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신마귀환
한참을 침묵하던 용무린이 자책이 가득한 얼굴로 말문을 열었다.
“한 번의 방심이 놈의 부활을 불렀네요.”
놈이 갑자기 불사마력이 아닌 규천마력을 바탕으로 한 천마삼검을 펼치기 시작했을 때 음양신마라고 하는 껍질을 버리고 이미 도망쳐 나갔음을 깨달았어야만 했다.
‘내가 놈의 진악이라고 생각했던 것을 소멸시킬 당시 놈의 진악이 생각보다는 짙지 않다고 느꼈던 것은 바로 놈이 도망쳤기 때문이었던 거야.’
설마하니 불사마력을 한꺼번에 뿜어내 장막처럼 시야를 가린 그 짧은 순간에 도망쳐 나갈 수 있으리라고 그때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하지만 놈은 해냈지.’
아무리 빨라도 후회는 이미 늦다.
이제는 황제가 되어 버린 역천자 해무광을 상대로 최대한 적은 양민들의 피해로 수습하는 수밖에 없다.
“수습하는 방법은 두 가지입니다.”
“오오. 두 가지나?”
“그게 대체 무엇이오, 맹주?”
어찌해야 할지 감도 잡지 못하던 용대명과 소림의 법정을 비롯한 모두가 반색을 했다.
“첫 번째는 저 혼자 불문곡직 자금성으로 직행한 후 건청궁 지하에 숨어든 역천자 놈을 잡아내 처단해 버리는 것입니다.”
“그, 그것은……?”
“그렇게 하면 역적으로 몰리게 되는…….”
대뜸 부정적인 말이 여기저기에서 튀어 나왔다.
용무린이 직접 움직인다면 그 결과야 빤하지만, 뒤처리가 종잡을 수 없게 되기 때문이었다.
‘황제 아니 역천자 해무광 놈이야 잡겠지.’
‘하지만 그렇게 하면 황후를 비롯해 진성왕과 모든 군부의 세력이 적으로 돌아서게 된다고.’
‘아마 모르긴 몰라도 역적과 반란이라는 누명을 쓴 비룡문과 맹주를 처단해야 한다며 오군도독부가 통째 들고 일어날 거야.’
굳이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서슬에 무림 역시 함께 끝장이 나 버릴 가능성이 컸다.
비록 껍질에 불과한 존재였지만 황제라는 사람을 강제로 건청궁 밖으로 끌어내 죽이는 후폭풍은 그렇게나 장대하고 클 것이다.
“두 번째는 놈에게 시간을 주는 한이 있더라도 조금 돌아가는 것입니다.”
“뭔지는 몰라도 그게 좋겠소이다, 맹주.”
“그게 대체 어떤 방법이오?”
용무린의 목소리가 무겁게 이어졌다.
“타초경사! 조호이산! 포전인옥! 금적금왕으로 흐르는 계책입니다. 그 실행 방법은…….”
용무린의 말이 계속될수록 사람들의 입에서는 탄성이 흘러 나왔다.
“오오!”
“그, 그 방법이 좋겠습니다, 맹주.”
용무린의 말대로만 된다면 황제를 죽여 역모를 꾀하는 무림이라는 굴레에서 벗어나 역천자 해무광을 솎아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정작 용무린의 마음은 그것을 거부하고 있었다.
용무린의 ‘참나’가 애꿎은 희생을 용납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타초경사. 일단 놈의 정체를 만천하에 밝힌다. 조호이산. 그 상태에서 놈이 자시 생 동남동녀의 정혈을 취할 수 없게 차단하면 놈은 반드시 밖으로 직접 나설 수밖에 없게 되겠지. 포전인옥. 나를 비롯한 정파무림이 역적의 굴레를 피해 놈을 잡기 위해서는 소수지만 자시 생 동남동녀의 희생이 필요해. 되도록 많은 사람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놈이 정혈을 흡수해야 하니까 말이야.’
바로 그 점 때문에 용무린의 참나가 거부를 하는 것이다.
아무리 이 땅의 일들이 자신에게는 그저 스쳐 지날 뿐인 것이라고는 하지만 공연히 휘말려 들어 목숨을 잃게 될 자시 생 동남동녀에게는 다른 문제였기 때문이다.
‘진악에 물든 이들도 아닌데 내가 그 아이들의 가능성을 미리 거둬들일 수는 없는 법이지.’
나 스스로를 속이는 짓이다.
그리고 그런 것은 ‘참나’를 오염시키고 그 빛을 가리는 어리석은 일에 속한다.
