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과잉 충성이 불러들인 존재
용무린이 북상하고 있는 사이 만금상단은 팽팽한 긴장감에 싸여 있었다. 차근차근 계속되는 자금성과의 계약 파기 때문이었다.
쾅!
“이런 수모가 있나?”
총관 구진기가 가감 없는 분노를 쏟았다.
금왕 정관호가 손을 떼라니 지금껏 참고 있기는 했지만 끌어 오르는 분노가 한계에 달한 것이다.
“상선감에서 시작해 내관감, 어용감, 사설감에 이르기까지 모두 계약 파기를 당했어. 그것도 얼토당토않은 이유를 들어서 말이야.”
누가 봐도 이것은 음모다.
철저한 계획 아래 움직여 자금성에서 만금상단을 몰아내려고 하고 있다. 자신이 만금상단의 총관에 오른 이래 이런 수모는 이제껏 겪어보지 못했다.
“장인태감 그 빌어먹을 고자 놈이 대체 우리 만금상단에 무슨 억하심정이 있기에 그 지랄이지?”
확실히 자신이 모르는 무엇인가가 있다.
그렇지 않고서야 황금까지 바리바리 싸들고 간 자신을 면전에서 내치지는 않았으리라.
그때였다.
소리도 없이 문이 열리고 음침한 인상의 무인이 안으로 들어섰다.
“오! 오셨는가?”
총관 구진기의 얼굴이 환하게 밝아졌다.
그 무인이야말로 자신의 심복 중의 심복, 지금껏 함께 자금성을 좀먹으려는 다른 상단의 상행을 숱하게 망가뜨려온 흑월회의 회주 추담이었기 때문이었다.
“그 일은 어떻게 좀 알아봤는가?”
“예, 대인.”
흑월회주 추담이 공손히 고개를 숙여 보였다.
총관 구진기가 활짝 웃었다. 이렇듯 자신을 깍듯이 대인이라 불러주는 흑월회주가 너무 마음에 들어서였다. 그래서 구진기는 더더욱 추담을 공대했다.
“어서 보따리를 좀 풀어 놓으시게. 궁금해 죽겠네.”
“알겠습니다, 대인.”
추담이 눈을 살짝 일그러뜨리며 웃었다.
그 역시 구진기로부터 받는 공대가 어지간히 마음에 흡족했던 것이다.
“알아보니 역시 사례감 혼자 기획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면 그렇지!”
구진기가 자신의 허벅지를 내리치며 흥분했다. 추담의 말에 격하게 동조했다.
“어떤 놈인가? 대관절 어떤 놈이기에 고자 놈에게 붙어서 우리 만금상단을 물고 늘어진단 말인가?”
“비룡문의 문주인 용대명과 제갈세가의 가주 제갈문군이었습니다.”
“크흠.”
구진기의 볼살이 사납게 씰룩였다.
생각지도 못했던 이름 앞에 마음이 무거워졌던 것이다.
이미 오래전에 쇠퇴한 가문들이었지만 다섯 가문은 그 이름만으로도 아직 구진기의 마음을 흔들 정도였다.
추담의 말이 계속해서 이어졌다.
“오성상단의 뒤에 과거 오대세가로 불리던 다섯 가문이 있음은 대인도 알고 계실 것입니다.”
“그야…….”
“오성상단이 전면에 나섰지만 결국 과거 오대세가로 불리던 다섯 가문이 그동안 사그라진 영향력을 확대하기 위해 벌인 일이라고 봐야 할 것입니다.”
결국 황제의 총애를 받는 황룡패주 용무린에 힘입어 이 기회에 사례감 역시 자신의 지위를 공고히 할 생각에 벌인 일이라 보았다. 용대명과 제갈문군의 비위를 맞춰주는 것은 곧 용무린의 비위를 맞춰주는 것과 같았으니까.
“흥! 오대세가는 개뿔, 칠십 년 전에야 오대세가의 이름에 모두가 고개를 숙였지 지금은 신주오가의 말석인 비룡문만도 못한 곳이 바로 그들 아니오?”
“그거야 그렇습니다, 대인.”
구진기가 짐짓 호기롭게 외쳤고 추담이 맞장구를 쳤다.
‘아무리 무림중의 사람들이라지만 상단의 길은 또 달라. 황금의 힘이라면 귀신도 부릴 수 있단 말이야.’
추담의 맞장구에 힘입어 구진기가 용기를 냈다.
만금상단의 힘이라면 그들 모두를 빈털터리로 만들 수도 있기 때문이다.
‘네깟 놈들이라고 별 수 있어? 자금줄 완전히 마르고도 지금처럼 거들먹거릴 수 있느냐고?’
관과 무림이 별개이듯 상단 역시 별개다.
무력만으로 만금상단과 같은 거대상단을 어찌해 보려다가는 중원의 모든 상단이 등을 돌릴 것이고 제아무리 오대세가라 해도 오래지 않아 밥을 굶게 될 것이다.
“놈들에게 교훈을 내려주고 싶소, 회주. 만금상단을 건드리면 어떻게 되는지 똑똑히 보여주고 싶단 말이오.”
“다른 곳도 아닌 오대세가와 현재 찬란히 떠오르고 있는 비룡문입니다, 대인. 여파가 상당할 터인데 정말 괜찮으시겠습니까?”
추담이 조심스레 물어왔다.
꿈틀.
구진기의 눈이 우악스럽게 구겨졌다. 추담의 조심스러운 말이 자존심에 생채기를 낸 것이다.
“지금까지와 같으면 무슨 여파가 있겠소? 누가 한 것인지 아무도 모를 텐데 말이오. 아니 그렇소, 회주?”
구진기가 은근한 목소리로 추담을 보았다.
이미 생각해 둔 것이 있는지 추담이 입술만 살짝 움직여 웃었다.
“교훈을 내리는 정도라면 누구도 모르게 가능할 것입니다, 대인.”
“오오오!”
구진기가 반색을 했다.
누가 한 것인지 아무도 모를 것이라는 자신의 말에 가능하다고 대답했으니 그 말은 곧 금왕의 시선까지 피해 일을 성공시킬 수 있다는 말이었기 때문이다.
구진기가 대뜸 서랍을 열었다. 작은 상자 하나를 꺼냈다. 추담 앞으로 밀었다.
“황금 반관이오.”
“뭘 이런 것을 다…….”
겸양의 말을 하면서도 추담은 손을 내밀었다. 상자를 소매 속으로 가져갔다.
“내가 가용할 수 있는 상단의 자금 중 일부요. 이 일만 잘 성공시키면 내 회주께 조금 더 챙겨줄 의향도 있소. 내말 무슨 뜻인지 아시겠소?”
“물론입니다, 대인.”
추담의 목소리가 더욱 공손해졌다. 고개가 한층 더 깊이 숙여졌다.
구진기가 강경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금왕께서는 참으라 하였지만 나는 도저히 그렇게 못하겠소. 그러니 회주께서 은밀히 움직여 교훈을 내려 주시오. 그렇게 하면 오성상단에 빼앗겼던 자금성의 계약을 내가 다시 우리 만금상단 앞으로 되돌려 놓겠소.”
“너무 심려치 마십시오, 대인. 곧 좋은 소식이 날아 올 것입니다. 그럼 저는 이만…….”
그 말을 끝으로 추담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왔을 때처럼 소리 없이 밖으로 사라졌다.
홀로 남은 총관 구진기의 얼굴에 진한 욕망이 일렁였다.
