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공짜는 없는 법이다
혈교의 마인 중, 살아남은 자가 얼마나 되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아무리 많아 봐야 삼백 명을 넘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신마가 뿌려낸 불사마력에 이어 오마종이 난입했다.
한 사람 한 사람이 무당파의 장문인과 대등하거나 우위의 고수들인 오마종이 작정하고 살수를 뿌렸으니 불사마력의 서슬에 살아남은 혈교의 고수들이 얼마나 더 버틸 수 있었겠는가?
혈신강령대법을 펼쳐 대적했어도 속수무책으로 쓸려 나갔다. 팔십 년 전에는 십 년 동안이나 버티며 전쟁을 이었지만 그날에는 불과 반나절을 넘기지 못한 것이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점이 있다면 오마종이 도주하는 혈교의 마인들까지 쫓아다니며 끝까지 다 죽이지는 못했다는 것이라고나 할까?
메뚜기 튀듯 사방으로 도주를 하는데 오마종이 그 넓은 홍화장의 담을 전부 막을 수도 없었고 신마는 더더욱 그럴 만한 상태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대충 살육을 마무리한 후 오마종은 신마의 뒤를 따라 십만대산 불회곡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올 때와는 달리 그 속도가 매우 느렸다.
신마의 몸 상태가 예상보다 훨씬 더 좋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신마는 불회곡에 돌아오자마자 다시금 조사동에 들었다.
“시, 신마시여…….”
지독한 내상을 입은 신마의 복귀에 음양자는 혼이 달아날 정도로 놀랐다.
“어서, 어서 운공요상을 취하소서.”
어찌해야 할 바를 몰라 호들갑을 떨었다.
애끓는 그 충심을 느낀 것인지 신마가 음양자를 향해 씽긋 웃어 보이며 말했다.
“회복하는 대로 신교의 숙원을 이룰 것이다.”
중원정복의 거보를 내딛겠다는 약속!
쾅!
음양자가 부복하며 이마를 청석에 찍었다.
“신명을 다 바쳐 준비토록 하겠나이다.”
목이 터져라 부르짖었다.
“믿겠다.”
그 한마디를 끝으로 신마는 조사동에 들어가 운공요상에 돌입했다.
‘드디어!’
콱!
몸을 일으킨 음양자가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신마가 조사동을 벗어나는 날, 그토록 기다리던 신교의 천년숙원이 풀리게 되기 때문이었다.
***
자금성 태화전.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황제는 조회를 시작으로 정무를 돌보느라 바빴다.
“감숙성 전장을 지키던 강병들의 순환배치 이후 북원의 기습이 날이면 날마다 증가하는 추세입니다, 폐하.”
“총병관이 감찰을 마무리한 후 원상복귀를 다 시켰음에도 그러한가?”
“그러하옵니다, 폐하.”
“북원의 흉포한 무리가 제국의 힘을 다시금 가늠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어쩌면 머지않은 장래에 큰 전쟁이 벌어질지도 모른다고 하옵니다.”
“……!”
연이은 불길한 보고에 조금은 어두운 얼굴이 되었던 황제의 표정이 확 살아났다. 자신의 등 뒤에 어떤 존재가 버티고 있는지 기억이 난 것이다.
‘맞아. 내게는 황룡패주가 있지.’
관과 무림이 별개라고는 하나 황룡패주는 이미 그 경계를 넘었다. 혈교에서 거대한 힘이 꿈틀대는 것을 감지하기가 무섭게 자신을 지키러 와준 것만 봐도 알 수 있었다.
‘놈들이 준동을 한다 하여도 황룡패주의 용력이라면 능히 쓸어버릴 수 있을 터.’
저 무도한 마교의 종자들도 일거에 쓸어낸 황룡패주가 있으니 걱정할 것은 하나도 없다.
‘그래도 일단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해야겠지?’
또 하나의 든든한 패가 떠올랐다.
바로 충신 양업의 자손인 양문광 총병관이었다.
“총병관을 들라 이르라. 내 그와 함께 논의한 후 적절한 조치를 내리겠노라.”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폐하.”
한 가지 사안이 끝나면 즉시 다른 안건이 올라왔다.
“다음은 때만 되면 해안가를 유린하는 왜구들을 위한 대비책을 마련해 달라는 산동성과 강소성 성주의 요청이온데, 현재 왜구들이…….”
안건이 끝도 없이 올라오고 토의되고 있었지만 황제의 뒤에 선 용무린의 생각은 다른 곳에 가 있었다.
지난 보름 사이 개방과 군부의 정보망을 통해 상당한 양의 연락을 받았는데 그 정보를 토대로 향후의 진로를 결정하기 위해서였다.
‘혈교가 박살이 났다 이거지?’
용무린이 감지했듯 홍화장에서는 공전절후의 대결이 있었다고 한다.
감히 추측하기도 힘들 정도의 격돌!
그 끝에 홍화장은 완전히 부서졌고 마인들 역시 숱한 주검만 남겼다고 한다. 더는 그 어떤 혈교 마인들의 모습도 찾아볼 수 없다는 전언이었다.
혈교의 패망이 확실해진 것이다.
무림맹을 시작으로 큰 피해를 입었던 화산파와 종남과 청성이 한시름 놓았다. 전력을 다해 피해 복구에 들어갔다고 한다.
‘신마 그 자식은 분명히 운공요상을 하느라 시간을 허비할 테고…….’
깜짝 놀랄 만큼 강대했던 그 기운의 주인이 혈교의 교주가 맞았다면 아무리 신마라 하더라도 멀쩡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 사이 난 무얼 하면 좋을까?’
뭐, 오래 생각할 것도 없었다.
‘역시 가지치기를 먼저 해두는 것이 좋겠지?’
만금상단을 흡수하는 것으로 마교의 자금줄 하나는 확실히 끊었다. 무림맹에 연락을 해 마영각이라고 하던 놈들의 중원 내 정보조직마저 다 부숴놓았다.
하지만 금왕 정관호와 외원 부총관이었던 놈의 입을 통해 들었던 정보가 모두 사실이라면 아직도 놈들의 자금원은 건재하다.
‘흑상과 염상이라…….’
만금상단처럼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놈들의 자금력은 만만한 것이 아니다. 특히 염상 같은 경우 국가에서 통제하는 소금의 밀매를 통해 막대한 부를 축적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이 된다.
‘그 두 곳마저 쓸어버려야 해.’
그래야만 마교의 숨통을 제대로 조이게 된다.
마교와의 싸움이 앞으로 어떤 식으로 전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자금력을 고갈시켜 놓는 것만큼 놈들의 숨통을 확실히 옥죄는 일도 드물 것이다.
‘먹고 입고 수하들을 부리는 사소한 것 하나까지 모두 다 돈이야 돈.’
