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귀찮긴 한데 나쁘진 않네
만금상단의 업무가 마비가 됐다.
승선포정사와 제형안찰사의 지휘로 만금상단의 모든 자산의 국고 귀속 작업이 진행되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 누구도 감히 토를 달지 못했다.
도지휘사와 위지휘사 그리고 천호소의 병력들이 진을 치고 주변을 차단한 가운데 각 관청의 관리들이 밀어닥친 후 그야말로 탈탈 털어내고 있으니 과연 누가 그 앞에 대거리를 할 수 있단 말인가?
놀랍지만 그래도 생겨났다.
만금상단에 납품을 하고 있는 중소상단 중 하북 성도에 지부를 두고 있는 곳들은 책임자가 달려와 엎드려 눈물로 하소연을 했다. 애꿎은 자신들의 피해를 호소했다. 대책을 간절히 원했다.
그런 사람들까지 몽땅 피해를 보라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인지라 용무린은 특명을 내려 그 상단들의 피해를 최소화 하라는 지시를 내려두었다.
덕분에 만금상단에 납품을 하는 중소상단들은 한숨을 돌리게 되었다.
현행 계약에 맞추어 납기일까지 기존 계약 물품을 납품하라고 한 후 지금까지 납품된 물품들의 결제 약조까지 다 받았으니 그야말로 죽다가 살아난 기분일 것이다.
하지만 만금상단에 소속된 각 상회들은 자산과 영업현황을 모두 파악할 때까지 모든 영업을 중지하라고 하였으니 죽을 맛이었다.
각 성의 성주가 제각각 성의 승선포정사와 도지휘사 그리고 제형안찰사와 더불어 들이친 후 모든 것이 파악될 때까지 아예 문을 닫아 버렸으니 어쩌겠는가?
거역할 수 있는 곳은 없었다.
금왕 정관호가 마영각으로 보냈던 보고서에 대한 답신과 구진기가 육대 상단의 주인들에게 보냈던 전서가 명명백백한 증거로 나타났기에 감수해야만 했다.
증거는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만금각이 무너진 후 병사들의 힘으로 주변을 정리하는 와중에 금왕 정관호의 집무실에서 치명적이라고밖에 할 수 없는 몇몇 서류들이 또 나타났던 것이다.
이른바 비밀장부였다.
그 안에는 만금전장을 통해 황금을 세탁한 후 어떤 방법으로 얼마만큼의 황금을 대산으로 보냈는지 너무나 적나라하게 적혀 있었다.
다른 곳도 아닌 마교와의 연계다.
양민들은 역사적으로도 언제나 천하를 피로 물들이려는 전례가 많은 그 마교의 자금원이 바로 만금상단이었다는 사실에 놀라고 전격적인 국고 귀속 소식에 다시 한 번 놀랄 수밖에 없었다.
용무린은 다른 의미에서 놀라워했다.
금왕 정관호와 걸걸한 목소리의 주인공인 마교 외원 부총관에게 얻은 정보 때문이었다.
‘신마가 대공을 이루고 나왔다?’
그야말로 깜짝 놀랄 만한 정보였다.
자칫 방심하고 있다가 뒤통수를 대차게 얻어맞을 뻔한 것이다.
‘그놈이 역천자인가?’
마교의 교주쯤 되면 그렇게 불려도 무방할 듯싶은데 뭔가 조금 이상했다. 새로이 등극한 후 마교의 교주가 된 신마가 정녕 역천자라면 어째서 미적댄단 말인가?
‘전생의 나인 절대검신과 무당의 천기자 그리고 소림의 법정이 한 마음으로 두려워 대비를 해왔던 존재야. 그 정도라면 대공을 이루고 나서는 즉시 군림의 행보를 시작해도 되지 않나?’
당최 알 수가 없었다. 대체 왜 미적대는 걸까?
‘뭔가 또 노리는 게 있나?’
있다 하더라도 지금으로서는 그게 뭔지 감도 잡지 못하겠다. 한참을 더 생각하던 용무린이 내린 결론은 뒤통수만 얻어맞지 말자는 것이었다.
‘일단 대비나 튼튼히 해놓자.’
구진기 따위의 하찮은 놈에게 허를 찔리는 우를 범했다.
물론 용대명과 제갈문군이 황궁에서 일을 하는 바람에 비무장 상태로 생활하다가 그대로 술을 마시는 실수를 해서 피해가 더 커졌지만 결과적으로 보면 그것조차 미리 예상했어야 한다.
그런데 이제는 신마까지 대공을 이루고 출관한 마당이다.
여기서 아차 또 방심하면 부모님과 가족 거기에 더해 사랑하는 사람까지 잃을 수도 있는 거다.
‘별 수 없이 황제폐하를 한 번 만나야겠네.’
비룡문을 지키는 데 가장 좋은 방법은 역시 비룡문 자체의 힘이 무적이 되는 것이다.
‘시간만 오 년 정도 더 주어진다면 무적은 못되어도 감히 그 누구도 함부로 범접할 수 없는 곳으로 만들어 놓을 수 있겠지만 지금은 아니야.’
무림맹의 힘을 끌어오는 것도 마교와 혈교를 견제해야 하니 조금 그렇고 개방이나 소림 혹은 무당파의 전력을 빌려오는 것도 마땅치 않다.
실제 마교나 혈교와의 전쟁이 시작된다면 그들 역시 상황에 따라 이리저리 빠져나가야 되기 때문이다.
‘당분간은 역시 다른 곳의 힘으로 내 주변을 지키는 수밖에 없겠어.’
황제를 만나려는 이유가 바로 그것이었다.
담판을 지어서라도 도지휘사의 병력쯤 비룡문 주변에 두고 싶은 거다.
‘관과 무림은 별개라고 부르짖었던 말을 스스로 번복하는 것 같아 낯이 좀 간질거리기는 하지만 명색이 황룡패주잖아? 나는 이미 관과 무림 양쪽 모두에 한 발씩 걸치고 있는 사람이라고.’
뻔뻔하지만 그렇게 생각하고 말 것이다.
차라리 내가 욕을 얻어먹으면 먹었지 내 가족, 내 부모형제와 사랑하는 여인이 잘못되는 꼴은 죽어도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엄 중감!”
“하명하십시오, 패주.”
용무린 뒤에 시립해 있던 중감 엄당이 공손하게 머리를 조아렸다.
“육대 상단의 수장들은 이곳에 도착하려면 아직 한참 남았겠지?”
“그러하옵니다.”
“얼마나 더 걸리겠어?”
“만금상단의 총단이 하북성도에 있을 뿐 나머지 육대 상단의 총단은 각지에 흩어져 있습니다. 전서를 받는 즉시 열일 제쳐두고 말을 달린다 하여도 앞으로 열흘은 족히 넘게 걸릴 것입니다.”
“좋아. 그러면 나는 지금 황제폐하를 만나러 자금성엘 좀 다녀와야겠다.”
“제가 모시겠습니다.”
“됐다. 나 혼자 다녀오는 편이 훨씬 더 빨라. 그리고 내가 없는 사이 너까지 여기에 없으면 내가 돌아왔을 때 상황을 파악하기가 힘들어. 그러니 네가 속속들이 파악하고 있어야만 해.”
“명심 또 명심봉행 하겠습니다, 패주.”
용무린의 믿음에 중감 엄당이 목이 터져라 부르짖으며 고개를 조아렸다.
“그럼 나 다녀온다. 수고해.”
“보중하소서.”
용무린은 그대로 몸을 일으켰다. 자금성으로 향했다.
***
닷새 후 자금성 인근.
정오 무렵 용무린은 채시구의 주선각에 도착할 수 있었다.
갈 때와는 달리 하루 반나절이 더 늦은 이유는 오는 도중 개방의 분타 몇 곳을 돌며 신마의 출관 소식을 전하고 향후 대책을 교감하느라 지체할 수밖에 없었다.
“황룡패주를 뵈오이다.”
“황룡패주를…….”
삼엄한 경계를 펴던 경위지휘사사의 군병과 동창의 고수들이 고개를 깊이 조아려 용무린을 맞았다.
‘하아. 나로 하여금 아낌없이 뭔가를 베풀 수밖에 없도록 만드시네. 우리 폐하께서 말이야.’
아버지와 장인어른의 보호를 황궁을 수호하는 경위지휘사사의 군병과 동창의 고수들이 도맡아 하고 있으며 어의가 돌아가며 상처를 돌보고 있었다.
무림과 관은 별개라는 말은 이제 더는 황제에게 꺼내지 못하는 거다.
“마침 잘 오셨습니다, 패주. 춘부장께오서 방금 전에 일어나 앉으셨습니다.”
희소식이었다.