“언제까지 내가 총관의 자리에만 머물러 있을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이번 기회에 내 능력을 확실히 보여주는 거야. 그래야만 금왕께서 나를 믿고 큰 자리를 내려 주실 거란 말이야.”
총관으로서의 삶이 나쁜 것은 아니다.
어지간한 중소상단의 수장쯤 눈 아래로 깔아 볼 만큼의 권위와 역량도 있었고 자연스레 흘러드는 뒷돈 역시 막대한 수준이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뭔가 부족했다.
하나도 성이 차지 않았다.
금왕의 핏줄은 아니었지만 평생을 바쳐온 상단의 지류 하나를 뚝 떼어 받고 싶었다. 보란 듯 키워내 인정도 받고 더 나아가길 원했다.
“나 구진기가 칠대 상단의 주인이 되지 말라는 법이 어디 있겠는가 말이야.”
결국 원하는 것은 금왕의 도움을 얻어 독립한 후 칠대 상단에 준하는 상단의 주인이 되고 싶은 것이다.
“잘해낼 거야. 틀림없어.”
구진기는 믿어 의심치 않았다.
지금껏 실패를 모르는 흑월회주가 직접 나섰으니 놈들에게 틀림없이 교훈을 내릴 것이고, 그로 인해 오성상단은 자금성에서 떨어져 나가게 되리라.
“그때 내가 다시 자금성의 모든 계약을 우리 만금상단으로 되돌리는 거지. 푸흐흐.”
생각만 해도 좋은 것인지 총관 구진기가 얼굴까지 일그러뜨리며 웃음을 터뜨렸다.
“용대명이 먼저일까? 아니면 제갈문군이 먼저일까? 그도 저도 아니면 오성상단의 상행 쪽?”
어느 쪽이 되든지 다 좋다고 생각했다.
놈들에게 교훈을 내려주고 자금성의 모든 계약을 다시 가져올 수만 있다면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
날은 하루하루 잘도 지나갔다.
어느새 황궁비고의 기관토목 공사의 완성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모든 기관장치가 다시 원상을 회복해 그 치명적인 발톱을 감추었고 내, 외관 역시 흔적을 감추어 겉으로 보아서는 아무것도 알 수 없을 정도였다.
무가로의 변신 이전에 기관과 토목에 일가견이 있던 비룡문의 역량과 기관 진법하면 언제나 첫손을 꼽는 제갈세가의 힘이 만나 이뤄낸 역작인 셈이다.
척척 마무리가 되어가는 황궁비고 내부를 바라보며 용대명과 제갈문군이 눈을 마주쳤다. 만족한 얼굴로 빙그레 웃어 보였다.
“이제 마무리만 한 후 흠안전과 그 아래 통로를 무너뜨리면 되겠습니다, 사돈.”
“허허허. 길었던 공사도 이젠 끝인 셈이지요.”
“황상께서 새롭게 만들어낸 통로를 보신 후 흡족해하시는 모습을 뵈니 뿌듯했습니다.”
“저 역시 그러했습니다. 출사길이 막혀 지금껏 배우고 익힌 지식을 언제 써보나 했는데……. 흡족해하시는 황상의 용안을 뵈니 그간의 답답함이 한순간에 날아가 버리는 듯했습니다, 사돈.”
제갈문군의 솔직한 감상에 용대명은 호탕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하하. 저 역시 같은 감정이었습니다, 사돈. 역시 저희가 가진 학문은 나라를 위해 사용해야 옳은 것이라 느꼈던 순간이었습니다.”
함께 빙그레 웃어 보였던 제갈문군이 불쑥 뜻밖의 질문을 쏟아냈다.
“어찌하여 황상께서 내리신 관작을 받지 않으셨습니까, 사돈?”
“내각 대학사 말씀이십니까?”
“예, 사돈.”
짧게 고개를 끄덕이는 제갈문군의 눈에는 여전한 궁금증이 맺혀 있었다. 용대명이 관직을 고사했기에 병부상서였던 진후상이 새로운 내각대학사에 오를 수 있었던 거다.
소탈한 미소와 함께 용대명이 말을 이었다.
“저는 사돈께서 한림원의 수장인 정오품 학사가 되신 것으로 족합니다.”
제갈문군 역시 내각대학사와 같은 정오품의 한림원 수장을 제수 받았던 것이다.
“혹, 패주 때문이오이까?”
“……!”
용대명은 굳이 대답을 하지 않았다.
제갈문군이 미루어 짐작해 냈으니 토를 달 필요조차 없는 것이다.
“크흠. 제가 실수를 한 것이로군요. 어쩌면 제갈세가의 조정 출사가 황룡패주인 사위의 발목을 잡는 일이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닙니다, 사돈.”
용대명이 재빨리 고개를 흔들었다. 진심이 가득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저와 사돈은 경우가 다릅니다. 저는 패주와 직계이지만 사돈께선 패주의 처가에 해당하고 내각대학사는 정책을 좌우하는 황상의 고문 역할이기에 견제를 받지만 한림원의 수장은 장상의 임명문서와 도서, 경적, 국사편수의 임무가 주이질 않습니까?”
“한 가지가 빠졌습니다.”
“……!”
무슨 뜻인지 알지만 용대명은 이번에도 굳이 입을 열지 않았다. 제갈문군의 목소리가 계속해서 이어졌다.
“장상의 임명문서 취급은 기밀 중의 기밀, 황상의 의중을 가장 먼저 아는 사람은 앞으로 제가 될 것입니다. 해서 조정의 견제가 언제나 내각대학사와 한림원 수장 두 사람에게 쏠리는 것이 아닙니까?”
용대명이 어깨를 슬쩍 으쓱여 보였다.
“선조이신 무후의 영광을 재현할 때가 다가오고 있는 것일 뿐입니다, 사돈. 비룡문의 길은 이제 무가, 제 아들 녀석이 이미 열고 있습니다. 저는 아비 된 자로 아들의 길을 묵묵히 지켜볼 뿐입니다.”
비룡문은 이제 오롯이 무가로의 길만 걷겠다는 뜻!
‘무가로의 길과 나랏일이 다르지 않음을 모르지는 않을 터, 불필요한 견제를 벗어나 제갈세가의 숙원을 풀어주기 위함이로구나.’
제갈문군은 단숨에 용대명의 내심을 읽었다.
무후의 영광을 이어오며 제갈세가는 그간 조정과 무림 양쪽에서 혁혁한 이름을 날려 왔다.
비룡문 역시 마찬가지다.
무가의 길을 걸으며 제갈세가가 그래왔던 것처럼 조정의 일도 함께 보는 것이 훨씬 더 좋다. 양가장처럼 군부의 힘까지 동시에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감사하오이다.”
제갈문군이 공손히 두 손을 모았다. 앞으로 내밀었다.
“제갈세가의 가주로서 비룡문의 문주께서 베풀어주신 후의를 결코 잊지 않겠습니다.”
“어허! 어째 이러십니까, 사돈.”
용대명이 재빨리 제갈문군의 손을 잡았다. 맞잡은 손을 풀어 내리며 고개를 흔들었다.
“아직 식은 올리지 않았지만 이제 우리는 한 식구입니다, 사돈. 저는 그저 사돈께서 힘껏 일하시기를 바랄 뿐입니다. 앞으로도 계속 승승장구 하십시오.”
그 진심을 어찌 모르랴?
뭉클.
제갈문군의 심장 깊숙한 곳에서 뜨거운 무엇인가가 치밀어 올랐다.
