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혹여, 다시 또 이 땅에 오면…….
많은 피를 흘리고 제자들의 주검을 남긴 채 도망쳐 와야만 했지만 결과적으로 아미와 청성 당가는 마교의 추격을 차단하는 데 성공했다.
모두가 당가의 희생 덕이었다.
대장로 당오현의 죽음에 광분한 당가의 무인들이 자폭이라도 하듯 홀로 남아 모든 독과 암기를 쏟아냈기에 놈들이 섣불리 따라올 수 없었던 것이다.
물론 마교도 축융궁이 괴멸에 가까운 타격을 입어 부담스러웠을 거다.
하지만 권마종과 도마종이 건재한 상태임에도 추격을 멈춘 것은 절대로 무리할 필요가 없으니 천천히 진격하며 점령지를 다지라는 음양자의 전언 때문이었다.
덕분에 신이 난 것은 흑도의 무리들이었다.
이천여 명이 호주평원에서 궤멸을 당했지만 어느 틈엔가 그만한 무리가 다시 모여들었다. 쭈뼛쭈뼛 다가와 신마의 깃발 아래 합류 의사를 밝혔다.
무엇을 위함인지 모를 리 없는 권마종과 도마종이었지만 흔쾌히 허락을 해주었다.
“감사합니다, 권마종이시여-!”
“지금 즉시 시건방진 정파 놈들을 싹 쓸어버리도록 하겠습니다.”
“사천을 신교의 깃발 아래 환호하도록 만들겠습니다.”
되도 않는 소리를 지껄이며 흑도 세력은 즉시 호주평원 주변의 륭창, 의빈, 고현, 흥문 등지의 현으로 쏟아졌다. 중립을 표방하거나 무림맹과 연줄이 닿아 있는 중소 문파들을 숫자로 마구 짓밟았다.
“이 악독한 놈들아-아! 커헉!”
“우리는 무림맹이나 그 어디에도 연줄이 없다. 어째서 우리에게…… 크아악!”
“이 하늘 아래 정의란 없는 것인가?”
덕분에 많은 사람들이 피눈물을 흘렸다.
하늘을 원망하기도 하고 도움의 손길을 내밀어 주지 않는 무림맹이나 정파를 욕하며 죽어갔다.
평생 모아 일군 가업이 불타 없어지는 것을 봐야 했으며 일가식솔이 죽거나 노리개가 되는 것을 지켜봐야 했다.
“저대로 날뛰어도 정녕 괜찮겠습니까?”
“아무리 생각해도 신교의 명성에 해가 될 듯싶습니다.”
혈마궁주와 외원 총관의 우려 섞인 말에 권마종과 도마종은 메마른 미소를 지어 보였다.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무심한 목소리로 답했다.
“신교의 명성을 위해서다.”
“놈들이 패악질을 하면 할수록 후에 질서를 잡을 우리 신교의 교도들을 추앙할 것 아니겠느냐?”
“저 흑도 떨거지들은 잘 하고 있는 것이다. 뭣도 모른 채 패악을 떨어주는 게 좋아.”
“그 후 우리 신교의 교도들이 나서서 참다운 진악(眞惡)을 보여주는 것이지. 그래야 아리만을 통해 영원으로 나아가는 신교의 교리도 받아들이게 되는 거야.”
나름 약삭빠른 이유들이 그렇게 있었다.
“아하!”
“역시, 멋집니다.”
말도 안 되는 논리였지만 그들 마신의 추종자들에게는 너무나 멋진 교리였던지라 혈마궁주와 외원총관은 더없이 밝게 웃었다.
“놈들이 사천 땅의 양민들 눈에서 더 많은 피눈물을 짜냈으면 좋겠군요.”
“맞습니다. 그래야 우리 신교가 진악을 보여줌으로 수월하게 개종을 시킬 수 있을 것 아니겠습니까?”
정파인들이 들었다면 천인공노할 말을 잘도 쏟아내는 마교인들이었다.
“하하하! 그렇게 될 것이다.”
“그래서 귀검문과 대혈문의 전력을 은밀히 흑도 무리에 섞어 보냈다.”
“때가 되면 양민들이 보는 앞에서 놈들을 싹 다 죽여 버릴 생각이다.”
“그래야 신교의 깃발을 반겨 맞이할 것 아니겠느냐?”
“오오오!”
“역시……!”
권마종과 도마종의 말에 혈마궁주와 외원총관이 감탄을 금치 못했다. 악신 아리만에게 너무나 충실하고 어여쁘지만 정말 나쁜 개자식들이었다.
***
아미산과 사흘 거리에 위치한 약산현.
몸을 돌볼 틈도 없이 후퇴만 거듭하던 아미, 청성, 당가의 무인들은 그제야 겨우 아미의 이차 파견 고수들부터 시작해 무림맹의 주력을 만나 안정을 찾게 되었다.
반나절을 더 경과하니 벽력도가와 화산, 종남의 무인들과도 합류할 수 있었다. 정파무림의 1로는 겨우 완전한 진용도 갖추고 몸을 돌보기 시작했다.
“장문인……. 이제야 찾아온 못난 제자를 용서해 주시기 바랍니다.”
사저들과 사매들의 처참한 몰골에 눈물을 글썽이던 백리소옥이 무릎을 꿇었다. 고개를 숙여 죄를 청했다.
“허허허. 그 무슨 소리더냐? 마교 놈들이 한 짓을 왜 네가 뒤집어 써?”
“……!”
백리소옥은 참담한 마음에 계속해서 눈물을 글썽였고 아미 장문 보상신니는 넉넉한 목소리로 백리소옥의 안부를 물었다.
“그래, 정인의 마음은 받았느냐?”
글썽! 툭! 투둑!
보상신니의 목소리가 어찌나 따뜻했던지 백리소옥은 왈칵 솟구친 눈물을 감추지 못했다. 소리 없이 계속해서 눈물을 흘려냈다.
“쯧쯧쯧.”
보상신니가 혀를 찼다.
따뜻한 시선으로 백리소옥을 바라보며 마음을 건넸다.
“스스로 완전한 행복을 찾지 못하고 외부에서, 특히 타인에게서 내 자신의 행복을 찾으려 하면 대개 비슷한 결말을 맞이하곤 한다.”
“제자가 삼가 가르침을 청합니다.”
백리소옥이 고개를 깊이 조아렸다.
보상신니의 목소리가 천천히 이어졌다.
