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교토삼굴(狡免三窟)
무한의 비룡문.
정파 무림의 주축이라고 할 수 있는 소림과 무당파의 정예들이 진을 치고 있는 덕에 현재 위상은 무림맹보다 더 자자한 곳이었다.
하지만 무림에서의 위상이나 이름값답지 않게 비룡문의 분위기는 침울하기만 했다.
소림의 장문방장인 법정대사가 기약할 수 없는 운공요상에 들었으며 비룡문주인 용대명은 아직도 사경을 헤매고 있었고 무엇보다 용무린이란 절대자의 부재가 주는 파장이 컸기 때문이었다.
누구도 용무린의 죽음을 입에 담지 않았다.
그러나 모두가 짐작하고 있었다. 황룡패주이자 무림왕이며 무림맹주인 용무린의 죽음을…….
지금도 사경을 넘나들고 있는 용대명은 물론이고 소림의 법정도 그런 말은 절대로 입에 담지 않았지만 용무린이 동정호에 떨어지는 장면을 목격한 사람의 수는 수십여 명이 넘었다.
게다가 전투가 끝난 후 동정호변을 왜 수색했겠는가?
불사항마승의 유해를 찾기 위함도 있었지만 한편으로는 모두가 용무린을 찾았다.
하지만 없었다.
용무린의 모습은 그 어디에서도 보이지 않았다. 그렇기에 그의 죽음을 입에 담지 않았던 것이다. 언제고 훌쩍 웃으며 나타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모두가 알고 있었다.
물고기가 아닌 이상 물에 빠진 사람이 살 수 있는 방법이 없다는 것을 말이다. 그것도 무려 수십여 일 동안 가라앉아 있다면 틀림없는 거다.
‘용무린 대협은 죽은 거야.’
‘맞아. 틀림없어.’
‘그 오랜 시간을 물속에 빠져 있는데 그럼 살아 있을 도리가 있어?’
‘음양신마는 아직 건재한데 어쩌지?’
‘정말 큰일이야. 음양신마가 내상을 회복하고 나서면 대체 누가 있어서 놈을 막을 수 있지?’
사람들은 삼삼오오 모여 그런 말들을 속삭였다.
음양신마의 건재함이 두려운 것이었다.
이럴 때 법정이라도 내상에서 회복을 한 후 ‘우리가 있으니 걱정할 것 없노라.’ 하고 외쳐 주었으면 좋으련만 운공요상에 빠져 있는 법정의 눈은 떠질 줄 몰랐다.
용대명 역시 마찬가지였다.
불사활생신단은 물론이고 의성까지 나서서 사력을 다했지만 여전히 사경을 헤매고 있었다.
‘음양신마가 내상을 회복하면 가장 먼저 이곳을 향해 진격해 오겠지?’
‘그렇게 되지 않을까?’
‘놈과 맞설 수 있는 능력을 지닌 곳은 여기뿐이야.’
‘법정 대사님도 그렇고 불사항마승의 절반과 용무린 대협의 본가인 비룡문이 아직 건재한 이상 다른 곳부터 치지 싶은데?’
‘하긴, 무한 외곽의 관군도 아직 건재하니까.’
비룡문과 비룡문 인근에 모여 있는 정파 무림인들의 불안함은 가실 줄 몰랐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자리를 지키는 것은 우습게도 이만 어림에 달하는 관군 때문이었다. 음양신마가 내상을 회복한다 하더라도 쉬이 이곳을 향해 짓쳐 들 수 없는 가장 큰 이유를 관군으로 본 것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비룡문의 내원에는 웃음꽃이 피었다.
“언니! 방금 내 손을 또 찼어요.”
“어디? 이 어미도 한 번 보자꾸나.”
제갈영령의 배에 손을 대고 있던 용설화가 활짝 웃으며 감동 어린 목소리로 외쳤고 곁에 있던 조연옥이 기대감 가득한 얼굴로 다가왔다. 둥그렇게 부푼 제갈영령의 아랫배에 손을 가져다 대었다.
퉁. 투웅.
기다렸다는 듯 조연옥의 손을 걷어차는 녀석.
“손주다! 손주가 틀림없어!”
조연옥이 기쁘기 짝이 없는 목소리로 외쳤다.
손바닥 전체를 울리는 힘찬 발길질이 비룡문의 대를 이을 손주가 틀림없다고 느껴진 것이다.
“어이구, 고맙다 아가. 고마워…….”
조연옥은 제갈영령의 등을 자꾸만 쓰다듬었다. 아직까지 주검도 찾지 못한 용무린이 떠올라 눈이 시큰거렸지만 애써 눌러 참았다.
‘용 가가…….’
제갈영령 역시 용무린의 얼굴이 떠올라 눈이 시큰해지려 들었지만 애써 눈물을 감추었다.
제갈영령이 도착한 지도 벌써 한 달이나 되었다.
용무린의 실종 소식에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은 슬픔을 맛보았던 제갈영령은 그 즉시 모든 일을 오라버니에게 맡기고 비룡문으로 달려왔다.
동정호변을 수색한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일각이 여삼추와 같은 시간이 흘렀다.
하지만 그 어디에서도 용무린을 찾았다는 말은 들려오지 않았다.
의식을 잃고 사경에 빠진 용대명과 얼마나 많은 피를 흘렸는지 새하얗게 변한 얼굴의 법정스님은 돌아왔지만 용무린은 변함없이 실종이었다.
그것이 무슨 뜻인지 짐작이 되었다.
눈물이 저절로 흘러나왔지만 제갈영령은 함부로 소리 내어 울지 않았다.
되레 마음을 다잡았다.
자신에게는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미래가 함께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조연옥과 용설화에게 회임을 알렸다. 슬픔만이 가득한 시기에 듣게 된 기쁜 소식, 조연옥과 용설화가 뛸 듯이 기뻐한 일은 불문가지였다.
그 뒤로 세 여인은 눈만 뜨면 이렇게 한 곳에 모여 희망으로 가득 찬 시간을 보냈다.
날이 가면 갈수록 힘찬 움직임을 보이는 새 생명의 기운에 힘입어 용대명도 법정스님도 모두 다 정신을 차리기를 바라면서 말이다.
‘용 가가께서 돌아가실 리 없어.’
‘우리 오빠가 누군데 죽어, 죽길?’
‘내 아들은 반드시 돌아올 거야. 틀림없어.’
퉁. 투웅.
무럭무럭 자라나 힘차게 태동을 하는 용무린의 2세만큼이나 여인들은 희망에 차 있었다.
그 덕일까?
“이제 고비는 넘겼습니다.”
그동안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한 채 용대명과 비룡무단의 상세를 돌보던 의성 신우량의 말이 있었다.
“수고하셨습니다, 의성.”
“감사합니다.”
“감사해요. 정말 너무너무 감사해요.”
세 여인이 뛸 듯 기뻐했다.
“의식을 차리셨으니 이제 회복만 하시면 됩니다.”
“지금 뵈러 가 봐도 좋을까요?”
“물론입니다. 잠시라면 상관없습니다.”