용대명이 빙그레 웃으며 제갈문군의 손을 잡아끌었다.
“가십시다, 사돈. 내일 아침에 흠안전과 아래로 향한 비밀 통로만 무너뜨리고 주변을 정돈하면 되니 오늘은 이 사람이 한 잔 거하게 사겠습니다.”
“하하하. 거 반가운 말씀입니다. 하지만 오늘 마시는 것은 제가 계산할 것입니다. 거부하시겠다면 저는 아예 술을 마시지 않겠습니다. 아시겠습니까, 사돈?!”
제갈문군이 짐짓 강짜를 부렸다.
용대명은 못 이기겠다는 듯 그저 웃으며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
자금성을 벗어나 숙소로 향하는 용대명과 제갈문군을 지켜보는 눈이 있었다. 흑월회의 회주 추담이었다.
‘크흐흐. 오늘이로구나.’
살기 따위 흩뿌리지 않았다.
그저 담담한 시선으로 제갈문군과 용대명을 살펴 그들의 무위를 짐작해 내려 애쓸 뿐이었다.
‘제갈문군 초절정 턱걸이. 용대명 이제 겨우 절정.’
걸음걸이와 자세만 봐도 대충 답이 나왔다. 수집한 정보를 확인하는 차원이었다. 제갈문군의 무위가 제법이긴 했지만 겁은 나지 않았다.
‘무림에 잘 알려진 정보 이상의 것은 보이지 않는군.’
맞상대를 해도 과히 밀리지는 않을 테지만 어차피 정상적인 방법으로 맞상대할 생각도 없었다.
‘우리는 우리만의 방법이 있어. 네놈들은 곧 그 사실을 뼈저리게 알게 될 거야.’
용대명은 말할 것도 없었고 비룡문의 무인들과 제갈세가의 무인들 역시 별 볼 일이 없었다. 무공의 고하보다는 기관과 토목에 일가견이 있는 사람들 위주로 선발해 왔기 때문이었다.
‘그래. 마셔라. 실컷 마셔.’
흡족하게 취하면 그때 사신이 깃들 것이다.
***
스파아아아-앙!
허공에 한 줄기 선을 긋듯 용무린의 신형은 북경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아버지. 제가 갑니다. 무조건 버티세요. 무조건!’
만금상단의 진정한 정체가 신교의 자금원이라는 말을 듣는 순간 정신이 퍼뜩 들었다.
자금성에서 일을 하고 있는 아버지에게 위험이 찾아들 것이라는 것을.
‘이런 바보! 멍청이! 자금성에 무기를 가지고 들어가지 못한다는 것을 왜 이제야 떠올렸단 말이야?’
자금성 내부에서는 마교와 관련된 놈들을 깨끗이 씻어내 버렸으니 별 일 없을 것이다.
하지만 숙소로 돌아갈 때가 문제였다.
무기를 착용할 수 없는 곳이니 갈 때 역시 빈손이기 때문이었다.
‘미리 생각해 대비를 했어야만 했는데…….’
지금은 어쩔 수 없다. 그저 달리는 수밖에 없는 거다.
“하아아아!”
스파아아앙!
용무린은 신법에 모든 힘을 쏟았다. 먹지도 자지도 아니한 채 죽자고 북경을 향해 신법만 펼쳤다.
***
자금성 남쪽으로 뻗어 있는 대로를 따라 내려가면 온갖 화려한 상점과 술집과 객잔 등으로 불야성을 이루고 있는 채시구가 나온다.
비룡문과 제갈세가의 숙소 또한 이곳에 있다.
채시구 남쪽 중앙에 자리한 주선각.
숙식을 포함한 잠자리도 제공하지만 전국 각지의 이름 높은 명주 중 없는 것이 없어 언제나 새벽녘까지 애주가들로 넘쳐나는 곳이다.
용대명과 제갈문군은 주선각 뒤편으로 쭉 늘어선 숙소로 향하지 않고 이층으로 바로 올랐다. 창가에 자리를 잡고 기분 좋게 술자리를 가졌다.
“하하하. 사돈, 제 잔을 한 잔 받으시지요.”
“좋지요, 사돈. 하하하. 이젠 제 잔을 한 잔 받아주십시오, 사돈.”
권커니 잣거니 술잔이 돌았다.
사개월가량 계속되어 온 공사에 이제는 친해질 대로 친해진 두 가문의 사람들도 서로 한 자리씩을 차지하고 기분 좋게 마시기 시작했다.
많은 양의 술동이가 쌓여갔다.
취기가 오른 사람들의 얼굴이 보기 좋을 만큼 붉게 물들어갈 때였다.
“응?”
고개를 갸웃한 용대명이 갑자기 술잔을 내려놓으며 손으로 머리를 짚었다.
“허허허, 왜 그러십니까, 사돈?”
제갈문군의 물음에 용대명은 다소 쑥스럽게 웃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이거, 술이 많이 약해진 모양입니다. 갑자기 머리가 핑 도는 것이…….”
“하하하. 그렇다면 제가 사돈 대신 한 잔 더 마시겠습니다. 으응?”
용대명 대신 한 잔 더 마시겠다며 술잔을 들어 올린 제갈문군의 눈빛이 변했다. 자신 역시 용대명처럼 머리가 핑 돈 것이다.
철렁.
제갈문군의 심장이 내려앉았다.
머리가 어질하면서 몽롱해졌기 때문이었다.
‘서, 설마…….’
제갈문군의 표정이 급변했다.
용대명과 주변을 향해 다급한 얼굴로 외쳤다.
“몽혼약이다. 술에 몽혼약이 들어 있다!”
“허억!”
“모, 몽혼약?!”
“이, 이런!”
제갈문군의 경고성에 술을 마시던 비룡문과 제갈세가 사람들이 소스라치게 놀랐다.
하지만 이미 너무 늦었다.
몇몇은 몽혼약에 취해 이미 고개를 술상에 처박고 있었던 거다.
“모두 내공을 끌어 올려라. 어서 술기운을 날려야 한다.”
용대명이 목청을 돋우었고,
“전투 준비!”
제갈문군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는 순간,
스팡. 파아앗. 쉬쉬쉬쉭.
비룡문과 제갈세가 주변에서 함께 술을 마시고 있던 일반인들이 일제히 행동을 개시했다.
눈에 띄지 않게 감춰두고 있던 소검을 일제히 날렸다. 일부는 짓쳐들며 장법을 뿌렸고 또 일부는 솟구쳐 올라 비침을 던졌다.
살수다!
그것도 고도로 훈련이 된 살수들이다!
‘바보같이 너무 마음을 놓고 있었어.’
제갈문군의 심장이 터질 듯했다.
만금상단이 어떤 놈들인지 잘 알면서 지금껏 움직임이 없다고 이렇게 마음을 놓아 버리다니!
‘그렇다고 넋 놓고 맞아줄 수야 없지.’
“이야아-하!”
황급히 내공을 휘돌려낸 제갈문군이 장법을 펼쳤다. 전면을 단단히 틀어막았다. 제갈세가의 비전장법 중 하나인 칠현장법이었다.
튀잉. 타타탕.
매섭게 날아들던 소검들이 장법에 걸려 어지럽게 비산했다.
하지만 칠현장법의 변화는 그것이 시작이었다. 일곱 번의 변화를 거쳐 살수들 몸에 쏟아졌다.
퍼엉. 퍼퍼퍼퍼펑.
“……!”
“……!”
