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역천자
덜컥!
옥진도장의 심장을 향해 기세 좋게 뻗어가던 장마종의 손이 그대로 멈춰졌다. 자신을 향해 밀려오는 미증유의 압력에 막혀버린 것이다.
뻐언쩌저저-적!
하늘과 땅이 통째 어긋나고 있었다.
투명한 살얼음에 균열이 일 듯 허공에 실금이 쫙 그어지더니 한쪽이 스르르 미끄러져 내렸다.
아니,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파사삭. 파사사삭!
어긋난 곳을 기점으로 공간 자체가 살얼음 깨져 나가듯 깨지더니 동시에 바스러졌다.
‘맙소사…….’
장마종의 입이 쩍 벌어졌다.
‘아, 아름답구나…….’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분명한 것은 이대로 저 아름다운 붕괴의 선상에 머물러 있으면 자신도 함께 붕괴되어 허무로 사라져 버릴 것이라는 점이다.
‘피해야 하는데…….’
하지만 피할 수가 없었다.
화산의 말코를 때려죽여야 한다는 것도 이미 잊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살얼음 깨지듯 마구 바스러져 오는 공간의 압력 때문인지 손을 더 뻗어낼 수도 없었고 발걸음도 뗄 수 없었던 거다.
아니, 그보다는 공간 자체가 허물어지는 순간의 아름다움에 혼백을 모두 빼앗겼다. 이대로 그냥 죽어도 좋을 것만 같았다.
바로 그 순간 기적이 일어났다.
투화아아악!
심연과 같은 어둠에 보랏빛 광채가 똬리를 틀 듯 깃든 힘이 장마종 앞에 강림했다.
콰드득!
거침없이 뻗어 오던 공간의 균열이 거짓말처럼 멈춰졌다.
보이지 않는 어떤 힘에 가로막힌 듯 부르르 떨었다.
휘슷.
흐릿한 사람의 그림자 하나가 장마종의 앞에 나타났다.
재미있어 죽겠다는 듯 느물거렸다.
“크크큭. 이러면 반칙이지 않나, 형제여…….”
신마였다.
용무린이 개입을 하자 신마 역시 참지 못하고 뛰어 들었던 것이다.
짜릿!
한 줄기의 전율이 신마의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관통했다.
충분할 것이라 생각한 힘을 투입했음에도 불구하고 용무린이 만들어낸 공간의 균열을 겨우 멈춰 세울 수 있었던 것이다.
‘하마터면 놓쳤어.’
지금도 겨우 붙잡고 있다.
손아귀에 느껴지는 압력은 감히 아리만의 화신임을 주장했던 혈교주 혈마 이상이다.
‘크크큭. 좋아. 아주 좋아.’
누구와도 견줄 수 없는 호적수라는 것이 이 한 수의 교환으로 확실해졌다. 손맛이 어찌나 좋은지 불사마력이 부글부글 끓어오르기 시작했다. 금방이라도 통쾌하게 뿜어져 나오려 꿈틀댔다.
“커흡!”
그 서슬에 옥진도장이 몸을 휘청거렸다.
용무린의 도움에 힘입어 장마종을 베어내려는 순간 신마의 힘에 제지당했기 때문이었다.
심연의 어둠!
콰르르. 콰르르르.
그 사이 타오르듯 나부끼는 보랏빛 광채!
불사마력의 현신에 숨통이 막혔다. 용무린의 도움이 아니었다면 벌써 짓이겨졌으리라.
티딕. 투둑. 콰드득.
상상하기 힘들 정도의 힘과 힘이 맞물렸다.
지진의 여력에 암벽 중단의 돌가루가 흩날리듯 멈춰진 공간의 균열이 부스러기를 떨구었다.
헤실.
용무린의 입꼬리가 위를 향해 말려 올라갔다. 아무렇지도 않은 듯 이죽거렸다.
“네놈이 안 나왔어야 반칙이지.”
“푸흐흐. 그런가?”
“그래.”
콰드드. 티딕. 웅웅웅웅웅.
가만히 서로를 노려보고 있기만 한데도 불구하고 하늘과 땅이 몸살을 앓는다.
“커흡!”
“흐읍!”
그 사이에 새우처럼 끼인 옥진도장과 장마종은 숨쉬기조차 곤란한 듯 핼쑥한 얼굴이 되었다. 나직이 답답한 신음성을 흘렸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이십여 장 떨어진 곳에서 진행되던 자운도장과 혈마종 사이의 팽팽하던 균형이 무너졌다.
“받으시오!”
쿠와아앙.
모든 것을 무극으로 환원해 되돌리는 태극혜검의 반탄력!
동시에 펼쳐진 양의검 일 초에 견디다 못한 혈마종의 팔 하나가 떨어져 나간 것이다.
피쉬이잇! 서걱!
양의(兩儀)!
즉, 음과 양 두 갈래로 나뉘는 초식의 연환 중 은밀함에 속하는 음의 초식을 막아내지 못한 결과였다.
“커흑!”
비틀 뒤로 밀려나는 혈마종이 자운진인을 향해 원독 어린 시선을 보냈다.
쿨럭!
태극혜검의 반탄력을 이용해 회심의 일 초를 펼친 자운진인 역시 적지 않은 충격을 받았는지 검게 죽은 핏덩이를 쏟았다.
하지만,
“받으시오!”
휘슷. 패애애액.
자운진인은 이를 악물고 거리를 좁혔다. 이 기회를 놓치지 않겠다는 듯 따라 붙으며 다시 한 번 양의 검법을 펼쳤다. 혈마종의 목을 노렸다.
‘이런 빌어먹을!’
혈마종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무당 말코의 저 지독한 공격을 도저히 떨쳐낼 수 없어서였다.
‘나 혈마종이 이렇게 죽어야만 하다니…….’
무당의 말코 따위에게 죽을 것이라고는 지금껏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태극혜검.
기껏 해봐야 타인의 공격을 되돌리기만 하는 검법이 어째서 남존 무당의 일절이라고 불리는 것인지 이제야 알 것 같았다.
‘그렇다고 곱게 죽어줄 수는 없지.’
목을 주는 대신 심장을 가져올 것이다.
태극혜검이 아닌 양의검법을 펼치고 있으니 그것은 어렵지 않다.
그렇게 혈마종이 동귀어진을 결심하는 순간이었다.
화아아악!
심연의 어둠이 갑자기 세력을 확장했다.
혈마종 앞을 가로막았다. 앞으로 쭉 뻗어나가며 모든 것을 집어 삼켰다. 심연의 허무로 돌렸다.
‘이, 이런!’
양의검법을 통해 막 혈마종의 목을 베려던 자운진인의 눈이 부릅떠졌다. 양의검법의 초식이 심연의 어둠속으로 하릴없이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어둠이 자신을 향해 쭉 밀려들었다.
‘급하다!’
자운진인은 황급히 검을 휘돌려 태극혜검의 마지막 초식을 펼쳤다. 혈마종의 마지막 공격까지 거뜬히 튕겨냈던 바로 그 태극혜검이었다.
하지만,
콰자작! 후욱. 후우욱.
놀랍게도 태극혜검의 방어초식마저 심연의 어둠이 집어 삼켜 버렸다. 그 무엇이든 무극으로 환원해 다시 튕겨낼 수 있는 반탄력마저 어둠에 깃든 보랏빛 광채가 먹어 버린 것이다.
‘끄, 끝이다.’
자운진인의 눈에 안타까움이 흘렀다.
태극혜검의 반탄력마저 사라졌으니 이제는 죽음만 남았을 뿐이라 생각한 거다.
***
‘신마시여. 어째서 벌써 개입을 하시나이까?’
백여 장 밖에서 지켜보고 있던 음양자의 애가 끓었다.
자신과 함께 세웠던 작전과는 달리 먼저 움직여버린 신마의 행동이 아쉬웠던 것이다.
‘신마를 믿습니다. 하지만 다른 누구도 아닌 신마이기에 적의 수장과의 대결은 가장 나중으로 미뤄놓았어야만 했습니다.’
신마라는 상징성을 생각한다면 의당 그래야만 했다.
생각과 달리 용무린이라는 저 애송이에게 조금이라도 해를 입는다면 마교의 사기가 한꺼번에 곤두박질 칠 수 있기 때문이다.
‘제발 더는 개입하지 마소서. 광마인들로 하여금 적의 예봉을 꺾은 후 오궁이원이전의 고수들과 함께 마도칠문과 흑도의 아이들이 나설 것입니다. 그들이 정파인들의 피를 강과 같이 흘려 놓으면 그때 나서십시오.’
피가 흐를 만큼 흐른 후 신마가 신위를 드러내면 살육의 광기에 흠뻑 젖은 모두가 그 영향을 받아 마공에 힘이 더 실리게 되리라.
그런데,
‘아! 힘들 것 같구나.’
장단이라도 맞춰주겠다는 듯 용무린 역시 움직였기 때문이었다.
***
덜컥!
심연의 어둠에 깃든 보랏빛 광채의 진격이 강제로 멈춰졌다. 무엇인가에 덜미를 잡힌 듯 진저리를 쳤다. 발악을 하듯 법석을 떨었다.
물론 그래봐야 소용없는 짓이었다.
눈곱만큼도 앞으로 나아갈 수 없었다. 부르르 떨기만 할 뿐이다.
휘슷.
그 앞에 희미한 사람의 그림자가 생겨났다.
용무린이었다.
‘휘유. 역시 만만치 않아…….’
용무린이 내심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가볍게 뻗어낸 신마의 힘을 겨우 막아낼 수 있었다.
아니, 솔직히 지금도 놈의 힘을 통제하기 위해 무진 애쓰고 있다. 자칫 조금이라도 실수하면 그대로 튀어나가 자운진인을 집어 삼킬 만큼 놈의 힘은 막강했다.
‘푸흐흐. 그래도 지진 않아.’
흉험하긴 해도 불사신기로 능히 감당할 수 있다.
나는 이미 한 번 저놈을 잡아 죽인 경험이 있는 절대검신 독고황이니까.
그래서 이 정도쯤이야 숨 쉬는 것만큼 간단하다는 의미로 가볍게 툭 뱉었다.
“이러면 반칙이라며?!”
“크흐흐. 형제가 가로막지 않았어야 반칙이 성립될 텐데? 분명히 조금 전에 그렇게 말한 것으로 아네만…….”
용무린의 이죽거림을 신마가 웃음으로 받았다.
샐쭉.
용무린도 입술만 움직여 웃어 보였다.
“흉내쟁이냐?”
“그럴 리가? 나는 어디까지나 형제가 내게 했던 말을 고스란히 돌려줬을 뿐이네.”
“창의력 없는 자식 같으니……. 흉내쟁이 맞네.”
