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개미귀신
혈고가 만사력의 뇌를 점령하기까지 시간은 반 시진이면 족했다. 그 후 용무린은 불사신기 탄검으로 만사력을 완전히 복속시켜 버렸다.
쿵.
“하명하소서 주인이시여.”
멍한 시선의 만사력이 무릎을 꿇으며 외쳤다.
만족스러웠다.
“첫 번째 명을 내리겠다. 지금 당장 밖으로 나가서 네가 이끌고 온 만독대 아이들 조용히 이곳으로 데리고 와.”
“충!”
대답과 동시에 만사력이 밖으로 얌전히 사라졌다.
“호오. 정말 대단합니다, 초월자시여. 이 혈고라는 물건은 정말 재미있습니다.”
“그래. 재미있지.”
간단히 고개를 끄덕여 대답한 용무린의 입술이 위를 향해 슬쩍 말려 올라갔다.
동시에,
둥실. 두둥실.
혈고 열 마리가 떠올랐다. 대사제와 아홉 혈사제의 귀를 향해 이동해 갔다.
“어, 어째서……?”
대사제가 말을 더듬었지만 용무린은 단호했다.
“나에게 복속된 상태긴 하지만, 그래도 안전한 것이 좋지 않겠어? 안전장치 하나 없이 너와 혈사제들을 그대로 두기에는 이 세상에 너무나 기기묘묘한 술법이나 대법들이 많거든. 그러니 그냥 받아들여.”
역천자의 눈마저 속인 암시였음에도 용무린은 끝까지 방심을 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니 뭐라고 항변하랴?
본능은 혈고의 감염을 두려워하고 있었지만 암시가 시키는 대로 따를 수밖에.
와작. 와그작.
혈고 열 마리가 대사제와 아홉 명의 혈사제의 귓속을 파먹어 들어가고 있을 즈음 막사평의 뒤를 따라 만독대원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어헉!”
“이, 이게 대체……?”
만독대원들 사이에 작은 소란이 일었다.
하긴, 심상치 않은 얼굴을 한 채 그대로 몸이 굳어 파르르 떨고 있는 대사제와 혈사제를 보고도 아무런 의심도 없을 바보들은 아니었다.
“조용히 시켜야지.”
“아! 알겠습니다.”
용무린의 말이 무슨 뜻인지 대뜸 알아차린 만사력이 뒤로 돌아섰다. 만독대원들을 향해 묵직한 목소리로 확실히 해두었다.
“나를 믿으면 그대로 움직이지 말 거라.”
“……?”
무슨 뜻인지 몰라 모두의 눈에 의문부호가 그려질 무렵 만사력은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만독대원들의 마혈을 짚어나가기 시작했다.
“억!”
“부, 부궁주님!”
몇몇 대원들이 화들짝 놀라 항변을 하려 들었지만,
“어허! 내가 바로 너희들의 부궁주야. 그렇게 나를 몰라? 나를 믿으라니까!”
라고 윽박지르는 만사력의 위세에 눌려 마혈을 제압당해야만 했다. 몹시 수상쩍은 일이 벌어지고 있기는 했지만 자신 있게 내뱉은 말처럼 지금까지 겪어 온 만사력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다 끝났습니다, 주인이시여.”
용무린을 향해 주인이라 부르는 만사력을 보며 마혈이 제압당한 만독대원들의 눈은 튀어 나오기라도 할 듯 부릅떠질 수밖에 없었다.
‘당했다.’
‘세상에, 내가 모시던 부궁주가 배신자였다니!’
‘대사제도 아니고 혈사제 따위에게 주인이라 불러?’
치밀어 오르는 복잡하고 억울한 생각에 모두의 눈빛이 착잡하게 변할 때였다.
“커헉.”
“큽!”
짧은 비명과 함께 간질 발작에라도 걸린 듯 이리저리 몸을 마구 뒤틀어대던 대사제와 혈사제들이 표정이 갑자기 몽롱해졌다.
“뇌로 파고 들어가기 시작했군.”
뇌까지 파먹고 들어가는 시간이 한 식경.
거기서 불사신기 탄검을 통해 완전히 복속시키는 데까지 걸리는 시간이 또 한 식경이 걸린다.
“모두 합해 반 시진이 걸리지.”
둥실 두둥실.
혈고 십여 마리가 하늘로 떠올랐다. 만독대원들을 향해 부드럽게 이동해 갔다.
“누가 그러더라. 시간은 금이라고 말이야.”
감염시켜 복속시켜야 할 놈들 천지다. 한 사람 끝내고 또 한 사람 끝내고 할 시간이 없다.
“기회가 닿으면 이렇게 뭉텅 뭉텅 끝을 내야 내게도 시간이 남겠지?”
용무린의 눈이 반달을 그리는 사이 혈고는 남김없이 만독대원들의 귓속으로 파고들었다. 와작 와작 살을 파먹으며 뇌 속으로 기어들어갔다.
부르르. 파르르.
마혈이 제압당한 까닭에 쓰러질 수조차 없는 만독대원들은 그대로 몸이 굳은 채 사시나무처럼 몸을 떨 수밖에 없었다.
“어디 시작해 볼까?”
허리춤에 걸린 평범한 청강검을 들어 올린 용무린은 즉시 불사신기를 끌어 올린 후 탄검 연주를 시작했다.
따앙. 따라랑. 따리라랑. 따라랑.
몽롱해졌던 대사제와 혈사제들의 얼굴에 서서히 미묘한 빛이 올라왔다.
***
“뭐라고? 만사력 부궁주와 만독대원 오십 명이 광마인 작업장으로 몰려갔다고?”
“그렇습니다, 전주님.”
“이런 빌어먹을! 곪을 대로 곪은 것이 이제 터지려는 모양이로군그래.”
이전 중 하나인 집법전의 전주 추강원의 얼굴이 사납게 일그러졌다.
집법전의 전주라는 이름에 걸맞게 현재 신교 내에서 벌어지고 있는 세력들 간의 알력에 대해 이미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확실히 종사음과 혈마궁, 아니 혈마궁에서도 아직은 그 자리가 위태로운 대사제와 혈사제들이 손을 잡은 것이 확실해 보입니다.”
“그렇겠지. 하긴, 나라도 그랬을 거야. 종사음과 대사제와 혈사제들이라면 꽤 괜찮은 조합이니까.”
“맞습니다, 전주님. 오전에 오독문으로부터 복귀한 만독대원이 검은색의 병을 들고 작업장의 대사제를 바로 찾아간 것이 그 증거입니다.”
과연 신교 내의 규율을 관리하는 집법전이다.
만독궁과 오독문 그리고 종사음과 대사제 사이에 얽힌 인과관계를 정확히 꿰뚫어 보고 있었다.
“이대로 두고 볼 수 없다.”
“집법전의 고수들을 소집합니까?”
“그래. 싸움이 벌어지면 피해가 너무 커질 거야. 그렇지 않아도 정파 놈들에게 당해 가뜩이나 숫자가 줄어들었는데 자중지난을 일으키면 어떻게 되겠어?”
“알겠습니다.”
야무진 답과 함께 부전주가 재빨리 밖으로 튀어 나갔다.
벌떡 일어나 검을 집어가는 집법전의 전주 추강원의 눈에 시퍼런 불똥이 튀었다.
“멍청한 짓 하기만 해봐. 종사음이고 만사력이고 둘 중 누구도 궁주의 위에 오를 자격이 없다고 내가 책임지고 앞길을 막아버릴 테니까.”
개인의 명예와 권력욕 때문에 그렇지 않아도 약해진 신교를 더욱 약하게 만드는 행위를 추강원은 용납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
어느새 불사신기 탄검 연주는 끝이 났다.
대사제부터 시작해 말단 만독대원들까지 모두가 완벽하게 거듭났다.
“하하하! 형제가 된 것을 축하하네.”
“와하하하! 반겨주셔서 감사할 따름입니다, 대사제님.”
“저는 만독대 2조장 나웅겸이라고 합니다, 혈사제님.”
“오! 그런가? 나는 일곱째 혈사제 임학우라고 한다네. 반갑네 그려. 하하하.”
언제부터 그리 친했다고 그러는 것인지 대사제와 혈사제, 만사력과 만독대원들이 하나로 얽혀 서로 인사를 나누고 손을 맞잡고 웃음을 터뜨리고 있었다.
‘거 참, 나쁘지 않은 광경이네.’
손수 만들어 놓은 작품 감상하듯 용무린도 좌중을 쓸어 보며 미소 지었다.
‘이렇게 해 봐야 이 녀석들의 참나에는 변함이 없음을 잘 알고 있긴 하지만…….’
혈고로 인한 변화로 인해, 적어도 이번 생에서 쌓을 악업의 총량이 상당히 줄어들게 되었으니 누구에게나 나쁘지 않은 일이다.
‘그러면 슬슬 움직여 볼까?’
이 녀석들을 토대로 밖으로 나가 본격적으로 혈고를 뿌릴 시간이 돌아왔다.
그런데…….
“집법전주 추강원과 집법전의 고수 백여 명이 이곳을 향해 달려오고 있습니다.”
밖에서부터 급박한 보고가 들려왔다.
“집법전주와 고수들?”
“그렇습니다, 주인님!”
그렇단다.
피식.
절로 웃음이 새어 나왔다.
‘이게 웬 떡이지?’
이렇게 되면 굳이 힘들게 밖으로 나가 돌아다닐 필요도 없다.
“주목! 자자, 이젠 그만 흥분들 가라앉히고 내 말 좀 들어 봐봐.”
“……!”
혈고에 감염되어 복속한 녀석들이 순한 양 같은 눈빛을 용무린에게 집중시켰다.
“그러니까 말이야…….”
“예! 예, 알겠습니다, 주인님.”
“문제없습니다, 주인님!”
대사제와 혈사제는 물론이고 만사력과 만독대원들이 신나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잠시 후,
타다닷. 와다닥.
요란한 소리와 함께 집법전주 추강원과 부전주 그리고 집법전 휘하 마인 백 명이 뛰어 내려왔다.
“모두 멈춰! 멍청한 짓 좀 하지 마……. 으응?!”
병장기 소리 대신 뭔가 왁자지껄 했지만, 그래도 대뜸 고함부터 터뜨렸던 집법전주 추강원의 목소리가 점차 수그려졌다.
생각과는 달리 분위기가 묘했던 것이다.
‘뭐지?’
보고대로라면 지금쯤 병장기 소리 요란한 가운데 피와 살점이 난무하는 광경이 펼쳐져야 하건만 단체 회식이라도 하고 있는 듯 훈훈하기만 하다니!
“아! 오셨습니까, 전주님!”
만사력이 환한 얼굴로 집법전주를 반겼다.
“부궁주. 이게 대체…….”
“아! 아직 인사 나누지 못 하셨겠군요. 이분께서 바로 한때 혈교 대사제셨던…….”
“이 사람아. 그 이야긴 왜 또 하나?”
“푸흐흐. 죄송합니다, 대사제님. 하여간 이분께서 음양신마님의 명을 받들어 광마인 양성 작업에 전념하고 계신 대사제님이십니다. 서로 인사 나누시지요.”
만사력의 너스레에 대사제가 한 발 앞으로 성큼 나섰다.
두 손을 공손히 앞으로 모으며 인사를 건넸다.
“반갑소이다, 추 전주. 대사제 여절령이라고 하오.”
“예? 아, 예.”
집법전주 추강원 역시 얼떨떨한 표정으로 마주 포권을 취했다. 고개를 숙였다.
‘뭐야? 대체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거야?’
주변을 돌아본 추강원의 눈이 동그래졌다.
자신과 대사제가 서로 인사를 나누며 화기애애한 장면을 연출하고 있듯 도처에서 똑같은 광경이 펼쳐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오랜만입니다, 부전주님.”
“어? 그렇군. 반갑네 3조장.”
“혈마궁 소속으로 거듭난 혈사제 엽양준이라고 하오.”
“반갑소이다. 나는…….”
만남의 광장이 펼쳐졌다. 모두가 한데 어우러져 포권을 취한 후 환하게 웃고 떠들고 있었다.
‘나쁘진 않은데, 믿어지지가 않네.’
솔직한 감상이었다.
서로 잡아먹을 듯 무기를 들고 달려든 사람들이 갑자기 이렇게 바뀔 수 있는 이유가 대체 뭘까?
‘혈고에 단체로 감염이라도 되지 않고서야 어디…….’
어처구니없어 떠올린 생각이 스치는 순간 집법전주 추강원의 시선이 광마인 제조와 인체실험 시술대 위에 놓인 검은 일색의 병으로 향했다.
‘혈고! 혈고가 담긴 병의 뚜껑이 왜 열려 있지?’
병 속에서 꿈틀대는 붉은 색의 벌레를 확인한 순간,
오싹!
추강원의 전신에 소름이 쫙 돋았다.
그 순간,
후욱.
간이라도 빼줄 듯 사람 좋은 표정을 짓고 있던 대사제가 순간적으로 거리를 좁혔다. 피처럼 붉은 내공이 어린 손을 뻗어왔다.
“어헉!”
화들짝 놀라 몸을 뒤로 빼려 했지만 이미 늦었다.
타다닷.
대사제의 손이 추강원의 열여덟 개 대혈을 동시에 짚었다.
“이런!”
“뭐냐?”
“기, 기습이다. 어헉!”
기다렸다는 듯 동시에 공격이 이뤄졌다.
만독대원과 혈사제뿐만이 아니었다. 한 차원 높은 단계로 올라선 무명인들까지 나서서 집법전 고수들의 마혈을 짚어 버렸다.
“이요옷!”
“차앗!”
패애액. 차차창.
친화력이 낮아 바깥쪽에서 서성대던 놈들이 화들짝 놀라 반격을 시도했지만 어림도 없었다. 불과 반각을 넘기지 못하고 모두 제압당했다.
“푸흐흐. 아오, 재미있어라.”
용무린까지 나섰으니 별 수 없는 노릇이었다.
“좋아. 기왕 이렇게 된 이상, 구린 분위기 물씬 풍겨서 대가리 급들만 먼저 이곳으로 불러들여야겠다.”
개미귀신이 되는 거다.
한 번 발을 디디면 절대로 빠져 나갈 수 없는 개미굴이 되어 놈들을 쓸어 담을 생각이다.
“자, 이제 모두 형제가 될 시간이다.”
둥실 두둥실.
