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집으로
용무린은 호남, 강서, 복건, 광동, 광서, 귀주성에 이르기까지 여섯 개의 성을 샅샅이 훑고 다녔다.
자시 생 동남동녀 수급을 위해 각 지역으로 흩어졌던 축융궁과 유령궁 그리고 환희궁의 마인들을 불회곡으로 몰아내기 위한 작업이었다.
물론 겸사겸사 음양신마의 황제 참칭에 동조했던 관리들과 군부의 실세들의 교체 작업까지 함께 이루어졌다.
격렬한 반항이 잇따랐다.
용무린의 연락을 받은 총병관 양문광이 아직 와병 중에 있는 황제를 대신해 십만 명의 토벌군을 이끌고 남하를 시작했다는 소식에 더더욱 요란했다.
다수의 군부 실세들이 똘똘 뭉친 후 진정한 의미의 반란을 획책하려 들었다.
음양신마의 황성이랄 수 있는 호남성 성도 장사.
그 중심에 자리한 전군도독부의 실세인 좌, 우 도독과 자칭 삼공 삼고라고 하는 감투를 썼던 관리들이 주축이 되어 이뤄졌다.
“음양신마 황제폐하께서 정녕 황룡패주에게 죽임을 당하셨다는 말이오?”
“돌아가는 상황이나 정보를 토대로 판단하면 그렇다고 봐야 할 것 같소이다.”
좌, 우 도독의 대화를 잠자코 듣고만 있던 삼공과 삼고가 다투어 입을 열었다.
“이대로 잠자코 있다가는 우리들 개개인은 물론이고 가문 전체가 씨 몰살을 당하고 맙니다.”
“맞습니다. 대책을 세워야 합니다.”
“대책이랄 게 뭐가 있겠소이까? 음양신마라는 구심점 대신 다른 구심점을 내세워 뭉쳐야지요.”
“그렇소이다. 이대로 넋 놓고 토벌당할 수는 없질 않겠소이까?”
“어서 빨리 구심점을 세운 후 전군도독부의 모든 전력을 한데 끌어 모아야 합니다.”
“선황의 수하들도 끌어안아야 할 것이오. 그들의 무력이라면 총병관과의 전쟁에 큰 도움이 될 것이오.”
인지상정이었다.
죽을 것이 빤히 눈에 보이니 사람들은 생존과 부귀영화를 위해 똘똘 뭉쳤다.
“지금 가장 중요한 일은 구심점을 정하는 일이외다.”
“기왕 이렇게 된 일, 신국(神國)의 2대 황제 옹립을 서둘러야 하겠소이다.”
“거, 좋으신 말씀이외다.”
“그래야지요. 그래야 그 구심점을 향해 모든 힘을 하나로 모을 수 있습니다.”
“하면 어느 분을 옹립하는 것이 좋겠소이까?”
선뜻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그 막강하던 음양신마의 존재감을 감히 대신할 수 있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인자였던 검마종께서 오신다면 모를까…….’
‘이참에 무림의 세력을 배제를 하는 편이 좋을 것 같아.’
‘지리멸렬해 사라져버린 신교의 세력은 배제한 후 우리 중 한 사람이 황제가 되면 어떨까?’
‘신국이라는 토대가 섰으니 신황 운운하며 연기만 잘해 준다면 우리끼리도 문제없을 텐데 말이야.’
호랑이 없는 산골에 여우가 왕 아닌가?
구심점만 완벽하게 세울 수 있다면 굳이 그 좋은 자리를 마인들에게 내줄 필요가 없는 거다.
반짝. 반짝.
탐욕으로 빛나는 눈빛들이 서로를 돌아보며 주판알을 튕기기 시작했다.
“우리 중 한 분이 구심점이 되어도 좋다고 생각합니다.”
가감 없이 내심을 드러낸 좌 도독 곽무웅을 시작으로 모두가 동조하고 나섰다.
“하하하. 나 역시 그리 생각하고 있었소이다.”
“허허허. 좋지요.”
“하면, 우리 중 어느 분을 옹립하는 것이 좋을지…….”
“어려운 문제입니다만, 일단은 양문광이라고 하는 강대한 적을 앞에 두고 있으니 휘하 군부를 통솔해 전쟁을 잘 치를 능력이 있는 분이 좋지 않을까 합니다.”
“그, 그야…….”
“역시 그러는 편이 좋겠습니다.”
누구인들 2대 황제의 자리에 오르고 싶지 않겠는가?
어차피 가만히 있어도 죽는다.
황제를 참칭한 음양신마의 편에 선 것으로도 모자라 이제는 2대 황제에게까지 충성을 맹세해야 하니 잘못되면 가문까지 깡그리 쓸려 나가게 된다.
‘그런 판국에 곱게 죽을 수는 없잖아.’
‘죽어도 황제라는 감투 한 번 써보고 죽으면 또 이야기가 다르지.’
‘사내로 태어나 황제로 죽는 것도 나쁘지 않아.’
내심을 감춘 채 치열한 눈치 보기와 이합집산이 침묵과 함께 이루어졌다.
그렇게 지나간 시간이 사흘.
결국 새로운 구심점, 신국의 2대 황제가 정해졌다.
대규모 전투가 예정되어 있는 만큼 병사들을 규합해 전투를 잘 치러낼 능력이 있는 사람이 선택되었다.
전군도독부의 좌 도독 곽무웅.
그가 바로 음양신마에 이어 신국의 2대 황제의 자리에 오른 인물이었다.
그 뒤부터는 일사천리였다.
지금껏 축재한 재물과 몰래 양성해 온 사병, 거기에 대해 그동안 휘어잡은 전군도독부 소속 군병들까지 모두 하나로 묶어 대항군을 조직했다.
2차 신마대전 때와는 다른 종류의 긴박감이 전군도독부에 속한 여러 성들에 퍼졌다.
신마대전 때는 그래도 무림에 속한 세력들끼리의 싸움으로 끝이 난다면 반란과 토벌이라는 전쟁은 애꿎은 양민들까지 끌어들이기 때문이었다.
전군 징집령이 내려졌다.
그 주체는 2대 황제인 좌 도독 곽무웅이었다.
큰 싸움에 앞서 여섯 개의 성 전부에 전군 징집령을 내린 것이다.
-악적 양문광이 십만 대군을 휘몰아 우리를 짓밟기 위해 오고 있다.
초대 황제인 음양신마께서 내건 우리 신국(神國)의 가치를 지켜야 한다. 수많은 피를 토대로 세워진 우리 신국만이 영원무궁할 자격이 있다.
모여라 신국의 양민들이여.
