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어부지리
번쩍.
물처럼 고요하게 앉아 있던 신마의 눈이 떠졌다.
용무린이 느낄 수 있었던 아스라이 먼 곳에서 전해져온 파동을 그 역시 감지했던 것이다.
꿈틀!
신마의 눈이 투쟁심과 분노로 일그러졌다.
용무린의 기운을 느꼈을 때와는 완전히 다른 반응이 튀어 나왔다.
“이런 시건방진 노-옴!”
용무린의 기운은 친근하며 막연한 동질감까지 느껴졌던 반면 지금 감지한 기운은 느끼는 순간 박살을 내버리고 싶을 만큼 강력한 경쟁자로 인식되었던 거다.
확!
참을 수 없다는 듯 신마가 몸을 일으켰다.
둥실 떠 조사동 밖으로 나섰다. 음양자가 기다리고 있을 대전을 향해 나아갔다.
“신마시여…….”
생각지도 못한 신마의 등장에 음양자의 얼굴이 환하게 밝아졌다. 이제야말로 중원정복의 거보를 내딛는 것인가 하는 기대감에서였다.
하지만 신마는 이번에도 음양자의 기대를 배신했다.
“잠시 다녀올 곳이 있다.”
“어, 어디엘 다녀오신단 말씀입니까?”
신마의 입에서는 음양자가 한 번도 생각해 보지 못했던 말이 튀어 나왔다.
“감히 아리만의 화신을 자처하는 종자가 눈을 떴다.”
아리만은 마교에서 모시는 빛의 신 아후라 마즈다가 적을 대할 때 나타내는 마신으로서의 성향을 말한다.
마교의 교리는 빛과 어둠을 모두 포괄하는 것.
그래서 마교가 사교인 것이고, 근원적 공포인 죽음의 마신을 받아들임으로 생사필멸을 자신들만이 제어할 수 있다 여기기에 마교라 불리는 것이다.
여하튼 아후라 마즈다를 신으로 받드는 마교의 교주인 신마가 악신이자 마신으로서의 성향인 아리만의 화신임을 자처하는 것은 당연한 일, 하지만 그 자리를 두고 언제나 다퉈온 곳이 있었다.
“혈교!”
음양자의 입에서 불쑥 튀어 나온 말이 정답이었다.
신마의 고개가 크게 끄덕여졌다.
“그래. 냄새나는 땡중이나 말코도 아니면서 언제나 신마의 권위를 부정하는 빌어먹을 종자가 눈을 떴다.”
휘이이. 트드드드.
신마가 분노를 일으킴에 따라 대전이 몸살을 앓았다. 금방이라도 무너져 내릴 듯 푸스스 천장에서 가루를 떨굴 정도였다.
“……!”
음양자도 더는 말을 잇지 못했다.
팔십여 년 전에도 그랬다.
중원정복의 거보를 내딛기에 앞서 마교는 혈교와 십 년 동안이나 전쟁을 치러 결국 혈교를 무너뜨리고 나서야 거보를 내디뎠지 않은가?
‘하는 수 없다. 먼저 치는 수밖에.’
또다시 같은 일이 반복되는 듯해 마음이 무거웠다.
하지만 마교의 근본을 부정하고 마신의 적통을 자처하는 혈교의 전설이 다시금 나래를 편다면 먼저 정리하는 것이 옳다.
그냥 혈교가 재림을 한 것과 아리만의 화신을 자처하는 자가 눈을 뜬 것과는 차원이 다른 문제다. 자칫 잘못하면 마교의 힘이 혈교로 흡수당할 수도 있는 거다.
음양자가 고개를 조아리며 외쳤다.
“사흘의 말미만 주소서, 신마시여. 모든 전력을 모아 혈교로 진격을 하겠나이다.”
“아니!”
신마가 단호한 태도로 고개를 흔들었다.
“필요 없다. 나 혼자 간다.”
“신마시여! 그, 그것은…….”
화들짝 놀라는 음양자를 향해 신마는 입꼬리만 슬쩍 말아 올려 웃어 보였다.
“신마인 내가 직접 간다. 놈의 목을 거두는데 힘이 부족할 듯싶은가?”
“……!”
음양자의 입이 쩍 벌어졌다.
그제야 신마가 불사신기와 규천마력을 하나로 엮어 불사마력을 완성했던 사실이 기억난 것이다.
‘아니지. 그래도 안 돼.’
아무리 천하의 신마라지만 혈교의 전설이 눈을 떴다.
마교의 모든 것이나 마찬가지인 신마를 절대로 혼자 보낼 수는 없는 거다.
“그러시다면 오마종이라도 수신호위로 대동하십시오, 신마시여.”
“귀찮아. 나 혼자 다녀오는 것이 빨라.”
“아니 되옵니다, 신마시여. 홀로 떠나시려거든 차라리 속하의 목을 치고 가십시오.”
음양자가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목청을 돋웠다. 머리를 청석 바닥에 콱 처박았다.
피식.
가만히 내려다보던 신마가 풀썩 웃었다.
감히 신마인 자신에게 대거리를 하는 것은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그것이 충심으로 인한 것임을 알고 있기에 나무랄 수 없었던 거다.
결국 신마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좋다. 오마종을 불러라. 함께 간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신마시여.”
음양자가 발딱 일어나 밖으로 달려 나갔다.
“이 노-옴. 이 시건방진 노-옴.”
아득히 먼 곳에서 자신이 놀랄 만큼의 기운을 뿜어낸 혈교주 혈마 나령을 향해 신마는 본능적인 투쟁심과 살기를 뿜었다.
“네놈까지 아껴 먹을 생각은 추호도 없다. 반드시 박살을 낼 것이다.”
***
“혈신 천세천세 천천세.”
“혈신강림. 화신군림.”
혈교 역사상 최초로 혈신령을 완전히 받아들인 나령의 발아래 엎드려 대사제와 혈사제들이 환호했다.
“크흐흑. 혈신이시여…….”
“흐흐흑. 영원토록 군림하소서.”
어찌나 북받치는지 대사제와 혈사제들은 흐느껴 울기까지 했다. 과거 혈마 나령을 대하며 일정 부분 보였던 거만함 따위 눈을 씻고 봐도 찾을 수 없었다.
혈교의 역대 교주들이 죽음으로 만들어내 지켜온 혈신령의 전설이 자신들의 당대에 깨어났으니 이제는 승리만이 남았다고 생각한 것이다.
“이레의 말미만 주소서, 혈신이시여. 혈교의 모든 전력을 휘몰아 혈신의 뒤를 따르겠나이다.”
대사제가 흐느끼듯 외쳤다.