돈줄을 죄게 되면 그 효과는 무척 클 것이다.
우당탕 하고 전면전만 벌이지 않는다면 세력이 약화될 수밖에 없으리라.
‘본교 소속 마인들이야 별 동요가 없겠지만 외부에서 영입된 놈들과 하위 마인들은 동요가 클 거야.’
오궁이원이전 소속 마인들과는 달리 하위 마인들은 솔직히 아후라마즈다에 대한 신심이 없는 편이다.
쉽게 말해 돈과 명예 따위의 실리를 찾아 움직이는 의리 없는 놈들이라는 거다.
‘어쩌면 모래알처럼 떨어져 나갈 수도 있어.’
신마가 얼마나 큰 부상을 입었는지가 관건이다.
그의 원상회복이 늦어지면 늦어질수록 흑상과 염상을 쓸어버린 효과가 적나라하게 나타날 것이다.
‘그 전에 먼저 해야 할 일이 있지.’
이참에 그동안 들르지 못했던 본가에 한 번 들러야한다.
‘어머니 얼굴도 뵈고 폐관수련에 드신 아버지와 이제는 한 분밖에 남지 않은 숙부님을 비롯해 두 분 의숙과 직계 형제들도 고루 살펴야만 해.’
상청무상검법을 비롯해 전수한 무공의 기본적인 것이야 이미 사사했다지만 무공 발전 단계에서 지금이 가장 중요할 시기다.
보다 더 높은 경지를 향한 깨달음에 목말라 하고 있을 때 자신이 조금만 도와준다면 한층 더 수월하게 경지를 높여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후 흑상과 염상을 찾아 조진다.’
결정을 내리자 몸이 벌써 근질근질해졌다.
황제의 강권에 의해 태화전에 나와 시립하고는 있었지만 관심도 없는 이야기를 계속해서 듣고 있자니 정말 죽을 맛이었다.
그 순간 황제가 용무린을 힐끗 돌아보았다.
‘어라? 황룡패주의 표정이 어째…….’
황제가 대뜸 용무린의 내심을 읽었다.
하긴, 그도 그럴 것이 지금 용무린의 얼굴은 어명이라는 말도 뿌리치고 도망치던 그날 바로 그 얼굴이었던 거다.
‘무슨 핑계로 붙잡지?’
삼공과 삼고를 비롯한 문무백관이 경쟁적으로 목소리를 높이고 있었지만 하나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황제가 아끼는 여동생과의 혼사도 마다하고 어명이라고 윽박질러도 콧방귀를 뀌는 녀석인데, 대체 어떤 것으로 녀석을 눌러 앉힐 수 있을까?’
용무린을 떠나보내기가 싫었다.
더는 불사신기를 넣어달라고 하지 않아도 이제는 조석으로 행하는 순수한 단전호흡만으로 충분했지만, 지금처럼 등 뒤에 가만히 서 있기만 해도 든든했던 거다.
반면에 용무린은 달랐다.
‘무슨 핑계를 대든 오늘은 무조건 튄다.’
어디에 어떻게 숨었는지 아직 감도 잡지 못한다.
개방에서도 아직 꼬리를 잡지 못했으니 놈들을 찾아내려면 상당한 시간을 필요로 하리라.
‘무슨 핑계를 대고 튀는 게 좋을까?’
‘저 녀석을 어떻게 붙잡을까?’
용무린은 나름 도망칠 궁리를 하느라 바빴고 황제는 황제대로 용무린을 눌러 앉게 할 묘수를 짜내느라 하루 해가 저물어가고 있었다.
***
여타 거대 문파들과는 달리 하오문은 따로 총단이라는 개념이 없다.
하오문주가 후대를 지정하고 여러 장로들이 됨됨이를 보아 인정하면 그 사람이 하오문주가 되고 그 사람이 있는 곳이 바로 총단이 되는 셈이다.
당대 하오문주는 사십오 세의 중년 미부인 이능하.
이십오 세의 어린 나이에 강소성의 성도 남경의 분타주의 자리에 올라 불과 십 년 만에 하오문의 문주에 오른 경영의 귀재였다.
“흐음. 이 정보가 정녕 사실이더냐?”
혼잣말과도 같은 이능하의 질문에 천장에서 나직한 대답이 흘러나왔다.
“확실합니다. 이미 다섯 단계의 확인 작업을 마쳤습니다. 강소성 북동쪽 운태산을 중심으로 산동성과의 경계인 흑림, 동쪽 끝인 운련항, 남쪽으로 향수, 염성, 대풍현에 이르기까지……. 각 지부의 형제들이 은밀히 죽어나갔습니다.”
반짝.
이능하의 눈에 독기가 번득였다.
“흉수는?”
“흑상과 염상으로 보입니다.”
듣자마자 심장이 뻑뻑해지는 느낌이었다.
놈들은 여느 흑도의 무리들과는 또 다른 성향을 지닌, 아주 지독하고 잔인한 놈들이었기 때문이었다.
“놈들이 왜 갑자기 하오문의 지부들을 노리는 것인지는 알아냈나?”
“분석중입니다만, 아무래도 만금상단의 붕괴 여파로 중지가 모이는 형편입니다.”
“만금상단의 붕괴 여파라…….”
많은 것을 시사하는 대답이었다.
불과 달포 전에 만금상단의 정체가 바로 마교의 자금줄이라는 것이 밝혀졌다.
황룡패주의 파격적인 행보 끝에 금왕 정관호는 변명 한 번 제대로 해보지도 못한 채 죽어야만 했으며 만금상단은 모든 자산을 압류당하고 결국 황명에 의해 황룡패주에게 귀속되었다.
“그 여파에 따라 꼬리를 잡힐 것을 염려한 놈들이 활동을 멈추고 합법을 가장하기 위해 거점을 마련하기 시작했다는 뜻이겠지.”
“맞습니다.”
그 말은 곧 놈들 역시 마교와 관련이 있다는 것을 강력하게 시사한다.
흑상과 염상 짓은 황룡패주의 추격 때문에 몸을 사려야만 하는데 마교에 보내야 할 돈은 여전하니 궁여지책으로 합법적인 영업을 하려는 것이다.
‘미치겠군. 멀거니 두 눈 뜨고 업장을 빼앗겼는데도 함부로 공격할 수 없다니 말이야.’
수십 개의 지부에 나뉘어 있어서 그렇지 하오문의 전력도 한데 모으면 나름 준수한 편이다. 신주오가나 전통의 명문인 오대세가보다는 못해도 중소문파 수준은 족히 되는 정도인 것이다.
하지만 상대가 흑상과 염상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녹림십팔채나 장강의 수로십팔채와 같이 정체가 밝혀진 것이 아니라 정확한 고수의 숫자나 규모조차 아직 제대로 알고 있는 게 없는 거다.
