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우환제거
불회곡의 책임자라 할 수 있는 장마종과의 면담은 비교적 훈훈하게 끝났다.
“굴러 들어온 돌이 박힌 돌을 빼냈다는 말을 듣지 않기 위해서라도 교에 도움이 될 수 있는 것은 무엇이라도 할 생각입니다.”
혈교 대사제의 위치를 마교로 본다면 각성 전의 음양자와 비슷했다.
아무리 낮춰 잡아도 앞에 선 장마종의 아래는 아니었지만 스스로 먼저 고개를 숙였기 때문에 장마종으로서는 흐뭇하기만 했다.
“허허허. 이미 음양신마님을 뵙고 왔는데 무슨 그런 소릴 하는 겐가?”
“그래도…….”
“어색할 수 있는 부분을 감안해 특별히 배려해 주라는 음양신마님의 전언이 있었네.”
마교나 혈교와 같은 무력단체에서의 배려는 본디 강자나 윗사람이 아랫사람이나 약자에게 하는 법이다. 배려를 해주라는 말로 미루어 음양신마 역시 장마종을 혈교 대사제의 윗사람으로 인정했다는 뜻이었다.
“그저 감사할 따름입니다.”
쑥스러운 듯 고개를 살짝 숙이는 혈사제의 등을 장마종이 툭툭 두들겼다.
“너무 염려하지 마시게. 본가인 혈마궁의 궁주와 부궁주가 지난 전투로 사망했기에 현재는 부궁주 한 사람밖에 남아 있질 않네.”
혈마궁이 바로 수백 년 전에 떨어져 나간 혈교의 본가라고 할 수 있다.
혼자 남은 혈마궁의 부궁주는 신분 상승의 기회가 사라져 화가 날 수 있겠지만, 음양신마나 마교의 입장에서 본다면 이차 신마대전으로 인해 약화된 전력 보강의 차원에서 참 좋은 일이었다.
“아! 이런.”
대사제가 크게 안타까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
“시간이 조금 걸리겠지만, 그래도 뿌리가 같은 곳이니만큼 서로 잘 융합하리라 믿고 있네.”
“당연한 일입니다. 떨어져 있던 시간만큼 서로 달라진 부분을 배우는 일 또한 흥미로울 것 같습니다.”
“하하하. 그러길 바라네.”
호탕한 웃음과 함께 장마종은 대사제를 이끌고 중앙 대전으로 향했다.
중앙 대전에는 음양신마에게 직접 확인을 받고 승낙을 얻은 혈교 대사제의 복귀를 축하하고자 많은 수의 수뇌부들이 나와 있었다.
혈마궁의 하나 남은 부궁주는 물론이고 이제 그 세가 팍 줄어든 축융궁의 부궁주를 비롯해 현재 오궁이원의 핵심 전력이라고 할 수 있는 인원들이었다.
“모두 반갑소. 음양신마님의 은혜를 받아 본향으로 다시 돌아오게 된 혈교 대사제, 아니 혈마궁 대사제 여절령이라고 하오.”
“푸흐흐. 본향에 오신 걸 환영하오. 유령궁주 초요빈이라고 하오.”
오궁의 주인 중 환희궁주와 더불어 이차 신마대전에서도 멀쩡히 목숨을 부지하고 있던 유령궁주가 목에 힘을 주고 반겼다.
“오! 그 살벌한 전투에서 혁혁한 공을 세우셨다던 유령궁주셨구려. 반갑소이다. 연배도 비슷해 보이는데, 더불어 한 잔 술의 교분을 나누어도 좋을 듯싶소이다.”
“와하하하. 안 될 이유가 뭐가 있겠소? 나와 함께 교의 이곳저곳을 함께 돌아다니며 구경을 하시다가 한 잔 하도록 하십시다, 그려.”
“하하하. 좋지요.”
혈교 대사제가 뻗대지 않고 숙이고 들어오니 꽤 기분이 좋은 모양이었다. 유령궁주와 대사제 여절령과는 상당히 죽이 잘 맞았다.
“……!”
“……!”
용무린이나 당문으로 인해 피해가 컸던 만독궁의 부궁주나 지리멸렬한 혈마궁의 하나밖에 안 남은 부궁주들의 안색은 그리 좋지 못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음양신마가 직접 확인을 한 후 본교로 귀속됨을 허락했다고 하는데 말이다.
“혈마궁을 지키던 부궁주라고 하셨나?”
“그렇습니다, 대사제님.”
여절령의 질문에 헛물을 켠 혈마궁 부궁주가 한껏 어두워진 얼굴로 고개를 숙여보였다.
여절령은 재빨리 그의 몸을 손수 일으켜 세웠다.
호들갑을 떨며 지금까지 애써온 그의 수고에 대해 공치사를 했다.
“정말 애 많이 쓰셨네. 덕분에 내가 고향집에 돌아올 수 있었어. 앞으로 나도 많이 돕겠네. 떨어져 있던 시간만큼 많은 것이 다를 터이니, 서로가 서로에게 많이 알려주도록 하세나.”
서로가 서로에게 많이 알려주도록 하자니?!
“……별 말씀을. 물론입니다.”
이 정도까지 낮추고 들어올 줄은 몰랐던지 부궁주가 겸연쩍은 얼굴로 멋쩍은 미소를 지어 보이기까지 했다.
이렇듯 여절령의 친화력으로 인해 혈교의 대사제와 혈사제 십 명은 무사히 마교에 안착하게 되었다.
***
며칠간의 적응기간이 끝나고 대사제 여절령과 혈사제 열 명은 혈마궁의 부궁주와 더불어 지난 수백여 년 동안 서로 달라진 부분을 일정부분 나누었다.
일종의 무공 교류였다.
물론 시간이 흘러 여절령과 혈사제들이 완전히 혈마궁에 녹아들면 그들의 독문 무공까지 완벽하게 합일이 될 것이나 지금은 중급 수준 무공의 교류만 이루어지고 있었다.
‘다 멍청이들만 있는 것은 확실히 아니야.’
혈사제의 하나로 변신해 들어와 있던 용무린은 생각보다 시간이 더 많이 필요하다는 것을 느껴야만 했다.
음양신마의 제혼대법을 통과했음에도 불구하고 감시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았던 것이다.
‘음양신마에 대한 불신이라기보다는 어쩔 수 없는 경쟁심리 같은 것이겠지.’
경쟁심에 더해 막연한 거부감도 한 몫 할 것이다.
아무리 음양신마가 명령을 했다지만 오궁의 하나인 혈마궁과 혈교는 서로 떨어져 있게 된 지 수백 년이라는 시간이 흘렀으니까.
‘귀찮긴 하지만 어쩔 수 없지.’
시간을 조금 더 투자하는 수밖에 없다.
혈사제 일 인에 세 사람씩의 감시자가 붙어 있으니 더더욱 조심해야만 한다.
‘음양신마 놈이 배교나 마교의 대법으로 여절령과 혈사제들의 머릿속을 검사할 것이야 당연했고 통과도 잘 했는데 여기에서 시간이 걸릴 줄은 미처 몰랐네.’
이로써 가능성이 훨씬 더 높아졌다.
진정한 무극의 경지는 녀석의 혼백이나 영혼마저 소멸시킬 가능성이 크다.
왜냐하면 용무린이 진정한 무극의 경지로 여절령과 혈사제 열 명에게 모종의 암시를 주었고 그 암시가 음양신마에게 발각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 말은 곧 녀석의 술법보다 용무린의 암시가 더욱 위력적이었다는 것을 뜻하는 바, 녀석의 환혼대법 역시 마찬가지가 될 확률이 높다는 것이다.
‘그건 그거고, 이제 슬슬 움직여봐야 하는데…….’
굳이 이런 방법을 동원하는 이유는 오직 한가지였다.
음양신마의 환혼대법.
녀석의 본체가 위험에 처하거나 죽음을 맞이했을 때 찾아들어갈 다른 몸을 찾아 없애기 위해서였다.
‘놈이 준비해 놨을 껍질을 이곳을 제외한 곳에서 찾는다는 것이 가당키나 하겠어?’
그래서 가장 먼저 이곳으로 달려온 거다.
그런데…….
‘막막하구나.’
혈신령의 기운을 느낄 수 있었듯, 이곳에 와보면 솔직히 무슨 느낌이 있을 줄로만 알았다.
하지만 오산이었다.
그 어떤 특별한 느낌도 없었다.
이제는 놈이 정말 이곳에 옮아갈 껍질을 준비해 두었을지 확신까지 옅어질 정도였다.
‘그래도 한 번 움직여보자.’
계속되는 교류와 친화성 발휘로 지금껏 혼자 있을 시간이 없었는데 다행히 며칠이 지나니 잠자리까지 지켜보는 시선은 거둬진 것이다.
물론 아직도 밖에서는 자신의 방을 삼교대로 돌아가며 지켜보는 눈들이 있을 터였다.
그래도 상관없었다.
자신에게는 따로 방법이 있었으니까.
‘보자, 모두 세 놈이었지?’
문을 열고 나서자 녀석들이 시선이 한꺼번에 쏠리는 것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천정. 마루 밑. 그리고 여기…….’
모퉁이를 돌기가 무섭게 용무린의 손이 벽을 향해 뻗어졌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곳을 콱 움켜쥐더니 바닥에 패대기쳤다.
철퍼덕.
“커헉!”
짧은 비명소리와 함께 검은 일색의 차림의 사내가 바닥을 뒹굴었다. 유령궁의 은신술을 사용하는 자였는데 그대로 돌처럼 굳었다.
“흥!”
나직한 콧소리와 함께 용무린은 발을 살짝 굴렀다.
동시에 손가락을 위를 향해 찔렀다.
“크흑!”
“허억!”
외마디 비명이 연거푸 터졌다.
천정에 있던 녀석이 힘을 잃고 뚝 떨어졌다. 마루 밑에 있던 놈 역시 발 구름 한 번에 도주하려던 자세 그대로 제압당하고 말았다.
“일단 좀 들어가자.”
용무린은 셋 모두를 다시 방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혈교 대사제의 정신을 파고들어 강력한 암시를 걸어 놓은 것처럼 녀석들에게도 똑같이 했다.
“너부터 시-작!”
텁!
유령궁 녀석의 머리를 움켜쥐었다.
불사신기를 뿜어 녀석의 두뇌를 마구 헝클였다. 혼란에 빠진 틈을 비집고 들어간 불사신기를 이용해 녀석의 뇌리에 초월자만이 가능한 암시를 걸었다.