혈루단과 혈풍단을 잃었다. 중진들로 이뤄진 혈마단도 잃었고 뇌화탄의 재수급을 위해 떠났던 혈뇌와 태상장로마저 잃어야 했다.
하지만 이제 그 모든 수모를 갚아줄 수 있게 됐다.
혈신령을 받아들여 거듭난 혈신의 힘이라면 뇌화탄 따위 없어도 단숨에 천하를 발아래 둘 수 있다고 믿었다.
“천하를 발아래 두소서.”
“천하를…….”
혈사제들이 일제히 따라 외쳤다.
그런데…….
“아직 아니야.”
혈신의 입에서는 천만뜻밖의 말이 흘러나왔다.
아직 아니라니? 그게 대체 무슨 뜻인가?
혈신으로 자각한 나령이 계속해서 알 수 없는 이야기만 쏟아냈다.
“놈이 움직였다.”
“대, 대체 누굴 말씀하시는 것인지…….”
대사제가 말 꼬리를 늘였고 혈신은 감히 범접하기 힘든 살기를 뿜으며 대답했다.
“혈신과 더불어 아리만의 화신을 자처하는 자!”
“허업!”
대사제가 헛숨을 들이켰다.
아리만의 화신을 자처하는 자가 누구인지 너무나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놈이 곧 나를 찾아올 거다.”
“혈신이시여……. 속하들이 목숨으로 나아가 맞서 싸우겠나이다.”
있는 용기 없는 용기 다 짜내어 외친 말이었지만 혈신은 그저 한 번 픽 웃으며 차갑게 받았다.
“너희 따위가?”
“……!”
틀림없는 비웃음이었지만 대사제는 감히 혈신 앞에 고개도 들지 못했다.
“아무도 나서지 마라.”
솔직히 나설 수도 없다.
혈신이 본인의 입으로 아리만의 화신을 자처하는 자라고 규정하지 않았나? 그 말은 곧 마교의 교주인 천마가 신마로 올라서 혈신과 동등하다는 뜻이었기 때문이었다.
씨이익.
혈신 나령의 입가에 섬뜩하리만큼 흰색의 선이 쭉 그어졌다.
“그와의 만남으로 천하의 주인이 결정이 된다.”
절대로 양립할 수 없는 숙적끼리의 만남이다.
만나면 생사결을 나눌 것이다.
“아리만의 화신을 자처하는 자들끼리의 만남. 절대로 피할 수 없지.”
냄새나는 땡중과 말코를 비롯한 정파의 같잖은 종자들을 대할 때와는 또 다른 종류의 적개심이다.
혈교의 근간을 이루는 근원적인 부분을 건드리고 있는 것이라 양보할 수도 없고 물러설 수도 없다.
무조건 나아가 싸운다.
승패가 나뉠 것이고 살아남은 승자가 모든 것을 독차지하게 되리라.
혈신이 나직한 목소리로 으르렁댔다.
“어서오너라 가짜여. 아리만의 진정한 화신인 나 혈신이 기다리고 있다.”
가감 없이 드러낸 존재감이 북상하기 시작했다.
신마가 혈신령의 힘을 감지했듯 자신 역시 아득히 먼 곳이지만 그가 드러낸 막강한 존재감과 움직임을 느낄 수 있었던 것이다.
“크크크크큭.”
혈신 나령이 나직한 웃음을 터뜨렸다.
두근두근.
심장이 기분 좋게 뛰었다.
두려움 따윈 없었다. 그저 필생의 숙적을 만나 싸우게 된다는 기대감이 있을 뿐이었다.
***
“가가!”
“응?”
계속되는 제갈영령의 부름에 비로소 용무린은 혈신에게 쏠렸던 정신을 되돌릴 수 있었다.
“대체 무슨 일이에요? 가가께서 그런 표정을 짓고 있는 것은 처음 뵈어요.”
“아, 그거?”
잠시 고민을 했지만 용무린은 제갈영령에게 자신이 느꼈던 것을 낱낱이 밝혔다. 공연히 말을 아껴 뒤통수를 얻어맞느니 대비를 하는 편이 더 낫기 때문이다.
“……서남쪽에서 느껴졌다. 섬서성 쪽이지. 틀림없이 홍화장에 몸을 숨긴 혈교주가 어떤 강대한 힘을 가감 없이 드러낸 걸 거야.”
“어떻게 해요, 가가.”
두려운 모양인지 제갈영령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용무린이 풀썩 웃어 보이며 가슴을 쫙 폈다.
“너무 걱정하지 마. 무서운 힘이긴 한데, 그렇다고 내가 질 것 같지는 않거든.”
장담할 수 없는 일이었지만 그렇게 느꼈다.
불사대천검의 힘이라면 이기지는 못해도 최소한 지지는 않을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문제는 내 불사대천검이 완전하지가 않다는 것인데…….’
하루아침에 해결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닌지라 지금으로서는 철저한 대비만 할 뿐이다.
그때였다.
밖에서 동창의 중감 엄당이 목소리를 높였다.
“황룡패주시여. 개방의 의창현 분타주라 자칭하는 방건이란 거지가 부름을 받아 도착했나이다.”
반가운 소식이었다.
“어서 들라 해.”
“네-이.”
엄당이 읍하고 물러간 후 오래지 않아 방건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화, 황룡패주를 뵈오이다.”
간만에 봐서 그러는 것인지 아니면 갈수록 높아져만 가는 용무린의 위명 때문에 그러는 것인지 방건은 또 딱딱하게 굴었다. 바짝 언 얼굴로 정중히 포권을 취한 거다.
피식.
“또 그런다. 편하게 하라니까, 편하게…….”
“헤헤헤. 막상 보니까 그게 잘 안 돼서…….”
방건이 겸연쩍게 웃었다.
그게 문제가 아니라는 듯 용무린은 방건을 가까이 불렀다. 뭔가 있음을 직감한 방건이 곁으로 다가와 귀를 활짝 열었다.
“지금 말이야…….”
용무린은 방금 전에 자신이 느낀 감각을 확신으로 바꾸어 방건에게 말했다. 더불어 자신이 생각하는 긴급조치들을 순서대로 알렸다.
“허어. 저, 정말? 응응. 그래서?”
튀어나올 듯 동그래진 눈으로 연신 고개를 끄덕이던 방건은 오래지 않아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알았어. 일단 그렇게 전할게.”
막 문 밖으로 나서는 방건의 뒤통수에 대고 용무린이 크게 외쳤다.
“홍화장 인근에서 강력한 힘의 존재를 느낀 사람이 한 사람이라도 있다고 하면 그 즉시 모든 세력을 뒤로 물려야 한다고 전해! 알았지?”
“염려 마! 반드시 그대로 전달할게.”
시원시원한 대답을 끝으로 방건은 밖으로 사라졌다.