용대명이 의식까지 회복했다는 기쁜 소식에 면회까지 허락을 받은 세 여인은 그 즉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용대명의 침실로 향했다.
“……푸흐흐. 얼굴을 보니 좋구려.”
조연옥의 얼굴을 확인한 용대명이 서글프게 웃었다.
자식을 잃고 혼자 살아 돌아왔다는 사실이 너무 뼈아팠던 것이다.
왈칵 눈물이 쏟아졌지만 조연옥은 애써 참았다.
옆으로 비켜섰다. 딸과 며느리에게 자리를 내어줬다.
“아버지!”
“아버님…….”
용설화와 제갈영령이 다가왔다.
용대명은 눈물을 글썽이는 용설화의 머리를 가만히 쓰다듬었다.
“걱정했느냐? 괜찮다. 아비는 이제 괜찮아……. 아가, 너도 왔구나.”
잘 참았지만 제갈영령을 향해 눈을 돌렸을 때는 어쩔 수 없었다. 용대명의 눈에 금세 눈물이 차올랐다. 동정호의 물속으로 떨어져 흔적도 찾을 수 없는 용무린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툭. 투둑.
제갈영령의 눈에서도 뜨거운 눈물이 넘쳐흘렀다.
하지만 제갈영령은 활짝 웃었다. 한 눈에 보기에도 부풀어 보이는 아랫배를 조심스레 손으로 감쌌다. 용대명을 애써 위로했다.
“용 가가께서 남긴 희망이에요.”
“오오!”
용대명의 몸이 튕기듯 격동했다. 손주 소식에 당장에라도 일어나 앉고 싶은 모양이었으나 아직은 무리였다.
“용 가가께 불사신공의 구결을 들었던 이후 뼈는 부러뜨리지 않았지만 하루도 거르지 않고 수련을 해 왔어요.”
“장하다, 아가. 정말로 장하구나.”
반짝반짝.
미래를 기약하는 제갈영령의 눈이 밝은 빛을 뿜었다.
“힘들겠지만, 마음이 무척 아프겠지만, 그래도 저는 반드시 불사신공으로 키울 거예요. 그래서 용 가가의 복수를 스스로의 힘으로 할 수 있도록 이끌어 주겠어요. 아버님께서도 도와주세요.”
불사신공에 대해 용대명만큼이나 잘 아는 사람이 바로 제갈영령이었다. 용대명은 불사신공으로 키운다는 말이 어떤 것인지 잘 알았다.
불사의 의지!
그것을 이루기 위해서는 강제로 뼈를 부러뜨려야 한다.
피를 쏟는 고통을 일부러 줘야 하고 반드시 그 고통을 웃으며 이겨내야만 성취할 수 있다.
하지만 차마 반대할 수가 없었다.
비룡문을 위해서도 그렇고 이제 가고 없는 용무린의 복수를 위해서라도 그의 후손이 불사신공을 익히는 것은 필수였기 때문이었다.
“너에게나 뱃속의 내 손주에게나 미안하기 짝이 없구나. 미안하다, 아가.”
“아니에요 아버님. 용 가가의 후손이라면, 불사신공의 후계자라면 반드시 겪어야 할 일일 뿐이에요.”
제갈영령이 아랫배를 쓰다듬었다.
미안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언제고 알게 되겠지요. 엄마와 어른들이 어떤 마음으로 불사신공을 수련하도록 했는지 말이에요.”
자식을 사랑하는 마음을 생각하면 불사신공이 아닌 다른 무공을 권하고 싶다. 하지만 전군도독부 관할 일대에서 황제를 참칭하기 시작한 음양신마를 생각하면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는 거다.
‘두고 봐. 반드시 내 아이로 하여금 놈을 부숴버리도록 하겠어.’
제갈영령은 자신의 남은 생을 그 일에 바칠 생각이었다.
***
그래도 희망이라도 품고 있는 비룡문과는 달리 황궁의 기류는 연일 심각하기만 했다.
“난주가 위험한 상황이라 하옵니다, 폐하.”
“한 달, 그 안에 응원군이 도착하지 않는다면 성을 포기하고 후퇴해야 할 지경이라는 전언입니다.”
천하의 명장인 양문광이 직접 나섰음에도 저 모양이다.
조로스 칸.
초원에서 가장 강력한 두 부족이 하나로 합쳐져 탄생시킨 강인한 무인!
그의 압도적인 무력에 개량된 뇌화전을 소나기처럼 뿌렸음에도 무너뜨릴 수 없었다.
물론 처음에는 뇌화전의 힘으로 압도했다.
빼앗겼던 감숙성의 땅을 거의 수복하고 놈들을 다시 감숙 너머로 밀어붙였다.
하지만 몇 번의 경험을 통해 뇌화전의 성능을 면밀히 파악한 조로스 칸은 철저한 기병의 산개 운용과 청랑문 소속 무인들을 기습 침투시켰고 뇌화전을 무용지물로 만든 후 다시 진격하는 전술을 썼다.
그 탓에 다시금 쭉 밀릴 수밖에 없었다.
조로스 칸 한 사람을 상대하는 데 양문광 본인과 유격장군인 양경홍 그리고 양가장의 세 장로가 동시에 달려들어야만 할 정도였기 때문이었다.
마치 용무린급 무인을 맞상대하는 느낌을 받을 정도!
물론 조로스 칸은 용무린의 상대가 아니었다.
잘 해봐야 음양신마가 음양자로서 일신의 무력을 숨기고 있을 당시의 무력 정도라고나 할까?
곁에서 많은 것을 보고 느꼈던 양문광의 판단이니 확실할 터지만 지금 조로스 칸을 맞상대할 수 있는 인재가 전무하니 문제인 것이다.
“난주가 함락당하면 곧바로 녕하와 섬서성이 적들의 공세에 놓이게 되옵니다, 폐하.”
“정녕 큰일인 것입니다. 머지않아 조로스 칸이 이끄는 두 부족 이외에 나머지 두 부족들 역시 산서성 북단의 대동현이나 하북성 북쪽의 위장현을 통해 밀고 내려올 수도 있음이옵니다.”
“그 두 곳의 진격에 맞추어 적의 수괴 조로스가 합공을 해 온다면 종묘사직이 위태로울 수도 있습니다.”
하나 같이 절망적인 상황만 늘어놓는다.
황제는 정말이지 답답하면서도 화가 치밀어 견딜 수가 없었다.
‘어째서 저렇듯 진다는 생각만 하는고? 또 어째서 싸워 이긴다는 작자가 한 사람도 없단 말인가?’
용무린이 있을 때는 이런 적이 없었다.
무슨 일이라도 생길라치면 황룡패주 용무린이 다 알아서 미리 치워 버렸다.
자금성에 드리웠던 마교 놈들의 그늘도 그가 단번에 걷어 버렸고 혈교 놈들의 수작도 치워 버렸으며 홍연왕의 반란 역시 그가 발본색원했다.
그런 그가 이제는 없다는 사실이 황제는 뼈아팠다.
‘정녕 잘못되었는가? 정녕 그러한가, 패주?’
