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대오각성(大悟覺醒) (93/104)

3.대오각성(大悟覺醒)

꿀꺽. 꿀꺽.

신마 진무량의 의식은 묵묵히 할 일을 했다.

역대 혈교주들의 내공과 탐욕을 기계적으로 끝도 없이 집어 삼켰다.

‘이러다가 자칫 잘못하면 큰일 나겠는데?’

밀려드는 힘이 끝이 없는 듯하다.

여기에서 아차 실수하면 그릇이라고 할 수 있는 단전이 버텨내질 못할 듯싶었다. 상중하 세 곳을 모두 개방했음에도 벌써 넘칠 정도의 양이었다.

‘끊어지질 않아.’

혈신령의 기운을 끊어보려 했었다.

실패했다.

열리는 것까지가 문제였지 한 번 열린 이상 절대로 놓칠 수 없다는 듯 혈신령의 기운은 쏟아져 내리는 폭포라도 되는 양 끝도 없이 쏟아졌다.

‘포화상태야. 위험해.’

용오름 하눌신폭을 펼쳤을 때 그 거대한 대자연의 기운을 몸 안으로 끌어 들이는 일이 가능한 이유는 바로 초식에 바로바로 사용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만큼 막대한 기운이 몸 안으로 쏟아져 들어와 그저 쌓이기만 한다.

단전은 이미 포화상태다.

여기서 아차 실수하면 그대로 끝난다.

넘쳐나는 내공을 감당하지 못한 육체가 터져 버리고 말 것이다.

‘여러 번의 환골탈태를 거친 육체지만 그래도 버틸 수 없을 거야.’

그만큼 혈신령에 깃들어 있던 역대 혈교 교주들의 내공과 의지는 거대했다.

‘불사신공을 믿자.’

결국 믿을 것은 그것뿐임을 새삼 깨달았다.

죽음조차도 거부했으며 거듭된 상처에 자존심 상한 듯 몇 번이고 환골탈태까지 시켜 놓은 불사신공의 힘이라면 견뎌낼 수 있으리라.

후우우우-웅.

절대검신의 의식이 더더욱 불사신공에 힘을 쏟았다.

백회와 용천혈이 활짝 열렸다.

끝도 없이 펼쳐낼 수 있을 만큼의 대자연의 기가 쏟아져 내렸다. 단전으로 밀려와 휘돈 후 불사신기로 치환이 되어 전신으로 퍼져나갔다. 용무린의 육체를 지켰다.

꿀꺽. 꿀꺽. 꿀꺽.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하루, 이틀, 사흘…….

쪼르륵.

신마의 의식은 결국 마지막으로 뿜어진 한 방울까지 남김없이 마셨다. 혈교의 시작이자 끝이라는 전설의 혈신령을 통째 삼켜낸 거다.

‘후우. 힘든 싸움이었다.’

말단 세포 하나하나에까지 미증유의 기운이 가득했다.

혈신령에서 비롯된 힘과 그 힘에 대항하기 위해 끌어 모은 불사신공 때문이었다.

‘이젠 어디가 상중하 단전이고 어디가 혈도인지조차 모르겠다.’

아련한 느낌만 있을 뿐 솔직히 이젠 단전의 구분조차 무의미해졌다.

그냥 몸 전체가 단전인 듯하다.

삼백육십 개의 혈도 중 어느 하나를 찍어도 어지간한 절정 무인급 이상의 내공이 쌓여 있는 것이 느껴졌다.

‘보유 내공만 따지자면 나만큼 막대한 내공을 보유했었던 사람도 드물 것 같네.’

생각해보니 전생인 절대검신 독고황 시절에도 이 정도까지는 아니었던 것으로 기억이 된다.

그때는 단출하게 상중하단전 세 개뿐이었다.

‘크흑. 이런 젠장.’

용무린은 하마터면 비명을 쏟아낼 뻔했다.

그때부터가 진정한 싸움의 시작이었기 때문이었다.

추측할 수 없을 만큼 차오른 혈신령의 힘이 주체인 신마 진무량의 의식을 잡아먹으려 하는 동시에 분심의 벽까지 넘으려 한 것이다.

콰르르르. 출렁. 처얼썩.

한 여름 불어온 태풍에 해일이 인다고나 할까?

거침없이 밀어 닥치는 혈신령의 힘이, 역대 혈교주들의 의식이 분심의 벽을 넘어 확장을 시도했다. 용무린까지 집어 삼키려 들었다.

