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일석이조
일원산에 가까이 다가가면 갈수록 용무린의 심장은 가쁘게 뛰었다.
‘확실해. 이곳 어디쯤이다.’
느낌이 더 정확해졌다.
이제는 정확한 방향까지 가늠할 수 있을 정도.
그러던 어느 한순간 작은 사원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노란 칠이 곳곳에 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한때는 황교의 한 지파였던 곳으로 보였으나 지금은 전혀 다른 놈들의 소굴이 되어 있는 곳일 게다.
‘혈교…….’
어떤 가면을 쓰고 있든 상관없다.
이미 혈교주의 기운이 이 안에서 뿜어져 나오고 있음을 감지한 이상 더는 도망칠 수 없다.
“이번에야말로 끝을 내주지.”
화아악.
용무린의 전신에서 불사신기가 폭발하듯 뿜어졌다.
***
건물 내부.
일반 사찰과 비슷한 규모의 사원 내부는 크고 작은 여러 건물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그 중 일원산이 폭 안기다시피 만들어진 건물이 존재했다.
신당(神堂).
사찰이나 사원답지 않은 편액이 걸려 있고 닫힌 문을 열면 일월산 안으로 이어진 기다란 동굴이 나올 것이다.
“어헉!”
신당 안쪽 깊숙한 곳에 좌정하고 있던 혈교 대사제가 소스라치게 놀랐다. 갑자기 심혼을 뒤흔드는 무지막지한 기운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이, 이 힘은 흡사…….”
아리만의 가짜 화신 주제에 감히 혈신령의 힘을 넘어섰던 신마가 나타날 때와 비슷했다.
“하지만 달라.”
신마가 보여주었던 힘은, 쓰고 있는 가면만 다르지 본질적으로는 동류라는 느낌이 강했다면 지금 감지한 힘은 보다 더 밝고 진한 느낌이라고나 할까?
“도망칠 수 없다.”
어쨌거나 결론은 그거다.
혈교주와 신마가 서로 대결을 할 때는 몸을 빼낼 틈이라도 있었지만, 혈교주가 없는 지금은 도주도 불가능하다.
‘고개를 조아리든지 아니면 그냥 발악 좀 하다가 처참하게 죽든지…….’
둘 중 하나를 택해야만 한다.
그때였다.
쿠와아아앙. 트드드드.
고막이 터질 듯한 굉음과 함께 숨이 턱 막히는 충격파가 밀려왔다. 일월산이 진저리를 치며 알려주었다. 절대로 맞설 수 없는 상대라고.
‘마지막으로 혈신령에 기댄다.’
결정했다.
죽을 때 죽더라도 마지막 수 하나는 써보고 죽을 거다.
‘성공하면?’
푸흐흐.
대사제의 얼굴이 일그러지며 진득한 웃음이 떠올랐다.
그 순간 밖에서 거대한 외침이 들려왔다.
“혈교주! 나와!”
우르릉.
하늘과 땅이 동시에 울렸다.
기다렸다는 듯 일어나 밖으로 향하는 혈사제의 손에는 혈교의 모든 것이랄 수 있는 혈신령이 들려 있었다.
***
확실히 수상한 곳이었다.
어지간한 중소문파 크기는 족히 되어 보이는 사원 또는 사찰인데 느껴지는 기척은 모두 열을 넘지 않고 느껴지는 기척 모두에게서 혈교주와 같은 종류의 힘이 느껴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일단 도망칠 엄두를 내지 못하게 만든다.’
그래서 대뜸 중심에 자리한 전각 하나를 때려 부쉈다.
고함을 질렀다.
말을 듣지 않는다면 지금 당장 사냥을 시작할 것임을 알리는 살기를 가득 담아서 말이다.
말귀를 알아먹는 놈들이었다.
“나오는군.”
불쾌한 기운 십여 개 중 가장 큰 덩어리가 밖으로 나오고 있었다. 용무린이 혈교주라고 오해할 만큼 무지막지한 기운이 자신을 향해 다가오기 시작했다.
그런데…….
‘뭐지? 저 자식은?’
기운을 품고 있는 주체가 사람이 아닌 것인가?
힘의 크기로만 보면 분명히 혈교주 본인이거나 그에 준한 사람이어야 했는데 대사제의 눈빛은 전혀 그렇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굳이 따지자면 오마종의 하나 정도?’
하여튼 혈교주 본인은 절대로 아니었고 그에 준한 사람 역시 아니었다. 그 정도 되는 존재들이라면 아무리 평범함을 가장해도 감지할 수 있었으니까.
‘설마, 내가 감지하지 못할 정도의 고수?’
그럴 리가 있나?
‘뭐, 음양신마 같은 놈도 있긴 했지.’
그놈이 진짜 역천자였을 줄은 정말 상상도 하지 못했다.
완전히 사라진 것으로 알았던 불사마력을 흡수하며 놈이 자신을 드러냈을 때 얼마나 놀랐던지!
‘또 그런 놈은 아니겠지?’
갑자기 슬쩍 긴장이 되었다.
그런 용무린을 향해 혈교 대사제가 고개를 숙였다. 공손히 입을 열었다.
“환영합니다, 귀인이시여.”
“환영은 개뿔.”
살기를 보면 모르나?
들어오자마자 건물 하나 때려 부순 후 잡아먹을 듯 살기를 뿜어내는데 귀인이라니 더 웃긴다.
“됐고…….”
용무린의 시선이 대사제의 가슴으로 향했다.
얌전히 모인 그의 손에는 기분 나쁘게 생긴 가면 하나가 들려 있었다.
“그거!”
보는 순간 비로소 알 수 있었다.
혈교주의 힘을 뿜어내던 것은 눈앞의 사내가 아니라 바로 저 가면이었다는 것을.
“말씀하소서, 귀인이시여.”
“네 손에 들고 있는 건 뭐냐? 그게 대체 뭔데 혈교주의 힘이 그토록 강렬하게 뿜어져 나오고 있는 거지?”
혈사제는 숨기지 않았다.
“혈신령이라고 합니다, 귀인이시여.”
“혈신령?”
용무린의 눈이 살짝 동그래졌고 혈사제는 충직한 얼굴로 다시 말을 이었다.
“혈교의 시작이자 끝인 성물입니다.”
“……!”
용무린의 눈이 가느다래졌다.
혈교의 시작이자 끝인 성물.
듣기만 했음에도 뭔가 수상한 냄새가 풀풀 나는 듯했다.
‘콱 부숴버릴까?’
칼벼락으로 베든 불사대천검으로 베든 순간적으로 소멸시켜버릴 수 있을 듯했다. 그 안에 깃든 힘 역시 불사신기에 휘말려 스러지겠지.