칠현장법에 적중된 살수들이 피를 토하며 뒤로 훌훌 날렸다. 하지만 살수라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누구도 비명 하나 지르는 자가 없었다.
‘검을 두고 온 것이 너무나 뼈아프구나.’
황궁비고의 일 때문에 평소에는 검을 숙소에 놓고 다녀야만 했다. 오늘 역시 그러했고, 간만에 술 한 잔 마시려고 방에 들르지도 않고 바로 이층에 올랐다.
“이런 죽일 놈들. 깡그리 죽여주마!”
후웅. 후웅. 프파파파-앙!
호기롭게 외치며 연신 장법을 펼쳐내고는 있지만 제갈문군의 움직임은 점점 더 느려졌다. 이미 허벅지 어림에 비침 두어 개를 맞았던 것이다.
용대명 역시 상황이 좋지 못했다.
아직 절정 수위의 내공밖에 되지 않는 데다 익힌 것은 검법이었고 그 역시 제갈문군처럼 검을 숙소에 두고 왔기 때문이었다.
휘웅. 파앙. 파파팡.
임시방편으로 장법을 운용하고는 있었지만 솔직히 어림없는 짓이었다. 제갈문군이 앞을 막아주지 않았다면 벌써 고슴도치가 되어 바닥을 뒹굴고 있으리라.
‘크흠. 자칫 잘못하면 오늘 이곳에 뼈를 묻겠구나.’
제갈문군의 움직임이 둔해진 것이 보였다.
모르긴 몰라도 자신 못지않은 상처를 입었을 것이다.
‘비침 세 개와 소검 하나. 이 망할 것들 때문에 진기의 운용이 자유롭지 않구나.’
소검이야 즉시 뽑아낼 수 있었다.
하지만 복부 깊숙한 곳에 스며든 비침 두 개와 허벅지 어림에 꽂힌 비침은 머리끝까지 살 속을 파고들었는지 만져지지도 않았다.
‘이런 살수들이 거침없이 사람의 목숨을 노리는 곳이 바로 강호로구나.’
무림이란 곳이 어떤 곳인지 용대명의 가슴에 똑똑히 새겨지는 순간이었다.
‘아들아. 오늘 어떤 일이 생기든 너무 분노는 하지 말거라. 냉정해야 한다. 상대는 마교의 자금줄인 만금상단, 연결고리 따위는 남기지 않을 것이란다.’
용무린을 떠올리니 그나마 마음이 편안해졌다.
설령 오늘 이 자리에서 자신이 목숨을 잃는다고 하더라도 비룡문의 앞날은 걱정되지 않았다.
‘너만 믿는다, 아들아.’
용무린이 있기 때문이었다.
“오너라. 하아아-아!”
용대명은 있는 힘껏 불사신기를 끌어 올렸다. 두 손에 담아 우직하게 뿌렸다. 제갈문군을 보조했다.
후우웅. 파파팡.
놈들이 뿌려댄 소검 두어 개가 장법에 퉁겨졌다.
퍽.
하지만 어느 틈인가 스며든 소검 하나가 다시금 용대명의 허리 어림에 틀어박혔다.
“흡!”
용대명이 비틀 뒤로 물러났다. 힘없이 주저앉았다.
“사돈! 이 죽일 놈들아-아!”
피로 물들어가는 용대명을 확인한 제갈문군이 울부짖듯 고함을 질렀다. 사력을 다해 내공을 끌어 올렸다. 칠현장법을 연거푸 펼쳤다.
쉬쉭. 패애액. 피시시싯.
살수들은 아직도 넘쳐났고 사방에서 소검과 비침이 날아들었다.
용대명과 제갈문군의 얼굴은 갈수록 어두워졌다.
검을 놓고 온 일이 이토록 후회가 될 수 없다.
더불어 기관 토목에 일가견이 있는 혈족으로만 뽑아 올라온 것도 후회가 되었다. 이럴 줄 알았다면 각자의 가문에서 출중한 무력을 지닌 사람들까지 함께 왔을 것이다.
피시시싯. 파파팡.
퍼엉.
“크악.”
“크으읍!”
그러는 사이에도 비룡문과 제갈세가 사람들은 자꾸만 쓰러졌다. 비룡문과 제갈세가의 위기였다.
***
쿵쿵쿵쿵쿵.
용무린의 심장이 터질 듯 뛰었다.
‘제발, 제발, 제바-알…….’
금방이라도 무슨 일이 생길 것만 같았다.
스파아아아-앙!
공간을 접듯 신법을 펼치고 있지만 아직도 많이 남아 있는 거리가 야속하기만 했다.
‘너희들도 아직은 숨기고 싶을 거 아니야? 그렇지? 그러니까 그냥 얌전히 있어. 그렇지 않으면 하늘에 맹세코 네놈들을 갈가리 찢어 버릴 거야.’
누군지도 모를 상대를 용무린은 끊임없이 협박했다.
자금성에 가까워지면 질수록 감이 왔다.
비룡문에 상관세가의 사주를 받은 놈들이 침입을 했을 때와 비슷한 느낌이 들었던 것이다.
“이야아아아-하!”
추측하기 어려운 수준의 불사신기가 이끌려 나왔다. 용천혈을 통해 대지를 찍었다. 그 반탄력을 고스란히 추진력으로 환원해 공간을 갈랐다.
휘스스슷. 빠아아아아아-앙!
어느새 파공음이 용무린 뒤로 쳐졌다.
용무린이 벼락처럼 스쳐 지난 후에야 공간이 울부짖는 소리를 내었다.
잠시도 쉬지 않았다.
양의신공을 이끌어 낸 후 절대검신의 의식을 통해 불사신기를 운용하는 한편 신마의 의식으로는 끊임없는 신법을 펼쳤다.
“더 빨리! 조금만 더 빨리-이!”
그래도 부족하다는 듯 용무린은 계속해서 신법에 불사신기를 끌어 올렸다.
북경의 굳게 닫혀 있는 성문이 손에 닿을 듯 앞으로 다가왔다.
***
씨익.
금왕 정관호의 입가에 서늘한 미소가 걸렸다.
“지금쯤 시작됐겠지?”
“물론입니다.”
예의 그 걸걸한 목소리가 바로 대답을 해줬다.
“푸흐흐. 구진기 그 욕심만 많은 놈이 기회를 다 만들어 줄 줄이야…….”
생각할수록 기분이 좋은 듯 정관호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응징에 필요한 모든 준비를 구진기의 사주를 받은 흑월회가 해놓았다.
“나는 그저 숟가락만 살포시 얹으면 된다는 말씀이지.”
“하하하. 만에 하나 일이 잘못되어도 우리가 드러날 일은 없을 듯합니다.”
걸걸한 목소리의 사내 역시 기분 좋게 웃었다.
“당연하지. 내가 그 생각에 구진기와 흑월회의 뻘짓거리를 그냥 두고 보고 있는 게 아닌가? 하하하!”
금왕 정관호의 웃음소리가 점점 더 커다래졌다.
***
삐이익.
어디선가 호각 소리가 들려왔다.
그때까지 쓰러지지 않고 공격을 퍼붓고 있던 살수들이 일제히 퇴각했다. 창밖으로 몸을 날렸다. 계단을 타고 아래로 도주했다.
“허억. 허억. 사, 사돈.”
이제야 살았다는 듯 제갈문군이 용대명을 부축했다.
“흐으으. 저, 저는 괜찮…….”