“나는 방에 들어오면 혈교 무공 일주천 한 후 마교에서 교류를 통해 얻은 서적을 읽고 잠자리에 들어. 목욕을 한다거나 술을 마실 때도 있는데 대동소이해. 알아들었지?”
“예? 아, 예. 알겠습니다.”
넋이 나가버린 듯 녀석이 침을 질질 흘리며 답했다.
부르르.
곁에서 지켜보던 두 녀석이 진저리를 쳤다.
천하에 유령궁의 밀사가 개구리처럼 잡혀와 저렇듯 단숨에 바뀌는 모습을 보니 두려웠던 것이다.
씨익.
“떨긴? 무서울 것 없어. 이거 안 아파.”
그런 녀석들을 향해 서늘하게 웃어 보이며 용무린이 다가왔다.
텁!
잘 익은 수박 움켜쥐듯 녀석들의 머리를 차례차례 움켜쥐었다. 불사신기를 밀어 넣어 암시를 걸었다. 완벽하게 개조를 했다.
감시자 셋의 정신을 모두 개조해 놓은 용무린은 가볍게 밖으로 나섰다.
휘슷.
한 걸음에 용무린의 신형이 흩어지듯 어둠속으로 녹아들었다. 불회곡 이곳저곳을 스쳐 지나기 시작했다.
***
다음날 아침.
유령궁주는 밀사들에게서 취합된 보고를 받고 있었다.
“……그렇게들 시간을 보냈다고 합니다. 어젯밤에도 역시 별다른 일은 없었습니다.”
유령궁주의 고개가 갸우뚱하고 기울었다.
“희한하단 말이지. 아무리 먹고 사는 일에 지쳤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혈교 대사제씩이나 하던 인간과 혈사제들인데 너무 고분고분하단 말이야.”
어쩌면 음양신마로 각성 전 음양자와 비슷한 위치에 있던 자가 대사제 아니겠는가?
“그 아래 혈사제들이 바로 우리 오궁의 부궁주 정도의 위치가 된단 말이지.”
그런 대단한 신분의 사내들이 너무나도 자신들을 낮추는 것이 수상했다.
물론 음양신마님의 확인을 거쳤다고 했으니 그렇게 크게 걱정은 하지 않는다. 다만, 놈들이 노리는 게 있다는 느낌이 강하게 드는 것이 문제였다.
“황제의 위에 오르신 음양신마님께서 어째서 놈들을 받아주셨을까? 그 이유가 뭘까?”
아무리 생각해도 음양신마님께서는 놈들의 움직임을 통해 자신들에게 돌려서 말하고 싶은 것이 있는 것이다.
“그게 과연 뭘까?”
그게 너무나 궁금했다.
“하여튼 계속해서 눈여겨보라고 해. 황제폐하께서 놈들을 다시 받아들이고 작업장을 맡긴 이유는 광마인 말고도 뭔가 또 있을 거야.”
그래야만 자신들 역시 냄새나는 환희궁 계집들처럼 황제 곁에서 함께 나라를 세운 결실을 함께할 수 있을 것이다.
“예, 궁주님.”
“명심하겠습니다, 궁주님.”
유령궁주는 단순히 그렇게 생각하고 말았지만 나머지 두 곳인 만독궁의 부궁주와 혈마궁의 부궁주 직속 수하들의 생각은 많이 달랐다.
만독궁 부궁주 만사력의 입에서 실로 묵직한 예상이 흘러나왔다.
“대대적인 조직 개편이 있을지도 모른다.”
“조직 개편 말씀입니까?”
“그래.”
바짝 긴장한 얼굴로 만독궁의 하나밖에 남지 않은 부궁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지난 신마대전에서 궁주님을 잃은 우리 만독궁이다. 어디 그뿐인가? 부궁주도 나 하나 남았다. 그 외에 많은 고수들도 잃었지. 예전에 비해 확실히 사 할 정도의 전력밖에는 남지 않았다.”
“분한 노릇입니다, 부궁주님.”
“맞습니다. 우리 만독궁이 이렇듯 심각한 타격을 입었는데도 불구하고 보살펴 주시지 않다니요!”
“자칫 잘못하면 앙숙인 유령궁 놈들에게 흡수통합 당할 수도 있습니다.”
“유령궁주에게 힘을 실어 주기 위해 대사제란 놈을 보낸 것이 분명합니다.”
“그렇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어째서 그 정도 지위가 되는 여절령이란 놈이 스스로를 낮추어 유령궁주와 찰떡궁합을 이룰 수 있단 말입니까?”
황제를 참칭한 후 나라를 경영하는 연습을 하느라 가장 큰 힘이었던 불회곡의 남겨진 수하들 챙기는 일에 소홀해진 결과였다.
음양신마에 대한 충성이 옅어졌다기보다는 자신들의 처지에서 비롯된 불안함도 크게 한몫했다.
“냄새나는 계집들인 환희궁도 황제폐하의 주변에서 나랏일을 돌보고 있거늘 우리만 이곳에 팽개쳐져 있다.”
“맞습니다, 부궁주님.”
“이대로는 안 됩니다.”
점점 더 목소리들이 높아졌다.
수하들을 둘러보던 부궁주 만사력이 무거운 목소리로 명령을 내렸다.
“한시라도 감시의 눈길을 떼지 마라. ‘아차’ 하는 순간에 혈마궁 놈들과 한통속이 된 유령궁 놈들에게 먹혀버리고 만다. 그리고 오독문의 일에 더욱 집중을 해. 그것만이 우리 만독궁이 살 길이야.”
“예.”
“알겠습니다.”
이렇듯 궁주와 부궁주 한 사람을 잃은 만독궁은 언제나 앙숙이었던 유령궁의 기세에 눌리다 못해 피해의식까지 생겨 날을 세우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혈마궁 역시 마찬가지였다.
본향을 찾아왔다고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혈교 대사제의 입장인 것이지 자신들에게는 굴러 들어온 돌일 뿐인 것이다.
“수백 년 전 본교에서 떨어져 나갔던 놈들이다. 그런 놈들 손아귀에 우리 혈마궁을 통째 빼앗길 수는 없는 일 아니겠느냐?”
“맞습니다.”
“분합니다, 부궁주님. 크흐흑.”
혈마궁 수뇌부들 중 몇몇은 분한 나머지 울음을 터뜨리기까지 했다.
“무조건 꼬투리를 잡아라. 수단 방법 가리지 마라. 광마인 작업장에서든 어디서든 놈들이 본교에 득이 되기는커녕 해가 된다는 증거를 찾아라. 그래야만 우리 혈마궁을 빼앗기지 않게 된다. 알겠느냐?”
“충!”
“알겠습니다.”
그렇듯 비장한 목소리로 수하들이 흩어질 때, 용무린은 발걸음도 가볍게 불회곡을 뒤집고 다니는 중이었다.
‘저곳이 바로 오궁이원이전 소속 마인들의 가족들이 살고 있는 곳이라고 했겠다?’
오늘 밤엔 저길 뒤질 생각이었다.
스스슷.
용무린의 신형이 바람처럼 흔적도 없이 외원에서도 외곽을 향해 움직였다.
***
자금성의 아침이 밝았다.
“오오, 총병관이 개선하고 있단 말이지?”
“그러하옵니다, 폐하.”
장인태감의 보고에 황제는 태화전으로 달려 나갔다. 조회와 시사까지 뒤로 미루고 총병관 양문광 대장군이 입궐하기를 기다렸다.
이윽고 때가 되었다.
총병관과 양문광 이하 군사 제갈문군과 유격장군 양경홍 등이 태화전 앞에 도착했다.
기다렸다는 듯 수신호위가 고함을 질렀다.
“총병관 양문광과 군사 제갈문군, 유격장군 양경홍 입궐이오-오!”
태화전의 커다란 문이 활짝 열렸다.
안으로 들어선 양문광과 제갈문군 그리고 양경홍 세 사람이 당당히 나아가기 시작했다.
씨이익.
그 모습을 지켜보며 활짝 웃던 황제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성큼성큼 옥좌에서 내려갔다.
“폐하!”
“너무 과하신 처사이옵니다-아.”
삼공과 삼고가 화들짝 놀라 목소리를 높였다.
용무린을 맞이할 때는 황제가 옥좌에서 내려온 것으로도 모자라 십 보 앞으로 나아가 손수 맞이할 때에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으면서 지금은 옥좌에서 내려오는 것만으로도 딴죽을 걸었다.
‘질투가 났겠지?’
참으로 못난 놈들이었다.
본인들 뜻대로 이뤄진 화친이 아니라 생각지도 못한 전공을 올린 화친의 주역들이기에 초조했으리라.
‘네놈들처럼 자리보전에만 전전긍긍하는 무리들과 더는 상종치 않으리라.’
굳은 결심과 함께 황제의 입이 열렸다.
“어서 오라! 그간 애써 나라를 지키느라 고초가 컸음을 잘 알고 있느니라.”
처처척!
황제의 목소리가 끝나기가 무섭게 양문광, 제갈문군, 양경홍이 한쪽 무릎을 꿇었다. 군례를 올렸다.
“신 총병관 양문광, 황제폐하 앞에 승전보를 올리고 돌아옴을 고하나이다.”
“신 군사 제갈문군…….”
“신 유격장군 양경홍…….”
묵직하고 뜨거운 보고가 이어진 후에 황제는 뒤를 향해 손을 뻗었다. 미리 이야기가 되어 있었는지 장인태감이 다가와 작은 쟁반을 내밀었다.
“받아라.”
쟁반에는 빈 잔 세 개가 놓여 있었다.
감격한 얼굴의 총병관 일행이 빈 잔을 받아들자 황제는 옥으로 만들어진 주전자를 기울였다.
“그대와 장병들이 흘린 피를 겨우 옥로주 한 잔으로 되갚는 나를 용서하라. 하지만 약속하지. 나는 절대로 그대들과 죽어간 병사들을 잊지 않겠다.”
금은보화의 보상도 좋겠지만 이렇게 마음을 알아주는 것이야말로 무장들이 진정으로 바라던 일 아닐까?
“충! 신 총병관 양문광, 황제폐하께 가없는 충성을 할 뿐이옵니다.”
“충! 신 군사 제갈문군…….”
“충! 신 유격장군 양경홍…….”
열화와 같은 답이 터져 나왔고 황제는 셋을 손수 일으켜 세웠다. 씽긋 웃으며 가장 하고 싶던 말을 했다.
“자세한 이야기가 듣고 싶구나.”
전서와 파발마를 통해 대충은 알고 있다.
하지만 용무린이 대체 뭘 어떻게 했기에 그 무시무시한 조르스 칸 놈이 꼬리를 말고 도주를 한 것인지는 도무지 알 수 없었던 거다.