‘막을 수 없어. 넘친다. 넘쳐…….’

겁이 버럭 났다.

이러다 견디지 못해 자칫 몸이 터져버리는 것 아니야? 하는 생각마저 들 정도였다.

그런데 갑자기,

‘가만! 내가 애초에 이 짓을 시작한 이유가 음양의 조화, 즉 양의 기운이랄 수 있는 불사신공과 비슷한 수준으로 음의 기운을 맞추려고 그런 것이잖아.’

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흘러넘치도록 놔두어야 하지 않나?’

하는 결론에 도달했다.

흘러 넘쳐 마구잡이로 날뛰는 것을 불사신공이 그냥 두고 보지도 않을 것이거니와 함께 어우러지지 않고서야 마음대로 쓸 수도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불사신공만 믿는다.’

결국 그렇게 놓아 버렸다.

콰르르르. 처얼렁. 추울썩.

거친 해일이 밀려가듯 혈신령의 기운이 분심의 벽까지 넘었다. 절대검신 독고황의 의식과 불사신기까지 들이받았다. 밀어 붙였다.

그렇게 마지막 싸움이 시작되었다.

용무린은 철저한 방관자가 되어 양의신공의 유지에만 심력을 쏟았다.

전대 혈교주 혈마 나령의 힘까지 고스란히 흡수한 혈신령의 힘은 불사신공 못지않았다. 더할 수 없는 앙숙이라도 된 듯 서로를 짓누르기 위해 사력을 다해 싸웠다.

엎치락뒤치락.

‘거, 흥미진진하네.’

불사신공이 결국 승리하리란 믿음이 있지만 혈신령 역시 발군의 힘을 발휘했다.

크게 한 번 출렁일 때마다 조금씩 움직인 불사신기의 틈을 비집고 들어가, 기존에 불사신기가 차지하고 있던 곳 모두에 비슷한 공간을 확보했다.

‘푸흐흐. 불사신기가 억울해하는 것 같아.’

그럴 수밖에 없다.

성질 같아서야 애당초 소멸시켜 버렸을 것을, 용무린이 묵인하고 허락을 해줬기에 이 정도까지 일이 벌어졌기 때문이었다.

***

일월산에 맞닿은 청해호변에 이변이 생겼다.

작열하는 태양처럼 아니 석양의 붉은 노을 한 덩어리가 뚝 떨어져 내린 것처럼 붉은 빛 덩어리가 생겨나 모두의 시선을 끌었기 때문이다.

“저, 저게 뭐지?”

“우와, 아름답다.”

“거의 작은 관제묘만 해, 빛 덩이가.”

청해호에서 물고기를 잡아 내다파는 어부들과 일월산 일대를 구경하기 위해 배를 타고 나섰던 유람객들까지 모두 동그래진 눈으로 바라보았다.

“주변에 서 있는 기분 나쁜 인상의 늙은이들은 대체 뭐하는 작자들이지?”

“접근해볼까?”

“오줌 지리고 싶으면 너나 가.”

“그건 또 무슨 말이야?”

“출발하기 전에 소문을 들었는데, 어제 유람객들 중 한 무리가 호기심에 접근했다가 영문도 모르는 사이 단체로 바지에 소변을 지렸대.”

“뭐, 뭣 단체로 오줌을 지려?”

“쉿!”

사내가 입가에 손을 가져다 댔다.

생각만 해도 두려운 듯 고개를 흔들었다.

“접근하면 바로 죽을 것 같은 공포가 밀려온다고 해. 눈빛만 접해도 숨통이 콱 막히고 다리에 힘이 풀려 쓰러진다고 하니 가려거든 너나 가.”

그렇게까지 말하는데 어찌 다가갈 수 있겠는가?

일월산 중턱의, 사람들이 접근하기만 하면 실종되곤 한다는 오래된 황교 사찰에서 나온 정체불명의 무인들이란 소문까지 도는 판국이었다.

그래서 모두가 흘끗 거리기만 했다. 누구도 가까이 다가서려 들지는 않았다.

경고를 무시하고 다가오는 사람은 누구를 막론하고 질식할 것 같은 공포에 짓눌릴 수밖에 없으니까.

그 순간이었다.

반짝.

모른 체 축원만 계속하던 대사제의 눈가에 회심의 빛이 돌았다.

‘혈신의 강림이 시작되었다.’

틀림없다.

용무린은 혈신령의 힘을 받아들이는 것으로도 모자라 자신의 것으로 만들고 있었다.