불사신기와 피독제왕주의 가루가 있었다지만 그래도 내외상이 엄중했을 터인데 이만큼 빠른 회복속도를 보였다면 어의의 의술도 한 몫 단단히 했을 것이다.
“유 어의라 했던가?”
“그러하옵니다, 패주.”
“유 어의의 공을 내 결코 잊지 않겠어. 황제폐하께 누가 되지 않으며 대의에 어긋나지 않는다면 내 무슨 일이든 유 어의의 부탁 하나를 들어주도록 하지.”
“감당하기 어려운 과례입니다, 패주.”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유 어의의 얼굴은 활짝 피어났다.
금서철권의 주인인 황룡패주이자 무림왕인 사내의 말이니 적어도 자신의 가문의 구명줄 하나는 막강한 것으로 구한 셈이다.
용무린은 적이 마음이 놓인 얼굴로 안으로 들어섰다.
다소 굳은 얼굴을 한 용대명이 반겨주었다.
“왔느냐?”
“예, 아버지. 몸은 좀 어떠세요?”
“무탈하구나. 나만 무탈해…….”
비명에 간 아우 용대승이 생각이 난 모양이었다. 말꼬리를 늘이는 용대명의 목소리가 애잔하게 들려왔다.
“빚을 갚고 오는 길입니다. 이자는 지금 계속해서 받아내고 있는 중입니다.”
용무린은 만금상단 총단에서 벌어졌던 일을 간추려서 말해 주었다. 잠자코 듣고 있던 용대명은 공치사 대신 본인의 결의를 불쑥 내뱉었다.
“돌아가는 즉시 필수 인원을 제외한 직계 모두와 함께 일 년 동안 폐관연공에 들 것이다.”
이번 일로 충격이 꽤 컸던 모양이었다.
용무린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하세요, 아버지. 제가 최선을 다해 돕도록 할게요.”
“앞으로 가문의 운영에 관한 모든 것을 네게 일임한다.”
“아버지. 그렇게까지 하실 것은…….”
“아니다.”
용대명이 용무린의 말을 중간에 잘랐다. 단호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가주의 위를 지금 당장 물려받으라는 게 아니다. 하지만 앞으로 비룡문을 이끌 사람은 다른 누구도 아닌 너다. 그리니 지금부터는 네가 전면에 나서 줘야만 해.”
“…….”
“물론 시간이 부족한 것은 잘 안다. 마교에 이어 혈교까지 재림을 했으니 네가 동분서주해야 할 일이 많아지겠지. 하지만 나를 비롯한 일가 모두가 네게 더는 짐이 될 수 없음이다.”
맞는 말인지라 용무린은 계속해서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후일을 위해서도 폐관연공에 들어 최소한의 무력이라도 키워놓을 생각이다. 그러니 남겨 놓은 필수 인원들과 긴밀한 연락을 취해라. 그 정도만으로도 충분할 거다.”
“알겠습니다, 아버지. 그리고 불사신기를 수련하실 때 가장 중요한 요체가 바로 불굴의 의지라는 점을 항상 기억하세요.”
“불굴의 의지라……. 잘 알겠다. 바쁠 터인데 그만 나가 보거라.”
“예, 아버지.”
고개 숙여 인사를 한 후 방을 나선 용무린은 제갈문군의 거처로 이동했다.
***
십만대산 불회곡.
“뭐, 뭐라? 만금상단이?!”
신마 대신 대전을 지키고 있던 음양자의 입에서 노성이 터져 나왔다. 신교의 든든한 자금줄이던 만금상단의 괴멸은 그만큼 놀라운 일이었던 것이다.
“마영각으로부터 계속해서 급보가 들어오고 있습니다. 삼만 어림의 군세를 앞세워 봉쇄를 한 후 용무린 그 애송이가 직접 만금상단 총단을 짓밟았다고 합니다.”
“허어…….”
어찌나 기가 막히는지 음양자의 입에서는 힘없는 탄성밖에 나오지 않았다.
“하북성도의 만금상단 총단은 물론이고 각 성의 지부에 이르기까지 군세를 앞세운 승선포정사와 제형안찰사의 관리들이 난입을 해서 모든 자산과 물품을 압류해 국고로 귀속시키는 작업을 하고 있다고 합니다.”
“마, 만금전장은?”
“만금전장의 상황 역시 마찬가집니다. 만금상단에서 운영하는 전장인데다 본교로 황금을 보내는 통로로 이용되어 온 사실이 다 드러나 버렸기 때문에…….”
“……!”
참담했던지 귀안대주도 말을 더는 잇지 못했고 음양자는 아예 말을 잃었다.
“어찌해야 합니까?”
“……!”
귀안대주의 질문에 음양자는 뾰족한 대답을 내놓을 수가 없었다. 일을 마무리한 것이야 용무린이었지만 그가 동원한 힘이 무림의 세력이 아닌 관과 군이었기 때문이었다.
‘그것도 삼만에 달하는 군세였단 말이지.’
하북성도에서만 그 정도였다.
전국 각지에 세워진 지부들을 공략한 군세를 더하면 몇 십만이나 되는 막강한 힘이다. 아무리 마교라지만 그 군세까지 한꺼번에 어떻게 할 수는 없는 일인 것이다.
‘빌어먹을! 별 수 없이 무림 정복 이후를 기다려 되찾는 수밖에 없겠구나.’
생각 같아서는 지금 당장에라도 뒤엎어 버리고 싶다.
하지만 신마가 다시금 조사동에 들어가 지금까지 얻은 것을 되돌아본다고 했으니 기다려야만 한다.
첫 보고를 듣고 난 직후 조사동으로 달려가 보고를 했었지만 그저 기다리라는 신마의 싸늘한 목소리만 듣고 물러나야 했기 때문이었다.
분하고 또 분하지만 지금은 참아야 할 때다.
‘용무린! 네게 주어진 시간을 충분히 즐겨야 할 것이다. 신마께서 정복의 거보를 내딛기만 하면 네 모든 것은 신기루처럼 사라질 것이니 말이다.’
중원 정복 후 다음 계획을 진행하면 지금 받았던 수모 따위 몇 곱으로 되돌려 줄 수 있는 일이다.
“흑상과 염상의 흔적을 지우는 일에 주력해라. 놈의 능력이라면 틀림없이 정관호와 외원 부총관의 입을 통해 두 곳의 정보를 뽑아냈을 터, 그 일이 먼저다.”
“명을 따릅니다.”
다부진 대답과 함께 귀안대주가 물러났다.
***
용대명을 시작으로 주선각을 한 바퀴 순회하며 부상자들을 살피고 난 후 용무린은 자금성으로 향했다.
“황룡패주를 뵈오이다.”
“황룡패주를…….”
용무린의 등장에 전과는 판이하게 달라진 금의위와 경위지휘사사의 정병들이 목이 터져라 외치며 반겼다.
“사례감에 알려라. 나 황룡패주가 황제폐하를 뵙고자 한다고…….”
“충!”
금의위장 하나가 부리나케 신법을 전개했다.
용무린은 황제가 관료들을 접견하는 정전인 태화전을 향해 천천히 걸었다.
“황룡패주를 뵈오이다.”
오래지 않아 사례감의 장인태감인 채홍이 날듯이 달려와 고개를 조아렸다.
“오! 채 사례감. 오랜만이야.”
“그간 강녕하셨습니까, 패주?”
채홍이 반가움이 역력한 얼굴로 반겼다.
“채시구의 주선각에 신경을 많이 썼더군. 내 채 사례감의 마음을 잊지 않도록 하겠어.”
“황공하옵니다, 패주. 소관은 그저 황상의 어지를 받을 뿐입니다.”
“그래그래, 황상께선 지금 집무를 보고 계시겠지?”
“그렇사옵니다. 지금 상선태감에게 연통이 갔을 것입니다. 이대로 입실하시면 되옵니다, 패주.”
“알겠다. 가자.”
“네이-.”
길게 읍하며 채홍이 앞장섰다. 용무린을 태화전으로 직접 안내했다. 그야말로 진성왕에게나 보였음직한 극상의 공경이었다.
이윽고 태화전 앞에 도달했다.
새하얀 대리석 축대 위에 위압적으로 세워진 태화전이 거대한 위용을 뽐내었지만 용무린은 눈 하나 꿈쩍하지 않았다. 거침없이 올랐다.
“황룡패주 입실이오-오!”
수호위사의 외침과 함께 태화전의 문이 활짝 열렸다.
여의주를 입에 물고 있는 용의 조각으로 온통 도배가 된 회랑을 지나 끝에 옥좌가 보였다.
그리고 황제가 그 위에 앉아 환하게 웃으며 용무린을 기다리고 있었다.
