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살려는 주지(11권) (91/104)

신마귀환 11권

서경 신무협 소설

1.살려는 주지

전장까지 하루거리가 남았다.

자신의 움직임을 최대한 숨겨야 할 용무린은 보안이라고 하는 효과를 위해 말을 버리고 주약란의 수레에 동승을 해야만 했다.

“저는 이만 나가 있도록 하겠습니다.”

“연홍아!”

시비의 돌발 선언에 주약란은 놀란 듯 불렀지만 굳이 그녀의 팔을 붙잡지는 않았다.

그것이 어떤 의미인지 누구보다 잘 아는 연홍은 배시시 웃어 보이며 기대에 부응했다.

“말씀을 나누도록 하세요.”

밖으로 나선 후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수레 뒤에 걸터앉았다. 살랑살랑 발을 흔들며 햇볕을 쬐었다.

“커흠흠. 실례하오, 옹주.”

“아니에요.”

어색한 침묵이 한동안 흘렀다.

그러다가 용기를 내었는지 주약란이 불쑥 입을 열렸다.

“제 마음은 아직도 변함이 없네요.”

“……!”

용무린은 답을 하지 못했다.

확실하게 매듭을 져야 할 순간임을 직감한 주약란이 조금 더 용기를 내었다.

“만금상단에서 하린이가 그랬었지요. 오직 한 사내에게만 보여야 하는데 용 가가께서 다 보았으니 책임을 지라고 말이지요.”

“그, 그것은…….”

변명을 하려던 용무린의 말꼬리를 주약란이 잡아챘다.

“저 역시 마찬가지 말씀을 드리겠어요. 책임지세요.”

“옹주.”

“보안을 위해, 혹여 조르스 칸이라는 적의 수괴가 용 가가의 등장을 알게 되면 화친의 자리에 나오지 않을까 저어하여 수레에 오르신 것을 잘 알고 있어요.”

“물론이오.”

“하지만 남들이 대체 뭐라고 생각을 하겠어요? 남녀칠세부동석이거늘, 과년한 남녀가 하루 밤낮을 수레 안에 함께 있었는데 말이에요.”

듣고 보니 참 그랬다.

‘보안이고 뭣이고 그냥 말 등에 앉아 진중으로 들어가 버릴 것을.’

이제야 살짝 후회가 되는 용무린이었다.

‘그나마 밖으로 말이 새어나가지 않도록 내공으로 차단해둔 것이 다행이네.’

당당하지만 곤혹스러울 수밖에 없는 주약란의 말을 어림군과 시비가 모두 들었다고 생각하기만 해도 아찔했다.

주약란이 계속해서 힘을 내었다. 용무린을 계속해서 궁지로 몰았다.

“도착하기 전에 확언을 주시어요. 제가 그렇게 싫으시다면, 소녀를 정 받아들이지 못하시겠다면, 저는 황명을 따라 조로스 칸이라는 악적과 정략혼을 해버리겠어요.”

“옹주. 그 무슨…….”

용무린이 말을 잇기 위해 급히 입술을 떼었지만 냉소적인 미소를 짓고 있던 주약란이 툭 잘라 버렸다.

“제국의 적에게 새신부가 아닌 헌 신부를 안기는 셈이니, 초원에서 온 악적을 욕보일 생각이시라면 참 좋은 계획이겠네요. 더불어 나라의 위기도 구원하고, 일석이조의 계책 아닌가요?”

용무린이 만금상단에서 자신의 모든 것을 본 것을 계속해서 물고 늘어졌다.

거부하면 그 뒤가 빤했다.

‘백리소옥이 겪은 것과 비슷한 불행을 주약란 옹주 또한 겪게 되는 것인가?’

만금상단의 일과 수레에서 보낸 하루 밤낮의 일.

그 사실은 결국 퍼질 수밖에 없고 황제의 강권이든 황족들의 중매로 인한 인연이든지간에 주약란은 불행한 혼례를 올릴 수밖에 없다.

사내들의 못난 특성상 흠결이 너무 많아 깨끗하지 못한 여인이라는 생각이 들면 다른 여인을 찾아 밖으로 나돌 것이 빤하기 때문이다.

‘나로 인해 주약란 옹주마저 그런 불행한 삶을 살게 되는 것은 원하지 않아.’

방법은 하나밖에 없다.

잠시 생각을 정리한 용무린이 묵직한 목소리로 자신의 생각을 밝혔다.

“옹주의 마음이 변치 않듯 내 마음에도 변치 않는 것이 하나가 있소.”

올 것이 왔다.

쿵쿵쿵.

“말씀하시어요.”

터질 듯 뛰는 가슴을 부여안고 주약란이 귀를 활짝 열었다.

***

성도인 난주로 가까이 다가갈수록 땅은 황폐해진다.

몇몇 녹주(綠州)를 제외하면 나직한 구릉의 연속이어서 대단위 병사들이 진을 펴고 전투를 벌일 만한 곳이 그리 많지 않다.

난주에서 닷새 거리에 위치한 정서현 앞 평원이 그나마 대단위 전투를 벌이기에 적합했다.

그래서 군사 제갈문군과 총병관 양문광은 정서현을 등지고 배수의 진을 폈던 것이다.

이번에도 밀리면 이 자리에서 죽을 각오였다.

제갈문군이 계책을 내었을 때는 황명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군사들만 빠져나왔다.

당연히 북원의 무리가 난주를 점령했을 때 어떤 짓들을 할 것인지 잘 안다. 살인, 방화, 강간, 약탈 등등 인간이 벌일 수 있는 가장 원초적이고 강렬한 범죄행위들이 죄다 벌어지고 있을 터였다.

‘황명이라고 해도 그러면 안 되었어.’

꾸우욱.

그 생각을 할 때마다 양문광의 주먹이 터질 듯 쥐어지곤 했다. 양민들의 울부짖는 소리가 들려오는 것만 같았기 때문이었다.

‘차라리 그곳에서 옥쇄를 했어야만 했어.’

물론 그랬다가는 거칠 것이 없어진 조르스 칸과 북원의 군대가 파죽지세로 밀고 내려왔을 것이다. 명 제국에 놈을 막을 만한 무장이 더는 남아 있지 않게 될 테니까.

아득.

“화친이라니! 놈들의 손에 죽어간 정병과 양민들의 수가 얼마인데 화친이라니!”

이번에야말로 설욕할 시간이 돌아왔다 여겼다.