병 속에 담겨 있던 혈고가 소리도 없이 허공으로 떠올랐다. 눈꼬리를 파르르 떨며 두려워하는 집법전주와 휘하 고수들의 귓속으로 파고들었다.
***
두 시진 후.
피를 나눈 형제보다 더 끈끈해진 집법전주와 만독궁 부궁주 만사력의 주도로 작업장의 분위기가 바뀌었다.
이미 모든 마령인은 광마인으로 바뀐 후였고 그 광마인들은 용무린에 의해 얌전한 수족으로 변화되어 있었으니 도구들을 싹 다 정리해 버린 것이다.
온갖 약물과 독물이 끓어오르던 약탕기들과 항아리, 크고 작은 침과 바늘, 전공이 아니면 알 수도 없는 기기묘묘한 주술적인 도구들까지 죄다 부서져 화로 안에서 활활 불타 사라졌다.
비좁게만 보이던 직경 이십여 장의 지하 작업장이 이제는 되레 휑하게 보일 정도였다.
그 중앙에 기다란 탁자가 놓였다.
세로로 줄을 지어 열 개 남짓 놓인 후 그 위에 싸고 독한 술병이 어지러이 자리를 잡았다.
우육간편이나 간단한 수육 소채 따위의 안주도 놓였고 왁자지껄한 가운데 한바탕 잔치가 벌어졌다.
당연히 그 소식이 신교 전역으로 퍼졌다.
파리 꼬이듯 마인들이 꼬여들었다.
그 첫 번째는 박힌 돌인 혈마궁 부궁주였다.
“뭐야? 피 튀기는 싸움이 벌어진 줄 알고 달려간 집법전의 고수들이 만독궁과 대사제들과 어울러져 한바탕 술잔치를 벌이고 있다고?”
“그렇습니다, 부궁주님.”
“큰일입니다. 놈들이 부궁주님과 본디 혈마궁의 주인이었던 저희들을 제쳐두고 야합하기 시작했습니다.”
까드득.
치솟는 분노에 부궁주가 이를 갈며 외쳤다.
“이런 빌어먹을! 놈들이 대체 우리 혈마궁을 얼마나 하찮게 보았으면……?!”
더는 참을 수가 없었다.
당장 달려가 판을 깨든지 아니면 놈들 앞에서 당당히 권리를 주장해 못을 박든지 해야만 했다.
“애들 모아! 광마인 작업장으로 간다.”
“싹 다 끌어 모읍니까?”
“그래. 담판을 짓자.”
“알겠습니다.”
심복 조장이 단단한 목소리로 답하며 달려 나갔다.
하지만 움직이기 시작한 것은 혈마궁뿐만이 아니었다.
전례 없는 분위기에 유령궁도 움직이기 시작했고, 몇 남지 않은 축융궁과 본디 유흥이라면 어디에도 빠지지 않는 환희궁까지 들썩거렸다.
그러나 누가 알 수 있었을까?
자신들이 향한 곳이 음양자의 작업장이 아니라 사실은 개미귀신이 도사린 함정이라는 것을…….
개미굴 아니 음양자의 작업장은 사람들로 꽉꽉 들어찼다.
서열이 낮거나 무위가 떨어지는 사람들일수록 지하층으로 내몰렸지만 누구 한 사람 싫어하는 기색을 보이거나 반항하지 않았다.
“와하하! 형제들이여!”
“오늘 우리가 하나 됨을 축하하외다!”
“크하하핫. 기쁜 날이오!”
“마십시다.”
“오늘 같이 통쾌한 날 마시지 않으면 언제 마시겠소?”
혈고로 인해 피를 나눈 형제보다 더욱 깊은 사이로 바뀐 모두가 한 마음이 되었으니 다툼이나 싫어하는 마음이 깃들 까닭이 없는 것이다.
혈마궁 부궁주와 휘하 수속 삼백오십여 명이 몰려왔지만, 지금까지 그랬듯 한 순간에 모두 제압당했다. 차례차례 감염이 되어 형제의 우의를 나누었다.
“푸흐흐. 이렇게 좋은 것을 내가 지금까지 왜 그렇게 마음을 졸이고 살았는지 모르겠습니다.”
“저 역시 마찬가집니다, 부궁주님. 주인님과 형제들과 함께 마음을 나누니 이렇게 좋은 것을요.”
“그래그래, 다 잊고 오늘만큼은 실컷 먹고 마셔라.”
“우와아아!”
“만세!”
용무린의 호쾌한 선언을 모두가 반길 즈음,
“허어. 여기서 이런 연회를 벌이고 있을 줄이야! 이게 대체 무슨 일이오?”
눈을 휘둥그레 뜬 유령궁주와 부궁주들이 개미굴을 방문했다. 당연히 휘하 마인들을 몰고 왔다.
“어서 오십시오, 궁주님.”
“와하하. 어서 오시오, 유령궁주. 나 대사제 여절령과 한 잔 하십시다.”
분위기가 이런데 어찌 의심을 할 수 있겠나?
유령궁주와 부궁주들 할 것 없이 분위기에 휘말려 이곳저곳으로 찢어졌다. 병째 술을 마시며 어울렸다.
그러다가 적당히 취기가 오르고 때가 되었다 싶으면 용무린이 신호를 주었고 대사제를 비롯한 각 단체 수뇌부급들의 기습에 제압되어 몸이 굳었다.
“이런!”
스스슷.
이름값을 하려는 것인지 아니면 무공의 특이함 때문인지는 몰라도 유령궁주가 대사제의 손을 벗어나려고 했었지만 이내 용무린의 손에 붙잡혔다.
“컥!”
외마디 비명을 쏟는 유령궁주의 귀에 용무린이 으스스한 목소리로 일러주었다.
“겁먹지 마. 너도 곧 쟤들처럼 좋아하게 될 거야.”
“무, 무슨……. 어헉.”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유령궁주가 눈을 부릅떴다.
둥실 떠올라 유령처럼 다가오는 혈고를 확인한 후 괴성을 내질렀다.
“받아들여 인마.”
말 그대로였다.
유령궁주 역시 얌전히 혈고를 받아들여야만 했다.
한 시진 후.
형제로 거듭난 유령궁주는 용무린을 향해 가슴을 탕탕 치며 장담을 하고 있었다.
“맡겨만 주십시오, 주인님. 제가 지금 즉시 나아가 나머지 유령궁도들을 이 안으로 끌어들이겠습니다.”
이런 충신이 있나?
“그래그래. 한 번 해봐.”
“예, 주인님!”
용무린의 치하에 유령궁주가 희희낙락 밖으로 사라졌다.
개미굴은 이렇듯 점차 그 흡입력을 더해갔다.
혈고가 놀라운 마물이긴 하지만 원래 이렇게까지 완벽한 성공률을 보이지는 않았다.
하지만 용무린이 작정하고 불사신기 탄검 연주에 ‘참나’의 빛을 이용한 암시까지 함께 하고 나서자 그보다 더 완벽할 수 없게 바뀌었다.
혈마궁의 모든 마인들을 혈고에 감염시키기까지 만으로 하루가 걸렸다.
신이 나서 스스로 나서는 유령궁주 덕분에 가장 숫자가 많았던 유령궁 마인들의 완전한 변화까지 불과 사흘이 걸렸을 뿐이다.
엄청난 피해를 입었던 축융궁은 하루, 이미 대다수가 외부로 자리를 옮긴 환희궁 소속 여 고수들의 변화 역시 하루가 걸렸다.
그 뒤로 집법전의 고수들이 움직여 성녀전의 인물들까지 하나씩 개미굴에 끌어왔다.
발을 디딘 누구도 벗어날 수 없었다.
누구를 막론하고 혈고에 감염되고 불사신기 탄검 연주와 ‘참나’의 빛에 의한 암시에 걸려 기존의 감염자들과 한 배에서 태어난 형제와 같은 끈끈한 정을 나누었다.
***
다시 사흘 후.
개미굴 밖에는 장마종과 내원 소속 마인들이 심각한 표정으로 진을 치고 있었다.
“와하하하.”
“껄껄껄.”
음양자의 작업장으로 내려가는 지하 입구에서는 아직도 요란한 웃음소리가 흘러나오고 있었는데, 그럴수록 장마종의 표정은 어두워졌다.
‘정상이 아니야!’
무려 열흘 남짓 계속해서 이어진 연회!
들어가면 누구도 밖으로 나오지 않는 이 상황이 정상일 리가 없는 거다.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냐?’
음양신마와 검마종을 대신해서 신교의 운영을 책임지고 있는 장마종이었지만 차마 저 안으로 내려가 볼 엄두가 나질 않았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개미귀신에 걸린 듯 저 안으로 들어간 누구도 다시 밖으로 나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대전을 수호하는 내원 수호대의 대주와 수호대원 백 명까지 집어 삼켰어.’
이미 알고 내려갔음에도 그 모양이었다.
‘절대로 방심하지 마. 조금만 수상쩍으면 그대로 공격을 퍼 부어버리란 말이야.’
내려갈 당시 자신이 직접 그렇게 지시했다.
그런데도 감감무소식.
참다못해 새롭게 재정비한 신교 무력단체인 자전마단까지 투입했지만 그들 역시 오리무중이었으니…….
‘어떻게 하지?’
너무 답답해 가슴이 터지기 일보직전이었다.
“지금까지 저 안에 들어간 전력을 추산해봐.”
“장마종께서 직접 손을 쓰신 이후부터 계산하오리까?”
“아니. 집법전이 만독궁의 움직임을 감지했을 때부터 계산에 넣어봐.”
“예.”
짧은 대답과 함께 침묵이 이어졌다.
잠시 후,
“허어.”
계산해보니 실로 어이가 없었는지 낮은 탄식과 함께 답이 튀어 나왔다.
“본교 식솔들이 있는 외곽의 인원들을 제외한 외원의 전부와 오궁의 전부, 그리고 이전인 집법전과 성녀전의 전부가 저 안에 있습니다.”
“……!”
장마종의 입이 쩍 벌어졌다.
언뜻 계산이 안 될 정도였던 것이다.
기가 찬 모양인지 고개를 흔들어 보인 수하의 목소리가 계속해서 이어졌다.
“오독문에 나가 있는 인원을 제외한 만독궁 사백오십 명 전원, 역시 외부인원을 배제한 혈마궁도 삼백칠십칠 명 전원, 유령궁주 추강원 이하 구백팔십 명 전사들 전원…….”
정말 기가 막힌 숫자였다.
마지막에 안으로 진입한 자전마단 단주와 휘하의 전사 오백 명까지 모두 합하면 무려 삼천 명에 이르는 엄청난 인원이었다.
물론 작업장 안에는 그만한 공간이 충분했다.
모두 삼층으로 이뤄진 지하 공동.
각 층의 너비가 최소 수십여 장은 족히 되고 마지막 층에는 도저히 제어가 되지 않는 폐기물 광마인들까지 봉인해 두는 공간이 있었으니 그 정도 숫자로 미어터질 정도는 절대로 아니다.
‘아니, 아무리 그래도 대체 무슨 일이냐고?’
공간 넓은 것과 감감무소식인 것이 무슨 상관이랴?
들어가긴 켕기고, 그렇다고 지켜만 볼 수도 없으니 그저 답답할 뿐이다.
‘입구를 무너뜨려 버릴까?’
생각해보니 그래봤자 안에 들어 있는 전력을 생각하면 뚫고 나올 듯싶다.
‘그냥 이렇게 봉쇄만 한 채 모른 척할까?’
그건 더더욱 말이 안 된다.
일이 너무 커진 나머지 어쩌면 이미 음양신마도 이 소식을 들어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가뭄에 콩 나듯 들어오는 자시생 동남동녀 정혈을 긁어모아 운기행공에 여념이 없으시려나?’
그럴지도 모르는 일이었지만 결국엔 언제든 이 일에 대해 알게 된다.
그렇게 되면 더 큰 일이다.
무능함을 넘어서 겁쟁이에 쓸모없는 인간으로 낙인찍히는 거다.
‘별 수 없다.’
직접 들어가 보는 수밖에.
꿀꺽.
자신도 모르는 사이 마른 침 한 번 크게 집어 삼킨 장마종이 결단을 내렸다.
“들어간다!”
“장마종님!”
“시끄럽다. 만반의 준비를 한 후 나를 따라라.”
“……명!”
무거운 얼굴로 답하는 수하를 향해 장마종은 단단히 주의를 주었다.
“명심해라. 안에 들어가게 되면, 내 명령만 기다리지 말고 조금이라도 이상한 것이 보이면 바로 공격을 시작해. 무슨 뜻인지 알겠느냐?”
“알겠습니다.”
기다렸다는 듯 내원 수호대의 부대주가 대답할 때였다.
끝도 없이 이어지던 개미굴의 웃음소리와 왁자지껄한 소란이 멈췄다.
“응?”
돌발 상황에 장마종의 발이 땅에 붙은 듯 멈춰질 때였다.
저벅 저벅.
발소리도 가볍게 누군가가 올라왔다.
피처럼 붉은 일색의 장포를 얼굴까지 깊이 눌러 쓴 사내.
‘혈사제?’
장마종이 고개를 갸우뚱할 때 혈사제가 얼굴까지 눌러 쓰고 있던 장포를 홱 걷어치웠다.
씨이익.
장마종을 향해 활짝 웃어 보였다.
“여-어, 오랜만에 보는 얼굴이네? 반갑다.”
“커헉! 너, 너는…….”
소스라치게 놀란 장마종이 말을 채 잇지 못했다.
잊으려야 잊을 수 없는 얼굴.
개미굴을 나선 혈사제의 정체는 바로 황룡패주 용무린이었기 때문이었다.
***
장마종의 짐작이 옳았다.
그 즈음 음양신마는 불회곡의 상황에 대한 보고를 전혀 받을 수 없었다.
한 명, 혹은 두 명씩 드문드문 자시생 동남동녀가 들어올 때마다 조금씩이라도 몸을 회복하기 위해 전력을 기울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만큼 무림맹의 노력이 빛을 발한 것이다.
사력을 다한 차단에 수급은 갈수록 어려워져만 갔고 그만큼 시간이 흘러갔다.
너무나 감질났다.
속이 터질 것 같았지만 음양신마로서도 더는 채근을 할 수가 없었다.
군사들을 동원해서라도 한꺼번에 자시생 동남동녀를 잡아들인 후 무림맹 놈들을 짓이겨 버리고 싶었지만 얄궂게도 감숙성의 전쟁이 끝나 버렸던 것이다.
