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이차 신마대전의 끝에서 (87/104)

3.이차 신마대전의 끝에서

불사대천검을 대성하지 못한 상태에서 저 초식에 살아남을 수 있는 방법은 오직 한 가지, 똑같은 힘으로 같은 초식을 펼쳐 맞받아치는 것뿐이다.

‘가능할까? 칼벼락에도 뒤로 쭉쭉 밀릴 정도로 내상을 입은 주제에?’

배부른 생각이다.

이 자리에서 죽고 싶지 않다면 반드시 놈의 초식을 받아 쳐내야만 한다. 어쨌거나 고려의 옛 법 역시 고스란히 내 안에 깃들어 있는 것이었으니 불가능하진 않을 거다.

“우와아아-악!”

비명을 쏟아내듯 악을 썼다.

그만큼 독하게 불사신공의 마지막 한 방울까지 모두 끌어 올렸다. 쥐어짜듯 모았다.

‘하늘 끝에서 하늘 끝까지 한(桓)님의 의지가 뻗을 것이니, 그 앞에 맞서는 것은 모두 멸절하리라…….’

용무린은 홀연히 떠오르는 구결에 맞추어 불사신공을 이끌기 시작했다. 놈이 그러했듯 한 손은 하늘로 다른 한 손은 땅으로 향했다.

양의신공 때문일까?

홀연히 떠오르는 비홍검의 구결대로 불사신기를 움직이고 초식을 끌어내려던 용무린의 뇌리에 문득 이런 생각이 스쳐 지났다.

‘어쩌면 불사대천검의 대성지경의 비밀이 고려의 옛 법인 비홍검에 있을지도 모르겠구나.’

비홍검은 내 전생인 절대검신 독고황이 전승자로서 평생 동안 닦아 대성한 검법. 그것을 뛰어넘어야만 다다를 수 있는 것이 바로 불사대천검 아니겠는가?

‘당가에 어째서 구환살이 그렇게 절실했겠어? 팽가의 철혈도법은? 남궁세가는 어찌 그리 창궁무애검법을 돌려받고 감격해했을까?’

갑자기 후회가 밀려들었다.

그들의 절실함을 보았으면서도 정작 나는 어쩌자고 고려의 옛 법을 건너뛰고 바로 불사대천검만 죽자고 익히려 했던 것일까?

이미 알고 있다는 자만심 때문에?

아니면 다 필요 없고 불사대천검이 그냥 최고라서?

버언쩍. 버번쩌저저적.

겨우 겨우 두 개의 심검을 일으키기는 했다.

하지만 용무린은 알 수 있었다.

지금 자신이 똑같이 펼쳐내 맞받아치려고 하는 초식은 해무광만큼의 수련도 되어 있지 않은 상태에서 요결과 경험만으로 펼칠 수 있는 초식이 아니라는 것을.

“죽어라-아!”

마침내 해무광의 손에서 그 초식이 펼쳐지고야 말았다.

고려의 옛 법 중 최종기.

용오름 하눌신폭이…….

‘끝났군.’

단 한 번도 포기했던 적이 없었는데 순간적으로 맥이 탁 풀리는 것이 느껴졌다. 굳이 해보지 않아도 안다. 졌다. 놈에게 진 것이다.

‘다시 한 번 더 태어나야 하는 걸까?’

웃기는 소리!

아득. 꾸우욱.

절로 이가 갈렸다. 본능적으로 손에 힘이 고였다.

질 때 지더라도 곱게 죽어주는 것은 성격에 맞지 않는 짓이었으니까.

“그거 내가 할 소리야 인마-아!”

되든 안 되든 상관없다.

나는 끝까지 싸운다.

죽는다 해도 바로 그 순간까지 눈을 똑바로 뜨고 할 수 있는 것을 할 거다.

칼벼락에서 반격의 틈을 찾아냈듯 용오름 하눌신폭에서도 틈을 찾아 그곳에 한 칼 먹일 결심을 할 때였다.

“불사항마승! 불사항마력을 발하라-아!”

노승의 힘찬 외침을 시작으로 오백여 불사항마승들이 일제히 불호성을 외웠다.

“아미타불!”

“아미타불!”

휘우우우웅. 버언쩌저저적.

불사항마승들에게서 황금빛 찬란한 불사항마력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불사, 뭐?”

용무린의 눈이 절로 돌아갔다.

놀라운 모습이 보였다.

정파 진영의 중단이 쫙 갈라지더니 그 안에서부터 오백여 명의 승려들이 놀라운 속도로 용무린과 해무광을 향해 밀려드는 것이 아닌가?

‘방장 스님!’