‘거기에 더해 마교와 관련이 있다고 한다면…….’
붙어보나 마나 필패다.
틀림없이 마교의 고수들이 곳곳에 포진되어 있을 테니 더 두렵다.
‘마교와의 연계에 대한 확실한 증거가 없다면 관의 힘을 이용할 수도 없어.’
하오문의 진실한 힘은 정보가 첫째요, 두 번째는 고관대작의 처첩으로 들어가 있는 여인들의 힘에서 나온다.
선공을 취하면 그 힘을 빌려 약간의 이득은 취할 수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지금까지 그림자처럼 살아온 놈들이 하오문의 수작을 모를 리 없고 이내 총공세를 취해 올 가능성이 너무나 크다.
‘강소성에 모든 고수를 집중하면 나머지 분타나 지부를 지켜낼 수가 없어.’
온갖 흑도 패거리들 속에서 하오문을 지키려면 완전한 힘의 집중은 힘들다.
그러니 결과가 빤히 보이는 거다.
흑상이나 염상과 본격적으로 붙으면 하오문은 멸문에 가까운 타격을 입을 수밖에 없다.
‘별 수 없다. 회심의 한 수를 사용하는 수밖에…….’
이런 일로 사용하기에는 다소 아까운 감이 없지 않지만 현재 상황으로 보아 그만 한 패도 없다.
“무한의 소가흔 분타주에게 연락을 취해라.”
“무어라 전하오리까?”
이능하의 명령은 간단했다.
“그분께 밀린 정보료 계산을 할 때가 돌아왔다 전하라고 하여라.”
“알겠습니다.”
천장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힘이 부쩍 실렸다.
오래지 않아 한 마리의 비응이 무한의 하오문 분타를 향해 힘차게 날아올랐다.
***
비슷한 시간 용무린은 황제와 더불어 황궁무고에 들었다.
흠안전으로 나 있던 입구를 폐쇄한 후 새롭게 난 출입구는 황제의 침전인 건청궁, 그 중에서도 황제가 황후와 더불어 밤을 보내는 침소였다.
‘젠장. 별로 궁금하지 않다는데도 왜 자꾸 이러시나?’
급한 일 때문에 가봐야 한다고 아무리 애써도 소용이 없었다. 황제는 막무가내로 용무린에게 선물을 해주겠노라며 이곳으로 잡아끌었다.
“거 참, 고가 아무에게나 이런 은혜를 내리는 줄 알아?”
“거야 물론 아니시겠지요.”
“그래. 이곳에 들 수 있는 사람은 황족에 한해서 평생 동안 단 한 번만 들어올 수 있는 기회가 주어져. 그런데도 내가 우리 황룡패주를 위해 활짝 열었다는 거 아니야?!”
황제가 목에 힘을 팍 주었다.
용무린의 고개가 슬그머니 끄덕여졌다.
‘하긴, 그럴 법도 하네.’
무림에서나 황궁무고라 불리지 자금성에서는 황궁비고라 불리는 곳답게 정말이지 없는 것이 없을 정도였다.
주먹만 한 묘안석과 야명주를 비롯해 온갖 종류의 보석과 귀물들이 방 안에 가득했다.
사방 십여 장에 이르는 방이 모두 열 개.
그 뒤에는 따로 병장기와 영약 그리고 이름 모를 비급들을 모아 놓은 곳이 또 열 개나 되었으니 황궁무고의 거대함과 가치를 잘 알 수 있으리라.
“하나 고르도록!”
“예?”
용무린이 눈을 동그랗게 뜨자 황제는 회심의 미소를 지어 보였다.
“무얼 그리 놀라는가? 아무려면 고가 황룡패주를 이곳까지 끌고 온 이유가 고작 눈요기 따위만 시키기 위함인 줄 알고 있었단 말인가?”
“……!”
“무엇이든 하나 고르도록 하라. 황룡패주이자 무림왕인 그대에게 고가 특별히 하사토록 하겠다.”
그렇다면 굳이 거절할 필요가 없다.
‘뭘 고를까?’
대체 뭘 골라야 잘 골랐다고 할 수 있을까?
용무린은 신중해진 시선으로 산더미처럼 쌓인 보물들을 차례차례 훑어 나가기 시작했다.
용무린은 황금이나 보석이 가득 차 있는 곳은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돈이 궁한 것도 아닌데 뭐.’
흑야방의 노백인, 독사, 유중 등의 수하들이 지금도 착실히 전장에 돈을 맡기고 있을 거다.
거기에 더해 지금은 만금상단이 통째 내 것이다.
곡식과 몇몇 중요 생필품은 수익이 거의 없다 해도 만금상단의 전체 수익은 막대한 수준의 것, 앞으로 돈 따위로 궁지에 몰릴 일은 없으리라.
‘내 수준이라면 영약도 필요 없지.’
먹어서 나쁘지는 않겠지만 먹는다고 불사신기의 수준이 한꺼번에 훅 늘어나지는 않는다. 중요한 것은 영약이 아니라 불사신기를 대성하는 것이다.
‘대성지경에 이르면 대자연의 기를 직접 끌어와 불사신기로 치환해 사용할 수 있을 테니까…….’
지금도 어느 정도는 가능하다.
하지만 신마와 혈교주가 싸움을 벌이며 뿜어낸 힘의 여력을 직접 느껴보니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최소한 불사신기나 불사대천검 둘 중 하나를 대성하기 전에는 필승을 장담할 수 없다는 것을.
용무린은 영약창고를 훑어보며 내심 고개를 흔들었다.
‘거의 바닥을 보였었는데, 그새 또 많이 찼네.’
상관세가와 마교가 이곳을 차지한 삼 개월의 시간 동안 영약창고의 영약들이 그야말로 훅 줄어들었다. 마령인을 만드느라 마음껏 가져다 쓴 것이다.
그런데 불과 십여 개월 만에 다시 이만큼이나 채워지다니!
‘혈고로 인한 죄를 씻으려는 문무백관들이 황제의 건강을 위한다는 명목으로 앞다투어 거금을 들여 구입해 바쳤다고 했었지?’
사례감의 귀띔으로 알게 된 사실이다.
물론 그들이 바친 것은 소수였고 나머지 절대적인 분량은 타국의 사절들이 조공을 통해 진상한 것들이다. 그렇지 않으면 어림도 없는 일이다.
‘병장기와 방어구들은 어떤 것들이 있으려나?’
용무린은 거침없이 영약들이 있는 방을 지나쳐 진정한 무고라고 할 수 있는 곳으로 향했다.
“지금까지는 패주가 계속해서 심드렁한 표정을 지었지만 무고만큼은 다를 것이다.”
