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변화의 바람 (99/104)

3.변화의 바람

채홍의 머리가 빠르게 회전했다.

‘설마, 황상께서 황룡패주와 총병관을 정적으로 인식하시기 시작했다는 말인가?’

그렇지 않고서야 이런 말을 할 까닭이 없다.

‘여기서 까딱 잘못하면 나 역시 같은 취급을 당한다.’

황제는 분명히 자신의 내심을 밝혔다.

기분이 나쁘다고 말이다.

여기서 심복과 권력의 중추에서 떨려나갈 외인이 갈리게 된다.

‘분명히 일반 백성들이 황제폐하보다 황룡패주와 총병관의 명성이 더 높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고 말씀하셨단 말이야.’

그렇다면 자신의 답은 명확해진다.

채홍은 최대한의 진심을 담아 입을 열었다.

“폐하께오선 태양이십니다. 황룡패주와 총병관이 작은 명성이 있다한들 어찌 감히 영명하오신 폐하의 성덕에 견줄 수 있겠사옵니까?”

그야말로 모범답안에 다름 아니다.

‘폐하의 마음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어.’

제국을 다스리는 황제의 입장에서 일개 무부인 용무린의 명성과 신망이 백성들에게 더욱 높다는 사실은 그리 좋은 것이 아니었으니까.

‘자칫 잘못하면 옥좌가 위협을 받을 수도 있음이야.’

사람 됨됨이로 보아 그럴 가능성은 적지만, 그래도 혹시 모르는 거다. 자고로 욕망이란 숱한 거인을 검게 물들인 전력이 있으니까.

씨이익.

황제 아니 배교주 해무광이 활짝 웃어 보였다.

“그렇지?”

“물론입니다, 폐하.”

“그런데 말이야. 백성들도 그렇고 문무백관들도 그렇고 자꾸만 고의 권위보다 앞서 말한 두 녀석의 명성이 더 높은 것처럼 생각하는 것 같단 말이야.”

벌써 두 번째다.

은근한 어조로 계속되는 추궁.

사례감 장인태감 채홍은 즉시 오체투지를 했다. 목소리를 높여 뜨겁게 외쳤다.

“폐하. 저 사례감 장인태감 채홍의 태양은 오직 한 분 황제폐하 외에는 없음이옵니다. 말씀만 하소서. 조정에 폐하의 의지를 세워보이겠나이다.”

물밑공작을 시작하겠다는 뜻이었다.

기다렸다는 듯 황제의 탈을 쓴 배교주 해무광이 답했다.

“오오! 장인태감이 한 번 나서줄테야?”

“물론이옵니다, 폐하.”

“좋아. 그러면 말이야…….”

해무광의 말은 계속해서 이어졌고 채홍은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눈을 빛냈다.

***

사흘이 흘렀다.

황제는 계속해서 와병을 핑계로 조정에 나서질 않았다.

건청궁에 칩거를 한 상태에서 황후나 황귀비 비, 빈들에게도 곁을 내어주지 않은 채 오직 한 사람 장인태감만 접촉했다.

누가 봐도 장인태감 채홍에게 힘을 실어주는 모양새가 되었다.

“명심해야 하오.”

그렇게 받은 힘을 앞세워 채홍은 삼공과 삼고를 비롯한 조정의 중신들과 은밀히 독대하는 시간을 가졌다.

“황상께오서 황룡패주와 총병관을 정적으로 생각하기 시작했소이다.”

“그게 정말입니까?”

“정녕 그 말이 참이오?”

“물론입니다. 두 사람을 싸잡아 말씀하셨지만 사실상 주적으로 황룡패주를 상정하신 듯합니다. 총병관이 언제나 황룡패주의 오른팔이 되어 전면에 나섰기 때문입니다.”

채홍의 판단이 옳았다.

누가 봐도 황룡패주 용무린과 총병관은 같은 급이 될 수 없는 노릇이었다.

“허어.”

“그럴 수가…….”

이야기를 들은 모두가 놀라워했다.

황제와 황룡패주가 그간 보여준 두터운 교분과 우의는 절대로 깨지지 않을 불변의 것이었다.

그런데 정적이라니!

‘충분히 이해할 수 있어.’

‘한신도 그러했지 않은가?’

‘어디 한신뿐이겠는가? 알아서 떠나지 않았던들 손무께서도 솥에 삶겼을걸?’