선두에 선 노승의 정체는 바로 소림의 장문방장인 법정.

그렇다면 법정과 함께 밀려드는 승려들 역시 소림의 무승일 것이다.

살 수 있다. 해낼 수 있다.

용무린의 가슴이 희망으로 부풀어 오르는 순간!

“지랄! 다 죽어-어-엇!”

버번쩍.

차마 눈을 뜰 수 없을 정도의 빛이 터져 나옴과 동시에 용오름 하눌신폭이 완전히 발동했다.

가로로 누운 두 개의 심검이 매섭게 소용돌이치는가 싶더니 이내 딱 달라붙었다. 그러더니 이내 점점 더 크게 덩치를 키웠다.

휘우우우웅. 쌔애애애액.

눈 깜박할 사이 하늘에까지 닿을 듯 자라난 소용돌이는 모든 것을 파괴하고 집어 삼키는 글자 그대로의 용오름이 되었다.

파지직. 파지지직.

한 줄기 한 줄기가 모두 심검인 용오름의 매서운 바람 주변에 보랏빛이 똬리를 튼 검은 색의 번개가 미친 듯이 작열하고 있었다.

그것은 모두가 칼벼락이었다.

보랏빛이 똬리를 튼 검은 색의 번개가 스치고 지나가면 만년 거암이든 아니면 애꿎은 허공이든 가리지 않고 그 무엇이든 찢겼다.

놀라운 일은 또 있었다.

실제 용권풍이나 용오름 현상이 일어날 때와 똑같이 한 뼘 남짓한 크기의 우박이 쏟아진 거다.

그런데 더 미칠 노릇인 것은 그 우박이 송곳마냥 날카롭고 두꺼운 철판이나 화강암을 두부처럼 뚫어낼 만큼 강력하게 나선형으로 꼬여 있다는 점이었다.

퍼억. 퍼퍼퍼퍼퍼억.

지상에 지옥이 강림한 것만 같았다.

우박처럼 쏟아져 내린 송곳과도 같은 얼음에 대지가 송두리째 들고 일어날 정도였다.

그 힘에 불사항마승의 선두가 휩쓸렸다.

“커흑!”

“크아악!”

거침없이 진격해 오던 불사항마승 백여 명이 거의 동시에 칠공으로 피를 쏟았다. 전신에 구멍이 뻥 뚫려 힘없이 바닥을 나뒹굴었다. 숨이 끊겼다.

실로 무시무시한 위력!

그러니 용무린은 어떻게 되었겠는가?

와드득.

상상조차 하기 힘든 압력에 척추가 부러졌다.

파지직. 파지지직. 피쉬쉬쉬쉿.

미친 듯 모든 것을 찢어발기는 칼벼락과 추측하기 힘든 속도로 휘도는 심검의 회전에 전신의 피부가 잘게 갈렸다. 그때마다 뭉텅 뭉텅 피가 쏟아졌지만 나오기가 무섭게 허무로 흩어졌다.

고통?

그런 것 따위 느낄 만큼 한가하지 않았다.

용오름 하눌신폭의 위력에 노출되는 순간 그대로 갈아 없어져 완전한 허무로 흩어지지 않은 것을 다행으로 알아야 할 것이다.

‘방장 스님. 가, 감사…….’

감사인사도 끝까지 건네지 못하고 용무린의 의식이 흐려졌다.

한계였다.

신마와의 생사결로 입은 내상에 해무광과 연이어 전투를 치렀으니 더는 버틸 수가 없었다.

법정은 흔들림 없이 해무광에 맞섰다.

“불사항마-아!”

목이 터져라 외치며 두 손을 코앞까지 모았다가 전면을 향해 밀어 내었다.

투화아-악!

황금빛 찬란한 불사항마력이 용오름 하눌신폭의 중단을 후려쳤다.

“불사항마-아!”

“아미타불!”

투화악. 투화아아-악!

나머지 불사항마승 역시 앞을 다투어 불사항마력을 쏟아냈다. 일부는 용오름 하눌신폭을 받아쳐 용무린을 구하려 들었고 또 일부는 해무광을 직접 노렸다.

휘우우웅. 투우웅.

용오름 하눌신폭이 휘청거렸다.

그 서슬에 빈 공간이 생겼다. 애초 생각대로 용무린을 끝까지 갉아 없앨 수 없었던 것이다.

끈 떨어진 인형처럼 용무린은 동정호로 떨어져 내렸다.

태풍해일이라도 이는 양 거친 파도가 일렁이는 동정호 아래로 가라앉았다.

‘……불사의 의지!’

