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다 필요 없어. 나는 오직 한 사람만 원해 (72/104)

3.다 필요 없어. 나는 오직 한 사람만 원해

생각과 동시에 불사신기가 일었다.

단전을 휘돌아 내린 후 용천혈을 통해 뿜어…….

“어? 패주다! 패주-우. 저예요. 하린이가 왔어요.”

휘청.

막 신법을 전개하려던 용무린이 헛발을 디뎠다. 양하린의 부름에 산통이 다 깨졌기 때문이었다.

‘젠장. 너무 가까이 접근했어. 조금 더 멀리에서 지켜보다 튀었어야 했는데.’

이젠 너무 늦었다. 기왕 이렇게 된 이상 인사도 하고 이 사태를 잘 풀어나가야 한다.

“와, 왔어?”

웃는 낯에 침 뱉지 못한다는 말을 양하린이 여실히 증명해 냈다.

양하린 특유의 밝음과 통통 튀는 듯한 목소리는 용무린으로 하여금 인상을 찌푸리지 못하게 만들었다. 이런 상황에도 반겨 대답하게 했다.

그런데…….

반짝. 반짝. 반짝.

나머지 세 여인의 시선이 심상치 않다.

무슨 천하의 난봉꾼 바라보듯 가늘게 뜬 눈으로 해명을 요구하고 있었다.

‘아, 답답해.’

내가 차라리 혈교 태상장로와 다시 싸우고 말지 싶다.

중감 엄당이 나서기도 전에 양하린이 다시 불쑥 앞으로 나섰다. 주약란의 곁에 바짝 붙더니 그녀의 손을 잡았다. 더할 나위 없이 밝은 목소리로 쫑알댔다.

“빨리 오세요. 주약란 옹주님이세요.”

“하린아. 황룡패주시다. 예의를 갖추어야지.”

주약란이 점잖게 양하린을 나무랐다.

하지만 목소리에 책망 대신 애정이 어려 있었다.

아무래도 양하린이 총병관의 손녀이다 보니 둘 사이에 많은 왕래가 있었던 모양이었다. 두 여인은 무척이나 친해 보였다.

그 앞으로 무거운 발을 내디디며 용무린은 완벽하게 둘로 나뉜 진영을 목격할 수 있었다.

‘하아, 관과 무림은 별개라는 고언을 여기에서도 재현하고 있었구나.’

주약란과 양하린이 한 편인 듯 보였고 제갈영령과 백리소옥이 다시 한 편인 듯했지만 그 와중에도 사이가 좋지 못해 보였다.

‘령매…….’

고립무원. 천지사방이 적으로 둘러싸인 듯 제갈영령은 무척 외롭고 힘들어 보였다.

‘백리소옥. 너는 대체 왜 온 거냐?’

백리소옥의 얼굴도 잔뜩 굳어 있었다.

제갈영령까지밖에 예상하지 못했던 듯 백리소옥은 양하린에 이어 주약란의 연이은 등장에 적잖이 마음이 무거워진 모양이었다.

‘령매, 미안. 일단 먼저 예의 좀 갖추고.’

정리는 그 후다.

용무린은 먼저 주약란 앞에 걸음을 멈추었다. 그런 후 정중한 태도로 두 손을 앞으로 모았다. 담담한 목소리로 인사말을 건넸다.

“주약란 옹주를 뵈오. 황룡패주 용무린이오.”

반짝.

주약란 옹주의 눈가에 묘한 빛이 스쳐 지났다. 씽긋 웃으며 입을 열었다.

“폐하께 듣기로 마음을 건네셨다 들었는데, 목이 많이 뻣뻣하시네요?”

목이 뻣뻣해?

‘너 잘 걸렸다.’

옹주고 나발이고 내가 그런 이름에 주눅이라도 들 줄 알았나 보지?

씨익.

용무린이 하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불쑥 차가운 목소리를 내뱉었다.

“내가 마음을 드린 분은 하늘 아래 오직 한 분 황제폐하시지 옹주가 아니오. 그리고 황룡패주는 황족이라 하더라도 증거만 확실하다면 즉참을 할 수 있는 권한이 있을 뿐 옹주에게 고개를 숙일 필요까지는 없소.”

“호오.”

반짝반짝.

주약란의 눈이 점점 더 밝은 빛을 뿜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용무린의 대답이 마음에 쏙 든 모양이었다.

‘젠장. 사내의 냉정한 말에 흥분하는 취미 따위 내가 알게 뭐야?’

주약란의 이성 취향 따위 알 바 아니라는 듯 용무린은 내처 냉정한 말을 쏟아냈다.

