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전초전 (79/104)

2.전초전

새로운 날이 밝았다.

“이제야말로 신교 천년 숙원을 풀 날이 도래했나니, 신교의 전사들이여 진격하라!”

“우와아!”

“신마출세 천하군림!”

“신교 천세천세 천천세!”

신마의 선언과 함께 모든 마교의 고수들이 용광로처럼 끓어올랐다.

마교의 문이 활짝 열렸다.

해일처럼 쏟아져 나오는 마교의 고수들이라니!

오궁에 속하는 축융궁, 혈마궁, 환희궁, 유령궁, 만독궁의 고수들이 각각 일천에 이원인 내, 외원의 고수들이 각각 일천오백 명이다.

거기에 더해 이전인 성녀전과 집법전의 고수들이 다시 오백 명씩이오, 마령인의 완성형인 광마인이 오백 명이니 모두 합해 구천오백 명이라고 하는 무지막지한 힘이 한꺼번에 진격하는 것이다.

“나를 따르라, 신교의 전사들이여!”

그 선두에는 마교의 전설을 오롯이 이루어낸 신마가 자리하고 있었다.

“와아아!”

“크아아아!”

마교의 마인들이 목이 터져라 호응했다.

파괴와 정복에의 욕망에 눈을 번들거리며 북으로, 북으로 밀려갔다.

부르르!

후방에서 보급을 주도하며 대산을 지키기 위해 남아 있던 음양자가 감격에 겨워 몸살을 앓았다. 털썩 무릎을 꿇고 앉아 흐느꼈다. 목소리를 높였다.

“크흐흑! 아리만의 화신이시여! 신교의 천년 숙원을 기필코 이루소서! 중원천하가 마신의 나래 아래 엎드려 죽음의 기쁨을 노래하게 하소서-어!”

감격에 겨운 목소리로 부르짖는 음양자의 외침이 바람에 실려 북으로 내달렸다.

***

대산의 문이 활짝 열렸다!

진격하라!

음양자의 전서를 받아 든 마도 칠문의 주인들이 눈을 희번덕였다.

만겁문과 더불어 호남성 북단에 자리 잡은 구유마문의 문주 배위성도 그 중에 하나였다.

“가자!”

더는 두고 볼 것도 없다는 듯 구유마문을 나섰다.

“크흐흐. 드디어 시작입니다!”

“아오, 얼마나 기다렸는지…….”

구유마문의 정예 고수 삼백여 명이 일제히 완전무장을 한 채 길을 나섰다. 저 악록산 허리로 내려다보이는 동정호변을 향해서였다.

한 시진 후.

구유마문의 문주 배위성과 휘하 마도 고수들은 동정호변을 끼고 펼쳐진 익양현에 들 수 있었다. 그 중심에 자리한 장룡방이 첫 번째 목표였던 것!

“크크큭. 쳐라!”

배위성의 살기 가득한 명령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구유마문의 마도 고수들은 대낮임에도 불구하고 일제히 장룡방을 향해 달려들었다.

“다 쓸어버려-엇!”

“갑니다-아!”

“차아아!”

선전포고도 없었다.

문을 두드릴 필요도 열 필요도 없다는 듯 모두가 담을 넘었다. 남녀노소의 구분도 없었다. 눈에 띄는 모든 대상을 닥치는 대로 베었다.

“누, 누구냐?”

패액. 서걱.

“커헉!”

“저, 적이다-!”

휘리릭. 차창. 스각.

“커헉!”

뒤늦게 구유마문의 습격을 알아차린 장룡방의 무사들이 경고성을 발했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는 일이었다.

동정호의 많은 수로 중 겨우 한 줄기 감당하는 수준의 장룡방 무사들이 마도 칠문에 속하는 구유마문의 정예들을 당해낼 리 만무한 거다.

“이 악독한 놈들! 우리 장룡문은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중립이거늘 어째서……?”

“닥쳐라!”

화들짝 놀라 튀어나온 장룡방주의 억울한 항변을 구유마문의 문주 배위성이 단칼에 잘랐다.

패애애액. 스가각.

“커헉!”

무기 한 번 제대로 휘둘러보지 못하고 주살당해버린 장룡문주를 내려다보며 구유마문의 문주가 살기로 범벅이 된 눈을 희번덕이며 내뱉었다.

“신교에 속하지 않으면 적일 뿐!”

스릉.

배위성의 손에 묵빛의 도가 들렸다.

“이제 다들 죽어라-아-앗!”

휘슷! 스각!

양 무리에 뛰어든 늑대라도 되는 양 배위성이 장룡방의 무사들을 마구 베었다.

“크아악!”

“커헉!”

장룡방주을 포함해 장룡방의 고수 오십여 명을 몰살하기까지 한 식경이면 족했다. 방주 오현양으로 시작해서 그의 가족과 허드레일꾼 그리고 무사들에 이르기까지 살아 움직이는 것은 깡그리 죽어 나자빠졌다.

“크하하하하!”

배위성이 통쾌한 웃음을 터뜨렸다.

실로 잔혹 무도한 손속이었지만 그간 감추고 억누르기만 했던 폭력과 정복에의 욕구가 아직도 채워지지 않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배위성이 고함을 버럭 질렀다.

“관이고 군이고 신경 쓸 것 없다. 걸리적거리는 것들은 무엇이든 베어라. 신마께서 오고 계신다. 바야흐로 피의 계절이란 말이다-아!”

마도칠문의 임무는 교두보의 확보였다.

혹시라도 정파 떨거지들과 힘을 합쳐 뒤통수를 노릴 가능성을 제거하는 것, 그렇기에 이렇듯 잔혹하게 손을 써 후환을 없애는 것이다.

“오소서 신마시여-어! 대지를 피로 적시소서!”

살기와 광기로 범벅된 배위성이 이끄는 구유마문의 주력은 익양현에 자리한 몇몇 중소 무관과 중립문파들을 차례차례 짓밟았다.

“크아악!”

“사, 살려……. 커허억!”

가는 곳마다 피비를 뿌렸다.

하루 사이에 죽어 나간 중소문파와 무관의 희생자만 해도 무려 오백여 명에 달한다.

하지만 놀랍게도 그 어떤 현청의 병사들이나 근처 천호소의 정병들도 나서지 않았다. 그저 묵계라도 맺은 양 침묵했다. 모른 체 했다.

‘호, 홍연왕야와 한 배를 타고 있으니 어쩔 수 없잖아!’

‘마교의 주력이 몰려오고 있어. 저놈들을 상대했다가는 그 괴물들까지 상대해야만 해.’

‘이번만 눈을 감자. 이 혈풍이 지나가기만 기다리자.’

