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마교의 영향력은 생각보다 넓고 깊다
배시시.
소가흔이 용무린을 향해 미소 지어 보였다.
용무린이 좋아했던 그 연한 화장에 어깨까지 드러나는 옷차림, 그리고 영혼까지 끌어 모은 가슴이 꽤나 뇌쇄적이었지만 용무린의 얼굴은 시큰둥하기만 했다.
‘뭐하는 짓이야 지금?’
제갈영령이 있으니 이제 저런 모습 따위 더는 관심도 없다. 그저 귀찮기만 할 뿐이다.
덕분에 소가흔의 자존심이 팍 상했다.
‘왜 이렇게 싸늘해졌지?’
도발적으로 가슴 부분을 내밀며 요염한 자세를 취하던 소가흔은 차갑기만 한 용무린의 시선에서 무엇인가를 깨달을 수 있었다.
‘서, 설마……. 이미 그녀와?’
그 설마가 맞았다.
용무린은 제갈영령과 한 몸이나 다름이 없었던 것이다.
절대로 견줄 수 없는 사랑을 차지한 사내의 의리 가득한 눈빛을 용무린은 하고 있었던 거다.
철렁!
소가흔의 심장이 내려앉았다.
고이 간직해왔던 순수한 애정이 송두리째 씻겨 내려가는 느낌이었다.
“대체 뭔데 그래?”
“아니에요, 아무것도.”
소가흔은 치밀어 오르는 아쉬움을 애써 억눌러야만 했다.
고개를 살짝 갸우뚱하던 용무린의 입이 불쑥 열렸다.
“저기 왼쪽 문 보이지?”
“예? 아, 예.”
“거기로 나가서 다시 왼쪽으로 돌아 나가면 해우소야.”
“예? 해, 해우소요?”
“그래! 그러니까 힘들게 참지 말고 가서 마음껏 싸고 뀌고 돌아와!”
빠직!
소가흔의 이마에 굵은 힘줄이 솟았다.
“급 똥은 사람이 참을 게 아니야. 나도 소싯적에 그것 때문에 많이 힘들어 봐서 잘 아는데…….”
“야 이 나쁜 인간아! 그게 어디 여인에게 할 소리…….”
“아니면 그만이지 왜 고함을 지르고 난리야? 나는 나름 생각해서 한 소리라고!”
용무린이 소가흔의 분노를 중간에 툭 잘랐다.
“이, 씨!”
“됐고, 해우소가 급한 게 아니면 뭣 때문에 온 건데?”
제갈영령과 한 몸이 된 사내 아니던가?
이제는 언감생심 꿈꾸기도 힘든 자리에 오른 사내이기도 했다.
“빚 갚아요!”
차지하고 싶은 욕심을 모두 버렸는지 소가흔이 고함을 빽 질러 버렸다.
“빚? 무슨 빚?”
“생각 안 나요? 일 년 전에 합비의 정보를 무상으로 건네주는 대가로 무슨 일이든 제 부탁을 한 가지 들어주기로 했잖아요?!”
“아하! 그거?”
그제야 기억이 난다는 듯 용무린이 손으로 허벅지를 과장되게 내리쳤다.
“그런데 내가 정말 그런 약속을 했던가? 그때는 그냥 다음에 원하는 것을 말하겠다는 것 정도로 대충 넘어갔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용무린이 고개를 갸웃 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무슨 일이든 한 가지 들어 주겠다고 한 적은 없는 듯해서였다.
“무, 무슨 말이에요? 천하의 황룡패주 무림왕 용 대협께서 이제 와 한 입으로 두 말을 하시겠다는 말씀인가요?”
피식.
“에이, 그럴 수야 없지.”
뭔가 조금 속는 느낌이었지만 용무린은 그냥 넘어가 주기로 마음먹었다. 흑상과 염상을 쓸어버리기 위해서는 어차피 하오문의 도움도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뭐야? 말해봐.”
“들어 주시겠어요?”
“일단 들어 보고.”
“흥!”
소가흔이 소리 나게 콧방귀를 뀌었다.
용무린이 입술만 움직여 웃으며 말을 이었다.
“무슨 일인지는 몰라도 나와 내 가문 그리고 제갈세가를 비롯한 내 친인들에게 해가 갈지도 모르는 일은 거부해야만 하잖아. 안 그래?”
그야 그렇다.
“그러니 일단 말해봐. 들어보고 황제폐하나 내 친인들에게 해가 되지 않는다는 판단이 서면 도와줄 테니까.”
“제 연락은 받으셨나요?”
“그래.”
용무린이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황귀비가 내밀었던 전표가 들어 있던 비단 주머니 속에는 놀랍게도 소가흔이 보낸 밀서까지 함께 동봉되어 있었던 것이었다.
“받았으니 네가 지금 날 귀찮게 하고 있는 거야. 지금도 시간 겨우 냈단 말이지. 그러니까 빨리 내게 그 긴히 하고 싶다던 말을 해.”
그 밀서를 받지 않았다면 용무린은 낮이고 밤이고 아버지와 숙부님 그리고 혈족들과 실전비무를 하느라 눈 코 뜰 새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니까 한 달 전쯤이었어요. 강소성 북동쪽 운태산을 중심으로 산동성과의 경계인 흑림, 동쪽 끝인 운련항, 남쪽으로 향수, 염성, 대풍현에 이르기까지……. 각 지부의 형제들이 은밀히 죽어나갔는데 말이죠.”
“……!”
이야기가 계속될수록 용무린의 눈이 빛을 발했다.
‘이거 혹시 그놈들에 대한 정보 아니야?’
혹시는 역시가 되었다.
“저희 하오문에서는 놈들이 흑상과 염상의 주력이라고 보고 있어요!”
“흑상과 염상!”
“맞아요. 바로 놈들이에요, 용 대협.”
푸흐흐. 이렇게 좋을 수가?
‘개방에서 그렇게 눈에 불을 켜고 찾았는데도 흔적을 찾을 수 없던 놈들인데…….’
이렇게 어이없이 그놈들의 꼬리를 잡게 될 줄은 미처 몰랐다.
“좋아! 거기까지!”
“예?”
소가흔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용무린이 거부를 한 것으로 잘못 알아들은 모양이었다.
“겁먹긴……. 접수했다는 뜻이야.”
“아!”
다행이라는 듯 소가흔이 긴 숨을 내쉬었다.
“시간이 얼마나 있지?”
“빠르면 빠를수록 좋아요. 지금 이 순간에도 강소성의 형제들이 쓸려나가고 있거든요.”
“흠, 그래도 시간이 조금 필요해. 내가 무슨 인간 백정도 아니고, 나 혼자 다 죽여 버리기에는 조금 그렇잖아?”
소가흔이 다급히 말을 이었다.
“하오문의 지원도 있을 거예요.”
“거야 당연하지. 본인들 발등의 불을 꺼주는데 그냥 지켜만 보는 것은 조금 아니지 않나?”
무슨 그런 당연한 말을 하느냐는 듯 용무린의 목소리는 퉁명스럽기까지 했다.
“하여간 최소 이레 정도의 시간이 필요해.”
“이레면 되나요?”
“그래. 그 후에 바로 출발하지.”
“알겠어요. 그러면 그렇게 알고 준비하도록 할게요.”
정말 급한 듯 소가흔이 발딱 일어섰다.
그때 용무린의 목소리가 무심하게 이어졌다.
“거, 하오문주에게 보고할 때 말이야. 하오문이 되레 내게 빚을 진 거라고 전해줘.”
“예? 그, 그게 무슨 뜻이죠? 빚이라니요?”
소가흔의 목소리가 뾰족하게 올라갔다.
씨익.
용무린이 하얀 이를 드러내며 느물거렸다.
“이거 왜 이래? 내가 그때 진 빚은 분명 운룡장 놈들의 움직임을 알아보는 정보료였어. 은자 50여 냥 주면 끝나는 문제였다고.”
대화 도중에 완전히 기억이 난 모양이었다.
하여간 용무린은 은과 원에 대해서는 언제나 칼 같이 계산한다.
“그런데 내가 직접 나서주잖아? 내 몸 값이 겨우 은자 50여 냥이라고 생각하면 곤란해!”
“……!”
마땅히 대꾸할 말이 없었는지 소가흔은 그저 눈만 멀뚱멀뚱 해보였다.
‘망할 자식.’
소가흔은 속이 상했다.
용무린이 그런 말을 할 것에 대비해서 이렇듯 꾸미고 나왔기 때문이었다.
‘그 대가로 나를 주려고 했었는데…….’
겸사겸사 이 일로 용무린을 차지해볼까? 하는 앙큼한 생각까지 염두에 두었건만 다 틀렸다. 용무린은 이미 제갈영령의 남자,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에 흔들림조차 안 보이니 이젠 틀린 거다.
“만금상단의 새로운 주인이 나야. 나는 돈 따위로는 움직이지 않는 사람이니 푼돈 몇 푼 따위로 계산하지는 말자고. 그저 내게 큰 빚이 있다는 것만 알아두라고 해.”