씨이익.
회심의 미소를 지어보인 양문광이 삼공과 삼고가 있는 곳을 슬쩍 돌아보며 답했다.
“송구하오나 아주 민감한 기밀인지라 주위를 좀 물린 후 답을 드렸으면 합니다.”
쿵 하면 짝이다.
“오오! 그러한가?”
말 한 번 잘했다는 듯 황제의 어명이 즉시 떨어졌다.
“오늘 조회와 시사는 내일로 미루겠다.”
“폐하-아!”
“산적한 안건들이…….”
입지가 줄어들 것을 염려한 삼공과 삼고를 비롯한 문무백관들이 목소리를 높였지만 소용없는 짓이었다.
“시끄럽다.”
“……!”
“제 아무리 산적한 안건들이 중요하다지만 나라의 안위에 관한 것만 하겠느냐? 어서 썩 물러들 가렷다!”
저렇게까지 말을 하니 어쩌랴?
“황공하옵니다, 폐하.”
“내일 조회에 뵙도록 하겠나이다, 폐하.”
그렇게 물러나야만 했다.
그제야 속이 후련한지 황제는 헤죽 웃어 보이며 앞으로 바짝 다가왔다.
은근한 어조로 물었다.
“어서 말을 해 보거라. 황룡패주가 대체 어떻게 하였기에 그 망할 조르스 칸이란 놈이 꼬리를 말았느냐?”
“예, 폐하.”
양문광 역시 활짝 웃으며 황제에게 용무린의 무용담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
어느 문파들이나 마찬가지이겠지만 외원이라는 곳은 그 문파가 원활하게 돌아가게끔 하기 위한 공적인 업무를 보는 곳들이 주로 배치되어 있다.
당연히 마교 역시 외원은 그런 곳들이었다.
수십 채에 이르는 거대한 전각들.
그 안에는 저마다의 업무에 따라 마도 칠문이나 흑도 문파들과의 크고 작은 이익관계에 얽힌 일들이 진행되고 있을 것이다.
‘그 많은 숫자가 호남성과 다른 성에 나가 있는데도 불구하고 아직도 많네.’
각 문파 간에 이득관계의 중재를 위한 면담이나 엄청난 양의 생필품 거래 현장도 보였고 그때마다 외부인들의 모습도 들어왔다.
‘저 많은 놈들까지 죄 살펴봐야 하는 것일 테지?’
당연하다. 그렇게 하지 않고서야 의미가 없다.
용무린은 각 건물 지붕 밑에 자리를 잡은 후 기감을 끌어 올렸다.
‘느껴진다.’
어떤 건물인지는 몰라도 건물 안에 들어와 활동하고 있는 자들의 내공이나 움직임 따위가 하나도 빠짐없이 기감에 걸려들었다.
‘여긴 아니야.’
이 건물의 지붕 아래 살아 숨 쉬는 모두를 살폈다.
하지만 누구도 의심할 만한 독특한 무엇인가를 풍기는 존재는 없었다.
‘다른 곳으로 이동하자.’
다시금 지붕 위로 오르며 용무린은 생각했다.
‘뭐, 이렇게 보면 마교나 여타 다른 문파나 별다를 게 없어 보이네.’
하지만 보이는 것이 다가 아님을 용무린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신마가 주입해 놓은 기억 속 마교의 교리는 둘째 치더라도 마인들의 실생활 속에는 왕왕 상리에 어긋나는 숨어 있기 마련이었으니까.
그 생각이 옳다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려는 것일까?
“꺄아악!”
어디선가 한 여인의 자지러지는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그 순간에 마교의 본성이 드러났다.
헤죽. 헤실.
분명히 비명소리를 들었으면서도 누구 한 사람 움직이려 들지 않았다. 모두 그 비명 소리의 위치와 이유에 대해 알고 있다는 태도였다.
‘일단 가보자.’
오직 한 사람 용무린만이 움직였을 뿐이다.
휘스슷.
전각 두 개를 타 넘었을 때였다.
외원에서도 외곽에 속하는 곳에 상당한 넓이의 장원이 펼쳐져 있었는데 비명은 그 장원의 중심인 마당에서부터 쏟아지고 있었다.
“제, 제바-알!”
“사, 살려주세요. 흐흐흑.”
멀쩡하게 생긴 사내 오십여 명이 밧줄에 묶여 무릎을 꿇고 있는 가운데 이제 갓 십오 세나 넘겼을 법한 소녀 두 명이 헐벗은 채 벌벌 떨었다.
“크크큭. 고년 참! 후르릅.”
“이년아, 어차피 죽을 목숨, 육보시 좀 하고 죽으면 좀 좋으냐? 낄낄낄.”
유령궁도로 보이는 마인 열 놈이 소녀 둘을 둘러쌓은 채 시시덕대며 옷을 벗기는 중이었다. 겁탈할 순서도 미리 정했는지 이미 두 놈은 하의를 반쯤 내린 상태였다.
아득.
“이이, 악독한 자식들!”
“더러운 놈들아! 차라리 나를 죽여라!”
제압당한 채 밧줄에 묶여 있던 사내들 중 그래도 의기가 넘치는 몇몇이 이를 갈았다.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며 소녀들을 구하려 들었다.
물론 다 소용없는 짓이었다.
유령궁 소속 마인들은 되레 더 잘 되었다는 듯 사내들을 보며 이죽거렸다.
“크크큭. 그래, 바로 그거야.”
“분노를 잘 기억해. 그래서 결전의 순간이 오면 최선을 다해서 표출하란 말이야.”
“푸흐흐. 그래야 우리가 수련이 되지. 안 그래?”
용무린은 비로소 이들이 하는 짓이 어떤 것인지 알 수 있었다.
‘분기에 한 번씩 있다는 사냥축제로구나.’
마교의 수많은 악독한 짓거리 중 하나!
본디 치열한 실전 위주로 무공을 익히는 곳이 바로 마교라는 곳이다.
따라서 모든 수련의 끝은 반드시 죽음이 오고 가는 실전이 되어야만 했고 그것을 위해 예하 문파들이 적절한 무인들을 납치해 와 납품을 하는 것이었다.
‘알고는 있었지만 참…….’
마도칠문과 불회곡 인근의 흑도문파들의 짓으로써 대부분 운남성이나 귀주성 그리고 해남도 인근의 중소 검파들 소속 무인들이 대상이었다.
‘참기 힘들게 만들고 지랄이네 정말.’
어째서 마교도 자신들끼리는 죽고 죽이는 실전을 펼치지 않느냐고?
잊지 마라. 이들은 마교다.
이들의 절대적인 첫 번째 적은 누가 뭐라고 해도 정파다.
그러니 되도록 마공이 아닌 무공과의 실전을 치러 경험을 쌓아야만 했고 저 사내와 소녀들은 그 목적에 맞게 잡혀온 상품에 불과했다.
‘유령궁 놈들이 저 지랄인 것을 보니 이번에는 유령궁에서 사냥 삼아 실전비무를 치를 모양이로구나.’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찌이익. 촤악.
소녀들이 완전히 나체가 되었다.
“크흐흐.”
“꾸울꺽.”
하의를 반쯤 내린 유령궁 마인 두 녀석이 소녀들에게 다가갔다.
“흐흐흑. 제, 제바-알!”
“사, 살려주세요. 아흐흑.”
아무리 울어봐야 소용이 없는 일이다.
놈들은 소녀를 둘러싸고 있는 열 놈 모두에게 차례가 돌아가기 전까지 멈추지 않을 것이고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을 사내들의 분노를 자극할 것이다.
‘그래야 실전비무에 효과가 더 좋아지기 때문이겠지.’
잘 알고 있지만 용무린 자신의 속까지 부글부글 끓어오르기 시작했다는 것이 문제였다.
‘하아, 고민된다.’
마음만 같아서야 벌써 놈들을 난도분시 했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음양신마의 껍질을 찾겠다는 목표가 엉망이 되어 버린다.
“요년!”
“우헤헤!”
하의를 완전히 내린 두 녀석이 소녀들을 덮쳤다.
더는 생각이고 뭐고 할 수가 없었다.
휘슷.
자신도 모르는 사이 용무린의 신형이 움직였다.
이 모든 일들이 사실은 뜬구름처럼 스쳐 지나갈 뿐인 일임을 알고 있었음에도 그렇게 되었다.
‘알아. 알지만, 그래도 저건 아니야!’
참아 줄 일이 있고 참지 못할 일이 있는 거다.
저건 아니었다.
버언쩍. 스가가각.
움찔! 퍼득.
한 줄기 섬광과 함께 막 소녀들의 몸을 범하려던 두 마인의 몸이 굳었다.
툭. 투둑.
녀석들의 목에 그어진 붉은 색의 실금에서 핏물이 흘러 소녀들의 얼굴로 떨어졌다.
“꺄아악!”
“아악!”
소녀들의 눈이 부릅떠졌다.
자신들을 겁탈하려던 놈들의 머리가 소리도 없이 스르르 미끄러지더니 옆으로 툭 굴러 떨어졌기 때문이었다.
차차창.
“웬 놈이냐!”
“너는 누구냐?”
나머지 여덟 유령궁도들이 검을 뽑아들었다. 제법 정교한 포위망을 구성했다.
놈들 따윈 아랑곳없이 용무린은 이미 죽어 버린 사내 녀석들의 장포를 벗겨 소녀들에게 건넸다. 따뜻한 목소리로 안심을 시켰다.
“너희 둘만큼은 내가 어떻게 하든 구해주도록 하마.”
워낙 충격적인 일의 연속이어서인지 소녀들은 대답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용무린이 건넨 장포를 멍하니 바라만 보고 있을 정도였다.
스륵.
그래서 용무린이 손수 장포를 휘돌려 소녀들의 몸을 감싸주었다.
“아!”
“어머!”
그제야 자신들의 차림을 소녀들이 자각했다.
화들짝 놀라 장포에 여린 몸을 마구 구겨 넣었다.
“괜찮아. 괜찮아.”
따뜻한 미소로 웃어 보이며 돌아선 용무린의 표정이 급변했다. 사신과 같은 냉막한 얼굴에 두 눈에서는 서릿발 같은 광채가 줄기줄기 뿜어졌다.
“너흰 하나도 안 괜찮을 거야.”
역시 하룻강아지들이 용감한 법이다.
겁도 없이 용무린을 향해 달려들었다. 유령궁의 절기를 펼쳐냈다.
“죽어엇!”
“시건방진 애송이 놈!”
“차아앗!”
유령궁 마인답게 절기들이 은밀했다.