“그래도 저는 첫 번째 방법을 택하려 합니다.”
“예에?”
“매, 맹주!”
“하지만 그것은…….”
모두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용무린을 말리려고 했지만 용무린의 결심은 바뀌지 않았다.
“저와 제 가문이 살자고 애꿎은 목숨을 희생하라 할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
“……!”
말뜻이야 누구보다도 더 잘 아는 정파인들이다.
그저 벙어리가 될 수밖에 없었다.
용무린의 목소리가 잔잔히 이어졌다.
“하지만 안전장치 하나도 없이 제가 일을 벌이면 그 또한 작게는 아버지와 비룡문 그리고 크게는 정파무림의 희생을 요구하는 것, 최소한의 안전장치는 마련해두고 가도록 하겠습니다.”
“최소한의 안전장치?”
“그게 대체 무엇이오?”
“그런 것이 가능합니까?”
용무린의 고개가 크게 끄덕여졌다.
***
닷새 후 북경 인근 패주현.
쌔애애애-액.
이제는 불과 반나절 거리로 줄어든 자금성과 패주현 사이에서 용무린은 갈등하고 있었다.
‘아직까지는 괜찮은데…….’
달을 물들이면서까지 보인 놈의 부활 조짐 이후 별다른 천기의 변화는 없었다. 지난 닷새 사이 또 다른 희생자들은 없었다는 뜻이었다.
‘내가 이대로 직진을 하지 않고 패주현으로 달려가 진성왕야와 면담을 하는 것으로 허비한 시간 때문에 구할 수 있는 아이들을 구하지 못하면 어떻게 하나?’
그것이 고민이었다.
하지만 반대로 진성왕과의 면담을 배제하면 벌어질 비룡문과 정파무림의 희생 또한 마음에 걸렸다.
‘후우. 천기를 안다는 것은 이렇게 무거운 것이로구나.’
모든 생명의 무게를 나 홀로 짊어질 수 없음에도 그 책임감이 막중했다.
다시 경험을 시작하기 전과는 완전히 달랐다.
그 전에는 황룡패주이자 무림왕으로서 내 가문이나 나를 건드리는 것들은 적아를 막론하고 깡그리 죽여 없애 버렸다면, 한 사람 한 사람이 모두 부처가 될 가능성을 품은 존재라는 것을 아는 지금은 정반대였다.
‘진악’을 품거나 오염되어 정상적인 윤회에서 벗어난 존재들이라면 몰라도 함부로 자신이 나서서 그 기회를 박탈할 수는 없었던 거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나 홀로 천하 만민을 구할 수는 없다는 거야.”
그것은 부처도 하지 못했던 일이다.
결국 자신도 선택을 해야만 한다.
“모든 것은 천리에 맡긴 후 최선을 다해 노력을 하는 수밖에 없구나.”
그것이 바로 순천인 셈이다.
애꿎은 소수의 희생과 정파무림의 피해까지 모두 줄일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은 지금 자신이 패주의 진성왕부를 들러 이 사실을 알리는 것이다.
스파아-앙.
용무린의 신형이 패주를 향해 급격하게 꺾였다.
삼 장 어림 높이의 성벽 너머 번화한 패주현의 모습이 눈에 잡힐 듯 들어왔다.
휘리리릭.
용무린은 성을 그대로 날아서 넘었다.
누구도 그의 움직임을 감지하지 못하는 사이 패주현 중심에 자리 잡고 있는 진성왕부 안으로 내려앉았다.
“침입자다.”
“누, 누구냐?”
일부러 드러낸 인기척에 진성왕부가 소란스러워졌다.
진성왕부를 수호하는 왕부장사사의 병사들이 우르르 몰려나왔다.
용무린은 빙그레 웃으며 입을 열었다.
“나는 황룡패주 용무린이다. 어서 왕야께 내가 왔음을 아뢰거라.”
언제 꺼내든 것일까?
버언쩍.
말과 동시에 용무린의 손에 들린 황룡패에서 찬란한 빛이 뿜어졌다.
“어헉. 화, 황룡패주!”
“금서철권 패주친림!”
“추-웅!”
소란이 일시에 가라앉았다.
저 끝에서 헐레벌떡 좌장사 이벽이 달려 나와 부복했다.
“패주-우.”
오랜만에 좌장사 이벽의 얼굴을 보니 절로 웃음이 새어 나왔다.
“어서 왕야께 가십시다, 좌장사.”
“예, 패주.”
