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너로구나
다음 날 아침.
안성맞춤이라고나 할까?
대사제 여절령은 뜻밖의 제안을 받고 있었다.
“예에? 광마인들을 말씀입니까?”
“그렇다네.”
장마종이 음양신마, 자칭 황제의 어명이 담긴 전서를 대사제에게 내밀었다.
“……!”
가만히 읽어 내려가던 대사제 여절령의 눈이 점점 더 커다래졌다. 한 번도 생각해 보지 못했던 큰 믿음과 신뢰가 그 안에 담겨 있었기 때문이었다.
털썩!
여절령이 무릎을 꿇었다.
음양신마가 있을 북쪽을 향해 오체투지를 하며 큰 소리로 외쳤다.
“폐하-아! 신 혈마궁주이자 대사제 여절령, 황제폐하의 어명을 받자와 신명을 다해 광마인들의 양산에 신명을 다하겠나이다!”
“……!”
신심 가득한 목소리로 외치는 대사제 여절령의 모습을 장마종은 그저 흐뭇한 얼굴로 지켜보았다. 고개를 크게 끄덕여 보였다.
“나를 따라오게.”
“예.”
장마종은 대사제 여절령을 과거 음양자가 주로 머물며 광마인을 비롯한 여러 실험을 하던 지하 사층의 공간으로 이끌고 갔다.
“바로 이곳이네.”
“오오.”
“이곳이 바로 황제폐하께서 평소 마령인들과 광마인들을 양산하시고 또한 여러 실험을 하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던 곳이라네.”
“그렇군요. 오! 저것이 바로 그것인 모양입니다?”
혈사제가 암동 구석에 강시처럼 서 있는 사내 하나를 가리키며 물었다.
장마종의 고개가 끄덕여졌다.
“그러하네. 한 구 한 구가 절정 수위의 무공을 지녔으면서 실제 전투에서는 그 이상의 파괴력을 쏟아내는 신교의 무기 광마인이라네.”
“오오오!”
계속해서 탄성을 흘리는 대사제에게 장마종은 서랍 하나를 열고 그 안에 들어 있던 두툼한 책 몇 권을 꺼내 내밀었다.
“받게.”
“이것은……?”
“신교의 모든 무공과 술법이 집대성되어 있는 천마경 중 일부를 뽑아낸 후 음양신마 황제폐하께서 정리를 해 놓은 것인데, 대사제에게 건네주라 하셨네.”
부르르.
“이, 이런 고마울 데가!”
감동을 바가지로 퍼먹은 듯 여절령의 몸이 가늘게 떨렸다.
물론 말과 행동은 달랐다.
대사제 여절령은 그 어떤 마약보다 더 중독이 된 얼굴로 책에 빠져들었다. 숨도 크게 쉬지 못한 채 반짝반짝 눈을 빛내며 읽어내려 갔다.
장마종은 풀썩 한 번 웃어 보인 후 가만히 문을 닫고 밖으로 나갔다.
‘이제 머지않아 부족한 광마인들이 다시 생산되기 시작하겠구나.’
음양신마 황제가 저 멀리 호남성 장사에 자리를 잡은 바람에 모든 일정이 중지된 상태였다. 음양자의 제자들이 용무린의 손에 모두 죽어버렸기 때문이었다.
‘정말 다행이다.’
장마종은 그제야 비로소 왜 음양신마가 혈교 대사제를 다시 받아들였는지 알 수 있었다.
그 능력만 보자면 혈교 대사제인 여절령이야말로 음양자의 대를 이어 마령인과 광마인들을 양산하는 임무에 최적인 것이다.
***
이레가 지났다.
덕분에 용무린은 그동안 음양자가 남긴 배교 술법이 적힌 책자의 내용과 실제 대상인 광마인이나 마령인들을 면밀히 연구하면서 보낼 수 있었다.
‘크흠.’
용무린의 이마에 패인 골이 깊어졌다.
‘어지간만하면 평범한 사람으로 되돌려 주려고 했는데 그건 어려울 듯싶네.’
광마인들을 되돌려 본래의 기억을 찾아주고 싶었다.
하지만 결론만 말하면 포기했다.
불가능이 아니라 포기다.
광마인의 재료로 사용되는 인간들의 정체가 마교의 고수들이거나 마도칠문 혹은 여타 흑도문파들에서 지원받아 만들어졌기 때문이었다.
‘초기에는 운룡장이나 상관세가가 그러했듯 일반적인 문파의 무인들도 뽑아서 쓰긴 했는데, 모든 연구가 완료된 이후에는 모두 마교의 고수들이나 마도칠문 아니면 흑도문파의 정예를 받아다 만들었단 말이야.’
광마인들이 펼쳐야 할 무공이 바로 마공인지라 어쩔 수 없는 선택인 것 같았다.
‘하긴, 정파인들을 잡아다 만들고 싶어도 마공을 가르쳐야 하는 문제 때문에 불가능했겠다.’
정신이 나간 놈들이 아니고서야 선선히 마공을 익힐 리가 없는 거다.
게다가 어떻게든 마공을 익힌다고 해도 이미 익혔던 정파 계열의 내공 때문에 광마인 제작에 해가 되면 되었지 이득이 될 리는 없었다.
그래서 결국에는 처음부터 마인들을 선택해 작업을 진행할 수밖에 없었으리라.
‘그러니 광마인들을 다시 정상으로 되돌려봐야 무슨 보람이 있겠어?’
다시 놈들의 힘만 불려주는 셈인 거다.
‘잘 됐다. 이참에 나도 혼백이나 영혼의 소멸에 대해서 점검이나 하도록 하자.’
음양자의 작업장 가장 깊숙한 곳에 그 대상이 존재했다.
폐기물들…….
마령인과 광마인을 제작할 때 살기가 골수에 미친다거나 광기가 너무나 강해져 통제가 되지 않을 만큼 살육만을 위해 날뛰는 폐기물들을 따로 모아 둔 것이다.
‘마령인들까지는 탄검 연주를 통해 제어가 되었는데 이놈들은 어떨까나?’
작은 기대감과 함께 용무린은 현재 있는 곳에서 십여 장이나 더 깊은 곳에 만들어진 지하격리실로 내려갔다.
‘철문 두께가 꽤 두껍네.’