순간적으로 시선을 회피하며 뒤로 휘도는 유령신보도 그러했고 암살에 특화된 검법임을 알려주듯 펼쳐내는 검법초식은 소리조차 일지 않았다.
어지간한 무인이었다면 자신이 어떻게 죽는 줄도 모르는 사이 목이 떨어졌을 테지만…….
“먼저들 가 있어. 나머지 놈들도 머지않아 보내줄게.”
아무렇지도 않게 내려진 사망선고를 끝으로.
버언쩍. 피쉬이이잇.
가볍게 피어 오른 가온누리 칼벼락에 한 번에 모두 두 조각으로 나뉘고 말았다.
후두둑. 털썩. 터얼썩.
정말 살풍경한 장면이었다.
그저 짧은 한 번의 휘두름에 여덟 마인들이 몽땅 핏속을 나뒹구는 신세가 되다니!
“후우. 일이 복잡하게 되었네.”
누구도 입을 열지 못하는 사이 용무린은 길게 한숨을 내쉰 후 돌아섰다.
그런 용무린을 향해 사내들 중 두 명이 나섰다.
“사, 살려주십시오, 은공.”
“이곳에서 나갈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은공.”
물에서 건져내니 보따리를 내놓으라는 격이다.
‘이럴 것 같아서 나서지 않으려 했는데…….’
최대한 들키지 않은 채 역천자 녀석이 옮겨갈 몸을 찾아내야 하는 처지다. 그 목적을 위해 내가 해줄 수 있는 것은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그게 가능할 것 같아?”
용무린의 다소 싸늘한 목소리에 사내들이 입을 다물었다.
그러더니 이내 말을 바꾸었다.
“저 두 아이를 두고 하는 말이었습니다, 은공.”
“저 아이들만이라도 은공께서 살펴주십시오. 이렇게 부탁드립니다.”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사내들이 무릎을 꿇었다.
간절한 목소리로 애원했다.
“두 아이는 운남 오독문의 핏줄입니다.”
“방계에 불과하지만 만독문에 망가져버린 오독문의 몇 남지 않은 혈손입니다. 부디 아량을 베풀어 주십시오.”
오독문.
대충 그림이 그려졌다.
‘만독문 녀석들이 궁주랑 부궁주 사망으로 인해 세력이 줄어드니까 만만한 오독문을 흡수해 덩치를 키우려고 했던 것이로구나.’
이들은 회유가 되지 않는 독종들일 터.
‘유령궁에 넘겨 점수도 따고 처리도 하고 겸사겸사 좋은 일이었겠네.’
갑자기 김이 팍 샜다.
‘그놈이 그놈이었잖아!’
오독문도 그리 좋은 놈들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규모만 다를 뿐, 그 녀석들 역시 운남성 성도 곤명을 중심으로 온갖 악독한 짓이란 짓은 다 저지르고 돌아다니는 녀석들이었다.
애써 구해준 보람이 사라진 기분이라고나 할까?
괜한 짓을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냥 역천자 놈 껍질이나 찾으러 다닐 것을.’
반짝. 배시시.
기껏 구해준 소녀 두 명이 묘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아무리 봐도 몸짓이 예사롭지 않다. 방계라고는 하지만 그래도 오독문의 혈손의 몸짓이라고 하기는 지나치게 요염했다.
‘운남의 여인들은 어린 나이에 성혼을 하며 성혼 전이나 후를 막론하고 외간 남자와도 서로 마음만 맞으면 얼마든지 통정을 한다더니…….’
원치 않는 사내들에게 겁간 당하는 것이야 당연히 피눈물이 나지만 자신들이 원한다면 이야기가 또 급격히 달라지는 모양인지 눈빛이 뜨거웠다.
어지간히 문란한 풍습에 젖어 생활한 탓에 피가 뜨거운 것 같았다.
‘아오, 됐다.’
그렇지 않아도 제갈영령에 주약란 그리고 양하린까지 겹쳐서 머리가 아플 지경인데 엄한 데 눈 파는 짓 따윈 절대로 사절이었다.
“그렇게 눈 묘하게 뜨지 않아도 살려준다. 미리 말해두지만 나는 너희들 몸에 관심 없다.”
“예? 아, 예…….”
“네에.”
내심을 들켜 민망한 모양인지 소녀, 아니 어쩌면 유부녀일지도 모르는 소녀 두 명이 얼굴을 붉혔다.
“너희들 요청대로 이 두 명은 살려준다.”
괜한 짓이긴 했지만, 어쨌거나 마무리는 지어야 하니까.
용무린은 대뜸 두 여인을 각각 한 사람씩 옆구리에 끼었다. 번쩍 들었다.
스르르.
그 상태로 용무린의 몸이 하늘로 떠올랐다.
“알지? 얘들 살리고 싶으면 튀어.”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용무린은 그대로 날아올랐다.
불회곡 밖을 향해 소리도 흔적도 없이 움직였다.
그 순간,
“응?”
“어헉! 내, 내공이 돌아온다.”
“점혈이 풀렸어.”
사내들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그리고…….
“튀어!”
“반드시 살아서 보자.”
“가자!”
타닷. 스스슷.
일제히 사방으로 흩어졌다.
“어엇! 누구냐?”
“이런! 사냥감들이 도망친다!”
“잡아랏!”
외원 일대가 갑자기 소란스러워졌다.
그사이 용무린은 외원을 돌파해 불회곡 밖으로 향하고 있었다.
스스스슷.
이토록 은밀한 신법이 있을까?
혹 덩어리가 둘씩이나 달려 있음에도 불구하고 용무린의 모습을 누구도 볼 수 없었다. 공간 속에 녹아든 듯 아니 허깨비인 듯, 코앞에서 스쳐 지나고 있음에도 눈치 채는 마인이 없었다.
휘슷.
불회곡을 완전히 빠져 나온 용무린이 기분 좋게 하늘로 솟구쳐 오르며 물었다.
“어느 쪽으로 가야 좋겠냐?”
“저어기, 저쪽입니다, 은공.”
“해가 지는 곳을 향해 가 주십시오, 은공.”
여인인지 소녀인지 모를 두 사람의 목소리가 어쩐지 운남성까지 데려다 줄 것을 요구하는 듯해서 용무린은 다시 한 번 잘라 말했다.
“마교 놈들 눈길이 잘 닿지 않는 곳까지만 데려다 줄 거야. 그 이상은 곤란해.”
솔직히 지금도 살짝 무리였다.
2교대로 바꿔가며 감시하던 여섯 놈 모두에게 암시를 걸어두긴 했지만 너무 오랫동안 변함없는 보고만 들어가게 되면 보고 받는 놈들이 의심할 게 뻔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만독궁이 오독문을 노리는 가장 큰 이유는 혈고라는 귀물의 제조비법 때문입니다.”
“혈고의 제조비법이 놈들에게 들어가게 되면 자의 반 타의 반 마교의 만독궁에 합류하게 된 오독문의 문도들 목숨이 위험하게 됩니다. 필요 없어지게 되니까요.”
“그러니 제발 그것까지만 도와주시어요.”
“우리 소문주님, 궁지에 몰려 숨어계신 우리 소궁주님까지만 구해주시어요, 은공.”
두 여인의 입에서 이런 말들이 흘러나왔다.
‘안 갈 수가 없네.’
한때 무림맹은 물론이고 황궁까지 온통 혼란의 도가니에 빠뜨린 그 혈고의 제조비법이 오독문의 것이었다는데 어떻게 안 갈 수가 있겠는가?
“서쪽이라고 했지?”
“예.”
“서둘러 주시어요, 은공.”
서둘러 주지. 암.
“꽉 잡아!”
스파아아-앙.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속도를 높이는 용무린이었다.
***
운남성 동남쪽에 자리한 문산.
장족과 묘족 모두가 신성시 여기는 이 산속에는 아주 독특한 연못 한 곳이 존재하는데 마령지라고 한다.
희한하게 자연 발생된 마기가 흐르는 곳!
음산하며 귀기가 서려 있고 장족과 묘족의 선조들이 대대로 조상들의 장례를 치러온 곳으로 시기와 귀기에 미약한 수준의 유황연까지 섞여 보통 사람들은 오래 서 있을 수조차 없는 곳이었다.
하지만 예외인 사람들도 있는 법이었다.
스스슷.
보통 사람들이라면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고 대낮임에도 볕이 잘 들지 않아 어둑어둑한 마령지 안에서 신법을 펼쳐 휘젓고 다니는 무인들이 있었다.
마교 오궁의 하나인 만독궁의 마인들이었다.
타다닷. 멈칫.
선두에서 달리던 염소꼬리 수염 장년인의 움직임에 따라 나머지 백 명의 만독궁 마인들이 신법을 멈추었다.
척. 척.
말이 필요 없었다.
염소꼬리 수염 장년인이 손가락 두 개를 들어 자신의 좌, 우를 가리키자 두 갈래로 나뉘더니 커다란 바위 하나를 휘돌아 흩어졌다.
씨이익.
마음에 든다는 듯 염소꼬리 수염 장년인이 입술만 움직여 웃어 보였다.
잠시 후,
차차창. 타탕. 카카캉. 스각.
“크아악!”
피이잇. 서걱.
“허억!”
병장기 부딪히는 소리와 함께 처절한 비명소리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드디어 잡았다.”
염소꼬리 수염 장년인의 얼굴 한 가득 회심의 미소가 번졌다. 이차 신마대전 직후부터 계속해서 공을 들여온 일이 결실을 맺는 순간이기 때문이었다.
“이미 다 확인했다. 유황천의 너비 때문에 이 길을 제외하면 빠져 나갈 곳이 없을 터, 어서 빨리 본좌 앞으로 나오너라.”
만독궁의 부궁주 종사림은 애가 닳았다.
어서 빨리 오독문주의 여식을 잡아 비전을 빼앗고 이 싸움을 끝내고 싶었다.
“어차피 본교와 오랫동안 협조해 왔잖아. 우리 만독궁과 하나가 되는 것이 미래를 위해서도 더 좋을 거야. 그러니 이제 그만 튕겨.”
만독궁와 오독문의 강제 병합.
아무리 생각해도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일이었다.
만독궁으로서는 이차 신마대전으로 인해 잃어버린 전력을 어느 정도라도 채워 넣을 수 있어서 좋았고, 오독문으로서는 마교의 힘을 정식으로 등에 업고 내세울 수 있어서 좋은 일이었다.
물론 그 과정에서 혈고라는 귀물의 제련과 성장에 관한 비법 취득은 덤이었다.
“오독문 소궁주 진화연. 그만 버티고 나와서 본좌의 품에 안겨라. 나 만독궁 부궁주 종사림, 이제는 만독궁주의 위에 오를 사내야. 네년의 부군으로 부족함이 없는 사내란 말이지.”