저 야만스러운 북쪽 정벌군에게 우리의 부귀와 영화, 그리고 영원무궁의 약속을 빼앗기지 말자.
제법 솔깃한 출사표를 사방팔방에 내걸었다.
징집령을 든 파발마가 여섯 개의 성 곳곳을 향해 내달리기 시작했다.
“모두 나를 따르라.”
2대 신국의 황제로 올라선 곽무웅의 뒤를 따라 전군도독부 소속 군병칠만 명이 진군을 개시했다.
목표는 악록산 아래 대평원.
음양신마를 비롯한 모든 마인들과 정파무림이 일전을 겨뤘던 곳에서 자신들의 운명 또한 결정될 것이었다.
그런데…….
“바보들. 그 한 줌도 되지 않는 부귀영화를 위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잃게 할 생각이야?”
용무린이 그 짓을 보고 있을 까닭이 없었다.
그렇지 않아도 마무리를 위해 호남성을 향해 오던 길 아니던가?
“잘 됐다. 저희들 스스로 한 곳에 모여 준다고 하니 이 기회에 완전히 정리해 두자.”
뒷정리에 힘을 실어주기 위해 총병관 양문광이 대군을 이끌고 내려오고 있기는 하지만, 그들과 이들이 싸우는 것을 지켜볼 생각은 추호도 없다.
“악록산 아래 대평원이라고 했지?”
용무린은 성도 장사로 향하던 발걸음을 좌측으로 틀었다.
그리고 사흘 후.
기세등등하게 악록산 아래 대평원에 도착한 곽무웅과 전군도독부 소속 반란군들은 몇 번에 걸쳐 신마라는 존재를 베어 버린 황룡패주 용무린의 능력이 어떤 것인지 비로소 알게 되었다.
둥실. 휘스스.
천신인 양 허공에 떠서 바람이 흐르듯 부드럽게 거리를 좁히는 신인!
용무린은 해 볼 수 있으면 어디 한 번 해보라는 듯 천천히 칠만의 대군 중심에 세워져 있는 가장 큰 군막을 향해 날아갔다.
“마, 맙소사.”
“시, 신선님이시다!”
“맞아. 사람이 아니야.”
하늘을 날아오는 용무린의 모습을 지켜 본 누구도 그 말에 토를 달지 못했다.
하긴, 누가 있어 토를 달 수 있겠는가?
무려 수백여 장에 달하는 거리를 천신인 양 둥실 떠서 날아가는 존재를 향해 말이다.
“……!”
곽무웅의 군막 앞에 도착한 용무린의 얼굴이 한심하다는 듯 찌푸려졌다.
“어헉!”
“누, 누구냐?”
황제 곽무웅과 휘하 제장들이 소스라치게 놀랐다.
누군지 묻고 자시고 할 필요도 없다는 듯 주변을 향해 크게 외쳤다.
“뭣들 하느냐? 쏴라!”
“쇠뇌병들과 궁수들은 어서 저 악적을 떨구어라!”
잠잠했다.
황제씩이나 되는 사람과 군의 수뇌가 고함을 질렀지만 누구도 움직이려 들지 않았다.
‘쏘면 저 거리까지 닿기나 해?’
‘닿는다고 떨굴 수나 있을까?’
‘난 죽기 싫어. 저 신선님께서 손을 쓰시기라도 하는 날이면 우리는 파리 목숨처럼 쓰러져야만 할 거야.’
이미 음양신마로 인해 절대적인 수준의 무인이 어떤 존재들인지 익히 알게 된 병사들은 황제의 명령이 떨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움직이지 못했다.
“쯧쯧쯧.”
지켜보고 있던 용무린이 혀를 찼다.
한심하다는 듯 눈살을 찌푸리며 말을 이었다.
“결국 너희가 하는 짓이란 게 너희들의 기득권, 그러니까 부귀와 영화를 지키기 위해 본격적으로 힘겨루기를 하는 것이었냐?”
“이, 이놈. 무슨 소릴…… 흡!”
용무린의 말에 대응해 고함을 치려던 곽무웅의 몸이 흠칫 굳었다. 용무린이 누구도 모르게 손을 써서 제압을 해버린 것이었다.
곽무웅뿐만이 아니었다.
“……!”
“……!”
그의 주변에 있던 제장들과 수뇌부들 중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은 누구도 없었다. 그 짧은 순간에 용무린에게 모두 금제를 당한 거다.
“이봐라. 어리석은 인간아.”
타이르듯 용무린의 목소리가 계속해서 이어졌다.
물론 곽무웅에게 하는 말이 아니었다. 주변에 가득한 칠만 정병들에게 전하는 일종의 당부였고 친절히 내려주는 기회였다.
“네가 황제의 자리에 오르고, 너를 따라 한 자리씩 차지한 놈들의 부귀영화를 지켜내기 위해 칠만 명이라는 목숨을 던져 넣을 생각이었느냐?”
그제야 새삼 자신들이 어떤 깃발 아래 모인 것인지 떠올리는 병사들이었다.
“지금 북쪽에서 총병관이 십만 정병을 휘몰아 내려오고 있다. 애초에 너희 욕망 때문에 벌인 일에 어째서 애꿎은 병사들 목숨 칠만 명과 그의 가족들 목숨까지 쓸어 넣으려 드는 것이냐?”
뭐, 누구나가 공감하는 거창한 명분이 있는 것도 아니다.
실체도 불분명한 신국(神國).
피를 통해 영원무궁에 이를 수 있다는 신교의 교리를 내세워 음양신마를 따르는 몇몇 윗대가리들의 야합으로 이뤄진 것이 바로 신국이란 나라가 아니던가?
‘솔직히 나라도 아직은 아니지.’
‘말만 그럴싸하게 신국 어쩌고 했지 솔직히 제대로 돌아가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잖아.’
‘심지어 제대로 된 개국선포도 없었어.’
‘나, 나는 신국의 신민이 아니야. 나는 불교 신자야. 마교의 교리 따윈 안중에도 없다고.’
‘나는 도교신자야. 태상노군을 받드는 사람이라고.’
‘나도 마교와는 거리가 멀어.’
웅성웅성.
병사들 사이에 큰 소란이 일었다.
하다 보니 이곳까지 오긴 했지만, 솔직히 신국이란 얼토당토않은 깃발 아래 목숨을 걸고 싶은 마음은 눈곱만큼도 없었던 거다.
‘됐다. 이대로 해체시키면 다들 알아서 돌아가겠어.’
그 분위기를 용무린이 정확히 짚어냈다.
행동 개시!
용무린의 손이 까딱하고 장난스럽게 움직였다.