이대로라면 머지않아 아리만의 화신으로 거듭나 혈교의 역사 이래 가장 강력한 주인이 되어 이 세상에 군림하게 될 것이다.

“오소서, 혈신이시여. 아리만의 화신으로 오소서. 오옴. 아라마라도르 오옴.”

갈수록 대사제의 목소리가 높아지는 가운데 용무린을 둘러싸고 있는 혈광 역시 짙어져만 갔다.

***

언제 끝이 날 것인지 모르는 처절한 싸움.

제 삼자가 되어 그것을 가만히 지켜보던 용무린은 어느 순간 묘한 것을 알아차리게 되었다.

양의신공을 통해 분심의 벽을 세웠다.

스스로를 절대검신과 신마라고 하는 두 가지 의식을 가졌다는 생각에 제각각의 의식에 각기 다른 힘을 운용하게 만들었다.

그래서 두 가지 상반된 힘이 요란하게 몸속에서 싸움을 벌이는 것이었지만 처음부터 변하지 않는 것이 존재한다는 점을 알게 된 것이었다.

‘그것은 바로 나야!’

분심의 벽을 세울 때도 나는 흔들림 없이 그 사실을 목격하고 있었다.

절대검신을 전면에 세워 신마의 의식을 가라앉혔을 때도 그것을 목격하는 주체는 나였다.

‘반대로 신마 진무량의 의식을 전면에 세워 절대검신의 의식이 가라앉았을 때도 나는 그것을 지켜보며 제대로 되고 있음을 확신했었어.’

목격자라는 존재.

내 전생을 신마로 인식했을 때도 변함없었던 존재.

시간이 흘러 순천자, 즉 절대검신 독고황이 전생의 나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도 그대로였던 존재…….

혈교의 시작과 끝이라는 전설의 혈신령과 불사신기가 사투를 벌이고 있는 이 순간에도 고요히 그것을 관조하고 있는 이 존재!

‘용무린……?!’

이름이야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어 생이 바뀌면 변화하게 되지만 그것만큼은 이전에도 그러했듯 이후에도 변하지 않고 그대로 있을 터!

‘참나!’

영원불변의 그것!

아무리 이름이 바뀐다고 해도 변함없고 그 어떤 색을 끼얹어도 물들지 않는 절대적인 진리!

참나!

그 절대적이고 영원불변한 참나가 모든 것을 지켜보고 있었음을 인식하는 순간,

파가각!

용무린의 의식을 봉인하고 있던 마지막 한 조각의 껍질이 드디어 깨어졌다.

전생인 절대검신 독고황이 자신의 모든 것을 모아 남겨놓은 깨달음이 기다렸다는 듯 터져 나와 참나와 함께 환희로 떠올랐다.

그 압도적인 존재감이라니!

양의신공이 환영이 되어 스러졌다.

근원의 ‘참나’의 드러남이란 무엇도 가로막을 수 없기 때문이다.

서로 잘났다고 싸우던 불사신공과 혈신령이 한 여름 밤의 꿈처럼 스러졌다. 꼬리를 말고 도망쳤다. 몸 밖으로 빠져 나갔다.

‘이것이 바로 참나!’

유, 불, 선을 비롯해 무(武)를 통해 깨달음을 얻기를 바라던 모든 수행자들이 최종적으로 도달해야만 하는 단계가 바로 ‘참나’를 오롯이 하는 것이다.

‘천문이 열리려 한다.’

말 그대로였다.

단지 ‘참나’가 오롯해졌을 뿐인데…….

누구의 눈에도 보이지 않지만 하늘의 한 점이 황금빛으로 빛나기 시작하더니 점점 덩치를 불려나가기 시작했다.

등선의 시작인 것이다.

‘이 땅에서 환생을 거듭해 수행을 해가며 얻어야 할 깨달음이 더는 없으니 당연한 일.’

‘참나’가 오롯해진다는 것은 그런 것이다.

‘보인다.’

아직 해가 많이 남아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늘에 얽힌 오묘한 기운들이 눈에 들어왔다.

천기!

그토록 보고 싶어 할 때는 아무리 노력을 해도 보이지 않더니 영원불변한 ‘참나’를 오롯이 세우기가 무섭게 수줍은 얼굴을 드러낸다.

그사이 천문이 더 크게 열렸다.