초절정도 뛰어넘는 무인이 전력을 다해야 겨우 부술 수 있을 정도로 강력한 철문으로 봉쇄된 공간이었다.
들어가 보니 괜히 그런 짓을 한 것이 아니었다.
강제로 잠재워진 놈들임에도 불구하고 흘러나오는 마력이 장난이 아니었다. 절정 상급의 무인이라 하더라도 맞상대하기 힘들 정도였다.
“폐기물이라 다행이지, 이놈들이 신마대전에 참여했다고 생각하면 정말 끔찍하네.”
우선 가장 앞쪽에 서 있는 폐기물 광마인 하나를 잡아 앞으로 끄집어냈다. 그런 후 뒤로 쭉 늘어서 있는 광마인 폐기물들 사이를 불사신공을 뿜어내 차단해 버렸다.
“그러면 어디 한 번 시도해 볼까?”
미리 가지고 들어온 싸구려 청강검을 들었다.
불사신기를 돋워 손가락으로 두들겼다. 신마의 기억을 토대로 자신이 확립한 운율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따앙. 따라랑. 따당. 따아앙.
불사신기가 가득한 탄검 연주에 놈을 구속한 금제가 단박에 깨어졌다.
광마인 폐기물이 눈을 번쩍 떴다.
“크르르. 크아아아!”
눈을 뜨기가 무섭게 살기를 흘렸다.
“호오. 역시 살기가 여간 아닌데?”
보통의 광마인들과는 확연한 차이를 보였다.
본디부터 살기가 강해져서 그러는 것인지 아니면 욕심 때문에 더욱 강력하게 만들려 하다가 실패해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지금까지 보아왔던 광마인들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였다.
따앙. 따라랑. 따앙. 따리라랑.
“크아아! 크르르!”
후욱. 파아앗.
계속해서 탄검 연주가 이뤄지고 있음에도 불과 일각을 넘기지 못하고 덤벼들었다. 신교의 여러 마공들 중 하나인 사사혈검법 초식의 형에 따라 수도를 휘둘렀다. 용무린의 목을 베려 들었다.
“그 자식도 차-암.”
어림도 없는 짓이었다.
제 아무리 절정 상급을 넘어간다 하더라도 그 정도로는 용무린의 옷깃조차 스칠 수 없다.
휘스슷. 휘리릭.
한 줄기 바람처럼 녀석의 주변을 휘돌며 용무린은 점혈은 가능한지, 탄주에 투입되는 내공의 양을 늘리면 제어가 되는지 등등 다방면에 거쳐 실험을 했다.
결론은 불가능이었다.
혈적과 싸워 오백여 마령인들을 빼앗기도 한 탄검 연주임에도 불구하고 전혀 효과가 없었다. 온갖 사마를 제어하는 불사신기로도 정신 제어에 실패했다.
“크아아. 크르르륵.”
털썩.
계속해서 불사신기의 농도를 높이자 그냥 죽어 버렸다.
내부를 채우고 있던 마력이 불사신기에 박살나자 더는 견딜 수 없었던 것이다.
“실망스러운 결과인걸?”
이번에는 그랬지만 솔직히 이제 시작이다.
용무린은 즉각 다시 광마인 폐기물 하나를 더 끄집어 내 실험을 계속했다.
털썩. 터얼썩.
바닥에 주검이 늘어만 갔다.
계속해서 실패를 거듭한 용무린은 별 수 없이 다른 수를 내야만 했다.
따라랑. 따앙.
“크아아!”
탄검 소리에 눈을 번쩍 뜬 광마인 폐기물이 용무린을 찢어 버리겠다는 듯 달려들었다.
“실험을 계속하려면 역시 이렇게 하는 게 최선이로구나.”
피쉬잇. 서걱. 서걱.
용무린은 탄검을 멈추고 슬쩍 휘둘렀다.
달려들던 광마인 폐기물들의 팔과 다리가 동시에 떨어져 나갔다. 하지만 관성을 이기지 못하고 몸통은 용무린 앞까지 주르륵 밀려왔다.
“크르르르.”
짐승이라도 되는 양 이를 드러내는 광마인 폐기물을 보며 용무린은 고개를 흔들었다.
“보자, 이렇게 하면 어떨까?”
생각만 해보던 것을 실험해 볼 차례였다.
용무린이 잠시 정신을 집중하자 백회 부근에 신비로운 황금빛이 어리는가 싶더니 반투명한 덩어리 하나가 불쑥 튀어 나왔다.
“무소불위무소부재. 정말 가능한가 보자.”
용무린은 자신이 뽑아낸 의식체 일부가 광마인 폐기물의 저 막강한 살인과 광증만 남은 무지막지한 본능 안으로 들어가길 바랐다.
후욱.
놀랍게도 그 즉시 의식체가 어디론가 사라졌다.
상상에 그칠 줄 알았는데 실제 광마인의 본능 안으로의 침투에 성공한 것이다.
그 대신 용무린의 얼굴이 살짝 찡그려졌다.
용무린의 뇌리에 광마인 폐기물이 지니고 있던 살의와 악의의 본능이 가감 없이 전해졌기 때문이었다.
‘이토록 강력할 수가 있다니!’
놀라울 정도였다.
진악(眞惡)이 있다면 이럴 것 같았다.
놈의 의식은 순수한 악의로 가득 차 넘실대고 있었다.
‘그래도 남아 있을 거야. 틀림없어.’
용무린은 포기하지 않았다.
녀석의 끝없는 살의와 악의의 본능 속을 유영했다.
설마하니 그 안에서 선의를 찾는 것인가?
아니었다.
놈은 모르고 있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단 하나의 절대불변의 진실인 ‘참나’를 찾고 있는 것이었다.
‘녀석은 그것을 찾을 능력이 되지 않지만 나는 다르지. 나는 이미 내 스스로 나의 참나를 견성했고 일부러 용무린이라고 하는 인생을 경험하기 위해 남지 않았던가?’
이번의 삶이 어떻게 끝나든 이 광마인 폐기물 역시 윤회의 법칙에 따라 다시 삶을 살기 위해 이 땅에 돌아올 수밖에 없다.
그 말은 곧 절대로 없을 것만 같은 이 광마인 폐기물 안에도 절대불변의 ‘참나’가 있다는 뜻이 된다. 그래야만 이 껍질에서의 실패를 딛고 다른 경험을 얻으려 이 땅에 다시 올 수 있는 것이다.