홍연왕과 마교가 손을 잡았던 효력은 홍연왕이 용무린의 손에 체포되어 자금성으로 향하고 있음에도 아직까지 주효했다.

물론 홍연왕에게 선을 대었던 군부의 수뇌부 태반이 홍연왕부에서 용무린에게 죽음을 당한 직후라 강력한 지휘력이 상실된 이유도 컸다.

하지만 무엇보다 크게 작용한 것은 누구나 목숨은 하나라는 새삼스러운 자각이었다.

뒤늦게 원군이 찾아와 놈들을 처단하는 것은 이미 자신들이 죽고 난 후의 일인 것, 일단은 살고 봐야겠다는 생각이 더 컸던 것이다.

“다음은 상음현이다. 서둘러라!”

“충!”

익양현의 중소문파를 깨끗이 밀어버린 구유마문의 마도 고수들은 사흘 거리에 위치한 상음현을 향해 일제히 신법을 전개했다.

구유마문주가 비릿하게 웃었다.

‘크흐흐. 상음현 다음이 비로소 악양인가?’

악양에는 제법 덩어리가 큰 중급 문파들 다수가 산재해 있다. 동정호반을 끼고 있는 터라 먹을거리가 풍부했기 때문인데 지금까지는 군침만 흘려야 했다.

‘익양현까지만 올라가도 마도의 세력이 북상을 하네 마네, 별 염병 지랄을 다 하는 통에 탐스런 먹잇감을 지켜보기만 해야 했지만 이제는 다르단 말씀!’

신마가 선두에 선 신교의 주력이 불회곡을 나섰다.

칠십 년 전에 벌어졌다던 정마대전이 재현되는 판국에 무엇이 두렵겠는가?

‘익양까지 일소한 후 즐기면서 신마를 맞이한다.’

탄탄히 다져 놓은 대지를 발판 삼아 신마께서 중원정복의 꿈을 이루시리라.

“속도를 높여라. 상음현이 코앞이다!”

“충!”

쌔애액. 휘스스스슷.

구유마문 고수들의 신법이 가일층 되었다.

피! 피! 피!

그에 따르는 비명과 절규와 통곡!

“크하하하! 깡그리 죽여라!”

“우리 뒤에는 신마께서 계시다!”

“관과 군 따위 염려할 것 없다. 눈치 볼 필요 없이 마음껏 짓밟아라.”

익양현과 상음현처럼 짓밟히고 파괴와 약탈을 겪는 곳들이 한두 곳이 아니었다.

구유마문으로 시작해 귀검문, 대혈문, 만겁문, 사령문, 백골문, 번천문으로 이어지는 속칭 마도 칠문에 속한 귀주, 호남, 강서, 복건성에 이르는 모든 중소 문파와 중립문파들이 화를 입었다.

관과 군의 지도력 부재와 외면에 힘입어 북상하는 마도 칠문의 파상공세에 많은 문파들이 멸문을 당했다.

마도 칠문만의 전력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었지만 그동안 숨죽여 왔던 많은 수의 흑도 문파들이 이때다 싶어 동참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신교의 문이 열린 지 불과 열흘!

귀주, 호남, 강서, 복건의 네 개 성의 중소문파들은 무림맹과 정파연합을 따르든 따르지 않던 완전히 짓밟히고 붕괴가 되었다.

구유마문이 악양을 차지한 것처럼 각기 한 곳의 거점을 차지한 마도칠문이 온갖 약탈과 방화, 강간을 이어갔지만 어느 한 곳 나서는 곳이 없었다.

***

하늘과 땅의 기운이 통째 쏟아져 내리는 것처럼 대자연의 기운을 빨아들이던 현상이 드디어 갈무리되었다.

우드득. 와드득.

기묘한 소리를 내며 몇날 며칠을 계속되던 환골탈태도 더는 진행되지 않았다.

흠칫! 홱!

경외감 가득한 얼굴로 이제나 저제나 용무린의 운공요상이 끝나기만을 기다리고 있던 총병관 양문광이 무엇인가를 느끼곤 화들짝 놀라 선실을 향해 돌아섰다.

‘조, 존재감이…….’

천신이라도 내려온 듯 아니면 용왕이라도 들어앉은 듯 거대하게 뿜어지던 용무린의 존재감이 어느 한순간 씻은 듯 사라져 버렸던 것이다.

“아, 아버지!”

“쉿!”

같은 것을 느끼고 있던 유격장군 양경홍이 총병관을 불렀지만 양문광은 재빨리 양경홍의 입을 막았다.

‘경계나 더 철저히 해. 어쩌면 지금이 가장 중요한 고비일지도 몰라. 패주께서 이루시려는 대공을 우리가 지켜드려야만 해!’

‘예, 아버지.’

서로를 향해 고개를 살짝 끄덕여 보인 두 사람의 시선이 주변으로 돌았다.

‘염려 마십시오.’

‘지금껏 한숨도 자지 못했지만 거뜬합니다.’

‘우리가 초인의 탄생을 지켜내는 겁니다. 하하하.’

척하면 착이었다.

양가장의 장로들을 비롯한 오군도독부의 수뇌부들은 굳이 말하지도 않았는데 같은 것을 느끼고 있었던 모양인지 활짝 웃으며 더더욱 주변 경계에 집중했다.

하지만 생각했던 것만큼 용무린의 상황이 급박한 것은 아니었다. 존재감이 완전히 사라지던 그 순간 용무린의 눈이 떠졌던 것이다.

‘거 참, 이거 적응 안 되네…….’

눈을 뜬 용무린은 새롭게 바뀐 신체를 파악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다섯 번이나 연거푸 환골탈태를 하다니!’

초절정의 내공을 예전에 뛰어 넘었음에도 불구하고 한 번의 환골탈태를 하지 않더니 지금은 무슨 바람이 불어 이렇게까지 한 것인지 조금 웃겼던 거다.

‘악취도 별로 안 나네?’

아버지 용대명을 환골탈태까지 이끌 때 느꼈던 악취에 비하면 지금은 꽃 즙을 뿌린 듯 청아하고 부드러운 향기마저 느껴졌다.

‘확실히 노폐물이나 이런 것은 많지 않았던 모양이지?’

자존심이 팍 상했던 불사신기가 작정하고 몸을 고쳤지만 이전에도 노폐물 따위가 깃들 만큼 만만한 경지는 아니었다는 뜻이다.

‘임, 독 양맥은 물론이고 기경팔맥과 12정경 모두가 전과 확 달라졌어.’

어찌나 넓고 튼튼해졌는지!