그것이 바로 권력이란 것의 무서운 속성 아니겠나?

모두는 불행하고 무서운 일이 시작되리라는 것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몇 번이고 의중을 확인했습니다. 그러니 결정하십시오. 황제폐하의 힘이 되어 주실 것입니까? 아니면 정적인 황룡패주의 편에 서실 것입니까?”

물어보나마나 아니겠는가?

“황상의 녹을 먹는 관리로서 태사인 나 공운생, 황상께 힘이 되어드리지 않는다면 당장에 죽어 마땅할 것이오.”

“나 태보 공백승 황상께…….”

“태부 진일랑…….”

만나는 족족 황제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불과 사흘.

그동안 채홍이 만난 삼공과 삼고를 비롯한 조정의 중신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의견을 같이했다.

아니, 채홍의 제안을 내심 반겼다.

내각대학사로 돌아온 제갈문군과 총병관에게 줄을 댄 중신들에게 밀려 쫓겨나기 일보직전이었던 만큼 새롭게 생긴 줄을 콱 붙잡았다.

***

태화전 조회시간.

갑자기 바뀐 분위기에 제갈문군은 적잖이 당황했다.

“일개 무부에 불과한 비룡문에서 벌어지는 연회 따위에 조정 차원에서 축하사절을 보내는 것은 조금 과한 일이라고 생각하오.”

“저 역시 그렇게 생각합니다.”

“맞습니다. 세운 공이 제법이기는 하나, 그리하면 황상의 영명에 폐가 되오이다.”

“옳은 말씀입니다. 이 모든 것이 황상의 성덕에 힘입은 것인 줄 모르는 천것들은 지금 이 순간에도 황룡패주와 총병관만 입에 올린다고 합니다.”

“허어. 이런 황망할 데가…….”

“이 나라 산천초목 모두가 황상의 것이고 황상의 성덕에 의해 유지가 되고 있는 것이거늘!”

불과 사흘 전까지만 해도 전혀 다른 분위기였다.

‘그때는 비룡문에 파견할 사절단에 어떻게든 한 자리 끼어 보려고 무진 애를 쓰던 인간들이 어찌!’

기가 막혔다.

사흘 만에 완벽하게 뒤바뀐 사람들이라니!

이제는 한 목소리로 비룡문에 파견할 사절과 선물은 불가하다고 외치고 있었다.

삼공, 삼고, 육부의 중신들.

내각대학사인 제갈문군과 뜻을 함께 하는 소수를 제외하면 모두가 들고 일어나 황룡패주가 세운 공을 깎아 내렸고 무시했다.

‘뭔가 있다. 틀림없어.’

제갈문군의 시선이 한곳으로 향했다.

그곳에 회심의 미소를 지어보이고 있는 장인태감 채홍이 있었다.

***

자금성의 일이 예상하지 못한 방향으로 흐르기 시작한 것을 꿈에도 모르는 용무린은 행복하기 짝이 없는 날들을 보내고 있었다.

“하하하. 천화야. 까꿍!”

“까르르! 아뿌-! 아뿌-아!”

용무린이 품에 안은 채 어를 때마다 용천화가 흐드러지게 웃어댔다.

어찌나 성장이 빠른지 이제 제법 아빠라는 발음을 한다.

게다가 활짝 웃을 때마다 드러나는 앞니 두 개가 어찌나 귀여운지 뭍 여인에게도 담담하던 용무린도 마음을 송두리째 빼앗길 정도였다.

아장아장 걸을 때는 또 어떻고?

보통의 아이들보다 성장이 무척 빠르다고는 하는데, 그것조차 용무린에게는 자랑거리였다.

“쳇! 용 가가 눈에는 우리는 안 들어오나 보네요.”

“용 가가 미워. 흥!”

주약란과 양하린이 질투를 할 정도로 용무린은 용천화에게 푹 빠졌다.

“후우. 이리들 와 동생들. 나도 마찬가지 신세니 함께 차나 마시며 용 가가 흉이나 보자고.”

“예, 언니.”

“호호호. 좋아요. 우리 함께 용 가가 흉이나 봐요.”

제갈영령의 제안에 주약란과 양하린이 반색을 하며 반겼다. 잽싸게 따라 움직였다.

이제 난처해진 것은 용무린이었다.

아이를 사랑하는 마음이야 변함이 없는 것이지만, 경험도 없는 사내가 홀로 독박육아를 한다는 것은 보통 힘든 일이 아닌 것이다.

