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마귀환 9권
서경 신무협 소설
1.혈풍. 불어오다
음양자가 보내준 광마인이 대전을 향해 짓쳐들고 뇌화전 스무 발이 쏘아지는 모습을 지켜보던 홍연왕이 통쾌하다는 듯 크게 웃었다.
“크하하핫! 본 왕을 거부한 대가는 죽음뿐이로다! 황룡패주여, 회천대계의 제물이 되어라. 크하하핫!”
뒤에 시립하고 있던 좌장사 채진성이 조심스럽게 말문을 열었다.
“이 일로 대전이 완전히 파괴될 것입니다, 왕야.”
아까운 것이었다.
홍연왕부의 중심이었던 저 대전은 태조 홍무제가 황성으로 삼았을 만큼 유서가 깊었고 또한 거대했으며 아름다운 곳이기 때문이었다.
“상관없다!”
“……!”
“쓰러지면 다시 세우면 그만, 더더군다나 앞으로는 회천대계를 실현해야 하지 않느냐? 이제 뒤를 돌아보지 않겠다는 본 왕의 의지라 생각하면 된다.”
본디 계획은 이게 아니었다.
어떻게 해서든 당금 황제를 혼군으로 만들어 양민들의 고통이 누적된 상황에서 자연스레 천심인 민심을 등에 업고 일어서려 했다.
‘무능력한 주제에 눈과 귀만 밝은 조카 녀석이 황룡패주를 보내 이미 회천대계에 관한 것을 눈치 챈 이상 다 틀린 이야기지.’
기호지세!
이미 호랑이 등에 올라 탄 형국이 아니던가?
들킨 이상 내가 죽든지 아니면 회천대계를 이루어 옥좌에 앉든지 결판을 내야만 하는 거다.
“어차피 대계가 성공하면 앞으로의 치세는 자금성에서 이루게 될 것이다.”
“하긴, 그도 그렇습니다.”
좌장사 채진홍이 공손이 머리를 조아렸다.
“황룡패주를 잡음과 동시에 배수의 진을 쳐 나를 따르는 군사들의 정신무장을 새롭게 하는 일에 앞으로는 사용하지도 않을 건물 하나라면 싸게 먹히는 것 아니겠는가?”
“제장들에게 홍연황제의 큰 뜻이 잘 전달될 수 있도록 유념하겠습니다.”
“응? 그렇지! 그래! 흐하하하하!”
좌장사 채진홍은 은근슬쩍 홍연왕을 홍연황제라 불렀고 홍연왕이 너털웃음을 터뜨릴 때였다.
후우웅. 후우우웅. 콰아아아-!
대전 안에서부터 실로 범접하기 힘들 만큼 막대한 힘이 휘몰아치는 것이 느껴졌다.
철렁!
홍연왕은 심장이 떨어질 듯 크게 내려앉았다가 겨우 되돌아올 정도였다.
‘실로 무서운 힘이로다.’
자신 역시 한 사람의 무인으로서 절정 수준은 되는지라 용무린이 뿜어내는 기세가 얼마만큼 거대한 것인지 피부로 느껴졌다.
‘저 힘을 고가 직접 맞는다면?’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부르르.
절로 몸이 떨렸다.
쿠와앙. 콰아앙. 쿠콰콰쾅.
트드드드. 와드득. 트드드드드.
광마인에 이어 쏘아진 뇌화전이 폭발하며 대전은 금방이라도 무너질 듯 몸살을 앓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용무린이 뿜어내는 거력은 조금도 줄어들지 않았다.
굳이 안을 들여다 볼 필요도 없었다.
십중팔구 일차 공격은 실패로 돌아갔으리라.
‘과연, 황룡패주. 이만큼 멀리 떨어져 있음에도 전신이 절로 떨릴 만큼의 용력이라니!’
오늘 황룡패주를 잡지 못한다면 필시 회천대계가 어그러질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반드시 잡아야 해, 반드시.’
기회를 놓칠 수 없다는 듯 홍연왕은 지체 없이 마지막 총공세의 명령을 내렸다.
“깡그리 퍼부어 버려-엇!”
휘슷. 휘리릭.
씨이잇. 씨시시싯.
마지막으로 남아 있던 광마인 스물이 다시금 무너지기 직전의 대전을 향해 짓쳐들었고 다시 스무 발의 뇌화전이 안으로 쏘아졌다.
‘그런데 황룡패주가 살아나오면 어떻게 하지? 저렇게까지 했는데도 살아 나오면……?’
오싹! 부르르.
홍연왕의 등줄기를 타고 머리끝까지 전율이 일었다.
어이없게도 방금 전에 들었던 그 불길한 상상이 현실이 되어 나타날 것만 같았던 것이다.
‘죽어라! 제발 죽어라, 황룡패주.’
홍연왕의 간절함이 담긴 시선이 활활 타오르기 시작하는 대전으로 향했다.
***
완벽한 함정!
“……!”
용무린의 두 눈이 튀어나오기라도 할 듯 부릅떠졌다.
하지만 행동은 본능적인 수준에서 이루어졌다.
휘슷. 파아아-!
풍뢰와 소검비연이 동시에 떠올랐다. 맹렬한 속도로 용무린의 주변을 휘감았다. 진천수라도의 마지막 초식과 비연오식의 마지막 초식을 한꺼번에 펼쳤다.
버언쩍. 버번쩌저적.
풍뢰와 소검비연이 한 줄기 벼락이 되어 용무린의 의지를 수행했다.
카가각. 쉬가가각.
풍뢰는 짓쳐드는 광마인들의 공격을 무위로 돌리는 것과 동시에 놈들의 몸을 잘게 썰어냈고 소검비연은 뇌화전의 중단을 베었다. 어린아이 팔뚝만 한 크기의 대나무 통의 중단을 잘라 폭발력을 최대한 줄였다.
‘급하다!’
풍뢰와 소검비연을 날려 보낸 후 용무린의 두 손이 합장하듯 하나로 모였다.
“이야아아-하!”
용무린의 입에서 창룡음이 터졌다.
동시에 눈을 뜨고 볼 수 없을 만큼 강렬한 빛 무리가 합장한 손끝에서 뿜어졌다. 유형화된 하나의 검이 되어 손에 잡혔다.
심검이었다!
덩실. 덩실. 촤아아악. 쫘아아악!
천문에서 수련 후 대자연진을 부수고 밖으로 나올 때 이외에는 한 번도 꺼내지 않았던 심검을 불러일으킨 채 불사대천검이 펼쳐졌다.
쩌어억. 쩌어어억.