“흥! 알았어요.”
앙칼지게 대답한 소가흔이 힘찬 콧바람을 남기며 돌아섰다.
‘푸흐흐. 어딜 날로 먹으려고 들어?’
흑상과 염상의 위치도 알아내고 하오문에 빚도 지운 용무린이 기분 좋게 웃었다.
***
소가흔과의 면담을 마친 용무린은 즉시 흑야방으로 이동했다.
용무린의 방문에 이제는 어엿한 중소방파의 주인 냄새를 풍기는 노백인이 나는 듯 달려 나와 부복했다.
“오셨습니까, 두목!”
“쓰읍! 아직도 그 말버릇 못 고치면 어떻게 해?!”
“아! 주, 주군.”
“콱!”
용무린이 주먹까지 쥐어 보였건만 이제는 그만큼 친숙해졌는지 노백인은 쩔쩔매는 모습을 보이는 대신 웃어 보이기까지 했다.
“아직 입에 잘 붙지 않아서……. 죄송합니다, 주군.”
용무린의 입가에 보기 좋은 미소가 걸렸다.
이제는 스스럼없이 자신을 대하는 노백인의 모습이 흡족하게 다가온 것이다.
“들어가십시오, 주군. 그간 확장한 흑야방의 보고도 받으시고 술상도 거하게 한 상 차려 들이겠습니다.”
“술상은 됐고. 독사랑 유중이랑 다 있지?”
“독사와 유중은 인근 현들에 관리하러 나가 있습니다. 아마 주군께 드리는 보고가 끝날 때쯤이면 돌아올 듯싶습니다.”
“그래? 그럼 들어가자.”
“예, 주군.”
안으로 들어선 용무린이 상석에 앉자 그 옆에 공손히 시립한 노백인이 자랑스러운 듯 가슴을 쫙 펴고 그간 이룬 것들을 보고했다.
“……하여, 위로는 하남성 남부 여덟 개의 현의 밤을 접수했으며 아래로는 호남성 북부 여섯 개 현을, 그리고 좌로는 여타 거대문파들이 없는 중경성의 다섯 개 현의 밤을 접수 완료 했습니다.”
“거, 꽤 바쁘게 지냈구나.”
생각보다 흑야방의 세력이 많이 커진 듯했다.
“다 주군의 덕입니다. 일 년 전에 전수해주신 유성검보를 죽어라고 익혔더니 별 어려움이 없었습니다.”
“흐음. 그래 보이네.”
한 차례 노백인을 슥 훑어 본 용무린이 고개를 끄덕여보였다. 불룩 튀어나온 태양혈과 잘 벼려진 칼날을 보는 듯 날카롭게 가다듬어진 기세는 노백인의 무위가 절정 중급은 족히 되어 보였던 거다.
“감사합니다, 주군.”
기쁜 얼굴로 고개를 끄덕여 보인 노백인이 계속해서 보고를 이었다.
“……객잔이 50여 개소, 도박장 15 개소, 주점, 홍루, 청루, 등등 직접 운영하는 곳까지 다 합하면 총 108개의 업장이 본 흑야방의 깃발 아래 있습니다.”
그사이 정말 많이도 세력을 확장했다.
‘고수의 숫자야 많이 부족하지만, 어찌 됐든 외형만큼은 어지간한 중소방파 이상이네?’
사실이 그러했다.
관리하는 업소가 108개에 달한다면 못해도 오대세가의 제력과 맞먹을 정도지 밑은 절대 아니다.
물론 알게 모르게 흑야방이 용무린의 휘하라는 사실이 알려져 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흑야방이 과거 악랄하던 모습을 완전히 탈피해 약간의 보호비만 받으며 관리는 철저히 해준 공로가 더 컸다.
“그래서 매달 보름 은하전장에 주군의 이름으로 된 전표를 예치하고 있습니다.”
용무린은 갑자기 궁금해졌다.
지난 일 년 동안 흑야방에서 내 앞으로 얼마나 예치를 해 놓았을까?
“그게 얼마나 되냐?”
“첫 달에는 소소하게 황금 한 냥으로 시작했지만 점점 늘어나서 지금까지 예치한 것을 다하면 총 황금 10관쯤 됩니다, 주군.”
“……!”
용무린의 입이 쩍 벌어졌다.
설마하니 그 정도로 많은 돈이 자신의 이름으로 예치되어 있을 줄은 몰랐던 것이다.
‘가만, 그걸 다 은하전장에 넣어 둘 필요가 없잖아?’
은하전장은 일전에 만났었던 신화상단이 운영하는 곳이다. 이제는 자신이 만금상단의 주인이 되었으니 그 돈도 만금상단으로 옮겨야 하리라.
“그 돈 죄다 만금상단이 운영하는 만금전장으로 옮겨라.”
“몽땅 말입니까?”
“그래, 몽땅. 그리고 앞으로 흑야방에서 운영하는 자금 역시 모두 만금전장을 통해 관리하는 것으로 해라.”
“아! 주군께서 만금상단의 새로운 주인이 되셨으니……. 알겠습니다, 주군.”
그제야 접수가 되었다는 듯 노백인이 고개를 크게 끄덕여 보였다.
그때였다. 밖에서 왁자지껄한 소리가 들려왔다.
“뭐라고? 대 두목께서 오셨다고?”
“대 두목님이 오셨다! 이야, 이게 대체 얼마 만에 존안을 뵙는 거야?”
외부에서 막 돌아온 독사와 유중이 용무린의 방문 소식에 법석을 떨었던 것이다.
‘저것들을 콱 그냥!’
용무린의 얼굴이 잔뜩 구겨졌다.
그런 줄도 모르는 독사와 유중이 희희낙락한 얼굴로 뛰어 들어오며 반갑게 외쳤다.
“두모-옥!”
“오셨습니까, 두목!”
문을 벌컥 열고 들어오며 말끝마다 두목 소리를 입에 올리는 독사와 유중을 향해 용무린이 날아들었다.
“에라, 이 썅!”
휘릭. 철퍽. 철퍽.
“두, 두목. 어찌……. 컥. 흐읍!”
“대 두목! 사, 살려……. 커헉. 끄윽!”
그래도 분위기 파악이 안 되었는지 독사와 유중은 한참이나 더 두목 소리를 연발했고,
“그래도! 죽어! 죽어엇!”
퍽퍽퍽퍽퍽.
“크아악!”
“끄억!”
신나게 두들겨 맞아야만 했다.
그렇듯 한 차례 폭풍이 지나간 후.
독사와 유중은 대가리를 땅에 꽂은 채 용무린으로부터 희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외형만 커졌지 솔직히 실력은 아직 어디 내세울 정도는 아니잖아. 초식의 운용은 내공의 영향을 많이 받으니 이참에 너희들 내공이라도 쑥 올려놓자.”
불사활생신단 몇 개를 물에 희석해서 줄 생각인 것이다.
“내, 내공을 말씀입니까?”
눈이 휘둥그레진 노백인이 떨리는 목소리로 되물었다.
“그래. 너희들 어디 가서 맞고 다닐까봐 내가 밤에 잠을 못자요, 잠을.”
아니다. 잘만 잔다.
그렇지만 용무린의 다정한 말에 독사와 유중은 어깨까지 들썩이며 울음을 터뜨렸다. 감격해 했다.
“크흐흑. 이놈을 그렇게까지 생각해 주시다니! 두목! 저는 앞으로도 두목을 위해 이 한 목숨 바칠 것입니다.”
“저 역시 마찬가집니다, 두목. 두목님을 위해서라면 유중의 목숨을 기꺼이 바칠 겁니다!”
정말 분위기 파악 더럽게 안 되는 녀석들이다.
“안 되겠다. 너희들은 조금만 더 맞자.”
휘릭. 퍽퍽퍽퍽.
대뜸 달려든 용무린이 독사와 유중을 마구 밟았다.
“커헉. 감사합니다, 두목! 크흡! 이렇게 해서 내공이 늘 수만 있다면 더 밟아 주십시오, 두목! 크헉!”
“두모-옥! 꺼흑! 감사합니다, 두목! 허어억! 더 밟아 주십시오, 두목! 크으윽!”
생각 없이 내뱉는 변태성 발언에 독사와 유중의 곡소리는 그 뒤로도 한참동안 더 이어졌다.
***
노백인과 독사 유중을 비롯해 흑야방의 핵심 수뇌부 백 명을 선발했다.
용무린이 무한 인근의 밤을 평정할 당시부터 함께해 왔던 인물들로 신분확인을 비롯해 가장 믿을 만한 수족들이었다.
용무린은 주저 없이 불사활생신단 다섯 개를 물에 풀어 희석했다. 찻잔에 정확히 계량해 백 명에게 골고루 나누어 주었다.
수뇌부라 할 수 있는 노백인과 독사, 유중 셋에게는 특별히 세 모금씩 하사했다.