무후의 환생인 듯 귀계를 내놓는 제갈문군이 군사로 합류한 이상 오래지 않아 난주를 수복하고 빼앗긴 땅도 되찾을 수 있으리라 여겼다.

하지만 다 소용없는 일이 되었다.

화친을 할 테니 무리한 전투를 삼가고 대기하라는 황명이 내려왔기 때문이었다.

“참으로 우습게 되었습니다.”

곁에 서 있던 제갈문군이 툭 내뱉었다.

계책을 내어 총병관을 구원하긴 했지만 같은 심정이었던 것이다.

느닷없이 화친이라니!

주약란 옹주를 제물로 바쳐 진행되는 화친을 반길 사람은 이곳에 아무도 없었다.

피식.

“노회한 것들이 제 한 목숨과 움켜쥔 부귀영화가 스러질 것이 겁이 났던 게지요.”

양문광이 씹어 뱉듯 말했다.

동감이라는 듯 제갈문군이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대전에 있을 때부터 그러했었습니다. 총병관께서 애쓰시는 것은 아랑곳없이 어떻게 하든 화친을 이끌어내 이 전쟁을 빨리 끝내려고만 했었습니다.”

“정말 구역질나는 놈들이오.”

“공연히 출사를 했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습니다.”

제갈문군의 맞장구에 한 차례 피식 웃어 보인 양문광이 내심을 가감 없이 밝혔다.

“황도로 돌아가면 내 무슨 수를 쓰든 놈들에게 책임을 물을 작정이외다.”

“제가 힘을 보태드리지요.”

허공에서 마주친 두 사람의 눈빛에 살기가 돌았다.

권력투쟁을 감수할 생각이다.

겁에 질린 나머지 끝까지 싸워보지도 않고 화친 따위나 주장하는 늙고 노회한 것들을 싹 쓸어버리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었던 거다.

그때였다.

“어림군이 다가오고 있습니다-아!”

“옹주마마께서 당도하셨습니다.”

척후병들의 외침과 함께 화려한 은빛 갑주를 차려 입은 오십여 어림군을 선두로 하여 거대하게까지 보이는 수레가 들어왔다.

“결국 오시고 말았는가?”

“가엾은 분께서 오시고 말았군요.”

같은 마음이었는지 눈을 마주친 양문광과 제갈문군의 눈에 애잔함이 흘렀다.

하지만 이제는 어쩔 수 없는 일.

나아가 맞이한 후 황명에 따라 화친을 맺고 주약란 옹주를 악적 조르스 칸에게 보내야 한다.

총병관과 제갈문군은 즉시 군막 밖으로 나섰다.

군영을 관통해 다가오는 황룡기와 함께 다가오는 거대한 수레가 보였다.

그때였다.

두 사람의 뇌리에 반가운 목소리가 스치듯 박혔다.

-접니다, 황룡패주.

반짝. 부르르.

두 사람의 안색이 동시에 변했다. 어찌나 놀랐는지 눈에 띌 정도로 몸을 떨기까지 했다.

용무린의 목소리가 계속해서 이어졌다.

“예, 패주.”

“알겠습니다, 패주.”

두 사람은 넋이 나간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후 잽싸게 수하들을 부려 길고 넓은 천을 가려와 수레 주변을 가렸다.

“쳇, 그래봐야 다 아는데 뭐.”

“그러게 말이야.”

“주약란 옹주를 제물로 갖다 바치고 화친을 맺으려고 한다며?”

지금껏 목숨을 걸고 북원의 강병들과 맞상대를 해온 병사들답게 화친이 못마땅한 모양들이었다. 수레의 등장과 주변에 천막을 치는 것 자체를 싫어했다.

하지만 그 내막을 일일이 설명해 줄 수도 없는 일, 천막을 모두 친 다음에야 총병관과 제갈문군을 비롯한 오군도독부의 수뇌부들이 부복을 했고 수레의 문이 열렸다.

“패, 패주!”

“정녕 패주께서 와주신 것입니까?”

총병관과 유격장군 양경홍이 격동한 목소리로 용무린을 반겼다.

“크흑. 패주-우!”

“패주만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양가장의 장로들을 비롯한 오군도독부의 수뇌부가 눈물까지 글썽이며 용무린 앞에 고개를 조아렸다.

“늦게 와서 미안합니다.”

그들 앞에 용무린이 당당하게 서 있었다.

***

난주성 내부 조르스 칸의 진영.

해가 넘어갈 무렵 척후를 나가 있던 병사들이 돌아와 주약란 옹주의 도착을 알렸다.

“호오. 확실하더냐?”

“그러하옵니다, 칸이시여.”

“황명으로 움직이는 황룡기와 황족을 뜻하는 자색기, 더불어 움직이던 어림군 오십여 명이 호위하는 커다란 수레로 보아 확실하옵니다.”

“푸흐흐. 그렇군.”

조르스 칸이 만족한 듯 느물거리며 웃었다.

오십 명 어림군에 화친의 제물인 주약란 옹주를 딸려 보냈다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 것인지 알 수 있어서였다.

“중원의 배부른 돼지들이 급하긴 급했구나.”

“그렇사옵니다. 기동성 유지를 위해 겨우 어림군 오십을 딸려 보내는 것으로 보아 중원 돼지들의 화친 의지는 확고한 것으로 보입니다.”

혹시라도 화친을 빌미로 수작을 부리지나 않을 것인지 걱정을 했었다.

그래서 척후병들을 놈들의 진영 그 너머까지 파견을 했고 혹시라도 많은 병력이 뒤따르고 있지는 않은지 세심하게 살폈다.

하지만 이제는 안심해도 된다.

주약란 옹주를 보호하고 온 오십 명의 어림군을 끝으로 추가 병력 따위는 없는 거다.

그런 판단이 내려지기를 기다렸던 것일까?

밖에서 백기를 매달고 온 명군의 전령이 도착해 있음을 알려왔다.

총병관의 이름으로 된 서신이었다.

그 안에는 내일 날이 밝으면 출발을 해 화친을 위한 면담을 양쪽 진영의 중간지역에서 하면 어떻겠느냐는 질문이 적혀 있었다.

“서신에 적힌 대로 해 주지.”

“감사하옵니다, 칸이시여.”

명군의 전령이 씩씩하게 답을 하고 돌아간 다음이었다.

씨익.

“화친의 자리에 나아가 느긋하게 즐기다 와도 되겠군.”

