목표는 용대명과 제갈문군, 그리고 비룡문과 제갈세가의 직계들이다.”
흠칫!
“그, 그들은…… 그냥 넘어가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걸걸한 목소리가 슬그머니 자제를 권유했다.
정관호가 입술만 슬쩍 움직여 웃었다. 싸늘한 목소리로 단언했다.
“실패해도 상관없다.”
“예-에?”
“잊었느냐? 그분께서 이미 대공을 이루셨다.”
“아아…….”
걸걸한 목소리가 탄성으로 바뀌었다.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정관호가 어깨를 살짝 으쓱했다.
“자금성과의 모든 계약이 다 무위로 돌아가도, 설령 응징이 잘못되어 우리가 드러나도 상관없다. 대산으로 보낼 자금의 총액은 흑상과 염상이 있으니 어차피 변치 않아.”
“그야 그렇습니다.”
“어차피 놈들이 우리 존재를 감지한 이상, 그냥 넘어가지는 않을 터. 이 기회에 용무린이란 애송이에게 적절한 교훈을 내린다.”
잘은 몰라도 만금상단의 황금이 신교로 흘러들어가는 일은 더는 없을 것이다. 이미 눈치를 챈 놈들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틀어막을 테니까.
“머지않아 신교의 천년 숙원이 풀릴 것이다. 그렇게 되면 우리가 세운 공이 만금상단을 잃어버린 과를 덮을 것이고 되레 상을 받게 될 게야.”
음양자가 해내지 못했던 일을 자신이 해낸다?
모르긴 몰라도 신교 내에서의 지위까지 확 뛰어 오르게 되지 않을까?
“놈들의 방심을 유도해라. 그리고 신중하게 살펴 기회를 잡아라.”
“예, 알겠습니다.”
***
그로부터 다시 한 달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오성상단은 여러 성에서 끌어 모은 최상등 품만을 모아 상선감에 납품을 성공시켰다.
그 일에는 당연히 오대세가에서 파견된 주력들이 일반 표사들과 함께 철저히 지켜 이룬 쾌거였다.
오성상단은 물론이고 동반자 입장인 각각의 오대세가에서도 크게 기뻐했다. 제갈문군의 중제로 함께 힘을 모았던 결과가 이제야 나타났다고 여겨 뿌듯해했다.
하지만 그 소식을 전해들은 제갈문군의 안색은 바로 어두워졌다. 역시 그의 심계는 일반적인 사람들과는 그 격이 달랐던 것이다.
오직 한 사람, 비룡문주 용대명만이 듣는 순간 제갈문군과 같은 판단을 했다. 어두운 얼굴로 제갈문군에게 우려를 토했다.
“이것으로 확실해졌습니다. 만금상단은 확실히 마교와 연관이 있는 것이로군요.”
“맞습니다, 사돈.”
제갈문군이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심각한 얼굴로 계속 말을 이었다.
“놈들이 그간 자금성의 납품을 둘러싸고 벌여 왔던 풍문만 들더라도 지금처럼 납작 엎드리는 것은 비정상적인 일일 것입니다.”
“상단의 일에 대해 잘 알고 있지는 않지만, 그러한 풍문이라면 저 역시 들어봤습니다. 자금성의 납품을 둘러싸고 어느 상단이든 물꼬를 트려 하면 혹독한 조치를 취해 왔다고 하지요?”
“증거야 없습니다만, 모두가 아는 사실입니다. 오죽하면 나머지 거대 상단들도 자금성과의 계약만큼은 하지 않으려 하겠습니까?”
“그렇게 혹독하게 굴던 만금상단이 칠대 상단도 아닌 중소상단인 오성상단의 표행을 그대로 보아 넘긴다? 이거야말로 ‘나 수상해.’ 라고 웅변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허허허. 그렇습니다. 놈들이 매관매직을 해 밀어 넣은 관리들 전부가 상관세가와 연루되어 황상의 옥체를 억압한 역적질에 관련이 있었으니…….”