용무린의 육신은 그대로 있었지만 영원불변한 ‘참나’는 달랐다. 당연히 그래야 한다는 듯 스르르 몸에서 벗어나기 시작했다.

등선!

이대로 ‘참나’를 오롯이 한 채 등선에의 의지를 세우면 지금까지 삶을 지탱해왔던 껍질만 남긴 채 선계에 오르게 될 것이다.

그것이 바로 진정한 원신출태!

또한 불가에서 말하는 해탈의 경지였고 선도에서 말하는 금선탈각의 경지인 것이다.

‘이대로 오를까?’

생각하는 순간,

출렁.

저만큼 아래서 무엇인가 크게 일렁였다.

뭐지?

이 아련하고 애틋한 느낌은?

‘참나’를 직시하는 이상 허상에 불과한 감정 따위 더는 영향을 끼치지 못할 텐데?

하지만 있었다.

차마 떨쳐내지 못할 그 무엇인가가.

‘불사신기!’

두 번의 생에 걸쳐 함께 했던 불사신기라는 허상 한 조각이 잊고 있던 무엇인가를 일깨워 주었다.

자신이 등선을 해버림으로 인해서 고통 받고 괴로워해야만 할 많은 사람들의 슬픔 바로 그것이었다.

‘아! 역천자.’

멈칫!

역천자를 인식하는 순간 원신출태가 멈춰졌다.

금선탈각을 해 등선을 하는 와중이었지만 이 또한 ‘참나’로 인한 것, 스스로를 가두었던 봉인이 모두 깨어졌으니 언제든 원하는 대로 이룰 수 있다.

‘그래. 역천자 그 녀석이 있었지.’

‘참나’의 관심이 현세로 되돌아왔다.

비로소 일체중생을 제도한 후 깨달음을 이루리란 지장보살의 서원이 이해가 되었다.

‘뭐, 전생에도 그렇게 행동했었지만…….’

지옥이 텅 비지 않으면 성불하지 않겠다는 마음까지야 같지는 않지만 그래도 근본은 동일했다.

자비심.

초월자로서의 이타심.

그 두 가지가 용무린에게서 솟아오른 ‘참나’의 발목을 붙잡았다.

쑤우욱.

거의 다 빠져 나갔던 황금빛 찬란한 ‘참나’가 다시금 빈 껍질인 용무린의 몸속으로 깃들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다.’

과거에도 그랬지만 이번에도 갈등 따위는 없었다.

‘다시 삶을 산다.’

왜냐하면 한 번 ‘참나’를 오롯이 한 이상, 역천자와의 경험이 더해진다고 해도 ‘참나’에게는 그저 스쳐 지나갈 뿐인 환영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쭈와아아-악!

몸 밖으로 밀려 났던 불사신기와 혈신령의 힘이 놀라운 속도로 다시 빨려들었다.

하지만 그 반응이 예전과 사뭇 달랐다.

그저 스쳐 지날 뿐인 이 세상에서 역천자라고 하는 오물을 씻어내기 위한 한 가지 방법일 뿐 ‘참나’에게는 눈곱만큼의 영향도 끼칠 수 없기 때문이었다.

츄리릿. 츄릿. 휘우우웅. 처얼썩.

그제야 인간적인 감각도 다시 살아났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모두가 단전으로 변화해 버린 듯한 감각 속에서 불사신기와 혈신령의 힘이 하나가 되어 사이좋게 일렁였다.

‘이것이 바로 진정한 의미의 무극.’

일원의 경지는 등선과 해탈의 경계를 말함이다.

‘재미있구나.’

‘참나’를 오롯이 했으면서도 등선을 보류한 채 인간적인 모든 허망한 것들을 다시 경험할 수 있다니!

‘뭐, 기왕 다시 삶을 경험하기로 한 이상 재미있는 것이 좋겠지.’

초월의 영역에 들었던 모든 감각과 인식체계가 용무린의 그것으로 다시 돌아왔다.

다소 마초적이지만 내 여인들에게는 자상한 사내, 내 가문을 가장 우선시하지만 타인의 아픔을 외면하지 않는 사내, 하지만 내 앞에 서 있는 적과 양민들을 괴롭히는 적들에게는 무자비한 사내를 다시 경험하기로 했다.

‘스쳐지나갈 뿐이다.’

‘참나’의 오롯함으로 인해 이런 사소한 것조차 스치는 경험일 뿐이라고 인식한다.

과거와 같지만 전혀 다를 수밖에 없는 이유였다.

‘경험을 다시 시작한다.’