나이만 따지면 아버지뻘이었지만 종사림은 그런 생각 따위 추호도 없었다.
그때였다.
차차창. 카캉. 스걱.
“크아악!”
패애액. 서걱.
“허어억!”
비명소리가 바로 앞에서 울려 나오기 시작했다. 궁지에 몰린 토끼가 튀어 나오기 직전이었다. 이제는 포위망을 바짝 조여야 할 때!
“크크큭. 가자!”
스슷.
종사림을 시작으로 수신호위 다섯이 어둑한 나무그늘 속으로 동시에 짓쳐들었다.
반짝!
‘또 있을 줄 알았다!’
‘그래, 네놈들이 있어야 정상이지.’
‘함께 죽자 이놈들아!’
피에 물든 상처를 손으로 감싸 쥔 채 정신없이 포위망을 벗어나던 오독문의 무인 십여 명의 안색이 더없이 단호해졌다. 독기를 뿜었다.
타닷. 탓.
종사림과 수신호위들이 외길을 차단한 채 달려오고 있는 모습을 보자마자 갑자기 왼쪽을 향해 방향을 틀었다.
“억! 그쪽은 유황천인데?”
이해할 수 없었다.
이곳 마령지의 유황천 물 색깔은 모두 붉은 빛이었다.
지독한 부시독을 품고 있어 살아 있는 것은 무엇이든 닿기만 하면 녹여 없애버리는 힘을 품고 있음을 모를 리 없는데 어째서 그곳으로……?
“……!”
거기까지 생각하던 종사림이 눈이 동그래졌다.
“서, 설마?”
설마가 사실이었다.
휘릭. 타다닷.
눈부신 동작으로 오독문 무인들의 뒤를 따라 방향을 꺾은 종사림의 눈에 놀라운 장면이 나타났다.
백여 장이나 되는 너비의 유황연 가운데 드문드문 바위가 솟아 있었는데 오독문 무인들은 기가 막히게 그 바위만 밟고 건너는 중이었다.
“이런 빌어먹을! 숨겨진 길이 있다니!”
이러다 다 잡은 먹잇감을 놓치겠다.
위기감이 아찔하게 다가왔다. 다른 생각을 할 수 없도록 만들었다.
“모두 나를 따르라.”
종사림이 징검다리처럼 놓여 있는 바위를 밟고 유황연을 건너기 시작했다. 그 뒤를 따라 수신호위들과 만독궁 마인 백여 명이 줄을 지어 유황연에 돌입했다.
바로 그때였다.
“아하하하. 오독문의 복수다. 죽어라 악적!”
앙칼진 여인의 웃음소리가 터져 나오는가 싶더니 징검다리가 터져나가기 시작했다.
쿠와앙. 콰아앙. 퍼퍼펑.
오독문의 성지이자 장족과 묘족의 성지인 이곳 마령지를 지키기 위해 예로부터 전해지는 안배였다.
징검다리가 되는 바위 윗부분을 조심스럽게 파낸 후 그 안에 화약을 담아 유사시 터뜨릴 수 있게 준비를 해 놓았던 것이다.
쿠와앙. 퍼퍼펑.
화약의 양은 무인들을 살상할 수 있을 정도는 아니었지만 징검다리를 없애 버리기에는 넉넉했다. 그리고 적들을 몰살시키기에도 충분했다.
첨벙. 첨벙.
만독궁 마인들 태반이 유황천에 빠졌다.
부글부글.
사람을 집어 삼킨 유황천이 확 끓어올랐다. 지옥과도 같은 광경이 펼쳐졌다.
“우와악!”
“사, 살려줘-어!”
목이 터져라 비명을 지르는 만독궁 마인들의 몸이 그대로 녹고 있었다.
어찌나 독한지 유황천의 피처럼 붉은 물에 닿기가 무섭게 피부가 먼저 녹았다. 뒤이어 근육과 지방이 녹았는데 그 속도가 더뎌 고통이 극심했다.
“우와악!”
“주, 죽여줘-어.”
차라리 누가 은혜를 베풀어 빨리 죽여주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전신의 피부가 녹아드는 고통은 상상을 초월했다.
하지만 오독문의 소궁주와 생존자들은 그 모습을 보면서 통쾌하게 웃었다.
“크크큭. 맛이 어떠냐?”
“감히 오독문을 집어 삼키려 한 벌이다, 이놈들!”
“이 안에 들어온 놈들은 다 죽는다. 모두 다. 크하하하.”
그 말이 사실이었다.
오독문의 생존자 뒤를 바짝 쫓아 왔던 종사림과 수신호위 열 명을 제외하면 만독궁 마인 백여 명 중 무려 여든다섯 명이나 유황연에 빠졌다.
아득.
종사림이 이를 갈며 외쳤다.
“모두 제압해라!”
마음만 같아서야 깡그리 죽여 없애라고 하고 싶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이들이 오독문의 마지막 핵심인물들, 이들까지 없앤다면 혈고까지 사라지는 셈이다.
제압에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이미 많은 부상을 입고 있기도 했거니와 자신들이 유도한 함정에 함께 빠져 있는 이상 죽음은 모두에게 공평한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시간의 문제일 뿐, 네놈들 역시 모두 이곳에서 죽는다.”
“지옥에서 기다리겠다. 푸흐흐.”
“죽여라. 이제 마음이 편하다. 크크큭.”
너무나도 초연한 오독문 무인들의 모습에 당황한 종사림이 다시 주변을 살폈다.
‘이런 빌어먹을! 망했네.’
얼굴이 팍 일그러졌다.
자신들이 발을 딛고 있는 작은 땅이 유황연못의 중간에 생긴 작은 섬이었기 때문이다.
사방이 모두 유황연이었다.
어느 한곳도 빠져 나갈 수 있는 곳이 없었다.
“이년!”
와락.
종사림은 오독문의 소궁주인 진화연을 잡아 일으켰다. 목에 검을 들이대고 으르렁댔다.
“빠져나갈 방법이 있겠지? 빨리 말해라.”
“흥! 이곳은 오독문의 마지막 비처, 빠져나갈 방법 따윈 없다. 함께 죽자, 악적!”
진화연이 앙칼지게 외쳤다.
‘정말인가?’
종사문은 믿을 수가 없었다.
함께 죽기 위해 모두를 끌어 들이다니!
아무리 자신들이 싫기로서니 오독문의 후대를 이을 소궁주의 목숨까지 함께 내버린다고?
그 사이 죽음을 직감한 수하들이 먼저 흥분했다.
“빨리 말해!”
“나갈 방법이 뭐야?”
서걱. 서거걱.
오독문도들에게 달려들어 복부에 검을 꽂았다. 고문을 하듯 마구 비틀며 물었다.
“크크큭. 죽여라, 개자식아. 곧 너도 함께 죽을 테니 나는 걱정도 없다.”
“푸흐흐. 유황연에 숨이 막혀 죽든지, 굶어 죽든지 둘 중 하나겠지.”
“아! 탈출한답시고 유황연을 헤엄쳐 보는 것도 좋을 게야. 안 그런가?”
“맞네, 맞아. 와하하하!”
정말 스스로 사지에 들었던 모양인지 태도에 변함이 없었다. 몸에 칼이 꽂히고 마구 휘젓는 고통을 주는데도 눈 하나 깜박하지 않는다.
‘제 놈들의 소궁주 목줄이 내게 잡혀 있음에도 그래.’
그제야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정말 이렇게 죽는 거야? 나 종사림이?’
만독궁주가 이차 신마대전 와중에 죽었다.
혈마궁과 같은 처지인 셈이다.
‘오독문 흡수병합과 혈고 문제를 해결한 공으로 당당히 궁주의 자리에 오르려 했는데…….’
이렇게 죽으면 죽 쒀서 개 준 꼴이다.
혈마궁과는 달리 만독궁에는 또 한 명의 부궁주가 건재해 있기 때문이다.
그때였다.
모두의 머리 위에서 한 사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누가 진화연이냐?”
용무린이었다.
“어엇!”
“누, 누구냣?”
화들짝 놀란 시선이 모두 위로 향했다.
“……!”
“……!”
뒤이어 모두가 침묵에 잠겼다.
능공허도? 아니면 허공답보?
그것도 아니라면 전설의 능공천상제?
허공에 둥실 떠 가만히 자신들을 내려다보는 용무린의 신법을 대체 뭐라고 해야 할까?
‘밖에서 이곳까지의 거리가 백여 장 가까이나 되는데.’
‘그 거리를 저렇게 날아 왔다는 거야?’
‘저 먼 거리를 날아와서 지금도 그냥 떠 있어. 둥실. 두둥실……. 사람이야 아니면 귀신이야?’
말로만 들었지 다들 처음 본다.
물론 한 사람은 달랐다.
만독궁 부궁주 종사림, 그만큼은 용무린의 얼굴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마교 3로에 속해 안휘성을 공략하고 있을 때 들이닥친 용무린의 손에 궁주를 포함해 얼마나 많은 마교의 고수들을 잃었던가?
잊으려야 잊을 수가 없었던 거다.
‘대, 대체 어떻게……?’
죽었다고 들었는데, 틀림없이 음양신마님의 손에 의해 동정호의 물속에 빠져 죽었다고 들었는데 어떻게 이곳에 와 있는 것일까?
모두가 입만 쩍 벌리고 있을 때였다.
천천히 한 사람씩 훑어보던 용무린의 시선이 오독문 소궁주 진화연에게 닿았다.
“야!”
“예, 옛?”
화들짝 놀란 진화연이 놀란 토끼 눈을 뜨자 용무린이 가볍게 이죽거렸다.
“그래, 못생긴 애. 너 말이야.”
“…….”
진화연의 얼굴이 팍 구겨졌다.
어디 가서 예쁘다는 말을 들으면 들었지 못생겼다는 말은 처음 들어봤던 거다.
“네가 진화연 아니야?”
“맞는데요?”
“그래?”
잘 됐다는 듯 용무린이 가볍게 손을 뻗었다.
스르륵.
“어맛!”
진화연이 고함을 터뜨렸다.
용무린이 손을 뻗자 저절로 몸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스르르.
진화연은 몸은 오 장 어림이나 날아올라 용무린의 팔 안에 폭 안겼다.
“허엿차. 꽤 무거운데?”
적나라한 용무린의 말에 진화연의 볼이 빨개졌다.
“저 가벼운 편인데요?”
“가볍기는 개뿔! 교영, 호려 두 녀석과 비슷할 정도로 무겁구만 무슨…….”
“아! 교영, 호려 두 아이를 아시나요?”
