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부활
연회 날이 가까워짐에 따라 무한으로 정말이지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모든 이들에게 개방된 연회라는 용무린의 선언 때문이었다.
황룡패주 용무린의 얼굴이 보고 싶은 사람이나 안면이라도 터놓고 싶어 하는 사람들, 그리고 비룡문에 줄을 대고 싶은 사람들까지 죄 몰려들었다.
자연히 무한의 모든 객잔과 주루 등 숙박을 할 수 있는 곳들은 너나할 것 없이 즐거운 비명을 질렀다.
더불어 비룡문의 총관의 혼이 쏙 빠졌다. 밀려드는 사람들의 숫자가 추측불가능 할 정도로 늘어남에 따라 대접을 위해 지불해야 할 은자와 챙겨야할 일 역시 기하급수적으로 불어났기 때문이다.
만금상단에서 활동하던 제갈세가의 직계들이 달려와 도와주지 않았던들 총관 혼자 몸으로는 도무지 감당할 수 없었을 것이다.
누가 보면 군량미라고 해도 좋을 만큼 많은 식량이 무한으로 밀려왔다. 그리고 누가 봐도 고개가 끄덕여질 만큼 많은 고수들이 비룡문 주변에 몰려들었다.
사흘 동안의 대 연회.
그들 모두에게 제대로 된 식사를 대접하기 위해서 비룡문은 특단의 조치를 취했다. 무한의 모든 객잔과 음식점들에 통째 계약을 맺어버린 것이다.
연회 기간에 한해 모든 음식을 비룡문을 대신해 제공하며 부족한 장소는 객잔 앞 빈 공터와 같은 장소에 탁자와 의자를 놓아 해결하기로 했다.
반짝.
그런 모습을 지켜보던 중감 고염무의 눈이 서늘하게 빛이 났다.
‘확실히 위험할 정도야.’
직접 내려와 보기 전에는 솔직히 몰랐다.
물론 수많은 공을 세운 황룡패주에게 황제폐하께서 너무하시는 것 아닌가? 하고 생각하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은 알 수 있었다.
‘군량미라 하기에 충분해.’
일개 연회를 감당하기 위해 유입되는 쌀과 고기의 양이라고 보기에는 지나치게 많았다.
물론 만금상단에 질세라 신경을 쓴 나머지 오대 상단의 기부가 보태어 진 것이지만 그런 내밀한 내막까지 겉만 보아서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니 고염무도 겁이 버럭 날 정도였다.
군량도 의심스러운데 그것을 상회할 만큼 많은 고수들의 유입이라니!
‘황상께서 어째서 황룡패주를 정적으로 인식하기 시작하셨는지 알 것 같구나.’
하늘에까지 닿을 듯 높은 일신의 무력.
거기에 더해 황제 이상 가는 명예와 무림인들의 믿음, 백성들의 두터운 신망까지…….
‘패주께서 마음 한 번 잘못 먹는다면 실로 걷잡을 수 없는 일이 생기겠다.’
그런 고염무의 마음을 확증하는 일이 연이었다.
불과 며칠을 사이에 두고 총병관 양문광을 비롯한 양가장의 수뇌부와 제갈문군을 비롯한 내각의 중진들까지 몰려왔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모인 무인들의 숫자만 일만 명을 상회한다.
거기에 더해 군부의 실세라고 할 수 있는 양가장의 수뇌부까지 더해졌으니!
‘위험해. 너무 위험해…….’
그뿐만이 아니었다.
총병관을 비롯한 양가장의 수뇌부가 뜨니 중군도독부의 좌, 우 도독이나 조금이라도 황룡패주와 연관이 있었던 군부의 세력들까지 축하사절을 보내왔던 것이다.
‘알려야 해. 빨리.’
지켜보는 고염무의 숨이 턱턱 막혀왔다.
***
“아오, 숨 막혀.”
몰려드는 인파에 숨이 턱턱 막히는지 개방의 양현 분타주 방건이 이맛살을 찌푸렸다.
“잘 쳐다봐, 인석아. 자칫 잘못하면 신교나 혈교의 잔당들까지 죄 몰려온단 말이야.”