용무린의 눈이 번쩍 뜨였다.

용무린의 호법을 서던 대사제는 당황스러운 표정을 감출 수가 없었다.

‘이, 이게 대체 어떻게 되어가는 조화속이야?’

잘 되어가는 중이었다.

굳이 혈신의 강림을 축원하지 않아도 용무린은 알아서 혈신령의 힘을, 그것도 역대 가장 강력한 교주였던 혈마 나령의 기운까지 흡수한 혈신령의 힘을 무난하게 흡수해 나가고 있었다.

‘분명히 새로운 아리만의 화신이 되시기 일보 직전이었단 말이야.’

대체 얼마나 강력한 화신으로서 오실까?

궁금해하던 찰나 갑자기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용무린과 그의 내부를 휘돌던 기운을 포함한 모든 것이 돌처럼 굳어버렸다.

그러더니 맥없이 밀려나왔다.

혈신령과 그토록 오래 싸우던 미지의 기운까지도…….

‘그 두 가지 기운이 무저갱에라도 빠진 듯 일순간에 사라져 버릴 줄이야.’

흡수하는 것만도 무려 사흘이나 걸렸다.

그런데 그 짧은 순간에 씻은 듯 사라질 것이라고 누가 알았겠는가?

‘더 놀라운 일은 그때부터 벌어졌지.’

용무린의 정수리에서 신비로운 황금빛 광채가 뿜어지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아주 작은 점과 같은 크기였었는데 점점 더 넓어지는가 싶더니 이내 황금빛 찬란한 누군가의 형상이 쑤욱 하고 솟구쳤다.

‘정말 기절초풍할 만큼 놀랐었지…….’

그럴 수밖에 없었다.

솟구치던 황금빛 형상이 새로운 아리만의 화신이 될 황룡패주 용무린과 똑같았기 때문이었다.

‘그 장엄함이란!’

절로 무릎이 꿇어졌다.

자신들이 혈신을 받드는 혈사제들이라는 것도 인식하지 못하는 사이 저절로 그렇게 되었다. 하늘 저편에서 쏟아져 내리는 상서로운 빛줄기를 보면 누구라도 그렇게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런데 왜 다시 들어왔지?’

황금빛 형상은 거의 다 빠져 나갔었다.

남은 것은 겨우 발목 정도?

이제 하늘 저편에서 내려온 서광을 타고 날아오르기만 하면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그 생각이 드는 순간 다시 쑥 되돌아오셨단 말이야.’

실패한 것일까?

그렇게 생각하니 자신이 다 속상할 정도였다.

왜 그 좋은 기회를 놓쳤을까?

‘아니, 놓친 것이 아니라 그냥 미루신 것이 아닐까?’

그래, 그럴 수도 있겠다.

그 정도 능력을 가지신 분이 마지막 순간에 실패를 할 까닭이 없는 거다.

하여간 그런 생각을 하는 순간이었다.

공간 저편으로 사라져 소멸해 버린 줄로만 알았던 불사신기와 혈신령의 힘이 다시금 터져 나오더니 눈 깜박 할 사이 흡수가 되었다.

그 뒤부터는 일사천리였다.

두 가지 상반된 기운이 서로 하나가 되어 섞이더니 무색으로 바뀌어 사라져 버렸다.

‘혈신령의 힘이 어째서 생명을 뜻하는 피처럼 붉은 색이 아니라 무색이 되어 버린 것이지?’

궁금해하는 순간이었다.

버언쩍.

용무린의 눈이 떠졌다.

움찔.

대사제를 비롯한 혈사제 십 명이 놀라서 몸을 떨었다.

빙 둘러선 얼굴들을 차례차례 확인한 후 용무린이 갑자기 피식하고 웃었다.

“너희들이었구나.”

목소리가 정겹다.

‘왜지? 어째서 이 목소리가 두렵고 압도적으로 느껴지지 않는 것이지?’

전대 혈교주였던 혈마 나령이 혈신령을 이었을 때는 정말이지 오금이 저렸다. 목소리만 들어도, 눈만 한 번 크게 부릅떠도 숨통이 콱 막혔다.

‘그런데 지금은 그저 편안해.’

더 놀라운 사실은 그런 편안한 와중에 무한한 존경심과 충성심이 치솟는다는 점이다.

뭐든지 할 수 있을 것만 같다.

눈앞의 사내가 원한다면 불 속에라도 뛰어들 수 있고 목숨이라도 선뜻 내놓을 수 있을 정도다.