조르스 칸이 회심의 미소를 지어 보였다.

***

다음날 아침 해가 밝았다.

조르스 칸과 북원의 전사들은 이틀거리에 자리한 평원을 향해 진격을 개시했다. 전투를 위함이 아니고 화친을 위한 진격이었기 때문에 병사들의 얼굴은 밝기만 했다.

“적장이 양문광이라고 했던가?”

“그렇습니다, 칸이시여.”

“나는 살짝 아쉽기도 해. 그 정도 수준의 적을 만나보기란 쉬운 일이 아니거든.”

화친을 하고 적당히 여유를 가지고 있다가 양문광이 호남성 이남을 향해 진격해 들었을 때가 바로 다시금 초원의 전사들이 진격할 시기다.

“무슨 말씀인지 알 것 같습니다, 칸이시여.”

심복인 추밀부사가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자신이 생각해도 그때가 되면 전투다운 전투 한 번 해보지 않아도 명군은 무너질 것이고 북경의 자금성까지 단숨에 달려갈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화친의 자리에서 말이야. 한 번 즐겨보자고 넌지시 말이라도 해 볼까?”

“거 좋은 생각입니다. 놈들의 사기도 죽이고 혹시 모를 불미스러운 일의 예방을 위해서도 그 정도의 위력행사는 해두는 편이 좋겠습니다.”

“그렇지? 푸흐흐.”

“예.”

조르스 칸과 추밀부사가 그렇듯 웃고 떠들 때 명군의 선두에 있던 양문광과 양경홍 역시 회심의 미소를 입가에 머금었다.

‘기다려라. 오줌을 찔끔 싸게 만들어준다.’

‘전력을 다해 말을 달리고 싶구나.’

불과 한 사내가 등 뒤에 있을 뿐인데 마음가짐이 이렇게 달랐다.

북원의 기마대와 청랑문 소속 무인들에 대한 걱정은 이미 잊었다.

그저 화친의 자리에서 조르스 칸이라는 북원의 악적이 어떤 황당한 표정을 지을 것인지 절대적인 강함 앞에 무릎을 꿇을 때는 또 어떤 말을 할지 궁금할 뿐이었다.

***

이틀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화친이 아니었다면 전투를 앞둔 긴장감이 짓누르고 있을 평원에 이상하리만큼 여유가 흘렀고 천오백여 보의 거리를 두고 진격이 멈춰진 후 중간에 천막이 쳐지고 의자가 가지런히 놓였다.

잠시 시간이 흐른 후.

명군 진영의 중단이 살짝 열렸다. 일단의 군마가 천막을 향해 움직였다.

그 수는 겨우 셋.

지금부터 벌어질 북원과의 화친에 저자세로 대처하기 위함이 분명해 보였다.

그에 비해 북원의 진영에서는 일백여 군마가 움직였다.

조르스 칸의 지위를 나타낼 기수들을 시작으로 추밀원의 수뇌부들과 조르스 칸의 심복이랄 수 있는 청랑문 소속 무인들이었다.

마치 무력시위를 하듯 일백여 무인들이 천막을 빙 둘러 쌌다. 조르스 칸이 거들먹거리며 말에서 내릴 때 추밀부사가 눈에 힘을 주었다.

전투를 통해 익히 얼굴을 알고 있던 양문광과 양경홍은 자리에서 일어났는데 새파랗게 어린 녀석이 느긋하게 앉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추밀부사가 대뜸 으르렁댔다.

“이런 시건방진 놈을 보았나? 감히 칸께서 친히 왕림을 하셨는데 자리에 그대로 앉아 있다니?! 어서 빨리 일어나 고개를 조아리지 못할까?”

그때였다.

피식.

가운데 자리를 차지한 채 몸을 깊이 파묻고 있던 새파란 애송이가 갑자기 풀썩 웃었다. 한마디 툭 뱉었다.

“지랄하네!”

용무린이었다.정적이 흘렀다.

자신들이 지금 들은 말이 사실인지 확인하려는 듯 서로의 얼굴을 돌아보기도 했다. 물론 양문광과 양경홍은 가만히 웃고 있기만 했다.

“호오. 그냥 애송이가 아니로구나.”

조르스 칸의 눈에도 호기심의 빛이 어렸다.

자신이 이대로 끝내길 아쉬워할 정도의 무장인 양문광이 가만히 있는 것으로 보아 신분이나 무력 모든 면에서 그보다 위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짜식. 눈치는…….”

풀썩 웃어 보인 용무린이 턱을 까딱였다. 아랫사람 대하듯 말을 이었다.

“거기 앉아.”

이건 조금 곤란하다.

먼저 화친을 청해온 패배자답게 고개를 숙이는 법을 가르쳐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시건방진…….”

조르스 칸이 냉혹한 목소리를 발했다.

적당히 내공을 끌어 올려 건방이 하늘을 찌르는 용무린의 숨통을 조이려는 순간,

쌔액. 퍼억.

“컥!”

뭘 어떻게 했는지 보이지도 않았는데 추밀부사가 비명을 쏟아내는가 싶더니 바닥에 엎어졌다.

“조금 전에 주둥일 함부로 놀린 대가야.”

“……!”

조르스 칸의 몸이 흠칫 굳었다. 표정이 심각해졌다.

방금 보인 한 수를 막기 위해서는 자신 역시 전력을 다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이놈, 나와 비슷한 수준이다.’

어쩐지 양문광과 양경홍 두 사람 모두가 아무런 제지도 않더라니!

‘뭐, 그래도 상관은 없지.’

대세에는 변함이 없다.

놈의 실력이 자신과 비슷한 수준이라고는 하나 초원의 전사들은 명나라 군사들 개개인에 비해 월등하며 놈들의 전술은 이미 다 꿰뚫어 본 후다.

‘화친이고 뭐고 다시 전쟁을 개시한다고 해도 우리들의 승리야.’

뇌화전이 비처럼 쏟아져 내렸어도 단숨에 단점을 꿰뚫어 무찔러 버린 자신이었다.

‘너 역시 밟아주마.’

그제야 적이 마음이 놓였다.

조르스 칸의 입가에 슬그머니 미소가 피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용무린은 계속해서 여유만만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앉아, 인마. 안 잡아먹을 테니까…….”

저런 치욕적인 말에 계속해서 참고 있을 수하들은 없다.

“무엄하…… 커헉!”