‘불가능한 일일까?’
양의신공을 익혔기 때문일까?
불가능을 떠올린 순간 다시 한 번 획기적인 이론을 용무린은 떠올릴 수 있었다.
‘무소부재! 내가 원하는 곳은 어디든 갈 수 있잖아.’
모든 것은 의지의 문제다.
불사를 꿈꾸었을 때 진실로 불사의 내공을 얻었듯이 불가능을 떠올리면 진정 불가능해질 것이고 그 반대로 가능성에 집중하면…….
‘녀석의 참나로 바로 간다. 녀석의 참나로 직행하겠다.’
후우욱.
놀랍게도 정말 이뤄졌다.
용무린의 의식체는 순식간에 이동을 한 후 황홀하리만큼 아름다운 빛을 뿜어내는 참나 앞에 설 수 있었다.
‘아!’
절로 탄성이 흘러 나왔다.
광마인 폐기물의 광기와 살의로만 가득 찬 의식 저 깊은 곳에 자신과 한 치도 다름이 없는 참나가 존재하고 있을 줄이야!
‘역시 내가 옳았어.’
세상만물이 모두 부처다.
마음 한 번 돌리면 누구나 부처가 되어 해탈을 할 수 있다는 불가의 가르침은 사실이었다.
견성성불.
인간의 본성을 깨우치면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다는 법어의 본모습 앞에 용무린은 감격할 수밖에 없었다.
‘구름에 가려 있다 한들 태양이 어찌 사라질 것인가?’
용무린은 구름을 걷어내야겠다고 생각했다.
버언쩍. 파아아-앗!
용무린의 의식체가 찬란한 황금빛 광채를 뿜었다.
그러자 광마인 폐기물의 의식을 가득 채우고 있던 삿된 것들이, 통제도 불가능하고 지울 수 없을 것만 같던 살의와 악의가 스르르 녹아 사라져 버렸다.
‘당연한 일. 어둠은 빛의 부재일 뿐이니까.’
자신이 뿜어낸 광채는 불사신기가 아니었다.
참나의 빛!
바로 깨달음의 빛이었던 것이다.
위이잉. 버언쩌저적.
어둠에 가려져 있던 녀석의 참나가 덩달아 빛을 발했다.
용무린이 뿜어냈던 참나와 함께 어울려 기뻐하는가 싶더니 이내 어디론가 스르르 사라져갔다.
용무린은 녀석의 참나가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있었다.
‘갈 곳으로 갔구나.’
정상적인 윤회의 길을 찾아 떠났다.
얼마나 많은 시간이 걸릴지는 모르겠지만 녀석은 다시금 이 땅에 돌아올 기회를 얻었다.
반짝.
용무린의 눈이 떠졌다.
참나가 떠나감으로 인해 이제는 완전히 빈 껍질이 되어 버린 광마인 폐기물을 바라보았다.
“죽었군.”
끝없이 으르렁대며 살의를 뿜어내던 광마인 폐기물은 편안한 얼굴로 더는 움직이지 않았다.
잠시 그 모습을 바라보던 용무린은 다시 시작했다.
의식체를 뽑아내 광마인 폐기물의 의식 속으로 스며든 후 녀석들 안에 숨어 있는 참나를 향해 움직였다.
달라진 것도 있었다.
제어를 위해 처음에는 녀석들의 사지를 절단한 후 시도를 했었지만 점차 경험이 쌓이면서 굳이 그럴 필요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던 것이다.
이제는 그저 의식체를, 참나의 일부분을 분리한 후 원하는 상대에게 집중만 하면 되었다.
후우욱.
그러면 곧바로 녀석의 ‘참나’ 앞에 도착할 수 있었다.
물론 매번 성공하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놀랍게도 광마인 폐기물 중에는 참나가 이미 사라진 것들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저 사이한 것들은 대체 뭐야?’
마령이라고 해야 할까?
아니면 악귀?
잘은 모르겠지만 그런 것들로 채워진 폐기물도 상당수 존재했다.
-캬아아아!
그런 것들은 예외 없이 용무린의 의식체를 향해 끝없는 적의를 뿜어냈다.
놈들에게 살의와 적의를 뿜어낼 필요도 없는 일이었다.
용무린은 그저 참나의 빛만 넉넉하게 뿌렸다.
그것으로 끝.
마령이나 사이한 악귀들은 예외 없이 비명을 지르며 녹아 없어졌다.
싸우지 않고도 승리를 거뒀다.
그 어떠한 마령이나 살의, 악령들이라 해도 촌각을 버티지 못하고 스러졌다.
갈 곳으로 간 것이 아니었다.
글자 그대로 녹아 없어졌다.
용무린이 밝힌 ‘참나’의 드러남에 마땅히 이래야 한다는 듯 소멸했다.
‘이런 것이로구나.’
비로소 알 수 있었다.
‘바로 이런 방법을 통해 온갖 사악한 것들을 완전히 소멸시킬 수 있는 것이었어.’
역천자의 혼백과 영혼까지 완벽하게 소멸시킬 수 있는 방법은 불사대천검이라는 무공을 대성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이것이라는 사실을.
-캬아아. 크아아-악.
용무린이 뿜어내는 ‘참나’의 빛에 휘말려 사이한 악령 하나가 또 사라졌다. 글자 그대로였다. 봄 눈 녹듯 너무나도 쉽게 지워져 없어졌다.
‘다시!’
용무린은 아직도 많이 남아 있는 광마인 폐기물들을 대상으로 그렇듯 혼백과 영혼을 소멸시키는 방법을 완성해 나가기 시작했다.
***
열흘이란 시간이 훌쩍 지나갔다.
그동안 용무린의 일도 묵묵히 계속 이어졌다.
놀랍게도 참나가 떠나간 빈 껍질 중에 죽지 않는 개체들도 존재했다.
하긴 그러니까 그 빈자리를 사이한 다른 것들로 채워 넣을 수도 있었겠지.
용무린은 그런 존재들에게는 자신의 의지를 심어버렸다.
그 무엇으로도 오염되거나 물들일 수 없는 의지.
참나에서 나와 불사신공으로 힘을 얻은 자신의 의지를 심자 놀랍게도 제어가 가능해졌다.
물론 그래봐야 빈 껍질이었다.