“이 많은 사람들 중에 어떻게 가려낸단 말이에요. 그냥 포기하세요.”
화운 태상장로의 핀잔을 방건은 심드렁하게 받았다.
함께 많은 일을 겪었더니 태상장로라고 하는 지위도 별 영향을 끼치지 않게 된 모양이었다.
“하긴…….”
자신이 말을 해 놓고도 엄두가 나질 않는 모양인지 화운 태상장로 역시 고개를 흔들었다.
솔직히 무리였다.
성도 무한이 큰 곳이라지만 만 명이 넘는 무인에 군부의 실세들까지 일시에 몰려드니 고개를 돌리는 곳마다 콩나물시루처럼 인간들이 꽉꽉 들어차 있었던 거다.
“내일이 연회 날이지요?”
“그래.”
“젠장. 맹주님은 좋겠다.”
딱.
“악!”
“좋으면 좋은 거지, 거기에 왜 ‘젠장’이란 말이 붙어?”
화운이 방건의 뒤통수를 후려 갈겼다.
눈물을 글썽이며 방건이 덧붙였다.
“나이가 훨씬 더 많은 저는 아직도 숫총각인데 맹주는 이번 연회가 끝이 나면 세 명의 꽃과 같은 부인들을 얻게 되잖아요.”
“에라, 이 자식아.”
딱.
“악!”
“거지 주제에 언감생심 여인을 가슴에 품냐?”
말이야 그렇게 했지만 방건을 나무라는 화운의 목소리에는 힘이 실리지 못했다. 그의 말에 상당 부분 공감이 갔기 때문이었다.
‘에혀. 거지 팔자가 다 그렇지 뭐.’
어느 여자가 냄새나는 거지와 사랑에 빠지겠는가?
그래서 개방의 호걸들은 더더욱 술을 입에 달고 다니며 ‘의’와 ‘협’만 부르짖는 것인지도 모른다.
‘온 동네 참견쟁이처럼 무림을 휘젓고 돌아다니며 참견하는 이유 역시 넘쳐나는 정력을 따로 쓸 곳이 없기 때문일 거야.’
새삼 그런 자각이 들었지만 딱히 후회되는 삶은 아니다.
의협을 베개 삼아 자유롭게 강호를 활보하며 맺은 인연들 역시 대부분 기분 좋은 것들이었으니까.
“건아.”
“예, 태상장로님.”
“연회 때 말이다.”
“예.”
“최대한 많이 먹어라. 내가 살아 보니 그나마 먹는 게 남는 거더라.”
참으로 거지다운 충고였다.
“든든하게 배를 채운 후 의기충천한 개방도 답게 귀동냥을 하러 세상으로 나가. 도와줄 놈 있으면 도와주고 때려 줄 놈 있으면 때려줘. 그게 개방이야.”
피식.
“예, 태상장로님.”
풀썩 웃으며 답하는 방건은 이내 화운과 함께 비룡문 안으로 들어섰다.
“어딜 다녀오시는 게요? 어서 이리 앉으시오, 화운 태상장로. 나 양문광의 술 한 잔 받으시오.”
“하하하. 자네가 바로 차기 개방의 후계감이라는 방건 분타주로군. 이리 앉게. 내 술 한잔 받게.”
들어서기가 무섭게 총병관 양문광과 제갈문군이 두 사람을 반겼다. 자리를 권하고 술병을 내밀었다.
씨익.
두 사람의 입가에 환한 미소가 걸렸다.
‘그래, 개방도는 이런 맛으로 사는 거야.’
용무린이 누리는 평범한 남녀 간의 사랑 따위는 인연이 없었지만 어딜 가나 이런 호쾌한 환대가 뒤따른다.
“감사합니다. 늦게 온 죄로 벌주 석 잔을 마시겠습니다.”
본격적인 연회를 하루 앞둔 날, 벌써부터 즐거운 술자리가 계속되었다.
***
사례감 깊은 곳.
수장인 장인 태감 채홍은 중감 고염무로부터 전해진 전서를 받고 고민에 빠져 있었다.
-족히 이만 명의 정병을 두 달쯤 먹여 살릴 군량과 그만큼의 고수들이 속속 무한의 비룡문 인근으로 집결을 하고 있습니다.