말을 잇던 용대명의 몸이 축 늘어졌다.
긴장이 풀어진 것인지 아니면 상태가 그만큼 심각해진 것인지는 몰라도 그대로 두고 볼 수는 없는 일이었다.
“사돈! 이런!”
제갈문군이 잽싸게 용대명을 바닥에 뉘였다.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추궁과혈을 시작했다. 훤원전단신공을 운용해 용대명의 대혈을 짚어나갔다.
“허억. 허억.”
“흐으으…….”
한 차례 전투가 끝나고 비룡문과 제갈세가의 고수들이 이곳저곳에 너부러졌다. 전투 중에 쓰러진 사람들을 돌볼 여력도 없을 만큼 다들 부상이 컸던 거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휘슷. 휘스스슷.
한 줄기 바람이 창문을 타 넘었다.
흑월회의 회주답게 가장 좋은 순간을 노려 추담이 마지막 공격을 개시한 것이다.
“크흐흐. 죽어랏!”
죽은 듯 움직임이 없는 용대명과 그런 용대명을 추궁과혈하고 있는 제갈문군을 향해 벼락처럼 검을 뿌렸다.
버번쩍. 피쉬쉬쉬쉿.
어찌나 강한 힘이 걸렸는지 소리조차 거의 없는 협봉검이 매서운 파공음을 흘렸다.
움찔!
제갈문군이 몸을 떨었다.
‘피할 수 없다.’
자신이 피한다면 용대명이 적의 공격에 고스란히 노출된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느낀 거다.
‘공격도 힘들어.’
추궁과혈을 하는 중이었다.
손가락 끝으로 이끌었던 내공을 강제로 장심으로 이끌려다가는 진기의 운용이 꼬인다. 그대로 몸이 굳어 놈의 검에 꼬치 꿰듯 꿰일 것이다.
‘사돈!’
별 수 없었다. 그냥 몸으로 받는 수밖에.
와락.
제갈문군이 용대명의 몸을 그대로 껴안았다. 자신의 목숨을 내던져서라도 용대명의 목숨을 구하길 원했다.
퍼버버버벅.
나직하고도 섬뜩한 소리가 연속해서 울렸다.
뜨겁게 느껴지는 핏줄기가 제갈문군의 등을 적셔왔다.
‘이렇게 죽는 것인가?’
죽음을 떠올렸던 제갈문군은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왜 아무런 고통이 느껴지지 않는 것이지?’
뭔가 있다는 생각에 홱 고개를 돌렸다.
“아!”
제갈문군의 눈이 부릅떠졌다.
두 팔을 활짝 펼친 채 온몸으로 피를 쏟아내고 있는 자신의 아우이자 일장로인 제갈문기와 역시 몸으로 적의 공격을 막아낸 용대승의 모습이 보였기 때문이었다.
“치잇! 운이 좋은 놈들이군.”
휘슷.
더 이상 시간을 끌 수 없다는 듯 추담이 창문 밖으로 몸을 날렸다. 어둠속으로 사라져갔다.
“흐으으.”
“끄르륵.”
희미한 신음을 흘리며 용대승과 제갈문기가 옆으로 쓰러졌다. 그대로 의식을 잃었다.
하지만 자신들 가문의 수장을 지켜냈다는 것에 자부심을 가진 듯 입가에는 하나같이 희미한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으아아아-!”
제갈문군이 울부짖었다.
***
화륵!
용무린의 눈에 지옥의 화염과 같은 불길이 맺혔다.
저 멀리 주선각의 이층 창문을 벗어나는 야행인의 눈에서 살수의 움직임을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채앵. 채채챙.
“크악!”
“끄아악!”
아득히 먼 곳에서부터 울려 퍼지는 듯한 병장기 부딪히는 소리에 이은 처절한 비명들…….
기회만 노리고 있는 듯 멀찌감치 뒤에서 마기를 뭉클거리며 공격할 순간만을 기다리고 있는 마인들까지!
더 두고 볼 필요도 없는 일이었다.
‘깡그리 죽인다!’
스릉. 파아아!
용무린의 의지가 살기를 머금자마자 풍뢰가 튀어나갔다. 한줄기 낙뢰가 되어 공간을 단축했다.
빠아아아-앙!
그 속도가 어찌나 빠르던지 한참 뒤에나 공간이 울부짖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
***
“크흐흐. 그래봤자, 하루 이틀이나 더 살까?”
주선각을 벗어나며 추담은 통쾌하다는 듯 웃었다.
자신이 확인한 것만 해도 벌써 다섯 개 이상씩 비침을 맞았다.
“칠점사의 독이야. 더 버티긴 힘들 걸?”
용대명과 제갈문군의 몸을 파고든 비침에는 칠점사의 독이 묻어 있었다. 아무리 내공을 운용한다고 해도 하루 이틀을 넘기기 어려울 것이다.
임무 성공이다.
이제 동창 고수들의 눈을 피해 잠잠해질 때까지 숨어 있다가 느긋하게 황금이나 챙기러 가면 된다.
“금왕의 수족들도 우리가 움직인 것은 아직 몰라. 그러니 우리만 잠자코 있으면 누가 알겠어?”
사례감의 장인태감 채홍은 물론이고 비룡문이나 제갈세가에서도 셈이 복잡할 것이다.
심증이야 만금상단에 둘 수 있지만 아무런 증거가 없으니 어쩔 것인가? 지금까지 계약을 다 파기 당했어도 그대로 참아오기만 했는데 말이다.
거기에 더해 오성상단의 상행도 방해 받지 않았다. 지난 몇 달 동안 자금성에의 납품을 정상적으로 완료했다. 그러니 절대로 만금상단을 물고 늘어질 수 없는 거다.
“비룡문과 제갈세가를 떨궜으니 주변이 잠잠해지면 오성상단의 상행도 훼방을 놓아야겠지?”
그러면 모든 작전이 끝난다.
만금상단의 총관 구진기가 느긋하게 나선 후 자금성과의 계약을 다시 가져올 것이다. 그 열매는 자신에게도 나누어지리라.
“크흐흐. 총관께서 황금을 얼마나 더 주실……. 응?”
서걱.
구진기에게 받을 황금 생각에 들떠 있던 추담의 왼팔이 갑자기 뚝 떨어져 내렸다.
“우와악! 뭐, 뭐야?”
어찌나 놀랐는지 비명이 저절로 튀어 나왔다.
지금껏 살수행을 하며 숱한 위기를 맞아 몸이 꿰뚫렸을 때도 절대로 지르지 않았던 비명이었는데 임무가 끝났다고 방심을 하니 제어가 되지 않았던 거다.
번쩍. 서걱. 서거걱.
번갯불과 같은 광채가 다시 일었다. 이번에는 두 다리에 화끈한 통증이 일었다. 어이없이 떨어져 나갔다.
콰드득. 털썩. 데구르르르.
“크허억! 크으으.”
다시 비명을 흘렸다.
신법을 펼치는 도중에 두 다리를 잃었기 때문에 바닥을 형편없이 굴렀다. 그 서슬에 자잘한 돌조각이 얼굴을 마구 찍었다. 추담의 얼굴이 삽시간에 피투성이로 변했다.
“대, 대체…….”
고통보다 놀라움이 먼저였다.
대체 뭘까? 뭐가 어떻게 된 것이기에 왼팔이 잘리고 두 다리마저 사라진 것일까?
번쩍. 스각.
“커허억!”
마지막으로 남았던 오른팔까지 툭 떨어져 내렸다.
