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암전이 되려는 이유
선도현 인근으로 가기에 앞서 용무린은 비룡문에 먼저 들렀다. 기왕 여기까지 온 김에 출관을 한 아버지를 뵈고 싶었던 것이다.
“소가주께서 오셨습니다.”
“소가주님!”
“오셨습니까?”
변함없이 싱글벙글 웃으며 맞아주는 청지기 노인으로 시작해 비룡문의 모두가 몰려나와 용무린을 반겨주었다.
“오, 종우진 단장님! 보기 좋은데요?”
“별 말씀을, 이게 다 소가주님 덕입니다.”
비룡무단의 단장 종우진이 몰라보게 헌앙해진 자세로 용무린을 향해 포권을 취했다.
“손 총관님도 보기 좋습니다. 그간 열심히 하셨군요.”
총관 손위마저도 절정의 상급 수위의 내공에 어울리는 무위를 찾아가는 듯 보였다. 굳게 맞잡는 손바닥에 박힌 굳은살이 그것을 증명했다.
“소가주님!”
“하하하! 많이 보고 싶었습니다, 소가주님!”
비룡무단의 무사 우진과 임준도 달려 나와 용무린을 반겼는데 그 눈빛이 예사롭지 않은 수준이었다.
‘아니, 비룡무단 전체가 그래 보이는군.’
불사활생신단과 용무린이 전수한 유성회류검법 그리고 적성환월검법의 힘이었다. 그간 정말 열심히 수련을 해왔던 모양인지 불사활생신단을 만나 완전히 꽃을 피울 수 있었던 것이다.
개개인의 기세가 모두 절정 중급 이상이었다.
어느 한 사람 그 아래가 아니라는 듯 두 눈에 신광이 번들거렸으며 태양혈이 불룩했다.
‘이 정도면 됐어.’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항상 그려왔던 오 년 후의 모습에 비하면 아직 손색이 조금씩 있었지만, 그래도 이 정도면 마교의 무력단체 한 곳쯤은 충분히 감당해 낼 수 있을 정도로 보였다.
‘아니, 솔직히 그 이상이지.’
아버지 용대명을 비롯해 초절정 고수만 벌써 다섯 명에 달한다. 직계를 포함해 비룡무단 전체 무인의 평균 무위가 절정의 중급이다. 그 이하로는 아예 없다.
그 정도의 힘을 보유한 가문이 어디 흔하겠는가?
불과 일 년 반 어림에 이 정도 성과를 거뒀다면 그야말로 무지막지한 발전인 셈이다.
“아드-을!”
어머니 조연옥이 또 맨발로 달려왔다.
가뭄에 콩 나듯 얼굴을 보여주는 아들의 방문에 미처 신발 신을 생각도 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어머니!”
와락!
누가 보든지 말든지 용무린은 조연옥을 콱 껴안았다.
“이 무심한 녀석! 그래 밥은 먹고 다니고?”
“예, 어머니.”
“어디 보자 잘난 내 아들. 홍연왕부에서의 일이 흉험했다고 하더니 얼굴에 상처가 났냐? 안 났냐?”
그 이야기까지 다 들으신 모양이다.
조연옥이 고개를 뒤로 쭉 빼더니 눈을 가늘게 뜨고 용무린의 얼굴을 살폈다.
“어머니도 차암. 괜찮아요. 저 다친 곳 없어요.”
손사래를 치는 용무린을 향해 씽긋 웃어 보인 조연옥이 고개를 끄덕였다. 큰 상처라도 입은 것으로 알고 걱정했었는데 되레 전보다 더 좋아 보이니 안심한 것이다.
“그래. 좋아 보이네.”
“그렇다니까요!”
“그래도 녀석아, 그런 게 아니야. 여인의 마음이란 믿는 만큼 두려움도 큰 법이란 말이지. 어미도 어미지만 그 아이도 마음 상하지 않게 잘 해줘. 알았지?”
여인의 입장에서 제갈영령을 생각하는 시어머니의 마음에 용무린은 마음이 따뜻해졌다. 씨익 웃으며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예, 어머니. 걱정하지 마세요.”
“들어가자. 아버지와 다른 문파의 어른들이 많이 기다리시겠다.”
“다른 문파의 어른들이요?”
“소림, 무당, 개방 그리고 무림맹의 무력단체…….”
그들이 이곳에 있다니?
‘선도현에 있는 것 아니었나?’
아니, 어머니 말씀처럼 어른들 즉 수뇌부만 와 있을 수도 있는 일이다.
‘가보면 알겠지.’
“집무실에 계신가요?”
비룡각 삼층.
그곳이 바로 비룡문주 용대명이 무림의 수뇌부들과 더불어 회의를 하고 있는 곳일 터다.
“그래.”
“지금 그쪽으로 가볼게요.”
“회의 끝나면 바로 갈 거니? 아니면 식사라도 하고 움직일 거니?”
“봐서요.”
“미리 연락 줘. 그래야 준비하지.”
“예, 어머니.”
조연옥은 한결 행복해진 얼굴로 내원을 향해 들어갔고 용무린은 외원 중앙의 비룡각으로 향했다.
이미 연락이 취해졌는지 용무린이 들어섬에 누구도 놀라는 기색이 없었다. 활짝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나 용무린을 반겨주었다.
“아미타불. 어서 오시게 부맹주. 허허허.”
“하하하. 그사이 더 헌앙해지셨구려. 참으로 애쓰셨소, 부맹주.”
“에잉. 이제는 그놈의 지위 때문에 막대하기가 좀 그렇잖아! 왠지 모르게 멀어진 느낌이야.”
놀랍게도 안에는 살계승 효정 대사와 무당파의 장문인 자운진인 그리고 개방의 화운 태상장로가 있었다.
“대사님! 자운진인께서도 오셨군요. 화운 태상장로님! 여전하시네요. 하하하…….”
용무린이 활짝 웃으며 차례차례 포권을 취해 보였지만 화운만 여전히 툴툴거렸다. 용무린의 지위가 무려 부맹주였지만, 다 필요 없다는 투였다.
“나쁜 녀석. 이 중에서 내가 제일 먼저 그리고 오래 알았는데 가장 마지막에 아는 체를 하냐?”
참 별 걸로 다 삐진다.
그래도 화운장로는 미워할 수가 없었다. 그의 말처럼 용무린과 가장 많은 일들을 겪었기 때문이었다. 솔직히 이제는 그가 친 조부처럼 느껴질 정도다.
“허허허. 화운장로님. 아직 이 아비에게는 인사도 하지 않은 상태가 아닙니까?”
“아! 그런가요? 하하하!”