“불가에서 어째서 참선을 하겠느냐? 그 모든 것이 참 나를 찾기 위함 아니겠느냐? 하면, 참 나를 어찌 찾으려 하겠느냐? 참 나야말로 영원토록 변함없는 ‘완전’을 뜻하는 것이기에 찾으려는 것이다.”
“……!”
백리소옥의 눈빛이 묘해졌다.
끊임없이 이어지는 보상신니의 알 듯 말 듯한 말을 듣고 있자니 깊은 슬픔이 천천히 가셔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던 것이다.
“완전이라 함은 곧 부족함이 없다는 뜻이고 부족함이 없다는 뜻은 바로 진정한 행복을 뜻하는 것이니 슬픔이나 비련 따위가 끼어들 틈이 없느니라.”
“아!”
백리소옥의 입이 살짝 벌어졌다.
깊고 깊은 불가의 가르침에 가슴 한 귀퉁이가 활짝 열렸던 거다.
“그것이 바로 외부에서 행복을 구하는 자와 내면에서 완전무결한 행복을 찾아내는 불가와의 인식 차이다. 그러니 어찌 삿된 마교의 가르침이 천하를 물들이려는데 아미의 승이 가만히 있을 수 있겠는가?”
내가 아니면 누가 지옥에 가랴?
아미의 승려가 분연히 떨쳐 일어난 기본 신념이 오롯이 백리소옥의 살짝 열린 가슴으로 밀려들었다.
‘이런 마음가짐으로 목숨을 내어놓은 분들을 두고 나는 외부에서, 그것도 내게는 관심도 없는 사내를 통해 행복을 구하려 하였던 것이로구나.’
그제야 자신이 무엇을 붙잡고 있었는지 알게 되었다.
돌이켜 생각해보니 참 부질없게 느껴졌다.
‘죽어도 후회를 남기지 않을 만큼 노력을 해보겠다니!’
후회라는 게 남지 않을 도리가 있나?
사랑 아니, 욕망이 하나도 채워지지 않았는데?
행복으로 물들어 더는 그 무엇도 원하지 않을 정도가 되지 못했는데 어찌 후회가 남지 않겠나?
‘처음부터 허상을 원했던 거야.’
물론 용무린을 향한 자신의 마음까지 허상인 것은 아니었다. 어째서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를 향한 뜨거운 사랑만큼은 거짓 없는 사실이었다.
‘사랑은 온유하니 강요하지 않는 법, 굳이 내 욕심을 차리기 위해 그의 마음을 힘들게 할 필요가 있을까?’
홀연히 백리소옥의 마음이 보다 근본적인 곳을 향해 움직였다.
사르르.
그제야 심장 한 귀퉁이를 짓누르고 있던 묵직한 무엇인가가 녹아 없어졌다. 용무린을 향한 사랑이 녹아 없어진 것이 아니라 더 깊은 근원을 향해 이동한 것이었다.
‘내가 사랑하는 마음을 보냄으로 나 역시 영원한 사랑과 함께 함이라……. 굳이 요구하고 받아야 할 그 무엇도 없어질 터이니…….’
백리소옥의 고개가 공손히 숙여졌다.
“이제야 머리를 깎을 결심이 섰나이다.”
“오냐, 나 역시 기다렸느니라.”
보상신니가 활짝 웃으며 옆으로 시선을 돌렸다.
스릉.
기다렸다는 듯 영선이 검을 빼 공손히 들어 올렸다.
보상신니가 영선의 검을 받아들고는 거침없이 백리소옥의 머리를 깎아 나가기 시작했다.
사각. 사가각.
삼단과도 같던 백리소옥의 고운 머리카락이 환영과도 같은 속세와의 결별을 알리며 수북이 바닥에 쌓였다. 파르라니 깎은 머리가 드러났다.
“정식 비구계는 본산으로 돌아가 내릴 것이다. 하지만 시국이 시국이니 이곳에서 간략하게나마 속가제자 백리소옥을 아미 본산 제자이자 나 아미장문 보상의 직전제자로 맞아들이노니…….”
보상신니의 말이 계속해서 이어지는 동안 백리소옥의 마음속에서는 용무린과의 작별이 이뤄지고 있었다.
‘안녕, 내 사랑…….’
홀가분했다.
하지만 어째서 뜨거운 눈물이 이토록 멈추지 않고 흘러내리는 것일까?
백리소옥은 애써 활짝 웃었다.
‘너무 슬퍼하지 말아요. 나는 그대에게 더 큰 사랑을 보내기 위해 이 길을 택했을 뿐이에요.’
이제야말로 영원한 사랑을 찾은 느낌이다.
물론 육체적으로 함께할 수 없어 다소 아쉽다.
하지만 그것 역시 허상, 언제고 지워야 할 것임을 이제는 안다.
“불력의 신령함으로 거듭나라는 뜻에서 너를 앞으로 영화(靈化)라 부르리라.”
척. 처처척.
주변에 시립하고 있던 많은 아미의 제자들이 백리소옥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멀리 떨어진 곳의 제자들은 앞에 서 있던 사저나 사매의 어깨에 손을 얹어 간접적으로라도 한 덩어리가 되었다.
새로이 거듭나 아미 본산의 제자 영화가 됨을 그렇게 모두가 축하했다. 이차로 파견되어 온 제자들까지 포함해 다시금 오백여 명으로 불어난 아미의 여승들은 의식까지 모두 하나로 뭉쳐졌다.
“축하해, 사매.”
“축하해요. 이제 사저라 불러야 되겠네요.”
그야말로 파격적인 조치였지만 누구 한 사람 저어하는 기색이 없었다. 모두가 아미일보 금정이라 불렸던 백리소옥의 입산을 환영했다. 그만큼 백리소옥과 아미의 승려들 사이의 친밀도는 남달랐다.
스르륵.
보상신니가 본인이 걸치고 있던 가사를 벗더니 백리소옥 아니 영화의 몸에 둘러씌웠다.
“사부님!”
백리소옥 아니 영화의 눈이 동그래졌다.
보상신니가 인자한 미소와 함께 고개를 흔들었다. 넉넉한 목소리로 답했다.
“조금만 더 노력하여라. 머지않아 내 목에 걸린 백팔염주도 네게 건넬 것인즉…….”
세상에, 차기 아미장문의 자리를 약속하다니!
하지만 이미 아미일보 금정이라는 수식어에 부담감이 없던 아미의 여승들은 되레 든든한 듯 백리소옥 아니 영화의 지위를 미소로 인정했다. 백리소옥이 아미의 전설인 난피풍검법을 오롯이 되살릴 수 있으리라 믿었다.