“크크큭. 그렇다고 해두지.”
재미있어 죽겠다는 듯 신마의 얼굴에는 미소가 한 가득이었다.
결국 용무린도 환하게 마주 웃어 주었다.
“푸흐흐. 재미있는 놈이네 정말…….”
용무린의 목소리가 끝나는 순간이었다.
버언쩌저적. 쿠와아아아앙!
용무린과 신마 사이의 공간이 강렬한 빛과 함께 갈기갈기 찢어져 버렸다.
서로를 향해 은밀하게 쏟아낸 불사신기와 불사마력이 허공에 정체되어 있던 힘까지 한꺼번에 터지도록 만들었던 것이다.
“커헉!”
“크흡!”
나직한 비명과 함께 자운진인과 혈마종이 뒤로 훌훌 밀려났다. 핼쑥해질 만큼 커다란 충격을 받았음에도 아직까지 멀쩡한 것은 용무린과 신마가 자운진인과 혈마종을 서로 보호했기 때문이었다.
파박. 휘릭.
여력이 미치는 범위를 벗어나기가 무섭게 자운진인과 혈마종은 멀찌감치 뒤로 물러났다. 이제 두 사람의 대결은 끝난 것이나 다름없었다.
“후훗! 좋아, 아주 좋아!”
신마가 싱글벙글 웃었다.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불사마력을 통제하기가 점점 더 힘이 들었다.
애초에 맛을 보질 말았어야 했는데, 한 번 불사신기의 짜릿함을 대하니 어서 빨리 전력을 다해 부딪쳐 보고 싶었다. 궁극의 희열을 느껴보고 싶은 것이다.
‘에잇, 모르겠다.’
음양자와 나눴던 작전이 순간적으로 뇌리를 스쳐 지나갔지만 그냥 무시했다. 이 정도로는 너무나 감질나서 견딜 수가 없었다.
뭉클뭉클.
보랏빛이 감도는 심연의 어둠이 신마로부터 뿜어졌다. 주변을 잠식했다. 신마가 손을 들어 올려 보랏빛 어둠을 한 손으로 휘감았다. 슬쩍 뿌렸다.
화아악. 후웅.
묵직한 파공음이 용무린을 향해 밀려왔다.
용무린이 대뜸 이죽거렸다.
“좋긴 개뿔! 변태냐?!”
동시에 풍뢰가 가볍게 그어졌다.
보랏빛 어둠에 실금이 쫙 그어지는가 싶더니 그대로 폭발해 버렸다.
쿠와아아앙.
다시 한 번 일어나는 강력한 충격파.
“하앗!”
“차아앗!”
차차창. 휘슷. 타닷.
마지막 격돌을 끝으로 이번에는 효정대사와 검마종까지 싸움을 멈추었다. 아예 본격적으로 싸울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주려는 듯 뒤로 멀찌감치 물러났다.
부르르.
신마의 손끝을 타고 오른 전율이 온몸의 솜털을 송두리째 곤두세웠다. 용무린이 가볍게 뿌려낸 힘이었지만 정말 위험했다.
한순간만 한눈을 팔아도 그대로 목이 달아나버릴 것만 같은 위기감에 심장이 터질 듯 뛰었다.
‘크흐흐. 이 희열! 이 고통!’
신의 경지에 다다른 자신이었지만 비정상적으로 빠르게 뛰는 심장소리와 아릿한 손아귀는 아직도 자신이 살아 있는 인간임을 오롯이 느낄 수 있게 만들어 주었다.
‘더 느끼고 싶어. 더…….’
도저히 더는 참을 수 없었던 모양인지 신마가 먼저 손을 쓰기 시작했다. 장난이라도 하듯 가볍고 짧게 연거푸 천마신장을 펼쳐냈다.
후웅. 후웅. 투투-퉁.
그때마다 보랏빛 어둠이 미증유의 힘을 머금은 채 잘도 튀어 나왔다. 오마종이 전력을 다해 펼쳐야 겨우 가능할 정도의 강기덩어리였다.
그런데,
“겨우 그 정도로 되겠냐 멍청아?”
용무린은 그걸 또 가볍게 베어 버린다.
마치 자존심 싸움이라도 하려는 듯 신마가 쏘아낸 것은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깡그리 베었다. 피해도 되건만 굳이 쫓아가 그었다.
버언쩍. 버번쩍. 쿠와앙. 콰아앙. 쿠콰콰콰앙.
그때마다 하늘과 땅이 진저리를 쳤다.
우박 쏟아지듯 강기의 파편들이 주변으로 퍼져나갔다. 파편일망정 어지간한 무인들은 스치기만 해도 그대로 절명할 만큼 무시무시한 힘이 내포되어 있었다.
“무, 물러나!”
“피해라!”
“뒤로 쭉 빠져-엇!”
효정대사와 자운진인, 그리고 옥진도장이 악을 쓰듯 목청을 돋웠다. 이미 백여 장 밖으로 벗어났음에도 불구하고 격돌의 파편이 위험하다는 것을 파악한 것이다.
버언쩍. 번쩍. 쿠와앙. 콰아앙.
그러거나 말거나 용무린과 신마는 점점 더 본격적으로 손을 쓰기 시작했다.
천신이라도 되는 양 허공에 우뚝 서 있다가 갑자기 번개 같은 속도로 부딪혔다. 또 어떤 때는 수십여 장 밖에서 가볍게 손을 휘두르기만 했다.
콰아으으-응! 트드드드-드.
그럴 때마다 하늘과 땅에 통째 뒤흔들리는 느낌이었다.
격돌의 충격파가 어찌나 크던지 동정호의 표면에 구슬이 생겨 위로 튕겨오를 정도였다.
대체 어느 틈에 동정호 상공으로 자리를 옮긴 것일까?
애꿎은 물고기들이 배를 허옇게 까뒤집고 수면 위로 올라오고 있었다.
“크하핫. 좋아. 바로 이거라고! 크하하하핫.”
“아오, 이 변태 새끼……. 쳐 맞을 때마다 좋다고 하는 걸 보니 모가지를 날려주면 아예 질질 싸겠네.”
통쾌하게 웃음을 터뜨리는 신마와 지겹다는 듯 얼굴을 살짝 찌푸리는 용무린의 본격적인 대결이 동정호 상공에서 벌어지기 시작했다.
버언쩌저적. 콰르르르릉.
흠칫.
놀란 것일까?
빛과 어둠이 교차하는 동정호 상공을 주시하던 음양자의 시선이 퍼뜩 주변을 훑었다.
‘내가 지금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지.’
이미 일은 벌어진 후다.
‘굳이 더 시간을 끌 필요가 없다.’
이렇게 급격하게 일이 진행되는 것을 바라지는 않았지만 용무린의 개입에 이어 신마가 즐기기로 작정한 이상 다 필요 없는 일이었다.
‘결과는 어차피 본교의 승리로 귀결이 될 터, 굳이 뒤를 남길 필요조차 없겠지.’
음양자가 뒤를 향해 고함을 질렀다.
“가라, 신교의 전사들이여. 저 가증스러운 정파 떨거지들을 쓸어버리고 신교 천하를 이룰 때가 돌아왔다-아!”
“우와아아아아!”
“신교 천세천세 천천세-에!”
서전을 장식하던 초인들의 싸움에 이어 용무린과 신마가 격돌을 했다. 조금씩 달아오르기 시작한 전장이 음양자의 외침으로 인해 순식간에 용광로처럼 끓어올랐다.
마교의 마인들이 거대한 해일이 몰려드는 것처럼 일제히 정파무림인들을 향해 신법을 전개했다.
용무린과 신마와의 대결을 지켜보고 있던 비룡문주 용대명이 성큼 앞으로 나섰다. 불사신기를 돋워 크게 고함을 질렀다.
“어둠은 빛의 부재일 뿐! 의협의 빛으로 일어나라 정파의 무림인들이여-!”
우르릉.
용무린을 제외하면 불사신기의 농도가 가장 진하고 강력한 사람의 외침이었다. 용대명의 목소리에 포함된 불사신기는 모두의 호연지기를 돋울 수 있었다.
“허허허. 아미타불! 내가 아니면 누가 지옥에 가겠는가? 지금 이 순간 살계를 활짝 열 것이다. 소림의 제자들은 나를 따르라!”
“아미타불!”
“아미타불!”
살계승 효정대사가 용대명의 말을 받으며 앞으로 성큼 발을 내디뎠고 소림의 무승 칠백여 명이 일제히 불호성을 터뜨리며 따라 나섰다.
“태상노군이여 굽어 살피소서……. 무당의 도인들이여 나서라! 마인들을 계도하도록 하자!”
자운진인까지 살기등등한 얼굴로 신법을 펼쳤다.
차창. 스르릉. 차라랑.
그 뒤를 따라 무당파의 검수 오백여 명이 일제히 검을 뽑아들었다. 자운진인의 뒤를 따랐다. 해일인 듯 파도인 듯 밀려갔다.
그러니 나머지라고 어찌 가만히 있을 수 있으랴?
“크하하하! 오너라, 마졸들아!”
“여기 개방의 의협들이 간다-아!”
“벽력도가도 있다!”
“백리검가의 검을 받아라-아!”
구파일방과 신주오가 그리고 오대세가의 생존자들과 중소문파의 무림인들이 일제히 무기를 뽑아들었다. 전면을 향해 신법을 펼쳤다.
팔십 장, 육십 장, 사십 장…….
시시각각 거리가 줄어들었다.
그리고 마침내 두 진영 사이의 거리가 십 장 어림이 되는 순간,
“크하하하! 죽어라!”
“하아아! 백보신궈-언!”
“이것이 바로 무당의 구궁연환검이다-아!”
“여기 백리검가의 육양귀일검도 간다! 받아라-아”
“이야아아-하!”
휘우우웅. 버번쩌저적. 피유윳. 쐐애애액.
두 진영이 맞부딪힌 중심을 시작으로 온갖 검초와 도법 그리고 권장지공이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채챙. 채채챙. 카카캉. 스각.
퍼퍼펑. 콰쾅.
“크아악!”
“커헉!”
격렬한 파공음과 함께 처절한 비명이 쏟아졌다.
하지만 팽팽한 균형이 이어졌다.
어느 한쪽을 향해 쉽사리 무게추가 기울지 않았다.
마교의 진영에서 아직 살아남은 삼마종이 다시금 나섰고 팔다리가 끊겨도 미친 듯이 무기를 휘두르는 광마인들이 날뛰고 있음에도 변함없었다.
네 가지 서로 다른 힘이 완벽한 조화를 이룬 채 마인들을 상대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미타불!”
따앙. 콰앙.
“커헉!”
사대금강의 일인인 일각이 일지관수로 자신의 목을 향해 떨어져 내리는 마교인의 검을 때려낸 후 놈의 가슴 어림에 백보신권을 때려 넣었다.