그 여파 때문일까?
당장 북경의 황제가 총 동원령을 내려 황제를 참칭한 호남성을 공격하기 위해 군사를 파병할 수도 있다는 소문이 돌았다.
정말 미칠 노릇이었다.
‘내가 내상만 온전히 치유했다면 그냥!’
자금성의 황제 놈이 군사 몇 십만을 파병하든 전혀 신경 쓰지 않았을 것이다.
‘뭐, 지금도 그다지 신경 쓰고 있지는 않지만…….’
군사 따위 몇이 오든 상관없는 일이었다.
그래도 내상이 완전히 치유되지 않으니 별 잡스런 것들이 다 깔보는 것만 같아 기분이 별로였다.
옮아갈 껍질 마련해뒀다고 현재의 자신이 형편없이 깨지고 박살나는 것을 좋아할 리 없는 거다.
절대검신 놈이 자신처럼 다시 살아 돌아올 리 없지만, 그래도 무인이라면 언제나 준비는 제대로 하고 있어야만 하는 것이다.
“폐하. 방금 강서성에 나가 있는 환희궁주가 보낸 물건이 도착했나이다.”
드문드문 전해지는 반가운 소식이다.
“오냐! 지금 간다.”
음양신마는 즉시 일어나 지하 연무장으로 향했다.
본디 지하 뇌옥이었던 곳.
그 중에서도 지하 이층에 새로운 공간을 추가한 후 필요한 약초와 재료들을 모아 놓았다.
“푸흐흐. 얼추 우러났군.”
흡족한 듯 음양신마가 웃음을 터뜨렸다.
어지간한 장정 서넛은 족히 들어갈 만큼 커다란 항아리가 화로에 올려 있었다.
모자란 동남동녀의 정혈을 보충할 귀한 것들이었다.
산삼과 같은 영약 삼십 종과 동물의 피, 그리고 인근 공동묘지에서 채취한 시독과 경면주사와 함께 이름 모를 주술적인 재료들이 뒤섞여 부글부글 끓고 있었다.
“폐하. 여기 대령했나이다.”
“오오! 왔구나.”
음양신마가 반색했다.
축융궁 출신 무관의 인도로 이제 지학이나 됐음직한 사내 아이 두 명이 다가왔다.
“십사 세. 자시생인 것으로 확인 끝났습니다, 폐하.”
무관이 두 아이를 향해 눈을 부라렸다.
“폐하시다. 어서 인사드리지 못할까!”
“폐, 폐하. 저는…….”
“이, 인사드립니…….”
“됐다. 인사는 무슨!”
오체투지와 함께 주입시킨 것이 빤한 극상의 공경을 올리려던 소년들을 음양신마가 만류했다.
‘폐하께서 참 자상하신데?’
‘소탈하시구나.’
두 소년이 그런 착각을 할 때였다.
음양신마가 축융궁 무인을 퉁명스럽게 나무랐다.
“잡아먹어야 하는데, 고를 멋쩍게 만들려는 게냐?”
흠칫.
두 소년은 자신들의 귀를 의심했다.
‘방금 뭐라고 하신 거야?’
‘내, 내가 잘못 들었겠지?’
알 수 없는 예감에 절로 몸이 떨려왔지만 누구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죄, 죄송. 아니 송구하옵니다, 폐하.”
“됐고, 어서 나가서 더 빨리 더 많이 잡아오기나 해. 알아들었느냐?”
“예, 폐하.”
묵직한 답과 함께 무관이 뒷걸음질 쳐 나간 후 음양신마가 소년들을 향해 돌아섰다.
“크흐흐.”
나직하게 터지는 음양신마의 웃음소리.
‘서, 설마?’
‘아니야. 아닐 거야.’
바들바들 떨며 소년들은 자신들의 생각이 상상에 불과하길 빌고 또 빌었다.
바로 그 순간.
스각!
***
음양신마가 간만의 운공요상 돌입에 즐거워할 때 장마종의 얼굴은 처참하게 일그러지고 있었다.
‘맙소사. 개미굴의 주인이 황룡패주였다니!’
그제야 비로소 음양자의 작업장이 무저갱이라도 되는 듯 고수들을 집어삼킬 수 있었던 힘의 근원이 용무린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저 괴물이 다 잡아먹은 거야. 틀림없어.’
상대가 어지간해야 대항할 의지라도 품는 거다.
황룡패주 용무린은 전대 신마를 글자 그대로 소멸시켜 버렸던 장본인이었으며 뒤이어 나타났던 음양신마와도 팽팽히 맞섰던 초인이었다.
‘음양신마시여. 대체 이 일을 어떻게 해야 합니까?’
정신이 다 아득해질 때 실실거리며 웃던 용무린의 얼굴이 얼음장처럼 차갑게 굳었다.
한마디 툭 내뱉었다.
“덤벼!”
흠칫!
말 한마디에 이렇게 몸이 떨릴 수가 없다.
‘제길. 어쩌지?’
갈팡질팡.
어찌해야 할 바를 모르겠다.
덤비면 죽을 것 같고, 책임자가 되어 물러날 수도 없는 상황이다.
‘젠장. 덤비면 저놈에게, 물러나면 음양신마님께 죽게 생겼구나.’
그제야 판단이 바로 섰다.
‘좋아. 기왕 죽을 목숨, 한 평생 닦아 온 무공 시원하게 한 번 펼쳐보고 죽기라도 하자.’
마음이 홀가분해지자 개미굴에서 꾸역꾸역 밀려 나오는 사람들의 얼굴을 보면서도 그다지 놀라지 않았다.
이미 죽은 것으로만 알았던 만사력에 유령궁주 추강원과 수하들, 거기에 혈마궁과 얼마 남아 있지 않던 환희궁 소속 여인들은 물론이고 축융궁 소속 마인들까지 골고루 섞여 있었다.
‘어라? 왜 안 죽었지?’
앙숙이었던 놈들까지 모두 끈끈해진 이유는 또 뭘까?
갑자기 여러 가지가 궁금해졌다.
기세 등등 들어간 놈들을 대체 무슨 수로 저렇듯 얌전히 만들었을까?
반짝.
그 순간 수호대주의 보고가 번득 스쳤다.
검은 일색의 병을 만독궁이 아닌 작업장으로 가지고 온 만독대의 마인.
‘서, 설마. 혈고?’
그 짐작이 맞은 것일까?
씨익.
잠자코 지켜보던 용무린이 돌연 장난기 어린 목소리로 물어왔다.
“싸우기 싫으면 평화롭게 해결하는 방법도 있긴 하지. 들어보고 싶냐?”
“혈……고?”
짝짝짝.
“오! 명석한데?”
“…….”
“그러면 어떻게 해야 살 수 있는지 잘 알겠지?”
“그걸 말이라고!”
장마종이 고함을 버럭 질렀다.
살고 싶긴 하지만 혈고를 몸에 지닌 채 누군가의 의지에 조종당하는 꼭두각시로 살고 싶진 않다.
“그건 네 생각이고.”
용무린은 의미심장한 시선으로 장마종 주변에 흩어져 있던 내원 고수들을 향해 외쳤다.
“마지막으로 기회를 준다. 죽을래? 아니면 살래?”
용무린의 얼굴을 알고 있는 마인과 짐작만이라도 할 수 있는 마인들부터 웅성거림이 시작되었다. 주변으로 빠르게 번져갔다.
용무린의 따뜻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괜히 먼저 나섰다가는 전투에 앞서 기강을 잡는답시고 윗대가리 놈들이 등을 베어버릴 수도 있겠지. 알아. 그러니 한 가지 방법을 일러주지.”
“닥쳐라, 이놈!”
장마종이 발작을 했다.
하지만 어찌된 영문인지 내공까지 가득 실린 그의 외침은 주변에만 맴돌았고 뻗어나가지 못했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용무린의 목소리가 계속되었다.
“전투가 개시되면 말이야.”
“닥쳐! 닥치라고!”
마음만 같다면 벌써 달려들어 목이라도 뎅겅 베어 버렸을 터인데, 핏대를 세우며 고함을 지르는 것이 무색할 정도로 장마종의 발은 땅에 붙어 있었다.
움직이면 죽는다는 것을 알기에 본능적으로 움직이지 못하는 것이었다.
“전투가 개시되면 달려드는 척하다가 불시에 내원 경계선까지 물러나. 그런 후 무장 해제하고 얌전히 내가 오기를 기다려. 알아들었나?”
“황! 룡! 패! 주-우!”
팔십 평생 무공을 닦아온 무인의 자존심이 기어이 두려움을 이겨냈다.
스파-앙.
힘찬 외침을 끝으로 장마종이 땅을 박찼다.
훌쩍 날아오른 후 떨어져 내리며 어지러이 양손을 흔들었다.
버언쩍.
투명하리만큼 맑은 핏빛이 튀어나왔다.
혈옥신장.
장마종을 오마종의 일원으로 올라서게 만들어 준 무서운 파괴력이 용무린의 목숨을 노렸다.
굼실. 후욱.
슬쩍 내딛는 발걸음에 용무린의 신형은 거짓말처럼 장마종과의 거리를 0으로 만들었다.
혈옥신장이 파괴력을 채 발휘하기도 전이다.
용무린은 불사신기를 한 움큼 휘감아낸 손으로 장마종의 장력을 코앞에서 받아 쳐버렸다.
쿠와아앙. 콰자작.
강렬한 폭음과 함께 혈옥신장을 펼쳐낸 장마종의 오른팔이 수수깡처럼 부서졌다. 힘없는 살덩어리가 되어 기괴한 방향으로 덜렁거렸다.
“크아악!”
황망히 내뱉는 비명과 함께 힘없이 뒤로 밀리는 장마종.
바로 짓쳐들면 장마종의 목숨을 손쉽게 취할 수도 있으련만 용무린은 더 복잡한 길을 택했다.
“시작해 볼까? 공격!”
나직한 목소리였지만 혈고로 인해 종속된 개미굴 출신 전사들의 귀에는 너무나도 똑똑히 들렸다.
“주인님의 명령이 떨어졌다. 공격!”
“공격하라!”
“가자, 만독궁의 전사들이여-!”
“주인님께 우리의 존재 이유를 보여드리자-아!”
“와아아!”
파도일까?
아니, 차라리 해일에 가깝다.
삼천여 명에 가까운 무인들의 일제 공격은 공중에서 보면 해일과 같은 거대한 너울이 되어 내원 소속 무인과 수호대를 향해 밀려갔다.
물론 반대의 움직임도 있었다.
“저놈들은 우리 형제들이 아니다.”
“혈고에 종속된 놈들이다. 사정 볼 것 없이 쳐라.”
“다 죽여 버려-엇!”
“우와아아!”
“차아앗!”
혈고가 어떤 마물인지 너무나도 잘 알기에 그들의 행동에는 한 치의 주저함도 없었다. 마치 무림맹의 무인이나 생사대적을 만나기라도 한 듯 살기를 뿜으며 거침없는 살수를 펼쳤다.
하지만 절대적인 열세였다.
고수들의 숫자는 내원을 제외한 거의 모든 신교 마인들이 포함된 용무린 쪽이 몇 배나 더 우위였고 전투 개시 전에 용무린이 슬쩍 살길을 터주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이대로 죽기 싫어.’
‘제기랄. 혈고에 감염이 되면 뭐가 어때?’
‘종속된다고 바로 죽는 건 아니잖아. 주인이 죽이려고 들지만 않는다면 늙어죽을 수도 있단 말이야.’
스파아-앙! 휘스슷.
용무린의 말을 떠올린 상당수의 마인들이 일제히 뒤를 향해 신법을 펼쳤다.
“이, 이런 개자식들!”
“돌아와!”
“어서 싸우란 말이다, 이 비겁한 놈들아!”
수호대 조장급 이상 마인들과 내원에서도 책임자급이었던 마인들이 악을 썼다.
그러나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살고자 하는 욕구에 대열 이탈은 점점 더 가속화 되었고 개미굴 출신과 맞닥뜨릴 때는 결국 초라한 수준인 오백여 명 남짓으로 줄어들어 있었다.
‘굳이 죽일 것 없이, 저 녀석들까지 다 혈고로 종속시키면 좋겠지만 이젠 어쩔 수 없다.’
장마종이 불회곡의 나머지 고수들을 몽땅 휘몰아 왔으니 소란은 당연한 일, 아무리 폐관수련을 하고 있다지만 검마종이 모를 리 없는 것이다.
‘무위가 높아지면 높아질수록 감각은 그만큼 더 예민해지고 날카로워지는 법.’
위기라고 느낀 놈이 다른 곳으로 숨어버리기 전에 어서 일을 마무리 지어야 한다.
“장마종! 마지막으로 멋지게 갈 수 있는 기회를 준다. 네가 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초식을 펼쳐라.”
죽는다.
다음에 서로 공격을 주고받는 순간 자신은 반드시 죽을 것이다.
변치 않는 그 사실을 직감한 순간 장마종은 용무린이 말한 멋지게 갈 수 있는 기회라는 것이 무엇인지 깨달을 수 있었다.
“크흐! 고맙군.”
멋진 죽음.
한때나마 천하를 진동시킨 신교의 고수 장마종에게 이보다 더 좋은 배려가 어디에 있을까?
“우와아아악!”
장마종은 사력을 다해 내공을 끌어 모았다.
그야말로 필생의 공력.
두 번 다시 펼칠 수 없음을 알기에 젖 먹던 힘까지 다해 단전을 쥐어짜고 쥐어짜 하나 남은 손에 담았다.
부우우웅. 버언쩌저적.
벌 떼 소리가 이는가 싶더니 이내 맑고 투명한 혈광이 장마종의 손아귀에서 작열했다.
혈옥신공.
극의. 혈옥파멸신강.
“간다-앗!”
악을 쓰며 손을 밀어나는 순간.
투화-악!
인간의 청력으로는 잘 들리지도 않을 정도의 파공음을 동반한 장강의 빛 무리가 용무린을 향해 밀려갔다.
모든 방위에서 장강이 쏟아지는 듯했다.
하지만 그 모든 빛 무리의 종착지는 용무린 한 사람!
중심에 서서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마치 밤하늘에 터진 폭죽의 불똥이 나를 향해 밀려오는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멋졌다. 진심으로.
‘걸맞은 모습을 보여주지.’