그때였다.
저만큼 앞에서 헐레벌떡 누군가가 다가왔다.
“놈들입니다. 놈들이 오고 있습니다.”
방건이었다.
주변을 살피기 위해 나가 있던 그가 마교의 진격에 놀라 헐레벌떡 뛰어온 것이다.
***
여러 현들의 중소 무관들을 숫자로 짓밟으며 독기와 광기 어린 살의를 끌어 올린 흑도 무리가 이번에도 마교의 선두에 섰다.
“크하하하. 가라, 마교의 전사들이여!”
“저 가증스러운 정파 나부랭이들에게 죽음이 무엇인지 가르쳐 주도록 하여라!”
“우와아아악!”
“마교 천세천세 천천세!”
마교의 전사들이라고 하는 한 마디 말에 이제는 거의 삼천여 명으로 불어난 흑도의 떨거지들이 용광로처럼 훅 끓어올랐다.
“정파 나부랭이들을 죽여라!”
“쳐라! 승리는 우리 마교의 전사들의 것이다.”
마치 자신들이 마교의 손과 발이라도 되는 듯 거침없이 달려들었다.
‘살아남기만 하면 나도 마교와 함께 온갖 영화를 누리게 된다.’
‘정파 무인 다섯만 베면 된다고 했지? 좋아, 기필코 다섯 놈을 베고 마교의 정식 무사가 되어 두둑한 월봉과 권위를 가져주겠어.’
결국 따지고 보면 흑도의 무리 역시 행복을 원하고 있는 것이었다. 물론 그 행복이란 것을 추구하고 얻어내는 방법이 정파나 아미와 같은 불가와 다를 뿐이었다.
***
하나의 단일된 연합 수뇌부를 구축한 것이 아니었음에도 정파무림의 대응은 빠르고 적절했다.
“벽력도가가 선두에 서겠소!”
무림맹의 주력을 제외하면 가장 강력한 힘을 지니고 있는 곳이라 어느 누구도 벽력도가가 선두에 서는 것을 반대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우리 의천단이 왼쪽 날개를 맡도록 하지요.”
의천단주 당유현이 이를 부드득 갈며 나섰다.
“그 곁에 대정단도 함께할 것이오.”
대정단이 의천단과 함께 왼쪽 날개를 맡는다고 나서자 검룡당주는 이끌고 온 사백여 검수들과 함께 오른쪽을 향해 신법을 전개했다.
“우리 검룡단이 오른쪽 날개를 맡지요.”
“갑니다-아!”
타다닷. 휘스스슷.
거친 파도가 되어 달려 나가는 검수들의 모습을 보며 아미 장문 보상신니가 씽긋 웃었다.
“우리도 보고 있을 수만은 없군요. 아미가 오른쪽 날개에 힘을 보태겠습니다.”
“여기 청성도 있습니다.”
“종남도 잊으시면 곤란하지요!”
중군과 좌, 우익의 날개까지 결정이 되자 나머지는 자연스럽게 후군이 되었다.
“와하하하. 당가에서 원거리 지원을 하겠소이다.”
가장 적절한 자리이며 배치이다.
중앙의 후위를 차지한 당가의 암기라면 상황을 보아 밀리는 곳을 원거리에서 지원하기에 최적화되어 있는 집단이었으니까.
“그러면 우리 화산이 가장 바빠지겠구려. 허허허. 화산에서 모자라는 곳을 그때그때 채우도록 하겠소이다.”
새로운 장문인에 오른 옥진 도장이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앞으로 나섰다.
“빈곳을 채우는 화산이라!”
“이것 참, 너무 과분한 호위가 아니겠소이까?”
“든든하외다! 하하하!”
옥진의 말에 모두가 기쁜 표정을 지었다.
검을 뽑아들지도 않았는데 청아한 검향이 옥진의 주변을 흐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
두근두근.
용무린의 심장은 아예 터지려고 했다.
‘불안해. 불안해. 불안해.’
대체 무엇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어째서 이렇듯 심장이 격렬한 반응을 보이는 걸까?
‘천기도 보여주지 않으면서 왜 이 지랄이냐고!’
마음만 같아서는 며칠 전에 허탈하고 김새는 느낌이 왔을 때 벌써 방향을 꺾었다.
‘이제는 안 돼. 어째서 이런 반응을 보이는 것인지 반드시 확인을 해야만 할 것 같단 말이야.’
용무린의 시선이 저 멀리 남쪽 산마루를 훑었다.
뉘엿뉘엿 넘어가는 태양 때문에 붉게 물들기 시작하는 약산 아래 그 이유가 있을 터였다.
“다 와 간다. 조금만 더 기다려-엇!”
스파아아-앙!
***
패애애액. 쉬가가가가. 파카-앙.
서걱.
“커헉!”
쉬리리릭. 따다당. 스각.
“크아아악!”
아비규환의 지옥도가 펼쳐진 약산 중턱.
모두 합하면 무려 육천 명에 가까운 숫자의 무인들이 서로를 죽이기 위해 악다구니를 썼다. 살기로 번들거리는 눈을 희번덕였다.
“죽어엇!”
스각. 푸우욱.
“커흐…….”
정파 무인 한 사람이 마교도의 검에 풀썩 쓰러졌고,
“이노-옴!”
타닷. 휘릭. 서걱.
동료의 주검을 밟고 뛰어 올라 기어이 적의 목을 끊어내 복수를 하는 정파 무인의 모습…….
이와 같은 광경이 숱하게 벌어졌다.
물론 복수를 하는 사람이 마교도일 때도 많았으니 겉모습만으로는 정파의 무인과 마교도나 흑도의 악적을 구분할 방법은 전무한 상태였다.
“아미타불! 아미여, 우리 모두 지옥으로 함께 가자꾸나.”
“아미타불! 악의 제도를 위해 이 한 목숨 지옥에 던져 버리리-!”
스각. 파카아앙. 차차창.
이율배반적으로 느껴지겠지만 불호성을 외치며 힘없는 양민과 무림의 안녕을 위해 스스로를 살육의 현장에 내몬 아미의 정신이 오롯이 서고 있었다.
따다다다당.
방어에 더욱 큰 강점이 있는 아미의 바라승들이 방패만큼이나 큰 바라로 방어를 하면 그 사이 뒤에 숨어 있던 검수들이 튀어나가 공격하는 바라멸절검진이 무서운 위력을 발휘했다.