미증유의 거력에 자금성의 태화전 못지않은 크기의 대전 상단이 통째 잘려나갔다.
바로 그 순간!
대전 천장 부위에 숨겨 두었던 흑색화약 일천관이 시린 빛을 뿜어내며 폭발을 했다.
버언쩌저저저적!
굉음 따위 들리지도 않았다. 시리다고 밖에는 표현할 수 없는 수준의 빛과 함께 홍염의 불꽃이 모든 것을 집어 삼키기 시작했다.
***
울컥!
“우웃! 피하시오소서, 황제폐하!”
화들짝 놀라 외치며 홍연왕의 앞을 가리는 좌장사 채진성의 입가에 굵은 핏줄기가 흐르고 있었다.
오십여 장이나 떨어져 있었지만 흑색화약 일천관의 폭발력은 그 거리와 공간을 무시하고 밀려와 깊은 내상을 입혔던 것이다.
“비켜라! 나는 봐야 해.”
마찬가지로 입가에 피를 흘려내고 있었지만 홍연왕은 피하려 들지 않았다. 회천대계의 성패를 가늠하는 저 순간을 놓치고 싶지 않았던 거다.
“오오오!”
홍연왕의 입에서 탄성이 쏟아졌다.
들썩!
자금성의 태화전과 견주어도 좋을 만큼 거대한 대전이 한 차례 통째 위로 들리는 듯하더니 이내 산산조각이 나서 사라져 버리는 것이 아닌가?
투확. 투화악.
무너지는 대전 사이사이 뿜어져 나온 홍염의 구름!
그리고 희뿌연 충격파가 놀라운 속도로 주변을 휩쓰는 장관이라니!
“우왁!”
“커허억!”
충격파에 스친 일만의 정병들 중 상당수가 다시 피를 토했다. 용무린에게 받았던 충격에 폭발의 충격파가 더해지니 견딜 수가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홍연왕의 신경은 온통 대전에 쏠려 있었다.
쿵쾅쿵쾅.
터질 듯 뛰는 심장이 불안하기만 한 홍연왕의 마음을 대신 말해주었다.
‘죽었나? 죽었겠지? 죽었으면 좋겠다. 죽어라, 제발.’
간절하게 빌고 또 빌었건만 홍연왕의 눈은 천천히 부릅떠질 수밖에 없었다.
휘류류류-!
산산이 흩어지는 홍염과 조각난 대전의 파편 사이 천신인 양 허공에 우뚝 서 있는 사내의 모습을 볼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황룡패주 용무린이었다.
“마, 맙소사……!”
홍연왕의 입이 쩍 벌어졌다.
도무지 믿을 수가 없었다.
광마인에 뇌화전, 그리고 흑색화약 일천관의 폭발 속에서도 무사할 수 있는 인간이라니!
“……!”
활활 타오르는 용무린의 시선이 주변을 슥 훑었다.
그러다가 좌장사 채진성을 발견했고 그 앞에 넋이 나간 표정을 짓고 있는 홍연왕을 보았다. 분노에 찬 일성을 토해내었다.
“홍! 연! 와-앙!”
우르릉!
천신의 분노이련가?
용무린의 노성이 홍연왕부 전체를 뒤흔들었다.
그 위엄! 그 박력!
“어헉!”
용무린의 분노를 고스란히 받은 홍연왕의 다리에 힘이 풀렸다. 그대로 주저앉고 말았다.
홍연왕뿐만이 아니었다.
좌장사 채진성을 포함해 아직까지 멀쩡한 일만의 정병들 중 태반이 오줌을 지리며 뒤로 넘어갔다. 들고 있던 창과 검을 떨구었다.
“저, 저, 저놈을 죽여라-아!”
그래도 왕이라 조금은 다른가?
주저앉았지만 홍연왕이 덜덜 떨리는 손을 들어 올렸다. 용무린을 가리키며 새된 목소리로 악을 썼다.
“……!”
“……!”
하지만 누구도 움직이려 들지 않았다.
하긴, 이해가 되는 일이었다.
저 죽음의 함정에서도 멀쩡하게 살아 있는 초인을 향해, 천신이라도 되는 양 오연히 하늘에 떠 있는 사내에게 과연 누가 달려들 수 있단 말인가?
용무린의 노성이 다시 이어졌다.
“금서철권 황룡패주의 이름으로 판결을 내린다!”
우르릉!
용무린의 목소리가 홍연왕부를 넘어 남경 전체로 멀리 퍼져 나갔다.
“황제폐하를 시해할 역모를 위해 이 많은 군사들을 모았으며 감히 마교의 사특한 무리들까지 끌어들여 나 황룡패주의 입을 막으려 들었으니 그 벌을 받아야 할 터!”
퍼-펑!
완전히 무너져 내린 대전 속에서 두 줄기 흙먼지가 하늘 높이 솟구쳐 올랐다.
풍뢰와 소검비연이었다.
“이제 죽어라, 역적들아!”
용무린의 말이 떨어진 순간이었다.
버언쩍. 패애애액.
풍뢰와 소검비연이 다시 힘을 되찾아 쏘아졌다. 벼락이 되어 떨어졌다.
“어헉!”
“피, 피해-에!”
화들짝 놀란 역도들이 부리나케 흩어졌다.
“황제폐하-아!”
아직도 정신을 차리지 못한 좌장사 채진성만이 몸으로라도 막으려는 듯 홍연왕에게 달려들어 감쌀 뿐이었다.
하지만,
스각. 둥실.
어느새 날아든 풍뢰가 채진성의 목을 갈랐다. 거짓말처럼 채진성의 머리가 떠올랐다.
“꾸, 꿈인가?”
분수처럼 뿜어지는 채진성의 피에 흠뻑 젖으며 홍연왕이 말을 더듬었다. 하긴, 홍연왕에게는 이 모든 일이 지독한 악몽과도 같으리라.
퍼억. 퍼퍼퍼퍽. 스가각.
“커헉!”
“크아악!”
두 자루 크고 작은 검이 생명이라도 가진 듯 스스로 움직여 그토록 믿음직하던 장수들의 목과 심장을 취하고 있는데 어찌 악몽이라 하지 않겠는가?
물론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활을 버리지 않는 놈은 깡그리 죽여 버릴 테다!”
스파아아-앙. 스가가가각.
“컥!”
“허어억!”
“커헉!”
희뿌연 그림자만 흘리며 날아다니는 풍뢰와 소검비연은 용무린의 의지를 받아 궁병들을 노렸다. 시위에 살을 먹이고 있는 궁병들을 마구 헤집었다.