“어찌 오셨는지는 아직 모르겠으나 내가 고개를 숙이거나 허리를 숙이길 바라셨다면 이대로 돌아가시는 게 좋을 게요. 나는 그럴 생각 따위 추호도 없으니 말이오.”

그 말 직후 용무린의 시선은 제갈영령에게로 향했다.

얼음장과도 같던 지금까지의 얼굴과 목소리와는 완전히 반대로 뒤바뀌었다.

“왔어?”

녹아내릴 듯 둥그렇게 휜 눈과 부드럽게 지어진 미소와 달콤한 목소리.

울컥.

제갈영령이 심장이 한차례 크게 뛰었다.

‘옹주의 위세와 미모 앞에서도 내게만 미소를 지어 보여 주고 계셔. 나를 사랑하는 저분의 마음은 그 어떠한 일이 있다 하더라도 흔들리지 않을 거라고.’

달콤했다. 그리고 안심이 되었다.

더불어 승리자가 된 기분이 들었다. 용무린의 마음을 갈구하는 나머지 세 여인의 질시 어린 시선 따위 더는 신경 쓰이지도 않았다.

“네, 가가.”

“들어가자. 령매와 더불어 상의하고 싶은 것들이 많아.”

“호호호. 그래요?”

용무린과 제갈영령은 자신들에게 쏟아지는 시선은 아랑곳없이 두 사람만의 세상을 향해 움직였다. 내원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글썽.

백리소옥의 눈가에 뜨거운 눈물이 고여 들었다.

냉대를 받을 줄은 알고 있었지만 이렇듯 눈길조차 받지 못할 줄은 미처 몰랐던 것이다.

콱.

입술을 깨물었다. 무너지려는 의지에 힘을 더했다.

‘그렇다고 내가 이대로 포기할 줄 알고?’

분명히 맹세했었다.

설사 이대로 죽는다 하여도 후회 따위 결코 남기지 않을 만큼 노력을 할 것이라고.

‘노력이란 마지막 순간까지 하는 거야. 그렇지 않는다면 진정으로 노력을 했다고 할 수 없어. 마지막에 가서 웃는 사람이 진짜 이기는 거라고.’

백리소옥은 성큼 용무린의 뒤를 따랐다.

촉촉이 젖은 눈을 애써 감추며 일부러 밝음을 가장해 목소리를 내었다.

“정말 너무하시네요. 그래도 아는 체쯤은 해줄 수 있지 않나요?”

“불청객이잖아. 누가 오라고 했다고 그러는…….”

주약란에게도 마음껏 냉정한 말을 내뱉던 용무린이었지만 차마 백리소옥에게까지는 그렇게 하지 못했다. 금방이라도 눈물을 쏟아낼 만큼 붉게 물든 두 눈과 그렁그렁 고인 눈물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가가.”

제갈영령이 가만히 용무린을 불렀다. 너무 심하게는 하지 말라는 듯 가만히 고개를 흔들어 보였다.

전생의 인연까지 포함해 이미 용무린과 백리소옥 사이에 있었던 일들을 모두 알고 있는 제갈영령으로서는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어서까지 용무린에게 배척을 받는 그녀가 애처롭게 느껴진 것이다.

“아오, 그래. 알았어.”

용무린의 목소리가 금세 수그러들었다.

“들어와라. 함께 밥이나 먹자.”

“네!”

백리소옥이 잽싸게 제갈영령 옆으로 붙었다. 나직한 목소리를 건넸다.

“고마워요, 언니.”

“…….”

제갈영령은 대답하지 않았다. 용무린을 말린 것이 백리소옥을 허락한다는 뜻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반짝반짝.

용무린을 바라보는 주약란의 눈이 점점 더 맑은 빛을 뿜어냈다.

‘사내 중의 사내로구나.’

황제를 비롯해 왕가의 사내들이 언제나 정실에 이어 후처를 여럿 두는 것을 보며 자라왔기 때문인지 제갈영령이나 백리소옥 그리고 양하린의 존재가 그리 꺼려지지 않았던 것이다.

‘영웅에게 여인이 꼬임은 당연한 것. 황가의 여인으로서 투기는 가장 큰 죄이지.’

사랑을 받기 위해 해야 할 일은 오직 한 가지 노력뿐이라는 것을 누구보다도 더 잘 안다. 투기나 시기 또는 질시는 사내의 마음을 떠나게 하는 첩경임을 이미 경험으로 아는 것이다.

“패주!”

그래서 성큼성큼 사라지는 용무린의 뒤에 대고 큰 소리로 외쳤다.

“합격이에요.”

저건 또 뭔 소리래?

용무린의 귀가 쫑긋 섰다. 주약란의 목소리가 계속해서 이어졌다.