우우웅. 둥실. 둥실. 두둥실.
잠시 묵직한 공명음이 일더니 자신들의 새로운 왕이 되었던 곽무웅과 휘하 핵심제장들, 관리들의 몸이 허공으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가히 천인지경에 달한 허공섭물의 한 수.
검이나 작은 물건 따위를 움직이는 것을 뛰어넘어 십여 명에 이르는 사람을 통째 들어 올리다니!
“허억.”
“이, 이럴 수가!”
화들짝 놀라 내지르는 경악성을 뒤로 하며 곽무웅과 그의 핵심 수하들은 계속해서 떠올랐다. 용무린의 뒤에 얌전히 모여들었다.
그들 따위 안중에도 없다는 듯 용무린의 시선은 칠만에 이르는 병사들에게로 향했다.
“그동안 수고했다. 너희들에게 죄가 없음을 나 황룡패주가 잘 안다. 돌아들 가라. 가족들이 기다리고 있는 집으로 어서 돌아들 가.”
그 말이 끝이었다.
둥실. 스스슷.
허공에서 방향을 튼 용무린은 북쪽을 향해 미끄러져 나갔고 그 뒤를 따라 곽무웅과 그와 함께 반란을 획책한 핵심 수하들이 얌전히 따라 움직였다.
그것으로 반란은 끝이었다.
챙그랑.
“난 집에 갈래.”
칼을 벗어 던진 천호장을 시작으로 너나할 것 없이 무기를 바닥에 내던진 병사들이 진중을 이탈하기 시작했다.
챙그랑. 챙그랑.
“나도 갈래.”
“나도 돌아갈 테야. 내 새끼들이 너무 보고 싶어.”
“나도, 나도…….”
병장기 내던지는 현상이 들불처럼 번졌다.
잠깐 사이 거의 모두가 무기를 내던지고 자신들의 집을 향해 돌아가 버렸다.
***
콰두두두! 콰두두두두!
남쪽을 향해 거침없이 말을 달리는 십만여 명의 기병들.
정벌군의 선발대에는 총병관 양문광과 유격장군 양경홍 그리고 양가장의 장로들과 정예들이 포진해 있었다.
“모두들 힘을 내라! 내일 중으로 악록산 아래 진을 칠 것이다.”
그렇듯 양문광이 병사들을 채근할 때였다.
지평선 쪽에서 하나의 점처럼 보이던 존재가 어느새 눈앞으로 훅 가까워졌다.
“오오!”
양문광의 눈이 둥그렇게 휘었다.
용무린을 알아본 것이었다.
“멈추어라.”
즉시 손을 들어 기병들을 세웠다.
콰두두. 콰두두두두.
뽀얀 흙먼지를 불러일으키며 기병들이 속도를 줄였다. 이내 멈춰 섰다. 과연 총병관과 함께 북방에서 계속된 전투를 해온 강병들다운 움직임이었다.
양문광과 양경홍을 비롯한 수뇌부가 일제히 말에서 내렸다. 너무나도 가볍게 자신들 앞에 떨어져 내리는 용무린을 향해 고함을 질렀다.
“황룡패주를 뵈오이다!”
“황룡패주를…….”
우르릉!
십만여 명의 기병이 동시에 내지르는 고함소리에 산천초목이 덜덜 떨었다.
용무린의 뒤에 얌전히 따라올 수밖에 없었던 자칭 2대 신국의 황제 곽무웅과 휘하 제장들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 버렸다.
“됐습니다. 어서 일어들 나세요.”
“감사하옵니다, 패주.”
“하명하소서.”
모두가 일어난 후 용무린은 뒤를 향해 빙긋 웃어 보였다.
“먼 길 오셨는데, 내가 먼저 손을 좀 썼어요.”
“……!”
무슨 뜻인지 잘 알고 있다는 듯 양문광의 눈빛이 싸늘해졌다.
와들와들.
곽무웅과 수하들의 몸이 마구 떨렸다.
금제를 당한 터라 옴짝 달싹도 할 수 없는 처지였지만, 그래도 몸은 사시나무처럼 잘도 떨렸다.
피식.
풀썩 웃어 보인 용무린의 입에서 천만뜻밖의 부탁이 흘러나왔다.
“황상께 혈고의 일을 떠올려 주십사 고해 주세요. 이들 역시 음양신마로 인해 여기까지 오게 되었을 뿐, 실제 반란을 할 생각은 아니었다고 말이에요.”
“패, 패주. 그 말씀은…….”
양문광의 눈이 동그래졌다.
용무린의 말은 역적의 수괴들을 살려주라는 말과 같았기 때문이었다.
“어차피 결정은 황상께서 하실 거예요. 그렇지요?”
“그, 그거야 물론…….”
양문광이 말꼬리를 늘였다.
용무린이 빙그레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 말을 전하는 것으로 총병관께서는 해야 할 일을 다 하게 되는 겁니다. 나머지는 황상이 감당해야 할 몫, 피를 흘리는 것도, 인정을 베푸는 것도 모두 그분께서 짊어질 겁니다.”
“…….”
양문광은 쉽게 답을 하지 못했다.
말뜻이야 알지만, 어째서 이렇게까지 해주는 것인지 선뜻 이해를 할 수 없었던 거다.
‘감숙의 전장에서는 그야말로 군신과 같은 위엄으로 거침없이 적들을 쓸어버리던 분이셨는데…….’
그때의 용무린과 지금의 용무린은 눈빛부터 달랐다.
초연하다고나 할까?
‘아니, 내가 속한 세상이 아닌 전혀 다른 곳에 속한 존재가 되신 것만 같구나.’
인간이되 이미 인간을 벗어난 것만 같았다.
‘하긴, 일신에 지닌 그 무력만 보자면 이미 인간이라고 볼 수 없을 지경이긴 하지.’
그렇게 생각하니 마음이 편해졌다.
입가에 떠오른 그 미소를 읽어냈는지 용무린이 부드럽게 말을 이었다.
“반란군들은 지금쯤 와해되었을 것입니다. 굳이 이렇게 달려가서 죄 목을 날려버릴 필요가 없어요.”
사실이었다.
용무린에게서 집으로 돌아들 가라는 말에 무기를 내던지기 시작한 좌군도독부의 반란군들은 그 날 해가 떨어지기 전에 해산되어 버렸다.
하나도 남기지 않고 본래 있던 곳을 향해 떠나갔다.
음양신마가 세운 신국(神國)의 종말인 셈이다.
“알겠습니다, 패주. 확인 후 최후까지 남아 일을 도모하는 무리만 따로 선별해 섬멸하기로 하고 나머지는 황상의 충신들로서 자진해산을 한 것으로 보고하겠습니다.”