“흥! 내가 내 아들 하나 제대로 돌보지 못할 줄 알고?”

용무린은 자신만만했다.

신마에 이어 음양신마까지 차례차례 거꾸러뜨린 자신이 젖먹이 아이 하나 돌보지 못할 리 없다고 생각한 거다.

“우와-앙.”

그때 갑자기 용천화가 울기 시작했다.

그 힘찬 목소리로 보아 대변 혹은 소변을 보았으니 어서 기저귀를 갈아달라는 뜻이었을 텐데 그런 것을 용무린이 알 턱이 없었다.

“아들아. 갑자기 왜 그러냐? 배가 또 고픈 것이냐? 방금 먹었으니 그럴 리 없을 텐데…….”

“우와-앙.”

용천화는 더욱 큰 소리로 울어댔고 그만큼 용무린의 가슴 역시 타들어갔다.

“어디가 아픈 것이냐?”

갑자기 화들짝 겁이 났다.

그래서 조심스레 불사신기를 끌어 올린 후 명문혈에 밀어 넣은 후 내부를 관조했다.

일다경 후.

용무린은 심각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디 특별히 아픈 곳은 없어 보이는데?”

“으아-앙. 아-앙.”

이제는 발버둥까지 친다.

어지간히 찝찝했던 모양이었다. 세상 짜증을 냈다.

“대체 뭐지? 내가 감지할 수 없을 정도로 심각한 병환이 잠복해 있는 것인가?”

애는 자지러지게 울고 어째서 그런 것인지는 당최 알 도리가 없고……. 용무린은 처음으로 당황이라는 것을 해보게 되었다.

“미안하다, 아들아.”

“으아-앙.”

“제발 좀 그만 울어라.”

“와아-앙!”

“하아. 미치겠네, 정말.”

허드렛일을 하는 시비들이라도 와줬으면 좋을 텐데, 용무린과 아들 사이의 좋은 시간을 방해하지 말라는 엄명이라도 있었는지 당최 코빼기도 볼 수 없었다.

그래서 용무린은 자신이 할 수 있는 방법을 총동원했다.

“천화-아-야! 우루루루 까꿍.”

괴상한 소리를 내며 어르기도 했고,

“아뿌-아! 아뿌-아! 뽀뽀뽀뽀뽀.”

연신 아빠임을 부르짖으며 뽀뽀 공격도 해 보았으며,

“코 자자. 자장자장 내 아들.”

재워보기라도 하려고 품에 안은 채 계속해서 주변을 서성거리기도 했다.

“우와-앙.”

백약이 무효였다.

용무린이 뭘 할 때마다 성질나 죽겠다는 듯 용천화는 발버둥을 치며 울어댔다.

“아오.”

어찌나 당황스럽고 답답한지.

‘참나’의 깨달음이고 나발이고 다 소용없었다.

“젠장. 차라리 내가 아프고 말지……. 어째서 이리 우는 것인지 알 수만 있으면 좋겠군그래.”

그렇게 넋두리를 다 할 때였다.

스멀스멀.

한 줄기 구수한 향기가 용무린의 코끝을 스쳤다.

많이 맡아 본 냄새.

‘서, 설마?’

혹시나 하는 생각에 용무린은 잽싸게 아들을 뉘인 후 바지를 벗겨 보았다.

“허억!”

헛숨이 절로 들이켜졌다.

질퍽한 대변이 아들의 엉덩이와 허벅지까지 온통 짓뭉개져 있는 모습이라니!

“우와-앙!”

빨리 안 갈아주고 뭐합니까?

악을 쓰고 울어대는 용천화를 보면서 용무린은 뭘 어떻게 해야 할지 엄두가 나질 않았다.

별 수 없이 용무린은 백기를 들었다.

“령매-애!”

우르릉.

내공까지 잔뜩 돋운 채 제갈영령을 불렀다.

***

용무린이 똥 기저귀와 씨름을 하고 있을 무렵, 자금성에서는 많은 변화가 있었다.

첫째, 하마터면 떨어져 나갈 뻔했던 삼공과 삼고를 비롯한 기득권 세력이 다시금 힘을 얻었다.

황제의 확실한 의지를 받은 채홍과의 교감을 통해 힘을 얻었기 때문인데, 삼공과 삼고 그리고 육부의 대신들은 기사회생한 후 목소리를 높일 수 있게 되었다.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는 게요?”