하지만 용무린의 의지로 완벽하게 제어가 되는 최강의 병기가 된 셈이었다.
“오오오! 정말 놀라운 일입니다. 광마인을 훌쩍 뛰어 넘었음에도 불구하고 완벽한 통제가 이뤄진다니요!”
대사제 여절령이 혀를 내두르며 좋아했다.
장마종은 물론이고 저 멀리 장사에 있는 음양신마에게도 통할 좋은 핑계거리가 생겼기 때문이었다.
“자제해라. 새로운 형태의 병기가 생겼다고 하면 놈이 득달같이 달려와 확인을 할지도 모른다.”
“아!”
여절령이 동그랗게 뜬 눈으로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러다가 갑자기 질문을 쏟아냈다.
“이들은 뭐라 부르실 것입니까?”
“흐음.”
잠시 생각에 잠겼던 용무린은 적절한 이름 하나를 떠올릴 수 있었다.
“무명인.”
“무…… 명인 말씀이십니까?”
되물어오는 여절령을 향해 용무린은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담담한 목소리로 답했다.
“그래, 무명인이다.”
하나 같이 참나가 없는 빈 껍질들이었다.
다만 용무린이 나눠 넣은 의식체 조각이 있어 빈 껍질에 불과한 육신을 움직일 수 있었으니 무명인이라는 말이 가장 적절했다.
모두 합해 쉰다섯 명.
이 무명인들이야말로 마교 척멸의 선봉에 설 자들이었다.
“이제 광마인들을 봐야 할 차례다.”
폐기물들을 모두 처리했으니 녀석들의 처리는 조금 더 쉬울 것이다.
‘광마인들까지 다 내 것으로 만들어 버린 후 마교를 통째 갈아엎는다.’
바야흐로 마교의 해체가 코앞이었다.
밤마다 역천자의 껍질을 찾는 작업도 잊지 않았다.
직접 몸을 움직여 찾는 대신 더욱 효율적인 방법을 사용했다.
자신의 방으로 들어온 용무린은 감시자들의 암시를 다시 한 번 새롭게 해준 후 가부좌를 틀고 앉아 가만히 눈을 감았다.
불사신공을 끌어 올린 후 정신을 집중했다.
‘좋았어. 지금이야.’
반짝.
백회혈 어림에서 옅은 황금빛이 어렸다.
동시에 한 덩어리가 뚝 떨어져 나왔다. 공기 속에 녹아들 듯 사라져 버렸다.
하지만,
‘보인다.’
용무린의 입가에 회심의 미소가 걸렸다.
몸은 혈마궁 내부의 자신의 방에 있었지만 자신의 의식은 몸을 벗어나 마교를 날아다니며 바라던 대로 한 사람씩 살펴보기 시작했다.
‘후후훗. 이거 꽤 편한데?’
일원의 경지에 발을 디딘 후 얻은 작은 것들이었다.
‘불가로 따지자면 천안통과 신족통의 일부를 발휘했다고 해야 할까?’
볼 수 없는 상태에서 볼 수 없는 것을 보니 천안통이다.
또한 몸을 원하는 무엇으로든 변화시킬 수 있으며 어느 장소든 임의대로 나타나고 갈 수 있으니 또한 신족통이라고 할 수 있다.
휘이이.
용무린의 의식 한 조각은 그렇듯 공간 속에 녹아든 후 바람이 되어 불회곡을 뒤져나가기 시작했다.
‘한 사람도 놓치면 안 되겠지?’
여기까지 와서 설렁설렁 살펴보고 나갈 생각이라면 애초부터 들어오지 말았어야 한다.
***
휘이이.
한 줄기 바람처럼 불회곡 안을 돌아다니는 용무린.
비록 의식의 한 부분에 불과했지만 직접 돌아다니며 눈으로 보는 것보다 더욱 자세히 살피고 있다고 자부하는데도 너무나 막막했다.
‘아무리 돌아다녀도 안 보이는데?’
외원에 속한 거의 모든 인원을 살폈다고 자부한다.
음양신마 주변에 함께 하고 있는 사람들이야 어쩔 수 없지만 현재 외원에 남아 있는 마인들과 그 식구들은 빠뜨리지 않고 확인했다.
밤마다 보고 다녔어도 무려 닷새나 걸렸다.
외원에 속한 마인들이나 그 식구들 전부를 빠짐없이 살피고 또 살폈다.
그래도 느낌이 오는 대상이 없었다.
역천자 놈이 준비해 놓은 껍질이라고 한다면 독특한 무엇인가가 느껴져야만 했지만 그런 느낌은 약에 쓰려고 해도 보이지 않았다.
‘환희궁을 한 번 더 살펴볼까?’
분홍빛 나삼이 하늘하늘하던 곳이었다.
좋은 향기와 헐벗은 나머지 보듬어 안아주고픈 생각이 절로 들 여인들이 어찌나 많던지!
‘아오, 됐다. 뱃속에 내 아들 키워주고 있는 여인이 시퍼렇게 눈을 뜨고 나만 기다리고 있는 판국에 한눈은 무슨 놈의 한눈이람?’
공연히 제갈영령에게 미안해진 용무린은 재빨리 의식을 다른 곳으로 이끌었다.
‘내원 쪽을 살펴야 하나?’
쉬이익.
생각을 품자마자 용무린의 의식이 내원을 향해 움직였다.
‘여기도 안 보이고…….’
이전 중 하나인 집법전의 마인들을 훑었다.
아침 해가 뜰 때까지 하룻밤을 꼬박 투자했으나 소용없는 일이었다. 용무린이 원하는 기운 혹은 반응이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저곳은 또 어디지?’
성녀전도 훑었다.
분위기가 너무 우울한 곳이었다.
‘환희궁 여인들은 죄다 웃고 떠들고 난리 났던데 여긴 다들 왜 이래?’
성녀의 전부라고 할 수 있는 전대신마의 죽음.
자신이 신마의 목을 베어버렸기 때문임을 용무린은 아직 알지 못했다.
‘아, 미치겠다. 여기도 아니면 대체 어디에 있는 거야?’
용무린의 속이 터지려 들었다.
무조건 불회곡 안에 한 놈쯤은 있으리라 생각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던 어느 한 순간이었다.
‘아!’
홀연히 한 곳이 떠올랐다.
