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부활의 인연 (88/104)

4.부활의 인연

피식.

“꼴좋다, 이 자식아-아!”

소년이 고함을 버럭 질렀다.

어리다는 핑계로 자신을 깔보고 떠나간 정파 무림인 중 하나가 죽은 것이라 생각한 모양이었다.

“……젠장.”

나직한 욕설을 한 번 뱉어낸 소년의 얼굴에 갈등의 빛이 어렸다.

“먹고 살 일 걱정하는 것만 해도 팍팍해 죽겠는데 내가 지금 죽은 사람까지 신경 써야 해?”

문파에서도 버림받았다.

신마대전에라도 끼어 발돋움의 기회로 삼으려 했는데 나이가 어리다는 핑계로 그곳에서도 쫓겨났다.

이제는 입에 풀칠해야 할 일부터 걱정해야 하는데 물에 빠져 죽은 시신 뒤처리를 해줄지 말지 고민하는 자신이 웃겼다.

“에잇 몰라!”

풍덩!

소년은 결국 물에 뛰어 들었다.

거친 말을 내뱉은 것과는 달리 마음은 모질지 못했던 것이다. 그리고 한때나마 종남파에서 생활했기 때문인지 협이라는 단어가 가슴에 남아 있기도 했다.

“헉헉. 푸우. 왜 이렇게 무거워? 헉헉. 푸우.”

소년은 자신보다 한참이나 더 큰 용무린을 한 팔로 끌어 물가로 나오는 일에 온 힘을 쏟았다. 축 늘어진 용무린의 무게는 보기보다 훨씬 더 무거웠다.

“아오, 추워라.”

한 식경 남짓이나 고생한 소년은 겨우 뭍으로 올라올 수 있었다. 용무린의 축 늘어진 몸도 힘겹게 땅 위로 건져 올려놓았다.

“아으으. 뭔 놈의 몸이 저리 차가워?”

덜덜덜.

소년이 사시나무 떨듯 몸을 떨었다.

평범한 주검이라고 보기에 용무린의 몸은 지나치게 차가웠다. 멀리서 봤을 때는 잘 몰랐는데 지금 보니 냉기 때문인지 얼굴과 몸 전체가 푸르스름하게까지 보였다.

“거 참, 강시나 뭐 그런 것은 아니겠지?”

갑자기 겁이 버럭 났다.

저 정도 차가운 몸이라면 시신이 딱딱하게 굳어야 했는데 용무린의 몸은 차갑기만 할 뿐 살아 있는 것처럼 유연했기 때문이다.

“아직 살아 있는 거 아냐?”

혹시나 싶은 소년은 용무린의 몸을 찬찬히 살폈다.

확실히 죽었다.

숨도 완전히 끊겨 있었고 심장과 맥 또한 뛰지 않았다.

사부와 사숙들로부터 주워들은 이야기에 귀식대법 엇비슷한 것도 있었던지라 혹시나 해서 주의를 기울여 보기도 했는데 정말 죽은 것이었다.

“그나저나 이상하네.”

사내답게 잘생긴 얼굴이었다.

옷이라고는 걸레 조각이 되어 버린 바지만 걸치고 있을 뿐 상반신은 고스란히 맨몸을 드러내고 있었는데 잘 발달한 상체는 예술품처럼 멋있었고 어디 한 군데 생채기 난 곳 하나 없었다.

“대체 왜 죽은 거야 저 사람?”

놀랍게도 용무린의 몸에는 아무런 상처도 보이지 않았다.

분명히 음양신마 해무광이 펼친 고려의 옛 법에 난도질을 당해 동정호로 떨어졌는데 대체 어떻게 된 일일까?

“에잇, 모르겠다. 죽을 만했으니 죽었겠지.”

더는 골치 아프기 싫었던 듯 소년이 고개를 흔들었다.

발딱 일어나 주변을 돌아다니며 마른 나뭇가지들을 주워 모으기 시작했다.

“내가 뭐 꼭 강시 같은 게 겁나서 이러는 거 아닙니다. 아시겠어요?”

말이야 그렇게 했지만 솔직히 몹시 켕겼다.

홀라당 벗겨진 상체에 비해 하의가 걸레처럼 된 것을 보면 분명히 격렬한 전투를 벌이다 죽은 것으로 보이는데, 상처도 없었고 이야기 속 강시들처럼 푸르뎅뎅한데다 소름이 쫙 돋을 만큼 몸이 차갑기 때문이었다.

소년은 자신에게 억하심정 갖지 말라는 듯 계속해서 혼자 큰 소리로 주절댔다.

“그리고 말이에요. 사람이 화장을 해야 뒤탈이 없답디다. 그렇게 차가운 몸으로 이곳 어디에 몸을 뉘인들 따뜻하게 잠을 자겠어요?”

망자가 몸을 뉠 곳은 양지바른 곳이 장땡인 거다.

하지만 용무린의 차가운 몸을 생각하면 아무리 양지바른 곳에 뉘여도 몸이 녹지 않을 것만 같았다. 용무린의 몸은 그만큼 차가웠다.

강변이라 그런지 자잘한 나무들이 무척 많았다.

마른 나뭇가지는 짧은 시간에 상당한 양이 모였다. 적어도 소년의 허리 어림까지는 되었다.

“이 정도면 충분하겠지?”

소년은 낑낑대며 용무린을 나뭇가지 위로 끌어 올렸다. 그런 후 종남파에서 받은 것들 중 유일하게 남은 싸구려 협봉검에 발화석을 때려 불씨를 만들었다.

“갈 때라도 따뜻하게 가세요.”

화르륵. 화르륵.

바람이 좋아서인지 불씨는 금세 커다랗게 자라났다.

푸르다 못해 이제는 검게까지 보이는 용무린의 몸을 오래지 않아 집어 삼켰다.

화르륵. 화륵. 화르르륵.

타닥. 타다닥.

삼 장 어림까지 높이 치솟은 불똥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날아오를 무렵이었다.

화아악!

갑자기 괴이한 일이 생겼다.

용무린의 몸을 집어 삼킨 불꽃이 내부로 침잠되는가 싶더니 어느 한 곳으로 쭉 빨려드는 것이 아니겠는가?

“뭐, 뭐야?”

화들짝 놀라 뒤로 물러난 소년의 두려움은 아랑곳없다는 듯 화염은 계속해서 한 곳으로 빨려들었다.

호로록. 호로로록.

“커헉!”

소년의 눈이 부릅떠졌다.

믿을 수가 없었다.

화염이 용무린의 몸으로 빨려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불사신공의 공능이었다.

불사신공은 본디 무극을 따르는 내공, 한데 용무린이 빠진 곳이 동정호라는 것이 문제였다.

때는 아직 싸늘한 봄.