“감히! 뉘 안전이라고…… 크악!”

털썩. 터얼썩.

조르스 칸 양 옆으로 서 있던 무장 두 명이 이를 드러냈지만 말을 끝내지도 못한 채 어딜 어떻게 맞았는지 알아차리지 못하는 사이 너부러졌다.

헤실.

용무린의 입가에 섬뜩한 미소가 걸렸다.

“마지막 경고다.”

용무린의 목소리가 나직하게 깔렸다.

분위기 파악이 전혀 되지 않는 모양인지 화친을 청하러 온 주제에 되레 윽박질렀다.

“시건방지게 구는 놈들은 지금부터 목을 벤다.”

후웅.

불사신기가 뿜어졌다. 무겁게 주변을 짓눌렀다.

누구도 입을 열지 못했다.

지금껏 양문광을 몇 번이고 사지로 몰아넣었던 조르스 칸마저도 긴장을 잔뜩 처먹은 얼굴로 용무린의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

‘쾌검 계열의 무공을 익힌 자인가?’

솔직히 이번에는 조금 놀랐다.

추밀부사를 공격했던 것을 기억해 이번에는 수하들을 공격하는 놈의 손을 막으려고 했었지만 보기 좋게 실패했기 때문이었다.

“뭐해? 앉으라니까?”

“크흠.”

“앉기 싫으면 서서 들어 그러면.”

“……!”

조르스 칸의 안색이 확 바뀌었다.

‘그럴 수야 없지.’

수하도 아닌데 어찌 상대의 말을 서서 듣는 굴욕을 겪겠는가?

조르스 칸은 잽싸게 용무린 앞에 놓인 의자에 앉았다.

당당하게 등을 쫙 폈다.

용무린의 눈을 매섭게 노려보았다.

그때만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용무린의 목소리가 느물거리며 이어졌다.

“알다시피 화친을 위한 자리야.”

“…….”

“뭐, 호남성 쪽에서 벌어지는 일이 조금 급하게 돌아가서 말이야.”

“그러는 너는 대체 누구냐?”

궁금함을 더는 참을 수가 없어 물었다.

용무린이 풀썩 웃었다. 좌우를 돌아보며 되물었다.

“아! 내가 아직 안 알려줬나?”

양문광과 양경홍이 슬그머니 자리에 앉으며 답했다.

“예, 패주. 아직 정체를 밝히지 않으셨습니다.”

“그렇습니다, 패주.”

“그렇군.”

어깨를 한 번 들썩여 보이는 것으로 실수를 인정한 용무린의 시선이 조르스 칸에게로 향했다.

“들었지? 나, 황룡패주 용무린이야.”

“화, 황룡패주 용무린?!”

조르스 칸의 눈이 살짝 커졌다.

모를 수가 없는 이름이었기 때문이었다.

“어, 어떻게?”

분명히 동정호 인근에서 마교의 교주와 싸우다 물에 빠져 죽었다고 알려졌기 때문이었다.

‘아니, 그것보다…….’

씨이익.

갑자기 웃음이 새어나왔다.

지금껏 누구에게도 느껴보지 못했던 심장이 간질간질한 이 느낌, 드디어 마음껏 싸워볼 수 있는 적이 자신 앞에 나타난 것이다.

“드디어 내 상대가 될 만한 놈이 나타났구나.”

쿵쾅쿵쾅.

조르스 칸의 심장이 미친 듯 뛰었다.

‘놈과 싸운다면 정말 짜릿할 거야.’

후우우웅.

초원의 전설인 청랑대유공의 힘이 저절로 발동했다. 해일처럼 넘실대며 주변을 휘감았다. 슬그머니 용무린까지 옭아맸다.

그런데…….

“놀고 있네.”

용무린은 그냥 픽 하고 웃을 뿐이다.

아니, 양 옆에 앉아 있던 양문광과 양경홍까지 함께 웃고 있었다. 무슨 상황인지 빤히 눈치 챈 모양인데, 놀랍게도 아무런 압박도 느끼지 못하는 것 같았다.

‘어떻게?’

답은 하나뿐이다.

중앙에 앉아 있던 황룡패주 용무린 이라는 애송이가 청랑대유공의 힘을 자신도 느끼지 못하는 사이 차단해 버린 것이다.

“이놈! 감히…….”

철퍽!

“커헉!”

용무린의 말투를 탓하려 들던 부장 하나의 고개가 또 홱 하고 돌아갔다. 볼썽사납게 바닥에 쓰러졌다.

‘이번에는 느끼지도 못했다.’

조르스 칸의 표정이 조금 더 어두워지는 순간이었다.

화아악.

용무린에게서 미증유의 기운이 폭발하듯 뿜어졌다.

‘커헙!’

조르스 칸은 볼살이 푸들거릴 만큼 깜짝 놀랐다.

초원의 전설로 통하는 청랑대유공의 구 성 내공이 바람 앞에 촛불이라도 되는 듯 감쪽같이 지워져버렸기 때문이다.

‘어, 어떻게…….’

아무리 정보가 잘못된 것이었다고 해도 그렇지, 어떻게 저 나이에 저 정도의 무위가 가능하지?’

숨통을 콱 조여 오는 무형의 기운.

초원의 전설인 청랑대유공의 힘을 끌어 올렸어도 겨우 버티기만 할 뿐이어서 조르스 칸의 가슴은 갈수록 묵직하게 가라앉았다.

“보아하니 네가 북쪽 애들 대장 같은데 말이야.”

“조르스 칸이라고 합니다, 패주.”

기다렸다는 듯 양문광이 확인을 해주었다.

“조르스 칸? 맞아?”

“그렇다네.”

한마디 겨우 뱉어낸 후 조르스 칸은 상대가 눈치 채지 못하도록 조용히 숨을 골랐다. 갖은 애를 써서 태연을 가장한 후 다시 말을 이었다.

“내가 바로 초원의 세 영웅 중 하나인 조르스 칸이라고 하지.”

더없이 자연스러운 태도였다.

스스로를 영웅이라 칭함에도 전혀 위화감이 없는 사내, 조르스 칸은 확실히 초원의 영웅이라 할 만했다.

물론 용무린은 한 번 픽 웃을 뿐이었다.

“너 정도가 영웅이라면 나머지 둘 역시 안 봐도 답이 나오는데?”