이전의 혈맥들이 강의 작은 지류와 같았다면 지금은 거의 장강처럼 크고 넓고 깊어진 느낌이다.

‘이젠 역천자란 놈과 붙어도 확실히 괜찮겠다.’

예전에는 막연하게 그래도 지지는 않겠지? 하는 정도였지만 지금은 확실하게 말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이기지 못한다 하더라도 절대로 지지는 않는다고.

‘그나저나 이 감각, 정말 신비롭구나.’

무어라 말을 해야 할까?

내 몸이 내 몸이 아닌 듯했다.

손을 뻗어 하늘을 움켜쥐면 실제로 하늘을 움켜쥘 수 있을 듯했고 조운선 아래를 흐르는 물과 그 아래의 대지와 하나가 되어 있는 것만 같다.

‘진정한 의미의 반박귀진을 넘어선 것 같은데…….’

전생인 절대검신의 기억을 더듬어 보면 옛 고려에서는 이런 경지를 두고 현빈일규 백규개통(玄牝一竅 百竅皆通)의 경지라고 했다.

‘이 다음의 경지가 비로소 전생의 나인 절대검신이 죽음에 이르러서야 오른 경지였지? 천지인 삼태극이 조화를 이뤄 원신출태 즉 마음먹는 대로 등선을 할 수 있는 경지라 했던가?’

지금부터 그 경지까지는 무력이나 내공의 강약 따위로 오를 수 있는 경지가 아니다. 지극한 깨달음과 함께 모든 업을 태워버려만 오를 수 있다.

‘그렇다면 일단 무력만큼은 전생의 경지를 오롯이 되찾았다는 것인가?’

생각해보니 그것은 또 아니었다.

불사신공은 몰라도 불사대천검의 경지가 무림맹에서 펼쳐냈던 것처럼 완전한 자유를 찾지는 못했다.

“시간이 해결해 주겠지.”

늘 생각해왔던 것처럼 마음을 편안하게 먹었다.

깨달음과 무공의 완성이라는 것은 일조일석에 해결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었으니까.

“다들 걱정하겠네. 일단 일어나자!”

조바심 태우며 숨조차 크게 쉬지 못하고 주변에 서 있는 총병관과 유격장군을 비롯한 지인들의 심장소리가 천둥처럼 귓전을 울리고 있었다.

“움직여야 새롭게 바뀐 육체에 적응을 하지.”

용무린은 문을 열고 갑판 위로 나섰다.

그동안 숨도 크게 쉬지 못하고 잠도 자지 못한 채 호법을 서던 모두가 활짝 웃으며 두 손을 앞으로 모았다.

“대공을 이루심을 감축 드립니다, 패주.”

“감축 드립니다, 패주.”

용무린도 환하게 웃으며 답했다.

“고마워요. 다들 걱정 많았죠?”

“무슨 말씀을! 무림왕 황룡패주의 진정한 힘을 누구보다도 더 잘 알고 있었기에 소장은 하나도 걱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렇습니다, 패주. 이렇게 떨치고 대공을 이뤄 나오실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습니다. 하하하.”

총병관 양문광과 유격장군 양경홍이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고개를 흔들었다.

용무린은 짐짓 눈을 가늘게 떠 보였다.

“하나도 걱정하는 사람이 없었다니! 이거, 조금은 서운한데요?”

“와하하하. 그렇습니까? 하면, 황성에 당도하는 대로 소장이 열 동이의 술을 사겠습니다.”

“다음은 저 유격장군 양경홍이 사도록 하겠습니다. 그리하면 되겠습니까, 패주? 하하하하하.”

몇 번의 전투를 함께 한 사이들인지라 느낌이 꼭 화운장로나 소림의 일각대사 혹은 살계승 효정대사를 보는 기분이었다.

“여기가 어디쯤 되죠?”

“두어 시진만 더 가면 북경성 인근의 청진항에 도착을 합니다.”

정신없이 운공요상을 하는 사이 참 많이도 왔다.

“그 사이 무슨 연락이 온 것은 없었나요?”

“저, 그것이…….”

“……!”

용무린의 눈이 이내 부릅떠졌다.

잠시 말꼬리를 늘이던 총병관의 입에서 그야말로 놀라운 정보가 쏟아졌기 때문이었다.

마교의 진격!

선발대 격인 마도 칠문과 흑도연합의 파상공세에 벌써 여러 개의 성이 놈들의 수중에 떨어졌다는 놀랍고도 충격적인 사실!

‘마도칠문이 선발대 역할이고 뒤 따라 북상하는 마교의 정예들이 후발대니 누가 막을 수 있겠어?’

돌덩이라도 얹어 놓은 듯 용무린의 가슴이 답답해졌다.

놈들의 파상공격에 마구 쓰러져 갈 중소문파들의 모습이 빤히 그려졌기 때문이다.

‘그래도 생각과는 조금 다르네?’

자신들의 말마따나 천년 숙원 아니던가?

급한 마음만 따지자면 일직선을 그리며 무림맹과 소림, 무당을 짓밟고자 달려들 것으로 알았는데 넓게 퍼져 차근차근 진격하는 것은 정말 의외였다.

“여기, 그동안 들어온 정보이옵니다.”

총병관 양문광이 군의 정보망을 통해 지금껏 입수한 전서들을 내밀었다. 마도칠문의 진격부터 시작해 뒤이어 북상한 마교가 어떻게 행동하고 있는지 소상히 적혀 있었다.

‘귀주, 호남, 강서, 복건성을 차지한 후 각 성의 북쪽 경계에 멈춰 있다 이거지?’

기반을 다지는 거다.

‘선발대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했으니 본대 격인 마교가 북상을 해 주변을 완전히 먹을 때까지 기다리겠다는 뜻 아니겠어?’

새삼 가슴이 서늘해진다.

천년 숙원을 앞에 두고도 이렇듯 자제를 하며 천천히 먹어 들어오다니!

‘뒤통수 맞을 여건을 절대 남겨두지 않겠다는 뜻일 터!’

진격 속도는 느려도 더 없이 안전한 방법이다.

점령한 문파들을 완전히 밀어낸 후 흑도 잡배들로 채우며 올라올 테니 최소한 보급로가 끊어질 염려나 뒤통수 맞을 걱정이 사라지기 때문이다.

‘관과 군이 그렇듯 몸을 사릴 줄은 미처 몰랐네.’

홍연왕과 함께 손을 잡았거나 직간접적인 영향을 받은 놈들이라 그런지는 모르겠는데 아직도 마교와 한 배를 타고 있다고 여기는 것일까?

‘그렇게 눈 감고 귀 닫을 줄이야…….’