보기만 해도 숨이 턱턱 막힐 정도의 힘이옵니다.
지금 당장에 적절한 견제에 들어가야 할 것이라 사료되옵니다.
민심과 무력.
양 면 모두에서 위험 수위를 넘어선지 오래입니다.
보고 내용만 보아서는 아주 급박한 상태로 보였다.
하지만 채홍은 잘 알고 있었다.
겨우 이 정도 규모의 병력으로는 아무런 일도 도모할 수 없다는 사실을.
“중요한 것은 이런 게 아니야.”
밀려드는 고수의 숫자와 군량 따위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
“바로 황룡패주 무림왕 용무린 대협의 의중이 훨씬 더 중요하단 말이지.”
오직 그 사실 하나만이 중요할 뿐이다.
감숙의 전장과 동정호 인근에서 벌어졌다던 이차 신마대전의 정보를 종합해 보면 용무린이라는 일개인의 무력이 모든 유, 불리를 뒤엎어 버린다.
그러니 용무린의 마음의 향방이 모든 것을 결정한다.
그를 제외하고 행해지는 그 어떠한 대응도 사실 유명무실할 뿐이었다.
“한데 어디에서도 패주가 성도로 진격을 하려 한다거나 황제폐하의 권위에 도전을 하는 듯한 발언을 한 적이 없단 말이야.”
권력의 속성을 충분히 이해하는 바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채홍은 용무린을 견제하는 일이 솔직히 긁어 부스럼 같다고 느껴졌다.
‘말이야 바른 말이지만, 지금껏 패주께서 얻게 된 부귀나 양명 같은 것들 모두가 폐하께서 억지로 안긴 거나 다름이 없단 말이야.’
돌이켜보면 용무린은 입신양명이나 부귀영화 따위 한 번도 원한 적이 없는 사람이었다.
그럼에도 황제가 모든 것을 강제로 떠안겼다.
무림왕의 지위도 그러했고 만금상단도 그랬으며 총병관을 움직여 군권을 행사할 권리 역시 황제가 강제로 싫다는 사람에게 쥐어주었다.
‘그런데 이제와 믿지 못하겠다고 하면 어쩌나?’
막말로 그래봐야 소용없는 일이었다.
용무린의 강대한 무력을 생각하면 솔직히 백약이 무효한 상태였으니까.
‘감숙의 전장을 생각해 봐. 수십만 대군 사이를 홀로 휘젓던 그 강대한 무력이라면 혼자서도 자금성을 때려 부술 수도 있음이야.’
누가 들으면 큰일 날 소리지만 채홍은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후우. 고양이 목에 방울달기도 유분수지, 과연 어떤 방법으로 패주를 제어할 수 있단 말인가?”
고민이 깊어질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일단 폐하께 보고를 올린 후 다시 생각하자.”
모든 것은 황제가 정하는 것이다.
***
건청궁 앞.
그동안 수시로 황제를 독대하던 채홍의 발걸음이 처음으로 막혔다.
“뭐라? 들어갈 수 없어?”
채홍의 목소리가 뾰족해졌다.
굵은 눈썹을 무섭게 꿈틀거렸지만 고개를 조아려야 할 병필수당태감은 되레 고개를 빳빳이 쳐들었다. 가늘게 뜬 눈으로 채홍을 내려다보며 답했다.
“황제폐하의 엄명이오이다, 장인태감.”
“……크흠.”
“지금부터 먼저 부르기 전까지 누구도 안으로 들이지 말 것이며 주위를 완벽히 차단하라고 소인께 명하셨다는 말이외다.”
“그, 그럴 리 없다. 황상께오서 내게 전권을 위임하시며 패주에 관한 정보가 모이면 언제든 보고를 하라고…….”
“장인태감 채홍은 어명을 받으라.”
채홍의 말을 자르며 병필수당태감이 뒤춤에서 황색 두루마기를 꺼내들었다. 전가의 보도처럼 앞으로 당당하게 내밀었다.
흠칫.
채홍이 몸을 떨더니 이내 큰 소리로 답하며 오체투지를 했다.
“사례감 장인태감 채홍, 어명을 받사옵니다.”