얼어붙진 않았지만 동정호의 물은 에일 듯 차가웠고 용무린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서 불사신기는 이것저것 가릴 처지가 아니었다.

쭈와아아악.

동정호의 차가운 냉기를 무극의 힘으로 흡수했다.

당연히 냉기가 강해질 수밖에 없는 거다.

그런 판국에 양기의 대명사라고 할 수 있는 화염이 주변에 일어나니 어떻게 했겠는가?

불사신공의 공능은 음양의 균형을 맞추어 일원인 무극으로 환원하기 위해서 자동적으로 화염의 양기를 집어 삼켰던 것이다.

호로로록.

그걸 모르니 겁이 날 수밖에…….

오싹.

소년의 전신에 솜털이 송두리째 곤두섰다.

등줄기를 타고 머리끝까지 소름이 쫙 돋았다. 용무린이 뾰족한 송곳니를 곤두세운 강시가 되어 벌떡 일어날 것만 같았기 때문이었다.

“서, 설마…… 아니겠지?”

제발 그래야 한다고 속으로 되뇌면서도 소년은 그냥 지켜보고만 있지 않았다.

기왕 시작한 일, 망자를 완전히 태워야 자신이 살 수 있다는 생각에 정신없이 주변을 돌며 나뭇가지들을 긁어모았다. 불에 던졌다.

화르륵. 화르르륵.

미친 듯이 덩치를 키워놓아 봐야 소용없는 짓이었다.

밑 빠진 독에 물 붓 듯 화염은 키워 놓기가 무섭게 용무린의 몸속으로 빨려들었다. 그만큼 동정호를 떠돌며 축적된 음의 기운이 강했던 거다.

호로록. 호로로록.

뭔 놈의 불길 빨아 당기는 소리가 이제는 맛나게 들릴 정도였다.

‘내가 미쳐!’

강시에게 당하지 않기 위해 소년은 죽을힘을 다했다.

어설픈 신법까지 펼쳐서 보다 멀리 있는 곳의 나뭇가지까지 깡그리 가져다가 화염에 힘을 보탰다.

호로로로록.

“씨발! 불길 못 처먹고 죽은 귀신이 붙은 거냐?”

이젠 오기가 생기려고 그런다.

소년은 비지땀을 뻘뻘 흘리며 언제 끝날지도 모르는 싸움을 계속했다.

‘아오, 대체 이게 뭔 짓이람?!’

생각하면 할수록 기가 막혔다.

좋은 뜻에서 낑낑대며 물에서 건졌다.

내친김에 화장까지 해주려는데 갑자기 강시가 불길에서 튀어 나오려고 하다니!

‘빙 강시가 아니라 화 강시 뭐 그런 것이었나?’

세상 천지에 그런 게 어디 있겠나?

‘마교 놈들도 아니고 그런…….’

철렁!

소년의 심장이 한 차례 크게 널을 뛰었다.

동정호 남쪽 평원에서 지금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그제야 생각이 난 것이다.

‘호, 혹시?’

어쩌면 용무린이 마교 놈들의 강시 중 하나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퍼뜩 소년의 뇌리를 스쳤다.

‘어, 어쩌지?’

진짜로 화 강시 뭐 그런 것이면 불길의 크기를 더는 키우지 말아야 하나? 화염을 주식 삼아 빨아들여 더욱 강해지려는 것인지도 모르니까.

“……!”

소년이 그런 생각에 두려움 가득한 눈으로 화염 속을 바라볼 때였다.

호로로로로록. 퍼어억!

급격한 흡수를 견디다 못해 주변이 진공으로 변했고 그 서슬에 불길이 꺼져 버렸다.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연기.

열기마저 집어 삼켰는지 눈앞에는 재만 남았을 뿐 이제는 냉기마저 느껴졌고 푸르뎅뎅하던 용무린의 몸은 반대로 보기에도 좋은 혈색이 돌고 있었다.

꾸울꺽.

소년이 마른침을 크게 집어 삼켰다.

다리에 힘이 풀려 그만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용무린이 갑자기 눈을 번쩍 뜨더니 부스스 일어나 앉아 버렸던 것이다.

‘……이,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이지?’

용무린도 잠시 혼란스러워했다.

이곳이 어디인지, 또 자신이 어떻게 해서 이런 곳에 발가벗고 누워 있는 것인지 알 수 없으니 어쩌면 당연한 노릇이리라.

‘아니, 그것보다 부상은?’

용무린은 다급히 다시 눈을 감고 내부관조에 들어갔다.

‘젠장. 너무 약해.’

내부관조에 필요한 불사신기마저도 간당간당하다.

완전히 말라버린 듯 단전은 텅 비어 있었고 아무리 의지를 불러 일으켜도 백회와 용천혈은 열리지 않았다. 대자연의 기가 꿈쩍도 않는 거다.

‘그래도 해야 해.’

기를 쓰고 의지를 불러 일으켜 겨우겨우 내부관조를 시작했다.

“……!”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소년의 가슴이 콩닥 콩닥 뛰었다.

강시가 다시 눈을 감긴 했는데 그러다가 또 갑자기 눈을 뜨고 덤벼들어 목에 송곳니를 박아 넣지나 않을까 하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피식.

다행히 용무린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후우. 내상이 겨우 아물었네.’

홍연왕부에서 일천관의 흑색화약에 당했을 때와 비슷했다. 내부 장기가 온통 터지고 갈라져 굵은 피가 줄줄 샜었지만 이제는 멈추었다. 다시 완전한 재흡수까지 끝난 뒤로 보였다.

부러진 척추와 크고 작은 골절 역시 마찬가지였다.

언제 그랬느냐 싶게 다시 붙었다.

‘그러면 이제 기경팔맥과 십이정경만 다시 손보면 되는 것인가?’

육체만 겨우 다시 봉합한 수준이지 혈맥들은 정말이지 볼 만했다. 크고 작은 혈맥들이 끊기고 찢겨 이어지지 않고 있었다.

어림잡아도 수백 군데로 보인다.

이걸 다 회복하는 데 시간이 얼마나 더 걸릴까?

‘……불사의 의지! 믿을 것은 오로지 그것뿐.’

언제 끝날지 모를 운공요상에 들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안전 확보는 필수.

번쩍.

용무린의 눈이 떠졌다. 그리고……

“넌 누구니?”

알 수 없는 두려움에 몸을 떠는 소년이 눈에 들어왔다.

종남의 오대 제자 가량에서 이제는 다시 고려의 유민이자 이름조차 모르는 고아 소년으로 되돌아온 아이의 입이 불쑥 열렸다.

“저를 잡아먹으면 안 돼요.”

“응?”

황당함에 용무린이 눈을 부릅떴고 소년은 자신을 잡아먹으면 안 되는 이유에 대해 열변을 토했다.