‘물론 그 반대일 수도 있긴 하지만…….’
아직도 그 기억이 생생하다.
신마의 소멸과 함께 공간 저편으로 사라져버렸을 줄로만 알았던 불사마력이 음양신마의 방울소리 한 번에 다시 쏟아져 나왔다.
어디 그뿐인가?
마땅히 그래야만 했다는 듯 음양신마의 몸속으로 남김없이 빨려들기 까지 했다.
‘섣불리 깨긴 좀 그렇지?’
그랬다가 녀석의 몸으로 빨려들면?
‘그건 좀 곤란하잖아.’
일단 녀석이 대답을 잘 하고 있는 것 같으니 궁금한 것을 조금 더 물어 보기로 했다.
“내가 그걸 부숴버리면 어떻게 하려고 들고 나왔지? 혈신령? 너희 혈교의 시작과 끝이라면서?!”
대사제가 묘한 미소와 함께 툭 내뱉었다.
“그래주시면 더 감사할 뿐입니다.”
“……!”
진위를 가리려는 듯 용무린의 눈이 가느다래졌다.
대사제의 말이 계속해서 이어졌다.
“혈신령 안에 깃들어 있던 아리만의 힘이 주변으로 뻗어나가게 될 것입니다. 무인이든 평범한 양민이든 그 힘을 받은 자들은 각성을 하게 될 것이고 결국 하나로 합쳐지게 될 테니까요.”
그럴 수도 있나?
‘하긴, 마음대로 주인을 바꿔 깃들던 불사마력을 생각하면 영 불가능한 일은 아닌 듯하지만…….’
아무래도 믿기지는 않았다.
‘음양신마의 경우는 그놈 자체가 역천자였으니까 조금 특별한 경우라고 봐야 하지 않나?’
그렇게 생각하자니 신교 조사동 한 귀퉁이에 처박혀 있던 흡성대법이 떠올랐다.
‘혈신령의 힘을 그와 비슷한 능력을 통해 서로 빼앗을 수 있단 말일까?’
자신만만한 미소.
대사제의 표정을 보아하니 그런 듯싶다.
그런데,
‘웃어? 감히 내 앞에서?’
자존심이 살짝 상했다.
저 새끼 먼저 죽여 버릴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렇다면 다 죽이고 네 손에 들린 그것만 회수해서 가면 되겠네?”
막을 수 있으면 막아봐.
화아악.
불사신기가 순간적으로 뿜어져 나왔다. 혈교가 숨어 들어온 이곳 사찰을 통째 휘감았다.
‘숨도 쉬기 힘들걸?’
사실이라는 듯 대사제의 얼굴이 잔뜩 붉어졌다. 이마와 목에 굵은 핏줄이 솟구쳤다.
“마, 마음대로 하시길…….”
하지만 대사제는 여전히 태연했다.
기꺼이 받아들이겠다는 듯 혈신령을 내밀었다. 죽여도 좋으니 어서 빨리 이 성물을 가져가라는 듯 목을 길게 늘이기까지 했다.
‘하아, 이런 경우는 또 처음인데?’
헷갈렸다.
그리고 뭔가 조금 켕겼다.
‘왜지?’
대체 저 혈교의 마인은 무슨 생각으로 자신들의 시작과 끝이라는 성물을 귀찮은 물건 취급을 하는 것일까?
당최 알 수가 없다.
용무린의 혼란스러움을 익히 짐작하고 있다는 듯 대사제의 목소리가 계속해서 이어졌다.
“이렇게 하든 저렇게 하든 혈신령은 어차피 귀인의 손에 들어가게 되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지키던 저와 휘하 사제들의 역량이 부족하니 어쩔 수 없는 노릇이지요.”
“…….”
“파괴하면 즉시 그 안의 힘이 주변의 생명을 찾아 흩어졌다가 다시 모일 것이요, 우리의 관리가 없이 그냥 봉인을 한다 하더라도 오래 버티지 못하고 혈신령은 깃들 곳을 찾아 떠날 것입니다.”
땅에 파묻어도 소용없다는 뜻이다.
결국 인연이 이렇게 닿아 서로가 만났으니 해결을 봐야 한다는 뜻인데…….
“그렇다면 제어 가능성을 찾기 위해 귀인께서 혈신령을 직접 살펴보셔야만 할 터. 일신의 능력에 자신이 있으시다면 기꺼이 혈신령을 귀인의 얼굴에 착용해 보시길 권해드리는 바입니다.”
결국 저것이었나?
내게 저 혈신령이라는 가면을 씌우기 위해서 지금까지 그렇듯 당당한 태도와 얼토당토 않는 헛소리를 지껄여왔던 것인가?
‘독?’
그것은 아니다.
혈신령이라고 하는 이 성물에서는 독 기운과는 완전히 다른 혈교주의 기운이 뿜어지고 있었다.
‘차기 혈교주의 탄생을 막기 위해서라도 혈교의 성물을 처리해야만 해.’
그렇다면!
반짝!
용무린의 눈에서 신광이 번득였다.
직접 손을 움직여 낚아채기라도 한 듯 대사제의 손에 들려 있던 혈신령이 날아올랐다. 용무린의 손으로 스르르 잡혀 들었다.
“일단 회수는 했고.”
공손히 바친 것을 신경질 적으로 잡아 챈 듯해서 기분이 별로였지만 어쨌든 혈교의 전설이라는 성물을 손에 쥐는데 성공했다.
‘혈교 떨거지들인데 그냥 다 죽일까?’
생사의 기로.
쿵쿵쿵쿵쿵.
대사제의 심장이 이전보다 확실히 빠르게 뛰는 것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놈이 긴장했어.’
긴장했다는 것은 곧 속이는 게 있다는 뜻이 된다.
그렇지 않다면 조금 전에 목을 길게 빼던 순간처럼 변함이 없어야 할 테니까.
‘죽이는 것은 일단 유보한다.’
고민이 살짝 들었지만 용무린은 일단은 내버려두기로 마음먹었다. 혈신령으로 인해 뭔가 생각지도 못한 일이 벌어지기라도 하면 물어 볼 곳 한 군데 정도는 있어야 했기 때문이다.
“마음대로 하라 했으니 이것은 일단 내가 접수하겠어.”
“귀인의 존성대명이라도 알 수 있겠는지요?”
그 정도야 뭐.
“용무린이다.”
익히 알고 있던 이름이었는지 대사제의 눈이 동그래졌다.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원하는 것을 손에 넣었으니 이제 마음대로 하시길 바랍니다, 귀인이시여.”