“한낱 강호 무부의 일이라니!”

총병관 양문광과 양경홍이 눈을 부릅뜨고 목소리를 높였다. 점점 도를 넘는 조정 중신들의 말을 더는 참기 고약했던 것이다.

하지만 중신들의 반격은 갈수록 심해졌다. 모두가 한 목소리로 양문광과 양경홍을 압박했다.

“아니, 그럼 한낱 무부가 아니면 뭐요?”

“황룡패주라지만 조정에 직책이라도 있답디까?”

“지금껏 애써 준 것은 고마운 일이나, 이제 내치를 담당해야 하는 것은 황상폐하의 성덕과 우리 조정대신의 일치된 마음이지 않소이까?”

그러니까 달리 말을 하자면, ‘지금까지 도와준 것은 고마워. 그런데 이제는 우리가 전면에 나서서 해먹어야 하니 곱게 빠져줘.’ 정도가 되겠다.

아드득.

양문광과 양경홍이 이를 갈며 쏘아붙였다.

“제 한 몸 보전을 위해 싸워보지도 않고 주야장천 화친만 도모하던 무리들이 뭐가 어쩌고 어째?”

“황상의 성덕이야 당연한 일이지만 그 뒤에 ‘우리 조정대신의 일치된 마음’ 따위의 말이 왜 붙어?”

“잘 되면 너희들처럼 제 잇속만 생각하는 놈들 덕이고 못되면 다 남 탓인가?”

“더러운 족속들 같으니!”

꾸우욱. 후우웅.

양문광이 진정으로 분노하자 내공이 절로 일어났다.

주변을 송두리째 압박했다. 대신들을 짓눌렀다.

덜컥.

심장이 내려앉는 듯한 충격과 공포가 몰려나왔지만 모두들 힘을 냈다. 장인태감 채홍과 그 뒤에 도사리고 있는 황제를 생각해 힘을 내었다.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지.’

‘여기서 물러나면 황제폐하의 마음속에서도 밀려나는 거야.’

마지막이라는 생각에 악을 썼다.

“무공 높으면 다인 것이오?”

“이곳은 국정을 논하는 조정이오! 감히 군부의 무부 따위가 힘만 내세우는 곳이 아니란 말이오!”

“죽일 테면 죽이시오!”

“어서 손을 쓰시오!”

“우리는 언제나 황상의 성덕만을 믿고 따르는 조정대신들, 두 분 장군의 힘을 당해낼 수 없으니 죽일 테면 죽이란 말이오!”

참으로 기가 막혔다.

“……!”

“……!”

양문광과 양경홍은 너무나 어이가 없어진 나머지 서로의 눈만 멍하니 쳐다볼 뿐이었다.

개구리 떼처럼 와글대는 조정 중신들의 말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던 도중 양문광의 시선이 장인태감에게로 향했다.

“장인태감.”

“말씀하십시오, 장군.”

“지금 당장 황상을 뵈어야겠소.”

전과 같았다면 대뜸 허락이 떨어졌을 테지만 채홍의 입에서는 생각지도 못한 말이 흘러나왔다.

“불가합니다.”

그것이 바로 두 번째 변화였다.

그토록 돈독하던 황제폐하와 총병관인 자신 사이의 관계 변화!

“뭐라? 불가?”

자연스레 양문광의 말꼬리가 높아졌다.

그 서슬에 피어 오른 내공이 채홍의 목줄을 휘감았지만 채홍은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몸이 쾌차하는 즉시 등청을 할 터이니 그동안은 누구도 침전에 들이지 말라는 어명이 계셨소이다.”

말과 동시에 뒤춤에서 어명을 내릴 때 사용하는 황색 두루마리가 나왔다.

쫙 펼쳐지는 두루마리.

그 안에는 너무나 명명백백한 어명이 적혀 있었다.

채홍의 말 그대로였다.

‘설마 또 과거와 같은 일이 벌어진 것인가?’

‘뭔가 수상한데?’

마교의 수족이 된 상관세가에서 황상의 옥체를 억압한 후 이와 비슷한 짓을 한 전력이 있었기 때문에 양문광과 양경홍도 일단 의심부터 하고 봤다.

하지만 지금 당장 확인할 수는 없는 일이다.

“신, 총병관 양문광 황제폐하의 어명을 받드오이다.”

“신, 유격장군 양경홍 황제폐하의 어명을 받드오이다.”