이미 많은 것을 알고 있다는 듯 좌장사 이벽이 흔쾌히 일어나 앞장섰다.
하긴 아무것도 모를 리가 없었다.
황제의 시해와 반란에 연루되어 황귀비와 그 주변이 통째 쓸려 나가고 그 와중에 하오문의 몇몇 지부마저 박살이 났는데도 가만히 있을 진성왕야가 아니었던 거다.
“역시 황궁의 일 때문에 패주가 직접 나선 것인가?”
“이미 어느 정도는 알고 계신 모양이십니다, 왕야.”
“그야 물론.”
진성왕이 어깨를 으쓱여 보였다.
“하지만 황제폐하께서 갑자기 왼손잡이가 되었다는 것 정도까지야. 나머지 자세한 것은 나도 몰라.”
“그걸 알면 다 알고 계시는 거네요.”
무거울 수밖에 없는 얼굴로 용무린은 자신이 알고 있는 바를 밝혔다.
역천자 해무광.
그의 정확한 정체와 능력, 그리고 무려 팔십여 년 전부터 그로 인해 진행되어 온 일, 이차 신마대전과 해무광의 죽음과 부활까지 낱낱이 알렸다.
“어, 어떻게 그런…….”
이야기를 듣던 진성왕의 얼굴은 시시각각 변했다.
그리고 이 사태의 수습에 대한 곤란함과 심각성도 단숨에 알아차렸다.
“송구하지만, 황제폐하는 이제 더 이상 황제폐하라 할 수가 없습니다. 놈이 폐하를 집어 삼켰으니 폐하의 의식은 놈에게 기억으로만 남아 있을 뿐, 겉모습을 제외한 모든 것이 놈의 것으로 바뀌었을 겁니다.”
“허어!”
진성왕야는 한동안 장탄식만 거듭했다.
다른 누구도 아닌 용무린의 말이었으니 믿기야 믿고 있지만 당최 다른 대안이 생각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용무린이 단호한 목소리로 이야기에 결론을 지었다.
“해무광을 소멸시켜야 합니다.”
“하, 하지만 겉모습은 아직도 황제폐하이질 않은가?”
“잘 말씀하셨습니다. 그저 겉모습일 뿐입니다. 안은 완벽히 역천자이며 날이 가면 갈수록 동남동녀의 정혈을 흡수해 더 요악하게 변해갈 것입니다.”
“허어…….”
다시 장탄식을 터뜨리는 진성왕.
용무린의 목소리가 단호하게 이어졌다.
“과거 황상께 한 가지 약조를 드린 일이 있습니다.”
“……?”
“어떤 일이 생기든 황태자께서 후대를 잇도록 지켜드리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그거야 당연히…….”
“하지만 황태자의 보령(寶齡) 이제 갓 돌을 지나셨으니 일단은 진성왕야께서 수렴청정을 해주셔야만 할 듯합니다.”
“뭐, 뭐라고? 내가 수렴청정을?”
“예, 왕야.”
“어째서? 황태자께는 황후마마가 있지 않은가?”
당연한 의견이었지만 용무린의 고개는 무겁게 가로저어지기만 했다.
“황후마마 역시 장담할 수 없습니다.”
역천자 해무광이 또 어떤 수작을 부려놓았는지 알 수 없는 노릇이어서 지금껏 계속해서 잠자리를 하며 지근거리에 있었던 황후 역시 권력의 중심에서 배제해야만 한다.
‘물론 더 큰 문제는 이제 겨우 돌이 지난 황태자 역시 안심할 수 없다는 것이지.’
황태자마저 놈의 빈 껍질로 전락했다면?!
‘아니야. 그건 아닐 거야.’
역천자 놈이 이제야 부활을 했으니 아직 그렇게까지는 힘을 확보할 수 없었을 거다.
‘황후마마야 성인의 몸이니 제령대법이나 각종 사이한 대법을 통해 정신을 억압할 수 있다고 하지만 이제 겨우 돌을 넘긴 황태자께는 그것도 불가능하다고.’
뭘 알아야 겁도 먹는 것이고 세뇌도 가능한 거다.
그러니 현재 믿고 맡길 수 있는 수렴청정 대상자는 진성왕이 유일했다.
“왕야. 왕야 밖에는 없습니다.”
용무린의 고개가 깊숙이 숙여졌다.
진성왕은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문득 무엇인가를 깨달았다.
‘어쩌면, 최악의 순간에 내가 황제의 위에 올라야 한다는 뜻이겠구나.’