그 말을 끝으로 눈을 감아 버리는 대사제.
언제 심장이 빠르게 뛰었느냐 싶게 다시 고요해졌다.
“……!”
잠시 대사제와 주변에 오체투지 하고 있는 혈사제들을 둘러본 용무린은 아무런 말도 없이 그대로 신형을 뽑아 올렸다.
휘슷.
그제야 슬며시 눈을 뜨는 대사제.
“푸흐흐. 던져진 주사위가 구르기 시작했다.”
자신을 비롯해 혈사제들의 목숨을 구하는 것이 첫 번째 도박, 혈신령을 처음부터 내놓으며 마음대로 하라고 목을 길게 뺐던 점이 유효했다.
딱 꼬집어 말을 할 수는 없었지만 뭔가 켕겼던 용무린은 자신과 혈사제들을 죽이지 않았다. 그냥 혈신령만 받아들고 떠나갔다.
“크크큭. 결국 제어한답시고 착용할 수밖에 없을 것이외다, 황룡패주.”
혈신령은 혈교의 근간을 이루는 성물.
대사제인 자신과 혈사제들의 힘이 없다면 폭주해 버리고 말 것이다.
“폭주를 하든 그 전에 제어를 한답시고 착용을 하든, 그것은 패주의 마음이겠으나……. 주사위가 던져졌다는 것만 아시오. 크크크크큭.”
대사제가 길게 웃기 시작했다.
***
다시 청해호변으로 돌아온 용무린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하아, 이거 괜한 짓을 한 것 같은데…….”
그냥 놔둘 수 없어 집어 들고 오긴 했는데, 생각하면 할수록 혈신령은 계륵이었다.
“그냥 냅다 부숴버릴 수도 없고.”
하고 싶으면 아예 부숴버리라지 않는가?
놈은 그 말에 덧붙여 감사하다고까지 했다. 혈신령의 힘이 깃들 생명을 찾아 흩어졌다가 다시 한 곳으로 합쳐질 것이라 더 좋아하는 것 같았다.
“땅에 파묻어도 소용이 없다고 했었고…….”
그렇다고 불사신기로 제압을 한 상태로 소림이나 무당파 혹은 그만한 능력이 있는 고수나 기인을 찾아 돌아다닐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이차 신마대전은 아직도 끝이 나질 않았고 자신은 감숙의 일을 해결했으니 최대한 빨리 암전이 되어 불회곡을 뒤져 만에 하나를 대비해 역천자가 갈아탈 몸을 죽여 없애버려야 한다.
“그렇다고 계속 이대로 들고 다닐 수도 없잖아.”
괜한 짓을 했다는 후회가 들었다.
물론 한편으로는 어쩔 수 없는 일이라는 생각도 한다.
“혈교주의 힘이 느껴졌는데 모른 체 하고 그냥 갔다가 얼마 지나지도 않아서 다시 혈교가 재림한답시고 날뛰면 그때는 어떻게 하겠어.”
처리하기 위해 나서는 것이 옳은 일이긴 했는데, 막상 혈신령을 손에 들고 보니 진퇴양난인 거다.
“결국 놈의 말대로 위험을 감수해야만 하나?”
제어를 위해서라도 가면을 한 번 써보라고 했었다.
놈의 심장이 빠르게 뛰던 것으로 보아 바로 그 행동에 흉계가 숨어 있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젠장. 모르겠다.”
용무린의 시선이 혈신령으로 향했다.
가면 안쪽에 피처럼 붉은 색의 기운이 요사하게 번들거리기 시작했다.
“죽음까지 이겨낸 불사신공이라면 이 힘도 이겨낼 수 있겠지.”
혈신령을 천천히 들어 올렸다.
혈신령 안쪽의 요사한 기운이 붉게 번득이는 순간이었다.
츄리릿.
독사처럼 날카롭게 뿜어진 혈신령의 힘이 용무린의 얼굴과 연결이 되었다. 초절정 수준의 무인이라고 해도 꼼짝없이 당할 정도의 힘으로 끌어당겼다.
“이런 시건방진!”
용무린의 손아귀에 푸른 힘줄이 돋아났다.
불사신기를 휘돌려 어떻게 하든 달라붙으려 하는 혈신령의 힘을 가볍게 떨쳐내 버렸다.
치릿. 치리릿.
요사한 붉은 빛의 일렁임은 먹잇감을 놓쳐 아쉬워하는 듯 보일 정도였다.
“흥. 이런 방법을 통해 강제로 착용하는 거다 이거지?”
어림도 없는 수작이었지만, 대사제 놈의 말처럼 제어를 위해 착용해 보기로 마음을 먹은 상태다. 용무린은 천천히 혈신령을 얼굴로 다시 가져갔다.
버언쩍. 츄리릿.
대뜸 뿜어진 요사한 붉은 빛이 얼굴 곳곳에 틀어박히는 느낌이 들었다. 동시에 무서운 힘으로 끌어당겼다. 이 기회를 놓치지 않겠다는 듯 발버둥 쳤다.
“이거, 애 좀 먹겠는데?”
정신이 날카롭게 곤두섰다.
필생의 적과 싸움을 시작한 듯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혈교의 시작이자 끝인 성물이라더니 아무래도 일이 고약하게 될 모양이었다.
‘그렇다고 모양 빠지게 이대로 물러날 수야 없지.’
혈교주를 죽여 버린 신마의 목을 벤 사람이 바로 나다.
이까짓 기운 따위에 당할 내가 아닌 거다.
‘너, 사람 잘못 골랐어.’
잡아먹으면 내가 잡아먹지 잡혀 먹힐 생각 따위 눈곱만큼도 없었다.
‘좋아. 어디 한 번 해보자.’
후우우웅.
고려의 옛 법이나 불사대천검을 펼칠 수 있을 정도의 불사신기를 끌어 올리는 순간,
찰싹!
혈신령이 용무린의 얼굴을 완벽하게 덮었다.
버언쩌저적.
기다렸다는 듯 뿜어진 요사한 붉은 빛이 용무린의 몸을 송두리째 집어 삼켰다.
***
일월산 중턱의 혈교 사원.
무엇을 본 것일까?
아스라이 멀리 보이는 청해호를 바라보던 대사제의 눈에서 예사롭지 않은 빛이 번득였다.
“오오오!”
대사제가 격동하듯 흐느끼며 떨쳐 일어났다.
주먹을 불끈 움켜쥐며 외쳤다.
“시작됐다.”
사람의 안력으로는 아스라이 형태만 보이는 청해호에서 벌어지는 일들이 보일 리 없다.