“구궁연환!”
피쉬시시싯. 따라랑. 스각.
“큽!”
일각의 옆에서 무당 칠협 중 하나인 자영도장이 구궁연환검을 펼쳐 축융궁 소속 마인의 목을 날려 버렸다.
“크아악. 이 죽일 놈의 말코 놈아-아!”
휘슷. 파아아-아!
그 곁에 있던 혈마궁의 부궁주가 혈마오검을 펼쳐 자영의 목을 노렸지만,
후-욱.
“물러가라!”
공간을 접듯 다가온 용대명의 손에서 상청무상검법의 진수가 펼쳐졌다.
무량천심의 초식.
피쉬-잇. 따아앙!
불사신기가 가득 깃든 한 수에 자영도장을 노렸던 혈마궁의 부궁주의 공세가 무위로 돌아갔다. 충격을 다 흘려내지 못해 자세가 옆으로 크게 기울었다.
그 기회를 어찌 놓칠까?
“크하하. 이거 송구하외다!”
용대명의 곁을 지키고 있던 개방의 방주가 대뜸 용음십이수를 펼쳐 골통을 부숴버렸다.
퍼어억.
비명도 지르지 못한 채 쓰러지는 혈마부궁주.
“허허허. 계속 송구해도 좋습니다. 용두방주께서 곁을 지켜 주시니 든든하기만 합니다.”
용대명이 호탕하게 웃으며 반겼다.
“아미타불. 마졸 한 마리가 또 옵니다.”
휘슷. 따아앙.
그 사이 일각대사가 다시 굵직한 마인의 공격을 받아 넘겼다.
“갑니다.”
그 뒤에는 다시 무당파의 자영도장차례다.
피쉬잇! 서걱.
“옆에서 파고드는 놈은 제가 맡습니다, 도장!”
말과 동시에 용대명이 자영도장 곁을 단단하게 막아서며 상청무상검법을 펼쳤다.
휘슷. 패애액. 따다당. 스각.
“커헉!”
불사신기와 하나로 어우러진 상청무상검법에 마공은 너무나도 쉽게 파훼가 되었다. 자영도장의 옆구리를 노려 짓쳐들었던 마인의 심장에 구멍이 뻥 뚫렸다.
그놈뿐만이 아니었다. 짓쳐드는 족족 거꾸러졌다.
그리고 그와 같은 장면이 수백여 곳에서 연이어 펼쳐지는 중이었다.
소림과 무당, 혹은 화산파에 불사신공이나 호심결을 익힌 비룡문의 직계나 방계의 무인과 개방의 고수들이 하나의 조를 이뤄 마인들을 상대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단단한 불문내공과 날카로운 도가의 검공에 비룡문의 뛰어난 검법과 호심결 그리고 개방의 경쾌함이 곁들여지니 감히 뚫을 수 있는 마인들이 드물었다.
살아남은 오마종은 다시금 살계승 효정대사와 무당장문 자운진인, 그리고 화산장문 옥진도장과 못다 끝낸 일전을 이어가기 시작했다.
병장기가 부딪치며 만들어내는 요란한 불꽃과 강렬한 내공 덕에 빛으로 승화되는 아름다운 강기무공이 이곳저곳에서 터졌다.
그에 맞게 울려 퍼지는 비명소리 역시 가득했지만 음양자의 관심을 끌지는 못했다.
그가 한 손 보탠다면 금방이라도 마교를 향해 전투의 승기가 기울 수도 있으련만 음양자는 다 필요 없다는 듯 동정호 상공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바로 그곳에서 용무린과 신마가 세기의 대결을 펼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버언쩌저저적. 쿠르릉. 콰르릉.
트드드드드드.
먹장구름과 같이 세력을 넓히는 불사마력의 어둠 사이로 보랏빛 광채가 번득이고 있었으며 작열하는 태양처럼 활활 타오르는 용무린이 풍뢰와 소검비연을 동시에 움직여 불사마력으로 펼쳐지는 천마신공을 파훼했다.
‘신마시여! 부디 승리하시길…….’
용무린과 신마와의 대결이 그 무엇보다 더 중요했다.
동정호변에서 벌어지는 정파와 마교와의 싸움이 어느 쪽으로 기울어지든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터질 듯 움켜 쥔 주먹에 땀이 흥건히 고이는 줄도 모르는 채 음양자는 용무린과 신마와의 대결에 모든 정신을 집중하고 있었다.
음양자의 그런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신마는 최고의 희열을 만끽하는 중이었다.
버언쩍. 콰르르릉.
한 수에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 이 짜릿한 기분.
전신의 솜털이 송두리째 곤두섰다.
정신은 칼날처럼 날카로웠고 흘려보내는 것만으로도 힘겨워 터져 버린 피부는 알싸한 통증으로 자신이 아직 살아 있다는 것을 알려 주었다.
쿵쾅쿵쾅.
심장이 터질 듯 뛰었다.
그 격렬한 움직임에 따라붙는 통증이 무엇과도 견줄 수 없는 희열이 되어 돌아왔다.
“크크큭. 좋구나. 좋아.”
저절로 입꼬리가 말려 올라간다.
이대로 용무린과 함께 영원히 싸울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퍽이나 좋겠다, 이 변태 자식아!”
파카아앙. 쾅쾅쾅.
용무린의 이죽거림이 이어질 때마다 풍뢰에 이어 소검비연까지 동시에 사각으로 파고든다.
어디 그뿐인가?
이제는 작은 태양이라고 불러도 좋을 만큼 휘황찬란하게 타오르는 불사신기라니!
일천의 동남동녀의 정혈로 합일시켜 놓은 불사마력이 아니었다면 규천마력이나 천마기 따위 단숨에 녹아 없어졌으리라.
쿠와아앙. 콰아앙. 쿠콰콰쾅.
저 힘과 격렬히 부딪힐 때마다 짜릿했다.
죽음에 한쪽 발을 담근 것처럼 오싹하는 전율이 신마를 자꾸만 자극했다.
“크하하하. 형제여, 어찌 좋지 않겠는가? 오직 그대만이 나로 하여금 살아 있음을, 죽음의 공포를 느낄 수 있도록 해준단 말이다.”
후우욱. 파아아-아!
말과 동시에 폭발하듯 뿜어낸 보랏빛 어둠을 한 손으로 휘감아 확 뿌려낸다.
강기? 아니면 심검?
그 무엇으로 불러도 이상하지 않을 무지막지한 힘이 용무린을 짓이기기 위해 밀려왔다.
“흥!”
버언쩍. 패애애액.
콧방귀 한 번에 풍뢰가 번개처럼 날아들었다. 전면을 틀어막고 불사신기를 쏟았다.
쿠와아아앙. 트드드드.
다시 한 번 희뿌연 충격파가 동정호 전역으로 퍼졌다.
불사신기와 불사마력은 완벽하게 서로 상쇄되어 사라졌다. 누구도 우세를 점하지 못했다. 이대로 계속되면 둘 모두 종말을 맞게 될 것이다.
‘그럴 수야 없지.’
이제 장난은 그만 둘 생각이다.
용무린은 풍뢰와 소검비연으로 하여금 계속해서 신마의 발목을 잡도록 하는 한편 두 손을 코앞으로 모았다. 즉시 양의신공을 펼쳤다.
일원인 무극이 태극으로 나뉘며 음과 양의 구분을 짓게 만든 분심의 벽이 용무린의 심상을 정확히 반으로 쪼갠 후 중앙에 섰다.
완벽하게 둘로 나뉜 두 가지 심상!
하나는 절대검신 독고황 그 자체였고 다른 하나는 신마 진무량의 기억으로써 풍뢰와 소검비연을 통제했다.
씨이이웅. 씨웅. 쿠와앙. 콰아앙.
풍뢰와 소검비연이 작살처럼 꽂혔다가 힘없이 튕기기를 끝없이 반복했다.
씨이웅. 씨융. 콰아아앙. 콰앙.
한두 번도 아니고 계속해서 부딪히는 것이 부질없어 보일 정도였지만 풍뢰와 소검비연은 끝도 없이 놀라운 속도로 신마의 사각을 파고들었다.
“크아아압!”
뭉클 뭉클. 화아악.
질리지도 않는 모양인지 그때마다 신마 역시 보랏빛 어둠을 휘몰아 때려내야만 했다.
무시하고 싶어도 무시할 수 없었던 것이다.
가볍게 파고들었다가 속절없이 튕기는 것처럼 보였지만 풍뢰와 소검비연에는 검마종이 목숨을 걸고 동귀어진을 해야 겨우 엇비슷할 정도로 강대한 힘이 걸려 있었기 때문이었다.
‘크크큭. 그래도 이 정도야 가뿐하지.’
용무린이 직접 손으로 잡고 뿌렸을 때는 공간 자체가 갈라진다. 어검술과 어도술로 펼쳐지는 검법과 도법은 아직 그 정도는 아니다.
바로 그 순간,
착!
용무린의 두 손이 합장을 하듯 하나로 합쳐졌다.
그대로 불사신기가 집중이 되었다.
웅웅웅웅웅. 버언쩌저적.
십여 장 아래 동정호의 물결이 출렁일 정도의 공명음과 함께 눈부신 광채가 일었다. 검을 잡듯 용무린이 오른손을 슬쩍 움켜쥐자 손아귀 안에 빛으로 이뤄진 한 자루의 검이 잡혔다.
심검이었다.
파츠츠. 파츠츠츠.
마치 살아 있는 뇌전을 손으로 잡아채기라도 한 듯 구체화된 심검의 표면에는 넘쳐나는 불사신기가 가느다란 뇌전의 형태로 튀고 있었다.
“크하하하. 멋지구나! 과연 내 형제로다!”
용무린이 뽑아낸 심검이 너무나 마음에 드는 모양인지 신마 역시 무엇인가를 움켜쥐는 시늉을 해 보였다. 그대로 불사마력을 집중했다.
“크아아-합!”
뭉클 뭉클 화아악.
실로 끔찍한 농도의 보랏빛 어둠이 손아귀로 집중되었다.
그러더니 이내 용무린과 엇비슷한 크기의 보랏빛 어둠으로 이뤄진 심검을 뽑아내는 것이 아닌가?
파지직. 파지지직.
용무린과 엇비슷한 수준의 가느다란 뇌전이 보랏빛 어둠으로 흘렀다. 만족스러운 듯 신마가 웃음을 터뜨리며 내려다보았다.
“크크큭. 어떠냐? 가짜 주제에 아리만의 화신을 자처하던 혈교주 놈의 목을 날려 버린 불사마검이니라.”
심검으로 만들어낸 불사마검.