그런 판국에 이제와 몸을 사리니 더더욱 확신이 굳어질 수밖에 없는 거다. 승냥이가 갑자기 개과천선을 해 순한 양이 될 수는 없는 법이었으니까.
제갈문군이 용대명을 보며 슬그머니 운을 띄웠다.
“어떻게 하는 것이 좋겠습니까?”
그 속내를 너무 잘 알고 있다는 듯 용대명이 빙그레 웃으며 말을 받았다.
“마교 놈들과 연관된 일 아니겠습니까? 미력하지만 제 자식 놈을 불러야 할 때라고 생각합니다, 사돈.”
“오오, 저 역시 같은 생각이었습니다, 사돈.”
기다렸다는 듯 제갈문군이 활짝 웃었다.
그것으로 용무린의 자금성 행이 결정이 되었다.
***
쿵쾅쿵쾅.
흠칫!
“뭐지?”
용무린의 수련이 다시 한 번 멈춰졌다.
달포 전에도 이와 비슷한 경험이 있었지만 곧 잠잠해졌는데 지금은 쉬이 사라지질 않았다.
“나가봐야 하나?”
불안해서 수련이 손에 잡히질 않는다.
당장에라도 무슨 일이 생길 것만 같았다.
용무린은 살기로 번들거리는 눈을 하늘로 돌렸다.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별들이 무정하게 아름다운 빛만을 뿌려내고 있었다. 그 어디에서도 천기 엇비슷한 것은 보이질 않았다.
“심마인가?”
대공을 이루기 전이면 언제나 찾아드는 심마.
용무린은 결국 밖으로 나서지 않았다.
“일단은 할 수 있는 것을 한다.”
그래야만 밖에 나갔을 때 땅을 치고 후회하는 일을 맞이하지 않게 되리라.
쿵쾅쿵쾅.
하지만 용무린의 심장은 계속해서 알 수 없는 불안감에 거칠게 뛰었다.
***
용무린이 수련에 전념한 지 벌써 90여 일이 흘렀다.
성산 천문 내부는 여전히 평화로웠다.
따사로운 햇살 아래 새들은 저마다 아름다운 목소리를 뽐내고 있었으며 한들 불어온 바람은 수줍게 피어난 들꽃을 툭 건드리고 달아났다.
그러던 어느 한 순간이었다.
틱. 티딕.
허공의 한 부분에 균열이 일었다.
참으로 믿지 못할 기사였다.
살얼음에 금이 가듯 실금이 그어지더니 균열을 일으키는 허공이라니!
한곳이 아니었다.
종횡으로 이어진 균열은 마침내 삼백육십의 모든 방위에 걸쳐 둥그렇게 번졌다.
그리고…….
투화아-악!
한순간에 깨졌다.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후우욱! 화아악!
안쪽에서부터 형언할 수 없을 정도의 압력이 밀려왔다. 그 서슬에 하늘까지 닿을 듯 자라나 있던 거목들이 수수깡처럼 부러졌다. 아니 박살이 났다.
퍼어엉. 퍼퍼퍼퍼펑.
포탄이라도 맞은 듯 터졌다. 동심원을 그리며 멀리, 아주 멀리까지 퍼졌다.
투우우웅. 트드드드드.
잔잔한 수면에 조약돌이 던져진 것처럼 동심원을 그리며 퍼진 충격파가 천문을 넘어 구련산 전체를 마구 뒤흔들어 버렸다.
그 파문의 중심에 용무린이 고요히 서 있었다.
태산 같은 무게로 풍뢰를 비켜 들고 있던 용무린의 눈이 번쩍 떠졌다. 천천히 눈을 돌려 자신이 일으킨 이적을 확인했다.
“다 이룬 건가?”
들어왔을 때와는 전혀 다른 경관이 펼쳐져 있었다.