하지만 자신은 혈교의 대사제, 분명히 느낄 수 있었다.
신마의 손에 의해 죽어간 혈교주 혈마 나령의 힘까지 흡수한 혈신령이 용무린의 몸에 깃들기 시작했다.
“오라, 혈사제들이여.”
“명!”
휘스슷.
대사제의 명령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혈사제 열 명이 다가왔다.
“그분이 눈을 뜨기까지 호법을 선다. 또한 혈신의 탄생을 돕는다.”
“명!”
대사제는 그 즉시 신법을 펼쳤다.
눈으로는 보이지 않아도 심령에 또렷이 떠오르는 힘의 근원을 향해 움직여 갔다.
휘스스슷.
혈사제들이 한결같은 얼굴로 그 뒤를 따랐다.
***
반시진이나 흘렀을까?
대사제와 혈사제들은 온통 혈광으로 뒤덮인 용무린을 찾아낼 수 있었다.
“혈신의 탄생을 돕는다.”
재빨리 일렬로 늘어섰다.
둥그렇게 용무린을 에워싼 후 힘을 개방했다.
대사제인 자신의 힘과 혈사제들의 힘을 하나로 단단히 묶었다.
“시작하라. 혈신강령의 축원을 마신께 빌어야 해.”
“오옴! 아라도르마라 오옴!”
“오옴! 아라도르마라 오옴!”
혈사제들이 일제히 내공을 끌어 올렸다. 혈신강령의 축원을 마신에게 빌었다.
음사한 기운이 너울거리더니 하늘과 땅 전체를 붉은 빛으로 물들이기 시작했다. 용무린을 집어 삼킨 빛과 하나로 얽혀들었다.
“푸흐흐. 이 어찌 기쁘지 않겠는가?”
좋아 죽겠다는 듯 대사제가 빛 속에서 웃음을 터뜨렸다.
‘용무린이 혈신령의 힘을 오롯이 흡수하면 전대 아리만의 화신을 뛰어 넘는 강대한 혈교의 주인으로 거듭나게 될 것이고, 그 반대라면 본교에게 막대한 손해를 입혔던 용무린을 처단해 혈신령으로 흡수하게 될 것인즉!’
결과가 어떻게 나오든 혈교로서는 손해날 것이 하나도 없는 일이었다.
‘크크큭. 도박의 참 맛이란 바로 이런 것이지.’
가장 위험했던 가능성은 용무린이 자신과 혈사제들을 깡그리 죽인 후 혈신령만 지닌 채 떠나는 것이었다.
‘파괴를 한다면 내가 말했던 것처럼 깃들 곳을 찾아 혈신령의 힘이 사방으로 뿜어질 것이니 결국에는 하나가 되어 돌아올 것이다.’
자신들이 죽는다고 해도 혈교의 맥은 혈신령으로 인해 이어지게 되리라. 혈신령은 대사제인 자신과 혈사제들이 계속해서 봉인의 힘을 부여해야만 그대로 유지가 되는 기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냥 땅에 깊이 파묻어 버린다면?
그것만큼은 답이 없다.
얼마만큼 깊이 묻느냐에 따라 달라지겠지만 누군가가 혈신령이 묻힌 대지에서 수련을 하면 혈신령의 힘을 조금씩이나마 흡수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정도로는 혈교의 모든 것을 이을 만큼의 고수가 나오기 어렵다.
그야말로 혈교의 끝인 것이다.
그 마지막 가능성이 너무 두려워 심장이 쿵쿵 뛰는 것을 참기가 힘들었다.
자신이 있다면 소멸시키라고 충동질을 하긴 했지만 솔직히 땅에 파묻어 버린 상태에 자신들마저 다 죽은 후라면 답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다 잘 됐다.’
모든 경우의 수 중 최고의 가능성으로 일이 진행되는 중이다.
용무린이 혈신령을 사용했다.
이제 둘 중 하나다.
‘아리만의 화신으로 각성을 하면 기쁜 마음으로 충성을 하면 될 것이고 그 반대라면…….’
본교에게 진 죄를 갚는 셈치고 용무린은 자신의 모든 것을 혈신령에 토해내고 죽게 될 것이다.
“크크큭. 오옴! 아라도르마라 오옴!”
통쾌하게 웃던 대사제 역시 혈신강령의 축원을 마신에게 빌기 시작했다.
***
호남 성도 장사의 승선포정사사 지하.
연무장으로 거듭난 공간을 당당히 차지한 채 불사신공의 힘을 떨쳐내기 위해 애쓰던 음양신마의 눈이 한순간 잔뜩 일그러졌다.
‘뭐지?’
정체를 알 수 없는 몹시 불쾌한 기분이 들었다.
‘이 빌어먹을 놈의 기운이 기승을 부려서 그렇게 느끼는 것인가?’
그럴 리가 없다.
용무린과 싸울 때 깃든 힘과 그 후에 덤벼 든 놈들과 싸우면서 파고든 힘들이 자신을 괴롭힌 것이 어디 하루 이틀이겠는가?
‘그 힘든 싸움을 하면서도 멀쩡하던 기분이 갑자기 이렇게 주변 모든 생명을 다 죽여 버리고 싶을 정도로 불쾌해지는 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지?’
이것이 바로 전대 신마와 음양신마가 다른 점이다.
전대 신마는 용무린이나 혈교주가 전력으로 뿜어내는 기운과 파동에 민감했다. 그것은 그가 목숨을 걸고 불사마력의 합일을 이뤄낸 장본인이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음양신마는 그런 과정이 없었다.
죽을 고비 따위는 실험체에 불과했던 운룡장의 장손과 전대신마가 모두 대신 해주었고 자신은 그 결실만 맛있게 따먹었다.
그 작은 차이가 날카롭던 전대 신마의 감각을 계승할 수 없게 만들었다.
환혼대법의 힘으로 불사마력은 다시 흡수할 수 있었지만 목숨을 걸고 무극의 경지를 이뤄낸 감각까지는 흡수할 수 없었던 것이다.
‘별 수 없다.’
아무리 생각해도 알 수 없는 일이어서 음양신마는 결국 이렇게 결정할 수밖에 없었다.
‘자시 생 동남동녀의 정혈.’
시간이 걸린다 하더라도 그 방법이 최선이다.
‘실패만 거듭하던 불사신공과 규천마력을 무극의 일원으로 합일시켜 낸 것이 바로 자시 생 동남동녀의 정혈이 지닌 효험이야.’
그러니 자신의 몸에 깃든 놈들의 힘 따위 전대 신마가 필요로 했던 것의 반만 있어도 충분히 씻어낸 후 한 발 성큼 나아갈 수도 있을 것이다.