용대명의 눙치는 말에 화운장로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아버지! 다녀왔습니다.”
“오냐, 아들아. 수고했다.”
용무린이 깊숙이 고개를 숙여 보였고 용대명은 흐뭇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홍연왕부에서의 일이 흉험했다고 들었는데, 어디 다친 곳은 없느냐?”
“예, 아버지.”
“그래. 그리 앉아라. 지금 한참 마교를 상대할 대책을 논의하는 중이었다.”
용무린은 잠자코 용대명 곁에 앉았다.
따지고 보면 효정대사나 자운진인과 화운장로는 비룡문을 신마대전에 끌고 들어가려 찾은 것이나 마찬가지였지만 이 상황에 그걸 가지고 따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비룡문 주변이 신마대전이 벌어지는 소용돌이 중에서 가장 안전한 곳이라고 할 수 있으니 거점으로 삼기 위해서라도 협의는 필수겠지.’
다 이해한다.
누군들 비빌 언덕이 이렇듯 훌륭한데 그냥 놀려두고 싶겠는가?
‘차후, 비룡문이 정파 무림의 중추로 자라나기 위해서도 이번 싸움을 마냥 피할 수많은 없어.’
그래도 비룡문의 피해가 너무 큰 방향으로 일을 진행시킬 수는 없는 일이다.
‘어디 한 번 두고 보자.’
뭐라고 하는지 지켜보겠다는 심산으로 눈을 빛낼 때였다. 마치 용무린의 마음을 들여다보기라도 한 듯 용대명이 먼저 입을 열었다.
“비룡문 역시 무림맹과 함께 마교에 맞서기로 했다.”
그거야 당연한 수순이었다.
“그러셨군요. 옳으신 결단입니다, 아버지.”
용무린은 선선히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미래를 위해서도 참전은 당연한 일이니 그것까지야 참견하지 않을 생각인 것이다.
“소림과 무당파 그리고 개방의 정예와 함께 이대로 남하를 해 형주 인근에서 정체 중인 마교의 주력 중 하나를 감당할 생각이다.”
“형주 인근의 마교 주력 말씀인가요?”
그게 대체 어느 정도인지 알 수가 있나?
대답 좀 해달라는 시선을 보내기가 무섭게 화운태상장로가 입을 열었다.
“형주 인근에서 주변 현들의 중소문파들을 초토화시키고 있는 놈들의 주요 무력은 환희궁, 유령궁 각 일천에 광마인 삼백여 명 그리고 마도칠문에 속한 구유마문과 만겁문, 사령문에 각각 삼백 어림에 달한다.”
“흑도 녀석들은요? 이곳의 흑도는 한데 뭉쳐 몰려다니지 않나요?”
“그럴 리가? 물론 거기에 흑도 떨거지 이천여 명도 포함시켜야 하지.”
실로 만만치 않은 전력이었다.
세 곳으로 나뉘었음에도 하나씩 살펴보면 실로 엄청난 힘인 것이다. 흑도 떨거지들을 제외해도 삼천 명을 훌쩍 넘어설 정도라니!
“너무 심려치 말거라. 본 문은 이미 강하다, 아들아.”
용대명의 단단한 목소리에 이어 효정대사와 자운진인이 거들고 나섰다.
“어느 한 문파의 힘만으로 한 구역을 맡으라는 짓 따위는 하지 않을 걸세.”
“각 문파의 특성에 따라 서로 힘을 합할 생각이오.”
“방어력이 강한 소림의 불문내공에 날카로운 무당파의 도가 검공과 개방의 빠른 뒷받침, 그 안에 비룡문의 특별한 힘이 모두를 아우르며 보조를 할 것이다.”
화산에서 소림의 중후한 내공과 도가의 검향이 함께 어우러지며 놀라운 위력을 발휘했듯 이번에도 역시 조화를 통해 단단한 힘을 구축할 모양이었다.
‘그렇다면 믿을 만하지.’
각 문파들 간의 실력 편차가 생길 수밖에 없는데 모두 조화를 이루게 만든 상태에서 대적을 한다면 어느 한 문파만 괴멸을 맞이하는 상황은 나오지 않게 된다.
“제가 안휘성의 신마를 맡으면 형주 인근의 무리 정도는 여러 문파 어른들의 힘으로도 충분히 무너뜨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신마를 맡는다!
들려오는 그의 무지막지한 무력을 생각하면 걱정이 되지만 용무린을 제외하면 달리 방법이 없다.
“아직 도착하기 전이지만, 선도현으로 내려오는 백리검가의 주력과 무림맹의 진무단, 천도단의 힘을 이끌고 달려가 줬으면 좋겠다.”
“백리검가…….”
그 말을 듣는 순간 심장 한 쪽이 시큰거려오는 용무린이었다.
이미 사천에서의 일을 알고 있던 화운이었지만 모른 체 말을 이었다.
“속도야 당연히 너 혼자 가는 것이 빠르겠지만, 신마를 상대하는 일 말고 무너져버린 남궁, 황보, 팽가와 무림맹 무력단체의 생존자들을 구원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어.”
“……!”
용무린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는 순간이었다.
밖에서 총관 손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문주님! 백리검가의 가주님께서 당도해 계십니다.”
“오! 어서 안으로 모셔라!”
용대명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손님을 청했다.
문이 열리고 잔뜩 굳은 얼굴의 백리검가주 백리장천이 안으로 들었다.
“어서 오십시오, 백리가주님. 원행에 노고가 많으셨습니다. 이쪽으로 앉으시지요.”
“반겨 주셔서 감사하오이다, 용 문주님.”
끈끈한 혈맹의 환대에 백리장천은 애써 웃어 보이며 자리에 앉았다.
그의 웃음이 어째서 슬프게 보이는지 너무나도 잘 아는 용무린이나 사천의 일을 동시에 떠올린 좌중의 누구도 백리장천의 아픈 곳을 건드리지 않았다.
조용한 가운데 지금까지 논의된 사안들을 알렸다.
용무린과 함께 안휘성으로 가 달라는 말에 백리장천의 눈이 한 차례 진한 살기로 희번덕였다.
물론 시종일관 회의가 그렇게 무겁게 흐르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의천현의 분타주로 있던 방건이 날 듯이 뛰어 들어와 마교 본산에 회심의 일격을 먹인 무림맹주의 일을 알려주었던 것이다.
“허어! 선재, 선재라…….”
“오! 태상노군이시여…….”
효정대사와 자운진인의 얼굴에 기쁨보다 깊은 우려가 흘렀다. 회심의 일격을 먹이는 것은 좋지만 그것은 아예 목숨을 내놓겠다는 뜻이기 때문이었다.