그 놀라운 무력을 생각하면 믿어지지 않지만 올라온 정보를 종합하면 그렇게 볼 수밖에 없다.
황룡패주 역시 사람인 이상 동정호의 물속에 빠지고 달포가 지나도록 시신조차 건지지 못하고 그 어디에서도 발견하지 못했으니 그의 죽음을 이제는 받아들여야만 한다.
그때였다.
삼공의 좌장인 태사가 어쩔 수 없다는 듯, 한 가지 계책을 내놓았다.
“폐하. 세가 불리할 때는 한 발 뒤로 물러남이 가할 줄 아뢰옵나이다.”
“한 발 뒤로 물러나?”
황제의 목소리가 뾰족하게 울렸지만 태사는 물러나지 않았다. 계속해서 목소리를 높였다.
“그러하옵니다, 폐하. 북원 수괴의 무위가 범상치 않사옵니다. 더불어 장강 이남의 상황 또한 녹록지 않다고 합니다. 마교가 전군도독부 관할지를 점령했고 그 중 호남 성도인 장사에서 감히 황제를 참칭한다고 하지 않사옵니까?”
“크흐음.”
황제가 불쾌하기 짝이 없다는 듯 침음을 삼켰다.
마음 같아서야 당장에라도 놈들을 쓸어버리라고 하고 싶은데 그럴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놈들의 손에 황룡패주가 갈 줄이야.’
이번에도 당당히 무찌르고 돌아올 줄로만 알았다.
한데, 신마 이후 새롭게 등장한 음양신마라는 악적의 손에 당했다고 한다. 핏덩어리가 되어 동정호 물속으로 가라앉아 떠오르지 않는다는 소식이다.
죽었다.
황룡패주이자 무림왕인 용무린이 그렇게 스러진 거다.
‘패주. 이번에도 돌아와 고와 더불어 열 동이의 술을 나눌 수 있을 것으로만 알았는데……. 어찌 그리 빨리 가셨단 말인가?’
안타깝고 또 안타까운 일이었다.
더불어 두려웠다.
황룡패주 용무린조차 넘어서지 못한 마교의 종주인 음양신마가 자금성의 담을 넘는다고 한다면 과연 누가 있어 막을 수 있겠는가?
황제의 그런 애타는 마음도 모르면서 태사는 계속해서 화친을 주장했다. 음양신마의 황제 참칭보다는 북원의 침습을 더 위험하다고 본 것이었다.
물론 그것이 더 현명한 안목이리라.
마교는 단숨에 나라를 전복할 수 없지만 북원의 조로스 칸은 이 나라를 완전히 전복시킬 수 있을 만큼 무서운 세력을 거느렸다.
“폐하. 북원의 수괴인 조로스 칸을 부마도위로 삼으소서.”
“뭐, 뭐라? 부마도위?”
“그러하옵니다, 폐하. 놈에게 아내가 셋이 있다고는 하나 명제국의 주약란 옹주라면 능히 첫째로 올라설 수 있음이옵니다.”
“닥쳐라, 태사! 네가 어찌 감히 나를 능멸하는 게냐?!”
황제가 분노를 쏟아냈다.
하지만 태사와 같은 생각인 모양인지 나머지 삼공의 일원인 태보와 태부까지 나섰다.
“어찌 능멸만 생각하시는 것이옵니까? 그저 이보 전진을 위한 일보 후퇴라 생각하시옵소서 폐하.”
“조로스를 부마도위로 삼아 감숙을 영지로 내리시면 패배하여 빼앗기는 것이 아니게 되옵니다.”
“또한 감숙은 후일 어느 때고 다시 되찾아 올 수도 있지 않겠사옵니까?”
“지금은 놈의 진격을 막고 후환거리인 마교의 악적을 먼저 쳐 없애야 할 때이옵니다, 폐하.”
삼공이 모두 화친을 주장했다.
그것도 주약란 옹주를 화친의 증거이자 명목상의 패배를 무마하기 위해 던져주고서 말이다.
‘후우. 패주. 정말 가셨는가? 정말?’
황제는 이제는 두 번 다시 볼 수 없는 용무린을 그리며 답답한 심정을 달래야만 했다.
“지원병 일만여 명이 오늘 내일 사이에 난주 인근에 도착할 것인즉, 이 이야기는 그 결과가 나오면 하는 것으로 하겠다.”
“폐-하!”
“통촉하여주시옵소서, 폐하.”
“이 나라를 풍전등화의 위기에서 구해주시옵소서, 폐하.”
벌떡 일어나 건청궁으로 돌아가려는 황제의 발걸음을 삼공과 삼고 그리고 예하 문무백관이 잡고 늘어졌다. 목청을 돋웠다.
황제는 답답했다. 괴로웠다.
‘패주. 고가 너무 외롭네. 어찌 해야 하는가?’
황제의 뇌리에 다시 한 번 용무린의 얼굴이 스쳐 지나는 순간이었다.
‘나라가 풍전등화의 위기에 빠졌거늘 그 주인인 고가 모른 체할 수는 없는 일!’
황제가 다시 자리에 앉았다.
시사가 이어졌다.
삼공을 비롯한 문무백관은 여전히 화친을 주장하고 있었고 오직 한 사람 한림대학사로 새로이 등극한 제갈문군만 홀로 나섰다.
“미력한 신이지만 평생을 두고 병법과 무예를 닦아왔사오니 오늘 나아가 총병관을 돕고자 합니다. 통촉하여주시옵소서, 폐하.”
불감청이언정고소원 아니던가?
무후의 후손인 내각대학사의 병법과 무예라면 필시 밀리고 있는 감숙의 전장에 큰 도움이 될 터였다.
“오오! 고에게 그대가 있었지? 고맙구나, 고마워.”
황제는 즉시 제갈문군에 군사의 지위를 수여했다.
조회가 끝나기가 무섭게 제갈문군은 난주 인근으로 향하는 지원군에게 자신이 합류할 때까지 정지를 명했다. 그런 후 두 명의 기수만 앞세워 감숙을 향해 말을 달렸다.
***
용무린은 나뭇가지를 슬쩍 슬쩍 쳐냈다.
패액. 쩌어억.
그때마다 손에 들고 있는 것이 나뭇가지라는 사실이 무색할 정도로 무지막지한 파공음이 흘렀다.
하지만 용무린의 표정은 좋지 못했다.
‘아, 답답해라.’
고려의 옛 법을 완벽하게 다시 펼쳐내기 위해서는 머릿속에 들어 있던 경험을 마음먹은 대로 쏟아낼 수 있도록 고련을 해야만 하는데 마음에 걸리는 것 때문에 당최 마음껏 펼칠 수 없었던 것이다.
‘작정하고 펼쳤다가 놈이 눈치 채면 어떻게 하지?’
놈을 방심시키기 위해서는 내가 죽은 것으로 알고 있는 것이 더 좋다.
하지만 이대로라면 수련을 완성할 길이 없다.
초식이라는 것은 상상과 실제로 펼쳐내는 것과는 완전히 다르기 때문이다.