“지금껏 권력에 몸을 낮추고 조아리는 사람만 보아왔어요. 미소 뒤에 감춰진 추악한 욕망과 야망을 저는 너무나 잘 알아요.”

용무린의 대답을 딱히 기다리지도 않았다.

양하린의 손을 잡은 채 그대로 발걸음을 내디뎠다. 용무린이 향한 곳을 따라 걸었다.

‘젠장. 그 미소의 의미가 그런 것이었어?’

냉정했던 자신의 태도가 되레 주약란의 마음에 쏙 들게 했다는 사실에 용무린은 입맛이 썼다.

‘진즉 알았으면 좋았을 것을.’

물론 알았다고 해도 주약란을 대하는 태도가 뭐 딱히 달라질 것 같지는 않았다. 황제를 인정하고 그 앞에 무릎을 꿇은 것과 주약란을 받아들이는 문제는 전혀 별개의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때 주약란도 용무린과 비슷한 생각을 했다.

‘냉랭하지만, 그래도 괜찮아. 이제 시작이잖아.’

용무린의 마음 따위 알 바 아니라는 듯 주약란이 목소리를 높였다.

“폐하의 강권으로 오게 되었지만 지금은 잘 왔다고 생각해요. 나, 황룡패주를 더 알고 싶어졌어요.”

지금껏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얻을 수 있었던 고귀한 황녀다운 행동과 생각이었다. 물론 용무린은 내심 콧방귀만 뀌었다.

‘아오, 몰라. 맘대로 해. 그런다고 해봐야 내가 네게 마음을 빼앗길 것 같지도 않으니까 말이야.’

우윳빛 피부에 그린 듯 유려한 눈썹과 크고 맑은 눈.

입술은 도톰한데다 붉어 도발적이었으며 유달리 커다란 가슴에서 허리로 이어지는 선이 무척이나 아름다웠고 쭉 뻗은 다리 역시 시원해 보였지만 그런 정도는 자신 곁의 제갈영령만으로도 충분했다.

‘제길, 그 사이 자세히도 봤다.’

용무린은 사내로서의 본능에 충실한 자신을 자각하곤 제갈영령에게 미안해졌다.

‘그래도 내 맘 잘 알지?’

하는 시선을 담아 제갈영령을 슬쩍 바라보았다.

불안함 따위 하나도 없는 제갈영령이 용무린을 향해 활짝 웃어 보였다.

***

불편한 시간은 밤이 되어서도 계속되었다.

식사를 할 때도 네 여인이 계속해서 용무린과 함께했던 것이다.

“……호호호. 폐하께서 그랬지 뭐예요.”

“우와, 황제폐하께서 그런 장난기 가득한 면모가 있으시다는 말이에요?”

“……!”

“……!”

주약란이 주로 대화를 주도했고 양하린이 맞장구를 쳤으며, 제갈영령과 백리소옥은 잠자코 들으며 가만히 미소만 지어보이곤 했다.

‘아, 불편해라.’

밥이 입으로 들어가는 것인지 코로 들어가는 것인지도 모를 지경이다.

“가가!”

“응? 아! 고마워.”

제갈영령이 가만히 충초압설 한 젓가락을 용무린의 밥그릇에 올려 주었을 때에야 비로소 자신이 맨 밥만 우걱우걱 입에 처넣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릴 정도였다.

“여기 이것도요.”

지기 싫은 것인지 양하린이 대뜸 오향장육 하나를 집어 용무린의 밥 위에 올려놓았다.

“아하, 소소하지만 이런 방법으로도 여인의 마음을 표현할 수가 있는 것이로구나.”

여인들의 연이은 행동에 크게 깨달았다는 듯 감명 깊은 얼굴로 고개를 주억거리던 주약란이 배운 대로 즉시 행동을 개시했다.

“이것 좀 드셔보세요, 패주. 제가 먹어 보니 이곳 숙수의 솜씨 역시 자금성의 상선감 못지않네요.”

그러면서 화궁전구육 한 젓가락을 듬뿍 집어 용무린의 밥 위에 올리는 것이 아닌가?

“……!”

용무린의 입이 쩍 벌어졌다.

주약란의 뒤를 이어 백리소옥이 사천의 이름 높은 요리인 방선궁정채를 듬뿍 퍼 용무린의 밥 위에 경쟁적으로 쌓았기 때문이었다.

하나의 탑처럼 우뚝 솟은 반찬이라니!

“하아.”

용무린의 입에서 한숨이 절로 나왔다.

슬쩍 옆을 보니 제갈영령이 ‘내가 올려 준 반찬은 내리면 절대 안 돼요. 알고 있지요?’ 하는 시선으로 웃고 있었던 것이다.