“젠장. 맹주답지 않게 이상할 정도로 잠잠하다 싶었더니 그런 무모한 일을 벌이고 있을 줄은 미처 몰랐네.”
화운장로마저도 나직이 혀를 내둘렀다.
마교와의 전면전이 벌어지고 있는 와중에 불회곡의 마교 본산을 치기 위해 움직였다는 것은 퇴로 따위는 아예 염두에 두지 않았다는 뜻이 되기 때문이었다.
십만대산이라 불리는 마교 본산 불회곡은 광동성과 광서성의 경계에 위치해 있고 그 사이에는 온통 마교의 주력들로 채워져 있었으니까.
‘정말 대단하신 분이었네.’
용무린의 주먹이 불끈 쥐어졌다.
무림의 역사 이래 한 번도 실행되어 본 적이 없는 정파무림의 대 마교 본산 전격 침공이라니!
쿵쿵쿵.
생각하면 할수록 가슴이 뛰었다.
“여기, 맹주께서 부맹주님께 보내신 전서입니다.”
방건이 용무린을 향해 피에 젖어 거뭇하게 변한 전서 한 장을 내밀었다.
무림맹주 비천검제 풍연호의 피가 분명할 터!
용무린은 뜨거워지는 심장을 겨우 억누르며 전서를 펼쳐 읽었다.
-무모하다 생각하겠지만 내 생각을 이해해 주길 바라오.
숱한 세월 동안 정파 무림은 마교의 침공을 두려워만 하며 전전긍긍해 왔소. 나는 그 이면에 두려움도 있겠지만 놈들에게 적절한 교훈을 내려주지 못한 탓이 더 크다고 생각하고 있었소.
중원 무림 정복이라는 욕망에 침공을 한다면 너희 역시 본산이 불에 탈 각오를 해라!
이참에 나는 마교 놈들의 뼈마디에 그런 깊은 교훈을 새겨주고자 하오.
나를 걱정하지 마시오.
혹여 이 와중에 나를 구하기 위해 이곳으로 올 필요는 없소. 내 몸은 내가 알아서 건사할 테니, 본산이 불에 타오름으로 인해 크게 흔들릴 마교의 주력들을 완벽히 박살을 내어 주시오.
부맹주만 믿고 내린 결단이오.
무림을 부탁하오.
혹여 내가 잘못된다면 앞으로 무림맹은 부맹주가 맡아서 이끌어 주길 바라오.
비천검제 풍연호
담백하면서도 결연한 의지가 느껴지는 글이었다.
‘맹주. 어쩌자고 홀로 암전을 자처하셨습니까?’
잠시 생각해보니 자신과 상의를 했다고 하더라도 별반 달라지는 일은 없었을 것 같았다.
어차피 신마는 안휘성에 있었고 그를 상대할 사람은 자신밖에는 없지 않던가? 회심의 일격을 먹이기 위한 적임자를 한 사람 꼽으라면 맹주밖에 없는 거다.
‘호심결. 전생의 나인 절대검신이 직접 소림의 혜월과 천기자와 상의해 남긴 그 내공심법을 익힌 장본인이 그분이기 때문이지.’
이미 일은 벌어졌다.
전서가 날아오는 시간을 감안하면 벌써 이틀에서 삼 일은 흘렀다. 그 시간이면 막말로 벌써 무슨 일이 벌어져도 벌어졌을 시간인 거다.
‘목숨을 걸고 벌어 놓은 기회를 그냥 흘려보낼 수는 없는 일이지.’
생각할 것도 없다.
계획대로 안휘성으로 달려가 신마를 상대하고 나머지 놈들을 죄 쓸어버리는 거다.
‘기다려라, 신마. 네놈이 죽을 이유가 한 가지 더해졌다.’
용무린의 눈가에 진한 살기가 어렸다.
용무린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아무래도 저부터 가봐야 할 것 같습니다.”
“무린아! 남궁, 황보, 팽가의 생존자들을 구하기 위해서는 아무래도 숫자가…….”
화운장로의 말을 용무린이 툭 잘랐다. 고개를 흔들며 자신의 생각을 밝혔다.
“아니요! 지금 필요한 것은 속도예요.”
“……!”
“놈들이 기존에 하던 것처럼 주변 현부터 차근차근 기반을 다시며 북상을 한다고 하더라도 지금쯤이면 가장 남부에 위치한 남궁세가를 노리고 있을 가능성이 커요.”
“하긴, 그렇지 않아도 생존자들이 남궁세가를 중심으로 마지막 방어선을 구축하고 있다고 한다.”
“주변 정리가 끝나면 뒤통수가 근질거려서라도 그곳부터 칠 거예요. 그러니 빨리 가 봐야만 해요.”
자운진인이 불쑥 질문을 던져왔다.
“그곳을 향해 신마가 공격을 해온다면 뒤를 받쳐줄 고수가 없을 터인데 어쩌시려오?”
“혹여, 신마와의 싸움이 승리로 끝난다 하더라도 전투 자체는 처절한 패배로 끝날 수도 있음을 말하는 것이야.”
살계승 효정 대사까지 우려를 더했다.
신마에게 이겨도 전투 자체는 패배로 끝날 수 있다.
그 말의 의미를 모를 리 없다.
신마와의 전투에서 멀쩡할 수는 없는 일, 틀림없이 심각한 부상을 당할 것이고 그런 상태에서 짓쳐들 마교의 수뇌부들을 막아내지 못한다면 신마에게 승리를 거둬놓고도 숨 막히는 도주를 해야 할 수도 있는 거다.
씨이익.
용무린이 하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믿으세요. 신마 이외에 저를 어찌할 수 있는 존재는 이 하늘 아래 없습니다.”
“허어!”
“광오하구려…….”
효정대사가 탄성을 쏟아냈고 자운진인이 혀를 내둘렀지만 용무린의 태도는 한결같았다.
“그와의 대결에서 얼마나 심각한 부상을 입을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가 피하고자 하면 누구도 제 앞을 막을 수 없으며 따라올 수도 없습니다.”
용무린의 시선이 백리장천에게로 향했다.
대책이라면 대책일 수 있는 부탁을 쏟아 내었다.
“그러니 백리가주님께서는 무림맹의 전력과 함께 옆구리라고 할 수 있는 서쪽부터 차근차근 치고 들어오셨으면 합니다.”
“서쪽부터 말이오?”
“예. 태호현과 석태현을 거쳐 얼마 전 차지한 이현으로 오며 놈들이 주둔군조로 조금씩 남겨놓은 놈들을 쓸어버리면 틀림없이 놈들도 세력을 나눠야만 할 겁니다. 저는 그 정도면 충분합니다.”