‘그나저나 시간이 이렇게 많이 흘렀는데 대체 무얼 하고 있기에 아직까지 소식이 없는 거야?’
명령을 내린 지 벌써 달포도 넘게 지났다.
모였으면 얼마가 모였다, 아니면 자시 생이라는 특이함 때문에 시간이 걸린다, 등등 뭐라고 보고가 있어야 할 시간이었다.
‘본보기를 보여야 하나?’
슬그머니 부아가 치밀었다.
연습이기는 하지만 황제를 참칭하느라 피 보기를 조금 눌러 참았더니 놈들에게 우습게 보인 것인가? 하는 생각마저 들 정도다.
“삼공과 삼고는 고에게 오너라!”
우르릉.
얼음장 같은 음양신마의 목소리가 승선포정사사를 통째 뒤흔들었다.
***
자금성 태화전.
고대하던 감숙의 소식이 도착했다.
붉은 밀랍으로 봉인이 된 전서가 황제의 손에 놓였다.
긴장한 빛이 역력한 눈으로 봉인을 끊고 전서 내용을 읽어 내려가던 황제의 얼굴에 녹아내릴 듯한 미소가 번져가더니 이내 광소가 되었다.
“크하하하!”
통쾌하기 짝이 없는 웃음이었다.
‘대체 왜 저러시지?’
‘화친이 잘 처리가 된 것인가?’
‘감숙의 전쟁이 끝이 났는가 보군, 그래.’
‘궁금하군. 일이 잘 처리가 되었다면 그 공에 대한 떡고물이 우리에게도 떨어질 것인데 말이야.’
삼공과 삼고가 기대감 가득한 눈으로 황제의 용안만 바라볼 때였다.
“감숙의 일은 완전한 해결을 보았다.”
“감축 드립니다, 폐하.”
“폐하의 성덕에 힘입어 조르스 칸이 주약란 옹주와의 혼사로 만족하고 물러간 것으로 보여집니다, 폐하.”
“그렇사옵니다. 모든 것이 다 폐하의 성덕에 힘입어 잘 해결된 것이 옵니다, 폐하.”
삼공과 삼고가 혀에 꿀이라도 머금은 듯 달콤한 목소리로 황제의 덕을 찬양했다.
꿈틀.
황제의 눈에 서슬파란 독기가 어렸다.
삼공과 삼고를 비롯한 겁쟁이들을 당장에라도 잡아먹을 듯 노려보았다.
‘왜 저러시지?’
‘어째서……?’
심상치 않은 느낌에 삼공과 삼고는 잽싸게 고개를 더 조아렸다. 더 이상의 말을 삼간 채 황제의 말이 이어지기만 기다렸다.
“후우.”
나직하게 숨을 한 번 내쉰 황제가 다시금 입을 열었다.
“조르스 칸은 다시 감숙 너머 북원으로 패퇴했다.”
“‘패퇴.’라는 말씀이십니까, 폐하?”
“그래.”
모두의 눈이 동그래졌다.
하지만 황제는 전서 안에 적힌 내용을 모두에게 말해줄 생각이 없는 모양이었다.
“파발을 보냈다 하니 자세한 이야기는 전령이 도착하면 듣는 것으로 하고, 경들은 감숙에서 벌어지던 전쟁이 해결되었으니 이대로 내치에 힘쓰라. 알겠는가?”
그렇다고 하는데 더 뭘 어쩌겠는가?
“예, 폐하.”
“알겠사옵니다, 폐하.”
그저 기쁘기 한량없는 얼굴로 답하며 고개를 조아릴 뿐이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황제의 눈은 보이지 않는 누군가에게로 향했다.
‘패주. 어서 일을 마치고 돌아오라. 고와 더불어 열 동이의 술을 마셔보자꾸나.’
두근두근.
모처럼 만의 기쁨에 황제의 심장이 기분 좋게 뛰었다.
***
무한 비룡문 용대명의 집무실.
실질적으로 정파를 이끌어 가는 중추가 한 자리에 모여 회의를 벌이는 중이었다.
“하오문과의 연합은 잘 되었습니까?”
“그렇소이다, 군사. 이번에 개방의 용두방주가 직접 남경 등왕루를 방문하여 당대 하오문주인 이능하와 협약을 맺었다고 합니다.”
“오오, 참으로 잘된 일입니다. 수고하셨습니다, 화운 태상장로님.”
“별 말씀을…….”
용대명의 진심 어린 치하에 화운이 기쁘게 웃어 보였다.
“아미타불. 패주가 없어도 이렇듯 무림의 정기가 바로 설 수 있음이니…….”
“그저 감사할 뿐이오. 허허허.”
법정과 자운진인이 한마디씩 하며 너털웃음을 터뜨렸고 그 곁에서 지켜보던 화산의 옥진도장은 빙그레 미소만 지어 보였다.
잔뜩 붉어진 얼굴로 용대명이 입을 열었다.
“과찬의 말씀이십니다. 그것보다는 어서 빨리 그만한 결과를 내놓아야 한다는 생각뿐입니다.”
용대명이 원탁 위에 지도를 쫙 펼쳤다.
호남성 성도 장사 인근의 지도였는데 대, 소 관도와 강줄기 등이 일목요연하게 그려져 있었다.
“여기, 여기, 그리고 여기!”
용대명의 손이 몇몇 관도와 강가의 포구를 짚었다.
하나같이 성도 장사로 접근하기에 용이한 곳들이었다.
“개방과 하오문에서 얻은 정보를 토대로 보건대, 며칠 사이 이곳들을 통해 관병들이 아이들을 장사로 호송하려 들 것입니다.”
“흐음. 생각보다 빠르구려.”
“설마하니 이렇게 빨리 동남동녀를 모을 수 있을 줄은 미처 몰랐소이다.”
법정과 자운진인의 목소리에는 우려가 가득했다.
“자시 생이라고 하는 특별함 때문에 시간이 걸릴 테지만 관과 군을 동원한다고 하면 그리 오래 걸리지도 않을 것입니다. 화운장로님이 가져온 하오문의 정보가 그것을 말하고 있었습니다.”
잠자코 듣고 있던 화운장로가 보충설명을 해주었다.
“하오문의 힘은 여인들, 그것도 고관대작의 첩실로 들어가 있는 여인들에게서 나옵니다.”
감히 황제를 참칭한 음양신마 따위에 붙은 놈들이긴 하지만 고맙게도 평소 여인을 밝혔기에 하오문 소속 여인들을 첩실로 받았다.