씨이익.
용무린이 밝게 웃어 보였다.
“바로 그거예요. 굳이 불필요한 피 흘림을 부채질 할 필요가 없는 거라고요.”
“……!”
양문광의 눈이 동그래졌다.
더없이 밝게 웃는 용무린의 등 뒤로 황금빛 찬란한 후광이 순간적으로 뿜어졌다 사라졌기 때문이었다.
“감숙의 전장에서야 그리 하지 않으면 수없이 많은 피를 더 흘려야 했으니 부득이하게 인명을 거둬야만 했지만, 이곳의 관병들은 애초에 적이 아니었어요.”
“그거야 뭐…….”
어깨를 한 번 으쓱해 보인 양문광이 선선히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무슨 말씀이신지 잘 알아들었습니다, 패주. 너무 심려치 마십시오. 황상께서 쾌차하고 일어나시면 제가 잘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쾌차? 황상께서 어디 병환이 있으신가요?”
“예, 패주. 그것이 어떻게 된 일이냐면…….”
“……!”
양문광의 말이 이어질수록 용무린은 기가 막혔다.
‘세상에. 너무나 좋아도 사람이 정신을 잃거나 잘못 될 수도 있는 것이로구나.’
황제가 바로 그런 경우였다.
용무린의 대승.
황제를 참칭했던 음양신마의 소멸과 함께 반란군을 직접 상대할 것이라는 희소식에 기뻐서 방방 뛰더니 그만 뒷목이 뻣뻣하게 굳어 뒤로 넘어가버린 것이다.
“하여튼, 현재 많이 회복되셨다는 소식입니다.”
“저를 찾으시던가요?”
당연히 그럴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그것은 아닙니다. 그저 완벽한 마무리를 부탁한다는 당부가 전부셨습니다.”
“그렇군요.”
하긴, 그게 먼저이긴 하다.
“수고하세요,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어디로 가십니까, 패주?”
“전군도독부 관할지역을 한 바퀴 크게 돌 작정입니다. 이미 한 바퀴 돌긴 했는데, 신교의 잔당들 정리를 하자면 아무래도 한 번 더 돌아봐야 해서요.”
잠시 뜸을 들인 양문광이 결연한 얼굴로 불쑥 다른 말을 입에 담았다.
“……주약란 옹주님과 제 손녀인 하린이가 비룡문으로 향했습니다.”
생각지도 못한 소식이었을 거다.
예전처럼 극구 거부를 할 것만 같아 양문광은 물론이고 아비인 양경홍까지 심장이 쿵쾅거렸지만 용무린은 놀랍게도 씽긋 웃었다.
“예. 머지않아 보게 되겠네요. 알겠습니다.”
그 말을 끝으로 둥실 떠올랐다.
물 흐르듯 부드럽게 동쪽을 향해 쏘아졌다.
넋을 놓고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양문광이 갑자기 주먹을 불끈 쥐어 보이며 외쳤다.
“허락하셨다. 패주께서 우리 하린이도 허락하셨어!”
“아버지도 그렇게 느끼셨습니까?”
“그래. 와하하하. 이제 되었다. 이제 되었어.”
“이 기쁜 소식을 어서 본가에 알린 후 정식으로 사주단자 보낼 준비하도록 하겠습니다, 아버지.”
“오냐. 그리해라. 나는 이대로 패주께서 당부하신 점을 확인하고 체포를 해야 할 인물과 그대로 둬도 될 인물들을 선별하겠다.”
음양신마에 이어 2대 신국의 황제로 올라선 곽무웅의 반란은 이렇게 제대로 펼쳐 보지도 못한 채 허무하게 종말을 맞았다.
***
호북성 무한의 비룡문.
본디 정파무림의 구심점 역할을 하던 하남성 나산현의 무림맹이 유명무실하게 된 후 이제는 어엿한 정파무림의 중심이 되어 있었다.
왁자지껄. 와글와글.
오늘도 변함없이 무림의 중진들이 비룡문주의 집무실에 모여 무림의 대소사에 대해 논의를 하고 있었고 그 아래층에서는 실무진들에 의한 교류가 이뤄졌다.
“2차 신마대전으로 인해 피해를 입은 많은 문파들의 재건을 돕기 위한 방안을 마련해야 합니다.”
“좋은 말씀입니다. 하지만 저는 혈교에 피해를 입은 문파들의 지원책 역시 염두에 두고 회의를 진행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물질적인 도움도 큰일이지만, 피해를 입은 각 문파들의 전력공백으로 인한 주변 흑도 문파들의 역공에 대처할 방안도 마련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렇습니다. 각 성에서 취합되는 정보들을 종합해보면 우리 정파 무림의 정기가 약해진 틈을 타 흑도나 사도의 세력이 득세하고 있다는 정보가 우려될 정도로 많이 들어오고 있습니다.”
“문제는 자금입니다. 흑도나 사도 세력의 득세는 무림맹의 무력단체들을 재편성한 후 전력공백이 심화된 문파들에 일정기간 파견하면 되는데, 그 비용을 그렇지 않아도 피해가 심한 문파들에게 전가할 수는 없는 일이지 않습니까?”
이렇듯 정파무림의 재건과 상처 치유를 위한 논의가 연일 이어졌다.
온갖 이해관계가 얽혀 있고 자금원은 그리 많지 않은 상황이라 회의의 진척은 그리 빠르지 않았다.
하지만 썩어도 준치라고 했다.
이차 신마대전의 후유증으로 무림맹의 사정이 아무리 좋지 못하다고는 하나, 서로의 이해가 상충된다고 목에 핏대만 세우는 집단은 아닌 거다.
적절한 수준에서 결정이 하나씩 내려졌다.
자금원은 그나마 여유가 있는 문파들이 조금씩 더 감당을 하는 것으로 했다.
모자라는 부분은 감숙의 전쟁과 이차 신마대전에서도 별다른 피해를 입지 않은 칠대 상단에 기부금을 요청하기로 결정되었다.
전력공백이 심화된 문파들의 안정과 재건을 돕기 위한 무림맹 무력단체들의 지원은 자금 확보와는 별개로 결의 즉시 이뤄지도록 결정했다.
마교의 전력과 직접 부딪힌 셈인 장강 이남의 문파들의 피해가 너무 심각했기 때문인데, 흑도나 사도문파들의 난립 역시 그쪽이 가장 많기 때문이었다.
이렇듯 연일 숨 막히는 토론과 논의의 나날을 보내는 외원 비룡각의 격렬함과는 달리 내원은 훈훈한 즐거움만이 계속되었다.
