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새로운 시작
한참이나 가슴을 얻어맞은 후에야 비로소 용무린은 제갈영령의 배에 손을 얹을 수 있었다.
힘찬 발길질!
이 벅찬 감동을 대체 무슨 말로 형언할 수 있을까?
아빠와의 만남이 기쁜 듯 이리저리 발차기를 하는 새 생명의 신비로움에 용무린의 가슴이 먹먹해졌다.
‘내 아들!’
아직 아들인지 딸인지 알 도리가 없다.
하지만 본능적인 앎이 있었다.
제갈영령의 뱃속에든 자신의 아이의 성별이 아들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하늘에 무지개가 뜨더니 한 마리의 거대한 황룡이 아랫배로 쑥 들어왔다고 하질 않던가?’
아들!
나 용무린의 대를 이을 아들!
용무린은 갑자기 속이 든든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식사를 하지 않았음에도 배가 불렀다.
운기행공을 한 것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일만 초식을 뿌릴 수 있을 만큼 기운이 넘쳤다.
더불어 세상 전부를 가진 듯 행복했다.
이 세상의 부귀와 영화 따위를 조금 움켜쥔 것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지극한 충만함이 나를 하나 가득 채워주고 있었다.
동시에 막중한 책임감이 느껴졌다.
음양신마고 지랄이고, 내가 터지고 베여 피를 말로 쏟는 한이 있다 하더라도 내 아들의 안전을 위해 반드시 놈을 없애 버리겠다는 맹세가 절로 나왔다.
‘그걸 이루기 전에…….’
감사 인사가 먼저다.
“고마워 령매. 정말 너무 고마워.”
“아니에요 가가. 제가 더 고마워요. 이렇게 무탈하게 돌아와 주셔서 얼마나 고마운지 몰라요.”
뜨거운 입맞춤이 이어졌다.
질투가 나는 것인지 뱃속의 아이가 요란하게 발차기를 했지만 입맞춤은 한참이나 더 이어졌다.
그 후에야 비로소 제대로 된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그동안 왜 연락조차 하지 못했는지, 어디서 무얼 하고 있었는지 밝혔다.
용무린이 달포간이나 차가운 동정호의 물속을 떠돌아다녔다는 말에 제갈영령은 가슴 한쪽이 아릿해지는 것을 느껴야만 했다.
불사신공이 사십오 일 동안이나 빨아들인 동정호의 냉기를 화장을 위해 지핀 장작불을 흡수해 겨우 음과 양의 균형을 맞추었다는 말에 다시 한 번 놀랐다.
세상에!
음양의 균형을 맞춘답시고 장작불의 화기를 몸으로 빨아들이다니! 그게 어디 사람의 몸으로 이룰 수 있는 경지란 말인가?
“하여간, 내 목숨을 구해 준 그 소년을 내가 아우로 삼았어. 성과 이름까지 지어줬지. 용준경이라고 말이야.”
고려의 유민인 고아 소년이 난데없이 시동생이 되었다는 말에도 제갈영령은 동요하지 않았다. 당연한 일이라는 듯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내 낭군을 구한 소년이야. 그보다 더한 것을 주어도 전혀 아깝지 않아.’
용대명과 조연옥 그리고 용설화라 하더라도 기꺼이 식구로 받아들일 것이다.
용무린의 목소리가 계속해서 이어졌다.
이차 신마대전의 와중에 백리소옥이 자신의 품에 안겨 떠났다는 소식을 전하며 그때 자신도 많이 분노했다는 말을 전했다.
끄덕끄덕.
제갈영령은 말없이 고개만 주억거렸다.
전생에 이어 현생까지 이어진 두 사람의 질긴 인연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고 두 번에 걸쳐 용무린의 품에 안겨 죽어간 백리소옥의 마음 역시 짐작이 갔기 때문이었다.
‘결국 두 사람은 내생에도 서로 만나게 되겠구나.’
굳이 콕 짚어 말은 하지 않았지만 용무린은 그날 백리소옥을 품에 안은 채 한 가지 다짐을 한 것 같았다.
‘다음 생……. 그날이 오면, 그때야말로 뜨겁게 그녀만을 사랑해주겠다고 맹세를 했을지도 몰라.’
여인의 직감이었다.
자신의 눈으로 직접 보거나 들은 것은 아니었지만 따뜻한 마음을 지닌 용무린이라면 어쩐지 그럴 것이라고 생각되어졌다.
‘나 역시 내생에도 용 가가를 원하는데 어쩌지?’
이제야 살짝 후회가 된다.
틀림없이 내생에는 자신이 백리소옥의 신세가 될 것만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냥 나를 언니라고 부르게 할 것을…….’
미리 그렇게 마음을 썼다면 내생에 입장이 뒤바뀌어 정실의 자리를 차지할 백리소옥 역시 자신에게 아량을 베풀어주지 않을까?
‘정실이 아닌 첩이어도 좋으니 제발 언니라고 부르게 해 달라고 하던 그 말의 의미를, 그 절절함을 이제야 알 것 같구나.’
제갈영령은 비로소 백리소옥과 주약란 그리고 양하린의 마음을 완벽히 이해할 수 있었다.
‘조금만 더 빨리 알았다면 좋았을 것을…….’
제갈영령의 마음 속 변화를 아는지 모르는지 용무린의 목소리는 계속해서 이어졌다.
자신이 몸을 회복한 후 세웠던 계획이 무엇인지, 또 어떻게 해야 역천자인 음양신마를 완벽하게 소멸시킬 가능성이 있는지에 대해서 밝혔다.
“솔직히 지금 당장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나도 잘 모르겠어. 이래도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고 저래도 마음에 걸리는 것이 생기고…….”
제갈영령에게 자문을 구했지만 그녀라고 뾰족한 수가 있을 리 없다.
“여러 어른들과 머리를 맞대는 게 좋겠어요.”
“그러는 것이 낫겠지?”
전생의 자신인 절대검신과 천기자와 혜월이 서로 머리를 맞대고 지혜를 모았듯 다시금 법정과 자운진인 그리고 옥진과 화운장로와 상의를 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아버지와 어머니를 먼저 뵈세요. 법정 대사님의 용태가 심각한 수준이긴 하지만 한두 시진 사이 어떻게 될 정도는 아니니까요. 어차피 지금 의성께서 시침을 하실 시간이라 방해를 할 수도 없어요.”
“그래. 알았어. 고마워 령매.”
머리를 맞대고 상의하는 것도 어차피 치료가 끝난 후에야 가능한 일이다.
쪽.
다시 한 번 살짝 입맞춤을 한 후 용무린은 소리도 없이 밖으로 나섰다.
***
오래지 않아 용무린은 부모님과 마주할 수 있었다.
조연옥의 반응은 제갈영령과 비슷했다.
터져 나오려는 울음을 억누르려는 듯 두 손으로 입을 막았고 뜨거운 눈물을 쏟았다.
“아들아!”
이내 두 팔을 활짝 펼쳤다.
용무린은 달려가 어린아이처럼 어머니의 품에 깊이 안길 수밖에 없었다.
“흐흐흑. 되었다. 되었어.”
뜨겁게 흐느끼며 조연옥은 용무린의 등을 연신 두들겼다. 쓸어내렸다.
놓으면 어디론가 사라질세라 한참을 그렇게 안고 있더니 이내 감정을 가라앉힌 후 용대명을 향해 돌려세웠다.
“믿고 기다리고 있었다, 내 아들아.”
용대명의 눈자위가 붉어졌다.
제갈영령을 보고 온 후이기 때문일까?
어엿이 한 아이의 아비로서 용대명과 조연옥의 마음을 더더욱 깊이 이해할 수 있게 된 용무린이었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아버지.”
“죄송하긴! 고초가 컸을 터인데, 가장 힘든 시간에 도움이 되지 못해 미안할 뿐이다.”
용무린을 잃었다는 생각에 그야말로 미친 듯이 음양신마에게 덤볐다.
죽음에 가까운 큰 부상을 입고 지금도 침대에 누워 있는 신세였지만 할 수만 있다면 자신의 목숨을 대신 내어주고서라도 용무린을 구하고 싶었다.
“어떻게 된 것이냐? 동정호의 물속으로 떨어지는 것을 내 눈으로 보았다만 그 뒤로는…….”
“말씀이야 다음에 나누어도 상관없습니다, 아버지. 지금은 아버지의 운공요상을 도와드리고 싶습니다.”
“아니야. 그보다 네 이야기가 더 궁금하구나.”
운공요상보다 용무린의 이야기를 더 듣고 싶은 모양이었다. 용대명은 자꾸 용무린을 채근했다.