그 어떤 전설의 검보다 더 강력하고 날카로울 것이 빤했지만 용무린은 눈곱만큼도 신경 쓸지 않았다. 다 귀찮으니 어서 빨리 마무리를 짓 자는 듯 툭 내뱉었다.
“네가 올래? 아니면 내가 갈까?”
“아무래도 좋다 형제여.”
“그럼…….”
신마의 대답이 끝나기가 무섭게 용무린이 움직였다.
휘슷. 파아아-!
공간이동이라도 하듯 신마 앞에 불쑥 모습을 드러냈다. 가볍게 심검을 그어 내렸다.
“내가 먼저 간-다-앗!”
버언쩌저적. 티디딕.
파스슷. 파스스슷.
심검의 끝을 따라 공간 자체가 매끈하게 잘렸다. 한쪽이 어긋나 미끄러져 내렸다. 살얼음 깨어지듯 바스러져 허무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불사대천검!
현재 용무린이 펼칠 수 있는 최대한의 불사대천검이 펼쳐지기 시작한 것이다.
신마 역시 그냥 보고만 있지는 않았다.
즉시 반격에 나섰다. 그 이름도 유명한 천마삼검을 펼쳐냈다.
“천! 마! 현! 신!”
버언쩍! 콰아아아-아!
보랏빛 어둠이 하늘과 땅을 하나로 이을 듯 커다란 강기의 기둥을 만들어내었다.
그 중심에 선 것은 바로 신마!
마계의 신이 정녕 강림이라도 한 듯 거대한 강기의 기둥이 용무린을 짓눌렀다.
덩실!
용무린이 검무를 추기 시작했다.
살포시 휘어져 감기우고 다시 접어 휘영청 내뻗는 손끝에 심검이 맺혀 있었고 나래를 활짝 편 나비처럼 부드럽게 나풀거렸다.
콰르르. 콰르르르.
하늘과 땅을 통째 이을 듯 거대한 강기의 기둥이 용무린을 짓눌렀지만,
파슷. 파스슷.
춤을 추듯 가볍게 나풀거리는 심검의 움직임에 강기의 기둥은 너무나도 허무하게 깨졌다. 어긋난 후 바스러져 사라지는 공간과 함께 사라져갔다.
“으하하! 좋구나! 으하하하핫!”
자신의 공격이 무위로 돌아갔음에도 신마는 되레 통쾌한 웃음을 터뜨렸다. 확실히 목숨을 걸고 싸운다는 느낌이 강할수록 짜릿한 모양이었다.
신마가 다시 한 번 악을 썼다.
“이건 어떠냐?! 크아아압!”
보랏빛 어둠을 뭉텅 끌어내었다. 불사마력으로 이뤄진 검에 터지도록 밀어 넣었다.
“천! 마! 제! 천!”
천마삼검의 두 번째 초식이 펼쳐졌다.
무식하리만큼 강대한 힘으로 짓누르는 것이 첫 번째 초식이었다면 두 번째 초식은 그 강대한 힘으로 펼쳐지는 변, 환, 쾌의 성향을 가졌다.
스아-악. 사아아-악! 쩌저저저적!
신마의 손에 들린 불사마검이 움직일 때마다 보랏빛 어둠의 뇌전이 일렁였다. 하늘과 땅에 가득 차오른 후 한꺼번에 쏟아져 내렸다.
피할 곳 따위 애초에 없었다.
‘그럴 생각도 없어.’
맞부딪힌다.
‘깨버릴 거야.’
불사대천검이라면 가능하다.
휘슷. 파아아-!
생각과 동시에 불사대천검무가 변화하기 시작했다.
덩실. 촤촤촥.
보다 부드러워졌고 또 그만큼 더 정교해졌다.
파사삭. 파사사삭.
360의 모든 방위가 하얀 실금으로 차올랐다. 그러더니 유리가 깨어지듯 한꺼번에 어긋났다. 동시에 바스러져 허무로 돌아갔다.
놀라운 일이었다.
쿠와아앙. 콰아아앙. 쿠콰콰쾅.
하늘과 땅을 뒤덮듯 펼쳐진 천마제천의 초식이 하나도 빠짐없이 불사대천검의 변화된 춤사위에 걸렸다. 동시에 터지고 쪼개졌다.
피쉬잇. 휘스스슷.
조각난 강기의 폭풍이 주변을 휩쓸었다.
하지만,
굼실. 휘릭. 굼실굼실. 스슷.
구름을 밟듯 살포시 내딛어 바람처럼 휘도는 용무린의 보법은 깨어지고 터진 강기의 파편들로부터 호신을 할 수 있도록 만들어줬다.
쐐애애액. 피쉬쉬쉿.
일진광풍에 섞인 소나기처럼 강기의 파편이 용무린을 뒤덮었음에도 어느 하나 스치지를 못했다. 일부러 그렇게 펼쳐낸 것처럼 허무하게 비켜 지났다.
“크하하! 우하하핫!”
미친놈처럼 웃던 신마가 마지막 회심의 일초를 전개하기 시작했다. 한 번 펼쳐지면 적의 말살이라는 목적을 달성해야만 비로소 멈출 수 있는 천마삼검의 마지막 초식 천마파천무였다.
“비로소 종말이다, 형제여!”
보랏빛 심연의 어둠이 화산처럼 터져 나오는 순간.
신마의 손에 들린 불사마검이 신묘한 선 하나를 그려내기 시작했다.
버언쩍. 번쩍. 휘스스슷.
검으로 펼칠 수 있는 모든 묘리가 불사마검이 만들어내는 선에 담겨 있었다.
찌르고 베고 치는 성질과 함께 끌어당기고 튕겨내며 무겁고 또한 가벼웠다.
거기에 더해 부드럽고 강렬했으며 무엇으로도 변화할 수 있지만 오로지 하나만 눈에 보일 뿐인 만검의 묘리가 불사마검으로 표현되었다.
그것이 바로 천마파천무!
불사마력을 불쏘시개삼아 불사마검으로 펼쳐내고 있었으니 과연 이 세상 그 무엇으로 막아설 수 있을 것인가?!
“와하하하! 형제여 오라!”
그오옹. 키이이이잉.
천마파천무의 초식에 걸린 파괴력이 얼마나 막대한지 공간이 비틀렸다. 강제로 구부려졌다. 유일한 적수인 용무린까지 비틀고 구부리려 들었다.
아무런 대책 없이 저 힘에 휘말린다면 사정없이 비틀리고 구겨져 한 줌 피 떡이 되고 말 것이다.
‘천마파천무!’
용무린은 신마가 펼친 검법의 흉험함을 알아보았다.
공간 자체를 베는 것과 아예 비틀고 구부러뜨리는 것 중 과연 어느 쪽이 더 강할까?
콰드드. 트드드드드.
그 서슬에 하늘과 땅 그리고 동정호가 몸살을 앓았다.
유일하게 멀쩡한 것은 오직 용무린뿐이었다.
‘그래도 내가 더 위라는 것을 증명해 보이지.’
굼실. 휘릭. 굼실굼실. 스슷.
구름 위를 걷듯 살포시 내딛는 발걸음에 용무린의 신형은 나빌대듯 공간의 뒤틀림을 따라 휘 돌았다. 구부정하게 구부러진 공간의 꼭짓점을 밟고 성큼 앞으로 나아갔다. 거침없이 불사대천검을 펼쳤다.
촤아아악.
나래 짓인 양 그어 내리고 비켜 올린 후 가볍게 쳐낸 심검의 끝을 따라 새하얀 실금이 어지럽게 그려졌다.
티딕. 쫘아악.
실금은 이내 어긋나 미끄러져 내렸고 덩달아 공간까지 베여 허무로 바스러져 내렸다.
굼실굼실. 스스스.
유과처럼 파사삭 부서져 내리는 천마파천무 아니 불사마력의 파편 사이를 유영하듯 헤치며 용무린은 계속해서 앞으로 다가섰다.
파스스. 파스스.
불사마력으로 비틀어내고 구부려 놓은 공간에 스친 부위가 피 한 방울 쏟아낼 것도 없이 허무로 되돌아갔지만 용무린의 움직임에는 거침이 없었다.
***
용무린과 신마가 맞부딪치는 주변에 인세의 지옥이 펼쳐졌다.
버언쩍. 버번쩌저적.
쿠와아앙. 콰아아앙. 트드드드드.
인간임에 틀림이 없는 두 사람이 싸움을 벌이는데 하늘과 땅과 대지가 통째 뒤흔들렸다.
쏴아아. 쏴아아아. 처얼썩.
심지어는 동정호의 물결마저 태풍에 흔들리듯 격랑을 일으켰다. 수면 위에는 거듭된 충격파에 허연 배를 내밀고 죽어간 물고기들이 수없이 떠올라 있었다.
어둠보다 짙은 심연과 한 덩어리가 된 보랏빛 어둠이 해일처럼 주변을 휘감는다. 그때마다 공간이 비틀리고 구부러졌으며 터졌다.
하지만 인간 하나를 어쩌지 못했다.
하늘과 땅이 새하얀 실금으로 가득 찼다.
유리가 깨어지듯 어긋나더니 바스러져 내렸다. 그대로 허무로 되돌아갔다.
보랏빛 어둠은 말할 것도 없다.
용무린 주변에서만 비틀리고 구부러져 터질 뿐, 뻗어 오는 즉시 베어져 어긋나 바스러졌다.
꽈르릉. 콰콰콰콰쾅.
트드드드.
그때마다 두 눈을 뜰 수 없을 만큼 강렬한 광채와 충격파가 일었다. 반경 백여 장을 초토화시키며 사방으로 뻗어 나갔다.
“크흡! 무, 물러서.”
이 정도 거리면 충분하겠지?
방심하던 음양자가 핼쑥한 얼굴을 한 채 비칠 뒤로 물러나야만 할 정도로 큰 충격파!
“크아악!”
“커헉!”
세상에, 두 사람이 충돌하며 만들어낸 강기의 파편에 백여 장 밖의 마인들이 속절없이 쓰러질 정도다.
“크흡! 더, 뒤로…… 더 뒤로 물러나-아!”
“피해라-아!”
정파의 진영도 마찬가지였다.
설마하니 이 정도일 줄은 몰랐던지 수많은 주검을 남긴 채 분분히 뒤로 물러나야만 했다. 보랏빛 어둠의 조각이 지닌 파괴력은 그만큼 무서웠다.
그 서슬에 전투가 잠시 멈춰졌다.
당가의 전설인 만천화우를 뿌리듯 계속해서 강기의 파편이 쏟아지고 있는 곳 주변에서 싸움을 지속한다는 것 자체가 바보 같은 일이었던 것이다.
‘이, 이 정도의 힘이라니!’
‘이 승부에서 이기는 쪽이 신마대전의 승리를 가져가게 된다.’