그렇다고 하는 데야 더 뭐라고 하겠는가?
“아들아! 만용과 자신감의 차이를 잘 알고 하는 말이라고 믿겠다.”
잠자코 듣고 있던 용대명마저 이런 반응이라니!
“예, 아버지.”
그것으로 모든 결정은 끝이 났다.
그런데…….
“그 아이는 잘 갔나?”
애잔하기 짝이 없는 백리장천의 목소리가 용무린의 발걸음을 붙잡았다.
“오면서 소식을 들었네. 누구보다 부맹주가 더 잘 알 것 같아서 묻는 것이네. 그 아이는 잘 갔는가?”
“……!”
백리장천을 돌아본 용무린은 선뜻 입을 열 수 없었다.
자식을 잃은 슬픔이 가득한 눈에 핏발이 곤두서 붉게 물들어 있었다. 금방이라도 쏟아질 듯 차오르는 눈물까지 똑똑히 보였다.
울컥.
다시금 치밀어 오르는 격정을 용무린 역시 애써 억누르며 답을 했다.
“다행히 잘 갔습니다.”
“……그렇군.”
“후회 따위는 없다는 것이 마지막 남긴 말이었습니다. 백리검가의 딸로 왔으나 아미승 ‘영화’로서 기꺼이 웃으며 떠났습니다.”
의미심장한 말이었다.
“백리검가의 딸로 왔으나 아미승 ‘영화’로 웃으며 떠났다? 후후후. 그 아이답군…….”
용무린의 답을 되뇌며 쓸쓸히 웃어 보이는 백리장천의 볼을 타고 기어이 뜨거운 눈물 한 방울이 흘러 내렸다.
머리로는 모두 이해가 되지만 천륜으로 맺어진 부모와 자식 간의 인연이란 그리 쉽게 흘려보낼 수 없는 성질의 것이기 때문이었다.
오죽하면 부모가 죽으면 땅에 묻지만, 자식이 죽으면 가슴에 묻는다는 말이 전해져 오겠는가?
“알려 주어 고맙소이다.”
백리장천이 다시금 용무린을 부맹주로 대하기 시작했다.
“말씀하셨던 것처럼 태호현과 석태현을 거쳐 이현까지……. 놈들이 주둔군조로 조금씩 남겨놓은 놈들을 깡그리 쓸어버리도록 하겠소이다.”
버언쩍!
백리장천의 두 눈에 서릿발 같이 차가운 살기가 어렸다.
“믿고 먼저 가겠습니다.”
“보중해라, 아들아.”
“예, 아버지.”
용무린은 그렇게 비룡문을 떠나 남궁세가로 향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또 벌어졌다.
훅!
갑자기 뭔가 김이 팍 샌 기분이 들었다.
‘뭐지?’
남궁세가를 향해 방향을 잡은 지 얼마나 되었다고 이런 허탈한 기분이 드는 것일까?
‘이거, 사천성으로 내려갈 때도 느꼈던 기분인데?’
아직 확신할 수는 없지만 어쩐지 알 것만 같았다.
‘놈이 또 움직였나? 안휘성에서 나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다른 곳으로 또 이동했어? 그래?’
마땅히 어떤 움직임을 감지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본능이라고 할 수 있는 수준에서 이미 놈의 부재를 느꼈다고 봐야 했다.
‘이걸 대체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지?’
여러 가지 생각이 스쳤다.
신마도 자신과 같은 것을 느끼고 있는 것일까?
그렇다면 두 번에 걸쳐 먼저 피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놈은 내 기운을 그 먼 거리에서 보다 더 정확히 감지할 능력이 된다는 뜻일까?
‘그러면 놈의 무위가 내 짐작을 훨씬 뛰어 넘을 만큼 높다고 봐야 하나?’
그것이 아니라면 내 무위가 더 높기 때문에, 나의 내공이 더욱 강력하기 때문에 놈이 더 쉽게 나를 감지하는 것이며 내가 놈을 잘 느끼지 못하는 것은 놈의 힘이 나에 비해 약하기 때문인가?
‘아오, 복잡해라.’
생각만 복잡할 뿐 확실한 것은 하나도 없다.
‘가보면 한 가지는 확실해질 테지.’
놈의 움직임을 자신 역시 이제는 확실히 느끼기 시작했다는 사실 말이다.
‘남쪽! 놈이 정말 남궁세가 인근에 없다고 한다면, 놈은 지금 남쪽을 향해 움직이고 있어.’
용무린의 눈이 본능적으로 밤하늘로 향했다.
밤하늘 가득한 별들이 끊임없이 깜박이며 아름답게 빛나고 있었다.
‘천기라……. 이런 느낌들이 결국 천기를 읽을 수 있는 능력으로 발전을 하는 것일까?’
아름답게만 보일 뿐, 아직 밤하늘에서는 그 무엇도 보이는 것이 없었다.
***
비슷한 시각 비천검제 풍연호는 호남성 중부에 위치한 악록산 허리에 이르렀다.
“모두 내공을 다스리도록. 앞으로 한 시진 후면 구유마문이다.”
“충!”
풍연호의 명령에 경계를 제외한 모두가 자리에 앉아 운공에 돌입했다. 하지만 풍연호 뒤에 시립해 있던 불사수호단의 단주는 운공에 돌입하는 대신 풍연호의 마음을 거듭 돌이키려 애썼다.
“맹주님! 정작 운공을 해야 할 사람은 맹주님이지 않습니까? 제가 호법을 서겠습니다. 그러니 제발 맹주님의 몸을 먼저 살펴주십시오.”
“쉿! 말을 삼가게.”
혹여 사기라도 떨어질까 두렵다는 듯 풍연호가 입술에 손가락을 세워 보였다.
하지만 불사수호단주의 태도는 달라지지 않았다.
되레 더 목소리를 높였다.
“이러다 정말 큰일 나십니다. 제가 똑똑히 보았습니다. 아까도 검게 죽은피를 삼키시지 않았습니까?”
“……!”
“맹주님께 직접 사사한 저희들입니다. 사승의 예를 올리지는 않았지만 저희 모두 제자라고 생각하고 있단 말입니다. 한데 어찌 저희 마음을 그렇게 몰라주실…….”
단주의 목소리가 점점 더 고조되려는 찰나 비천검제 풍연호가 풀썩 웃으며 말을 잘랐다.
“나 역시 그래서라네…….”
“예?”
단주가 눈을 동그랗게 떴고 풍연호의 입가에 떠오른 미소는 조금 더 짙어졌다.