그들의 입을 통해 음양신마의 계획을 보다 확실히 알 수 있었던 것이다.
“과거에 용무린 맹주가 알아냈던 비밀처럼 이번에도 역시 놈은 자시 생 동남동녀의 정혈로 지난 전투의 내상을 씻어내려고 하고 있습니다.”
화운의 말을 용대명이 받았다.
“빠른 치유를 위해 놈이 관을 움직였습니다. 각각의 관아에 적혀 있는 각 고을의 인명부에서 자시 생 동남동녀를 확인한 후 궁녀와 내관 선출을 빌미로 끌어들이고 있었습니다. 참칭이긴 하지만 황제의 어명으로 벌어지고 있는 일, 당당히 움직이려면 대관도와 포구를 이용할 수밖에 없습니다.”
용대명의 목소리가 조금 더 은밀해졌다.
“그래서 저는…….”
용대명의 말이 이어지면 이어질수록 정파 무림 수뇌부들 표정이 밝아졌다.
***
닷새 후 장사 인근의 상음포구.
동정호를 경유해 성도 장사에 이르기 위해서는 반드시 거쳐야만 하는 핵심적인 항구로써 호남성의 물산이 총 집결되는 큰 곳이었다.
“빨리 빨리 비켜!”
“군선 들어오는 것 안 보여?”
“상단 소속이건 뭐건 군선이 제일 먼저니까 빨리 배들 빼란 말이야!”
고래고래 악을 쓰는 조방 소속 관원들의 고함소리가 끝나기가 무섭게 군선 한 척이 상음포구에 배를 댔다.
끼이익.
뱃전까지 닿는 커다란 사다리가 놓이며 묘한 소리를 내었고 뒤를 이어 관병들이 잔뜩 주눅 든 얼굴을 한 소년과 소녀 칠십여 명을 대동하고 나섰다.
반짝.
‘왔다.’
‘자시 생 동남동녀들이다.’
멀리 떨어진 곳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홍안의 거지들이 눈을 빛냈다.
홍안의 거지들이 두 손을 입에 모았다.
뾰르르. 뾰르르르.
이름 모를 새 울음소리가 몇 차례 이어진 직후였다.
“쉬이. 물렀거라. 어림친위군 행차시다.”
“냉큼 고개를 숙이렷다.”
당당한 외침과 함께 화려한 깃발을 앞세운 일백여 무장이 포구에 나타났다.
“어림친위군?”
“그게 무슨…….”
생각지도 못했던 등장에 이제 막 군선에서 내렸던 관병과 무장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하지만 자칭 어림친위군은 당당했다.
성큼 앞으로 다가오더니 위엄 가득한 눈으로 한 번 슥 살펴보고선 품에서 장궤 하나를 꺼내며 외쳤다.
“책임자는 앞으로 나서 어명을 받아라.”
“어명?”
다소 얼떨떨한 얼굴로 무장 하나가 앞으로 나섰다.
“어허! 어명 앞에서 어딜 감힛! 빨리 움직이지 못할까?”
어림친위군이 눈을 부라렸다. 사납게 외쳤다.
무장으로서 어명 앞에 더 버틸 담량이 없었다. 무너지듯 재빨리 무릎을 꿇고 고개를 조아려 외쳤다.
“신, 귀주 안찰사 정이품 백천경. 어명을 받습니다.”
관선에서 내린 깃발은 귀주성 인근의 경위지휘사사 깃발인데 스스로를 귀주성의 안찰사라고 칭하는 것이, 이 사내 역시 음양신마의 황제 참칭으로 인해 벼락출세를 한 것이 분명했다.
그래서일까?
어림친위군이랍시고 전군도독부 산하 호남성 도지휘사사 깃발을 들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스스로를 어림친위군이라 부르는 것을 누구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시절이 그런 시절이기 때문이었다.
음양신마가 황제로 참칭을 한 지 이제 겨우 백여 일.
중앙 관제부터 시작해 지방관제까지 모든 것이 어설프고 주먹구구로 진행되고 있었던 것이다.
하여간, 사내의 태도가 마음에 든다는 듯 어명을 받들고 온 어림친위군 사내가 장궤를 펼쳐 들었다. 큰 소리로 어명을 읽었다.
“……하여, 그간의 노고를 치하하니. 이제는 돌아가 포상을 기다려라. 지금부터는 어림친위군이 모든 것을 책임지도록 할 것이다.”
수고했어. 그러니 애들 놓고 돌아가.
돌아가 있으면 잘 했다고 후하게 포상을 해줄게.
그런 뜻의 장황한 문장의 연속이었지만 안찰사로 벼락출세한 사내는 감격에 겨워 부르짖었다.
“오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그 뒤로는 일사천리였다.
군선에서 내린 아이들 칠십여 명은 어림친위군에 인계되었고 안찰사를 자칭하던 사내는 어떤 포상이 돌아올 것인지 기대 가득한 얼굴로 다시 배에 올랐다.
“가자!”
“충!”
어림친위군은 아이들을 끌고 보무도 당당하게 포구를 벗어나기 시작했다.
하지만 놀랍게도 이들은 성도인 장사로 가지 않았다.
포구를 벗어난 후 사람들의 시선이 뜸해지기가 무섭게 좌회전을 했다. 북쪽을 향해 길게 뻗어 있는 막부산으로 쏙 들어가 버렸다.
뭔가 일이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음을 감지한 소년 소녀들이 불안해했다.
다행히 늦지 않게 한 사람이 앞으로 나섰다.
자칭 황제인 음양신마의 어명을 읽었던 무장이었다.
바로 비룡문의 문주 용대명이었다.
용대명은 소년 소녀들이 모두 자시 생인지를 묻고, 황제를 참칭한 음양신마라는 괴물이 어째서 자시 생 동남동녀를 가려 뽑았는지 넌지시 알려주었다.
하마터면 전신의 피를 뽑혀 죽었을 것이란 말에 모두가 놀라 울음을 터뜨렸다.
“너무 걱정하지 말거라. 이제 다 끝났다.”
그럼에도 울음소리는 완전히 멈추지 않았다.
용대명은 다시 한 번 약속을 해 주어야만 했다.
“약속한다. 놈들이 너희들을 욕심내지 않는 때가 온다면 황룡패주의 이름을 걸고 너희 모두를 부모님께 돌려보내 주마. 알겠느냐?”
“황룡패주세요?”
“어? 황룡패주는 옥기린이라 하였는데?”
“맞아.”
아이들의 눈에는 의심이 하나 가득이었다.
용대명은 쓴웃음과 함께 자신의 정체를 밝혀주었다.