후우웅. 휘우우웅.
잠시 고민하던 용무린은 결국 작정하고 두 개의 심검을 끌어 올렸다.
‘눈치 채도 어쩔 수 없다. 일단은 수련을 완성시켜 놓는 것이 먼저야.’
그래야 불사대천검의 대성도 바라볼 수 있다.
쌔애애애액.
순간적으로 치솟은 심검이 옆으로 누웠다. 이내 맹렬한 회전을 시작했다.
소용돌이치는 두 개의 심검이 천천히 하나로 합쳐졌다.
“용오름 하눌신폭!”
하나로 합쳐진 심검의 소용돌이가 순식간에 늘어났다.
하늘과 땅을 하나로 이었다.
용오름의 강림!
미친 듯 휘도는 돌개바람은 그대로 심검으로 이뤄졌고 용오름 외곽에서 작열하듯 사방을 휘감는 번개는 모두가 칼벼락이었다.
거기에 더해 우박처럼 쏟아져 내리는 나선형으로 꼬인 얼음송곳이라니!
영산의 깊은 골의 지형이 변하기 시작했다.
용오름이 할퀴고 갉아 없애 버리는 통에 지형 자체가 바뀌어 버렸기 때문이었다.
실로 무지막지한 거력.
한 번 발동하면 용오름의 흡입력으로 인해 대자연의 기운이 자연적으로 끌려와 위력을 더하는 초식이기 때문에 본신진기의 소모는 상대적으로 적다.
‘이 거짓말 같은 능력 때문에 한 사람의 내공으로써 수백여 고수를 능히 상대할 수 있게 되지.’
하지만 아직도 완전히 모르겠다.
대체 이 고려의 옛 법과 불사대천검 사이에 어떤 연결 고리가 있는 것인지를…….
휘이이이-!
용무린이 내공을 완전히 끊었는데도 불구하고 초식의 여력은 한참이나 더 주변을 황폐화시켰다.
이윽고 초식이 완전히 멈췄다.
드러나는 참상이라니!
부르르.
용준경은 입을 쩍 벌린 채 몸을 떨었고 용무린은 한 차례 픽 웃어 보인 후 생각에 잠겼다.
‘느낌은 이 검법을 완벽하게 연마하면 불사대천검을 대성할 수 있다고 가리키는데 나는 아직도 어렴풋밖에 모르겠단 말이야.’
아직까지 완벽하게 깨어지지 않고 있던 의식의 봉인이 마저 깨어져야만 하는 것일까?
‘이 정도라면 전생의 나인 절대검신이 펼친 것과 별반 다를 게 없는 위력인데 말이야.’
장담컨대 이대로 놈 앞에 나서도 지지는 않는다.
일전에 놈에게 당했던 이유는 놈과 싸우기에 앞서 가짜인 신마와 생사결을 벌였기 때문이다.
‘물론 놈이 또 다시 환혼대법을 펼치면 그 대법에 자신할 수는 없어.’
전생에 그러했듯 놈이 또 다시 나를 집어 삼키려고 했을 때 쉬이 벗어날 방법이 있다거나, 혹은 놈이 음양자에게로 옮아갔듯 또 다른 누군가에게 옮겨 가려는 것을 막을 자신이 없었다.
‘어떻게 해야 놈을 막을 수 있을까?’
용무린의 걱정은 음양신마를 죽이는 것에서 놈이 죽음을 통해 다른 누군가에게 옮겨 가는 것을 막는 것으로 이동해 갔다.
‘결국에는 놈의 영혼이나 혼백까지 한꺼번에 베어 소멸을 시켜야만 한다는 뜻인데…….’
영혼. 또는 혼백마저 베는 검법이라.
그런 무공이 과연 세상에 존재하기나 할까?
‘그런 점을 생각하면 내가 함부로 나설 수가 없어.’
내가 건재함을 놈이 눈치 채면 과거 음양자로 몸을 갈아탔듯 수하들 중 누군가에게 은밀히 수작을 부려 놓을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교토삼굴. 놈이라면 벌써 수하들 중 누군가에게 손을 써두었을 거야.’
가짜 신마를 내세워 불사마력을 익히게 한 후 놈이 죽으면 그 힘이 자신에게 쏟아지게 만들어 둘 정도의 심계와 능력을 지닌 놈이다.
그런 여우가 자신이 옮겨 갈 수 있는 대리인을 만들어 두지 않았을 리가 없어.
‘내가 암전이 되어 놈의 심장을 노려야 하는 이유가 한 가지 더 늘었군.’
음양신마가 불시에 옮겨 갈 수 있는 껍질의 주인을 찾아 그놈을 제거해야만 한다.
‘필시 많은 공을 들여 놓아야 가능한 대법일 터, 하루아침에 몇 차례나 연거푸 되지는 않을 테니 놈의 움직임에 제약이 있겠지.’
그렇게 놈이 옮겨 갈 껍질을 없앤 후 역천자와 겨뤄야만 완벽하게 소멸시킬 수 있는 확률이 조금이라도 더 늘어나게 된다.
용무린은 천천히 자신의 계획을 점검했다.
1, 암전(暗箭)이 된다.
생존 소식을 알릴 수 없으니 많은 사람들이 마음 아파하겠지만 승리를 위해 감내하리라.
2, 암전이 되어 놈들 속으로 스며든 후 놈이 옮겨 갈 대상자를 찾아내 제거한다. 그래야만 놈을 완전히 없애버릴 가능성을 높일 수 있다.
3, 불사대천검의 대성은 물론이고 음양신마의 혼백마저 소멸시킬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만 한다.
물론 아직도 완전히 깨어지지 않는 의식의 봉인 속 안쪽 깊숙한 곳에 그 비밀이 숨어 있다고 생각한다.
또한 비홍검과의 연결고리를 찾아 불사대천검을 대성하면 놈을 혼백이나 영혼마저 완벽하게 소멸시킬 수 있는 힘을 얻게 될 수도 있다.
4, 혹시 모를 미래를 위해 용준경에게 미래를 준비시킨다.
완전한 불사신공과 함께 고려의 옛 법인 비홍검을 용준경이에게 전수할 것임. 혹여 내가 잘못되면 비룡문과 무림을 그가 책임지게 되리라 생각함.
5. 놈의 환혼대법을 다시 내게 펼치려 할 때 막을 수 있는 대책이 필요하다.
‘뭐, 그쯤 하면 되겠지?’
아무리 생각해도 이보다 더 좋은 생각을 찾을 수가 없었다.
“준경아.”
“예, 형님.”
용무린의 부름에 아직도 얼떨떨한 얼굴로 초토화된 영산의 골짜기를 바라보던 용준경이 달려와 무릎을 꿇었다.
“앞으로 달포(45일) 후 나는 세상으로 나설 것이다. 하지만 너는 이곳에 남아 수련을 계속해야 한다.”
홀로 수련을 계속하라는 말에 용준경의 얼굴이 살짝 어두워졌다.
그 마음 다 알고 있다는 듯 용무린이 손을 들어 용준경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어깨를 툭툭 두들겼다. 따뜻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너는 내 마지막 패다.”