“저는 좋은 뜻으로 강시 형님을 물에서 건져 올렸단 말이에요.”

“……?”

“물은 차갑지, 강시 형님은 또 겁나게 무겁지. 저도 상당히 힘들었어요.”

무슨 소린지 그제야 조금 알 것 같았다.

‘저 아이가 동정호에서 나를 뭍으로 끌어 올린 장본인이로구나.’

바로 맞추었다.

소년의 뜨거운 목소리가 계속해서 이어졌다.

“어찌나 몸이 차가운지 그냥 땅에 묻어서는 원귀가 되겠다 싶더라고요. 그래서 화장을 하려 했을 뿐이에요.”

항변하는 모습이 어찌나 귀여운지!

씨이익.

절로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송곳니까지 다 보일 정도로 활짝 웃었다.

흠칫. 부르르.

그게 또 소년에게는 공포로 인식되었던 모양이다.

소년이 한 발 뒤로 물러나며 목을 움츠렸다.

“계속 굶어서 제 피는 맛이 없을 거예요.”

“푸흐흐.”

“그러니까 제발 저는 잡아먹지 마세요. 예?!”

이쯤해서 아이의 걱정을 덜어주어야 했다.

“잡아먹지 않는다. 그 대신에 무공을 가르쳐 주지.”

“예? 무, 무공을요?”

“그래. 생명의 은인에게 그 정도야 어찌 못해줄까? 네가 다른 문파의 제자라 거부한다면 별 수 없이 재물로써 보답할 수밖에 없지만…….”

용무린이 소년의 눈을 지그시 들여다보았다.

은근한 목소리로 물었다.

“어떠냐? 무공을 배우고 싶지 않느냐?”

꿀꺽.

소년이 마른침을 집어 삼켰다.

‘가만, 강시가 아니고 정말 살아 있는 사람……. 그것도 굉장한 수준의 무인이라는 뜻이네?’

지금은 이 세상에 없는 사부와 사숙들에게 들었던 이야기 속에서도 화염을 쭉 빨아 먹을 정도의 무인이 있다는 소리를 들어 본 적이 없다.

그 말은 곧 눈앞의 청년이 신비로울 만큼 대단하다는 뜻 아니겠는가?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 아니겠어?’

기회를 잡아 고수로 거듭나고 싶다는 생각에 신마대전에까지 참여하려 이곳을 찾아온 자신이다.

그 판국에 뭘 못하겠는가?

“배우고 싶어요. 가르쳐 주세요.”

용무린의 손가락 두 개가 펼쳐졌다.

“지금 당장, 인가로 달려가 내가 입을 만한 옷을 한 벌만 가져오너라.”

“옷이요?”

“그래. 이 모양으로는 네게 무공을 가르치기도, 어딜 가기도 그렇지 않느냐?”

완전히 홀딱 벗은 알몸의 사내에게 무공을 배우는 일은 소년으로서도 사양하고 싶었다.

“그리고요?”

“동정호 남쪽의 소식이 알고 싶구나.”

소년은 속으로 ‘역시’ 하고 생각했다.

생각대로 청년은 신마대전에 참여한 무인 중 한 사람이었던 것이다.

“위험할 수도 있으니 누구에게 묻거나 하지는 말고, 옷을 구하며 주변의 어른들 대화를 잘 듣기만 하면 될 거다.”

“예!”

소년이 발딱 일어났다.

“금방 다녀올게요.”

와다닥.

신이 나서 강변을 따라 하구로 달렸다.

***

한 시진 후.

수북이 돋아난 강변의 풀 속에 몸을 감추고 있던 용무린은 허름한 마의 한 벌을 손에 들고 온 소년과 만나 비로소 떳떳이 몸을 일으켜 세울 수 있었다.

‘끄응. 겨우 아물기만 했다 뿐이지, 아직 이곳저곳 쑤시는 곳 천지구나.’

그래도 이게 어디냐 싶다.

해무광의 손에서 펼쳐진 고려의 옛 법 용오름 하눌신폭의 광포함 아래 눈, 코, 입이 멀쩡했고 팔다리 역시 다 붙어 있다는 사실이 거짓말 같기만 했다.

“동정호 남쪽 소식 말인데요.”

“그래. 동정호 남쪽 소식!”

용무린의 귀가 쫑긋 섰다.

소년의 입에서 생각지도 못했던 단어 한 마디가 불쑥 흘러 나왔다.

“양패구상이래요.”

양패구상!

용무린의 눈이 부릅떠졌다.

소년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말들은 그만큼 놀랍기만 했던 것이다.

음양신마를 자처하는 해무광을 따라 마교의 세력이 호남성의 성도에 자리를 잡았다는 말과 함께 황제를 참칭하기 시작했다는 말까지 들려오고 있다니!

‘내가 물속에 꽤 오래 잠들어 있었던 모양이로구나.’

사실이었다.

소년으로부터 날짜를 물어 계산해보니 무려 달포(45일)씩이나 동정호의 물속에 있었던 거다.

‘정파의 피해는 어느 정도지? 아버지는? 우리 비룡문의 식구들은 어떻게 됐을까?’

궁금한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 듣고 있는 사실도 소년이 눈치껏 어른들 대화를 엿듣고 온 수준이어서 궁금한 것들에 대해 더 뭐라고 물어볼 수가 없었다.

‘아니, 어쩌면 지금은 이대로 모르는 편이 더 좋을지도 모르겠구나.’

몸 상태가 이 지경인데 만에 하나 아버지 용대명에 관한 소식이라도 듣게 되어 봐라.

‘그것이 불행한 소식이라면?’

혹여 돌아가시기라도 했다는 소식이라도 들리면?

절대로 참지 못할 것이다.

어지간한 무인의 출현도 두려워해야 할 처지임에도 눈이 홱 돌아서는 마교 본거지를 향해 그대로 달려갈 수도 있는 거다.

‘그럴 수야 없지.’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역시 회복이다.

‘끊기고 터져나간 기경팔맥과 십이정경을 포함해 전신 세맥까지 완전히 다 회복한 다음 불사신기를 단전에 꽉꽉 채워놓은 후 소식을 알아야 해.’

그래야만 듣는 즉시 바로 움직일 수 있게 된다.

‘혹시, 지금 이 순간에도 내 도움을 필요로 하는 곳이 있지는 않을까?’

그런 생각이 불쑥 들었지만 애써 억눌렀다.

그렇게 알아봐야 민폐다. 이 상태로는 큰 도움을 줄 수도 없거니와 자칫 잘못하면 자신 역시 잘못될 확률이 너무 크기 때문이다.

“얘야.”

“예?”

“이 근처 지리 좀 잘 아니?”

소년은 용무린이 지금 안심하고 운공요상을 할 곳을 찾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아무리 오대 제자에 버려졌지만 경험만큼은 성인 못지않았던 것이다.