“말 좀 해 보거라. 대체 어떻게 된 일이더냐?”
“그게…….”
별 수 없이 용무린은 제갈영령에게 했던 것과 똑같은 말을 반복해야만 했다.
계속되는 전투에 일어난 거친 파도.
그 파도에 실려 동정호의 차가운 물을 거슬러 올라 선도현 인근까지 이르기까지 걸린 시간이 무려 달포.
한 소년으로부터 구함을 받고 부족했던 양기를 흡수해 살아난 일과 전생으로부터 이어진 끈을 느껴 그 소년에게 용씨 성과 이름을 주어 동생으로 삼았다는 말까지 남김없이 밝혔다.
허락도 구하지 않은 채 용씨 성과 이름을 주었다는 말에도 용대명은 고개를 한 번 크게 끄덕여 보인 후 ‘허허허. 영특한 막내아들을 얻게 되었구나.’ 라고 했다.
조연옥도 같은 반응이었다.
따뜻한 미소로 용준경이라는 막내아들의 등장을 기꺼이 반겼다.
“용준경이라……. 너를 살려냈으니 그 아이가 이 어미를 살린 것과 같다. 하니, 이 어미 역시 지금부터 그 아이를 내 속으로 낳은 아들로 생각하겠다.”
솔직히 조금은 혼날 각오를 했었다.
그런데 이 정도로 흔쾌히 용준경을 가문의 직계로 받아들일 줄은 정말 몰랐다.
‘그만큼 나를 사랑하고 계신다는 뜻이겠지.’
세상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용무린의 목숨을 구했으니 그에 합당한 대접을 하는 것이다.
“아버지. 운공요상에 드시지요. 제가 돕겠습니다.”
“오냐, 해보자꾸나.”
용대명이 이를 악물고 고통을 참으며 몸을 일으켰다.
용무린이 부축해 가부좌를 틀고 앉도록 도와드린 후 그 뒤에 앉았다. 용대명의 명문혈에 가만히 두 손바닥을 가져다 대었다.
“아버지. 잊지 않으셨죠? 불사의 의지. 붙잡아야 할 것은 오직 하나 불사의 의지뿐입니다.”
“그것을 어찌 잊겠느냐? 염려하지 말거라.”
살포시 눈을 감은 용대명이 호흡을 가라앉혔다. 불사의 의지에 초점을 맞춘 후 불사신공의 구결에 따라 호흡을 이끌었다.
우우웅.
불사신기를 끌어 올리고 있던 용무린이 기다렸다는 듯 용대명의 명문혈에 밀어 넣었다.
‘일단은 조심스럽게.’
자신이 그러했듯 기경팔맥과 십이정경이 많이 상해 있다면 처음부터 세차게 돌릴 수 없다. 그러면 큰일 난다. 치료가 아니라 되레 죽는다.
그렇게 한 식경이 지났다.
살얼음판을 걷듯 조심스러운 일주천이 비로소 끝이 났다.
‘다행이다.’
놀랍게도 미약하긴 하지만 모든 혈들이 제대로 이어져 있었다.
‘의성께서 수고해주신 것이겠지.’
그것이 정답이었다.
‘이제는 거칠 것이 없다.’
간다. 강하게.
콰르르. 콰르르르.
용무린의 불사신기에 호응해 백회와 용천혈로 쏟아져 내린 불사신기가 난폭하게 굴었다.
예상했던 바였다.
용무린에게 그러했듯 자존심이 팍 상한 불사신기가 용대명의 몸을 싹 뜯어 고치는 작업에 돌입한 것이다.
더불어,
푸시싯.
보랏빛이 감도는 어두운 기운 한 줄기가 용대명의 몸에서 밀려나왔다. 지금껏 용대명의 명줄을 갉아 먹고 있던 불사마력의 찌꺼기였다.
‘이제 되었다.’
휘우웅. 후우우우웅.
용대명의 내부를 휘도는 불사신기가 완벽하게 제 할 일을 다 하는 것을 확인한 후에야 비로소 용무린은 손을 떼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법정 대사님께 다녀올게요.’
조연옥에게 심어를 보낸 후 소리도 없이 밖으로 나섰다.
***
뚝. 뚜욱.
의성 신우량의 이마를 타고 굵은 땀방울이 연신 흘러내리고 있었다.
한철로 만들어진 침과 황금으로 만들어진 침을 번갈아가며 시침하는 신우량의 눈은 곁에서 벼락이 떨어져도 흔들리지 않을 만큼 단단해 보였다.
푹. 푹. 푹.
두 가지 서로 다른 성격을 가진 침이 거침없이 법정의 전신에 꽂혀 갔다.
이름하여 무극 회혼 침술.
활생단과 더불어 의성 신우량의 이름을 하늘같은 반열에 올려놓게 된 침술로써 목숨만 붙어 있다면 반드시 살려낼 수 있다는 뜻에서 붙인 이름이었다.
‘음은 양으로, 양은 음으로 보완한다.’
한철로 만들어진 침은 차가운 성질을 지녔고 황금으로 만들어진 침은 따뜻한 양기를 지녔다.
더불어 여덟 가지로 구분되는 체질과 시침해야 하는 경락의 상성까지 살핀 후에야 비로소 시침을 하는 것이니 이 무극 회혼 침술의 힘이 아니었다면 소림의 대환단을 복용했다고 해도 이만큼 버틸 수는 없었을 것이다.
‘잘 버티고 계시기는 한데 근본적인 기력이 점차 약해져서 걱정이로구나.’
신우량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법정의 상세가 갈수록 나빠졌기 때문이었다.
평생 닦아 온 내공의 특별함 때문에 법정에게는 불사활생신단 대신 소림의 무가지보인 대환단이 쓰였다.
하지만 불사마력의 지독함은 대환단으로도 다 몰아낼 수 없었고 심검의 바람에 갈려나간 육체를 조금씩 아물게 하는 것이 전부였다.
그러니 보람도 없이 이렇듯 죽어가고 있는 것이다.
용대명도 그러했지만, 자신의 능력으로는 완전히 씻어낼 수 없는 불사마력의 찌꺼기가 문제였다. 계속해서 법정의 명을 갉아 먹었다.
‘체력이라도 조금만 더 승하다면 희망이 있겠는데 이렇게 점점 더 쇠약해져서야 어디 원…….’
신우량이 내심 고개를 흔들고 있을 때였다.
법정이 의성을 나무랐다.
“푸헐! 무얼 그리 애통해하시는 겐가? 생사일여, 늙은 땡중이 열반에 드는 게 무슨 대수라고! 쯧쯧쯧.”
“방장스님! 그래도…….”
안타까운 마음에 신우량이 몇 마디 말을 이으려 했지만 법정대사는 단호한 얼굴로 고개를 흔들었다.
“아까운 대환단을 이렇게 다 죽어가는 땡중에게 쓸 줄 알았다면 진즉 후기지수들에게 죄 퍼주고 말았을 것이야.”
자신이 죽어가는 것 따위 대수롭지 않다는 투여서 신우량은 그저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방장스님께서 자리를 털고 일어나셔야 그 망할 놈의 음양신마라는 악적을 때려 부숴버릴 수 있지 않겠습니까?”
“무슨 소리!”
죽어가는 사람답지 않게 법정의 목소리는 또렷했다.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매단 채 말을 이었다.
“역천자를 상대할 사람은 내가 아니야.”
“또 그 말씀이십니까? 후우. 저도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방장스님.”
벌써 몇 번이고 들었던 말이었는지 신우량이 긴 한숨과 함께 고개를 흔들었다.
“한숨은 개뿔!”
“……!”
“믿어 보시게. 순천자는 말 그대로 하늘의 뜻을 따르는 사람, 하늘의 뜻을 따르는 사람은 그렇게 쉽게 사그라지지 않는 법이야.”
“동정호의 차가운 물에 빠진 지 이미 백 일이나 지났습니다, 스님. 순천자가 아니라 그 어떤 초인이라 해도 이미 숨이 끊겼을 것이란 말입니다.”
뾰족한 신우량의 외침.
그 목소리에는 강한 부정만큼 순천자인 용무린이 살아 돌아왔으면 좋겠다는 간절한 바람이 실려 있었다.
그래서였을까?
스르륵.
소리도 없이 문이 열리고 두 사람이 불쑥 안으로 들었다.
“이것 보라지.”
법정의 시선이 그 중 한 사람에게로 향했다.
“푸흐흐. 다 부처님 뜻대로 되기에 순천자라고 하는 것이라니까?”
