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해무광의 마지막 안배
‘대체 언제……. 아! 그렇지?!’
채홍의 뇌리에 유달리 기뻐하던 황제의 모습이 떠올랐다.
기쁨이 너무 지나쳤는지 황제는 그때 목이 뻣뻣하게 굳어 뒤로 넘어갔었다.
‘정신을 잃었을 때!’
어쩌면 역천자가 스며들어왔기에 그 건강하신 분께서 목이 뻣뻣하게 굳어 뒤로 넘어가셨을지도 모른다.
‘그때 스며들어왔겠구나.’
자신이 황룡패주를 몰랐다면, 그래서 음양신마에 관한 정보를 알고 있지 못했다면 죽는 순간까지도 눈치 못 챘을 수도 있다.
‘아니, 아니지. 어쩌면 상관세가가 황궁무고에 황상의 옥체를 유폐시키고 있었을 때, 그때부터 은밀히 계획되어 왔을지도 몰라.’
지금 생각해보니 정말 그랬다.
혈고.
자신도 느끼지 못하는 사이 사람을 타인에게 완벽하게 종속시킬 수 있는 그 마물을 어째서 황제에게는 감염시키지 않았는지 이제야 알 것 같았다.
‘다른 그 무엇보다 황제를 종속시켰으면 다 해결이 되는 일이었어.’
문무백관을 혈고로 종속시킬 일이 아니었다.
황제 한 사람만 혈고로 종속을 시켰다면 나머지 문무백관의 제어도 자연스레 가능했었다.
그런데도 황제에게는 혈고를 투입하지 않았다.
바로 이때를 위해서였던 거다.
역천자. 음양신마가 최후의 순간 차지할 몸뚱이였기 때문에 혈고 따위에 종속시키지 않은 채 그저 깊은 잠에 빠져 들게 해 두기만 한 것이다.
반짝.
역천자 해무광의 눈이 시린 빛을 뿜었다.
“많은 것을 깨달은 모양이군그래.”
해무광이 묘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역시 때를 놓치지 않고 채홍을 잘 불러들였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대답대신 채홍은 시선을 서창 장인태감에게로 돌렸다.
큰 소리로 외쳤다.
“정신 차리시오, 장인태감.”
“이놈!”
해무광이 잽싸게 손을 흔들었다.
버언쩍. 스걱.
채홍의 상체와 하체가 반듯하게 잘렸다. 그대로 허물어져 내렸다.
그런데…….
“화, 황제가 아니다. 우리 황제가 아, 아니야. 정녕 모르겠는가?”
놀랍게도 채홍은 몇 마디 말을 더 했다.
“어헉. 어, 어찌?”
서창의 장인태감이 소스라치게 놀랐다.
“흐으…….”
그제야 채홍의 목소리가 잦아들었다.
“이런 시건방진!”
해무광이 신경질 적으로 손을 다시 흔들었다.
쉬각. 쉬가가각.
채홍의 머리가 잘게 다져졌다. 당연히 아무런 말도 더 이을 수가 없었다.
꾸울꺽.
마른 침을 삼키며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서창 장인태감을 해무광이 다독였다.
“시답잖은 헛소리다. 경거망동하지 마라.”
“예? 아, 예 폐하.”
“너는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위에 오를 귀인이 될 것이다. 고가 힘을 다시 되찾은 후 저 시건방진 패주를 거꾸러뜨린다면 무료함을 이기지 못해 정복전쟁을 시작할 터. 네가 나를 대신해 제국을 경영할 것이다. 알겠느냐?”
“화, 황공무지로소이다, 폐하.”
서창 장인 태감 석중인이 황급히 고개를 조아렸다.
채홍의 말마따나 황제가 전과 다르다는 것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생각해보니 상관없었다.
일인지하 만인지상.
이 세상을 경영하는 실질적인 주인이 될 수 있는 기회인데 그깟 게 뭐라고 버리겠는가?
“예전처럼 동창으로 하여금 모든 힘을 황룡패주와 그 주변의 동태 파악에 투입하도록 만들어라. 그런 후 서창은 전력을 기울여 자시 생 동남동녀들을 최대한 은밀히 이곳으로 끌고 오게 해. 알아듣겠느냐?”