“……!”

용무린은 잠시 침묵에 잠겼다.

고요 속에 앞으로 해야 할 일을 결정했다.

‘역시 역천자 녀석이 몸을 갈아타지 못하도록 한 후 처리하는 것이 좋겠지?’

이대로 역천자를 향해 달려가 쓸어버리는 것도 해 봄직한 일이다.

‘하지만 그것은 결국 멀리 돌아가는 일이 되고 말 거야.’

역천자의 환혼대법.

대표적으로 알려진 몸 갈아타기에 대해서만 알고 있을 뿐, 정확한 것은 아무것도 모르고 있다.

‘내가 빛이라면 놈은 정확히 그 반대편에 서 있는 존재란 말이야.’

빛의 드러남 앞에 어둠은 자연히 힘을 잃는다.

하지만 도고일척 마고일장이라는 말이 왜 생겨났을까를 생각해보면 답이 나온다.

‘정면으로 마주치면 당연히 내가 우위지.’

그것은 뭐 말할 필요도 없다.

중요한 것은 마주치기 전까지 벌어질 일에 대해서라면 자신 역시 아는 바가 없다는 사실이다.

‘불길하게 빛나던 그 별들이 놈이 은밀히 끝내 놓은 준비라고 본다면?’

이전에 생각했었던 교토삼굴이 맞는다는 뜻이 된다.

‘이제야 다시 천기를 볼 수 있게 되어 그렇게까지 자세히는 보이지 않지만, 막말로 놈이 자신의 의식을 여럿으로 쪼개 대비를 할 수도 있단 말이지.’

전생의 나인 절대검신을 삼키려 밀어 넣었던 의식이 현생인 용무린에게까지 이어졌음에도 불구하고 멀쩡하게 역천자로서의 본성을 드러낸 것을 보면 알 수 있는 일이다.

‘음양신마를 본체로써 자신을 드러냈으니 차근차근 놈의 도주로를 차단한 후 마지막에 치도록 하자.’

생각을 모두 정리한 용무린의 눈이 번쩍 떠졌다.

아직도 멀뚱한 눈을 한 채 공손한 태도로 지켜보고 있던 대사제를 불렀다.

“너 말이다.”

한때는 적이었지만 지금은 뭐라 불러야 할지 감도 잡을 수 없는 사내의 목소리였다. 하지만 놀랍게도 대사제의 가슴 속에서는 눈곱만큼의 거부감도 느껴지지 않았다.

“대사제라고 했었지?”

털썩.

거부감은커녕 자연스럽게 무릎이 꿇어졌다. 공손히 고개가 조아려졌다. 조심스럽게 답했다.

“그렇습니다, 신이시여.”

앞에 혈(血)이라는 글자를 빼먹었지만 대사제는 그 사실을 인식하지도 못했다.

“신은 개뿔…….”

낯간지러운 듯 툭 내뱉는 용무린.

‘완벽하게 돌아왔군.’

성격까지 전과 같아졌다는 사실을 인식한 용무린은 다시 한 번 풀썩 웃어 보인 후 말을 이었다.

“너 말이다.”

“말씀하소서.”

“나랑 일 하나만 같이 하자.”

“……?”

대사제의 눈이 동그래졌다.

***

보름 후.

‘그냥 싹 다 죽여 버리고 새로 뽑을까?’

삼공과 삼고라는 놈들의 모가지를 날려 버릴 것인지 말 것인지를 두고 고민하던 음양신마에게 뜻밖의 소식이 날아들었다.

혈교의 대사제가 찾아와 알현을 청하고 있다는 소식!

믿기지가 않아 되묻기까지 했다.

“뭐, 뭐라고? 지금 밖에 혈교의 대사제라는 인간이 도착해 알현을 청하고 있다고?”

“예, 폐하.”

음양신마는 잠시 말문이 막혔다.

‘자살 대신 더 신박하게 죽고 싶은 걸까?’

문득 그런 생각마저 들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찌 혈교의 대사제란 놈이 자신을 찾아올 수 있단 말인가?

‘혈교주 혈마 나령의 죽음. 내가 직접 움직이지는 않았지만 오마종의 입을 통해서 그 뒤 혈교가 어떻게 되었는지는 잘 알고 있지.’

수천여 명의 혈교 마인들 중 살아서 도망친 이가 불과 백여 명을 넘지 못한다고 들었다.