“히익!”
“사, 살려줘!”
벌겋게 달궈진 활을 쥐고 있었던 듯 궁병들이 다투어 활을 땅에 버릴 때였다.
“역도들을 짓밟아라!”
“안휘의 명문 남궁세가의 검을 받아라, 역도들아!”
“여기 사천의 명문 당가도 있느니라!”
양가장의 수뇌부들과 함께 잠시도 쉬지 않고 조운선의 노를 함께 저어온 총병관 양문광의 명령을 시작으로 남궁세가의 고수들과 당가의 고수들이 들이닥쳤다.
그 수가 무려 일천!
홍연왕부에 모인 일만의 정병과 많은 수의 장군들 그리고 엄청난 공성병기나 장비들을 생각하면 적은 수의 특수목적 군이나 다름이 없었으나 그 기백만큼은 이미 그들을 압도하고도 남았다.
“이야아!”
“하아앗!”
피쉬잇. 패애액.
“크악!”
“커허억!”
양가장의 고명한 창술과 남궁세가의 검법, 거기에 더해 사천의 명문인 당가의 암기술이 더해지니 누구도 막아낼 수가 없었다.
그들이 달리는 곳이 곧 길이라도 되는 양 뻥뻥 뚫렸다. 비명을 지르며 쓰러지기 바빴다.
“허허허. 이렇게 허망한 것을……. 큽!”
한 순간에 늙어버리기라도 한 듯 초췌해진 얼굴의 홍연왕이 허탈한 목소리로 웃을 때였다. 순간적으로 거리를 좁힌 용무린이 목줄을 잡아챘다.
“홍연왕!”
코앞까지 바짝 끌어당긴 홍연왕의 눈을 화등잔 같은 눈으로 쏘아보며 용무린이 으르렁댔다.
“너 말이야. 그렇게 웃을 때가 아니야.”
용무린은 진심으로 분노하는 중이었다.
회천대계라는 큰 떡밥을 던져 저 많은 동조자들을 낚은 주재자가 일이 실패했다고 저 혼자 초연한 듯 허탈하게 웃고 있어?
“한 세력의 대가리라면, 그렇게 처 웃지 말고 최소한 미안한 마음이라도 먹어야 하는 거 아닌가?!”
“……!”
홍연왕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자신이 왜 그런 소리를 들어야 하는지 아무리 생각해도 알 수 없었던 것이다.
“큿!”
용무린이 짧은 웃음을 터뜨렸다.
수하들의 죽음에 아무런 감정도 느끼지 못하는 겨우 이정도 그릇밖에 안 되는 인간의 무엇을 보고 이 많은 사람들이 동조했는지 알 수 있어서였다.
‘사람을 보아서가 아니라 회천대계 성공 후 떨어질 콩고물을 위해서였구나.’
자신의 몸으로 홍연왕을 지키려 했던 좌장사 채진성을 제외하면 역모에 동조한 나머지 놈들은 몽땅 역모 후에 얻게 될 부귀영화에 끌린 것이다.
‘황제폐하께서 황궁무고에 갇혀 있을 때 혈고에 물든 문무백관이 전횡을 숱하게 저질렀으니 거병을 해도 괜찮다고 생각했겠네.’
그 역시 양민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일의 성공 후 차릴 제 잇속을 위해서가 아니겠는가?
진정으로 양민들의 삶과 나라를 생각했다면 상소를 올려 황제의 마음을 돌리려 노력하는 것이 충신의 마음가짐이오, 행동이리라.
용무린은 그런 놈들 따위에게 자비를 베풀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총병관!”
“찾아 계십니까, 패주!”
총병관 양문광이 한 줄기 표홀한 바람처럼 용무린 앞에 나타나 군례를 올렸다.
“도주하는 말단 병사들을 상대하기 보다는 장수들과 부장급 이상 되는 놈들을 주살하는 데 주력하라. 역모 후 떨어질 부귀영화 따위에 현혹된 놈들이다. 사정 볼 것 없다. 깡그리 짓밟아라!”
“명!”
똑 소리 나는 대답과 함께 신형을 뽑아 올린 양문광이 내공을 가득 담은 목소리로 용무린의 명을 모두에게 전할 때였다.
휘청.
용무린의 몸이 크게 흔들렸다.
심각한 내상에 더는 평정을 유지해 버티기가 힘이 들었던 것이다.
꿀꺽!
용무린은 울컥 치밀어 오르는 핏덩이를 그대로 다시 삼켜버렸다.
‘아직은 약한 모습을 보일 수 없지. 암.’
여기에서 약한 모습을 보였다가는 살 길 찾으려는 장수들이 총공세로 돌아설 수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오장육부가 성한 게 없네, 젠장.’
겉은 멀쩡해 보이지만 내상은 심각했다.
광마인과 뇌화전 때문에 몸을 빼내지 못하는 상황에서 일천 관에 이르는 흑색화약의 폭발력을 고스란히 몸으로 받아내야 했기 때문이다.
‘당장 운공요상을 할 수도 없지만 어쩌겠어?’
버틸 수밖에 없다.
광마인 수십 명의 합공과 뇌화전 수십여 발, 일천관의 화약 좀 터진 것 정도로는 끄떡도 없다는 듯 태연하게 버텨야만 한다.
하지만 그것은 마음일 뿐이었다.
휘청.
자꾸만 흔들리는 신형을 점점 가누기가 힘이 들었다.
***
홍연왕부에서 백오십여 장 떨어진 곳에 자리한 누각.
그곳의 꼭대기에 오연히 서 있던 검마종의 눈에 회심의 빛이 번득였다.
‘내상을 입었다.’
거리가 상당했지만 똑똑히 보였다.
태산처럼 우뚝 서 있던 용무린의 몸이 자꾸만 휘청거리는 모습이…….
‘틀림없어. 꽤 심각한 내상이야.’
한 번 흔들렸을 때는 긴가민가했다.
하지만 그 뒤로도 연거푸 계속해서 흔들린다. 버티기가 힘들다는 뜻이었다.
‘음양자께서 기뻐하시겠군.’
기습이라도 해야 하건만 놀랍게도 그런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그저 용무린의 내상이라고 하는 소기의 목적을 입힐 수 있어서 기쁠 뿐이었다.
‘그 거대한 대전이 송두리째 붕 떠올랐다가 가루가 되어 사라질 만큼의 대폭발이었는데도 저렇듯 태연한 신색을 유지할 수 있다니…….’
어지간해야 뒤통수를 노릴 생각도 하는 거다.
