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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어디서 약을 팔아? (77/104)

8.어디서 약을 팔아?

다음 날 아침.

출발을 앞둔 용무린 앞으로 한 장의 전서가 도착했다.

“당대 하오문주의 전언이옵니다, 패주.”

하오문 수호대주가 전서를 받자마자 들고 달려온 것이다.

‘홍연왕에 대한 것이겠지?’

대충 짐작이 갔다.

하오문의 진정한 힘은 정보, 그 중에서도 고관대작들에게서 흘러나오는 정보였으니 홍연왕의 움직임을 뒤늦게나마 알아차렸을 가능성이 높다.

“그래? 어디 한 번 볼까?”

-황룡패주께 아룁니다.

죄송한 말씀이지만 모든 일을 멈추시고 그냥 되돌아오시길 간원 드립니다. 이것으로 빚을 모두 갚고 오히려 하오문이 갚아야 할 빚이 있음을 인정합니다.

자칫 잘못하면 그동안 기회만 보아오던 남경의 절대자 홍연왕이 움직이게 됩니다.

그동안 빼앗겼던 하오문의 분타들을 접수한 곳의 마지막 뒷배가 바로 홍연왕야 본인인 것으로 파악되었기 때문입니다.

마교가 홍연왕의 군자금 일부를 감당하고 있다는 것이 본문의 판단입니다. 홍연왕이 패주의 행동을 자칫 황제폐하의 의도로 인식하게 되면 당하기 전에 공격으로 나설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습니다.

그렇게 되면 엄청난 양의 피가 흐르게 됩니다.

본문은 황룡패주와 패주의 가문에 위해를 끼칠 수도 있는 일이 더 이상 확대되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그러니 이만 멈추어 주십시오.

하오문주 이능하 배상.

‘후훗. 그래도 마음 씀씀이는 곱네.’

용무린의 눈이 둥그렇게 휘었다.

하오문주의 말은 결국 자신이 모든 손해를 감당할 터이니 위험한 일에 더는 엮이지 말라는 뜻이었기 때문이었다.

“수호대주.”

“하명하십시오, 패주.”

“하오문주에게 지금 즉시 전서를 보내.”

“무어라 하오리까?”

“마교와 엮여 있다면 그것이 설사 홍연왕이 아니라 홍연황보다도 더 높은 지위라 해도 상관이 없다고 말이야.”

꿀꺽.

너무나 엄청난 말에 수호대주가 마른침을 크게 집어 삼켰다. 용무린의 말이 계속해서 이어졌다.

“내 일은 내가 알아서 할 터이니 걱정 말고 애들 입단속이나 잘 시키라고 해. 알아들어?”

“명!”

바짝 긴장한 목소리로 대답한 수호대주가 물러갔다.

피식.

용무린이 입술만 슬쩍 움직여 싸늘하게 웃었다.

“홍연왕? 딴 마음 먹는답시고 마교와 손을 잡았으면 너도 그만한 대가를 치러야지. 안 그래?”

그딴 놈들과 손을 잡는 놈이 얼마나 양민들을 위한 삶을 살겠는가? 굳이 보지 않아도 빤했다. 제 배만 실컷 채우고 몰라라 할 것이다.

“거기에 비해 현 황제폐하는 백성들도 잘 살피고 나와 쿵짝도 잘 맞는단 말이지.”

그 전에야 어땠는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현 황제는 황궁무고의 일을 겪은 후 백성들을 위한 선정을 펼치는 정말 멋진 황제가 되었다.

“그런 판국에 홍연왕? 내가 지금 당장 달려가 목을 따버리지 않는 것을 다행으로 알아야지!”

지금 당장 뛰어가지 않는 것은 그래도 황제의 숙부이기에 주는 마지막 기회다. 그런데도 주제를 모르고 욕심을 부리면 그 뒷일은 모두 그 멍청이의 탓이리라.

“자, 그러면 이만 출발해볼까?”

용무린이 벌떡 일어나 밖으로 향했다.

“출발!”

“충!”

노백인과 독사 유중을 선두로 흑야방과 하오문 수호대 모두가 용무린의 뒤를 따랐다.

그렇게 용무린은 차근차근 북진을 했다.

대풍현을 벗어나 나흘 후 염성현을, 다시 닷새 후에는 향수현의 하오문 분타를 박살냈다.

물론 그때마다 재미있는 일이 벌어졌다.

대풍현에서 그러했듯 염성현과 향수현에서도 제각각 현령들이 병사들을 이끌고 달려왔던 것이다.

***

“뭐, 뭐얏? 또 황룡패주라고?”

연이은 급보에 음양자의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만금상단에 이어 마영각까지 박살났다.

그런데 이제는 마지막 보루라고 할 수 있는 흑상과 염상까지 찾아내 박살내고 다니고 있다니! 그야말로 마교의 숨통을 끝까지 조르겠다는 것이 아니고 뭔가?

“상황이 급합니다. 대풍현은 물론이고 이미 염성현과 향수현의 조직까지 쓸려나갔습니다.”

“허어!”

기가 막힌 모양인지 음양자의 입에서는 계속해서 탄식만 쏟아졌다.

“만금상단의 일로 마영각이 쓸려나간 후유증이 너무나 큽니다. 마영각의 부재로 중원의 움직임을 살필 수 있는 눈을 잃어버린 터라 흑상과 염상이 대처를 할 시간적 여유가 없었던 듯합니다.”

듣고 있자니 속에서 천불이 인다.

음양자가 고함을 버럭 질렀다.

“아니, 홍연왕 그 멍청한 인간은 무얼 하고 있는데? 회천대계를 이루기 위해서는 우리 세력을 잘 보존해 줘야 한다는 걸 정말 몰라서 그래?”

정말이지 화를 내지 않으려야 않을 수가 없다.

신마가 대공을 이룰 시기에 맞추어 써먹으려고 접촉해 손을 잡았다.

홍연왕의 숨겨둔 야심과 신교의 야욕이 교묘히 맞물려 이뤄낸 성과였다.

홍연왕은 회천대계를 이룰 때 부족한 병사들의 숫자를 절대고수들로 채워 단숨에 판도를 뒤엎을 속셈이었고 음양자는 신교의 중원진출 시 홍연왕을 통해 관과 군의 견제를 최대한 받지 않을 속셈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신마께 보고를 했을 때 관과 군은 염려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씀을 드린 것인데…….’

이제는 그것마저 흔들리게 되다니!

물론 음양자 역시 회천대계 어쩌고 하는 홍연왕의 뜻을 이뤄줄 생각은 전혀 없었다.

신교의 중원진출에 관과 군의 견제만 없다면 손쉽게 무림을 집어삼킬 수 있을 테고 그 후에는 놈을 돕기 위해 미리 보내 놓은 수하들로 하여금 홍연왕의 목을 취할 생각이었기 때문이었다.

‘하늘 아래 절대자는 신마 한 분이면 족하지! 암!’

그렇듯 서로 다른 꿈을 꾸고 있었지만 일이 이렇게 되니 화살을 돌릴 사람은 홍연왕밖에는 없는 거다.

“머저리 같은 자식! 그 정도도 제대로 하지 못하면서 회천은 무슨 얼어 죽을 놈의 회천이야!”

그동안 만금상단과 흑상 염상을 운영하며 비축해 놓은 황금이 적지 않다.

그래서 당장 어떻게 될 정도는 아니었지만 만금상단에 이어 흑상과 염상까지 모두 털려나간다면 불과 일 년 뒤가 두려워진다. 십만에 이르는 신교의 구성원이 먹고 입고 쓰는 비용은 장난이 아니기 때문이다.

“어떻게 해야 할지 하교를 내려 주십시오.”

음양자의 머리가 무섭게 회전했다.

여러 가지 경우의 수를 하나씩 짚어 가장 좋은 방법을 찾기 시작했다.

‘신마께 아뢰어야 하나?’

굳이 그럴 필요가 없는 일이었다.

아리만의 가짜 화신인 혈신과의 싸움으로 인해 내상을 입고 전력을 다해 회복을 하고 있는 그분에게 이런 보고는 심려만 끼치는 일일 테니까.

‘내 선에서 해결을 하는 게 가장 좋은데 말이야.’

일을 실패하는 것도 유분수지 만금상단에 이어 흑상과 염상까지 잃게 된다면 신마의 그 두터운 신임도 흔들릴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때 한 장의 전서가 더 도착했다.

홍연왕 곁에 심어 놓은 수하가 보내온 것이었는데 홍연왕이 용무린을 회유하기 위해 준비 중이라는 소식이었다.

“좋아! 그걸 함정으로 이용한다!”

음양자가 쾌재를 불렀다.

홍연왕의 회유?

되면 대박이고 안 되도 고마운 일이었다.