“무얼 그리 놀라는가? 나 역시 자네들과 같은 생각이기 때문에 이렇게 하는 것이라니까!”
“……!”
무슨 뜻인지 여전히 모르겠다는 듯 단주는 눈을 멀뚱하게 떴고 운공요상보다는 두 사람의 대화에 더 관심이 있다는 듯 귀를 기울이는 대원들이 하나 둘씩 늘어났다.
피식.
싱거운 웃음과 함께 풍연호의 따뜻한 목소리가 주변으로 흘렀다.
“지금껏 공인된 제자 한 사람 키워오지 않았던 나였네. 그 모두가 비밀리에 자네들 불사수호대를 키워내기 위해서였지.”
“맹주님…….”
“자네 말처럼 딱히 사승의 예를 올리지는 않았지만 지난 십여 년에 걸쳐 나 풍연호의 근본이랄 수 있는 호심결과 비천팔황검법을 비롯한 모든 절기를 가르쳤으니 어찌 제자와 다르다 할 수 있겠는가?”
굳이 말은 하지 않았지만 불사수호대 일천 명은 자신의 제자들이나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내가 사부라고 하면 자네들은 내 자식과 같겠지. 한데, 나는 자네들을 사지로 몰아넣었네.”
“맹주님!”
풍연호가 천천히 고개를 흔들었다. 내상 때문이 아닌 마음의 고통에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벌써 오백여 명이나 잃었어.”
불회곡 마교 본산을 기습하며 잃은 숫자였다.
물론 마교 본산을 절반 가까이 불태웠으며 일천오백여 명에 달하는 마인들까지 베었으니 기대 이상의 성과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다들 기꺼이 웃으며 갔습니다, 맹주님!”
“맞습니다. 누구도 해내지 못한 일을 해냈다는 자부심을 가지고 떠났으니 후회는 없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맹주님. 형제들의 피해도 크긴 했지만 마교의 피해는 그보다 몇 배가 더 되지 않습니까?”
단주에 이어 두 사람의 부단주까지 합류했다.
점점 더 운공 대신 풍연호와의 대화에 집중하는 대원들 숫자가 늘어났다.
“알지. 알아…….”
잠시 고개를 끄덕여 보이던 풍연호가 발작적으로 고개를 흔들었다. 목소리를 높였다.
“하지만 그거 아나? 머리로는 이해를 해도 가슴에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는 것을?”
“……!”
모두 같은 심정인지 다들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풍연호의 애끓는 목소리가 계속해서 이어졌다.
“십여 년 동안 갖은 정성을 다해 길러낸 나의 제자들을 절반이나 잃다니! 나는 참을 수가 없었네. 어떻게든 조금이라도 더 살려서 돌려보내고 싶다네. 그렇게 할 수만 있다면 나는 정말 웃으며 눈을 감을 수 있을 것 같네. 무슨 뜻인지 이해할 수 있겠는가?”
어째서 그 마음을 모르겠는가?
잠자코 듣고 있던 대주가 고함을 버럭 질렀다.
“그러면 저희들이 기뻐할 것 같습니까?!”
“맞습니다. 제자들 대신 목숨을 내던지는 사부를 보며 어떤 정신 나간 제자들이 기뻐한단 말입니까?”
“저희 역시 사부님과 같은 마음입니다. 제발 좀 몸을 아껴달라는 말입니다.”
두 명의 부대주까지 가세해 소리를 지른다.
하지만 그 안에 담긴 뜨거운 진심에 풍연호는 되레 기쁘기만 했다.
‘죽을 가능성이 십 중 구가 넘는데도 기꺼이 따라왔으면서도 나를 사부라고 인정하고 이렇듯 마음까지 주다니!’
이제는 정말 죽어도 여한이 없을 듯했다.
‘아니지. 그럴 수 없지.’
모든 것을 걸고 길러낸 이 제자들을 하나라도 살려 돌려보내기 위해서는 자신이 조금이라도 더 오래 살아남아 적들의 목을 베어야만 했다.
“그래. 나의 제자들아. 우리 모두 힘을 내서 마도칠문의 버러지들에게 두 번 다시 중원 땅을 밟지 말라는 교훈을 내려주자꾸나.”
“예, 사부님!”
“알겠습니다, 사부님!”
모두의 마음이 그렇게 하나가 되었다.
풍연호마저 그동안 호심결의 회복력에 기대고 손을 놓았던 운공요상에 들었다.
‘천기자시여-. 당부하신 것을 반드시 이루겠습니다.’
풍연호는 가만히 천기자를 떠올렸다.
이렇듯 암전을 자처한 이유가 바로 천기자의 부탁 때문이었던 것이다.
-암전이 되어 주려무나.
결전의 그날에 앞서, 신마에게 호심결의 맛을 보여 주어야만 한다.
호심결은 하나의 낙인과 같다.
너와 불사수호대원들의 의지라면 신마라 하더라도 쉬이 떨쳐낼 수 없으리라!
너와 불사수호대의 의지를 거름 삼아 드디어 순천자의 힘이 신마를 분쇄하리니, 너희의 의기는 무림의 역사에 천추만대까지 이어지리라.
그저 순천자의 밑거름이 되어달라는 요구.
어찌 보면 너무나 무리한 요구였음에도 풍연호는 사부로 모신 혜월과 특히 천기자의 부탁을 흔쾌히 승낙했다. 받아들였다.
‘내 목숨이 역천자를 막는 데 보탬이 된다는데 협의를 아는 한 사람의 무인으로서 무얼 망설이겠는가?’
자신의 이름이 무림의 역사에 천추만대까지 이어지지 않는다고 해도 좋았다. 그저 무인의 한 사람으로서 역천자를 거꾸러뜨리는 일에 가장 큰 역할을 한다는 사실 자체로 만족한다.
‘오라, 신마여. 기필코 한 칼 먹여주마.’
휘이이. 휘이이-웅. 후우우우우-웅.
오백여 명이 넘는 인원이 단체로 호심결을 운용하니 그 기세가 하늘을 찔렀다.
***
쐐애애액. 타닷. 스파아앙.
일 보에 십여 장씩 쭉쭉 거리를 좁히는 놀라운 신법!
파공음조차 뒤에 길게 흘리며 신마는 강소성을 가로지르는 중이었다.
불과 닷새 만에 한 개의 성을 뛰어 넘었으니 그 빠르기가 어지간한 비응과 같을 정도로 무지막지한 속도였다.
‘감히 신교 본산을 넘보다니!’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일천 명 정도밖에 되지 않는 버러지들이 신교의 정문을 뚫고 들어와 불을 지르고 식솔들과 하위 마인들을 베었다고 한다.