‘어쩌지?’

별 수 없었다.

“크아앙.”

찢어져라 입을 크게 벌린 용무린은 그 모든 것을 한꺼번에 입에 밀어 넣어 버렸다.

***

소화도 안 될 것만 같은 한 끼 식사시간이 지난 후 이번에는 향기로운 차를 사이에 두고 모두가 원탁에 빙 둘러앉았다.

식사 때와 같은 일이 벌어질 것을 미연에 방지할 생각에서 용무린이 대화를 주도했다. 원하던 제갈영령이 도착했으니 겸사겸사 자신의 생각을 밝혔던 것이다.

“……해서 나는 만금상단을 그런 방향으로 이끌어 가려고 생각하고 있어. 양민들에게 최소한의 삶을 보장해 주며 상단의 이익 역시 미래의 수해나 가뭄에 대비해 비축하는 쪽으로 말이야.”

“가가의 뜻이 그렇듯 크거늘 제가 어찌 반론을 제기할 수 있겠어요. 염려하지 마세요. 가가의 큰 뜻에 어긋나지 않도록 제가 힘껏 도울게요.”

제갈영령이 지혜로운 눈을 반짝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잠자코 듣고 있던 주약란이 지기 싫다는 듯 불쑥 입을 열었다.

“양민을 위한 일이 곧 황상을 위한 일이지요. 만금상단에서 취한 조치로 이미 많은 양민들이 황제폐하의 성덕을 찬양한다고 들었습니다. 저 역시 모든 힘을 다해 돕도록 하겠어요, 패주.”

다시 한 번 느끼는 것이지만, 당당한 주약란의 목소리에는 자신이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가질 수 있었던 사람의 자신감이 가득 묻어났다.

‘확실히 해둘 필요가 있군.’

황제의 의중을 모르는 바는 아니나 이건 아니다, 싶다.

그래서 용무린은 싸늘한 목소리로 선을 그었다.

“말씀처럼 양민을 위한 것이니 나를 돕는 것은 곧 황상을 돕는 일, 그러니 돕겠다는 마음을 막지는 않겠소. 하지만 그뿐이오. 나는 이미 마음을 준 여인이 있소. 내게 더 많은 것을 바라지 마시오.”

어찌나 차가운 목소리인지 잠자코 듣고 있던 백리소옥과 양하린마저 찔끔할 정도였다.

하지만 황가의 여인인 주약란은 참으로 달랐다.

이미 황제를 비롯한 황가의 사내들에게 많은 수의 처첩이 함께 하는 것을 보며 자라왔기 때문인지 아무렇지도 않게 그 말을 받았다.

“영웅의 마음은 넓고 넓지요. 한 여인만으로는 다 채울 수 없음이에요. 황룡패주에 무림왕이시니 능히 삼처사첩이 가해요. 저는 괘념치 않아요. 여인의 투기란 사내를 망치는 법, 저는 그저 기다릴 뿐이에요.”

할 말을 다 했다는 듯 주약란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토록 너를 원하니 오늘 밤은 네가 모시렴.’

대인배와 같은 미소를 제갈영령을 향해 지어 보인 후 스스럼없이 자리를 떴다. 자신에게 배정된 숙소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저, 저는 이만 세가의 직계들과 만금상단의 운영에 대해 이야기를 나눠야 할 것 같아요.”

함께하고픈 마음이야 굴뚝같았지만 이곳 만금상단의 총단에 제갈세가의 직계 수십여 명이 함께 있음을 잘 알고 있던 제갈영령이었다.

“응? 으응. 그래. 그래야지 뭐…….”

아쉬움에 목소리가 갈라져 나왔지만 용무린도 허락을 해줄 수밖에 없었다.

“저도 조금 피곤하네요. 이만 들어가 쉬겠어요.”

백리소옥도 그렇게 자리를 떴고,

“저는 오랜만에 약란 옹주님과 이야기나 더 하다 함께 자야겠네요. 편히 쉬세요, 패주.”

양하린도 발딱 일어나 주약란의 거처로 자리를 옮겼다.

홀로 남은 용무린은 우두커니 앉아 한참을 멍하니 식어가는 찻잔만 바라보고 있었다. 네 명의 여인들 때문에 오늘 하루 소모한 정신력이 만만치 않았던 거다.

“제길 결국은 또 혼자네.”

그렇게 문득 정신이 들었을 때였다.

사락. 사라락.

어디선가 한없이 부드럽고 야릇한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뭐지?”

용무린의 귀가 쫑긋 섰다.