“내가 바로 황룡패주 용무린의 아버지란다.”
“우와!”
“정말요?”
“그럼. 당연하지. 세상 그 어떤 아버지도 자신의 아들 이름을 함부로 걸지 않는단다. 알겠니?”
그제야 아이들의 얼굴에 믿음의 빛이 어렸다.
“예.”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어르신.”
그렇게 겨우 안심을 시킨 아이들의 전폭적인 협조와 놀라운 인내로 용대명과 화산파, 벽력도가 소속 무인들은 무난히 호남성을 벗어나 북상할 수 있었다.
이와 같은 일이 동시다발적으로 벌어지는 중이었다.
호남 성도인 장사를 중심으로 상담, 주주, 류양 현에 이르는 대관도가 차단되었다.
용무린과 용대명이 함께 짜둔 계획에 따라 어림친위군을 참칭한 후 성도로 압송하던 아이들을 감쪽같이 빼돌렸다. 안전해질 때까지 보호하기 위해 정파 영역인 호북성으로 산개한 후 빠져나왔다.
***
삼공과 삼고랍시고 음양신마의 고함소리에 불려 내려온 놈들의 보고는 가관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도착할 시간이 며칠이나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동남동녀가 도착하지 않아서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알아보려던 참이었습니다, 폐하.”
“맞습니다. 필시 무슨 좋지 못한 일이라도 생긴 것으로 보여집니다.”
“마지막으로 연락이 끊긴 곳들이 모두 성도에서 하루에서 반나절 사이이니 목격자든 뭐든, 오래지 않아 연유를 알 수 있게 될 것입니다, 폐하.”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며칠이나 지났다고? 이런 멍청한!’
며칠이나 지났는데 대체 왜 이제야 움직이는데?
지금까지는 뭘 하고 있었던 거고?!
‘성질 같기만 하면 그냥 콱!’
죽여 버리고 싶지만 겨우 눌러 참았다.
연습에 불과한 황제 노릇이지만 성질대로만 하다가는 나라 자체를 경영할 수 없다는 것은 불을 보듯 훤한 노릇이기 때문이었다.
‘내가 채근하기도 전에 먼저 알아보는 중이었다고 하니 참는다.’
그 정도의 머리도 없는 놈들이었다면 살려둘 필요 따윈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음양신마의 결심은 오래지 않아 무너졌다.
사흘 후.
이곳저곳에 파발도 보내고 전서구도 날린 후 그들이 알아 온 연유라는 것이 도저히 묵과할 수 없는 황당무계한 것이기 때문이다.
“뭐, 뭐라고?”
어찌나 어이가 없던지 말까지 더듬어 다시 되묻는 음양신마였다.
“어림친위군? 어림친위군들에게 틀림없이 자시 생 동남동녀를 인계했다고?”
기가 막혔다.
‘어림친위군은 개뿔, 만들지도 않은 어림친위군이 어디에 있어서?’
그렇지만 눈 밑 그늘이 턱까지 내려온 놈들은 퀭한 얼굴로 정신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그러합니다, 폐하.”
“틀림없는 어림친위군이라고 하였습니다.”
“황제폐하의 어명이 쓰이고 옥새까지 찍힌 장궤를 함께 대동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어떤 놈들인지는 몰라도 감히 황제폐하의 어명을 도용한 것이 틀림없습니다, 폐하.”
정말 기가 막혀서 말이 안 나왔다.
아무리 중앙관제나 지방관제가 다 주먹구구식으로 운영이 된다고는 하지만 어림친위군이란 말 한마디와 대충 찍은 도장 따위에 그렇듯 홀딱 넘어가다니!
아드득.
“도찰원주(환희궁주)에게 명해라. 동남동녀를 빼앗긴 놈들을 찾아간 후 책임자 장본인과 부장급까지 깡그리 압송하라고 해. 아니다. 귀찮으니 그냥 모가지만 떼어 보내라고 전해. 알아들어?”
“예, 폐하.”
“그, 그대로 전하겠나이다.”
삼공과 삼고가 벌벌 떨며 고개를 조아렸다.
음양신마의 호령이 계속해서 이어졌다.
“도독부(마교 출신 고수들로 이뤄진 부서)의 혈마종 대장군에게 전해라. 관이고 군이고 다 필요 없다. 전면에 나선 후 수단방법 가리지 말고 자시 생 동남동녀 오백 명을 모집해 오라고 일러라.”
“명대로 이뤄질 것입니다, 페하.”
“알겠사옵니다, 폐하.”
쿵쿵쿵쿵쿵.
음양신마의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알 수 없는 위기감 때문이었다.
‘최대한 빨리 몸 상태를 완전하게 만들어 놓아야 해.’
무엇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좋지 못한 일이 다가오고 있다는 느낌이 팍 왔다.
시간이 없다.
이젠 정말 다급한 마음이 들었다.
‘놈들이 하나 둘씩 정상을 되찾아가고 있어.’
법정이 부상에서 떨쳐 일어났다고 했으며 불사항마승이라는 놈들 역시 대다수가 부상에서 일어났다고 한다.
게다가 비룡문주라는 놈까지 쾌차했다. 예전보다 더한 위압감을 뿜어내고 있다는 정보다.
‘하루라도 빨리 내 몸에 깃든 놈들의 불사신기와 땡중들의 힘을 씻어내 버려야만 해.’
안전장치를 해두긴 했지만, 그래도 나 스스로가 완전해지는 것만 못하다.
‘물론 이 상태에서도 놈들과 동귀어진 정도는 충분히 할 자신이 있지.’
말이 그렇다고 진짜 죽고 싶진 않다.
공연히 안전장치를 하나 잃게 될 것이며 다시 힘을 복구하기까지 상당한 시간이 소요될 테니까.
‘혈마종. 너만 믿겠다. 수단방법 가리지 말고 자시 생 동남동녀를 모아서 내게 데려와라.’
관부에 기록되어 있는 명부를 뒤져 자시 생 동남동녀를 찾기는 이제 글렀다. 발로 뛰어야 하니 혈마종의 고초가 클 것이다.
하지만 혈마종이라면 해낼 수 있으리라 믿었다.
전대 신마의 수발을 들며 이미 한 번 자시 생 동남동녀를 모아 본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
용무린은 꼬박 하루 밤낮을 고민했다.
‘이 망할 놈의 기운을 아예 소멸시켜버릴까?’
미친 듯이 파고드는 혈신령의 힘.
‘탐욕스러운 이 행동을 보면 마치 의지를 지니고 있는 놈 같단 말이야.’
짐작이 사실이었다.