‘거기에 더해 음양자에게까지 치명상을 입혔다, 이거지?!’
그 생각만 하면 속이 부글부글 끓는다.
음양자가 대체 누구던가?
십만 마도인의 절대자인 자신에게 유일한 혈육과도 같은 존재이며 자신이 세상을 마음껏 활보할 때 거침없이 등 뒤를 맡기는 유일무이한 존재다!
그런 존재가 깊은 상처를 입었다고 한다!
“반드시 잡아 죽인다! 반드시-!”
스파아아아-앙!
신마의 신법이 점점 더 빨라지는 그 순간이었다.
흠칫!
무엇인가를 감지한 신마의 고개가 갑자기 오른쪽을 향해 홱 돌았다.
“이건 또 뭐지?”
아득히 먼 곳에서 풍겨오는 기분 나쁜 어떤 기운이 느껴졌다.
호심결의 힘이었다.
풍연호와 오백여 명이 한꺼번에 운공에 빠지자 주변의 대기가 공명을 했고 이 먼 곳에까지 그 파동이 전해져 온 것이었다.
물론 아무리 그렇다고 하더라도 신마가 아니었다면 감지하지 못했을 것이다. 또한 신마가 불사신공과 규천마력을 하나로 합치지 못했다고 해도 어림없는 일이었다.
“이런 시건방진!”
희한한 것은 받아들여지는 감정이다.
용무린의 불사신기를 감지했을 때는 마치 친 형제라도 되는 듯 친근감과 호감이 느껴졌다고 하면 지금 느낀 호심결은 불사신기를 흉내 내는 가짜로 다가왔던 것이다.
“네놈들이로구나! 바로 네놈들이었어!”
흉내를 내는 가짜라고 해도 근본은 불사신공일 터, 오마종의 무위를 넘어섰던 음양자가 그렇듯 크게 당한 것도 모두 이해가 되었다.
“잘 걸렸다!”
휘릭. 타닷. 스파아아아-앙!
줄곧 남쪽으로 향하던 신마의 신법이 대뜸 서쪽을 향해 바뀌었다. 불사신공을 흉내 내는 가짜들의 존재감을 향해 쏘아졌다.
물론 큰 부상을 입었다는 음양자가 걱정이 되기는 했다.
‘먼저 음양자를 치료한 후 놈들을 쫓아야 하나?’
잠시 고민을 했지만 결국 마교의 영역에서 신나게 활개를 치고 돌아다니는 저 시건방진 놈들을 먼저 갈가리 찢어 죽이는 것을 택했다.
‘지금 뒤쫓지 않으면 곤란해질 수도 있단 말이야.’
음양자를 치료한답시고 시간을 주었다가 놈들이 뒤로 쭉 빠져나가 용무린과 합세를 하면 어떻게 하겠는가?
그야말로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보는 격인 거다.
“깡그리 잡아 죽인다.”
놈들을 처리한 후 음양자를 치료한다.
상세가 위중하다고는 하지만 음양자의 무위라면 충분히 저 시건방진 가짜 놈들을 처리하고 자신이 신교에 도착할 때까지 버티고도 남는다.
“크흐흐. 절대로 도망칠 수 없다!”
신마의 입가에 흰 선이 쭉 그어졌다.
이미 놈들이 집단으로 뿜어냈던 기운이 감각에 등록이 된 이상 어떤 곳으로 도망친다고 해도 최소한의 방향 정도는 가늠할 수 있었으니까.
‘이 방향이면, 구유마문 쪽인가?’
대충 놈들의 내심을 알 것 같았다.
‘마도칠문의 빈집을 노리는 거다, 이거지?’
놈들이 노리는 목표가 진정 마도칠문이라면 생각보다 더 빨리 잡을 수 있다.
“간다-앗!”
쌔애애액. 스파아아-앙!
신마의 신형이 흰 선을 그리며 쏘아졌다.
***
비슷한 시간, 사천성 무림맹 1로.
많은 피해가 있었지만 용무린의 개입으로 인해 다행히 힘을 추스르게 된 문파들은 다시금 정비를 거쳐 두 개의 세력으로 힘을 나누었다.
첫 번째는 아미파와 대정단과 검룡당의 무인들이 주축이 되어서 사천성 인근과 귀주성 인근의 중소문파들을 회복하는 일을 맡았다.
두 번째는 청성, 종남, 당가 마지막으로 벽력도가의 힘을 하나로 묶어 도망치는 마교 잔당을 추격함과 동시에 마도칠문을 하나씩 지워나갈 생각이었다.
“반드시 놈들에게 당가의 피가 얼마만큼의 무게를 지니고 있는지 알려 줄 것입니다.”
무림맹 의천단의 단주에서 이제는 당가의 장로 신분으로 되돌아온 당유현이 이를 갈았다.
“당가인의 피 한 방울에 놈들의 목숨 하나로 받아내야 합니다, 숙부님!”
당건 역시 표독한 목소리로 이를 갈며 외쳤다.
마교와의 전투로 인해 많은 세가 인명의 피해가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건은 복수가 먼저라고 생각하는 것이었다.
과연 어째서 당가와 은원을 맺지 말라는 것인지 여실히 드러나는 태도였지만 당유현은 한술 더 떴다.
“그렇게 하자꾸나. 우리 모두가 죽는다 해도 당가를 건드린 놈들에게는 죽음밖에 남지 않는다는 것을 알려주도록 하자.”
“예, 숙부님.”
그동안 혈교에게 당한 상처를 많이 치유해낸 청성과 종남의 무인들 역시 의천단과 당가와 함께 마교의 추격에 힘을 합쳤다.
“놈들을 반드시 괴멸시켜 두 번 다시 중원을 넘볼 수 없도록 만들 것이외다.”
“이를 말씀이겠습니까? 이참에 깡그리 쓸어버려 종남의 기상을 드높일 생각입니다.”
새로이 장문인의 자리에 오른 청성의 서금도장과 종남의 이인자였던 곽창휴가 살기를 돋웠다. 용무린의 힘에 괴멸된 후 필사의 도주를 감행하는 마교의 마인들이 먹잇감으로 보였던 것이다.
보상신니에 이어 아미파의 새로운 장문이 된 보연이 넉넉히 웃으며 답했다.
“어느 길로 가도 결국에는 만나게 되겠지요. 그때까지 모두 보중하시길…….”
그렇게 보연은 절반 이하로 훅 줄어든 아미파의 여승들과 대정단 검룡단과 함께 먼저 길을 떠났다. 마도칠문과 흑도의 무리들에게 주인이 바뀐 중소문파들을 다시 되돌리기 위해서였다.