‘맞아! 그곳! 그곳은 내가 아직 안 봤지?’
생각해보니 왜 그곳을 이제야 떠올렸는지 어처구니가 없을 정도다.
‘조사동!’
불회곡에서도 금지 중 금지인 곳.
그곳 주변을 지키는 마인들은 아직 한 놈도 살펴보지 못했다.
‘좋아. 그놈들을 살피자.’
용무린의 마음이 일자 의식이 바로 공간을 단축하듯 거리를 좁혔다.
후우욱.
한 순간에 조사동 앞으로 의식체가 이동했다.
과연 조사동인 천마동 주변에 보기 드문 수준의 마인들이 포진해 있었다.
‘좋아, 좋아. 저 정도 육체와 실력이라면 역천자 놈이 충분히 탐을 낼 수 있을 거야.’
하나 같이 젊고 내공이 충만하다.
입장을 바꿔놓고 생각해봐도 노쇠한 몸을 갈아타기 위해서는 저런 몸을 원할 것이다.
‘보자. 이 녀석에겐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고, 저 녀석 역시 깨끗하고…….’
천마동 주변에 숨어 있는 마인 백 명을 다 훑었다.
하지만 누구의 몸에서도 유의해야 할 만한 기운이라든지 아니면 ‘이거다.’ 싶을 만큼 독특한 힘이 느껴지지 않았다. 모두가 평범했다.
실망이었다.
‘애써 들어왔는데 결국 녀석의 주변을 좀 더 뒤져보는 편이 더 나았나?’
후회가 되었다.
호남 성도 장사의 승선포정사사, 녀석이 터를 잡고 상주해 있는 곳이기에 혹시나 들킬까 싶어 이곳부터 살핀 곳인데 역시 그곳이었나 싶은 거다.
그런데…….
‘천마동을 지키는 호위가 원래 백 명이나 되었나?’
하는 의문이 들었다.
‘아닌데? 보통 십여 명 내왼데?’
신마 진무량의 기억으로 보면 그 정도가 적당하다.
어차피 ‘금지’였다.
거기에 더해 천마에 대한 불경을 염려하는 교도들의 특성상 누구도 함부로 여기지 않는 사실상의 ‘성지’ 엇비슷한 곳이기 때문이었다.
‘혹시, 누가 비밀리에 조사동에 들어 무공을 수련하고 있는 것일까?’
그렇지 않고서야 백 명씩이나 되는 마인들이 지키고 있을 리가 없지 않겠나?
‘확인해 보자.’
두근두근.
갑자기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어쩐지 저 안에 지금껏 자신의 가슴을 애태운 무엇인가가 정체를 드러낼 것만 같았다.
휘이익.
용무린의 의식의 조각이 바람처럼 백 명의 마인들을 휘돌아 천마동에 접근했다.
‘그대로구나.’
겉으로 보아서는 그냥 암벽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환영일 뿐, 일정한 법칙으로 걸어 들어가 한 곳을 향해 뛰어들면 거짓말처럼 또 다른 공간에 들어와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천문에 펼쳐져 있던 대자연진법과 비슷하다고 보면 된다.
그런데,
휘리릭. 투웅.
용무린의 의식체가 천마동에 진입할 수 없었다. 대자연진법에 그대로 퉁겨졌다.
‘헐, 의식체인데 튕겨난다고?’
비슷한 정도가 아니라 같은 수준인 모양이다.
지금껏 어느 장소를 막론하고 유령처럼 마음껏 뚫고 들어갈 수 있었던 의식체인데도 불구하고 막히다니!
삐익.
“침입자다!”
타닷. 휘리릭.
“감힛!”
“잡아랏!”
짧은 호각 소리와 함께 한꺼번에 열 명의 마인이 용무린의 의식체가 있는 곳을 향해 달려왔다.
“뭐야? 왜 아무도 없어?”
“기감을 극도로 끌어 올려라.”
“모두 제자리를 지켜!”
요란법석을 떨었지만 걸리는 게 있을 리 없다.
용무린의 의식체가 녀석들을 한 사람씩 다시 훑어보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감도 잡지 못했다.
‘재빠른 대처는 칭찬해주지.’
그것이 끝이었다.
녀석들은 고개만 갸웃거리다 다들 제자리로 돌아가야만 했다.
‘이거, 의식체로도 제대로 방위를 밟는다는 것이 가능한 일인가?’
긴가민가하면서도 용무린은 의식체를 기억 속의 진입방법에 따라 움직였다.
휘스스.
‘호오!’
그랬더니 진짜 성공했다.
‘이것 참…….’
짜릿한 느낌과 함께 묘한 가능성에 생각이 미쳤다.
‘의식체가 분명했지만 대자연진법에 영향을 실제 받는 것을 보면 이 의식체로도 물리력을 발휘할 수 있다는 뜻이 아닐까?’
무소부재 무소불위.
원하는 무엇으로든 몸을 변화시킬 수 있으며 어느 장소든 임의대로 나타날 수 있고 갈 수도 있는 것이 바로 신족통이라 했으니 어느 정도 맞는 듯했다.
‘신기하긴 하지만 그런 종류의 수련이야 나중에 해보기로 하고, 일단 이 안을 좀 살펴보자.’
용무린은 천마동 안을 향해 의식을 집중했다.
휘이잉.
의식체가 바람이 되어 천마동 안으로 깊숙이 들어갔다.
십만대산 깊숙한 곳으로 들어갈수록 공간은 점점 더 넓어졌다.
‘기억 그대로네.’
끝을 알 수 없는 암동.
하지만 적당히 들어가면 연무장으로 사용할 수 있을 커다란 공동이 나오고 그 한 귀퉁이에 천마를 비롯한 역대 마교의 조사들이 좌탈한 유해가 늘어서 있었다.
‘있다.’
연무장 중심에 누군가가 보였다.
‘어라? 안면이 있는 놈 같은데…….’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신마대전 당시 음양자 주변에 있었으며 삼대 삼으로 싸움이 벌어졌을 때 살계승 효정대사와 맞붙었던 놈으로 기억된다.
‘검마종이라고 했던가?’
한 자루의 고색창연한 검이 무릎에 놓여 있었다.
확실히 놈은 조사동인 이곳에서 지금 수련삼매에 빠진 것이 맞았다.
그런데 참 이상한 일이다.