가물가물해지는 의식을 겨우 붙들고 용무린은 불사신공에 초점을 맞추었다.

툭.

그렇게 의식이 끊겼다.

푸들푸들.

해무광의 볼살이 참을 수 없는 분노로 마구 떨렸다.

용무린을 놓치다니!

해무광의 감각에서 용무린이 사라졌다.

의식과 숨 모두가 끊겼기에 그 어디에서도 용무린의 기척을 느낄 수가 없었던 거다.

‘죽었다. 내 평생의 숙적이 드디어 죽었어.’

하지만 갉아 없애 버리지는 못했다.

그 점이 너무나 아쉽다.

아득.

“냄새나는 땡중들이 감힛!”

모두 이 땡중들 때문이다.

이를 부득 갈아 붙인 해무광이 모든 힘을 법정과 불사항마승을 향해 집중했다.

쐐애애액. 쌔애애액.

미친 듯이 휘도는 용오름의 바람.

바람 한 줄기가 모두 심검이었고 미친 듯 작열하는 보랏빛 검은 색의 칼벼락과 송곳을 닮은 나선형 얼음이 불사항마승을 송두리째 덮었다.

여명이련가?

투화악. 투화아아악.

어둠을 뚫고 솟구치는 불사항마력의 광휘라니!

쿠와앙. 콰아앙. 쿠콰콰-쾅!

“커흐…….”

하늘이 통째 무너져 내리는 듯한 굉음과 함께 해무광이 깊은 신음을 흘렸다.

용무린과 계속해서 맞부딪혀 충격이 누적되었고 법정과 불사항마승들의 공격이 더해지니 그 역시 더는 견디기가 힘들었던 것이다.

‘이런 멍청한 것들을 봤나?’

해무광의 속이 터지려고 들었다.

소림의 땡중들이 자신을 향해 이렇듯 개미 떼처럼 달라붙었는데도 아직까지 넋 놓고 구경만 하고 있으면 대체 어쩌자는 것인가?

“크흑! 뭣들 하느냐? 공격해라! 저 가증스러운 정파 놈들을 짓밟아 버리란 말이다!”

참다못한 해무광이 고함을 버럭 질렀다.

흠칫!

화들짝 놀란 삼마종과 오궁이원이전의 주인들이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 신마마저 사라진 지금 신마 이상의 괴력을 보이는 음양자만이 구원이었기 때문이었다.

“공겨-억!”

“쳐라! 정파 떨거지들을 짓밟아 버려-엇!”

“모두 진겨-억!”

“와아아아-!”

“하아아!”

삼마종의 명령에 오궁이원이전 소속 마인들과 많은 흑도의 고수들이 신법을 전개했다.

“이런!”

“드디어 때가 되었군.”

지켜보고 있던 용대명과 살계승 효정 대사 역시 진격 명령을 내렸다.

“모두 쳐라!”

“마교의 무리를 몰아내자!”

구경꾼 신세로 전락했던 정파의 무림인들이 그제야 제정신을 차렸다. 감히 용오름이 휘도는 곳으로는 갈 수 없었지만 마찬가지로 넋을 잃고 구경하던 마교의 무리들을 향해 신법을 전개했다.

“우와아아!”

“이야아!”

백오십여 장이 넘던 거리가 0이 되기까지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온갖 병장기 소리와 섬광 그리고 파공음이 난무했고 비명소리가 뒤이었다.

‘아들아!’

용대명은 그 순간 방향을 틀어 동정호변으로 향했다.

해무광에게 당한 용무린이 힘없이 동정호의 물속으로 가라앉는 모습을 똑똑히 보았기 때문이었다.

촤아악.

물에 뛰어 들었지만 해일처럼 거칠게 파도치는 물살 때문에 바닥이 다 뒤집혀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쿵쿵쿵

용대명의 심장이 터질 듯 뛰었다.

‘제발. 제바-알…….’

간절한 마음으로 한참을 더 찾아보았지만 결국 포기하고 나와야만 했다. 흙탕물로 변해 버린 동정호의 물속에서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아득.

물 밖으로 나선 용대명이 이를 갈았다. 새파랗게 독이 오른 눈으로 해무광을 노려보았다.

“네가 감히!”

과거 용무린이 그러했듯 용대명의 머릿속에서도 무엇인가가 툭 끊어졌다. 폭풍처럼 끓어 오른 불사신기가 검으로 밀려들었다.

“네가 감히 내 아들을!”

버언쩌적.

심검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불사신기로 한껏 뭉쳐낸 검강이 찬란한 빛을 쏟았다.

“죽어-엇!”