황제가 자신만만한 얼굴로 장담했다.
하지만…….
‘애걔?’
무고의 병장기들을 한 번 훑어본 용무린은 솔직히 실망을 감추지 못했다.
무기나 방어구들이 모두 실전용이라기보다는 의장용이거나 관상용이어서 보석으로 치장된 화려한 것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이다.
‘황궁무고의 무기들이 뭐 이래? 응?’
실망하던 용무린의 눈에 무엇인가가 띄었다.
“호오. 간장과 막야라…….”
놀랍게도 전설의 명검인 간장과 막야가 황궁무고에 고이 잠들어 있었다.
“그래. 이런 것들이 진짜 무기인 것이지!”
호기심이 동한 용무린은 잽싸게 간장과 막야를 차례차례 들어 올린 후 무게 중심을 가늠해보고 손가락으로 퉁겨 검명을 들어 보았다.
따앙! 따앙!
간장과 막야가 여전히 청아한 검명을 흘려내었지만 용무린의 눈살은 바로 찌푸려졌다.
‘전설의 명검들이 뭐 이래?’
무게중심을 비롯한 검의 기본은 너무나도 훌륭했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철의 질이 좋지 못했다.
경지가 경지인지라 검명만 들어봐도 다 알 수 있다. 검에 불순물이 너무나 많이 섞여 있었다.
‘아! 그렇지!’
불현듯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시대에 따른 기술의 발전 차이 때문이로구나.’
동검이 주류인 전국시대 초기에 한 발 앞선 철검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간장과 막야가 같은 쇠도 베는 전설의 명검으로 불렸던 것이지, 현재와 비교하면 절대로 전장에 들고 나설 수 없는 수준인 것이다.
‘어쩐지 간장과 막야와 같은 명검이 아직도 고스란히 남아 있더라니!’
상관세가와 마교의 마인들이 이곳에 진을 치고 있던 시간이 무려 석 달 남짓이나 된다. 그 사이 오죽 많이 뒤져보았겠는가? 놈들 역시 이 검들을 보았을 거다.
‘푸흐흐. 후대로 들어오며 만들어진 이름 없는 무기들의 품질이 더 좋다니!’
따앙. 따아아앙.
하나씩 검명을 들어 보았는데, 후대로 들어와 무고의 한 자리를 차지한 무기들일수록 검명이 더 맑고 청아한 상등품이었다. 쓸데없이 보석으로 치장이 된 화려한 의장용 검마저도 그러했다.
‘하긴, 후한 시대에 들어와서야 비로써 청동제 무기들이 거의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고 하니 뭐…….’
그러니 나머지는 보나 마나인 거다.
‘반년 전에 한 식구가 된 천수신장 공손위 어르신이 만들어 낸 내 풍뢰와 소검비연이 차라리 전설의 무기에 더 합당한 셈이네.’
풍뢰나 소검비연보다 더 뛰어난 무구를 찾아 볼 수가 없었다. 상관세가와 마교 놈들이 이곳의 무기들을 이렇게 고스란히 놓아둔 것에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는 것이다.
“어째서 그런 표정을 짓는 것이냐? 설마하니 마음에 드는 것이 없는 것이냐?”
질문을 던지는 황제의 목소리가 조금 날카로워졌다.
마음에 들지 않는 듯 찌푸려진 얼굴에 비웃음까지 떠오르는 것을 보니 자존심이 팍 상했던 것이다.
‘너무 적나라하게 말하면 안 되겠지?’
어찌할까 고민하던 용무린은 황제의 자존심을 적절히 세워주기로 마음먹었다.
“황제폐하의 위엄을 나타내기에는 더없이 좋습니다.”
사실이었다.
고대로부터 진상되어온 온갖 무기들 중 그래도 최 상등품만을 골라 모아온 것이니 장수에게 하사할 지휘용 검으로는 이만한 것들도 없으리라.
“다만, 제가 이미 병장기에 구애를 받는 경지가 아닌지라 별 관심이 없을 뿐입니다, 폐하.”
“오오, 역시!”
황제의 표정이 단박에 살아났다.
헤벌쭉 웃으며 자꾸만 용무린을 재촉했다.
“그래도 뭔가 하나 골라 보거라. 고가 패주에게 주고 싶어 그러느니라.”
결정은 이미 내린 후다.
용무린은 주저 없이 황제에게 원하는 것을 말했다.
“약재 창고에 들어 있는 영약 중 새로이 들어온 것들에 삼왕, 천지구엽초, 삼선주엽구과, 오행설란 등이 있더군요. 저는 그 녀석들이 필요 합니다, 폐하.”
“응? 그렇게 많이?”
생각 밖이었던지 황제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용무린이 재빨리 말을 이었다.
“황제폐하의 안위를 든든하게 지키기 위해서 꼭 필요한 것들입니다. 그 영약들로 마교와 혈교의 사특한 무리들을 박멸하는 데 사용할 생각입니다.”
“오오! 황룡패주는 어쩌면 그렇게 고의 안위만 생각을 한다는 말이더냐?”
황제가 감동을 사발째 들이켠 얼굴로 고개를 크게 끄덕여 보였다.
“오냐. 주지. 주고말고! 고의 안위를 위해 필요로 하다는데 무엇인들 주지 못할까? 가져가거라. 본디 한 가지만 허락하려 했으나 패주의 충심이 고의 마음을 움직였느니라. 패주가 말했던 것들을 모두 챙겨도 좋다.”
“감사합니다, 페하.”
혹시라도 마음이 변할까 용무린은 재빨리 약재 창고로 달려가 영약들을 챙겼다. 잡히는 대로 막 집어 소매에 집어넣었다.
“인형설삼은 아까 말하지 않았던 것인데…….”
생각과는 달리 너무 많은 것을 퍼 담는 듯하자 황제가 슬그머니 말꼬리를 늘였다.
“폐하. 이게 다 폐하를 잘 지키기 위해서라니까요?! 믿어 보십시오, 쫌.”
척척척. 쑥쑥.
“그, 그래라.”
황제가 멋쩍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가 도저히 안 되겠는지 소심하게 한마디를 더 중얼거렸다.
“그 공청석유, 이번에 들어온 건데……. 고도 아직 맛도 못 봤는데…….”
정신없이 이것저것 챙기며 용무린이 외쳤다.
“폐하! 폐하께는 불사신기가 있잖습니까. 이런 거 다 필요 없다니까요? 조석으로 호흡만 열심히 하세요. 영원히 타오르는 불꽃, 살아 있는 정력의 화신이 되실 것이라는 것을 황룡패주의 이름을 걸고 보장하겠습니다.”
사실이다. 제갈영령과 더불어 이미 확인을 끝냈다.