허파에 바람 빠지듯 새된 소리로 웃음을 터뜨리는 법정 앞으로 누군가가 다가섰다.
“어헉!”
의성 신우량의 눈이 부릅떠졌다.
뒤이어 뿌연 습막이 번졌다. 그 서슬에 상대의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다.
“저, 정녕 소가주시오?”
똑똑히 확인을 해보아야겠다는 듯 연신 눈을 비빈 후 부릅뜨는 의성이었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염려 덕분에 잘 다녀왔습니다.”
“소가주!”
와락!
걱정을 시켜 미안하다는 듯 겸연쩍게 웃어 보이는 용무린의 손을 의성 신우량이 움켜잡았다. 핏발 선 그의 눈에 눈물이 글썽였다.
“허허허. 선재, 선재라…….”
여전히 바람 빠진 소리로 법정이 웃었다.
그 모습이 너무나 희망적이어서 함께 들어온 일각이 함박웃음을 지어보일 수밖에 없었다.
***
이번에도 용무린이 법정의 운공요상을 도왔다.
용대명이 그러했던 것처럼 법정의 기경팔맥과 십이정경은 예상보다 상태가 훨씬 더 좋았다.
‘이것이 바로 대환단의 힘인가?’
불사활생신단과는 사뭇 다르지만 실로 범상치 않은 힘의 흔적이 모든 경혈에서 느껴졌다.
‘크흠. 역시 불사마력!’
대환단의 약력에 의성의 침술이 더해졌음에도 아직 음양신마가 뿜어낸 불사마력은 끈질기게 남아 법정의 명을 갉아 먹고 괴롭히는 중이었다.
불사신공과 규천마력이 무극으로 하나가 된 힘인 만큼 확실히 지독했다.
‘그래도 이젠 괜찮아.’
아버지를 치료함으로 이미 증명했다.
‘내가 있으니까.’
놈의 힘이 무극이라면 내 힘 역시 무극이다.
더군다나 법정에게는 불사항마력이 있질 않은가? 그깟 찌꺼기 따위 단숨에 씻어낼 수 있다.
“불사항마력이라 외치는 것을 들었습니다, 스님.”
“푸흐흐. 맞아. 그것이 바로 소림에서 준비한 회심의 한 수였어.”
천기자가 역천자의 탄생을 늦추며 양의신공을 준비해 용무린에게 디딤돌을 제공했다면 소림은 불사항마력과 불사항마승을 준비해 놈의 탄생 이후를 대비했다.
그 결과가 용무린의 생존으로 이어졌다.
용무린의 불사대천검에 힘을 보태 음양신마에게 치명적인 일격을 먹여 놓기까지 했다.
놈 역시 몸을 완전히 치유하고 일어나기까지 상당한 시간이 소요될 터, 어쩌면 천기자가 벌어 놓았던 것 이상의 소중한 시간을 번 셈이다.
“불사항마력이 제 불사신공과 무엇이 얼마나 다른지 모르겠으나 핵심만큼은 같을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인고?”
“불사의 의지!”
“헐헐헐. 같으면서도 조금 다르구나.”
“무엇이 같고 무엇이 다릅니까?”
법정의 입가에 어린아이 같은 미소가 걸렸다.
“윤회의 사슬을 끊어내야 할 땡중이 불사를 꿈꾸어 무엇 하겠는가?”
“……?!”
“받기는 불사의 의지로 받았으되 그것은 이미 꺾이지 않는 부처님의 자비로 치환되었네.”
꺾이지 않는 자비심!
‘뭐, 상관없겠지.’
부처를 더하든 빼든 바탕에 깔린 것은 불사의 의지!
아무리 구결을 바꾸어도 그것은 변함없는 거다.
“꺾이지 않는 자비심에 의식의 초점을 맞추십시오. 나머지는 제 불사의 의지가 메꿉니다.”
“허허허. 선재, 선재라…….”
법정의 눈이 편안히 감겼다.
후우웅.
부드럽게 끌어 올려진 불사신기가 명문혈을 통해 법정의 몸으로 스며들었다.
조심스러운 일주천!
활짝 열린 백회혈과 용천혈을 통해 쏟아져 들어온 대자연의 기운은 용무린의 불사신기와 하나로 융합되어 단전으로 흘러들어가 불사항마력으로 치환되었다.
푸스스.
대환단에 무극회혼침술을 펼쳤음에도 끈질기게 남아 있던 불사마력이 보랏빛이 섞인 검은 안개로 밀려나와 사라지기 시작했다.
***
사흘 후 야반삼경, 비룡문 내원 중심의 가주전.
용무린을 중심으로 용대명, 법정, 자운, 옥진, 화운까지 모두 한 자리에 모였다.
외부는 사대금강의 한 사람인 일각과 무당칠협의 하나인 자성도장이 지키고 섰다. 누구도 접근할 수 없도록 철저히 차단하는 중이었다.
뭐 그래도 알 사람은 안다.
용무린이 무사히 복귀했다는 사실을 말이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자신을 구하기 위해 중상을 입고 죽어가는 불사항마승들을 내버려둘 수 없었고 비룡문의 식솔들 역시 살릴 수 있는 사람들은 살려야 했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그들은 내 복귀를 함구해 줄 거야.’
사경을 헤매던 부상자들의 급격한 회복에 시선이 쏠리겠지만 그 이름 높은 소림의 대환단과 의성의 명성에 불사활생신단을 내세우면 누구도 이들의 빠른 회복을 믿어 의심하지 않을 것이다.
외부에 말소리가 새어 나갈세라 모든 고수가 내공을 일으켜 주변을 차단한 상태다. 그제야 안심한 듯 화운이 타박부터 했다.
“고얀 놈!”
“늦어서 죄송합니다, 태상장로님.”
“이제는 아예 대놓고 나는 뒷전으로 미룬다, 이거지? 어!”
본의 아니게 또 화운을 맨 마지막에 찾았다.
상황의 급함을 알지만 그게 또 묘하게 서운해 저렇듯 한 소리를 하는 거다.
“다음에 저와 함께 백주 열 동이. 어때요?”
“약속하는 거냐?”
“당연하죠.”
“푸흐흐. 좋아. 까짓 것 용서해준다.”
함께 백주를 마시자는 말에야 비로소 화운이 마음을 풀었다.
용무린의 목소리가 천천히 이어졌다.
다행히 기연이 있어 내, 외상을 모두 치유할 수 있었다는 말로 자신의 일은 적당히 감추고 음양신마의 정체에 대해 처음부터 끝까지 털어 놓았다.
역천자 음양신마의 탄생비화.
모두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마음만 먹으면 누구의 몸에게나 깃들 수 있는 환혼대법의 무서움과 함께 용무린을 짓누르던 마음의 무게를 나눠 짊어졌다.
“……그래서 나름대로 그렇게 우선순위를 정해봤습니다.”
자신이 암전이 되어야 하는 이유와 당위성.
“허어!”
“그럴 수가!”
배교의 교주인 음양신마 해무광이라는 역천자가 환혼대법을 통해 입맛에 맞는 사람에게 옮겨갈 능력이 있다는 증언에 모두가 경악했다.
환혼대법이라니!
세상에, 아무리 온갖 사이한 술법에 능한 배교의 전설이라지만 그런 게 가능할 줄은 정말 몰랐다.
“맹주님이 말씀하신 교토삼굴 부분, 그 대상이 누구인지 찾아야 하는 고민에 대해 충분히 공감이 갑니다.”
“나 역시 동감이외다.”
자운진인의 말에 화운이 동감을 표했다.
이번에는 용대명이 나섰다.
“놈을 완전히 소멸시킬 방법을 찾는 것도 문제입니다. 마음만 먹으면 누구에게든 옮겨갈 수 있는 괴물을 대체 어떻게 혼백과 영혼까지 한꺼번에 소멸시킬 수 있을지 너무 걱정입니다.”
모두의 시선이 용무린에게로 쏠렸다.
신마를 당당히 거꾸러뜨린 용무린을 제외하면 누구도 답을 할 수 없는 문제였기 때문이다.
‘소림의 불문내공으로도 힘들어.’
‘법정을 포함해 불사항마승 오백여 명이 한꺼번에 힘을 썼음에도 놈을 죽일 수 없었잖아. 쉬이 회복할 수 없는 부상을 입혔다지만 그것이 전부였다고.’
다행히 용무린에게서 희망적인 답이 나왔다.
“자신할 수 없습니다만, 제가 익히고 있는 무공을 대성하면 길이 보일 듯도 싶습니다.”
“오오!”
“이런 반가울 데가 있나?”