‘어떻게 저놈이 이곳에 있는 것이지?’
오마종의 수좌에 속한 검마종이라 하더라도 이곳에 들 권한은 없는 거다.
그렇게 궁금해 하는 순간이었다.
딸라-앙!
돌연 놈의 품속에서 사이한 종소리가 울려 퍼졌다.
듣기만 해도 머리칼이 쭈뼛 곤두설 만큼 사이한 종소리!
‘어디서 분명히 들어 본 기억이 있는데?’
오래 생각할 시간이 없었다.
검마종의 눈이 번쩍 떠졌다. 동시에 의식체 상태의 용무린을 똑바로 보았다.
실체가 없는 의식체임에도 놈의 시선이 꿰뚫어 보는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일단 후퇴!’
위기본능에 용무린은 재빨리 의식체를 뒤로 물렸다.
휘이잉.
한 줄기 바람처럼 의식체가 천마동 밖으로 빠져나가는 바로 그 순간,
버언쩍!
튕기듯 몸을 일으킨 검마종이 무릎에 놓여 있던 검을 잡아 한 차례 옆으로 쓸었다.
콰아아앗!
실로 깔끔한 검강이 쏟아져 나왔다.
방금까지 용무린의 의식체가 머물고 있던 곳을 정확히 둘로 쪼개 버렸다.
물론 용무린의 의식체가 천마동 밖으로 물러났기에 애꿎은 바닥만 후벼 판 셈이지만, 그대로 있었다가는 어떤 타격을 입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갸웃!
검마종의 고개가 살짝 기울었다.
“뭐였지?”
기이하달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코앞까지 바짝 다가온 미지의 존재가 순식간에 멀어져 간 느낌이라고나 할까?
“착각이었나?”
지이잉.
그럴 리가 없다는 듯 품속의 환혼령이 아직까지도 가늘게 울고 있었다.
슈우욱.
용무린의 의식체가 다시 천령개로 빨려들었다.
반짝.
용무린의 눈이 떠지며 맑은 빛을 뿜었다.
“너로구나.”
드디어 찾았다.
여차하면 역천자가 몸을 갈아탈 새로운 껍질.
“동정호변에서 봤던 그 작은 종, 음양신마 놈이 흔들어대던 바로 그 음산한 종!”
그것이 검마종의 품속에서 신나게 울었다.
바로 놈인 것이다.
검마종이 바로 역천자 음양신마가 유사시에 헌 옷을 버리고 새 옷 갈아입듯 갈아 탈 새로운 몸, 살아서 움직이되 언제든 주인이 바뀌어 버릴 껍질이었다.
“그런데 왜 조금 더 젊은 몸을 택하지 않았지?”
돌연 궁금해졌다.
기왕 몸을 갈아탈 생각이면 보다 젊은 몸을 택하지 어째서 늙은 검마종을 택한 것일까?
“물론 놈의 무공이 높은 것은 나도 인정해.”
대단하달 수 있을 정도로 커다란 단전.
그에 걸맞을 정도로 크고 넓고 튼튼한 기경팔맥.
어지간한 젊음으로는 견줄 수 없을 만큼의 육체적 강함에 옮겨 가자마자 즉시 막강한 무공을 펼칠 수 있다는 장점이 검마종에게 있었다.
“물론 언제부터 살아왔는지 모를 음양신마 놈에 비하면 검마종의 육체도 애송이에 불과하겠지.”
그래서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드니 역천자 놈의 결정이 이해가 되었다.
“좋아, 좋아. 어쨌든 알았으니 이제 된 거야.”
계속해서 모르고 있었을 때가 문제인 것이지 알아차린 이상 문제없다.
“기다려라, 역천자. 이곳을 정리한 후 바로 네 녀석을 찾도록 하마.”
***
기다림의 시간이 계속되었다.
그동안 용무린은 광마인의 개조에 주력했다.
광마인들의 개조는 훨씬 수월했다.
이미 폐기물들을 다루며 경험을 쌓은 용무린은 수월하게 그들의 ‘참나’를 가야 할 곳으로 돌려보낸 후 의식의 조각을 심어 장악했다.
‘숫자가 많으니 이것도 꽤 일이 되는군.’
말이 조각을 나누는 것이지, 그동안 나눠 심은 의식체 조각을 모두 합해 부피로 따지면 이미 어지간한 높이의 나무 크기 그 이상이 될 것이다.
그럼에도 용무린은 가뿐했다.
‘참나’는 언제나 불변인 것이고 나눠 보낸 것은 의지의 그림자들일 뿐이었으니까.
보름이 꼬박 걸렸다.
그 짧은 시간 안에 준비되어 있던 마령인들은 모조리 광마인 수준으로 능력이 올라갔고 그 다음에는 ‘참나’를 잃고 껍질이 되었으며 용무린에게 장악당했다.
그 수가 모두 삼백 명.
거기에 더해 지하에는 완전히 탈바꿈한 무명인 쉰다섯 명까지 더해졌으니 그 전력은 오궁 중 두 곳의 전력에 비견되거나 넘어설 정도였다.
특히 무명인 쉰다섯 명의 능력이 뛰어난데, 그들의 힘이라면 불회곡에 남아 있는 각 궁의 수뇌부 대부분을 능히 상대할 수 있을 정도였다.
‘상대할 수 있다는 것과 이긴다는 것은 또 다른 개념이니까 그 정도야 충분하지.’
준비는 그렇게 얼추 끝났다.
‘본래 계획이라면 당장 조사동으로 몰려가야 하겠지만 조금 더 기다려야겠지?’
더 좋은 결과를 위해 오독문의 연락을 기다려야 한다.
‘아직도 한참 남았을까?’
그때 들었던 이야기에 의하면 만독궁에 제공하기 위해 준비해 놓은 물량이 있었다고 하니 지금쯤이면 얼추 되었으리란 생각도 든다.
‘조금만 더 기다려보다 정 안되겠으면 내가 직접 나서서 한 번 알아보지 뭐.’
시간을 더 끌었다가는 역천자 놈이 힘을 다 회복한 것으로도 모자라 다시금 또 하나의 껍질을 만들어 놓을지도 모른다.
***
“크흠.”
만독궁 부궁주 만사력의 이마에 깊은 골이 패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뭔가 조금 이상했던 것이다.