이런 무지막지한 힘을 쏟아내는 초인이 전투에 가담하게 되면 그 뒤는 빤하다. 음양자, 오마종, 소림, 무당 그 누가 되었든 반대쪽에 선 자들은 한꺼번에 쓸려나갈 거다.
용무린과 신마!
두 초인의 대결은 그 뒤로도 한참동안 더 이어졌다.
그러나 몇몇 초인의 경지에 근접한 사람들은 분명히 알 수 있었다.
“제, 제압한다. 보랏빛 어둠이 바스러져 사라지는 속도가 점점 더 빨라지기 시작했어!”
음양자는 분명히 느낄 수 있었다.
팽팽하던 무게추가 황룡패주 용무린 쪽으로 기울기 시작했다는 것을…….
“어, 어떻게 이럴 수가…….”
믿을 수 없는 일이다.
천하의 신마가, 마교의 천년 전설을 현실로 이뤄낸 신마가 어찌 황룡패주라는 애송이 따위의 힘에 눌릴 수 있다는 말인가?
하지만 놀람도 잠시였다.
반짝!
냉정을 되찾았는지 음양자의 눈이 서늘하게 빛나기 시작했다.
‘준비해야 할까?’
아무리 생각해도 그렇게 해야 할 듯싶다.
원래 계획대로라면 신마의 승리 후 자금성을 집어 삼키고 북원과 요동까지 완전히 병합한 후 천천히 진행시키려고 했지만 이제는 생각이 달라졌다.
‘드디어 가면을 벗어버릴 때가 돌아왔다.’
딸랑!
음양자의 한 손에 보기만 해도 섬뜩한 붉은 색의 방울이 들렸다.
다른 손은 터질 듯 콱 움켜쥐었다.
깊숙이 파고든 손톱에 베여 나온 피가 손아귀에 가득 고여 들었다.
***
타닷. 스스슷. 스파아아앙.
태풍처럼 쉼 없이 신법을 전개하는 오백여 승려들.
그 선두에는 소림의 장문방장인 법정대사가 자리하고 있었다.
반짝.
법정의 눈에 불똥이 튀었다.
‘시작되었다.’
저 멀리 동정호의 남쪽 기슭에 펼쳐진 보랏빛 심연의 어둠 아래 순천자와 역천자가 존재하리라.
“도착함과 동시에 짓쳐들 것이다. 불사항마승은 모두 불사항마력을 돋워 준비하라.”
“아미타불!”
“아미타불!”
오백여 불사항마승이 일제히 불호성을 외웠다.
츠츠츠츠츠.
동시에 불사항마력까지 일으켰는가?
오백여 불사항마승의 등 뒤로 부처님의 후광과도 비슷한 금빛 광휘가 맺혔다.
“불사항마승! 전속으로-오!”
스스스. 스파아아아-앙!
극성까지 끌어 올린 금강부동신법으로 인해 법정의 신형이 공간 속으로 빨려 들 듯 쏘아졌다.
스팡. 쌔애애액. 파파팡.
그 뒤를 따라 불사항마승의 질주가 이어졌다.
동정호의 남쪽 기슭이 점점 더 황금빛으로 물들어가기 시작했다.
***
버언쩌저적.
두 가지 서로 상반된 힘이 뒤엉키며 거창한 빛을 쏟았다.
하늘과 땅을 통째 뒤덮을 듯 퍼졌나갔던 보랏빛 심연의 어둠과 불사신공을 머금은 불사대천검무가 정점에 이르러 한꺼번에 터져나간 것이다.
투우우-웅.
집약된 힘이 어찌나 큰지 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그저 희뿌연 충격파만이 동심원을 그리며 반경 백오십 장 밖까지 퍼졌을 뿐이다.
동정호의 수면에 둥그런 원이 그려졌다.
둥그렇게 그려진 원형의 모습 그대로 동정호의 물이 바닥까지 밀렸다. 맨살을 드러냈다. 상상조차 힘든 압력에 물이 사방으로 밀려나간 것이다.
투화아아아-악! 쿠그그그그-긍.
그제야 거대한 폭발음이 들려왔다.
동정호변에 가득 심어져 있던 능수버들 수백여 그루가 동시에 부러져 흩날리더니 진공으로 변한 폭발의 중심을 향해 다시 빨려들었다.
희뿌연 충격파의 속도는 소리보다 빨랐다. 그리고 예상보다 훨씬 더 멀리까지 퍼졌다.
“크아악!”
“커헉!”
충격파에 직격당한 사람들이 갈대처럼 거의 동시에 쓰러졌다. 정파와 마교인을 가리지 않고 피를 토했다. 고막까지 손상되었는지 검붉은 피가 흐르는 귀를 감싸 쥐고 주저앉기까지 했다.
하지만 처음과는 달리 죽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음양자와 살계승 효정 대사 그리고 용대명의 경고로 훨씬 더 뒤로 물러났기 때문이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저 능수버들처럼 폭발의 중심부로 죄 빨려들어 짓이겨지거나 절명했을 거다.
이윽고 빛이 사라졌다.
겉옷 따위가 먼지로 변해 날아가고 겨우 천 조각 일부만 남아 하체를 가린 두 사내의 모습이 드러났다.
“……!”
“……!”
누구도 입을 열어 말을 하지 않았다. 잡아먹을 듯 서로를 쏘아 보기만 했다.
겉으로 봐서는 용무린의 패배로 보였다.
신마는 핼쑥한 얼굴에 멀쩡한데 용무린은 쉴 새 없이 검게 죽은피를 게워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뿐만이 아니다.
벌거벗은 상체 곳곳이 갈라지고 터져 굵은 핏물이 줄줄 흐르는 중이었다. 외상 못지않게 내상 역시 심각한 수준일 것이다.
그때였다.
풀썩 웃어 보인 용무린의 입에서 생각지도 못한 말이 흘러나왔다.
“이것이 바로 너와 나의 차이다.”
핼쑥한 낯빛을 한 채 잔뜩 굳어 있던 신마의 얼굴에 미묘한 표정의 변화가 일었다.
헤실.
그것은 분명히 미소였다.
“……그래. 이, 인정한다.”
살짝 떨리는 목소리의 대답이 있은 직후였다.
티딕!
신마의 얼굴에 실금 하나가 일었다.
“크크큭!”
나직한 신마의 웃음소리를 시작으로,
티딕. 틱. 짜작. 짜자작.
실금은 얼굴 전체로 번졌다. 아니 상반신 전체로 이어졌다. 완전히 바스러지기 직전의 살얼음처럼 몸 전체가 실금으로 덮였다.
“음과 양이라고 할 수 있는 규천마력과 불사신공의 힘을 일천의 동남동녀의 정혈을 이용해 강제로 하나로 묶어낸 힘과 자연스럽게 무극으로 진입한 차이를 이제야 확실히 알 수 있었다. 크하하하!”
신마가 큰 소리로 웃음을 터뜨렸다. 하지만 이내 웃음기를 거두었다. 정색을 했다.
티딕. 틱.
그 사이에도 실금은 신마의 전신으로 계속해서 번졌다.
한 군데도 빠짐없이 채웠다.
금방이라도 어긋나 쏟아져 내릴 것 같았지만 아직은 불사마력이 건재했다. 도저히 손을 쓸 수 없을 정도로 갈라졌음에도 불구하고 꿋꿋이 조각난 몸을 붙잡고 있었다.
신마의 목소리가 담담하게 이어졌다.
“후회는 없다, 형제여.”
“쿠울럭. 그놈의 형제 소리.”
다시 한 번 덩어리 피를 뱉어낸 용무린이 입가를 슥 닦으며 투덜거렸다. 얼굴이 한층 더 핼쑥해졌지만 이내 허리를 곧추 세웠다. 어깨를 쫙 폈다.
용무린이 신마를 똑바로 노려보았다.
‘도대체 왜 마지막 순간까지 고려의 옛 법을 꺼내들지 않았는지 물어볼까?’
솔직히 그것이 가장 궁금했다.
전생의 나인 절대검신 독고황을 통째 집어 삼키려 들었을 때 흡수했던 고려의 옛 법, 꺼내들지 않는다면 지금과 같은 상황을 맞을 것이 빤한데 어째서 끝까지 고려의 옛 법을 꺼내들지 않았을까?
‘그걸 펼치지 않은 덕에 상대적으로 내 피해가 덜했어.’
만에 하나 신마가 고려의 옛 법까지 펼쳐 사력을 다했다면 불사대천검을 대성하지 못한 지금으로서는 나 역시 죽음을 각오해야 했으리라.
“어쨌든…….”
씨익.
용무린이 활짝 웃었다. 당당히 선포했다.
“나의 승리다, 신마!”
한 차례 픽 웃어 보인 신마의 목소리에서 천천히 힘이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이, 인정한다.”
용무린의 입가에 숨길 수 없는 미소가 번져갔다.
신마가 패배를 인정한 것이다.
고려의 옛 법을 꺼내들지 않은 이유가 궁금하긴 했지만, 신마의 솔직한 패배 인정 그 자체만으로도 무림 전체에 기념비적인 일이었다.
신마의 허심탄회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절대자의 끝없는 고독과 허무, 이제는 오롯이 형제의 것이다.”
용무린이 세차게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 나는 그 따위와는 거리가 멀어.”
내가 왜 고독과 허무를 느껴?
어림도 없는 수작이다.
‘너는 몰라도 나는 제갈영령을 비롯해 함께 기뻐해 줄 아버지 어머니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들이 주변에 넘쳐난단 말이지.’
아무려면 내가 너와 같을까?
그렇게 봤다면 다시 한 번 보기 좋게 네놈의 생각을 깨어주마.
‘잘 먹고 잘 살아 주지.’
자식들도 힘닿는 데까지 낳아 볼 거다.
“언제고 절대자의 고독과 허무를 형제 역시 알게 될 것이다. 아무런 자극도 없이 이 하늘 아래 덩그러니 홀로 남겨져 있는 듯한 그 절대적인 고독을 말이야.”
자극이 없는 삶!
신마는 용무린이 자신이 느꼈던 고독과 허무를 언제고 알 수 있으리라 믿었다.
물론 용무린은 듣자마자 비웃었다.
“지랄 말아. 나는 내 사랑하는 여인과 명승지 찾아 여행 다니고 맛난 것 사먹으면서 재미나게 살 거야. 그리고 자식들도 최대한 많이 낳을 것이고 말이야. 고독? 허무? 그런 걸 느낄 틈이 어디 있어? 날마다 새로운 즐거움이 가득할 텐데 말이야.”
“……!”
신마의 눈이 동그래졌다.
피식.
생각지도 못한 방법이었는지 싱거운 웃음을 터뜨렸다. 슬그머니 고개를 끄덕이기까지 했다.