“저어기 북쪽으로 사흘을 가면 영산이라고 있어요. 형문산에 비하면 작은 편에 속하지만 골이 깊고 동굴이 많아서 사냥꾼들이나 약초꾼들도 그리 좋아하지는 않는 산으로 알아요.”

혈교 놈들의 손에 스러진 사부와 사형제들로부터 주워들은 정보였다. 종남으로 향하는 와중에 한 번 스쳐 지났기에 더 잘 알고 있었다.

“머리가 좋구나. 이름이 뭐냐?”

소년의 얼굴이 금세 어두워졌다.

주저하는 목소리로 더듬거리며 입을 열었다.

“……고, 고아면 무공을 안 가르쳐 주나요?”

그럴 리가?!

“고아가 뭐 어때서? 걱정하지 말거라.”

용무린의 따뜻한 목소리에 적이 마음이 놓였는지 소년의 얼굴이 살짝 밝아졌다. 하지만 여전히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는지 소년이 미적거렸다.

용무린은 잠자코 기다려 주었다. 용무린의 따뜻한 시선을 느끼며 소년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무공을 가르쳐 준다는 뜻은 앞으로 내게 사부님이 되어 주겠다는 뜻이겠지?’

사부는 고아인 자신에게는 부모와 다름이 없는 분이 된다. 그런 분에게 거짓을 입에 담을 수 없다고 생각했는지 소년은 결국 출신까지 모두 밝힐 결심을 했다.

“저는 고려 출신이에요.”

“……?!”

용무린의 눈이 동그래졌다.

자신의 전생인 절대검신 독고황이 바로 고려의 선인이지 않았던가? 역천자를 막을 생각이 아니었던들 아직도 백두산 천지에 앉아 선정에 들어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선정은 무슨, 그냥 등선을 해버렸겠지.’

그런 생각을 할 때 소년의 목소리가 계속해서 이어졌다.

고려의 멸망과 함께 쫓기듯 이 땅으로 흘러들어온 아이, 아득한 기억 속에 부모님은 고려의 무장이었던 것으로 생각되어지는데 너무 어려서 헤어진 나머지 얼굴조차 기억에 남아 있지 않았다.

“떠돌다가 왈패꾼들 사이에서 자라는 통에 이런 저런 이름으로 불렸어요. 그 서슬에 정확한 내 이름이 무엇인지도 잊어 버렸고요.”

소년의 얼굴에는 혹시라도 자신이 고려 출신의 고아라서 싫어하고 멸시할까 봐 걱정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용무린은 단호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약속한다, 아이야.”

“예? 뭐, 뭘?”

“네가 고려 출신의 고아에다 이름이 없다는 이유로 누군가가 너를 멸시한다면…….”

버언쩍.

내공 한 점 없는 눈에 광포한 살기가 돌았다. 얼음가루가 날릴 듯 차가운 목소리가 이어졌다.

“나 용무린이 반드시 짓밟아 줄 것이다.”

“요, 용무린?”

이번에는 소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용무린이라니?!

‘설마, 무림왕 황룡패주에 무림맹주 용무린?’

천하에 이 정도 나이에 저런 눈빛을 지닌 용무린이란 이름을 가진 사내가 어디 또 있을까?

부르르.

소년의 몸이 격렬하게 떨렸다.

그제야 자신이 동정호에서 누구를 건져낸 것인지 알 수 있었던 것이다.

‘내 정체를 눈치 챘구나.’

소년의 반응으로 미루어 용무린도 알 수 있었다.

씨이익.

소년을 향해 한 차례 환하게 웃어 보인 용무린이 선언하듯 입을 열었다.

“이름이 없다하니 내가 지어 주마. 지금부터 너는 나 용무린의 막내 동생인 용준경이다. 알겠느냐?”

맙소사.

단순히 제자가 될 줄 알았는데 막내 동생이란다.

거기에 더해 성씨까지 자신과 같은 성을 붙여 주었다.

소년은 자신의 이름을 가만히 불러 보았다.

“용…… 준경?”

“그래, 용준경.”

용무린이 고개를 크게 끄덕여 보였다.

자신을 살려 준 아이다.

아버지 용대명이 곁에 있다 하더라도 흔쾌히 허락을 해줬을 것이라 믿는다.

‘이 아이가 아니었다면 얼마나 더 차가운 물속에서 부유했을지 몰라.’

불사신공이 부상당한 신체를 회복하느라 무극의 힘을 발휘했지만 동정호의 냉기가 너무 강해 마지막에는 잘 못 될 확률도 컸다.

‘은과 원은 언제나 확실히 해야 해.’

저 소년이 뭍으로 끌어낸 후 화장을 해주려 들지 않았다면 태양의 양기만으로는 이미 흡수한 냉기와 균형을 맞출 수 없었다.

오랜 세월 힘들어 해야만 했거나 결국에는 회복하지 못하고 잘 못 될 확률이 농후했다.

용준경!

성은 자신이 주었지만 이름은 과거 자신의 친우에게서 따왔다.

절대검신이라는 별호로 자신이 고려의 하늘로 불렸다면 실질적인 고려의 대지를 지켰던 사람은 무신 척준경이라는 사내였다.

‘그렇게 가서는 아니 되었어 친구…….’

승자가 기록하는 것이 역사인지라 그가 저질렀다는 죄가 과연 어디까지 진실인지는 자신도 모른다.

하지만 그가 독살 당했다는 것만큼은 분명하다.

그의 별이 가물가물해지는 것이 이상하여 직접 찾아가 만났을 때 그는 다 알면서도 허탈하게 웃으며 자신의 죽음을 받아들였기 때문이었다.

‘이 아이의 눈매가 그렇게 어이없이 가버린 친우를 닮았어. 핏줄 또한 고려인이라고 하니 내 이 아이를 통해 그대의 끊긴 대를 이어 보도록 하겠네.’

고려의 유민에 고아.

아득한 기억 속 아버지의 모습이 무장인 듯하다는 말까지 종합하면 소년의 핏줄 속에는 정녕 그 친구의 피가 어느 정도 흐르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글썽.

생각지도 못하게 형제의 연을 맺게 된 용준경의 눈에 눈물이 번졌다.

그러더니 벌떡 일어나 기억 속에 남아 있는 고려의 인사법을 따라 큰 절을 올리며 외쳤다.

“아우 준경이 형님을 뵙습니다.”

큰 절이 어떤 의미인지 용무린이 모를 리 없다.

“오냐, 반갑다.”

따뜻하게 웃어 보인 용무린이 용준경의 등을 다독이며 말을 이었다.

“형제의 연을 맺게 되었으니 하늘과 땅이 두 쪽이 난다고 해도 변하지 않으리라.”

“예, 형님.”