‘아오, 낯간지러워라…….’
솔직히 마음에는 들지 않지만 이제는 인정해야 할 때다.
무림왕에 봉해 준 것은 아무런 의미도 없지만 황제는 어의와 수많은 약재를 보내 아버지 용대명이 수월하게 털고 일어나게끔 해주었다.
그뿐만이 아니다.
황룡패주로서의 자신의 지위를 인정해줬고 마음껏 그 권한을 사용할 수 있게 힘을 실어 주었다.
‘까짓것 무릎 한 번 꿇지 뭐.’
아버지의 일로 관의 힘을 사사로이 사용했으니 이제 인정할 것은 인정하고 넘어가야 사내인 거다.
뚜벅뚜벅.
용무린이 힘차게 앞을 향해 걸었다.
그때 갑자기 황제가 벌떡 일어나더니 옥좌에서 내려왔다. 앉아서 용무린을 맞이하지 않고 혈족을 대하듯 파격적으로 행동했던 것이다.
씨익.
용무린의 입가에 환한 미소가 절로 떠올랐다.
‘졌다. 완벽하게.’
용무린은 마지막 남아 있던 한줄기 자존심까지 녹아 없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사내로서, 황룡패주로서 제대로 해주지.’
십 보 앞까지 마중을 나온 황제가 환한 미소와 함께 두 손을 내밀었다. 그 앞에 도착한 용무린의 한쪽 무릎이 천천히 바닥에 닿았다.
“황룡패주 용무린, 황상을 뵈오이다.”
용무린은 기꺼이 고개를 숙였다. 지극히 정중하지만 조금도 비굴하지 않은 사내답고 당당한 태도였다.
“와하하하!”
황제가 통쾌하다는 듯 크게 웃었다.
용무린을 손수 일으켜 세우며 다시 크게 외쳤다.
“문무백관은 보아라! 보이는가?! 황룡패주가 본 천자에게 마음을 주는 것을? 크하하하하!”
황제의 웃음소리가 점점 더 커다래졌다.
“황제폐하 만세만세 만만세!”
“황제폐하 만세만세 만만세!”
정사를 논하기 위해 입궐해 있던 문무백관이 목이 터져라 부르짖었다.
‘다들 왜 이래?’
무릎 한 번 꿇었다고 이렇게까지 격렬한 반응을 보일 줄은 몰랐던 용무린은 쌔한 느낌을 받아야만 했다.
좌우를 돌아보며 황제가 다시 외쳤다.
“황룡패주가 고(孤)에게 마음을 주었다. 하니 어찌 고를 대신해 민초를 돌보지 아니하겠는가?”
“황상의 뜻대로 하시옵소서.”
“황상의 뜻대로 이루옵소서.”
황제의 외침에 문무백관이 일제히 고개를 조아리며 크게 외쳤다.
‘대체 뭐야? 또 무슨 짓을 하려고?’
용무린은 슬그머니 불안해졌다.
공연히 쓸데도 없는 감투를 또 내릴까 해서였다.
역시나 그랬다.
“만금상단의 모든 것을 국고로 환원하는 대신 황룡패주에게 귀속하노라!”
“폐하!”
용무린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싫어하는 빛이 역력한 얼굴로 황제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무엄하다고 나무랄 수도 있는 일이었지만 황제는 되레 크게 웃었다.
“보아라! 황룡패주가 싫어하고 있느니라! 와하하하. 천하에 뉘가 있어 만금상단의 모든 것을 통째 안긴다는 말에 저렇듯 싫어하는 기색을 내비칠 수가 있겠느냐?”
“그러하옵니다, 폐하.”
“황룡패주는 황궁비고의 일을 끝낸 후에도 아무것도 원한 것이 없었사옵니다.”
“천하에 오직 그만이 만금상단을 바르게 경영해 여타 거대 상단들이 황금을 통해 나라를 어지럽히지 못하도록 제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삼공과 삼고는 물론이고 병부상서에서 이제는 내각대학사로 자리를 옮긴 호유용까지 다투어 나섰다.
아마도 그들은 용무린이 태화전에 들어오기 전까지 황제의 편에 서서 반대하는 무리들과 설전을 벌였던 듯했다.
“황룡패주께서 황상께 예를 보이는 것으로 그 충심을 확인할 수 있었사옵니다.”
“그 충심을 확인했으니 이제 뜻대로 하소서, 폐하.”
용무린이 무릎을 꿇은 모습에 그토록 열광한 이유가 바로 그것이었다. 만금상단이라고 하는 거대한 상단까지 용무린에게 안겼을 때 혹시라도 발생할지 모르는 역심을 염두에 두었던 것이다.
‘이런 제길. 왜 자꾸 발목을 잡고 난리야?’
안 그래도 마교와 혈교 문제로 골머리가 다 아파죽겠는데 거기에 더해 이제는 만금상단을 책임지라니! 그랬다간 일에 치여 죽을 것만 같았다.
용무린은 맹렬히 고개를 흔들었다.
“폐하. 만금상단은 저와 맞지 않습니다. 저는 무부…….”
“되었다.”
황제가 용무린의 반론을 칼같이 잘랐다. 용무린의 눈을 들여다보며 단단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나머지 육대 상단으로 향하던 만금상단 총관의 전서를 과인도 읽었느니라.”
“……!”
그제야 알 수 있었다. 황제가 어째서 이런 결정을 내리게 되었는지를.
“그 무도한 것들이 감히 연합을 해 이 나라의 경제를 망가뜨리려 했다. 내 백성들을 볼모로 천자인 나를 겁박하려 들었단 말이다.”
확실히 화가 치밀어 오를 만한 일이긴 했다.
칠대 상단이 연합해서 국가 경제를 엉망으로 만든 뒤 그것을 빌미로 황제의 양보를 얻어내려 하다니!
“내 백성들을 볼모로 잡으려 했던 것도 용서할 수 없는 일이거니와 이 나라의 경제 자체가 붕괴되면 그 뒤에는 무엇이 기다리고 있겠는가?”
황제의 목소리가 점점 더 날카로워졌다.
“세금도 제대로 거두지 못할 것이오, 그로 인해 병사들이 배를 주리게 될 게 아니겠는가? 그렇게 되면 북원에서 가만히 두고 보겠는가?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일제히 쳐들어 올 것이다.”
용무린의 생각도 마찬가지이긴 했다.
과장이나 부풀린 측면이 없지는 않지만 확실히 그렇게 되면 군대는 약해질 수밖에 없게 된다.
배가 고픈 군대는 전투력이 약화 될 테고 가세가 쪼들리니 군 수뇌부들이 뇌물에 흔들려 돈줄을 거머쥔 거대 상단 손에 휘둘리게 될 테니까.
‘일시적인 손해가 있기는 하겠지만 상인들이야 나라가 무너져도 배를 갈아타면 그만이겠지. 아니, 그들의 행동으로 북원이 중원을 차지하게 된다면 몇 년 사이 몇 배로 보상을 받게 될 거야.’
같은 생각이었는지 황제의 얼굴에는 그동안 참아오기만 했던 노화가 가득했다.
“그런 상황에 고가 할 수 있는 일은 하나다. 바로 황룡패주를 통해 각 상단들이 어떠한 수작을 부린다고 해도 이 나라 경제를 든든히 떠받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도록 하는 일이 바로 그것이다.”
잠자코 듣고 있던 용무린은 내심 한숨을 내쉬었다.
‘휴우. 단단히 걸렸구나.’
돌아가는 상황을 보아하니 황제의 결심이 너무 단단하여 빠져나갈 구멍이 보이질 않았던 거다.
“황룡패주.”
“예, 패하.”
“어명이다. 만금상단을 받으라. 그리하여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상인들이 연합하려 이 나라 경제를 망가뜨리는 일은 없도록 하라.”
‘아버지 약값 한 번 거하게 치르는구나.’
그것만 아니었어도 그냥 안면 몰수하고 무림을 활보하며 즐겁게 살 수 있었을 터인데……. 이젠 별 수 없이 더 골머리를 썩어야 한다.
“알겠습니다, 폐하.”
한 번 한다고 한 일이니 확실히 할 거다.
최소한 먹는 것 가지고 양민들을 볼모로 잡히는 일은 없게 만들 생각이다.
“또한 그 일을 행함에 있어서 필요하다고 생각하면 군부의 힘이라도 마음껏 움직여라. 만금상단의 총단을 봉쇄해 그들의 음모를 분쇄했듯 어명을 이루기 위한 것이라 생각되면 무엇이든 해도 좋다.”
그야말로 파격의 연속이었다.
하지만 용무린이 황궁무고에 이어 만금상단까지 군세를 동원해 황제의 말처럼 마교의 음모를 봉쇄했기에 누구도 그 어명에 토를 달고 나서지 못했다.