냉혈곡에서 자소단을 저렇듯 희석해서 사용하는 것을 이미 경험해 보았고 비룡문에서 확인까지 해 보았던 터라 약효에 대해서는 의심하지 않았다.
“감사합니다, 두…… 히익. 주군!”
“크흐흑. 이 은혜, 죽어도 잊지 않겠습니다, 두…… 허업! 주군!”
독사와 유중이 다시금 두목이란 말을 입에 올렸다가 소스라치게 놀라 말을 바꾼 것을 제외하면 일은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불사활생신단이 희석된 물을 마신 모두가 일제히 그 자리에 주저앉아 운공에 들었다. 전력을 다해 유성검보 상의 유성전단공의 내공을 운용했다.
‘푸흐흐. 이 정도는 되어야 어디 가서 내 수하라고 당당히 말할 수 있지 않겠어?’
이들은 훗날 정사 중간의 무게추가 되어 무림의 성향이 어느 한 극단으로 치우치지 않도록 하는 역할을 충실하게 수행할 것이다.
‘백 명 중 최소한 열 명은 절정의 상급에 오르겠지?’
나머지 아흔 중 마흔 정도는 절정의 중급 정도 될 테고 오십여 명은 절정 턱걸이쯤 될 텐데, 일단은 그 정도만으로도 충분했다.
익힌 무공에 내공까지, 이들 백여 명은 거듭난 비룡무단에 비교해도 전혀 손색이 없을 정도이기 때문이다.
‘열심히 해라. 무림 정복 따위 이제는 완전히 마음에서 버렸지만, 너희가 열심히 해야 치안이 잘 유지가 될 테고 그래야 내가 황제폐하를 구슬려 영약을 몽땅 더 빼내 올 수 있다.’
치안 유지의 공에 흑상과 염상을 완전히 정리한 공을 더해 다시 한 번 황궁무고의 약재창고를 털어 올 생각으로 용무린은 즐겁기만 했다.
만 하루가 가기 전에 백여 명이 영약의 기운을 모두 자신들의 것으로 만들었다.
그런 후 나머지 엿새 동안 백여 명을 상대로 용무린은 실전비무 특강을 베풀었다. 유성검보를 익히지는 않았지만 모두 꿰뚫고 있기에 쉬운 일이었다.
예상대로 노백인과 독사, 유중 셋을 비롯해 십여 명은 절정 상급의 내공에 걸맞은 실력자로 발돋움을 할 수 있었다. 조금만 더 경험이 쌓인다면 초절정의 벽도 능히 뚫어낼 수 있으리라.
“이렇게 공격을 해 왔을 때 쓰라고 유성회류의 초식이 있는 거야! 봐봐. 이렇게!”
용무린의 풍뢰가 상대의 검을 흘려냄과 동시에 공격으로 전환하는 유성회류탄의 초식을 전개해 보였다.
휘리릭. 촤촤촥! 스각.
느릿하며 정직한 그 검로가 오롯이 모두의 뇌리에 각인되었다.
“오오!”
“하! 그, 그렇군요.”
사부가 제자에게 가르침을 내리듯 세세하게 풀어서 설명을 하고 직접 시범까지 보이니 늘지 않으려야 않을 수가 없는 거다.
그동안 아무리 노력해도 풀리지 않았던 실타래가 풀렸기 때문인지 노백인과 독사, 유중을 비롯한 흑야방 수뇌부의 무위가 급격히 높아졌다.
일신우일신.
불사활생신단의 힘에 자상한 가르침까지 있었으니 불과 엿새에 불과했지만 그 전과는 완전히 다른 무인들로 거듭나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
“가자! 껄렁한 놈들 털러.”
“예, 주군.”
“예, 두…… 히익. 주군!”
노백인과 독사 유중을 비롯한 흑야방의 핵심 수뇌부 오십 명을 이끌고 용무린은 강소성을 향해 출발했다.
***
강소성 북동쪽에 자리한 흑림현.
동쪽에서 불어오는 찬바람을 막아주는 운태산이 포근히 안아주다 보니 많은 사람과 물산이 집결하기에 온갖 흑도 문파가 난립하는 곳이었다.
하지만 그 중에서도 흑도의 왈패들이 함부로 난장을 치지 못하는 안전한 곳이 있었으니 바로 하오문에서 운영하는 흑화루였다.
그래서 흑화루는 언제나 사내들로 들끓었다.
“뭐야? 왜 칠복이랑 영춘이가 안 보이지? 그 녀석들이 예쁜 아이들을 잘 데려오는데…….”
“와하하. 손님도 참. 그놈들은 고향으로 떠났습니다. 대신 꾸냥들은 여전히 그대로 있으니 무슨 상관이겠습니까? 들어오십시오. 오늘은 제가 원하시는 평소 가격에 밤 시중까지 책임질 꾸냥을 붙여드리리다.”
“그래? 뭐, 그렇다면야……. 푸흐흐.”
하루아침에 안면이 있던 사람들이 싹 바뀌었음에도 사내들은 별다른 의심 따위가 없었다. 어차피 누가 흑화루의 주인이든 술과 여자만 마음껏 즐길 수 있다면 한량들은 상관이 없었던 거다.
흑화루의 오층 난간.
왼쪽 눈에 안대를 찬 장년인이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됐어. 이대로라면 곧 안정을 되찾겠어.”
이곳 흑림현에서 가장 그럴 듯한 이곳 흑화루를 급습해 껄렁한 기존 왈패들을 쓸어버린 후 기녀들까지 포함해 통째 접수했다.
하루아침에 주인이 바뀐 셈이라 기녀들이 혼란스러워 했지만 감히 도망치지는 못했다. 본보기를 겸해 가장 드세게 반항하던 기녀들을 모두가 보는 앞에서 죽여 버렸기 때문이었다.
“현청의 반응은?”
외눈박이 사내의 뒤에서 음침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분께서 따로 손을 써주셨는지 은자 백 냥으로 잘 넘길 수 있었습니다. 현청은 문제없습니다. 그냥 이대로 운영하며 약간의 은자만 상납하면 됩니다.”
“푸흐흐. 그렇군.”
외눈박이 사내가 느물거리며 웃었다. 모든 것이 만족스러웠던 것이다.
“강소성만 벗어나면 언제 그놈의 관군이 달려올지 몰라 속을 졸였는데……. 이렇게 한 곳에 자리를 잡는 것도 나쁘지 않군. 그렇지?”
“그렇습니다. 만금상단과 마영각 괴멸 후 흘러들어간 정보가 있으니 우리를 잡는답시고 온통 헤집고 돌아다닐 터인데, 이참에 쉬면서 재미나 좀 보다가 다시 움직이면 될 듯합니다.”
“크크큭. 그래. 그러자고…….”
할짝!
외눈박이 사내가 회가 동했는지 이층에 시선을 던지며 혀를 축였다. 이곳 흑화루에서 가장 빼어난 미모를 지닌 여인들이 그곳에 있기 때문이었다.
“다른 곳들은 어때? 다들 자리를 잡았겠지?”
“그렇습니다. 운련항과 향수, 염성, 대풍현에 이르기까지 쓸 만한 곳들을 무사히 다 접수했다고 합니다.”
“그곳들 역시 그분께서 손을 써 주셨나?”
“그렇습니다. 각 현의 현령들이 두 말하지 않고 주인이 바뀐 사실을 눈감아 주었다고 합니다.”
“자리 잡고 있던 왈패들은?”
“깡그리 죽여 땅에 파묻었다고 합니다.”
“크크큭. 그렇군.”
외눈박이 사내의 눈이 점점 더 발갛게 물들어갔다. 음욕으로 번들거렸다.
“이곳이나 다른 곳들, 남경상단과는 확실히 상관이 없는 곳들이겠지?”
“그렇지 않아도 그 점이 염려되어 자세히 살폈습니다. 확실히 무관합니다. 칠대 상단의 하나인 남경상단이 강소성의 터줏대감이긴 하지만 그들이 기루까지 운영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래, 그래.”
이층을 향해 계속 시선을 고정하고 있던 외눈박이 사내가 더는 참지 못하겠는지 불쑥 입을 열었다.
“요화라고 했지?”
“예? 아, 예. 그렇습니다. 요화가 이곳 흑화루의 제일 기녀입니다.”
“데려와.”
“예, 총수.”
이 외눈박이 사내가 바로 흑상과 염상의 총수였다.
하오문이 파악했던 것이 맞았다.
그들은 용무린과 관군의 눈을 피하기 위해 중원에서 비교적 외딴 곳인 이곳 강소성을 택했고 스며들기 위해 흑도무리가 가득한 기루를 선택했던 것이다.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곧 회포를 푸실 수 있도록 조치하겠습니다.”
흑상대주가 음흉한 미소와 함께 돌아섰다.
***
강소성 성도 남경.
육조의 고도라 불릴 만큼 터가 좋은지라 명 태조 또한 처음에 도읍으로 정했던 곳.