자애로운 미소와 함께 용무린은 부들부들 떨며 몸을 일으켰다. 상처가 아물기는 했지만 아직까지 고통은 여전했던 것이다.

“형님.”

용준경이 재빨리 다가와 부축했다.

툭툭.

용준경의 등을 두들기며 용무린은 북쪽을 향해 시선을 던졌다.

“가자, 영산으로.”

“예, 형님.”

얼싸안듯 부축한 채 용무린과 용준경 두 형제는 영산을 향해 나아갔다.

***

사흘로 잡았던 시간이 닷새로 늘었다.

용무린의 몸 상태가 그만큼 좋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준경이가 아니었다면 어찌 되었을지 생각만 해도 정말 끔찍하구나.’

용준경은 눈치가 아주 빨랐다.

달포라는 시간을 용무린이 물속에서 있었다는 사실을 잊지 않았는지 지천에 널려 있는 몇 종류의 산딸기를 따와 쌀 한줌에 섞어 죽을 쑤어 줬다.

어찌나 고맙던지!

그 덕에 새롭게 힘이 솟았다. 배가 텅 비어 있을 때와 그렇게라도 채워진 것과는 그 느낌과 기력 그리고 회복력이 완전히 달랐던 거다.

용무린이 운공요상을 할 동굴을 찾아낸 눈썰미 또한 최고였다.

그리 깊지 않아 동물들이 보금자리로 삼을 수 없는 곳이어서 안쪽으로 볕도 잘 들었고 환기성도 좋으며 근처에는 조그만 냇물도 있어 더할 나위 없을 곳을 골랐다.

‘내가 골랐다면 급한 마음에 그냥 대충 아무 곳이나 골라 가부좌를 틀고 앉아버렸을 거야.’

힘에 겨워 잠시 쉬고 있는 한 시진 정도의 시간에 그런 곳을 찾아낸 의제, 아니 성씨까지 주었으니 이제는 친형제와 같은 용준경에게 감탄을 금치 못했다.

“지금부터 운공요상에 들 것이다.”

“염려하지 마십시오, 형님. 제가 목숨을 바쳐서라도 형님의 호법을 설 것입니다.”

엉성한 자세로 협봉검을 들어 보이는 모습이 어찌나 든든하던지!

“믿겠다.”

한 차례 푸근한 미소를 지어 보인 후 용무린은 드디어 운공요상에 들 수 있었다.

‘불사신공!’

믿을 것은 오로지 그것 하나뿐이다.

하지만…….

‘이 정도로 심각할 줄이야.’

자세히 살펴보니 홍연왕부에서 흑색화약 일천관의 폭발에 휘말렸을 때보다 훨씬 더 심각했다.

그때는 그래도 불사활생신단도 있었고 오래지 않아 불사신기를 한 가닥 잡아 운공으로 이끌어낼 수 있었지만 지금은 어림도 없었다.

거대한 강줄기가 십년 가뭄에 완전히 말라 바닥을 드러낸 것처럼 불사신기 자체를 느끼기가 힘들 정도였다.

‘강변에 앉아 관조를 했을 때보다 더 심해졌어.’

안전한 곳을 찾아야 했기에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그만큼 상황이 심각했다.

‘별 수 없다. 처음부터 다시 시작한다.’

조급해하면 할수록 일이 안 되는 법이다.

급할수록 돌아가라는 격언이 괜히 만들어진 것이 아닐 것이다.

‘불사신공을 처음 수련한다고 생각하자.’

고려의 옛 법 용오름 하눌신폭에 휘말렸음에도 사지 멀쩡하게 살아 있는 것으로 만족하고 다시 천천히 한 발자국씩 나아가는 거다.

용무린은 불사신공의 첫 부분부터 시작했다.

가만히 눈을 감고 신주오가에 알려진 호심결과는 완전히 다른 완전한 불사신공의 구결을 외워나갔다.

‘기경팔맥 십이정경은 작은 강줄기에 불과할지니 생각할 것은 오직 하나 바다뿐이다…….’

구결처럼 일어난 불사신기가 모든 물줄기가 하나가 되는 바다 즉 단전에 이르게 되도록 용무린은 칼날처럼 세운 정신을 하나로 모았다.

***

사흘.

완전히 메말라 바닥을 드러낸 강에서 다시 불사신기의 물줄기를 찾아 끌어 올리는데 걸린 시간이었다.

물론 그 뒤로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너무나 많은 혈맥과 세맥이 터지고 끊어진 통에 운공 자체가 힘들었다.

-불사의 의지!

무릇 내공을 움직이는 힘은 인간의 의지다.

내공이 형상과 실체가 있어 손으로 잡아 끌 수 있던가?

본질은 바로 의지에 있다.

그러니 불사의 의지를 품어라.

불사의 힘이 너를 불사로 이끌게 될 것이다.

너무나도 명명백백한 사실!

몇 번이나 죽음의 고비를 뛰어 넘으며 증명해낸 사실을 용무린은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랬더니 과연 효과가 있었다.

우웅.

드디어 넉넉히 움직일 만한 수준의 불사신기가 단전으로 스며든 것이다.

‘됐다.’

즉시 그 불사신기를 움직여 치료를 위한 단계를 밟아갔다. 어떻게 하든 소주천부터 달성하기 위해 단전에서 불사신기를 끌어낸 후 독맥으로 이끌었다.

‘그때처럼 즉각 불사신기가 들고 일어났으면 좋으련만.’

어찌나 상처가 심한지 이번에는 그런 것도 없다.

꼬리뼈 인근의 장강혈은 괜찮았는데 그 다음 혈도인 요유혈과 요양관이 망가져 있었다.

‘휘 돈다.’

망가져 있다고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다.

세맥을 통해 휘 돌면 되는 거다.

‘물론 세맥들도 완전히 망가졌으면 어렵지만…….’

세맥이 왜 세맥이겠는가?

부분적으로 끊기고 터진 곳은 있을망정 십팔만에 달한다는 세맥 전체가 망가질 수는 단연코 없는 일이다.

‘그렇다면 벌써 죽었겠지.’

용무린은 붙잡은 불사신기를 조심스럽게 요유혈과 요양관 옆으로 이끌었다.

스르르.

솜이 물을 빨아들이는 것과 비슷한 일이 벌어졌다.

장강의 그것마냥 거대한 곳이 바로 독맥이었다면 세맥은 아주 작은 시냇물과 같다.

불사신기는 망가지고 상한 두 혈을 시냇물인 세맥을 통해 부드럽게 휘돈 후 다시 그 다음 차례인 명문혈로 모여 들었던 것이다.

‘후우, 한 고비 넘었네.’

용무린은 그렇게 조심스럽게 한 발씩 나아갔다.

물론 모든 일이 그렇게 쉽게 되지만은 않았다.