그때까지 다소곳이 용무린만 지켜보고 있던 제갈영령의 입이 살포시 열렸다.
“가가께서는 어찌하실 거예요?”
“나?”
“예.”
용무린은 재빨리 상황을 판단했다.
‘내가 느꼈던 것이 정말 혈교주의 기운이 확실하다면 섬서성 일대에 모여든 정파의 힘은 한 발 크게 뒤로 물러날 거야.’
방건을 통해 연락을 취했다.
화운장로와 살계승 효정대사 그리고 일각대사라면 자신의 말이 어떤 것인지 알 수 있으리라.
‘그 정도 무식한 힘이라면 머릿수로는 해결이 불가능해. 뒤로 빠져 재정비를 하는 편이 더 나아.’
교만할 수도 있지만 자신이 판단하기에 그 힘을 상대할 수 있는 사람은 천하에 몇 되지 않는다.
‘절대적인 고수가 전면에 나서지 않는 한 맞대결은 피해야 하겠지.’
느낌상 소림의 방장이나 무당의 장문인이라 하여도 오래 버티긴 힘든 힘이었다.
‘무당의 장문인께서 마교의 오마종 중 혈마종과 겨우 동수를 이뤘으니 새로이 화산의 장문인으로 등극하신 옥진도장에 소림의 장문인까지 함께 연수합공을 해야 조금이라도 비슷하려나?’
솔직히 그렇게 한다고 해도 떨어지게만 느껴졌다.
자신이 감지한 힘은 그만큼 막강했다.
‘일단 섬서성에서 정파의 힘을 뒤로 물린 후 재정비에 들어가면 혈교도 함부로 움직이지 않을 거야. 싸우지도 않고 앞마당을 확보하는 셈이니 그간 잃어버린 힘을 이참에 충분히 보충하려 들겠지.’
혈교가 보일 행동으로는 그게 맞을 듯했다. 절대고수가 있다지만 중하위 고수들의 숫자가 너무 적으면 그 뒤를 감당할 수 없기 때문이다.
‘앞으로가 문제지. 무림이야 당분간은 대치상태가 계속 될 텐데 황제폐하의 안위가 걱정이 된단 말이야.’
용무린의 걱정은 바로 그것이었다.
왜냐하면 어떤 전투든 가장 빠르고 확실하게 승기를 잡는 방법은 적의 머리를 치는 것이기 때문이다.
‘혈교의 태상장로와 혈뇌를 포함한 놈들의 수뇌부를 벨 때 총병관을 비롯한 군부의 실세가 함께했었단 말이지. 어쩌면 관과 무림은 별개라고 하는 벽이 허물어졌다고 생각할 수도 있어.’
막말로 마교도 혈고를 풀어 황궁을 도모했지 않은가?
혈교라고 그러지 말라는 법이 없는 거다.
‘누구든 다시 한 번 자금성의 담을 넘으면, 황제폐하의 분노를 사게 되고 그러면 무림이고 뭐고 다 끝나는 거야.’
다시금 그런 일이 발생해 황제가 분노하면 더는 참지 않을 것이다. 자신이 아무리 말려도 듣지 않고 오군도독부 전체를 움직여 무림의 말살에 들어갈 수도 있다.
‘솔직히 그 전에 황제가 죽겠지.’
자신이 느꼈던 그 힘이라면 양가장의 전력이 통째 막아서도 그냥 뚫린다. 주머니 안에 든 물건처럼 황제의 목을 취해 사라지리라.
‘그렇게 되면 내가 아무리 말려도 진성왕과 총병관이 참지 않을 거야. 모든 병력을 휘몰아 무림을 말살한 후 차기 황권을 안전한 기반 위에 세우려 들겠지’
존재감을 드러낸 혈교 절대자의 의중을 알 때까지만이라도 직접 황궁을 지켜야 할 필요가 있었다.
“놈들의 의중이 확실해질 때까지 나는 잠시 자금성에 있어야 할 것 같아. 놈들이 혈고를 뿌렸던 마교의 흉내를 낼지도 모르거든.”
따지고 보면 이곳도 위험하긴 마찬가지이나 이만 팔천의 정병을 뚫고 공격을 해서 황제나 용무린에게 관의 힘을 끌어들일 빌미를 제공하지는 않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런 위험을 감수할 것이라면 차라리 황제를 노릴 것이다.
“아! 그렇군요.”
제갈영령은 현명한 여인이었다.
용무린의 말에 모든 것을 이해했다는 듯 탄성을 터뜨렸다.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다녀올게, 령매.”
용무린이 무거운 몸을 일으킬 때였다.
“가가!”
목덜미까지 발갛게 물들인 제갈영령이 그윽한 눈빛으로 올려다보며 물어왔다.
“내, 내일 아침에 가시면 안 되나요?”
용무린의 얼굴에 형언할 수 없는 기쁨의 빛이 어렸다.
내일 가면 안 되느냐고?
‘왜 안 되겠어?’
그쯤이야 아무래도 상관없는 일이다.
놈들이 아무리 빨리 움직인다고 해도 며칠의 시간은 걸릴 테니까.
용무린은 대답대신 손을 내밀었다.
수줍은 얼굴을 한 제갈영령이 그 손을 잡고 일어났다.
‘사랑해, 령매.’
‘제가 더 많이 사랑해요.’
수많은 의미가 함축된 시선을 주고받으며 두 사람은 회의실을 나섰다. 서로 손을 꼬옥 잡은 채 제갈영령의 숙소를 향해 이동했다.
“……!”
“……!”
지나치던 제갈세가의 직계 모두가 그 모습을 보았다.
하지만 누구도 먼저 입을 열어 방해하지 않았다. 두 사람의 모습에서 느껴지는 것이 있는 모양인지 미소와 함께 재빨리 그 자리를 피했다.
주약란과 양하린 역시 마찬가지였다.
뜨거운 눈으로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며 손을 꼭 잡고 내원으로 향하는 두 사람의 모습에 제갈세가 직계들과 같은 것을 느낄 수 있었던 거다.
“옹주님…….”
초조한 얼굴이 된 양하린이 주약란을 가만히 불렀다.
심상치 않은 모습으로 내원으로 향하는 두 사람을 말려야 하지 않느냐는 질문이다.
“아니야.”
주약란은 가만히 고개를 흔들었다. 생각지도 못했던 말을 계속해서 이었다.
“삼종칠거를 기억해라, 하린아.”
“삼종칠거?”
“그래. 네 입으로 그랬었지? 투기, 질투, 비련을 모르는 게 아니라고, 다른 여인에게 사랑을 나눠주는 것을 감수하면서라도 함께 있고 싶으니까 그러는 것이라고 말이야.”