천문 안쪽에 펼쳐져 있던 두 번째 대자연진세가 박살이 나서 사라졌다.
칠성의 방위를 밟아 사선으로 뛰어내려야만 했던 만년거암은 물론이고 천년거목을 비롯한 모든 것들이 동심원을 그리며 고운 모래가 되어 있었다.
천문과 구련산 일대의 흔들림은 멈춰졌지만 그 파문은 지축을 타고 멀리, 아주 멀리까지 퍼졌다.
투우웅.
단숨에 호북을 관통하고,
투우우웅.
호남성을 지나쳐…….
투우우우우웅.
광동과 광서성 사이에 자리 잡고 있는 십만대산 속 깊숙한 곳의 불회곡에까지 이어졌다.
아무리 예민한 사람이라고 해도 느낄 수 없었지만 새들은 일제히 하늘로 날아올랐다. 심령을 뒤흔든 파문에 놀라 방황했다.
산짐승들도 예외가 아니었다.
아득히 먼 곳에서부터 이어진 파문에 본능까지 뒤흔들렸는지 호랑이와 거웅과 멧돼지와 사슴이 한 덩어리가 되어 내달렸다. 어쩔 줄 몰라 했다.
“뭐야?”
“갑자기 짐승들이 왜 이래?”
신교의 경비를 서는 마인들이 자꾸만 고개를 갸웃했다.
“저것들이 단체로 미쳤나?”
“그러게 말이야. 호랑이와 거웅과 멧돼지와 사슴이 한 덩어리로 돌아다니는 모습이라니! 내 평생 저런 해괴한 모습은 처음 보는구먼…….”
혀를 내둘렀다. 설레설레 고개를 흔들었다.
하지만 오직 한 사람!
신마만이 달랐다. 아득히 먼 곳에서부터 이어져 온 파문이었지만 즉시 감지했다. 품고 있던 여인들을 내팽개치고 벌떡 일어났다.
“아흑. 시, 신마시여…….”
“어, 어째서 갑자기?”
환희궁주와 부궁주에 이어 환희궁의 여 고수들 중 인물이 반반해 불려온 두 여자 마인이 신마를 올려다보았다. 끈적한 목소리로 칭얼댔다.
“……!”
신마의 귀에는 그 여자들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이미 모든 신경을 곤두세워 방금 스쳐지나간 파문에 집중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뭐지? 대체 뭐였지?’
실로 믿을 수 없는 거력의 흔적이었다.
불사마력을 완성한 지금의 자신에게 견주어도 어느 쪽이 위라고 선뜻 말할 수 없을 만큼의 거력!
이 세상에 그 정도의 힘을 가진 존재가 나 외에 또 있을 수 있다니!
‘하지만 위험하게 느껴지지는 않아. 왜지?’
신기한 일이었다.
그만큼 거대한 힘이라면 위기감이나 투쟁심 혹은 살심이 반드시 뒤따라오기 마련인데 이상하게 그런 마음 자체가 들지 않았다.
두근.
한 차례 심장이 크게 뛰더니 막연한 친밀감과 아련한 그리움 비슷한 감정이 느껴졌다.
‘이, 이것은…….’
즉시 그 정체를 알아차릴 수 있었다.
부모형제를 대할 때나 느낄 수 있는 애틋한 감정이었기 때문이었다.
‘나와 같다. 아니 달라. 하지만 비슷해.’
본능적으로 자신과 근본이 같음을 느꼈다.
형제나 자매가 피부색이나 생김새는 다르겠지만 한 배에서 나온 이상 본능적으로 서로에게 호감을 느끼는 것과 같은 경우였다.
아니, 어쩌면 쌍둥이의 경우와도 같다고 볼 수 있다.
둘 모두 불사신기와 규천마력에서 비롯된 힘을 지니고 있었으니까.