함께 기뻐해주기는 했지만 절대로 쉽지 않은 문제라는 것을 모두가 알고 있었다.
무공의 대성이라니!
절대검신 독고황이 역천자에게 고려의 옛 법을 빼앗긴 후 그것을 넘어서기 위해 모든 것을 다 바쳐 이뤄낸 것이 바로 불사대천검이다.
‘평생을 노력해도 이루기 어려울지 몰라.’
‘아무리 천재라고 해도 일조일석에 이룰 수 없음이야.’
그것이 현실이었다.
게다가 엎친 데 덮친 격이라고 해야 할까?
감숙의 전장이 현재 난리였다.
생각지도 못했던 북원의 침공, 그 숫자가 무려 삼십만 명에 육박한다고 한다.
총병관이 즉시 나섰지만 그럼에도 밀리는 상태.
현재 감숙의 성도인 난주가 함락 직전이라고 하니 자칫 잘못하다가는 파죽지세로 밀려 섬서성과 산서성이 함락되고 하북성에 이어 북경까지의 길이 뻥 뚫려 버릴 수도 있는 일이었다.
무림이고 뭣이고 나라가 무너질 수도 있는 위기상황!
북원의 무리가 무림을 접수하는 무참한 상황을 피하기 위해서는 힘을 보태야만 했다.
하지만 이차 신마대전으로 인해 무림은 이미 많은 피해를 입은 상태가 아니던가?
힘을 보태려면 소수의 고수를 파견해야만 할 텐데 소수정예를 파견하면 호남성 인근에서 감히 황제를 참칭한 음양신마와 마교의 무리들을 상대할 힘이 부족하게 된다.
게다가 총병관인 양문광을 넘어선다는 적장 조로스 칸의 무위를 생각하면 감숙에 파견하는 고수는 최소한 총병관인 양문광을 넘어서야 하지 않겠는가?
현재 그럴 수 있는 사람은 용무린 자신밖에 없었다.
바로 그 점이 용무린의 고민이었던 거다.
진퇴양난.
감숙으로 먼저 달려가자니 혹여 역천자인 음양신마가 진격했을 때 놈을 상대할 수 있을 만한 고수가 없다는 것이 문제였고, 그렇다고 이곳에 있자니 지켜야 할 대지가 무너질 판이었다.
“먼저 우선순위부터 결정해야 할 듯하네.”
모두의 시선이 소림방장 법정에게로 향했다.
어린아이와 비슷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법정은 가벼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말 그대로일세. 진퇴양난이긴 하나 결국 어느 한 편에 힘을 더 실어줘야 하지 않겠는가?”
“그렇긴 하지요.”
용대명의 묵직한 대답에 법정은 대뜸 결론을 내렸다.
“감숙으로 가시게, 맹주.”
“예? 감숙으로요?”
“그래. 마교와의 싸움이 중하다 하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무림에 국한된 일 아니겠는가?”
감숙에서 벌어지는 일은 다르다는 뜻.
“나라 전체와 모든 양민들의 삶에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남기고 무소불위의 영향력을 행사할 것이네. 나라를 잃는다는 것은 그런 것이야.”
나라를 잃는 슬픔을 누구보다 용무린이 더 잘 안다.
절대검신으로 살고 있을 때 선계로 떠날 생각을 했던 이유가 바로 고려의 멸망 때문이었으니까.
‘하지만…….’
용무린은 쉬이 대답할 수 없었다.
제갈영령의 뱃속에 자신의 아이가 자라나고 있는 이상 비룡문과 정파연합이 역천자의 손에 위험에 빠지는 모습을 볼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면 역천자는 누가 있어서…….”
“맹주가 늦지 않게 손을 써 준 덕에 다행히 내가 기력을 되찾았고 불사항마승도 아직 절반이 남았으며 무당의 자운도 건재하고 화산장문 옥진도장의 검향은 더더욱 짙어졌네. 거기에 더해 용대명 문주께서도 전에 비해 눈빛이 훨씬 더 강해졌는데 무얼 그리 두려워하는가?”
“……!”
용무린은 차마 법정의 낯을 깎아 내리지 못했다.
불사대천검에 한참동안이나 괴롭힘을 당하던 음양신마의 손에 법정을 포함한 오백여 명의 불사항마승이 별반 힘도 쓰지 못하고 쓸려나가던 장면이 아직도 선했다.
그런 마음을 느낀 것일까?
법정이 쓴웃음을 터뜨리며 용무린을 나무랐다.
“푸헐, 맹주께서는 지금 여기 모인 우리가 모두 시체로 보이시는 겐가?”
“그, 그런 것은 아닙니다만…….”
뜨끔한 나머지 말을 더 이어내려는 것을 법정이 냉정하게 잘랐다.
“되었네.”
“……!”
“잊지 마시게 맹주. 상대는 역천자인 음양신마와 마교의 마인들이네. 아끼는 마음만 생각한다면 누구도 죽거나 다치는 일이 없게 하고 싶겠지만 피해는 나올 수밖에 없는 법, 맹주 홀로 모든 것을 다 감당할 수는 없음이야.”
유구무언이었다.
법정과 같은 마음이었는지 빙그레 웃어 보이던 자운진인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나라를 지켜야 무림도 지켜지는 것이외다, 맹주.”
“……!”
“또한 역천자 역시 정상이 아닐 것이란 점을 잊으면 아니 될 것이오.”
“아! 맞다! 그렇지!”
그제야 용무린의 얼굴이 확 밝아졌다.
하도 역천자의 말도 안 되는 능력에만 집중을 하다 보니 그걸 깜박 잊고 있었던 것이다.
‘그 사실을 대체 왜 잊고 있었지?’
환혼대법이란 술법이 놀라운 것이기는 하지만 현재 놈이 깃들어 있는 육체에는 한계가 있다.
‘나와 싸우며 스며든 불사신기에 법정스님과 불사항마승이 쏟아낸 불사항마력, 거기에 더해 아버지의 불사신기까지 깃들었을 테니…….’
그제야 얼추 답이 나온다.
현재 놈은 절대로 쉽게 움직일 수 없다.
‘마음 같아서는 지금 당장에라도 쳐들어가서 놈의 목을 베어 버리고 싶은데…….’
교토삼굴.
놈이 어느 누구에게 수작을 부려 몸을 갈아탈 준비를 해 두었는지 모른다는 것이 문제였다.
‘지금 놈을 죽이는 것은 되레 놈을 더 깊이 숨도록 만들 뿐이야.’
놈의 실체가 사람을 건너고 건너 짐작조차 힘든 지인이나 내 가족 중 누군가에게 깃든다고 생각해보라.
상상만 해도 끔직한 일이다.
‘음양신마 놈을 잡기 위해서는 반드시라고 해도 좋을 만큼 놈이 몸을 갈아탈 대상부터 발본색원한 후 해치워버려야만 해.’
환혼대법이 아무리 대단하다고 해도 밥 먹듯 간단히 되는 일은 아닐 터, 그 대상부터 해치운 후 놈을 잡아 소멸시켜야 한다.
‘그래. 마교와는 일단 이렇게 현상 유지만이라도 하면서 버티고 있자.’
그렇게 우선순위에 대한 고민이 끝나자 그동안 용무린의 골머리를 아프게 만들었던 모든 것들이 한꺼번에 풀려 사라졌다.
더불어 용무린의 머릿속에 한 가지 장면이 떠올랐다.
“놈이 몸을 회복하는 시간을 단축하려 들 것입니다.”
백주로 위장한 운룡표국의 상행 항아리에 자시 생 동남동녀가 들어 있었던 일이었다.
“이번에도 역시 애꿎은 동남동녀들의 정혈로 몸을 회복하려 들 가능성이 큽니다.”
“이런 육시할 놈을 봤나? 그런 천인공노할 짓거리를 또 벌인단 말이야?”
노기가 치솟은 화운이 고함을 버럭 질렀다.
언제 푸근했는가 싶게 날카로워진 법정과 자운진인 역시 노성을 터뜨렸다.
“도저히 상종 못 할 악적이로고!”
“역시 이 세상에서 반드시 지워버려야 할 족속임에 틀림없습니다.”
거기까지 짐작한 이상 가만히 있을 수가 없다.
모두가 머리를 맞대고 지혜를 모았다. 적지인 호남성과 강서, 복건성 등지에서 벌어질 자시 생 동남동녀의 납치를 막을 방법을 찾았다.
***
어느새 동쪽 하늘에 푸름이 번져왔다.
완벽하다고는 볼 수 없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 가능한 방법을 마련한 용무린은 감숙을 향해 떠났다.
‘이곳은 우리에게 맡겨라.’