“그, 그거야…….”
“이제 시작이란다, 하린아. 네가 지금 그의 이름을 불러 방해를 하면 너는 영원히 기회를 잡을 수 없다. 그는 네게 화만 낼 거란다.”
“……!”
“나처럼 인정을 하면 편하다, 하린아.”
“옹주마마.”
이해는 하지만 아직은 상실감을 감추기 힘든 모양인지 양하린이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괜찮아, 하린아. 지금 우리가 축하해줘야 다름에 우리 차례가 돌아와도 서로 축하를 해줄 수 있을 것이며 영령이와 소옥에게도 축하를 받을 수 있지 않겠니?”
“……!”
“너는 그날에 축하를 받고 싶지 않니?”
당연히 축하를 받고 싶다.
‘모두가 내 존재를 인정해 주는 가운데 마땅히 받아야 할 축하와 환대를 받으며 그와 행복하고 달콤한 밤을 보내고 싶어.’
그런 마음을 읽은 것일까?
토닥토닥.
주약란이 양하린의 등을 가볍게 두들겼다. 따뜻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러니 우리도 오늘은 축하를 해주자꾸나.”
“그래요, 옹주마마.”
그제야 양하린의 얼굴에 작은 미소가 피어났다.
주약란은 아예 한 발 더 나아갔다.
동창의 중감 엄당을 부려 용무린과 제갈영령이 함께 들어간 처소 주변을 말끔하게 정리한 것이다.
누구도 두 사람이 첫날밤을 보내는 주변에 있을 수 없었다. 제갈세가의 직계들은 미리 감을 잡고 축복의 미소와 함께 빠져나왔고 나머지 사람들은 어림친위군과 동창 고수들 손에 의해 밖으로 밀려 나와야만 했다.
훅!
제갈영령의 방을 밝히던 마지막 등불이 꺼졌다.
글썽. 투둑.
오십여 장 밖에서 꺼지는 등불을 지켜보던 백리소옥의 볼을 타고 뜨거운 눈물 한 방울이 떨어졌다.
‘아직 끝난 게 아니야.’
어차피 첫 번째 정실 자리는 생각지도 않았다.
자신이 노리는 것은 제갈영령의 인정을 받은 두 번째 자리, 이제야 진정한 시작인 것이다.
불사신기의 힘은 정말이지 놀라웠다.
꺼지지 않고 영원히 타오르는 불꽃처럼 용무린의 몸을 최상의 상태로 계속해서 유지시켰다.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제가 더 많이 사랑해요. 영원히.’
눈빛으로 말을 대신하며 한 몸이 된 두 사람은 떨어질 줄을 몰랐다.
초저녁에 꺼진 등불은 다음날 아침 떠오른 태양이 쫓기듯 사라져 다시 저녁이 되었어도 켜질 줄을 몰랐고, 한 몸이 된 용무린과 제갈영령은 자시를 넘어 다시 동녘하늘에 푸름이 번질 무렵이 되어서야 겨우 떨어졌다.
“사랑해, 령매.”
배부른 고양이처럼 행복한 얼굴로 곯아떨어진 제갈영령의 얼굴을 보며 용무린은 기쁘게 웃었다.
‘하여간 이래서 아버지나 황제폐하께서 그리 불사신기를 반겼던 것이로구나.’
새삼 불사신기의 묘용에 대한 고찰이 일었다.
제갈영령의 행복한 얼굴은 모두 불사신기 덕이다.
자연스레 밀려든 불사신기의 힘 덕에 제갈영령이 첫 경험의 고통이나 힘겨움 대신 기쁨을 알 수 있었고 그 긴 시간을 함께 즐길 수 있었던 것이다.
“다녀올게. 잘 쉬고 있어 잠꾸러기.”
쪽!
제갈영령의 입술에 가볍게 입맞춤을 한 후 용무린은 소리도 없이 방을 나섰다. 내 외원의 경계에 도착한 후 가볍게 입술을 떼었다.
“엄 중감.”
“찾아계시옵니까, 패주시여.”
용무린의 부름에 엄당이 오십 보 밖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종종걸음으로 다가왔다.
“나는 지금 자금성으로 간다. 몇 가지 조치를 취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혹시 모르는 일이다. 경위지휘사사와 각 관청의 병사들과 천호소의 병력을 절반 수준으로 유지한 채 이곳으로 불러와 계속해서 지켜라.”
“알겠사옵니다, 패주.”
“너만 믿는다.”
그 말을 끝으로 용무린의 신형은 하늘을 향해 빨려들 듯 사라졌다.
***
방건을 통해 전한 용무린의 말은 곧장 섬서성에까지 전달이 되었다. 마영방을 중심으로 삼아 모여 있던 정파의 수뇌부들이 한자리에 모여들었다.
“뭐, 뭐라? 혈교에도 그 정도 수준의 고수가 있다고?”
“허어. 신마의 출관만으로도 셈이 복잡한 판국에 혈교에도 그런 고수가 있다니…….”
신마가 대공을 이루고 출관을 했다는 말에 이은 두 번째 충격적인 소식에 모두가 놀랐다.
“홍화장 인근에서 지켜보던 아이들은 뭐라고 해?”
“확실히 무슨 힘의 준동 같은 것을 느꼈다는 보고가 있긴 했는가?”
화운 태상장로와 살계승 효정대사가 다그쳐 물었다.
달포 전 합류를 했던 벽소추가 어두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가문의 직계들이 직접 느꼈다고 합니다. 지진이라도 난 듯 하늘과 땅이 동시에 진저리를 쳤다고 하는데, 백여 장 밖에서도 숨이 잘 쉬어지질 않았다고 합니다.”
실로 놀랍고 무지막지한 수준의 힘이다.
하늘과 땅이 동시에 진저리를 치며 백여 장 밖에서도 제대로 숨을 쉬기가 힘이 들다니!
“허어!”
“큰일이로구나.”
“그런 무지막지한 존재감을 드러낼 정도의 고수가 있을 줄이야…….”
“신마라는 마인의 출관만으로도 머리가 복잡하거늘…….”
화운과 효정대사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어찌해야 할 바를 모르겠다는 듯 힘없이 고개를 흔들었다. 잠자코 듣고 있던 백리천월이 불쑥 입을 열었다.
“용무린 그 친구의 말대로 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동감이야.”
“……!”
벽소추에 이어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백리천월의 목소리가 계속해서 이어졌다.
“분하지만, 머리수로는 해결할 수 없는 수준의 고수가 등장했다고 봐야 합니다. 지금 즉시 홍화장 주변을 감시하던 고수들을 뒤로 물린 후 마영방 주변에 주둔하던 정파의 힘 역시 완전히 빼내야 한다고 봅니다.”