상청무상검법의 마지막 초식인 상청무량의 초식이 펼쳐졌다. 아직도 힘을 유지하고 있는 용오름 하눌신폭의 중단을 그대로 후려쳤다.

쿠와아아앙.

불사신기로 이뤄진 검강의 격돌에 용오름이 크게 출렁거렸다.

칼벼락과 심검의 바람에 용대명의 전신에서도 굵은 핏물이 튀어 올랐지만 상관하지 않았다. 다 필요 없다는 듯 맹목적으로 부딪혀 갔다.

쿠와앙. 콰아앙. 쿠콰콰쾅.

그 서슬에 거꾸러지려던 소림 방장 법정이 한숨 돌릴 수 있었다. 겨우 몸을 세웠다.

“쿠울럭! 불사항마승이여. 힘을 내라!”

속 시원히 한 덩어리 피를 쏟아낸 소림 장문 법정이 목청을 돋웠다.

“아, 아미타불!”

“아미타불!”

불사신기와 불사항마력의 가세에 용오름의 모양이 한층 더 찌그러졌다. 미친 듯 휘몰아치던 칼벼락도 조금은 누그러졌고 심검의 바람도 약해졌다.

‘마, 마구니의 힘이 이 정도일 줄이야.’

법정의 눈이 부릅떠졌다.

정말이지 믿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아무리 역천자라고는 하나 어찌 한 개인의 힘이 소림의 무승 오백 명의 힘을 저렇듯 밀어 버릴 수 있단 말인가?

하지만 그것은 법정이 고려의 옛 법 비홍검을 잘 모르기 때문에 오해를 하는 것이었다.

해무광은 지금 본신진기로 초식을 펼치는 것이 아니다.

물론 불사마력으로 펼쳐내긴 했지만 용오름 하눌신폭이라는 초식은 발동과 동시에 미증유의 흡입력으로 대자연의 기를 끌어당겨 유지된다.

그렇기에 그 파괴력이 이렇게 강하고 범위가 넓은 거다.

작정하고 펼치면 이 초식 하나만 펼쳐도 엄청난 수의 인명을 살상할 수 있었다.

그래서 절대검신 역시 과거 신마대전 당시 용오름 하눌신폭을 이 정도 수준까지 펼치지 않았다. 오로지 신마에게만 집중시켜 목을 베었던 것이다.

그러나 복수와 무림 정복을 위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해무광이 사정을 보아 줄 필요가 없는 법, 최대한으로 펼쳤고 이런 놀라운 위력을 과시하게 된 거다.

“크크하하핫! 죽엇! 죽어엇!”

해무광은 미친 듯 웃으며 불사마력을 초식에 계속해서 밀어 넣었다.

하늘과 땅 사이 우뚝 선 기둥처럼 완벽하게 자리 잡은 용오름의 흡입력에 대자연의 기가 폭포수처럼 빨려들었다. 고려의 옛 법을 저절로 유지되게 만들었다.

해무광은 스스로가 진짜 마신처럼 느껴졌다.

칼벼락은 끝도 없이 주변 공간을 갈랐고 터뜨렸으며 심검은 운 좋게 칼벼락을 피해 접근한 불사항마승들을 마구 할퀴었다.

주변으로 쏟아져 내리는 얼음송곳은 또 어떠한가?

용대명 정도 되는 무인들이 아니라면 접근할 수조차 없는 수준이다.

하나하나가 절정 무인이 던지는 투창 정도의 위력을 지녔고 그 숫자 또한 무지막지했기에 가까이 다가오지도 못하고 꿰뚫려 죽으리라.

하지만 무엇이든 시작이 있으면 끝도 있는 법.

영원할 것만 같던 용오름 하눌신폭의 위력도 점차 줄어들기 시작했다.

음양자로 지내던 시절, 불사마력의 부재로 인해 해무광 역시 비홍검을 완벽히 수련할 수 없었던 이유가 가장 컸고 법정을 비롯한 불사항마승의 불사항마력과 하나로 뭉쳐진 용대명의 불사신기 때문이었다.

‘비, 빌어먹을. 이러다 잘못하면 또 큰일 나겠다.’

새삼 두려운 생각이 든다.

용무린에 이어 소림의 승려들이 몰려왔다.

용무린의 죽음으로 인해 이제야 조금 숨통이 트이려나 싶었는데 다시금 불사신기가 추가되니 등골이 오싹해진 것이었다.

‘뭔가 수를 내야해.’

이대로 가면 양패구상이다.

‘내가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데 양패구상이야?!’

그럴 수는 없다.

어떤 식으로든 이 전투를 끝낼 때가 다가오고 있었다.