“예, 폐하. 소신이 신명을 다 바쳐 거행하도록 하겠나이다. 너무 심려치 마소서.”
“그래. 너만 믿겠다.”
다시 한 번 오체투지를 한 석중인이 나직한 목소리로 질문을 던졌다.
“동창의 수장을 계속해서 공석으로 비워둘 수는 없는 일이옵니다. 누구로 하여금 그 일을 하도록 만드오리까?”
“누가 차 순위더냐?”
“중감 고염무와 중감 엄당이옵니다.”
“둘 중 적임자는?”
“엄당은 만금상단의 일로 인해 파견되어 있은 지 오래인 터라 반 이상은 패주의 사람이 되어 있을 터, 무한 인근에서 패주와 그 주변의 동태 파악에 여념이 없을 중감 고염무가 적임이라고 사료되옵니다, 폐하.”
“중감 고염무? 좋아. 그를 동창의 새로운 장인태감으로 앉히겠다. 어명을 준비하라.”
“예, 폐하.”
옥새가 바로 준비되었다.
해무광은 왼손으로 붓을 들어 먹물을 묻혔다. 일필휘지로 어명을 써내려갔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서창 장인태감 석중인의 눈에 묘한 빛이 흘렀다.
‘왼손잡이. 정말로 왼손잡이로 바뀌었다.’
채홍의 절규가 아직도 귀에 생생했다.
정말 나는 안전할까?
불안함으로 흔들리는 석중인을 해무광이 흘깃 보고선 혀를 끌끌 차기 시작했다.
“쯧쯧쯧. 별 수 없구만.”
후욱.
해무광이 석중인을 향해 덮쳐갔다.
***
비룡문의 대연회는 성황리에 끝이 났다.
역천자 음양신마의 부활.
그 두려운 선포에도 중원 무림은 두려움과 혼란에 빠지지 않았다.
연거푸 신마와 음양신마를 베어버렸던 황룡패주 용무린이 전면에 나섰기 때문이었다.
-역천자 음양신마를 잡을 단초는 자시 생 동남동녀다.
불행한 일이지만 역천자는 자시 생 동남동녀의 정혈로 부상을 치유하고 힘을 회복한다.
그러니 천하인들이여, 자시 생 동남동녀를 살펴라.
놈은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그 불쌍한 아이들을 죽여 정혈을 흡수하려 들 것이다.
내게 알려라.
나 황룡패주 용무린이 달려가 반드시 아이들의 목숨을 구하고 이번에야말로 역천자 음양신마를 완벽하게 소멸시켜버리겠노라.
용무린의 선포가 전 무림으로 퍼져나갔다.
그야말로 회심의 한 수였다.
아예 대놓고 놈의 부활과 자시 생 동남동녀의 일을 밝혀버린 덕에 천하 무림 동도 전부가 감시자로서의 역할을 하게 되었다.
과거 개방과 하오문도만 겨우 움직일 때와는 그 파급력 자체가 달랐다.
“자시 생 동남동녀의 정혈을 흡수한다고?”
“어미, 숭한 놈.”
“야! 우리 주변에 자시 생 애기들 누구 없냐?”
“우린 없어.”
“하여간 잘 살펴 봐. 누구든 사주팔자 묻고 난 후에 애들 잡아가려고 하면 잽싸게 정파 무림에 알려.”
“당연하지. 황룡패주께서 이번에야 말로 그 괴물을 소멸시키시겠다고 단단히 벼르고 계시잖아.”
“암. 인제 그 음양신만가 뭔가 하는 놈은 뒈진 거여.”
놀라운 소식이긴 했지만 누구도 두려워만 하지 않았다.
어떻게든 소식을 듣게 되면 알리려 했다.
용무린은 비룡문에 앉아 천하 곳곳에서 들어오는 정보들을 살피느라 시간 가는 줄을 몰랐다.
‘반드시 걸려든다.’
용무린은 그렇게 믿어 의심치 않았다.
아예 대놓고 밝혀버린 이상, 놈이 제 아무리 날고 기는 재주가 있다 하더라도 걸릴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놈이 걸려드는 것은 걸려드는 것인데…….’