휘우우웅. 버언쩍.
용무린의 손에 황금빛 찬란한 심검 하나가 솟았다.
혈공파멸신강을 향해 슬쩍 뻗어낸 후 읊조렸다.
“그릇된 세상 한가운데를 가르나니…….”
진심을 담아낸 고려의 옛 법이 오롯이 제 위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키이우우웅. 트드드드.
불사신공이 집중됨에 따라 공간이 서서히 비틀렸다.
하늘과 땅이 덜덜 떨며 몸살을 앓았다.
“이것은 하늘이 내리는 벌이다!”
말과 동시에 용무린의 손이 스윽 짧게 위에서 아래로 그어졌다. 황금빛 찬란한 심검이 따라 움직이며 허공에 한줄기 선을 그려내었다.
고려의 옛 법.
비홍검.
일 초. 가온누리 칼벼락.
버언쩌저저-적.
하늘 끝에서 땅 끝까지 이어지는 선을 따라 모든 것이 둘로 나뉘기 시작했다. 아름답게 하늘을 수놓은 혈옥파멸신강의 빛과 공간마저도…….
‘크흐. 멋지구나!’
장마종의 입가에 환한 미소가 걸렸다.
비록 이대로 죽을 테지만 한 사람의 무인으로서 이보다 더 화려하고 행복한 죽음은 없을 터, 미련을 모두 버리고나니 비로소 용무린의 진심 어린 배려가 가감 없이 고맙게 느껴졌다.
키릭. 스르르륵.
살얼음에 금이 가듯 그어진 공간의 실금을 따라 한 쪽이 미끄러져 내렸다.
마치 불사대천검과 쌍둥이처럼 보일 정도.
그 차이점이 무엇인지 알 수 없는 장마종은 황홀한 표정으로 둘로 나뉠 뿐이었다.
파사삭. 파사사삭.
소멸되는 공간을 따라 함께 소멸되어 가는 장마종의 뇌리에 문득 이런 생각이 스쳤다.
‘그냥 혈고에 종속되었어도 좋지 않았을까?’
무인에게 이 정도로 성의 있는 최후를 내려주는 주인이라면 그저 암중에 숨어 자신들을 이용해오기만 한 음양신마보다는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선뜩하고 화끈하며 부드럽고 날카로운 그 어떤 힘이 자신의 정수리에서부터 사타구니까지 훑고 지나간 것이 느껴진 거다.
“고, 고맙…….”
파사삭. 후욱.
마지막 인사도 채 끝내지 못하고 장마종은 조각나 바스러지는 공간과 함께 소멸되어 버렸다.
“잘 가라. 마음은 받아주지.”
장마종의 마음을 잘 알고 있다는 듯 짧게 고개를 끄덕여 보인 용무린의 시선이 내원으로 향했다.
줄을 지어 세워진 수백여 채의 전각.
그 뒤에 우뚝 솟은 십만대산의 암벽 한 줄기.
바로 그 아래 암동에 조사동인 천마동이 존재했고 그 안에 검마종이 있다.
“기다려. 내가 간다.”
이젠 더 기다릴 필요도 없다.
둥실.
용무린의 신형이 허공으로 떠올랐다. 소리도 없이 조사동을 향해 미끄러져 갔다.
“무명인. 광마인. 나를 따르라.”
“크르르.”
“크아아!”
스파-앙. 스파-앙. 휘스스스.
***
딸라-앙!
환혼령이 큰 소리로 울었다.
“또 뭐야?”
심상수련에 여념이 없던 검마종의 눈이 번쩍 떠졌다.
날카로운 시선으로 주변을 훑었다.
짜증이 가득한 얼굴.
천마신공과 천마삼검에 대한 깨달음을 거의 다 수습해 가는 도중에 삼매가 깨어지니 짜증이 일지 않으려야 않을 수가 없었다.
“……!”
검마종의 몸이 흠칫 굳었다.
전과는 다르게 확실한 누군가의 실체가 자신 앞에 나타나 있었기 때문이었다.
“심상수련 삼매에 들었던 터라, 아직 밖의 일은 감지하지 못했던 모양이지?”
무슨 소리야 대체?
“네놈은 누구냐?”
검마종은 짜증이 가득한 목소리로 다시 물었다.
대답대신 천마동 밖에서 자지러지는 비명소리가 흘러들어오기 시작했다.
“과, 광마인이 어찌!”
“크아악!”
“커헉!”
광마인의 공격이라는 것에 상당히 놀란 모양이었다.
검마종의 눈이 가느다래졌다. 으스스한 목소리로 사납게 뇌까렸다.
“네놈이 끌고 온 놈들이냐?”
용무린의 얼굴을 모를 리 없었지만 검마종은 설마 하면서 그렇게 질문을 했다.
틀림없이 음양신마의 손에 의해 동정호 물속에 떨어져 죽은 사내가 이렇듯 멀쩡하게 살아 돌아올 수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피식.
“뭐, 그렇다고 해두지.”
싱그럽게 웃어 보이던 용무린의 눈에 호기심의 빛이 잔뜩 어렸다.
“너, 그나저나 상당히 특이한 상태로구나.”
“……?”
이번에는 검마종이 고개를 갸웃했다. 용무린의 시선이 적인 자신의 눈을 바라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랬다.
용무린은 검마종이라고 하는 육신이 아니라 그의 본질을 꿰뚫어 보는 중이었다.
“보인다. 보여.”
“무슨 헛소리냐?”
검마종이 고함을 버럭 질렀지만 용무린은 개의치 않았다. 계속해서 하고 싶은 말을 이었다.
“너 말이다. 핏물을 흠뻑 뒤집어 쓴 적이 있지?”
당연한 일 아닌가?
“나 검마종이 핏물을 뒤집어쓰지 않았다면 거짓말일 터, 셀 수가 없다. 그런 당연한 일을 묻는 이유가……?”
당당하게 외치던 검마종의 목소리가 잦아들었다.
순간적으로 자신의 얼굴에 붉은 핏물을 왈칵 뿜어냈던 음양신마의 얼굴이 떠올랐던 것이다.
괴이했다.
‘왜 갑자기 그 생각이 떠오른 거지?’
검마종의 내심을 다 읽고 있다는 듯 용무린이 가볍게 말을 이었다.
“너 말이다……. 네 얼굴에 핏물로 그려진 기이한 문양이 살아 꿈틀대고 있는 걸 알고는 있냐?”
사실이었다.
본인도 느끼지 못하고 있었지만 용무린의 눈에는 하나도 빠짐없이 다 보였다.
음양신마가 토해낸 각혈이 얼굴을 타고 흘러내린 후 가슴에서부터 알 수 없는 기하학적인 문양을 그려 내었고 얼굴까지 치솟아 완전히 뒤덮고 있었다.
‘저 문양이 녀석의 참나를 완전히 에워쌓았어.’
거의 다 잠식된 상태다.
어떤 힘이 스며들었는지 모르겠지만 문양은 검마종의 의식 속으로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이질적인 기운이 점과 같은 형태로 모여 있어.’
연원을 알 수 없는 기묘한 느낌의 기운 덩어리였다.
‘그런데 내가 이와 같은 이질적인 기운 덩어리를 어디선가 한 번 꼭 느껴본 것 같은데 말이야…….’
틀림없다.
분명히 보았고 또 느껴봤다.
문제는 그게 어디의 누구 것을 보고 또 느껴본 것인지가 생각이 나지 않을 뿐이다.
꿈틀꿈틀.
완전히 뿌리를 내려 고정된, 마치 점처럼 생긴 그곳에서부터 다시 가지를 뻗어낸 피로 이뤄진 문양들은 맥동하듯 활기차게 움직여 녀석의 ‘참나’를 포위했다.
‘내가 너무 늦었구나.’
그렇게 느낀 순간이었다.
딸라-앙. 딸랑. 딸라-아-앙.
환혼령이 연거푸 울음을 토해냈다.
흠칫. 퍼득.
검마종의 몸이 종소리에 반응했다. 환혼령이 울릴 때마다 푸들푸들 크게 떨렸다.
퍼억. 퍼퍼퍽.
검마종의 ‘참나’를 에워싸고 있던 음양신마의 피와 불사마력이 환혼령의 종소리에 맞춰 작살처럼 꽂혔다. 완전히 연결되었다.
반짝.
검마종의 눈빛이 완전히 바뀌었다.
이전까지는 용무린의 말에 약간의 동요를 보였다고 한다면 지금은 정반대였다. 그 무슨 말에도 흔들리지 않을 부동심으로 씹어 뱉었다.
“덤벼라, 독고황.”
***
일각 전.
성도 장사의 승선포정사사 지하 연무장.
이제나 저제나 자시 생 동남동녀의 정혈이 도착하기만을 기다리던 음양신마의 전신에서 생사대적을 대하는 듯한 기운이 뿜어졌다.
딸라-앙.
심혼을 울리는 소리 때문이었다.
“서, 설마?”
음양신마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무서운 눈으로 전면을 쓸어 보았다.
보이는 것은 아직 아무것도 없었다.
외롭게 타오르고 있는 횃불 몇 개가 전부일 뿐 적막한 연무장은 아직 어둠에 휩싸여 있었다.
바로 그 순간,
딸라-앙. 딸랑. 딸라-아-앙.
심혼을 울리는 소리가 연속해서 귓가에 들려왔다.
“환혼령!”
틀림없다. 검마종의 손에 쥐어 불회곡으로 보낸 그 귀물이 요란하게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오싹!
갑자기 등줄기를 타고 소름이 쫙 돋았다.
“설마……?”
불길한 생각이 치미는 순간 음양신마는 입술을 콱 깨물어 피를 내었다. 입안에 가득 고인 피를 허공으로 길게 뿜어내었다.
푸우웃!
가늘게 뿜어진 피가 안개처럼 연무장 허공에 떠올랐다가 다시 떨어져 내리며 음양신마의 얼굴과 몸을 적셨다.
“오옴! 마라도르마라 오옴!”
사이한 주문과 함께 음양신마가 정신을 집중하며 주문을 외웠다.
버언쩍.
‘되었다!’
음양신마의 눈에 불꽃이 튀었다.
자신이 걸어둔 대법이 발동한 것이 고스란히 느껴진 것이었다.
푹푹푹.
그때가 바로 핏물로 이뤄진 문양이 검마종의 ‘참나’에 틀어박힌 순간이었다.
‘보인다. 놈이…….’
천안통은 아니었지만, 삼천 리는 족히 떨어져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검마종의 눈을 통해 똑똑히 보였다. 용무린의 모습이…….
‘너로구나. 독고황.’
음양신마의 입술이 사이하게 뒤틀렸다.
‘어떻게 된 영문인지는 모르겠지만, 너무 늦었다. 피할 수가 없어.’
용무린이 그러했듯 그 역시 너무 늦었다고 안타까워했다.
싸워야만 한다. 껍질을 움직여서.
애써 만들어둔 껍질이 아까워 미칠 지경이긴 하지만.
‘어쩔 수 없다.’
드문드문 받아들이기는 했지만 자시 생 동남동녀의 정혈을 이미 백여 명 가깝게 빨아들였다. 저놈을 버린다고 해도 조금만 더 모으면 새로운 껍질 하나 정도는 충분히 다시 마련할 수 있을 정도다.
‘기왕지사 이렇게 된 일, 네놈이 무슨 힘으로 다시 살아 돌아왔는지 보아 주마.’
껍질로 완전히 옮겨간 것이 아니라 펼칠 수 있는 것은 고작 천마삼검과 규천마력에 불과하지만 그래도 맞서 싸울 것이다.
마음을 굳힌 역천자 음양신마가 으스스한 목소리로 으르렁댔다.
“덤벼라 독고황.”
***
반짝.
용무린의 눈빛이 매섭게 빛났다.
한 순간에 뒤바뀐 의식의 주체를 꿰뚫어 본 것이다.
“음양신마!”
그놈이었다.
완전히 오염된 후 뒤바뀐 검마종의 ‘참나’가 보였다.
‘참나를 잠재우거나 놈의 마력으로 가린 후 껍질을 통제하는 것이 아니었구나.’
그것은 더 이상 검마종의 ‘참나’가 아니었다.
놈이 말했던 그대로였다.
잡아먹는다.
대체 어떤 방법을 썼는지는 모르겠지만, 말 그대로 역천자 음양신마는 검마종의 ‘참나’를 집어 삼켰다. 그런 후 흉내를 내고 있었다.
‘나 역시 전생에 당할 뻔한 일.’
실로 놀라운 능력이 아닐 수 없었다.
‘놈의 참나까지 소멸시킬 수 있을 것인지 수련을 한다고 생각하면 되겠다.’
휘우우웅. 버언쩍.
용무린의 손에 심검 한 자루가 솟아올랐다.
그 순간 검마종이 먼저 짓쳐들었다.
후욱.
공간을 접듯 다가서며 손을 내밀었다. 무릎 위에 놓여 있던 검이 놀라운 속도로 날아와 잡혔다. 순간적으로 빛기둥과 같은 검강을 뿜었다.
천마삼검 일초 천마제천.
버언쩍.
어둠에 휩싸여 있던 암동이 대낮처럼 밝아졌다. 그 빛 아래 놀랍도록 혼탁한 어둠이 보였다.
규천마력.
천마신공이 극성에 이르면 얻을 수 있는 진마의 힘으로 작은 덩어리 한 조각이 검강 그 이상의 파괴력을 품은 채 용무린을 향해 쏟아지고 있었다.
굼실. 스슷.
허깨비를 보았는가?
가볍게 내딛는 발걸음 한 번에 용무린은 허깨비가 되었다. 도저히 피할 수 없을 것 같은 규천마력의 소나기를 비켜냈다.
그리고…….
후웅. 타아아-!
부드럽게 내밀어진 심검의 하늘거림에 규천마력의 촘촘한 그물이 쭉 찢어졌다.
쩌어어-억!
조사동이 들어앉은 십만대산의 암벽 전체가 정확히 둘로 쪼개졌다.
그 거대한 힘 최전방에 있던 규천마력은 어떻게 됐을까?
파사삭. 파사사삭.
힘없이 바스러져 소멸되었다.
그 뒤에 버티고 서 있던 검마종의 검이 가루가 되어 스러졌고 그 검을 들고 있던 손목까지 덩달아 어디론가 날아가 사라졌다.
“크헉!”
삼천 리 거리에 도사린 음양신마가 비명을 지를 정도!