황제에 이어 황후, 황태자 모두가 이상해졌다면?
그리하여 현 황실의 누구에게도 믿고 황권을 이양할 처지가 되지 못한다면?
두근두근.
갑자기 진성왕의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자신 역시 사람인지라 막연한 욕심이 들었던 것이다.
‘아니야. 아직 거기까지는 생각하지 말자.’
진성왕은 내심 고개를 흔들었다. 욕심이 언제나 사람을 추하게 만든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더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패주의 뜻은 충분히 알았네.”
“감사합니다, 왕야.”
“그래, 내가 무얼 어떻게 해주면 되겠는가?”
“그것은…….”
용무린의 목소리가 한동안 이어졌다.
***
비슷한 시각 자금성 수구문.
과거 총병관이 한차례 통과했던 이력이 있던 문을 통해 커다란 수레 다섯 대가 들어오고 있었다.
수레에 실린 것은 정체 모를 항아리들이었다.
누가 봐도 수상쩍은 항아리가 자금성 내부로 반입이 되고 있었지만 신기한 것은 아무도 제지를 하지 않고 있다는 점이었다.
“어서 빨리 움직여라.”
“예, 대인.”
서창 소속 중감과 고수들을 비롯해 동창 소속의 환관들까지 총 동원되어 눈을 부라리고 있는 통에 어림군은 물론이고 금의위조차 감히 얼씬거리지도 못했다.
“최대한 빨리. 그리고 은밀히 움직여라.”
“건청궁으로 옮겨야 한다.”
“오늘 일에 대해 발설하는 자는 궁의 법도대로 처리할 터이니 명심하렸다.”
“예, 대인.”
추상과도 같은 분위기 속에 항아리들은 건청궁 지하로 옮겨졌다.
그 수가 무려 스물다섯 개.
서창과 동창의 모든 능력을 동원해 미래를 약속해줌으로써 비밀을 확보하고 수급에 성공한 자시 생 동남동녀들이 그 안에 들어 있었다.
건천궁 지하로 이어진 황궁무고 중앙광장.
“크흐흐. 되었다. 되었어. 이 정도면 충분하다.”
차곡차곡 쌓이는 항아리들을 보며 역천자 해무광은 웃음을 참지 못했다.
먼저 확보한 항아리들까지 모두 합해 지금까지 확보한 자시 생 동남동녀의 숫자는 모두 일백 명.
그 정도의 정혈을 한데 모은다면 능히 환혼대법의 극의를 발동할 수 있으리라.
“푸흐흐. 이번에도 내가 이겼다, 독고황.”
어찌나 통쾌하던지!
그동안 가슴 조렸던 초조한 패배감이 승자의 쾌감으로 단숨에 바뀌었다.
“네놈이 들이닥치기 전에 내가 필요한 정혈을 먼저 다 모았단 말이다.”
해무광의 두 팔이 활짝 펼쳐졌다.
후우-웅.
퍼퍼퍼퍼퍼퍼-엉.
백여 개에 달하는 항아리가 동시에 깨어졌다.
죽은 듯 깊은 잠에 빠져 있던 자시 생 동남동녀 백여 명이 그대로 바닥에 너부러졌다.
짝!
활짝 펼쳐졌던 해무광의 두 손이 가슴 어림에서 하나가 되었다.
“오오오-옴! 마라니 마라 오옴. 오소서 신이시여. 이 육체를 신께 내어드리오니 제 혼을 거두시고 이 몸에 깃드시어 신의 힘을 발휘하는 마로써 거듭나소서! 오오오-옴! 마라니 마라 오옴…….”
해무광의 섬뜩한 주문이 끝도 없이 이어지기 시작했다.
***
용무린이 진성왕을 만나기 위해 올라오는 닷새 동안 천하에는 믿을 수 없을 만큼 흉흉한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황제가 역천자 해무광이라고 하는 마귀에게 육신을 빼앗겼다고 한다.
-마귀에게 육신을 빼앗긴 황제가 날이면 날마다 자시 생 동남동녀의 정혈을 흡혈하고 있다.
-황제로 하여금 더는 자시 생 동남동녀들의 정혈을 흡수하도록 그냥 내버려 두어서는 아니 된다.
-황귀비마마와 그 주변이 반란이라는 명목으로 쓸려 나간 것은 시작일 뿐이다.
-흡혈 황제로 인해 천하가 도탄에 빠질 것이다.
-마귀 황제를 막아 설 존재는 천하에 오직 한 사람 황룡패주 용무린이 유일하다고 하더라.