하늘을 바라보는 용무린의 표정은 어둡기만 했다.
천기의 변화가 심상치 않았기 때문이었다.
‘어째서 마력이 저렇듯 충만한 것일까?’
달을 물들였던 마력은 북쪽 하늘을 덮을 듯 뻗어 나오더니 이내 용무린이 버티고 있는 동쪽의 밝음에까지 밀려오려 들었다.
이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역천자고 뭣이고, 다시 만나기만 한다면 놈은 이번에야말로 용무린의 ‘참나’에 완전히 소멸당해 사라져야 할 운명이기 때문이었다.
‘놈의 힘이 나를 넘어섰나?’
그것은 절대로 아니었다.
그럴 수도 없겠지만, 물리적인 내공의 힘이 설령 뛰어 넘었다 하더라도 용무린은 충분히 버텨내면서 놈의 진악을 소멸시킬 능력이 있었다.
‘그런데 어째서 마력이 저렇듯 충만하단 말이냐?’
천기는 분명히 말하고 있었다.
지금 부활하는 마력의 주인의 힘이 용무린으로서도 감히 감당하기 힘들만큼 거대하다고 말이다.
‘자시 생 동남동녀의 정혈을 벌써 그만큼 많이 흡수했다는 뜻인가?’
그것은 또 아니었다.
자신이 천기를 제대로 읽어낸 것이 맞다면 놈이 정혈을 흡수한 것은 며칠 전 자신이 감지해 낸 것이 지금으로서는 전부였다.
‘놈도 그만큼 조심하고 있다는 뜻이겠지.’
그러니 더욱 이해하기 힘든 일이었다.
천기는 도대체 무엇 때문에 지금 부활하는 마력의 주인을 감당하기 힘들 만큼 거대하다고 하는 것일까?
그때였다.
갑자기 따뜻한 그 무엇인가가 용무린의 손을 가만히 잡아왔다.
제갈영령이었다.
넋을 잃은 채 천기에 빠져 있던 용무린의 표정이 너무 심각해지자 용기를 주기 위해 그의 손을 잡았던 것이다.
“령매.”
“가가. 너무 심려치 말아요. 역천은 순천을 당하지 못하는 법이에요. 잘 아시잖아요. 유달리 춥고 긴 겨울이라 하더라도 반드시 봄은 오기 마련이에요.”
잘 안다. 자신이 그런 정도를 모를 리 없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맙다.
이렇듯 사랑하는 마음으로 주변을 환기시켜 새롭게 해 주기 때문이었다.
‘맞아. 어둠은 빛의 부재. 아무리 마력이 높아봤자 그놈이 그놈 아니겠어?’
두려워하면 할수록, 어둠을 빛의 부재가 아닌 실체가 있는 다른 그 무엇이라고 생각하면 할수록 놈의 힘이 강력해진다.
“고마워, 령매.”
“고맙긴요? 현모(賢母)라면 누구라도 당연히 그런 조언을 드렸을 것이에요.”
“그런 현모가 세상에 흔치 않아. 그러니 나는 정말 복을 많이 받은 셈이지.”
꼬옥.
제갈영령이 손아귀에 힘을 주며 속삭였다.
“방금 어머니께 천화 재워서 맡겼어요. 그리고 저는 이미 목욕도 다 마쳤답니다.”
오호라, 그랬단 말이지?
쿵쿵쿵.
용무린의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잠시만 기다려주오. 내 빨리 씻고 오겠소.”
“이미 따뜻한 물을 받아놨어요, 가가.”
제갈영령이 한 술 더 떴다.
용무린의 귓속에 속삭이는 그 목소리가 어찌나 뜨겁고 간질였는지!
휘슷.
그 순간 용무린의 모습이 사라졌다.
***
고염무는 무한의 혼란스러움을 뒤로 한 채 자금성으로 최대한 빨리 복귀했다. 자신을 동창의 장인태감에 올리겠다는 어명 때문이었다.
‘내가 동창의 장인태감이 되다니!’
환관이라면 누구라도 바라 마지않는 자리.