불사신기를 운용하면 그게 당최 죽지를 않는다. 영원히 타오르는 불꽃처럼 무소불위의 위용을 자랑한다. 그래서 무려 이틀 내내 행복한 시간을 보내지 않았나?
단전을 만들 때 밀어 넣어 준 것과 조석으로 행하는 호흡 수련이라면 황후를 비롯한 열두 명의 여인들을 동시에 만족시키고도 충분히 남을 것이다.
“그, 그래? 뭐, 그렇다면야…….”
황제가 그제야 뒤로 훌쩍 물러났다.
정력의 화신이 쩨쩨하게 보일 수는 없다고 생각했는지 거침없이 영약을 쓸어 담는 용무린 쪽으로 시선도 돌리지 않았다.
척척척. 쑥쑥쑥.
용무린의 손은 갈수록 더 빨라졌다.
본능적으로 대자연의 기가 많이 응집된 영약을 골라 잘도 소매에 쓸어 담았다.
‘아버지. 조금만 기다리세요. 제가 단숨에 초절정의 경지로 올려드릴게요.’
이 영약들에 의성 신우량의 솜씨가 더해진다면 아버지뿐만 아니라 비룡문 전체의 전력이 단시간에 훌쩍 높아지게 될 것이다.
‘이것도 챙기고, 저것도 챙기도…….’
애초에 황제에게 말했던 것은 불과 네 가지였지만 어느 사이엔가 용무린의 소매 속에는 수십여 가지의 영약이 가득 들어찼다.
***
홍연루주 소가흔이 신중한 얼굴로 물었다.
“연락은 왔나요?”
하오문의 장로이자 소가흔의 사부인 극모란이 환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방금 확인했다. 삼고의 하나인 소사의 첩으로 들어간 예진으로부터 연락이 왔는데, 어젯밤에 자금성에 들러 그분께 틀림없이 전했다고 하는구나.”
바로 이것이 하오문의 진정한 힘인 것이다.
구중궁궐인 자금성에도 원하는 때에 원하는 사람에게 말을 전할 수 있는 힘! 천대받고 버려진 여인들이 모여 이뤄낸 쾌거인 것이다.
“그러면 오늘 밤에는 어떻게 하든 핑계를 만들어 황룡패주께 제 서신을 보내겠군요.”
“그렇겠지.”
“패주께서 빨리 움직여 주실까요?”
“그야 모르지.”
“…….”
“하지만 이것 하나만은 확실히 말할 수 있겠다. 그간의 행동으로 보아 다른 것은 몰라도 황룡패주라는 사내는 은과 원 하나만큼은 확실히 매듭을 진다는 거야.”
“하긴…….”
고개를 끄덕이며 소가흔이 나지막이 말을 이었다.
“빨리 와 주셨으면 좋겠네요. 강소성에서 죽어나가는 우리 문도들을 위해서요.”
***
약재창고의 영약 재고가 훅 줄어든 상실감을 황제는 술로 달래려 들었다.
“마셔라! 오늘 한 번 거하게 취해보자꾸나.”
“예, 폐하.”
오늘만큼은 용무린도 빼지 않고 황제의 비위를 잘 맞춰 주었다. 주거니 받거니 황제와 더불어 온갖 명주를 마구 들이켰다.
적당히 취기가 오른 황제가 살짝 혀가 풀린 목소리로 떼를 쓰기 시작했다.
“패주. 진짜 그럴 거야?”
“뭔데요 또?”
더불어 취기가 오른 용무린도 막 나갔다.
하지만 황제는 황룡패주를 정말 친 혈족과 같이 생각하는지 아무렇지도 않게 받았다.
“내 막내 여동생 주약란 말이야. 정말 그렇게 나 몰라라 할 거냐 이 말이지!”
“싫은 게 아니라고요 폐하.”
“아니면?”
“잘 아시잖아요. 저 사랑하는 여자 있다니까요? 옹주님을 받아들이게 되면 그녀는 후처가 되어야 해요.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날 거예요. 저는 그게 싫어요. 그래서 받아들일 수가 없어요, 폐하.”
“허어! 그 여자는 삼종칠거도 모른단 말이더냐? 영웅이 삼처사첩을 취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거늘, 어찌 그 정도로 눈물을 흘리는 투기를 부려 부리길?”
황제의 목소리가 갈수록 높아질 때였다.
문 밖에 시립하고 있던 상선감이 가느다란 목소리로 길게 외쳤다.
“폐하! 황후마마와 황귀비마마께서 귀비, 비, 빈들과 함께 입실하셨사옵니다-아.”
정말 구세주가 따로 없었다.
황제의 말을 들을 필요도 없다는 듯 용무린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여인들이 떼로 몰려왔다는 말에 고개를 살짝 갸우뚱한 황제가 이내 목소리를 높였다.
“패주와 더불어 술을 마시는 것을 잘 알 터인데 어쩐 일이지? 하여튼 들라하라!”
“녜-이!”
소리도 없이 문이 열리고 황후와 황귀비를 비롯한 황제의 여인들이 우르르 몰려들었다. 황제 앞에 도열한 후 날아갈 듯 대례를 올렸다.
황제가 말끝을 올렸다.
“태교에 힘써야 할 황후께서 황귀비와 귀비, 비, 빈들을 모두 거느리고 예까지 어인 걸음이시오?”
황제의 질문에 황후가 날아갈 듯 다가와 곁에 앉으며 용무린을 바라보았다.
“폐하. 어찌하여 은인에게 감사 인사도 건넬 기회를 주지 않으시나이까?”
“아하!”
그제야 알겠다는 듯 황제가 웃는 낯으로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황후가 용무린을 향해 환하게 웃어 보이며 말을 이었다.
“황룡패주가 황상의 옥체를 무사히 구했으니 지아비를 구원받은 본 후의 목숨 역시 함께 구한 것임에 틀림이 없는 일 아니겠습니까?”
“그렇지! 암! 그렇고말고.”
황제가 죽었다면 황후 역시 상관세가와 마교의 마인들 손에 잘못되었을 가능성이 농후했다. 황후의 말이 절대적으로 옳은 것이다.
“하여, 이제나 저제나 황제 폐하께서 자리를 마련해주기만을 기다려왔으나 패주가 바람과 같아 또다시 훌쩍 떠날까 두려워 오늘 이처럼 찾았나이다.”
지아비를 구원해 준 일에 대한 인사를 지금이라도 하고 싶다는 뜻이다.
“허허허. 고가 무심했구려.”
황제는 흔쾌히 허락했다.
“황후의 말이 참으로 옳소. 고를 일깨워 주어 고맙소.”
“무슨 말씀을…….”