“명심 또 명심하겠나이다, 폐하.”
그것으로 끝!
문무백관을 향해 돌아선 황제가 환한 얼굴로 외쳤다.
“기쁜 날이다. 오늘은 패주와 더불어 한 잔 술을 즐길 터이니 나머지 자잘한 일은 삼공과 삼고가 문무백관과 머리를 맞대고 상의토록 하라.”
그 말을 끝으로 황제는 몸을 돌려세웠다.
“황룡패주는 고를 따르도록!”
황제가 성큼성큼 태화전을 벗어나기 시작했다.
“……!”
용무린은 별 수 없이 그 뒤를 따라야만 했다.
***
건천궁에서의 술자리는 밤늦게까지 이어졌다.
“파하하하! 고가 말이야. 황궁무고에서의 그런 흉악한 고초를 겪었는데도 말이지, 그(?) 능력만큼은 전례 없이 탁월해졌다 그 말이야! 와하하하!”
적당히 술기운이 오른 황제가 손바닥으로 허벅지까지 내리쳐가며 웃음을 터뜨렸다.
‘푸흐흐. 그렇게 좋으신가?’
용무린도 속으로 웃을 수밖에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상당기간 용무린에게 불사신기를 계속해서 주입 받았던 황제의 정력이 몰라보게 좋아진 나머지 황후와 황귀비, 두 명의 귀비에 네 명의 비 그리고 여섯 명의 빈까지 한꺼번에 회임을 시켰던 것이다.
‘하여간 남자는 다 똑같은 모양이로구나.’
용무린은 불사신기 수련 초기에 반찬이 바뀌었다고 한껏 기뻐하던 용대명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런데…….”
그때 황제가 갑자기 안면을 싹 바꾸었다.
치미는 노화를 참을 수 없다는 듯 엄한 표정으로 목청을 돋우었다.
“거, 말이야! 종종 와서 어! 고에게 불사신기 좀 넣어 주면 좀 좋아?!”
“……!”
“어의가 달인 보약 아무리 먹어봐야 불사신기만 못하단 말이야. 어! 고가 정무에 얼마나 시달리는 줄 알아? 묘시 초에 일어나서 시사, 윤대, 경연에…… 아오, 볼살이 팍팍 빠진다고!”
그러면서 무엇인가를 강력히 원하는 시선으로 용무린의 눈을 바라보았다.
‘젠장. 내 그럴 줄 알았다.’
저렇게까지 말하는데 황제가 원하는 것이 무엇이겠는가?
용무린은 슬그머니 일어나며 입을 열었다.
“제가 도와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폐하.”
“응? 그래? 그, 그러면 나야 고맙지.”
옆구리를 쿡쿡 찔러 놓고서 황제는 못이기는 체 몸을 돌렸다. 등을 내밀었다.
‘내가 인간보약도 아니고…….’
살짝 짜증도 났지만 간이고 쓸개고 다 내어줄 듯 자신을 대하는 황제인지라 용무린은 두 말 없이 불사신기를 끌어 올렸다. 손바닥을 황제의 명문혈에 대고 부드럽게 주입하기 시작했다.
‘언제까지나 내가 보약 노릇을 할 수는 없지.’
용무린은 불사신기를 황제의 단전으로 인도했다.
이 기회에 아예 작정하고 호심결의 기틀을 만들어 줄 생각인 것이었다.
웅웅웅. 후우우웅.
상당한 수준의 불사신기가 황제의 단전을 향해 계속해서 밀려들었다. 그러더니 이내 자리를 잡았다. 이미 여러 번 경험이 있던 신체라서 그런지 너무나 자연스럽게 제집처럼 들어앉았다.
“폐하. 하루에 한 번, 기침하셨을 때 한 시진만이라도 지금 가득 들어찬 불사신기가 있는 곳에 의식을 집중하고 호흡을 하십시오.”
내공을 끌어 올려 타인의 몸에 단전을 만드는 와중에 입을 열어 저렇듯 말을 할 수 있다니!
화운장로가 보았다면 혼비백산 놀랄 일을 용무린은 아무렇지도 않게 해내고 있었다.
“무병장수하실 것이며 차후로도 계속해서 정력이 넘쳐흐르게 될 것입니다.”
부르르.
황제의 몸이 가늘게 떨렸다.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애써 참는 것이다.
‘좋아한다. 계속해서 정력이 넘쳐흐르게 된다고 하니 무지하게 좋아하고 있어.’
하여간 사내들이란!
그렇게 한 시진 동안 명문혈에 손을 붙이고 있던 용무린은 황제의 단전에 호심결의 기틀을 완전히 만들어 놓은 후에야 떨어졌다.
‘됐다. 앞으로는 나를 오랜만에 만나도 인간보약 대하듯 하지는 않겠지.’
겨자씨만큼 작지만 확실히 단전이 만들어졌다.
그것도 불사신기에서 비롯된 단전이다. 장담했던 것처럼 황제는 무병장수하고 정력이 흘러넘치게 될 거다.
황제의 몸에 단전을 만들어 버린 후폭풍이 있었다.
전례 없이 기운 넘치는 몸이 어찌나 흡족했던지 황제가 중매를 하고 나섰던 것이다.
“선황폐하의 총애를 한 몸에 받으시던 영인고황귀비의 마지막 소생인 약란 옹주가 있네. 고의 막내여동생인 셈이지. 어찌나 어여쁜 아인지, 구중천화라 불리는 아이네. 어떤가? 만나보겠는가?”
“폐하. 저는 이미 사모하는 여인이…….”
화들짝 놀란 용무린이 거부의 의사를 밝히려 했지만 이번에도 황제가 중간에 잘랐다. 제 하고 싶은 말만 계속해서 뱉어냈다.
“알지! 알아! 이번에 고가 새로이 한림원 수장으로 임명한 제갈문군의 여식과 혼사가 오가고 있다지? 그런데 뭐? 황룡패주씩이나 되어서 삼처사첩이 무슨 흉이라고 정색을 하고 그래?”
“그래도 저는 제갈영령이란 여인을…….”
용무린이 계속해서 거부를 하자 황제는 오기가 발동했는지 갑자기 강짜를 부렸다.
“어명이야! 내 막내 여동생 주약란과 혼인을 먼저 해. 그런 후 제갈영령을 맞이하면 될 게 아닌가?”
“폐하!”
“어허! 황룡패주를 인정해주고 밀어줬으며 무림왕에 봉해주고 만금상단까지 안긴 고야! 그쯤의 인연은 맺어주어야 세상 모두가 인정을 하게 되는 거라고.”
더는 밀릴 수 없었던 용무린이 반격에 나섰다. 단호한 목소리로 고개를 흔들며 답했다.
“싫습니다.”
“싫어? 어명인데?”
“폐하께서 말씀하셨듯이 저 황룡패주입니다. 부당한 어명은 거부할 수 있습니다.”
“부당해? 내 어명이? 내 여동생인 주약란과 혼인하라는 게 왜 부당해? 걔 예뻐. 무지 아름답다고. 그뿐인가? 서책도 많이 읽어서 현명하기도 해. 그런데도 싫어?”
“예, 싫습니다.”
“에이, 한 번 더 생각해 보라니까?”
계속해서 목청을 높이던 황제가 안 되겠다고 생각했는지 눙치기까지 했다. 물론 천하에 오직 한 사람, 용무린에게만 보여주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용무린만큼은 시종일관 똑같았다.
끝까지 고개를 흔들었다.
“한 번 더 생각해 볼 것도 없습니다. 저도 저지만, 옹주께서도 생면부지의 사내인 저와 느닷없이 혼인을 하라고 하면 싫으실 것입니다.”
“아하, 그거? 그거라면 염려하지 마. 내가 일전에 패주와 고와의 돈독한 사이를 자랑했더니 무지 보고 싶어 했어. 사내중의 사내라고 하더라니까?”
용무린은 골머리가 지끈거리기 시작했다.
‘젠장, 내가 다시는 황궁에 오나봐라.’
단전도 이미 만들어줬겠다, 정무로 인해 몸이 찌뿌둥하니 와서 불사신기 좀 넣어 달라는 말 따윈 앞으로 꺼내지 못할 것이다.
“저 갑니다, 폐하.”
용무린이 자리에서 발딱 일어섰다.
“어? 아직 술 많이 남았어! 어딜 가?! 멈춰! 어명이야!”
“아, 싫다고요! 그리고 저 황룡패주예요. 그런 어명은 받들지 않아도 된다는 거 잘 아시잖아요!”
더는 싫다는 듯 용무린은 줄행랑을 쳤다.
