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숙명의 적 드디어 맞서다(10권) (85/104)

신마귀환 10권

서경 신무협 소설

1.숙명의 적 드디어 맞서다

하루 밤과 낮이 흘렀다.

풍연호가 쏟아낸 호심결로 인한 내상에 힘들어하던 음양자는 언제 그랬냐는 듯 떨쳐 일어났다. 신마가 작정하고 불사마력을 쏟아낸 덕이었다.

“감사합니다, 신마시여.”

쿵!

감격에 겨운 음양자가 청석에 이마를 찍었다.

생각지도 않았는데 한 번의 환골탈태를 했다. 그 전에도 오마종 중 셋을 상대할 수 있을 정도의 무력을 지니고 있었는데 지금은 주입된 불사마력과 환골탈태로 인해 더더욱 무시무시해졌다.

“이렇게까지 저를 아껴주시다니! 크흑!”

너무나도 감격한 나머지 음양자는 말을 잇지 못했다.

무위(武威)까지 글자 그대로 일인지하 만인지상에 걸맞게 상향되었기 때문이었다.

신마가 슬쩍 웃으며 다시 불사마력을 일으켰다. 음양자를 강제로 일으켜 세웠다.

“되었다. 누차 말하지만, 너는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몸이니 함부로 상하게 하지 말거라.”

“충!”

대답하는 음양자의 목소리가 어느 때보다도 컸다.

그 즈음 만겁문과 주변 흑도 세력들로부터 연락이 들어왔다. 음양자의 명령에 따라 비천검제 풍연호와 그 수하들의 주검을 잘 수습해 뒤로 빼냈다는 전갈이었다.

“좋아! 본 좌의 편지와 함께 놈들의 주검을 용가 애송이에게 보내도록 한다.”

대회전으로 유도하기 위한 일종의 미끼인 셈.

“옳으신 판단입니다, 신마시여.”

음양자 역시 소리 높여 찬성을 했다.

후회 없는 대회전을 벌이기 위해서는 몸 상태를 최상으로 만들어 둬야 하니 피차 서로 간에 그만한 시간이 필요하지 않겠는가?

풍연호와 그 수하들의 주검과 함께 보내는 신마의 친서라면 정파 역시 응할 것이다.

“여기 있나이다.”

문방사우가 내어져 왔고 신마는 붓을 들어 일필휘지로 용무린에게 보낼 글을 적어 내려갔다.

“혈마종!”

“말씀하소서, 신마시여.”

음양자 뒤에 늘어서 있던 혈마종이 한 발 앞으로 나서며 절도 있게 고개를 숙였다.

둥실.

소리도 없이 떠오른 전서가 혈마종을 향해 미끄러지듯 이동했다. 혈마종의 코앞에 떠 있었다.

“내 친서를 가지고 가서 용가 애송이에게 전하라. 무림맹주와 그 수하들의 주검을 가지고 가면 아마 내 의지를 알아들을 것이다.”

“충!”

똑 소리 나는 대답과 함께 내민 혈마종의 손에 전서가 스르르 내려앉았다.

“차질 없이 수행하겠나이다.”

절도 있는 대답을 끝으로 혈마종이 대전 밖으로 나섰다.

신법을 전개했다.

목표는 동정호 인근의 흑도 세력이었다.

그곳에서 풍연호와 그 수하들의 주검과 함께 움직일 생각인 것이다.

***

이레 후.

용무린은 악양에 도착했다.

동정호로 인해 풍요롭고 넉넉해야 할 악양은 한차례 난리를 치고 지나간 구유마문으로 인해 아직까지도 민심이 흉흉했다.

흠칫. 와다닥.

‘눈만 마주쳐도 다들 움찔움찔 하는구나.’

이방인이라고 할 수 있는 용무린의 등장에 화들짝 놀란 양민들이 문을 걸어 잠갔다. 시선을 피했다. 재빨리 건물 안으로 피신했다.

‘이래서야 어디 원…….’

공연히 악양에 들려 양민들에게 폐를 끼친 느낌이었다.

아마도 용무린의 허리에 매인 풍뢰 때문에 더더욱 두려워하는 것만 같았다.

양민들로서는 누가 흑도의 악적인지 정파의 협객인지 알 수 없으니 병장기를 지닌 사내는 덮어놓고 일단 두려워하는 것이다.

‘동정호를 배로 가로지르는 것이 그래도 가장 빠른 길이라고 했지?’

개방의 정보에 의하면 풍연호 맹주가 마지막으로 향한 곳이 바로 동정호 건너편의 만겁문이라고 했다.

‘식사만 하고 바로 배를 타자.’

그런 생각으로 적당한 객잔을 찾을 때였다.

관도 끝에서 한 무리의 무인들이 나타나더니 용무린을 향해 다가왔다.

쾅! 탁! 우당탕!

뭔가 낌새가 이상했는지 주변 상점들이 죄 문을 닫아걸었다.

피식.

용무린이 입술만 움직여 싸늘하게 웃었다.

다가오고 있는 무인 중 선두에 선 자가 누구인지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혈마종이었다.

냉혈곡에서 무당파의 장문인 자운진인의 손에 낭패를 겪었던 바로 그 마인이었다.

“혈마종. 네가 죽으려고 왔구…… 응?”

당장 거리를 좁혀 놈의 목을 날려 버리려던 용무린의 눈이 살짝 커다래졌다.

놈의 등 뒤로 놈의 수하들이 쭉 따라 오고 있었는데 하나 같이 백기를 등에 매고 있었던 거다.

‘백기?’

백기라면 보통 항복을 뜻한다.

아니면 싸울 생각이 없고 대화를 원한다는 적극적인 표시가 아니던가?

‘대체 뭐하는 수작이지?’

더더욱 수상쩍은 것은 수레였다.

어림잡아도 스무 개가 넘어가는 수레에는 정체불명의 기다란 상자가 실려 있었는데, 보는 순간 어쩐지 알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

‘설마…….’

기다란 상자의 정체는 관(棺)으로 보였다.

‘진짜 관인가?’

다가오면 올수록 확실해졌다.

놈과 놈의 수하들이 끌고 있는 수레에 실린 수백여 기다란 상자는 분명히 관이었다.

나부끼는 백기. 그리고 관.

대뜸 감이 왔다.

‘풍 맹주…….’

십중팔구는 그와 그의 수하들이리라.

꾸욱.

용무린의 주먹에 절로 힘이 고여 들었다.

그 모습에 바짝 긴장했는지 혈마종이 모래라도 한 주먹 퍼 먹은 듯 껄끄러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오랜만이구나.”

훅! 파아아-!

혈마종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그의 목 어림이 쭉 찢어지며 가는 피 한 방울이 흘렀다. 그 짧은 사이 용무린이 손을 쓴 것이다.

“내가 누군지 알고 왔지? 그렇다면 주둥이 함부로 놀리지 마라, 늙은이.”

백기를 들고 왔어도 소용없다.

정말 풍 맹주의 주검을 가지고 온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용무린으로 하여금 눈곱만큼만 신경을 거슬려도 출수를 할 일촉즉발의 상태로 만들어 버린 거다.

“……!”

입을 열어 선뜻 뭐라 답을 할 수는 없었던 혈마종이었지만 속으로는 소스라치게 놀라는 중이었다.

‘이, 이렇게 달라졌을 줄이야!’

냉혈곡에서의 만남 이후 불과 육 개월 정도의 시간밖에 흐르지 않았다.

‘그때도 나이답지 않은 엄청난 무위를 보여주었었는데 지금은 아예 그때와도 달라!’

그래도 냉혈곡에서 봤을 때는 잘 만 하면 양패구상 정도는 가능하겠다고 생각했었는데 어떻게 그 짧은 시간에 이렇게 바뀔 수 있단 말인가?

‘신마시여…… 으음?!’

용무린을 보며 홀연히 신마를 떠올렸던 혈마종은 자신이 눈앞의 애송이를 신마와 같은 선상에 놓고 있다는 깨달음에 흠칫 놀라야만 했다.

그런 혈마종을 향해서는 시선도 돌리지 않은 채 관만 바라보고 있던 용무린의 입이 불쑥 열렸다.

“저 관……. 뭐냐?”

대답 대신 혈마종은 부르르 떨리려는 손을 사력을 다해 억누르며 용무린을 향해 내밀었다.

혈마종의 손에는 한 장의 서신이 들려 있었다.

용무린은 잠자코 그 서신을 받아 들고 읽기 시작했다.

-신마다.

거두절미하고 용건만 말하겠다.

구질구질하게 싸움을 계속 끄는 것은 피차 시간낭비에 가까우니 짧고 굵게 가자.

대회전!

모든 것을 걸고 대회전을 벌이기로 하자.

당연히 승자가 모든 것을 갖는다.