자신들 주변에서 그 많은 피가 흐르고 있음에도 설마하니 저렇듯 무사통과를 시키거나 지역의 패권을 인정하듯 침묵할 줄은 미처 몰랐다.

‘홍연왕이 내 손에 잡힌 것을 안다면 살기 위해서라도 마교와의 무관함을 보여야만 할 터, 그렇다면 죽는 한이 있다 하더라도 마교의 진격을 막아야 할 놈들이 저렇듯 흐리멍텅한 태도를 보이다니!’

아무리 생각해도 오랜 세월 다져진 마교의 은밀한 영향력으로 보였다.

홍연왕에게 접근한 것이 비교적 가까운 시간 내에 벌어진 일이라면 진격 선상에 있던 관과 군은 오랜 세월 동안 마교와 가까운 곳에 있다 보니 자연스럽게 두려움에 젖어들었다, 고나 해야 할까?

‘아니면 관과 무림은 별개라는 해묵은 관행을 두려움을 가릴 방패로 삼은 것이겠지.’

뭐가 되었든 문제는 문제였다.

‘아니, 그것보다 더 큰 문제는 바로 저놈들이지.’

용무린의 눈이 동정호 북쪽의 악양을 차지한 구유마문의 정보가 적힌 쪽지에 닿았다.

‘악양이라고 하면 내 가문인 비룡문에 불과 닷새면 닿을 수 있단 말이야!’

악양은 동정호 북단에 자리해 있다. 동정호의 수로를 통해 북상하면 군산과 홍호를 지나 곧바로 동호가 나오게 되고 무한은 동호의 끝에 위치해 있으니 비룡문까지 닷새면 충분한 거리다.

그때였다.

용무린의 우려가 무엇인지 잘 알고 있다는 듯 총병관 양문광이 불쑥 입을 열었다.

“이미 황제폐하의 어명이 있었습니다, 패주.”

“예? 무슨……?”

동그랗게 눈을 뜬 용무린을 향해 총병관 양문광이 보기 좋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마교의 진격 소식을 황상께 보고를 했었습니다.”

“아! 군과 동창의 정보망이…….”

“그렇습니다, 패주. 군의 정보망과 동창의 정보망이 한꺼번에 움직여 마도칠문과 마교의 움직임을 속속들이 보고를 했지요.”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홍연왕의 역모 직후인데 군과 동창의 정보망을 거둬들일 까닭이 없는 거다.

“놈들의 움직임을 직접 보듯 들여다보신 황상께서 내리신 첫 번째 어명이 바로 ‘무한의 비룡문을 보호하라.’ 라는 것이었습니다.”

“후후훗. 폐하도 참…….”

못 말리겠다는 듯 웃어보였지만 용무린의 가슴이 조금은 따뜻해졌다. 용무린을 깊이 생각하는 황제의 마음이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이미 호북성을 관할하는 중군도독부가 움직였습니다. 호북성을 지키는 위지휘사사 열 곳 중 다섯 곳이 무한 주변으로 이동했고 천호소 다섯 개소가 비룡문 주변으로 군막 자체를 옮겼습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중군도독부의 좌 도독이 직접 본대 이만을 거느리고 무한을 향해 움직이고 있으니 최소한 비룡문의 안전만큼은 염려하지 않아도 좋았다.

‘거, 참…….’

사람 마음 참 얄팍한 거다.

용무린은 비룡문의 안전을 확인하게 되자마자 피식 피식 터지는 미소를 감추기가 힘들었다.

‘아생연후살타! 입장이 나와 바뀐다면 누구든 안심하고 좋아하겠지.’

과연 누가 용무린의 미소를 폄훼하겠는가?

입장이 서로 바뀐다면 하나도 빠짐없이 좋아 죽으려 할 것이다.

‘위지휘사사의 병력이 오천육백 명이니 다섯 곳이면 이만 팔천명인가? 거기에 천호소 다섯 곳이 더해졌고 중군도독부의 좌 도독이 직접 본대를 이끌고 남하 중이라고 하니 무한 인근의 병력은 최소 오만 어림일 터!’

그 정도라면 아무리 마교라고 해도 치고 들어올 수가 없게 된다.

군이 작정하고 보호하는 곳임을 드러냈음에도 친다는 것은 곧 백만 명에 달하는 군 전체와 해보겠다는 뜻이 되기 때문이었다.

“폐하를 아니 뵐 수가 없겠네요.”

청진항에서 자금성까지의 거리는 불과 하루.

신법을 전개해 전력으로 달리면 불과 몇 시진이면 당도할 수 있는 거리다.

‘마음 같아서는 나 혼자서라도 냉큼 달려가서 얼굴을 뵌 후 마교 놈들을 때려잡기 위해 남하를 하고 싶은데 그렇게 하긴 좀 그렇지?’

그만큼 자신을 생각하는 황제에 대한 예의가 아닌 거다.

역모를 꾀했던 홍연왕을 체포해 데려가는 행렬이니만큼 최대한 황제의 위엄을 드러내야만 한다.

“청진항에 누가 나와 대기하고 있나요?”

“인근의 위지휘사사와 항구 주변을 지키는 천호소에서 나와 있을 것입니다.”

“흠…….”

고개를 살짝 끄덕여 보인 용무린이 활짝 웃으며 목소리를 높였다.

“기왕 이렇게 된 것, 폐하의 위신 좀 제대로 살려드려야 할 것 같네요.”

“알겠습니다, 패주. 그렇게 준비하도록 하겠습니다.”

총병관 양문광이 넉넉한 미소로 대답했다.

오래지 않아 총병관의 이름으로 된 전서 몇 장이 하늘 높이 날아올랐다. 오군도독부와 진성왕부를 수호하는 왕부장사사와 왕부호위지휘사사 그리고 북경과 자금성을 지키는 경위지휘사사를 향해서였다.

“황룡패주를 뵈오이다!”

“황룡패주를…….”

청진항에 내린 용무린 일행을 근처의 위지휘사사의 병력과 천호소에서 나온 병력이 맞았다.

“수고했다. 깃발을 높이 들어라. 감히 황상께 역모를 벌였던 역적을 압송하는 길이다.”

“충!”

흰색 무명옷으로 환복한 홍연왕과 홍연왕의 식솔들이 나무로 얼기설기 엮어 만들어진 뇌옥 수레에 올랐다. 백성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며 자금성으로 향했다.

“퉤에! 더러운 놈!”

“뭐가 부족해서 역적질이야, 역적질이?”

“우리 황제폐하께서 얼마나 우리 백성들을 생각하시는 성군이신데, 그런 우리 폐하를 시해하려고 들어?”