스각. 서걱.
“커헉!”
“크아아악!”
백리소옥의 합류로 인해 단단히 융합된 아미의 공격에 흑도인들은 물론이고 마도 칠문의 하나인 대혈문의 고수들도 숱하게 쓰러져 갔다.
“이 냄새나는 계집들아-아!”
“다 찢어 죽일 테다-아!”
쉬쉬쉬쉬쉭. 쉬가가각.
아무리 무섭게 공격을 퍼부어도 당최 뚫을 수가 없었다.
따라라랑. 차차창. 튀튀튕.
바라승들의 철벽과도 같은 방어!
“간다-앗!”
“차아아!”
벼락처럼 그 사이에서 솟구쳐 오르는 검수들의 합벽검!
쉬가각. 파카캉. 서걱.
“크아악!”
“커헉!”
놀랍게도 마교 오궁의 하나인 혈마궁의 마인들조차 아미의 바라멸절검진을 뚫지 못했다. 얕보고 짓쳐들었다가 속절없이 쓰러지기 일쑤였다.
그때였다.
스스슷.
“쯧쯧쯧. 확실히 냄새나는 것들의 내공은 우리와 상극이란 말이야.”
“맞아. 숫자는 확실히 우리가 많아도 내공에서 어쩐지 이상하게 밀리는 듯하단 말이지.”
어쩔 수 없다는 듯 투덜거리며 권마종과 도마종이 아미파의 앞을 막아섰다.
그간의 성과에 고무된 것일까?
“이야아하-앗!”
상대의 무위를 읽을 줄 모르는 바라승 하나가 대뜸 권마종을 향해 신법을 펼쳤다. 테두리가 날카롭게 갈린 바라를 비검이라도 되는 듯 힘껏 던졌다.
쉬이이이잉.
매섭게 회전하며 날아든 바라가 회전력 때문인지 나선형을 그리며 권마종의 목을 노리고 솟구쳤다.
피식.
입술만 슬쩍 움직여 웃어 보인 권마종의 손가락 하나가 가볍게 옆으로 튕겨졌다.
따아아앙. 파사삭.
놀랍게도 손가락에 부딪힌 강철 바라가 박살이 났다.
“허억!”
바라에 계속해서 내공을 공급하고 있던 아미의 바라승이 비명을 터뜨렸다. 휘청거렸다.
“영조야!”
“조심해 사매-에!”
휘릭. 휘슷.
영은과 영선을 비롯한 바라멸절검진 1개 조가 영조 앞을 막아섰다. 겁도 없이 권마종을 향해 검을 들어 올렸다. 아미일절인 금정검법의 기수식을 취했다.
꿈틀.
권마종의 볼살이 거칠게 요동쳤다. 같잖다는 듯 씹어 뱉는 목소리를 내었다.
“냄새나는 계집들 따위 단숨에 부숴주마. 하아앗!”
권마종의 주먹이 힘차게 뻗어졌다.
훅!
내질러진 기세에 비해 촛불이라도 꺼뜨릴 수 있을까 싶은 나지막한 소리가 들렸다.
‘뭐지?’
‘웬 헛짓이야?’
영은과 영선이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뜰 때였다.
“영은아! 영선아! 위험하다-아!”
조금 떨어진 곳에서 막 혈마궁 마인의 가슴에 일장을 먹이던 보상신니가 권마종의 일 권을 확인하곤 소스라치게 놀라 고함을 질렀다.
스파아아-앙.
보상신니가 전력을 다해 신법을 펼쳐 가세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계속해서 눈만 동그랗게 뜨고 있던 영은과 영선 앞에 이변이 벌어졌다. 눈앞의 허공이 어느 한 순간 훅 꺼져 들어가기 시작한 것이다.
“어억!”
“조, 조심!”
그제야 영은과 영선의 얼굴이 확 변했다.
피하고 싶었지만 이미 뿜어진 미증유의 압력에 사로잡혀 도무지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내공조차 쉬이 이끌어내기가 힘들 정도였다.
“사저-어!”
“이 악적! 여기도 있다아-아!”
영은과 영선 주변에서 함께 싸우던 일대제자들 십여 명이 한꺼번에 방어에 가담했다. 강철바라를 여러 겹으로 덧대어 앞을 막았다.
아득.
‘기필코 막아낸다.’
야무지게 이를 악문 백리소옥 아니 이제는 비구승이 된 영화도 그 중에 하나였다.
“이야아-하!”
백리소옥이 자신이 아는 한 가장 강력한 초식인 금정만상의 초식을 펼치려 할 때였다.
투둑. 투화악. 콰드드드득.
권마종이 뿜어낸 무식한 붕산와류권의 압력 앞에 놓인 모든 것이 바스라지기 시작했다.
와그작. 퍼퍼퍼퍼펑. 푸스슷.
하나밖에 남지 않은 바라승 영조의 강철 바라가 밀전병이라도 되는 듯 힘없이 부서져 흩날렸고 뒤이어 여러 겹으로 덧대어 놓은 강철바라들이 몽땅 부스러졌다.
쿠콰콰-쾅.
그 뒤에 영은과 영선이 펼쳐내었던 초식이 통째 허무로 돌아갔다.
따다다당. 콰드득. 와드득.
힘껏 내밀었던 검이 수수깡처럼 부서졌고 옷가지는 갈가리 찢겼으며 내부 장기를 떠받치던 뼈마디까지 몽땅 부러져 버렸다.
“크아악!”
“커헉!”
영은과 영선을 비롯한 일대제자 십여 명의 입에서 거의 동시에 비명이 터졌다. 더불어 검게 죽은 핏덩이까지 울컥 울컥 쏟아져 나올 때였다.
살랑!
갑자기 어디선가 한 줄기 바람이 불어왔다.
‘이, 이건 뭐지?’
죽음을 각오했던 백리소옥의 눈이 동그래졌다.
공간을 무너뜨리는 무식한 권력 앞에 날아든 한 줄기 미풍이라니 어이가 없었던 것이다.
“……!”
하지만 백리소옥의 눈은 이내 부릅떠졌다.
미풍이 놀라운 이적을 만들어냈던 것이다.
살랑. 살랑. 살라-앙.
수줍은 듯 백리소옥의 머리칼을 한 번 훔치고 지나간 바람은 봄을 알리는 하늬바람처럼 그 결이 훌쩍 불어나더니 이내 한여름의 소나기를 부르는 광풍으로 바뀌었다.