-이미 반인반선의 경지에 오른 황룡패주 용무린이라면 흡혈황제가 아무리 아이들의 피를 빨아도 능히 제압할 수 있을 것이다.
그야말로 흉흉하고 믿을 수 없는 소문이 연이었다.
하지만 이 소문은 자금성의 현실까지 교묘히 꿰뚫고 지나갔다.
황귀비의 억울한 죽음 뒤에 역천자이자 마귀로 뒤바뀐 흡혈황제가 있다는 소문이 바로 그 증거였다.
-황귀비마마께서 당하신 이유가 바로 흡혈황제의 사악함을 알리시기 위해 애쓰셨기 때문이다.
-동창의 장인태감이 몇 달 사이 자꾸만 바뀐 이유 역시 흡혈황제의 정체를 알아차렸기 때문이라고 한다.
개방과 하오문이 총력을 다해 소문을 퍼뜨렸다.
거기에 더해 이제는 진성왕부까지 그 무거운 입을 떼고 반응을 보이기 시작했다.
-항간의 떠도는 흉흉한 소문의 진상규명을 위해 나 진성왕은 황룡패주 용무린에게 적극 나서주기를 요구했다.
황룡패주로서의 본디 소임을 다하라는 뜻이다.
황룡패주는 황제를 제외한 모든 황족의 생사여탈권을 일신의 손에 틀어 쥔 자, 바꿔 말하면 귀책사유만 확실하다면 황제라 하더라도 처벌을 내릴 수 있는 무상권위를 선황제로부터 부여받은 자이니 오직 그만이 자격이 있다 하겠다.
하니, 황룡패주 용무린은 어서 빨리 황성으로 나아가라.
나아가 흡혈황제에 얽힌 매듭을 속 시원히 풀고 하늘과 백성들에게 낱낱이 밝히라.
자금성에서 불과 반나절 거리의 패주현에서 내려진 진성왕의 왕명이 수백여 마리의 전서응과 전서구 그리고 파발마에 실려 전국으로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이것이야말로 면죄부!
비룡문과 정파무림을 애꿎은 역모의 사슬로부터 빼내기 위한 용무린의 한 수였다.
이로써 용무린은 황궁의 일에 개입할 명분을 얻었다.
흡혈황제의 진상을 밝혀라!
진성왕야의 왕명과 불안에 떠는 백성들의 마음을 등에 업은 용무린은 설사 황제를 참한다 하더라도 적절한 설명만 뒤따른다면 역모나 황위찬탈의 누명은 뒤집어쓰지 않게 될 것이다.
군부도 덩달아 들썩였다.
황제를 제외한다면 진성왕이야말로 총병관 양문광을 비롯한 모든 맹장들이 기꺼이 고개를 조아릴 수 있는 유일한 황족이기 때문이었다.
-나 총병관 양문광은 진성왕야와 함께 황룡패주께서 진상규명을 해 주시기를 적극 소망하며 급변하고 있는 이 사태를 예의 주시하고 있다.
-나 후군도독부 좌 도독…….
-나 우군도독부 우 도독…….
총병관과 함께 입을 맞추기라도 했다는 듯 오군도독부 소속 수뇌부들이 다투어 성명을 밝혔다.
오직 한 곳, 한때는 음양신마에게 줄을 댔고 지금은 음양신마로 바뀐 황제에게 충성을 다하는 좌군도독부의 수뇌부만이 잠잠할 뿐이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용무린은 매섭게 창공을 가르며 자금성을 향해 직선으로 나아가는 중이었다.
‘시간이 많이 늦었다.’
진성왕과의 대화가 예상보다 길어졌다.
무려 두 시진.
거기에 더해 진성왕의 왕명이 천하로 퍼져나가기까지 걸린 시간이 또 하루였다.
천하의 운명을 결정하기에는 어처구니없을 만큼 짧은 시간이었지만 그 사이 스러질 수도 있는 애꿎은 생명을 생각하면 마음이 무거워질 수밖에 없는 용무린이었다.
‘지금 이 순간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은 그저 최대한의 빠르기로 자금성을 향해 나아가는 것일 뿐.’
스스스스파-아-앙!
실로 형언하기 힘든 빠르기로 인해 응축된 수증기가 용무린의 주변에서 새하얗게 터져나갈 때였다.
“이, 이런!”
용무린의 얼굴에 안타까움이 어렸다.
우려하고 또 우려했던 일이 벌어지기 시작했던 거다.
우뚝!