잔뜩 목에 힘을 준 병필수당태감이 어명을 큰 소리로 읽어 내려갔다.
“장인태감은 들으라. 고가 중한 일이 있어 일정기간 칩거에 들어야 하니 장인태감은 계속해서 고가 내린 소임을 다하라. 고의 안전은 앞으로 병필수당태감이 서창의 수장을 겸함으로써 방패가 되어 지킬 것이다. 하니, 장인태감은 고의 창이 되어 성심을 다하라.”
“충! 신 사례감 장인태감 채홍, 황명을 받자와 성심을 다하도록 하겠나이다.”
답과 동시에 공손히 머리 위로 들리는 채홍의 두 손.
그 손에 병필수당태감은 황색 두루마기를 가만히 내려놓았다.
이윽고 몸을 일으킨 채홍이 두루마기 내용을 확인했다.
반짝.
채홍의 눈이 번득였다.
혹여 어떤 이상이라도 있을까 저어한 나머지 눈에 불을 켜고 살폈지만 어명에는 어디 한 점 이상한 구석이 없었던 것이다.
“이만 가보시오 장인태감.”
“감축…… 드리오.”
채홍이 떨떠름한 목소리로 축하 인사를 건넸다.
지금까지는 자신보다 한 직급 낮은 병필수당태감이었지만 같은 반열인 서창의 수장이 되었으니 그 직급 역시 자신과 같은 장인태감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감사하오. 어심을 받아들여 신명을 다해 황상을 보필할 것이오. 하니 장인태감께서는 어서 나아가 역적들을 견제하고 감시해 주시오.”
“……알겠소이다.”
심장 깊은 곳에서 뜨거운 것이 치밀어 올랐지만 채홍은 어금니 한 번 콱 깨무는 것으로 감내한 후 조용히 뒤로 물러나왔다.
‘권력의 속성을 잘 알고 있긴 하지만, 나 역시 황룡패주나 총병관과 비슷한 신세가 되리라고는 미처 생각해 보지 못했구나.’
권력의 중심에서 아직 완전히 밀려나온 것은 아니다.
어명에도 나와 있듯 황제는 아직 자신에게 대외적인 일들을 모두 맡기고 있었다.
‘곧 변할 거야. 틀림없어.’
그것이 문제였다.
황제의 곁을 지키는 사람은 앞으로 서창의 수장인 병필수당태감이 될 터, 그의 입을 통해서만 황제의 말이 외부로 전달이 된다.
‘바꿔 말하면 황제께 올려야 할 보고와 비밀스러운 내용 역시 그의 손을 통해야 한다는 것이지.’
부글부글.
피가 절로 끓어오르는 채홍이었다.
‘두고 보자 서창 장인태감. 화무십일홍이다. 황제의 입을 대변하던 나의 권세가 불과 열흘을 넘기지 못했다. 너 역시 그러할 것이다.’
어쩌면 그보다 더 빠르게 끝날지도 모른다.
‘그때가 오면 보다 더 확실하게 끝을 내기 위해서라도 너의 약점들을 긁어모아 주지.’
황제의 명을 받들어 일을 해나가는 한편, 채홍은 서창 장인태감의 비리 역시 함께 모을 것이라 작정했다.
그렇게 동창과 서창의 반목이 시작되었다.
이것은 실로 커다란 전력낭비였다.
하지만 황제 아니 해무광으로서는 어쩔 도리가 없는 결정이었다.
황궁무고에 들어 예전의 무력을 조금이라도 회복을 해나가야만 했는데, 장인태감은 일신의 무력이 절정에 달해 눈치를 챌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갑작스러운 황제의 무공연마.
거기에 더해 서창을 통해 전국각지에서 뽑아 올린 자시 생 동남동녀까지 더해지면 황룡패주와 총병관에 의해 세워진 것이나 다름없는 채홍이 의심을 할 수밖에 없는 일이었으니까.
“크크큭. 어쩔 수 없지.”
건청궁과 이어진 황궁무고 안에서 해무광은 비릿한 괴소를 연신 흘리고 있었다.
자신의 눈앞에 오들오들 떨고 있는 자시 생 동남동녀 두 명이 흡족해서였다.