그제야 추담은 자신을 이렇게 만든 상대를 볼 수 있었다.
지옥에서 올라온 사신처럼 새파랗게 빛나는 두 눈을 한 사내, 용무린이었다.
콱.
용무린이 추담의 목줄을 잡아챘다. 으스스한 목소리로 으르렁댔다.
“죽여 달라고 사정해도 소용없다는 것만 알아라.”
타다닷.
용무린의 손이 추담의 몸을 훑었다. 잘려나간 사지를 통해 분수처럼 뿜어지던 핏줄기가 즉시 줄어들었다.
“아으으.”
왜 이렇게 춥지?
“흡!”
그제야 보였다. 자신의 신호를 받고 밖으로 몸을 날렸던 수하들이 하나도 빠짐없이 서너 조각으로 나뉘어 사방에 흩뿌려져 있다는 것을…….
어검술이었다.
원거리에서 어검술을 날려 정리한 후 용무린은 이제야 도착한 것이다.
‘그, 그런데 왜 이렇게 숫자가 많지?’
그 와중에도 추담은 궁금했다.
조각조각 나뉜 수하들의 숫자가 너무나 많았던 것이다.
그것은 바로 금왕 정관호가 대기시켜 놓은 마교 소속의 마인들이었다.
총관이 움직인 것을 알아차린 후 느긋하게 뒤만 지켜 뒷마무리를 할 생각에 숨겨 놓은 자들이었던 것이었다.
하지만 그런 꼼수도 모두 소용이 없게 됐다.
마기를 감지한 용무린이 소검비연을 날려 마인들부터 깡그리 쓸어버린 후였기 때문이었다.
“네놈에게 지옥을 보여주마.”
추담의 목줄을 틀어 쥔 채 용무린은 주선각의 이층 창문으로 스며들었다.
“……!”
용무린의 몸이 그대로 굳어졌다.
정신을 잃고 있는 용대명과 피눈물을 뿌리고 있는 제갈문군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사위! 크흐흑. 사돈이, 아버님이……. 허으으.”
용무린을 발견한 제갈문군이 흐느끼다 그대로 정신을 잃었다. 한계까지 몰렸던 긴장과 아우를 잃은 슬픔에 용무린을 본 순간 더는 견딜 수 없었던 것이다.
“장인어른!”
분노할 틈도 없었다.
용무린은 그대로 용대명과 제갈문군 곁으로 다가왔다.
불사신기를 이끌어 낸 후 두 사람의 몸에 동시에 추궁과혈을 가했다.
치릿. 치리리릿.
유형화된 불사신기가 새하얗게 손가락 끝에서 뿜어졌다. 실처럼 가느다랗게 변해 두 사람의 몸으로 스며들었다.
“커흐.”
“후으으.”
곧이라도 끊어질 듯 가느다래졌던 두 사람의 숨이 오래지 않아 길게 이어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안색은 여전했다.
검은 기운이 온통 뒤덮은 가운데 푸르스름한 색이 이리저리 얽혀 있었다.
‘독인가?’
추궁과혈을 하는 도중이라 더욱 잘 느낄 수 있었다.
용대명은 복부에 두 곳 허벅지에 세 곳, 제갈문군은 양쪽 허벅지 세 곳에서 이질적인 기운이 느껴졌다. 뱀독 특유의 화끈한 기운이 두 사람의 혈맥을 갉아 먹으며 심장을 향해 움직이고 있었다.
“하아압!”
용무린은 불사신기를 더욱 강하게 돋웠다. 두 사람의 내부로 밀어 넣었다.
기경팔맥에 고루 흩뜨려 낸 후 단전으로 이끌었다. 의식이 없는 두 사람을 대신해 임맥과 독맥으로 강하게 휘돌렸다.
‘할 수 있어. 할 수 있다고.’
불사신기의 힘이라면, 죽음까지 거슬러 버리는 그 힘이라면 두 사람의 목숨을 구할 수 있다고 믿었다.
스르르.
불사신기의 강력한 힘에 두 사람의 몸 속 깊숙이 파고들었던 비침이 고개를 쑥 내밀었다. 그 서슬에 독 기운 역시 밀려났다.
툭. 투둑.
완전히 빠져나와 바닥으로 떨어지는 비침과 함께 독기가 피가 되어 뿜어졌다.
‘일단 급한 것은 해결했다.’
비침을 빼내고 독 기운 역시 핏물에 쓸려 나왔겠지만 아직은 안심할 수 없다. 독이란 것은 그 정도로 다 밀려나오는 것이 아닌 거다.
‘그게 있었지!’
용무린은 잽싸게 품을 뒤졌다.
비단으로 만들어진 작은 향낭을 찾아 꺼냈다. 황궁비고의 일 때문에 진성왕에게 받았던 피독제왕주의 가루였다.
‘급하다.’
용무린은 잽싸게 피독제왕주의 가루를 손가락으로 조금씩 집어 들었다. 용대명과 제갈문군의 상처에 문질렀다.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상처가 너무 작아 피독제왕주 가루가 효능을 잘 발휘하지 못할까봐 저어한 나머지 입안에도 조금씩 흘려 넣었다.
“휴우.”
한숨이 절로 새어 나왔다.
용대명과 제갈문군의 얼굴빛이 빠르게 되돌아오기 시작했던 것이다.
“숙부님! 장로님!”
그제야 용대승과 제갈문기가 눈에 들어왔다.
재빨리 다가가 맥을 짚었다.
울컥!
심장 속 저 깊은 곳에서부터 뜨거운 무엇인가가 치밀어 올랐다. 두 사람의 숨은 이미 끊겨 있었다. 너무 늦었다. 불사신기로도 피독제왕주로도 구할 수 없다.
하지만 슬퍼할 틈이 없었다.
“끄으으.”
“흐으.”
아직도 죽어가고 있는 친인들이 수두룩했기 때문이다.
용무린은 재빨리 그들 곁으로 다가가 몸에 박혀 있던 비침과 소검을 뽑아냈다. 피독제왕주 가루를 나눠 뿌리고 불사신기로 숨통을 틔웠다.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은 움직여! 지금 당장 자금성으로 달려가! 어림친위군이나 동창을 찾아서 즉시 의원과 함께 달려오라고 전해!”
“알겠습니다, 패주.”
“명을 따릅니다.”
성한 사람은 솔직히 아무도 없다.
하지만 그나마 칠점사의 독이 묻어 있는 비침에 당하지 않은 사람들은 스스로 혈도를 막아 지혈을 한 후 용무린의 명에 따라 움직였다.
***
“뭐, 뭐라? 두 분께서 당하셨다고?”
장인태감 채홍이 눈을 부릅뜬 채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그 서슬 파란 노기에 보고를 하던 소감이 머리를 푹 처박으며 말을 이었다.
“그렇다고 합니다, 대인. 비룡문의 문주인 용대명은 사경을 헤매고 있고 제갈세가주 제갈문군 역시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다 합니다.”
“이런!”
채홍이 움켜쥔 주먹을 파르르 떨었다.
소감의 보고가 계속해서 이어졌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비룡문의 장로인 용대승이 사망하였고 제갈세가의 일장로인 제갈문기 역시 비명에 갔으며 두 가문의 사망자가 열둘에 중상자가 스물다섯이나 된다고 합니다.”
채홍의 머리가 무섭게 회전했다.
‘놈들이다. 놈들이 움직인 거야.’
만금상단이 손을 썼다.