여섯 살 어린 나이에 환관이 되어 언제나 꿈꾸었던 자리에 오르는 것이었지만 고염무의 표정은 밝지 못했다.
‘채홍 대인께선 어떻게 되셨을까?’
그게 너무나 궁금했다.
은밀한 일을 하는 동창의 특성상, 무엇 때문에 채홍이 밀려나게 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자신 또한 그렇게 될 수도 있다는 뜻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고염무는 황궁에 들자마자 서상 소속 환관들의 뒤를 따라 건청궁의 깊은 곳으로 들었다.
황궁무고.
와병을 치유하기 위해 두문불출하고 있다던 황제가 너무나도 건강한 얼굴로 고염무를 기다리고 있었다.
“어서 오너라. 고가 너를 기다리고 있었느니라.”
그 뒤로 일사천리였다.
황제는 고염무에게 동창 장인태감의 지위를 제수했고 임명장과 어명의 장궤도 내렸다.
“신 사례감 장인태감 겸 동창 장인태감 고염무, 황상의 어명을 받자와 신명을 다할 것을 맹세하옵니다.”
“그래, 그래. 지금까지 잘 해왔으니 앞으로도 잘 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러니 모든 힘을 다 기울여 황룡패주의 역심의 증거를 잡아내도록 하라. 알겠느냐?”
“예, 폐하.”
씩씩하게 대답을 하고 물러나왔지만 고염무의 안색은 좋지 못했다. 황제의 등 뒤에 시립하고 있던 병필수당태감 아니 서창의 장인태감 때문이었다.
‘그가 채홍 대인을 제친 것이로구나.’
채홍이 어떻게 되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와의 권력 싸움에서 밀린 끝에 떨어져 나간 것만큼은 확실히 알 것 같았다.
황궁무고를 나선 고염무는 이제는 자신의 집무실이 된 사례감의 장인태감 집무실로 향했다.
‘동창 조직을 내 손에 틀어쥐기 위해 내 사람들로 주변을 채워야겠지?’
가장 먼저 할 일이 바로 그것이었다.
‘참 감개무량하긴 하구나.’
채홍이 서창 장인태감 석중인에 밀려 사라진 덕에 이 자리에 앉을 수 있게 되긴 했지만, 어쨌든 대단한 자리에 앉긴 앉은 거다.
‘자, 시작해 볼까?’
고염무는 인사이동명령서를 적고 수결을 위해 먹부터 갈았다. 중간 크기의 붓을 들어 먹물을 적당히 적셨다. 명령서에 내용을…….
철퍽.
처음이라 떨렸는지 고염무는 몇 자 적지도 못하고 붓을 탁자 아래로 떨어뜨렸다.
“어이쿠. 이런 실수가 있나?”
당황한 듯 몸을 일으킨 고염무는 탁자를 저만큼 앞으로 치웠다. 주변의 종이를 들어 바닥에 이리저리 튄 먹물을 닦으려 했다.
우당탕. 콰당.
“이, 이런 젠장.”
또 실수했다.
호들갑 떨면서 탁자를 치우고 바닥을 닦으려다 이번에는 벼루를 통째 떨어뜨렸다. 먹물이 청석 바닥에 넓게 쫙 퍼졌다.
반짝.
고염무의 눈에 한 줄기 광채가 일었다.
‘있다.’
짐짓 어리석은 채 요란을 떨어 보인 보람이 있었다.
채홍이 남긴 비문(祕文)이었다.
콧기름이나 이마의 기름을 손가락에 잔뜩 묻힌 채 매끄러운 청석 바닥에 글을 남기면 기름기로 적은 글이 되기에 먹물을 뿌려야 비로소 확인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동창 장인태감이었던 그와 후계자로 지목된 자신만 알고 있는 비문의 밀약, 그러하기에 채홍이 자리를 비운 후 다른 사람이 들어와 확인을 했어도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했던 것이다.
파르르.
비문을 읽어가던 고염무의 눈동자가 격렬하게 떨렸다.
‘이, 이런! 여, 역천자라니!’
오싹.
등줄기를 타고 치솟은 소름에 고염무의 머리칼이 송두리째 곤두섰다.
하지만 고염무는 끝까지 침착했다.