절대고수의 힘이 필요한 시기다.
새롭게 탄생한 혈교의 절대고수를 상대할 사람도 없는데 굳이 대항한답시고 힘을 집중해 각자의 본가를 빈집 비슷하게 만들 이유가 없는 거다.
“몇몇 상위 고수들만 제외한 후 다들 본가로 돌아가 무슨 일이 생기든 능동적으로 움직일 수 있도록 해두기만 하면 될 것 같구나.”
“맞습니다, 장로님.”
“그게 좋을 듯합니다, 장로님.”
화운의 말에 모두가 동감을 표했다.
용무린의 말처럼 절대적인 고수가 필요한 시기이니 굳이 한데 뭉쳐 있음으로 빌미를 제공하지 말고 섬서성을 비우다시피 하여 혈교에게 여유를 주는 것을 좋은 생각이라 받아들인 것이다.
“벽력도가의 어깨가 더욱 무거워지겠구나.”
십 년 후라면 모를까, 종남파는 물론이고 화산파 역시 아직은 전력을 회복하기 전이라 제대로 된 힘을 투입할 여력이 없다.
청성은 이미 돌아갔고 서문세가와 단목세가는 남겨둘 만큼 뛰어난 고수가 없으니 이대로 모두 각자의 가문으로 되돌아갈 것이다.
연락망을 제외한 개방의 주력과 소림의 힘도 빠져나가게 될 테니 섬서성의 명문정파 중 남는 곳은 오직 한 곳 벽력도가밖에 없게 된다.
어깨가 무거워질 수밖에 없는 거다.
효정대사의 말에 벽소추가 씽긋 웃어 보였다.
“이미 가주님과 이야기가 끝나 있습니다. 용무린 그 친구의 부탁대로 벽력도가는 일단 사태 추이만 지켜보다가 상황이 발생하면 그 친구에게 알린 후 잽싸게 주변 도지휘사와 합류하기로 했습니다.”
“허어. 도지휘사와?”
“예, 대사님.”
관과 무림은 별개라 했던 고언은 이제 옛말이 되어 버린 셈이다.
‘그게 뭐 어때서?’
‘살아남아 후일을 노리는 게 장땡이지. 가문 전체의 생존 앞에 체면 따위 하등 필요 없는 일이야.’
화운과 효정 대사는 그다지 이런 상황을 반기지 않겠지만 용무린과 함께하며 머리가 많이 트인 백리천월과 벽소추는 아무렇지도 않게 그 상황을 받아들였다.
“자자, 그러면 정리를 하자꾸나.”
“남아 있을 고수급만 선별한 후 돌아갈 인원들을 추리면 될 것 같소이다.”
화운과 살계승 효정 대사의 주도로 모든 문파가 돌아갈 차비를 갖추기 시작했다.
이제 이곳 마영방 주변에는 화운과 효정, 일각을 비롯한 몇몇 최상위 고수만 남아 있게 될 것이다.
***
오마종과 함께 불회곡을 벗어난 신마는 본능이 이끄는 곳을 향해 공간을 접듯 신법을 펼쳤다.
‘세상에, 땅을 밟지도 않아.’
‘거의 육지비행술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잖아.’
신마의 뒤를 따르는 오마종의 입이 다물어질 줄을 몰랐다. 오궁이원이전의 모든 고수들을 통틀어 마교의 최상위 고수라 해도 과언이 아닌 그들이었지만 신마의 무위는 그들의 상상조차 벗어났던 것이다.
대륙의 남쪽 끝이라 할 수 있는 광동성과 광서성 경계에 자리한 십만대산에서 섬서성 서쪽 끝자락에 위치한 홍화장까지 불과 보름밖에 걸리지 않았다.
아마 그것도 오마종을 대동하지 않고 혼자서만 움직였다면 시간을 더 단축할 수 있었으리라.
천양현을 코앞에 둔 대파산지에 이르러서야 신마는 잠시 움직임을 멈추었다.
“혈교가 코앞이다. 모두 호흡을 가다듬도록.”
그렇지 않아도 숨이 턱에까지 차올라 죽을 지경이었다.
아무리 오마종이라 하나 지난 보름동안 겨우 사흘에 한 번 정도만 운기조식을 취하고 계속해서 신법만 펼쳐대니 죽을 맛이었던 것이다.
“충!”
한 목소리로 답하고 운기조식에 든 오마종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호법을 서는 신마를 보며 생각했다.
‘이제야말로 본교의 천년 숙원을 풀게 되는구나.’
‘신마군림 천하앙복이 목전이다!’
‘마교천하가 멀지 않았다.’
신마의 시선은 대파산지 끝자락의 평원에 자리한 천양현으로 향해 있었다.
‘시건방진 놈! 조금만 더 기다려라. 아리만의 진정한 화신인 본좌가 간다.’
정파인을 향한 적개심과는 전혀 다른 종류의 근원적인 적개심과 살기가 천양현 서쪽 끝에 위치한 홍화장에게로 뻗어 나갔다.
***
홍화장 깊은 곳.
“크흐흐. 어서 오라, 가짜여!”
호화로운 태사의에 몸을 묻은 채 기다리고 있던 혈신 나령이 벌떡 일어났다. 남쪽을 향해 시선을 고정한 채 살기를 뿜어냈다.
“혈신이시여, 아리만의 가짜 화신이 가까이 도착한 것이옵니까?”
“그렇다. 놈이 가까이 와 있느니라.”
대사제의 질문에 혈신 나령이 으르렁대며 답했다.
“따로 준비할 것은 정녕 없나이까?”
“없다. 아무도 나서지 마라. 이것은 가짜와 진정한 화신인 나 혈신과의 싸움이다. 오늘의 싸움으로 천하의 주인이 결정되리라.”
혈신 나령이 자신만만하게 외쳤다.
팔십 년 전 십 년간의 전쟁 끝에 마교에 패망했던 전력은 이미 안중에도 없다.
그때는 혈마멸천오검의 힘에 기대 싸웠을 뿐임에도 십 년이나 버텼다. 하지만 지금은 혈신령의 힘을 바탕으로 혈마멸천오검을 펼칠 터, 가짜 놈 따위에게 질 리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내 오늘 너를 꺾어 천하의 주인이 되리라.”
휘슷.
혈신 나령이 대전을 벗어났다.
더 기다릴 필요도 없이 나아가 신마를 맞을 생각인 거다.
흔들.
대사제의 눈동자가 묘한 떨림을 만들어냈다.
‘팔십 년 전 십 년 전쟁 당시, 마교 역시 그때는 본교와 다를 바 없지 않았던가?’
묘한 떨림의 정체는 바로 불안함이었다.