재정비를 해야만 한다.

허수아비의 죽음을 시작으로 흡수한 불사마력도 다듬어야만 하고 비홍검의 수련도 완벽하게 해야 했으며 이번에 입은 내, 외상도 돌봐야만 한다.

***

처얼썩. 철썩. 처얼썩.

동정호에 이는 거친 파도는 아주 멀리까지 퍼졌다.

거친 파도는 동정호의 물속까지 깡그리 뒤집어 놓았으며 바닥까지 가라앉아 있던 것들을 수면 위까지 끌어 올려놓았다.

그 서슬에 바닥에 누워 있던 물체 하나가 둥실 수면 위로 떠올랐다.

용무린이었다.

창백한 얼굴. 완전히 끊긴 숨.

무림을 위해 많은 것을 이뤄낸 젊은 영웅이었지만 지금은 한낱 부유물이 되어 정처 없이 동정호의 수면을 두둥실 떠돌 뿐이었다.

철썩. 처얼썩.

둥실. 둥실. 두둥실.

동정호 남쪽 끝자락에서 이는 거친 충격에 발생한 파도는 싸늘하게 식어 버린 용무린의 몸을 자꾸만 저 멀리 북쪽으로 밀어냈다.

해무광과 불사항마승 그리고 용대명과의 접전은 결국 승패를 가리지 못하고 양패구상으로 끝나고 말았다.

배교의 술법 하나를 은밀히 동원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시간과 휘하의 대사제들이 지닌 암흑마기였는데 현재 그의 주변에 아무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계산 착오였다.

용오름 하눌신폭의 위력을 간과한 것도 있다.

그래도 휘하의 대사제들이라면 뚫고 들어올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아무도 들어오지 못한 것이다.

그만큼 용대명이 지닌 불사신기와 법정 그리고 불사항마승의 힘이 강력했다고 볼 수 있다.

검마종과 혈마종 장마존 셋은 살계승 효정대사와 무당의 자운진인 그리고 화산의 옥진도장과 함께 투계승 효성대사의 가세로 속절없이 뒤로 밀리기만 했다.

오궁이원이전의 주인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몇몇은 이미 용무린의 손에 죽은 뒤였고 많은 수의 핵심고수들까지 잃었기 때문에 그다지 큰 힘을 쓸 수가 없었던 것이다.

물론 정파 무림의 상황 역시 별로 좋지 못했다.

무림맹 3로에 속한 곳의 세력은 신마에게 당해 거의 괴멸되다시피 했고 1로 역시 개전 초기에 크게 밀려 많은 수의 정예를 잃었다.

양패구상!

해무광과 소림방장 법정 그리고 용대명까지 건재하니 양패구상이란 말은 적절치 않을까?

승자와 패자가 없는 휴전상태라는 말이 더 적절할 듯도 싶다. 그 자리에서 완전히 공멸을 하지 않기 위해서는 서로 간에 재정비가 필요했기에 암묵적인 휴전이 자연스레 맺어진 것이다.

해무광은 마교의 힘을 과거처럼 불회곡으로 되돌리지 않았다. 동정호에서 사흘거리에 자리한 호남 성도 장사까지만 물러났다.

거기에서 한 번 더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콰두두두. 콰두두두.

한 떼의 기병이 퇴각하는 해무광과 마교의 정예들 앞으로 밀려왔다.

관과 무림은 별개라고는 하나 저 많은 수의 마인들이 성도 안으로 들어오려는 것은 막아야 했기에 출병한 전군도독부 소속 군병들이었다.

“멈추어라.”

“……!”

하얗게 눈을 치켜뜨는 해무광에게 시선도 제대로 맞추지 못한 천호장이 주춤거리며 나섰다. 싫어 죽겠는데 상관의 명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나서는 기색이 역력했다.

“어, 어느 세력인지는 모르겠지만……. 커흐흠. 서, 성도 안으로만 들어오지 마, 말도록!”

천호장이 더듬거리며 상관의 말을 전했다.

깃발을 통해 전군도독부 소속 무관임을 확인한 해무광이 앞으로 성큼 나섰다.

“안내해.”

“무, 무슨……?”

귀찮은 듯 해무광이 얼마 남지 않은 불사마력을 확 뿜었다. 천호장의 심령을 짓눌렀다.

“허억!”

“전군도독부의 좌, 우 도독 지금 어디 있나?”

“지, 진중에…….”

“가자.”

“이, 이리로…….”

따가닥.

천호장은 급히 말 머리를 돌렸다. 자신이 어째서 이러는 것인지도 느끼지 못하는 사이에 저절로 그렇게 되었다. 초인의 힘이란 이런 것이다.