두 사람은 잽싸게 오체투지를 한 후 어명을 받았다.

그때 채홍이 한 술 더 떴다.

“황상께오서 따로 언질을 주셨소이다.”

양문광과 양경홍의 고개가 더욱 깊이 숙여졌다.

채홍의 말이 당당하게 이어졌다.

“감숙의 전장과 호남성의 반란군까지……. 그간 두 장군의 노고가 극심하였을 터, 이제는 그만 집으로 돌아가 편히 쉬라 하셨습니다.”

“그, 그 말씀은 지금…….”

“나, 낙향을 하라는…….”

어찌나 어이가 없는지 양문광과 양경홍은 말을 끝까지 잇지 못했다.

보다 못한 제갈문군이 나섰다.

“어찌 이럴 수가 있소이까? 두 분 장군께서 목숨을 내놓고 싸우지 않았다면 조로스 칸이 어디만큼 치고 들어왔을 것인지 알 수도 없소이다! 한데 낙향이라니! 그것은 토사구팽을 하겠다는…….”

어명은 너무나도 확고했다.

그냥 집으로 돌아가 쉬고 있으라는 어명이었으니 삭탈관직까지는 하지 않겠다는 뜻이었지만 더는 조정에서 힘을 행사하지 말라는 뜻이었던 거다.

“닥치시오, 대학사! 황상께서 내리신 어명에 지금 토를 달려는 것이오?”

“……!”

황상의 어명이라는 한마디에 제갈문군도 더는 나설 도리가 없었다.

‘허허허. 사냥이 다 끝났다 이건가?’

한신 꼴이 난 게로군.

이제는 허탈한 미소를 지어 보이게 된 양문광이 마지막으로 질문을 던졌다.

“이제 집으로 돌아가 쉬라는 어명……. 확실히 황제폐하께서 내리신 어명이오이까?”

“물론입니다, 장군.”

장인태감 채홍이 턱을 바짝 쳐들었다.

오만한 눈빛을 한 채 양문광을 내려다보며 말을 이었다.

“지금 당장 가서 다시 어명을 받아다 드리리까?”

이것이 세 번째 변화였다.

와병을 핑계로 양문광의 독대 요청도 받아들이지 않고 있지만 채홍만큼은 마음대로 찾아가 어명을 받아올 수 있다는 자신감!

“……!”

양문광은 더 할 말이 없었다.

황궁에서 허언은 없는 법이었고, 저토록 자신 있게 내뱉었으니만큼 채홍은 지금 당장 뛰어가 다시 어명을 받아올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별 수 없어진 양문광은 양경홍을 바라보았다.

같은 심정인 양경홍의 고개가 천천히 끄덕여졌다.

두 사람은 동시에 몸을 일으켰다.

건청궁을 향해 다시 한 번 오체투지를 하며 크게 하직인사를 올렸다.

“신 총병관 양문광 어명을 받자와 집으로 돌아가 쉬고 있겠나이다. 언제든 불러만 주소서, 황제폐하의 칼과 방패가 되오이다!”

“신 유격장군 양경홍 어명을 받자와 집으로 돌아가 쉬고 있겠나이다. 언제든 불러만 주소서…….”

그 후 당당히 일어나 돌아섰다.

성큼성큼 태화전을 벗어나기 시작했다.

“푸흐흐. 승리 몇 번에 나대더니 꼴좋다.”

“크크큭. 감히 무부 따위가 우리 조정 대신들을 몰아내려고 수작을 부리더니 잘 됐네.”

나직한 비웃음이 비수처럼 두 사람의 심장을 후볐다.

하지만 주먹만 불끈 쥘 뿐, 두 사람은 아무런 대꾸도 없이 그저 태화전을 벗어나기만 할 뿐이었다.

‘허어. 이 일을 어찌할꼬?’

오직 한 사람 제갈문군만이 적진에 홀로 남겨진 마음으로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

양문광과 양경홍은 패주현으로 돌아가는 대신 오군도독부에 들어앉았다.

명목은 감숙의 전쟁과 호남성 반란군의 뒤처리와 전후 병력 재배치였지만 정보망을 최대로 가동했다. 사력을 다해 혹시 모를 변고를 대비했다.

그동안 사이가 좋았던 덕에 몇몇 태감과 내명부 소속 궁녀들의 입을 통해 황제가 칩거하고 있는 건청궁 내부 소식을 전해들을 수 있었다.