‘염려하지 말거라. 네가 돌아올 때까지 무슨 수를 쓰던지 간에 비룡문을 지키도록 하마.’
먼 길을 떠난 용무린을 대신해서 지금부터는 남겨진 사람들이 바쁘게 움직여야 할 때였다.
떠오르는 태양과 함께 모두의 얼굴이 밝아졌다.
어젯밤까지만 해도 죽음에 한 발을 디뎠다고 알려진 법정이 전보다 더 강건해진 얼굴로 나타났고 불사항마승 또한 마찬가지였기 때문이었다.
대환단과 의성.
혹자는 비룡문에서 의성과 함께 만들어 놓은 불사활생신단이 효력을 발휘했을 것이라는 의견도 내놓긴 했으나 정확한 실상을 아는 사람은 그들 중 누구도 없었다.
용무린은 한 마리 새처럼 허공에 흰 선을 그리며 북쪽을 향해 나아갔다.
‘조로스 칸이라고 했지?’
조금만 기다려라. 내가 곧 박살을 내준다.
함께 해서 좋은 길
1
자금성의 아침이 밝았다.
문무백관이 동쪽 하늘에 푸름이 번질 때부터 부지런히 입궐한 후 아침 조회를 준비하고 있었지만 황제는 침전을 벗어나지 않았다.
“……!”
굳은 듯 앉아 있는 황제의 눈에 핏발이 곤두서 있었다.
뜬 눈으로 날을 샌 것이다.
“폐하!”
함께 날을 샌 장인태감이 일어나야 함을 알렸다.
“이제는 그만 조회와 시사를 보러 대전에 나가셔야 할 때이옵니다.”
조회 후 문무백관으로부터 정치에 대한 이야기를 듣는 것이 바로 시사였다. 당연히 현재 중요하다 여겨지는 사안들을 다루게 되고 감숙의 전황은 항상 다뤄지는 주제였다.
‘오늘은 결정을 해야 할 터인데…….’
삼공과 삼고를 비롯한 문무백관이 벼르고 있을 것이다.
나라가 풍전등화의 위기에 처해 있으니 주약란 옹주 하나를 희생해 어서 위기에서 벗어나라 주장하리라.
“감숙에서의 희소식은 아직 없는가?”
솔직히 기적을 바라는 것이었다.
천기를 내다볼 줄 알고 도력이 드높아 동남풍을 빌 정도의 제갈공명도 결국 천하통일을 이루지 못하고 스러지는 것이 바로 전쟁이었다.
“송구하옵니다, 폐하. 난주성에 고립되었던 총병관 일행을 제갈문군 군사가 봉화와 소달구지에 싣고 간 허수아비로 대병력인 것처럼 속여 구해낸 후 전선을 뒤로 물려 재정비를 하고 있다는 소식이 끝이었습니다.”
제갈문군과 함께한 병력은 불과 일만!
그 정도 병력으로 총병관을 구해낸 것만으로도 솔직히 기적이나 다름이 없는 일이다.
“좋아! 그렇다면 재정비 후 일전을 통해 빼앗긴 땅을 다시 수복할 수도 있겠지.”
제갈문군이 합류한 후 아직 제대로 된 일전을 치러보지 않았으니 그것을 빌미로 조금 더 버텨볼 생각이었다.
“가자!”
“녜이-.”
그렇게 기세 등등 태화전으로 나아갔건만 예상과는 전혀 다른 일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조로스 칸에 버금간다고 하는 명장 쿠쿠티무르가 군사들을 움직여 섬서성 북부의 땅과 산서성 북부의 땅도 야금야금 먹어 들어오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야말로 충격적인 소식의 연속이었다.
화친을 주장하던 삼공과 삼고 이하 문무백관들은 더더욱 요란법석을 떨었다.
“정말 큰일이옵니다, 폐하.”
“북원의 무도한 무리들이 동시다발적인 공세를 취하기 시작했사옵니다.”
“그 말은 곧 감숙에 이어 대대적인 침공을 해올 수도 있다는 뜻입니다.”
“어서 하루라도 빨리 감숙을 안정시켜 놓아야만 합니다, 폐하.”
“그래야만 섬서성과 산서성의 전장 역시 안정적인 상태로 잠잠해질 것이옵니다.”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폐하.”
“주약란 옹주와의 혼약을 통한 화친을 명분으로 조로스 칸을 부마도위로 삼으시어 지금까지 점령한 지역을 봉토로 하사하소서.”
“땅을 빼앗기는 것이 아니라 부마도위에게 하사하는 것이니 지키는 일이 되옵고 섬서성과 산서성까지 안정시킬 수 있으며 다시 칼끝을 호남의 사특한 사교 무리들에게 돌릴 수 있으니 일석삼조의 대계이옵니다, 폐하.”
삼공과 삼고는 물론이고 문무백관이 벌떼처럼 들고 일어나 떠들었다.
‘어쩔 수 없는 것인가?’
용무린과의 혼약을 생각해 버티고 버텼건만 이제는 정말 한계였다.
섬서성과 산서성에서까지 밀고 내려온다면 달포 남짓한 시간 안에 이 나라가 끝장이 날 수도 있는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화, 화친을…….”
황제의 입이 더듬거리며 열렸다.
바라마지않던 순간이었는지 모두가 눈을 동그랗게 뜬 채 황제의 목소리에 주의를 기울였다.
“허(許) 하노라!”
되었다. 올 것이 온 것이다.
“현명하신 판단이옵니다, 폐하”
“어서 교지를 내리시오소서.”
“화급을 다루는 일이오니 조로스 칸과의 화친을 알리는 파발과 전서부터 보내야 할 것이옵니다.”
황제의 입에서 화친을 허한다는 말이 나오기가 무서웠다.
일사천리로 일이 진행되었다.
장인태감의 명을 받은 상보감의 태감이 내명부 여관(女官) 깊은 곳에서 옥새를 꺼내어 왔고 이미 삼공과 삼고가 함께 머리를 맞대고 작성해 둔 치욕적인 화친 요청 문서를 황제에게 내밀었다.
“……!”
문서를 쭉 읽어 내려가던 황제는 기가 막혔다.
점잖은 문장으로 점철되어 있기는 하지만 결국 주약란 옹주를 노리개로 바치고 지금까지 빼앗긴 땅도 인정해 줄 터이니 이제 그만 좀 해달라는 구걸이었기 때문이었다.
‘허어, 내가 고작 이런 치욕을 보려고 버티고 또 버틴 것이었던가?’
자괴감이 들었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쿵!
옥새가 찍히고 화친 요청 문서는 붉은 색의 밀랍으로 봉인이 되어 머나먼 길을 떠났다. 물론 그 전에 비응의 발목에 매어 전서가 먼저 날았다.
콰두두두.
황제의 깃발을 높이 세운 열 명의 기수가 감숙을 향해 정신없이 내달렸다. 화급을 요하는 일이니 역관에 들러 말을 바꿀 때나 숨을 돌릴 수 있으리라.
‘미안하다, 약란아. 할 수 있는 데까지 버텼지만, 이젠 나도 어쩔 수가 없구나.’
만금상단에서 돌아왔을 때, 진심으로 고마워하던 주약란의 얼굴이 떠올랐다.
‘너만은…….’
지금까지 보아왔던 그 누구와도 다른 사내였다며 눈을 빛내던 주약란의 모습이 잊히지가 않았다.
‘너만은 황가의 여인이란 숙명에서 벗어나게 만들어주고 싶었는데…….’
해동청이 오가는 시간이 닷새 어림, 조로스 칸이 북원의 대칸에게 허락을 받아 화친을 수락한다면 주약란은 즉시 떠나야 한다.
***
용무린이 비룡문에 들러 용대명과 법정을 비롯한 무인들의 목숨을 구해내고 있을 무렵, 자금성에는 고대하고 고대하던 조로스 칸의 회신이 도착했다.
-명 황제의 성덕을 받아들여 주약란 옹주와의 혼인을 통해 양국의 우의를 돈독히 할 생각입니다. 더불어 하사받은 감숙의 봉토는 북원과 명 사이의 완충지대로써 언제나 평화로운 대지가 될 것입니다.
조로스 칸 배상.
당당하기만 한 회신.
문장이야 정중했지만, 사실은 ‘최고급 노리개를 줘서 고마워. 빼앗은 땅에서 잘 먹고 잘 놀아 볼게.’ 라는 말에 다름 아니다.
울컥.
황제는 피가 거꾸로 치솟는 것을 느껴야만 했다.