‘대사제란 놈도 그때 겨우 살아서 도망치는데 성공한 놈인 것 같은데…….’

그렇게라도 살아났으면 머리카락도 보이지 않게 숨어서 잘 살 것이지 갑자기 무슨 바람이 불어서 여기까지 찾아온 것일까?

그런데 웃기는 사실은 혈교의 대사제란 놈이 찾아왔다는 말에도 과거 신마가 그랬던 것만큼 격렬한 살기가 치밀어 오르지는 않는다는 점이었다.

‘내가 본디 배교의 교주였기 때문이겠지?’

실험체에 불과했던 전대 신마 녀석이야 스스로를 자랑스러운 마교의 주인인 신마라는 기억을 주입해 놓았기에 그랬겠지만 본체인 자신은 근본이 배교의 교주이다 보니 진정한 아리만의 화신 타령에 거리가 멀었다.

그건 그런데…….

‘정말 왜 왔지? 내 본체가 배교의 교주라는 사실을 알고 왔을 리는 없고, 놈의 입장에서는 오면 죽을 가능성이 구 할이 넘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을 텐데?’

하도 기가 막히다보니 갑자기 녀석의 헛소리가 듣고 싶어졌다. 대체 뭐라고 할까?

‘혹시, 내가 나라를 일으켜서?’

대뜸 생각나는 이유는 그것 하나였다.

‘일단 들어나 보자.’

궁금했다.

죽이는 것은 조금만 미루지 뭐.

“들라 하라!”

“예, 폐하.”

***

알현은 대전으로 사용하는 승선포정사의 대회의실에서 이루어졌다.

“혈교 대사제 입궐이오-오!”

내관 대신 자리를 지키고 있던 축융궁도의 고함소리에 맞춰 문이 열렸다. 혈교 대사제는 고개를 조아린 체 조심스레 앞으로 나아가 납작 엎드렸다.

“만천의 지존이신 음양신마 황제폐하를 뵈오이다.”

주저함이 하나도 없는 인사였다.

“각설하고, 어떻게 죽고 싶냐?”

“…….”

“말만 해라. 여기까지 찾아온 성의를 봐서라도 나 음양신마가 직접 손을 써서 죽여주마.”

사형 선고가 떨어졌음에도 대사제는 잔잔한 미소만 입가에 머금었다. 두려워하지 않고 천천히 품속에서 거무튀튀한 가면 하나를 꺼내들었다.

“받아주소서.”

“……?”

음양신마의 눈이 가느다래졌다.

가면에서부터 아련히 사이한 기운 한 줄기가 풍기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뭐냐?”

“혈신령이옵니다, 폐하.”

뜻밖이기 때문일까?

음양신마의 말문이 다시 막혔다.

상관없다는 듯 대사제의 목소리는 계속해서 이어졌다.

“아시다시피 혈신령은 혈교의 시작과 끝이라고 할 수 있는 신물이옵니다.”

“그걸 대체 왜 가져온 거냐?”

“더는 제가 감당할 수 없어서입니다.”

“……!”

“전대 혈교주인 혈마 나령이 혈신령에서 미약하게나마 성취를 얻었지만 그날을 넘기지 못하고 전대 신마께 죽음을 당했습니다.”

아직도 그날의 기억이 생생하다는 듯 대사제가 가늘게 몸을 떨었다.

“계속해봐.”

음양신마가 채근했다.

대사제가 바로 대답을 이어나갔다.

“저의 책무가 바로 혈신령을 수호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혈교의 수백 년 역사 이래 혈신령을 통해 성취를 얻은 사람은 전대 혈교주 혈마 나령 이외는 없었습니다.”

피식.

음양신마의 입가에 가벼운 미소가 걸렸다.

비교적 담담한 목소리로 털어 놓는 대사제의 속마음을 어느 정도는 알 것 같았던 것이다.

‘역사 이래 누구도 성취해내지 못했던 혈신령의 힘을 얻어낸 혈마 나령이 전대 신마에게 바로 죽임을 당하자 실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던 모양이로구나.’

바로 맞추었다는 듯 대사제가 바로 그 점을 입에 올렸다.

“어떻게 성취를 얻자마자, 하루해를 넘기지 못하고 죽임을 당하는 것인지…….”

지금 생각해도 기가 막히는 모양인지 대사제의 표정이 조금은 허탈해 보였다.

“그날, 혈교의 미래를 위해 혈신령을 품고 도망쳐 나오느라 아무것도 가지고 나올 수 없었습니다. 동가식서가숙이 따로 없었지요.”