지독한 모욕의 연속이었는데도 불구하고 조르스 칸은 담담하기만 했다. 물론 등 뒤로 남모르게 식은땀을 쏟았지만 적어도 양문광이나 양경홍이 보기에는 대단하리만큼 초연해 보였다.

“하여간 말이야.”

어린아이 어르듯 용무린의 말이 계속해서 이어졌다.

“화친이다.”

“뭐, 뭐라?”

“살려는 주지. 이대로 얌전히 돌아가면 말이야.”

기가 막혔다.

‘아무리 개인의 무력이 강하다고 해도 그렇지. 어찌 감히 초원의 전사 삼십만 명을 앞에 두고…….’

화친이고 나발이고 끝을 볼 것이라 결심했다.

하지만 바로 그 순간,

화아아아-악.

폭발하듯 뿜어져 나온 불사신기가 조르스 칸의 숨통을 콱 조였다.

‘이, 이렇게 지독할 수가!’

믿을 수가 없을 정도다.

처음에는 애송이로 보였다. 그 후에는 비슷한 수준으로 보였고 잠시 뒤에는 전력을 다해 싸워보고 싶은 상대로 인식되더니 지금은 아예 쳐다보기가 두려울 정도다.

“이, 이놈!”

“이런 무례한 놈!”

하여간 무식하면 용감한 거다.

스릉. 스릉. 스르릉.

용무린이 조르스 칸을 놀리듯 숨통을 조이고 있으려니 저만큼 뒤에 쳐져 있던 추밀원의 무장 서너 명이 더는 참지 못하고 검을 빼들었다.

“아, 안 돼!”

화들짝 놀란 조르스 칸이 수하들을 말리는 사이 벌써 일은 벌어졌다.

“내가 경고했지!”

버언쩍. 스파-앗.

한 줄기 벼락과도 같은 광채가 주변을 휩쓸었다. 고려의 옛 법 가온누리 칼벼락이었다.

크릭. 키릭.

유리가 깨어지듯 칼벼락에 스친 놈들의 몸이 어긋나는가 싶더니 스르르 미끄러져 내렸다. 불사대천검에 당했을 때와 너무나 흡사한 죽음이었다.

“……!”

“……!”

감히 누구도 입을 열지 못했다.

저런 식의 죽음을 내리는 것은 조르스 칸에게도 불가해한 영역이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초원의 전사들에게는 다른 의미로 다가왔다.

자신들의 우상, 자신들의 영웅인 조르스 칸에게 알 수 없는 수작질에 당한 사이 초원의 전사들이 죽음을 당한 것으로 인식되었다.

“칸께서 위험에 빠지셨다.”

“놈들의 간계에 당했다.”

“칸을 구해야 한다. 가라, 초원의 전사들이여.”

“우와아아아!”

“끼랴-앗!”

콰두두두두.

선두에 서 있던 기마대가 일제히 말을 달렸다.

둥그렇게 휘어 마상에서 파괴력이 더 높은 만월도를 휘두르며 일부는 단궁의 시위에 살을 먹여 쏠 준비를 한 채 거리를 좁혔다.

용무린의 눈에 살기가 번들거리기 시작했다.

입술만 움직여 슬쩍 웃어 보이더니 씹어 뱉듯 한마디를 내뱉었다.

“잘 봐!”

휘슷.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용무린의 신형은 초원의 전설인 기마대를 향해 쏘아졌다.

“저, 저런 미친!”

숨통이 트인 조르스 칸조차 무모하다고 생각할 정도로 미친 짓이었다. 무인의 힘이 아무리 높다 하더라도 기마대를 상대로는 오래 버틸 수가 없기 때문이다.

콰두두두.

“거차-앙!”

차차착.

겁도 없이 뛰어드는 용무린을 단숨에 꿰어 주겠다는 듯 기마대 선두의 일백여 무장이 창을 꼬나 쥐었다. 전방을 향해 내밀며 허리를 숙였다.

씨잇. 씨시싯.

공을 빼앗길 수 없다는 듯 기마대 중간에서 단궁이 쏘아졌다. 용무린을 향해 소나기처럼 쏟아져 내렸다.

그런데,

버언쩍. 번쩍. 버번쩌저적.

날벼락이란 이런 것일까?

아니, 정확히는 가온누리 칼벼락이었다.

번개를 닮은 시린 빛이 용무린의 빈손이 휘감는 방향으로 피어올랐다.

스각. 카가각.

너무나도 손쉽게 기마대를 베었다.

기수의 내공과 무게에 말의 무게와 속도까지 더해져 그 어떤 내공심법으로 펼쳐낸 초식보다도 더 무거운 만월도부터 시작해 갑주와 기수의 갈비뼈와 척추까지 송두리째 쪼개졌다.

“크아악!”

“커헉!”

연이어 터지는 비명소리와 함께 피가 분수처럼 튀어 올랐다. 피분수가 무서운 속도로 뻗어나갔다.

버언쩍. 번쩍. 버번쩌저적.

연이어 쏟아져 내리는 칼벼락.

“크아악!”

“으악!”

꼬리에 꼬리를 무는 비명소리와 함께 놀라운 광경이 펼쳐졌다. 패배를 모르던 초원의 기마대가 정확히 둘로 쪼개어졌던 것이다.

그 사이로 흩날리는 피의 소나기라니!

버언쩍. 스각

“끄아악!”

버번쩍. 서걱.

“커헉!”

칼벼락 하나에 목숨 하나가 떨어졌다.

아니, 말까지 통째 쪼개었으니 둘의 목숨이 스러졌다고 해야 하려나?

스파아-앙!

어느새 일백여 기마대를 돌파했다.

그 뒤로도 아직 일천여 명에 이르는 기마대가 미친 듯이 달려오고 있었지만 용무린에게는 그다지 큰 위협이 될 수 없었다.

‘놈들을 일렬로 세워 놓고 차례차례 순번을 정해 덤벼드는 것도 아니고…….’

보통의 전장에서 하듯 달려 나왔지만 상대는 한 사람에 불과하지 않던가? 기세 좋게 달려 나왔어도 뭘 어떻게 해보기 힘든 상황인 것이다.

콰두두두.

기마대의 말발굽 소리는 아직도 요란했지만,

스각. 서거걱.

“크아악!”

“커헉!”

용무린은 일직선으로 내달려 기마대를 돌파한 후 북원의 본진을 그대로 파고들어 버렸다.

***

명 제국 본진.

부르르.