‘불사마력이어야만 해! 규천마력 정도로는 저놈의 힘을 막을 수가 없어.’
다시 한 번 절실히 느껴진다.
녀석의 불사신공은 모든 마공의 정점에 서 있는 규천마력으로도 감히 맞상대가 불가능하다. 속절없이 깨지고 부서져 녹아 없어진다.
검법은 또 어떤가?
신교를 세운 천마조사가 마선에 오르며 남기고 간 것이 바로 천마삼검인데, 당최 녀석의 간단한 한 수를 감당할 수가 없다.
‘내가 아는 것과 동일한 고려의 옛 법이 아니야.’
고려의 옛 법은 본디 절대검신의 것, 하지만 지금 보니 녀석의 검법은 한층 더 발전했다.
자신이 잘 알고 있던 가온누리 칼벼락이 아니었다.
보다 부드럽다. 더 자유롭고 날카롭다.
공간을 쪼개던 파괴력은 또 어떤가?
삼천 리라고 하는 물리적인 공간 저편에 숨어 있는 자신의 심령에 충격을 줄 정도로 강력해졌다.
‘대체 어떻게 저런 위력을 보일 수 있는 것일까?’
궁금했지만 시간은 마냥 자신의 편이 아니었다.
“흐아아-압!”
사력을 다해 심검을 일으켰다.
소용없는 줄은 알지만 천마삼검을 버리고 고려의 옛 법으로 갈아탔다.
‘아깝지만 아낌없이 쓴다.’
완전히 옮겨가지 못한 상태에서 고려의 옛 법을 사용하기 위해 지금껏 흡수한 자시 생 동남동녀의 정혈을 아낌없이 매개체로 이용했다.
그 덕에 간신히 성공할 수 있었다.
버언쩌저저-적.
심검에서 가온누리 칼벼락이 피어올라 용무린의 허리를 쓸었다.
“크흣!”
용무린의 입꼬리가 비틀려 올라가는 모습이 왜 이렇게 자존심이 상하는지!
“여긴 답답하다. 밖으로 나가자.”
휘슷. 터어어-엉.
용무린은 심검을 살짝 흩뿌려 검마종의 칼벼락 방향을 바꾸었다.
쿠와아아앙.
방향이 바뀌며 흔들렸는지 깔끔하게 쪼개져야 할 암벽에 구멍이 뻥 뚫렸다. 용무림은 굼실 한 번 발을 놀려 그 사이를 빠져나갔다.
“이노-옴!”
스파-앙.
검마종에 빙의한 음양신마가 사납게 으르렁대며 뒤로 바짝 따라 붙었다.
***
조사동 밖의 전투는 이미 끝이 나 있었다.
무명인 오십오 명과 광마인 삼백 명 앞에 수호대 소속 수신호위 백 명은 모래성과 같았다. 무명인과 광마인으로 이뤄진 파도 한 번에 쓸려 나갔다.
모두가 용무린에 의해 새롭게 재탄생한 존재들.
깃들어 있던 온갖 사이한 무공은 그대로였지만 그것을 움직이는 주체가 용무린의 의식체 작은 조각으로 바뀌었으니 수신호위 따위가 버틸 수가 없었다.
예전에는 팔다리가 떨어져 나가도, 배가 쭉 찢어져 내장이 흘러나오는 상황이라 하더라도 멀쩡하게 공격을 펼치는 것으로 상대의 허를 찌르는 용도였다면 지금은 산전수전 다 겪은 무인처럼 행동했다.
무명인들은 특히 더 심했다.
본디 지니고 있던 힘이 통제할 수 없을 정도로 막강했었던 만큼 용무린의 의식체 조각이 심어진 순간 어지간한 초절정 수준의 무인 정도로 강력해졌던 거다.
콰르르릉.
화산 폭발하듯 굉음이 터지더니 백여 장에 이르는 거대한 암벽 한쪽 면에 구멍이 뻥 뚫렸다.
휘슷.
그 안에서 용무린과 검마종이 차례차례 튀어 나왔다.
“이노-옴!”
휘우웅. 버번쩌저적.
검마종이 악을 쓰며 심검을 뽑아 칼벼락을 올려 쳤다.
허공에서 빙글 몸을 돌린 용무린이 그대로 뚝 떨어져 내리며 부드럽게 심검을 그어 내렸다.
파카아아-앙. 파사삭.
검마종의 심검과 함께 왼손마저 팔꿈치까지 허무로 돌아갔다.
투웅.
화살 쏘아지듯 용무린의 몸이 공간을 단축해 검마종 앞으로 자리를 옮겼다.
검마종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크아합!”
검마종이 이를 악물었다. 고함을 질렀다.
버언쩍.
검마종의 얼굴 앞에 심검 한 자루가 불쑥 생겨나 도도한 빛을 쏟았다.
이래서 심검이 무섭다.
양손을 잃었어도, 전투 의지만 남아 있다면 언제든 마음의 검을 세울 수 있는 거다.
하지만,
휘슷.
용무린의 손이 한 번 휘둘러지는 순간 사기그릇 깨어지듯 허무하게 깨져 버렸다. 바람에 흩날리는 먼지처럼 흩어져 사라졌다.
와락.
용무린이 검마종을 목줄을 잡아챘다.
불사신기를 천돌혈로 밀어 넣은 후 전신의 혈도를 순간적으로 봉쇄해 버렸다.
“커헉!”
외마디 비명과 함께 검마종의 몸이 그대로 굳었다.
용무린이 검마종의 목줄을 잡아 앞으로 끌어당겼다. 독하게 빛나는 놈의 눈을 지그시 들여다보았다.
반짝.
용무린의 눈에 불똥이 튀었다.
‘보인다.’
울컥. 울컥.
검마종의 ‘참나’를 집어 삼켜 완전히 다른 어떤 것으로 거듭난 기이한 존재가 똑똑히 보였다.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저 존재를, 검마종의 의식 저 깊은 곳에 숨어들어 ‘참나’를 잡아먹고 완전히 다른 어떤 것으로 거듭난 저 존재를 소멸시킬 수 있어야만 역천자 역시 완전히 소멸시킬 수 있다는 사실을…….
‘가능할까?’
우선 시도해 볼 것은 불사대천검이다.
용무린은 황금빛 찬란한 심검의 끝을 검마종의 뇌가 있는 부분으로 세웠다.
‘검마종의 목숨을 노리는 것이 아니야.’
자신이 노리는 것은 바로 검마종의 ‘참나’를 먹고 거듭난 기이한 존재. 흔들린 없는 시선으로 놈을 노려보며 심검을 푹 찔렀다.
퍼어어억.
심검이 검마종의 머리에 틀어박혔다.
하지만 검마종의 머리는 갈라지지도 쪼개지거나 터지지도 않았다.
멀쩡했다.
마음의 검이 부린 조화였다.
심검은 놀랍게도 육체가 아니라 검마종의 의식을 파고들었다. 완전히 다른 어떤 것으로 거듭나 꿈틀거리는 존재의 중앙에 틀어박혔다.
-크아아아!
괴이한 존재가 괴로워 몸부림치는 것이 느껴졌다.
하지만 놀랍게도 죽거나 소멸하지는 않았다.
‘이래도?’
심력의 소모가 이만저만 아니었지만 용무린은 심검을 일으켜 검마종의 의식 속에서 불사대천검을 펼쳐 버렸다.
버언쩌저적.
형언할 수 없을 만큼 강렬한 빛의 춤사위가 검마종의 심상에서 펼쳐졌다. 꿈쩍도 하지 않고 있는 괴이한 존재를 수도 없이 베었다.
-끄아악. 크아아-악!
고통에 겨운 것일까?
아니면 이런 처지로 몰린 것에 분노하고 있는 것인가?
놈이 내지르는 괴성이 청각을 뛰어 넘어 용무린의 심령을 직접 울렸다.
‘불사신공 가득한 불사대천검으로도 소멸시킬 수 없어.’
그렇다면 남은 방법은 한 가지뿐이다.
용무린은 심검도, 불사신기도 모두 거둬들였다.
그런 후 자신의 ‘참나’에 집중했다.
용무린의 ‘참나’가 그 거대한 존재감을 드러냈다.
윤회의 사슬을 끊어낸 존재!
타인의 안녕과 행복에 기여하기 위해 등선을 잠시 멈추고 그저 경극 한 편을 보고 있을 뿐인 용무린의 ‘참나’가 검마종에 깃들어 있는 그 존재를 직시했다.
파르르.
비로소 놈이 겁을 집어 먹었다.
혼전
1
참으로 신기한 일이었다.
용무린이 뭘 어떻게 한 것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검마종의 ‘참나’를 물들이고 끝내 집어 삼켜 변화한 괴이한 존재는 괴로운 듯 비명을 터뜨리며 점점 쪼그라지기 시작했다.
-캬아아.
‘불쌍하구나.’
상처 입은 짐승을 보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검마종의 ‘참나’에서 이미 전혀 다른 그 무엇으로 변화된 존재이기에 뭘 어떻게 해줄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저 측은한 시선으로 볼 뿐이었다.
그런데 쪼그라지는 속도가 점점 더 가속화되었다.
용무린이 진심으로 측은해하면 할수록, 그 존재를 불쌍해하면 할수록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공격으로 치환되는 것처럼 반응했다.
-끄아아악. 캬아악.
‘아! 그렇구나!’
용무린은 그제야 비로소 이 현상에 대해 오롯이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나그네의 옷을 벗긴 것은 강풍이 아니라 따사로운 햇살이었지.’
바로 그것이었다.
새롭게 거듭나 알 수 없는 무엇인가가 된 존재는 모든 악의와 적의를 비롯한 부정성을 자양분 삼아 힘을 키워나가는 존재였던 것이다.
‘그런데 바람을 통해, 그러니까 적의를 가지고 없애려고만 들다니.’
그러니 소멸시킬 수가 없었던 것이다.
더불어 진심으로 불쌍하다는 생각이 가슴을 채웠다.
‘가엾은 것.’
빛은 어둠의 부재일 뿐인데 저렇듯 온갖 적의를 자양분 삼아서라도 이 세상에 영향력을 행사하려들다니.
한마디로 짠했다.
‘더는 고통 받지 말거라.’
그럴 필요가 뭐가 있겠나?
어차피 어둠은 빛의 부재일 뿐이어서 ‘참나’가 빛을 뿜으면 사라지는 것이 순리인 거다.
-캬아아아-악!
마지막 외마디 비명이 끝이었다.
검마종의 ‘참나’를 삼켜 거듭난 존재는 흔적도 없이 깨끗이 사라져 버렸다.
‘사라졌다. 소멸한 거야.’
용무린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드디어 역천자 음양신마를 찾아가 일전을 벌일 때가 돌아온 것이다.
***
“크아악!”
처절한 비명소리와 함께 음양신마가 나뒹굴었다.
검마종에게 심어 놓았던 의식체의 일부가 소멸당하며 충격을 넘겨받은 것이다.
특히 검마종과 연결이 되어 간접적이긴 하지만 직접 싸운 것이나 마찬가지였기에 심령에 입은 충격과 상처는 더 클 수밖에 없었다.
“이놈! 이 죽일 노-옴! 크으윽.”
욕설을 내뱉다가도 머리를 쥐어 싸고 쓰러졌다.
연무장 바닥을 마구 뒹굴었다.
“도, 동남동녀. 자시 생 동남동녀를 빨리 데려와-아!”
우르릉.
승선포정사사를 통째 뒤흔드는 광포한 떨림.
삼공과 삼고를 비롯해 축융궁과 환희궁도가 혼비백산 놀라 자시 생 동남동녀 수급을 위해 밖으로 뛰쳐나갈 때 음양신마는 두려움에 떨었다.
“어떻게, 대체 어떻게 그게 가능했지?”
검마종에 심어 놓은 자신의 분신이 소멸 당했다.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마선이 되어 등선을 할 때 뽑아낼 수 있다는 의식체를 나누어 만들어 놓는 것이 바로 분신이었고 그것은 물리적인 실체가 없는 것이니 타격을 입을 수가 없다.
“하지만 타격을 받았어. 아니, 소멸 당했어. 껍질인 검마종이 죽어버린 후 그 안에 심어 놓았던 내 분신이 되돌아오지 않았단 말이야.”
돌아와야 마땅한 것이 돌아오지 못했다.
더불어 껍질인 검마종이 죽음을 당하는 순간 본체가 받은 거대한 충격이라니!
소멸이다.
분신이 소멸당한 거다.
“껍질에 숨은 분신에 충격을 줌으로써 수천 리 떨어진 곳의 본체, 그것도 심령에 이 정도의 충격과 상처를 입힐 수 있다면 나 자신의 소멸도 가능하겠지.”
두 가지 생각이 동시에 일었다.
첫 번째는 당연히 탐욕과 본질적인 식욕이다.
자신은 지금껏 죽음 따위 두려워한 적이 없었다.
환혼대법을 완성한 후 아무리 강력한 상대를 만난다고 해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아니, 두려워할 필요가 없었다.
자신에게 있어서 죽음이란 새로운 몸으로 거듭나는 하나의 과정일 뿐, 그 과정을 통해 나보다 더 강력한 적의 모든 것을 집어 삼켜 새롭게 진화한다.
“수라멸절단의 단주 진무량이란 놈을 만났을 때도 그랬고 신교에 들어가 음양자를 만났을 때와 교주라는 놈을 만날 때도 그랬어.”
일신의 무력으로는 감히 어쩔 수 없는 강자들.
하지만 자신은 놈들을 집어 삼켰다.
완전히 새로운 나로 거듭나며 갈수록 강해졌다.
“절대검신을 만나 속절없이 뒤로 밀리면서도 얼마나 기뻐했었던가?”
단 한 번도 상상해 보지 못한 수준의 강함.
가냘픈 인간의 몸으로 대자연의 분노와 같은 수준의 거력을 뿜어내는 그를 보며 두려워하기보다는 집어 삼켜 빼앗고 싶은 탐욕이 먼저 일었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용무린의 권능이 너무나도 탐이 났다.
비록 분신에 불과하지만, 지금껏 그 어떤 방법으로도 털끝만큼의 타격을 입어보지 않았던 의식체의 조각을 소멸시켜 버린 그 힘이 너무나 갖고 싶었다.
“그 힘! 그 초월적인 힘만 가질 수 있다면 이 세상 전부를 집어 삼킬 수도 있을 텐데.”