“천화야. 할미다. 할미에게 오렴.”
“아니야, 천화야. 고모, 고모에게 와줘.”
짝짝짝. 짝짝짝.
조연옥과 용설화가 손뼉을 치고 입에 두 손을 모아 고함을 질렀다.
배시시.
이제 겨우 칠 개월 남짓 된 사내 아이 용천화가 두 사람의 유난 떠는 모습을 보며 입가에 웃음을 머금었다.
그 모습이 어찌나 예쁘던지!
“아유, 천화야. 할미에게 오라니까-아!”
“아니야, 천화야. 고모! 고모가 널 더 많이 사랑해. 고모에게 와줘-어.”
그럴수록 조연옥과 용설화의 애가 닳았다.
어떻게 해서든 이 의미 없는 자존심 싸움에서 이기고 싶어 했다.
‘어휴. 두 분도 차-암.’
제갈영령은 내심 고개를 흔들었다.
한두 번 보아온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용천화도 마찬가지였던 모양이었다.
두 사람에게서 시선을 돌리더니 엄마인 제갈영령을 향해 녹아 버릴 것만 같은 미소를 지어 보인 후 새로운 얼굴을 향해 고개를 돌렸던 것이다.
“아! 아! 우-!”
의미를 알 수 없는 단음의 연속과 계속해서 쥐어졌다 펼쳐지는 양손, 마치 안아 달라고 하는 듯 쫙 펼쳐진 두 팔과 거절할 수 없게 만드는 천상의 미소.
‘이래도 버틸 수 있어?’ 하듯 자꾸만 달싹이는 작고 앙증맞은 궁둥이까지…….
“호호호. 제가 낙점된 듯한데요?”
“아니, 옹주님. 천화가 팔을 뻗은 방향을 보세요. 그게 어디 옹주님께 뻗은 거예요? 제게 뻗은 거지요.”
이번에는 주약란 옹주와 양하린까지 용천화의 사랑 쟁탈전에 참여했다.
“아니야. 나야. 천화야. 작은 엄마에게 오렴. 천화야-아.”
“옹주님 정말! 에잇 모르겠다. 천화야. 막내 엄마에게 오렴. 천화야-아. 여기. 여기-이.”
손뼉을 치고 입에 두 손을 나팔처럼 모아 부르기도 하고 요란법석을 떨었다.
하지만 그와는 반대로 조연옥과 용설화의 표정은 난감하게 바뀌었다. 안절부절 못하며 자꾸만 제갈영령의 얼굴을 흘깃거렸다.
주약란과 양하린이 대놓고 자신들을 작은 엄마와 막내 엄마 운운했기 때문이었다.
‘이걸 어째. 우리 며늘아기 마음 불편하겠네.’
‘아유, 우리 새언니 난감하겠다.’
그러나 제갈영령의 반응은 놀라웠다.
용무린을 그만큼 믿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심경의 변화가 생긴 것인지, 두 사람의 작은 엄마나 막내 엄마 운운에도 그저 빙그레 웃기만 했다.
용천화의 반응이 더 의미심장했다.
마치 서열을 정해주려는 듯 주약란을 향해 빨빨거리며 기어가 안기더니 볼에 뽀뽀도 하고 힘주어 목을 껴안아주기도 하더니 이내 양하린에게도 손을 뻗어 옮겨 갈 의사를 표현했던 것이다.
“호호호. 녀석이 그래도 순서는 확실하게 알고 있는 게로구나. 으음? 오, 옹주마마. 늙은이의 실언입니다. 심려치 마십시오.”
무심코 의미심장한 말을 뱉어버린 조연옥이 화들짝 놀라 고개를 흔들었다.
듣기에 따라서는 선황제의 고명딸이자, 현황제의 여동생인 주약란에게 ‘본처는 안 되고 후처라면 인정해주지.’ 라고 하는 셈이 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주약란의 반응이 상상 밖이었다.
“아유, 어머니. 앞으로 저는 옹주고 뭣이고 다 아니에요. 그러니 그냥 방금 말씀처럼 편하게 대해주시면 너무 감사하겠어요.”
“저도요, 어머니. 저도 그냥 막내딸처럼 편하게 대해주세요. 예-에?!”
양하린도 지지 않고 싹싹하게 외쳤다.
물론 그럴수록 조연옥은 더욱 난감해했다. 어쩔 줄 몰라 하며 제갈영령의 표정을 살폈다.
한 사람의 여인으로서 제갈영령의 마음을 충분히 이해하고 존중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그 사실을 어찌 모를까?
제갈영령은 조연옥을 향해 한 점 그늘도 없는 환한 미소를 보여 줄 뿐이었다.
이미 용무린과의 사이에서 아들을 보았기 때문일까?
표정이나 태도가 과거와는 완전히 달라졌다.
그때였다.
“으응! 아-앙!”
양하린의 품에 안겨 꼼지락대던 용천화가 내려 달라고 떼를 썼다.
“답답하니 천화? 알았어. 내려 줄게.”
양하린이 바닥에 내려놓기가 무섭게 천화의 엉덩이가 들썩였다. 신나게 몇 번 춤을 추더니 이리저리 둘러보다가 결국 제갈영령을 향해 기어가기 시작했다.
마치 결정을 내려주는 듯 보였다.
순서가 어찌 되었든 가장 중요한 사람은 역시 제갈영령이니 이분의 말씀을 따라야 한다! 라고 행동을 통해 보여주는 듯싶었다.
그때였다.
활짝 열린 문에 갑자기 그늘이 살짝 일었다.
문 앞에 누군가가 나타난 것이었다.
모두의 시선이 일제히 그림자의 주인에게로 향했다.
“……!”
“……!”
사람들의 눈이 동시에 동그래졌다.
무려 수백여 일 만에 보는 얼굴, 누구에게는 아들이었고 또 누구에게는 오빠였지만 제갈영령에게는 하늘같은 지아비인 용무린이었기 때문이었다.
“……!”
“……!”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드디어 이뤄진 부자 상봉의 순간에 그저 가슴 벅차고 떨려와 조용히 숨죽이고 지켜볼 뿐이었다.
제갈영령의 시선을 따라 용천화의 시선도 홱 돌아갔다.
문 앞에 우뚝 서 있는 용무린을 천천히 올려다보았다.
그 후 반응이 놀라웠다.
누구라는 걸 딱히 알려주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이미 상대가 누구인지 알고 있다는 듯 용무린을 향해 활짝 웃어 보였던 것이다.
그리고…….
“우! 우! 아…….”
몇 번에 걸친 별 의미 없는 단음의 연속 끝에…….