용무린의 경우에는 신마가 잠식하기 위해 밀어 넣은 것이 녹아들어 각인되었고 현재의 신마는 규천마력의 각성 이후 불사신기를 익혀 합일한 점만이 다를 뿐이다.
“크크큭. 재미있구나, 재미있어. 크크크크큭.”
신마가 나직한 목소리로 계속해서 웃었다.
순간적으로 스쳐지나간 작은 파문에 허무함과 권태가 한꺼번에 쓸려 나가버리다니!
“그래그래, 네가 마지막이다.”
중원정복이고 뭣이고 간에 저 힘을 가진 존재가 가장 맛있는 먹잇감인 것이다.
“아니, 중원정복 과정에 필연적으로 만나게 되려나?”
생각해보니 그럴 수도 있겠다, 싶다.
“아니야, 그러면 너무 싱거워. 나는 그 맛있는 먹잇감을 조금 더 아껴먹고 싶단 말이지.”
소름끼칠 정도로 자신과 비슷한 기운을 쏟아내는 미지의 적, 그런 적이라면 중원정복이 끝난 후에도 얼마든지 허무함과 권태감 없이 살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신마의 시선이 북쪽으로 향했다.
버언쩍!
번갯불과 같은 광채를 뿜었다.
“네 존재감을 드러내줘 고맙다, 형제여……. 내 허무와 권태감을 거둬가 준 대가로 지금은 찾지 않겠다. 나중에, 아주 나중에 보자꾸나. 크흐흐흐.”
확.
신마가 침소를 나섰다. 침대 바닥에 아무렇게나 나뒹굴고 있던 장포가 제 스스로 날아와 신마의 몸에 휘감겼다.
“시, 신마시여…….”
“이렇게 그냥 가시면 소첩들은 어찌한단 말입니까?”
환희궁의 두 여자 마인들이 징징댔다.
하지만 신마는 뒤돌아보지 않았다. 두 번 다시 성녀전의 침소에 들지도 않았다.
기대감 가득한 눈을 한 채 다시 조사동에 들었다. 지금껏 자신이 이룬 것을 천천히 되새김질하기 시작했다.
***
파문의 범위는 어림잡아도 백여 장!
우뚝 서 있는 용무린을 중심으로 십여 장은 깨끗이 허무로 돌아가 있었고 다시 이십여 장은 모래 같은 고운 입자로 변해 있었으며 그 뒤로는 포탄에 직격이라도 맞은 듯 처참하게 모든 것이 찢겨져 있었다.
“그래도 뭔가 미진한데?”
세상에 다시없을 기사를 이뤄냈으면서도 용무린은 고개를 모로 꺾었다. 뭔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심드렁한 얼굴로 중얼댔다.
“이게 아니야. 이건 그냥 수박 겉핥기에 불과해.”
내기를 해도 좋다.
왜냐하면 불사대천검을 처음부터 끝까지 펼쳐냈음에도 불구하고 무림맹에서 운위영을 상대했을 때는 이 정도의 파괴력을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때보다 파괴력이 늘었다고 봐야 하나?”
곰곰이 생각하던 용무린이 픽 하고 웃었다. 고개를 흔들며 자책을 했다.
“그럴 리가 없잖아?”
운위영을 상대했을 때는 신마라는 의식도 용무린으로서의 의식도 없었던 때, 단단하기 짝이 없던 껍질에 금이 가고 그 안에 잠들어 있던 절대검신 독고황의 순수한 의식이 쏟아져 나왔을 때였다.
그때야말로 전생의 절대검신 독고황에 가장 근접한 상태가 아니었던가?
그런 상태에서 펼쳐진 불사대천검이야말로 완성형에 가까운 것일 터!
“그런데도 그때는 오직 한 사람 운위영 그놈만 깨끗하게 베었단 말이지.”
파괴력 완급 조절의 문제일까?
아니라면 혹시 불사대천검의 숙련도 문제?
“아니, 그런 게 아니야…….”