자존심이 팍 상한 황제가 다시 술기운이 올라왔는지 막나가기 시작했다.
“야! 황룡패주! 너 정말 치사하게 이럴 거야? 황후랑 황귀비랑 모두 회임해서 나 어디 잘 곳도 마땅치 않아. 한 잔만 더 하게 빨리 돌아와! 빨리-이!”
결국 용무린을 붙잡고 늘어진 것은 황후와 황귀비 등이 모두 회임을 했기에 잠자리가 마땅치 않아 그랬던 것으로 드러났다.
쌔애애-앵.
용무린은 대답도 없이 이미 사라져 버렸다.
황제는 쓸쓸하게 홀로 술잔을 기울이며 툴툴거렸다.
“나쁜 자식. 고가 말이야 저를 얼마나 총애하는데 술 먹다 말고 튀어 튀길?”
결국 황제는 앙칼진 목소리로 복수를 다짐했다.
“두고 봐라, 황룡패주. 내 기어이 약란이와 너를 엮어 주고야 만다. 어떻게든 부마도위로 만들어서 두고두고 괴롭혀 줄 거라고!”
***
도망치듯 자금성을 나선 용무린은 다시금 채시구의 주선각으로 돌아왔다.
용대명과 제갈문군에게 자금성에서 있었던 일을 털어 놓았다.
“축하한다, 아들.”
“오오, 이런 경사가!”
깜짝 놀라면서도 두 사람은 용무린이 만금상단의 주인이 된 것을 축하했다. 갈수록 일이 많아지는 것이 조금 우려되긴 하지만 그것은 분명히 축하할 일이었다.
“그래서 도움이 필요해요. 솔직히 제가 상단 일에 대해 아는 게 없잖아요.”
“……!”
“무엇이든 말만 하시게, 사위.”
용대명은 말이 없었고 제갈문군은 잔뜩 흥분한 목소리를 내었다.
용무린의 시선이 말이 없는 용대명에게로 향했다.
“아버지. 아직도 결심에는 변함이 없으신 거죠?”
“……그래. 네가 도움이 필요하다는 것을 잘 알겠지만 더는 짐이 되기 싫구나.”
“……!”
“겨우 일 년이란 시간으로 뭐가 얼마나 더 달라지겠느냐마는 그래도 폐관수련을 하고 나면 그렇듯 허무하게 당하지는 않을 것 같다.”
용무린의 고개가 크게 끄덕여졌다.
“알겠어요. 그럼 아버지께서는 식솔들을 거느리고 비룡문으로 돌아가셔서 원하던 것을 하세요. 저는 일단 이곳의 체계만 잡아 놓고 찾아뵙도록 할게요.”
“그래. 이해해줘서 고맙구나.”
“아니에요.”
용무린의 시선이 이번에는 제갈문군에게로 향했다.
“장인어른.”
“말씀하시게, 사위.”
지위가 지위인지라 제갈문군은 사위인 용무린을 깍듯하게 대했다.
“세가의 일도 바쁘시겠지만 처가의 식구들이 저를 조금 도와주셨으면 좋겠어요.”
“지금 주선각에 이끌고 온 아이들 말인가?”
“예. 그리고 이참에 령매도 만금상단 총단으로 불러올렸으면 합니다.”
“영령이를?”
“예, 장인어른.”
고개를 크게 끄덕여 보인 용무린이 말을 이었다.
“장인어른과 여러 직계들이 빠져 나갔음에도 홀로 제갈세가를 능수능란하게 운영해 온 령매라면 제가 만금상단을 새롭게 만드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그렇군.”
고개를 주억거리면서도 제갈문군은 선뜻 확답을 하지 않았다. 아무래도 아버지 입장인지라 혼사도 치르지 않은 두 사람을 이곳에 함께 있도록 하기는 조금 저어하는 마음이 들었던 것이었다.
용무린이 잽싸게 말을 덧붙였다.
“만금상단이 마교와 연계가 있음은 잘 아시겠지요? 든든한 자금줄을 통째 빼앗겼으니 놈들이 어떤 해코지를 할지 모릅니다.”
“그렇다면 이곳이 더 위험하지 않은가? 이곳이야말로 놈들의 터전 중 하나, 되찾기 위해 고수들을 파견하면 어떻게 하려고?”
“이곳 주변에 왕부호위지휘사사의 군사들을 배치할 생각입니다. 더불어 천호소 다섯 개쯤 더 깔아둘 것이고요. 오군도독부 전체를 상대할 생각이 아니라면 감히 이곳을 어찌해 볼 생각은 할 수 없을 것입니다.”
물론 반은 사실이고 반은 핑계였다.
용무린은 황제가 막무가내로 밀어 붙이는 주약란 옹주와의 혼사를 저지하기 위한 시위로 제갈영령을 아예 곁으로 불러올리려는 생각이었다.
‘우리 두 사람이 함께 있는 걸 본다면 더는 밀어붙이지 못하겠지?’
그러나 제갈문군은 그 유명한 제갈세가의 가주였다.
용무린의 주장에서 단숨에 허점을 찾아낼 수 있었다.
‘왕부호위지휘사사와 천호소의 재배치 이야기까지 나왔어. 군부의 재배치까지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것은 이미 어명을 받았다는 뜻, 만금상단 주변이 가능하다면 비룡문과 제갈세가에도 가능하다는 말이 될 테지.’
그런데도 불구하고 굳이 제갈영령을 만금상단으로 불러올리려는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함께 있고 싶은 것이로구나. 일이 계속해서 많아지니 혼사는 갈수록 늦어지고……. 더는 기다리기가 싫은 게야.’
피식.
“……그렇겠군.”
물끄러미 용무린의 눈을 들여다보던 제갈문군이 풀썩 웃어 보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에는 저어하는 마음이 들었지만 어차피 맺어질 인연, 혼사라는 형식은 없어도 용무린은 이미 자신의 사위였기 때문이다.
“알겠네. 그렇게 하시게나. 과년한 여식을 둔 아비의 한 사람으로서 기쁜 마음으로 환영하는 바이네.”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장인어른.”
대답을 하는 용무린의 얼굴이 살짝 발개졌다
그 역시 제갈문군의 말 속에서 그가 자신의 의도를 짐작해 냈음을 알아차린 것이었다.
그래서 잽싸게 화제를 다른 곳으로 돌렸다.
“오대세가의 도움 역시 필요합니다. 장인어른께서 이뤄내신 오대세가의 연합이 지금까지는 오성상단의 뒤를 봐주고 있었지만 앞으로는 만금상단의 일을 도맡아 해줘야만 제가 안심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좋은 일이지. 알겠네. 각 가문의 수뇌부들 역시 사위의 제안에 크게 기뻐할 걸세.”
오성상단이 아닌 만금상단과 함께 하는 일이다.
만금상단은 무림왕이자 황룡패주인 용무린이 군세로써 보호하는 곳, 함께할 오대세가의 발전 역시 급격한 수준으로 이뤄지리라.
“길을 언제 떠나시겠는가?”
“아버지의 몸도 많이 좋아지셨고, 아버지께서 차비만 갖추면 바로 출발할 생각입니다.”
“아비는 지금이라도 좋다. 떠날 준비가 되는 대로 출발하자꾸나.”
“예, 아버지.”
짐이라고 할 것도 많이 없어서 출발 준비는 빠른 속도로 이뤄졌다. 부상자들이 문제였는데 그 문제는 승선포정사와 제형안찰사에서 마차를 제공해줘 해결했다.
한 시진 후.
“보중하시고 꼭 대공을 이루시길 바랍니다, 사돈.”
“감사합니다. 사돈께서도 승승장구하셔서 삼공의 반열에 오르시길 바라마지 않습니다.”
진심 어린 덕담을 끝으로 용대명과 제갈문군이 손을 맞잡았다.
“그럼…….”
“안녕히…….”
한림원 수장으로서의 역할에 충실하기 위해 뒤에 남은 제갈문군의 환송을 받으며 용무린과 용대명 그리고 비룡문의 직계와 제갈세가의 직계가 길을 떠났다.
***
열흘 후 하북성도 앞 갈림길.
“본가까지 모시지 못해서 죄송해요, 아버지.”
“아니다. 너는 일이 바쁘질 않느냐? 너무 걱정하지 말거라. 용현천호소의 정병들이 함께하고 있으니 마교라 하더라도 감히 딴마음을 품지는 못할 것이다.”
용대명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뒤에서 목이 터져라 지르는 고함이 들려왔다.
“용현천호소 정천호 유진성. 황상의 어명의 받아 충성을 다할 뿐입니다.”
주약란을 용무린에게 시집보낼 작전의 일환으로 황제가 먼저 선수를 친 것이다.