휘이이이. 휘이이이. 쐐애애애액.
고막이 터질 듯 굉음을 쏟으며 붕산와류권 앞을 단단히 틀어막았다. 맹렬한 속도로 휘돌아 권마종이 뿜어낸 권력을 갉았다.
꿈틀!
권마종의 볼살이 무섭게 뒤틀렸다.
“난피풍검?!”
바로 맞추었다. 아미일절인 난피풍검법이었다. 아미 장문인 보상신니가 전력을 다해 펼치는 것이었다.
권마종이 코웃음을 쳤다.
“흥! 아직 어설퍼! 난피풍검법의 참 모습은 내가 예전에 한 번 겪어 봤단 말이지.”
수십 년 전, 자신이 아직 새파란 애송이였던 시절 힘에 취해 천지분간 하지 못하고 천하를 상대로 피바람을 뿌리며 돌아다니던 때였다.
당시 아미 장문이던 멸절신니의 손에서 펼쳐진 난피풍검법에 걸려 죽다가 겨우 살아났다. 창피한 일이지만 죽음을 각오한 채 강물로 뛰어들지 않았다면 옴나위없이 그 자리에서 죽었으리라.
‘거의 용오름이나 다름이 없었던 그 검법에 비하면 이 정도야 산들바람이나 다름없지. 암.’
“꺼져라아-앗!”
지금껏 가만히 있던 왼 주먹에 힘이 불끈 들어갔다.
작살이라도 되듯 전면을 콱 찍었다.
후우욱.
다시금 꺼져 들어가는 공간.
콰아아. 콰아아아아.
꽈배기처럼 슬쩍 비틀리며 앞에 놓인 것은 무엇이든 부숴내는 붕산와류권이 두 개로 늘어났다.
아득.
“이야아아아-하!”
제자들을 살리기 위해 보상신니가 이를 악물었다. 마지막 모든 잠력까지 끌어 올려 난피풍검법의 초식에 보탰다.
하지만 보상신니는 알 수 있었다.
자신의 부족한 화후로는 권마종이 뿜어낸 붕산와류권의 중첩을 이겨낼 수 없다는 사실을.
쿠와아아앙. 콰콰콰콰-쾅.
귀청이 터질 듯 요란한 소리와 함께 몇몇 인영들이 힘없이 뒤로 나뒹굴었다. 핼쑥한 얼굴에 갈가리 찢겨나간 승복과 터진 복부…….
이미 태반이 절명한 뒤였다.
덜덜덜.
떨리는 손을 주체할 수 없는 보상신니를 향해 권마종이 성큼 발을 내디뎠다.
후욱.
한 걸음에 간격을 좁힌 후 보상신니의 가슴 어림을 가볍게 찍었다.
터어어엉.
북 터지는 듯한 굉음과 함께 보상신니의 등이 커다랗게 터져나갔다. 권마종의 주먹이 닿은 곳은 멀쩡했으니 대성지경의 붕산와류권이리라.
“커허억!”
외마디 비명과 함께 뒤로 훌훌 날려가는 보상신니!
“사부니-임!”
백리소옥이 처절한 목소리로 불러 보았지만 오장육부가 이미 바스러져 등 밖으로 튀어 나간 보상신니는 대답을 할 수 없었다.
‘아쉽구나. 난피풍검을, 아미일절 난피풍검을 네게 오롯이 전해야만 하는데…….’
그저 안타까운 눈빛만 백리소옥을 향해 보내다가 보상신니의 의식이 끊겼다.
십여 장 떨어진 곳에 있던 화산장문 옥진도장이 안타까운 목소리로 부르짖었다.
“보상신니-이!”
“이놈! 어딜 한눈을 파는 것이냐?”
파카-앙. 따라라랑. 카카캉.
“흐읍!”
쿵쿵쿵.
화산파 유일의 검향지경을 이룬 옥진도장이었지만 보상신니를 구할 수가 없었다. 도마종이 어도술을 펼쳐 틀어막았기 때문이었다.
의천단주와 대정단주 그리고 무림맹 검룡당의 당주를 비롯해 그 누구도 보상신니와 속수무책으로 무너져가는 아미의 바라멸절검진을 구하지 못했다.
우지끈!
무림맹의 왼쪽 날개가 완전히 부러지는 순간이었다.
***
“……!”
백리소옥의 눈이 부릅떠졌다.
보현에 이어 다시금 모신 사부님이 눈앞에서 죽어 나가는 이 현실을 믿을 수가 없었다.
무엇이든 하고 싶었다.
자신의 모든 것을 내던져서라도 사부님을 구하고 사저와 사매들을 구해주길 원했다.
바로 그때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쩌어어억!
보상신니가 내린 승복을 걸침으로 아미파의 집단의식과 하나가 되기 시작한 백리소옥의 의식 가장 깊은 곳에서 무엇인가가 깨어졌다.
그동안 억눌리고 감춰져 있던 기억이 화산 폭발하듯 터져 나와 환영처럼 눈에 보였다.
휘이잉. 휘이이이잉. 콰아아아-!
산들바람으로 시작해 용오름이 되어가는 바람의 결과 그 움직임을 백리소옥은 오롯이 알아보았다. 도대체 언제 보았던 장면인지는 몰라도 처음부터 자신 안에 내재되어 있었던 것이다.
‘이, 이것은?’
보는 순간 바로 알 수 있었다.
그것이 바로 오랜 세월 잃어버리고 있던 아미파의 제일 검법인 난피풍검법의 완전한 모습이라는 사실을.
휘슷. 파아아아-!
놀랍게도 백리소옥의 검이 그 결을 똑같이 재현해내기 시작했다.
쉬리리리-릭!
어떻게 난피풍검법의 완전한 모습을 자신이 기억하고 있는지 의아해하지도 의문을 품지도 않았다.
지금 이 순간, 해야 할 일은 오직 그것뿐이라는 듯 모든 것을 다 던져 집중을 했다.
휘이이. 쏴아아아. 휘우우우웅!
구결이나 내공의 운용방식도 모르고 있었지만 자연스럽게 휘돌리는 검 끝을 따라 바람이 매서운 결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콰아아아아-!
용오름 수준은 못되어도 이제는 작은 돌개바람은 족히 되어 보이는 난피풍검법의 마지막 초식이 권마종을 향해 쏟아졌다.
“응? 으응? 어, 어떻게?”