“으, 음양자시여!”

“호, 호위라도……”

삼마종이 재빨리 따라 나섰지만 다 필요 없다는 듯 해무광은 매몰차게 고개를 흔들었다.

“되었다.”

“하, 하지만…….”

“나를 따라 나설 시간에 조금이라도 빨리 내상에서 벗어나라. 그것이 바로 본좌를 돕는 길이다.”

“……명!”

검마종이 머쓱한 얼굴로 고개를 조아렸고 해무광은 지면에서 한 자 가량 둥실 떠올라 천호장의 뒤를 따라 미끄러지듯 움직였다.

***

전군도독부 병영.

나라가 북원과의 국지전을 치르고 있으니 언제든 출병하기 위해 전군도독부 역시 성도 외곽으로 나와 거대한 군막을 차렸다.

이 만여 명이 채 되지 못하는 군세.

이미 한 번의 지원병 차출이 있은 후에도 그 정도 군세를 유지하고 있는 것이니 상당한 힘이라 할 수 있으리라.

따가닥.

“이, 이쪽입니다.”

해무광을 데리고 온, 아니 모시고 온 천호장이 진중을 가로질렀다.

좌, 우 도독이 자리한 거대 군막은 그 중에서도 가장 안쪽에 있었는데 해무광은 겁도 없이 천호장의 뒤를 따라 산보하듯 둥실 떠 움직였다.

이윽고 다다른 거대한 군막.

잽싸게 말에서 내린 천호장이 안에 대고 고함을 크게 질렀다.

“정천호 유진, 명을 수행하고 복귀하였나이다.”

“안으로 들라.”

묵직한 목소리가 있었지만 정천호 유진은 안으로 들지 못한 채 똥 마려운 강아지마냥 어쩔 줄 몰라 했다.

‘아, 씨. 어떻게 말하지?’

자신도 모르는 힘에 눌려 이곳까지 모시고는 왔다.

하지만 그 뒤가 당최 답이 없었다.

적의 수괴를 진중에 모시고 와서 어쩌자는 것이냐며 목을 베도 할 말이 없는 순간인 거다.

‘에라 모르겠다. 일단 그냥 아뢰고 보자.’

일은 일이 벌어졌는데 어쩌랴?

결심을 굳힌 정천호 유진이 다시 고함을 지르려는 순간이었다.

“푸흐흐.”

나직한 웃음을 토해내던 해무광이 품에서 작은 방울 하나를 꺼내들었다.

불사마력을 흡수할 때 사용했던 기물, 음양자라고 하는 거추장스러운 가면을 벗어던질 때 사용했던 바로 그 기물이었다.

딸랑!

방울이 한 번 요사한 소리를 쏟았다.

‘어헉!’

아주 작은 소리였는데 곁에 있던 정천호 유진은 소스라치게 놀라야만 했다. 심령을 꿰뚫린 듯, 듣는 순간 등줄기를 타고 소름이 쫙 돋아났던 것이다.

작은 방울 소리는 놀랍게도 전군도독부 전역으로 퍼졌다. 외곽에서 땀 흘려 훈련 중이던 말단 병사의 귀에까지 똑똑히 들렸다.

흠칫! 퍼덕!

“……!”

“……!”

모두가 하던 일을 멈추었다.

화들짝 놀란 눈으로 소리가 들린 방향을 향해 시선을 던졌다.

좌, 우 도독이 자리하고 있을 군막에 무거운 침묵이 일었다. 심령이 뒤흔들린 것인지 누구도 입을 열어 말을 하지 못했다.

“크크큭……. 옴 아라사라도르. 옴 마라 옴. 아라타라마라 옴. 마라니 하앗!”

나직한 괴소와 함께 해무광의 입에서는 연원을 알 수 없는 배교의 주술 진언이 흘러나왔다.

그리고,

딸라-앙!

다시 한 번 방울이 요사한 소리를 토해냈다.

그러자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군막이 활짝 펼쳐지고 좌, 우 도독이 광기 어린 눈을 한 채 달려 나와 오체투지 했던 것이다.

“주, 주인이시여!”

“이제야 강림하셨나이까, 주인이시여!”

오체투지도 모자라 감격에 겨워 울부짖는다.

이게 대체 어찌된 일일까?

“오래 전부터 예언되어 왔던 세상의 주인이 왔다, 나의 종들아.”

“오오!”

“주인이시여!”

전군도독부의 좌, 우 도독이 감격에 겨워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같은 군막 안에 있던 휘하 제장들까지 한꺼번에 몰려나왔다. 오체투지와 충성맹세가 끝도 없이 이어졌다.