“퉤에! 나쁜 놈!”

역적을 잡아 압송하고 있다는 소식에 백성들이 몰려나왔다. 홍연왕과 그 식솔들을 향해 침을 뱉었다. 욕설을 퍼부었다.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황궁무고에서 돌아온 직후부터 베풀기 시작한 선정은 용무린이 만금상단을 차지하고 황제의 이름으로 곡식과 중요 생필품에 대해 가격 인하를 단행함으로써 절정에 이르게 되었던 것이다.

“황제폐하 만세, 만세 만만세!”

“벼락이나 맞아 죽어라, 이 나쁜 놈아!”

황제에 대한 찬양과 홍연왕에 대한 저주가 교차되어 쏟아졌지만 용무린에게 혈도를 제압당한 홍연왕은 모든 것을 포기한 채 눈을 감고만 있었다.

황제를 찬양하는 백성들이 날로 늘어났다.

자금성으로 향하는 길목마다 쏟아져 나와 최소한 굶어 죽는 것을 막아준 황제를 찬양했으며 그런 황제를 시해하려 역모를 꾀한 홍연왕을 욕했다.

용무린의 명에 의해 군사들도 백성들의 행동을 막지 않았다. 돌을 던지는 등의 심각한 행위만 제어하는 선에서 접근을 허용했다.

점점 늘어만 가는 백성들의 환호소리.

그 사이를 뚫고 황제의 깃발을 위풍당당하게 휘날리며 입성하는 용무린과 총병관의 행렬.

“우와아! 황제폐하 만세만세 만만세!”

“이 죽일 놈의 역적! 퉤에!”

“왜 그랬어? 왜 우리 폐하를 시해하려 한 거야, 이 나쁜 역적 놈아!”

자금성에 가까이 가면 갈수록 많은 백성들이 몰려나와 황제를 찬양했으며 홍연왕에게 침을 뱉고 돌을 던졌고 욕설을 퍼부었다.

그 모든 것이 황제를 높여주는 행동들이다!

황제의 위상을 드높게 받들며 용무린이 이끄는 행렬은 위풍당당하게 자금성에 도착했다.

“오는구나! 온다! 오고 있어!”

어쩌면 엄청난 피를 흘렸을지도 모르는 역모를 적은 피로 간단히 막아낸 용무린을 치하하기 위해 황제가 대전 밖으로 직접 나와 용무린을 맞았다. 그야말로 역사에 남을 성대한 환영인 셈이다.

“황룡패주 입궐이오-오!”

“오오오, 패주! 어서 오라!”

와다닥.

상선감의 외침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황제가 달려 나갔다. 황제의 체면이고 뭐고 다 필요 없다는 듯 용무린의 두 손을 뜨겁게 잡았다.

“폐하! 황룡패주 용무린, 다행히 역적의 무리를 괴멸하고 수괴를 잡아올 수 있었습니다.”

“그래그래. 수고했다. 수고했어.”

무릎을 꿇고 고개를 조아리는 용무린을 황제는 다 필요 없다는 듯 일으켜 세웠다. 기쁘기 한량없는 얼굴로 등을 쓰다듬고 두들기며 안으로 향했다.

“단 한 사람의 공도 빠뜨리지 않겠노라!”

총병관을 비롯한 양가장과 오군도독부에 대한 치하는 대전 안에서 이루어졌다. 양문광으로 시작해 누구 한 사람 빠뜨리지 않고 골고루 황제가 입에 이름을 올린 까닭에 모두가 기뻐하는 자리였다.

치하와 술자리가 밤늦게까지 이어졌다.

원하는 것이 무엇이냐는 황제의 질문에 용무린은 다시금 황궁무고의 영약들을 입에 올렸고 황제는 흔쾌히 허락을 해주었다.

“시간을 끌 게 무어냐? 가자!”

황제는 대뜸 용무린을 이끌고 황궁무고로 향했다. 약재창고 앞에서 마음껏 고르라 재촉했다.

“이거 다 황제폐하를 지키기 위해서예요. 아시죠?”

라고 외치며 주섬주섬 영약들을 챙겨 넣는 용무린을 향해 황제는…….

“알다마다! 마음껏 챙겨도 좋다.”

호탕하게 외쳤다.

과거처럼 ‘그거 고가 아직 맛도 못 본 것인데.’ 라며 아까워하는 모습을 보이지도 않았다. 그저 흡족하다는 듯 웃어 보일 뿐이었다.

“그럼 이만 가보겠습니다, 폐하.”

“남쪽으로 갈 생각인 것이냐?”

“예, 폐하.”

툭툭툭.

황제가 용무린의 등을 가만히 토닥이며 말을 덧붙였다.

“고가 군을 움직여 돕는 것은 안 되겠지?”

용무린이 풀썩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 폐하. 다시 한 번 말씀드리지만, 그렇게 되면 폐하의 안전을 보장할 수가 없게 됩니다.”

“그래, 그래. 알겠다.”

몇 번이고 들었던 말인지라 황제는 선선히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관과 무림은 별개라고 하는 해묵은 격언을 거부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 것인지 이제는 아는 것이다.

‘고얀 놈들. 그래도 이 나라의 황제는 바로 고일 터인데, 그깟 관례 좀 무시했기로서니 자금성의 담을 넘어 고를 직접 노리려 들어?’

그런 것을 방지하기 위해 황룡패주에게 무림왕이라고 하는 지위를 내렸다. 힘을 실어 주었다.

황제의 표정이 엄해졌다. 단호하고 결연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무림왕으로서의 사명을 다하라, 황룡패주. 더는 마교와 같은 사특한 무리들이 선량한 고의 백성들을 괴롭히지 못하도록 하라.”

“예, 폐하.”

용무린은 기꺼이 고개를 숙여 답했다.

어차피 마교와는 같은 하늘 아래 살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

무림맹주 비천검제 풍연호의 눈이 동그래졌다.

“무한 인근에 관군이 결집을 하고 있다?”

“그렇습니다, 맹주. 아무래도 비룡문을 보호하기 위한 조치로 생각이 됩니다.”

이어지는 천안각주의 보고에 풍연호는 회심의 미소를 지어 보였다.

씨이익.

“좋군. 최소한 비빌 언덕이라도 생긴 셈이니…….”

“그렇습니다, 맹주. 무한이 자리한 호북성을 기점 삼아 주변을 공략하다가 밀리는 일이 생기면 무한으로 빠지면 될 듯합니다.”

천안각주가 반색을 하며 답했다.

풍연호의 명령이 이어졌다.