“그럼 내가 일면식도 없는 널 뭐가 예쁘다고 구하러 여기까지 왔겠냐?”
톡 쏘아 붙인 용무린의 시선이 아래로 향했다.
만독궁 부궁주 종사림을 슥 훑었다. 고개를 살짝 갸웃하고 기울였다.
“저 녀석은 어디서 한 번 본 것 같은데?”
“사, 살려주십시오.”
털썩.
종사림이 다짜고짜 무릎부터 꿇었다.
자신과 수신호위 열 명 정도로는 도저히 어떻게 해 볼 존재가 아님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피식.
한 차례 가볍게 웃어 보인 용무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뭐, 네 안에도 ‘참나’가 있음은 당연하니…….”
알 수 없는 말과 함께 용무린의 손이 가볍게 휘저어졌다.
후우웅. 피시시싯.
작은 떨림과 함께 은밀한 어떤 소리가 들렸다.
“크학!”
“허어억!”
종사림부터 시작해 수신호위 열 명이 동시에 비명을 터뜨렸다. 작살에 맞은 듯 몸을 떨었다.
“죽이진 않아. 하지만 무공 따윈 더는 필요 없으니 내가 가져가도록 하지.”
“……이, 이럴 수가!”
휘청.
종사림의 몸이 크게 흔들렸다.
가벼운 손놀림 한 번에 내공이 송두리째 사라져버렸기 때문이었다.
“이, 이런!”
“차라리 죽여라, 악적!”
그때까지 말이 없던 수신호위 십 인이 악을 썼다.
물론 용무린은 대꾸도 하지 않았다.
휘슷.
진화연을 안은 채 유황연 끝으로 사라져 버렸다.
반짝.
그러자 오독문의 생존자들이 살기어린 눈을 한 채 하나 둘씩 몸을 일으켰다. 당장에라도 잡아먹을 듯 나직하게 으르렁댔다.
“은공께서 네놈들의 무공을 앗아간다고 했으렷다?”
“퉷! 이제야말로 빚을 갚아줄 때가 왔나?”
“크흐흐. 갈기갈기 찢어 죽여주지.”
스릉. 스르릉.
다시금 검을 뽑아드는 오독문 생존자들.
“허엇. 이, 이놈들이!”
“감히…….”
종사림을 비롯한 수신호위들의 얼굴이 하얗게 되었다.
평소라면 콧방귀도 뀌지 않을 하찮은 놈들에 불과했지만 내공은 물론이고 움직임까지 제약을 받는 지금은 사신과 다름이 없었던 것이다.
주춤.
한 발 뒤로 물러나는가 싶더니 종사림이 먼저 앞으로 짓쳐들며 검을 쳐 냈다. 동시에 품속에서 독침 한 움큼을 꺼내 앞으로 던졌다.
피시시싯.
신호라도 된 것일까?
“하아앗!”
“차아앗!”
수신호위 열 명이 동시에 앞으로 돌격했다.
종사림이 그랬던 것처럼 독침과 자모정과 비수를 던졌다.
씨싯. 패애액.
하지만,
“크크큭. 이 정도쯤이야.”
“우하핫. 어린아이 장난 같구나.”
“하아아!”
따라랑. 튀튀튕. 차창.
오독문 생존자들은 종사림이 던져낸 독침과 수신호위들이 던져낸 암기를 너무나도 쉽게 피해냈다. 더러는 검면으로 때려냈다.
내공이 사라지고 움직임에 제약을 받자 그만큼 위력이 약해졌기 때문이었다. 아무리 부상이 심해도 이 정도쯤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러니 그 다음은 빤한 일이다.
차차창. 따당. 스각.
채챙. 카라랑. 서거걱.
“크아악!”
“커헉!”
썩어도 준치라는 말이 사실임을 입증하겠다는 듯 분전했지만 종사림과 수신호위들은 곧바로 수세에 몰렸다. 여기저기 베이고 찔려 금방이라도 숨이 넘어갈 듯싶었다.
‘이, 이렇게 어이없게 내가 죽다니…….’
종사림은 기가 막혔다.
아닌 밤중에 홍두깨도 유분수지, 동정호에 떨어져 죽었다던 황룡패주 용무린이 왜 갑자기 여기에 나타나서 일을 이렇게 만드는 것이냔 말이다.
“크아악.”
“커헉!”
수신호위 열 명이 금세 세 명으로 줄었다.
자신도 복부와 허리 그리고 가슴 어림에 깊은 상처를 입었다. 아찔할 만큼 피가 줄줄 샜다.
그런데…….
파파팡.
“욱!”
“허억!”
거친 파공음과 함께 놀랍게도 오독문의 생존자들이 뒤로 나가 떨어졌다.
“그 자식들 참, 고 사이를 못 참고 난리네…….”
탄식인 듯 질책인 듯 투덜대는 용무린의 목소리가 다시 머리 위에서 들려왔다.
“으, 은공이시여.”
“어찌하여 저희들을 막으시는…….”
“시끄러.”
용무린은 단칼에 녀석들의 말문을 막았다.
“다 너희들을 위해서 막은 거니까. 그리 알아.”
살생 따위 ‘참나’에 드리우는 먹구름 같은 거다.
자신이야 이미 밝게 했으니 무슨 짓을 하든지 간에 오롯이 변치 않지만 저들은 당연히 다르다. 쉽게 말해 악업 쌓아봐야 좋은 게 없다는 뜻이다.
“유황연에 몰아 놓고 무슨 헛짓이야? 그냥 계획대로, 녀석들이 스스로 사지를 찾아들어온 뜻을 존중해서 유황연이 알아서 처리하도록 내버려 둬.”
둥실 둥실 두둥실.
용무린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커다란 돌덩어리들이 떠 왔다. 화약으로 인해 박살이 난 징검다리가 다시 놓이기 시작했다.
“뭐해? 나오기 싫어?”
“예? 아, 아닙니다.”
“그럴 리가…….”
휘스슷. 타다닷.
오독문의 생존자들이 징검다리를 박차고 신법을 펼쳤다.
하지만 만독궁 부궁주 종사음과 수신호위 열 명에게는 그림의 떡이었다. 징검다리 사이가 너무 넓어 내공이 사라진 지금은 도저히 뛰어 넘을 수 없었던 것이다.
풍덩. 풍덩.
그나마 만들어졌던 징검다리도 생존자들이 다 넘어가자 다시 물에 빠져 버렸다. 용무린이 아예 없애버린 거다.
“이런 말 조금 뭣한데 말이다.”
“……?”
“……?”
혹시나 살 수 있는 기회를 줄까 싶은지 모두의 눈이 동그래졌다.
그런데 용무린의 입에서는 생뚱맞은 소리만 흘러나왔다.
“마지막 기회다. 스스로를 돌아봐라. 그렇게만 해도 다음 생에는 이번 생보다 훨씬 더 좋은 기회를 맞이하게 될 거다.”
휘슷.
그 말을 끝으로 사라져 버리는 용무린.
유황연 한 가운데 오롯이 솟은 외딴 섬에는 적막이 찾아들었다.
부글부글. 뽀글뽀글.
한 식경이나 되었을까?
수하들을 몽땅 집어 삼킨 유황연이 배가 고프다는 듯 다시금 거품을 뿜어내었다. 그 거품에 섞인 독연이 모두의 숨통을 콱 조였다.
그제야 종사음의 정신이 돌아왔다.
참을 수 없는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울화통이 터져 참을 수가 없었다.
“이런 빌어먹을 새끼! 크흐읍!”
“돌아보긴 개뿔! 허업!”
“다음 생에 태어나면 반드시 네놈을 찢어 죽이는 삶을 택하고 말 것이다. 컥. 커으읍.”
용무린을 향해 온갖 악담을 퍼부어 대며 종사음과 수신호위들은 독연에 괴로워했다. 서서히 죽어갔다. 용무린이 준 마지막 기회를 저주로 채웠다.
***
긁적긁적.
파괴된 오독문으로 들어서던 용무린이 귀를 후볐다.
“유황연이 내 피부와 잘 맞지 않은가?”
농담도 잘한다.
‘유황연에 풍덩 빠져도 터럭 하나 상하지 않을 것 같은 인간이 무슨 그런 소릴 해?’
‘그 붉은 물에 밥을 말아 먹어도 멀쩡하겠고만…….’
차마 그런 말은 뱉을 수 없었다.
꿈인지 생시인지 꿈을 꾸는 얼굴로 파괴되어 버리고 적들의 손아귀에 넘어간 오독문으로 들어섰다.
“어라?”
“이게 웬 떡이냐?”
“부궁주님께서 그렇게 찾아다니던 소궁주와 제독당 고수들 아니야?”
종사음이 남겨 놓은 만독궁 소속 마인들이 희희낙락한 얼굴로 달려 나왔다.
물론 녀석들은 용무린이 반겨주었다.
“반갑다.”
피시시시싯.
지극히 나직하며 은밀한 그 무엇인가가 용무린에게서 뿜어졌다. 녀석들의 몸속으로 파고들었다. 살상력을 배제한 불사신기였다.
하지만 종사음과 수신호위가 그러했듯 효과는 죽여줬다.
“커헉!”
“크흡!”
달려 나오기가 무섭게 다리가 풀려 고꾸라졌다.
내공이 제압되고 몇몇 대혈마저 금제되어 근력마저 평소의 절반으로 줄었다.
“너희들에게도 똑같이 기회를 줄게.”
“이, 이게 무슨…….”
“사, 사술이다.”
백여 명 남짓 남겨져 있던 만독궁 소속 마인들은 불과 일각을 넘기지 못하고 모두 제압당해 버렸다. 하나도 남김없이 내공을 잃고 근력마저 반으로 줄어든 채 중앙 연무장에 꿇어앉아야만 했다.
“……!”
“……!”
이 난감한 상황에 오독문의 소궁주인 진화연은 물론이고 오독문 소속 생존자들이나 만독궁의 마인들이나 할 것 없이 모두 용무린만 바라보았다.
“판결 하나, 현 시간부로 만독궁 소속 마인들은 저지른 죄가 있는 만큼 오독문의 하인이 되어 잡일을 돕는다. 그러면서 반성하고 죄를 갚아.”
“아, 아니 그런…….”
“어떻게 그럴 수가…….”
“차라리 죽여라 악적아!”
얼굴이 하얗게 질린 만독문 마인들이 악을 썼다.
반대로 이미 한 번 비슷한 일을 겪어 본 소궁주 진화연과 제독당 소속 생존자들은 얼떨떨하면서도 기쁜 얼굴로 서서히 바뀌었다.