저런 괴물과 맞상대 할 수 있는 존재는 이 하늘 아래 오직 한 사람 신마밖에 없다는 믿음이 검마종의 뇌리를 가득 메웠다.
‘가자!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다 했다.’
휘슷.
검마종의 모습이 감쪽같이 사라졌다.
***
꿈틀.
용무린의 볼살이 거칠게 씰룩였다.
‘아, 그 자식. 이제야 갔네.’
놀랍게도 용무린 역시 검마종을 감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성질 같아서는 쫓아가서 모가지를 비틀어 버리고 싶긴 한데…….’
그럴 수가 없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시시각각 심각해지는 내상 때문에 전력을 다해 불사신기를 운용해 상처를 억누르는 일에 집중해야만 했다.
‘끝나가고 있나?’
그나마 다행인 것은 일방적으로 벌어지던 도살이 거의 마무리가 되어 가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 모두가 용무린 덕이었다.
용무린이 그 엄청난 폭발 가운데에서도 멀쩡하게 튀어 나와 단숨에 홍연왕이 목줄을 잡아 챈 순간 다들 패배를 직감했던 거다.
그 뒤에 기다렸다는 듯 짓쳐 든 총병관과 양가장의 무시무시한 고수들, 오군도독부 수뇌부의 무위에 더해 남궁세가의 고수들과 사천당가의 고수들까지!
홍연왕부에 모여든 일만의 정병은 더는 적수가 될 수 없었다. 파도에 휩쓸린 모래성처럼 진영이 허물어졌다. 뿔뿔이 흩어져 도주하다가 주살 당했다.
“좌 도독 네 이노-옴!”
버언쩍. 투화-악!
“크아악!”
양문광이 내던진 절대투환살의 초식에 좌군도독부의 한 축을 담당하고 있던 좌도독의 가슴이 뻥 뚫렸다.
털퍼덕.
좌도독이 도주하던 그 모습 그대로 만세를 부르며 땅에 패대기쳐졌다.
“오랜만이로구나, 우군도독부 우 도독 좌문소!”
유격장군 양경홍이 살기로 번득이는 눈을 한 채 좌문소를 반겼다.
“으아아-합!”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라는 심정으로 좌문소가 패검을 휘둘렀다. 군문의 장수들이 익히는 제독검법이었다.
그러나 그 결과는 빤했다.
후우우웅. 따-앙!
양가창법의 일초 환영만개의 초식에 좌문소의 패검은 힘없이 위로 튕겨 올라갔다.
“웃!”
좌문소는 만세를 불러야만 했고,
휘슷. 퍼어억.
“크아악!”
털썩.
그 사이 스며든 창날이 심장에 커다란 구멍을 뚫었다. 좌문소는 목이 찢어져라 지르는 비명을 끝으로 힘없이 거꾸러졌다.
“크아악!”
“커헉!”
끝도 없이 이어지던 비명소리가 점차 잦아들더니 어느 사이엔가 멈춰졌다. 대가리 급들만 골라서 잡아 죽이다보니 나머지 병사들이 구심점을 잃고 완전히 흩어져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다.
휘청.
다시 한 번 용무린의 몸이 크게 흔들렸다. 그 모습을 우연히 양문광이 보게 되었다.
“패주-우!”
총병관 양문광이 놀란 토끼 눈을 한 채 달려왔다. 용무린을 부축했다.
“괜찮으십니까, 패주?”
“괜찮아요. 어서 홍연왕을 압송할 준비를 하세요.”
용무린은 고개를 흔들며 그때까지 붙잡고 있던 홍연왕을 양문광에게 넘겨주었다.
“어서 빨리 운공요상을 하셔야 합니다, 패주.”
“지금 이 판국에요? 내가 약한 모습을 보이면 상황이 어떻게 바뀔지 몰라요. 잘 알고 있잖아요.”
“패주시여…….”
무슨 뜻인지 너무나도 잘 알고 있던 양문광의 가슴 깊은 곳에서 뜨거운 그 무엇인가가 울컥 치솟았다. 뒤를 걱정하는 용무린의 다급한 심정이 고스란히 전해졌던 거다.
“빨리 움직이세요. 역모의 주재자를 잡았으니 당당하게 황성으로 복귀해야만 해요. 그래야 황제폐하의 힘을, 천하의 주인이 그 무엇으로도 바뀌지 않는다는 것을 다른 모두가 알게 됩니다.”
“알겠습니다, 패주.”
양문광이 고개를 푹 숙였다.
용무린의 목소리가 계속해서 이어졌다.
“처리해야 할 일이 많습니다. 아무것도 모른 채 끌려온 일반 병사들을 사면하겠다는 포고령을 내려 이 주변 민심을 가라앉혀야 해요.”
황제가 이 자리에 있다 하더라도 모든 병사들의 삼족이나 구족을 멸하라 명령하지는 않을 것이다. 기껏 해야 녹봉의 감봉 정도나 근신이 더해졌으리라.
‘나머지는 황제폐하께서 알아서 하겠지 뭐.’
적극 가담한 장수들과 그 가족의 처리에 대한 결정과 처리는 모두 황제의 몫이었다.
“최대한 빨리 준비하도록 하겠습니다, 패주. 조금만, 조금만 더 참으소서.”
뜨겁게 외친 양문광이 재빨리 움직이기 시작했다.
수하들을 부려 홍연왕부의 정리를 하는 한편 용무린의 명령을 수행했다. 일반 병사들에 대한 사면령을 준비해 남경 내 모든 골목에 붙여 놓았다.
“황제폐하 만세만세 만만세!”
“살았다. 크흐흑. 우리는 살았어!”
“감사합니다, 황제폐하.”
“저희는 정말 아무것도 모르고 그 자리에 끌려간 것일 뿐입니다, 황제폐하-아!”
왕부장사사의 병사들이건 왕부호위지휘사사에 속한 병사들이건 같은 반응을 보였다.
솔직히 역모에 관한 것은 수뇌부에 속하는 좌장사 채진성과 같이 대가리 급들이나 알지, 말단 병사들은 알 수가 없었던 것이다.
만에 하나 모든 병사들이 역모에 대해 알고 있었다면 지금까지 비밀이 지켜지지도 못했으리라.
그러니 얼마나 기쁘겠는가?
“황제폐하 만세만세 만만세!”
“황제폐하 만세만세 만만세!”
남경을 근거지로 삼고 있던 병사들과 그 가족들이 뛰쳐나와 황제의 성덕을 찬양했다.
그 만세소리가 빠른 속도로 주변에 퍼졌다.