주선각을 떠날 무렵 북경 주변의 천호소 중 가장 강력한 힘을 지니고 있다는 것으로 알려진 용현천호소의 천호장과 정병들이 달려와 부복했고 황명이라는 말로 눌러 붙었다. 함께 이동했다.
‘비룡문까지 호위를 한다고 했었지?’
호위라는 이름으로 천호소의 정병들이 따라붙긴 했지만 용무린은 황제의 의중을 누구보다도 더 잘 꿰뚫어 보았다.
‘이렇게까지 신경써주고 있으니 주약란 옹주 들이밀 때 알아서 기어라, 뭐 이거겠지?’
빤했다. 그것 말고 또 뭐가 있겠나?
‘걱정 끼쳐드리고 싶지는 않았는데…….’
별 수 없었다. 먼저 이실직고하는 수밖에는.
“아버지.”
용무린은 용대명의 귓가에 대고 나지막이 속삭였다.
“황제폐하가 말이죠. 선황제 폐하의 막내 소생인 주약란 옹주를 제게…….”
“……!”
말이 이어질수록 용대명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선황제의 막내딸이자 당금 황제의 여동생인 주약란 옹주와의 혼사라니!
‘그것도 황제가 막무가내로 밀어붙이려 한다고?’
참으로 난감하고 곤란한 일이었다.
혼사를 대놓고 거부하기도 어렵고 받아들인다고 하면 제갈문군을 볼 낯이 없어진다. 왜냐하면 황제의 체면 때문에라도 주약란 옹주가 정실이 되어야 하고 제갈영령은 후처로 내려앉기 때문이었다.
“하여간 제가 싫다고 하고 도망쳐 나왔거든요?”
“도, 도망을 쳤다고? 황제폐하와 술을 마시다가 도중에?”
“예. 별 거 아니니 그건 신경 쓰시지 않아도 돼요.”
“그게 어떻게 별 게 아닐 수가 있어?”
“저 황룡패주잖아요. 잊으셨어요? 어명이라 하더라도 대의에 어긋난 것이라면 저는 거부할 수 있다니까요?”
“그, 그게 대의에 어긋나나?”
“예. 최소한 저에게는 어긋나요.”
“허어.”
“하여간 제가 이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황제폐하가 이렇게 밀어붙이는 것으로 보아 어쩌면 주약란 옹주를 비룡문에 보낼지도 몰라서예요. 저는 건너 뛰어 아버지 어머니와 담판을 지으려고 말이죠.”
“맙소사…….”
용대명의 우려를 잘 알겠다는 듯 용무린은 단호하게 말을 이었다.
“어떤 상황이든 이렇게만 대답하세요. 나는 이제 뒤로 물러나 무공수련에만 전념하고 있으니 모든 일은 황룡패주인 용무린의 판단에 따를 수밖에 없다고요.”
“그래. 알겠다.”
용대명의 고개가 크게 끄덕여졌다.
황제가 정말 그 혼사를 밀어 붙이려 한다면 현재 상황에서 가장 현명한 대처는 용무린의 말처럼 모든 핑계를 황룡패주라는 이름에 미루는 것이기 때문이다.
“불굴의 의지! 그걸 잊으시면 안 돼요 아버지.”
“그래 알았다. 명심하마.”
용대명이 환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용대명은 길을 떠났다.
앞으로 보름 정도의 시간이 흘러야 비룡문의 본가에 도착할 수 있을 것이다.
‘아직 완전히 회복되지 못한 부상자들 때문에 어쩔 수 없겠지.’
같은 불사신기를 익히고 있다지만 직계의 몇몇을 제외하면 한참이나 순화된 것을 익혔다. 그로 인해 회복이 더디니 별 수 없는 일이다.
“아버지의 의지라면 일 년이면 충분할 거예요. 부디 대공을 이루세요, 아버지.”
내각대학사의 지위도, 만금상단이라는 황금에도 흔들리지 않고 폐관수련을 고집하는 용대명이라면 틀림없이 상청무상검법과 절대검신이 마지막으로 추가시킨 무량천심의 초식을 익혀낼 수 있을 것이다.
용무린은 그대로 발길을 돌렸다. 성도 중심의 만금상단 총단으로 향했다.
***
만금각이 무너진 자리는 이미 깔끔하게 정리가 되었다.
십층에 달하는 목조건물이 무너졌지만 이만 팔천 명이 움직여 청소를 시작하니 그야말로 게 눈 감춰지듯 사라져 깨끗해진 거다.
그 자리에 다시 거대한 건축물이 세워지기 시작했다.
이름 하여 황룡각.
황제의 후의로 황실의 건축을 담당하는 내관감 소속 목공들과 기술자들이 대거 공사에 투입되어 전보다 일 개 층이 더 높게 건설될 것이라고 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는 오남 일녀가 있었다.
만금상단과 더불어 중원 칠대 상단이라 불리는 금화, 남경, 대룡, 대륙, 천은, 신화 상단의 주인이거나 그 후계자들이었다.
금화상단의 주인 좌경의 입이 불쑥 열렸다.
“앞으로 어떻게 될 것 같소이까?”
곁에 있던 남경상단의 주인 신유평과 대룡상단의 주인 송철위가 신경질을 겨우 억누른 목소리로 번갈아가며 입을 열었다.
“만금상단을 황룡패주에게 내린다는 어명이 이미 방방곡곡에 뿌려지지 않았소?”
“오늘부터는 내관감에서 파견 나온 목공들이 만금각이 있던 자리에 황룡각이라는 이름의 전각을 다시 세우기 시작했소이다.”
“육대 상단의 주인들을 한자리에 불러 모은 후 내려진 어명과 행보이오. 그렇다면 빤하지 않겠소?”
“겁을 주겠지요. 잘 봐라. 수틀리면 너희도 공중분해 시켜버린 후 국고로 회수하든 아니면 누군가에게 훈공의 의미로 하사해버리든 하겠다, 그 정도 아니겠소?”
“……!”
“……!”
같은 생각이었던 모양인지 아무도 그 말에 토를 달지 못했다. 만금상단의 총관 구진기가 자신들에게 보내려 했던 전서가 너무 치명적이었던 것이다.
“공론을 정해야 하지 않겠소?”
누군가가 불쑥 입을 열었다.
살아남기 위해서 함께 행동을 하자는 뜻!
‘나쁠 것 없지.’
‘우리 모두가 함께 뜻을 모은다면 아무리 황룡패주라고 해도 함부로 우리를 어떻게 할 수는 없을 거야.’
“당연한 대응이라 생각해요.”
이 자리에 유일한 여인으로 참석한 신화상단의 소주인 유소담이 당돌하게 대답했다.
같은 생각인지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고 있던 상단의 주인들이 담담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일단 황룡패주를 만나보고 결정합시다.”
“하긴, 그도 그렇소.”
“어떤 사람인지도 모른 채 내린 결정은 실수가 될 가능성이 너무 크긴 하지.”
“맞소. 일단 그분과 면담을 해보고 난 후 우리끼리 다시 모입시다.”
그때였다.
동창의 중감 엄당이 소리도 없이 그들의 뒤에 나타났다. 얼음가루가 풀풀 날리는 듯한 목소리로 알렸다.
“황룡패주께서 납시었다. 지금 그분을 뵈러 갈 것이니 따르도록!”
성큼 발을 내디뎠던 엄당이 멈칫 하더니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으르렁댔다.
“내가 네놈들이 받을 전서를 가장 먼저 확인한 장본인이다. 그러니 제발 그분 앞에서도 방금 지껄이던 것처럼 뻗대길 바란다.”
용무린의 성질을 잘 알기에 하는 말이다.
황룡패주는 약자에 약하고 강하게 나가는 사람에게는 한없이 강한 사람, 저들이 시건방지게 나가면 나갈수록 탈탈 털릴 확률이 높다.
“……!”
누구도 입을 열지 못했다.
제발 뻗대서 망하기만을 바란다는 것은 자신들이 지금껏 우려했었던 것을 갈망한다는 뜻이기 때문이었다.
‘제길, 입조심해야 하겠구나.’
‘뭘 얼마나 요구할까?’
‘살아남기 위해서는 달라는 대로 줘버리자.’
‘언제고 갚을 날이 있겠지. 그날을 위해 오늘의 모든 치욕을 감수한다.’
나름대로 전의를 다지며 육대 상단의 주인과 후계자들은 용무린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엄당은 육대 상단의 주인과 후계자들을 내원의 한 곳으로 이끌었다. 자금성의 동서육궁의 한 곳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화려한 곳이었는데 육대 상단의 주인과 후계자들은 별 감흥이 없는 얼굴이었다.
“황룡패주시여, 육대 상단의 주인들과 그 후계자들이 입실했사옵니다.”