용무린의 목소리가 계속해서 이어졌다.
“기회는 이미 주었으니 죽고 싶으면 여기 생존자들에게 반항을 해. 뭐, 인원이 얼마 되지 않으니 탈출을 해도 상관없겠지.”
어떻게 하든 죽고 싶으면 알아서 죽으라는 뜻이었다.
왜냐하면 오독문을 나서게 되면 곧바로 울창한 밀림이 이어지는데, 그 안에는 온갖 독물과 흉포한 맹수들이 넘쳐나기 때문이었다.
내공이 멀쩡하고 근력이 충만하다면 모르되, 내공이 사라지고 근력이 반으로 줄어든 이상 오독문의 영역을 벗어나지 못하고 죽든지 다시 잡힐 수밖에 없는 거다.
“소궁주.”
“예, 은공.”
“쟤들 일꾼으로 부려서 오독문 무너지고 부서진 거 복구 작업해.”
“저, 정녕 그래도 되겠습니까?”
“당연하지. 저놈들 일꾼으로 부리면 여기 복구하는데도 도움이 되고 오독문 생존자들 기 살리는 일에도 좋을걸? 대신 두고두고 부려먹어야 하니 괴롭히기는 해도 죽이지는 말라고 해. 이건 내가 너희들에게 주는 기회이기도 해.”
무슨 뜻인지 다는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적어도 느낌만은 비슷하게 와 닿았다.
‘직접 죽일 필요도 없으니 공연히 헛일에 힘쓰지 말라는 뜻 아니겠는가?’
자신들이 보는 앞에서 직접 손을 썼다.
확인해 보지는 않았지만 완벽하게 내공을 억제했을 것이며 다리가 흔들거리는 것을 보면 근력마저 예전보다 훌쩍 줄어들어 있을 것이었다.
‘그 정도면 충분해. 마음껏 부리며 죽어간 오독문 원혼들에 대한 응어리도 갚고 복구에도 이용할 수 있겠어.’
오독문주인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장로들이 몽땅 저놈들 손에 죽었다. 평소와 다름없던 놈들의 말만 믿고 따라 나섰다가 기습을 당해 어쩔 수 없었다.
전체적인 전력이야 당연히 크게 떨어지지만 독에 관해서만큼은 오히려 한 수 위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한 번 무너지니 걷잡을 수 없었다.
‘은공이 주신 기회를 잡아 오독문을 재건한다.’
그런 마음을 알아차리기라도 한다는 듯 용무린의 입에서 뜻밖의 제안이 흘러나왔다.
“듣자하니, 소궁주가 궁주로 올라서야 할 처지인 듯한데. 맞아?”
“그렇사옵니다, 은공.”
진화연이 애써 울음을 참으며 답했다.
“그래? 그러면 나와 둘이 조용히 이야기 좀 하지.”
진화연의 눈빛이 묘하게 뜨거워졌다.
냉큼 고개를 끄덕였다. 끈적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기꺼이…….”
스파앙. 멈칫. 스파앙. 멈칫.
용무린의 신법이 자꾸만 덜컥거렸다.
‘아오, 갑자기 령매가 왜 이렇게 보고 싶으냐?’
이유는 오직 한 가지, 오독문 소궁주 진화연의 대담함 때문이었다.
‘끈적한 목소리 낼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는데…….’
온통 부서지고 파괴된 건물 탓에 밀담을 나누기 위한 장소는 자연스레 그녀의 방이 되었다.
‘들어가자마자 갑자기 옷을 벗어 재낄 줄이야!’
둘이 조용히 이야기 좀 하자는 말이 어떻게 운우지락을 나누자는 말로 들리느냔 말인가?!
더 웃기는 것은 그녀의 손목에 아직 수궁사가 찍혀 있다는 거다.
‘그런데도 그렇게 대담한 공세를 취해 올 줄은 정말 몰랐네.’
진화연 말로는 아끼고 아껴둔 수궁사를 지울 절호의 기회로만 알았다고 한다. 오독문의 구원자에 생명의 은인, 거기에 더해 난생 처음 보는 미남이었으니…….
‘하여간, 시킨 대로 일은 잘 하겠지?’
진화연이 잔뜩 실망한 얼굴로 대답한 통에 살짝 믿음이 흐려졌다.
뭐, 그래도 믿어봐야겠지.
후환을 지워버릴 절호의 기회니까!
스파아앙. 멈칫. 쉬이이익. 멈칫.
덕분에 애꿎은 육체만 후끈 달아올랐다.
진화연의 나신은 그만큼 아름다웠고 용무린의 욕망에 단숨에 불을 질렀으니까.
하지만 용무린의 욕망은 오직 한 사람에게로 향했다.
당연히 제갈영령이었다.
‘령매. 건강한 거지? 뱃속의 우리 보물도 무럭무럭 잘 자라고 있고?’
제갈영령을 무한에서 만났을 때 당시가 육 개월 여 무렵이라 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감숙의 일을 해결하기 위해 보낸 시간이 달포.
그로부터 혈교 대사제와 함께 역천자 녀석에게 들러 불회곡까지 스며들어 온 시간이 다시 달포가 지났으며, 이곳에서 보낸 시간이 또 열흘이다.
석 달 열흘.
그때로부터 무려 백 일이나 지났으니 지금쯤 어쩌면 해산을 했을 수도 있겠다.
산모와 아이 모두 무탈할까?
많이 힘들었겠지?
‘곁에 있어주지 못해서 미안해 령매.’
미안함과 함께 참 묘한 감동이 밀려왔다.
지금 경험하는 모든 것들이 사실은 ‘참나’라는 바탕 위에 스쳐 지나갈 뿐인 것임을 잘 알고 있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버지가 된다는 일만큼은 조금 많이 달랐다.
‘사랑의 결실이니까.’
이 경험은 보다 큰 사랑과 자비의 마음을 세상으로 되돌려 보내도록 이끈다는 것이 불현듯 느껴졌다.
‘좋구나.’
용무린의 시선이 하늘로 향했다.
동쪽 하늘에 여명이 비쳐오고 있었는데, 어둑한 하늘 가운데 작은 별 하나를 향해 여명의 빛이 쭉 뻗어 나가는 것이 보였다.
천기였다.
천기에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다.
‘서, 설마……?’
덜컥!
용무린의 움직임이 멈춰졌다.
무엇인가에 홀린 듯 어둠과 여명이 번져오는 하늘만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
무한 중심의 비룡문 내원.
“아아악!”
“아기씨! 조금만 더 힘을 주세요. 힘을 내셔야 합니다. 어서요!”
고통에 겨운 여인의 비명소리와 함께 산파의 응원과 독려도 이어졌다.
“아흐-윽!”
“잘 하고 있어요, 아기씨. 조금만 더! 조금만 더-어!”
비명소리와 함께 독려 소리도 점점 더 높아가는 가운데 용무린의 방 외부에서는 용대명과 여러 어른들이 손에 땀을 쥐고 기다리는 중이었다.
“허허허. 선재, 선재라……. 아무 걱정하실 것 없소이다, 용 문주. 이집 며느리야말로 맹주를 제외하면 가장 오랫동안 불사신공을 익혀 온 장본인 아니오?”
“하하하. 맞습니다, 용 문주. 무탈하게 해산을 할 터이니 아무 염려하지 않으셔도 될 것입니다.”
소림장문 법정과 무당장문 자운이 덕담을 했다.
초조한 얼굴을 하고 있던 용대명이 빙그레 웃으며 얼른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물론입니다. 저 역시 그렇게 믿고 있습니다.”
말은 그렇게 해도 걱정은 떠나질 않았다.
초산에 벌써 다섯 시진이나 진통이 계속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나마 며늘아기가 불사신공을 익히고 있으니 넉넉히 버티는 것이지 어디 원…….’
상당히 멀리 떨어진 곳이었지만 다들 무공이 높으니 제갈영령이 지르는 산고 소리가 가감 없이 들렸다. 덩달아 마음을 졸이게 만들었다.
그러니 용무린의 방 바로 밖에서 서성대고 있는 조연옥과 용설화의 마음은 어떻겠는가?
“엄마. 어떻게 해? 새언니가 너무 힘든가봐!”
“조용해 해 욘석아. 네가 도와줄 것은 그저 천지신명께 기도하는 것뿐이야.”
조연옥이 용설화의 잔망을 나직한 목소리로 타박하는 순간이었다.
그 뒤로도 제갈영령의 산통은 계속되었다.
더운 물이 계속해서 방으로 들어가기를 반복했다.
그러던 어느 한 순간!
“아흐-윽!”
“응애-애!”
짧고 강렬한 비명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미약하지만 힘차고 맑은 울음이 터져 나왔다.
그리고 잠시 후,
“아기씨! 아들이에요. 아주 잘생긴 아드님이 탄생하셨어요.”
기뻐하는 산파의 호들갑이 문지방을 넘었다.
“만세!”
“엄마! 아들이래! 아들!”
조연옥이 두 손을 하늘로 번쩍 치켜세웠고 그런 조연옥을 부둥켜안은 용설화가 곁에서 발을 동동 굴렀다. 기뻐서 날뛰었다.
산파의 호들갑을 들은 용대명의 귀가 쫑긋 섰다.
콱!
주먹을 움켜쥐었다.
“손자! 내 손자! 비룡문의 대를 이을 적자가 드디어 탄생했다!”
감격에 겨워 고함을 질렀다.
“허허허. 감축 드리오 용 문주.”
“하하하. 감축 드립니다, 용 문주.”
소림장문 법정과 무당장문 자운의 축하도 이어졌다.
“감사합니다. 함께 기뻐해 주셔서 정말 너무나 감사합니다. 제가 따로 인사를 드리겠습니다. 저는 어서 이 사실을 천지신명과 조상님께…….”
휘리릭.
말을 채 끝내지도 못하고 용대명은 뭇 선조들의 위패를 모셔놓은 사당을 향해 신법을 펼쳤다.
“허허허. 무림의 동량이로세.”
“하하하. 그러게 말입니다.”
법정과 자운의 시선이 하늘로 향해 있었다.
동쪽 하늘에서 번져오는 여명이 유난히 상서로워 보였다.
잘은 몰라도 그 상서로운 여명이 어째서 지금 이 순간 이토록 강렬하게 빛을 발하는 것인지 정도는 두 사람 모두 알 수 있었다.
***
용무린의 눈이 점점 더 커다래졌다.
버언쩌어-억!
여명에서 쭉 뻗어 나온 빛을 가득히 받은 작은 별이 드디어 찬란한 광채를 뿜어내기 시작했던 것이다.
“태, 태어났다.”