권마종의 찢어질 듯 부릅떠졌다.
믿을 수가 없었던 거다.
보상신니가 펼친 난피풍검법보다 훨씬 더 강력하고 완벽에 가까운 초식을 펼치는 제자라니!
파사사사삭!
난피풍검법에 완전히 사로잡히기 전임에도 옷가지가 갈가리 찢겨 사라졌다. 잘 다져진 고기마냥 팔이 수도 없이 베어지더니 뼈가 드러났다.
‘싹을 자른다. 죽인다. 반드시 죽여 냄새나는 아미의 대를 끊는다.’
결심을 굳힌 권마종의 단전이 용트림을 했다.
콰르르르.
붕산마력이라고 일컫는 거친 힘이 권마종의 두 주먹에 고여 들었다. 눈에 보일 듯 회오리를 일으키며 한 점으로 압축되었다.
“꺼져라-앗!”
후우우욱!
붕산와류권 두 번을 중첩시킨 것보다 더 큰 공간이 한꺼번에 꺼졌다. 회오리를 따라 비틀리더니 모든 것을 허무로 돌리며 백리소옥이 펼쳐낸 난피풍검법의 중단을 그대로 때렸다.
쿠와아아아앙. 휘스스스슷.
귀청이 터질 듯한 폭음에 이어 미친 것만 같은 광풍이 일었다. 난피풍검법의 마지막 초식이 일으킨 바람의 결이 깨어지며 주변을 마구 할퀸 것이다.
“아아아악!”
처절한 비명을 길게 흘리며 백리소옥의 몸이 뒤로 훌훌 날렸다.
***
덜컥!
지금껏 단 한 번도 쉬지 않고 펼쳐지던 용무린의 신법이 멈춰졌다. 시산혈해가 펼쳐진 약산의 중턱에 오른 순간 유달리 시선을 끄는 장면이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냉혈곡에서 분명히 얼굴을 보았던 권마종.
그 맞은편에서 피를 쏟으며 뒤로 훌훌 날아 힘없이 떨어져 내리는 여승의 얼굴…….
‘서, 설마?’
이제 깎은 지 얼마 되지 않아 유달리 파르라니 보이는 두상, 하지만 그 얼굴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자신에게 사랑을 갈구하던 여인의 것이었다.
‘백리소옥. 어째서 그녀가 이곳에?’
생각은 오래가지 못했다.
투화아아악!
보상신니가 그러했던 것처럼 백리소옥의 등 역시 커다랗게 뚫려 조각나고 짓이겨진 오장육부가 쏟아져 나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 안 돼…….”
시간이 천천히 아주 천천히 흐르는 것 같았다.
노을빛을 받아 더없이 붉게 보이는 핏줄기와 핼쑥한 그녀의 얼굴이, 아프도록 처연히 흘러나온 눈물 한 방울까지 모두 용무린의 눈에 각인되었다.
“안 돼-에!”
애타게 한 번 더 부르짖었지만,
터얼썩. 데구르르르.
백리소옥의 육신은 볼썽사납게 바닥을 나뒹굴었다.
얄궂다고 해야 할까?
이번에도 그녀와 눈이 마주쳤다.
전생과 똑같다.
칠십 년 전 신마대전을 벌이고 있었을 때, 신마 진무량과 싸우고 있을 당시 나만을 바라보며 숨을 거두었던 그녀의 환영과 완벽하게 같았다.
그녀의 입가를 타고 흐르는 힘없는 미소.
아련하게 떨리는 눈동자까지…….
‘슬퍼하지 말아요. 나, 후회하지 않아요.’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어 백리소옥의 미소가 그렇게 말하고 있는 듯 보였다.
분명히 내가 사랑한 여인은 아니었다.
애써 외면했던 여인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렇게 허무하게 보낼 정도의 여인은 절대로 아닌 거다.
터질 것만 같은 이 분노를 참을 수가 없었다.
“으아아아아-아!”
울부짖음과 같은 고함소리와 함께,
스파아아아아-앙.
용무린의 신형이 대지를 박차고 날아올랐다.
***
흐려지는 의식 사이 백리소옥은 분명히 들었다.
-안 돼-에!
‘용…… 대협?’
이미 머리를 깎았지만 채 지워내지 못한 본능이 그녀로 하여금 시선을 돌리게 만들었다.
공간이라는 제약을 훌쩍 뛰어넘어 놀랍게도 그의 눈이 보였다. 예상치 못한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해 절규하는 용무린의 얼굴이 똑똑히 보였다.
욱신.
가슴이 다시금 아려왔다.
머리를 깎고 승복을 걸쳤어도 아직까지 남아 있는 깊은 사랑 때문이었다.
‘슬퍼하지 말아요. 나, 후회하지 않아요.’
애써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가 모든 것을 털어내고 제갈영령과 더불어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도록 떠나 줄 생각이었다.
‘이제는…… 이제야 비로소 그대를 내 마음에서 놓도록 하겠어요.’
행복하세요. 언제까지나.
‘혹여, 내가 이 땅에 다시 오게 된다면…….’
백리소옥은 빠르게 흐려지는 의식 사이 아득한 미래를 기약하기 시작했다.
***
흠칫!
막 백리소옥의 심장 어림에 붕산와류권을 때려 넣었던 권마종의 몸이 그대로 굳었다.
‘뭐지?’
자신도 모르는 사이 미소를 짓는 백리소옥의 시선을 쫓아 고개를 돌렸을 때였다.
버언쩌저적!
권마종의 눈에 작열하는 섬광이 보였다.
티딕.
믿을 수 없지만, 하늘과 땅이 통째 어긋나는 모습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마, 맙소사!”
어긋난 하늘과 땅이 유리처럼 허무하게 바스러졌다.
그 선상에 놓인 모든 것이 거짓말처럼 갈라지고 어긋나 자신을 향해 밀려오는 모습이라니!
후우욱. 후우욱. 콰아아아-!
어긋난 곳을 기점으로 모든 것이 허물어졌다.
훅!
붕산와류권을 펼쳐내던 자랑스러운 오른팔이 물감을 물로 지워낸 듯 깨끗이 어디론가 사라졌다.
후우욱!
왼팔도 동시에 허무가 집어 삼켰다.
콰아아아-!
뒤이어 하체가 송두리째 지워졌으며 상반신이 뭉개졌고 목이 둥실 떠올랐다.
‘머, 멋지구나.’
퍼서석.