“아니오! 황룡패주는 고의 목숨을 구해줬을 뿐만 아니라 불사신기를 건네어 고의 정…… 아니 건강을 회복하게도 해주었으며 혈교라는 사이한 무리가 발호하자 고를 지키고자 이렇게 또 와준 사람 아닌가?”
오그작.
낯간지러운 말에 용무린의 손이 바로 오그라졌다.
‘아오, 내가 이래서 여기 있길 싫어한다니까?’
영약 챙길 욕심만 아니었어도 낮에 바로 튀었어야만 했는데, 이젠 별 수 없이 버텨야만 한다.
그때 황후가 점잖은 목소리로 진심을 가득 담아 용무린에게 공치사를 했다.
“황룡패주.”
“예, 황후마마!”
“황제폐하를 구해주어 정말 고맙소.”
“무슨 말씀을! 마땅히 해야 할 일이었을 뿐입니다. 더는 괘념치 마소서, 황후마마.”
용무린의 겸양에 어림도 없다는 듯 황후가 품에서 두툼한 서류를 꺼내 앞으로 슥 밀었다.
“패주에게 뭐가 필요할까 많은 궁리를 했지만 딱히 뭐가 필요할지 몰라 봉록으로 토지를 준비했소. 과거 황제께서 본 후에게 내리신 사전의 일부로 일만 석은 족히 생산할 게요. 소소하지만 받아주길 바라오, 패주.”
“아닙니다, 황후마마. 저는 이미 폐하께 너무 많은 것을 받았습니다. 더는 받을 수가 없음입니다.”
다 귀찮다는 듯 용무린은 맹렬히 고개를 휘저었다.
그때였다.
잠자코 그 모습을 지켜보던 황귀비가 불쑥 끼어들었다.
“호호호. 황후마마, 황룡패주가 물욕이 너무 없사오니 이렇게 하면 어떻겠습니까?”
“오! 황귀비에게 무슨 좋은 수라도 있는가?”
반색을 하는 황후를 향해 회심의 미소를 지어 보이며 황귀비가 말을 이었다.
“황룡패주의 별호가 삼절일학이라 들었습니다. 그 중 난을 치는 솜씨와 초상화나 산수화를 그리는 솜씨가 중원제일이라고 알려져 있지 않습니까?”
용무린은 뭔가 분위기가 쌔하게 돌아간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여기서 그 말을 왜 하는 건데? 하지 마. 하지 말라고!’
용무린의 애타는 심정을 알지 못하는 황귀비의 입에서 청천벽력과 같은 말이 쏟아지고야 말았다.
“난이라도 한 폭 쳐 달라하는 것이 어떠할는지요?”
“그 난을 본 후와 황귀비가 사는 것이다?”
“오오, 좋은 방법이로다.”
황후와 황제가 활짝 웃었다.
‘내가 미쳐!’
용무린의 얼굴은 반대로 썩어 들어갔다.
날벼락도 이런 날벼락이 또 없다.
이제는 기억조차 희미한 삼절일학으로서의 솜씨가 필요로 할 줄이야!
‘글줄이야 전생의 나인 절대검신이나 그 망할 놈의 신마 녀석도 어느 정도 읽었으니 무슨 대화를 나누든 충분히 이끌어갈 수 있지만 화공으로써의 솜씨도 그럴까?’
아무리 생각해도 무리였다.
신마 진무량이 진정한 나인 줄 알고 있었을 때조차 간단한 권장지각이나 검초를 펼 때 미세한 실수가 잦았다. 그래서 백일 가까운 수련을 통해 겨우 현재의 몸에 기억 속의 감각을 일치시킬 수 있지 않았던가?
‘진정한 내가 절대검신이라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역시 마찬가지였지.’
불사대천검은 물론이고 그 괴리감 때문에 진천수라도와 비연오식조차 제대로 펼칠 수 없었다.
‘내가 보기에는 난을 치거나 산수화를 그리는 것 역시 마찬가지란 말이야.’
머릿속에 정보가 아무리 많이 남아 있어도 소용이 없다.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라는 말이 있듯이 서화 역시 무공 수련하듯 연습해야만 제대로 그려낼 수 있을 거다.
‘어쩌지?’
황제는 물론이고 황후와 황귀비를 비롯해서 귀비, 비, 빈들이 기대 가득한 얼굴로 용무린의 얼굴만 바라보고 있는 앞이다.
‘그림 값으로 황후가 연간 일만 석을 생산하는 농지의 토지문서까지 꺼내놓은 앞이야.’
정말 미칠 노릇이다.
황후에 이어 황귀비마저 은하전장에서 발행한 황금 일 관의 전표를 그림 값으로 준다며 꺼낸 판국이니…….
“무엇 하느냐? 상선감은 어서 황룡패주가 난을 칠 수 있도록 준비를 하라!”
“녜-이!”
일이 점점 더 커졌다.
상선감이 기대감 가득한 얼굴로 문방사우를 가져와 용무린 앞에 늘어놓았다. 그림을 그리는 모습을 직접 보고 싶은지 나가지도 않고 먹을 갈고 자빠졌다.
‘환장하겠네, 정말!’
분위기 때문에라도 ‘그거 개 뻥인데요?’ 라는 말로 넘어갈 수는 없었다.
그냥 대충이라도 그려볼까?
‘그랬다가 난이 아니라 낙서가 되어 버리면 그때는 어떻게 하고?’
위치가 위치이고 장소가 장소인지라 나 혼자 창피당하고 끝나는 일이 아니게 된다.
‘지금껏 나를 믿어왔던 황제도 실망을 할 테고, 폭풍칭찬을 해왔으니만큼 황제의 체면까지 상하게 된다고!’
더불어 오늘의 망신살이 비룡문에까지 뻗어나가게 되리라. 궁중에 허언은 없다, 라는 격언이 어떤 형태로 나타날지 모르는 거다.
“준비가 다 되었나이다, 폐하.”
그 사이 먹을 다 간 상선감이 조용히 뒤로 물러났다.
끝까지 기대감 가득한 시선을 용무린을 향해 보내면서 나갔다.
“멋진 난 한 폭 쳐 주게나, 패주.”
“기대가 크옵니다, 폐하.”
“마찬가지 심정입니다, 황후마마. 그간 삼절일학의 위명을 어찌나 귀가 따갑게 들었는지…….”
황제의 재촉에 황후와 황귀비가 가세했다.
‘아오, 모르겠다. 한 번 해보자.’
그리긴 하는데 그냥은 안 된다.
수많은 서화를 감상해온 황제와 황후, 황귀비의 안목이란 극상의 것일 터, 서투른 솜씨로 난이나 산수화를 그리려다가는 즉시 망신을 당한다.
‘난이나 산수화는 그릴 수 없어. 대신, 뭐라 콕 집어 형언할 수는 없지만 굉장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도록 그려내야만 해.’