한참을 생각하던 용무린은 고개를 흔들었다.
단순한 파괴력의 완급 조절이나 불사대천검의 숙련도 문제를 넘어 보다 근본적인 무엇인가를 놓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세상에 다시없을 위력의 불사대천검이지만 이래서는 곤란해. 적을 베는 데 있어서 거침이 없는 나지만 그렇다고 내가 살귀는 아니란 말이야.”
자신이 서 있는 곳을 중심으로 온전한 것이라곤 전생의 나를 묻은 작은 봉분 하나뿐이었다.
“혹시나 하는 생각에 일부러 피한 곳은 멀쩡하니 불사대천검의 숙련도나 위력의 범위 조절 모두 내 마음대로 된다고 봐도 되겠는데…….”
내가 놓치고 있는 것이 대체 뭘까?
대체 그게 무엇이기에 그때와 현재가 이렇듯 큰 차이를 보이는 것일까?
“어디 다시 한 번?”
용무린은 대뜸 양의신공을 일으켰다.
분심의 벽을 세워 절대검신과 신마 진무량의 의식을 둘로 나누었다.
절대적이라도 해도 좋을 두 가지 의식이 서로 독립을 하며 존재감을 드러냈다. 하지만 거듭된 수련으로 인해 그전처럼 요란하거나 머리가 어지럽지 않았다.
“좋아!”
스르르.
의지가 일자마자 소검비연이 둥실 떠올라 풍뢰의 반대쪽 손아귀에 잡혔다.
“한 번만 더 확인해 보자고.”
그 상태에서 용무린은 불사대천검의 첫 동작과 완성된 형태의 어검술을 동시에 펼쳐 보았다.
놀라운 광경이 펼쳐졌다.
소검비연은 제 스스로 날아올라 용무린의 의지대로 진천수라도의 초식과 비연오식을 펼쳐냈고 풍뢰는 점잖게 허공의 한 부분을 쭉 찢었던 것이다.
버언쩌저적. 푸스스슷.
소검비연이 만들어낸 광풍과 풍뢰가 찢어낸 허공이 바스러지는 놀라운 광경이라니!
“이 정도라면…….”
소검비연을 되돌린 용무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두 가지를 무리 없이 동시에 펼쳐낼 수 있으니 태극을 넘어선 무극의 경지라고 봐야겠지.”
그렇다면 내가 가야 할 길은 무극을 넘어선 일원의 경지라는 것일까?
“무극을 넘어선 일원의 경지라…….”
잠시 생각에 잠겼던 용무린은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일원을 향해 어떻게 나아가야 할 것인지 감도 잡히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모르겠다. 하여간 무림맹에서 운위영을 상대로 펼쳐냈던 경지가 바로 그 경지라는 것만은 분명해.”
하지만 역시 시간이 문제였다.
마음 같아서야 계속 정진을 더 해 그 경지까지 다 이루고 싶지만 일원이라는 경지가 일조일석에 해결될 문제가 아니질 않은가?
“하긴, 두어 달 조금 넘긴 시간에 이정도 이뤄낸 것도 어찌 보면 놀라운 일이긴 하지.”
용무린이 평소에 어검술과 어도술을 동시에 펼쳐내던 경험이 없었다면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양의신공은 그만큼 어려웠다.
“그렇게 생각하면 전생에 나를 잠식해 통째 삼키려던 신마, 아니 역천자가 나를 도운 셈인가?”
한편으로 생각하면 그 말도 맞다.
어쨌거나 역천자가 주입해 각인된 그 능력으로 인해 어도술과 어검술을 순차적이긴 하지만 거의 동시에 펼칠 수 있었고, 그로 인해 양의신공을 훨씬 더 빠르게 깨우칠 수 있었으니까.
“그만 나가보자.”
지금의 경지까지는 비교적 순조롭게 올라올 수 있었지만 무극을 넘어선 일원의 경지는 솔직히 어떻게 수련을 해야 할지조차 감이 잡히질 않는다.