그 생각을 마지막으로 둥실 떠오른 머리마저 한 점 핏물로 흩어져 버렸다. 권마종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던 마교의 오마종 중 일인은 이 세상 그 어디에도 남아 있지 않게 된 것이다.
공간 자체가 어긋난 여파는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쿠그그그그긍.
권마종의 뒤에 서 있던 약산의 거대한 절벽이 몸살을 앓더니 그대로 허물어져 내렸다.
“으아악!”
“커헉!”
권마종의 등 뒤에서 짓쳐들던 혈마궁 소속 마인 백여 명이 한꺼번에 핏물이 되어 안개처럼 쫙 퍼졌다. 그 뒤편에 있던 마인 백여 명은 무너져 내리던 바위 더미에 깔려 뭉그러졌다.
“어헉! 궈, 권마조-옹!”
“어디에다 눈을 돌리는 것이냐-아!”
소스라치게 놀란 도마종이 눈을 돌리기가 무섭게 화산장문 옥진도장이 자하검결에 검향지기를 실어 보냈다.
화아악! 버번쩍.
노을보다 더 짙게 뿜어져 나오는 자하의 빛과 코를 찌르는 진한 검향지기.
“우웃!”
카카카카-앙. 스가각.
아차, 싶어 재빨리 어도술을 펼쳐 그 앞을 막아 보았지만 자하검결에 실린 검향지기는 도마종이 펼쳐낸 어도술을 멀찌감치 밀어냈다. 그리고 마침내 도마종의 심장을 깊숙이 베었다.
“커흐-!”
나직한 신음소리와 함께 무너져 내리는 도마종.
잠시 자랑스러운 얼굴로 그 모습을 지켜보던 옥진도장은 이내 다른 먹잇감을 찾아 움직였다.
휘슷.
어느 사이엔가 공간을 단축해 내려 선 용무린이 백리소옥을 안아들었다.
“소옥! 정신 차려라 소옥!”
“……!”
백리소옥은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그저 잔잔한 미소만 입가에 머금은 채 용무린을 향해 애잔한 시선을 보낼 뿐이었다.
“제발! 제바-알!”
용무린은 미친 듯이 불사활생신단을 꺼내 백리소옥의 입에 밀어 넣었다. 전력을 다해 불사신공을 일으켜 단전에 직접 주입했다.
하지만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다.
이미 너무 늦었다는 것을…….
휘우우우-웅.
폭발하듯 쏟아져 나온 불사신기가 백리소옥의 내부를 휘감았지만 완전히 부서져 등 뒤로 뿜어 사라진 오장육부를 재생할 수는 없었다.
휘스스스스.
불사신기와 불사활생신단의 약력은 허무하게 등 뒤로 빠져나가 바람이 되어 흩어졌다.
하지만 불사신공의 놀라운 힘과 불사활생신단의 약력은 백리소옥으로 하여금 용무린과 마지막 인사를 나눌 시간을 주었다.
백리소옥의 입이 더듬거리며 열렸다.
“쿨럭. 이, 이 땅에 혹여 내가 다시…….”
“아니야! 포기하지 마! 살 수 있어. 살 수 있다고!”
자신을 속여 가면서까지 용무린이 애써 외쳐보았지만 이미 죽음을 직감한 백리소옥은 가만히 고개를 흔들었다. 힘겹게 덩어리 피를 게워낸 후 다시 말을 이었다.
“쿠울럭. 다, 다시 오게 된다면…….”
“소옥!”
“그, 그때는…….”
대체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것일까?
용무린은 끝까지 듣지 않았어도 다 알 수 있다는 듯 크게 부르짖었다.
“사랑해줄게 너만을……. 혹여, 너와 내가 다시 이 땅에 오게 된다면 그때는 너만을 죽도록 사랑해줄게. 그러니 제바-알!”
제갈영령이 들었다면 서운해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용무린은 그렇게 약속할 수밖에 없었다.
배시시.
만족한 듯 미소 지어 보이던 백리소옥의 고개가 가만히 흔들렸다. 점점 더 낮아지는 목소리로 겨우 겨우 말을 이어나갔다.
“나, 나는 아미일보……. 부, 부질없는 사랑 따위 이, 이제는……. 쿨럭.”
제갈영령을 떠올렸기 때문일까?
아니면 인간사 부질없는 사랑 놀음 대신에 이제는 불가에 진심으로 귀의해 윤회의 고리를 끊어 해탈을 하겠다는 신념을 세운 것일까?
“부, 부디……. 저들을 용서……. 쿨럭. 사, 살귀가 되시지는 마, 말아주시길……. 후, 후회 따위는 없어…….”
“소오-옥!”
용무린이 목이 터져라 부르짖었고 백리소옥의 입가에 걸린 미소가 더욱 짙어졌을 때였다.
투욱.
백리소옥의 고개가 힘없이 옆으로 꺾였다.
용무린의 품속에 깊이 안겨 천천히 식어갔다. 그대로 조금씩 몸이 굳었다.
툭!
용무린의 머릿속 깊은 곳에서 무엇인가가 끊어졌다.
사랑했던 여인은 분명히 아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또 이렇게 가다니!
전생에도 나만을 바라보다 죽었으면서 또 이렇게 사랑 한 번 받아보지도 못한 채 죽어야만 하다니!
-나, 노력해 볼래요. 이대로 죽는다 해도 후회 따위 남지 않을 만큼…….
과거 애써 슬픔을 억누르며 말하던 백리소옥의 목소리가 떠오른 순간,
“으아아아-아!”
용무린의 분노가 폭발하고 말았다.
휘슷. 파아아!
풍뢰와 소검비연이 동시에 날아올랐다.
복수를 원하는 용무린의 살의를 오롯이 받아 전장을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퍼억! 퍼퍼퍼퍼퍼-억!
정파의 내공을 지닌 무인들은 철저히 배제했다. 마(魔)의 흔적을 쫓아 그대로 꿰뚫었다.
“크아악!”
“커헉!”
요란한 비명소리가 연이었다.
그 누구도 복수심 가득한 용무린의 의지를 거스르지 못했다. 심장과 목을 내어 줘야만 했다.
“이야아-하!”
화르르륵. 콰아아-아!
축융궁주 적군양이 젖 먹던 힘까지 다해 축융마공의 마지막 초식을 펼쳤지만,
씨이웅. 퍼억.
풍뢰가 두부라도 되는 양 손쉽게 파고들어 심장에 커다란 구멍을 뚫어 버렸고…….