“그래, 그런 수도 있긴 하지…….”
푸념을 했다.
그래봤자 언제고 다시 짜릿한 자극 없는 밋밋한 삶에 염증을 느끼게 될 것이라 믿는 모양이었다.
“내 모든 것을 다 쏟아 후련하게 싸웠으니 나는 이제 다시 마신께로 돌아가리라. 후회는 없다. 잘 지내라, 나의 형제여.”
“잘 가라, 신마.”
용무린의 말이 끝나는 순간이었다.
신마가 마지막으로 미소를 지어 보이더니 산산이 흩어져 버리는 것이 아닌가?
파사삭. 파사사사-삭!
퍼어어어억!
전신을 가득 채웠던 실금을 따라 어긋나는가 싶더니 이내 먼지가 되어 무너져 내렸다. 그대로 허무로 돌아가 사라져 버렸다.
피 한 방울 남기지 못했다.
어긋난 공간과 함께 훅 꺼지듯 허무 속으로 완전히 없어졌다. 신마라는 존재의 종말이었다. 그 무엇도 남겨지지 않았다.
휘청.
그제야 긴장이 풀렸는지 용무린의 몸이 크게 흔들렸다. 하마터면 그대로 주저앉을 뻔했다. 하지만 이를 악물고 꿋꿋하게 겨우 버텼다.
‘아직 끝이 아니야!’
신마가 없어졌으니 큰 짐을 덜은 셈이지만 아직 마교의 주력은 건재하다.
‘지금부터는 뒷정리를 해야만 해.’
마교라는 단체를 무림에서 깨끗이 지워버릴 것이다.
‘내상이 심하긴 하지만 꾹 참고 버틴다.’
지금 약한 모습 보이면 다 된 죽에 코 빠뜨리는 셈이다.
용무린은 움켜쥔 주먹을 하늘 높이 들어 올렸다.
잠시 동안 정적이 흘렀다.
하지만 이내 하늘 끝까지 닿을 듯 커다란 함성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우와아아아아!”
“승리다!”
“이겼다! 무림맹주 용무린 대협께서 신마를 박살내 버렸단 말이다!”
무림맹 연합 진영은 환희의 도가니에 빠졌다.
신마의 죽음!
이제 승리만 남은 것이다.
반대로 마교와 흑도 연합의 진영은 침묵과 지독한 패배감에 사로잡혀 있었다.
“……!”
“……!”
그 누구도 입을 열지 못했다.
세상에, 신이나 다름이 없던 신마가 죽다니! 저토록 허무하게 사라져 없어지다니! 도무지 그 사실을 믿을 수가 없었던 거다.
바로 그때였다.
넋이 나간 듯 멍한 표정을 짓고 있던 음양자의 손이 살짝 흔들렸다.
딸랑!
참으로 기이한 일이었다.
작은 방울이 한 번 울린 것에 불과했는데 놀랍게도 공간을 훌쩍 뛰어 넘어 신마대전에 참여한 모두의 귓가에 스며들었다.
촤악.
동시에 펼쳐진 다른 손에 그동안 고여 있던 피가 뿌려졌다. 한 줌 밖에는 안 되지만 허공의 한 점에서 뭉치더니 한 방울의 낭비도 없이 음양자의 얼굴로 다시 쏟아졌다.
얼굴을 덮은 피가 이리저리 얽혀갔다. 기이한 도형을 그리며 몸 전체로 번졌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휘이이-!
어디선가 스산한 바람 한 줄기가 불어왔다.
“으음?”
용무린의 눈이 동그래졌다.
바람이 불어오는 시작점을 정확히 알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어, 어째서 저곳에서……?”
휘이잉. 휘이이이이잉.
점점 더 강력해지는 바람은 놀랍게도 신마가 완벽히 사라진 공간에서 불어왔다. 그리고 믿기 어렵지만 그 바람에는 불사마력이 농축되어 있었다.
그 지독한 기세라니!
어찌나 그 농도가 진하고 강력하던지 이미 먼지가 되어 사라졌던 신마가 다시금 세상에 강림해 불사마력을 뿜어내는 것만 같았다.
“……허억!”
“크흡!”
“저, 저게 대체……?!”
정파무림인들의 환호성도 어느새 멈춰졌다.
뭔지 모를 끔찍할 일이 벌어질 것만 같은 예감에 믿기 힘든 장면을 조바심 나는 마음으로 지켜볼 뿐이었다.
쿵쾅 쿵쾅 쿵쾅.
용무린의 심장도 터질 듯 뛰기 시작했다.
‘대체 뭐지?’
불안했다. 완전히 닫혔던 공간이 다시 열리고 형체도 알 수 없도록 조각나 증발했던 신마가 불쑥 다시 고개를 내밀 것만 같았다.
‘더는 기다릴 수 없어.’
뭐가 어떻게 되고 있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막아야 했다. 가능할는지의 여부도 모르지만 일단 시도해 봐야 한다는 본능적인 충동이 일었다.
“이야아아-하!”
용무린은 전력을 다해 불사신기를 끌어 올렸다.
버언쩌저저적.
다시금 용무린의 손에 심검의 빛이 솟구쳤다.
굼실.
살포시 내디뎌지는 한 걸음에 거리라는 제약이 사라졌다. 용무린의 몸은 불사마력이 새어 나오는 공간 앞에 이동해 있었다.
덩실. 파아아-아!
나래짓 하듯 퉁겨진 심검이 다시금 불사대천검을 펼쳐내었다. 흐드러지듯 내쳐졌다 부드럽게 휘감아 돌리는 한 폭의 그림 같은 검무가 이어졌다.
쩌어억. 쩌저저저-적.
심검의 움직임을 따라 불사마력이 흘러나오는 공간이 수도 없이 갈라졌다.
‘이 정도면 충분히 부숴버릴 수 있겠지?’
오산이었다.
수도 없이 갈라지고 쪼개진 공간과 함께 불사마력 역시 상쇄되어 사라져야만 했지만 그러지 않았다.
투화악! 콰아아아아-!
어림도 없다는 듯 아예 입을 쩍 벌렸다.
사라질 때 그 몇 배의 기세로 불사마력을 뿜어냈다.
“이, 이런!”
화들짝 놀란 용무린의 시선이 불사마력을 쫓았다.
휘이이잉. 휘류류-류!
폭발하듯 뿜어져 나온 불사마력이 한 곳을 향해 흘러들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음양자였다.
신마가 전력을 다해 용무린과 일전을 겨룰 때 쏟아냈던 것과 똑같은 기세로, 아니 그 몇 배 속도로 뿜어져 나온 불사마력이 고스란히 음양자에게로 빨려들었다.
“크허억! 컥! 크헉!”
두 팔을 하늘로 번쩍 치켜 올린 음양자가 격렬하게 몸을 떨었다. 고통인지 희열인지 모를 소리를 토해내며 불사마력을 끝도 없이 삼켰다.
콰르르. 콰르르르르-르.
몸 안에 무저갱이라도 만들어진 양 음양자는 자신을 향해 밀려드는 불사마력을 남김없이 흡수했다.
쪼르륵.
마지막 한 방울까지 깡그리 마셨다.
“……!”
“……!”
그 장면을 지켜보고 있던 누구도 입을 열어 말을 하지 못했다.
용무린도 말문이 막힐 정도!
쿵쾅 쿵쾅 쿵쾅.
용무린의 심장이 계속해서 터질 듯 뛰었다. 까닭 모를 불안함을 가눌 길이 없었다.
그러다 문득 한 가지 두려운 가정이 머리를 스쳤다.
‘서, 설마 저놈이?’
자신이 처리한 신마가 사실은 역천자가 아니고 놈의 죽음 후 불사마력을 통째 흡수한 저 괴인이 진정한 역천자가 아닐까 하는 가정!
“……!”
지그시 눈을 감은 음양자는 미동도 없었다.
넘치도록 꾹꾹 채워 넣은 불사마력을 음미라도 하고 있는 것일까?
‘지금이라도 베어야 해.’
이미 늦었다는 자각과 함께 그래도 시도는 해봐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교차하는 순간이었다.
음양자의 눈이 크게 떠졌다.
버언쩍.
순수한 보랏빛을 머금은 심연의 어둠이 순간적으로 강렬한 빛을 뿜어내고 사라졌다.
‘맙소사…….’
용무린은 내심 탄식을 쏟았다.
검은 일색의 눈이었다.
흰자위가 하나도 없는 순수한 검은 색의 눈동자가 흔들림 없이 떠진 것이다.
진악(眞惡)!
그 순수한 요요(了了)함이라니!
“……?!”
불사마력을 송두리째 집어 삼킨 느낌이 묘했는지 음양자가 고개를 갸웃했다. 자신의 손과 몸을 돌아보는 시선에 호기심이 가득 담겨 있었다.
용무린의 마음이 다급해졌다.
‘어떤 힘을 지녔는지는 몰라도 지금 당장 쳐야 해.’
놈의 행동에는 호기심이 강하게 섞여 있다.
그 말은 곧 불사마력의 흡수로 인해 새롭게 얻은 힘이 흥미로울 정도로 익숙하지 않다는 뜻이니 지금이라면 놈이 완전한 힘을 발휘하지 못할 가능성이 크다.
‘간다!’
굼실! 후우욱!
살포시 내디딘 발걸음 한 번에 용무린과 음양자와의 거리가 사라졌다. 공간을 도약하듯 용무린은 음양자 코앞에 나타났다.
덩실. 휘슷.
순간적으로 뽑아 올린 심검으로 불사대천검의 검무를 다시금 펼쳐내는 순간이었다.
쩌어어억!
공간과 함께 음양자의 몸이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둘로 나뉘려는 찰나,
파아아아-!
흥미로운 눈으로 자신의 손과 몸을 이리저리 훑어보던 음양자의 손이 짧게 휘둘러졌다.
그 결과는 놀라웠다.
파지직.
뇌전이 일렁이는 듯 방전하는 소리가 짧게 들리더니 보랏빛 광채가 똬리를 튼 검은 색의 심검이 솟구쳐 나왔고 같은 색의 뇌전을 뿌렸기 때문이었다.
콰르르르릉!
“음…….”
“크흐흐…….”
나직한 신음성과 함께 용무린이 다섯 걸음이나 뒤로 물러났다. 음양자도 튕기듯 다섯 걸음 물러나며 비릿한 웃음을 터뜨렸다.
동수!
기습을 한 용무린의 불사대천검을 창졸지간에 맞받았으면서 같은 파괴력을 낸 것이다.
된서리는 음양자 주변에 서 있던 수하들이 맞았다.
용무린의 불사대천검과 음양자와의 격돌이 빚어낸 충격파에 휩쓸려 수십여 명이나 되는 숫자가 칠공으로 피를 쏟으며 쓰러져간 거다.