잠자코 참고 있기에 마교와의 관계를 노출하지 않으려면 역시 참을 수밖에 없을 것이라 생각했었는데 그 방심의 틈을 노린 거다.
‘아니, 지금 그게 중요한 것은 아니지.’
지금 급한 것은 살아남은 사람들이라도 구하는 것이다.
채홍은 즉시 명령을 내렸다.
“너는 지금 즉시 외의원의 당직 의원들을 동원해 주선각으로 가거라. 급하다. 어서!”
“네이-.”
길게 읍한 소감이 종종 걸음으로 사라졌다.
채홍은 신경질적인 동작으로 주렴 끝의 줄 중 하나를 잡아 당겼다. 마구 흔들었다.
땡땡땡땡땡.
사례감 깊숙한 곳에 종소리가 울려 퍼졌다.
오래지 않아 당직을 서던 동창 소속 고수들이 채홍의 집무실로 몰려왔다.
“찾아계시옵니까, 대인?!”
“급하다. 지금 즉시 가용 가능한 모든 고수를 휘몰아 채시구의 주선각으로 달려가라.”
“주선각이라면 비룡문과 제갈세가의…….”
“그래!”
되묻는 동창고수의 말을 채홍이 툭 잘랐다. 다급한 목소리로 최종 명령을 내렸다.
“그간 잠잠하던 놈들이 선수를 쳤다. 패주께서 도착하셨다고는 하지만 어떤 일들이 벌어질지 모른다. 가서 패주를 돕거라. 비룡문과 제갈세가의 고수들을 지켜라!”
“명을 받듭니다!”
“명을…….”
짧은 대답과 함께 동창 고수들이 즉시 움직였다.
긴급조치는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혹시 모르는 일이야.’
무부들의 손에 황상이 수모를 겪는 것은 한 번으로 족했다. 채홍은 즉시 어림친위군과 금의위에게도 긴급 연락을 취했다. 그런 후 황제의 침전으로 달렸다.
자금성 전체에 비상이 걸렸다.
황궁을 수호하는 경위지휘사사는 물론이고 금의위와 어림친위군이 전부 움직였다. 쥐새끼 한 마리 스며들 수 없을 만큼 촉각을 곤두세웠다.
그 서슬에 단잠에 들었던 황제도 깨어났다.
채홍과 침소 밖에서 당직을 서던 상선태감의 입을 통해 주선각에서 벌어진 전투 소식을 들었다.
“뭐라? 그 천해 빠진 상인 놈들이 감히 패주의 부친과 한림원의 수장 목숨을 노렸단 말이더냐?”
“그러하옵니다, 폐하!”
쾅!
황제가 침상 머리를 내려쳤다. 격렬한 분노를 쏟아냈다.
“내 이놈들을 당장!”
아차, 싶었는지 채홍이 바삐 말을 이었다.
“다행히 황룡패주가 늦지 않게 주선각에 도착했다고 합니다. 그 출중한 힘으로 사태를 해결할 것이오니 패주에게 시간을 주어야 할 듯합니다, 폐하.”
“크흠. 그래-에?”
역시 황제에게는 용무린이 약이었다.
그토록 격렬하게 뿜어내던 분노였지만 황룡패주가 이미 나섰다는 말에 금세 말꼬리를 올렸다. 노화가 그 정도로 가라앉았다는 뜻이다.
그러다가 돌연 눈을 반짝였다.
“부상자들이 많다 하였더냐?”
“그러합니다, 황제폐하.”
황제가 채홍을 향해 파격적인 명령을 내렸다.
“사례감은 지금 즉시 당직 어의를 대동해 내의원들을 이끌고 주선각으로 가거라. 치료에 필요한 약재와 도구가 있거든 그것이 무엇이든 내의원을 통해 조달하라!”
환해진 얼굴의 채홍이 급히 고개를 조아렸다.
“황은이 망극하옵니다, 폐하.”
“황룡패주에게 일러라. 전권을 내릴 터이니 사특한 역도의 무리들을 처단하는 데 있어서 아무것도 거칠 것이 없다 이르라.”
“황제폐하 만세만세 만만세!”
진심어린 만세 삼창을 끝으로 채홍은 뒤로 물러났다.
***
자금성에서 일어난 소란은 날이 밝기도 전에 만금상단에게까지 전해졌다. 북경부에 자리한 만금상단의 지부에서 전서를 날렸던 것이다.
‘크크큭. 성공했구나.’
만금상단의 총관 구진기가 짜릿하다는 얼굴로 주먹을 콱 움켜쥐었다.
‘맛이 어때 이놈들?!’
누가 죽고 살았는지 그런 것이 중요한 게 아니다.
중요한 것은 오직 하나, 감히 만금상단의 먹잇감에 숟가락을 들이댄 일에 대한 충분한 응징이다.
‘이제 시작이야. 네놈들이 자금성에 납품을 할 오성상단의 상행도 지금부터는 납품을 할 수 없게 될 거라고.’
전투를 벌여서 표사들과 쟁자수들을 다 죽인 후 표물을 몽땅 빼앗아야만 방해가 아니다.
굳이 그렇게 하지 않아도 방법은 차고 넘친다.
예를 들면 쟁자수나 표사들 중 몇을 황금으로 회유한 후 자금성으로 납품할 표물에 장난을 쳐도 좋다. 때로는 그런 게 더욱 큰 효과를 발휘하기도 한다. 물론 황금을 쓸 필요도 없이 흑월회주가 직접 그렇게 해도 되는 일이다.
‘크크큭. 최상등품이라고 자신만만하게 꺼냈는데 물건이 다 엉망이어 봐. 얼마나 황당하겠어?’
상선감에서 만금상단이 당했던 경우가 바로 그런 경우다.
가장 중요한 상황에서 물건이 뒤바뀐 것이 드러나면 변명이고 뭐고 할 틈도 없다.
“자연스럽게 계약은 파기가 될 테고, 그때를 노려 내가 다시 계약을 가져오는 거란 말이지. 푸흐흐흐.”
생각만 해도 좋은지 구진기는 연신 웃음을 흘렸다.
바로 그때였다.
쾅!
터질 듯 문이 열리고 금왕 정관호가 안으로 들어섰다.
“오, 오셨습니까?”
구진기가 화들짝 놀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금왕에게 상석을 양보하고 공손히 그 앞에 섰다.
하지만 금왕은 굳은 듯 움직이지 않았다.
상석에 앉지도 아니한 채 이글이글 타오르는 시선으로 쏘아보고만 있었다.
“어째서……?”
구진기가 말꼬리를 늘일 때 갑자기 금왕이 불쑥 입을 열었다.
“네 놈 짓이냐?”
이미 알고 온 것이다.
하지만 구진기는 태연한 얼굴로 눈을 동그랗게 떴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파리를 집어 삼킨 두꺼비처럼 변함없는 얼굴.
하지만 금왕 정관호를 속일 수는 없었다.
평소와는 다르게 쿵쾅쿵쾅 뛰는 구진기의 심장 소리가 가감 없이 들렸던 것이다.
“멍청한 자식!”
더는 참을 수 없었던 정관호가 내공을 일부 개방했다.
폭풍처럼 일어난 마공의 힘이 구진기를 휘감았다. 구렁이처럼 옭죄었다.
“커헉. 끕. 끄읍.”
구진기의 숨이 턱 막혔다.
힘을 살짝 개방하는 것만으로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저절로 다리에 힘이 풀렸다. 바닥에 그대로 주저앉았다. 흐름을 멈춘 혈관이 압력으로 인해 툭툭 붉어졌다. 터지려 했다.