좌군도독부에 속하든 우군도독부에 속하든 상관이 없었다. 홍연왕부에 함께 있던 수뇌부들이 이미 주살당해 사라졌기 때문에 너 나 할 것 없이 뛰어 나와 만세를 불렀다.
그 서슬에 곤란해진 것은 다른 지역에서 홍연왕과 야합한 군부의 수뇌부들이었다.
홍연왕의 연락만 기다리고 있던 나머지 많은 수의 군 수뇌부들은 어떻게든 살아남기 위해 한데 뭉쳐 황제의 처벌에 대항하려 들었다.
‘뭉치자!’
‘이대로는 단숨에 쓸려나간단 말이야.’
‘뭉쳐야만 우리가 살 수 있어.’
하지만 그게 쉽게 되는 일이 아니었다.
구심점이자 명분이었던 홍연왕과 그 가족들이 황룡패주의 손에 잡혀 있는데 무얼 어떻게 하겠는가?
“놈들이 왕야를 자금성으로 압송하기 전, 중간에서 공격을 하면 어떨까?”
“홍연왕야와 가족들을 빼내면 될까?”
솔직히 그것만이 살길이었다.
어떻게든 홍연왕을 되찾아 다시 회천의 깃발을 세워야만 자신들의 삶을 보장받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제 문제는 병사들이 마음대로 움직여주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홍연왕이 역모를 꾀하다 붙잡힌 마당에 거병이라니요? 우리를 앞세워 뭘 어찌하겠다는 말이오, 좌참의!?”
“내심을 밝히시오!”
“우리는 절대 역모에 가담할 수 없음이오!”
백호장 급에서 명령을 거부하고 들었다.
아무리 목을 베고 겁을 주고 위압적으로 명령해도 대부분의 병사들이 수뇌부의 명령을 따르지 않았다.
그러니 별 수 있는가?
진중에서 잠을 자다 목이 잘리는 장수가 되지 않으려면 내심을 감출 수밖에…….
“우리는 황룡패주의 뒤를 지킬 것이다. 감히 무도한 놈들이 역모를 꾀했으나 황룡패주께서 일거에 박살을 내었다. 황룡패주께서 황도로 금의환향하실 때 혹여 반란군의 잔재가 공격을 할 수 있으니 우리는 그것을 막는다!”
연판장과 같은 것을 들키지만 않는다면 살 수 있을지 모른다는 희망에 모든 것을 걸고 노선을 바꾸는 수뇌부들이 늘어났다.
그 사이 용무린과 총병관 일행은 홍연왕과 그 식솔들을 모두 포박해 타고 왔던 조운선에 몸을 싣고 전력을 다해 북상하기 시작했다.
‘크으으. 이제야 운공요상을 마음 놓고 할 수 있겠구나.’
선실 하나를 차지한 채 가부좌를 틀고 앉은 용무린은 혹시 몰라 지니고 왔던 불사활생신단 하나를 입에 털어 넣고 운공요상에 빠져들었다.
***
검마종이 보내온 희소식은 해동청의 나래짓에 힘입어 이틀을 넘기지 않고 불회곡에 전해졌다.
“놈이 큰 내상을 입었다고? 으하하. 놈이 크게 휘청거렸어? 흐하하하하!”
죽이지 못하고 내상을 입힌 것뿐인데 이렇게 기쁠 수가 없는 거다.
“와하하하! 놈이 내상을 입었다. 그것도 몸을 크게 휘청거릴 정도로 말이야! 크하하하!”
하긴, 그 정도 폭발에도 멀쩡하다면 어디 그게 인간이겠는가? 이미 신의 경지에 들어 저 하늘 위 선계로 올라갔을 것이다.
“마침 준비도 다 끝났는데, 이런 희소식이라니!”
음양자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신마가 쉬고 있는 내원을 향해 신법을 전개했다.
“승리다! 신교의 천년 숙원이 드디어 이루어지고야 말 것이다-아!”
음양자는 그렇게 믿어 의심치 않았다.
용무린의 무력이 제 아무리 하늘에 닿았다 하더라도 내상까지 입은 상태에서 어찌 신마의 손 아래 살아남을 수가 있겠는가?
“신마시여-어! 희소식입니다.”
“무슨 일인데 그리 기뻐하는 것이냐?”
음양자의 목소리에 어린 격렬한 기쁨에 신마도 덩달아 웃으며 물었다.
“방금 강소성에 나가 있는 검마종으로부터 희소식이 들어왔습니다, 신마시여.”
그러면서 신나게 자신이 이룬 업적에 대해 떠벌렸다.
홍연왕에게 어떤 요청이 왔으며 회유하기 위해 불러들였다는 말에 용무린을 무너뜨릴 계책을 마련해 검마종과 광마인 마흔을 딸려 보냈다.
솔직히 반신반의했다.
그간 보여준 용무린의 무력이라는 것이 너무나 초절하여 살짝 걱정을 하던 차였는데 놀랍게도 놈에게 심각한 내상을 입힐 수 있었다!
“와하하하. 신마시여, 이제는 그저 진격만 하시면 되나이다. 단숨에 중원을 집어 삼키시…….”
신이 나서 떠들던 음양자의 표정이 점점 머쓱해졌다.
잠자코 말을 듣던 신마의 얼굴이 잔뜩 구겨지더니 붉으락푸르락 했기 때문이었다.
“시, 신마시여. 어째서…….”
슬그머니 말꼬리를 흐리는 음양자를 향해 신마의 노성이 쏟아졌다.
“내가! 이 신마가! 그리도 우습게 보이는 가-아!”
우르릉!
노성에 불사마력이 가득 실렸는지 내원 전체가 부르르 떨릴 정도였다.
“……!”
그제야 정신이 번쩍 들었는지 음양자가 자세를 바로 했다. 고개를 푹 숙였다. 하지만 신마의 노성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나 신마가 황룡패주보다 못한다고 생각하기에 수를 쓴 것이냐? 그래?”
휘우우우우웅. 콰아아아-!
불사마력이 쏟아지다 못해 폭발하듯 뿜어져 나와 음양자의 숨통을 옭죄었다.
음양자는 뭐라고 할 말이 없었다.
그저 질끈 눈을 감은 채 땀을 뻘뻘 흘리며 신마의 분노를 감내할 뿐이었다.
“내가 무어라 했느냐? 황룡패주라는 놈을 아껴먹을 생각이라 하지 않았느냐? 그런데 감히 지존이 가장 맛있게 생각하는 먹잇감에 먼저 손을 대?!”
폭발하듯 치솟아 오른 분노가 결국 의형상인의 힘을 뿜게 했다.