“충성심이 아깝기는 하지만 너 역시 처음부터 버리는 패였다, 채홍. 푸흐흐.”
동창의 모든 눈을 용무린 주변으로 돌린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그 사이 아무도 모르게 병필수당태감을 서창의 주인으로 세운 이유는 또 뭐겠나?
“바로 오늘과 같은 날을 위해서였지 크흐흐.”
해무광이 아이들을 향해 성큼 다가섰다.
“폐, 폐하.”
“사, 살려주소서. 살려 주소서, 폐하.”
허물어지듯 오체투지한 동남동녀가 애원했다.
해무광이 입맛을 다시며 웃었다.
“푸흐흐. 내 힘의 일부가 됨을 영광으로 알거라.”
가차 없이 손을 들어 올렸다.
스각. 서걱.
***
비룡문 내원의 용무린 처소.
여전히 왁자지껄한 외부의 소란도 이곳에까지는 미치지 못해 아늑하고 고즈넉했다.
“가가. 보세요. 달이 밝아요.”
오늘도 역시 조연옥에게 용천화를 맡기고 오는 길이었다.
제갈영령은 주약란과 양하린의 부러움 가득한 시선을 뒤로한 채 용무린의 손을 잡고 처소로 돌아오는 도중 손을 들어 밤하늘을 가리켰다.
“오, 그래? 하긴, 내일이 보름이니까.”
그저 예뻐 죽겠다는 듯 계속해서 제갈영령의 얼굴로만 향해 있던 용무린의 시선이 모처럼 만에 하늘로 향했다.
그때였다.
“응? 으응? 저, 저것은……?”
용무린의 입에서 연거푸 기함이 쏟아졌다.
환하게 밤을 밝히던 보름달이 사이한 빛으로 물들기 시작했던 것이다.
“가가. 어째 그러시어요?”
제갈영령의 눈에는 평소와 다를 바 없는 달이었다.
다른 날에 비추어 붉은 기운이 살짝 더 짙을 뿐 여전히 아름답게 보였지만 천기를 읽기 시작한 용무린의 눈엔 전혀 다르게 보였다.
환한 달빛 이면에 물들어가는 검고 짙은 보랏빛 기운이 똑똑히 눈에 들어왔다.
‘이럴 수가…….’
마기였다.
마기가 폭발하듯 터져 나와 다시금 자라나기 시작하고 있었다.
‘어떻게? 역천자 놈도 없는데 대체 누가 있어서 저 정도의 마기를 흩뿌릴 수 있는데?’
믿을 수가 없었다.
용무린은 홀린 듯 계속해서 밤하늘을 바라보았다.
시시각각 마기로 물들어가는 달빛의 변화를 뚫어져라 주시했다.
“……가가?”
그제야 제갈영령도 무엇인가 이상함을 감지했다.
부릅떠진 용무린의 두 눈, 평소보다 붉은 색으로 물들어가는 달빛까지…….
제갈영령은 잡고 있던 용무린의 손을 가만히 놓았다. 조용히 소리 죽여 방으로 돌아갔다.
“……!”
이미 천기의 변화에 집중하기 시작한 용무린은 그것도 모른 채 계속해서 마기의 변화를 주시했다.
‘틀림없어. 역천자다. 역천자가 다시 세상에 돌아오고 있는 거야.’
아니, 그것이 아니다.
그때 죽지 않았던 것이다. 소멸당하지 않았다.
그동안 감쪽같이 숨어 있다가 이제야 이빨을 드러내고 힘을 되찾으려고 하는 거다.
‘어디냐? 대체 어디에 숨어 있는 거야?’
그것까지는 알 수 없었다.
하긴, 돌이켜 생각해보니 독고황 시절에도 정확한 위치는 알지 못했다. 천기라는 것은 지남철처럼 의문점에 대해 명확한 방향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그저 현재 벌어지고 있는 일을 알려줌으로써 당연히 변화될 미래를 비추어 짐작하게 만들 뿐, 천기를 읽는 당사자가 미루어 대비해야만 한다.
‘너무 명확하면 그 또한 천기가 아니겠지.’
사람에게 자유 의지가 있기 때문이다.