“허어. 설마, 설마 했거늘 사실이었구나. 황상께오서 우리 두 사람을 정적으로 생각하기 시작한 것이었어.”

정보를 모두 취합해 내린 결론이었다.

황제는 혈고로 스며들어온 상관세가 때와는 완전히 다른 움직임을 보여주었다.

일단 건청궁이나 동서육궁을 오가는 모습이 자주 눈에 들어왔다. 그 말은 곧 과거처럼 억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었다.

“그러면서도 장인태감 채홍의 입을 통해서 모든 의사전달을 하고 계시니…….”

그보다 더 확실한 의지의 표명이 어디 또 있으랴?

“허탈합니다, 아버지.”

“허허허.”

양경홍의 억눌린 목소리에 양문광은 초연한 듯 그저 나직하게 웃기만 할 뿐이었다.

자신들이 모셨던 주군이 자신들의 높아진 명성에 부담감을 느끼고 정적으로 생각하기 시작했다는 사실에 더 뭐라고 할 말이 없었던 것이다.

“그냥 집으로 가자꾸나 아들아.”

“아버지! 하지만…….”

양경홍이 목소리를 높였지만 양문광은 그저 가만히 고개를 흔들어 보일 뿐이었다.

그러니 어쩌랴?

그 심정을 모르는 것도 아닌데…….

‘아버지께서는 나보다 더 하시겠지. 평생을 충심 한마음으로 모셔온 황제폐하께 버림을 받은 셈이니.’

결국 양경홍도 체념하는 수밖에 없었다.

“알겠습니다, 아버지.”

“허허허. 잘 되지 않았느냐?”

갑자기 양문광이 웃으며 반문을 해왔다.

“뭐가 말입니까?”

“생각해 보거라. 우리가 계속 조정에 남아 있었다면 곧 있을 비룡문의 연회에도 참석할 수 없지 않았겠느냐?”

“그거야 뭐…….”

“하하하. 황룡패주나 뵈러 가자꾸나.”

“…….”

채 지워내지 못한 미련과 허무함에 양경홍은 물끄러미 양문광의 얼굴을 바라보았고 양문광은 미련을 모두 떨쳐낸 얼굴로 호탕하게 웃으며 채근했다.

“하하하. 가서 담판을 짓자. 우리 하린이와 언제 혼례를 치르실 것이냐고 말이다.”

그걸 잊고 있었다.

그리고 그 문제 해결을 위해서라면…….

“좋지요.”

씨이익.

양경홍도 결국 웃기 시작했다.

“좋습니다, 아버지. 가시지요 비룡문으로.”

“오냐. 가자.”

그렇게 두 사람의 비룡문 행이 결정되었다.

***

조정에 홀로 남겨진 제갈문군의 처지는 날이 가면 갈수록 점점 더 고립무원이 되어갔다.

“아무리 회심을 했다지만 반란군 수뇌부들입니다. 그런 놈들을 다시금 중용해 전군도독부의 관리로 재임명한다는 게 말이나 되는 일입니까?”

참으로 기가 막힌 일이었다.

저잣거리에 내걸고 만인이 보는 앞에서 목을 베어도 부족할 판국에 용서한단다.

‘아니, 용서하는 것은 그렇다고 쳐. 다시금 전군도독부를 놈들의 손에 맡긴다니! 그게 말이 되냐고?!’

그것만큼은 도저히 찬성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제갈문군은 자신을 따르는 최대한의 힘을 모아 조정에서 반론을 제기했다.

“맞습니다. 이것은 전례가 없을 일이기도 하거니와 자칫 좋지 못한 선례를 남겨 마음 놓고 모반을 일으킬 단초를 제공할 수도 있는 일입니다.”

“예하 병사들이야 단순참여에 자진해산을 했으니 이해할 수 있는 일이지만 그들은 다릅니다. 반드시 참해서 일벌백계를 해야 합니다.”

하지만 소용이 없는 일이었다.

이미 완벽하게 노선을 갈아 탄 조정 중신들의 단결력은 놀라울 정도였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 바로 황상의 어심 아니겠소이까?”

“우리는 그저 황상의 어심을 받들어 정사를 돌보면 되는 일이오이다.”

“황상께서 크나큰 은혜를 베풀려 하시는데 내각대학사가 무엇이라고 막으려 드는가?”