휘우웅. 퍼-엉!
가슴 어림에서 북 소리가 나더니 한 줄기 피를 길게 뿜으며 음양자의 몸이 뒤로 튕겼다.
“크으으!”
괴로움을 애써 감추며 음양자가 다시 부복했다. 그저 처분에 맡기겠다는 듯 이마를 바닥에 처박았다.
“감히 네가 나를 능멸하다니! 나 신마가 그토록 믿었던 네가-아?!”
너무나 화가 났다.
말이야 자신이 아껴 먹으려는 먹잇감에 손을 댔기 때문이라 하였지만 사실은 음양자가 용무린에게 손을 쓴 이유는 자신이 그만큼 약하게 보였기 때문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신마가 황룡패주 따위보다 약하다니!
이 어찌 자존심이 상하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상처 입은 자존심이 응징으로 표출되었다.
버언쩍. 콰아아아!
신마가 들어 올린 손아귀에 끔찍한 수준의 불사마력이 걸렸다. 내치기만 한다면 천하의 음양자라 하더라도 피 떡이 되고 말 정도였다. 하지만 차마 쳐낼 수는 없었는지 신마는 손을 부르르 떨 뿐이었다.
“보기 싫다. 썩 물러가거라!”
냉혹한 출객령에 음양자가 부스스 몸을 일으켰다.
진심을 가득 담아 입을 열었다.
“절대로 신마를 능멸하려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저, 저는 그저 그 애송이가 너무나 얄미워서 그만…….”
“……!”
그 마음 충분히 이해는 한다.
자신이 조사동에 처박혀 있을 동안 용무린에게 당하기도 많이 당하지 않았던가?
그래서 신마는 굳이 더는 뭐라고 하지 못했다.
음양자의 목소리가 다시 이어졌다.
“이대로 저를 내치셔도 좋습니다, 신마시여. 하지만 내일은 신교의 천년숙원이 풀어지는 역사적인 날, 부디 차질 없이 중원정복의 거보를 내딛으소서. 그리하여 단숨에 무림맹을 치고 자금성을 삼키소서.”
눈엣가시와 같던 황룡패주 용무린이 큰 내상을 입은 마당이다. 폭풍 같은 기세로 진격을 해 무림맹을 무너뜨리고 자금성을 치면 천하는 자동적으로 신마의 손아귀에 들어오게 된다.
그때 신마의 입에서 청천벽력과 같은 말이 흘러나왔다.
“아니?! 본좌는 그리하지 않겠다.”
그게 대체 무슨 소리냐는 듯 음양자의 눈이 부릅떠졌다. 겁도 없이 다시금 목소리를 높였다.
“신마시여! 어, 어째서…….”
음양자의 말을 신마가 툭 잘랐다.
이제는 분노가 조금 풀린 듯 음양자를 향해 살짝 미소를 지어 보이며 말을 이었다.
“벌써 또 잊었느냐? 내가 아껴 먹을 것이라고 하질 않았느냐?”
“아!”
“나 신마가 직접 선두에 설 것이니 중원정복은 이미 이루어진 것이나 마찬가지, 그 뒤에는 본좌의 허무함을 달래기 위해 끝없이 피가 흘러야 할 터…….”
절대자의 고독!
신마의 목소리에는 어쩐지 벌써부터 일말의 허무함이 담긴 듯 느껴졌다.
‘그래서 천천히 진격하시겠다는 말씀이로구나. 마지막으로 흥미를 끌었던 용무린까지 쓰러뜨리고 나면 절대자로서의 허무가 찾아들까 봐서.’
음양자는 신마가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인지 충분히 알아들을 수 있었다.
그 짐작이 옳다는 듯 신마의 말이 계속해서 이어졌다.
“마지막일지도 모르는 중원정복의 기쁨을 되도록 천천히 즐길 생각이다.”
“충!”
음양자의 고개가 깊게 숙여졌다.
‘나쁘지 않아.’
성질대로만 따지자면 하루라도 빨리 무림맹의 같잖은 놈들을 무너뜨린 후 소림과 무당을 치고 자금성으로 달려가고 싶었지만 솔직히 그렇게 하면 뒷정리에 시간이 너무나 많이 걸린다.
‘신마께서 즐기시도록 천천히 진격을 하면 정복에 걸리는 시간은 느려도 꼼꼼히 빠뜨리는 것 없이 우리 깃발을 꽂을 수 있지.’
급하게 진격을 하면 그만큼 빈틈도 많이 드러나겠지만 진격 속도가 완만하면 교도들의 목숨도 되도록 아끼면서 탄탄한 지지기반을 만들 수 있는 거다.
“신 음양자, 신마의 명을 받들어 차질 없이 수행하도록 하겠나이다.”
그렇게 음양자가 물러난 후 신마는 멀리 북쪽 하늘을 바라보며 읊조렸다.
“신마가 베푸는 후의다, 나의 적수여. 부디 내가 베푼 시간 동안 빨리 내상을 회복하라.”
무엇이든 이룰 수 있는 힘을 가진 자의 숙명 같은 고독.
비슷한 위치에 있는 용무린이 내상에서 벗어나 완벽했을 때 그를 마주하는 즐거움이란!
“크흐흐. 그 후에 붙어보자. 과연 이 하늘 아래 누가 제 일인자인지 말이다.”
떠올릴 때마다 까닭모를 동질감과 친밀감이 든다.
완벽해진 그와 더불어 마음껏 어우러질 생각만 해도 살이 떨릴 만큼 즐겁다.
이 정도의 존재가 신마에게 어디 또 있으랴?
신마는 완전해진 용무린과 만날 날만을 손꼽아 기다리며 활짝 웃었다.
***
하남성 동남쪽 끝자락 나산현.
황하, 회하, 위하, 한수에 이르는 수로의 요충지에 세워진 무림맹에 비상이 걸렸다. 개방을 비롯한 천안각 고수들에게서 쏟아진 마교 준동의 징조 때문이었다.
무림맹주인 비천검제 풍연호는 쏟아지는 정보를 토대로 연일 회의를 주제했다.
“귀검문이 전투준비를 갖추고 문을 걸어 잠갔다고 했소?”
“그렇습니다, 맹주.”
“허어…….”
풍연호가 탄식을 쏟았다.
문을 걸어 잠그는 웅크림 뒤에는 필시 튀어 나오리란 목적 때문일 테니까.
“구유마문 역시 심상치 않습니다, 맹주. 이미 외부로 나가 있는 모든 문도들에게 일제 소집령을 내려 불러 모으고 있으며 병장기의 날을 다시 세우고 있다 합니다.”