그로 인해서 ‘참나’를 깨달을 수도 있고 마성에 빠질 수도 있는 거다.
그렇기에 너무 명확하면 천기라고 할 수 없다.
좋은 일이 앞에 있어도 그릇된 마음으로 어리석은 짓을 계속하면 악운으로 바뀔 수밖에 없는데, 그렇게 되면 천기가 틀렸다는 말이 되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천기는 항상 현재 벌어지고 있는 일을 어렴풋 알려줄 뿐이다.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다.’
휘슷.
용무린은 즉시 외원을 향해 신법을 전개했다.
아직도 술자리에 여념이 없을 어른들을 찾아 이 일을 상의하기 위해서였다.
***
비슷한 시간 사례감의 밀실.
“후우.”
채홍이 나직하게 숨을 몰아쉬었다.
심복들에게서 밀려오는 서창에 관한 정보를 취합하느라 머리가 뜨끈뜨끈했다.
‘벌써 백여 일도 더 전에 황상께서 서창과 접촉을 해 오셨구나.’
내막을 알고 보니 기가 막혔다.
고혈압으로 쓰러진 황제는 정신을 차리자마자 병필수당태감과 가장 먼저 접촉을 했다. 그 후 자신에게 전권을 실어주며 전면에 내세웠던 거다.
‘바보처럼 그걸 모르고 있었다니.’
자책감이 일었지만, 사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장인태감과 상선태감 그리고 병필수당태감은 서로 돌아가며 황상의 곁을 지키는 사람들이었기에 태생적으로 황제와 독대를 할 기회가 많았기 때문이었다.
‘먼저 서창을 가동하신 거야. 그런 후 칼잡이로 나를 내세우신 것이었어.’
그것도 모른 채 우쭐해하는 얼굴로 마구 전권을 휘둘러대는 자신을 보며 서창의 장인태감이 얼마나 속으로 비웃었겠는가?
‘이런 부끄러운 일이!’
그 생각만 하면 입술이 바짝 마를 정도로 얼굴에 열기가 몰려들었다.
‘뭔가 큰 비리를 찾아야만 해. 녀석의 목줄을 틀어 쥘 강력한 한 방이 필요하다고.’
채홍은 산더미처럼 쌓인 정보들을 정신없이 훑어보고 정리해 나갔다.
그때였다.
“응?”
와락.
채홍은 방금 내던지다시피 한 보고서 하나를 다시금 집어 들었다.
서창 장인태감의 비리 찾기에 온 정신을 쏟았기에 상관없다고 생각되는 것들은 무심코 옆으로 던졌지만, 뭔가 선뜩한 문장이 눈앞을 스쳐 지난 기분이 들었던 것이다.
‘뭐지?’
얼핏 생각하면 아무것도 아닌 정보였다.
황제가 어떤 손으로 붓을 잡는지 모를 리 없는 병필수당태감이 돌연 붓과 벼루를 황상의 왼편에 배치했으니 뭔가 숨은 뜻이 있지 않을까 하여 유심히 살폈지만 별다른 징후를 찾지 못했다는 보고.
‘왼편에 붓과 벼루를 배치했다고?’
황제는 오른손잡이다.
당연히 항상 오른편에 붓과 벼루가 배치되어 잇다.
‘그런데 왜 갑자기 바뀌었지?’
그 생각만 했을 뿐인데 심장 저 깊은 곳에서 무엇인가가 짜르르 하고 울렸다.
‘지켜봐야 해. 병필수당태감이 일부러 그렇게 한 것인지 아니면 황상께서 편하게 지필묵을 사용하시고자 그리 한 것인지 말이야.’
만의 하나 병필수당태감의 실수가 아닌 황제의 자의에 의한 위치 변경이라고 한다면?
채홍의 뇌리에 몇몇 중요 정보가 스쳐 지났다.
용무린과 떼려야 뗄 수 없는 사이였기에, 패주를 도우며 자연스레 알게 된 정보들이었다.
음양신마.
그 무서운 이름에 대한 정보들을 떠올린 순간,
쿵쿵쿵쿵쿵.
채홍의 심장이 터질 듯 뛰기 시작했다.