“우리도 출발합시다.”
“좋지요.”
“출바-알!”
이번에야말로 실추된 문파의 명예를 되살릴 기회라는 듯 당가와 청성과 종남이 여세를 몰아 퇴각하는 마교의 마인들 뒤를 쫓았다.
하지만 어차피 결국에는 만나게 될 것이다.
마교의 종착지는 십만 대산 불회곡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으니 말이다.
***
쌔애애액. 퍼퍼펑. 카캉. 스각.
“커헉!”
“크아악!”
무참한 비명을 터뜨리며 쓰러져가는 구유마문의 마도 고수들…….
카카캉. 스각.
“커헉!”
차차차창. 키리릭. 서걱.
“끄아악!”
요란한 비명을 흘리는 마도 고수들 중에는 머리에 하얀 서리가 내린 자도 있었고 이제 겨우 지학의 나이나 되었을까 싶은 어린 사내도 있었지만 손에 검을 든 이상 불사수호대원들은 무참히 베었다.
화르르. 화르르르. 화르르륵.
“크아아악!”
“사, 살려…… 아아악!”
구유마문 전체에 불을 지르다 보니 이제는 타 죽는 사람까지 생겨났다.
‘무참한 살육! 대의를 위해서라고는 하지만 과연 무엇이 우리 불사수호대와 마도칠문 혹은 마교의 마인들과 다르겠는가?’
부대주와 대원들이 어찌나 목청을 돋웠던지 풍연호는 이번 구유마문 공격에 나서지 못했다.
구유마문이 내려다보이는 곳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 기를 쓰고 내상을 다스리려 했지만 연이은 비명 때문에 그렇게 할 수도 없었던 거다.
꿈틀.
풍연호의 눈두덩이 거칠게 요동쳤다.
이런 것이 빈집털이의 백미이기는 하지만 어쩐지 도살자가 된 듯해 마음이 무거웠던 것이다.
‘그래도 부녀자 강간은 하지 않는다는 점이 이놈들과 우리가 다른 점인가?’
구유마문 문주 배위성의 식솔들.
그 중에서도 아내로 보이는 여인과 그 딸 그리고 여종들이 많이 눈에 뜨였지만 그 여인들을 향해 달려들어 욕심을 채우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았다.
지금껏 배위성과 구유마문의 고수들이 중소문파를 짓밟으며 저질렀던 가장 큰 죄악 중 하나를 돌려주지 못한 셈이었지만 누구도 아쉬워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나마 다행이로구나.’
무참히 살육을 저질렀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구유마문에 대한 응징인 것, 인간으로서 가져야 할 최소한의 것은 지켰다는 점이 한 가닥 위안이었다.
삐이익!
어디선가 날카로운 호각 소리가 들렸다.
타닷. 휘스슷. 휘슷.
기다렸다는 듯 불사수호대원들이 구유마문의 담을 다시 넘었다. 풍연호가 기다리고 있는 곳을 향해 나는 듯 신법을 전개해왔다.
‘미안하구나, 제자들아…….’
계속해서 이런 살육에 제자들을 밀어 넣어야 한다는 사실이 안타까웠지만 보다 큰 대의를 위해 어쩔 수 없는 일이라 생각했다.
“다음은 만겁문이다. 가자!”
생각할 시간을 주지 않고 얼른 목표를 제시했다.
“충!”
휘스슷. 타닷. 휘리릭.
풍연호가 제시한 목표에 따라 불사수호대원들이 살육에 대한 감상에 빠지지 않고 자연스럽게 다음 목표인 만겁문을 향해 움직였다.
***
형주 외곽의 얕은 구릉.
이곳의 옛 지명이 바로 삼국지에서 말하는 강릉으로 전략상의 요지인지라 군웅할거 시대에 치열한 쟁탈전이 벌어졌던 곳이었다.
마교 2로의 주력도 그래서 바로 이곳을 기점으로 삼아 주변을 차근차근 점거해 나갔다.
장강의 물줄기를 따라 서쪽으로는 지강, 의도, 의창현을 접수해 중소문파들을 쓸어버린 후 조금씩 마교도의 씨앗을 뿌렸고 동쪽으로는 사시, 공안, 잠강현을 집어 삼켰다.
관우가 지키던 옛 형주 고성에 아직도 관군들이 주둔을 하고 있었지만 관과 무림은 별개라는 고언 때문인지 아니면 마교도의 기세가 너무 흉악해 겁을 먹어서 그러는 것인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마도칠문과 흑도의 잡배들을 앞세워 나타난 마교 2로의 주력에 의해 많은 수의 중소문파들이 멸문의 화를 입었고 또한 죽어 나갔다.
조금 늦었지만 무림맹이 나섰다.
소림과 무당파와 개방 그리고 비룡문과 무림맹의 연합세력들이었다.
‘무력의 우위를 앞세워 마음껏 약탈과 방화 강간을 저지르는 놈들이라 했던가?’
반짝!
잠강현 외곽의 대도문을 바라보던 비룡문주 용대명의 눈가에 준엄한 빛이 돌았다.
‘오늘 너희들에게 단죄를 내리겠다.’
무당파의 속가 제자가 삼십 년 전 열었다고 하는 대도문에는 현재 마교 오궁에 속한 환희궁의 부궁주가 점거하고 있다고 한다.
오늘 대도문 수복의 책임자는 바로 자신이었다.
비룡문의 문주로서 제대로 된 전투는 처음이었지만 신기하게 겁 따위 나지 않았다.
‘이것 역시 내 아들 덕이겠지.’
용무린 덕에 불사활생신단을 복용했고 곁에 있던 용무린이 아예 불사신공의 힘을 뭉텅 끌어내 주입해 대공을 이끌어 주었다.
‘보여줄게 아들아. 아들이 준 힘이 어떤 것인지 말이야.’
슥.
용대명의 손이 하늘 높이 올라갔다가 뚝 떨어졌다.
휘슷. 타다닷.
비룡무단 삼십 명 일 개 조와 십팔나한 두 명, 무당파의 태극검수 여덟과 개방의 정의개 마흔 명이 일제히 대도문의 담을 뛰어 넘었다.
휘슷.
마지막으로 용대명 역시 대도문의 담을 뛰어 넘었다.
“웬 놈들이냐?”
파아앗. 쉬리리릭.
앙칼진 목소리와 함께 뛰쳐나온 환희궁의 부궁주가 용대명을 향해 연검을 뻗어내었다.
“꺼져라, 요녀야!”