“아! 아! 아-뿌-아!”
생각지도 못한 단어를 내뱉고 말았다.
울컥!
용무린의 심장 깊은 곳에서 뜨거운 무엇인가가 격렬하게 치솟아 올랐다.
‘이런 감동이라니!’
완전한 각성을 통해 ‘참나’를 제외한 모든 것들이 그저 스쳐 지나갈 뿐인 허망한 것임을 잘 알게 된 용무린이었지만 이건 또 달랐다.
‘그래서 천륜이라 하는 것이겠지.’
부모와 자식 사이를 달리 하늘에서 이어준 인연이라 부르는 게 아닌 것이다.
용무린의 무릎이 천천히 굽혀졌다.
“오너라, 아들아. 내가 바로 네 아빠다.”
“아! 아! 아-뿌-아!”
핏줄의 끌림이란 이런 것일까?
생전 처음 보는 사람이었지만 용천화는 자신의 아빠인 용무린을 향해 거의 뛰다시피 기어갔다. 활짝 열린 품 안에 쏘옥 안겼다.
“아-뿌-아!”
연거푸 외치며 용무린의 목을 힘껏 끌어 안아주었다.
그 충만함이라니!
‘이제야 알겠다. 세상 모든 것이 허망한 환영일 뿐이지만, 오직 하나 사랑만은 다르구나.’
사랑은 되레 완성으로 가는 지름길임을, 사랑이 없이는 ‘참나’의 빛에 이르지 못함을 비로소 완전하게 자각할 수 있었다.
‘조금 더 경험하길 잘했다. 잘 선택했어, 이 삶.’
그런 만큼 더없이 사랑하고 행복하게 살다가 떠나리라.
나를 사랑하는 모두와 함께 말이다.
용무린의 행복하고 따뜻한 시선이 제갈영령을 향해 살짝 머무른 후 조연옥에게로 향했다.
“다녀왔습니다, 어머니.”
냉큼 달려가 안고 싶었지만 조연옥은 며느리 앞이라 그런지 애써 참았다.
“오냐, 아들아. 고생 많았겠구나. 애썼다.”
“예, 어머니.”
그 다음 용무린의 시선은 제갈영령에게로 돌려졌다.
“나 왔어, 령매.”
아들을 품에 안은 자신의 사내가 활짝 웃으며 인사를 건네 온다. 그 모습을 지켜본다는 것은 얼마나 행복한 일이란 말인가?
제갈영령의 얼굴에 웃음꽃이 만발했다.
뚜벅뚜벅.
용무린이 성큼성큼 다가왔다. 제갈영령 앞에 섰다.
조연옥이 보고 있음에도, 용설화는 물론이고 주약란과 양하린의 시선까지 쏠려 있음에도 아랑곳없이 그녀를 끌어안았다.
아들과 함께 셋이 한 덩어리가 되었다. 서로를 안은 팔에 지그시 힘을 주었다.
“고마워.”
제갈영령의 귓가에 용무린이 가만히 속삭였다.
“이렇게 잘 생기고 건강한 아들 낳아줘서 고마워. 많이 힘들었지? 곁에 있어주지 못해서 미안해.”
진심 어린 고백.
용무린의 뜨거운 진심에 제갈영령은 그간 참아오기만 했던 그리움도, 용무린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의 설움도, 용무린도 없이 아이를 낳아야 했을 때의 두려움도 모두 씻어낼 수 있었다.
“천화라고 지었어요.”
“용천화. 좋은 이름이군. 잘했소.”
“우와-앙.”
질투가 난다는 듯 용천화가 울음을 터뜨렸다.
용무린의 품에서 벗어나려고 발버둥을 쳤다. 제갈영령을 향해 두 팔을 뻗었다.
“배가 고픈가 봐요. 이리 주세요.”
“응? 그, 그런가?”
이미 칠 개월 여를 엄마로 살아온 제갈영령은 더없이 익숙한 동작으로 용천화를 안았다. 저만큼 가서 돌아앉더니 가슴을 풀어 헤쳤다.
“이제 아이를 재워야 할 시간이에요, 가가. 그동안 약란과 하린 두 동생과 환담이라도 나누고 계세요. 아이를 재우고 나면 저도 그쪽으로 갈게요.”
그야말로 파격적인 말이었다.
“응? 으응……. 그, 그래. 알았어…….”
용무린이 얼떨떨한 표정으로 말꼬리를 늘이는 사이 주약란과 양하린 두 여인의 얼굴에는 주체할 수 없는 기쁨의 빛이 번졌다.
“고마워요, 언니.”
“정말 너무 감사해요, 언니.”
이렇게 쉽게 인정을 받을 줄은 미처 몰랐던 듯 두 사람의 얼굴에는 일말의 감격까지 어려 있었다.
“쉬잇. 천화 잠들려고 해.”
하지만 제갈영령은 당연히 그래야 한다는 듯 웃으며 손가락을 입술에 대어 보였다.
“자아, 천화가 잠을 자야 하니 모두들 잠시 자리를 비워주자꾸나.”
조연옥이 나서서 모두를 밖으로 몰았다.
기다렸다는 듯 용설화가 조연옥의 말을 받았다.
“오라버니. 화원에 꽃들이 만발했어. 그리로 가.”
“화원? 알았다.”
조연옥과 용설화에게 등을 떠밀린 용무린과 주약란, 양하린이 화원을 향해 움직인 직후였다.
“고맙구나, 아가.”
조연옥이 제갈영령을 향해 진심을 담아 말을 이었다.
“나 역시 한 사람의 여인으로서, 다는 모르지만 얼추 네 마음을 짐작하고 있다. 다른 여인들과 사랑을 나눈다는 게 결코 쉽지 않은 결단이었을 터인데……. 그저 고맙고 미안할 뿐이다.”
“아니에요, 어머니. 그저 제 생각이 조금 달라졌을 뿐, 진작 마음을 열지 못해 미안할 뿐이에요.”
묘한 눈으로 제갈영령을 지켜보던 조연옥이 단호한 목소리로 쐐기를 박았다.
“하늘이 두 쪽 나는 한이 있더라도 네가 비룡문의 첫째 며느리다. 더불어 비룡문의 차기 안주인이니 네 지위는 반석과 같을 것이다.”
“감사해요, 어머니. 저는 그냥 지금 이대로도 만족할 뿐이에요.”
“그래. 네가 정녕 그렇게 생각하고 있음을 알기에 나 역시 더욱 고마울 뿐이다. 쉬어라.”
조연옥도 그렇게 밖으로 나섰다.