“만겁문과 대혈문도 그렇습니다.”
“사령문과 백골문 그리고 번천문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맹주.”
마도칠문이라 일컬어지는 일곱 문파가 일제히 같은 움직임을 보이고 있었다.
‘이제야말로 시작되는구나.’
무림맹주 비천검제 풍연호의 눈에 서릿발 같은 기운이 스쳐 지났다.
광동성과 광서성의 북쪽 경계에 자리 잡고 있는 그들 일곱 문파는 마교의 수문장과 같은 역할을 하는 곳이기 때문이었다.
풍연호가 눈을 빛내며 선포했다.
“지금부터 무림맹을 비상체제로 전환합니다. 이유는 오직 하나, 마교의 준동을 막기 위해서입니다.”
쿵!
좌우에 앉아 있던 많은 수의 수뇌부들의 가슴에 하나 같이 무거운 돌덩어리가 던져진 듯했다.
마교의 준동이라!
그 얼마나 두려운 단어란 말인가?
풍연호의 말이 계속해서 이어졌다.
“무림맹의 존재이유를 증명할 때가 왔습니다. 그동안 황룡패주 용무린 대협에게 모든 짐을 지우고 움직이지 않은 채 전력을 다해 체계를 다시 세우고 힘을 비축해 왔으니 이제는 우리가 나설 때입니다.”
끄덕 끄덕.
인정하는지 모두가 고개를 크게 주억거렸다.
“가장 먼저 용무린 용대협의 지위를 올리는 조치부터 취하고자 합니다.”
“당연한 말씀입니다.”
“용 대협의 무위와 명성에 비하면 사실 총순찰이라는 지위는 너무나 보잘 것이 없지요.”
총관과 집법당주인 점창의 백엽이 맹주의 말을 거들었지만 사실 그럴 필요도 없었다. 그 자리에 있던 모두가 용무린의 무위와 능력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따로 생각해두신 자리가 있으십니까, 맹주?”
의천단주의 질문에 풍연호는 빙그레 웃으며 즉시 내심을 밝혔다.
“아직까지 공석인 부맹주가 어떨까 합니다.”
“용 대협이라면 충분히…….”
“찬성입니다, 맹주.”
“옳으신 결정인 듯합니다, 맹주.”
모두가 풍연호의 결정을 반겼다.
무위만 따지고 보면 용무린에게 무림맹주라도 충분히 맡길 수 있다.
하지만 자유롭게 움직이며 전장을 두루 살피고 전투에 참여하기 위해서는 부맹주의 지위가 더욱 좋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비상체제의 맹주령 1호로 천안각의 고수들을 제외한 모든 외부 파견 무림맹 고수들의 복귀를 명령합니다.”
그 뒤로도 풍연호의 명령이 척척 떨어졌다.
무림맹의 주축이라고 할 수 있는 의천, 풍운, 대정, 진무, 오행의 다섯 무력단체를 출동 준비시키는 한 편, 중진 고수들을 따로 편성해 새로운 무력단체인 천무단, 천의단, 호연단을 만들었다.
“검룡당과 천도당, 경천당과 철권당 역시 제각각 맹을 지킬 수호대 일부와 상황 발생 시 출동할 무인들을 선별해 준비시켜야 할 것입니다.”
“명을 따르오이다.”
“그렇게 준비하오이다.”
마교의 전체 전력에 비교하면 삼 할 정도 겨우 감당할까 말까한 전력이었지만 그래도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전력이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무림맹 소속 모든 문파에 일제히 마교의 준동 소식을 알리십시오. 지금부터 전 무림이 하나가 되어 똘똘 뭉치는 것입니다. 움직이십시오.”
“명!”
짧은 대답과 함께 무림맹 수뇌부들이 일제히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회의에서 결정된 사안들을 처리해 갔다. 단단히 준비를 시작했다.
“천안각주는 나와 마교의 행로에 대해 작전을 짜 보도록 하지.”
“그러시지요.”
무림맹주 풍연호와 천안각주가 중원전도를 펼쳐 놓은 후 지도 위에 하나씩 아군과 적군을 뜻하는 목각깃발을 올려놓았다.
중원전도를 뒤덮듯 세워지는 아군의 깃발.
하지만 오래지 않아 저 깃발들이 팍팍 꺾이고 피에 젖어 나뒹굴 것임을 너무나 잘 아는지라 무림맹주와 천안각주의 가슴은 답답하기만 했다.
***
무림맹에서 날아오른 비응과 전서구들은 사흘을 넘기지 않고 모두 목적지에 도착했다.
소림과 무당과 같은 전통의 명문들뿐만이 아니라 오대세가와 구문십가라 일컬어지는 중견문파들은 물론이고 소속된 모든 문파들에게 알려졌다.
소림이 더 이상 향화객들을 받지 않았다.
무당파 역시 마찬가지, 입산자들을 뒤로 돌리는 명판을 무당산 아래 세웠고 속가의 제자들을 비롯해 힘이 닿는 모든 제자들을 모아 준비태세에 들어갔다.
오대세가도 만금상단의 상행을 보호하던 무인들까지 죄 가문으로 불러들였다. 상단의 상행은 기존에 거래하던 표국의 무사들로만 이루어졌다.
***
무림이 그렇게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을 때 용무린의 눈은 답답하게 감겨 있었다.
불사활생신단의 힘으로도 내상이 쉬이 낫질 않았던 것이다.
‘하나씩 처리하자, 하나씩.’
오장육부 중 성한 장기가 없다.
폭발의 여력에 터지고 찢겨 곳곳에서 피를 쏟는 중이었다. 범인이었다면 이미 죽어도 백번은 넘게 죽었을 중상인 것이다.
휘우우우우-웅.
그나마 이만큼이라도 불사신기를 운용할 수 있는 것은 오직 불사활생신단의 힘이었다.
열다섯 가지의 영약과 불사신기가 하나가 된 힘이 기경팔맥과 세맥이 손상되었음에도 강대한 힘으로 휘돌아 치유력을 발휘하고 있었다.
‘일단은 내부 장기부터…….’
용무린은 단전으로 스며든 모든 영약의 힘을 끌어 모아 내부 장기에 집중했다.
가장 많이 터진 곳은 바로 연약한 대장과 소장.
그 중에서도 제일 크게 찢긴 부위에 용무린은 불사신기를 투입했다.
‘불사의 의지!’
의념은 오로지 불사의 의지에 맞추어졌다.
-무릇 내공은 의지로만 움직여지는 법, 불사를 꿈꾸어라. 불사의 의지가 그대로 이루어지리라.