“그래? 들어오라고 해.”
“예, 패주.”
문이 열리고 육대 상단의 주인과 후계자들이 안으로 들었다.
정관호가 앉았던 것으로 짐작이 되는 거창하게 만들어진 태사의에 앉아 있던 용무린이 웃으며 반겼다.
“어서들 와요.”
육대 상단의 주인들과 후계자들이 황급히 허리를 굽혔다. 고개를 조아렸다.
“반갑습니다, 황룡패주시여. 금화상단을 이끄는 좌경이라고 합니다.”
“처음 뵙겠습니다, 황룡패주시여. 미력하지만 남경상단을 이끌고 있는…….”
차례차례 자신들을 소개했다.
“모두 반가워요. 내가 바로 황룡패주 용무린이에요. 그런데 천은상단과 신화상단은 후계자가 왔네? 상단주에게 무슨 일이라도 있는 모양이지? 내가 소. 환. 한 것은 분명히 상단주인데 말이야…….”
소환했다는 단어에 유달리 힘을 주는 용무린의 목소리에 천은상단 소주인 초류연과 신화상단 소주인 유소담이 화들짝 놀라 급히 대답했다.
“천은상단의 주인인 제 부친은 이미 몇 달 전부터 와병중이신지라 별 수 없이 소가주인 제가 대신해서 왔습니다. 송구하옵니다, 패주.”
“신화상단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패주시여. 제 아비 역시 너무 연로하셔서 전권을 받은 제가 대신하여 왔습니다. 부디 혜량해 주시길…….”
용무린의 눈에 이채가 돌았다.
천은상단이야 소가주를 보냈으니 이해가 되었지만 신화상단에서는 장손 대신 이제 겨우 스물 남짓 되는 여식이 전권을 받아 이런 자리에 나왔기 때문이었다.
‘상재가 출중한가 보네? 아니, 그 정도가 아니겠구나. 위로 주르륵 있을 게 빤한 오라비들을 모두 제치고 이 자리에 왔으니 독심과 귀계도 상당하겠네.’
오로지 상재만으로 이런 자리에 오를 수 있다고는 도저히 믿을 수 없다. 일단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것이 뒤통수 맞을 염려가 없는 거다.
그때 용무린 뒤에 시립하고 있던 엄당이 슬쩍 허리를 굽히더니 용무린의 귀에 입을 가져다 댔다. 손으로 가린 후 나직하게 무엇인가를 쏙닥거렸다.
“음? 음, 알았어.”
이야기를 듣는 와중에 용무린의 시선이 육대 상단의 주인들을 차례차례 훑었다. 마지막에 신화상단주의 전권을 받아 나온 유소담의 얼굴에 멈추었다.
‘제길. 아까 우리가 나눈 대화에 대한 것이로구나.’
‘황룡패주의 시선이 움직이는 순서가 아까 우리가 나눈 대화의 순서야.’
‘조심하자.’
상단주들이 바짝 긴장을 했다. 유소담은 사력을 다해 미소를 지으려 노력했다. 공동 대응이 당연한 일이라 주장한 것이 바로 자신이었기 때문이었다.
피식.
그런 일련의 행동이 같잖다는 듯 용무린은 입술만 슬쩍 움직여 웃었다. 차갑게 빛나는 눈은 흔들림도 빈틈도 없어 보였다.
“각설하고…….”
다시 몸을 세운 용무린을 향해 모두의 시선이 쏠렸다.
“처음에 내가 그대들을 부른 이유는 아주 단순했어. 애초에 나는 만금상단을 완전히 해체한 후 국고로 귀속해버릴 생각이었거든.”
“…….”
“…….”
듣는 사람에 따라 섬뜩하기 짝이 없는 말인지라 누구도 입을 열지 못했다. 계속해서 용무린의 입에 시선을 고정시켰다.
“만금상단을 해체하면 빈자리가 생길 테고 그 빈자리를 두고 그대들이 싸울 것은 빤한 일, 그 와중에 자칫하면 중소상단과 양민들의 피해가 무지 크겠더라고. 그래서 조정 차원의 중재를 할까 했었지.”
말끝에 용무린이 씨익 웃었다.
눈은 여전히 차갑게 고정되어 있었는데 입술만 슬쩍 움직여 웃으니 그게 너무나 무섭게 느껴졌다.
“한데 마음이 바뀌었어. 구진기 따위가 전서에 뭐라고 적었든지 간에 정상적인 생각을 지닌 인간이라면 그럴 리 없다고 생각했었는데, 대뜸 공론을 정하자는 말이 돌았다고 하더라고…….”
말과 동시에 용무린은 육대 상단의 주인과 후계자들의 눈을 차례차례 노려보았다.
그 서릿발 같은 기세라니!
오싹!
눈이 마주친 사람들의 등줄기를 타고 오돌토돌 소름이 쫙 돋았다. 머리끝이 쭈뼛 곤두섰다.
“패, 패주시여. 그, 그것은…….”
“어떻게 협조를 해야 하는가를 두고 공론을 정하자는 뜻이었습니다, 패주.”
“오해십니다.”
육대 상단의 주인들이 앞을 다투어 변명을 하기 시작했다.
물론 용무린에게 통하지 않았다.
“됐고, 내가 여기서 딱 정할게.”
“하명하소서, 패주시여.”
“말씀만 하소서.”
용무린의 목소리가 천천히 이어졌다.
“구진기가 전서에 이 나라 경제를 뒤흔들어서 상인의 힘을 보여 황상을 압박하자는 말을 할 정도라면 그 전에도 비슷한 일들에 서로 협조를 했다는 뜻이잖아?”
꿀꺽. 꾸울꺽.
모두가 마른침을 집어 삼켰다.
“그것은 내가 문제 삼지 않겠어. 황제폐하께서 뭐라고 하시든 내가 막아주겠단 말이야.”
“오오. 감사합니다, 황룡패주시여.”
“금화상단은 패주의 은혜를 결코 잊지 않겠습니다.”
계속해서 이어지려는 찬사를 용무린은 중간에서 싹둑 잘라 버렸다.
“내 말 아직 끝나지 않았어. 계속해서 들어.”
“……!”
“황제폐하께서 내게 만금상단을 내리며 하신 말씀이 뭔지 알아? 당신들과 같은 힘을 가진 자들이 이 나라를 흔들지 못하도록 경제의 기틀을 잡으라는 것이었어.”
용무린의 목소리가 점점 더 커다래졌다. 말투도 반 존대에서 하대로 바뀌었다.
“해서 명령한다. 앞으로 어떤 종류의 야합이나 담합도 용납하지 않겠다. 특히 양민들의 삶과 직결되는 곡식과 중요 생필품에 대한 것은 만금상단을 기준으로 가격을 결정해야만 한다.”
신화상단의 후계자 자격으로 참여한 유소담이 용기를 내어 물었다.
“만금상단을 기준으로 한 가격이라면 어느 정도의 수준을 말씀하시는 것인가요?”
용무린의 즉답이 이어졌다.
“간단해. 만금상단은 앞으로 곡식과 중요 생필품의 수매와 판매에 이르기까지의 비용을 산출한 후 국가에 낼 세금을 포함한 최소한의 이득만 남기고 판매를 할 거야. 물론 그 최소한의 이득이라는 것도 수해나 가뭄에 대비한 비축물량으로 넘겨서 상황 발생 시 무상으로 지급할 것이고.”
그야말로 날벼락과 같은 선언이다.
“그, 그것은…….”
“각 산지의 생산물량이 다르니 지역별로 손해와 이득이 교차해 들이는 수고에 비해 이득이 별로…….”
잠자코 이야기를 듣던 육대 상단의 주인들이 겁을 상실한 채 들고 일어났다.
“닥쳐!”
화아악.
폭풍처럼 일어난 불사신기가 6인을 휘감았다.
“허업!”
“흡!”
상상해보지 못한 거력에 모두가 헛숨을 집어 삼켰다.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상관없다는 듯 용무린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내가 분명히 명령이라고 말했다. 지금부터 그에 대해 한마디라도 하는 놈은 지금 이 자리에서 죽여 버린 후 소속 상단 역시 역모의 죄를 물어 완전해체해 국고로 귀속시켜 버릴 것이다. 알아듣겠나?”
“……!”
“……!”
잠잠해진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유소담은 여전히 당돌한 목소리로 물어왔다.
“저희에게 그렇듯 일방적인 손해를 감수하라고만 하시지는 않을 분으로 사료됩니다. 따로 생각하시는 것이 있으시겠지요?”
‘역시 보통내기가 아니야.’
이제 갓 스물 남짓 되어 보이는 여인이 담량은 함께 둘러앉은 누구보다도 더 컸다.