사랑하는 여동생 주약란 옹주를 정실도 아닌 첩으로 보내는 것도 모자라 감숙의 땅까지 울며 겨자 먹기로 하사해야 하는 신세라니?!
하지만 어쩌랴?
그렇게라도 하지 않았다가는 전면전에 휘말려 나라가 송두리째 넘어갈 수도 있는 것을…….
‘반드시 되갚아 준다. 반드시.’
화친을 통해 시간을 벌었다.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호남성의 사교 무리들을 몰아낸 후 강군으로 조련한다.
‘그래서 반드시 억울하게 봉토로 하사한 감숙을 되찾고 북원의 대칸의 목까지 따 주리라.’
마음이야 그랬지만 과연 가능할까 싶다.
믿고 있었던 총병관마저 조로스 칸에게 밀려 난주를 빼앗기는 형편이었기 때문이다.
‘후우. 그래도 제갈문군 총사가 합류했으니 앞으로는 뭔가 좀 달라지겠지.’
그렇게 믿었다.
아니, 꼭 그렇게 될 것이다.
***
화친 소식은 바람결에 실려 주약란의 귀에까지 들렸다.
“결국 그렇게 되었는가?”
주약란의 시선이 창밖으로 향했다.
화창한 봄 햇살 아래 온갖 꽃들이 피어 있고 그 사이 새들이 지저귀고 있었는데 그 무심한 아름다움이 주약란의 가슴을 잔인하게 후벼 파고 있었다.
“사모하는 영웅의 품에 안기는 꿈을 꾸어 보기라도 하였으니…… 그나마 추억할 거리라도 있어 다행이라 할 수 있는 것인가?”
체념한 듯 읊조리는 목소리가 어찌나 처연하던지!
“흐흑. 옹주마마…….”
“옹주마마!”
고락을 함께 하던 시비들이 무릎을 꿇고 오열을 했다.
하지만 변하는 것은 없다.
나라를 위한다는 명분에 황제마저 뜻을 꺾었으니 자신의 운명은 그것으로 결정이 된 것이다.
‘너희들의 고초도 크겠구나.’
주약란은 되레 시비들을 안쓰러워했다.
주인을 잘못 만난 덕에 이들 역시 조로스 칸이 있는 곳으로 끌려가야 하기 때문이었다.
“미안하구나. 너희를 궁 밖으로 내보내고 싶어도 내 힘으로는 어렵다. 내가 원한 일은 아니었으니 나를 너무 원망하지는 말아주었으면 한다.”
“아, 아닙니다, 옹주마마.”
“저희는 그저 옹주마마께오서 너무 가여워서…….”
그렇게 서로를 위하며 슬픔을 달래는 사이 주약란이 궁을 떠나야 할 시간이 다가왔다.
가장 먼저 어림군들이 몰려와 호위를 시작했고 시비들을 앞세워 원행준비에 필요한 물품들을 챙겼으며 혼례에 필요한 화려한 옷가지 따위를 골랐다.
“……!”
주약란은 그저 멍한 얼굴로 지켜보기만 했다.
자신의 의지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일들이 척척 잘도 이뤄지는 것을 보자니 갑자기 언젠가 용무린이 자신에게 했던 말이 떠올랐다.
-그런 기다림이 과연 행복하겠소?
‘여인의 투기란 사내를 망치는 법이니 기다릴 것이란 내 말에 그리 말씀하셨지.’
그 뒤로 이어진 말.
당당한 그 목소리가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
-열 여인 마다하는 사내는 없다 하나 나는 다르오. 나는 다 필요 없소. 오직 한 여인만을 원할 뿐이오.
어찌나 가슴이 뛰던지!
‘그 한 여인이 나였다면, 그랬다면 얼마나 좋을까?’
많은 밤을 그 여인이 나라는 상상을 하며 지새웠다.
양하린이 당당히 선포했듯 언젠가는 한 사내에게만 보여야 하는 모든 것을 보았으니 나 역시 책임을 져야 한다고 외치려 했었다.
“어명이오!”
하지만 이젠 다 틀렸다.
나라를 구할 일념에 삼공의 하나인 태사가 달려와 어명을 알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여, 주약란 옹주의 조로스 칸과의 혼사를 기쁜 마음으로 허락 하노라!”
하마터면 웃음이 터질 뻔했다.
조로스 칸과의 혼사를 기쁜 마음으로 허락하겠다니.
‘북원의 악적과 혼인을 올리고 싶다고 내가 언제 애원한 일이라도 있었던가?’
한 마음으로 원했던 사내는 용무린이다.
그 외의 어떤 사내도 눈에 차지 않고 바라지도 않으며 사모하지도 않는다.
그러나…….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황가의 여인이 지닌 숙명이란 것이 늘 그러하지 않던가?
정략임에 분명하지만 나라를 위해,
“기쁜 마음으로 나아가 황명을 받들겠나이다.”
얌전히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글썽.
뜨거운 눈물이 차오르는 것을 주약란은 이를 악물고 참았다. 환영처럼 다가온 가마에 몸을 실었다.
“출바-알!”
“쉬이! 물렀거라! 옹주마마 행차시다-아!”
주약란은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감숙으로의 길을 그렇게 떠나갔다.
***
정파 무림이 모처럼 만에 활기를 띠었다.
비룡문과 소림, 무당, 화산, 개방의 주도로 모종의 계획이 진행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동남동녀들의 이동을 막아라.
목표는 음양신마가 둥지를 틀고 있다고 알려진 호남 성도 장사의 차단.
과거와는 달리 관이나 군의 힘을 빌려 쓸 수 없는 처지이니 가장 큰 조직력과 연락망을 가진 개방과 하오문을 도와 각 문파의 고수들이 유기적으로 움직여야만 했다.
“조심해야 할 점은 예전과는 달리 일부 관이나 군이 적이 될 수 있다는 점이야.”
“음양신마 놈이 이미 황제를 참칭하고 전군도독부 예하의 관이나 군이 놈에게 충성을 맹세한 이상 마교도 외의 무림인들을 겁박할 가능성마저 있어.”
“물론 전부 그렇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해. 마교도 외에도 중립을 표방하는 문파들의 수는 많고 많으니까.”
“그 많은 숫자의 문파들이 마교도가 아니라는 이유로 겁박을 받는다면 내부의 적이 될 테니 아마 적당한 선에서 물러서기가 쉬워.”
호남, 강서, 복건성 등지로 파견될 정파 무림의 고수들에게 똑같은 주의를 주고 세심하게 대비를 시켜 은밀하게 파견했다.
놈들이 어떻게 동남동녀를 모아 이동시키려 할 것인지 아무도 모른다.
하지만 이미 한 번 경험이 있다.
용무린과 함께 꽤 쓸 만한 작전도 짜 두었다.
계획대로만 된다면 못해도 음양신마의 회복하는 시간을 늦추는 것 정도는 충분히 할 수 있을 것이다.
***
그 순간 용무린은 섬서성을 가로질러 감숙의 경계를 넘었다. 과거, 혈교의 일로 한 번 방문했던 경험 덕에 훨씬 시간을 단축할 수 있었다.
‘후우. 저 앞이 서화현인가?’
감숙성의 관문과도 같은 현이어서 그런지 유달리 현이 크고 시전이나 상가들이 발전해 있던 곳으로 기억된다.
‘육포도 떨어졌으니 제대로 된 식사 한 끼 하고 재정비를 한 후 다시 가야겠다.’
그런 생각에 용무린은 신법을 멈추고 서화현으로 들었다.
예전에 자신이 들렀던 객잔을 찾아 시전을 가로질러 상가 중심부로 나갔다.
그런데…….
“응? 뭐지?”
용무린의 눈에 범상치 않은 깃발이 들어왔다.
황명으로 움직이고 있음을 알리는 황룡기와 황족의 동행을 알리는 자색 주작기 그리고 어림군임을 나타내는 은색 검과 창의 깃발까지 연이어 나부끼고 있었다.
꿈틀.
용무린의 눈매가 사납게 일그러졌다.
“지금 때가 어느 땐데……. 어떤 정신 나간 황족이 여기까지 유람을 나온 거야?”
북원과의 전쟁이 악화 일로를 걷고 있는 와중에 이 먼 곳까지 유람 나올 생각을 하다니 어지간히 정신이 없는 인간이라 생각되었다.
홍무제나 영락제가 아닌 바에야 스스로 전장을 찾아 올 황족은 없는 법이었으니까.
‘버르장머릴 고쳐줄까?’
고민하며 객잔 앞으로 다가가는 순간이었다.
식사를 다 마쳤는지 객잔의 문이 활짝 열리고 일단의 무리가 밖으로 나섰다.
“응?”