그 당시에는 마교 역시 아리만의 화신이라 자처할 만한 고수가 없었음에도 결국 혈교를 무너뜨렸기 때문이었다.
‘모르는 일이야.’
대사제는 혈신 나령이 앉아 있던 태사의 위를 향해 시선을 던졌다. 태사의 위에는 텅 비어버린 듯 아무런 빛을 발하지 않는 가면이 덩그러니 걸려 있었다.
‘내 임무는 언제나 혈신의 강림을 준비하는 것!’
대사제가 손을 뻗었다.
혈신령이 깃들어 있던 가면이 스르르 떠올라 대사제의 손에 내려앉았다.
***
용무린은 그 사이 자금성에 도착할 수 있었다.
“와하하하. 보라. 황룡패주가 고를 보고 싶어 이렇게 찾아오질 않았는가?”
황제가 통쾌하게 웃으며 용무린을 맞았다.
이번에도 역시 옥좌에서 내려와 열 보를 걸은 후 한쪽 무릎을 꿇은 용무린을 손수 일으켜주었다.
“어쩐 일이더냐?”
황제의 질문이었다.
문무백관이 지켜보고 있었지만 용무린은 사실대로 밝힐 수밖에 없었다. 간략하게 자신이 느낀 힘과 우려를 황제에게 밝혔다.
“……해서 폐하를 지켜드리기 위해 찾아 왔습니다.”
“와하하. 고를 지켜주기 위해서?”
“예, 폐하.”
“크하하하. 좋구나. 좋아. 하하하하하!”
용무린이 자신을 지켜주기 위해 왔다는 말에 황제가 너무나 좋아했다.
“오늘 정무는 이것으로 끝이다. 나머지 자잘한 일들은 삼공과 삼고와 더불어 문무백관이 알아서 하도록.”
그대로 옥좌에서 벌떡 일어났다.
용무린의 손을 덥석 잡아끌며 건청궁을 향해 움직였다.
“오늘은 도망칠 생각하지 말도록. 내 오늘 패주와 더불어 열 동이의 술을 마실 것이다.”
“예, 폐하.”
용무린이 쓰게 웃으며 끌려갈 때였다.
흠칫!
“웃!”
용무린이 갑자기 멈춰 섰다. 눈을 부릅떴다.
아득히 먼 곳에서 하늘과 땅을 뒤흔들며 퍼져온 무서운 파동을 감지했던 거다.
“왜 그러느냐?”
황제의 질문에 용무린은 매서운 눈빛을 서남쪽을 향해 던졌다. 불쑥 입을 열었다.
“시작됐다!”
철렁.
무슨 뜻인지는 몰라도 황제의 심장이 한 차례 크게 널을 뛰었다.
용무린의 목소리와 표정 그리고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통해 본능적으로 무엇인가 큰일이 벌어졌음을 직감했던 것이다.
‘대체……?’
무슨 일이냐고 묻고 싶어 조바심이 날 지경이었지만 황제는 잠자코 용무린의 입이 열리기를 기다렸다. 용무린이 바짝 독이 오른 얼굴로 한 곳을 노려보니 그 분위기에 눌려 물어볼 수가 없었던 것이다.
‘젠장. 대체 뭐냐고?’
황제가 조바심을 참고 기다려야 할 정도로 독기를 뿜어낼 일이 대체 무엇일까?
지금 이 순간 용무린의 관심을 돌릴 것은 아무것도 없을 것이다. 그만큼 집중했다.
‘격렬하다.’
서남쪽 아스라이 먼 곳에서 밀려든 파동의 분석에 용무린은 모든 정신을 빼앗겼다.
‘그냥 한 차례 뿜어낸 것이 아니야. 거의 같은 순간 수백여 번의 충돌이 연거푸 뿜어져 한 덩어리가 되어 밀려온 파동이야.’
그런 정도라면 무슨 상황인지 쉽게 알 수 있다.
싸움이었다. 분명히 경천동지할 싸움이 벌어진 거다.
‘한 놈은 분명히 혈교 쪽에서 그 흉험한 힘을 뿜어내던 놈이겠지?’
그렇다면 다른 한 놈은 빤하다.
‘신마!’
그 외에 다른 누가 있겠나?
‘내가 이곳에 있으니 나머지 한 놈은 뭐…….’
굳이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서로가 서로를 인지할 수 있을 만큼의 능력이 되는 이상, 같은 급의 고수가 부딪혔으니 속이려야 속일 수가 없는 것이다.
‘아오, 여길 오는 게 아니었구나.’
너무나 아쉬웠다.
신마와 혈교의 교주가 싸울 줄 알았다면 이곳으로 올 것이 아니라 홍화장 인근으로 갔어야 한다.
‘그랬으면 살아남은 놈의 뒤통수를 실하게 갈겨줄 수 있었을 텐데 말이야.’
어디 뒤통수만 갈겼겠는가?
신마든 혈교의 주인이든 살아남은 놈의 목을 어쩌면 거둘 수도 있었으리라.
‘그런데 지금까지 아무런 기미도 없다가 어째서 갑자기 맞붙은 거지?’
그때였다.
신마 진무량이 주입해 놓았던 기억들 중에 어째서 당대 신마가 느닷없이 혈교 나부랭이와 싸우게 되었는지에 대한 실마리가 떠올랐다.
아득히 오랜 시간동안 굳어진 관념.
우리가 바로 마신의 진정한 화신을 모신다. 그럼으로 마교가 바로 마신의 적통이다.
웃기지 마라.
아후라 마즈다의 반대 성향인 아리만의 화신이 어째서 어둠만이겠느냐? 생명의 빛은 바로 피로써 표현되는 법, 피를 통해 거듭날 수 있는 혈교야말로 혈신인 아리만의 적통이다.
어차피 사이한 교리로 세상을 뒤엎으려는 사교 주제에 서로가 마신이나 혈신의 적통이라고 그 긴 세월 보기만 하면 잡아먹으려 싸워댔던 것이다.
‘아하! 마교가 혈교를 그렇듯 못 잡아먹어서 난리였던 이유가 바로 그것이었구나.’
그래서 견원지간처럼 사이가 나쁜 것이고 마교가 중원정복에 앞서 십 년 동안의 전쟁까지 치러가며 후환을 완전히 없애버린 거다.
‘젠장. 그걸 미리 생각해 냈어야 했는데.’
그랬다면 이곳으로 오는 일 따윈 없었을 거다.
아예, 홍화장 인근에 돗자리를 깔고 앉아 누구든 싸워 나자빠지기만을 기다렸으리라.
‘물론 지금도 그렇게 나쁘진 않아.’
이 상황은 일종의 어부지리다.
누가 살아남든지 간에 정상적인 상태는 아닐 터, 놈이 정상을 회복할 시간을 벌게 되는 셈이다.