제갈영령은 활짝 열린 창밖을 통해 뭉게뭉게 피어나는 구름을 보며 누군가의 얼굴을 그렸다.
“언니! 미안해요. 내생에서는 언니가 저보다 우위에 서겠지요? 그때 실컷 저를 힘들게 해 주세요.”
글썽.
제갈영령의 눈에 눈물이 고여 들었다.
구름 속의 백리소옥이 그러지 않겠다는 듯 고개를 흔드는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
용무린의 복귀!
비룡문에 커다란 연회가 준비되기 시작했다.
이차 신마대전을 정파 무림의 승리로 종식시키고 음양신마에 이어 반란까지 일거에 쓸어낸 용무린의 복귀를 환영하는 뜻에서였다.
용무린은 그리 원하지 않았지만 이차 신마대전의 공식적인 종말과 승리 선포가 있는 것이 무림 안정에 좋을 것 같다는 용대명의 제안에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개방과 하오문이 즉시 소문을 퍼뜨렸다.
지금으로부터 달포 후 비룡문에서 커다란 연회가 개최되고 그 연회를 통해 이차 신마대전의 공식적인 종전과 승리 선포가 있으리라는 소문.
“우와. 승리 선포.”
“생각 잘했네. 비룡문에서 하는 것이 마땅하지.”
“아무렴. 실질적인 무림맹 역할을 해온 곳이 바로 비룡문이잖아.”
“어디 그뿐인가? 신마에 이어 음양신마의 목까지 댕겅 베어낸 황룡패주 무림왕의 본가잖아.”
“무림의 명숙들이 죄 모여 들겠지?”
“나도 가보고 싶다.”
소식을 듣게 된 모두가 기뻐했다.
알게 모르게 잠식하고 있던 마교의 두려움과 신마대전의 불안함을 달포 후에 있을 승리 선포를 통해 미리 씻어낼 수 있었다.
“네까짓 게 거길 왜 가냐?”
“푸흐흐. 누가 널 받아주기나 한대?”
연회에 가보고 싶다는 친구에게 험한 소리를 쏟아냈지만 곧 반격이 있었다.
“이런 바보들을 봤나? 황룡패주 무림왕께서 그 뒤에 하셨다는 말씀 몰라?”
“또 무슨 말씀을 덧붙이셨다고?”
“그게 뭔데?”
“이런 바보들. 한 번만 말할 테니 귓구멍 씻고 똑똑히 들어라.”
“그래그래. 어서 말이나 하라고.”
“황룡패주 무림왕께서 이르시길, ‘이번 승리는 정파 무림 모두의 노력에 의한 것이니만큼 연회에 참석할 자격은 모두에게 있다. 원하는 사람은 누구나 오라. 좋은 술과 식사를 제공하겠다.’ 라고 하셨단 말이다.”
“오오!”
“그게 정말이야?”
“그렇다니까, 이 바보야.”
“그럼 나도 간다.”
“나도 갈 테다. 나 역시 정파 무림의 일원, 지난 이차 신마대전에 미약한 힘이지만 나도 손을 보태긴 했다고.”
“하긴 나도 마교 놈들과, 놈들이랑 붙어먹은 군사들 움직임을 개방에 알리는 일을 하긴 했어.”
“그럼 우리 모두 같이 가자.”
“좋아. 가보자, 비룡문으로.”
그렇듯 무림은 모처럼 만의 기쁜 소식에 들떴다.
함께 기뻐하며 승리를 자축했으며 연회 참가를 위해 먼 길을 떠났다.
***
그렇듯 전 무림이 기뻐하고 있을 때, 오직 한 곳 자금성만큼은 분위기가 무거웠다.
승전보에 기뻐하다 쓰러졌던 황제 때문이었다.
놀라운 속도로 회복하고 있다고는 하지만 아직은 조심스러웠던 것이다.
건청궁 깊은 곳.
황후와 황귀비, 비, 빈들이 죽 늘어서 지켜보고 있는 가운데 세 명의 어의가 돌아가며 황제를 치료하고 있었다.
“후우.”
마지막 침을 뽑아낸 어의가 비로소 참았던 숨을 길게 내쉬었다.
“황상의 용태는 어떠하신가, 어의?”
황후가 기다렸다는 듯 질문을 던져왔다.
침을 뽑아낸 수석어의가 활짝 웃으며 고개를 조아려 대답했다.
“이제는 걱정하지 않아도 될 듯하옵니다, 황후마마. 기혈이 막히는 곳이 없사옵고 의식이 명료하니 이제는 완쾌되었다고 보아도 무방할 듯싶사옵니다.”
“오오. 고마운지고…….”
감격에 겨운 황후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그 사이 몸을 일으킨 황제가 자신을 둘러싼 황후와 황귀비, 비, 빈 들을 돌아보며 핀잔을 주었다.
“고가 뭐라 하였소? 괜찮다는데 호들갑은…….”
그러면서 손을 내저었다.
신분을 가리지 않은 축객령을 내렸다.
“이제 그간 밀린 정사를 돌보아야 하니 어서들 나가 보시오. 어서.”
전에 없던 반응이라 고개를 갸웃했지만 황후는 이내 몸을 일으켰다.
“그러셔야 성군이신게지요. 천첩들은 이제 물러가겠사옵니다, 폐하. 하지만 이제 막 회복한 뒤끝이니 옥체 보중하시며 정사를 보셨으면 좋겠사옵니다.”
“보중하소서, 폐하.”
“보중하소서.”
황후를 따라 황귀비, 비, 빈들도 모두 일어섰다.
아쉬운 시선을 남긴 채 자신들의 침전으로 사라져 갔다.
반짝.
홀로 남은 황제의 눈에서 섬뜩한 빛이 튀었다.
“크흐흐……. 제대로 되었구나.”
뜻 모를 말을 뱉으며 길게 웃었다.
입술을 삐쭉 말아 올리며 알 수 없는 말을 계속해서 내뱉었다.
“이제야 겨우 다 잡아 먹었네.”
잡아먹었다고?
그랬다. 황제는 황제이면서 황제가 아니었다.
겉은 황제와 같되 내면은 완벽히 다른 존재인 배교의 19대 교주 해무광으로 바뀌어 버린 것이다.
“이 육체가 나 해무광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노리고 있던 껍질이라는 것은 너도 몰랐을 것이다, 독고황.”
생각하면 할수록 통쾌했다.
수많은 고비를 넘고 넘어 이렇게 성공 해내다니!
“마신께서 돌봤음이야…….”
해무광은 믿지도 않는 마신까지 들먹이며 기뻐했다.
하긴 그도 그럴 것이 이 육체마저 용무린에게 들킬 뻔했기 때문이었다.