대회전 약속을 함에 있어서 서로의 힘을 우회하거나 하는 잔머리 따위 용납하지 않겠다. 나와 같은 힘을 지닌 존재답게 행동하길 바란다.

피식.

거기까지 읽어 내려간 용무린의 입술이 슬그머니 위를 향해 말려 올라갔다.

‘이거, 제법 멋을 아는 놈이었네?’

모든 것을 걸고 벌이는 대회전.

승자가 모든 것을 가지되 서로의 힘을 우회해 본산을 치려 하는 등의 잔머리 따위 없이 순수하게 겨뤄 보자는 말이 마음에 들었던 것이다.

-후회 없는 대회전이 되기 위해서는 피차간에 전력을 재정비할 시간이 필요하겠지?

재정비를 위한 성의를 보낸다.

감히 마교 본산에 진입했던 무림맹주의 주검과 그의 수하들이다.

성의껏 수습해 두었으니 후하게 장례라도 치러 주도록!

그들은 용감했다. 그리고 뛰어났다.

나 신마가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을 만큼 진정한 무인들이었다.

보름 정도면 되겠지?

동정호 남단의 악록산 아래 평원이 좋다.

수많은 피가 흘러도 동정호의 물로 씻을 수 있어 대단위 전투를 벌이기엔 더할 나위 없는 곳이지.

그곳에서 보자.

신교 교주 신마.

그야말로 자신만만하며 패기 넘치는 글이었다.

“큿. 크크하하하핫!”

콧방귀로 시작한 웃음은 이내 통쾌한 것으로 바뀌었다.

신마가 보낸 전서가 마음에 쏙 든 것이다.

“좋아, 좋아.”

“……!”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좋아’를 연발하자 비로소 검게 죽어 있던 혈마종의 혈색이 조금 돌아왔다.

“신마에게 가서 전해. 보름 후 그곳에서 보자고 말이야.”

“알겠소이다.”

“아아, 잠깐!”

즉시 돌아서려는 혈마종을 용무린이 잡았다.

“선물 고맙다고 전해줘. 답례로 혈마종 너와 떨거지들의 목을 보름 동안 더 붙여 놓았다고 전하면 알 거야.”

“……아, 알겠소.”

떨떠름한 얼굴을 하고 있던 혈마종이 올 때와는 다르게 엄청난 속도의 신법을 펼쳐 사라졌다.

물론 함께 왔던 흑도의 떨거지들은 그대로였다.

감히 용무린을 향해 시선도 돌리지 못하면서도 맡은 바 임무에는 충실했다. 수레를 모두 동정호변에 자리한 항구로 이끌었다.

‘제법 신경을 썼구나.’

신마의 의중을 확실히 알 수 있었다.

동정호변의 청련항에는 커다란 상선 두 척이 정박해 있었는데 풍연호와 수하들의 관을 싣기 위해서인지 한 사람의 승객도 받지 않았다.

이미 다 이야기가 되어 있던 듯 풍연호와 불사수호대원들이 잠든 오동나무 관들이 두 척의 배에 나누어 빠짐없이 실렸다.

‘갑시다, 맹주.’

용무린은 풍연호가 잠든 관에 가만히 손을 올렸다.

악수라도 나누려는 것인지 천천히 쓰다듬었다.

그러자 호탕하고 사내답기만 하던 생전의 풍연호의 모습이 홀연히 떠올랐다. 용무린은 다시 궁금해졌다.

‘나는 아직까지도 모르겠소이다. 어째서 맹주가 이렇듯 무모하게 일을 벌였는지 말이오.’

맹주씩이나 되는 사람이 스스로 암전을 자처했다.

그럴 만한 이유가 대체 뭘까?

‘혹, 천기자? 아니면 혜월?’

그들도 아니면 전생의 나인 절대검신 독고황의 유지라도 따로 있었던 것일까? 역천자를 세상에서 깨끗이 지우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렇게 해야 한다는?

‘후우. 모르겠소, 맹주. 하지만 한 가지만은 확실하외다. 맹주가 많은 사람들을 살렸소. 나조차도 생각지 못했던 암전을 맹주가 직접 맡아 주시는 바람에 신마가 화들짝 놀라 발길을 돌렸고 대회전까지 하자고 했으니 말이오.’

암전에 마교 본산 절반이 불에 타고 음양자가 크게 다치지 않았더라면 신마가 대회전을 하자고 했을까?

아니! 아닐 것이다.

십중팔구 신마는 지금까지와 같이 최대한 자신과의 대결을 뒤로 미룬 채 많은 인명을 담보로 하는 소모전을 펼쳤으리라.

‘암전으로 스러졌으나 정파 무림 모두에게 화려하게 기억될 것이오, 맹주.’

그러는 사이 배가 출항했다.

앞으로 만 하루.

수로를 타고 거슬러 오른 배는 호북성 남단의 감리현에 이르게 될 것이다.

‘비룡문과 개방의 전력이 그곳에서 대기하고 있겠지.’

항구에서 출발하기 전 조방의 연락망을 통해 전서가 날아올랐을 테니 이미 다들 비천검제 풍연호와 불사수호대원들이 돌아오고 있음을 알리라.

***

다음 날 오후 무렵.

예상했었던 것처럼 감리현의 항구에는 많은 수의 정파 무림인들이 달려 나와 대기하고 있었다.

“이 무모한 사람아! 어쩌자고 상의도 없이 그런 짓을 벌인 거야? 그렇게 혼자 편히 쉬니 좋은가? 그래?”

그간 쌓아 왔던 정 때문인지 화운태상장로가 가장 크게 목소리를 높였다. 핏발이 곤두선 눈에는 그렁그렁 눈물마저 고여 있었다.

“선재, 선재라……. 살신성인의 의지로 스스로를 암전으로 낮춘 덕에 많은 사람이 살 수 있었소, 맹주. 이제 그만 편히 쉬시오.”

“이제는 우리가 맡도록 하겠소이다, 맹주.”

“반드시 놈들과의 싸움에서 이겨 무림을 지켜내도록 하겠습니다. 지켜봐 주시오.”

살계승 효정 대사와 비룡문주 용대명 그리고 자운진인이 침통한 얼굴로 맹주의 귀환을 반겼다.

생환이었으면 더 좋았을 테지만, 이것이라도 어딘가?

깨끗이 몸을 닦아 염을 하고 정갈한 수의라도 입혀 놓았는데 말이다.

이내 성대한 장례가 치러졌다.

벌써 한 달 가까이 계속되는 마교와의 전쟁, 무인으로서 죽음이야 항상 달고 사는 일이었지만 무림맹주라는 사내의 죽음은 그 무게가 또 다른 법이었다.

용무린의 전서가 사방팔방으로 날았다.

개방과 하오문 그리고 조방과 관군의 연락망을 통해서까지 무림맹 산하 모든 문파와 세력들에게 전투 중지와 회군의 명령이 내려졌다.

대회전을 위한 재정비의 시간!

그리고 무림맹주였던 비천검제 풍연호와 불사수호대원 및 지금까지 마교와의 전쟁으로 인해 스러져간 많은 정파 무인들의 영령을 위한 장례!

그 두 가지를 위해 모든 전투가 즉시 멈추어졌다.

마교의 마인들은 본산과 최대한 가까운 집결지를 향해 이동했고 정파의 무인들은 장례가 치러지는 감리현으로 밀려들었다.

슬픔을 삼키며 치러진 장례였다.

보름 후에 있을 운명의 대회전을 앞둔 터라 세력을 결집시키고 재정비를 하며 정신 무장을 위해 이보다 더 좋은 기회는 사실 없을 터였다.

동정호가 자리한 남쪽을 향해 거대한 묘지가 생겨났다.

스스로 암전을 자처해 마교의 북진을 막으려 했던 풍연호의 의지를 받들어 그와 불사수호대원들 그리고 지금까지 스러져간 많은 정파 무인들의 영령이 마교의 진격을 이곳에서 막아낼 것이라는 의미였다.

그 후 용무린은 자연스럽게 무림맹주의 위에 올랐다.

자연스럽게 그냥 그렇게 되었다.

예전 같았으면 귀찮다며 기를 쓰고 거부했겠지만 아직도 풍연호가 스스로 암전을 자처한 이유를 모르는 용무린은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얼마 안 남았다.’

시시각각 다가오는 결전의 날을 기다리며 용무린은 서슬파란 눈을 빛냈다.

‘깡그리 쓸어버리리라!’

나 역시 후회 따위 남기지 않을 것이다.

***

대회전에 관한 소식은 불과 사흘 만에 전 무림에 퍼졌다.

당연히 고즈넉한 소림 한 귀퉁이에도 전해졌다.

반짝.

“드디어…….”

하늘이 무너져도 변함없을 부동심을 보이던 소림의 장문방장 법정의 눈에서 불똥이 튀었다.

“역천자와의 대회전이로구나!”

이 날만을 기다려왔다.