“예? 마, 마지막 패라니 무슨…….”
“내가 잘못될 경우를 대비한 회심의 한 수가 바로 너라는 뜻이다.”
“형님!”
화들짝 놀란 용준경이 목소리를 돋웠다.
용무린은 담담한 얼굴로 고개를 흔들어 보였다.
“내가 상대할 적은 역천자인 음양신마, 놈의 무력은 결코 나에 못지않다.”
용무린은 어째서 그렇게 생각하는지, 음양신마를 상대할 때 어떤 점을 주의해야 하는 것인지 하나도 빠짐없이 알려 주었다.
“……!”
생각지도 못한 적의 정체와 능력에 용준경은 적지 않게 놀란 듯했다.
하지만 결국 음양신마가 시공을 초월해 다시 나타날 수 있는 역천자라는 사실을 깨닫고 용무린의 말에 수긍하게 되었다.
“알겠습니다, 형님. 분부대로 따르겠습니다.”
용준경이 단단한 목소리로 답했다.
용무린이 부드러운 미소로 어깨를 두들겨 주었다.
“너만 믿는다. 하니, 열심히 따라와 주길 바란다.”
“예, 형님.”
그날부터 용무린은 불사신공과 비홍검의 모든 것을 용준경에게 전수하기 시작했다.
불사신공은 이미 바른 길을 찾아 스스로 헤쳐 나가기 시작하고 있었고 비홍검의 구결과 초식의 형(形) 역시 빠르게 흡수했다.
***
호남 성도인 장사의 중심.
보통은 온갖 상인과 행상들로 인해 양민들이 왁자지껄해야 하지만 어쩐지 고즈넉하게만 느껴졌다.
성도의 중심인 승선포정사사의 지하에 들어앉은 음양신마 때문이었다.
경호도 경호이거니와 놈이 스스로를 황제로 칭해버리는 바람에 놀란 양민들이 당최 밖으로 나오지를 않았다. 혹시라도 불미스러운 일에 휘말릴까봐 두렵기 때문이었다.
물론 혼을 내다 판 관원들이나 혈고에 당한 사람들의 경우는 달랐다.
“국호와 연호를 정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관 태사.”
“허허허. 그거야 황제폐하께서 정사를 보러 나오신 후 결정해야 하지 않겠소이까, 유 태보?!”
“껄껄껄. 그렇지요.”
과거에는 승선포정사사의 좌, 우 도독으로 불렸던 자들이 이제는 삼공의 하나인 태사와 태보로 스스로를 부르며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웃기는 노릇이었지만 승선포정사사는 이미 작은 자금성이나 다름이 없었다.
삼공은 물론이고 내각과 육부에 도찰원 그리고 한림원과 국자감까지, 다들 굵직한 자리 하나씩 다 차지하고 앉아 국정을 논의했다.
권한만 덩그러니 던져 놓은 음양신마가 아직도 지하 연무장에 들어앉아 운공요상에 여념이 없는데 어떻게 제대로 된 국정을 논하겠는가?
그저 뜬구름 잡는 소리일 뿐이었다.
“국호와 연호 정하는 거야 그렇다고 하지만, 황제폐하께서 나오시는 즉시 시행할 수 있도록 세금을 원활하게 걷을 방도쯤 마련해둬야 하지 않겠소?”
“그야 그렇습니다.”
“다행히 전군도독부 소속 정예들이 감숙의 전장으로 모두 끌려가지 않았으니 수월할 듯합니다.”
“그렇다면 권공께서 세금을 거둬들일 방안을 마련해 주시는 것으로 하고 우리들은 총병관 검마종 대장군과 함께 세금을 제대로 운반해 올 방도를 마련해 보겠습니다.”
이렇듯 중구난방으로 모든 것을 해결해 나가고 있었다.
‘어째서 섣부르게 벌써 건국을 선포하셨을까?’
잠자코 지켜보고 있던 검마종은 머리가 다 지끈지끈해 참기 어려웠다.
헛웃음 터뜨리며 비수를 감춘 채 자신의 잇속을 차리는 일은 애초에 먹물들의 전공이지 자신의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나마 잘 되었군. 세금을 핑계로 여러 성들을 돌면서 기반이나 확실히 다져놓아야겠어.’
운공요상 중에도 입을 열어 할 말을 다 하는 음양신마의 안전은 걱정할 필요가 없다.
그러니 이 지긋지긋한 곳을 벗어나 마교의 영지로 귀속된 다섯 개의 성을 마음껏 돌며 중요 거점들이나 다잡을 생각이었다.
그때였다.
[검마종은 잠시 들라.]
음양신마의 의념이 검마종의 뇌리를 울렸다.
검마종은 즉시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 지금 당장 출발하시려는 게요, 대장군?!”
“허허허. 나라의 기틀은 하루아침에 잡을 수 없다오. 천천히 움직이시오, 천천히.”
시답잖은 것들이 겁도 없이 검마종을 아래로 본다.
‘콱, 그냥!’
마음만 같아서는 벌써 모가지를 열 번도 더 넘게 떼었다.
하지만 놈들은 자신의 주인인 음양신마의 새로운 수족들, 나라의 기틀을 다지기 위해서라도 놈들을 조금 더 살려 두어야만 했다.
“황제폐하께서 부르셔서…….”
“오오!”
“역시 신비로운 황제폐하시구려.”
“우리의 귀에는 들리지도 않았는데 대장군을 부르시는 신묘한 힘을 보이시다니요!”
“우리도 폐하의 정겨운 부름을 좀 받아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려.”
늙고 욕심만 가득한 인간들의 느물거리는 태도를 사력을 다해 눌러 참으며 검마종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다녀오겠소이다.”
그나마 밖으로 나서니 조금 살 것 같았다.
어찌나 역겹던지 자칫 잘못했다가는 나라의 기틀도 다잡기 전에 삼공을 비롯한 고위 관료들의 목을 전부 날려버릴 뻔했다.
***
검마종이 움직인 곳은 승선포정사사의 지하였다.
본디 죄인을 잡아 가두는 뇌옥이었지만 음양신마의 명에 의해 지금은 연무실로 탈바꿈되어 있었다.
오싹.
진입하기가 무섭게 엄습하는 한기에 검마종은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나조차도 견디기 어려운 기운이라니!’
음양신마는 볼 때마다 느낌이 달라지는 듯싶다.
어떤 날은 자애롭고 또 어떤 날은 전대 신마 이상의 위압감을 뿜어냈으며 또 어떤 날은 진정한 황제인 듯 제왕의 품격이 느껴지기도 했다.
‘이제는 어떤 모습이 진짜 음양신마의 모습인지 나도 잘 모르겠다.’
자신을 포함한 삼마종이 음양신마의 최측근이라면 최측근이랄 수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속을 종잡을 수가 없었다.
모든 것은 음양신마의 머릿속에서 이루어질 뿐 의견 개진 하나 할 수 없는 자신들은 그저 허수아비나 잘 길들여진 개처럼 시키는 일이나 해야 할 뿐이라 느낀다.