‘기왕 이렇게 된 일, 아쉬운 마음 따위 털어버리자.’
솔직히 나까지 움직였다고 하면 상황은 또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신마 놈이 움직인 것을 눈치 채지 못했지만 놈도 내 움직임을 느끼지 못하리라곤 장담할 수 없지.’
느끼지 못한다고 해도 가까운 거리라면 또 모른다.
지금까지는 서로가 뿜어낸 힘의 파동만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서로간의 거리가 가까워진다고 하면 힘의 파동뿐만이 아니라 서로의 본질을 직접 느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는 거다.
‘먼저 싸우지 않고 내가 도착하기까지 기다려 삼파전을 벌이려고 했을 수도 있긴 해.’
하늘 아래 세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절대자 삼인의 전투.
과연 누가 승자가 될 수 있다고 단언하겠는가?
차라리 내가 빠진 상태에서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이 훨씬 더 좋을 것이다.
‘하여간 좋다. 너희들끼리 피터지게 싸워라.’
그래서 아무나 이겨라.
‘이기는 게 우리 편이다. 푸흐흐.’
그제야 마음의 정리가 다 되었는지 용무린이 기분 좋은 미소를 지었다.
“후우. 대체 무슨 일인 게냐?”
용무린의 미소를 보고서야 마음이 놓였는지 황제가 질문을 던져왔다.
“아, 그거요?”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던 지금까지와는 달리 용무린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설명을 시작했다.
“마교 대가리하고 혈교 대가리하고 싸우나 봐요.”
“응? 그 신마라는 놈과 혈교의 교주를 말하는 것이냐?”
“예, 폐하.”
“……!”
황제의 입이 쩍 벌어졌다.
자금성에서 아득히 먼 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싸움을 알아차릴 정도의 무위라는 게 당최 믿기도 힘들었고 짐작도 가지 않았던 거다.
“괜찮은 것이냐?”
걱정할 상황에 대비하지 않아도 되느냐는 뜻!
용무린은 픽 웃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뭐, 살아남는 놈이 우리 편인 거죠.”
“어부지리를 말하는 것이더냐?”
“맞습니다, 폐하. 생각지도 못했던 일이라 살짝 놀라기는 했는데, 다시 생각해보니 손 안대고 코를 푸는 격이라 되레 고마워하는 중이었습니다.”
용무린의 말을 듣던 황제가 안면을 싹 바꾸었다.
“그렇다고 이대로 훌쩍 떠날 생각은 아니겠지?”
“……!”
확실히 그동안 황제로서 쌓인 경륜은 무시할 게 못된다.
정곡을 찔렸는지 용무린은 즉답을 하지 못했다.
콱!
황제가 용무린의 손을 잡아챘다. 도망가지 못하도록 잡아끌었다.
“어림도 없다. 오늘은 고와 더불어 열 동이의 술을 마셔야만 해.”
황제는 용무린을 이대로 보내 줄 생각이 없었다.
주약란에게 상황보고를 전해 받은 것도 있고 하니 어떻게 하든 술자리에서 용무린에게 약조를 받아낼 심산이었던 것이다.
‘휴우. 괜히 왔다니까…….’
후회막급이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다.
“알았어요. 알았으니까 이 손 좀 놓으세요, 폐하.”
“안 돼. 그냥 와!”
용무린은 그렇게 황제의 손에 잡혀 건청궁으로 끌려가야만 했다.
***
이런 싸움이 어디 또 있을까?
버언쩍. 버번쩌저적.
쿠와아앙. 콰아아앙. 트드드드드.
아직까지는 인간임에 틀림이 없는 두 사람이 싸움을 벌이는데 하늘과 땅이 통째 뒤흔들리고 있다.
어둠보다 짙은 어둠과 한 덩어리가 된 검은 보랏빛 광채가 해일처럼 주변을 휘감는다. 뒤이어 일어난 피의 폭풍이 거칠게 해일을 들이받는다.
꽈르릉. 콰콰콰콰쾅.
그때마다 두 눈을 뜰 수 없을 만큼의 광채와 충격파가 일어 반경 백여 장을 초토화시키고 있었다.
“크흡! 무, 물러서.”
“흡! 더, 더 뒤로!”
적당히 떨어졌다고 생각하고 있던 오마종이 핼쑥한 얼굴을 한 채 비칠 뒤로 물러나야만 할 정도!
퍼퍼퍼펑. 와르르르.
파괴력이 미치는 범위 안에 들어있던 애꿎은 홍화장의 정문만 터져나갔다. 모래가 되어 허물어져 내렸다.
신마와 혈신.
두 초인의 대결은 그 뒤로도 한참동안 더 이어졌다.
그러나 오마종은 알 수 있었다.
“제, 제압한다.”
“불사마력이 혈신령과 함께하는 혈마멸천오검의 힘을 누르기 시작했어.”
두 초인을 제외하면 이 하늘 아래 열 손가락 안에 들어갈 수 있는 오마종은 분명히 느꼈다.
팽팽하던 무게추가 불사마력 쪽으로 기울기 시작했다는 것을…….
***
홍화장 깊은 곳에 틀어박힌 대사제 역시 같은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기운다. 기울고 있어.”
철렁!
심장이 내려앉는 것만 같다.
혈교의 역사가 시작된 이래 한 번도 풀린 적 없던 혈신령이 나래를 폈음에도 불구하고 밀리다니!
“정녕 아리만의 화신이 본교의 영광과 함께하지 않는단 말인가?”
분했다. 그리고 참담했다.
하지만 대사제는 스며드는 패배감을 떨치려는 듯 재빨리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야! 그럴 리 없어. 혈신께서 본교와 함께하지 않는다면 어째서 혈신령을 내려줬겠어?”
지금은 그저 하나의 시련일 뿐이다.
피를 통해 혈신께 나아가는 법을 알려 주셨듯이 이 시련 또한 거듭남을 위한 희생으로 승화하리라.
“미래를 대비해야만 해.”
휘슷.
대사제가 어디론가 몸을 감추었다.
팔십여 년 전 당시 대사제였던 태상장로가 혈신령과 함께 탈출해 지금의 혈마 나령을 길러내 다시 혈교를 길러냈듯 자신도 같은 길을 걸을 생각인 것이다.
스스슷. 스스스스슷.
혈사제들이 대사제의 뒤를 따라 움직였다.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그들이 다시 이 땅에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이 바로 진정한 혈교가 재림을 하는 순간이 될 것이다.
***
버언쩌저적.
두 가지 힘이 뒤엉키며 거창한 빛을 쏟았다.
하늘과 땅을 통째 뒤덮을 듯 퍼져나갔던 검보랏빛과 핏빛이 한 점으로 모여들었다가 정점에 이르러 한꺼번에 터져나간 것이다.