더는 참고 기다릴 필요가 없다. 이제야말로 떨쳐 일어나야 할 때인 것이다.

“신마가 바로 역천자겠지?”

한때는 혈교의 교주가 역천자가 아닌가 하고 의심하기도 했다. 하지만 혈교주는 신마의 손에 제거되었다. 당연히 신마가 역천자일 수밖에 없는 거다.

“이제야말로 놈을 쳐 없앤다.”

법정이 떨쳐 일어났다.

방장실 밖으로 훌쩍 나서더니 자신의 키 크기만큼이나 커다란 범종이 있는 종각으로 향했다. 대뜸 범종을 타종하기 시작했다.

데엥-! 데-엥!

범종 소리가 울리자마자 무승들이 달려 나왔다.

“갑자기 무슨 일이냐?”

“허엇! 바, 방장스님께서……?”

“방장스님! 어찌 타종을?”

달려 나왔던 무승들이 깜짝 놀랐다.

장경각주나 총무승을 비롯한 소림의 수뇌부들이 법정을 향해 질문을 던졌지만 법정은 가타부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데에-엥. 데에에-엥-!

내공까지 보태 더더욱 힘껏 타종을 할 뿐이었다.

무려 백팔 번!

데에에-엥!

크고 깊은 범종 소리가 소림사 담장을 넘어 숭산 전역에 메아리쳤다. 숭산 깊은 골짜기마다 깃들어 선정에 들었던 몇몇 승려들을 일깨웠다.

데에에에-엥!

“아미타불!”

그들은 백팔 번의 타종 소리를 듣자마자 수련을 멈추었다.

곧장 범종 소리가 들려오는 종각을 향해 신법을 전개해 모여들었다.

데에에에-엥!

“허허허! 내 살아생전에 척사타종이 울릴 줄이야!”

놀랍게도 공양주승장, 그러니까 소림사의 승려들을 위한 밥을 짓는 책임자, 세간에서 그렇게 농담 삼아 말하던 소림사 주방장이 삽자루 같은 밥주걱을 내던지고 나섰다.

그뿐이 아니었다.

말없이 선 수행과 불경 번역에 힘을 쓰며 종을 치는 소임을 맡고 있던 종두승과 허드렛일이나 하는 행자로만 알고 있던 불목이 둥그렇게 굽은 허리를 쭉 폈다. 팔부신장과 같은 기세를 뿜어냈다.

대중들이 마실 차를 준비하는 소임을 맡던 다각승에, 무공수련 대신 이것저것 잡일이나 돕던 별좌승까지 하던 일을 접었다. 화둥잔과 같은 신광을 빛내며 신법을 펼쳤다. 공간을 접듯 종각으로 달려왔다.

데에에-엥! 데에에에엥-!

더더욱 놀라운 일은 장문방장 법정 앞으로 몰려온 면면의 평소 맡은 책무가 허드렛일에 가까운 일이었음에도 어느 하나 하찮은 이 대하듯 거만한 시선을 보내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이것이 바로 북숭 소림의 진정한 저력!

언제 어느 때,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생각지도 못했던 고수들이 튀어나오는 곳이 바로 소림이었기에 가능한 반응인 것이다.

마침내 백팔 번의 범종 타종이 모두 끝이 났다.

종각 앞에는 소림의 승려 일천여 명이 몰려들었다.

그 중에는 무승도 있었고 무예와는 전혀 상관이 없는 학승과 선승에 주방장과 불목까지 섞여 있었지만 법정은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듯 형형한 눈빛으로 그들을 돌아보며 선언했다.

“그 날이 왔다! 불사항마승은 즉시 떠날 차비를 하라. 나와 함께 역천자를 제도하러 가도록 하자!”

불사항마승!

그동안 감춰져 왔던 소림의 비밀스러운 승려 조직이 드디어 눈을 뜬 것이다.

“장문방장의 명을 따르오이다.”

“장문방장의 명을…….”

동시에 오백여 명에 이르는 승려가 반장의 예를 취했다.

화아아악!

놀랍게도 그 중 태반이 평소에는 무공수련과 담을 쌓고 지내던 승려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반장의 예를 취하는 순간 감히 범접하기 힘든 기운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불사신기와 비슷하면서도 또 다른 기운이다.

절대검신 독고황이 호심결을 내놓으면서 소림을 위해 애쓴 결과였던 것이다.

이름하여 불사항마력!

풍연호와 함께했던 불사수호대에 이어 역천자의 심장을 찌를 두 번째 무기였다. 불문내공과 하나가 되었으니 그 항마력이야 불문가지이리라.

***

대회전의 소식은 황궁에까지 흘러들었다.

병부상서를 비롯한 대신들의 급박한 보고를 듣고 있던 황제의 용안은 펴질 줄을 몰랐다.

‘큰일이로고…….’

북에서는 조로스 칸이 삼십만 대군을 휘몰아 남진을 하고 있었으며 남에서는 마교라고 하는 전통의 악적들이 무림을 집어 삼킨답시고 난리였다.

‘총병관이 직접 나섰음에도 조금씩 밀리고 있다고 하는데 어찌할꼬?’

조로스 칸이라고 하는 초원의 후예의 실력이 보통이 아닌 모양이었다. 천하의 양문광 총병관이 고전을 하며 조금씩 밀린다고 하는 것을 보니 말이다.

“하루라도 빨리 황룡패주가 감숙의 전장으로 가야만 하옵니다, 폐하.”

“그렇사옵니다! 악적 조로스와 그 수하들의 기세가 흉험하기 짝이 없어 총병관과 양가장의 무인들조차 밀리기 일쑤라 합니다.”

“황룡패주의 용력이 아니고서는 감숙을 혼란하게 하는 북원의 악적들을 제어할 수 없을 것이옵니다, 폐하.”

대신들의 뜻은 한결같았다.

이구동성으로 용무린의 감숙 투입을 요청했다. 정말 답답한 노릇이었다.

‘누가 그걸 모르나?’

마음만 같아서는 어서 빨리 군사들을 일으켜 황룡패주를 도와 마교를 쓸어버린 후 황룡패주로 하여금 감숙의 전장으로 나아가 공을 세우도록 하고 싶다.

‘젠장. 그럴 수가 없잖아, 현실이!’

지금으로서는 군사를 뽑아 기본 훈련을 마치는 족족 감숙의 전장에 투입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어찌나 병사들이 빨리 죽어 나가는지, 이러다가는 병사들이 남아나지 않으면 어떻게 하는가 하는 두려움이 들 정도였다.

그러니 어찌 용무린을 도와 마교와의 전쟁을 빨리 끝내도록 도울 수 있겠는가?

‘패주. 고는 패주만 믿고 있다. 대회전까지 이제 열흘이 남았다지?’

총병관과 양가장의 저력이라면 그때까지는 어떻게든 버틸 수 있을 것이다.

‘이기고 오라. 그리하여 감숙으로 나아가 이 나라에 드리운 먹구름을 완전히 거두도록 하라.’

황제는 애타는 시선을 남쪽으로 돌렸다.

자신의 간절한 바람이 용무린에게 닿을 수 있도록 기원하고 또 기원했다.

***

연일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고 있는 감숙 북단 가욕관.

며칠째 이어지는 전투에 총병관 양문관의 눈에는 벌겋게 핏줄이 돋아 있었다.

‘정말 지독하구나!’

전설적인 테무친을 길러낸 북원의 전설 청랑문이 다시 열려 길러낸 것이 바로 조로스 칸이라는 사실을 감숙에 도착하고서야 겨우 알았다.

어쩐지 그의 일개 수하조차 상대하기가 힘에 부치더라니!

명 제국만큼 병사들의 수급이 원활하지 않은 북원의 특성상 조로스 칸이 전면전을 피하고 야금야금 먹어 들어오는 통에 겨우 살아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

‘놈의 무위는 최소한 양문광 셋 이상이야.’

먼발치에서 눈만 마주쳤음에도 전신에 소름이 쫙 돋았다.

비릿하게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뿜어내는 그 위엄과 기세를 맞상대할 수 있는 무인은 황룡패주 용무린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하지만 패주께서도 며칠 사이 대회전을 벌이실 생각이라고 하지?’

용무린을 이곳 감숙으로 모셔오고 싶은 생각이 간절했지만 그럴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렇다면 방법은 하나뿐이다.

죽는 한이 있더라도 용무린이 이곳으로 달려 와주기까지 버텨내야만 하는 거다.

꾸우욱.

절로 주먹에 힘이 고였다.

‘패주. 어떻게 하든 패주께서 당도하시기 전까지 지켜내도록 하겠습니다. 부디 마교와의 전투에서 승리하신 후 이곳으로 와 주시기 바랍니다.’

다행히 믿는 구석이 생겼다.

홍연왕이 혈교 뇌화탄에서 실마리를 얻어 장군전을 개량해 뇌화전이라는 귀물로 발전시켰다는 말을 듣고 화기창을 독려했던 것이다.