“어째서 종사음 부궁주가 계속해서 오독문에 죽치고 있는 것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종사음은 자신과 함께 만독궁의 궁주 자리를 놓고 겨루는 처지가 아니던가?
아무리 자신과 협의를 통해 오독문을 집어 삼킨 후 혈고의 제조 비법을 가져오기 위해서라고는 하지만 이 행보는 수상쩍었다.
“보고가 확실하다면 오독문의 멸문은 이미 한 달 전에 이루어졌어.”
혈고의 제조 비법을 추궁하고 있는 중이라고 했고 알아낸 사실 중 하나가 혈고는 오직 마령지라고 하는 곳에서만 번식이 가능하다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지금쯤 뭔가 결과가 나와도 나왔어야 하잖아.”
궁주 자리를 탐낸다면 당연히 그 전에 복귀한 후 장마종께 아뢰어 음양신마님의 윤허를 얻어달라고 계속해서 보채야 옳았다.
“소가주 진화연이라는 계집이 그렇게 죽여주나? 그래서 눌러 앉고 싶은 건가?”
아무리 계집이 좋아도 눌러 앉을 리는 없다.
뱀 머리가 번듯해 봤자 용꼬리가 한 번 움찔하는 아래 깔리면 그것으로 끝이니까.
당연히 용꼬리는 만독궁이다.
“뭔가 이상해. 밀사 몇 놈 파견해봐야겠어.”
그렇게 마음을 굳힐 때였다.
“부궁주님.”
만사력의 등 뒤에서 나직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방금 운남 오독문에서 종사음 부궁주님이 보낸 화물이 도착했습니다.”
만사력의 고개가 갸우뚱하고 기울었다.
그 정도는 보고거리가 되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당연히 합당한 보고 이유가 있다는 듯 계속해서 목소리가 이어졌다.
“대다수의 화물들은 외원 검색대를 통과한 후 본 궁으로 오고 있는 반면 검은 일색의 상자 하나가 광마인 작업장으로 직행했습니다.”
“뭐야? 검은 일색의 상자?”
갑자기 감이 팍 왔다.
검은 일색의 상자를 과거 상당히 다뤄본 경험이 있기 때문이었다.
‘설마, 혈고?’
경험이 이번에도 사실로 나타난다면 그것이리라.
철렁.
심장이 뚝 떨어졌다가 겨우 돌아왔다.
종사음과 혈교 대사제 아니 현재는 혈마궁의 궁주대행인 늙은이가 서로 손을 잡고 웃고 있는 모습이 그려졌기 때문이었다.
“서로의 지위가 불안정하니 함께 힘을 합쳐 밀어주기로 야합을 했나?”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축융궁과 환희궁은 현재 음양신마 측근이 되어 나랏일을 본답시고 여러 성도에 나뉘어져 있었으니 혈마궁과 만독궁의 야합이면 유령궁 정도는 충분히 제어가 가능할 테니까.
“그렇게는 안 되지!”
혈고는 미래를 기약하는 힘이다. 무조건 만독궁에서 아니 내 이름으로 관리해야만 한다.
“지금 당장 만독대 애들을 모아라.”
실력행사를 해서라도 혈고를 되찾아 올 것이다.
그래야만 장마종께 당당히 만사력의 이름으로 혈고를 이만큼 다시 구했다고 보고할 수 있으며 공석인 궁주자리에 자신의 이름을 올려달라고 요청할 수 있다.
“작업장으로 내가 직접 갈 것이다.”
“충!”
***
광마인 제조 작업장.
과거에는 음양자와 그의 제자들이 낮이고 밤이고 마령인들을 광마인으로 진화시키는 곳이었지만 지금은 용무린과 대사제의 작업공간으로 바뀌었다.
“호오. 이것이 바로 혈고라고?”
“그렇습니다, 초월자시여.”
만독대 출신 사내가 고개를 땅에 처박은 채 고함을 질러 대답했다. 혈고에 완전히 제압당한 후 용무린에게 종속당해 버린 것이다.
용무린의 계획에 따라 오독문의 진화연이 혈고에 감염시켜 보낸 사내인데, 작업장에 도착한 즉시 용무린에 의해 모든 금제가 해제된 데다가 혈고의 힘까지 더해져 더욱 용맹해졌다.
“거 참, 꿈틀거리는 모양새가 상당히 재미있구나.”
크기는 겨우 쌀 알갱이 하나만하다.
하지만 저것이 귓속으로 들어가게 되면 시전자의 신호와 의지에 따라 뾰족한 이를 드러내게 된다. 그 날카로운 이로 살점을 파먹으며 점점 더 뇌를 향해 나가는 것이다.
최종 종착지는 뇌에서 기억을 담당하는 부분.
그곳에 뿌리를 박고 양분을 빨아 먹으며 시전자가 원할 때 독성분을 분사해 숙주를 마비시킨 후 기억을 조작해 결과적으로는 시전자의 명령에만 복종하게 만든다.
“모고인 여왕 혈고는 이미 진소궁주께서 몸속에 잘 안착을 시켰다고 합니다. 그 병에 담긴 것들은 모두 수컷들이오니 마음껏 사용하시면 된다고 전해드리라 하였습니다.”
“그래, 알았다. 수고했다.”
“감사합니다, 초월자시여.”
대사제에게도 그러했듯 이 사내에게도 주인이나 신이라는 호칭 대신에 초월자라 부르게끔 했다.
‘아무리 마교가 바뀔 것이라지만 내가 계속해서 주인으로 불리기는 조금 그렇잖아.’
이 정도가 딱 적당하고 좋다.
그때였다.
밖에서 혈사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만독궁 부궁주 만사력이 달려오고 있다는 소식입니다.”
피식.
용무린의 입에서 바람 빠지는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귀여운 자식. 그냥 오늘 밤에 찾아갈 생각이었는데 굳이 또 와주네.”
“앞으로는 함께 초월자님의 명을 수행해 나가야 할 사이니 잘 해주어야겠습니다.”
“그래라.”
용무린의 고개가 살짝 끄덕여지는 순간이었다.
눈에 잔뜩 힘을 준 만독궁 부궁주 만사력이 계단 끝에 모습을 드러냈다.
아득.
대사제 앞에 무릎을 꿇은 만독대 소속 마인의 익숙한 얼굴을 보자마자 만사력이 이를 갈았다. 결코 좌시할 수 없다는 듯 크게 고함을 질렀다.