“찾아 계시옵니까?”
내심을 감추며 검마종이 고개를 조아렸다.
“오오, 어서 오라 검마종.”
오늘은 자애로운 가면을 썼나 보다.
음양신마가 따뜻한 목소리로 검마종을 반겨 주었다.
“이리 가까이 오라.”
“……!”
검마종이 조심스레 가까이 다가왔다.
지그시 검마종의 눈을 들여다보던 음양신마가 생각지도 못한 말을 불쑥 꺼내들었다.
“모든 것은 연습일 뿐이다.”
“예? 무, 무슨 말씀이신지…….”
“나라를 경영하는 것 말이다.”
그게 말이 되나?
문득 그런 생각이 스쳤지만 절대로 표정에 드러낼 수는 없는 법, 검마종은 잠자코 듣고만 있었다.
“천하의 제왕인 내가 자금성을 수중에 넣었을 때 허둥대거나 아무것도 아는 것이 없어서야 되겠느냐? 그래서 먹물들의 하는 꼴을 보며 연습을 하고 있었다. 옥좌에 앉았을 때를 대비해서 말이야.”
“아하!”
그제야 알겠다는 듯 검마종이 탄성을 발했다.
물론 마음속에서는 ‘그게 무슨 헛소리지? 황룡패주조차 없는 판국인데 무엇 때문에 이렇게 시간을 끈담?’ 하고 외쳤지만 감히 표현할 수가 없었다.
날카로운 시선으로 검마종의 얼굴을 살피던 음양신마가 갑자기 인상을 찌그러뜨리더니 각혈을 토했다.
“우웁. 쿨럭. 쿠울럭!”
각혈이 어찌나 세차게 뿜어지던지 검마종의 얼굴에까지 다 튀었다.
“음양신마시여!”
검마종이 화들짝 놀라 부축하려 들었다.
정확한 상세를 살피기 위해 음양신마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는 순간,
띠이잉.
‘뭐지?’
검마종의 머리가 갑자기 핑 돌았다. 눈앞이 아찔하며 어지러웠다. 다리에 힘이 풀렸다. 그 탓에 몸이 살짝 흔들거리기까지 했다.
‘뭐, 뭐지?’
검마종은 세차게 머리를 흔들었다. 지금은 자신보다 주인의 몸 상태를 살펴야만 했다.
‘신마께서 이렇듯 몸이 많이 상하셨을 줄이야.’
이상한 생각을 하는 대신 자책을 했다.
음양신마의 상세가 이렇듯 좋지 않은 사실을 진즉 알았다면 어째서 계속 이곳에 눌러 있는지에 대한 의구심 따위도 가지지 않았으리라.
‘황룡패주라는 애송이와 땡중들에게서 받은 내상이 이렇게 컸을 줄이야…….’
누가 뭐라고 해도 음양신마만이 희망 아니던가?
음양신마의 내상이 회복되지 않는다면 자금성의 주인이 되기까지 시간이 더 오래 걸리고 위험 역시 높이 상승할 것이다.
“쿨럭. 쿠울럭. 후우.”
한참 동안이나 피를 게워낸 음양신마가 겨우 숨을 돌이켰다. 나른한 눈빛으로 검마종을 보며 말했다.
“보았느냐?”
“속하가 불민하여 이제야 알게 되었습니다. 죄송합니다, 폐하!”
음양신마에서 황제로 호칭이 왔다 갔다 하는 검마종을 보며 해무광은 풀썩 웃었다.
“이런 판국이라 아직 진격을 하지 못했느니라.”
“그저, 폐하께오서 따로 복안이 있으리라 생각하는 중이었습니다.”
“물론 복안이 있지.”
“하명하소서…….”
“너는 지금 즉시 대산으로 돌아가라.”
“예? 대…… 산으로 말씀입니까?”
“그래.”
“어, 어째서?”
혹시나 음양신마가 자신을 버리려는 것인지 가슴이 덜컥 내려앉은 검마종이 말꼬리를 늘였다.
그럴 리가 있느냐?
하듯 자애로운 미소를 지어 보인 음양신마의 목소리가 담담히 이어졌다.
“너야말로 나의 후계자,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고귀한 몸이 될 사람이다.”
“……!”
생각지도 못한 말이어서 검마종은 그저 입만 쩍 벌린 채 음양신마의 말을 들어야 했다.
딸랑!
음양신마의 손에 예의 그 섬뜩한 방울이 들렸다. 검마종에게 내밀었다.
“환혼령이라 한다.”
“화, 환혼령.”
“이것이 바로 네가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몸이라는 것을 증명해 줄 것이니……”
“폐, 폐-하!”
“환혼령과 함께 대산으로 돌아가 조사전에 들도록 하라.”
조사전까지!
검마종은 그야말로 입을 쩍 벌릴 수밖에 없었다.
‘대체, 갑자기 나에게 왜 이렇게까지 잘해주는 것이지?’
물론 지금까지 세운 공을 따지자면 자신만큼 많은 공을 세운 존재도 드문 편이다.
하지만 후기지수들에 비해 나이가 너무 많다.
조사전까지 개방해가면서 자신을 키우려하기에는 불합리한 면이 적지 않다.
욕심만 같다면야 좋겠지만 어언 일백 살이 다 되어 가는 나이, 음양신마의 제안이 뭔가 수상하다는 사실을 본능적으로 알 수 있게 해주었다.
“……!”
그러나 폐부 깊숙한 곳까지 꿰뚫어 보듯 오묘한 눈빛으로 바라보는 음양신마의 속을 알 도리가 없었다.
‘시간을 너무 끌었다.’
검마종은 잽싸게 고개를 숙여 감사를 표해야만 했다.
연기였지만 완벽했다.
“저를 이렇게까지 믿어주시다니!”
감격한 듯 목소리를 조금 더 높였다.
“성은이 망극합니다, 폐하-아!”
음양신마는 그저 검마종의 모든 행동이 마음에 든다는 듯 고개를 끄덕여 보일 뿐이었다.
그리고…….
“조사전에 들면 말이야.”
무슨 무공을 어떤 방법으로 어떻게 익혀야 하는 것인지에 대해 자세한 가르침을 듣고 나서야 비로소 검마종은 뇌옥을 나설 수 있었다.
반짝.
변함없이 충직한 얼굴로 돌아서는 검마종을 바라보던 음양신마의 눈가에 회심의 빛이 어렸다.
확실히 뭔가 있다.
***
“으응? 시, 시간이 어째……?”
뇌옥 밖으로 나선 검마종의 고개가 갸우뚱 기울었다.
분명히 대낮에 음양신마를 만나러 뇌옥을 찾았다고 생각했는데 나와 보니 동쪽 하늘에 태양이 떠오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에이, 아니겠지.’
평소라면 절대로 그러지 않을 텐데 검마종은 그저 단순한 자신의 착각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이상한 것은 또 있었다.
음양신마가 각혈을 통해 상당한 양의 피를 얼굴에 뿜었었는데, 그 피가 씻은 듯 사라졌던 것이다.