군사가 지휘하는 높은 수레에 우뚝 선 채 저 멀리 화친의 대화가 이뤄지는 곳을 지켜보고 있던 제갈문군의 몸이 가늘게 떨렸다.

화친을 논의해야 할 군막에서 돌연 시린 빛이 번득이는가 싶더니 붉은 핏물이 솟구쳤기 때문이었다.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놀랍게도 말발굽 소리도 요란하게 북원의 기마대가 출진을 했고 그에 대응해 용무린이 추호의 망설임도 없이 신법을 펼쳤던 것이다.

‘세상에. 초원의 기마대를 한 사람의 무력으로 맞서려 하다니!’

다른 사람이었다면 웃기는 소리라고 폄훼했으리라.

하지만 저 무시무시한 북원의 기마대를 일직선으로 뚫어버린 후 북원의 본진에 작살처럼 틀어박힌 사람은 다름 아닌 용무린이었다.

“과, 과연 무림왕…….”

탄식과도 같은 제갈문군의 말이 흘러나오는 순간이었다.

버언쩌저저적. 쌔애애액.

눈이 멀어버릴 것만 같은 칼벼락의 빛이 휘몰아치는 가운데 북원의 본진에 용권풍이 강림했다.

고려의 옛 법.

그 마지막 초식인 용오름 하눌신폭이 화려하게 나래를 펼친 것이다.

재앙 그 자체였다.

미친 듯이 휘도는 회오리바람은 한줄기 한줄기가 모두 심검으로 이뤄진 것이었고 회오리 외부에서 수도 없이 내리쳐지는 번개는 모두가 가온누리 칼벼락이었다.

보다 먼 곳으로는 나선형으로 꼬인 얼음송곳이 우박처럼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대자연에서 빨아들인 음의 기운에 주변의 수분을 섞어 만들어낸 얼음송곳이다. 어디 한두 개나 되어야 피하지. 끝도 없이 쏟아져 내려 대량살상을 했다.

“크아악.”

“커헉!”

“끄아아악!”

목이 터져라 지르는 비명소리와 함께 죽어가는 인원이 도대체 몇인가? 선두에서 전열을 가다듬고 서 있던 방패수와 창병 수백여 명이 쓸려 나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용오름 하눌신폭의 초식은 점점 그 위력을 더해가기만 했다.

공간까지 베어낼 위력에는 미치지 못했지만 칼벼락은 병장기와 갑주 그리고 사람의 뼈까지 통째 갈라버렸고 이리저리 움직이는 용권풍의 중심에 휘말려 들어간 방패수와 창병들은 아예 형체도 남기지 못하고 사라졌다.

보다 먼 곳에서 우왕좌왕대던 군사들은 나선형 얼음에 꿰어 픽픽 쓰러졌다. 비명을 지르는 대부분의 병사들이 바로 그들이었다.

파르르.

넋을 잃고 지켜보던 조르스 칸의 몸이 저절로 떨렸다.

무서웠다.

자신을 비롯한 초원의 영웅 세 명이 동시에 모든 힘을 쏟아낸다 하더라도 도저히 어떻게 해 볼 엄두가 나지 않을 정도였다.

그때 불현듯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살려는 주지. 이대로 얌전히 돌아가면 말이야.

‘내 부하들, 나와 함께 온 병사들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니었어. 그것은 바로 나를 향한 경고였던 거야.’

기마대의 수가 얼마든 상관이 없었다.

얼마만큼의 군사들을 앞에 세우고 있든 다 필요 없다는 것을 용무린은 직접 보여주고 있었다.

콰아아우우-웅!

천오백 보가 넘는 거리가 떨어져 있음에도 심혼을 울리듯 휘도는 저 용권풍은 대체 뭐란 말인가? 바람보다도 더 빨리, 어떠한 신법이나 기마의 움직임보다도 더 빨리 움직여 병사들을 집어 삼킨다.

작열하는 칼벼락.

심검의 회오리에 베이다 못해 아예 잘게 갈려버린 탓에 피보라가 되어 흩날리다 쏟아져 내리는 육편과 혈우, 거기에 더해 저 괴상망측한 나선형 얼음에 꿰뚫려 죽어가는 수하들은 또 얼마인가?

덜덜덜.

저절로 몸이 떨렸다.

“괴, 괴물.”

자신도 모르는 사이 그 말이 불쑥 새어 나왔다.

그렇다. 상대는 사람이 아니었다.

사람이라면, 인간이라면 절대로 저 정도로 무지막지한 초식을 펼쳐내 수백 수천의 사람들을 하루살이 쓸어내듯 쓸어버릴 수 없는 것이다.

“인의 장벽, 설사 백만 명의 군사들로 장벽을 세운다고 해도 막을 수 없어.”

빤히 그 상황이 그려졌다.

상대는 저 무지막지한 무공을 펼쳐 무인지경으로 뚫고 들어올 것이다. 주머니 속의 물건처럼 손쉽게 자신의 목을 가져가 버리리라.

‘멈춰야만 해.’

지금 멈추지 않으면 저 괴물이 돌아와 자신의 목을 베어낼 것이다. 아니, 어쩌면 혼자서 초원을 향해 진격할 수도 있다.

그렇게 되면 큰일이다.

저 괴물을 대체 누가 막을 수 있겠는가?

대칸께서 위험해진다.

‘대칸이 계시는 호화호특을 향해 놈이 짓쳐든다면?’

아무도 막을 수 없다.

청랑문의 모든 것을 쏟아 붓는다 해도, 북원의 세 영웅이 모두 목숨을 내어 놓는다 하더라도 막지 못하고 결국 치욕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그, 그만.”

조르스 칸의 입에서 새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하지만 하늘과 땅을 하나로 이어버린 용권풍은 멈춰지지 않았고 계속해서 수하들을 집어 삼켰다.

참혹하기 짝이 없는 모습이었다.

수하들이 베어지다 못해 잘게 갈린 육편이 혈우가 되어 쏟아져 내리는 광경이라니.

“그마-안!”

우르릉.

절실한 마음에 내공까지 담아 외쳤다.

그 마음이 용무린에게까지 전해진 것일까?

영원히 계속될 것만 같던 용권풍의 회오리가 점차 잦아지더니 이내 산들바람이 되어 사라졌다.

이윽고 드러나는 참상이란!

용권풍이 움직여 집어 삼킨 공간에 남아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병사들의 주검은 물론이고 그 많던 군마와 병장기들까지 깨끗이 지워져버렸다.