‘회유고 나발이고 간에 놈을 함정에 빠뜨릴 기회를 잡았다는 게 중요한 거야.’

사실 신마에게 일인지하 만인지상을 약속받은 자신의 입장에서는 황룡패주 용무린이 회유가 안 되는 것이 더 좋은 일이다.

‘그놈이 회유가 된다 한들 내 밑에 있으려 하겠느냔 말이지.’

필시 자신의 자리를 노릴 것이고 그렇게 되면 자신은 크나큰 적을 스스로의 힘으로 만들어내게 되는 셈이다.

“함정이라시면? 홍연왕이 황룡패주를 회유하는 때를 노리시겠다는 것입니까?”

“그래! 어차피 홍연왕도 회유가 안 되면 후환이 두려워서라도 놈을 없애려고 할 거야. 그러니 우리도 말을 꺼내기 딱 좋지.”

“그렇긴 합니다.”

바보가 아닌 바에야 홍연왕도 음양자가 내미는 도움의 손길을 거부할 까닭이 없다. 회유까지 거절했다면 그야말로 끝까지 가자는 뜻인데 그렇게 되면 놈을 죽여 후환을 없애야 하지 않겠는가?

‘내 직권으로 움직일 수 있는 최대한의 힘이 현재 어느 정도지?’

마음만 같아서는 모든 힘을 휘몰아 홍연왕을 향해 달려가고 싶다. 신교의 천년 숙원을 이루기 위한 거보를 내딛기 전에 목에 가시와 같은 용무린을 제거하고 싶어서였다.

‘그랬다가 피해가 생각지도 못할 정도로 크면 그 또한 신마를 뵐 면목이 없어지겠지.’

그러니 적절한 선에서 가장 효율이 좋은 선택을 내려야만 한다.

“좋아, 이렇게 한다! 이리 가까이 와 봐!”

음양자가 눈을 빛내며 손을 까딱였다.

“예? 아, 예. 알겠습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음양자의 명령을 듣고 있던 수하의 눈이 점점 더 밝은 빛을 띠었다.

***

운련항은 양쯔강의 지류가 바다로 빠지는 곳이다.

타국과의 교역과 수로를 통한 물산 이동의 중심지이다 보니 말이 일개 현이지 규모는 여느 성도 못지않을 만큼 큰 곳이었다.

거친 바닷바람에 시달리고 주변에 산재한 염전에서 고생한 인부들이 술과 향락을 즐겨함은 당연한 일이어서 운련항의 대로에는 온갖 객잔과 주점 그리고 유곽이 즐비하게 서 있었다.

그 중에서도 단연코 화려하고 규모가 큰 곳은 바로 운련각, 바로 하오문에서 운영하는 곳이었다.

“저곳이라고?”

“예, 패주. 그런데…….”

용무린에게 운련각을 안내했던 수호대주의 고개가 갸웃하고 기울어졌다. 이를 갈며 달려왔거늘 어쩐지 운련각 주변의 분위기가 이상했던 것이다.

운련각 앞에서 웅성대는 사내들이 보였다.

“뭐야? 왜 장사를 안 해?”

“거 참, 안에 계집들은 다 있는 듯한데 문을 안 여네?”

탕! 탕! 탕!

“야! 문 열어! 오늘 내가 홍란이랑 술 먹기로 예약이 되어 있단 말이야!”

“나도! 나는 앵화랑 오늘 함께 하기로 예약이 되어 있어! 빨리 문 열지 못해?!”

교역 중심지다 보니 수중에 돈푼깨나 있는 한량들이 아직 해가 남아 있음에도 불구하고 운련각에 몰려들어 문을 두드려대는 중이었다.

슬쩍 지는 해를 바라보던 용무린도 수호대주의 말에 동감을 표했다.

“뭔가 이상한데? 유시니까 지금쯤 슬슬 문을 열어야 하지 않나?”

설마 하는 생각이 확 스쳐 지났다.

“한번 알아보고 오겠습니다.”

“그래.”

휘슷.

하오문 수호대주가 잽싸게 운련각을 향해 달렸다.

그리고 잠시 후.

“패주! 텅 비어 있습니다. 놈들이 눈치를 채고 사라져 버렸습니다.”

수호대주가 약이 바짝 오른 얼굴로 돌아와 고했다.

“그으래?”

대충 놈들의 내심이 짐작이 간다는 듯 용무린의 말끝이 올라갔다.

“하오문 식구들은? 기녀들은 괜찮고?”

“예, 패주. 그냥 영업을 개시해야 할지 말지를 두고 그녀들도 지금 어쩔 줄 몰라 하고 있는 중입니다.”

당황스럽기도 할 것이다.

두어 달 남짓한 시간 동안 온갖 패악을 다 떨며 저희들 멋대로 운영을 해온 놈들이 하루아침에 몽땅 사라져 버렸으니 말이다.

놈들이 도망간 것으로 인정하고 문을 열자니 그동안 당해온 상처를 치유할 시간이 필요했고 그렇다고 계속 닫고 있자니 언제 다시 돌아와 패악질을 할지 몰라 전전긍긍하고 있었으리라.

“가자! 그냥 접수하면 되지 뭐.”

간단명료한 일이었다.

흑야방 수하들 수련 기회가 사라진 것이 조금 아쉽지, 따지고 보면 귀찮은 일 덜게 되어 좋은 거다.

“놈들을 추적하지 않습니까?”

“뭐 하러 그래?”

노백인의 질문에 용무린은 픽 웃으며 답했다.

“우리 존재를 알아차리고 튄 거잖아! 그러면 답은 빤하지. 힘을 모아서 우리와 상대를 하려고 하든지 아니면 아예 멀찍이 물러나 다음 기회를 노릴 거야.”

물론 집을 내어준 후 방심을 노린 야간 기습이라는 작전도 있을 수 있겠지만 아무래도 좋다.

‘그때는 야간전투 훈련을 하는 셈 치지 뭐.’

경험도 그만한 경험이 없는 거다.

용무린과 함께 운련각으로 들어간 하오문 수호대로 인해 기녀들은 빠른 속도로 안정을 되찾았다.

왜 이제 왔느냐는 원망을 할 법도 하건만 잊지 않고 이렇게 와 준 것에 대해 고마워했으며 기꺼이 용무린과 흑야방 무인들을 위해 식사를 차렸다.

“놈들이 흑림현에 죄 몰려 있을까요?”

“글쎄?”

노백인의 질문에 잠시 생각을 해보았던 용무린은 이내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아무래도 그곳 역시 텅 비어 있을 듯싶네?”

“그러면 흑림현에는 하오문 수호대만 보내고 저희는 놈들의 뒤를 탐문합니까?”

“아니? 그랬다가 자칫 잘못하면 수호대만 몽땅 쓸려나가게 될 거야. 어차피 나선 걸음이니 거기까지는 함께 가서 확인을 해봐야지.”

“알겠습니다, 주군. 그렇게 알고 준비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래.”

노백인이 물러가고 용무린은 홀로 생각에 잠겼다.

‘홍연왕! 이제 어떻게 할래?’

운련항의 마교 수족을 뒤로 물린 것이 홍연왕의 생각인지 아니면 마교의 술수인지는 아직 모른다. 하지만 마교와 서로 손을 잡았다는 것을 들킨 이상 홍연왕이 어떤 행동을 취해올 가능성이 가장 컸다.

‘수작 부리지 마라, 홍연왕. 내가 진성왕야를 인정하고 그분께 존대를 하는 이유는 그분이 자신의 분수를 알고 그에 맞게 행동하기 때문이야.’

있는 듯 없는 듯 세상을 즐기며 황제를 누구보다 위하는 사람이 바로 진성왕이었다. 그래서 용무린이 진성왕을 도와 무림과 관의 경계를 넘었던 것이다.

그때였다.

용무린에게 답이라도 주겠다는 듯 생각지도 못했던 인물의 도착 소식이 들려왔다.

“주군! 홍연왕야를 수호하는 왕부장사사의 좌장사께서 찾아왔습니다.”

“홍연왕야를 수호하는 좌장사?”

“그렇습니다, 주군.”

헤죽.

‘올 게 왔나?’

“들라 해라!”

“저, 그, 그게…….”

난감한 모양인지 노백인이 말꼬리를 늘였다.

“뭔데 그래?”

“좌장사께서 황룡패주께 전할 왕명이 있으니 어서 나와 엎드려 왕명을 받으라고 해서…….”

지랄도 풍년이다.

‘황제폐하의 어명도 맘에 안 들면 면전에서 거절하는 내게 홍연왕의 가신 따위가 왕명 운운하며 엎드리라고?’

피식.

코웃음이 났다.

“뭐, 나가 주지.”

용무린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공연히 수하들 곤란하게 하느니 직접 나가서 해결을 볼 생각이었다.