홍연왕을 압송하고 그의 수하들을 깡그리 잡아 자산을 압수하는 과정에 나온 결과물을 화기창에 빠짐없이 보냈던 것이 유효했다.

불과 두어 달밖에 되지 않는 시간이었지만 화기창의 기술자들은 뇌화전을 본 후 그 간단하고도 획기적인 발상을 흡수해 지금 새로운 뇌화전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뇌화전이 도착하면 훨씬 수월할 거야.’

어른 팔뚝만 한 크기의 흑색화약 통 안에 날카롭기 짝이 없는 철편을 가득 넣어 살상력을 높였다고 하니 어쩌면 초원의 무리를 깡그리 쓸어버릴 수 있을지도 모른다.

뿌우우! 둥! 둥! 둥! 둥! 둥!

진격 나팔 소리와 함께 북이 울리기 시작했다.

“전군 진겨-억!”

“우와아아!”

“이야아-아!”

양문광의 명령과 함께 다시금 가욕관이 살육의 소용돌이에 빠져들었다.

***

만금상단 내원.

제갈영령은 며칠째 일손이 잡히질 않아 너무 힘들었다.

그곳까지 전해진 마교와의 대회전 소식 때문이었다.

‘용 가가! 부디, 조심하시어요.’

그의 능력을 믿는다.

하지만 상대는 천기자와 혜월 그리고 칠십 년 전 신마 진무량을 무너뜨린 절대검신 독고황이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어서까지 막으려 한 역천자가 아닌가? 걱정이 되지 않으려야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툭툭.

“괜찮을 게다.”

누군가 제갈영령의 어깨를 가볍게 토닥이며 달랬다.

“아! 오라버니!”

제갈세가의 장손인 제갈극이었다.

“오셨어요?”

“그래. 매제 걱정에 얼굴이 반쪽이 되었구나.”

“……!”

제갈영령의 얼굴에 살짝 홍조가 돌았다.

얼굴이 반쪽이 된 이유는 걱정 때문이 아니라 다른 데 있었기 때문이었다.

꼬옥.

제갈영령의 손 하나가 아랫배를 감싸 안았다.

자신의 얼굴을 반쪽이 되도록 만든 하늘이 주신 선물이 깊은 곳에서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었다.

“괜찮아요, 오라버니.”

“요즘 식사도 잘 하지 못한다고 들었다. 연일 계속되는 격무와 매제 걱정에 잠도 잘 못 이루면서 식사까지 어설프면 어찌하느냐?”

식사가 어설픈 이유는 바로 새 생명 때문이었다.

존재감이 어찌나 확실한지 음식 냄새만 맡아도 속이 왈칵 뒤집어진다. 그래서 어설플 수밖에 없었다. 물론 불안한 마음 탓도 있긴 하지만…….

“잠시만 기다려라. 오라비가 특별히 용봉탕을 만들어 오라 일렀다.”

“요, 용봉탕이요?”

제갈영령의 눈이 동그래졌다.

“그래.”

제갈극이 흐뭇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일 때였다.

아직 음식이 도착하기도 전인데, 용봉탕 냄새를 떠올린 것만으로도 제갈영령의 속이 뒤집어졌다.

“……우우읍! 웨에엑!”

계속되는 헛구역질!

제갈세가의 장손이 그 의미를 모를 리 없다.

“영령아! 너 설마……?”

제갈극의 눈이 동그래졌다.

여러 가지를 떠올렸는지 얼굴 표정은 복잡 미묘했다.

“맞아요.”

하지만 제갈영령은 달랐다.

아직 혼례를 올리지는 않았지만 양가에서 인정받은 사이에다 제갈문군은 다 알면서도 그녀를 직접 이곳으로 보내주시지 않았던가?

“그의 아이예요.”

다소 부끄럽긴 하지만 손가락질 받을 일이 아닌 거다.

제갈영령은 당당하게 어깨를 폈다. 제갈극을 향해 고개를 똑바로 들었다. 그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이 녀석아! 어째서 내게 말을 하지 않았느냐? 대체 어쩌려고?!”

제갈극의 목소리가 살짝 높아졌다.

책망을 하려는 것인가?

가당치 않다는 생각에 제갈영령의 눈이 엄해졌다. 목소리가 단호해졌다.

“아직 평화가 오지 않았기에 황룡패주이자 무림왕인 그분께 부담을 드리기 싫어 말하지 않았을 뿐이에요. 저는 이미 비룡문의 사람, 제갈가의 소가주께서 걱정하실 일이 아닙니다.”

제갈극은 이내 자신의 실수를 깨달았다.

‘아! 이 녀석이 오해를 하고 있구나. 내가 가문의 체면을 생각해 화를 내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어!’

당연히 아니었다.

물론 화가 나긴 했다. 하지만 그것은 귀중한 생명을 가진 녀석이 태교에나 힘을 쓸 것이지 과중한 업무를 계속해서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녀석아! 이 오라비의 목소리가 높아진 것은, 복중의 아이를 위해서도 업무를 줄이고 너를 돌보지 않았기 때문에 화가 나서였느니라!”

“……!”

그제야 제갈극의 진심을 알아차린 제갈영령의 얼굴에 비로소 미소가 돌아왔다.

제갈극이 자리에서 발딱 일어섰다.

제갈영령의 손을 잡고 일으켜 세웠다. 침실이 있는 곳으로 이끌었다.

“가자! 어서 가서 쉬자꾸나!”

“오라버니! 아직 업무가…….”

“업무는 개뿔!”

“……!”

“이 오라비가 알아서 한다! 그러니 너는 아무 염려 말고 태교에나 힘을 써라! 알겠느냐?”

“예, 오라버니.”

어찌나 단호한 목소리인지 제갈영령은 결국 못이기는 체 따를 수밖에 없었다.

“혹시 말이다.”

침실로 들어가는 사이 제갈극이 은근한 어조로 물었다.

“태몽은 꾸었느냐?”

제갈영령이 반짝이는 눈으로 답했다.

“며칠 전, 하늘에 무지개가 뜨더니 한 마리의 거대한 황룡이 제 안으로 쑥 들어왔습니다.”

“사내아이로구나! 와하하하!”

제갈극이 웃음을 터뜨렸고 제갈영령은 곱게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용무린은 이 사실을 알면 어떻게 반응할까?

놀랄까? 아니면 기뻐할까?

지금 이 순간, 제갈영령의 마음은 나비처럼 훨훨 날아 저 멀리 호북성 최남단 도감현 외곽에 머무르고 있는 용무린에게로 향했다.

***

제갈영령의 마음이 와 닿은 것일까?

비슷한 시간 용무린 역시 북쪽 하늘을 보며 마음속으로 가만히 되뇌고 있었다.

‘령매. 이제 정말 얼마 남지 않았어. 조금만 더 참아. 내가 깔끔하게 마무리 짓고 갈게.’

불사대천검을 완벽하게 대성하지 못한 점이 살짝 아쉽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신마에게 패배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이긴다. 반드시 쓸어버린다.’

그렇게 다짐을 하는 순간이었다.

휘우웅.

어디선가 한 줄기 바람이 불어와 용무린이 자리한 중앙 천막을 뒤흔들었다.

우드득.

일진광풍이 사뭇 거세었는지 무림맹을 뜻하는 깃발의 중단이 버티지 못하고 부러졌다.

갑자기 치미는 불길한 느낌에 용무린의 심장이 한 차례 크게 뛰었다.

대회전이라고 하는 큰일을 앞두고 있어서일까?

깃발이 부러진 일에 공연한 의미를 부여하지 않게 하려는 비룡문주 용대명이 바로 나섰다.

“그간 치러왔던 전투에 생채기가 많이 났었나 보구나. 그렇지 않아도 튼튼한 것으로 갈려 했었는데, 잘 되었다. 새 술은 새 항아리에 담는 법, 맹주가 바뀌었으니 깃대 역시 새로 바꾸라는 뜻으로 받아 들여라.”

살계승 효정 대사와 자운진인을 비롯한 구파일방의 수뇌부들이 다투어 나섰다. 대회전을 앞두고 벌어진 불길한 징조를 애써 지우려 했다.

“아주 좋은 액땜을 했구려, 맹주.”

“맞소이다. 이제야말로 신마를 거꾸러뜨린 후 무림을 안정시킬 기회가 온 것이외다.”

“옳은 말씀입니다. 깃대도 새것으로 바꾸고 액땜도 끝이 났으니 이제야말로 승리만 남은 것입니다. 하하하!”

“거, 좋은 말씀입니다. 하하하!”

조금은 과하다 싶을 정도의 반응들이었다.

그 마음을 어찌 모르겠는가?

용무린은 한 점 구김살 없는 얼굴로 웃으며 답했다.