그 중심에 자리 잡은 등왕루의 주인인 하오문주 이능하가 저 멀리 북쪽을 향해 시선을 던졌다.
“지금쯤 도착하셨겠지?”
“무한을 떠나 수로를 타신 지 열흘이 되었으니 아마도 그럴 것입니다.”
“우리 쪽 아이들은?”
“가려 뽑은 수호대 이백여 명이 근처에서 대기 중입니다. 패주께서 도착하시는 즉시 합류할 것입니다.”
“현령들의 반응은 어때?”
“돈만 받아 처먹으면 주인이 바뀌든 말든 아무래도 상관없단 투였습니다.”
보고를 하던 사내가 이를 악물고 대답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현령을 비롯한 그동안 뇌물을 받아먹은 인간들이 그렇듯 잠잠한 것이 분했던 모양이었다.
“후후후. 뇌물에 중독된 이들에게 인간적인 성향을 기대하지 말거라.”
“하지만 문주님!”
“그만!”
하오문주 이능하가 수하의 말을 바로 잘랐다. 차가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잊지 말아야 해. 우리는 언제나 낮은 곳에 있는 사람들이야. 그들을 치마폭에 휘감고 정보를 빼내기 위해서는 차라리 그들이 돈에 움직이는 못난 사내들이라는 것을 다행으로 여겨야만 해.”
“……!”
맞는 말이었기에 사내는 아무런 답도 하지 못했다.
그때였다.
“급보입니다!”
한 사내가 뛰어 들어와 해동청에 달려 온 한 장의 붉은 색 전서를 내밀었다.
꿈틀!
지급을 알리는 전서를 읽어 나가던 이능하의 얼굴이 무섭게 일그러졌다.
“맙소사……!”
“무, 무슨 일입니까?”
“급하다!”
사내의 질문에 대답할 겨를도 없다는 듯 이능하는 잽싸게 문방사우를 챙겨 지급정보를 적어나가기 시작했다.
“그분이…… 이 일에 그분이 관련이 되어 있다니!”
이 사실을 빨리 용무린에게 알려야만 했다.
자칫 잘못하면 엄청난 피가 흐르게 된다.
아니, 조금만 더 어긋나게 된다면 황룡패주의 가문인 비룡문을 넘어 이 나라 전체에 한바탕 피의 강이 흐르게 될 것이다.
“차라리 하오문이 손해를 보고 만다. 어서 빨리 패주의 걸음을 되돌려야만 해!”
전서는 남경의 절대자인 홍연왕부의 움직임에 대해서 온 것이었다.
그리고 전서의 내용을 종합하면 한 가지 놀라운 사실을 시사하고 있었다.
***
관제묘라는 것은 물레방앗간만큼이나 흔한 곳이다.
당연히 대풍현으로 가는 길목에도 관제묘는 존재한다.
관제묘라는 것이 초나라 관우를 기린다기보다 신으로 받들며 발복을 기원하는 곳으로 변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런 것은 아니지만 오늘 대풍현 인근의 관제묘는 미어터지고 있었다. 용무린과 흑야방의 무인 오십 명에 하오문의 수호대 이백 명이 모여 들었던 것이다.
방긋방긋.
재미있어 죽겠다는 듯 대풍현을 바라보며 웃던 용무린의 입이 불쑥 열렸다.
“보자, 저기가 바로 흑상과 염상 놈들이 슬그머니 스며든 대풍현이렷다?”
“맞습니다. 패주. 대풍현 서쪽 청화로 끝에 있는 취선각이 바로 그곳입니다.”
하오문의 수호대주인 홍기운이 똑 소리 나는 목소리로 답했다.
“푸흐흐. 어떻게 나올까? 이실직고 할까? 아니면 오리발 내밀며 저항할까?”
용무린의 말에 독사가 눈을 희번덕이며 내뱉었다.
“오리발 내밀어도 좋으니 죽자고 덤볐으면 좋겠습니다, 두…… 히익. 주군.”
독사를 한차례 매섭게 쏘아본 용무린의 눈이 이내 사르르 풀렸다.
“그래. 아무래도 그게 재미있겠지?”
“예, 주군.”
노백인이 실수 없이 대답했다.
툭툭.
마음에 든다는 듯 노백인의 어깨를 한 번 두들겨 준 용무린이 성큼 앞으로 나섰다.
“가자! 싸가지 없는 놈들 때려잡으러.”
“예, 주군!”
“출발!”
성큼성큼.
급할 것이 없다는 듯 용무린과 흑야방의 무인들은 건들거리며 걸었다.
‘어떻게 모양새가 꼭…….’
하오문의 수호대주 홍기운은 용무린의 뒷모습에서 흑도 왈패나 한량을 보았다.
피식.
자신도 모르는 사이 싱겁게 웃었다.
왈패 같은 행동과 걸음걸이에 넘쳐나는 자신감 또한 읽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
대풍현 서쪽 청화로의 취선각.
달포 전에 주인이 바뀌었지만 왁자지껄한 것은 그때나 지금이나 같았다.
아니 되레 한량들이 더 늘었다.
갑자기 모든 인원이 바뀐 것을 이상하게 보이지 않게 하려고 술값과 화대를 삼 할 가량 낮추었기 때문이었다.
“푸흐흐. 이 짓도 나름 재미있는데?”
내원에서 기녀들의 교태 어린 웃음소리와 한량들의 허풍 어린 기염을 듣고 있던 염상대주 추혼이 끌어안고 있던 기녀의 가슴골에 우악스럽게 손을 집어넣었다. 힘껏 움켜쥐고 마구 주물럭거렸다.
파르르.
염상대주에게 가슴을 내어 준 기녀는 가늘게 몸만 떨 뿐 아무런 반항도 하지 못했다. 이미 콧대를 세우다 몇몇 기녀가 목이 달아나는 것을 직접 보았기 때문이었다.
“그렇습니다, 대주. 찬 이슬 맞으며 거칠게 살아만 왔는데, 살다보니 이런 날도 다 있습니다.”
곁에 서 있던 염상 부대주가 시시덕거리며 따라 웃었다.
염상대주가 짐짓 눈을 부라렸다.
“마영각이 사라졌어. 외부의 소식을 알기가 어려우니 애들보고 소란 일으키지 말고 조용히 즐기기만 하라고 알아듣게 전해.”
“염려 마십시오, 대주. 다들 적당히 알아서 몸을 사리고 있는 중입니다. 어쭙잖은 한량들이 객기를 부려도 대충 좋게, 좋게 넘기고 있습니다.”
피식.
“짜아식. 하여튼 눈치는……. 그럼 너도 나가서 적당한 계집 하나 꿰차고 놀아. 계속 그렇게 힐끗거리며 침만 삼키지 말고.”
“푸흐흐. 예, 대주.”
염상 부대주가 고개를 꾸벅 숙여 보인 후 부리나케 밖으로 사라졌다.
“너는 이리 왓!”
쫘아악. 쫘악.
염상대주가 품에 안고 있던 기녀의 옷을 찢어내듯 벗기기 시작했다.
글썽.
기녀의 눈가에 뜨거운 이슬 한 방울이 맺혔다.
아무리 몸을 파는 기녀라지만 원해서 하는 것과 강제로 당하는 것은 엄연히 다른 것이다.
***
“저곳입니다, 패주시여.”
하오문 수호대주가 한 곳을 가리켰다. 청화로 끝자락에 자리한 취선각의 내원이었다.
“와하하하!”
“마셔! 마셔!”
“고 계집! 속살이 정말 죽여주는구나!”
수호대주가 가리킨 곳 담장 넘어 화통한 웃음소리와 음담패설들이 들려왔다.
굳이 보지 않아도 빤한 상황이었다.
취선각에서 하오문을 몰아내고 기녀들까지 몽땅 차지한 놈들이 하오문 소속 기녀들을 불러다 앉히고 질펀하게 놀고 있을 터였다.
아득.
“죽일 놈들!”
수호대주가 이를 갈며 분해했다.
“하! 그 새끼들 하는 짓들 하곤…….”
용무린의 눈가에 서늘한 빛이 스쳐 지났다.
흑야방이 저런 업소들을 많이 관리하기 때문이라기보다 그냥 저렇듯 개념 없이 함부로 행동하는 놈들 자체가 싫었던 것이다.
그때였다.
용무린으로 인해 완전히 사람이 달라진 노백인이 눈에 불을 켜고 앞으로 나섰다.
“주군! 제게 선봉의 기회를 주십시오.”
“응? 네가 선봉을 서겠다고?”
“예, 주군. 언제까지나 주군께서 앞에 나서는 모습을 지켜보고만 있을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공연히 웃음이 새어 나왔다. 생각해 보니 노백인의 말이 맞았던 거다.
“그래라!”
“감사합니다, 주군!”
훅.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노백인이 유성보를 전개했다. 취선각 내원의 정문을 향해 달려가며 주먹을 쭉 뻗어냈다.
후우우웅. 콰아아-앙!