“하아. 높은 감투 좀 썼다고 꼴사납게 이리 호들갑이라니. 쯧쯧쯧.”
스스로를 낮추며 먹물을 닦았다.
그 사이 채홍이 남긴 비문을 하나도 빠짐없이 다 읽을 수 있었다.
“남이 볼까 창피하구나. 츠읍.”
다시 한 번 스스로를 책망한 고염무는 격렬하게 떨려오는 손을 사력을 다해 눌러 참으며 자연스럽게 인사명령서류를 만들어갔다.
‘황룡패주께 알려야 한다. 반드시.’
채홍이 후임으로 점찍어 뒀을 만큼 고염무는 뛰어났다.
비문 몇 줄을 통해 어째서 일이 이 모양으로 흘러가고 있는지 깡그리 꿰뚫어 보았다.
황제가 고혈압으로 정신을 잃었던 그때 음양신마가 깃들었음을 직감했다. 놈이 깃들었기 때문에 현재 이런 일들이 생겼음을 알아차렸다.
‘피비린내가 분명했어.’
동창 장인태감의 위를 제수받기 위해 황궁무고를 찾았을 때 분명히 느꼈었다. 무고 안에 진하게 배어있던 비린내를 말이다.
‘채홍 대인이 그 안에서 잘못 되셨을까? 아니면 자시 생 동남동녀의 정혈 흡수가 이뤄진 것일까?’
둘 다가 아닐까?
아무리 생각해도 황궁무고는 이미 용담호혈 아니 마귀소굴이 되어 버린 듯했다.
‘서창의 대인은 알고 있을까?’
채홍이 알고 있었다면 그 역시 알고 있다고 봐야 한다.
자금성 내의 정보는 동창보다 서창이 더 강한 면모를 보이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황상 아니 역천자의 뒤를 조용히 지키고 있었으니…….’
일단 그는 제외해야 한다.
아니, 한 술 더 떠서 서창의 장인태감과 서창의 환관들 역시 역천자 음양신마의 수족으로 바뀌었다고 상정한 후 일을 해야 한다.
‘어떻게 하지? 대체 어떻게…….’
지금 이 순간에도 시선이 느껴진다.
이제 겨우 절정 수위의 무공밖에는 익히지 못했지만, 육감은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자신의 행동을 주도면밀하게 살피는 눈이 있다고.
‘틈이 생길 거야. 반드시.’
이제야 비로소 창의 조직을 내 사람으로 재구성하고 있는 중이다. 그 중 태반이 서창 입김에 휘둘리는 놈들이겠지만 그래도 기회는 올 것이다.
‘어떻게든 이 일을 황룡패주께 알려야 해.’
무한에서 벌어졌던 무림 대 연회.
비록 끝까지 지켜보지 못하고 어명에 의해 자금성으로 달려오긴 했지만, 여러 곳을 통해 들려온 정보만으로도 어떻게 마무리가 되었는지 알 수 있었다.
역천자의 부활 선포.
그에 대한 전 무림의 감시망 가동과 함께 자시 생 동남동녀의 움직임 추적까지…….
‘그분밖에는 없어.’
그분의 충성심을 의심해서 죄송했다.
하지만 상황과 명령과 여러 여건이 자신을 그렇게 몰아붙였으니 어쩌랴?
‘황룡패주께서 아예 전 무림을 향해 도움을 요청하셨다고 했지? 자시 생 동남동녀가 이동하는 곳에 역천자 음양신마 해무광이 있을 것이라고 말이야.’
그 덕에 서창은 물론이고 음양신마도 허튼 짓하기 쉽지 않게 되었다.
‘그 틈을 노리면 돼.’
할 수 있다. 반드시 알릴 것이다.
‘그렇게만 할 수 있다면 죽어도 좋다.’
***
고염무의 예상이 맞아 떨어졌다.
용무린이 아예 대놓고 전 무림을 상대로 선포를 해버린 탓에 서창 장인태감은 물론이고 해무광 역시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이런 빌어먹을! 이제 겨우 숨통이 트인 것뿐인데 수급이 끊기다니!’
생각하면 할수록 분통이 터졌다.