“저 아무렇지도 않습니다. 깃발 하나 부러진 것 따위에 무슨 큰 의미를 부여할 제가 아니지요. 신마고 뭣이고, 최소한 지지는 않습니다.”

“하하하! 그럼 되었다.”

“선재, 선재라…….”

“허허허!”

모두가 환하게 웃었다.

하지만 한 번 스며든 불길한 마음은 아무리 웃어도 가슴 깊은 곳 한 편에 요지부동으로 남아 있다는 것을 다들 알고 있었다.

하긴, 굳이 부러진 깃대에 핑계를 댈 것도 없었다.

마교와의 이차 신마대전이다.

그것도 단 한 번의 승부로 모든 것을 결정짓는 대회전이 아닌가? 그런 엄청난 싸움에서 누구인들 살아남을 수 있다고 자신하겠는가?

‘최대한 빠르게 신마를 정리한 후 대가리 급만 골라서 쓸어버린다.’

그것만이 조금이라도 피해를 줄일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리라.

***

소중한 시간이 빠르게 흘렀다.

대회전이라고 하는 무지막지한 결전의 순간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난다 긴다 하는 문파와 세력들이 한 곳에 총 집결을 했기 때문인지 사기만큼은 정말 최고였다. 계속되는 전투에 그동안 치료하지 못했던 내외상도 모두 치료할 수 있었기에 더더욱 좋았다.

남은 시간은 이제 만 하루!

격전장인 악록산 아래 평원으로 가기 위해서는 움직여야 한다.

용무린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풍연호에 이어 용무린까지 모시게 된 천안각주를 향해 단단한 목소리로 명했다.

“갑시다. 악록산 아래로…….”

“예, 맹주!”

짧은 대답과 함께 밖으로 뛰어 나간 천안각주가 크게 소리를 질렀다.

“전군! 이동 준비! 준비가 끝나는 대로 1군부터 차례로 강을 넘도록 한다!”

“명!”

똑 소리 나는 대답과 함께 일사분란하게 움직였다.

천안각주가 그동안 완전히 체계를 잡아둔 효과를 톡톡히 보여주었다. 일말의 혼란도 없이 차례차례 배를 타고 동정호로 흘러가는 강을 건넜다.

그대로 진격하면 반나절이면 족하다.

격전지에서 다시 반나절 정도 재정비를 하면 그대로 끝, 드디어 결전의 날이 밝는 것이다.

두근두근.

용무린부터 시작해 모두의 심장 박동이 조금씩 빨라지기 시작했다. 피와 살이 튀는 전장의 살기에 점점 더 물들어가는 것이었다.

***

비슷한 시간 남악 형산 초입.

신마의 마교 본진 역시 대회전을 위해 북상해 진용을 갖추고 있었다.

“놈들이 움직였습니다.”

“선박을 이용해 장강의 지류를 넘었습니다.”

“반나절 정도면 악록산 앞 평원 끄트머리에 당도할 수 있을 듯합니다.”

시시각각 정보가 쏟아졌다.

매서운 눈으로 정보를 살피던 음양자가 가장 중요한 것을 짚고 넘어갔다.

“우회를 하는 전력은? 대산을 향해 귀주나 강서 혹은 복건성으로 휘도는 놈들은 없었느냐?”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비천검제 풍연호와 같이 스스로 암전을 자처하는 간 큰 세력은 없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깃발로 확인을 했사온데, 사천에서 모습을 보였던 무림맹의 전력은 모두 악록산으로 향한 배에 타고 있었습니다. 많이 줄어들기는 했는데, 현재 사망자를 추산하면 비슷하다는 결론입니다.”

“안휘성에서 출전했던 세력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깃발로 확인한 세력과 생존한 무인들의 숫자가 파악된 정보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무한 인근에 있던 전력들 역시 빠짐없이 악록산으로 향한 것으로 파악됐습니다.”

음양자는 내심 길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다행이다.’

신마의 명령에 놈들의 급소를 찌를 힘을 나누어 보내지 않았는데 정파 놈들은 약속을 어기고 힘을 나눠 보내면 어쩌지 하는 걱정 때문이었다.

‘내가 이런 걱정까지 다 하다니!’

이 모든 것이 다 비천검제 풍연호 탓이다.

놈이 겁도 없이 불회곡을 짓밟기 위해 일천의 무인들과 함께 달려들지만 않았어도 이런 걱정 따위 없이 편한 마음으로 대회전에 임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가슴 졸이는 상황도 내일 저녁이면 모두 끝이다.’

드디어 대회전이 벌어진다.

승리는 당연히 신마가 건재한 신교의 것이리라.

음양자의 시선이 오연히 십 장 상공에서 둥실 떠 북쪽을 바라보는 신마에게로 향했다.

‘반드시 이긴다. 반드시!’

온갖 애를 태우고 속을 끓이게 만들었던 용무린이라는 애송이의 목숨도 내일이면 끝장이 나는 거다.

‘그때를 위해!’

진격이다!

“신교의 전사들이여! 악록산 아래로 진격하라!”

음양자의 입에서 드디어 진군 명령이 떨어졌다.

“우와아아아!”

“신교군림!”

“신교 천세천세 천천세!”

그동안 내, 외상을 회복하고 병장기도 재정비해 기세가 오를 대로 오른 마교의 마인들이 악을 썼다. 마지막 진군을 시작했다.

휘우우우웅. 화르르르륵.

축복이라도 내려 주듯 신마의 전신에 타오르는 검은 불꽃 형상의 불사마력이 어렸다. 신비로운 보랏빛까지 뒤섞여 더없이 신비롭게 보였다.

“크흐흐흐! 드디어 내일이로구나!”

그동안 아끼고 아껴온 최후의 적을 맞상대할 수 있다는 기대감에 신마의 심장이 울컥 울컥 뜨거운 피를 전신으로 휘돌렸다.

생각만 해도 너무 짜릿했다.

마치 피를 나눈 쌍둥이 혈육을 대하듯 닮은 기운을 지닌 존재, 아직 얼굴 한 번 보지 못한 상태였지만 보는 순간 알 수 있을 정도로 친숙한 느낌이다.

세상 그 누구와도 견줄 수 없는 상대인 셈!

그런 상대와 이제야말로 모든 것을 걸고 공전절후의 일전을 나누리라.

쿵쿵쿵쿵쿵.

심장이 고동치지 않는 것이 오히려 이상할 것이다.

“크흐흐흐. 기다려라 내 형제여. 이제 정말 하루밖에 남지 않았음이니…….”

형언할 수 없는 기대감과 여운을 조금 더 즐기겠다는 듯 신마는 그 뒤로도 한참을 더 북쪽을 바라보며 하늘을 유영했다.

***

알 수 없는 두려움과 미묘한 기대감이 교차하며 하루해가 지나갔다.

운명의 대회전이 벌어질 악록산 앞 평원.

전력을 다해 신법을 펼치면 불과 한 식경이면 서로를 향해 공격을 퍼부을 수 있는 거리만 남겨둔 채 진영 배치가 완료됐다.

지독한 긴장감이 감도는 밤이 시작되었다.

날이 밝으면 어떤 일이 벌어질 것인지 모두 다 알고 있기 때문인지 누구도 소리 내어 떠들거나 하지 않았다. 입을 꾹 닫은 채 조금이라도 더 내공을 모아 놓기 위해 운기행공에 빠졌다.

물론 수뇌부들이나 경험이 많은 무인들은 다 쓸데없는 짓임을 잘 안다.

그래서 어떻게 해야 살아남을 수 있는지, 어떻게 해야 효율적으로 초식을 전개할 것이며 더 오랫동안 날카로움을 유지시킬 수 있는지를 알려주려 애썼다.

‘아들아!’

이런 대규모 전투는 처음인 용대명의 눈에 일말의 불안함이 어렸다.

용무린은 슬쩍 용대명의 손을 잡았다.

염려하지 말라는 듯 가볍게 웃어 보이며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아버지. 제가 있잖아요. 결코 지지 않아요.’

‘그래그래, 너만 믿는다.’

용무린이 손을 잡아 건넨 온기가 용기로 변했는지 미세하게 떨리던 용대명의 몸이 그제야 평온을 되찾았다.

어디 불안해하는 것이 용대명 한 사람뿐이겠는가?

다들 똑같이 겁나고 불안해할 것이다.

하지만 다들 곁에 있는 문파의 어른과 의지할 수 있는 사형제들과 눈빛과 온기를 나누며 치밀어 오르는 불안함을 애써 털어냈다.

‘후우. 나 역시 아버지 덕을 보았나?’

용무린도 남몰래 긴 숨을 내쉬었다.

악록산으로 다가가면 갈수록 피부로 느껴지는 신마의 기세 때문이었다.

찌리릿! 오싹!

불사신공과 규천마력이 뒤섞인 무지막지한 힘이 시시때때로 느껴져 용무린으로 하여금 전신에 소름이 돋도록 만들고 있었다.