너무나도 많이 짓이겨지고 베여 세맥들조차 쉽사리 휘돌 수 없는 곳들도 더러 있었던 거다.

그럴 때는 다시 처음으로 되돌아갔다.

겨우 붙잡은 불사신기를 단전으로 되돌린 후 조금씩 그 세력을 불렸다. 그런 후 다시 독맥을 통해 밀어 올리고 완전히 망가진 세맥들을 돌보고 치료했다.

그렇게 보낸 시간이 또 다시 사흘.

명문혈이나 백회혈과 같은 대혈들의 상처를 어루만지고 보듬어가며 세맥들로 휘돌아 소주천이라 말하기에도 무색한 소주천을 완료하는데 걸린 시간이었다.

더는 견딜 체력이 되지 않아 용무린은 용준경이 준비해 준 산딸기 죽으로 배를 채우고 바닥까지 떨어진 체력을 보충했다.

“고맙다.”

진심 어린 한마디에 용준경이 환하게 웃었다.

그 미소를 마지막으로 용무린은 곯아떨어졌다. 깊은 수면으로 체력을 조금 더 보강했다.

그런 후 일어나 죽을 먹고 다시 운공요상에 들었다.

이번에는 임, 독맥이 아닌 십이정경 중 족소음간경을 포함한 다리 쪽으로 내려가는 혈맥을 돌보았다.

망가진 양쪽 용천혈을 십팔만 세맥을 이용해 휘돌아 다시 단전까지의 대주천 망을 구성하는데 걸린 시간에 또 이레가 걸렸다.

‘이제야말로 진짜 운공요상에 돌입할 때다.’

마지막으로 눈을 뜬 용무린은 용준경이 준비한 산딸기 죽과 수면을 통해 체력을 보강한 후 전투에 돌입하듯 운공요상에 들었다.

우우웅.

구불구불 휘돌아야만 하기에 속도는 형편없었지만 드디어 시작된 대주천의 운공요상에 불사신기가 기분 좋은 공명음을 쏟았다.

한 호흡을 10으로 본다면 들이켜는 숨 4에 내쉬는 숨은 6이 된다. 코끝에 댄 솜털이 움직이지 않을 만큼 깊고 고요히 그러나 절대로 끊어지지 않게 해야 옳다.

파괴력을 높이기 위해 어떤 유파는 중간에 호흡을 끊고 눌러 참기도 하지만 그런 짓은 결국엔 스스로의 몸을 망치게 된다.

휘이우웅.

이리저리 휘 돌기에 느려지긴 했지만 처음으로 대주천이 완성되었다.

‘됐어. 분명히 영향을 받았어.’

눈으로 직접 본 것은 아니었지만 용무린은 분명히 알 수 있었다.

갈라지고 터지고 찢긴 혈도, 그 중에서 가장 중요한 백회혈과 용천혈이 불사신기의 영향을 받아 천천히 회복되고 있다는 것을.

‘다시 한 번!’

휘이이우우-웅. 스르륵.

이번에도 틀림없이 불사신기의 영향을 받았다.

불길에 멀리 떨어져 있어도 자연스레 따스함이 스미듯 불사신기는 그렇게 조금씩, 조금씩 갈라지고 터지고 찢긴 중요 대혈들을 복원했다.

휘이웅. 휘이이이우. 휘이이이우우-웅!

스르륵. 스르르륵.

대주천 속도가 조금씩 더 빨라졌다. 그 서슬에 대혈맥들의 치유되고 복원되는 속도 역시 점점 더 빨라졌다.

명문혈이 다시 완벽하게 고쳐졌다.

글자 그대로 풀면 생명의 문이라 불리는 대혈도!

다시금 활짝 열린 생명의 문을 통해 대자연의 기가 밀려들어오기 시작했다.

쏴아아!

그 기세가 어찌나 강력했던지 용무린의 몸이 살짝 흔들릴 정도였다.

그런 식으로 망가진 혈도들이 차례차례 복원되었다. 그때마다 대자연의 기가 밀려들어와 용무린의 몸을 뒤흔들어댔다.

하지만 용무린의 표정은 변함이 없었다. 아직 가장 중요한 두 곳이 돌아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곳은 바로 백회혈과 용천혈.

‘조바심 낼 필요 없어.’

명문혈이 뚫리고 임, 독 양맥을 휘 돈 후 팔과 다리까지 내려갔다가 되돌아오는 대주천이 이미 구축되었다. 이제는 믿고 기다리기만 하면 되는 거다.

휘이이이. 휘이이우우웅.

스르륵. 스르르륵.

드디어 하늘의 문이라 일컬어지는 백회혈과 대지의 기를 흡수할 수 있는 용천혈 두 곳이 모두 고쳐졌다.

콰르르르. 투투-웅.

백회혈과 용천혈을 통해 대자연의 기가 쏟아져 들어오기 시작했다.

‘시, 시작이다!’

홍연왕부에서 흑색화약 일천관에 당한 후 겨우 회복할 때와 같은 반응이었다.

자존심이 상할 대로 상한 불사신공이 폭발했다.

휘이웅. 휘이웅. 휘이이우우-웅.

용권풍이라도 되는 양 단전에서 회전을 거듭하는 대자연의 기운은 불사의 요결에 따라 불사신기로 남김없이 치환이 되었다. 그리고…….

투우웅.

꼬리뼈 어림의 장강혈을 거칠게 통과해 독맥의 큰 줄기를 따라 위로 훅 치솟았다.

-와아! 창피해! 자존심 상해!

또 몸이 상하다니!

오냐, 좋다. 내가 내 모든 것을 다해 고쳐 놓겠다. 그러니 어디 한 번 또 깨어 봐라.

불사신기의 외침이 들리는 듯 용무린의 입술이 슬그머니 말려 올라갔다. 불사신기가 다시금 제어를 벗어나기 시작했던 것이다.

투우웅. 타아앙. 콰아아앙.

더럽게 늦게 고쳐지고 있던 임맥의 옥당혈과 단중혈이 강제로 활짝 열리더니 중단전이라 할 수 있는 중정혈에게 가서는 장력에 얻어맞기라도 한 듯 격렬했다.

움찔!

용무린의 몸이 저절로 들썩일 정도의 강맹함!

콰르르르.

마치 홍수를 만나 범람한 듯 불어난 불사신기가 용무린의 몸을 팔대맥과 십이정경을 가리지 않고 휩쓸고 다녔다.

그렇게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우드득. 와드득.

용무린의 몸에서 묘한 소리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이제는 영 불가능할 줄로만 알았던 환골탈태가 다시금 시작되었던 것이다.

***

이레 후.

우드득. 와드득.

그때까지도 계속해서 기묘한 소리를 흘려내는 용무린을 용준경은 그저 멍한 눈으로 지켜볼 뿐이었다.

‘와아. 또 시작했다 또…….’