집약된 힘이 어찌나 큰지 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그저 희뿌연 충격파만이 동심원을 그리며 백오십 장 밖까지 휩쓸었을 뿐이다.
쿠와앙. 콰아앙. 쿠콰콰쾅.
희뿌연 충격파에 직격당한 홍화장의 건물들이 포탄에 직격이라도 당한 듯 마구 터져나갔다.
“크아아악!”
“커헉!”
“끄아악!”
두려움에 떨던 하위 마인 수십여 명이 그 서슬에 온몸이 찢겨 죽었다.
“흐읍! 이, 이럴 수가!”
“이, 이런 끔찍한 힘이라니!”
살아남은 멀쩡한 마인들은 아무도 없었다.
유성이 떨어진 주변에 있었던 사람들처럼 깊은 내상을 입어야만 했다.
실로 무지막지한 힘의 격돌!
이런 수준의 싸움이 있으리라고 과연 누가 생각이나 해 보았겠는가?
“끄아아악!”
한 줄기 처절한 비명을 끝으로 사위가 고요해졌다.
공전절후의 대결에 결말이 난 것이다.
“크흐흐흐. 시건방진 놈! 꼴 좋-다.”
승자는 신마!
십 장 상공에서 마신인 양 우뚝 서 있던 그의 입에서 괴소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혈신은?
그 어디에서도 흔적을 찾아볼 수가 없었다.
형체조차 남기지 못했다. 불사마력의 힘에 아예 가루가 되어 버린 거다.
세상에!
혈교 역사상 최초로 혈신령의 힘을 오롯이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낸 혈신이 가루가 되어 버리다니!
“크하하하! 하늘 아래 신마만이 오롯한 아리만의 화신이로다! 크으흐하하-하!”
신마가 통쾌하다는 듯 웃음을 터뜨렸다.
우르릉. 트드드드.
그 광소에 하늘과 땅이 몸살을 앓았다.
“시, 신마시여.”
“보중하소서!”
오마종이 재빨리 다가와 신마 아래 부복했다.
천하의 오마종이 호들갑을 떨 정도로 신마의 상태가 좋지 않아 보였기 때문이었다.
“크흐흐. 본좌는 괜찮다. 호들갑 떨 필요 없어.”
신마가 여전한 목소리로 고개를 흔들었다.
하지만 신마의 부상 정도는 뱉어낸 말처럼 좋은 상태가 아니었다.
얼굴은 밀랍인 듯 잿빛으로 죽어가고 있었으며 누더기에 가까울 만큼 찢겨나간 옷가지 사이 쩍쩍 갈라진 상처에서 굵은 피가 샘솟듯 흘러나오는 중이었다.
“끄으응.”
역시나 위중한 상태를 완전히 감출 수는 없었는지 신마가 앓는 소리를 내었다. 두 손을 하늘 위로 들어 올렸다. 불사마력을 집중했다.
“이 빌어먹을 종자들을 오늘 완전히 지운다아-앗!”
신마가 악을 쓰듯 고함을 질렀다.
휘우우웅. 버언쩍. 버번쩌저-적.
번쩍 들어 올린 신마의 양손에 예의 그 검보랏빛 덩어리가 뭉쳐지기 시작했다.
“죽어어-엇!”
신마의 손이 홍화장을 향해 힘껏 뿌려졌다.
그 손끝을 따라 검보랏빛 덩어리가 살 떨리는 파공음을 흩날리며 떨어져 내렸다.
그리고…….
쿠와아앙. 콰아아앙. 쿠콰콰-쾅!
유성이라도 떨어져 내린 것일까?
그 넓던 홍화장이, 그 많던 건물들이 한차례 들썩하는가 싶더니 이내 뒤로 밀리며 힘없이 터져나갔다.
“크아악!”
“우와악!”
비명이라도 지를 수 있는 자들은 그래도 꽤 실력이 좋은 축에 드는 마인들이었다. 추측하기도 힘든 그 거력에 휘말린 하위 마인들은 비명 한 번 내질러 보지 못한 채 그대로 죽어나갔다.
휘청!
“크흐…….”
한 차례 크게 흔들린 신마가 더는 버티지 못하고 땅 위로 내려 왔다.
“신마시여!”
“시, 신마시여. 보중하소서.”
오마종이 호들갑을 떨었다.
하지만 신마는 하얀 이를 드러내며 혈교를 향해 외쳤다.
“가라, 오마종. 살아남은 모든 것들을 지워버려라.”
어찌 거부할 수 있겠나?
“충!”
휘슷. 스스슷.
한 목소리로 대답한 오마종이 일제히 혈교를 향해 짓쳐들었다.
“크아악!”
“커헉!”
다시금 처절한 비명이 무너져 버린 홍화장 안쪽에서 들려오기 시작했다. 그때까지 살아남았던 고위급 혈교의 마인들이 혈신강령대법을 펼쳐 대항을 해 보았지만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권마종이 무심히 내지른 주먹질에, 혈마종이 펼치는 혈마오검에, 하나 남은 팔로 열심히 도법을 펼치는 도마종의 도에 갈가리 찢겨나갈 뿐이었다.
혈교는 오늘 그렇게 어이없이 무너졌다.
***
천양현 북서쪽 외곽.
철렁!
무위, 장예, 주천, 돈황, 옥문관을 통해 신강으로 가는 교역로의 초입을 달리던 대사제는 심장이 내려앉는 것을 느껴야만 했다.
추측하기 힘든 거대한 힘이 가슴속으로 스며드는 것을 감지했기 때문이었다.
‘혈신이……. 혈신령의 힘이 되돌아오고 있다.’
그것으로 확실해졌다.
혈신이 신마의 손에 죽어버렸다는 사실이…….
번쩍. 버번쩍.
빛을 잃었던 혈신령의 탈 안쪽에 다시금 피처럼 진한 혈기가 엉겨들었다. 신마의 손에 죽은 혈신에게 깃들었던 혈신령의 힘이다.
‘혈신령의 전설을 이뤘던 혈신의 힘까지 더해졌으니 다음번에는 더 강해질 거야. 틀림없어.’
그것이 바로 혈신령의 금제.
한 번이라도 혈신령을 썼던 사람은 모든 힘을 혈신령에 상납한 채 죽는다.
씨익.
그래서 대사제는 웃었다.
언제가 될지는 모르지만 다시금 혈신령의 봉인이 풀리는 날에는 지금보다 훨씬 더 강력한 혈신이 탄생하게 될 테니까…….
‘기다려라. 반드시 돌아온다.’
스산하게 다짐하며 대사제는 신강을 향해 멀고도 먼 길을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