그런 상황에 언제까지 이곳에 죽치고 있을 수 없는 거다.
게다가 수련 와중에 두 번이나 겪었던 막연하고 진한 불안감을 생각하면 더는 내 욕심만 차리고 수련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 어서 빨리 알아봐야만 한다.
“어디로 갈까? 오랜만에 어머니 얼굴을 뵈러 집으로 가면서 개방과 연락을 취해 볼까? 아니면 령매 얼굴을 한 번 더 보러 가면서 연락을 해볼까?”
누가 양의신공 익히지 않았다고 할까봐 그러는 것인지 두 가지 생각이 동시에 일었다.
-무슨 일이 있는지 알아보는 것도 좋지만, 일단 비룡문으로 방향을 잡자. 어머니 얼굴 뵌 지도 오래 됐지 않냐? 그간 못한 효도도 좀 하고 일도 알아보고 좋잖아?
-어차피 어머니는 평생 내가 모시고 살 것 아닌가?
동정을 지켜야만 하는 고자신공을 익힌 것도 아닌데 솔직히 독수공방이 너무 길지 않았나?
생각해봐. 대충만 잡아도 백오십 년이 훌쩍 넘는다고! 그냥 령매 얼굴 보러 가면서 개방에 연락해보는 게 어때?
도리 상 무엇이 먼저인지는 바로 알 수 있었다.
“어머니를 먼저 뵈는 것이 정답이라는 걸 알긴 하겠는데 어째 마음은 령매 쪽으로 자꾸 가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아보는 것은 알아보는 것이고 령매의 얼굴 보고 싶은 것은 보고 싶은 것이다.
“에라 모르겠다. 일반 출발하자.”
휘슷.
용무린의 신형이 성도인 정주를 향해 쏘아졌다.
자신이 자리를 비운 사이 어떤 일들이 벌어졌는지 먼저 알아보기 위해서였다.
“박살내 버린 대자연진을 다시 복구해 놓아야 할 것 같은데 말이야…….”
대자연진을 설치하는 절대검신 독고황의 모습이 홀연히 떠올랐다. 어떻게, 어떤 이치로 대자연진을 펼치는 것인지 방대한 양의 정보가 밀려들었다.
스파아-앙!
하지만 용무린의 신법을 되돌리지는 못했다.
제갈영령을 보고 싶어 하는 마음, 그녀와 함께 하루 이틀만이라도 좋은 시간을 보내고 싶은 마음을 넘어서지 못한 것이다.
“일단은 무슨 일들이 있었는지 좀 알아 본 후 결정하자.”
어머니를 먼저 뵐 것인지, 제갈영령을 찾을 것인지 아니면 다시 돌아와 대자연진을 복구해 놓을지는 그때 봐서 결정할 것이다.
***
반나절 후 성도 정주.
남쪽으로 향했던 발길을 되돌려 북경을 향해 방향을 잡은 용무린은 끌어 오르는 분노를 담아 포효했다.
“마교-오!”
정주에 들어선 용무린은 즉시 개방의 분타를 찾았고 애타게 자신을 찾는 아버지 용대명의 전갈을 받은 것이다.
만금상단이 마교의 자금원이라니!
‘내가 느꼈던 두 번의 막연한 불안감이 바로 이것 때문이었던 모양이구나!’
쿵쾅쿵쾅.
용무린의 심장이 다시금 폭발하듯 뛰기 시작했다.
어쩐지 아버지 혹은 가까운 누군가에게 좋지 못한 일이 생길 것만 같았다.
용무린은 북문을 벗어나자마자 신법을 펼쳤다.
끌어 오르는 분노를 대변하듯 매서운 파공음이 길게 이어졌다.
“만금상단이고 지랄이고 다 깨부숴주마.”
스파아아-앙.
용무린의 신법이 점점 더 빨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