‘아, 아니야. 아닐 거야.’
상상만으로도 무서웠던 채홍은 세차게 머리를 흔들었다.
무모한 상상을 애써 떨쳐냈다.
그러나
오싹!
등줄기를 타고 머리끝까지 소름이 끼치는 것까지는 떨쳐낼 수 없었다.
***
비룡각 최상층 가주실.
용무린의 부탁으로 현 강호의 수뇌부라 할 수 있는 대다수의 인물들이 모여들었다.
“대체 무슨 일이냐, 무린아.”
“이제 다 모인 듯하니 말을 하려무나.”
화운 태상장로에 이어 용대명이 넌지시 말을 덧붙였다.
그때까지 계속해서 감겨 있던 용무린이 눈을 떴다. 무거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방금 전, 하늘에서 새롭게 변화되는 천기를 읽었습니다.”
“천기?”
“오오. 선재, 선재라…….”
“무림의 홍복이오이다. 천기를 읽어내다니요!”
일단 모두가 축하를 하고 봤다.
하지만 이어지는 용무린의 말에 아연실색을 할 수밖에 없었다.
“음양신마. 아니 역천자가 부활했습니다.”
“어헉!”
“억!”
“그, 그게…….”
용무린의 말이 거침없이 이어졌다.
“제 실수입니다. 확인하고 또 확인했어도 부족한 일인데 너무 일찍 마음을 놓았습니다.”
“그, 그러면?”
말꼬리를 늘이는 용대명을 향해 고개를 깊이 끄덕이며 답했다.
“예, 아버지. 제가 그러했듯 놈 역시 소멸한 것이 아니었던 겁니다.”
“허어.”
“그럴 수가…….”
전 무림이 발칵 뒤집힐 만큼 놀라운 소식이었다.
용무린의 목소리가 담담히 이어졌다.
“다행인 것은 놈의 힘이 현재 아주 미약하다는 점입니다. 모두 아시다시피 놈이 마력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자시 생 동남동녀의 정혈이 필요로 한데 쉽게 구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은 아니질 않습니까?”
“그야 그렇지.”
“아미타불…….”
“불행 중 다행이로고.”
살짝 눈을 감으며 무엇인가를 계산하던 용무린이 다시 말을 이었다.
“하늘을 물들인 마기의 여력으로 보건대 이제야 힘을 회복하기 시작한 것은 틀림없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것은 어떤 방법을 통해서든 놈이 자시 생 동남동녀를 수급할 방법을 찾았다는 것이고 마력 회복 속도는 날이 가면 갈수록 폭증할 것이라는 점입니다.”
이어지는 용무린의 말은 간단했다.
어차피 내일이 무림대연회의 시작이니 아예 역천자의 부활을 선포한 후 놈이 숨어 있을 만한 곳을 대대적으로 살펴보는 것이 어떠냐는 제의였다.
음양신마.
역천자의 진실한 위력을 이미 동정호변에서 겪어 본 경험이 생생한 각 문파의 수장들은 기꺼이 용무린의 제의에 손을 들어주었다.
백짓장도 맞들면 낫다는 말이 실현될 것인지 아니면 그 나물에 그 밥이 될 것인지는 뚜껑을 열어봐야 알 테지만, 그래도 중요한 사실은 전생과는 달리 역천자의 부활을 전 무림이 알고 대비할 수 있게 되었다는 점이었다.
***
사흘이란 시간이 더 흘렀다.
무한의 비룡문에서 열리는 무림 대연회가 성황리에 역천자의 부활에 대처하는 모임으로 바뀌어가고 있을 무렵, 채홍은 모종의 준비를 하는 중이었다.
사락. 사락.
사례감의 가장 깊은 곳 장인태감의 집무실.
평소처럼 탁자에 앉아 이것저것 서류를 훑어보던 채홍은 답답한지 얼굴에 흐르는 땀을 살짝 훔쳐낸 후 바지에 문지르는 듯 탁자 아래로 손을 내렸다.
슥. 스슥.
왼손으로는 바쁘게 서류를 넘겼지만 탁자 아래 감춰진 손 역시 무엇인가를 하고 있었다.
잠시 후.
“후우.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되었는가?”