부드럽고 야릇한 소리와 함께 두 여인의 목소리가 귓속을 파고들었던 것이다. 벽에 막혀 먼 곳에서 외치는 소리처럼 가늘고 탁하게 들렸지만 분명하게 알 수 있었다.

“와아, 옹주님. 너무 아름다워요.”

“호호홋. 너도 그렇구나 하린아.”

주약란과 양하린이었다.

함께 잔다고 하더니 잠옷으로 갈아입는 모양이었다.

‘그런데 그 소리가 왜 갑자기 들려?’

꿀꺽.

자신도 모르게 마른 침을 집어 삼킨 용무린이 소리가 들리는 방향으로 한 발 성큼 다가갔을 때였다.

딸칵.

용무린의 발끝에 눌린 정체 모를 기관이 작동을 했다.

책장으로만 보였던 한쪽 벽이 소리도 없이 빙글 돌아 열려 버렸다.

“떠헙!”

용무린의 눈이 부릅떠졌다.

잠옷으로 갈아입느라 탈의를 하고 있던 주약란과 양하린의 눈과 마주쳤기 때문이었다.

껌뻑. 껌뻑.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인지 몰라 주약란과 양하린이 큰 눈을 깜박였다.

휘릭.

용무린은 바람처럼 뒤돌아섰다.

그 서슬에 자신들이 지금 속옷까지 갈아입기 위해 홀라당 벗고 있음을 깨달은 양하린의 입이 크게 벌어졌다. 비명이 쏟아졌다.

“꺄아…… 흡!”

다행히 비명소리가 길게 이어지지는 않았다.

주약란이 잽싸게 양하린의 입을 한 손으로 틀어막았기 때문이었다.

“쉿. 조용히 하렴, 하린아. 네가 이러면 나와 함께 온 어림친위군이 몰려올 테고 그렇게 되면 패주의 체면은 물론이고 우리의 체면까지 크게 손상된단다.”

끄덕끄덕.

고개를 끄덕이는 양하린.

주약란은 양하린의 입을 막은 손을 뗀 후 아무렇지도 않은 듯 옷을 마저 갈아입었다. 두 볼에 이어 목덜미까지 발개진 양하린도 동참했다.

사락. 사라락.

그 소리가 어찌나 자극적이던지!

‘아오, 내가 미쳐!’

뒤돌아 선 용무린은 옴짝달싹도 하지 못한 채 그 소리를 고스란히 듣고 있었다.

향기는 또 어떤가?

후욱.

사향 따위 저급한 것이 아닌 특별한 것을 사용하는 모양인지 옷을 갈아입는 내내 두 여인 쪽에서 그윽하고도 진한 기분 좋은 향기가 끊임없이 밀려왔다.

‘령매-에.’

제갈영령을 아무리 찾아도 소용이 없었다.

무림 전체를 통틀어 세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무위를 지닌 용무린의 눈은 그 짧은 사이 주약란과 양하린의 적나라한 모습을 완전히 다 보았던 것이다.

‘나 좀 살려줘-어.’

눈을 감고 있어도 두 여인의 아름다움이 두 눈에 가득했다. 각인이라도 되듯 오롯이 떠올랐다. 주약란의 왼쪽 가슴 위와 양하린의 오른쪽 허벅지 안쪽에 점이 있다는 것까지 모두 기억났다.

“다 됐어요, 패주. 이제 돌아서셔도 되어요.”

그 사이 옷을 다 갈아입은 주약란이 나직한 목소리로 용무린을 불렀다.

“아, 아니오.”

돌아보기가 겁이 난 용무린은 성큼 앞으로 걸어 나가서는 자신이 밟은 자리를 자꾸만 콱콱 밟았다.

‘이 빌어먹을 놈의 책장은 대체 어떻게 해야 원상회복이 되는 거야?’

와작. 뿌득.

책장을 다시 닫는 게 아니라 용무린은 애꿎은 기관을 아예 때려 부수고 있었다.

“제갈영령의 침소에 드실 줄 알았는데……. 그 사이 생각이 바뀌신 모양이지요?”

“어마?! 옹주님!”

대담하기 짝이 없는 주약란의 말에 양하린이 화들짝 놀라 얼굴을 붉혔다. 하지만 밖으로 도망칠 생각은 전혀 없는지 그대로 버티고 있었다.

‘확실히 황가의 여인이로구나.’

용무린은 그제야 주약란의 남다른 마음가짐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황제를 비롯해 황가의 사내들이 얼마나 많은 여인들을 취해왔고 또 그런 상황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있는지를 이해한 것이다.

‘그 또한 비련 아닌가?’

투기도 할 수 없다.