“황룡패주 납시오-오!”

그 사이 눈치가 늘었는지 독사가 목청껏 용무린의 등장을 알렸다.

처처척.

좌장사 일행이 일제히 무릎을 꿇으며 군례를 취했다.

“황룡패주를 뵈오이다.”

“황룡패주를…….”

그 앞에 당당히 선 용무린이 담담한 목소리로 물었다.

“됐고, 뭐냐?”

“예?”

좌장사 채진성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알 바 아니라는 듯 용무린이 다시 채근을 했다.

“나 바빠 인마. 왔으니까 빨리 말 해. 뭐야? 대체 뭔데 오라 가라 지랄이야?”

참을 수 없다는 듯 좌장사 채진성이 일어났다.

“패주! 말씀이 지나치시오! 본 좌장사는 홍연왕야의 왕명을 받들고 나온 몸, 이 몸에게 그런 무례는 곧 홍연왕야께 무례임을 모르신단 말이오?”

용무린을 향해 눈을 부라렸다. 목에 핏대를 세웠다.

그러더니 품속에 넣어 온 왕명의 교지를 쭉 앞으로 내밀었다. 기세등등하게 외쳤다.

“황룡패주는 홍연왕야의 왕명을 받으라!”

알 만한 놈이 정보에는 참 더럽게 어둡다.

황룡패주 용무린이 왕명이라면 껌뻑 기가 죽어서 무릎을 꿇고 고개를 조아릴 것으로 생각하다니!

휘슷. 콰악!

용무린이 단숨에 좌장사 채진성의 목줄을 잡아챘다.

“컥! 끄으으…….”

목줄을 잡힌 채진성의 입에서 앓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생각지도 못했던 일에 난리가 났다.

“좌, 좌장사!”

“이, 이런 무도한 일이!”

함께 온 왕부장사사 소속 천호장과 백호장 그리고 휘하 정병들이 들고 일어난 것이다.

차차창.

“어서 그 손 놓으시오, 패주!”

“감히 홍연왕 전하의 왕명에 항명이라도 하겠다는 말이오이까?!”

용무린을 향해 검을 뽑아 세웠고 창을 겨누었다. 서슬 파랗게 윽박질렀다. 물론 그들의 행동이 용무린의 성질을 더 돋우었다.

“어따 대고 쇠꼬챙이를 들이밀어!”

휘슷.

용무린이 짧게 손을 뿌렸다. 보이지도 않는 그 무엇인가가 폭발하듯 뻗어나가 전면을 부드럽게 휘감더니 씻은 듯 사라졌다.

카가각!

나직한 소리와 함께 용무린을 향해 뽑아들고 세웠던 검과 창의 중단이 거짓말처럼 잘려 바닥으로 떨어졌다.

“어헉!”

“허어억!”

소스라치게 놀란 왕부장사사 소속 무관들이 토끼 눈을 한 채 용무린을 바라보았다.

“모가지를 죄 베어 버리려다 그나마 참았다. 경고하건대 참아 주는 것은 그 한 번이 끝인 줄 알아라.”

왕부장사사 소속 무관들을 향해 나직한 목소리로 으르렁거린 용무린은 아직도 숨을 헐떡이는 채진성을 바짝 잡아 당겼다.

“가서 금서철권 황룡패주의 권위가 어떤 것인지 알아보고 다시 올래? 아니면 이대로 왕야의 교지나 잘 전달하고 몸 성히 살아서 갈래?”

당연히 후자였다.

황룡패주의 권위라는 것이 확실한 증거만 있다면 황제를 제외한 황실 종친 누구라 하여도 즉참을 할 수 있는 무상의 권위가 있음을 그 역시 알고는 있었던 것이다.

물론 그 권위를 이런 식으로 표현을 할 줄은 미처 모르고 있었지만…….

“와, 왕야의 왕명을……. 끄으으. 후우-!”

원하던 대답에 손아귀의 힘을 풀어주었는지 좌장사 채진성이 숨을 길게 몰아쉬었다.

용무린은 그 앞에 당당히 서서 명령했다.

“실시!”

자세를 바로 한 좌장사 채진성이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다시금 왕명이 적힌 교지를 두 손으로 내밀었다. 용무린이 풀썩 웃으며 받아 읽었다.

-바야흐로 가을이 다가 오고 있구나.

가을에는 온갖 생물이 저마다의 결실을 거두는 법!

본 왕은 황룡패주와 더불어 이 나라 양민들이 어떤 결실을 거두게 될지 논하고 싶구나.

오너라 황룡패주.

본 왕과 더불어 한 잔 술을 마셔보자꾸나.

홍연왕

특유의 수결과 직인까지 찍힌 것을 보니 홍연왕이 직접 써서 보낸 것이 맞아 보였다.

‘가을이 오니 결실을 거두자고?’

은유가 이 정도면 광고에 가깝지 않나 싶은 생각이 들 정도다.

‘하지만 이 정도 은유를 증거로 역모로 엮기에는 많이 부족하지.’

다른 사람도 아니고 남경의 절대자 홍연왕이다.

어지간만 해도 역모로 엮을 수 있겠지만 홍연왕이라면 이야기가 다르다. 충분히 무마할 수 있을 정도의 세력과 지지기반이 있다.

‘좋아. 가주지.’

속이 빤히 보이지만 가야만 마교 놈들과 어떤 밀약을 했는지 알아낼 수 있는 거다.

“가서 전해! 나 황룡패주 용무린이 찾아뵙도록 하겠다고 말이야.”

“저희와 함께 가시는 것이오이까?”

좌장사 채진성이 휘둥그레진 눈으로 물어왔다.

“아니?”

“……!”

용무린의 장난기 어린 대답에 채진성의 얼굴이 단박에 일그러졌다.

“한 곳 더 들를 곳이 있어. 거기만 들른 후 찾아뵙는다고 가서 전해. 볼일 다 보면 아마 보름 후쯤이나 도착하게 될 거야.”

“알겠습니다, 패주.”

좌장사 채진성이 정중히 고개를 숙여 보인 후 뒤로 물러났다.

노백인이 다가와 가만히 우려를 전했다.

“주군. 어째서 한 곳을 더 들르겠다고 말씀하셨습니까? 정녕 흑상 염상과 관련이 있다면 미리 대비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라고 한 거야.”

“아!”

노백인이 탄성을 쏟으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만에 하나 흑림현에서 이곳과 같거나 아니면 다른 대처가 있다면 홍연왕과의 연관성이 더욱 더 확실해지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수호대주!”

“하명하십시오, 패주.”

“지금부터 말이야…….”

“예? 아, 예. 알겠습니다. 즉시 그렇게 조치를 취하겠습니다. 맡겨주십시오.”

하오문 수호대주가 눈을 빛내며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

황제의 침전인 건청궁의 깊은 곳.

깊은 침묵에 빠져 있던 황제의 입이 불쑥 열렸다.

“……정녕 그 보고가 참인가?”

부복한 채 고개를 조아리고 있던 총병관 양문관이 변함없는 어조로 답했다.

“그러하옵니다, 폐하. 황룡패주의 연락을 받은 직후 소장이 직접 오군도독부 산하 정보처를 방문해 그간 홍연왕야와 관계가 깊은 곳들에서 올라온 보고를 살폈사온데 아무런 변함이 없었사옵니다.”

“아무런 변함이 없었는데 어째서 그분의 변심을 확신한다는 말인가?”

황제의 반문에 양문광의 목소리가 살짝 높아졌다. 전과 다른 힘이 실렸다.

“보고와 실제가 달랐기 때문입니다, 폐하.”

“……!”

“황룡패주의 연락을 받은 소장은 깜짝 놀라 그동안 감숙과 혈교에게로 맞추어져 있던 감시망의 초점을 홍연왕야의 일대로 돌렸사옵니다. 한데…….”

“한데?!”

“황룡패주의 불미스러운 짐작이 사실로 드러났습니다. 남경 일대에 주둔하고 있는 좌군도독부의 비축미를 비롯한 활과 화살 그리고 화포와 같은 군수물자가 대폭 증강이 되었습니다.”

“허어…….”

황제의 입에서 긴 탄식이 흘러 나왔다.

양문광의 말은 결국 홍연왕을 따르는 좌군도독부에서 전쟁을 준비하고 있다는 말이었기 때문이었다.

“상황이 급박합니다, 폐하. 좌군도독부는 현재 홍연왕야의 휘하에 들어 있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좌군도독부가……. 고를 위한 군대가 감히…….”

실망감. 안타까움. 분노.

황제의 눈에 여러 가지 감정이 복잡하게 얽혔다. 총병관의 목소리가 계속해서 이어졌다.

“우군도독부 산하 광동성과 광서성의 군사 그리고 전군도독부에 속하는 강서성, 복건성까지 한 배를 탄 것으로 파악이 되고 있습니다.”