저러다가 하루쯤 지나면 피부가 부서지듯 갈라지면서 빛과 함께 새 살이 돋아난다.

‘저게 대체 몇 번이지?’

자신이 확인한 것만 벌써 세 번이다.

그때마다 그러했었던 것처럼 바닥에 갈라져 떨어진 부스러기들이 상당했으니 대체 몇 번이나 저런 일이 반복되었는지 알 도리가 없다.

‘무슨 현상인지 알 수는 없지만, 대단히 신비로운 것으로 보아 형님이 눈을 뜨신다면 분명히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할 것이야.’

아는 것이 미천한 터라 환골탈태가 수없이 진행되는 것을 눈앞에서 지켜보면서도 알 수 없었을 뿐, 틀림없이 중대한 변화가 일어나고 있음은 분명히 알 수 있었다.

그렇게 시간이 얼마나 더 흘렀을까?

이번에야말로 더는 손을 댈 곳이 없다고 느꼈던 모양인지 불사신기는 환골탈태를 멈추었다.

또 다른 시작이었다.

이제 완벽하게 바꾸어 놓은 새로운 터에 새로운 힘을 부여해 주겠다는 듯 하늘과 땅에서 대자연의 기를 뭉텅 끌어왔다.

쏴아아아-아!

폭포가 쏟아져 내리듯 대자연의 기가 몰려왔다.

대주천을 통해 단전으로 스며든 후 불사신기로 완벽하게 치환되었다. 만석지기 곳간에 쌀자루 쌓이듯 꾹꾹 눌러 쌓아갔다.

물론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하단전에 불사신기가 넘칠 정도가 되니 이번에는 중단전에 불사신기를 쌓았다. 아니, 그것으로도 모자란다는 듯 상단전에도 불사신기를 쌓기 시작했다.

중단전에 이어 상단전이라니!

연거푸 두 번이나 크게 몸이 상하니 정말 작정하게 독하게 고쳐 놓은 것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불사신기는 중단전에 이어 상단전까지 꽉꽉 쟁여진 후에야 비로소 흡수를 멈추었다.

반짝.

비로써 용무린의 눈이 떠졌다.

한 차례 신비로운 빛을 뿜어낸 후 사라졌다.

‘너무나 평범해졌다. 전혀 무공을 익힌 사람 같지가 않아. 그냥 백면서생 같아.’

그것이 용준경의 감상이었다.

“……!”

용무린 역시 새롭게 거듭난 자신의 육체가 신기했는지 오묘한 시선으로 이리저리 뜯어보았다.

그러다가 갑자기 혼자 픽 하고 웃었다.

설마하니 이 정도 수준까지 몸이 바뀔 줄은 그 역시 미처 생각지 못했던 것이다.

‘아예 몸 전체가 단전이 된 것만 같네.’

하단전에 이어 중단전과 상단전까지 불사신기가 꽉꽉 들어차 있다. 그러다 보니 그 영향력이 몸 천체에 미쳐 마치 몸 전체가 단전처럼 느껴졌던 것이다.

“괘, 괜찮으세요?”

용준경의 질문에 용무린은 풀썩 웃으며 답했다.

“후훗. 그래. 괜찮다.”

“다행이에요. 형님 몸에서 막 우드득 와드득 소리도 많이 나고 피부도 갈라져 부스러져 내리고……. 제가 본 것만 해도 세 번이나 그랬거든요.”

더 정확히는 다섯 번이다.

‘흑색화약에 당했을 때보다 두 번이나 더 많은 숫자지.’

이제야말로 해무광과 다시 붙어도 자신 있다.

‘물론 그때도 신마 놈과 먼저 싸우지만 않았다면 내가 그렇게까지 큰 부상을 입지는 않았겠지.’

이제는 아무래도 상관없다.

‘아니지. 그래도 고려의 옛 법에 그냥 노출되었다가는 생사를 장담할 수 없을 거야.’

비홍검의 마지막 초식은 그만큼 무섭다.

용오름 하눌신폭.

막대한 흡입력에 끌려온 대자연의 기운을 통해 칼벼락과 심검이 무수히 펼쳐진다.

그 초식을 막을 방법은 오직 두 가지뿐이다. 하나는 똑같은 초식을 펼쳐 받아치는 것과 불사대천검을 대성한 후 갈라버리는 것이다.

‘그때에 비해 육체가 더 단단해지고 내공의 총량이 늘어났다고는 하지만 그게 다여서는 곤란해.’

육체의 강함만 믿고 덤볐다가는 또 이런 꼴사나운 지경에 처하게 된다.

‘비홍검을 다시 내 몸에 꼭 맞게 익힌다.’

진천수라도와 비연오식을 다시금 몸에 맞도록 수련을 했듯이 이번에도 마찬가지다.

가온누리 칼벼락으로 시작해 미리내 우람별찌를 거쳐 용오름 하눌신폭으로 이어지는 비홍검 세 초식을 완벽하게 다시 몸에 맞도록 해야 한다.

‘그 과정을 거치는 동안 불사대천검과의 연결고리가 무엇인지 드러나겠지.’

불사대천검으로 공간을 쪼개는 것과 비홍검의 첫 번째 초식인 가온누리 칼벼락으로 공간이 베어지는 과정이 너무나도 흡사했다.

용무린은 비홍검의 수련을 통해 불사대천검을 대성할 수 있을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준경아.”

“예, 형님.”

용준경이 자세를 바로 했다.

“내가 지금부터 한 가지 내공심법과 한 가지 검법을 가르쳐 줄 것이다.”

반짝.

용준경의 눈이 밝은 빛을 뿜었다.

“성심을 다해 익히도록 하겠습니다, 형님.”

“네가 내 말을 믿고 따른다면, 장담하건대 이 하늘 아래 너를 어찌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혀, 형님도요?”

멍하니 입을 벌리고 있던 용준경이 불쑥 물어왔다.

피식.

“당연히 나는 아니지.”

“헤헤헤. 다행이네요. 설령 제가 어긋난다 해도 형님이 저를 잡아 줄 수 있다는 뜻이니까요.”

용준경이 쑥스러운 듯 혀를 내밀며 웃었다.

용무린이 용준경의 머리를 헝클었다. 애정 어린 손으로 쓰다듬었다.

“내가 네게 건넬 내공심법의 이름은 불사신공. 이 또한 검법과 더불어 고려의 옛 법이라 할 것이니…….”

반짝. 반짝.

용준경이 눈을 빛내며 용무린의 말을 흡수했다.

***

달포(45일)가 지났다.

하루 밤낮의 시간동안 눈을 감고 불사신기 수련에 빠져 있던 용준경이 눈을 떴다.

“끄응.”

나직한 신음을 흘리며 팔다리를 주물렀다.

“거 참, 신기하단 말이야.”