황가 여인의 특성상 자신이 사랑하는 사내가 다른 여인을 마음껏 품으며 돌아다니는 것을 알면서도 그저 지켜보아야만 한다.

권력과 부귀영화가 있다지만 어찌 슬프지 않겠는가?

“그래, 그런 상황이 좋으시었소?”

“……무슨 말씀이신지?”

고개를 갸웃하는 주약란의 말에 용무린은 완전히 냉정을 되찾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굳이 황제 폐하를 예로 들지 않겠소. 하지만 역사만 보아도 제후쯤 되는 사내들은 황후, 황귀비, 귀비, 비, 빈 등 많은 여인을 거느리지 않소?”

“…….”

그제야 용무린이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인지 깨달은 듯 주약란은 말을 잇지 못했다.

“차를 마실 때 옹주께서 그러질 않았소? 여인의 투기란 사내를 망치는 법이니 기다릴 것이라고 말이오.”

“그랬지요.”

“그런 기다림이 과연 행복하겠소?”

“…….”

주약란은 다시 대답을 할 수 없었다.

어려서부터 보고 자라온 것이 있는 터라 이해는 하고 있었지만 역시 가슴 깊은 곳에서는 받아들일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황가의 여인이고 뭐고 사람 마음은 다 똑같은 법이다.

용무린의 목소리가 다시 이어졌다.

“그런 상황은 나 역시 원치 않소. 열 여인 마다하는 사내는 없다 하나 나는 다르오. 나는 다 필요 없소. 오직 한 여인만을 원할 뿐이오.”

주약란의 심장이 아려왔다. 용무린의 말이 심장을 찌르듯 해서였다.

“미안하오. 알겠지만, 내 본의는 아니었소. 그저 한 발 내디뎠을 뿐인데 나도 모르고 있던 이 망할 놈의 기관이 갑자기 작동되는 바람에…….”

그때였다.

잠자코 용무린과 주약란의 대화를 듣고 있던 양하린이 용무린의 말을 잘랐다. 불쑥 입을 열었다.

“됐고요…….”

“응?”

“다 봤죠?”

움찔!

용무린의 동공이 흔들렸다.

“뭐, 뭘…….”

부인하려 했지만 소용없었다. 용무린의 눈동자가 흔들리는 것을 양하린과 주약란이 모두 확인했다.

“흥!”

콧방귀를 한 번 오지게 뀐 양하린이 어금니를 콱 깨물며 선언했다.

“책임져요.”

“……!”

용무린의 입이 쩍 벌어졌다. 양하린이 매섭게 용무린을 몰아붙였다.

“하늘 아래 오직 한 사내에게만 보여야 하는데 당신이 다 보았잖아요. 그러니 책임져요. 알았어요?”

젠장. 지금껏 주약란에게 했던 말을 어디로 들은 것이란 말인가?

‘거 말귀 더럽게 못 알아듣네.’

“하린! 내가 방금 전에 한 말 뜻 모르겠…….”

이번에도 용무린의 말을 양하린이 중간에 툭 잘랐다.

“저는 이제 다른 사내에게는 죽어도 시집 못 가요. 당신에게 모든 것을 다 보였는데 양심상 어떻게 그럴 수 있겠어요? 죽으면 죽었지 그렇게는 못해요. 그러니 당신이 책임져요. 알겠어요?”

“……아오, 내가 정말!”

궁지에 몰린 용무린은 애꿎은 기관에게 화풀이만 했다.

“이 망할 놈의 기관은 대체 어떻게 해야 열리고 닫히는 거야? 에잇!”

와작. 투둑. 우드득.

이것저것 만지는 사이 기관은 자꾸만 망가졌다. 지정된 책을 잡아 당겨야 회복이 되는데 힘으로 책장을 통째 잡아당기니 부서질 수밖에.

“에잇, 나도 몰라! 맘대로 해!”

배 째라는 듯 크게 외친 후 용무린은 쿵쾅 쿵쾅 발소리를 내며 밖으로 사라져 버렸다.

“흥! 다른 어떤 사내도 눈에 들어오지 않는 걸 나보고 어쩌라고! 투기? 질투? 비련? 누가 그런 걸 몰라서 이러는 것 같아? 다른 여인에게 사랑을 나눠주는 것을 감수하면서라도 함께 있고 싶으니까 그러는 것 아니야?!”

귀를 씻고 잘 들으라는 듯 양하린은 용무린의 뒤통수에 대고 큰 소리로 쫑알댔다.

“후훗. 네가 나보다 더 황가의 여인 같구나 하린아.”

주약란이 조금은 밝아진 얼굴로 양하린을 바라보았다.