전체가 아닌 일부였지만 모두 합하면 무려 이십만 어림, 그것만으로도 엄청난 전력이다.

그때까지 잠자코 있던 사례감 채홍이 나섰다.

“동창의 판단 역시 황룡패주의 짐작이 맞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폐하. 마교의 사주를 받아 움직였던 예전의 동창이 그동안 오군도독부를 비롯한 황상의 눈을 가렸던 것으로 파악되었습니다.”

홍연왕의 역모가 눈에 보일 듯 드러났다.

총병관 양문광이 오군도독부를 직접 탈탈 털어 확인을 했고 사례감은 동창을 움직여 그간 어째서 이 일이 알려지지 않았는지를 밝혔다.

“고가 부덕한 게야. 고가 부족해 애꿎은 양민들이 살기가 힘이 드는 게야…….”

황제가 스스로를 탓했다.

다른 누구도 아닌 홍연왕이 역모를 꾀한다면 선택의 여지가 없기 때문이었다.

황제의 눈에는 역모를 진압하는 과정에 스러져갈 양민들의 모습이 눈에 보일 듯했다.

그 정도로 힘의 결집이 이루어졌다면 전투는 단번에 끝나지 않을 테고 소모된 병사들을 다시 채울 방법으로는 본인이나 홍연왕이나 힘없는 양민들을 긁어모으는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때 양문광이 불쑥 입을 열었다.

“아직 최악의 단계는 아닙니다, 폐하. 황룡패주가 미리 알고 움직이고 있질 않습니까?”

“맞습니다, 폐하. 오늘 들어온 정보에 의하면 홍연왕이 황룡패주를 회유하기 위해 좌장사를 보내 교지를 전달했다고 합니다.”

“황룡패주를 회유하기 위해 교지를?”

황제의 얼굴이 서서히 밝아졌다.

황룡패주를 회유하기 위함이라는 것을 빤히 들었으면서도 그가 자신을 배신할 가능성 따위는 눈곱만큼도 염두에 두지 않았다.

그저 믿는 것이다, 황룡패주 용무린을.

자신이 아는 용무린이라면 홍연왕이 어떤 금은보화와 부귀영화를 약속한다고 해도 절대로 넘어가지 않을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렇사옵니다, 폐하. 머지않아 황룡패주가 홍연왕과 얼굴을 맞댈 터, 그 후에 연락이 올 것입니다.”

“그때 결정을 하면 될 것입니다.”

전군동원령을 내려 역도들과의 전쟁을 선포해 강이 되도록 많은 피를 흘리게 될지 아니면 황룡패주 선에서 작은 피를 흘리고 끝날지 곧 판가름이 날 것이다.

“알겠다. 고는 황룡패주의 판단을 믿고 기다리겠노라. 그 대신 총병관과 사례감은 전력을 기울여 황룡패주의 일을 돕도록 하라!”

“충! 소장 양문광 황명을 받들어 황룡패주를 보필함에 소홀함이 없도록 하겠나이다!”

“충! 사례감 채홍, 황상의 어지를 받들어 황룡패주를 도와 역도들을 소탕함에 모든 힘을 아끼지 않겠나이다.”

양문광과 채홍이 단단한 목소리로 외쳤다.

‘패주. 부디 양민들을 생각해 행하라. 그리고 부탁하건대 무탈하게 돌아오라. 고와 더불어 밤새 열 동이의 술을 나누도록 하자!’

황제가 남쪽을 향해 뜨거운 시선을 보냈다.

***

비슷한 시간 홍연왕부.

홍연왕은 중요 동맹이라고 할 수 있는 마교로부터 온 한 장의 전서를 읽고 흡족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나쁘지 않지. 나쁘지 않아…….”

이로써 준비가 모두 끝난 느낌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황룡패주가 제안을 거절했을 때 어찌해야 할지 고심하고 있었는데 그 정도라면 충분히 대비가 된 듯했다. 음양자가 보내온 계책이 마음에 들었다.

홍연왕의 시선이 멀리 북쪽으로 향했다.

아스라이 먼 곳에 자리 잡은 자금성을 그리며 불쑥 본심을 내뱉었다.

“조카야. 이제는 그만 내려오려무나. 무릇 황제의 자리라 함은 너처럼 유약한 자가 앉는 것이 아니라 본 왕처럼 강력한 패왕이 앉아야 하느니라.”

정말 자신 있었다.

자신이 황제의 자리에 오르기만 한다면 직접 친정에 나서 저 무도한 북원을 단번에 말살해 영토를 수복함은 물론이고 신강과 요동까지 정벌해 역사에 길이 남을 패왕이 되고도 남는다고 생각했다.

“어차피 알려지게 된 것, 황룡패주의 일을 결론지어 놓은 후 바로 움직인다.”

황룡패주를 얻는다면 하나의 날개를 더 얻어 안전하게 회천대계를 완성할 수 있을 것이고 반대라면 후환을 정리한 후 대계를 시작하게 되리라.

“오라, 황룡패주. 본 왕과 더불어 가을의 결실에 대해 논해 보도록 하자.”

홍연왕의 눈에 진한 욕망의 불길이 번졌다.

***

이레 후.

자금성을 나선 총병관 양문광이 유격장군 양경홍과 더불어 양가장의 장로들과 오군도독부의 수뇌부들과 함께 어디론가 말을 달릴 즈음 용무린은 운태산 허리에 당도해 흑림현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굳이 내가 직접 가볼 필요도 없겠지?”

“그렇습니다, 주군.”

용무린의 혼잣말에 노백인이 고개를 깊이 숙이며 답했다.

“이봐, 수호대주.”

“하명하십시오, 패주.”

“가봐야 놈들이 없을 것임을 대충 짐작하지?”

“물론입니다.”

“그동안 수고했어. 들어가서 그간 고생이 심했을 하오문도들이나 잘 다독여줘.”

“그렇게 할 것입니다. 심려치 마십시오, 패주.”

“그럼 우린 이대로 사냥을 간다! 개방과 연계해서 비선 유지만 잘 해줘.”

“신명을 다하겠습니다!”

툭툭.

“그래, 믿고 간다!”

수호대주의 등을 가볍게 두드려준 용무린이 돌아섰다.

휘슷.

남쪽을 향해 신법을 펼쳤다.

“주군을 따르라!”

“충!”

휘릭. 타다닷!

흑야방의 무인들이 유성천리탄의 신법을 펼쳐 용무린의 뒤로 바짝 따라붙었다.

“운련항까지 전력질주다!”

그곳에서 수로를 통해 회하의 지류를 타고 남경까지 빠르게 이동을 할 생각이었다.

“충!”

용무린의 한마디에 흑야방 무인들의 신법이 점점 더 빨라졌다.

갈수록 믿음직스러워지는 수하들을 향해 한 차례 웃어 보인 용무린은 이내 생각에 잠겼다.

‘일부러 모습을 드러내며 이곳까지 왔으니 피할 시간은 충분히 준 셈이지.’

개방과 하오문과의 정보망 연계로 이미 수상쩍은 놈들이 흑림현 동쪽 바닷가에서 배를 타고 어딘가로 떠났음을 확인한 후였다.

‘살고 싶으면 어디 이름 모를 섬에라도 가서 처박혀 있을 것이고 아니라면 등잔 밑이 어두운 점을 이용해서 함정을 파려 들겠지.’

홍연왕이 어째서 자신을 청했겠는가?

회유를 위해?

물론 그런 내심도 없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역심을 고스란히 드러낸 그 뒤가 문제가 된다. 용무린이 거부하면 후환을 없애기 위해서라도 깔끔하게 정리하려 들리라.

‘홍연왕부라…….’

그곳이 등잔 밑일 가능성이 가장 크다.

‘가 보면 알겠지.’

감시의 눈을 피하기 위해 멀리 바다를 휘돌아 오는 항로를 택했으니 놈들이 빨리 출발했어도 충분히 시간 내에 따라잡을 수 있다.

‘태항을 통해 양쯔강을 거슬러 오르는 항로 곳곳에 개방과 하오문의 눈을 깔아 두었으니 놈들이 모습을 드러낸다면 충분히 잡아낼 수 있어.’

놈들을 잡아내는 일은 홍연왕을 만나기 전에 보내는 경고와 같다. 이미 알고 있으니 말을 빙빙 돌리지 말라는 뜻임을 모르지 않으리라.

‘그런데도 알아듣지 못하면?’

씨익.

용무린의 입가에 흰 선이 쭉 그어졌다.

***

강남 삼각주의 중심이라 일컬어지는 진강현.