“다 덤벼 이 개자식들아-아!”
목이 터져라 외치는 노백인을 보며 용무린은 생각했다.
‘저놈, 나처럼 대문 때려 부수는 걸 해 보고 싶었던 거 아니야?’
***
그동안 감추고만 있던 염상의 본성이 바로 튀어나왔다.
“어떤 놈들이야?”
“이런 쓰벌, 한참 재미있었는데…….”
“이곳에 있던 흑도 왈패들이 주변 왈패들을 끌어 모아 왔나보다.”
“그럴 리가? 죄 죽여서 파묻어 버렸잖아!”
“에잇, 몰라. 다 쓸어 버렷!”
“크흐흐. 기다렸습니다-아. 차아앗!”
“죽어엇!”
혹여 개방의 정보망에 걸릴까 두려워 내원 곳곳에 틀어박혀 있던 염상소속 무사들이 우르르 몰려나왔다.
“푸흐흐. 싸가지 없는 자식들이 죽여 달라고 기를 쓰는구나! 쳐라!”
“예, 형님! 하아아!”
“갑니다-앗!”
휘슷. 파아아-!
노백인의 일갈에 독사와 유중을 비롯한 흑야방의 무인들과 하오문의 수호대 이백여 명이 일시에 달려 나갔다.
카앙. 차차창. 스각.
“커헉!”
파캉. 카카캉. 서걱.
“크아악!”
몰라보게 달라진 흑야방 무인들의 손에 염상의 무사들이 허수아비처럼 마구 쓰러졌다.
“뭐, 뭐야? 어디에서 저런 놈들이 온 거야?”
“대, 대주님께 알려라! 이대로는 막을 수 없어. 결정을 내려야 할 순간이다. 빨리!”
“예, 부대주!”
한 놈이 부리나케 안으로 뛰었다.
물론 별 소용이 없는 일이었다. 한참 신나게 기녀를 품고 있던 염상대주가 밖에서 들려오는 비명소리를 감지하고 밖으로 튀어 나왔던 것이다.
“웬 놈들이냐?”
우르릉.
염상대주의 일갈이 메아리처럼 주변을 울렸다.
피식.
막 한 놈의 목을 베어냈던 노백인이 느물거리며 웃더니 손을 내밀어 까딱였다.
“소리 지르는 데 힘 빼지 말고 이리와. 대가리 같은데, 나랑 함 붙어보자.”
느긋하게 주변만 살피던 용무린이 풀썩 웃으며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좋은 선택이야. 저놈 정도면 아마 좋은 상대가 될걸? 꽤 하는 놈인데, 내게 배웠던 것만 잘 기억하면 충분히 넘어설 수 있어.”
“예, 주군. 염려 마십시오.”
“……!”
염상대주의 눈이 가느다래졌다.
대뜸 자신을 상대하겠다고 나선 놈도 무시할 수 없는 기세를 뿜어내고 있는데 그놈이 주군이라 칭하는 사내는 아예 어느 정도 수준인지 감도 잡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차창. 스각. 휘리릭. 카캉. 서거걱.
“크아악!”
“커헉!”
그 사이에도 수하들이 픽픽 쓰러지고 있었다.
‘안 되겠다. 어떤 놈들인지는 몰라도 이대로는 그냥 쓸려 나간다.’
판단을 마친 염상대주가 벼락처럼 고함을 질렀다.
“더는 숨길 것 없다. 힘을 개방해라. 놈들을 빠른 시간에 치워 버리고 거점을 옮긴다.”
“충!”
“하아아!”
염상대주의 명령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몇몇 곳에서 폭발하듯 치솟는 기운들이 있었다.
예상했었던 것처럼 마공의 힘이었다.
그런데…….
“지랄!”
파아아-! 쉬각.
“커헉!”
“그렇게 말하면 쫄 줄 알았냐? 씨댕아?”
피쉬이잇. 서걱.
“크아악!”
독사와 유종이 비웃음을 터뜨리며 마공을 뿜어내던 두 사내를 대뜸 베어버린 것이다. 이미 몇 단계나 무위가 높아진 그들을 하위 마인들 정도로는 상대할 수 없었다.
꿈틀.
염상대주의 눈두덩이 무섭게 요동을 쳤다.
‘대체 어디서 이런 놈들이…….’
모래알이 틀어박힌 것처럼 염상대주의 심장이 뻑뻑해져 올 때였다.
“덤비기 싫으면 목이나 길게 빼라-앗!”
휘리릭. 파아아-!
노백인이 염상대주를 향해 짓쳐들었다. 유성검법의 초식 중 하나인 유성일뢰를 펼쳤다.
“우웃!”
화들짝 놀란 염상대주가 허리춤의 도를 뽑아 그었다.
파카-앙! 쿵쿵쿵.
한 번의 접전에 세 걸음이나 뒤로 밀린 염상대주를 향해 노백인이 독수리라도 된 양 덮쳐들었다.
피쉬잇. 쉬리릭. 카카캉.
둘 중 하나가 죽어야만 끝이 나는 싸움이 시작되었다.
‘노백인은 잘 해낼 것 같고…….’
노백인과 염상대주와의 싸움을 잠시 더 지켜보던 용무린은 이내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렸다. 자신이 감지한 놈의 수준이 정확하다면 어려움은 있을지언정 노백인이 당하지는 않는다는 판단이 내려졌기 때문이다.
‘독사도 괜찮고 유중도 적당한 상대를 찾았네.’
독사는 염상 부대주를 차지하고 맹공을 퍼붓고 있었고 유중은 염상에 스며든 마인들의 조장쯤 되는 놈을 상대로 잘 싸우는 중이었다.
‘에이, 심심해라.’
피 끓는 전장에 홀로 멀거니 서 있자니 멋쩍었다.
“죽어엇!”
“너나 뒈져랏!”
파카캉. 쉬가가각.
어찌된 영문인지 누구도 용무린을 향해 덤벼들지 못했다.
추측할 수 없는 강자에게 함부로 검을 들이 밀었다가는 즉시 죽는다는 것을 아마 본능적으로 다들 감지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에라, 그냥 나는 애들 수련이나 시켜준다고 생각하자.’
흑야방을 상대로 이만한 수련 상대가 솔직히 어디 또 있겠는가?
마기를 뿜어내는 놈들이 몇몇 있기는 하지만 어차피 외원 소속의 하급 마인들인지라 그다지 위협적이지도 않았고 그런 놈들은 또 패싸움에 능한 흑야방의 무인들이 둘 혹은 셋씩 뭉쳐서 잘 대처하는 중이었다.
‘일단 저놈!’
그중에서 용무린의 눈에 띄는 놈이 있었다.
“하아아!”
패애애액. 후우웅. 화아악.
우렁찬 고함소리와 함께 휘두르는 검 끝에서 희미한 마기가 소용돌이치는 녀석, 절정 중급은 족히 되어 보이는 마인이었다.
카앙! 탕! 따다다-당!
“큽!”
“흐읍!”
검 끝을 타고 뿜어지는 마공의 힘 때문에 흑야방의 수하들 넷이 합공을 하면서도 정신없이 뒤로 밀렸다.
휘슷.
더 볼 것도 없다는 듯 용무린은 수하들 곁으로 이동해 참견을 했다.
“멍청아! 정신 차려.”
따앙.
수하의 목을 향해 떨어지던 놈의 검을 일지관수로 간단하게 뒤로 밀어낸 후 폭풍 잔소리를 퍼부었다.
“봐봐. 녀석이 힘을 쏟을 때마다 빈틈이 드러나는 게 보이잖아?!”
“예? 예, 보이긴 합니다, 주군. 그런데…….”
“그런데는 개뿔, 이 바보들아. 합공을 하면서 네 놈이 같은 초식만 펼쳐 같은 곳만 노리면 어떻게 하자는 거야? 한 놈은 다리를 노리면 다른 놈들은 당연히 놈이 튀어 오를 것에 대비해 위나 뒤 혹은 좌우를 노려 포위망을 구축해야 할 것 아니야?!”
“아!”
그제야 알겠다는 듯 흑야방의 수하들이 탄성을 발했다.
그리고 즉시 용무린의 조언대로 움직였다.
“하앗!”
“차아아!”
같은 초식을 펼쳐도 정직하게 한 곳만 노리는 것이 아니라 피할 곳까지 계산해 함정을 파는 식으로 공격을 퍼부어 나갔다.
“이, 이런 젠장!”
카앙. 카카캉. 쿵쿵쿵.
놈은 금세 수세에 몰렸다. 용무린의 간단한 조언에 단조로운 공격이 조화를 이루니 전처럼 수월히 감당하기가 힘들어진 것이다.
“그렇지! 잘한다-아!”
신이 난 용무린이 추임새까지 넣을 때였다.
따앙. 차차창. 스걱.
“크헉!”
마침내 마인의 심장이 두 쪽으로 갈렸다. 허수아비처럼 풀썩 쓰러졌다.
“잘했어! 앞으로도 그렇게만 하라고!”