“너……!”
용무린은 비로소 확신했다.
“네 놈이 바로 역천자로구나!”
놈이 불사대천검을 맞받아친 힘!
그 힘이 바로 고려의 옛 법이었기 때문이었다.
비홍검!
아득한 시절부터 절대검신의 고향을 지켜온 옛 법!
그 검법의 비밀을 역천자가 절대검신으로부터 흡수해 버렸던 것이다.
음양자의 입이 불쑥 열렸다.
“아아, 이해 좀 해주게. 스스로를 가뒀던 봉인을 칠십 하고도 몇 년 만에 깨버린 탓에 아직 살짝 헷갈린단 말이지.”
지금도 조금은 혼란스러운 모양인지 음양자가 고개를 흔들어 보였다.
용무린은 잠자코 음양자의 말을 들었다.
어차피 벌어질 생사결이지만 솔직히 놈에 대해 궁금했던 것이다.
한 차례 픽 웃어 보인 음양자가 자신의 머리를 툭툭 쳤다. 용무린의 눈을 넌지시 들여다보았다.
“오랜만이야.”
짓궂은 얼굴을 지어 보이며 되물었다.
“그렇지 않나 절대검신 독고황?”
음양자가 용무린을 절대검신 독고황으로 불렀다.
이미 다 알고 있었다는 뜻이었다.
“역시, 지금껏 내가 상대했던 놈은 가짜였군.”
“푸흐흐. 그렇지 뭐…….”
음양자가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었다.
기가 막혔다.
“가짜를 내세우다니…….”
정말 생각지도 못한 일이었다.
자신은 물론이고 천기자와 혜월까지 모두 속이는 일에 성공할 줄이야.
“내가 다시 이 땅에 돌아와 너를 막을 것이라는 사실을 어떻게 알 수 있었지?”
간단한 답이 돌아왔다.
“널 먹었잖아! 마지막에 실패했지만…….”
팔 할, 아니 구 할 정도는 먹었다고 해야 할까?
마지막에 실패하긴 했지만 그로 인해 얻은 것이 적지 않다는 뜻이었다. 하긴, 마지막 순간에 품었던 생각까지 모조리 흡수를 했을 테니.
“역시 그랬나?”
그제야 이해가 된다는 듯 고개를 살짝 끄덕여 보인 용무린은 상대를 음양자 아니 역천자로 돌아온 진정한 의미의 전대 신마로 인정했다.
“진정한 의미의 전대 신마라.”
“아니, 이 기회에 정확히 밝혀줘야 하겠군 그래.”
용무린의 전대 신마 운운에 음양자가 고개를 흔들었다. 눈을 똑바로 뜨며 당당하게 목소리를 높였다.
“정식으로 소개하지. 나는 19대 배교의 교주 해무광이라고 한다네.”
“배교의 교주 해무광.”
쾅!
뒤통수를 한 대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언제부터 이 놀라운 일이 시작되었는지 용무린은 비로소 깨닫게 되었다.
팔십 년 전 일이다.
혈교와의 전쟁을 시작하기도 훨씬 전, 마교는 배교와의 전쟁을 먼저 치렀었다.
그 선봉에 섰던 것은 바로 교주 직속의 수라멸절단이었고 단주였던 진무량은 천마의 대제자로서 배교의 교주를 직접 베었다.
‘그때 이미 진무량을 삼킨 것이로구나!’
무력으로는 도저히 마교를 당해낼 수 없다고 판단한 배교의 교주는 복수와 세상을 통째 집어 삼키기 위한 초석으로 삼고자 스스로의 몸을 당시 수라멸절단주였던 진무량에게 던진 것이다.
“환혼대법이라고 해. 우리 배교의 전설이지.”
“……!”
“운이 좋았어. 배교의 모든 술법을 집대성한 끝에 내가 환혼대법을 이뤄내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마교에서 쳐들어왔으니 말이야.”
진무량을 보기 좋게 잡아먹었다.
놈에게 뱉어냈던 피의 저주를 통해 놈의 영육을 잠식해 들었고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아 진무량의 의식을 말살할 수 있었다.
“수라멸절단주를 집어 삼킨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바로 마교주까지 삼킨 것이로구나.”
일개 무력단체의 단주였던 진무량이 사부였던 마교의 교주를 밟고 올라가는 시간이 그렇게 짧았던 이유가 바로 진무량으로 몸을 갈아탄 배교의 교주 해무광의 능력 때문이었던 것이다.
“필요했던 것은 오직 하나, 진무량을 완전히 집어 삼키는 데 걸리는 시간뿐이었던 거야.”
짝! 짝! 짝!
“맞았어.”
음양자 아니 배교주 해무광이 장난스럽게 손뼉을 쳐 보였다. 긴 세월을 뛰어 넘어 이뤄낸 자신의 완벽한 계획이 어지간히 자랑스러운 모양이었다.
“칠십 년 전에 네놈을 먹지 못하고 밀려 나오는 통에 별 수 없이 나는 당시 마교 대사제의 몸에 깃들어야만 했지. 혹시나 해서 미리 손을 써뒀기에 망정이지 자칫 완전히 소멸을 할 뻔했다니까?”
칭찬이라도 받고 싶은 듯 음양자 아니 배교주 해무광은 계속해서 목소리를 높였다. 자신이 어떻게 여기까지 올 수 있었는지 낱낱이 늘어놓기 시작했다.
불가피하게 음양자로 몸을 갈아 탄 후 오마종을 천천히 공을 들여 세뇌했고 휘하 오궁이원이전의 주인들에게까지 술법을 걸었다.
어려운 일이기는 했지만, 천마의 자리가 공석이었고 음양자가 아리만의 대사제인데다가 오랜 시간 공을 들여 은밀히 행동했기 때문에 결국 원하던 충성심을 모두 이끌어 낼 수 있었다.
“거기서 문제는 환혼대법마저 떨쳐낸 너 절대검신 독고황이 나를 막기 위해 다시 돌아온다는 사실이었어.”
“그랬군.”
“게다가 아무리 생각해봐도 불사신공을 내가 익힐 수가 없었어. 환혼대법도 그렇거니와 이미 마공을 먼저 익혔기 때문에 불사신공을 익히면 버티지 못하고 그대로 죽어버릴 우려가 너무 컸거든.”
용무린이 진무량의 의식으로 눈을 떴을 때 고민했었던 점을 실제 피부로 느꼈던 것이다.
‘나 역시 도저히 양립할 수 없다는 생각 때문에 별 수 없이 마교의 내공을 버리고 처음부터 불사신공을 택해 수련을 했었지.’
배교주 해무광은 그 생각에서 한 발 더 나아갔다.
아예 불사신공과 규천마력을 하나로 엮어 낸 후 그 힘을 안전하게 흡수해 버릴 방법을 생각해낸 것이다.
“그래서 먼저 불사신공을 익혀내기에 가장 좋을 것이라 생각한 신주 오가의 일원을 노렸지. 어쨌거나 네가 호심결을 공식적으로 전한 가문들이었으니까.”
“운룡장과 상관세가…….”
“맞았어. 호심결 따위와 비교조차 할 수 없는 불사신공의 원본을 알고 있긴 했지만 조심스럽게 접근하기 위해서는 호심결을 먼저 연구할 필요가 있었거든. 약한 것부터 시작해야 안전할 테니까 말이야.”
해무광의 입가에 비릿한 미소가 걸렸다.
야비하게까지 보이는 놈의 주둥이에 주먹을 쑤셔 박아 버리고 싶었지만 흘러나오는 이야기가 워낙 놀라운 것들이라 용무린은 계속 참고 들어주었다.
“처음에는 실패했어.”
오죽 많이 실패했겠는가?
불사신공과 규천마력을 하나로 엮을 방법을 고안해 내는 것만으로도 벌써 수많은 마교의 제자들 목숨이 스러져야만 했었다.
“운룡장의 장손에게 신마의 기억을 심어 차근차근 준비를 시켰는데도 불사신공과 규천마력이 도저히 융합이 되지 않더라고. 실험체들이 다 그랬던 것처럼 결국 폭발해 버렸어. 물론 나는 그 사실을 숨겼지. 그리고 물들였어.”
말만 절대검신의 제자였지 진신절기는 하나도 전수받지 못한 신주오가 아니던가?
그런 차에 가문의 장손이 신마로 각성을 한 후 온갖 절기를 내려 주었으니 오죽 힘에 취했으랴?
장손으로부터 전해진 마교의 절기를 은밀히 익히며 혈고에까지 노출이 되어 운룡장은 그렇듯 쉽게 변절이 되어 버렸던 것이다.
“두 번째가 상관세가의 장손이었는데, 다행히 놈은 성공을 할 수 있었어.”
용무린이 말을 보탰다.
“운룡장의 장손이 넘지 못한 고비를 동남동녀의 정혈을 투입해 결국 성공했다는 뜻이지?”
“푸흐흣. 바로 그거지.”
음양자 아니 해무광이 대뜸 고개를 끄덕였다.
어지간히 참아내기 힘든 세월이었다는 듯 크게 숨을 몰아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뒤로도 꽤 오래 참아야만 했어. 내가 만들어낸 실험물 주제에 가장 맛있는 음식 운운하며 어찌나 시간을 질질 끌어대던지 원…….”
여색에 빠졌을 때를 말하는 것이다.
백 일.
그 시간을 넘기면 스스로에게 걸어둔 봉인을 제거하고 아예 전면에 나설 생각이었다.
하지만 다행히 그 전에 혈교주가 먼저 아리만의 화신을 자처하며 존재감을 드러냈고 신마는 떨쳐 일어나 놈을 짓밟았다.
비천검제가 불회곡으로 쳐들어왔을 때도 심각하게 고민을 했었지만 결국 참았다.
비천검제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용무린이 건재했기 때문이었다. 자신이 정체를 드러내는 순간은 실험체와 용무린이 격돌한 후가 되어야만 했다.
“생각해보면 불사신공과 규천마력을 합일시킬 방법을 찾아내기까지가 힘든 시간이었어. 시공을 뛰어넘어 다시 나를 막기 위해 돌아올 너를 상대하기 위해서는 나 역시 그 정도의 준비를 하지 않으면 안 되었거든.”
넌덜머리가 난다는 듯 해무광이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어 보였다.
“합일시키는 일을 완성하면 그 힘을 다시 안전하게 흡수하는 방법을 찾는 일은 또 어떻고? 흡성대법이란 것에 배교의 술법까지 섞는 게 쉬웠을 것 같아?”
하지만 결국 찾아냈다.
그리고 지금 보았듯 완벽하게 성공시켰다.