불사신공의 가장 중요한 핵심요결.
불사의 의지!
휘우우우웅.
용무린의 강대한 의지에 불사신기가 호응했다. 찢기고 터진 대장과 소장을 감싸 안았다. 불사의 의지를 받들어 회복을 시도했다.
스르르.
조금씩, 미약하지만 아주 조금씩 터지고 갈라지고 찢긴 부위가 붙기 시작했다.
쪼르륵.
복강을 가득 채우고 있던 피가 저절로 다시 흡수되었다.
아직까지 봉합이 되지 않은 곳들에서 여전히 피가 찔끔거리며 흘러나오고 있었지만 재흡수가 시작된 이상 아무 문제없었다. 나오는 족족 다시 흡수되었다.
스르륵.
그 사이 대장의 모든 상처가 아물었다.
다음은 소장 차례.
휘우우우웅. 스르르.
불사신기가 집중됨에 따라 소장의 터지고 갈라진 상처 역시 봉합되기 시작했다.
그렇게 내부 장기의 상처를 치유하기 시작한 지 닷새가 지나서야 용무린의 오장육부의 상처가 모두 본래의 모습을 되찾았다.
쪼르륵.
마지막 한 방울을 끝으로 내부출혈의 재흡수도 멈췄다.
반짝.
그제야 용무린의 눈이 떠졌다.
하지만 기적에 가까운 치유를 이뤄냈음에도 용무린의 표정은 그리 밝지 못했다.
‘급한 불은 껐는데…… 이게 쉬이 낫질 않는구나.’
임독 양맥은 물론이고 기경팔맥과 12정경의 많은 혈도가 터지고 끊겼다. 보다 근본적인 세맥은 말할 것도 없다. 이대로는 제대로 된 운공이 힘들다.
‘불사활생신단의 약력이 이미 다 했어.’
하나 더 먹어 볼까?
예비로 가져온 두 알 중 마지막 불사활생신단을 떠올린 용무린의 고개가 이내 가로저어졌다.
‘아니야. 너무 망가진 곳이 많아.’
불사활생신단 서너 개를 한꺼번에 먹는다면 모를까 하나 정도로는 걸레가 되다시피 한 기경팔맥과 12정경 그리고 임독 양맥과 세맥을 어찌할 수 없었다.
‘물론 있다 하더라도 지금 상태로는 서너 개를 한꺼번에 먹을 수도 없지.’
제대로 된 운공조차 할 수 없는 상황에 영약의 기운만 몽땅 처넣으면 어떻게 되겠는가? 갈 곳을 잃은 약력의 힘이 되레 몸을 상하게 할 것이다.
‘믿을 것은 역시 불사신공뿐인가?’
불사!
불사신공을 한 마디로 요약한다면 바로 그 ‘불사’라는 단어로 집약할 수 있으리라.
‘그나마 단전과 백회와 용천혈이 멀쩡해서 다행이군.’
그곳들마저 상처가 깊었다면 회복은 생각보다 훨씬 더 늦춰졌을 것이다.
‘해보자!’
용무린의 의지가 다시 발동했다.
모든 의식의 초점을 ‘불사’에 맞추었다.
“쓰으읍. 후우우우. 쓰으으읍. 후우우우우우.”
들이켜는 숨은 4, 내쉬는 숨은 6.
그 이유는 삶을 영위하는 와중에 깃든 탁기를 완전하게 외부로 배출하고 들이켠 순수한 기운을 오롯이 붙잡아 두기 위함이다.
하지만 그 모든 과정은 코끝에 대어 놓은 깃털이 흔들리지 않을 정도로 고요하며 깊게 이어졌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휘우우우우. 콰아우우우웅.
활짝 열린 백회혈과 용천혈로 대자연의 기운이 폭포처럼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다. 물에 적셔진 솜처럼 몸 전체로 스며들어 단전으로 몰려왔다.
휘이웅. 휘이웅. 휘이이우우-웅.
용권풍이라도 되는 양 단전에서 회전을 거듭하는 대자연의 기운은 불사의 요결에 따라 불사신기로 남김없이 치환이 되었다. 그리고…….
투우웅.
꼬리뼈 어림의 장강혈을 거칠게 통과해 끊겼던 독맥의 대로를 따라 위로 훅 치솟았다.
‘으응? 반응이 이거 왜 이래?’
폭주하는 경주마라도 되는 양 치솟는 불사신기의 움직임이 예전과 달랐다. 생각보다 너무 강력해 제어가 힘들 정도였던 것이다.
‘어어어…….’
내상 때문에 입을 열어 말은 할 수 없었지만 용무린은 확실히 당황했다. 폭발하듯 불어나는 불사신기와 움직임이 점점 더 통제를 벗어났던 것이다.
투우웅. 타아앙. 콰아아앙.
요수, 요양관의 두 혈도가 점점 더 거칠게 열리더니 세 번째 명문혈에 가서는 포탄에 직격당하기라도 한 듯 격렬하게 열렸다.
움찔!
용무린의 몸이 저절로 들썩일 정도의 강맹함!
위험했다. 절대로 좋은 징조가 아니었다.
‘야! 불사신기! 너 대체 왜 그래? 통제에 따라! 조금만 더 얌전히 하자고 인마! 그러다가 되레 내상만 도지면 어쩌려고 그러는데?’
양의신공의 묘용이 아니었다면 벌써 주화입마에 들었을 정도로 거대한 불사신기의 폭풍이 용무린의 내부를 거칠게 휩쓸었다.
휘이우우우-웅.
‘천천히 좀 하라고 이 자식아-아!’
절대검신의 의식으로는 삼매에 들 정도로 집중을 해 불사의 요결에 집중을 하는 한편 신마 진무량의 의식으로는 사력을 다해 불사신기의 통제를 시도했다.
그러나 다 부질없는 짓이었다.
콰앙. 콰앙. 콰아아앙.
화산이 폭발하듯 일어난 불사신기는 그 어떤 통제에도 따르지 않은 채 막무가내로 용무린의 모든 대혈을 활짝 열어젖히기만 했다.
‘너 대체 왜 그래에-에?!’
절규하듯 통제를 시도하는 용무린에게 불사신기가 입을 열어 말을 할 수 있다면 이렇게 말했으리라.
-나 자존심 상했어!
불사신기라는 이름에 먹칠을 해도 유분수지!
두고 봐!
툭 하면 깨지는 이따위 허약한 몸, 두 번 다시 깨지지 않도록 아예 싹 뜯어 고쳐 놓을 테니까!
환골탈태의 시작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