“헤헷. 조부님과 아버지께서 기회가 오면 절대 놓치지 말라 하셔서…….”

양하린이 쑥스러운 듯 그제야 얼굴을 다시 붉혔다.

그때 고백이라도 하는 것처럼 주약란이 한 가지 비밀을 입에 담았다.

“혹시나 하고 내가 엄 중감에게 언질을 주었단다.”

“엄 중감에게요?”

“그래. 정관호 같은 작자가 황룡패주와 같은 정명함을 지니고 있을 리 만무한 법. 혹시나 이곳에 그 작자가 여인들과 밀회를 즐기는 곳이 있는가 하고 물어 이 기관의 존재를 미리 알아 준비를 시켰지.”

“아하! 그래서 엄 중감이 옹주님의 처소를 패주의 집무실과 맞닿은 이곳에 배치를 한 것이로군요!”

정말 놀랐다는 듯 양하린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런 양하린을 향해 주약란이 한 쪽 눈을 찡긋해 보이며 웃었다.

“나 역시 황제폐하께서 누누이 당부를 하셨거든. 나라의 안녕을 위해 어떻게 하든 기회를 보아 패주를 부마도위로 만들어 버리라고 말이야.”

오직 한 사람 황제의 총애를 차지하기 위해 온갖 암투와 귀계가 벌어지는 자금성의 동서육궁에서 나고 자란 주약란에게 이 정도쯤 일도 아니었다.

“최고예요, 옹주마마.”

양하린이 엄지를 치켜세워보였다.

주약란의 얼굴에 보기 좋은 홍조가 돌았다.

‘그런데 내 선택이 옳았구나.’

솔직히 지금까지는 반반이었다.

황가의 여인 특성상 혼사는 언제나 정략결혼인 법, 주약란은 황제의 의지를 거스르지 못했다. 반 강제로 이곳으로 와야만 했다.

물론 황궁무고의 일을 통해 듣게 된 용무린의 무용담과 그 뒤 계속해서 무림을 종횡하는 용무린의 이야기를 들으며 호기심도 생겼고 궁금증도 많긴 했지만 오롯이 애정만으로 온 것은 아니었다.

‘그런 사내라면 내 지아비가 되기에 충분하겠다고 막연하게 생각만 하고 온 길이었지.’

다분히 정략적이고 계산적인 판단에 이렇듯 대담한 일을 행했지만 이제는 모든 게 달라졌다.

권력이나 명예, 재물에의 욕망 따윈 없이 오직 한 여인에게만 향하는 그의 마음에 되레 지금까지의 계산적이고 정략적인 마음이 사라진 것이다.

‘노력해 보겠어. 그의 마음에 내가 들어갈 때까지…….’

백리소옥에 이어 주약란마저 가열 찬 노력을 결심하는 순간이었다.

***

당황스러운 밤이 지난 후 이레가 흘렀다.

그 사이 용무린은 도통 제갈영령과 함께할 시간을 내질 못했다. 제갈영령이 용무린의 뜻을 너무나 열성적으로 따랐기 때문이었다.

제갈영령은 제갈세가의 직계들과 함께 만금상단의 모든 것을 파악하기 위해 연일 늦은 밤까지 서류뭉치를 들고 집중했다.

“……그때그때 물동량에 따라 이런 방법으로 가격을 책정하면 가가의 뜻대로 곡식과 중요 생필품에 대해서만큼은 양민들의 부담을 많이 덜게 되어요.”

“양민들 부담이 어느 정도나 덜어지지?”

“사 할 정도요?”

“그래 알았어. 그러면 그렇게 하자고.”

“알겠어요. 다음 안건으로는 다른 상단들과 경쟁하는 사치성 소비 물품들에게 대해서인데요…….”

이렇듯 제갈영령과 함께하는 시간이라고는 다른 직계들과 함께한 자리에서 이뤄지는 회의가 전부였다.

‘아, 트릿해라.’

그것이 잘 하는 일임을 알면서도 용무린은 채워지지 않는 욕구불만에 모든 게 짜증스러웠다.

물론 제갈영령 역시 그 사실을 알고 있기는 했다.

하지만 직계 식솔들과 함께하고 있는데다 주약란과 양하린 그리고 백리소옥까지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지켜보고 있기에 일부러 더 피했다.

‘소나기는 피해야 하는 거야.’

용무린의 마음만 변함이 없다면 어차피 시간문제일 뿐 그와 자신은 하나가 된다. 그러니 이렇듯 마음에 여유가 있고 보다 더 열심히 용무린의 뜻을 이뤄주기 위해 노력을 하는 것이다.