‘이, 이게 대체 어찌된 일이야?’

‘뭐야?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거야?’

자신도 모르는 사이 심령을 제압당했던 정천호 유진과 같은 사람마저 어리둥절할 정도로 좌, 우 도독과 휘하 제장들의 반응은 격렬했다.

하지만 해무광은 너무나 자연스러웠다.

그동안 은밀히 해둔 자신의 안배가 빛을 발하자 만족한 미소를 지었을 뿐이다.

‘크흐흐. 이래서 내가 가짜 신마 놈에게 관과 군은 염려할 것 없다고 했었지.’

홍연왕이 용무린에게 패배한 후 압송되었음에도 마교의 진격에 군부가 너무나 소극적으로 대응을 한다 싶었더니 이런 안배가 숨어 있었을 줄이야!

딸라-아-앙!

심혼을 뒤흔드는 요사한 방울 소리가 한 번 더 울렸다.

척. 처처척.

정천호 유진을 포함해 그동안 버티고 있던 나머지 군병들까지 모두가 무릎을 꿇었다. 두려움 가득한 눈으로 고개를 조아렸다.

‘여기서 거부하면 개죽음이다.’

‘이미 대세는 기울었다.’

‘따라야만 해.’

딸랑! 딸랑! 딸라-아-앙!

계속해서 요사한 방울 소리가 울렸다.

그때마다 병사들의 마음속에 내재된 투지와 반항심리가 녹아 없어졌다.

“크크큭. 이제 시작이다, 나의 종들아. 크하하하하!”

광소를 터뜨리는 것을 끝으로 전군도독부는 해무광의 수족으로 귀속되었다.

배교 술법과 혈고의 조화였다.

***

한 시진 후.

이제는 일천 수백여 명 남짓으로 줄어든 마교의 마인들은 자연스럽게 장사성 외곽의 전군도독부 군영으로 녹아들 수 있었다.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해무광은 수하들을 군영에 남겨 군병의 보호 아래 내, 외상의 치유를 하도록 시켜둔 후 자신은 스스로를 돌볼 사이도 없이 급히 길을 떠났다.

강서성과 복건성을 방문했다.

모두 전군도독부 소속인 곳으로 홍연왕의 일로 인해 이미 몇 해 전부터 손을 써 둔 곳들이었다.

딸랑! 딸랑! 딸라-아-앙!

가는 곳마다 요사한 방울 소리가 흘렀다.

“오오오! 주인이시여!”

“이제야 강림하셨나이까?!”

그때마다 군부의 수장 혹은 성도의 수장들이 뛰어 나와 충성을 맹세했다.

“크크큭. 두려워하라 세상이여! 나 음양신마가 너희들의 주인이로다!”

그때부터 해무광은 스스로를 음양신마라 일컬었다.

음양신마.

훗날 역천자의 대명사로 기록되게 될 음양신마라는 이름은 호남, 강서, 복건, 광동, 광서 다섯 성에서만큼은 황제와 같은 권위를 가지게 되었다.

대륙을 향한 중심이랄 수 있는 호남성 성도 장사가 그에게는 황도라고 할 수 있었다.

다시금 장사로 돌아온 음양신마는 진중 깊숙한 곳에 들어 앉아 불사신기와 불사항마력으로 인해 입은 내, 외상의 치유에 들어갔다.

‘최대한 빨리 바로 잡는다.’

그리고 고려의 옛 법 비홍검을 보다 완벽하게 가다듬을 생각이었다.

‘창피하게 땡중 떨거지들이나 불사신공 따위에 또 밀려날 순 없잖아?’

평생을 끌어 온 숙적 절대검신과의 싸움에서 승리한 후 결국 죽여 버린 자신이다.

완벽하게 갉아 없애 버리지 못한 게 조금 아쉽기는 하지만 이제 자신을 맞상대할 적은 더 이상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거기에 더해 고려의 옛 법까지 대성한다면?’

그때는 소림이고 나발이고 홀로 다 깨부숴버릴 자신이 있었다. 부족한 수련과 얻은 지 얼마 되지 않는 불사마력으로 펼쳐진 초식이 그 정도 위력이지 않던가?

‘제대로만 펼친다면 그 한 번에 소림이나 무당과 같은 거대 문파 하나를 쓸어버릴 수 있단 말씀이지.’

자신을 막기 위해 시공을 뛰어 넘어 돌아온 절대검신의 절기가 두렵기만 했는데 한 번 맞닥뜨려보니 솔직히 별 것 아니었다.

‘내가 볼 땐 차라리 고려의 옛 법이 더 나아.’