“지금 즉시 각 무림맹의 전력을 남하시키도록! 목표는 사천의 당문과 무한의 비룡문 인근, 그리고 안휘의 남궁세가로 정할 것이다.”

“명!”

회의장에 자리하고 있던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크게 세 곳으로 힘을 나눈 셈이었지만 지금 저보다 더 좋은 대책은 아무리 생각해도 없었던 것이다.

제 1로인 사천 쪽으로는 의천단 삼백 명과 대정단 삼백 명, 그리고 검룡당 소속 검수 사백 명까지 도합 일천의 무인들로 편성이 되어 있었다.

제 2로인 무한의 비룡문 인근을 향해서는 진무단 삼백 명과 천도당 무사 사백 명으로 파견되는 무인들의 숫자가 가장 적었고, 나머지가 제 3로인 안휘의 남궁세가로 향하기로 했으니 숫자만 보기에는 제 3로가 무림맹의 주력이라 할 수 있었다.

무림맹주의 집무실.

‘나도 이제 슬슬 준비해야 하겠구나.’

속속 떠나가는 무인들을 보며 비천검제 풍연호는 지난 세월 내내 준비해 온 것을 꺼낼 때가 다가오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역천자라…….’

놈을 막기 위해 살아온 지난 세월, 용무린이라는 영웅의 등장으로 그 빛이 많이 바랜 듯 느껴지긴 하지만 절대로 후회는 없었다.

‘부맹주. 부디 무림을 지켜주시오.’

회의를 하며 천안각주에게 이해시키기 가장 힘들었던 것이 바로 그 점이었다. 앞으로는 모든 일을 용무림 부맹주와 상의해가며 해야 한다는 것 말이다.

‘천안각주가 알아서 잘 해주겠지.’

무림의 맹주로 살아온 영광된 나날이었지만 암전이 되는 일에 주저함 따위는 없다. 지금껏 역천자라는 희대의 괴물을 상대하기 위해 살아온 나날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이대로 암전이 될 것이오, 부맹주.’

모든 것을 알려 주었으니 앞으로는 천안각주가 무림맹주인 자신을 대신해 용무린 부맹주와 교감하며 정마대전을 이끌 것이다.

‘부디 무림을 부탁하오, 부맹주.’

휘슷.

용무린을 한 차례 떠올린 비천검제 풍연호의 모습이 어디론가 사라졌다.

***

이레 전 만금상단.

“마교! 마교에서 전격적인 총공격을 시작했다고요?”

“그렇다는구나.”

반짝!

주약란의 말에 백리소옥의 눈에 서슬 파란 불꽃이 튀었다. 한동안 잊고 지내던 무인으로서의 기상이 단숨에 되살아 난 거다.

‘영은, 영선 두 사저들도 본산으로 달려갔겠구나.’

아니 굳이 그럴 필요도 없을지 모른다.

사천당문과 아미파와의 거리는 불과 닷새 어림, 당문에서 상처를 돌보고 있었던 두 사저는 아마 지금쯤 남하하고 있을 사문의 어른들과 함께 전장으로 향하고 있으리라.

‘사부님…….’

이제는 가고 없는 보현의 얼굴이 불쑥 떠올랐다.

더불어 자신을 아미일보 금정이라고까지 부르며 아껴주던 보상신니와 함께 친 혈육처럼 자신을 돌보아 주던 사문의 사저와 사매들이 생각났다.

울컥!

갑자기 심장이 욱신거렸다. 머리가 멍해졌다.

‘내가 지금 대체 여기서 무얼 하고 있는 것이지?’

용무린을 사랑하는 마음에 변함이야 있을 리 없다.

하지만 그만큼이나 크게 가슴에 와 닿는 것은 바로 아미파였다.

어린 시절부터 이어진 인연은 보현과 보상신니 그리고 영은, 영선과 더불어 모든 사저, 사매들에게 끈끈하게 이어져 있었던 거다.

‘하아! 사랑에 후회를 남기지 않으려다 사문에 죄를 짓는 후회를 가득 남기게 되겠구나.’

새삼스러운 깨달음이었다.

속가에 불과하지만 자신은 아미파의 제자, 장문인인 보상신니가 아미일보 금정이라고까지 부를 만큼 많은 사랑을 받은 사람이라는 사실이었다.

‘그런 내가 마교의 진격 앞에, 사문의 모두가 전장에 나가 있음에도 이렇듯 한 사내의 사랑만 갈구하며 그가 내게 와주기만 기다린다고?’

생각하면 할수록 어처구니없게 느껴졌다.

‘지금은 사랑만 갈구하며 멍하니 있을 때가 아니야!’

마교가 진격을 시작했고 사문의 형제들이 모두 죽음에 한쪽 발을 담갔다.

“가겠어요!”

백리소옥이 자리에서 발딱 일어났다.

잠자코 지켜보던 제갈영령이 복잡한 눈빛으로 백리소옥의 앞날을 축복해 주었다.

“몸조심해서 꼭 돌아오도록 해요, 언니.”

살아 돌아오라고는 했지만 끝까지 백리소옥을 아랫사람으로 인정하지 않고 언니라 부른다.

“고마워요, 언니. 반드시 돌아오도록 할게요.”

“……!”

백리소옥도 지지 않고 언니라 불렀지만 제갈영령은 대답을 하지 않았다.

“옹주님. 강녕하세요. 하린아. 다음에 또 보자.”

인사가 끝나기가 무섭게 백리소옥은 저 멀리 사천 땅을 향해 길을 나섰다.

“조심하여라 소옥아.”

“소옥 언니. 조심해요. 그리고 꼭 건강히 돌아와요.”

말릴 수 없음을 알기에 멀어져가는 백리소옥을 향해 손을 흔들어 보인 주약란과 양하린이 조금은 불안한 표정으로 작별을 고했다.

“나도 이제 그만 돌아가 봐야 할 것 같구나. 그간 여러모로 고마웠다.”

주약란이 쓸쓸한 미소와 함께 손을 내밀었다.

마교의 준동으로 인해 염려가 된 황제가 주약란 옹주를 다시 불러 올렸던 것이다.

“살펴가세요, 옹주님.”

“언니. 저도 가 볼게요. 가문에서 저도 어서 오라고 난리예요.”

양하린도 작별을 고했다.

“그래. 잘 가고, 다음에 꼭 보자.”

제갈영령의 가슴에 묘한 외로움이 스몄다.

연적들임에 분명한데 그간 알게 모르게 정이 들었던 모양이었다. 그녀들이 사라지니 좋아해야 했지만 한편으로는 허전하기도 했다.

‘그만큼 좋은 사람들이니 어쩌겠어? 모두 건강한 모습으로 다시 볼 수 있게 되길 빌 수밖에…….’