겨우 하루 밤낮이 지났을 뿐인데 수수깡처럼 부서졌던 팔과 다리가 감쪽같이 붙었다. 아마 그 전보다 훨씬 더 단단해졌으리라.

“고통을 극복하고 불사의 의지를 실현할 때마다 불사신기가 부쩍부쩍 늘어난단 말이야.”

불사신공은 정말이지 신묘했다.

불사의 의지를 품으면 말 그대로 불사를 이루게 된다고 하니 아프고 힘들지만 기쁜 마음으로 노력할 일이었다.

‘내가 직접 봤으니 믿을 수밖에.’

용무린을 동정호에게 건져낼 때 자신은 분명히 죽은 것으로 알았다. 호흡도 끊겼었고 심장과 맥도 멈췄으며 몸은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그런데 화염 속에서 홀연히 눈을 뜨고 부활했다.

그러니 믿지 않을 도리가 없는 거다.

“자, 또 나가보자.”

자신의 형님인 용무린이 밖에서 기다리고 있을 터였다.

동굴 밖으로 나서니 과연 용무린이 있었다.

허름한 나뭇가지 하나를 들고 서 있는 용무린의 기세는 그야말로 자연 그 자체를 닮아 있었다.

‘과연 어떤 무인이 있어 형님의 저 부동심을 깨뜨리고 자세를 조금이나마 흔들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을 하는 순간이었다.

나뭇가지를 들고 있던 용무린의 손이 가볍게 위에서 아래를 향해 그어졌다.

버언쩌저적. 쫘아아악!

놀랍게도 얇은 나뭇가지 끝을 따라 허공에 번갯불이 일었다. 찰나에 사라진 그 번갯불에 허공이 쩍 갈라졌다. 스르르 미끄러져 내렸다.

“허억!”

용준경이 헛숨을 집어 삼켰다.

미끄러져 내린 허공이 순간적으로 파사삭 바스러졌기 때문이었다.

“후훗. 왔느냐?”

용무린이 반겨 웃어 보인 후 궁금증을 풀어 주었다.

“이것이 바로 네게 가르치고 있는 비홍검의 일초, 가온누리 칼벼락이다.”

“하, 하지만 제가 배우고 있는 것은 삼재검법인데요?”

“그게 그거다.”

“……?”

“이리 앉아라.”

“예, 형님.”

용무린이 자신의 옆을 가리켰고 용준경이 다가와 앉았다.

용무린의 따뜻한 목소리가 계속해서 이어졌다.

“단순한 하나의 동작으로 공간을 쪼갠다. 방금 네가 본 것이지. 한데, 그것으로 끝이면 어떻게 하느냐? 내가 쪼갠 공간에 서 있던 적 이외에 그 곁에도 다른 적이 서 있으면? 그때도 부자연스럽게 검을 들어 올려 똑같이 위에서 아래로 쳐내야 하느냐?”

“그, 그거야……. 당연히 검이 내려와 있는 상황에서 비켜 올려치면 더 빠르긴 합니다. 하지만 형님이 펼친 초식은 분명히 위에서 아래로 치는 것이었잖습니까?”

초식을 충실히 따르는 것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이었다.

용무린은 용준경을 천천히 일깨워주었다.

“초식이란, 이럴 때는 이렇게 하는 것이 좋다고 하는 하나의 규칙일 뿐이지 절대적인 것은 아니다. 그렇기에 하나의 초식에서 변초식과 여러 응용초식이 파생되어 나오는 것 아니겠느냐?”

“아하!”

용준경이 탄성을 발했고 용무린은 계속해서 깨달음을 건네었다.

“가온누리 칼벼락은 단순한 일 검의 움직임에 극의가 있는 것이다. 반드시 위에서 아래를 향해 내치는 것 외에 아래에서 위로 비켜 올려도 무방하고 사선으로 휘돌려도 되며 마치 바람처럼 흔들어도 상관없다. 왜냐하면 하늘에서 번득이는 뇌전 또한 일정한 방향이 없이 자유로이 허공을 가르기 때문인데…….”

가르치면서 배운다고들 한다.

용무린 또한 그러했다.

용준경에게 비홍검의 일 초식인 가온누리 칼벼락에 대한 강론을 하면서 그것이 어떻게 불사대천검으로 발전을 했는지 알아차린 것이다.

‘굳이 의식하지 않아도 되는 칼벼락! 그것이 바로 불사대천검의 시작이었어.’

냉혈곡에서 부지불식간에 검을 휘둘렀을 때가 그랬다.

단순한 일 초에 그 거대한 건물이 송두리째 갈라져 미끄러져 내렸고 바스러졌다.

‘확실해. 불사대천검은 비홍검을 대성한 후에야 비로소 이룰 수 있는 것이야.’

대성만 하지 못했을 뿐 불사대천검을 상당한 수준까지 익혀냈다고 자부했었다.

하지만 아니었다.

지금까지 자신이 익힌 불사대천검은 수박 겉핥기일 뿐, 진정한 의미의 정수는 아직 접근하지도 못했다.

‘단순히 쪼갠 공간의 너비나 폭이 문제가 아닌 거야.’

겉으로 보이는 위력 그 이상의 의미가 숨겨져 있는 것이 바로 불사대천검인 것이다.

“보아라, 준경아.”

용무린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무당파에서 발원했다 알려진 삼재검법은 사실 천하에 산재하는 모든 검로 중 가장 기본이 되는 것만 가려 뽑아 수련에 보탬이 되고자 정리해 놓은 것일 뿐이다.”

휘릭. 쉭. 쉬가악.

용무린의 손에 들린 나뭇가지가 삼재검법의 첫 번째 동작인 소진배검으로 시작해 마지막 서른두 번째 동작인 비홍횡강에 이르기까지 단숨에 펼쳐냈다.

“이렇듯 단 일초로도 펼쳐낼 수 있거니와…….”

용무린의 동작이 느려졌다.

용준경이 외울 수 있도록 천천히 하지만 초식과 초식이 확실히 구분 가능하도록 절도 있게 펼쳐졌다.

“여덟 초식, 혹은 세 초식으로도 나누어 펼칠 수가 있는 것이 바로 삼재검법이다.”

“그러니 삼재검법을 연마해 방금 형님께서 펼쳐내셨던 것만큼을 구현하면 비로소 비홍검의 첫 초식인 가온누리 칼벼락에 접근할 준비가 된다는 뜻인가요?”

“바로 그렇다, 준경아.”

척하면 착이었다.

“감사합니다, 형님. 그렇게 알고 열심히 할게요.”

용준경이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싸구려 협봉검을 들고 삼재검법의 연마에 나섰다.

강호의 무인들이 보았다면 코웃음을 칠 정도의 진중함이었으나 용무린의 눈에는 기특하게만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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