사실이었다.

혈교의 당당한 대사제와 혈사제들이 개방의 걸인들처럼 배를 곯아야 했고 추적을 피하기 위해 음식을 훔쳐 먹으며 청해호까지 도주했다.

그 과정에서 느껴야만 했던 참담함이란!

부르르.

생각만 해도 끔찍한 듯 대사제가 진저리를 치며 말을 이었다.

“혈교의 부활은 이제 오롯이 저 혼자만의 책임으로 남았을 뿐입니다.”

“…….”

“솔직히 지쳤습니다.”

충분히 이해가 되는 부분이었다.

“아득한 과거, 믿음에 관한 의견 차이로 마교에서 떨어져 나온 것이 바로 혈교라고 알고 있습니다. 다시금 본류로 돌아옴을 받아주시기 바랍니다.”

대사제가 다시금 혈신령을 머리 위로 들어 올렸다.

최대한 공손한 목소리로 애원했다.

“혈신령을 거두소서. 저와 열 명의 혈사제들의 생사여탈권까지 황제폐하께 오롯이 맡깁니다. 죽이든 살리든 이제 폐하의 뜻대로 하소서.”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대사제가 오체투지를 했다.

이대로 죽인다 하더라도 아무런 여한이 없음을 드러내는 태도였다.

씨익.

“좋아.”

음양신마가 몸을 일으켰다.

한 걸음에 대사제 곁으로 다가오더니 손을 뻗어 머리통을 움켜쥐었다.

“네 말의 진위부터 확인한 후 답을 주겠다.”

후우웅.

음양신마의 손으로 규천마력 한 줄기가 끌려 나왔다.

두부에 바늘이라도 꽂듯 부드럽게 대사제의 두뇌 속으로 밀어 넣었다.

“크크큭. 규천마력으로 펼쳐지는 제혼대법이다. 네 말의 진위를 낱낱이 파헤쳐주마.”

고통 때문일까?

아니면 거짓말이 들통 날 것에 대한 두려움 때문일까?

부르르.

대사제의 몸이 격렬하게 떨렸다.

***

보름 후 불회곡 입구.

적의 차림의 11인이 다가오고 있었다.

혈신령을 바친 후 음양신마로부터 제혼대법에 의한 확인까지 통과한 후 복귀를 허락받은 혈교 대사제와 휘하의 혈사제 십 인이었다.

“후우, 이쯤이면 안내자가 나올 것이라 했는데…….”

그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일단의 무인들이 나타났다.

모든 방위를 차단한 채 날카로운 질문을 던졌다.

“일월.”

앞뒤 싹둑 잘라먹은 말이었지만 대사제는 약속된 사람이 맞음을 증명하기 위해 외워온 답을 건넸다.

“신교천세.”

그제야 사내들의 얼굴에 긴장의 빛이 가셨다.

과거 비천검제 풍연호의 침습으로 인한 피해가 어지간히 큰 충격이었던 것이다.

“환영합니다, 혈사제.”

한 사내가 앞으로 걸어 나오며 반겼다. 격조 있는 태도로 포권을 취했다.

“신교 외원 총관 위지군이라 합니다.”

“반갑습니다, 이제야 본향으로 돌아온 혈사제입니다.”

아득한 옛날, 혈교가 신교 오궁의 하나였던 혈마궁에서 비롯된 것을 빗댄 인사였다.

다행히 총관도 잘 알아들었다.

음양신마의 명령 때문에라도 텃세 따위 부릴 생각이 없는 모양인지 활짝 웃으며 길을 틔웠다.

“들어가시지요. 장마종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오오! 오마종의 일원이신 장마종께서 말씀입니까?”

오마종의 일원을 만나게 되어 기쁜 듯 대사제의 목소리는 살짝 상기되어 있었다.

“예. 장마종을 뵌 후 나머지 분들은 차차 인사를 드리면 될 것입니다.”

“알겠습니다. 가자.”

대사제가 외원 총관을 따라 발을 내디뎠고 그 뒤를 따라 열 명의 혈사제가 조용히 움직였다.

그 순간이었다.

무표정에 가깝던 혈사제 십 인 중 마지막 한 사내의 입술이 슬쩍 위를 향해 말려 올라갔다.

하지만 붉은 적의에 망토를 워낙 깊게 눌러 쓰고 있기 때문인지 누구도 그 모습을 볼 수 없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