‘신마. 너도 그러겠지? 내 힘이 느껴지지?’

놈이라고 다르겠는가?

놈 역시 터질 듯 끓어오르는 내 불사신공에 반응해 전율하고 있을 터였다.

‘기다려라. 곧 간다.’

이제 정말 얼마 남지 않았다.

동녘 하늘에 푸름이 번져오기 시작했다.

식사를 준비하는 냄새가 이곳저곳에서 피어올랐다.

오래지 않아 식사를 하게 될 것이고 그 후 무림을 좀먹어 들어오던 마교를 깨끗이 씻어 낼 이차 신마대전이 드디어 벌어지게 된다.

***

한 식경 후.

간단한 소채와 함께 넉넉하게 배를 채운 용무린이 주변을 돌아보며 씩 웃어 보였다.

“자, 이제 출발해 볼까요?”

“허허허. 좋습니다, 맹주. 앞장서시지요.”

소림의 살계승 효정 대사가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반겼다.

긴장 따윈 약에 쓰려 해도 없어 보이는 화운 태상장로가 주먹에서 오도독 소리를 내며 따라 일어섰다.

“좀이 쑤셔 죽겠네. 갑시다, 맹주! 시건방진 마교 놈들 때려잡으러…….”

“푸흐흐. 예! 그럼 가죠!”

활짝 웃어 보인 용무린이 발을 내디뎠다. 휘장 밖을 벗어났다.

반짝. 반짝. 반짝.

용무린이 나서기만 기다리고 있던 무인들의 시선이 시린 빛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말이 필요 없었다.

무인들 중앙이 쫙 갈라졌다. 길이 생겨났다.

성큼성큼.

자신을 위해 생겨난 길을 당당히 통과해 용무린은 전장의 맨 앞으로 나섰다.

뿌우우우. 둥. 둥. 둥.

뿔고둥 소리와 함께 어디선가 북이 울렸다.

척. 척. 척. 척. 척.

훈련 받은 군병들도 아니거늘 평원 건너 마교인들이 오와 열을 맞추어 가까이 다가왔다.

씨익.

용무린의 입꼬리가 둥그렇게 말려 올라갔다.

“가지가지 한다.”

천년 숙원을 이루기 위한 전투라는 것 때문인지 마교에서는 깨나 격식을 차리는 것 같았다.

용무린의 투덜거림에 답변이라도 하려는 것인지 인영 하나가 불쑥 허공으로 치솟았다. 유령이라도 되듯 부드럽게 움직여 앞으로 나섰다.

신마였다.

반짝.

용무린의 눈에 불똥이 튀었다.

‘쌍둥이!’

보는 순간 바로 알 수 있었다.

그와 자신은 쌍둥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서로 닮아 있다는 사실을…….

‘네놈이 바로 역천자로구나!’

절대검신이 남긴 글귀가 홀연히 떠올랐다.

-역천자는 넘어서지 못할 적이라고 생각되면 상대를 집어 삼킨다. 흡수해 강해지려 한다.

어떻게 해서 놈에게서 불사신공의 힘이 느껴지는 것인지 또 어찌하여 혈육과도 같은 아련한 끌림이 있는지 알 것만 같았다.

‘내 안에 남겨진 신마 진무량의 의식은 분명히 놈이 전생의 나를 집어 삼키기 위해 침투시켜 놓은 규천마력의 흔적이겠지.’

그 덕에 진천수라도와 소검비연을 바탕으로 빠른 시간 안에 놀라운 무위를 찾을 수 있었다.

‘그러니 쌍둥이 혈육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의 친밀감과 끌림이 있는 것이겠지.’

어쩌면 서로가 서로를 감지할 수 있는 이유에는 상상을 초월하는 무위 때문보다 쌍둥이로서 자연스럽게 타고난 초감각 때문일지도 모른다.

‘쌍둥이는 개뿔!’

용무린은 잽싸게 헛된 감상을 털어냈다.

어차피 서로는 죽이고 죽일 사이일 뿐, 진실로 피를 나눈 형제 사이도 아닌데 공연히 허튼 생각 따위 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씨이익.

용무린의 입가에 흰 선이 쭉 그어졌다.

백여 장 밖의 허공에 둥실 떠 있는 신마를 향해 불쑥 입을 열었다.

“반갑다, 상관옥. 네가 바로 상관세가의 마지막 생존자이며 신마이자 역천자로구나!”

참으로 놀라운 사실이었다.

상관세가의 마지막 생존자인 상관옥이라니!

“허엇! 저, 저자가 상관세가의 마지막 생존자라고?”

“허어……. 신마에 역천자라니!”

용무린 주변에 늘어서 있던 무림맹과 각 문파의 수뇌부들 사이에 작은 소란이 일었다. 용무린의 말은 그만큼 놀라운 사실이었던 것이다.

‘뭐, 천기자가 남긴 서신을 읽고 나 역시도 처음에는 많이 놀랐으니까…….’

절대검신 독고황의 수발을 들던 다섯 무인들이 일궈낸 신주오가의 한곳 상관세가가 그래서 그렇듯 쉽게 마교와 하나가 될 수 있었던 거다.

용무린의 말이 사실이라는 것을 증명해 주려는 듯 허공에 떠 있던 신마가 씽긋 웃었다. 고개를 크게 끄덕여 보인 후 답했다.

“반갑다, 형제여……. 우리 둘 모두 절대검신과 신마가 하나가 된 존재들이니 이제야말로 천하를 차지하게 될 주인이 결정 될 것이다.”

형제라는 말에 다시금 주변이 소란스러워졌다.

하긴 그 말을 듣고 누군들 웅성거리지 않을 수 있겠나?

용무린의 전생과 천기자나 혜월에 얽힌 비사를 알고 있는 극소수를 제외한다면 누구라도 놀랄 수밖에 없으리라.

피식.

용무린의 싱겁게 풀썩 웃었다. 지나가듯 가볍게 툭 말을 뱉어냈다.

“개수작 말아 자식아!”

“……!”

“형제는 개뿔…….”

슥.

용무린의 손 하나가 신마를 향해 뻗어졌다. 강아지 부르듯 까딱였다.

“덤벼라, 신마! 모가지를 예쁘게 잘라주마!”

절대검신 독고황을 얼마만큼 잘 흡수해 대공을 이뤄냈는지 직접 확인해 줄 작정이었다.

꿈틀!

신마의 눈두덩이 거칠게 요동쳤다.

주먹을 한 번 꾹 움켜쥐더니 이내 풀었다. 비릿하게 웃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아직 어려서 그런지 성격이 급하군, 형제여…….”

“하아, 그놈의 형제 소리!”

용무린이 신마의 말을 중간에서 툭 자르고 들어왔다.

“……절대자의 고독에서 너와 나 만이 유일하게…….”

“피 한 방울 안 섞인 도둑놈 주제에 무슨 개소리야?! 닥치고 그냥 덤벼 인마!”

“……짜릿한 희열과 위기감을 전해줄 수 있는 상대가 더는 없거늘 어찌 이렇듯 쉽게…….”

“아, 쪼오옴! 닥치고 덤비라고 자식아!”

“……결말을 내려 하느냐?”

계속해서 용무린이 말을 자르고 나서자 유유히 말을 잇던 신마도 결국에는 머쓱했던 모양이었다. 하늘이 무너져도 변함없을 듯 보였던 얼굴이 조금은 붉게 달아올랐다. 싸늘한 목소리로 내뱉었다.

“격식도 모르는 애송이로군…….”

“더럽게 분위기만 잡는 놈이군.”

용무린이 신마의 말꼬리를 또 잡았다. 아주 그냥 한마디도 지지 않는 거다.

“무림의 역사에 길이 남을 대회전이다. 한데, 시작부터 양측의 수장이 대뜸 나와서 싸우는 경우가 세상천지 어디에 있겠느냐?”

“쫄리면 쫄린다고 해 자식아. 그냥 싸우면 누가 위인지 알 수 있을 텐데 주둥이만 털어서 뭐하자는 거야? 뭐?! 상대편 응원전이라도 감상하고 싸울까?”

“……크흠!”

결국 신마의 입에서 분노를 눌러 참는 소리가 흘러나오고야 말았다.

‘푸흐흐. 내 저 인간 저렇게 할 줄 알았다.’

‘세상에, 신마인지 역천자인지 하는 괴물을 앞에 두고도 저렇게 속을 박박 긁을 줄이야.’

‘이게 지금 동네 패싸움이야? 응원전이 뭐야 응원전이……. 크크큭.’

저만큼 뒤편에 서 있던 백리천월과 벽소천 그리고 이제는 개방의 후계로 올라선 방건이 소리 죽여 웃었다.

그들뿐만이 아니었다.

효정대사나 용대명과 같은 각 문파의 수뇌부들 역시 슬그머니 웃음을 터뜨렸다. 알게 모르게 스며들었던 긴장과 불안함이 그 서슬에 녹아 없어졌다.