용무린이 황룡패주로서 황실에 드리워진 암운을 거둬낼 때, 그때 분명히 확인을 했었다. 황제의 몸에 깃들어 있던 기이한 점과 같은 기운들을…….
“푸흐흐. 놈이 천년동안 이어져 온 배교의 환혼대법에 대해 알 리가 없지.”
검마종에 펼쳐둔 대법이 깨어질 때도 그러했고 잠강 일대에서 축융궁 마인을 잡았을 때도 심장과 두뇌에 새겨놓은 대법의 흔적을 찾아내긴 했었다.
하지만 용무린은 어딘가에서 이와 비슷한 것을 보았다는 생각만 했지 그 알 수 없는 기운이 점처럼 뭉쳐진 것이 확실히 황제의 몸을 치료할 때 감지했던 것과 같은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못했던 것이다.
“감쪽같이 속아 넘어갔겠지?”
불사마력을 한꺼번에 뿜어내 놈의 눈을 가렸다.
그 후 음양자의 기억만 남긴 채 진악을 분리해 본체는 빠져 나왔다.
그러했기에 음양자가 불사마력과 고려의 옛 법 대신 한참 떨어지는 규천마력과 천마삼검을 펼쳐 용무린에게 대항을 했던 거다.
“흠. 그동안 어떤 일들이 벌어졌나?”
제물의 ‘참나’를 완전히 잡아먹는 시간은 보통 백 일 정도 걸린다. 이번에도 비슷한 시간이 흘렀을 거다.
딸랑. 딸랑.
배교주 해무광은 즉시 장인태감을 불러 들였다.
“찾아계시옵니까, 폐하.”
“그래.”
황제는 장인태감에게 자신이 정신을 잃고 있던 기간 동안 조정의 분위기와 정사를 처리해 나간 방향에 대해 여러 가지 질문을 던졌다.
“……그래서 북원과는 방금 말씀드린 조약을 빌미로 매해 조공을 받는 것으로 일단락을 지었사옵고, 반란을 획책했던 전군도독부는 황룡패주께오서 잡아들인 수뇌부 십오 인을 동창의 관리 하에 투옥시켜 두고 있사옵니다.”
“그래. 알겠다.”
황제가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이 정신을 잃고 있는 사이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것인지 대부분 파악할 수 있었다.
‘젠장. 기반을 깡그리 잃은 셈이로군.’
팔십여 년 동안 준비해 왔던 모든 것들이 망가졌다.
어찌나 깔끔하게 쓸려 나갔는지 허탈한 마음도 들지 않을 정도였다.
‘뭐, 상관없어. 그래도 나는 성공했으니까.’
진정한 황제의 자리에 올랐으니 주도권은 이제 다시 내게 넘어 온 것이다.
‘이때를 위해 예행연습까지 하며 황제 놀이를 했잖아. 잠자리의 사소한 버릇까지 다 흡수했으니 황후나 다른 계집들에게도 들키지 않을 거야.’
이제 남은 것은 어떻게 다시 예전의 힘을 회복하느냐, 하는 것이었다.
‘동창과 군부의 힘을 이용하면 자시 생 동남동녀 모아 오는 일이 훨씬 더 쉽겠지?’
일 자체는 당연히 더 쉬워질 것이다.
동창과 군부의 힘이라면 각 성에 은밀히 명령을 전달해 누구의 눈에도 띄지 않게끔 아이들을 모아 건청궁 지하에 입구가 있는 황궁무고에 데려다 놓을 수 있다.
‘하지만 지금 당장 그렇게 하려다가는 공연한 의심을 살 수도 있단 말이야. 총병관 놈과 동창도 자시 생 동남동녀에 관한 정보를 알고 있을 테니까.’
언제나 그렇지만 시간은 항상 내 편이다.
천천히 하면 된다, 천천히.
‘아니, 굳이 좋지 못한 소문이 돌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내가 그럴 필요도 없긴 해.’
황제가 되어 좋은 점이 뭔가?
팔십만에 달하는 금군의 통솔권이 자신에게 있지 않은가?
마교의 저력과도 견줄 수 없는 강력한 힘이다.
‘총병관을 통해 팔십만 금군을 몽땅 움직여 비룡문을 습격하라고 시킨다면?’
독고황이야 당연히 몇 명을 보내도 어쩔 수 없겠지만 그의 부모와 가족들은 그렇지 못하리라.
‘그렇게 하면 놈이 나와 담판을 짓기 위해 바로 이곳으로 찾아오려나?’
그러면 큰일이다.
놈이 자신을 보면 분명히 뭔가 달라진 것을 눈치 챌 것이다. 검마종에 이어 축융궁의 마인까지 두 번에 걸친 껍질 소멸의 경험이 있으니 틀림없다.
‘일단 놈과 마주치면 안 돼.’
일단은 놈과 거리를 유지시켜 놓아야 한다.
그 후 힘을 되찾는 한편 군사들을 시켜 놈의 부모형제를 볼모로 잡는 게 좋다.
‘총병관을 일단 내 사람으로 바꿔야만 해.’
공로가 큰 만큼 반발도 크겠지만 반대로 생각하면 공로가 너무 크니 더 쉬울 수도 있다. 양문광의 충성심이 강하면 강할수록 그 일은 쉬워진다.
“총병관은 지금 어디에 있지?”
“머지않아 있을 비룡문의 연회에 참여하기 위해 며칠 전 길을 떠난 것으로 알고 있사옵니다.”
“비룡문의 연회.”
듣기만 해도 속이 쓰렸다.
이차 신마대전과 반란군 평정 모두 자신을 상대로 거둔 승리였기 때문이었다.
“예, 폐하. 그렇지 않아도 조정의 중신들이 연거푸 큰 공을 세운 황룡패주와 총병관에게 어떤 포상을 내리는 것이 어울리는지 폐하께 여쭈어 달라 요청하였사옵니다.”
비룡문의 연회에 맞추어 포상을 하면 모양새가 더 나을 것이란 계산에서였다.
백성들의 신망과 인심이 두터운 황룡패주와 총병관에게 포상을 내리는 것은 곧 황제의 성덕을 찬양하는 계기가 되니 조정의 중신들도 거부할 리가 없는 일이었다.
그때였다.
장인태감 채홍이 한 번도 생각하지 못한 말이 황제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살짝 기분이 나쁘군. 가만히 듣다보면 백성들은 고보다 황룡패주나 총병관의 명성을 더 높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단 말이야?”
가볍지만 무서운 말이었다.
흠칫!
장인태감 채홍의 얼굴이 즉시 어두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