“이미 잘못을 아는 이들에게 개과천선의 기회를 주시려는 황상의 크나 큰 어심을 정녕 모르겠다는 말인가?”

모두가 한 덩어리가 되어 제갈문군과 그를 따르는 관료들을 몰아붙였다.

개과천선의 기회.

물론 그 말만 들어서는 좋은 취지다.

아마 다시금 기회를 얻은 전군도독부의 전임 좌, 우 도독이나 예하 수뇌부들은 그야말로 뼛속까지 황제를 따르는 충신이 될 가능성이 있다.

‘하지만 그래서는 우리가 무엇이 되나? 신교와 붙어먹은 것으로도 모자라 스스로 황제를 참칭한 좌 도독까지 깡그리 복권을 시켜 주면 그와 맞서 싸운 황룡패주나 총병관은 어떻게 해?’

이제는 황제가 왜 이런 무리한 짓을 하는지 알게 됐다.

황제는 불안했을 것이다.

몇 번의 전란을 연거푸 겪으며 떨어진 황권의 위상과 더불어 하늘까지 뚫을 듯 치솟는 황룡패주의 명성은 큰 위협으로 다가왔으리라.

‘황룡패주의 조정 내 가장 큰 조력자는 다름 아닌 총병관과 내각대학사인 나…….’

그 중 가장 위협적인 총병관에 실린 힘을 줄인 후 그 대척점에 전군도독부 좌도독을 세우려 했으리라.

‘그래도 이건 너무하잖아.’

목을 베는 것까지도 바라지 않는다.

음양신마에 이어 감히 황제를 참칭한 전군도독부 좌 도독과 예하 제장들을 멀리 귀향 보내 따끔하게 혼내주는 정도만 해도 만족할 수 있었다.

‘그런데 그냥 복권이라니! 아무리 황제폐하께서 정적인 황룡패주에 맞설 세력 모으기에 혈안이라고 해도 이건 정말 너무 심한 처사란 말이야.’

황제가 정녕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고 한다면 그냥 솔직히 말만 하면 되는 일이었다.

-치솟는 너희 명성으로 인해 황제로서의 내 지위와 입지가 흔들리는 기분이다. 걱정도 되고 부담도 돼. 이런 내 마음 이해할 수 있지?

그렇게 한 마디만 하면 됐다.

그랬다면 기꺼이 웃으며 모든 것을 내려놓고 떠나올 수 있었을 터인데 이렇듯 엉뚱한 곳에 힘을 실어 줌으로써 배척하는 것은 견디기 힘들었다.

‘결국 이렇게 되는 것이 권력의 본질인 것을…….’

이제 조정과 대신들 사이에 부대끼는 일 따위 신물이 나기 시작한 제갈문군이었다.

“모든 정사는 황상께서 바라고 원하시는 대로 이루어질 뿐이외다.”

“맞소이다. 전군도독부의 좌 도독은 필시 새로이 태어난 것처럼 황상께 충성을 할 것입니다.”

“이를 말씀입니까?”

“당연한 일입니다. 연이은 난리로 불안에 떠는 양민들을 안정시키는 일에도 크게 도움이 될 것이외다.”

삼공과 삼고를 비롯한 육부의 대신들은 이미 완벽한 적으로 돌아섰다.

총병관과 제갈문군의 세력에 밀려 낙향을 당할 처지에서 다시금 권력의 중추로 화려하게 복귀를 했다.

그 모두가 황제 덕이었다.

채홍을 통해 황룡패주와 총병관의 드높은 명성을 견제하고자 하는 황제의 의지를 똑똑히 전달 받았기 때문에 다시 기회를 잡은 것이다.

‘허허허. 이런 더러운 곳에 굳이 내가 더 버티고 있을 필요가 있을까?’

제갈문군의 생각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이런 상황이라면, 제갈세가의 가주로서 세가 인근의 양민들을 돌보는 것보다 할 수 있는 일이 없지 않은가?’

환멸이 났다.

양문광과 양경홍 두 사람처럼 낙향을 떠올렸다.

황제의 의중이 이미 자신을 정적의 하나로 보는 이상 올바르게 정사를 보아 양민을 보살핀다는 생각은 접어야 했기 때문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황상께서 확실한 의중을 가지고 중신들을 조종하고 있다는 것인가?’

이대로 자신이 떠난다고 하더라도 중신들 따위에게 황제가 휘둘릴 것 같지 않았다.