진심 어린 격려를 끝으로 용무린은 또 다른 희생자를 찾아 움직였다.
“감사합니다, 주군.”
“명심하겠습니다.”
신나게 인사를 한 흑야방 무인들은 경험을 살려 점점 더 무섭게 변해만 갔다.
“이때는 이렇게 해야지! 봐봐!”
차창. 슥.
“큽!”
막 흑야방 무인 한 사람의 심장을 찌르려던 마인의 공격을 무위로 돌린 후 시범까지 보였다. 녀석의 피부만 슬쩍 슬쩍 베어 오줌을 지리게 만들었다.
“알겠습니다, 주군!”
“확실히 하겠습니다.”
“하아앗!”
차차창. 패애애액. 스거걱.
“크아악!”
착실한 선생과 제자가 된 듯 한순간에 달라지는 흑야방의 무인들 손에 염상에 숨어 있던 하급 마인들은 속수무책으로 쓰러져 갔다.
“잘 봐! 저 자식이 방금 이렇게 허초를 펴서 네 심장을 노렸었잖아? 그럴 때는 이런 방법으로 파고들어서 피한 후 반격초식을 펴는 거라고!”
그러면서 유성탄검의 초식을 알기 쉽게 풀어서 직접 보여주었다.
따아-앙. 스각!
“큽!”
튕겨 오른 검 때문에 만세를 부르듯 두 팔을 높이 쳐든 운수 사나운 마인 하나가 또 피부만 잘게 썰리는 표본이 되었다.
“아하!”
“잘 알겠습니다, 주군.”
모범생이라도 된 듯 고개를 끄덕이는 흑야방 무인들.
“알았으면 그대로 실시!”
“넵!”
“하아아!”
패애액! 차차차창. 스걱.
“커헉!”
‘씨바, 이건 반칙이잖아!’
억울함을 감출 길 없는 눈을 한 채 쓰러져가는 마인들이 줄을 이었다.
“푸흐흐. 그러게 누가 내 눈에 걸리래?”
입꼬리를 길게 말아 올린 채 용무린은 주변을 헤집고 돌아다니며 훈수를 두고 시범을 보였고 마인들은 속절없이 쓰러졌다.
“크허억!”
마침내 염상대주의 가슴이 복부까지 길게 찢어졌다. 외마디 비명을 쏟으며 바닥을 뒹굴었다. 용무린이 알려 준 유성회륜의 초식을 보기 좋게 써먹은 결과였다.
“허억. 헉. 허억…….”
노백인이 거친 숨을 몰아쉬며 감격해 했다.
‘내, 내가 마교의 마인을 쓰러뜨리는 날이 올 줄이야!’
이제는 중견 방파의 수장이 되었으며 무위는 절정의 상급에 달한다. 껄렁한 조직인 흑야방의 이인자로 살아오던 날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났다.
울컥!
노백인의 심장 깊은 곳에서 뜨거운 무엇인가가 치밀어 올랐다.
“주군! 감사합니다! 이 목숨 바쳐 주군을 따를 것입니다.”
뜨거움을 참지 못해 노백인이 뱉어냈다.
“감사합니다, 주군!”
“이 목숨은 주군 것입니다-아!”
같은 심정인 모양인지 독사와 유중을 비롯한 흑야방의 무인들이 뜨겁게 외쳤다.
오그작.
‘아, 그 자식들 정말…….’
용무린의 손발이 오그라졌다. 그래서 퉁명스럽게 외쳤다.
“됐고, 빨리 정리나 하자.”
“예, 주군!”
“들었지 이놈들! 우리 주군께서 빨리 정리 하랍신다!”
“죽어라!”
패애액. 스각. 스가각.
“크악!”
“커허억!”
그리 오래지 않아 취선각 내원에 깃 들었던 염상 조직의 큰 덩어리 하나가 완전히 박살이 났다.
***
대풍현의 현청.
“뭐, 뭐라? 취선각이 정체 모를 놈들로부터 공격을 받고 있다고?”
현령 석한생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보좌관인 현승의 말이 계속해서 이어졌다.
“그렇습니다. 숫자는 알 수 없지만 많은 수의 왈패들이 취선각 내원을 점거한 채 새로 들어선 조직을 쓸어내는 중입니다.”
“허어! 이를 어쩌지? 그분께서 잘 돌보라 특별히 언질까지 주셨던 놈들인데…….”
현령 석한생의 얼굴에 낭패감이 어렸다.
얼마 전 취선각을 차지한 왈패들이 상납하는 최상위에 그분이 있음을 잘 알기 때문이었다.
‘필시 그분의 군자금을 충당하고 있는 조직일 터인데 그렇게 쓸려 나가게 두면 나는 어쩌지?’
보나 마나인 거다.
그분께 밉보인 대가로 출세 길도 막힐 것이며 자칫하면 벼슬을 잃고 낙향해야만 할지도 모르는 일이다.
‘안되겠다. 감당이 되든지 안 되든지 일단 노력하는 모습이라도 보여야만 해!’
정말 왈패들의 싸움이 맞다면 자신의 힘으로 어느 정도는 수습이 가능할 것이다.
‘놈들을 잡아들일 수 없는 상황이라면 최소한 그분께 상납할 수 있도록 방향이라도 틀어두면 되겠지?’
이 일을 그분이 알게 되더라도 그런 조치를 취해 놓는다면 자신에게 분노가 쏟아지지는 않으리란 계산이 서자 현령 석한생은 즉시 행동을 개시했다.
“현승은 지금 즉시 현 내의 병사들을 집결시켜라. 내가 직접 선량한 양민들을 폭압으로 몰아내고 사익을 취하려는 악독한 무리들을 진압하리라.”
“명!”
현승이 부리나케 뛰었다.
***
취선각에 승리의 기쁨과 때늦은 원망과 짙은 슬픔이 교차하고 있었다.
“와하하. 이겼다!”
“승리다!”
“흐흐흑. 왜 이제야 왔어요?”
“어흐흑. 앵화와 소월이가 놈들 손에 죽었어요.”
승리의 기쁨은 이십여 명에 달하는 마교 마인들을 쓰러뜨린 흑야방의 것이었고 원망과 짙은 슬픔은 하오문 수호대와 기녀들의 몫이었다.
“늦어서 미안하구나. 놈들의 정체를 눈치 챘기 때문에 완벽을 기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가 없었다.”
하오문 수호대주는 기녀들 앞에 고개를 떨구었다.
어쩔 수 없었다는 것을 물론 기녀들도 다 알고 있다. 하지만 저렇게라도 쏟아내고 털어내야지 어떻게 하겠는가?
‘그나마 여긴 복수라도 끝냈으니 다행인 게지.’
이젠 시간이 약인 거다.
놈들에게 치욕을 당하기는 했지만 본디 마음이 강한 기녀들이 아니던가? 다들 잘 추스를 것이다.
그때였다.
“선량한 양민들을 살해하고 이곳을 빼앗은 놈들을 모조리 포박하라!”
“명!”
되도 않는 외침과 함께 수백에 달하는 병사들이 창 한 자루씩을 꼬나 쥔 채 우르르 밀려들었다. 보는 눈도 더럽게 없는 것들이 관병이라는 위세만 믿고 금방이라도 찌를 듯 창을 중단에 세우기까지 했다.
“뭐지, 저것들은?”
“나 참, 어이가 없어서…….”
“선량한 양민들을 살해해? 우리가?”
“아니, 염상과 마교의 하급 마인들이 언제부터 선량한 양민들이 되었지?”
노백인을 비롯해 독사와 유중 그리고 하오문의 수호대주까지 분개해 눈을 부라릴 때였다.
다가닥. 다가닥.
나 좀 멋있지? 위엄 있어 보이지?
그렇게 시위하듯 현령이 말을 타고 내원으로 들어섰다. 크게 고함을 질렀다.
“닥쳐라, 이놈들! 깡그리 쓸어버리기 전에 모두 얌전히 오라를 받으렷다!”
한차례 풀썩 웃어 보인 용무린이 앞으로 나섰다.
위풍당당 근엄한 표정으로 내려 보는 현령을 향해 손을 까딱였다.
“마! 너 이리 내려와 봐.”
뉘 집 개가 짖느냐는 것 같은 말투.
흔들림 없는 시선과 싸늘한 미소, 그리고 전신에서 피어오르는 알 수 없는 기세.
‘뭐, 뭐지?’
현령 석한생은 쌔한 무엇인가를 느끼고 움찔해야만 했다.
“호호홋. 재미있네요.”
“그러게요, 언니. 우리가 당할 때는 코빼기도 뵈지 않더니 지금은 왜 이 난리래요?”
기녀들의 비웃음이 현령 석한생을 일깨웠다.
‘이, 이런!’
자신이 누구인지 자각한 현령의 얼굴이 창피함에 훅 붉어졌다. 손상된 체면과 위엄을 되찾기 위해 다시 한 번 고함을 버럭 질렀다.