주체할 수 없을 만큼 탐욕이 치솟았다.
집어 삼키다가 완전히 삼키지 못하고 밀려나오는 바람에 수십 년 손해를 보았지만, 다시 그런 일을 반복하는 한이 있더라도 시도해 보고 싶었다.
두 번째 감정은 너무 생소했다.
너무나 오랜만에 접한 나머지 이것이 맞나? 싶을 정도다.
“이, 이게 두려움인가?”
지금도 잘 믿기지가 않는다.
소멸이라니!
소멸을 당해 버리다니!
“마선계로 넘어갈 때나 뽑아낼 수 있다는 것이 바로 의식체. 하지만 나는 환혼대법을 통해 일부 혹은 전부를 내 마음대로 뽑아낼 수 있지.”
그래서 지금껏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여차하면 아무도 모르게 준비해 둔 다른 몸으로 갈아타 버리면 그만이니까.
하지만 용무린이 방금 보여준 능력은 달랐다.
의식체라 하더라도 소멸시켜 버릴 수 있다는 사실을, 죽음이라는 것에서 한 발 빗겨나가 있다고 자부한 자신에게 완전한 죽음을 내릴 수 있다는 가능성, 아니 실체를 맛보인 것이다.
이것은 충격이었다.
너무 오랜만에 느껴보는 생소한 감정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가늠하기가 힘들 정도.
“일단은 이 몸의 내상부터 어떻게 수습해야만 해. 검마종에 넣어둔 분신이 소멸당하며 덩달아 입게 된 심령의 상처까지 모두 다.”
녀석도 알 것이다.
분신을 소멸시킴으로써 본체 역시 소멸시킬 수 있다는 가능성을 알았으니 이제 더는 참지 않을 거다.
“오겠지. 나를 찾아서.”
곧 온다.
불회곡의 혼란을 수습하는 즉시 자신을 찾아 나서리라.
“며칠이나 걸릴까? 이레? 보름?”
검마종을 죽인 것을 시작으로 신교를 공격해 전멸시키려 했다면 수습이고 뭐고 필요 없으니 하루 이틀 운기행공만 한 후 출발할 것이다.
“그렇다면 내가 계속해서 이곳에 죽치고 있으면 안 되는 거잖아.”
용무린 그놈의 능력이라면 불회곡에서 이곳까지 이레면 충분하다.
“안 되겠다.”
음양신마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내가 직접 움직여야만 해.”
이대로 가만히 기다리고 있을 시간이 없다.
정보를 취합한 후 자시 생 동남동녀를 가장 많이 확보한 곳을 찾아 직접 움직여야 한다.
“그래야 놈과 맞닥뜨렸을 때 뭐든 시도해 볼 수 있어.”
스슷.
음양신마는 그렇게 지하 연무장을 벗어났다.
***
예상과는 달리 용무린은 바로 출발하지 않았다.
이미 손을 대기 시작했으니 불회곡을 어느 정도 수습해둬야 했기 때문이었다.
검마종을 소멸시키고 나왔을 때 작업장 앞에서 벌어지고 있던 전투 역시 마무리가 되었다.
숫자부터 이미 압도적이었고 무력은 더 말할 것도 없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부상자들은 그래도 치료해줘라. 오독문에서 혈고를 더 받아오면 그때 종속시키는 한이 있더라도 지금은 그냥 제압만 해 둬.”
“명!”
“알겠습니다, 주인님.”
신교는 빠른 속도로 모든 것이 바뀌어갔다.
삼천 명에 달하는 숫자가 용무린에게 종속되어 있었기 때문에 외원 구석에 터를 잡고 살고 있던 그들의 식솔 역시 별 무리 없이 융합할 수 있었다.
오독문에도 이 사실을 알렸다.
진화연이 뛸 듯이 기뻐하며 만독대원들을 이끌고 당당히 불회곡에 도착했다.
“잘 할 수 있지? 지금부터는 네가 신녀가 되는 거야.”
“모르겠어요. 제가 정말 잘 해낼 수 있을까요?”
달려오긴 했는데 뒤늦게 겁이 나는지 진화연이 한 발 뒤로 뺐다.
용무린이 진화연의 등을 토닥였다.
자상함 가득한 목소리로 용기를 북돋아줬다.
“걱정하지 마. 알다시피 절대적인 숫자가 혈고를 통해 나에게 종속되어 있어. 그리고 가장 중요한 혈고들의 모고가 네 몸에 있지. 잘 될 수밖에 없어.”
“그래도…….”
진화연이 몸을 배배 꼬았다.
고개를 푹 숙이고 흔들흔들 하며 꼬리를 쳤다.
어떻게든 용무린을 붙잡아 함께 하고 싶은 마음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아서라. 어림도 없다.’
제갈영령에 주약란과 양하린만 해도 머리가 아프다.
용무린은 그녀들 이외에 다른 어떤 여자에게도 곁을 내어줄 생각이 없었다.
“잘 들어. 앞으로 어떻게 해야 오독문이 신교에 완벽하게 녹아들 수 있는지, 또한 어떤 방향으로 길을 잡아야 정파 무림과 충돌이 없이 호남성 이남의 지배자로 군림할 수 있는지에 대해 알려주겠다.”
물론 가장 중요한 점도 못 박아 두었다.
모고가 그녀 안에 있다 하더라도 자신의 의지를 거스를 수 없음을 분명히 했다.
‘너야 내가 참나의 암시를 걸어두었으니 당연히 내 의지를 거스르려 하지는 않겠지.’
이것은 앞으로 늘어날 다른 유파의 인물들에게 남겨두는 일종의 경고인 거다.
‘신녀인 네가 종속의 권한을 내게 넘김으로 인해 다른 마음을 먹었던 놈들도 더는 어쩔 수 없겠지.’
신교의 교리도 조금 손을 보았다.
아리만의 화신이고 뭣이고 다 들어내 버렸다.
피와 죽음을 통해 거듭나 영원할 수 있다느니 하는 말도 안 되는 교리를 싹 다 지워버린 후 그저 빛을 숭상해 밝음을 향해 나아가도록 바꾸었다.
당연히 탐욕을 내세워 타 문파에 선공을 취하는 것을 자제하도록 교전에 써두었다.
그 대신 먼저 선제공격을 취해 오는 적 앞에 당당히 맞서 대응할 수 있도록 숨통도 터놓았다.
그렇게 보낸 시간이 한 달이었다.
그 사이 오독문에서 배양한 혈고가 도착을 했고 용무린은 그저 제압해 두었을 뿐인 내원의 고수들마저 깡그리 종속을 시켰다.
“음양신마를 따라 불회곡을 벗어나 있던 놈들이 돌아오면 문제가 될 거야.”
그것은 필연이다.
음양신마의 황제 참칭 때문에 지금도 각 성에서 얻어낸 막대한 재화나 생필품 그리고 각종 무구 따위가 들어오고 있었다.
호송해오는 것은 당연히 외부에 나가 있는 마인들.
혹은 마도칠문에 속한 인물들이거나 예전부터 신교에 종속된 흑도문파들이었다.
진화연과 함께 거듭난 신교의 고수들이 할 일이 바로 그것이었다. 그렇게 외부에서 새롭게 유입된 인물들을 혈고로 감염시키는 것 말이다.
“특히 마도 칠문에 속한 인물들은 네가 직접 너의 수족으로 종속시켜야만 해. 그래야 관리가 편할 거야.”
“예. 알겠어요.”
사근사근 답하며 물끄러미 용무린을 올려다보았지만 용무린은 매정하게 일어나 버렸다.
“잘 하고 있으리라 믿어.”
“정말 이렇게 그냥 가실 거예요?”
“소멸시켜야 할 놈이 있어. 그 일이 가장 급해.”
“일을 마치면요? 다시 오실 거예요?”
어찌나 간절한지 진화연은 두 손을 가슴께 모으고 눈물까지 글썽이며 물어왔다.
“……봐서.”
차마 매정한 말을 하긴 그래서 용무린은 그렇게 여지만 남겨 놓고 돌아설 수밖에 없었다.
“꼭 돌아오셔야 해요. 꼭이요.”
“수고해.”
스스슷.
동문서답을 끝으로 용무린은 불회곡을 벗어나기 시작했다.
***
“뭐야? 오십 명?”
모처럼 만의 제대로 된 정보에 화운 태상장로의 목소리가 절로 커졌다.
“예. 그렇습니다, 태상장로님.”
단단한 대답이 흘러 나왔지만 화운은 몇 가지를 더 물어야만 했다.
계속된 정파무림의 차단 노력에 축융궁이나 환희마궁 놈들도 거짓 정보를 흘리거나 함정을 파는 듯 적극적으로 대응을 했기 때문이었다.
“하오문과의 교차 확인은?”
“이미 마쳤습니다. 강소성 성도 남창의 승선포정사가 가까운 현들에 음양신마의 명령을 전달했고 각 지방의 현령들이 인명부를 이 잡듯 뒤져 자시 생 동남동녀의 숫자를 확보했다는 소식입니다.”
“더 중요한 사실은 호남 성도 장사의 움직임입니다.”
“며칠 전 발송한 전문을 보면 역천자가 자리한 장사로 집중되던 약재들을 각 성도로 분산시켜 집중시키라는 것이었습니다.”
“정의단과 천안각의 분석으로는, 계속된 차단에 견디다 못한 역천자가 직접 해당 지역을 찾아 움직일 것 같다는 것이었습니다.”
역천자 음양신마가 직접 움직인다?
보통 문제가 아니었다.
“크흠. 알겠다.”
벌떡 일어난 화운 태상장로는 급한 걸음으로 비룡각을 향해 이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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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양신마의 움직임에 대응하느라 그간 비룡문에서 움직이지 않고 있던 정파 무림의 중진들이 모두 한 자리에 모여들었다.
“……상황이 이러니 어찌해야 할지 결론을 내립시다. 시한은 오늘 밤까지, 최소한 음양신마 놈보다는 결단과 움직임이 빨라야 하오.”
시시각각 전해져 오는 정보는 음양신마의 호남성 이동을 확정적으로 보여주고 있었다.
녀석이 황제를 참칭함으로써 벌어지는 일이었다.
과거처럼 홀로 움직인다면야 알 도리가 없었겠지만, 황제를 참칭하는 바람에 수하들의 의전 요구를 완전히 무시할 수 없었던 거다.
황제의 행차 의전.
아무리 간소하게 준비한다고 해도 어딘가는 표시가 날 수밖에 없는 일이고, 그런 경험이 적은 녀석들이야 더욱 호들갑스러울 터였다.
다행히 그래서 알게 되었다.
놈은 확실히 장사를 떠나 강서성 성도 남창을 향해 조만간 이동한다.
“무려 오십 명에 달하는 아이들 목숨이 달려 있는 일입니다. 이 기회에 우리 역시 움직여야 한다고 봅니다.”
“동감이오.”
“나 역시 그렇게 생각하외다.”
용대명의 말에 법정과 자운진인이 동조했다.
“자시 생 동남동녀 오십 명의 목숨을 거두면 놈의 회복이 더더욱 빨라지겠지요. 더는 두고 볼 수 없습니다.”
화산 옥진 장문인의 말에 용대명이 부연설명을 했다.
“놈이 호남으로 떠난다는 사실은 아직까지 완전히 몸을 회복하지 못했다는 뜻, 지금이라면 놈과 맞닥뜨린다 해도 능히 상대가 가능할 것입니다.”
소림의 법정과 불사항마승.
거기에 더해 용대명 자신과 비룡문 직계들의 불사신공이라면 현재의 음양신마 정도는 충분히 상대할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그간 알게 모르게 조금씩 진입에 성공한 아이들의 정혈로 약간의 회복은 했을 터이니, 놈이 지금의 목숨을 잃을 염려 역시 하지 않아도 됩니다.”
용무린의 보살핌으로 이미 몸을 모두 회복했으면서도 놈을 치지 못한 이유가 바로 그것이었다.
놈은 역천자.
섣부른 공격으로 놈이 목숨을 잃는다면, 대체 어디의 누구에게로 스며들어가 다음을 기약할 것인지 감당할 수 없어서였다.
하지만 지금은 모두가 어설픈 상태다.
마음 놓고 일전을 겨루기 딱 좋았다.
잠자코 듣고 있던 화운 태상장로가 활짝 웃으며 마무리를 지었다.
“그러면 내일 아침 동이 터오는 즉시 강소성 성도를 향해 진격하는 것으로 결정을 보겠소. 이제 그 일에 참여할 면면을 결정해야 할 터인데……. 후훗.”
말을 하다 말고 화운 태상장로가 풀썩 웃었다.
필수 인원인 용대명과 법정을 제외하고도 누구 한 사람 뒤로 빼려는 모습을 보이지 않아서였다.
‘아무리 놈이 몸을 회복하지 못했다고 해도 가면 죽을 확률이 높아.’
그런데 빼기는커녕 되레 몸을 앞으로 내민다.
화운 태상장로와 어떻게 하든 눈을 맞춘 뒤 참여 의사를 활활 불태운다.
의기만천.
고맙고 즐거운 일이었다.
그때 또 한 가지 놀라운 소식이 먼 곳에서부터 도착했다.
“황룡패주, 아니 무림맹주님으로부터 전언이 도착해 있습니다.”
“오! 어서 들어오시게.”
무림맹 천안각 소속 무인의 손에 작은 전서가 들려 있었다. 잡아채듯 전서를 읽어 내려가는 용대명의 눈이 점점 더 커다래졌다.
이윽고 모두를 향해 용대명이 선언했다.
“누구누구 할 것 없이 강소성으로 가고 싶은 사람은 누구든지 가도 되겠습니다.”
그 말을 끝으로 전면에 내밀어진 전서.
“오오!”
“선재, 선재라…….”
“허허허. 이런 고마운 일이 있나?”
전서의 내용을 확인한 모두의 얼굴이 환하게 밝아졌다.
간단명료하지만 더없이 힘이 나는 글귀가 그 안에 적혀 있었던 것이다.
-불회곡 접수 완료.
수일 내 북상할 예정임. 변동사항은 개방과 하오문 지부에 하달 바람. 그에 맞추어 움직이되, 변동 없으면 무한으로 바로 가겠음.
그야말로 전무후무한 일이다.
불회곡 접수 완료라니!
대체 뭘 어떻게 했기에 접수 완료라는 말을 당당히 쓸 수 있는 것인지 짐작도 안 간다.