“후, 후퇴! 후퇴해라-아! 차아앗!”
쐐애애액. 버번쩍.
혈마궁주가 잠력까지 불러 일으켜 혈마오검을 펼쳐 보았지만,
파카-앙! 스각!
소검비연은 무슨 갈대라도 베어내는 것처럼 혈마오검의 마지막 초식인 사멸령의 힘을 가르고 들어가 혈마궁주를 아예 두 조각으로 만들었다.
쌔애액. 서걱.
“크아악!”
버언쩍. 퍼억.
“커헉!”
그 뒤로도 숱한 마인들이 풍뢰와 소검비연에 심장과 목을 잃고 쓰러져 갔다.
“히익. 도, 도망쳐!”
“후퇴! 후퇴-에!”
타다닷. 휘슷. 휘리리릭.
권마종과 도마종을 거의 동시에 잃고 축융궁주와 혈마궁주마저 잃어버린 마교 1로의 마인들이 한꺼번에 뒤를 향해 신법을 펼치기 시작했다.
아득!
“마교의 무리를 몰아내라!”
“쳐라!”
“와아아아!”
이를 갈며 외친 화산 장문 옥진과 의천단주 당유현의 일갈에 무림맹과 정파 연합의 무인들이 도망치는 마교의 뒤를 쫓아 신법을 펼쳤다.
***
만금상단 회의실.
“산서성 서부고원 쪽은 지금 삼 년째 가뭄이라고 해요. 그러니 이번에 장강이남에서 풍년으로 거둬들인 곡식들을 이문을 남기지 말고…….”
제갈영령이 정신없이 회의를 진행할 때였다.
살랑!
한 줄기 바람과 함께 누군가의 목소리가 제갈영령의 귓속으로 파고들었다.
-그분을 부탁해요, 언니.
흠칫!
산서성의 굶주린 양민들을 위해 연일 대책을 마련하던 제갈영령의 몸이 가늘게 떨렸다.
“소옥 언니!”
제갈영령이 화들짝 놀라 몸을 돌렸지만 등 뒤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욱신.
그 대신 심장이 아렸다. 까닭모를 슬픔이 차올랐다.
***
백리검가의 가주 백리장천은 무림맹 2로에 속해 진무단과 천도당의 고수들과 함께 호북성 선도현을 향해 남하하고 있었다.
‘억지로라도 1로에 속할 것을 그랬나?’
벌써 일 년 반 가까운 시간을 가출을 하듯 가문을 떠난 백리소옥의 얼굴을 보지 못했다.
전에는 가문을 버리고 아미의 제자로 들어간 여식이 너무 괘씸해 일부러 눈감고 귀 닫고 지냈지만 이렇게 마교와의 전쟁이 벌어지니 자꾸만 생각났다.
‘아미일보 금정이라고 불린다고? 허, 참…….’
속가제자였지만 백리소옥은 아미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있다고 한다.
‘열 손가락 깨물어 아프지 않은 손가락이 없는 법인데.’
슬그머니 불안해졌다.
백리소옥이 언제라도 머리를 깎고 여승이 될 수도 있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지금은 전시상황 아닌가?
백리소옥이 비록 속가제자라 하나 아미의 이름을 버리지 않는 한 그 뛰어남으로 인해 언제든 전장의 부름을 받을 수도 있는 일이었다.
‘그게 너무 불안하단 말이지.’
한 번이라도 얼굴을 보고 마음을 돌이킬 시간을 갖지 못한 게 너무 마음에 걸렸다.
‘내가 잘못했어.’
승승장구하며 황룡패주에 무림왕까지 봉해진 용무린의 이름을 들을 때마다 후회가 되었다.
‘그따위 선대의 약조가 무엇이라고 내가 하나밖에 없는 딸아이의 마음을 그렇게 아프게 하고 모른 체 외면했던 것일까?’
지금 생각하면 무엇에라도 홀린 것만 같다.
아직도 당당하게 자신의 마음을 밝히던 백리소옥의 목소리가 귓가에 선하다.
-그는 야비한 승냥이의 머리에 뱀의 심장을 지녔어요.
-예. 저는 그분을 사모해요. 저를 구해주는 것으로도 모자라 일깨워줬기 때문이에요.
‘그냥 허락해 줄 것을…….’
제갈문군이 그랬던 것처럼 그때 자신이 나서서 백리소옥과 용무린을 엮어 줬다면 어땠을까 하는 후회가 계속해서 백리장천의 마음을 괴롭혔다.
‘만금상단에 있다고 했지?’
그나마 다행이었다.
자신과 달라 당찬 구석이 있는 여식은 아비가 나서주지 않았음에도 용무린에게 자신의 마음을 당당하게 밝히고 제갈영령과 겨루고 있었다.
피식.
홀로 고군분투를 하고 있을 딸아이를 생각을 하니 공연히 웃음이 났고 가슴이 짠했다.
‘좋아. 이 싸움이 지나면 나도 지원을 좀 해주자.’
영웅은 삼처사첩을 거느린다고 하지 않던가?
용무린과 같은 사내라면 백리소옥까지 함께 맞이한다고 해도 큰 흠이 되지는 않을 거다.
‘기다려라, 소옥아. 아비가 조만간 찾아가마.’
들려오는 말에 따르면 황제까지 주약란 옹주를 보내 용무린을 부마도위로 삼으려 하고 있다고 한다.
‘양가장의 영애도 합류했다지만 뭐 어때? 내 딸도 신주오가의 일원인 백리검가의 금지옥엽이라고!’
주약란과 양하린에 비해 손색이야 조금 있지만 그리 크게 밀리지는 않는다.
‘그래 한 번 해보는 거야. 암.’
그렇게 백리장천이 백리소옥의 간절한 마음을 진심으로 허락하고 지원을 결심한 순간이었다.
살랑!
-죄송해요, 아버지. 하지만 이제 후회는 없어요.
불어오는 한 줄기 바람에 섞여 익숙한 목소리 하나가 백리장천의 귓가를 스쳐 지났다.
움찔! 홱!
화들짝 놀란 백리장천이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반겨주는 것은 핏빛 노을과 백리세가의 무인들뿐, 목소리의 주인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소옥아…….”
단지 그 이름을 한 번 불렀을 뿐인데,
울컥!
백리장천의 심장이 바늘로 찌르듯 아파왔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 전력을 다해 신법이 펼쳐졌다.
왜 이렇게 가슴이 아프고 불안한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