‘황제폐하가 보내셔서 온 분이 바로 주약란 옹주야. 마음이 조급해 공연히 비위를 건드려 일을 복잡하게 만들 필요가 없지.’

변치 않는 용무린의 마음을 확인했으니 이제는 조바심 따위도 가질 필요가 없다.

물론 용무린과 주약란, 양하린 사이에 어떤 묘한 일이 있었는지도 이미 알고 있었다. 어떤 생각에선지 은근슬쩍 속을 내비친 두 여인의 입을 통해 들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용무린은 흔들림 없이 ‘오직 한 여인만 원할 뿐이오.’ 라고 외쳤다고 한다. 그러니 뭐가 걱정이겠는가? 그저 마음이 든든하기만 했다.

그 뒤로도 주약란과 양하린이 계속해서 용무린을 유혹하려 애썼지만 용무린은 아예 그녀들에게 곁을 내어 줄 기회조차 주지 않았다.

술상을 보아 놓고 청해도 가지 않았고 차를 마시자고 해도 콧방귀도 안 뀌었다.

‘그러니 내가 걱정할 것이 무엇이겠어?’

그저 용무린의 뜻을 받들어 만금상단을 양민들의 삶에 보탬이 되는 쪽으로 경영하면 될 뿐이다.

“오늘도 밤늦게까지 서류와 씨름할 거야?”

“예, 가가. 만금상단과 만금전장의 자산을 하나씩 확인해서 정리할 것과 힘을 쏟아야 할 것을 분류하자면 아직도 시간이 더 필요해서 어쩔 수 없어요.”

“후우, 령매가 나 때문에 고생이 많구나. 미안해.”

“무슨 그런 소리를 해요? 내가 좋아서 하는 일이에요. 그러니 가가께서는 제시한 방향이 흔들리지 않도록 중심만 잘 잡아주세요.”

저렇게 말하는데 더 뭐라고 하겠나?

용무린은 그저 쓰게 웃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 알았어.”

오늘도 역시 쓸쓸하게 불사신기 수련이나 하며 밤을 지새워야겠다는 생각으로 힘없이 뒤돌아섰다.

***

홍화장 깊은 곳의 대전.

태사의에 앉아 먹지도 자지도 않은 채 혈신령을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일에 전념하고 있던 혈교주 혈마 나령의 몸이 갑자기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한계를 넘어서까지 계속해서 받아들이던 혈신령의 기운을 결국 견디다 못해 위험한 상황까지 치달았던 것이다.

트드드드.

진동은 대전을 넘어 홍화장을 통째 뒤흔들었다. 아니, 홍화장이 자리한 천양현 전체가 그 영향을 받았다. 몸살을 앓듯 가늘게 떨렸다.

콰드드드. 트드드드.

격렬한 진동이 정점을 향해 나아갔다.

이제 혈마 나령이 죽든지 아니면 대공을 이루든지 곧 결판이 날 것이다.

그렇게 얼마나 더 지났을까?

화아악. 버번쩌저적.

놀라운 현상이 일어났다.

혈마 나령의 몸을 곧이라도 터뜨릴듯하던 피처럼 붉은 색의 기운이 안정을 찾았다. 혈마 나령이 결국 혈교의 숙원을 이뤄낸 거다.

쭈와아아악!

지금까지 채 흡수하지 못하고 외부로 쏟아져 나왔던 기운들까지 무저갱에 빠져든 것처럼 혈마 나령의 단전으로 빨려들었다.

그리고…….

투우우-웅.

한 차례 커다란 울림을 끝으로 씻은 듯 사라졌다.

내내 감겨 있던 혈마 나령의 눈이 번쩍 뜨였다.

***

혈마 나령이 혈교의 숙원을 이루며 일으킨 커다란 울림은 한차례 대기에 공명을 일으킨 후 지각을 타고 멀리 아주 멀리까지 퍼져나갔다.

섬서성을 지나 산서성과 하남성의 경계를 가로질러 하북성의 성도에까지 이르렀다.

“음?!”

용무린의 눈이 부릅떠졌다.

아스라이 먼 곳에서 파도처럼 밀려온 어떤 강대한 떨림을 느낄 수 있었던 것이다.

“이, 이건 또 뭐야?”

“가가! 무슨 일이에요?”

“……!”

제갈영령이 물어왔지만 용무린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의 말이 하나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던 거다.

자신이 전력을 다한다고 해도 상대할 수 있을지 감히 장담할 수 없는 무지막지한 힘의 여운에 놀라 모든 정신을 그 힘의 여운에 집중하고 있었다.

“서남쪽…….”

튀어나올 듯 눈을 부릅뜬 용무린의 입에서 무서운 단어가 쏟아져 나왔다.

“혈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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