제갈영령은 두 손 모아 기원했다.

연적이고 뭐고 용무린을 믿고 있으니 자신이 해야 할 일은 그들의 안전을 비는 일뿐인 거다.

***

“용 대협! 아, 아니 부맹주니-임!”

용무린이 자금성을 나서기가 무섭게 개방의 정의개들이 다가왔다.

무림맹에서 내려진 결정에 의해 만장일치로 부맹주의 지위가 내려졌음을 알렸고 또한 무림맹의 고수들이 어떻게 움직이고 있는지 낱낱이 아뢰었다.

“부맹주는 개뿔, 누가 자리 따위 연연해한다고 자꾸 그딴 허울을 씌우고 그러지?”

“맹주님과 함께 회의를 하던 무림맹 수뇌부 전원이 만장일치로 내린 결론입니다, 부맹주님.”

“휴우. 하여간 맹주님은 뒤에 남아 보급에 주력하며 지켜보다가 급격히 세가 기우는 곳을 지원한다는 입장이고 나머지는 3로로 나뉘어 진격한다고?”

“그렇습니다, 부맹주님.”

보고를 하던 개방의 정의개가 빠른 목소리로 3로의 면면을 알려 주었다.

“음. 그래? 그렇군.”

용무린의 고개가 연신 끄덕여졌다.

간단히 3로로 나뉜 세력의 분배였지만 상당히 효율적인 힘의 안배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마교의 대처는? 놈들은 어떻게 움직이고 있는데?”

“약속이라도 한 듯 사천과 호북 그리고 안휘성을 향해 세 곳으로 나뉘어 움직이고 있습니다.”

“호북성? 후후훗. 간도 크네.”

용무린이 풀썩 웃어 보였다.

호북성은 곧 무한의 비룡문을 노린다고 봐야 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비룡문 인근에는 무려 오만에 달하는 군세가 집결이 되어 있다. 비룡문을 노린다는 말은 곧 자살을 하겠다는 말과 다름이 없는 거다.

“그게 아닙니다, 부맹주님.”

말을 잇던 정의개가 고개를 흔들었다.

“응?”

용무린의 눈이 살짝 커졌다. 정의개의 목소리가 빠르게 이어졌다.

“군산을 지나쳐 무한이 자리한 동호로 향하는 것이 아니라 좌회전을 했습니다.”

“좌회전이라면……?”

“그렇습니다, 부맹주님. 놈들은 수로를 통해 의창현을 지나쳐 북상한 후 무당산 아래까지 직행을 할 생각으로 보여집니다.”

한 가지를 빼먹었다.

무당산과 융중산은 불과 사흘거리, 놈들이 조금만 방향을 꺾어도 용무린의 처가인 제갈세가가 주공에 고스란히 노출이 된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갈세가를 입에 올리지 않는 이유는 한가지였다. 용무린을 위해 미리 움직인 황제의 배려로 융중산 인근에 상당한 숫자의 군사들이 집결해 있다는 점 때문이었다.

용무린은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한 것을 물었다.

“마교의 주력, 마교의 교주가 포함된 놈들이 어느 곳을 향하고 있지?”

“확실치는 않지만 사천이라고 짐작하고 있습니다.”

“사천? 무림맹 제 1로?”

“예. 3로가 내려오는 안휘성 쪽은 홍연왕의 역모로 인한 군세가 집결이 되어 있기에 부담감이 심할 테고 아시다시피 무림맹 2로가 향하는 비룡문 쪽은 오만이 넘는 군사들 때문에 생각하기도 힘이 드니 남은 것은 1로밖에 없습니다.”

용무린의 선택은 그것으로 결정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좋아. 그러면 나도 1로인 사천성을 향해 간다.”

오래 끌 필요도 없다.

‘근처에 가 보면 느낌이 오겠지.’

마교의 교주 놈이 1로를 택했다면 자신 역시 1로를 향해 나아가 직접 상대할 생각인 것이다.

‘네가 정녕 역천자인지 아니면 그저 그런 마교의 교주에 불과한 것인지 보면 알게 될 거야.’

두근두근.

알 수 없는 기대감에 용무린의 심장이 조금씩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

비슷한 시간 귀주성과 사천성의 경계인 흥문현 어귀.

“크흐흐. 이제야 움직이려는 것이냐?”

북쪽 하늘을 바라보고 있던 신마가 이를 드러내며 활짝 웃었다. 얼마 전부터 확연하게 느낄 수 있던 용무린의 기운을 감지했기 때문이었다.

“그 짧은 시간 동안 흑색화약으로 인해 입었던 내상과 외상을 모두 치유할 수 있었던 모양이로구나.”

생각하면 할수록 흡족한 적수다.

광마인과 뇌화전으로 인한 교차 함정으로 인해 옴짝달싹 할 수 없는 상황에서 터진 흑색화약 일천관의 위력에서도 겨우 보름 어림의 시간이 필요할 정도의 상처만 입고 끝이라니!

“완벽 그 자체겠지?”

그 전에는 전력을 다해 힘을 내뿜어야만 겨우 감지할 수 있었으나 지금은 다르다. 아무리 멀리 떨어져 있어도 어렴풋이 용무린의 존재감을 느낄 수 있었던 것이다.

“푸흐흐. 하지만 아직은 아니야. 우리가 마주치기에는 조금 이르단 말이지.”

언제고 마주치긴 할 것이다.

얼마나 좋을까?

자신과 비교해 조금도 손색이 없는 상대와 전력을 다해 맞부딪혀 싸워 이기는 기쁨이란!

두근두근.

그 생각만 하면 언제나 이렇듯 심장이 들썩거린다.

“너무 쉽게 끝나서야 쓰나? 두 번 다시 만나기 힘든 강적인데 말이야.”

조금만 더 아껴두고 싶었다.

그리하여 이 조바심이 극에 다다를 즈음 서로를 마주해 즐거움을 폭발시킬 생각이다.

“푸흐흐. 이쪽으로 방향을 잡았구나.”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용무린의 존재감이 느껴졌다.

아니 솔직히 말하면 그냥 느껴진 것이 아니라 이것은 막연한 어떤 감각이었다.

곁에 있던 누군가가 나를 향해 고개를 돌렸는지 아니면 그냥 멍하니 앞만 바라보고 있는 것인지 본능적으로 느껴지는 그런 것 있잖은가?

신마는 용무린이 자신을 향해 움직일 결심을 하는 그 순간 마치 곁에 있던 누군가가 자신을 향해 고개를 돌려 물끄러미 바라보는 느낌을 받은 것이다.