확실했다. 하늘이, 천기가 말을 해주고 있었다.
울컥!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큰 감동이 심장 저 깊은 곳에서부터 용솟음쳐 올랐다.
“내 아들…….”
역천자를 정리한 후 곧바로 선계에 오른다고 해도 걱정 없이 세상을 맡길 수 있는 차기 수호자가 세상에 태어난 것이다.
“잘 먹고 잘 자려무나 내 아들. 지금 네가 할 일은 그것 하나뿐이다. 무럭무럭 건강히 자라는 것.”
너는 너의 일을 그렇게 하고.
“아비는 아비의 일을 한다.”
용무린의 시선이 불회곡이 있는 십만대산으로 향했다.
“후환을 완전히 없애 주마.”
그 말을 끝으로 용무린의 신형이 동쪽을 향해 쭉 늘어나는 환영이 일었다.
스파아아-아-앙!
창공이 찢어지는 파열음이 허겁지겁 뒤따랐다.
용무린은 그렇게 불회곡에 복귀했다.
***
용무린이 저질러 놓고 간 일로 인해서 불회곡은 한바탕 난리가 난 상태였다.
오독문에서 잡아 온 사냥감들이 되레 만독궁 소속 마인들을 모두 참한 후 온갖 소란을 피우며 도주를 했으니 얼마나 큰 소란이 일어났겠는가?
비록 한 놈도 빠짐없이 다시 잡기는 했지만, 잡아들이는 과정에서 싸우다 모두 사망을 한 탓에 배후를 밝히지 못해 더 난리였다.
거기에 더해 서류 조사에서 밝혀진 사실인데 계집 두 명이 감쪽같이 사라진 사실 때문에 더더욱 분위기가 좋지 못했다.
대체 그 계집 두 명은 어디에 있단 말인가?
설마하니 아직도 불회곡 내부에?
아니면 벌써 흔적도 남기지 않은 채 탈출에 성공을 해서 사라졌나?
탈출을 했다면 그 두 계집의 오독문에서의 위치가 무엇인데 그 정도의 실력을 지녔는지가 의문이 되었고, 아직도 불회곡 내부에 있다면 어떻게 그게 가능한지가 큰 문제가 되었다.
“어떤 무공을 펼친 것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내통자가 있는 것만큼은 사실입니다.”
이제는 혈마궁처럼 하나밖에 남지 않은 만독궁의 부궁주 만사력이 장마종 앞에서 열변을 토했다. 신마대전에 이어 연거푸 무너져버린 자존심과 자신의 지위를 바로 세우기 위한 안간힘인 셈이다.
“맞습니다. 만독문의 독문 내공으로 마혈이 제압되어 있는 상태였습니다. 이제 겨우 절정 초급이나 중급 어림의 녀석들이 스스로의 힘으로 마혈을 풀어낸다는 것은 언어도단에 가깝습니다.”
만독궁과의 연계를 염두에 뒀는지 혈마궁의 하나밖에 안 남은 부궁주가 바로 동조를 하고 나섰다.
“거 참…….”
듣고 있던 유령궁주의 시선이 의미심장하게 변했다.
장마종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다른 것은 몰라도 내통자에 대해서만큼은 심각하게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아직까지 찾지 못한 두 계집, 그거 정말 말이 안 되거든요.”
유령궁주의 의뭉스런 시선이 장마종에서 곁에 있던 혈마궁의 대표 대사제를 슬쩍 스쳤다.
그야말로 노골적인 지적!
반짝.
“……!”
덩달아 장마종의 눈도 혈교 대사제에게로 향했다.
아주 작은 단서조차 놓치지 않겠다는 의지가 그 눈빛에 가득했다.
빙그레.
장마종과 눈이 마주친 대사제가 사람 좋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의심스러우면 무엇이든 하고 싶은 대로 해보라는 듯 거리낄 게 하나도 없는 모습이었다.
‘저 인간들이 들어온 직후 이런 일이 벌어졌으니 정황상 대사제와 혈사제들이 의심스럽기는 한데…….’
장마종은 내심 고개를 흔들었다.
대사제나 수하들인 혈사제들이 사건 발생 당시 모두 음양신마의 작업장이나 자신들의 방에 있었다는 증거가 너무 많았기 때문이었다.
한 사람 앞에 3인씩 2개 조.
주야로 나누어 여섯 명의 마인이 눈에 불을 켜고 지켜보고 있는 앞에 다른 행동을 할 여지는 없다.
그러니 더 환장할 노릇이었다.
‘오독문 따위에 뒷거래를 따로 하고 있을 정신 나간 놈들은 신교 어디에도 없단 말이야.’
같은 형제인 만독궁 소속 전사 십 인을 단 일 검에 베고 마혈을 풀어 주었으면서 딸랑 계집 두 명을 훔쳐 달아난다는 게 말이 되나?
‘생각해보면 사냥감으로 잡아 온 계집 겨우 두 명이 사라진 것에 불과한 일인데 말이야.’
하지만 되짚어 보면 절대로 간단한 일이 아니었다.
외원에서 밝혀내지 못할 정도로 감쪽같이 무공을 숨겼다가 만독궁 전사 열 명을 일 검에 처치할 수 있을 정도의 능력을 지닌 계집이 사실이라면, 그 계집이 현재 신교에 숨어서 저지르고 있을 일이 켕기는 것이 첫째다.
그 반대라면 계집 둘의 미모에 미쳐 같은 식구들 열 명을 참하고 몰래 숨길 정도로 미친놈이 존재할 정도로 신교의 기강이 흔들렸다는 말이 되니 이것이 둘째였다.
어느 쪽이나 문제는 문제인 거다.
‘검마종은 조사동에 들어 천마조사의 절기와 음양신마님의 안배를 취하고 있는 판국에 나는 불회곡 내부 단속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다니!’
그게 뼈아팠다.
‘어서 빨리 그 두 계집을 찾아 깔끔하게 처리해야만 해.’
그 두 계집으로 인해 무슨 일이라도 생겼다가는 음양신마님의 귀에 들어가게 될 것이고 그것은 곧 자신의 무능을 증명하는 것으로 이어진다.
‘그렇게 되면 끝장이야.’
언제가 될지 모르겠지만 검마종이 조사동에서 출관을 하고 나면 자신은 써 먹을 곳 없는 퇴물 신세가 되어 한직이나 전전해야 할지도 모른다.
‘내가 직접 뒤져본다.’
이 상황에 의심이 가는 곳은 한 곳밖에 없다.
장마종은 날카로운 눈빛을 빛내며 혈교 대사제를 향해 선언했다.
“대사제. 내가 직접 작업장과 혈사제들의 숙소를 좀 살펴봐야할 것 같소.”
“물론입니다. 사냥감에 불과한 계집이긴 하지만 마음대로 불회곡을 활개치고 돌아다니도록 만들 수는 없는 일이지요. 그렇게 하십시오.”
대사제가 흔쾌히 고개를 끄덕이고 나섰다.
하지만 장마종은 분명히 보았다.
혈사제들의 숙소를 언급했을 때 살짝 흔들리는 대사제의 눈빛을…….
‘거기다. 혈사제들의 숙소에 뭔가 있다.’
그래서 대뜸 말을 바꾸었다.
“작업장이야 무슨 문제가 있겠소? 일의 진척을 살피기 위해 나도 몇 번이나 내려갔었고 필요 약재나 재료 수급을 위해 만독궁과 유령궁에서 다녀갈 때도 아무런 이상이 없었는데 말이오.”
“그러면……?”
“그냥 깔끔하게 혈사제들의 숙소만 살피는 것으로 모든 의구심을 털어내는 것으로 합시다.”
“아, 알겠습니다. 가시지요.”
대답하는 목소리가 껄끄러웠다.
역시 혈사제들의 숙소는 보여주기 싫은 거다.
‘그렇다면?’
유령궁주로부터 들은 이야기가 하나 있다.
혈사제들 중 한 명이 지난 열흘 동안 내내 혼자서 방에 틀어박힌 채 내공수련만 하고 있다는 말이었다.
‘그놈이다.’
“혈사제 중 막내가 지금도 방에 틀어박힌 채 내공수련에 열중하고 있다지요?”
“그, 그렇습니다만…….”
“그곳으로 가십시다.”
“하지만 지금 아주 중요한 순간일지도 모르는데 어찌?”
계속해서 이어지려는 핑계를 장마종이 딱 잘라 버렸다.
“열흘이오, 열흘.”
“……!”
“무슨 경천동지의 무공을 익히는 것인지는 몰라도 그 시간 내내 삼매에라도 들어 지금도 깨지 않고 있다고 말하고 싶은 것이오?”
“……!”
“앞장서시오. 어서!”
대사제는 계속해서 답을 할 수 없었고 장마종은 그런 대사제를 거칠게 채근했다.
결국 체념할 수밖에 없었는지 대사제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음양신마의 작업장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혈사제들의 숙소를 향해 움직였다.
그리고…….
벌컥!
도착하기가 무섭게 장마종은 문을 열어젖혔다.
막내 혈사제가 삼매에 들었든지 말든지 전혀 상관하지 않겠다는 투였다.
그런데,
“오셨습니까?”
막 운기행공을 마치고 일어서던 참인지 가부좌를 풀던 혈사제가 고개부터 숙여 보였다.
“응? 자, 자네. 일어나 있었나?”
장마종의 물음에 막내 혈사제는 거침없이 답했다.
“예. 아무리 애를 써도 깨달음이 손에 잡히질 않고 간질간질하기만 해서 이젠 그만 포기하려던 참이었습니다.”
“아하, 그랬었군!”
무슨 뜻인지 단숨에 알아차린 장마종이 안타까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 깨달음이란 본디 그런 것임을 자신 역시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어쩐 일로…….”
말꼬리를 늘이는 막내 혈사제를 향해 장마종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풀썩 웃어 보였다. 침상을 뒤져볼 필요도 없이 이미 감각을 확장해 내부를 훑어 본 뒤였던 거다.
“아, 아니네. 그저 너무 오랫동안 수련을 하기에 걱정이 되어 들렀네.”
“그랬군요.”
“너무 실망 말게. 언제고 깨달음이 다시 올 것이네.”
“물론입니다.”
넉넉한 목소리로 격려를 마친 장마종은 멋쩍은 얼굴로 숙소를 나설 수밖에 없었다.
피식.
홀로 남은 막내 혈사제가 풀썩 웃음을 터뜨렸다.
“오독문의 일로 녀석들이 긴장했으니 당분간만 조금 자제를 해볼까?”
그동안 음양자의 작업장에 신경을 쓰지 못했으니 이 기회에 그 일을 마무리 지어야 할 듯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