그 정체는 바로 역대 혈교 교주들 중 뜻이 같은 교주들이 내공과 의지를 한데 모은 정수였다.
혈신령이란 가면에 모종의 술법을 걸었다.
그 후 모든 내공과 의지를 주입했다.
뜻을 함께하는 역대 혈교주들이 그렇게 산화했다. 혈신령에 깃들었다.
혈신령이란 그 어떤 영약으로도 이룰 수 없는 혈신공을 단숨에 신의 영역까지 끌어 올려주기 위한 망령들의 집합이었던 것이다!
치리릿. 츄릿.
혈신령은 지금도 용무린의 몸으로 파고든 후 의식의 한 귀퉁이를 파고들어 역대 교주들의 집합인 자신들의 의지와 내공을 주입하기 위해 애를 썼다.
‘역천자였던 음양신마 놈 때문에, 놈이 나를 삼키려 할 당시 섞여 들어온 놈의 의식 때문에 스스로를 신마 진무량의 환생이라고 착각했었는데…….’
혈신령 역시 그와 비슷한 짓을 하려는 것이니 어찌 쉽게 받아들일 수 있겠는가?
그렇다면 남은 방법은 한 가지뿐이다.
완벽한 소멸!
‘내 불사신기라면 충분하고도 남지.’
역천자의 환혼대법과 혈신령에 깃든 역대 혈교주들의 의식은 또 다르니까.
‘혹시나 싶어 혈신령을 쓰기 전에 불사신기를 잔뜩 끌어 올려 두길 잘 했군.’
용오름 하눌신폭을 펼치거나 불사대천검을 펼칠 수 있을 만큼 끌어 올린 그 힘을 혈신령을 상대로 뿜어버리면 일다경 정도면 충분할 듯싶다.
하지만 고민이었다.
‘이걸 받아들인 후 아예 나의 내공으로 길들여 버리면 어떻게 될까?’
그 생각에 고민이 깊어진 것이다.
내 손에 죽은 전대 신마나 역천자인 음양신마는 엄밀히 따지면 혼돈이라 규정할 수 있다.
태극으로 나눠볼 때 불사신기를 빛과 양으로 생각한다면 규천마력은 정확히 그 반대인 어둠과 음으로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두 가지 상반된 기운을 완벽하게 하나로 묶었다.
무극의 경지이기도 하며 혼돈인 이유다.
그에 비해 자신은 빛과 양으로서의 성질이 조금 아니 무지막지하게 더 강한 편이다.
왜냐하면 역천자가 절대검신인 내 전생을 삼키려 할 때 깃든 규천마력은 의식 부분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지 실제 몸에 깃들지는 못한 덕이다.
환생을 했으니 남아 있을 턱이 없다.
게다가 수라진천도 역시 너무 지독한 부분을 삭제하고 수정해서 진천수라도로 바꾸었고 펼칠 때 필요한 내공도 불사신공이었기 때문이다.
동정호에서 달포 동안 흡수한 냉기와는 완전히 그 경우가 다르다.
그때는 몸이 너무 차갑기 때문에 회복을 위한 양기가 필요해 화기를 흡수한 것이었다.
‘그렇게 따지면 나는 아직도 음양의 조화를 완전히 이루지 못한 상태라고 할 수 있어.’
불사신공의 특성으로 인해 놈과 대등한 싸움을 할 수 있었던 것이지 완전한 무극의 경지에 오른 것은 아니라고 볼 수도 있다는 뜻이다.
‘내 전생인 절대검신의 완전한 경험과 지식이 깨어나면 쉽게 알 수 있겠는데…….’
마지막 하나가 아직도 깨어지지 않는다.
그것만 알 수 있다면 불사대천검의 대성도 마음먹은 대로 이룰 수 있을 것이며 역천자 아니라 그보다 더한 놈이라도 영혼까지 완벽하게 소멸시킬 수 있으리라.
‘아무리 노력해도 대성의 실마리가 풀리지 않는 이유는 내 내공의 경지가 무극이 아니기 때문인 걸까? 아니면 뭔가 또 다른 점이 있는 것일까?’
무엇보다 이 혈신령의 힘을 음에 속한 힘으로 인식하고 받아들여 미약한 규천마력인 놈의 의식과 하나로 묶어 버린다면?
그래서 음과 양의 균형을 잡아 나 역시 내공을 무극에 가깝게 만들어 낸다면 어떻게 될까?
‘혈신령에 깃든 역대 혈교주 놈들의 의식에 내가 잡아먹히게 될까? 아니면 내가 승리를 거둬 완벽한 무극의 내공을 지니게 될까?’
더 고민해봐야 답이 없다.
직접 경험해 봐야 알 수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양의신공이 있으니 절대로 내가 질 것 같지는 않은데 말이야.’
결국 모험을 해보기로 결심했다.
‘일단 양의신공부터.’
즉시 구결에 따라 양의신공을 일으켰다.
의식에 분심의 벽을 세운 후 절대검신의 의식으로는 불사신공을 전력을 다해 휘돌리기 시작했고 신마 진무량의 의식으로 혈신령의 기운을 흡수해나갔다.
‘도 아니면 모!’
신마 진무량이 혈신령을 받아들일 때 사용할 내공심법은 다름 아닌 고려의 옛 법이었다.
이름 하여 비홍심결.
종류는 다르지만 석양의 붉은 빛을 뿜어내는 비홍심결과 피처럼 붉은 혈신령의 힘은 묘하게 어울릴 것만 같다.
거기에 더해 신마 진무량의 의식 역시 고려의 옛 법을 삼켰던 경험이 빛을 발했다.
거부반응이나 주저함 자체가 없었다.
본디 자신의 것이었던 것처럼 비홍심결을 통해 혈신령을 잘도 흡수했다.
그런데,
‘크흡!’
심령에 형언할 수 없을 정도의 충격이 몰려왔다.
어찌나 강렬하게 들이받는지 신마의 의식이 하마터면 혈신령에 밀려날 뻔했다.
그러나 아무리 일부라 해도 신마의 의식 아니겠나.
단 한 번도 혈교의 무공이나 고수에게 눌려 본 일 없는 신마로서의 의식과 비홍심결이 들고 일어났다. 스스로를 보호하며 혈신령을 받아들이는 일에만 주력했다. 남김없이 빨아 당겼다.
꿀꺽. 꿀꺽.
실제는 아니었지만 저렇듯 마시는 느낌이다.
이미 포화상태까지 들어찬 듯 포만감을 느꼈지만 아직 어림도 없다는 듯 혈신령의 가면에서는 끝도 없는 혈기를 뿜어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