용무린의 눈이 부릅떠졌다.
생각지도 못했던 얼굴이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2
선황제의 고명딸이자 현 황제의 막내 여동생.
주약란.
자신을 어여삐 여긴 황제가 막무가내로 혼사를 추진하려 했던 바로 그 여인이었다.
‘그녀가 왜 여기에?’
마교와의 신마대전을 염려한 황제의 명에 의해 그녀가 자금성으로 돌아갔다는 소식은 들었다.
하지만 화운장로나 개방으로부터 그녀가 이곳에 나타난 일에 대한 어떠한 이야기도 듣지 못했다.
자금성에 있어야 할 그녀가 대체 왜 이 먼 감숙 땅에까지 오게 된 것일까?
‘황족의 여인답게 사려와 심계가 깊은 여인이 아무런 이유도 없이 이곳에 올 이유가 없는데?’
그렇듯 궁금해하고 있을 무렵이었다.
수레에 오르기 싫었는지 주약란이 미적댔다. 황성과는 너무나 다른 주변을 돌아보며 조금이라도 더 눈에 담으려 애를 썼다.
‘싫어하고 있어.’
주약란의 마음이 분명히 보였다.
화려하기 짝이 없는 수레가 앞에 대기하고 있음에도 저런 행동을 보이는 것으로 보아 확실히 유람은 아니었다.
뭔가 있었다.
“옹주마마!”
주약란 뒤에서 누군가 불쑥 나섰다.
호위를 맡고 있던 어림친위군의 지휘 고이격이었다.
“아직 갈 길이 멉니다.”
고이격이 눈을 가느다랗게 떴다. 입술에 힘을 꾹 주었다. 싸늘하게 말을 이었다.
“고귀한 몸을 천한 것들 앞에 계속 나타내실 필요가 없습니다.”
어림군 지휘쯤 되는 무관의 태도가 수상했다.
어쩐지 주약란 옹주를 강제로 억압해 어디론가 압송하려는 것만 같지 않은가?
“알고 있다.”
주약란의 태도가 더 이상했다.
호위로 따라온 어림군 지휘가 자신에게 가시 돋친 목소리로 대하는 것을 빤히 알면서도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들이는 이유가 뭘까?
“그저 두 번 다시 보지 못할 풍경들이기에 조금이라도 더 가슴에 담아 두고 싶었을 뿐이다.”
철렁!
용무린의 심장이 크게 널을 뛰었다.
주약란의 처연한 목소리와 숨겨진 뜻으로 미루어 한 가지 가능성이 떠올랐던 것이다.
‘서, 설마…… 정략결혼?’
감숙의 상황이 급하다 하여 정신없이 달리는 일에만 집중하느라 뭐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파악하지 않았던 것이 실수였을까?
용무린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을 직감했다.
그때였다.
더는 들어주기 곤란하다는 듯 어림군 지휘가 비수와도 같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나라가 풍전등화의 위기이옵니다, 마마.”
“……!”
“하루라도 빨리 조로스 칸 앞에 나아가 전쟁을 종식시켜야 할 책무가 있으신 마마께오서 이렇듯 시간을 질질 끄는 행동을 더는 묵과할 수 없음이옵니다.”
불쾌한 마음이 가감 없이 드러나는 말투.
‘황가 여인의 비련이란 게 바로 이런 것이겠지?’
주약란이 입술을 한 번 지그시 깨물었다.
버려진 옹주 따위, 화친을 위한 제물로 사용될 뿐 더는 고귀한 신분이랄 수 없는 것이다.
그 사실을 너무나 잘 알기에 주약란은 차오르는 슬픔과 분노를 애써 억누른 후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그래. 어서 가자꾸나.”
주약란이 수레의 발판에 한쪽 발을 올려놓았을 때다.
더는 참아 주지 않겠다는 듯 어림 친위군 지휘 고이격이 못을 박듯 말을 뱉었다.
“앞으로는 말을 바꾸기 위해 역관에 들릴 때만 휴식을 취하도록 하겠사옵니다. 급한 용무는 안에 들여 놓은 나무틀로 해결하시오소서.”
너무한 처사였다.
식사는 물론이고 대소변마저 수레 안에서 대충 해결하라는 뜻이었기 때문이었다.
“이보시오, 지휘! 어쩌면 사람이 이렇게 무례하시오! 옹주마마의 신세가 아무리 이 지경이 되었다고는 하나…….”
어쩌나 서럽고 화가 나던지 주약란의 시비가 고함을 버럭 질렀으나 되레 화를 불렀다.
“닥쳐라!”
스릉!
어림군 지휘 고이격이 검을 빼어 들었다.
주약란 뒤에 시립하고 있던 시비의 목에 검을 가져다 대고 으르렁댔다.
“네년 때문에 시간이 지체되어 이 나라가 잘못될 수도 있음이다. 본관이 더 참아야 할 이유가 있더냐?”
“……!”
“마지막 경고다. 다시 그 천한 주둥이를 놀린다면 반드시 목을 벨 것이야!”
그야말로 서슬 파란 경고다.
너무나 기가 막혔지만 누구도 지휘 고이격을 막거나 나무라지 못했다.
다들 같은 생각이었던 것이다.
물론 모두가 같은 파벌이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어디에나 있는 파벌 중 이들은 삼공에 줄을 댄 파벌이었고 이들에게 있어서 공명을 세우는 일이란 주약란을 한시라도 빨리 조로스 칸에게 바쳐 화친을 이끌어 내는 일이었던 것이다.
‘그래. 다 이해한다.’
주약란은 눈을 지그시 감았다.
두 번 다시 돌아오지 못할 길을 떠나는 황실 여인의 비련 따위 저들이 알 바 아닌 거다.
나라를 위한 충심과 공명심이 범벅된 삼공과 삼고의 밀명을 받았으니 자꾸만 시간을 끄는 주약란의 행동이 깨나 미웠으리라.
“그만하시게. 원하는 대로 해주면 될 일 아닌가?”
자신 때문에 북원까지 내몰린 시비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주약란이 굴욕을 감수할 때였다.
“뭘 그만하란 것이지?”
저만큼 앞에서 칼날 같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웬 놈이냐?”
“멈추어라!”
차차창. 스릉. 스릉. 스르릉.
어림군 오십여 명이 일제히 검을 뽑아들었다. 소리가 들려오는 곳을 향해 돌아섰다.
그리고…….
“허억!”
“흡!”
고이격을 비롯한 어림군이 기함을 쏟았다.
화들짝 놀라 그대로 망부석처럼 몸이 굳었다.
분노로 인해 눈썹이 역 팔자로 치솟은 황룡패주의 등장 때문이었다.
“……!”
주약란의 눈도 부릅떠졌다.
죽은 것으로만 알았던 사내, 그래서 이제는 꿈에서나 얼굴을 그려볼까 애를 태웠던 사내의 등장에 심장이 내려앉는 것만 같았다.
씨익.
용무린의 입가에 흰 선이 쭉 그어졌다.
내딛는 걸음마다 뿜어지는 으스스한 기운의 농도가 갈수록 짙어졌다.
“화, 화, 황룡패주시여-어!”
“아으으.”
챙그랑. 쨍그랑.
누군가의 외침과 함께 어림군의 손에 들려 있던 병장기가 일제히 바닥으로 떨어졌다.
모를 수가 없는 거다.
황룡패주 용무린 앞에 섰던 적들이 어떻게 죽어갔는지 지금도 눈에 선했으니까.
놈들 따위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다는 듯 주약란만 똑바로 보며 걸어온 용무린이 드디어 앞에 도착했다.
주약란의 떨리는 입술이 떼어졌다.
“요, 용 가가!”
자신도 모르는 사이 그렇게 불렀다.
하지만 용무린은 자신을 그렇게 부른 주약란을 나무라지 않았다. 이제 다 괜찮다는 듯, 내가 왔으니 염려하지 말라는 듯 고개를 한 번 크게 끄덕여 보일 뿐이다.
그 모습이 어찌나 든든하던지!
“……흐흑!”
뿌옇게 차오르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어 결국 주약란의 두 볼을 타고 흘렀다. 지금까지 겪었던 마음고생이 모두 녹아내렸다.
“괜찮아. 내가 왔어.”
왜인지는 모르겠다.
용무린 역시 주약란이 뿜어내는 감정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였다.
‘소옥…….’
애처로운 주약란의 모습에 백리소옥의 모습이 언뜻 겹쳐 보였던 것 같다.
“화, 황룡패주시여. 소관은 그저……. 컥!”