거기에 더해, 수일 내 북상할 예정이란다.
그가 드디어 돌아온다.
두 번에 걸쳐 신마의 목을 베어냈으며 지독한 내상을 입은 와중에도 역천자에게 돌이키기 힘든 일격을 먹였던 사내가 합류할 예정이다!
황룡패주 무림왕 용무린.
존재 자체만으로도 모두에게 힘을 주는 절대자가 우리에게 돌아올 것이다.
“만에 하나를 대비하기 위해 현 무림맹의 본단이라고 할 수 있는 이곳 주변에 약간의 무력을 남겨두어야 할 것인데, 지금부터는 누가 남아야 할……. 후훗.”
말을 잇던 화운 태상장로의 얼굴에 다시 한 번 환한 미소가 걸렸다.
이전과는 달리 누구도 눈을 마주치려 하지 않았던 거다.
뺀들뺀들.
이리저리 눈을 굴리며 다들 딴청만 했다.
***
음양신마가 멍청이일까?
당연히 그럴 리 없다.
‘이렇게 요란법석을 떠는데 놈들이 모를 리 있나?’
황제 참칭한 것을 처음으로 후회하는 요즘이었다.
급한 마음에 강소성으로 직접 가겠다는 말을 꺼낸 직후 일은 자신이 겪어 보지 못한 방향으로 흘렀다.
뭔 놈의 준비사항이 그리 많은지.
수행원들을 비롯해 황제의 안전을 지키기 위한 어림군(정확히는 축융마궁의 마인들)과 호위군(전군도독부 소속 군병)을 앞뒤로 배치한 후 온갖 생필품을 실은 수레와 야영장비까지 죄 갖춰야만 했다.
그러느라 보낸 아까운 시간이라니!
음양신마는 이러는 동안 새어나간 이쪽의 동향을 정파 놈들이 모를 리 없다고 생각했다.
‘놈들의 눈을 속이기 위해서 출발한 후 하루, 이틀쯤 외부에 내 모습을 노출시킨다.’
그 뒤 수련을 핑계로 외부 노출을 거르고 휘장 안에서만 생활하는 것처럼 한 후 나는 혼자 강소성 성도 남창으로 직행하는 거다.
무려 오십 명이나 되는 숫자다.
자시 생 동남동녀 오십 명의 정혈이라면 그간 드문드문 흡수한 정혈들과 힘을 합쳐 충분히 예전으로 몸을 되돌릴 수 있을 정도다.
‘그것들만큼은 무슨 수를 쓴다 하더라도 내가 다 잡아먹어야 해. 반드시.’
콱!
생각만으로도 흥분이 되는지 음양신마의 주먹에 절로 힘이 들어갔다.
‘기다려라. 그때 다시 한 번 겨뤄보자.’
그때가 기다려졌다.
용무린이 불회곡의 일을 정리하고 나서기 전에 자신 역시 얼추 몸을 회복할 것이다.
그 순간을 기다려 다시 붙어 보고 싶다.
아니, 집어삼키고 싶었다.
‘크흐흐. 곧 보자.’
환혼대법을 완성한 이후 언제나 시간은 내편이었다.
놈이 어떤 방법으로 검마종의 머릿속에 심어 놓은 자신의 의식체를 소멸시켜 버렸는지는 모르겠지만 최악의 경우 자신은 또 다른 몸으로 갈아타 버리면 그만이다.
‘가장 좋은 것은 역시 그놈인데 말이야.’
절대검신 독고황.
실패하긴 했지만 놈을 집어 삼키려 했던 시도만으로도 얼마나 많은 것을 얻었던가?
후릅.
절로 입에 침이 고였다.
황룡패주에 무림왕으로 거듭난 놈을 삼킨다면 이번에는 또 얼마나 많은 것을 얻게 될까?
‘푸흐흐. 이번에는 진짜 마선지경에 올라서게 될지도 몰라…….’
음양신마는 터지려는 웃음을 애써 참아야만 했다.
***
옥화산 아래 장수현.
용무린은 전력을 다했던 신법을 잠시 멈추고 하오문의 연락망에 접촉을 했다.
석류각.
하오문의 중요 거점 중 하나로써 용무린이 자신을 밝히자 주루가 직접 모습을 드러내고 그간 모아 온 정보를 낱낱이 밝혔다.
강소성 성도 인근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이 일목요연하게 정리가 되어 용무린 앞에 놓였다.
‘흐음. 일이 재미있게 되어 가는데?’
장사의 움직임과 음양신마의 명령으로 인한 강소성 성도 남창 인근의 움직임, 그에 대응하는 정파 무림의 재배치와 이동상황을 보자니 대충 음양신마의 내심과 정파의 내심을 읽을 수 있었다.
‘결국엔 남창 인근에서 끝을 보자는 뜻이지?’
음양신마가 계획대로 움직인다면 그렇게 될 것이다.
그간 검마종을 대신해 무력의 상징 역할을 하던 혈마종과 예하 마인들이 일제히 모습을 감추었다는 것이 바로 그 사실을 역설하고 있었다.
‘소림, 무당, 화산, 비룡문의 직계들에 옛 무림맹의 무력단체들까지 합하면 음양신마가 함께하고 있다 하더라도 충분히 해볼 만한 전력이야.’
특히 지금까지 알려진 바에 의하면 음양신마가 부상에서 완전한 회복을 하지 못했다고 알려져 있기 때문에 확신이 더욱 강해졌다.
‘그런데…….’
용무린의 고개가 자꾸만 갸웃하고 기울었다.
뭔가 미묘하게 거슬렸던 거다.
‘가짜 신마까지 내세워 소나기를 피한 후 되레 나를 죽음 직전까지 몰아넣었던 놈이야.’
어디 그뿐인가?
검마종이라고 하는 자신이 옮아갈 빈 껍질 마련을 가장 먼저 하는 준비성까지 보인 놈이기도 했다.
‘그런 놈이 이렇게 빤히 눈에 보이는 작전을 감행한다고? 움직임이 빤히 드러나 정파 무림에서 이렇듯 직접적인 공세를 취해올 확률이 높은데도 불구하고?’
그 사실이 가장 마음에 걸렸다.
‘뭔가 이상해.’
용무린의 고민이 깊어갔다.
***
강소성 성도 남창.
사통팔달 연결된 대, 소 관도도 잘 발달되어 있지만 지근거리에 거대한 호수인 포양호가 자리하고 있는 관계로 수로 역시 무한이나 소주 못지않다.
그래서 축융궁의 마인들 역시 수로를 이용했다.
장강의 물줄기를 따라 길게 뻗어 있는 수로를 이용해 각 지역에서 골라낸 자시 생 동남동녀를 안전하고 빠르게 집결시켰다.
마음만 같아서는 수로를 통해 성도로 바로 들어가고도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안전을 위해 분산된 병력을 합쳐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결정한 곳이 남창 서쪽의 봉신현이었다.
봉신현은 남창에서 불과 하루거리.
신화상단의 깃발을 높이 세운 상선 다섯 척이 한 시진 어림을 사이에 두고 차례차례 도착했다.
그 안에서 내린 것은 전군도독부의 핵심 무력인 축융방의 마인들과 유령궁 소속 마인들 그리고 전군도독부 소속 관병들이었다.
“내려 이것들아.”
“뭐해? 빨리 빨리 움직여.”
거친 인상과 차갑기 짝이 없는 목소리.
“엄마…….”
“무서워.”
이제 갓 십여 세 어림이나 됨직한 동남동녀들이 다섯 척의 배에서 차례대로 내렸다. 중앙의 광장에 도열한 후 숫자와 신분 확인을 거쳤다.
검은 색 무복 차림의 장수가 앞으로 나섰다.
모두가 그 장수를 두려워했다.
일반적인 상식으로는 감히 상대할 수 없는 거력을 가진 무관, 그가 바로 축융궁의 새로운 부궁주 전사욱이기 때문이었다.
그에게서 무지막지한 힘과 무력, 아니 마력이 은연중 흘러 나왔기에 병사들은 눈도 마주치지 못한 채 고개를 땅에 처박고 명령만 기다렸다.
‘이상 없군.’
배에서 내린 아이들의 숫자와 신분 확인을 거친 전사욱이 크게 외쳤다.
“시간 없다. 지금 이 순간에도 황제폐하께서 일각이 여삼추로 기다리고 계실 터, 바로 출발한다.”
“명!”
전면에는 전군도독부에서 가려 뽑은 병사들.
그 뒤에는 축융궁 소속 마인들이 버티고 있었고 대열의 후미에는 유령궁 소속 마인들이 조용히 은신한 채 따라올 것이었다.
그 수가 무려 일천오백여 명.
그 중 일천 명의 관병들은 오늘을 위해 특별히 훈련까지 시켜둔 놈들이었다.
‘이번에는 어림도 없다, 이놈들.’
축융궁 부궁주 전사욱이 이를 악물었다.
계속되는 정파 무림의 방해에 잃은 수하들 숫자는 물론이고 빼앗긴 아이들 숫자는 훨씬 더 많았기 때문이다.
‘이곳에 신교에서 파견 나온 거의 모든 전력을 모았다. 어디, 이번에도 한 번 밀고 들어와 봐라.’
“출발!”
“움직여!”
전사욱의 명령에 따라 도열해 있던 병사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
반짝.
‘움직인다.’
‘예상대로 대로를 따라 움직일 모양이야.’
‘빨리 태상장로님께 알려드려. 두 시진 정도면 그곳을 지나칠 것이라고 말이야.’
‘그래, 알았어.’
멀찍이 떨어진 곳에서 지켜보던 홍안의 어린 거지들이 눈빛을 교환한 후 갈대숲에 몸을 숨겼다.
푸드득. 푸드드득.
전서구 서너 마리가 훌쩍 하늘로 날아올랐다.
피식.
그 모습을 확인한 전사욱이 입술만 움직여 웃어 보였다.
하지만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기다리던 바였던 것이다.
‘오냐, 와라. 깡그리 죽여주마.’
그렇게 시간은 흘렀고 자시 생 동남동녀 오십 명을 이끈 행렬은 어느 덧 봉신현을 완전히 통과했다. 성도 남창으로 향한 관도에 완전히 올라섰다.
그로부터 두어 시진이 지났다.
왼쪽에는 수풀이 우거진 작은 산이, 왼쪽에는 수로와 이어진 무성한 갈대밭이 나타났다.
‘여기다. 틀림없어.’
‘모두 준비-이.’
일촉즉발의 긴장감 때문일까?
수풀과 갈대밭 인근에서는 그 흔한 풀벌레 울음소리 하나 들려오지 않았다.
볼살을 거칠게 꿈틀거린 전사욱이 크게 외쳤다.
“정지.”
“정지! 정지하랍신다-아!”
복창소리가 길게 이어질 무렵 왼쪽 산허리와 오른쪽 갈대밭에서 일단의 무리가 불쑥 모습을 드러냈다.
“아미타불.”
“허허허. 눈치가 빠른 아해로고…….”
살계승 효정 대사와 화운 태상장로를 위시한 정파 무림 연합의 고수들이었다.
그 수가 무려 오백여 명.
한 사람, 한 사람이 절정의 무인들이었기 때문에 그 기세는 이미 두 배를 훌쩍 넘어선 숫자의 관병들을 압도하고도 남았다.
하지만 놀랍게도 누구 한 사람 겁을 먹는 이가 없었다.
아니, 되레 반겼다.
“크크큭. 내 이럴 줄 알았지.”
“쥐새끼들아. 두 번 다시 분탕질을 치지 못하도록 오늘 뿌리를 뽑아주겠다.”
스스슷.
전사욱의 등 뒤로 일단의 무리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 중 선두에 선 노괴의 얼굴이 눈에 익었다.
“혈마종.”
“네가 어떻게 여기에……?”
효정대사와 화운 태상장로의 안색이 크게 변했다.
혈마종 개인의 무력이야 겁이 나질 않았지만, 그가 전면에 나서는 것으로 보아 뭔가 일이 크게 틀어졌다는 것을 직감했기 때문이었다.
“어떻게? 너희 떨거지들 잡아 죽이기 위해 황제폐하께서 계책을 마련하신 것이지.”
말끝에 혈마종이 고함을 질렀다.
“뭣들 하느냐? 쏴라.”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대열 중간에서 쇠뇌병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 순간을 위해 지금껏 애써 숨겨 끌고 온 보람이 있는 순간이었다.
그 수가 무려 오백여 명.
“십 시 연사 후 자유사격이다-아!”
“쏴!”
씨잇. 씨시시시싯.
3
외부에서 남창으로 들어오는 대 관도는 모두 네 곳.
그 중에서 호남성과 직선인 곳을 꼽으면 고안현이 관문이 된다.
용대명은 만에 하나 음양신마가 수작을 부린다면 홀로 이곳을 지나칠 것이라고 믿었다. 그래서 비룡문의 직계, 법정과 불사항마승들과 함께 그곳을 지키고 있었다.
웅성웅성. 수군수군.
성도와 가까운 현인데다가 관도 주변에 늘어서 있는 것이어서 오가는 양민들이 자꾸만 힐끔거렸다. 겁먹은 목소리로 자신들끼리 이야기를 나눴다.
그러다가 눈이라도 마주칠라치면 불에 댄 듯 와다닥 뛰어 달아났다.
음양신마가 황제를 참칭한 지역.
불안한 시절이니 더더욱 예민하게 반응하는 것이다.
‘후우. 어쩌겠는가? 당분간은 불편해도 이렇게 지키고 있을 수밖에.’
음양신마의 행선지가 확실히 밝혀진다거나 자시 생 동남동녀 오십 명의 신병을 안전하게 확보했다는 소식이 들려오기 전까지는 다른 수가 없다.
그때였다.
삐이이익.
어디선가 길게 호각 소리가 들려왔다.
용대명은 긴장이 역력히 묻어나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시작되었군요.”
“너무 염려하지 마시오, 용 문주. 자운과 옥진 그리고 개방의 용두방주까지 나서서 나머지 관도를 지키고 있으니 머지않아 소식이 올 것이오.”
“그래야지요. 암요.”
용대명의 고개가 크게 끄덕여졌다.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이라면 미끼를 내세운 후 혼자서 정면 돌파 할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놈은 절대로 바보가 아니야.’
반대로 너무 영악한 놈에 가깝다.