이 무지막지한 살육에 북원의 병사들도 기가 질렸다.

도망이라도 치고 싶었는지 뒤로 멀찌감치 물러나 서로 눈치만 보았다.

그 사이에 용무린 홀로 남았다.

하지만 그의 존재감은 평원 전체를 덮고도 남았다.

천상천하유아독존!

그 말에 가장 합당한 사내였다.

“……!”

잠시 숨을 고른 용무린이 둥실 떠 중앙의 천막이 있는 곳으로 움직였다. 조르스 칸 앞에 이르러서야 스르르 살포시 내려섰다.

“보았나?”

이 말이 무슨 의미인지 이제는 안다. 조르스 칸의 고개가 작게 끄덕여졌다.

못이라도 박아두겠다는 듯 용무린이 나직한 목소리로 으르렁댔다.

“얌전히 물러가라. 약속대로 살려준다.”

조르스 칸은 안도의 한숨이 새어 나오려는 것을 사력을 다해 참았다.

“내가 호화호특에 가게 하지 말도록.”

흠칫.

조르스 칸이 몸을 떨었다.

‘역시 내 생각이 맞았던 거야.’

최소한의 품위 유지를 위해 호흡을 고른 후 담담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여 보였다. 떨리는 목소리를 최대한 감춘 후 입을 열었다.

“감사하오. 조르스 칸의 이름을 걸고 앞으로 감숙의 땅을 밟는 일은 없을 것이라 약속하오.”

아는 만큼 보인다고 하지?

약속을 지켜준다는 용무린의 말이 진심으로 감사했다.

용무린의 고개가 짧게 끄덕여졌다.

“좋아. 지켜보지.”

명 제국을 파국 직전까지 몰아갈 수 있었던 전쟁은 그렇게 화친이라는 이름으로 끝이 났다. 물론 조정의 삼공과 삼고를 비롯한 문무백관들이 생각하던 화친과는 전혀 다른 방향의 화친이었다.

***

하루가 지났다.

상처투성이 난주성으로 되돌아가는 길.

총병관 양문광이나 유격장군 양경홍 그리고 군사 제갈문군을 비롯한 누구도 입을 열어 말을 하지 못했다.

솔직히 아직도 실감이 잘 나지 않았다.

이렇게 쉽게 난주를 되찾을 수 있을 줄이야.

칼 한 번 맞대 보지도 않고 조르스 칸이 축 처진 어깨를 한 채 왔던 길을 돌아갈 줄은 미처 몰랐다.

“원래 전쟁이 이렇게 쉬운 것인데 우리만 힘들고 치열하게 움직였나?”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

총병관의 말을 양경홍이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받았고 제갈문군은 그저 고개만 절레절레 흔들 뿐이었다.

그래도 병사들 얼굴은 밝기만 했다.

죽음을 각오해야만 하는 것이 전장일 터인데, 이번에는 거짓말 같은 장면만 조금 구경하다가 그냥 끝이 나 버렸기 때문이었다.

“아는 만큼 보인다고들 하지요. 아마, 조르스 칸에게는 패주의 무위가 그만큼 큰 두려움으로 다가왔을 것입니다. 호화호특의 언급은 대칸을 노리겠다는 협박이나 마찬가지였으니까요.”

“하긴, 그분의 무위만 생각하면 친분이 두터운 우리도 때때로 살이 떨릴 정도인데 가감 없는 살기에 노출 되었을 조르스 칸은 어떠했겠어?”

양경홍의 말에 동감이라는 듯 총병관이 고개를 주억거리며 받았다.

그러더니 불쑥 제갈문군에게 말을 건넸다.

“군사께서는 나와 감숙의 뒷정리나 좀 하시다가 함께 돌아가십시다.”

“당연히 그래야 하지요.”

총병관의 얼굴에 그나마 미소가 되돌아오게 된 것은 제갈문군이라고 하는 마음에 쏙 드는 우군을 발견할 수 있어서였다.

제갈세가의 가주답게 제갈문군의 심계는 깊고 병법에 밝은데 그것이 또 사리에 맞아 자신과 죽이 잘 맞았다.

‘감숙을 정리하며 함께 계책을 세운 후 돌아가면 썩어빠진 놈들을 깡그리 몰아내고 만다.’

상관세가의 일로 인해 많은 부분 물갈이가 되어 있기는 했지만 그럼에도 자리보전이나 잿밥에만 관심이 많은 인사가 너무나 많았다.

‘삼공이나 삼고. 그리고 나머지 떨거지들…….’

제갈문군과 함께 오군도독부의 힘을 움직이면 어려울 것도 없는 일, 이제는 정말 적을 맞이할 때 함께 맞서 싸울 수 있는 사람들로 조정을 채울 것이다.

총병관 양문광이 감숙을 안정시킨 후의 일을 머릿속으로 그리고 있을 때 제갈문군은 용무린의 얼굴을 떠올리며 뿌듯한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내가 할아버지가 된다. 외할아버지가.’

혹시나 하면서도 여식을 보냈던 것이기는 한데 정말 이렇게 될 것인지는 몰랐다. 얼떨떨하면서도 한 편으로는 너무 기뻤다.

‘체통 따위가 다 뭐란 말이냐?’

한때 힘이 없어 봐서 너무나 잘 안다. 체통, 그거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것이다.

아직 혼례를 올리지 않은 여식의 회임이었지만, 정말 눈곱만큼도 개의치 않는다.

‘내 사위는 천하의 영웅이다. 황룡패주에 무림왕이라 불리는 사내에게서 당당히 후손을 얻기까지 했으니 되레 축하를 해야지. 암.’

게다가 용무린은 자신에게 약속까지 해줬다.

-어쩌다보니 주약란 옹주를 버릴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에 대한 최종판단은 역시 령매가 내리게 될 것입니다, 장인어른.

약속드립니다.

령매가 싫어하거나 거부를 한다면 황제폐하와 척을 지는 한이 있다 하더라도 주약란 옹주를 절대 받아들이지 않을 것입니다.

물론 허락해도 그녀는 둘째입니다.

제게 있어서 첫 번째는 언제나 제갈영령뿐이니까요.

참으로 여러 가지 생각이 들게 하는 말이었다.

세상에, 자신의 여식이 싫어하면 황제와 척을 지는 한이 있더라도 옹주를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며 받아들인다 하더라도 둘째일 뿐이라니.

‘우쭐한 마음도 들고, 신하로서 죄송하기도 하고.’