‘뭐, 이쯤이면 되겠지?’

정확히 용무린이 의도한 대로였다.

물론 염두에 넣지 못했던 음양자가 눈에 불을 켜고 욕질을 해대는 역효과도 낳긴 했다.

“이이, 이런 시러배 잡놈 같으니! 내 반드시 네놈의 목을 베고 창자를 꺼내 줄넘기를…….”

“어허! 음양자!”

“……해 버리겠……. 헙. 송구하옵니다, 신마시여.”

한참을 신나게 욕을 하던 음양자를 향해 신마가 날카로운 시선을 보냈고 음양자는 머쓱한 얼굴로 즉시 입을 닫아야만 했다.

지켜보고 있던 용무린이 목청을 돋웠다.

“아! 그래서 뭐 어쩌자고? 싸울 거야 말 거야?”

“네놈은 정녕 전쟁에 앞서 벌이는 일기토의 유희마저 모른단 말이냐?”

우르릉!

슬그머니 화가 치솟았는지 신마의 외침에 주변 대기가 살짝 요동쳤다. 하지만 그 요동침이 정파의 영역으로 넘어오지는 못했다. 아무도 모르게 뻗어낸 용무린의 불사신기 때문이었다.

“일기토?”

용무린이 기가 차다는 듯 콧방귀를 한 번 뀌더니 말을 이었다.

“킁, 야! 여기 모인 무인들 숫자가 몇 명인 줄이나 알고 지껄이는 거냐? 정파와 너희 떨거지들까지 다 합하면 무려 일만 명이 훌쩍 넘어가는 숫자야 이 멍청아! 그런데 한 사람씩 겨뤄보자고? 번호표 나눠줄까?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냐?”

“이놈!”

우르릉.

신마가 다시 고함을 질렀다. 뭔가 더 말을 이으려 했지만 용무린이 또 싹둑 잘라버렸다.

“됐고, 우리 쪽에서 셋 정도 내보낼 테니까 너희도 대가리 숫자 맞춰서 내보내. 그 후에는 한꺼번에 돌격! 끝장을 본다. 어때? 맘에 들어?”

아득.

신마가 거칠게 이를 갈며 답했다.

“오냐, 좋다. 반드시 후회하도록 만들어주마.”

“자식이 징징대긴…….”

마지막까지 이죽거려 보인 용무린이 뒤를 돌아다보았다.

수천 명의 무인들이 쭉 늘어서 있었지만 이런 순간 믿고 의지할 고수의 숫자는 손꼽을 만큼 적었다.

‘그래도 저분들이 계셔서 다행이네.’

마교 쪽에서 누가 나올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설사 오마종의 생존자들이 나온다고 하더라도 저분들이라면 죽지 않고 전투의 흥을 돋울 수 있으리라.

“효정 대사님! 죄송하지만, 살계를 활짝 열어주실 수 있겠습니까?”

“아미타불!”

소림의 장로라 할 수 있는 십계십승에서도 유독 살계를 맡고 있던 효정대사가 반장의 예를 취하며 선뜻 앞으로 나섰다.

한 시름 던 얼굴로 용무린이 반겼다.

“저는 알고 있습니다, 대사님. 살계승이 살계를 활짝 열면 금강야차가 된다는 것을요…….”

금강야차는 불교 오대 명왕의 한 존재!

셋의 얼굴에 여섯의 팔로 북방을 지켜 악마의 항복을 받아낼 힘을 지니고 있었다.

용무린은 십계십승의 수좌인 살계승 효정대사가 전력을 기울이면 금강야차가 될 것이라는 사실을 전생의 기억을 통해 이미 알고 있던 것이다.

“내가 아니면 뉘가 있어 지옥에 가겠소? 염려 마시오, 맹주. 살계를 활짝 열 것이오.”

반짝!

효정대사의 두 눈에서 형형한 안광이 번득였다.

“감사합니다.”

만족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돌린 용무린의 시선이 이번에는 무당파의 장문인인 자운진인에게로 향했다.

“자운진인께서 나서 주셨으면 합니다.”

“허허허. 그럴 줄 알았소이다.”

자운진인 역시 성큼 나섰다. 용무린의 당부가 이어졌다.

“처음부터 무극으로 되돌려 주셨으면 합니다.”

냉혈곡에서 함께 싸울 때 충분할 만큼 똑똑히 보았기에 주저 없이 자운진인을 청한 것이다.

무당 일절 태극혜검.

그 놀라운 검공을 처음부터 작정하고 펼치면 단언하건대 오마종이라 하더라도 죽음을 각오해야만 한다.

“옥진도장님!”

용무린의 시선이 마지막으로 향한 곳은 다름이 아닌 화산파였다.

혈교에게 큰 피해를 입은 화산파였지만 보란 듯 빠른 시간에 안정을 찾은 화산파의 중심에는 새로이 장문인의 자리에 오른 옥진도장이 있었다.

혈교와의 전투에서 보여준 검향지기!

불사신기나 불문내공 못지않은 제마의 위력에 화산파의 위상은 날이 가면 갈수록 높아지는 중이었다.

“허허허. 찾으시었소, 맹주?”

옥진도장이 성큼 앞으로 나섰다.

“예, 장문인……. 마교 놈들에게 화산제일검이 뿜어내는 검향이 어떤 것인지 보여주셨으면 합니다.”

“기꺼이 보여드리지요…….”

후우욱.

의지만 일으켰음에도 벌써부터 청아한 매화 향이 물씬 풍겨 나왔다. 불사신기가 아닌 다른 유파의 내공이었다면 꽤나 속이 답답해졌으리라.

‘이 정도라면 충분해!’

옥진장문의 검향지기라면 어떤 마종의 마공이라고 해도 녹여낼 수 있으리라. 더불어 효정대사나 자운진인과의 상승작용도 노려볼 수 있다.

‘사부님! 반드시 승리하세요.’

‘이기고 돌아오셔야 해요, 사부님. 꼭이요.’

‘사숙! 잘 이겨내시고 돌아오시리라 믿습니다.’

나아가는 세 사람을 향해 소리 없는 응원이 이어졌다.

소림, 무당, 화산의 소속이 아니어도 상관없었다.

그저 목숨을 걸고 나아가는 저 세 무인들이 마교와의 서전을 승리로 장식하고 무탈하게 돌아오기만을 바랐다.

마교의 진영에서도 홀연히 세 사람이 나섰다.

용무린이 예상했었던 것처럼 오마종의 살아남은 셋인 검마종, 혈마종, 장마종이었다.

저벅저벅. 터벅터벅.

신법을 펼치지도 않은 채 서로를 향해 거리를 좁혀 들어가는 여섯 무인들…….

휘이이잉!

한 줄기 무심한 바람이 그들 사이를 스쳐지나가는 순간이었다.

스파앙. 휘슷. 쌔애애액.

그 순간만을 기다렸다는 듯 여섯 무인들이 서로를 향해 거리를 좁혔다. 하수들이나 지껄이는 ‘죽어라’ 따위의 외침도 없이 무심하게 일신의 절기를 펼쳐냈다.

버언쩍. 콰콰콰콰-!

콰르르릉. 후우웅. 패애애애액!

백여 장 밖에서도 선연히 보일 만큼 강렬한 광채와 함께 대지가 덜덜 떨릴 정도의 충격파가 주변을 온통 뒤흔들어 놓는다.

타아아앙. 콰콰콰-아앙!

검과 검이 맞부딪치는 소리가 포탄이 터진 것 같다.

무심히, 때로는 날카롭게 서로의 목숨을 노리면서 펼쳐지는 절기들은 그야말로 무림사에 길이 빛날 정도로 유명한 것들이었다.

살계승 효정대사의 손에서는 묵철로 만들어진 오십 근의 선장이 작은 용권풍이라도 되는 듯 빠른 속도로 휘돌아 방어를 전담했다.

휘이우우우웅. 콰콰콰콰-아앙!

소림 특유의 묵직한 불문내공의 강기가 함께하니 그 무엇도 뚫고 들어오지를 못했다. 어떤 종류의 강기공이든 깡그리 터뜨려 버렸다.

콰아웅. 콰르르르.

그 사이사이 허를 찌르듯 펼쳐지는 권장지공이라니!

백보신권이 툭툭 튀어 나가는가 싶으면 어느새 아라한신권이 펼쳐졌고 항마십삼장인가 싶으면 홀연히 나한십팔장으로 바뀌어 목이나 심장 혹은 단전과 같은 치명적인 곳들을 노렸다.

“……크흠!”

검으로 일가를 이룬 검마종이었지만 고약한 상대를 만난 내심을 감추지 못했다.

파카-앙! 따라라랑. 쾅! 쾅! 쾅!