‘여태 동남동녀가 중간에서 숱하게 차단당한 것을 잘 알면서도 팔자 좋게 수행원들 몽땅 끌고 느긋하게 오지는 않을 거야.’
그래서 전력을 다해 달려 며칠 빨리 도착했다.
도착하기가 무섭게 찍어 두었던 이곳을 비롯한 네 곳의 관도 전부에 고수들을 배치했다.
포양호를 통해 진입하기에는 너무나 먼 거리를 돌아와야 하니 그 사이 오십 명이나 되는 아이들이 외부에 노출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혹시 몰라서 화운장로님과 효정 대사님을 봉신현의 포구에 보내 놓았지. 지금쯤이면 축융궁 놈들과의 교전이 시작되었을 거야.’
이제 남은 것은 관도를 지키는 일 뿐이다.
‘그놈들이 가짜라면 반드시 네 곳의 관도 중 한 곳을 통해 온다.’
더불어 그 아이들만큼은 놓치고 싶지 않을 음양신마 역시 함께 모습을 드러내리라.
‘그게 아니라면?’
짐작조차 가질 않는다.
음양신마는 어떤 생각을 어떻게 하고 있을까?
그때였다.
삐이익. 삐이이익.
요란한 호각소리와 함께 놀라운 급보가 전해졌다.
“정체불명의 흡혈괴마가 나타났다.”
“흡혈 괴마가 수로를 타고 유람 나온 가족을 노린다.”
“유람 나온 가족들이 아니다. 부모로 위장한 관병들이다.”
“놈들 손에서 탈취한 아이들을 덮친 흡혈괴마가 관병들은 내버려 둔 채 아이들만 골라 피를 빨아들이고 있다.”
생각지도 못한 소식!
믿기 어렵고 불길하기 짝이 없는 소식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용대명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당했다.’
흡혈괴마.
그 한마디에 괴마의 정체를 직감했다.
음양신마다.
놈이 누구도 생각해내지 못한 방법을 써서 선수를 쳤다. 예상대로 배에서 내린 오십 명은 자시 생이 아니라 눈속임용이었던 것이다.
“용 문주.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오.”
“그렇습니다, 방장스님. 어서 빨리 움직여야 합니다.”
“놈이 수로를 통해 움직이고 있는 것 같소.”
“놈에게 있어서 수로나 땅의 의미가 없습니다. 천상제 그 이상의 신법을 써서 훌훌 날아다니니까요.”
그렇다고 넋 놓고 당하고만 있을 수는 없다.
‘그랬다가는 아이들을 모두 빼앗길 거야.’
놈이 아이들의 정혈을 흡수하면 끝이다.
겨우 잡아내 치워버린 놈의 껍질이 또 다시 생겨날 수도 있었고 정파 무림에 치명적인 일격을 먹여 놓은 후 마음 놓고 북진을 할 수도 있는 일이었다.
“가시지요 방장스님. 어떻게든 포위망을 구성해 놈을 수로 밖으로 끌어내야만 합니다.”
“그럽시다.”
***
고안현에서 수로를 따라 조금만 달리면 강서성 성도 남창에 이르는 잠강이 나온다. 이 잠강이 성도 남창을 휘돌아 장강에 이르는 것이다.
포양호 역시 이 수로를 통하면 반나절 만에 이르게 되니 이 주변에는 언제나 유람객들을 태운 크고 작은 선박들이 넘쳐났다.
하지만 오늘만큼은 아니었다.
곳곳에서 들려오는 비명 소리와 흡혈괴마라는 흉흉한 소문에 어지간한 유람선들은 모두 포구로 돌아갔다.
아직까지 잠강을 따라 장강까지 쭉 떠 있는 배들은 하나 같이 진짜 자시 생 동남동녀를 태운 채 음양신마가 도착하기만을 기다리는 배였던 것이다.
출렁. 출렁.
잠강 한가운데 떠 있는 작은 조각배.
그 안에는 유람객을 가장한 축융궁 소속 마인 두 사람과 이제 갓 십오 세나 됨직해 보이는 소년이 있었는데 소년은 겁에 질려 손을 발이 되도록 빌고 있었다.
“사, 살려 주세요.”
방금 전에 물속으로 가라앉은 배 위에서 벌어진 일을 똑똑히 목격했기 때문이었다.
흡혈이라니!
안개라도 되는 것처럼 피어오른 핏줄기가 괴인의 입속으로 빨려드는 장면은 지금 생각해도 아찔했다. 몸이 저절로 떨렸다.
음양신마가 나타난 것이다.
“푸흐흐. 약속한다, 아이야. 고통은 없을 것이다.”
소년을 향해 너털웃음을 터뜨리는 음양신마의 모습은 끔찍하기만 했다. 그 모습이 어찌나 무서운지 축융궁의 마인들도 감히 고개를 들지 못할 정도였다.
덥석.
소년의 목줄을 잡아 챈 음양신마의 손가락 하나가 까딱 하고 움직였다.
핏. 둥실.
소년의 목에 붉은 실금이 그어지는가 싶더니 이내 거짓말처럼 하늘로 떠올랐다.
푸우우.
동시에 뿜어지는 핏물이여!
“크아합!”
음양신마가 입을 쩍 벌렸다.
그러자 소년의 목에서 뿜어진 피가 안개와 같은 형태로 변하더니 음양신마의 몸으로 스며들었다. 또 일부는 입으로 빨려들었다.
마시고 흡수하고 동시에 하는 거다.
부들부들.
자시 생 동남동녀의 피가 필요할 뿐 자신들에게는 손끝도 대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두 축융궁 마인들의 몸은 마구 떨렸다.
“커흐! 좋구나.”
독주에 취기라도 오른 듯 음양신마의 얼굴이 붉어졌다.
연거푸 흡수한 자시 생 동남동녀의 정혈로 인해 그토록 애를 먹이던 불사신기와 불사항마력이 연해지며 밀려나고 있는 것이었다.
그때였다.
이백여 장 앞쪽에 제법 커다란 유람선이 보였고 다섯 명의 아이들과 그 이상의 장년인들의 모습이 보였다.
“오! 그렇지 않아도 귀찮았는데 잘 되었다. 고맙게도 한데 모여 있……. 으응?”
막 장년인들을 칭찬하려던 음양신마의 눈이 찌푸려졌다.
놈들이 배를 강변에 대더니 이내 아이들을 하나씩 품에 안고 신법을 펼쳤던 것이다.
“이런 빌어먹을 놈들을 보았나?”
음양신마는 대뜸 욕설을 내뱉었다.
장년인들이 펼친 신법이 개방 특유의 연쌍비였기 때문이었다.
부아가 확 치밀었다.
감히 자신의 눈앞에서 다섯 명이나 아이들을 훔쳐 달아날 생각을 하다니!
“이 마당에 내가 빼앗길 것 같으냐?”
후욱.
음양신마가 허공으로 떠올랐다.
그러더니 시위를 떠난 화살처럼 전면을 향해 폭사했다.
스파아-앙.
능공천상제에 이은 천마탄신의 신법이었다.
***
휘리리릭.
세찬 바람을 뒤로 흘리며 연신 연쌍비의 신법을 발휘해 달리는 십 인의 장년인. 개방의 용두방주와 대표무력단체인 용호단의 걸개들이었다.
“우웃!”
슬쩍 뒤를 돌아다보았던 용호단의 단주가 소스라치게 놀랐다. 음양신마가 그야말로 허공을 훨훨 날아 쫓아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약속장소까지 가지 못한다.’
한 호흡에 십여 장의 거리가 줄어든다.
이대로라면 불과 일 다경 어림에 뒤를 잡힌다.
‘그럴 수야 없지.’
저 괴물의 아가리에 애꿎은 아이들의 목숨을 쳐 넣을 수 없는 일이다.
반짝. 반짝.
같은 심정들이었는지 좌우에서 뜨거운 시선들이 밀려왔다.
‘별 수 없다.’
결심을 굳힌 용호단의 단주가 행동을 개시했다.
자신이 품에 안고 있던 아이를 대뜸 용두방주에게 던져버린 것이다.
용호단주와 생각이 같은 용호단의 걸개들 역시 동료들에게 자신들이 맡아 품에 안고 있던 아이들을 강제로 안겨 버렸다.
“이게 무슨 짓인가?”
“시간이 없습니다, 방주님.”
“이런!”
그제야 무슨 뜻인지 알아차린 개방의 용두방주가 눈을 부릅떴다. 거부의 의사를 밝히려는 찰나 용호단의 단주가 먼저 선수를 쳤다.
“용두방주는 개방의 상징, 이런 곳에서 허무하게 목숨을 잃어서는 아니 됩니다.”
“이 사람 장린!”
개방의 방주가 거칠게 외치며 눈을 부라렸지만 소용없는 일이었다. 이미 뜻을 같이 하기로 마음먹은 다섯 명의 용호단원들과 동시에 뒤를 향해 방향을 틀었다.
“아이들을 살리시오, 방주.”
“하하하. 개방의 의기는 우리가 살리겠습니다, 방주.”
“크하하하. 놈의 콧잔등을 한 대 오지게 때려 놓겠습니다, 방주. 대신 그 아이들 목숨은 반드시 살리세요.”
하나 같이 죽음에 초연하다.
의를 숭상하라.
단 하나뿐인 방규를 목숨처럼 여기며 살아온 개방 호걸들의 의기는 그렇듯 높았다.
“이야아-하!”
용호단주가 필생의 힘을 끌어 올렸다.
개방 제일의 용호단주로서 배우게 되는 백결신권의 공력이 두 주먹에 고여 들었다.
후우웅. 버언쩍.
벌떼 우는 듯한 공명음과 함께 피어오른 권강에 용호단주의 두 주먹이 활활 타오르는 것만 같았다.
나머지 단원들도 그에 못지않았다.
하나 같이 십만 개방도 중에서 고르고 골라 길러진 무인들 아니던가?
“차아앗!”
“하압!”
옥현쇄심장, 옥룡팔권, 천애회선장력 등등 그 이름만으로도 강호를 위진 시키는 개방의 절기들이 그들의 손에서 잘도 튀어 나왔다.
하지만,
“흥! 거지새끼들이 어딜…….”
심드렁한 반응과 함께 음양신마가 투명한 무엇인가를 움켜쥐듯 손을 오므렸다.
버언쩌저적.
강렬한 광채와 함께 음양신마의 손아귀에 검보라빛 심검이 솟구쳤다.
“다 죽어-엇!”
신경질적으로 뿌려지는 손.
키이이우우웅. 쩌저적.
공간 자체가 뒤틀리는 듯 기괴한 소리와 함께 보이지 않는 무엇인가가 쩍 갈라졌다.
마치 용무린이 불사대천검법을 펼쳐 공간을 갈라내듯 음양신마 역시 같은 수준의 검법을 펼쳐낸 것이다.
고려의 옛 법.
가온누리 칼벼락의 위력이었다.
파카-앙. 휘스슷.
개방에서도 그 위력이 강하기로 손꼽히는 백결신권이 허무하게 깨어졌다. 미끄러져 내리는 공간과 함께 쓸려 내려가 사라졌다.
“커헉!”
그 서슬에 용호단주의 몸도 쩍 갈라졌다.
온통 강기로 두른 두 팔을 베고 밀려들어온 칼벼락의 여력이 가슴과 복부를 길게 갈라놓았다.
완전히 두 조각이 나지 않은 것은 오로지 음양신마의 내상이 모두 회복이 되지 않았기 때문, 그것만 아니었어도 두 조각으로 나뉘었으리라.
퍼퍼펑. 콰쾅. 스각. 서거걱.
“크아악!”
“커헉!”
다섯 용호개 중 두 사람만 비슷한 신세가 되었다.
나머지 셋은 비명 한 번 크게 질러보지 못하고 두 조각으로 나뉘어 거칠게 흙바닥을 뒹굴었다.
그 모습을 보고 어찌 참겠는가?
“우와악!”
용호단주가 비명 같은 고함을 지르며 혼신의 공력을 불러 일으켰고 같은 심정인 용호단 걸개 두 사람도 잠력까지 격발시켜 재차 무공을 펼쳤다.
후우우웅. 버번쩌저적.
모든 것을 다 바친 공격인 만큼 처음과 비교해 조금도 손색이 없는 파괴력의 초식들이 음양신마의 목숨을 노리고 짓쳐들었다.
“별 거지같은 것들이 다 발목을 잡는군.”
자신의 일 수를 버텨내다니!
그 사실이 불쾌해 견딜 수 없다는 듯 불퉁거리며 음양신마는 재차 심검으로 칼벼락을 내리쳤다.
콰르르릉.
***
용호단주와 용호단 소속 걸개들의 희생으로 개방의 용두방주는 무사히 목적지까지 빠져나올 수 있었다.
남창으로 향하는 장서분지의 시작점.
전력을 다해 신법을 펼친 용대명과 법정 그리고 불사항마승이 용두방주를 반겼다.
“성공 하셨……. 애쓰셨습니다.”
“……아미타불.”
개방의 방주와 다섯 용호단 걸개를 반기던 용대명과 법정이 말을 줄였다.
개방 제일의 무력이라는 용호단원들이 겨우 다섯 명만 돌아온 사실이 무엇을 뜻하는 것인지 너무 잘 알고 있어서였다.
“희생이 헛되지 않도록 준비를 하겠습니다.”
“우리 모두가 역천자를 막을 것이오.”
용대명과 법정이 개방의 용두방주를 위로할 때였다.
휘스스.
동지섣달 그믐밤에나 불어와야 마땅할 찬바람과 함께 온몸이 피에 젖은 괴인이 그들 앞에 나타났다.
역천자. 음양신마였다.
***
고안현에서 반나절 거리인 장수현 초입.
철렁.
용무린은 갑자기 떨어져 내릴 듯 크게 뛰는 심장을 부여잡고 신법을 멈춰야만 했다.
“흡. 무슨 일이지?”
쿵쿵쿵쿵쿵.
겨우 제 위치로 돌아온 심장이 터질 듯 뛰기 시작했다.
용무린은 자신의 심장이 어떤 때에 이런 반응을 보이는지 몇 번의 경험을 통해 알고 있었다.
과거 비룡문이 공격 받을 때도 이러했고 백리소옥이 죽기 전에도 이러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는 것은…….
“아버지.”
용대명이 위험이 처했다는 뜻이다.
버언쩍.
용무린의 눈에서 서슬파란 불똥이 튀었다.
신마귀환 11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