과연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
***
“후우. 이제야 다 끝났다.”
검마종이 사라진 직후 음양신마는 한 시름을 던 듯 크게 숨을 몰아쉬었다.
얼굴이 한층 더 핼쑥해졌지만 표정만은 밝았다.
“이제야말로 몸만 회복하면 되는 것인가?”
만에 하나를 위한 대비까지 다 끝났다.
부상의 회복조차 뒤로 미뤄가며 백 일이나 투자했던 일이었다. 하지만 다행히 완벽하게 마무리가 되었다. 운공요상만 끝내면 다시 일을 진행할 수 있는 거다.
“최대한 빨리 몸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역시 뭐니 뭐니 해도 동남동녀의 정혈이겠지?”
치료를 백 일이나 뒤로 미룬 데다 파고든 놈들의 힘 역시 지독한 수준이다. 어지간한 방법으로는 절대로 예전의 무위를 회복할 수 없다.
“자시 생 동남동녀의 정혈…….”
가짜 신마를 통해 이미 그 효과를 입증했다.
자시 생 동남동녀의 정혈은 불사신공과 규천마력을 하나로 묶어낼 만큼의 힘을 지녔다.
“시간이 문제인데.”
예전에야 천기자의 눈을 피하기 위해 그토록 오랜 시간이 필요로 했던 것이지 황제를 참칭하는 지금은 얼마 걸리지도 않을 것이다.
“푸흐흐. 그동안 행복한 꿈이나 꾸고 있도록.”
이번에는 일천 명까지도 필요 없다. 이미 불사신기와 규천마력을 합일시킨 불사마력으로 단전을 채운 전력이 있으니 그 절반에 해당하는 정혈만으로도 충분하리라.
“회복하고 나면 어느 곳을 먼저 칠까?”
음양신마는 즐거운 고민에 빠졌다.
정파 연합이 모여 있는 무한을 공략해 놈들을 피로 씻어 버릴까? 아니면 기왕 황제를 참칭했으니 자금성부터 손에 넣어 버리는 것이 좋을까?
결정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
“흠. 감숙에서 밀고 내려오는 북원 놈들 병력이 이, 삼십만 명에 이른다고? 그 정도 숫자라면 꽤 귀찮겠는데?”
자금성을 집어 삼키면 그 서슬에 총병관 양문광도 무너질 것이고 감숙에서 밀고 내려올 조로스 칸이라는 녀석으로 인해 일이 상당히 성가셔진다.
“놈이 뒤에 숨어 명령만 내린다면, 찾기도 어려운 데다가 그 많은 숫자를 죄 죽여야 비로소 놈의 얼굴을 볼 수 있단 말이야.”
그렇다고 백도 연합을 바로 치자니 살짝 켕겼다.
용무린의 불사신공에 적지 않은 피해를 입었을 때 밀려든 불사항마승들 때문이었다.
“그 빌어먹을 놈의 땡중들도 그렇지만 마지막에 미친 듯이 달려들었던 놈의 불사신기 역시 마음에 살짝 걸린단 말이야.”
고려의 옛 법으로도 놈들을 한꺼번에 처리할 수 없었다.
그렇다면 다시금 지금 입었던 것과 비슷한 수준의 부상을 입을 수도 있다는 뜻인데, 무턱대고 쳐들어갈 것이 아니라 한 번쯤 생각해 봐야 할 일이었다.
“푸흐흐. 어느 쪽을 치든지 간에 일단 부상부터 먼저 회복하고 보자.”
순천자를 자처하던 운명의 적을 이미 제거한 뒤다.
급할 게 없다.
시간은 이미 내 편이다.
***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고 암전이 되려던 용무린의 결심은 정보를 얻기 위해 무한에 발을 디디는 순간 송두리째 흔들렸다.
여러 가지 일로 침울하기만 한 정파 무림의 고수들, 아니 무한의 모든 양민들에게 한 가지 기쁜 소식이 들려왔기 때문이었다.
무림왕 황룡패주 용무린이 후계자를 남겼다!
후계자의 정체는 혼례만 올리지 않았지 이미 그의 처로 알려진 제갈영령의 복중 태아!
복중 태아에 불과하지만 누가 뭐라고 해도 무림왕 황룡패주의 당당하고 적법한 후계자로서 이미 비룡문의 안주인인 조연옥이 인정했다는 소식!
“세상에! 용 대협의 부인께서 회임을 하셨다고?”
“그렇다니까!”
“경사 났네. 경사 났어.”
삼삼오오 고개를 맞댄 사람들 모두가 그 소식에 자신의 일처럼 기뻐했다.
“일전에 혼담이 오가던 제갈세가의 그 아름다운 분?”
“맞아. 지금 비룡문에 계시다고 하네?”
“가만, 내가 지금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지.”
늙수그레한 촌로가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어딜 가려고?”
“어딜 가긴? 내가 손주를 보면 쓰려고 전에 미역을 구해 놓은 것이 있단 말이지! 그걸 가져다 드려야겠어.”
“이런 멍청이! 아직 해산도 하지 않았는데 벌써 미역이 필요하실 것 같으냐?”
핀잔을 준 촌로가 망태기를 등에 메고 부산을 떨었다.
“그러는 장 가 너는 어디가려고 그러는데?”
“간밤에 쳐 둔 그물 거두려고 간다. 잉어나 한 마리 커다란 놈 걸렸으면 좋겠다. 제갈세가의 아기씨 푹 고아 드시게 말이다.”
“함께 가자. 내가 도와준다.”
“푸흐흐. 그래. 함께 가자.”
제갈영령의 회임 소식이 다들 어지간히 기쁜 모양이었다.
하나 같이 자신의 일처럼 나섰다.
어떻게 해서든 좋은 것들을 구해서 제갈영령에게 먹이고 싶어 했다.
그 정성이 너무 고마워서 비룡문은 가지고 온 선물들을 모두 고가로 매입을 하려고 했다.
하지만 실패했다.
비룡문의 경사에 힘이 되고 싶어 일부러 가져온 것이지 돈을 받기 위해 들고 온 것이 아니라며 하나 같이 던지듯 놓고 도망치는 통에 어쩔 수 없었다.
평소에 용무린과 비룡문이 무한의 양민들에게 얼마나 많은 인망을 얻고 있었는지 잘 나타나는 대목이었다.
두근두근.
그 소식을 듣는 순간 용무린의 심장이 마구 두방망이질 쳤다.
‘령매! 정말이야? 정말 나와 함께 했던 그 이틀이란 시간 동안에 하늘이 주신 선물인 거야?’
제갈영령이 어찌나 보고 싶은지!
그녀가 현재 비룡문에 들어와 있다는 소식에 용무린은 자신도 모르게 움직이는 발을 붙잡기 위해 사력을 다해야만 했다.
‘어쩌지?’
본디 계획대로라면 이대로 암전이 되어 마교로 침투를 할 생각이었으니 정보를 구하는 대로 떠나야 한다.
‘아버지가 이제야 겨우 고비를 넘기셨다고 하잖아. 완전히 털고 일어나시려면 아직 많이 남았다는 뜻이야.’