그런 것이 대체 있기나 할까?
하지만 놀랍게도 용무린은 곧 적당한 것을 하나 떠올릴 수 있었다.
‘좋아! 그걸 표현하자.’
휘릭.
용무린의 의지가 일자마자 붓이 제 혼자 날아올랐다.
단순한 허공섭물을 펼친 것이 아니었다.
어검술을 응용한 것으로 지금부터 할 일에 꼭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오오오! 이런 신기가!”
“폐, 폐하. 참으로 신묘한 일이옵니다.”
“붓이 제 스스로 날아오르다니요?”
황제를 비롯한 모두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난생 처음 보는 절대적인 무위에 누구도 끝까지 말을 잇지 못했다.
붓이 적당히 먹물을 빨아들였다.
가로 다섯 자, 세로 석 자의 화선지 위에 박힌 듯 고정이 되었다.
‘후우우. 일단은 분위기 좀 잡고…….’
용무린은 눈을 지그시 잡았다.
안 그래도 되는데 오른손을 내밀어 허공을 쥐는 시늉까지 해보였다. 그런 후 모든 심력과 정신력을 한데 모으듯 눈썹을 살짝 찌푸렸다.
‘꽤 그럴듯하겠지?’
확실히 그런 모양이었다.
꿀꺽. 꾸울꺽.
여기저기에서 마른 침 집어 삼키는 소리에 긴장감과 기대감만 가득할 뿐이었다.
‘우리 폐하, 이거 지켜보다 지리겠다. 대충 이쯤에서 시작하자.’
불사신기를 살짝 더 일으켰다.
휘이잉. 휘이이이-!
압도적이면서도 정명한 불사신기가 주변을 휘감음과 동시에 용무린의 빈손이 허공에 파괴적이고도 아름다운 어떤 선들을 그렸다.
쉬이익. 쉬쉬쉬쉭. 스스슥.
화선지 위에 떠 있던 붓이 용무린의 빈손과 한 치의 어긋남도 없이 움직였다. 화선지 위에 파괴적이고도 아름다운 선을 그려내었다.
스아아악!
용이 하늘을 거슬러 오르는 것처럼 화선지를 누볐고,
사아악. 쉬리리릭.
또 때로는 세상 모두를 집어 삼킬 듯 광포한 용권풍이 되었다가도,
피쉬이잇!
이내 모든 것을 관통하는 벼락이 되었다.
움찔! 오싹!
붓의 움직임을 지켜보고 있던 모두가 가늘게 몸을 떨었다. 지켜보는 내내 광포한 대자연의 움직임에 빠져드는 것과 같은 착각이 들었던 것이다.
휘리릭. 휘릭.
어지러이 이어지던 선은 화선지 좌상단에 황룡패주 용무린이란 이름으로 된 글귀를 새긴 것으로 끝이 났다.
“……!”
“……!”
황제와 황후, 황귀비를 비롯한 모두가 넋이 나간 표정으로 용무린을 바라보았다.
용무린이 그린 것이 난이 아님은 이미 알고 있었다.
하지만 제 스스로 떠오른 붓이 홀로 그려낸 난해한 선에는 알 수 없는 현기와 더불어 대자연의 광포함과 정명한 기상이 함께함을 분명히 느낄 수 있었던 거다.
‘후훗. 놀랐지?’
만족한 듯 빙그레 웃어 보인 용무린이 뭔가 굉장히 있어 보이는 표정으로 목소리에 무게를 실었다.
“진천도라 하겠습니다.”
“지, 진천도?”
“예, 폐하. 약소하지만 머지않아 탄생하실 황태자께 드리는 제 작은 선물입니다.”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황태자에게 주는 선물이었지만 황제는 오히려 더 흡족해했다. 용무린이 미래의 황태자 역시 지켜주겠다는 말처럼 들렸기 때문이었다.
“좌상단에 적힌 구결과 주해, 그리고 제가 알려드린 호흡법을 계속해서 병행하라 한 후 방금 그린 그림을 시간이 날 때마다 들여다보라 가르치십시오, 폐하.”
“그, 그러면 어찌 되는가?”
씨이익.
용무린이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그림의 의미를 깨우칠 수만 있다면, 역도의 무리가 황성 전체를 둘러쌓는다 하여도 최소한 스스로를 지켜 후일을 도모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실이었다.
좌상단에 적힌 글귀는 바로 호심결이었으니까.
물론 정식 불사신기는 아니다.
비룡문의 직계에게 직접 사사한 호심결과도 다르지만 본류만큼은 충실히 따랐다. 무림맹주가 배웠던 온건한 정도의 호심결이라고 보면 된다.
‘거기에 더해 내가 그린 도형은 진천수라도의 첫 번째 초식과 소검비연의 첫 번째 초식이야. 호심결에 이어 그 두 가지 초식이라면 내가 말한 정도야 충분히 해낼 수 있지 않겠어?’
용무린이 자신만만하게 장담했다.
“황제폐하께서 세우신 황태자께 반드시 내리십시오. 분명히 성군이자 패왕이 되실 겁니다.”
성군이자 패왕!
“오오오! 패주!”
황제가 감동을 한 사발 몽땅 퍼먹은 얼굴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성큼성큼 다가와 용무린을 콱 껴안았다. 힘을 주었다.
“반드시 그리하겠다. 황태자에게 반드시 패주의 그림을 하사하겠노라. 그리하여 제국의 미래를 반석 위에 올려놓는 성군이자 패왕으로 키워 내리라! 하하하하하!”
황제가 통쾌하게 웃었다.
용무린의 진천도는 훗날 황태자의 정통성 증명의 대명사로 불리게 되며 후세의 사가들은 진천도를 차지하기 위한 암투를 진천쟁투라 명명하게 된다.
반짝. 반짝.
진천도를 바라보는 황귀비와 귀비, 비, 빈들의 눈에 숨길 수 없는 탐욕의 빛이 어렸다.
‘내가 괜한 소리를 했나?’
때늦은 후회를 하며 용무린은 황후가 준 토지문서와 황귀비가 건넨 전표 주머니를 받아 챙겼다.
***
보름 후 호북성 무한.
“이야, 이게 대체 얼마 만에 와보는 거야?”
용무린은 두근거리는 심장을 애써 누르며 무한의 대로에 접어들었다.
거리는 전보다 훨씬 더 활기차 보였다.
아니, 실제로도 그러했다.
용무린이 만금상단의 주인이 되자 실질적으로 운영을 맡은 제갈영령이 무한에 여러 상회를 열어 싼값에 양질의 물품들을 공급했기 때문이었다.
그 때문에 다른 상회들이나 상인들도 적정선으로 물건 값을 내려야 했고 양민들의 삶의 수준이 저절로 끌어 올려졌던 것이다.