“네 이놈들! 감히 대풍현의 현령 앞에서 그 무슨 망발이……. 커헉!”
현령 석한생은 말을 끝까지 잇지 못했다.
대뜸 달려든 용무린이 목줄을 잡아채 바닥에 패대기를 쳐버린 것이다.
철퍽!
“대인!”
“저, 저놈들을 쳐라!”
현승과 즙포사신이 벼락처럼 외쳤다.
바로 그 순간,
화아아악! 쿠우우우-!
감히 상상해보지도 못했던 미증유의 기운이 현승과 즙포사신을 비롯한 수백의 병사들을 한꺼번에 휘감았다.
용무린이었다.
그가 불사신기를 끌어 올려 주변을 휘감은 것이다.
“아으으.”
“추, 추워어…….”
아무도 움직일 수 없었다.
일부 병사들은 바지에 오줌까지 살짝 지렸다.
살짝 끌어 올렸지만 그것만으로도 감당할 수 있는 사람이 없었던 거다.
“지금부터 내 허락 없이 움직이는 놈은 황룡패주의 직권으로 모조리 참수해 버리겠다!”
말과 동시에 용무린의 손에서 빛을 발하는 황룡패!
“어헉!”
“화, 화룡패주를 뵈오이다!”
기함을 토하는 현승을 시작으로 즙포사신과 모든 병사들이 일제히 오체투지를 했다. 고개를 땅에 처박고 가늘게 몸을 떨었다.
‘이, 이런 우라질! 황룡패주가 왜 여기에 있는 거야?’
현승 석한생은 엿 됐음을 직감했다.
황룡패주라니!
자금성에 스며들었던 마교의 세력을 일소해 황상의 옥체를 구했으며 감숙에서 벌어지려던 반란과 혈교의 무리마저 단숨에 쓸어버려 황상의 총애를 입는 황룡패주가 왜 이런 곳에서 툭탁거리고 있단 말인가?
“너!”
“……커, 커흑. 눼-에. 큽. 하, 하명하소서.”
목줄이 잡혀 대답하기 힘들었지만 현령 석한생은 사력을 다해 대답했다.
용무린이 나직이 으르렁댔다.
“지금부터 내가 묻는 말에 바른대로 말하지 않으면 알지? 네놈과 네놈의 가문은 물론 너와 관계된 모두의 껍데기를 홀딱 벗겨 버릴 거야. 알아들어?”
“눼, 눼 그러케숩뉘돠.”
여전히 알아듣기 힘든 발음으로 석한생이 열심히 성의를 보였다.
“방금 전에 저 기녀가 하는 말 들었지? 달포 전에 여기 놈들이 무력으로 이곳의 사내들을 깡그리 죽일 때는 뭐하고 있다가 지금은 이렇게 바로 튀어 왔지?”
용무린의 손아귀의 힘을 살짝 풀었다.
“그, 그게…….”
숨통이 트였지만 석한생은 즉답을 할 수가 없었다.
‘말하면 그분께 죽고 말하지 않으면 지금 죽는다.’
정말이지 미칠 노릇이다.
‘어떻게 해야 하지?’
사력을 다해 머리를 굴린 현령 석한생은 별 수 없이 피해를 최소한으로 줄이는 방법을 택했다.
“예전에 있던 놈들보다 지금 들어온 놈들이 준 뇌물이 훨씬 더 많아서…… 그, 그래서 그랬습니다.”
모든 잘못을 자신의 뇌물수수죄로 돌린 것이다.
“그으래?”
용무린의 말꼬리가 슬쩍 올라갔다.
이해가 되는 핑계이긴 했지만 뭔가 석연찮은 점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깟 뇌물 때문에 저렇게 병사들 수백 명까지 휘몰아 달려온다고? 누가 이곳을 먹든지 간에 알아서 뇌물을 바치러 접촉을 해올 텐데?’
그때 가서 행정조치를 취하든 아니면 뇌물을 먹고 적당히 눈을 감아주든 하면 되는 일이다. 본디 이런 곳의 주인은 시시때때로 바뀌는 법이었으니까.
‘그렇다고 통각신경을 쥐어짜기도 조금 그렇고…….’
마인이나 살수들 대하듯 탈탈 털어내면 뭔가 더 나올 듯도 한데, 미지수인 증거를 찾기 위해 한 지방의 수장인 현령을 그렇게 대할 수는 없는 일이다.
‘좋아. 이번 한 번은 그냥 넘어가지.’
어차피 이곳 대풍현이 시작이다.
앞으로도 몇 곳이나 더 남았는데, 계속해서 그곳들을 쳐 나가다 보면 뭔가 윤곽이 나타나리라.
‘그래도 이곳 현령인데 너무 괴롭혀도 뭣하긴 하지.’
애꿎은 병사들의 목숨을 취하지 않으려 황룡패를 꺼내들긴 했지만 자신이 염상이나 흑상의 뒤를 쫓고 있다는 말이 최대한 늦게 퍼지게 하려면 이 녀석을 잘 다독여야만 하는 거다.
용무린은 슬그머니 현령 석한생을 일으켜 세웠다.
흙먼지 묻은 옷을 손수 털어주며 중얼거렸다.
“적당히 좀 받아 처먹어라, 자식아.”
“예? 아, 예. 송구하옵니다, 패주.”
부끄러운 것은 알고 있다는 듯 석한생의 얼굴이 붉은 빛으로 물들었다.
“하여간 이곳의 일은 신경을 꺼라. 황상의 안위를 위한 일의 와중에 본래의 주인을 찾아준 것뿐이니까. 그리고 알지? 이곳의 일이 밖으로 새어 나가면 나는 네놈이 떠벌리고 다닌 것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어.”
“충! 며, 명심하겠습니다, 패주.”
현령 석한생이 바짝 긴장한 목소리로 답했다.
“알아들었으면 가봐. 우린 여기서 뒷정리만 하고 바로 빠져나갈 테니까.”
“넵! 가자!”
우르르. 와르르.
어린아이처럼 대답한 현령 석한생은 부리나케 병사들을 휘몰아 사라졌다.
싱거운 웃음과 함께 돌아선 용무린은 노백인을 향해 명령을 내렸다.
“현령이 알게 되었으니 굳이 감출 필요 없다. 이것들 죄 성 밖으로 끌어내 파묻어 버리고 중상자와 경상자를 구분해서 다음 목적지로 갈 사람들 추려.”
“예, 주군!”
***
‘야, 야단났다.’
현청으로 되돌아온 석한생은 다람쥐 쳇바퀴 돌 듯 집무실을 뱅뱅 돌며 생각에 잠겼다.
‘어떻게 하지?’
용무린이 분명히 그랬다.
이곳에서 벌어진 일이 밖으로 새어 나가면 자신이 떠벌린 것으로 알겠다고!
‘하지만 어떻게 그래? 취선각은 그분께 군자금을 상납하던 놈들의 것이었단 말이야.’
그게 아니라면 어째서 그분이 특별히 자신에게 언질까지 주었겠나?
한데 지키지 못하고 빼앗겼다.
‘본래 그곳이 황룡패주의 정보망 뭐 그런 곳이었나?’
그래서 다시 본래의 주인을 찾아 주었다는 말을 한 것도 같았고 아니면…….
‘서, 설마. 황제폐하의 비선조직?’
어쩌면 동창과 선이 닿아 있던 곳일지도 모른다.
‘그, 그렇다면 황상께서 그분의 내심을 짐작하시고 미리 조치를 취하고 계셨다는 말인가?’
철렁!
심장이 그대로 내려앉는 것만 같았다.
자신의 짐작대로 황제가 그런 사실까지 다 알고 있으면서 황룡패주를 시켜 미리 준비를 하고 있는 것이라면 그분께 선을 대고 있는 자신 역시 중대 기로에 놓여 있는 셈이기 때문이었다.
‘선택해야만 해. 선택을…….’
빙글. 빙글.
한참을 더 집무실을 맴돌며 생각에 잠겨 있던 석한생의 발걸음이 한 순간 뚝 멈춰졌다.
‘별 수 없다. 그렇게 하는 것이 최선이야.’
용무린의 질문에 모든 죄를 자신에게로 돌렸지만 이번에는 중간에 걸쳐 어느 쪽으로 일이 진행이 되더라도 삶을 도모할 수 있는 길이었다.
슥슥슥.
석한생은 재빨리 두 장의 편지를 써 내려갔다.
한 장은 용무린에게, 그리고 다른 한 장은 그분에게 보내는 편지였다.
***
술시 말 취선각 내원.
“호오! 이것 봐라?”
즙포사신이 가져온 밀지를 받아 읽던 용무린의 눈이 동그래졌다.
현령 석한생이 보내온 것인데 생각지도 못했던 소식이 그 안에 들어 있었던 것이다.
-황룡패주께 뒤늦게나마 엎드려 고합니다.