북쪽으로는 홍택호로 이어지는 거대한 수로를, 서쪽으로는 남경으로 이어지는 수로를 모두 지니고 있는 수로의 요충지로써 크고 작은 항구들에는 언제나 많은 수의 배들이 저마다의 이유로 들락거리고 있었다.

“조운선이다! 조운선이 들어오고 있다!”

누군가의 외침에 진강현에서 가장 큰 충련항이 소란스러워졌다.

“유람선들 다 빼!”

“야! 거기 조각배들! 부서지기 싫으면 어서 자리 옮겨!”

“뭣들 하는 거야? 조운선 들어오는 거 안 보여? 선착장 다 비우란 말이야!”

조방 소속 수부들의 고함소리에 맞추어 선착장과 그 주변이 빠르게 정리가 되었다. 수로를 노니는 유람선과 조각배들 그리고 동서남북으로 승객들을 실어 나르는 교통선들까지 모두 밧줄을 당겨 공간을 만들었다.

투우우웅.

마침내 세금을 실어 나르는 조운선 세 척이 선착장에 그 거대한 몸집을 멈춰 세웠다. 삼과 지푸라기를 한데 꼬아 만든 충격 방지대가 선착장과 부딪히며 육중한 진동을 만들어내었다.

수로의 지배자인 조운선의 등장에 모두의 시선이 그곳으로 쏠렸다.

“얼래? 조운선이 왜 빈털터리야?”

“그러게? 곡식이나 비단 면포도 아니고 웬 인상 더러운 사내놈들만 잔뜩 내리는데?”

“쉬잇! 말조심해. 저 조운선이 홍연왕부 소속 조운선이라는 것을 몰라서 그래?”

“그래. 오래 살고 싶으면 우리 같은 사람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듯해야 하는 거라고.”

“하긴…….”

고개를 주억거린 사내가 조운선에서 내린 애꾸눈의 사내에게 쏠렸던 눈을 잽싸게 거두었다. 그물 손질이 지상과제라도 되는 양 하던 일에 집중했다.

하지만 조금 더 먼 곳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앳된 얼굴의 거지는 행동이 조금 달랐다.

“한 푼만 주세요, 대인! 예?!”

“저리 안 꺼져?”

이리저리 상인들을 따라 붙으며 구걸을 했다. 점점 더 충련항 외곽으로 자리를 옮겼다. 누구의 시선도 닿지 않는 빈 창고 뒤로 몸을 숨겼다.

푸드드득. 푸드득.

오래지 않아 비둘기 두 마리가 힘차게 날아올랐다.

***

두 시진 후.

남경으로 이어지는 상주평원의 시작점을 일단의 험상궂은 인상의 상인들이 지나치고 있었다.

수로를 끼고 이어지는 이 관도를 따라 서쪽으로 쭉 가면 반나절도 안 되어 성도인 남경이 나온다.

‘이제 얼마 남지 않았군.’

선두에서 걸음을 재게 놀리던 독안의 사내가 내심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황룡패주의 추격에 노심초사하다가 홍연왕부가 자리한 남경이 코앞으로 다가오니 적이 마음이 놓였던 것이다.

‘아무리 나지만, 놈은 두렵단 말이지.’

흑상과 염상을 모두 아우르는 총수가 바로 자신이다.

별호는 환영마.

비록 오궁이원이전에 적을 두고 있지는 않지만 어느 누구도 그에게 함부로 대하지 않는다. 만금상단과 더불어 마교의 자금줄을 그가 틀어쥐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면 뭐해? 상대는 도마종과 권마종마저 패퇴시킨 괴물이라고!’

환영마라 불릴 만큼 무공도 인정을 받아 총수의 자리에 오른 자신이었지만 그런 괴물과 홀로 부딪힐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런 판국에 음양자로부터 등잔 밑이랄 수 있는 홍연왕부로 피해 함정을 준비하라는 명령을 받고는 어찌나 기뻐했는지!

“다들 힘을 내라! 곧 남경이다. 도착하면 내 거하게 한 잔 사겠다.”

“호우!”

“좋습니다, 총수!”

“와하하. 왕부에 들어가면 일을 다 마칠 때까지 조신하게 지내야 할 터인데, 그 말씀만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흑상대주와 부대주를 비롯한 수하들이 벌써부터 입맛을 다시며 좋아 죽을 때였다.

“멈춰!”

총수 환영마가 갑자기 멈춰 섰다.

저만큼 앞에 웬 시건방진 애송이가 떡하니 관도를 막아서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심상치 않다.’

환영마는 가슴이 서늘해지는 느낌을 받았다.

우는 아이도 울음을 그칠 만큼 죽여주는 인상을 한 자신들 앞을 홀로 막아섰으면서도 저렇듯 환한 미소를 지어 보일 수가 있다니!

‘둘 중 하나다.’

미친놈이거나 그만 한 실력자이거나.

어쩐지 께름칙한 환영마가 일단 점잖게 운을 떼었다.

“홍연왕부로 향하는 상행이오. 볼 일이 없다면 길을 터주시겠소?”

환영마를 바라보며 빙그레 웃고 있던 용무린이 불쑥 생각지도 못한 말을 내뱉었다.

“상행은 개뿔!”

“……!”

“흑상과 염상, 둘 중 네놈들은 뭐지?”

“그, 그게 무슨 말이오? 우리는 왕야께서 명하신 물품을 구매해 돌아가는 상단일 뿐이란 말…….”

환영마의 말을 용무린이 중간에 툭 잘랐다.

“단전에 마공이 꿈틀대는 게 빤히 보이는데 수작은!”

용무린의 그 말이 신호라도 되었을까?

휘슷. 휘스슷. 파아아-!

갈대가 높이 자란 곁의 수로에서부터 일단의 무인들이 마구 솟구쳐 올랐다. 환영마와 직속 수하들을 향해 떨어져 내렸다.

그동안 전투로 상당한 경험을 쌓은 흑야방의 무인들이었다.

아득.

“돌파한다. 쳐라!”

명령을 내림과 동시에 환영마가 용무린의 왼쪽으로 신법을 펼쳤다. 본능적으로 용무린을 어찌할 수 없음을 깨닫고 그나마 만만한 노백인 쪽을 노렸던 것이다.

“넌 내 거야 이 자식아!”

돌파는 개뿔!

휘슷.

용무린이 대뜸 신법을 펼쳐 노백인 앞을 막아섰다. 싱글벙글 웃으며 풍뢰를 손에 쥐었다.

오싹!

환영마의 등줄기를 타고 소름이 쫙 돋았다.

‘강적!’

정체가 대충 짐작이 갔다.

대풍현에서부터 시작해 염상, 향수, 운련항까지 쭉 치고 올라오던 황룡패주이리라.

‘이것이 내 마지막 공격이 될지도 몰라.’

고이 숨겨두었던 비기까지 아낌없이 펼쳐야 후회가 없다.

환영마는 생각과 동시에 안대를 벗어 던졌다. 그동안 감고 있던 눈을 떴다.

반짝.

그 눈에서 기이한 빛이 쏟아졌다. 환영마가 그 빛을 용무린의 눈에 고정했다.

“아!”

놀랍게도 용무린의 입에서 탄성이 쏟아졌다. 신기하게도 상상치 못한 곳에서 폭발하듯 공격이 밀려드는 환영을 목격한 것이다.

“죽어라-앗!”

콰아아-!

환영마의 두 손에서 묵직한 강기공이 쏟아졌다. 환영에 빠져 있는 용무린의 심장을 노렸다.

‘크흐흐. 내가 잡았다. 나 환영마가 황룡패주를 잡았단 말이다.’

환영마의 입이 귀에 걸릴 듯 길게 늘어났다.

신교의 이인자인 음양자가 지금껏 이루지 못한 숙원을 자신의 손으로 이뤄낼 수 있다는 확신이 들었던 것이다.

그런데…….

콰아앙. 휘스스슷.

환영마가 쳐냈던 회심의 일격은 어이없을 만큼 허무하게 흩어져 바람이 되었다. 움직이는 것도 느끼지 못했는데 어느새 공간을 가른 풍뢰가 장력을 갈라버린 거다.

“어, 어떻게……? 부, 분명히 화, 환영에 걸렸…….”

휘청.

환영마가 말을 채 잇지 못하고 서서히 옆으로 넘어가기 시작했다. 풍뢰가 갈라버린 것은 환영마의 장력뿐만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피식.

“너도 참, 내가 겨우 그딴 환영에 속겠냐? 그냥 하도 오랜만에 환영마공을 봐서 반가웠을 뿐이야!”

환영마의 사부인 환영마존이 직접 와도 눈 하나 깜박하지 않을 자신이었다. 한데 겨우 독안으로 펼치는 환영마공에 당하겠는가?

타다닷.

용무린이 환영마의 36개 대혈을 점했다.

환영마의 몸이 나무토막이라도 되는 듯 딱딱하게 굳었다.