덕분에 인심도 훨씬 더 후해졌다고 한다.
삶의 수준이 올라가니 주변을 돌아보게 되어 최소한 무한 인근에 더는 굶어 죽는 사람이 없어졌다는 말까지 들려오고 있었다.
“어? 삼절일학 용 대협이시다!”
“어디, 어디?”
“정말이다! 삼절일학 용무린 대협께서 오셨어!”
“와아아! 용 대협! 만세, 만세 만만세!”
과연 나고 자란 고향다웠다. 용무린의 얼굴을 알아본 많은 사람들이 몰려와 만세를 불렀다. 용무린의 얼굴을 모르고 있던 사람들까지 그 서슬에 몰려나올 정도였다.
오그작.
용무린의 손발이 단숨에 오그라졌다.
‘이럴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네.’
양민들의 환호나 면전에 대고 퍼부어지는 칭찬 같은 것은 정말 체질에 맞지 않는다고 느낄 뿐이다.
“아, 아하하. 모두 반갑습니다.”
“꺄악! 난 몰라, 황룡패주께서 내게 인사를 건네셨어.”
“이 바보야. 날 보고 웃어 주신거란 말이야.”
방심이 뒤흔들린 소녀들이 언성을 높였고,
“용 대협. 이, 이것도 드셔 보시우. 이 늙은이가 방금 새로 우려낸 보이차라오.”
무한의 대로에서 오랫동안 차를 팔아온 늙은 노인이 달려와 싸구려 차지만 정성을 가득 담아 내밀었으며,
“용 대협! 용 대협 덕분에 우리 아이들이 굶지 않게 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용 대협.”
고된 노동에 얼굴 한 가득 주름이 덮인 장년인이 달려와 연방 허리를 숙이기까지 했다.
구김살 하나 없는 양민들의 밝음이, 작은 일상에 감사하는 양민들의 큰 행복이 용무린의 심장을 같은 빛으로 물들였다.
‘그래. 삶의 행복이란 저런 소소한 일상에 감사하는 것에서 오는 거야.’
끝없이 정복하고 또 정복해 무림을 완전히 발아래 둔다고 해서 모든 욕망이 사라질까?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욕망이란 밑 빠진 독과 같은 놈이어서, 하나를 얻으면 또 다른 것을 원하기 마련인 법. 눈을 감는 그 순간까지 다른 무엇인가를 갈구하게 만들 뿐이다.
‘무림 정복이고 나발이고 이젠 정말 끝이다.’
마지막 다짐을 끝으로 용무린은 빠른 걸음으로 비룡문으로 향했다.
“황룡패주 용무린 만세!”
“용 대협 만세!”
“감사합니다, 용 대협!”
많은 사람들이 용무린의 뒤를 따르며 계속해서 감사인사를 전해왔다.
***
“아들!”
용무린의 도착 소식에 어머니 조연옥이 날듯이 달려와 용무린을 힘껏 안아주었다.
“어머니! 그간 강녕하셨어요?”
“그래, 이 무정한 녀석아!”
조연옥이 눈물을 글썽이며 용무린을 나무랐다.
바쁜 것은 잘 알지만 사랑하는 아들 얼굴 한 번 보기가 너무 힘이 드니 서운했던 것일 게다.
“죄송해요, 어머니.”
피식.
“들어가자. 엄마가 맛있는 것 해줄게.”
만금상단을 거쳐 자금성에서 생활하다 온 것을 잘 알면서도 조연옥은 그저 용무린이 굶고 다닐까봐 걱정이 되는 모양이었다.
“좋죠. 그렇지 않아도 어머니께서 해주셨던 사계미탕포가 자주 생각났었어요.”
“사계미탕포? 알았다. 엄마가 금방 해주마.”
“예, 어머니.”
조연옥은 용무린의 손을 잡고 앞뒤로 흔들며 내원으로 들어갔다.
잠시 후.
음식이 만들어지는 동안 용무린은 비룡문을 한 바퀴 돌며 새로이 불어난 식구들을 만나고 다녔다.
‘아버지와 숙부님, 의숙부님을 비롯한 직계들은 지금 폐관수련을 하고 있으니 일단 뒤로 미루고…….’
찾아뵙긴 해야 하겠지만 그 전에 준비가 필요했다.
그래서 먼저 최근에 새로운 식구가 된 의성을 찾았던 것이다.
“잘 계셨어요, 천의당주님?”
비룡문에 둥지를 튼 의성 신우량은 신설된 천의당의 당주를 맡아 의욕적으로 일해 나가고 있었다.
세력과 재력이 급격히 불어만 가는 비룡문의 전폭적인 지지로 각지에서 들여오는 약재들을 배합해 진정한 의미의 활생단을 다시 만들기 위해 전력투구 중이었다.
“이, 이런! 패주께서 오셨구려.”
“하하하!”
“기별만 하셨으면 단숨에 달려 나가 맞이했을 것을……. 야속합니다, 패주!”
용무린이 직접 찾아온 것이 송구한 모양이었다.
“어떻게, 활생단 제작은 잘 되어 가세요? 뭐 또 필요한 것은 없고요?”
“그게…….”
의성의 얼굴이 살짝 어두워졌다. 원하는 것이 있기는 한 모양인데 차마 말을 꺼내기가 어려운 모양이었다.
“뭔데 그러세요? 말씀만 하세요, 능력이 닿는 한 다 구해드릴 테니까요.”
잠시 주저하던 의성이 결심을 굳힌 듯 말을 이었다.
“활생단은 음과 양의 조화가 맞아 떨어져야만 합니다.”
“오!”
“당연히 그런 약성을 내는 약재를 필요로 하지요.”
“그게 뭔데요?”
“음의 성질을 지닌 약재로는 지음석청이, 양의 성질을 지닌 약재로는 만양초라고 하는 약초가 꼭 필요한데 그것들을 구하기가…….”
“영약 같은 것인가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패주. 하지만 워낙에 귀한 약재들인지라 구하는데 시간이 많이 들 것 같습니다.”
“그냥 영약을 쓰면 어떤가요? 극음과 극양의 성질을 지닌 영약들을 사용하면요?”
“……!”
의성이 뜨악한 표정을 지었다.
영약이 달리 영약이겠는가? 그런 것들이 있다면 활생단의 약성이 전에 비해 열 배는 더 폭증하게 되리라.
“그, 그야 당연히 좋겠지요. 하지만 영약이라는 것은 하늘이 내린 인연이 없고서는 구할 수 없는…….”
“여기 있어요.”
척척척.
시전에서 사온 당과 꺼내듯 용무린은 옷 속에서 의성조차 문헌으로 공부만 해왔던 온갖 영약들을 꺼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