마음이 복잡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어떻게 결정이 된다 하더라도 용무린의 의지가 확고한 이상 제갈세가에 해가 되거나 화가 미치지는 않을 것이라는 점이다.

‘백리소옥이 그렇게 가버렸던 이유가 컸겠구나.’

황제가 그토록 부마도위로 삼으려 했을 때도 버티더니 갑자기 바뀌었다.

‘아니면 이번 신마와의 싸움에서 죽을 고비를 또 넘겨서 그런가?’

두 가지 이유가 복합적으로 작용한 듯싶다.

백리소옥의 죽음으로 인해 용무린의 마음에 틈이 생기고 죽을 고비를 넘기며 자손의 번창이라는 본능이 자극받은 것 같았다.

그렇지 않았다면 주약란 아니라 그보다 더한 신분과 미모를 가진 여인이라 하더라도 용무린의 마음을 비집고 들어올 수 없었으리라.

‘어쩌면 더 잘 된 것일 수도…….’

황룡패주에 부마도위까지 더해진다.

나쁘지 않다.

무림왕이라는 지위가 보다 더 확고해질 것이며 한동안 무림의 누구도 그의 위치를 넘보지 못할 테니 덩달아 제갈세가도 튼튼해질 것이다.

‘나 역시 패주를 믿소이다. 부디 내 여식의 마음을 많이 아프게만 하지 말아 주시오.’

이제 바랄 것은 오직 하나 그것뿐이다.

***

비슷한 시간 용무린은 청해성을 향해 신법을 펼치는 중이었다.

처음에는 일직선으로 남하를 해서 사천성을 경유한 후 귀주성을 통과해 암전이 되어 음양신마의 근거지인 불회곡으로 침투하려고 했었지만 계획을 바꾸었다.

혹시나 하는 생각에 퇴각하는 북원의 무리를 감시하러 나섰다가 감숙성의 끝자락에서 뜻밖의 기운 한줄기를 잡아냈기 때문이었다.

‘혈교주의 힘이었어.’

이미 각인되다시피 한 힘이다.

틀림없다.

놈이 뿜어내던 그 저릿한 기운이다.

‘분명히 소멸했었는데?!’

신마와의 전면전으로 인해 소멸했다.

그 결과로 혈교는 공중분해가 되었고 살아남은 소수의 마인들은 뿔뿔이 흩어져 사라져버렸다.

‘그런데 어떻게 이곳 어귀에서 놈의 힘이 다시 느껴질 수가 있지?’

확인해야만 했다.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어느 날 느닷없이 나타나 재림을 한답시고 날뛰어 수많은 문파와 무인들이 다시 핏물 속에 스러질 수도 있는 일이다.

용무린의 발걸음은 하서회랑의 일부분이며 비단길의 중요거점인 서녕에서 멈춰졌다.

‘여기에서 하루거리에 청해호가 있지.’

혈교주의 힘은 그쪽 방향에서부터 전해지고 있었다.

청해호를 둘러싸고 있는 기련산맥의 대통산, 청해남산, 일월산 중 하나에서 뿜어지고 있는 듯싶다.

‘불회곡을 파고드는 것도 좋은데, 기왕 지나가는 길이니 하나라도 확실히 하고 가도록 하자.’

공연히 뒤통수 맞기는 싫다.

용무린은 서녕에 들러 객잔을 잡아 푹 쉬었다.

혈교주에 얽힌 일이기에 충분히 쉬며 불사신공도 가다듬었고 불사대천검과 고려의 옛 법에 대해서도 묵상을 하는 시간을 가졌다.

그런 후 육포를 넉넉히 챙겨 다시 청해호를 향해 길을 떠났다.

하루가 지난 후 청해호가 눈앞에 나타났다.

용무린은 작은 배 한 척을 빌려 목표로 했던 산들에 접근을 했다.

‘대통산은 아니야.’

청해호 바로 코앞에 대통산이 자리하고 있었는데 고원답게 키 작은 나무들만 무성할 뿐 아무런 기운도 느껴지지 않았다.

‘청해남산도 아니고…….’

배가 스치는 사이 눈을 감고 충분히 살폈다.

역시 아니었다.

감숙성에서도 느낄 수 있었던 혈교주의 기운은 어디에서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런데,

“여기다!”

일월산에 이르러 용무린의 눈이 번쩍 떠졌다.

“멈추시오.”

“어떻게 할깝쇼?”

“산에 가까운 쪽에 배를 대 주시오, 노인장.”

“아이고. 너무 가까운 곳으로는 댈 수 없습니다, 나리.”

사공이 사색이 다 된 얼굴로 손을 흔들었다. 아무래도 뭔가 곡절이 있는 것 같았다.

“무슨 일이라도 있습니까?”

“……!”

입에 담으면 큰일이라도 난다는 듯 뱃사공 노인은 입술에 힘을 꾹 주었다.

‘여기까지가 한계야. 이 이상 가까이 가거나 저곳에 관한 말을 입에 담는 사람들 모두가 험악한 모습으로 죽어 나자빠졌단 말이지.’

용무린에게까지 해를 입힐 수 없어하는 표정이 역력했다.

그 표정으로 미루어 용무린은 판단을 내렸다.

‘굳이 입을 열 필요도 없지.’

뱃사공의 이상행동이 더더욱 심증까지 굳혀주는데 더 뭘 바라겠는가?

‘굳이 시선을 끌 이유는 없었지만 시간을 낭비할 이유는 더더욱 없으니…….’

절그럭.

용무린은 약속했던 은자 다섯 냥을 뱃전에 내려놓은 후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덕분에 편하게 목적지에 올 수 있었습니다, 노인장. 조심해서 돌아가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스스슷.

바람처럼 가볍게 떠오른 용무린은 놀란 나머지 뱃사공 노인이 뒤로 나자빠지는 것을 아랑곳하지 않은 채 일월산을 향해 날아가 버렸다.

“시, 신선님이셨구나. 신선님께서 저 붉은 옷의 귀신들을 쳐 없애기 위해 강림하셨던 것이었어.”

가까이 다가오거나 붉은 옷을 입은 사람들에 대한 말만 해도 불현듯 나타나 생명을 앗아간다는 귀신들과는 확실히 달랐다.

친절한 말과 과감한 후의.

더불어 하늘을 훌훌 날아다니는 사람은 신선밖에 없다고 뱃사공은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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