수급은커녕 명령을 하달 받은 각 성의 승선포정사사가 개방이나 하오문에게 정보를 흘리지 않게 다독이는 일에 전력을 기울여야 했던 것이다.
‘아직 자시 생 동남동녀를 선별해서 보내지 못한 무능한 놈들에게까지 입신양명을 약속해야만 하다니.’
서창 장인태감 석중인을 통해 자신의 명령을 전달 받고 은밀히 자시 생 동남동녀 모으는 일에 관여했던 관리들은 하나 둘이 아니었다.
용무린에게 그들이 허튼 소리를 하지 못하도록 막기 위해 지금 서창은 물론이고 동창에서 변절한 환관들까지 총동원 한 상태였다.
‘그래도 막아야만 해. 용가 애송이에게 내가 이곳에 들어앉은 사실을 들키기라도 하면 다 끝이란 말이야.’
팔십만 금군을 보내면 무엇 하겠는가?
휭 하니 날아서 놈은 이곳을 향해 직선으로 달려올 텐데 말이다.
‘역적이네 뭐네 누명을 씌워도 소용없을 거야. 놈은 금서철권의 주인이란 말이야.’
물론 황제의 껍질을 쓰고 있는 이상 용무린도 자신을 함부로 해칠 수 없다. 금서철권의 권위도 황제의 목숨만큼은 취할 수 없도록 못 박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놈이 미친 척하고 밀고 들어오면? 그래서 나를 끄집어내고 나로 하여금 무공을 펼치도록 만들면? 그때는 어떻게 하지?’
놈에게 역적의 누명을 씌우기 위해 잠자코 죽어줄 수는 없는 일 아니겠는가?
‘그것조차 사실 힘든 일이잖아.’
그 신묘한 놈의 힘에 의해 자신의 의지와는 전혀 다른 일이 벌어질 수도 있는 일이다.
이를테면 지금 간신히 끌어 모은 동남동녀의 정혈이 놈의 수작에 의해 모든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발현되어 버린다면?
‘안 돼. 역시 놈이 알지 못하게 만들어야만 해.’
그 사이 자신은 마지막 한 수를 펼쳐야 한다.
‘환혼대법. 내가 믿을 수 있는 것은 역시 배교의 전설인 환혼대법밖에 없어.’
이전까지는 자신이 옮겨 갈 껍질을 준비하느라 정혈을 낭비해 왔지만 이제는 다르다. 도망이나 치려던 생각을 완전히 버린 것이다.
‘결국 시간 싸움이야. 놈이 나를 먼저 찾아내든지 아니면 내가 먼저 준비가 되든지 간에 말이야…….’
그나마 다행인 것은 서창 장인 태감 석중인의 정신을 이미 제압했다는 것이었다.
채홍이 질렀던 고함 때문에 석중인의 마음이 크게 흔들렸었고, 그 날을 넘겼더라면 자신에 관한 말이 자금성 밖으로 새어 나갔을 수도 있었다.
‘제령대법을 펼쳐 두었으니 이젠 걱정 없지.’
혈고보다는 못하지만 그래도 안 하는 것보다는 낫다.
해무광의 목소리가 날카롭게 울렸다.
“석중인.”
“말씀만 하소서, 주인이시여.”
해무광의 등 뒤에 시립해 있던 석중인이 몽롱한 눈빛으로 오체투지 했다.
바로 저것이 혈고와 다른 점이었다.
혈고는 대상이 인식하지도 못하는 사이 자발적으로 복종을 하는 것처럼 만들어준다면 제령대법은 강압적이기 때문에 조금 아둔해진다. 조금만 관심을 가지고 보면 다 표시가 난다는 뜻이었다.
“지금부터는 시간 싸움이다. 수단 방법 가리지 마라. 각 지방 단체장들에게 어떤 약조를 해줘도 좋다. 삼공, 삼고는 물론이고 필요하다면 총병관의 지위도 내릴 수 있다고 어명으로 약조해라. 그 대신 가장 빠른 시간 내에 자시 생 동남동녀를 이곳으로 보내라고 일러라. 알겠느냐?”
“그대로 이루어질 것입니다, 주인이시여.”
충성스러운 대답과 함께 석중인이 황궁무고 밖으로 사라졌다.