“물론이다.”
용무린의 눈이 처음으로 둥그렇게 변했다. 유소담을 직시하며 말을 이었다.
“곡식과 중요 생필품을 제외한 모든 품목에 대해 너희가 입은 손해만큼의 비용전가를 허용하겠다. 일제히 올리든 아니면 차근차근 올리든, 그것은 너희가 알아서 해라.”
한마디로 양민과 노비 등 나라의 근간을 이루는 절대다수를 보호할 테니 그 이상 되는 사람들 주머니를 더 털어내라는 뜻이었다.
‘나쁘지 않은데?’
‘어지간한 중인들만 되어도 그 정도는 충분히 감당할 수 있겠어.’
‘물품 하나만 올리는 것이 아니라 모든 품목이잖아. 표시나지 않게 조금씩만 올려도 가능하겠는데?’
‘길게 보면 되레 이득이 커.’
과연 상단의 주인들답게 머리가 빨리빨리 돌았다.
이해타산을 마친 후 천천히 고개를 숙여 보였다. 협조를 약속했다.
“황룡패주의 명을 따르겠습니다.”
“황룡패주의 명대로 이행될 것입니다.”
고분고분해진 상단의 주인들을 보며 용무린은 속으로 웃었다.
‘곡식과 중요 생필품을 제외한 모든 품목에 손해를 보전하라는 말에 좋아하는 이유 다 알아.’
대놓고 허락을 해주었으니 담합으로 천천히 물가를 끌어 올려 마음대로 조정을 할 생각이겠지.
‘이제야말로 너희들 세상이 올 것 같지? 푸흐흐. 마음대로 될 줄 알아? 이제 시작이야, 이 인간들아.’
처음부터 생각했던 대로 밀어붙이면 겉으로야 수긍해도 비밀리에 원과 내통을 하거나 딴 마음을 먹을 수도 있는 일이다.
그러니 찬물에 삶기는 개구리처럼 천천히 그리고 조금씩 진행할 생각이다.
“……!”
용무린의 생각을 읽은 것인지 신화상단의 대표로 불려온 유소담의 입이 살짝 벌어졌다.
‘사내들을 짓밟고 그 자리에 올라 선 너라면 눈치 챌 수도 있겠지. 그런데 그거 알아? 잠자코 따르지 않으면 너와 신화상단은 끝이야.’
황제가 자신을 믿고 절대로 흔들리지 않는 경제의 기틀을 다지라는 의미에서 내려준 것이 바로 만금상단이다.
‘그래서 나는 만금상단을 이 나라 경제를 통합하고 제어해 능동적으로 움직일 수 있는 조직으로 만들어 나갈 생각이란 말이지.’
그래야만 거대 상단들의 농간으로 인해 천정부지로 치솟은 곡식이나 생필품 가격에 양민들이 굶어죽거나 눈물 흘리는 일이 없게 된다.
‘곡식은 넘쳐나는데 너희들 농간으로 사람이 굶어 죽지는 말아야지. 안 그래?’
그것이 바로 용무린이 생각하는 최소한이다.
‘그걸 방해하면 상대가 누구든 싹 다 쓸어버린다. 명심해라, 유소담. 방해하면 죽는 거야.’
그런 의지를 고스란히 담아 용무린은 유소담의 눈을 쏘아 보았다.
흠칫! 부르르.
역시나 눈치가 빠른 유소담은 이번에도 용무린의 의지를 읽었다. 잽싸게 눈을 깔았다. 알 듯 말 듯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항복인 셈이다.
풀썩 웃으며 용무린이 시선을 거두었다.
***
다음 날.
육대 상단의 주인과 후계자들이 돌아간 후 용무린은 황룡패주의 이름을 내세워 오늘 합의된 내용을 천하에 널리 알렸다.
-만금상단을 포함한 중원 칠대 상단은 금일 이후 곡식과 중요 생필품에 대한 가격을 최저가로 확정, 계속 유지하기로 합의를 보았다.
이는 이 나라 경제가 흔들려 고통 받는 양민들이 없게 하라는 황상의 어지를 받들어 이루어진바 각 상단에 소속된 예하 상회들은 차질이 없도록 하라.
만금상단주 황룡패주 용무린
언제나 먹고 사는 것이 중요한 양민들이 희소식에 환호했다. 한 순간에 쌀값이 큰 폭으로 하락했기 때문이었다.
“황제폐하 만세만세 만만세!”
“황룡패주 용무린 만세!”
소식을 접한 양민들 모두가 뛰쳐나와 환호했다.
같은 값에 평소의 두 배나 되는 곡식을 살 수 있게 되었으니 배고프다고 보채는 아이들을 이제 더는 타박하지 않아도 되었기 때문이다.
평소 식사량을 아껴 모으면 보릿고개나 가뭄과 기근이 돌아와도 훨씬 더 오래 버텨 살아남을 수 있는 가능성이 커진다. 좋은 일이었다.
물론 중소상단의 입에서는 앓는 소리가 나왔다.
곡식의 매점매석을 주로 하는 상단이라면 큰 타격을 입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거야 내 알 바 아니지.’
용무린은 양민들의 먹거리와 중요 생필품을 가지고 장난을 치며 폭리를 취하는 곳이라면 이참에 사라져 버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귀찮기는 한데, 뭐 이런 경험도 나쁘지는 않네.’
낯이 조금 간지러웠지만 나로 인해 기뻐하는 양민들의 칭송이 나쁠 리 없다.
‘그래도 역시 내가 있을 곳은 아니야.’
최대한 빠른 시간 안에 기틀을 잡아 놓은 후 자신은 이곳을 훌훌 떠날 생각이었다.
‘령매의 능력이라면 내가 가진 뜻을 이어서 훌륭히 해내고도 남지.’
이익을 내는 것이야 신화상단의 유소담 그 어린 여인이 더 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황제와 자신의 뜻을 제대로 잇기 위해서는 이익만 염두에 두어서는 곤란했다.
‘그런 의미에서 사려가 깊은 령매가 제격이야.’
제갈영령. 그녀가 너무 보고 싶었다.
‘빨리 와. 령매.’
푸흐흐.
생각만으로도 웃음이 절로 나온다. 빤히 눈치 챘으면서도 함께하는 것을 허락해준 제갈문군이 떠올라서였다.
꾸울꺽.
‘이번에야말로…….’
수백 년 만의 갈증을 풀고 말리라!
그런데…….
“패주시여. 지금 정문에 주약란 옹주께서 당도해 있사옵니다.”
청천벽력 같은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동창의 중감 엄당이 나는 듯 달려와 급보를 전한 것이다.
“뭐, 뭣? 주약란 옹주?”
“그렇습니다, 패주.”
“선황제폐하의 막내딸이자 황제폐하의 막내 여동생인 그 주약란 옹주?”
“맞습니다.”
엄당이 재차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이런 우라질!’
그녀가 대체 여길 왜 와?
‘일면식도 없는데 대체 왜?’
이유야 빤했다.
두 사람을 혼인시킬 욕심에 황제가 막무가내로 주약란을 보냈으리라.
“어서 나아가 맞으셔야 합니다, 패주.”
“아오, 내가 미쳐.”
한숨이 절로 나왔지만 별 수 없는 일이다.
선황제의 막내딸이자 황제의 여동생의 왕림이니 나아가 맞을 수밖에 없다.
“알았다. 가자.”
“모시겠습니다.”
엄당이 종종걸음으로 앞장섰다. 한껏 얼굴을 구긴 용무린이 그 뒤를 따랐다.
잠시 후.
“떠헙!”
용무린의 입에서 경악성이 쏟아졌다.
만금상단의 정문 앞에 보기 드문 수준의 미모를 지닌 여인들이 네 명이나 뭉쳐 있었는데, 한 여인만 제외하면 모두 용무린이 알고 있는 여인들이었기 때문이었다.
제갈영령, 백리소옥, 양하린, 마지막으로 안면은 없지만 한 떨기 난초와 같이 고고한 인상의 여인이 바로 구천지화라 불리는 주약란이리라.
‘맙소사.’
용무린의 입이 쩍 벌어졌다.
‘저 여자들이 대체 왜 저기에 다 뭉쳐 있는 거야?’
제갈영령이야 자신이 불렀고 주약란이야 황제의 음모겠지만 나머지 두 여인은 어떻게 된 영문인지 정말 하나도 모르겠다.
그런데 분위기가 정말 죽여줬다.
모두 같은 사내를 마음에 품고 있었기 때문인지 서로를 향한 시선에 팽팽한 긴장감이 서려 있었던 거다.
한 가지 생각이 용무린의 머릿속을 번득 스쳐 지나갔다.
‘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