창밖에 푸름이 비쳐오는 것을 보며 기지개를 한 번 크게 켜더니 이내 몸을 일으켰다. 황상께서 와병중이든 아니든 자신이 오늘 당번을 서는 날이니 식사 준비 감독을 위해 상선감으로 향했다.
그때였다.
텅 빈 채홍의 집무실의 문이 소리도 없이 열렸다.
눈빛이 날카로운, 소속을 알 수 없는 환관 하나가 들어오더니 고개를 숙여 탁자 밑을 살폈다.
고개가 갸우뚱 기울었다.
“어째서 아무것도 없지?”
분명히 채홍이 탁자 밑에 손을 집어넣어 뭔가 수작을 부리는 것을 보았다. 그 후 자신이 바로 들어왔으니 뭔가 남아 있어야 할 터인데 아무것도 없다니.
“거참…….”
환관은 뚫어져라 매끄럽게 윤이 나는 청석 바닥을 노려볼 뿐이었다.
이제야 겨우 동녘이 밝아오기 시작했을 뿐인데 상선감은 벌써 분주했다.
황제와 황후, 황귀비, 비, 빈들의 식사를 만들기 위해 온갖 재료와 약재를 내어와 다듬기 시작했고 장인태감은 혹시라도 삿된 것이 섞이는지 살피기 위해 눈을 부릅뜬 채 모든 것을 일일이 검사했다.
그때 황제의 식사를 운반하기 위해 궁내청에 있는 광록사 소속 환관들이 도착했다.
채홍은 선두의 중감 주부 옆에 바짝 붙어 섰다.
함께 온 소감과 예하 환관들이 준비 된 갖가지 음식들을 조심스레 들어 올리고 있을 때 그의 귀에만 들릴 정도의 작은 목소리로 슬그머니 입을 열었다.
“황상께서 언제부터 왼손잡이가 되셨는지 알아내서 내게 따로 보고하도록. 또한, 갑자기 왼손잡이로 바뀌신 것 말고도 도드라지게 이상한 점은 없는지 역시 알아보고 보고해.”
“……예!”
중감 주부의 고개가 보일 듯 말 듯 조금 끄덕여졌다.
그것으로 충분했던지 채홍은 그대로 앞장섰다.
“가자!”
“네-이.”
광록사 소속 중감 주부와 예하 환관들이 황제의 식사를 바리바리 들고 건청궁을 향해 움직였다.
그런데…….
“쯧쯧쯧.”
건청궁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병필수당태감 아니 서창 장인태감이 혀를 차기 시작했다. 손가락 하나를 들어 올리더니 좌우로 흔들어 보였다.
“그거 알아? 선택을 잘못했어.”
들켰나?
“무, 무슨 말인가?”
채홍이 짐짓 의뭉스런 눈을 할 때였다.
건청궁 안쪽에서 익숙하지만 듣는 순간 등골이 오싹해지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만. 공연히 밖에서 시끄럽게 하지 말고 놈을 데리고 안으로 들어와.”
황제였다.
서창 장인태감이 즉각 반응했다.
“예, 폐하.”
그러면서 한쪽으로 비켜섰다.
도주 따위 허락할 수 없으니 어서 안으로 들어가라는 태도였다.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 굴로 들어가야만 하지.’
나쁠 것 없다.
죽든 살든 오늘의 일로 인해 자연스레 흑막이 가려질 것이고 후임에게 내 뜻이 전해질 테니까.
성큼.
채홍은 활짝 열린 건청궁의 깊은 곳을 향해 움직였다.
잠시 후,
“크흐흐. 어서 오너라.”
자신을 향해 활짝 웃는 황제의 얼굴을 일별한 채홍은 가늘게 몸을 떨어야만 했다.
사례감의 지하에서 상관세가의 수족들을 몰아낼 당시 숱하게 맡아 보았던 진한 피내음과 함께 검보랏빛 기운이 황제의 얼굴에 넘실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내 우려가 사실이었구나.’
비로소 채홍은 확신할 수 있었다.
자신이 모셔왔던 황제가, 모든 충성을 아끼지 않으리라 맹세했던 황제가 역천자로 뒤바뀌었다는 사실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