준엄한 목소리와 함께 용대명이 검을 확 뿌렸다.
쉬릭. 파카카캉.
상청무상검법의 일초 상청무량의 초식이 쏟아져 나와 연검을 단숨에 멀찌감치 뒤로 밀어냈다.
“아학!”
쿵쿵쿵.
묘한 비음을 쏟으며 환희궁의 부궁주가 세 걸음이나 뒤로 물러났다.
확. 출렁.
그 서슬에 부궁주의 궁장이 확 뒤로 젖혀졌다. 일부러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상청무량의 초식에 베였는지 가슴 어림의 천 조각이 벌어지며 아름답기 짝이 없는 가슴이 그대로 드러났다.
“아흥……. 밤에는 얼마나 또 거칠게 나오실까?”
누가 환희궁 부궁주 아니랄까봐 그러는 것인지 아예 도발적으로 가슴을 내민다. 아니, 검을 쥐지 않은 손으로 슬쩍 자신의 가슴을 쓰다듬었다.
그 모습이 어찌나 요염한지!
사내라면 누구나 스스로의 몸을 쓰다듬는 그 손길에 시선을 빼앗길 수밖에 없으리라.
바로 그 순간,
타닷. 패애액.
환희궁 부궁주가 한 걸음에 거리를 좁히더니 연검을 빠르게 뻗어냈다.
버언쩍. 취리리릭.
잠시만 한눈을 팔았다 하더라도 금방 위기에 빠졌을 정도로 빠른 쾌검이 뻗어 나와 용대명의 목을 노렸지만…….
“냄새난다, 계집아! 홀라당 벗고 팔을 번쩍번쩍 들어 올리려거든 좀 씻고 해라.”
한 점 흐트러짐 없는 목소리와 함께 용대명은 무심히 상청무상검법의 초식을 전개했다.
파캉. 차차창. 스각.
“아학!”
쿵쿵쿵.
묘한 비음을 비명처럼 흘리며 다시금 뒤로 세 걸음이나 물러나는 환희궁 부궁주. 그 서슬에 옷이 훌러덩 완전히 밑으로 내려갔다.
출렁. 활짝.
속곳도 입지 않았는지 이번에는 가슴뿐만이 아니라 하체의 농밀한 숲까지 만천하에 드러났다.
화아악.
더불어 피어오르는 아찔한 향기.
사내라면 한 호흡에 눈이 뒤집히고 하체에 힘이 들어가 눈앞의 여인에게 달려들어야 할 향기와 요염한 모습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용대명은 흔들리지 않았다.
불사신공의 수준이 일정 이상이 되니 자연스럽게 심령까지 보호했던 것이다.
“아오, 냄새!”
진짜 냄새를 참을 수 없다는 듯 용대명은 얼굴을 잔뜩 찌푸렸다. 한 손으로 코를 감아쥐었다.
울컥!
아무리 요녀라고 해도 여인 아닌가?
창피하고 부끄럽고!
환희궁 부궁주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죽어라-앗!”
“에이, 욕심도…….”
파카카캉. 타탕. 쉬각.
“아악!”
환희궁 부궁주의 가슴 어림에 긴 상흔을 만들어 놓은 용대명은 누가 용무린의 부친 아니랄까봐 슬슬 용무린과 같은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다.
“덤벼! 탄력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는 비곗덩어리 가슴 대신 이번엔 목을 베어 주겠다.”
자존심 팍팍 긁어대는 얄미운 말과 함께 똥개 부르듯 까딱대는 손!
환희궁 부궁주의 눈이 홱 뒤집혔다.
“반드시 죽인다! 죽어어-엇!”
휘릭. 패애애액.
“에이, 냄새난다니까 왜 자꾸 팔을 들어 올리고 그러느냐?!”
휘슷. 파아아-!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이죽거린 용대명이 무량천심의 초식을 펼치기 시작했다.
***
용무린의 도움으로 기세를 올리는 사천성.
소림과 무당파와 개방, 비룡문의 연합된 힘으로 마교의 2로를 무너뜨려나가는 호북성과는 달리 안휘성의 상황은 너무나 열악했다.
신마와의 일전을 통해 남궁, 황보, 팽가의 가주 및 수뇌부들이 몰살당한 이유가 가장 컸다.
아마 무림맹주 풍연호가 준비한 회심의 일격이 아니었다면 제아무리 주변을 다지며 천천히 북진을 하는 것이 마교의 기본 작전이라고 해도 남궁세가는 이미 한 줌 재가 되어 버렸을 것이다.
“그래도 아녀자들과 아이들은 세가를 벗어났으니 다행입니다, 그려.”
팽가의 직계 중 그나마 지위가 있던 팽무강의 덕담에 남궁유룡이 독기를 뿜어냈다.
“후대를 이을 걱정을 덜어냈으니 이제 죽기로 싸우는 일만 남았지요.”
모두가 같은 심정일 것이다.
팽가나 황보세가 역시 가주와 수뇌부들을 한날한시에 몽땅 잃지 않았던가? 이곳에 있는 고수들까지 모두 잃으면 그야말로 답이 없는 거다.
‘그나마 신마가 빠져 나가서 다행이지.’
‘이제는 해볼 만해!’
‘죽기로 싸운다면 우리 터전만큼은 지켜낼 수 있을 거야.’
‘해낼 수 있어.’
그 날 이후 신마가 보이지 않는 이유를 며칠 전에야 알 수 있었다. 무림맹주 비천검제 풍연호가 보여 준 의기 덕분이라는 것을…….
“모두 기운들 내거라. 죽지 않고 이렇듯 살아 있으니 언제고 복수도 하고 다시금 가문을 일으켜 세울 수도 있을 것이다.”
당가의 가주 당현이 목소리에 힘을 주었다.
용무린의 부탁 때문에 제독주를 홍연왕부 인근까지 가져온 후 혹시라도 모를 일에 대비해 당가의 천독대와 함께 2선에서 대기하다가 구해낸 것이다.
당현과 당가의 천독대가 아니었던들 이만큼의 인원이라도 살아남을 수가 없었으리라.
“예, 어르신.”
“염려 마십시오, 당가주님. 말씀대로 힘을 낼 것입니다.”
남궁유룡을 비롯한 팽가와 황보세가의 생존자들이 억지로라도 힘을 낼 때였다.
그때였다.
“크크크. 마음껏 짓밟아라! 놈들을 끝으로 안휘성을 접수한다!”
어림 반 푼어치도 없는 생각이라는 듯 해일 같은 수준의 어두운 그림자가 남궁세가의 담을 넘었다.
드디어 올 것이 온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