***
완전히 다른 그 무엇으로 사람이 바뀐 석중인이 모든 노력을 다해 해무광의 명령을 이루려고 하고 있을 무렵 고염무가 기회를 잡았다.
새로이 동창의 수장이 된 것에 대한 인사라는 명목으로 내궁인 동서육궁을 두루 돌며 황후, 황귀비, 비, 빈들에게 인사를 했던 것이다.
가장 먼저 황후에게 들렀다.
황후와 이제 갓 돌을 넘긴 황태자 앞에 변함없는 충성을 맹세한 후 공손히 주머니 하나를 올렸다.
“이것이 무엇인고?”
“운남성 코끼리 상아로 만든 주작노리개이옵니다, 황후마마.”
“오오. 주작노리개?”
황후가 크게 흡족한 얼굴로 주머니 안의 노리개를 꺼내 들었다. 온갖 기이한 보물이 많은 황궁이지만 상아로 만든 주작노리개라면 받은 자리에서 꺼내어 볼 가치가 충분한 물건이었던 것이다.
“오오, 과연…….”
꺼내어 본 황후의 눈동자가 커다래졌다.
과연 동창의 장인태감이 바칠 정도로 아름다운 주작의 모습이 주머니 속에 들어 있었다.
“내 장인태감의 정성을 보아서라도 곁에 가까이 두고 자주 꺼내보도록 하겠네.”
“황공하옵니다, 황후마마.”
고염무는 길게 읍하고 물러나왔다.
‘다음은 황귀비마마 차례인가?’
차례차례 돌 것이다.
그리고 그때마다 내용물이 조금씩 다른 주머니 하나씩을 건네게 되리라.
‘지켜보는 놈들이 헷갈리겠지?’
뭔가 수상쩍긴 한데, 과연 어느 쪽을 노려야 할지 알쏭달쏭 부담백배일 것이다.
***
사흘 후 하북 성도의 하오문 지부.
“응? 마마께오서 어쩐 일이시지?”
지부장 교영선은 고개를 갸웃하며 특급으로 올라온 서신을 집어 들었다. 얼굴에는 살짝 긴장마저 감돌았다. 황궁에서 지급으로 보내질 정도의 정보라면 하나 같이 고급이었기 때문이었다.
잠시 후,
“……이, 이런!”
교영선의 눈은 터질 듯 치켜떠졌다.
단 한 번도 생각해보지 못했던 내용이 그 안에 들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정녕 큰일이로구나.”
왈칵 두려움이 앞섰다.
대체 어떻게 해야 좋을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그때였다.
파파팡. 콰쾅.
요란한 소리와 함께 일단의 무인들이 하오문의 지부에 짓쳐드는 소리가 들려왔다.
“역도의 무리다. 깡그리 포박하라.”
“반항하는 놈들은 그대로 참해도 좋다.”
“쳐라.”
차차창. 서걱. 카카카캉. 스가각.
“커헉!”
“크아악!”
요란한 비명소리가 연이어 울리기 시작했다.
‘벌써 꼬리를 잡혔다.’
시간이 없었다.
교영선은 그대로 서신을 작은 도자기 병에 담았다.
그런 후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이 소식을 최대한 빨리 그리고 안전하게 패주께 전해드려야만 해.’
방을 나선 교영선은 그 즉시 욕실에 들었다.
목욕통에 담겨 있던 물을 배수구를 향해 버림과 동시에 도자기 병도 함께 버렸다.
‘됐다.’
교영선의 표정이 조금 밝아졌다.
이제 도자기 병은 배수구를 통해 빠져나가 하수구 끝의 망에 걸러진 후 여러 단계의 손을 거쳐 용무린의 손에까지 잘 들어갈 것이다.
집무실 밖으로 나선 교영선이 고함을 버럭 질렀다.
“대체 무슨 소란이냐?!”
차차창. 서걱. 카캉. 스각.
“커헉!”
“크아아악!”
파죽지세로 하오문도들을 베어 넘기며 올라온 서창의 고수들 모습이 보였다.
선두의 고위 환관 하나가 비릿하게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크게 외쳤다.