“시간도 없고, 알아내야 할 것은 많고……. 오늘은 좀 빨리 끝내야겠다.”

흑야방 수하들의 실전수련은 이제 끝이다.

스파아앙. 쉬리리릭.

용무린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풍뢰와 소검비연이 날아올랐다. 스스로의 의지를 가지기라도 한 것처럼 전장을 휘돌며 환영마의 수하들을 꼬치 꿰듯 꿰었다.

퍼억. 퍼퍼퍼퍼퍽.

***

해가 질 무렵.

용무린은 강소성의 성도 남경에 홀로 도착했다.

환영마의 입을 통해 알아낼 것도 알아내고 또 한 사람을 기다려 만나고 오느라 살짝 늦었다.

용무린의 전서를 받자마자 직접 움직인 사천당가의 가주였다. 당가의 가주는 용무린의 다음 부탁을 위해 다시 모처로 이동했다.

‘푸흐흐. 보물섬이란 말이지?’

용무린이 계속해서 웃었다. 생각만 해도 뿌듯했다.

환영마의 통각신경을 이각 내내 쥐어짜 알아낸 사실인데 놈들이 신교로 상납하기 위한 중간 집결지로 애용하던 섬의 위치를 알아낸 것이다.

‘지난 삼 개월 간의 수익금과 마교 전체가 이용할 일 년 치의 유보금이라니! 그게 대체 얼마야?’

홍연왕부는 어차피 함정이라 수하들을 돌려보낼 생각이었다. 그래서 듣자마자 노백인에게 명령해 모든 수하들을 운련항에서 하루거리에 존재한다는 보물섬 아니 태항도로 보내두었다.

‘크크큭. 싹 다 털어서 비룡문에 보내 둬라.’

삽질이야 조금 하겠지만 캐내는 것이 금괴와 같은 보물이다 보니 흑야방의 수하들도 제법 재미가 있으리라.

그렇게 속으로 웃는 사이 성문 앞에 도착했다.

성문을 지키고 있던 수문위병들이 용무린의 신분을 확인하려 들었다.

번쩍.

용무린은 조용히 황룡패를 꺼내들었다.

“헉! 화, 황룡패주시여!”

“황룡패주를 배알하나이다!”

약간의 소란 끝에 용무린은 수문장인 정백호를 앞세워 홍연왕부로 향했다.

***

남경 중심부에 자리 잡은 홍연왕부.

‘확실히 진성왕부와는 다르네.’

안으로 들어서던 용무린은 홍연왕의 내심을 확실히 읽을 수 있었다.

어지럽게 나부끼는 깃발을 보건대 왕부지휘사사의 정병들과 왕부호위지휘사사의 군사들뿐만 아니라 좌군도독부의 군사와 중군도독부의 군사도 함께 있었기 때문이었다.

꿈틀.

용무린의 입술이 슬그머니 말려 올라갔다.

‘뭐, 이젠 속일 필요도 없다 이거네?’

언뜻 봐도 일만이 넘어 보이는 많은 수의 군사들이 대전으로 향한 길 양쪽으로 도열해 있는 모양새로 보아 홍연왕의 의중을 알 수 있었던 것이다.

‘내 기를 죽이겠다는 것이겠지?’

아니라면 보여주고 싶은 거다.

보아라, 내가 이 정도로 인정을 받고 있다. 그러니 너도 참여해라. 절대로 실패하지 않으리라.

‘뭐, 그런 정도인가?’

그때였다.

전자의 짐작이 옳다는 것을 알게 해 주려는 것인지 대전을 향한 길목에 도열한 병사들이 일제히 창을 바닥에 내리 찍기 시작했다. 발을 굴렀다.

쿵! 쾅! 쿵! 쾅! 쿵! 쾅!

일만에 달하는 군사들이 일제히 창을 바닥에 찍고 발을 굴러대자 그 소리가 가히 웅장했다. 어찌나 크던지 심령을 흔들어댈 정도였다.

쾅! 쾅! 콰앙! 쿠우웅!

점점 더 커지는 창 소리와 발 구름소리는 청각을 뛰어 넘어 전신으로 스며들었다. 심장을 직접 찌르는 듯했다. 폐부까지 압박하듯 느껴졌다.

물론 용무린에게는 소용이 없는 일이었다.

‘지랄도 풍년이다.’

이딴 짓을 준비해 놓고 술을 마시며 가을의 수확에 대해 논하겠다고?

‘무엇을 생각하든 그 이상을 보여주지!’

용무린이 숨을 크게 들이켜기 시작했다.

“후우웁. 쓰으으읍. 쓰으으으읍!”

마치 몸 안에 무저갱이라도 만들어진 듯 한도 끝도 없이 숨을 들이켰다. 대자연의 기가 용무린의 의지에 끌려 백회와 용천혈을 통해 단전으로 쏟아졌다.

휘이이. 휘이이이-!

용무린의 숨을 들이켜면 켤수록 끝도 없이 밀려왔다.

작은 용권풍이라도 만들어내는 듯 용무린을 중심으로 회전했다. 빨려들었다.

쿵! 쾅! 콰아앙! 휘이잉. 후우우-웅.

일만의 정병들이 창을 찍고 발을 굴러 만들어 내는 기세와 용무린이 싸움을 하는 것만 같았다.

그러던 어느 한 순간,

뚝!

세상 모든 것이 정지한 듯 그대로 멈춰졌다.

용무린의 입이 크게 벌어졌다.

“크아아아아-앙!”

사자후라 해야 할까?

아니면 전설의 창룡음이라고 해야 하려나?

그 무엇이라고 해도 좋을 무지막지한 음파가 화산이 폭발하듯 주변으로 터져나갔다.

“커허억!”

“우와악!”

용무린을 중심으로 둥그렇게 원을 그리며 병사들이 쓰러져갔다. 내공이 어느 정도 있는 자들은 피를 토하면서, 단순히 신체의 힘이 강할 뿐인 자들은 오줌을 지리며 다리가 풀려서 그렇게 쓰러졌다.

와르르. 와르르르.

야속한 가을 태풍에 썩은 고목들이 넘어가듯 그렇게 속절없이 나자빠졌다.

용무린의 입꼬리가 보기 좋게 말려 올라갔다.

“푸흐흐. 어디서 약을 팔어?”

창병들을 불러다 바닥을 찍는 행동 따위는 저잣거리의 약장수가 눈속임을 위해 하는 짓이다.

마침내 대전 앞에 도착한 용무린이 후들거리는 다리를 간신히 버티고 서 있는 좌장사 채진성에게로 시선을 던졌다. 불쑥 입을 열었다.

“뭐해? 어서 안에 외쳐! 나 황룡패주 용무린이 왔다고 말이야!”

***

불회곡 조사동.

번쩍!

지난 수개월 동안 계속해서 감겨만 있던 신마의 눈이 떠지며 검붉은 광채를 쏟았다.

“이제는 나아갈 때로구나!”

감히 아리만의 화신을 자처하던 혈신령과 싸우다 입은 내상에서 완전히 벗어난 거다.

스르르.

신마의 몸이 둥실 떠올라 대전으로 향했다.

“어엇! 시, 신마시여!”

홍연왕부의 일이 어떻게 전개될 것인지 조바심을 내며 기다리고 있던 음양자가 반색을 하며 일어났다. 재빨리 대전 아래로 내려가 부복했다.

“신마시여! 출관을 감축드립니다.”

“신마시여! 쾌유하심으르 감축드립니다.”

음양자와 더불어 회의를 하고 있던 오궁이원이전의 주인들이 일제히 고개를 조아렸다.

만족스러운 듯 살짝 웃어 보인 신마의 입이 열렸다.

“오래 기다렸겠구나. 그간 수고했다!”

“그 무슨 말씀을! 거두어주소서, 신마시여. 저는 그저 신마께 충성을 다할 뿐입니다.”

음양자가 변함없이 뜨거운 목소리로 답했다.

부드러운 시선으로 내려 보던 신마의 입에서 그토록 고대하던 명령이 떨어졌다.

“준비하라. 중원을 접수하러 나아갈 것이다.”

부르르.

격동에 몸을 떨던 음양자가 피를 토하듯 강렬한 목소리로 외쳤다.

“신마군림! 천하앙복!”

신교의 천년숙원을 풀 전투가 드디어 시작된다.

혼신의 힘을 다해 정신을 가다듬은 좌장사 채진성이 목을 쥐어짜 외쳤다.

“화, 황룡패주 입실이오-오!”

“아, 안으로 들라!”

어지간히 놀랐는지 안에서도 새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푸흐흐. 그러게 왜 나를 눌러?’

누르면 누를수록 튀어 오르는 것이 바로 자신이다.

용무린은 미소를 숨기지 않은 채 활짝 열린 대전 안으로 들어섰다.