저 혼자만 죄를 뒤집어쓰면 될 것이라는 짧은 생각에 뇌물을 위한 출병이라 답변하였지만, 사실은 취선각을 차지한 놈들의 뒤를 봐주라는 특별한 분의 전언이 있었기 때문에 그리한 것입니다.
그분은 바로 남경의 절대자이신 홍연왕 전하이십니다.
하지만 저는 황제폐하의 충신으로서 패주께서 말씀하신 황상을 위한 일이라는 충언에 퍼뜩 깨달아 이렇게 늦게나마 진실을 알리게 되었습니다.
홍연왕 전하께오서 이곳의 무리들과 어떤 관련이 있는지 저로서는 감히 알 수 없기에 일단 따르기는 했지만 황상을 위한 일에 걸림돌이 된다면 결단코 따를 수 없음입니다.
황룡패주의 거보에 광명이 깃들기를 앙망하나이다.
대풍현 현령 석한생 배상.
씨익.
용무린의 입꼬리가 슬그머니 위를 향해 말려 올라갔다.
“이거 사실이겠지?”
“그러하옵니다, 패주. 석 현령이 충심을 담아 써내려간 것이옵니다.”
쾅!
머리를 바닥에 처박은 즙포사신이 피를 토하듯 외쳤다.
‘충심은 개뿔!’
그렇게 충심이 가득한 인간이 내 앞에서는 딴 소리를 해 놓고 이제야 밝혀?
생각이야 그랬지만 면전에서 즙포사신에게 그런 소리 해봐야 변하는 것은 없다.
“알겠다. 석 현령에게 나 황룡패주가 무척이나 기꺼워하고 있다고 답해라. 절대로 잊지 않겠다고 말이야.”
쿵!
“가, 감사하옵니다, 패주!”
즙포사신이 다시 한 번 머리를 바닥에 찍으며 답했다.
‘그놈의 이마, 몇 마디 더 했다가는 남아나지 않겠다.’
“알았으니 가봐.”
용무린은 됐다는 듯 손을 휘휘 저었다.
쿵!
“평안하시길…….”
마지막까지 오지게 이마를 찍어 보인 즙포사신이 밖으로 사라져 갔다.
홀로 남은 용무린은 생각에 잠겼다.
‘홍연왕이라…….’
선황제의 아우 되는 사람이니 현 황제에게는 숙부가 되는 지고한 위치의 사내로 강소성의 성도인 남경이 지지기반이었다.
‘배가 부르니 딴 생각이 든 것일까?’
그 정도 되는 지위의 사내가 흑상이나 염상 따위의 뒤를 봐줄 일은 사실 없다.
수십만 호의 봉토를 지니고 있으며 일대의 세금까지 각출할 권한이 있는 사람이었으니 황금 따위에 흔들릴 일이 없는 거다.
‘흑상과 염상이 마교의 자금줄인 걸 알고 뒷배를 봐주는 것일까? 아니면 단순히 다른 마음을 먹기 위한 군자금의 부족 때문일까?’
이유가 무엇이든 용무린은 일이 흥미롭게 되어 간다고 느꼈다.
“보면 알겠지.”
대풍현은 시작일 뿐이다.
위를 향해 염성현, 향수현, 운련항 그리고 흑림현까지 차례차례 치고 올라갈 생각이었다.
“어떤 놈들이 튀어 나올까?”
혼자라면 아무것도 걱정할 필요가 없지만 지금은 수하들과 함께하고 있었다.
“상대가 홍연왕이라면 나도 적당히 준비를 하긴 해두어야겠지?”
혹시 모르는 일이다.
방심하다가 구진기 따위에게 아버지와 장인어른을 잃을 뻔하지 않았던가?
용무린도 몇 장의 전서를 써 내려가기 시작했다.
***
강소성 성도 중심에 자리 잡고 있는 홍연왕부.
왕부 내원의 깊숙한 곳을 향해 왕부장사사의 좌장사 채진성이 날듯이 뛰었다.
“왕야!”
“무슨 일이냐?”
“대풍현에서부터 급전이 도착했나이다.”
꿈틀.
홍연왕의 볼살이 크게 씰룩였다.
대풍현은 자신과 손을 잡은 그곳의 세력 일부가 스며든 곳이기 때문이었다.
“이, 이것을 보소서.”
좌장사 채진성이 급박한 목소리와 함께 전서를 내밀었다.
“……크흠.”
전서를 받아 읽던 홍연왕의 얼굴이 점점 더 어두워졌다.
-홍연왕야께 고합니다.
먼저 왕야의 밀명을 제대로 수호하지 못한 점, 엎드려 죄를 청하나이다.
미거한 소관이 취선각의 뒤를 제대로 돌보지 못하였습니다. 오늘 낮 취선각에 일단의 무리가 난입하여 왕야께서 뒤를 봐주라 하셨던 자들을 단숨에 쓸어버렸나이다.
하지만 제 힘으로는 막을 수가 없었습니다.
병사들을 이끌고 달려갔사온데, 그곳에 황룡패주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부디 유념하시오소서 왕야.
황룡패주가 분명히 제게 이리 말하였나이다.
‘황상의 안위를 위한 일을 하는 와중에 잠시 들러 본디 주인을 찾아준 것일 뿐이다.’ 라고 말입니다.
복중의 큰 뜻을 혹여 그가 눈치 채고 먼저 움직인 것이 아닐지 염려가 되어 이리 급전을 보내나이다.
대풍현 현령 석한생 배상.
그야말로 청천벽력과 같은 소식이었다.
‘빌어먹을!’
보는 눈 때문에 홍연왕은 치밀어 오르는 욕설을 차마 내뱉을 수가 없었다.
‘어린 조카 놈이 실기하기만 기다리고 있었거늘 어찌 황룡패주 따위가 갑자기 튀어나오는 것이란 말이냐?’
천근 거암이라도 올려놓은 듯 가슴이 답답해졌다.
“어찌 하오리까, 왕야?!”
좌장사 채진성이 걱정 가득한 목소리로 물어왔다.
“……!”
홍연왕은 잠자코 생각에 잠겼다.
좌장사 채진성도 감히 더는 보챌 수 없었다. 조용히 홍연왕의 상념이 끝나기만을 기다렸다.
홍연왕의 머리가 빠르게 돌아갔다.
‘놈이 내 비밀을 어디까지 알고 온 것일까?’
아니 그것보다 더 궁금한 것은 황룡패주가 정말 자신의 비밀을, 평생 꿈꿔왔던 큰 뜻을 정말 알고 이렇게 찾아온 것일까 하는 점이었다.
‘본 왕이 대산과 관련이 있다는 사실은 때가 되기까지 그 누구도 몰라야 하는데……. 알았다면 대체 어디까지, 그리고 어떻게 알아낸 것일까?’
마교 같은 사특한 무리와 손을 잡은 이유는 간단했다.
홍연왕에게 회천의 대계, 즉 황제의 자리에 오르고 싶은 꿈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때문에 손을 잡을 수밖에 없었지.’
한동안 잘 되고 있었다.
황제가 마교의 농간에 의해 자취를 감추었으며 문무백관은 기다렸다는 듯 전횡을 해 양민들의 삶을 힘겹게 만들기 시작했다.
‘조금만 더 그렇게 시간을 끌면 모든 민심이 내게로 쏠렸을 터인데 그 망할 놈의 황룡패주가 나서서 한 순간에 무위로 돌렸지.’
느닷없이 생각지도 못했던 황룡패주가 나타나 마교를 쓸어내고 황제를 무사히 구했다는 소식에 정말 얼마나 분통이 터졌는지!
‘다시 때가 오기를 기다려야만 해.’
황제의 위에 오르기 위해서는 천심이랄 수 있는 민심을 얻지 못하고는 절대로 성공할 수 없음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자신이었다.
‘그래서 절대고수들이 많은 놈들을 이용해 옥좌에 오른 후 놈들을 사이한 마교로 선포하고 쓸어내려 했었는데!’
또 다시 모든 계획이 뒤틀렸다.
정말이지 피가 거꾸로 치솟는 느낌이었다.
‘어째서 무능한 조카 놈 따위에게 그런 힘을 가진 황룡패주가 붙었을까?’
더불어 왜 자신에게는 황룡패주와 같은 인재가 나타나 주질 않는 것일까? 하고 홍연왕이 한탄할 때였다.
‘아니지! 황룡패주를 회유하면?’
번뜩 기가 막힌 생각이 홍연왕의 뇌리를 스쳤다.
‘맞아. 그래. 황룡패주를 내 사람으로 회유하는 거야.’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역사를 뒤져 보면 그런 일들이 숱하게 나온다.
여포와 같은 맹장도 결국 의부인 동탁을 향해 창끝을 돌려 세우지 않았던가?
“좌장사!”
“예, 왕야!”
좌장사 채진성이 단단한 목소리로 답했다.
“황룡패주를 회유한다. 적절한 계획을 짜보도록!”
“충!”
활로를 찾은 듯 환한 얼굴이 된 좌장사 채진성이 힘찬 목소리로 외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