“이미 벌어진 일이라 살려두는 것으로 알아라, 이 어리석은 놈아!”
그 말을 끝으로 압력이 씻은 듯 사라졌다.
금왕 정관호의 모습 역시 방 안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허억. 허억. 허억.”
구진기가 숨을 몰아쉬었다.
바짓가랑이 사이로 노릿한 물이 흘러나왔지만 움직일 엄두도 내지 못했다.
‘어, 어째서 이렇게까지……. 대체 비룡문과 제갈세가 따위가 무엇이기에 대 만금상단의 총관이 이런 수모를 감내해야만 한단 말인가?’
영문을 알 수 없었던 구진기는 억울하기만 했다.
소리 내어 말을 할 수는 없었지만 금왕 정관호를 향해 울부짖었다.
‘내게 감사할 날이 올 것입니다. 머지않아 오성상단이 상행에 실패를 하고 계약 파기를 당했을 때, 나 구진기가 빼앗긴 자금성의 계약서를 다시 들고 왔을 때 말입니다!’
***
다시 집무실로 되돌아 온 금왕 정관호의 귓가에 예의 그 걸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총관에게 씌운다고 한들 고자 나부랭이들이 속아 넘어갈까 모르겠습니다.”
그 사전 작업을 위해 정관호가 총관 구진기를 찾아 아무것도 모르고 있다가 뒤통수를 얻어맞은 얼굴로 열연을 펼쳤던 것이다.
“이미 일은 벌어졌다. 피한다면 아예 내가 범인이라 광고를 하는 모양새가 될 터, 죽을 때 죽더라도 정면으로 맞서는 수밖에 없다.”
“승산은 있겠습니까?”
걸걸한 목소리의 질문에 정관호는 입술만 슬쩍 움직여 웃었다.
“증거가 없지 않은가, 증거가.”
“……!”
“심증만으로는 본 상단에 어떠한 제재도 할 수 없어. 그리고 알다시피 흑월회의 회주는 입이 무겁지. 죽으면 죽었지 입을 열지는 않을 게야.”
“살수 단체니만큼 그도 그렇습니다.”
걸걸한 목소리가 정관호의 말에 수긍을 했다. 지금까지 믿고 일을 맡겨왔을 만큼 흑월회주의 능력은 출중했으니까.
정관호의 입꼬리가 샐쭉 올라갔다.
“입을 열면 또 어쩔 거야? 자백만으로는 증거가 되지 않는데 말이야.”
설령 흑월회주 추담이 고문에 못 이겨 자백을 했다 하더라도 물적 증거가 나오지 않는다면 힘을 잃는다.
구진기에게 받았던 황금을 찾아내 들고 온다고 해도 그 황금을 만금상단의 총관에게 받았다는 증거를 대지 못한다면 음모라 항변하면 된다.
“내공을 살필 수도 있는 일입니다.”
걸걸한 목소리가 맥을 짚었다.
“신교의 내공을 걸릴까봐서? 후훗. 그것조차 들키지 않으면 되지 않겠나?”
황제라고 해도 아무런 증거도 없이 중원 칠대 상단의 좌장격인 만금상단을 무너뜨릴 수는 없는 일이다.
그렇게 된다면 위기감을 느낀 다른 상단들이 살길을 찾아 북원이나 남만 혹은 세외를 끌어들일 수도 있는 일이기 때문이었다.
“나는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던 것처럼 총관에게 화를 내 놓았으니 내가 우기면 고자 놈들은 기껏 해봐야 총관 놈을 상대로 화풀이를 하는 것이 다일 게야.”
“그래서 아까 놈의 목숨을 거두지 않으신 것이군요.”
“당연하지. 그렇지 않으면 내가 그놈의 어디가 예뻐서 살려두었겠나?”
구진기가 먼저 어설프게 수작을 부리지만 않았다면 더 확실한 기회를 잡아 용대명과 제갈문군의 목숨을 거둘 수도 있었을 것이다. 어쨌거나 그들은 무기조차 지니지 않고 있었으니까.
“알겠습니다. 그러면 그렇게 알고 대비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래그래.”
***
동창의 고수들에게 조사를 받느라 난리가 난 주선각 본 건물과는 달리 숙소로 사용되는 내부는 다른 의미에서 소란스러웠다.
“거기 다리 좀 잡아. 부서진 뼈를 맞추어야 해.”
“깨끗한 물 좀 끓여 와 주게.”
“환자가 정신을 잃었다. 빨리 인중에 침을 놓아!”
황제를 보필하는 어의 서진의 진두지휘로 내의원들이 부산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채홍이 먼저 보냈던 외의원들이 보좌를 했다.
용무린은 피독제왕주 가루가 든 향낭을 탈탈 털어서 사용한 후 뒤로 물러나 있었다.
“패주시여…….”
그런 용무린 뒤로 동창의 고수가 다가왔다. 송구해 어쩔 줄 몰라 하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염(殮)이 다 끝났나이다.”
“어디냐? 가자.”
용대명과 제갈문군을 말없이 지켜보던 용무린이 냉큼 돌아섰다.
“이쪽입니다.”
동창의 고수가 허리를 푹 숙이고 앞장섰다.
건물 하나를 휘돌아 고즈넉한 곳에 마련된 전각에 들어섰다.
널찍한 방의 문이 활짝 열려 있었는데, 그 안에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은 용대승과 제갈문기 그리고 비룡문과 제갈세가의 희생자들이 영원한 잠에 빠져 있었다.
아득.
향불을 피워 올리는 용무린의 입속에서 섬뜩한 파열음이 새어 나왔다. 끌어 오르는 분노를 겨우 억누른 목소리로 질문을 던졌다.
“만금상단이라 했느냐?”
“그러하옵니다, 패주시여.”
“총단의 위치는?”
“만금상단의 총단은 하북의 성도 중앙, 그 중에서도 동남쪽에 위치해 있사옵니다.”
전력으로 말을 달리면 이레가 걸리는 거리.
‘하지만 내가 신법을 펼치면 사흘 반나절에 충분히 주파할 수 있지.’
더 기다릴 것도 없다.
“만금상단을 내사하기 위해 파견되어 있는 동창 고수들이 틀림없이 주변을 살피고 있을 터!”
“그렇사옵니다.”
“지금 즉시 전서를 날려라.”
“하명하소서.”
“승선포정사사와 제형안찰사사, 도지휘사사와 위지휘사사의 가용 병력 그리고 주변의 천호소의 병사들까지 깡그리 동원해 만금상단을 물샐틈없이 포위하라 일러라.”
“충!”
“나 황룡패주가 도착하기 전까지 개미새끼 한 마리도 들어가거나 나올 수 없다. 알겠느냐?”
“알겠사옵니다, 패주시여.”
동창 고수가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용무린의 시선이 저 멀리 남쪽으로 향했다. 하북 성도의 만금상단의 총단을 향해서였다.
“잘못 건드렸어.”
누구에게 하는 말일까?
“관과 무림은 별개지만, 내 아버지를 건드린 이상 그딴 것은 개나 줘버릴 테다.”
만금상단에 마공을 익힌 놈들이 있다면 그것이 누구든 갈기갈기 찢어 죽일 것이다.
“기다려. 내가 간다!”
휘슷.
어둠을 뚫고 용무린의 신형이 하늘 높이 솟아올랐다.
신마귀환 7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