“이게 지금 뭣들 하는 짓입니까?”
평소 같았으면 동굴 전체가 쩌렁쩌렁 울릴 만큼 내공이 담긴 외침이었지만 이상하게 작게 들렸다.
이상하다는 생각을 할 법도 하지만 놈의 관심은 다른 곳으로 향했다.
반짝.
‘혈고다.’
검은 일색의 병!
뚜껑이 열린 상태라 붉은 색 쌀 알갱이 크기의 혈고가 꿈틀대고 있는 것이 적나라하게 보였다.
‘개자식들! 나를 쏙 빼고 야합을 하다니!’
하지만 만사력은 그런 점까지 생각할 정도로 이성이 남아 있지 않았다.
궁주의 자리에서도 밀려나고 혈고 재생산의 공로까지 모두 빼앗겼다는 생각에 모두를 쓸어 보며 혈고 앞으로 성큼 다가섰다.
검은 색의 병 입구를 콱 움켜잡으며 외쳤다.
“이것은 지금껏 내가 공을 들인 것이오. 마령인이나 광마인에 사용하는 것은 물론 이곳 작업장의 관할이니 대사제께서도 권리를 주장하시겠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본 만독궁에서 불출을 받으신 후에야…….”
“능력 되면 가져가봐.”
용무린이 놈의 말을 중간에 툭 잘랐다.
“……비로소 권리가 생겨나게 되시는……. 뭐, 뭐라고? 감히 막내 혈사제 따위가 어딜……. 헉!”
용무린을 향해 노성을 쏟아내려던 만사력이 헛숨을 집어 삼켰다. 용무린과 눈이 마주친 순간 갑자기 등줄기가 선뜩했기 때문이다.
‘뭐, 뭐지?’
그제야 뭔가 이상한 점이 눈에 띄었다.
수뇌부들 간에 권리 주장하는 마당에 감히 막내 혈사제 따위가 나섰거늘 그를 보는 대사제의 표정이 너무나도 공손했던 것이다.
입술로만 슬쩍 웃어 보이며 용무린이 말을 이었다.
“능력이 된다면 가져가 보라니까?”
“……!”
갈수록 수상했다.
하지만 이 자리에서 밀리면 더는 기회가 없다는 생각에 용기를 내었다.
“하라면 못할 줄 알고?”
병을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힘껏 들어 올렸다.
그런데…….
“응? 으응?”
연속으로 두 번이나 놀라야만 했다.
근력으로 들어서 안 되기에 내공을 잔뜩 끌어 올렸는데도 불구하고 들어 올릴 수 없었던 것이다.
‘서, 설마 저 막내 혈사제의 내공이 나를 찍어 누를 정도라는 말인가?’
자존심이 상해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할 때였다.
더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스르르.
내공까지 잔뜩 끌어 올려진 만사력의 손이 자의가 아닌 누군가의 타의에 의해 허공으로 들어 올려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 이런 빌어먹을! 차아앗!”
자존심이 상할 대로 상한 만사력이 사력을 다해 내공을 끌어 올렸다.
스르르.
하지만 손이 들어 올려지는 속도에는 변함이 없었다.
물 흐르듯 부드럽게.
절대로 끊기거나 덜컥거림도 없이 자연스럽게 이뤄지고 있었다.
‘실로 놀라운 내공과 운용이다. 이제 갓 이십 대 초, 중반이나 됨직한 앳된 얼굴의 혈사제 내공과 운용이 이 정도로 출중할 줄이야.’
부끄럽지만 더 이상 망신을 당해서는 곤란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그 순간 더 미치고 팔짝 뛸 일이 눈앞에서 벌어졌다.
둥실.
검은 색 병 안에 담겨 있던 혈고 한 마리가 허공으로 떠올랐던 것이다.
‘이, 이런 미친.’
한꺼번에 두 가지의 물체에 내공을 가해 각각 다른 힘과 속도로 운용을 할 수 있다니!
‘믿을 수 없어. 이건 사기야!’
다른 누군가가 돕는 것이 아니라면, 오롯이 저 막내 혈사제의 능력이라면, 이는 자신과는 감히 비교조차 할 수 없을 만큼 대단한 내공의 운용이었다.
“혈고를 좋아하는 것 같으니 내가 직접 한 마리를 하사하도록 하지.”
“어어어…….”
사력을 다해 내공을 운용해 버티는 와중이라 겨우 낸 소리가 저것이었다.
둥실. 스르르.
그러는 와중에도 혈고는 소리도 없이 부드럽게 떠올라 만사력의 귀를 향해 움직였다.
‘크, 큰일 났다.’
그제야 상대가 얼마나 무서운 존재인지 깨닫게 된 만사력은 잽싸게 내공을 끊었다.
“져, 졌습니……. 헉!”
무릎을 꿇고 용서를 구하려 했지만 그것도 소용없는 일이었다.
마음과 달리 무릎은 꿇어지지도 않았다.
상대의 내공 때문에 몸이 그대로 굳어버린 것이다.
스르르.
그 상태에서 혈고는 계속해서 귓가로 다가왔다.
‘당했다. 당했어. 저자! 정체가 뭔지는 모르겠지만 대사제보다도 위다. 그가 이들을 모두 거느리고 있어.’
대사제와 나머지 혈사제들의 공손한 태도가 무엇 때문인지 비로소 알게 되는 순간,
쏘옥.
혈고는 막사평의 귓속으로 들어가고야 말았다.
부르르.
입을 열어 비명도 지르지 못하는 막사평은 그저 몸을 가늘게 떨 수밖에 없었다.
와작. 와작.
혈고가 귓속에서 살을 파먹어 들어오는 소리가 어찌나 무섭게 들리던지!
만독궁에서 혈고를 분출해 다른 사람들에게 감염시킬 때는 생각지도 못했던 종류의 공포가 만사력의 심혼을 마구 뒤흔들었다.
막내 혈사제.
드디어 본신의 힘을 드러낸 용무린이 만사력의 귓가에 뇌까렸다.
“기다려. 만독궁 전부, 아니 이곳 불회곡에 남아 있는 놈들 모두를 너와 같은 모습으로 만들어줄게…….”
파르르.
막사평의 몸이 계속해서 떨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