어검술을 펼쳐도 막혔고 자신을 검마종의 자리에 오를 수 있게 해준 천강혈룡검법을 펼쳐도 소용없었다. 절대로 넘어설 수 없는 통곡의 벽인 듯 다 막아냈다.

피이유우-웃!

‘우웃! 이런 젠장!’

검마종의 검속이 순간적으로 더 급박해졌다.

가끔씩 무심하게 뻗어내는 효정의 반격은 어찌 저토록 강맹하다는 말인가? 누가 칠십이 종 절예가 아니라고 할까봐 그러는 것인지 한수 한수가 펼쳐질 때마다 등줄기를 타고 소름이 쫙 돋아난다.

지금도 그렇다.

휘리릭. 파카카카-앙!

사각을 노리고 쏘아진 것이 분명한 탄지신통을 겨우 막아낸 검마종의 등줄기를 타고 식은땀 한 방울이 또르륵 흘러내렸다.

“……!”

“……!”

간담이 서늘해진 탓에 검마종의 표정은 갈수록 조금씩 굳어만 갔고 살계승 효정대사의 입가에는 넉넉한 미소가 살짝 걸렸다.

그렇듯 우열이 조금 눈에 보이는 효정대사와 검마종과는 달리 무당파의 장문인 자운진인과 혈마종과의 접전은 그야말로 백중세였다.

‘조심하자. 보통 말코가 아니야!’

‘얼마든지 와 보시오. 내 이번에는 처음부터 무극으로 되돌려 드리리다.’

이미 냉혈곡에서 한 번 생사결을 나눠본 사이여서 그런지 최대한 조심하며 공방을 주고받았다.

물론 자운진인이 방어적인 입장을 취했다.

하지만 공격을 퍼붓는 혈마종이라도 마냥 신나서 공격하는 것은 아니었다.

쿠와앙! 콰아앙! 쿠콰콰쾅!

‘크흡! 크으윽…….’

공격을 쏟아낼 때마다 고스란히 되돌아오는 반탄력 때문에 본인이 지금 무당 말코 자운을 공격하는 것인지 아니면 스스로 자해를 하는 것인지 모를 정도였던 거다.

‘빌어먹을!’

더 짜증나는 사실은,

“받으시오.”

저렇듯 정중한 말이 끝날 무렵이면 반드시라고 해도 좋을 만큼 무당파의 검공 하나가 사각을 노려 파고들곤 하는데 막아낼 때마다 소름이 쫙쫙 끼쳤다.

버언쩍. 패애애액.

어떻게 저 각도로 뻗어 있는 검 끝에서 저런 초식이 튀어 나오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소청검, 유운검, 현천검법 등의 무당 검법 중에서 한 가지씩이 툭툭 튀어나와 목이나 심장 혹은 단전을 노렸다.

“닥치고 네놈이나 받아-앗!”

파카아-앙. 휘우웅-. 콰아아-!

잽싸게 수라혈천공을 펼쳐 말코 자운의 공격을 무위로 돌린 후 태극혜검의 방어막을 휘돌아 뚝 떨어져 내리는 회심의 공격 한 수를 펼쳐 냈다.

“태극무량!”

우우우웅. 터터텅-.

하지만 다 소용 없는 짓이었다.

아무리 태극혜검의 방어막을 휘돌아 공격을 하려 해도 음과 양을 무극으로 환원시키는 저 빌어먹을 놈의 흡입력이 다 끌어당겼다.

콰콰콰-아앙!

“크흡!”

“커어헉!”

쏘아냈던 기운을 고스란히 되돌린 반탄력 때문에 쏟아내는 신음은 혈마종이 되레 더 컸다.

‘환장하겠네, 정말…….’

당해보지 않으면 아무도 모른다.

어떤 공격을 펼치든지 고스란히 되돌아오기 때문에 공격을 할 때는 그만큼의 힘을 더 이끌어 내 방어에 쏟아야 하기 때문이었다.

“받으시오.”

피유우-웃! 파아아-!

반탄력에 더해 저렇듯 얌체처럼 기습까지 하면 정말 뚜껑이 열리곤 한다.

그렇다면 방법은 하나밖에 없다.

태극혜검의 반탄력을 뛰어넘는 파괴력!

모든 힘을 한 점에 모아 단숨에 박살내는 수밖에 없는 것이다.

“으아아-아-합!”

휘우우웅. 버언쩌저적!

자운진인과 혈마종과의 접전도 그렇게 결말을 향해 가고 있을 때 화산의 장문 옥진도장과 장마종과의 대결은 이미 확실히 우열이 드러난 상태였다.

“크하하하! 죽어라-앗!”

콰르르. 콰르르. 콰르르르.

장마종은 통쾌하게 웃으며 전투가 벌이진 후 처음으로 유치하기 짝이 없는 말과 함께 마왕혈겁수와 아수라혈천장법을 연거푸 펼쳤다.

“크흡!”

쾅! 쾅! 쾅! 쾅! 쾅!

짧은 비명과 함께 급히 휘돌린 방어초식으로 공격은 막아냈지만 계속해서 뒤로 밀렸다.

검법이나 초식 그리고 경험의 고하 때문이 아니었다.

옥진도장이 경지에 오른 시간이 짧기에 어쩔 수 없이 생기는 내공의 강약 때문이었다.

콰드드드-.

뿌리를 내리듯 땅에 박힌 옥진도장의 두 발이 길게 밭고랑을 만들며 뒤로 밀렸다.

“퉤에엣! 고약한 말코 같으니!”

장마종이 생각지도 못하게 덩어리 피를 뱉어냈다.

검향지기 때문이었다. 소림의 불문 내공만큼이나 검향지기는 상대하기 까다로웠다. 어떻게 된 게 마공에 정말 상성이 맞질 않았던 것이다.

“죽어엇!”

휘슷. 파아아-!

하지만 그뿐인 듯 장마종은 다시 공간을 좁혔다. 자신의 성명절기인 마왕혈겁수와 수라혈천마장을 거침없이 펑펑 쏟아냈다.

아득.

“화산의 의지를 보여주마아-앗!”

휘리릭. 버번쩌어억. 촤아아악!

화산장문 옥진도장이 이를 갈며 검을 휘둘렀다.

짧게 휘돌려낸 검 끝에서 이름 높은 화산의 절기들이 잘도 쏟아졌다.

쿠와앙. 콰아앙. 쿠콰콰쾅.

“크흡! 쿨럭. 쿠울럭!”

하지만 근본적인 내공의 격차만큼은 어쩔 도리가 없었는지 다시금 옥진은 서너 걸음 밀려나야만 했다. 덩어리 피를 게워냈다.

반짝.

‘좋지 못하네.’

오십여 장 밖에서 지켜보던 용무린의 눈에서 불똥이 튀었다. 오래지 않아 화산 장문 옥진도장에게 파탄이 찾아올 것이 눈에 보였던 것이다.

‘길게 잡아야 십여 초!’

아마 그 정도가 되면 장마종의 손에 화산장문 옥진도장의 숨통이 끊길 거다. 비슷한 실력의 무인이라면 결국 내공의 격차가 승리를 결정짓는 것이다.

‘그럴 수야 없지.’

혈교 놈들의 손에 벌써 한 번 큰 화를 입은 화산이다.

그런 판국에 여기에서 또 다시 장문인을 잃게 만들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런 일들로 인해 전대 화산장문 옥양이 혈교와 손을 잡았단 말이야.’

무림을 위해 선뜻 큰 희생을 자처했음에도 언제나 푸대접을 받아왔다고 생각해온 그들에게 다시 빌미를 제공하지는 않겠다는 차원이 아니었다.

그저 한 사람의 무인으로서 검향지기라고 하는 놀라운 성취를 이룬 화산의 장문이 허무하게 스러지는 것을 보기가 싫은 거다.

바로 그때였다.

쿠와아앙!

“커헉!”

강렬한 파열음과 함께 옥진도장이 뒤로 길게 튕겼다.

핼쑥한 옥진 도장의 입가에는 벌써 검게 죽은 핏덩이가 엉겨 있었다.

“크하하하! 죽어라아-앗!”

휘슷! 파아아아-!

일말의 여유도 주지 않겠다는 듯, 한 걸음에 거리를 좁힌 장마종의 손바닥이 옥진도장의 심장을 향해 쭉 밀려드는 순간이었다.

‘어림도 없다.’

그때까지 지켜만 보고 있던 용무린이 행동을 개시했다.

툭.

가볍게 땅을 박차고 거리를 좁혔다.

휘이이스파아아아-아-앙!

그 속도가 어찌나 빠르던지 용무린의 주변에 수증기가 응축되었다. 더는 견디지 못하고 터졌다. 순간적으로 극한의 속도를 돌파해버린 것이다.

촤악!

언제 뽑아들었는지 위에서 아래로 짧게 그어지는 풍뢰!

버언쩌저저저-적!

공간을 포함해 그 선상에 놓인 모든 것들이 둘로 쪼개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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