‘황상께서 사냥이 끝나기가 무섭게 패주와 총병관을 토사구팽을 해버리는 과감함을 보이셨으니 그 사냥이 끝나면 중신들 역시 싹 쓸어버리시겠지.’

그래서 그나마 마음이 놓인다.

제갈문군의 내심도 천천히 자금성을 떠나 저 멀리 호북성 성도 무한으로 향했다.

‘허허허. 이 기회에 나도 떠나야겠구나.’

이럴 바에야 차라리 마음이라도 편하게 세가의 힘을 키우고 인근 양민들의 삶에 보탬이 되는 편이 더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커져만 갔다.

***

자금성의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따위 알 바 아니라는 듯 용무린은 행복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꺄하하. 아뿌-아. 엄무-우.”

눈만 마주치면 활짝 웃어 주며 비틀비틀 걸어와 품에 포옥 안기는 용천화와 더불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일상을 보냈다.

‘아오, 제발 잠 좀 푹 자주라 아들아.’

불만이 한 가지 있다면 바로 그것이었다.

용천화가 당최 잠을 푹 자지 않는다는 것, 아니 잠귀가 너무 밝다는 것이 문제였다.

“령매.”

“가가.”

피 끓는 젊은 부부 아닌가?

모처럼 만에 만난 사이에다 서로 깊이 사랑하는 부부 사이였으니 얼마나 서로의 몸에 끌리겠는가?

그래서 첫 날부터 기대를 잔뜩 했었다.

보는 사람들 눈이 너무나 많으니 회임을 했던 그 밤처럼 이틀 연속으로 즐길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회포 정도는 풀 수 있으리라 생각했었다.

그런데…….

“우와-앙.”

두 시진 간격으로 일어나 배고프다고 칭얼댄다.

그때마다 일어나 젖을 물려야 하니 제갈영령이 얼마나 피곤하겠는가?

“호호호. 아빠 오셨다고 샘내는 거니 아들?”

제갈영령이 웃으며 말하듯 용천화는 제갈영령의 곁을 차지하고 당최 틈을 주지 않았다.

“배부르게 먹고 잠들었지?”

“예, 가가.”

“이리와 봐, 령매.”

“아이, 몰라요 가가.”

이때다 싶어 제갈영령의 품에서 떼어 놓으려고만 하면 귀신같이 눈치 채곤 눈을 떴다. 엄마를 절대로 양보할 수 없다는 듯 울어댔다.

“우와-앙!”

그러니 어쩌랴?

돌아온 지 벌써 보름이 다 되어 가고 있음에도 아직까지 제갈영령과의 회포를 풀지 못했다.

‘가벼운 입맞춤이 다라니 나 참…….’

그렇다고 아직 사주단자도 주고받지 못한 주약란, 양하린과 동침할 수도 없는 일이다. 제갈영령을 봐서도 그렇게는 못한다.

아예 멀리 떨어져 있으면 모르겠는데 한 침상에서 한 이불을 덮고 생활을 하고 있음에도 욕구를 채울 수 없으니 죽을 맛이었다.

다음 날 아침.

어떻게 알았는지 조연옥이 구원자로 나서 주었다.

조연옥은 다짜고짜 제갈영령에게 생각지도 못했던 명을 내렸다.

“아가. 오늘 밤에 천화 젖 배불리 먹이면 내 방으로 좀 데려다 주련?”

“어머니 방으로요? 왜요 어머니?”

“왜긴? 나도 우리 예쁜 손자 한 번 품에 안고 잠들고 싶어서 그러지.”

그러면서 한쪽 눈을 찡긋해 보였다.

용무린을 두어 번 턱으로 가리켜 보였다.

사르르.

무슨 뜻인지 짐작한 제갈영령의 얼굴이 복사꽃처럼 붉어졌다.

“새벽에 배가 고파서 또 깨어나 칭얼댈 텐데요?”

마음이야 굴뚝같았지만 결국 불려나가야 한다는 것이 눈에 빤히 보였다.

그때 조연옥이 회심의 미소를 지어 보였다.

“유모를 구했다. 걱정할 것 없어요. 그러니 너는 며칠이라도 무린이와 편하게 쉬어라.”

“어머니-이!”

감격한 제갈영령의 목소리가 살짝 떨려왔고,

“됐어!”

자신의 방에서 지른 것이 분명한 용무린의 고함이 갑자기 터져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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