‘호오!’

대전은 텅 비어 있었다.

가장 끝에 자리한 옥좌에 앉아 있던 홍연왕을 끝으로 안쪽에서 문을 열었던 내관 역시 밖으로 조용히 나가 문을 닫았다.

‘제법 구색은 갖추네?’

용무린의 눈이 둥그렇게 휘었다.

옥좌에 앉아 있던 홍연왕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황제가 자신에게 그러했던 것처럼 십여 보 앞으로 다가와 맞이했던 것이다.

‘진성왕야는 그렇지 않더니 상당한 수준이군.’

다가오는 홍연왕의 단전에 자리 잡고 있는 묵직한 내공의 힘이 느껴졌다. 아무리 못해도 절정의 상급 수준은 되어 보였다.

‘힘이 있으니 자신감도 이리 넘치는 것인가?’

그렇다 하더라도 너무 무모하다.

필승을 자신하기에는 홍연왕부에 걸린 깃발의 숫자가 아직 부족했기 때문이었다.

“어서 오라 황룡패주. 본 왕이 바로 홍연왕이다.”

무릎이라도 꿇길 바랐을지 모르겠지만 용무린은 뻣뻣이 서서 고개만 살짝 까딱해 보였다.

“황룡패주 용무린입니다, 왕야.”

익히 그 성품을 들어 알고 있는 모양인지 홍연왕은 용무린의 태도를 나무라지 않았다. 짐짓 호탕하게 웃으며 용무린의 손을 잡아 옥좌로 이끌었다.

“허허허. 이리로 오라. 본 왕이 패주가 온다는 소식에 차를 준비했느니라.”

쪼르륵.

홍연왕이 손수 우려 놓은 차를 들어 용무린에게 건넸다.

“남경 특산의 오룡차다. 일단 들거라.”

무탈하다는 것을 보이려는지 홍연왕이 먼저 차를 홀짝 마셨다. 용무린이 보니 찻물이 청갈색의 광택을 띠고 그 향이 무척 진했다.

‘상 중 상품의 차. 그런데…….’

갑자기 용무린이 픽 하고 웃었다.

품속에서 어떤 기운 한 줄기가 용솟음쳐 오르는 것을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어찌 웃는 것이냐?”

“……!”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물어오는 홍연왕을 용무린은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한 입에 오룡차를 털어 넣고 삼켜버렸다.

반짝.

홍연왕의 눈가에 숨길 수 없는 회심의 빛이 스쳐 지났다.

“와하하. 호탕한 것이 과연 장부로다!”

기뻐 웃으며 곧바로 속을 터놓았다.

“가을이다, 황룡패주.”

“맞습니다. 가을이지요.”

“어떠냐? 본 왕과 더불어 이 가을에 풍요로운 수확을 해 보겠는가?”

“농군이 되어 논밭에 나아가 함께 낫질을 하자는 말씀이오이까?”

“어허! 잘 알면서…….”

“황룡패주의 허울을 쓰고 있긴 하지만 본디 무인입니다, 왕야. 은유를 하지 마시고 직언을 하시지요!”

이곳으로 오던 흑상과 염상의 총수까지 싹 다 죽여 버리고 온 것임을 잘 알 텐데?

꿈틀.

홍연왕의 볼살이 크게 요동쳤다.

하지만 이내 마음을 굳힌 듯 내심을 밝혔다.

“무능력한 혼군이 양민들의 삶을 핍박하고 있어. 승냥이와 같은 북원의 무리는 호시탐탐 중원을 노리고 있으며 혼군을 등에 업은 탐관들이 자신들의 배만 채우고 있는 요즈음이다.”

반짝.

홍연왕의 눈이 강한 빛을 뿜었다.

“천자라 함은 위로는 하늘을 받들며 아래로는 양민들의 삶을 잘 보살펴야 함이 당연한 천명. 본 왕은 혼군 치하에 고생하는 양민들을 이참에 구할 셈이다.”

말은 참 좋다.

“혼군 치하에 고생하는 양민들을 이참에 구하신다?”

어떤 의미에서 말꼬리를 올렸는지 알아차리지 못한 홍연왕이 신념 가득한 목소리를 이었다.

“그렇다. 본 왕과 함께 혼군을 몰아내도록 하자, 황룡패주. 너의 그 강대한 용력으로 양민들을 구하라. 그리하면 본 왕이 네게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위와 온갖 부귀영화를 내리리라.”

“……!”

용무린이 아무런 말없이 홍연왕의 얼굴을 뜯어보았다.

관상학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지만 고귀함과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 먼 상이었다.

‘슬그머니 째진 눈은 잔인함과 함께 제 음흉한 욕심만 차릴 것 같아 보이고 채신머리없이 들락거리는 혀는 불안함을 감추기 위함인 것인가?’

무엇보다 웃기는 것은 눈빛이었다.

남경의 절대자 홍연왕쯤 되면 눈빛에 무상의 위엄이 서려 있어야 하건만 그런 게 전혀 없었다. 태연함과 호탕함을 보이고 있었지만 눈빛은 두려움에 떠는 중이었다.

피식!

“너 따위가?”

***

불회곡에서 날아 오른 비응과 전서구들이 차례차례 목적지에 도착했다. 특급을 알리는 검붉은 색의 수실에 전서는 즉시 최상위 결정권자의 손에 들어갔다.

“드디어!”

광서성과 호남성의 경계인 동정호.

중원정복의 꿈을 내려다보듯 오도카니 악록산 허리에 세워져 있던 구유마문의 문주 배위성이 자리를 박차고 떨쳐 일어났다.

방금 도착한 한 장의 전서 때문이었다.

-신교 천년 숙원인 중원정복의 때가 도래했다.

마도 칠문이여 준비하라.

신마께서 함께하리니 천하가 앙복하리라.

음양자의 수결과 직인까지 찍혀 있는 그 전서가 구유마문의 문주 배위성의 피를 끓어오르게 만들었다.

콰앙!

문을 부수며 밖으로 뛰쳐나간 구유마문의 문주가 고함을 버럭 질렀다.

“일어나라, 구유마문이여! 이제야 말로 중원무림을 짓밟을 때가 돌아왔다!”

그 한 마디에 구유마문은 즉시 전투준비에 착수했다.

문도들의 모든 활동이 중지가 되었고 외부로 나가 있던 수하들은 황급히 복귀를 했다. 신마의 명령이 떨어지면 언제라도 진격할 수 있는 차비를 갖추었다.

구유마문뿐만이 아니었다.

광서성과 광동성 최북단인 귀주, 호남, 강서, 절강성의 경계에 배수의 진을 치듯 자리 잡고 있던 마도 칠문이 동시에 움직이기 시작했다.

모두가 음양자의 이름으로 된 전서를 받았고 신마의 명령에 따라 중원으로 진격할 준비를 했다.

그뿐만이 아니다.

마도 칠문의 움직임에 중소 흑도방파들 역시 들썩였다.

이참에 마도칠문이나 신교에 잘 보여 입교를 하거나 은혜를 입기 위해 다들 전투준비를 했다. 그렇게 광서성과 광동성 전체가 끓어올랐다.

“맙소사!”

불회곡은 몰라도 그들의 움직임까지 놓칠 리 없는 무림맹이다. 지금까지 모든 신경을 그들의 움직임에 맞추고 있었으니 모를 까닭이 없다.

“구유마문이 전투준비를 시작했다. 빨리 맹에 알려!”

“세상에! 귀검문의 마인들이 완전무장을 했어!”

“만겁문이 움직인다!”

마도 칠문 주변을 지키고 있던 무림맹 천안각 소속 무인들이 기겁을 하며 이 급보를 무림맹에 알렸다. 마도칠문이 움직인다는 사실은 곧 마교의 진격을 뜻하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이놈들이 완전히 미쳐 날뛰는구나!”

“어중이떠중이들까지 진격 준비를 하고 있어.”

“어서 빨리 알려야 해! 빨리!”

중소방파들의 움직임까지 감지한 개방 정의개들의 심장이 터질 듯 쿵쾅거렸다.

칠십 년이라는 세월을 뛰어넘어 다시금 정마대전이라고 하는 피비린내 나는 대전투가 시작되려 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

“뭐, 뭣이라?”

툭 내뱉는 용무린의 말에 홍연왕이 놀란 토끼눈을 떴다.

하지만 용무린의 태도에는 변함이 없었다.

“가짜 따위와 내가 무슨 말을 더 하겠어?”

“이놈!”

“됐고, 하여간 가짜를 통해서라도 들을 만큼 들었으니 이쯤이면 답을 줘도 될 것 같군.”

“무, 무슨…….”

당황한 것인지 말까지 더듬는 가짜 홍연왕은 싹 무시한 채 용무린은 불사신기를 끌어 올려 고함을 질렀다.