그뿐만이 아니었다.
소림의 장문방장인 법정대사 역시 아직 사경을 헤매고 있었다. 함께 음양신마를 공격했었던 불사항마승들의 부상도 너무 크다.
‘그 사이에 먼저 회복을 한 음양신마 놈이 이곳을 향해 짓쳐들면?’
누가 먼저 회복하느냐 하는 시간 싸움인 셈이다.
내가 암전이 되어 있을 때 음양신마가 먼저 회복을 하게 된다면 정파 무림이 피로 씻기게 될 것이고 그 반대라면 마교가 쓸려나갈 것이다.
‘물론 음양신마 놈은 다른 몸으로 갈아탄 후 한동안 숨어 지내겠지만…….’
적어도 몇 년, 길게는 몇십 년까지의 평화가 찾아온다.
당연히 근본적인 해결책은 되지 못한다.
‘근본적인 해결책은 역시 내가 불사대천검을 대성한 후 놈의 혼백과 영혼까지 소멸을 시키는 것이겠지.’
그 일도 순서가 있다.
놈은 틀림없이 도망갈 준비를 해두었을 것이다.
‘어떻게 해서든 그놈을 먼저 잡아 죽인 후 음양신마를 소멸시켜야만 해.’
그것도 문제였고 불사대천검의 대성을 통해 놈을 소멸시킬 수 있는 능력을 확보하는 일도 문제였다.
‘하아, 답답해라.’
어떻게 하는 것이 정답인 것일까?
‘이런 때 천기자가 내 곁에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푸후훗.
갑자기 쓴 웃음이 새어 나왔다.
그 천기자와 전생의 자신과 혜월까지 함께 머리를 맞대고 짠 계획의 결과가 지금 이 모양이지 않은가?
‘가짜를 내세워 칼받이 시킬 생각인지도 몰랐고 음양자를 집어 삼켜 숨어 있다가 가짜 신마의 죽음 후 모습을 드러내고 불사마력을 흡수해 버릴 줄도 몰랐지.’
가짜 신마가 고려의 옛 법을 펼쳐내지 못하기에 그나마 다행이라고 있었는데 느닷없이 음양신마의 손에서 펼쳐졌을 때 얼마나 놀랐는지!
-푸헐! 잘 오셨소. 백지장도 맞들면 나은 법이라오.
갑자기 혜월의 목소리가 귓가를 스쳐 지났다.
역천자의 등장에 놀라 천기자와 함께 혜월을 찾았을 때 그가 웃으며 했던 말이었다.
쿵.
심장에 작은 파문이 일었다.
‘내가 너무 나 혼자서만 감당하려 했었구나.’
절대검신과 천기자와 혜월.
당시 하늘 아래 세 손가락에 꼽히는 절대자들이 머리를 맞대고 세운 계획이었음에도 이런 결과가 나왔는데 혼자서 모든 것을 감당하려 하다니!
‘내가 교만했었어.’
암전이 될 때 되더라도 머리를 맞대야만 한다.
‘되도록 극소수의 사람만 알 수 있도록 은밀히 접근하면 되겠지.’
아버지와 소림 그리고 무당파와 화산과 개방 정도?
‘그렇게만 접촉하자.’
스스슷.
용무린의 신형이 그대로 흩어졌다.
***
해시 초.
비룡문 내원 용무린의 처소.
창문을 활짝 열고 멍하니 밤하늘별을 바라보던 제갈영령의 볼을 타고 맑은 빛이 반짝였다. 뜨거운 눈물 한 방울이 흘러내린 것이다.
‘용 가가…….’
조연옥과 용설화와 함께 슬픔을 잊는 것도 낮 시간 동안에 해당하는 말이다.
이렇듯 밤이 찾아오면 언제고 다시 돌아오는 깊은 슬픔과 채워지지 않는 빈자리의 허전함은 제갈영령의 마음을 그리움으로 물들이곤 했다.
‘정녕 그렇게 가신 것인가요?’
믿어지지 않았다.
불사신공과 더불어 하늘같은 용무린의 무위를 누구보다도 더 잘 알고 있는 자신이 아니던가?
‘신마에 이어 음양신마까지 연거푸 나타났다고는 하지만 저는 그래도 믿어지지가 않아요, 용 가가.’
순천자인 그라면 아무리 역천자가 흉계를 꾸몄다 하더라도 능히 빠져 나올 수 있어야만 한다.
‘그래야만 하는데…….’
돌아오지 않는다니!
울컥.
참을 수 없는 슬픔에 가슴이 찢어질 것만 같다.
그런데,
출렁.
더는 울지 말라는 듯 뱃속에서 힘찬 발길질이 일었다.
배시시.
그제야 제갈영령의 얼굴에 미소가 되돌아왔다.
하지만 여전히 눈물을 흘리고 있어서 더욱 서글프게 보이는 미소였다.
“미안해 아가. 엄마가 주책이었네. 그렇지?”
제갈영령은 잽싸게 눈물을 훔쳐내곤 조심스레 아랫배를 감싸 안았다. 자신이 있으니 더는 슬퍼하지 말라는 듯 뱃속의 태아가 힘차게 발길질을 해댔다. 그래서 기뻤고 그래서 더욱 서글펐다.
“엄마가 전에도 말해 줬었지? 아빠가 어떤 분인지?”
애써 미소 지으며 제갈영령은 뱃속의 아이와 대화를 이어갔다. 눈물이 계속해서 흘러내리고 있어서 더욱 처연하게 보였다.
“아가. 아빠는 말이야, 모든 사람들이 우러러 보는 영웅이었단다. 무림의 역사에서 유일하게 무림왕에 황룡패주 그리고 무림맹주라고 불렸던 분이란다.”
지금도 제갈영령의 눈에는 용무린의 얼굴이 선했다.
강인함 속에 자상함이 깃든 눈, 사내답게 우뚝 솟은 콧날, 굵은 턱선, 그리고 폭 안겼을 때 느낄 수 있었던 넓고 따뜻한 가슴…….
사랑하는 그 얼굴을 두 번 다시 보지 못하며 그의 품에 다시는 안길 수 없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찢어지는 것만 같았다.
출렁. 출러-엉.
뱃속 아이가 신경질을 내었다.
더는 슬퍼하지 말라 외치는 듯해서 제갈영령은 얼른 눈물을 훔쳤다.
바로 그때였다.
스르르.
소리도 없이 문이 열리고 누군가 안으로 들어섰다.
“어머니세요……. 흡?!”
몸을 돌렸던 제갈영령의 몸이 그대로 굳었다.
부릅떠진 눈은 눈앞의 상대가 사라질 것이 두려워 차마 깜박이지도 못했다. 천천히 다가오는 사내의 얼굴을 그저 홀린 듯 바라볼 뿐이었다.
용무린이었다.
“흑! 흐흐흑…….”
제갈영령의 입에서 억눌린 울음이 터졌다.
그런 제갈영령을 가만히 감싸 안으며 용무린이 속삭였다.
“내가 조금 늦었지? 미안해 령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