쭈뼛거리며 다가와 다급한 목소리로 주절대려던 고이격의 목줄을 용무린이 잡아챘다. 지그시 힘을 주었다. 놈의 목에서 묘한 소리가 새어나왔다.
투드득. 트득.
조금만 더 힘을 주면 목뼈가 완전히 부러진다. 놈의 혀가 점점 더 길게 빠져 나왔다.
어느새 눈물을 거둔 주약란이 고개를 흔들었다.
“황명을 받아 움직이는 어림군 지휘예요. 손속에 사정을 주셔야만 해요.”
알고 있다.
“버러지 같은 놈!”
용무린이 거칠게 손을 뿌렸고 고이격은 바닥에 패대기쳐졌다. 흙먼지를 피우며 나뒹굴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용무린은 주약란에게만 시선을 고정한 채 물었다.
“어찌된 영문인지 듣고 싶소.”
주약란의 대답은 간결했다.
“화친. 혼인.”
두 단어에 불과했지만 용무린이 사태를 짐작하기에는 충분했다.
‘조로스 칸과의 화친에 내세울 명분으로 정략결혼이 추진되고 있었구나.’
그러니 더 부아가 치밀었다.
황실 여인의 숙명에 따라 정략결혼으로 북원에 끌려가야 하는 주약란에게 어찌 저런 패악질이란 말인가?
“너 이 자식…….”
겨우 몸을 일으켜 가쁜 숨을 몰아쉬는 고이격을 용무린이 잡아먹을 듯 노려보았고 그런 용무린을 되레 주약란이 말리고 나섰다.
“나름, 황상과 나라를 위한다는 충정에 애가 닳아서 그렇게 행동했을 것이에요.”
목숨을 거두는 것은 쉬운 일이다.
주약란은 먼 훗날까지 그리는 것인지 용무린의 살기를 누그러뜨리기 위해 애를 썼다.
기회다 싶었는지 고이격이 숨 가쁘게 말을 쏟아냈다.
“옹주마마 말씀대로이옵니다, 패주.”
“……!”
“신 어림군 지휘 고이격, 한시라도 이 나라를 전란의 소용돌이에서 구하라는 황상의 어명을 받자와…….”
“됐고,”
“밤을 낮 삼아 내달리기를 어언 보름이나…… 예?”
“꼴 보기 싫으니 넌 그냥 돌아가.”
“그, 그게 대체……?”
고이격이 말꼬리를 늘이며 거부의 의사를 밝히려 들었지만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하얀 이를 드러내며 한 차례 픽 웃어 보인 용무린이 얼음장 같은 목소리를 쏟았다.
“너 나보다 싸움 잘해?”
그럴 리가 있나?
“그거야 당연히…….”
“그럼 나보다 지위가 높아?”
“……!”
이번에는 입도 뻥끗하지 못했다.
“금서철권의 권위로 명한다. 황제폐하의 어명, 그거 나 황룡패주가 접수할 테니까 너는 이대로 그냥 돌아가. 총병관이 기다리는 곳까지 옹주는 내가 직접 데리고 갈 테니까 말이야. 알아들어?”
금서철권의 권위로 내려진 명령이다.
황제의 어명이 먼저이기는 하지만 어림친위군 지휘 따위가 거부할 수 없는 일이다.
“눼.”
입이 댓 발이나 나온 고이격이 뒤로 물러났다.
“자, 듭시다.”
“예, 패주.”
용무린이 손을 잡아 주었고 주약란은 없던 힘이 솟았는지 가뿐하게 수레에 올랐다.
“저 자식 말 가져와.”
“여기 대령했사옵니다.”
용무린은 고이격의 말을 빼앗아 탔다.
“패, 패주시여. 이렇게 그냥 가시면…….”
졸지에 말까지 빼앗기고 홀로 남겨지게 된 고이격이 애원하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왜? 뭐?
하듯 쏘아보던 용무린은 결국 녀석을 투명인간 취급했다. 앞을 향해 외쳤다.
“출바-알!”
“충!”
힘찬 복창 소리와 함께 화친과 정략결혼을 위한 행렬이 앞을 향해 나아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제 누구도 걱정하지 않았다.
이 화친과 정략결혼을 위한 행렬은 용무린의 참여로 그 성격이 완전히 달라진 것이다.
“빌어먹을!”
오직 한 사람 어림군 지휘 고이격만이 썩은 얼굴로 욕설을 내뱉었다.
반짝반짝.
어림군 특유의 은빛 갑주가 호사스럽게 빛나고 있었지만 덩그러니 홀로 남겨진 고이격에게는 그 사실이 더욱 창피하게 느껴졌다.
***
감숙 성도 난주.
“아아악.”
“제, 제바-알!”
“크하하하. 죽기 싫으면 어서 빨리 벗어라 이년!”
차마 눈 뜨고 보기 힘든 참상이 백주대낮의 난주성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총병관 양문광이 제갈문군의 계책에 힘입어 성을 탈출한 후 벌써 보름이 다 되어가고 있었지만 살인과 약탈, 강간과 방화는 끝나지 않았던 것이다.
“푸흐흐. 좋구나, 한인들의 비명소리가…….”
난주성 내 곳곳에서 타오르는 방화의 검은 연기를 배경 삼아 비명소리를 노래처럼 인식하는 사내!
오늘 이 참상을 만들어낸 북원의 중원 정벌군 총 사령관인 조로스 칸이었다.
쪼르륵.
조로스 칸의 잔에 다시 술이 채워졌다.
그의 등 뒤에 시립하고 있던 사내의 입에서 묵직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벌써 다섯 병 째입니다, 칸이시여.”
조르스 칸의 심복인 추밀부사 악승이었다.
“왜? 내가 취하기라도 할 것 같아서 그러느냐?”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다만…….”
“다만?”
“어차피 초원의 땅이 될 곳 아니겠습니까?”
“…….”
“보름이 다 되었습니다. 이제는 다독여야 할 때가 된 듯하여 주제넘게 나서 보았습니다, 칸이시여.”
송구하다는 듯 고개를 조아리는 악승.
불호령이라도 내릴 듯 볼살을 꿈틀거렸던 조르스 칸은 이내 활짝 웃으며 답했다.
“그 말을 기다렸느니!”
“예?”
툭. 툭. 툭.
영문을 몰라 눈을 치켜뜨는 악승의 등을 조르스 칸이 가만히 두들겼다.
“명 황실의 계집을 노리개로 삼는 대가로 이 땅은 감숙성이 아닌 북원의 감숙로가 될 것이다. 당연히 난주는 만호부가 되어 다루가치를 뽑아 다스려야 할 터인데, 그 재목을 고르기 위해 지금껏 두고 보기만 했던 것이니라.”
조르스 칸이 악승을 부드러운 눈을 보며 말했다.
“너다, 악승. 네가 바로 이곳 난주 만호부의 다루가치가 될 것이다.”
화들짝 놀란 추밀부사 악승이 무릎을 꿇고 외쳤다.
“너무 과한 후사이옵니다, 칸이시여. 부디 무거운 짐을 거두어 주소서.”
화들짝 놀란 악승이 고개를 흔들었다.
하지만 조르스 칸은 눈 하나 꿈쩍하지 않았다.
“시끄럽다. 너 외에 감숙로 만호부의 다루가치가 될 자격이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잔치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는 말을 하기란 어렵다.
하지만 진심으로 모시는 주인을 위한다면 목숨을 걸고 해야만 한다. 잔치처럼 보름째 이어오던 북원 전사들의 살인, 방화, 강간, 약탈 등을 말려야 하는 것이다.
“이제는 침략군이 아닌 점령군으로 변모할 때이다. 정략혼을 통한 화친으로 감숙성을 감숙로로 만들기 위해서는 미래를 내다보고 다스릴 수 있는 역량이 필요해. 하지만 너 외에 누가 있어서 칸에게 바른 말을 하겠느냐?”
“…….”
감격한 듯 악승은 고개를 더욱 조아렸고 조르스 칸은 저 멀리 서남쪽을 향해 시선을 던졌다.
“머지않아 귀한 노리개가 도착한다. 화친과 함께 나는 돌아갈 것인즉, 내가 돌아올 때까지 이곳의 민심이 초원으로 향하게끔 돌려놓아라.”
“충!”
악승이 고개를 바닥에 처박으며 외쳤다.
조르스 칸이 주먹을 콱 움켜쥔 채 말을 이었다.
“놈들이 마교를 향해 정벌군을 움직일 때, 나는 그때 돌아올 것이다. 다시 중원정복의 일보를 내딛겠노라.”
조르스 칸의 눈에 탐욕의 빛이 넘실댔다.
신마귀환 10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