‘그렇게 보면 운룡장과 상관세가의 변절을 비롯해 무림에 암운이 드리워지기 시작한 것은 불과 십여 년 정도에 불과하구나.’
그 뒤로는 용무린도 알고 있는 그대로였다.
저 혼자 모든 것을 이뤄낸 것으로만 알고 있던 허수아비 신마는 신교로 돌아왔다.
한동안 내상을 회복한 후 신교 천년숙원의 해원이라는 가치를 내세워 마교와 흑도의 힘을 모아 중원정복의 거보를 내디뎠다.
“크크큭. 그리고 결국에는 내 예상대로 보기 좋게 네놈 절대검신과 말코 천기자 그리고 혜월 땡초의 안배를 홀로 받아 죽어 나자빠졌지.”
“그래도 이해할 수 없어. 어떤 이름으로 부르던 불사마력은 신마가 쌓아 올린 힘이었어. 그런데 어떻게 그 힘이 네게 귀속이 될 수 있었지?”
어이없다는 듯 음양자가 풀썩 웃어 보였다.
마치 ‘이런 어리석은 녀석을 봤나?’ 라고 비웃는 시선으로 말을 이었다.
“처음부터 내가 만들고 키워온 놈이야. 무슨 뜻인지 정말 모르겠어?”
대충 짐작이 갔다.
‘처음부터 키웠다? 애초에 불사마력을 완성하면 그 힘을 빼앗기 위해 밑 준비를 해왔다는 말인가?’
용무린의 짐작을 해무광이 확신으로 바꾸어주었다.
“놈의 운명은 처음부터 외부에 만들어 놓은 나의 살아 움직이는 단전 노릇이었을 뿐이야. 놈이 각성이랍시고 내가 주입시켜 놓은 기억을 깨달았을 때부터 이미 흡성대법과 하나로 엮인 내 술법의 노예가 되었단 말이야.”
처음부터 술법의 노예였다.
그러니 신마가 그렇듯 음양자를 싸고 돈 것이다.
일인지하 만인지상.
처음부터 그 전제를 깔아 두고 누구도 음양자의 위로 올라서는 것을 인정하지 않았으며 오마종을 비롯한 오궁이원이전의 주인들 역시 자연스럽게 음양자와 신마와의 미묘한 관계를 받아들였다.
파지직.
음양자 아니 배교주 해무광의 손에서 보랏빛 광채가 똬리를 튼 검은 일색의 심검이 피어올랐다.
“자, 이제 너만 없어지면 다 끝나는 거야.”
배교주로서의 힘과 불사마력으로 인해 두 사람의 대화는 누구도 들을 수 없었다. 해무광의 말대로 용무린만 없어진다면 세상 그 누구도 이 비밀을 알 수 없으리라.
“시간과 공간을 훌쩍 뛰어넘어 이어져 온 은원을 오늘 비로소 모두 끝내도록 하자, 독고황.”
“너 말 한번 잘했다.”
버언쩌저적.
용무린의 손에서도 심검의 빛이 찬란히 솟구쳤다.
“배교주고 지랄이고 간에, 이번에야말로 혼백까지 깔끔하게 말살해 주마.”
사람이 참 한결같다.
용무린은 심검을 놈에게로 향했다. 어서 들어오라는 듯 까딱였다. 한마디 툭 내뱉었다.
“덤벼.”
멍하니 용무린을 지켜보고 있던 해무광이 돌연 입이 찢어져라 웃기 시작했다.
“……큿. 크하하하-핫!”
스파아앙.
그러더니 갑자기 공간을 접듯 용무린을 향해 짓쳐들었다.
용무린이 다시 불사대천무를 펼쳤다.
굼실굼실 내딛는 한 걸음에 놈의 심검을 비켜내었고 덩실덩실 나래인 양 나풀거리는 심검은 사정없이 놈이 펼친 고려의 옛 법을 받아 쳤다.
쿠와왕. 콰아앙. 쿠콰콰콰-앙!
뇌우가 몰려오는가?
심검과 심검이 맞부딪칠 때마다 하늘과 땅이 격렬한 폭음으로 가득 찼다.
하지만 놀랍게도 백중세였다.
불사대천검을 펼치는 용무린과 고려의 옛 법을 펼치는 해무광 중 누구 한 사람 밀리지 않았다.
뻐언쩌저적.
용무린의 심검이 나비의 나래 짓처럼 살포시 공간을 쪼개어 놓으면,
파지직. 쩌어어억!
해무광이 뻗어낸 보랏빛 검은 색 심검 역시 공간을 찢어발긴다.
‘가온누리 칼벼락!’
전생이던 절대검신 독고황 시절 사용하던 고려의 옛 법.
온 세상 한 가운데를 갈라버리는 칼벼락이라는 초식의 이름처럼 위력적인 비홍검이야말로 불사대천검의 원류가 아니겠는가?
파지직. 콰릉. 콰르르릉.
그 서슬에 애꿎은 창공만 몸살을 앓는다.
찢기고 쪼개어지고 터졌다가 산산조각 나서 먼지처럼 흩어졌다.
정말 놀라운 위력이었다.
절대검신을 통해 집어 삼킨 원류 그대로만 익혀 냈음에도 불구하고 옛 법을 초월했다는 불사대천검과 팽팽히 맞섰다. 한 치도 밀리지 않는다.
‘내, 내가 오히려 밀린다.’
미칠 노릇이었다.
신마와의 생사결로 인해 이미 심한 내상을 입었기 때문이었다.
‘아니, 대성을 하지 못해서이기도 하겠지.’
대성지경에 오르기만 했다면 내상이 비록 심하다 하더라도 충분히 놈의 영육을 동시에 갈라 영원히 없애버릴 수 있었으리라.
“크크큭. 이것뿐인가 독고황?”
해무광의 기세가 점점 더 살아났다. 매서워졌다.
파지직. 파지지직. 콰릉. 콰르르릉.
신마가 뿜어내는 것에 비해 조금도 손색이 없는 수준의 불사마력을 심검에 담아 펑펑 뿌려댔다. 용무린을 밀어 붙이며 통쾌하게 외쳤다.
“나를 몰아내고 새로 만들어 낸 것이 겨우 이 정도뿐이야? 그래?”
콰콰쾅. 콰르르릉.
“커흡. 쿨럭. 쿠울럭.”
용무린은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사력을 다해 불사신공을 일으켜 검무에 힘을 보탤 뿐 이제는 해무광을 향해 빈정거릴 힘도 없었다.
‘하지만 내게도 마지막 한 수가 있어.’
처음에는 몰랐지만 이제는 보인다.
파지직. 콰르르릉.
“쿠울럭!”
연거푸 피를 쏟아내면서도 용무린은 해무광의 움직임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보여. 보인다고…….’
불사대천검에 연신 부딪치는 칼벼락.
한 치의 틈도 없이 정교하게 맞물리는 연계 속에 어색한 곳이 눈에 들어왔다.
‘너! 칼벼락을…… 비홍검을 아직 완전히 네 것으로 소화해 내지 못했지?’
지금 놈의 상태는 자신이 최초로 눈을 떠 신마 진무량으로 자각했을 때와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나도 그때 그랬어. 운룡장의 애송이들과 싸울 때 말이야. 아무리 기를 쓰고 정조준을 해도 이상하게 자꾸만 삑사리가 나더라고.’
놈이 집어 삼킨 고려의 옛 법은 어디까지나 전생의 나인 절대검신 독고황의 경험과 기억, 현재 놈이 차지한 음양자와는 신체 조건이 맞질 않을 거다.
버언쩌저적. 파지직. 콰릉. 콰르르릉.
“커헉. 쿠울럭.”
다시 한 번 피를 토해내면서 확신했다.
놈이 정녕 고려의 옛 법을 자신의 것으로 전부 소화해 냈다면 심각한 내상을 입어 제대로 불사대천검무를 펼치지도 못하는 지금의 자신 따위 벌써 참했으리라.
‘그러니 너는 내 손에 죽는다.’
반드시.
“크크큭. 어떠냐, 절대검신. 겨우 그 정도가 네 모든 것이라면 이제는 끝을 내 주마. 크하하하!”
배교주 해무광이 좋다고 웃어젖힌다.
‘얍삽한 자식이 부끄러운 줄 모르는군.’
본바탕이 마교의 교주가 아니라 배교주이기 때문인지 놈은 내가 지금 쏟는 피를 자신의 실력으로 받아들이는 모양이다.
‘하긴, 어떤 점에서는 그것도 맞는 말이긴 하지.’
가짜든 뭐든 신마라고 알고 있던 놈과의 생사결에서 심각한 내상을 입게 만들었으니 그것 역시 놈의 실력이라면 실력이라고 할 밖에.
인정할 것은 인정해야 사내다.
놈의 깊은 심계와 상황을 이끌어가는 능력만큼은 역대 그 어떠한 적보다도 더 위였다.
‘그래. 인정할게. 그러니 조금만 더 시간을 끌어 주라. 조금만 더…….’
쿠울럭.
덩어리 피 한 움큼을 더 쏟으며 용무린은 모든 힘을 다해 불사신공을 끌어 올리는 데 주력했다.
‘풍뢰. 소검비연. 너희 둘만 믿는다.’
가짜 역천자와의 대결이 끝난 후 급변한 상황 때문에 미처 거둬들이지도 못한 애병들이 아직도 바닥을 나뒹굴고 있었다.
‘너희들이면 충분해.’
놈이 고려의 옛 법 비홍검에 정말 서투르면 성공할 수 있을 것…….
움찔!
용무린의 몸이 살짝 떨렸다. 눈이 부릅떠졌다.
그것만은 피해달라고 바라마지 않던 초식의 기수식을 해무광이 취했기 때문이었다.
파지직.
보랏빛 검은 색의 심검을 든 손이 하늘로 향했다.
“크아아아아-합!”
나머지 한 손은 땅을 가리켰는데, 이 한 수에 끝을 내겠다는 듯 해무광이 악을 쓰자 그 손에서도 심검 하나가 솟구쳐 올랐다.
파지지직. 파지지지직.
보랏빛 검은 색의 뇌전 두 개에서는 연신 가느다란 뇌전이 흐르고 있었는데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둥실 떠오른 심검이 옆으로 몸을 뉘더니 이내 무서운 속도로 휘돌기 시작했던 것이다.
‘빌어먹을……. 칼벼락에 틈이 보이기에 그것까지는 펼칠 수 없겠지 싶었는데 그걸 펼치네.’
고려의 옛 법 중에서도 가장 무서운 초식.
용오름 하눌신폭.
칠십 년 전 신마대전 당시 신마의 목을 날려 버렸던 바로 그 초식, 신마를 집어 삼키고 있던 해무광의 목을 날려 버린 셈이었던 그 초식을 놈이 펼치기 시작한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