“그때를 위해 지금은 내가 먼저 피해주지.”

마주치는 순간 둘 중 하나는 죽어야 한다.

물론 승리자는 신마인 자신이 될 터, 이렇듯 달뜬 기대감을 충족시켜줄 적수는 두 번 다시 만날 수 없으니 최대한 즐길 작정이다.

“검마종!”

“충!”

뒤에 시립해 있던 검마종이 고개를 숙이며 답했다.

“나는 지금 3로인 안휘성으로 움직일 것이다.”

다소 뜻밖의 선언이었지만 검마종은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듯 바짝 따라 붙었다.

“말씀만 하소서, 신마시여.”

“이곳의 일은 도마종과 권마종에게 일임한다. 너는 나를 따라 안휘성으로 가자.”

“충!”

휘슷.

검마종이 고개를 숙이는 순간 신마가 훌쩍 하늘로 날아올랐다. 검마종 역시 재빨리 신마의 뒤를 쫓아 신법을 전개했다.

***

“응?”

사천성을 향해 전력질주를 하던 용무린의 눈이 살짝 찌푸려졌다.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어떤 기이한 감정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허탈함. 혹은 실망감.

‘왜 갑자기 이런 감정이 드는 것이지?’

더는 사천성을 향해 가기가 싫어졌다.

‘내가 신마라는 존재에 대해 두려움이나 겁을 집어 먹어서 그러는 걸까?’

아무리 생각해도 그런 것은 아니었다.

‘그러면 대체 왜?’

그것을 알 수가 없다.

대체 왜 까닭모를 허탈함과 실망감이 이는 것이며 더는 사천성을 향해 가기가 싫어지는 것일까?

‘혹시…….’

한 가지 생각이 번득 스쳐 지났지만 아직 확신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일단 가보자. 가서 확인해 보자.’

가보면 정확히 알 수 있으리라.

스파아아아-앙!

용무린의 신형이 쏘아진 화살처럼 길게 파공음을 매달고 사천을 향해 이어졌다.

***

흥문현에서 하루 거리의 자공현.

사천의 명문인 당가와 구파일방의 하나인 아미와 청성이 한데 뭉쳐 있었다.

물론 그 세 문파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마도칠문과 마교의 거침없는 진격에 놀란 많은 수의 중소문파들이 세 문파의 그늘 아래 모여들었다. 힘을 모아 마교에 대항하고자 했다.

그 수가 무려 일천여 명.

하지만 그 많은 수의 무인들 중 당가와 아미 청성의 수뇌부와 함께 하는 회의에 참석할 자격이 있는 사람은 불과 열 명에 불과했고 그 중에서도 가장 목소리가 큰 사람은 개방의 의창 분타주 방건이었다.

“놈들이 멈춰선 지 이레가 지났습니다. 이제 슬슬 움직일 때가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방건의 보고에 당가의 대장로 당오현이 묵직한 목소리를 발했다.

“놈들의 움직임이 있는가?”

“별다른 동요는 아직 없습니다만, 놈들의 느릿한 북상을 텃밭 다지기라고 생각할 때 이 정도 시간이면 점령지의 세력을 충분히 다지고도 남으니 이제 움직일 때가 되어간다는 판단입니다.”

“그렇군.”

그동안의 평화가 끝나고 다시 피 튀기는 전투를 벌여야 한다는 말에 입이 바짝 말라 들어갔다.

“놈들의 전력은 어찌 되오, 방 시주?”

아미 장문 보상신니의 질문에 방건의 고개가 갸우뚱하고 모로 기울었다.

“규모만 어림 파악할 수 있을 뿐입니다.”

“그래서 놈들의 규모는?”

당오현의 질문에 이번에는 즉답이 나왔다.

“규모만으로는 엇비슷합니다. 하지만 잘 아시다시피 이런 대규모 전투에서 규모 따위는 아무런 쓸모가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사천의 명문 당가가 있기 때문이지요.”

씨이익.

당가의 대장로 당오현이 섬뜩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방건의 대답이 꽤 마음에 들었던 것이다.

“더군다나 부맹주님께서 이곳 무림맹 1로를 향해 남하하고 계시다고 합니다.”

“오오!”

“용 대협께서 이곳에?”

용무린의 남하 소식에 모두가 기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의 등장은 천군만마를 얻는 것과 같기 때문이었다.

“그렇습니다. 그분의 신법이라면, 아마 모르긴 몰라도 지금부터 이레가 가기 전에 도착하실 것으로 생각되어집니다. 그러니 그동안만 잘 버티고 있으면 됩니다.”

“좋아! 그동안 혹시라도 무슨 일이 생긴다면 우리 당가가 선두에 서지!”

당가의 대장로 당오현이 자신만만하게 나섰다. 아미장문 보상신니를 비롯해 청성의 새로운 장문인에 등극한 서금도장도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당오현이 묵직한 목소리로 주의를 주었다.

“잊지 말도록. 바람의 방향과는 상관이 없어. 당가의 공격이 시작되면 일제히 우리 당가의 뒤쪽 이십여 장 밖으로 물러나야만 해!”

“알겠습니다, 대장로님. 그렇게 주지시켜 놓겠습니다.”

방건이 즉시 일어나 밖으로 나섰다.

아무리 생각해도 개방의 전력은 저렇듯 연락을 비롯한 힘의 운용에 가장 큰 가치가 있어 보였다.

“벽력도가와 화산, 종남의 힘이 대기 중이라 했던가요?”

“그렇소이다, 신니. 놈들이 서창현을 통해 휘돌아 올 것을 염려해 그곳 어림을 지키고 있다고 합니다.”

“무림맹의 전력은 삼협의 수로를 통해 우회할 것을 염려해 그곳을 지키고 있으니 격전이 벌어지는 순간 바로 남하할 수 있을 겁니다.”

사천의 1로도 사실 이렇듯 세 곳으로 힘이 분산되어 있는 실정이었다.

하지만 일개 성의 광대한 넓이를 생각하면 놈들의 움직임을 세 곳으로 압축해 지키는 것도 대단한 정보력이라고 해야 한다.

그 모두가 개방의 힘이었다.

정의개들이 죽도록 뛰어다니며 정보를 모아 왔기에 그나마 세 곳으로 놈들의 진격로를 압축해 이렇듯 대비할 수 있는 것이다.

그때였다.

당오현의 당부를 전하기 위해 밖으로 나갔던 방건이 부리나케 뛰어 들어오며 큰 소리로 외쳤다.

“놈들이 움직인다고 합니다!”

드디어 올 것이 오는 것이다.

칠십 년 만에 다시 벌어지는 신마대전, 그 전초전의 시작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