한 번 발동을 시키면 대자연의 기를 빨아들여 저절로 작동이 되는 무지막지한 초식.

‘마선지경의 무공! 그래, 그건 정말 마선지경의 무공이라고 해야만 해.’

절대검신이 선계에 오르기 전에 대성했던 무공이 바로 고려의 옛 법인 비홍검이었으니 이제는 마선지경의 무공이라 해도 좋으리라.

‘기다려라, 세상아. 곧 완전히 집어 삼켜 주마.’

해무광의 눈이 감겼다.

불사마력을 끌어 올린 후 내, 외상의 회복에 들어갔다.

음양신마.

전군도독부 산하 다섯 개 성에서는 이미 황제라고 불리는 음양신마의 눈이 떠지는 날 세상은 다시 한 번 전쟁의 소용돌이로 빠질 것이다.

***

호북성 남단 선도현 아래 장강의 지류.

한때 도복이었음에 분명한 옷을 걸친 지저분한 행색의 소년이 강물을 향해 돌을 던지고 있었다.

퐁당. 퐁당.

“쳇! 나는 왜 안 되는 건데?”

소년 가량은 심통이 단단히 나 있었다.

종남파가 혈교에 괴멸할 때 살아남은 마지막 생존자인 오대 제자, 바로 그 가량이었다.

“그 알량한 종남파에 한때나마 적을 두고 있었는데 왜 나는 신마대전에 참여할 수 없느냔 말이야?!”

혈교가 습격한 날 사부와 사형제들을 다 잃었다.

오래지 않아 종남의 이인자였던 곽창휴가 돌아와 본산을 되찾았지만 자신은 천덕꾸러기 신세가 되었다. 동문들의 눈에는 종남 치욕의 증거이자 홀로 살아남은 배신자쯤으로 인식되었던 것이다.

견딜 수가 없었다.

“퉤! 좀팽이 같은 놈들.”

그래서 때려 치웠다.

그 어린 몸을 이끌고 죽을 고비를 넘겨가며 찾아가 종남의 종말을 알린 것을 끝으로 제자였던 도리를 다 했으니 이제 놓아달라고 했다.

종남 치욕의 증거와 아픔의 기억이자 홀로 살아남은 배신자쯤으로 기억되던 애송이의 요구에 종남은 한 번의 고민도 없었다.

즉각적으로 가량을 놓아 주었다.

아량이라도 베풀 듯 무공의 회수도 없었다.

“신마대전은 어떻게 되었을까?”

종남의 오대 제자 가량에서 이제는 다시 고려의 유민이자 이름도 없는 고아로 돌아온 소년의 눈이 멀리 남쪽으로 향했다.

“조금만 더 힘이 있었다면 나 혼자서라도 신마대전이 벌어지고 있다는 동정호 남단의 평원으로 갔을 텐데.”

사나이가 한 번 죽지 두 번 죽겠는가?

혈교의 손아귀에서 한 번 살아남았더니 어지간한 일에는 이제 눈도 깜박이지 않을 정도의 담량이 생겼다.

“종남의 무공 따위 다 필요 없어. 나는 생과 사가 오고 가는 전장에서 실전을 통해 그 어떤 적도 베어버릴 수 있는 검신 검귀로 거듭날 거야.”

그 치기 어린 꿈을 이루기 위해서는 신마대전이 안성맞춤이었다. 그래서 물어물어 정파연합이 이차 신마대전을 위해 모여 있다는 선도현 어귀로 왔는데 이미 모든 고수들이 출정한 뒤였다.

남아 있는 것은 중소문파의 이차 지원군 정도였는데, 누구도 고아 소년을 받아주지 않았다.

“이런 어린놈의 자식이!”

“뒈지기 싫으면 꺼져 인마!”

“마빡에 피도 마르지 않은 너 따위가 낄 일이 아니야!”

아직 어린 소년 자신만 인정하지 못하는, 받아 마땅한 대접만 받고 쫓겨났다.

“두고 봐. 언젠가 그놈들 죄다 내 발 아래 엎드려 빌게 만들어 준다.”

소년이 다부진 포부를 밝힐 때였다.

반짝.

“으응?”

갑자기 소년의 눈이 빛을 발했다.

저 멀리 물속으로 사라졌다 올라오기를 반복하는 무엇인가가 보였던 것이다.

“뭐지?”

호기심에 벌떡 일어나 까치발을 했다.

눈을 가느다랗게 만든 후 힘을 주어 노려보았다.

“시체다!”

언제 죽었는지 모를 시체 하나가 두둥실 떠 흘러오고 있었다.

용무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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