“홍연왕!”

우르릉.

몸살이라도 앓듯 대전이 가늘게 떨렸다.

“감히 역모를 꾀하였으니 황룡패주에게 내려진 직권으로 오늘 네 목을 베겠다!”

폭언이나 다름없는 말이었지만 눈앞의 가짜 홍연왕은 통쾌하다는 듯 껄껄 웃었다.

“크하하하. 어디 한 번 해보아라. 남만의 청살지주독을 마시고서도 그렇게 할 수 있는지 보아야겠구나.”

오룡차의 유난히 반짝이던 청갈색 광택이 남만 제일독이라는 청살지주독 때문이었던 모양이었다. 가짜 홍연왕이 더는 자신을 숨기려 들지 않았다.

“감히 홍연왕야의 제안을 거부했으니 너야말로 오늘을 넘기지 못하고 죽으리라. 아니, 너를 시작으로 너의 가문인 비룡문과 처가인 제갈세가까지 깡그리 쓸어버…….”

스각. 둥실.

가짜 홍연왕의 머리가 신나게 외치는 도중에 허공으로 떠올랐다. 더는 들어 주기 귀찮았던 용무린이 풍뢰를 휘둘러 베어버린 것이다.

덥석.

가짜 홍연왕의 수급을 용무린이 낚아챘다.

“일단 증거 하나 확보!”

닮았는지 안 닮았는지는 몰라도 홍연왕 흉내를 내던 놈의 수급을 베었으니 이곳을 벗어나면 진짜를 찾아 비교해 볼 생각이었다.

“어디? 뭐 다른 게 있을까?”

용무린은 거침없이 행동했다.

옥좌 앞에 놓인 용탁이라 불리는 서랍을 하나씩 죄 열어 보았다. 혹시라도 증거가 될 만한 다른 서류가 있지 않을까 해서였다.

“너무 쉽게 생각했나?”

당연한 일이지만 용탁에는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남경 일대에서 올라온 몇몇 상소밖에 없었다.

“그럼 슬슬 나가 볼……?”

용무린의 눈이 살짝 커졌다.

파앙. 와자작. 휘스슷.

갑자기 대전 양쪽에서부터 이십여 명의 괴인들이 짓쳐들었던 것이다.

뭉클. 뭉클. 콰르르르.

그들에게서 폭발하듯 마기가 쏟아졌다.

오는 도중에 맞닥뜨려 보았던 환영마 따위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을 만큼 강력한 힘이었다.

“두 번째 증거다!”

희희낙락 외치며 용무린이 풍뢰를 크게 휘돌렸다.

풍뢰가 그려낸 검로는 직선이었지만 길게 뻗어 나온 불사신기는 반대였다. 나선을 그리며 사선으로 튀어 올랐고 이내 벼락처럼 뚝 떨어져 내렸다.

쿠왕. 콰앙. 퍼퍼퍼펑.

짓쳐들었던 마공이 허무하리만큼 쉽게 흩어져 바람이 되었다.

후두둑. 투둑.

그 서슬에 잘려나간 마인들의 팔과 다리가 우박처럼 마구 쏟아졌다. 그런데…….

“크아아!”

“캬아아아!”

마인들이 죽거나 멈춰서질 않았다. 심장에 구멍이 뻥 뚫린 놈까지 계속해서 짓쳐들었다. 끝까지 공격을 퍼부었다.

‘마령인?’

아니, 그 정도가 아니었다.

‘황궁무고 안에서 봤던 놈들보다 훨씬 더 강력하게 개조가 되었다.’

잘 보았다. 이들은 그간의 실패를 바탕으로 새롭게 탄생을 한 광마인들, 신마 앞에서 음양자가 자신 있게 보고를 했던 존재들인 것이다.

따라랑. 따랑. 따리리랑.

용무린이 재빨리 소검비연으로 탄주를 해보았지만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크아아아!”

“캬아아!”

맹목적인 적의로 명령을 받은 상대인 용무린을 향한 공격을 멈추지 않았다.

픽.

용무린이 싱겁게 웃었다.

“그래도 소용없다는 걸 잘 알 텐데?”

용무린의 고개가 갸웃 하고 기울었다.

제법 강한 놈들이긴 하지만 마교에 바보들만 있는 것이 아니라면 이런 놈들 정도로 자신을 상대할 수 없다는 것을 어찌 모른단 말인가?

‘노리는 것이 다른 것인가?’

혹시나 하는 생각이 들 때였다.

콰창! 퓨우웃. 쐐애애애액!

그 혹시나 했던 짐작이 사실이라는 것을 알려주듯 엄청난 크기의 화살이 창밖에서부터 쏟아졌다.

“이런!”

그제야 용무린의 눈에 다급한 기색이 어렸다.

치이이. 치이이이.

엄청난 크기의 화살 중단에 대나무로 이뤄진 기다란 통들이 매어 있었는데 그 끝에 튀어나온 도화선이 빨갛게 타들어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모두 합해서 스무 발!

‘급하다!’

용무린은 즉시 양의신공을 불러 일으켰다.

분심의 벽을 세워 신마 진무량의 의식을 가렸다. 절대검신을 전면에 내세웠다.

“이야아하-아!”

강렬한 기합과 함께 풍뢰를 휘돌렸다.

덩실. 덩실. 촤악. 스아아악.

춤을 추듯 뻗어진 풍뢰가 다시 휘어져 감긴 후 부드럽게 튕겨져 사위를 훑었다.

쩌어억. 쩌어어억.

풍뢰의 움직임을 따라 공간 자체가 쩍쩍 갈라졌다.

바로 그 순간!

쿠와아앙. 콰아아앙. 쿠콰콰콰콰-앙!

추측하기 힘들 만큼의 충격파와 화염이 일었다. 그 거대한 대전이 금방이라도 부서져 내릴 듯 뒤흔들렸다.

하지만 용무린이 갈라낸 공간과 함께 대부분의 폭발력이 사그라졌다. 믿을 수 없을 만큼 빠른 속도로 빨려나가 허무로 돌아갔다.

“후우우!”

긴 숨을 몰아쉬는 용무린의 두 눈이 진한 분노로 번들거릴 때였다.

“와하하하! 맛이 어떤가, 황룡패주? 혈교에서 뇌화탄이라는 것을 만들었다고 하기에 군문의 장군전을 살짝 개량한 뇌화전이라고 한다네!”

대전 밖에서부터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울렸다.

당당한 목소리에 거침없는 하대.

용무린은 듣는 즉시 그 목소리의 주인공이 진짜 홍연왕일 것이라 직감했다.

“죽었나? 아니겠지? 천하의 황룡패주가 이 정도에 죽어 줄 리가 없질 않은가?”

웃음기마저 어린 목소리.

용무린은 살짝 약이 올랐지만 고개를 살짝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그래. 이 정도는 되어야 남경의 절대자 홍연왕이지.’

그렇다고 기가 죽을 리는 없다.

“목을 길게 늘어뜨리고 기다려라 홍연왕! 내가 지금 나간다. 거추장스러운 네놈의 목을 떼어 황제폐하께 선물로 가져가야겠……?”

느물대던 용무린의 눈살이 잔뜩 찌푸려졌다.

뭔가가 신경을 마구 긁는 것처럼 느껴졌던 것이다.

‘뭐지?’

휙.

알 수 없는 감각에 용무린의 고개가 위를 향해 번쩍 들렸다. 그때 홍연왕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잘 가게나 황룡패주. 지금까지는 다 그대를 그 안에 잡아 두기 위한 시간 끌기에 불과했다네!”

철렁!

오랜만에 용무린의 심장이 크게 출렁였다.

그제야 알 수 있었다.

자신을 노리고 있던 회심의 한 수는 독도 아니고 광마인도 뇌화탄을 보고 개량한 뇌화전도 아니었으며 지금 타들어가고 있는 엄청난 양의 흑색화약이라는 사실을.

“뇌화전이 폭발하는 서슬에 일어난 불꽃으로 점화가 되는 설계였으니 자네는 아마 그 안에서 죽어야 할 걸세! 왜냐하면 자네의 탈출을 본 왕이 두고 볼 생각이 전혀 없기 때문이라네.”

휘리릭. 타닷.

홍연왕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다시 이십여 명의 광마인들이 용무린을 향해 짓쳐들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패애애액. 쐐애액.

다시 스무 발 남짓의 뇌화전이 대전 안으로 쏘아졌다.

장군전답게 긴 몸체에 꽉꽉 재워 넣은 큼직한 화약통을 매단 채 말이다.

치이잇!

바로 그 순간 대전 천장을 가득 채우고 있던 흑색화약에 빨갛게 타들어간 도화선이 파고들었다.

신마귀환 8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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