“감히 황상의 시해를 획책한 황귀비와 같은 무리다. 사정 볼 것 없다. 쳐라.”
실로 무서운 말이었다.
황상의 시해를 획책한 황귀비와 같은 무리!
‘이미 마마께서도 놈들의 손에 당했구나.’
하오문의 가장 큰 지원자이자 숨겨진 힘이 바로 황귀비였었다.
하지만 이제 그것도 끝이다.
서창의 손에 걸렸으니 황귀비라 하여도 몸 성히 빠져 나가기는 힘들 것이다.
‘우리 아기씨 불쌍해서 어쩌누…….’
황태자와 비슷한 시기에 탄생한 황제와 황귀비 사이의 옹주가 못내 마음에 걸리는 교영선이었다.
***
하북 성도가 서창과 어림군으로 인해 몸살을 앓았다.
누군가가 감히 황상을 시해할 계획을 꾸미다가 걸렸다는 것이 표면적인 이유였다.
놀랍게도 그 역적의 무리에 황귀비까지 얽혀 있었다니 보통 큰일이 아니었다.
덕분에 외부 연락망으로 알려진 하오문의 몇몇 지부와 고수들이 된서리를 맞았다. 서창을 대동한 어림군의 급습에 변변한 반항 한 번 해보지 못하고 몰살당했다.
하긴, 반항이 무슨 소용이 있었을까?
어림군 오천여 명이 한꺼번에 몰려나와 포위를 한 후 서창의 고수들이 투입되었는데 말이다.
하지만 교영선이 장담했었던 것처럼 자기병은 순조롭게 여러 단계의 손을 거쳐 무한으로 흘러들었다. 드디어 용무린 손에까지 들어갔다.
“맹주니-임. 급보입니다, 맹주니-임.”
개방의 방건이 헐레벌떡 달려오며 고함을 질렀다.
비룡문에 들어서기가 무섭게 지른 고함이 비룡각 오층의 가주집무실까지 들려오는 것으로 보아 어지간히 급한 소식인 듯했다.
탓. 타닷.
계단을 통해 올라오는 것도 시간낭비라고 여겼는지 방건은 지붕 끝을 차고 올라 창문을 통해 가주의 집무실로 들어섰다.
“맹주님. 여, 여기 이것 좀…….”
비룡문주와 용대명과 소림의 법정을 비롯한 많은 고수들이 있었지만 방건은 용무린을 향해 직선으로 달려와 들고 온 서신을 넘겼다.
잠시 후,
“맙소사…….”
용무린은 아연실색한 얼굴이 될 수밖에 없었다.
서신 안에 역천자 음양신마의 행방에 대해 적혀 있었는데 그 대상이 생각지도 못했던 존재였기 때문이었다.
“왜 하필…….”
역천자 음양신마가 껍질로 택한 존재는 바로 당금 황제라는 놀라운 사실!
“뭐, 뭐라고? 역천자가 부활한 것으로도 모자라 황제폐하의 몸을 차지해 버렸다고?”
“세상에!”
동창의 장인태감 채홍이 밝혀내고 고염무가 확인을 했으며 이곳까지 정보를 보내오기 위해 황귀비와 하오문의 중요 연락망이 모두 붕괴가 되었다는 소식에 모두가 안색이 돌변했다.
그만큼 무서운 소식이었다.
다른 누구도 아닌, 황제의 몸을 차지해 버렸다니!
어떻게 해야 할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대명제국의 황제라고 하는 최고 권력자를 껍질로 삼아 부활을 한 역천자 음양신마라니, 대체 무슨 수로 그를 잡아 죽일 수 있단 말인가?
‘놈이 팔십만 금군을 움직이면?’
‘깊은 곳에 숨어 어명을 통해 군사들만 부린다면?’
무림이고 뭣이고 다 끝장이 나는 거다.
그 거대한 힘 앞에 무림이라고 해도 버텨낼 수는 없었으니까.
“……!”
“……!”
모두의 시선이 용무린에게로 향했다.
팔십만 금군이 몰려오든 말든 원하는 바를 이룰 수 있는 무력을 지닌 존재는 하늘 아래 오직 한 사람 황룡패주 용무린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