절로 신법이 멈춰졌다.
망연자실한 얼굴과 시선으로 저 멀리 북쪽 하늘만 바라보기 시작했다.
“또 희생이 일어났구나!”
용무린의 눈에 이변이 똑똑히 보였다.
우르릉. 우릉.
심혼을 울리는 나직한 뇌성과 함께 자금성이 있는 방향의 하늘에 새카만 먹장구름이 몰려들었다. 그곳에서부터 숨이 턱 막히는 수준의 마기가 뿜어졌다.
그 마기가 실로 범상치 않았다.
지금껏 용무린이 겪어 보았던 그 어떠한 종류의 마기와도 달랐던 것이다.
“불사마력이 아니잖아?!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이지?”
마공의 종류만큼이나 많은 것이 마기의 종류다.
하지만 그 근본을 따지고 들어가 보면 몇 갈래로 나눌 수 있는데 바로 이렇다.
첫째가 바로 마교의 근간인 천마력과 규천마력이다.
천마신공에서 비롯된 것이 천마기, 그 천마기의 힘이 정점에 이르면 천마력이 되고 다시 그 천마력이 하늘에까지 닿으면 규천마력이 된다. 규천마력이야말로 모든 마공의 정점에 있는 힘인 셈이다.
둘째가 바로 혈마로부터 비롯된 종류의 혈마력이다.
혈교의 시작과 끝인 혈신령에 깃들어 있던 힘부터 시작해 피로부터 힘을 취할 수 있는 모든 것들의 궁극에 바로 이 혈마력이 자리하고 있다고 봐도 된다.
역천자 해무광이 자시 생 동남동녀의 정혈에서 힘을 얻는 것을 보면 혈교가 어째서 자신들을 아리만의 적자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인지 잘 알 수 있으리라.
셋째가 바로 불사마력.
이 불사마력이야말로 반인반마선인 역천자 해무광이 선계에 들기 직전의 독고황의 심득을 훔쳐 만들어낸 것으로 모든 마공의 정화라 할 수 있는 힘이었다.
그야말로 모든 마공이 꾸는 꿈이라 할 수 있는 궁극의 힘이 바로 불사마력인 것!
나머지 자잘한 마력들은 모두 그 세 가지 경우에서 파생된 곁가지였다.
“하지만 저 힘은 불사마력과도 달라!”
무릇 마의 힘이라고 한다면 아무리 다르다 하더라도 앞서 말한 세 종류를 큰 줄기를 넘어설 수 없는데 저토록 생소하며 강력한 힘이라니!
대체 뭘까?
저 불길한 먹장구름 아래에서는 지금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일까?
“안 되겠다. 어서 가 보자.”
용무린은 다시금 공간을 가르기 시작했다.
스파-아-앙!
미증유의 속도로 인해 용무린의 몸 주변에서는 다시 한 번 수증기가 새하얗게 응축되었다.
하지만,
“늦어. 너무 늦어.”
거의 공간을 단축하듯 나아가던 용무린의 애가 닳았다.
어서 빨리 나아가 저 무시무시한 일을 막고 싶은데 시간과 거리가 아쉽기만 했다.
“더 빨리!”
스스스스-파-아-앙!
이미 하늘 아래 그 누구보다도 더 빠른 속도로 공간을 가로지르고 있으면서도 용무린은 계속해서 스스로를 다그치며 속도를 높였다.
“더 빨리-이!”
사람으로 태어나서 이 이상 더 빠른 속도를 낼 수 있을까 싶은 순간이었다.
스스스스-후-욱!
타인의 의식 깊은 곳에까지 ‘참나’를 보낼 수 있던 신족통의 힘이 마침내 현실에서도 발휘되기 시작했다. 용무린의 간절한 마음이 시간과 공간이라는 제약을 한 걸음에 뛰어 넘어버렸던 것이다.
쿨렁.
한 차례 공간이 크게 출렁였다.
그 출렁임의 파도가 어찌나 컸던지 아득히 먼 곳에 떨어져 있던 장소까지의 거리가 크게 구부려졌다. 용무린의 코앞에 닿을 듯 접혔다. 하나의 형상으로 맺혔다.
뻐어엉.
그 형상에 녹아들 듯 커다란 구멍이 뚫리고…….
휘슷.
한 줄기 바람을 이끌며 용무린은 그토록 원하던 장소에 시간과 공간을 뛰어 넘어 도착할 수 있었다.
건청궁 지하.
놀랍게도 용무린은 황궁무고에 도착해 버린 것이다.
“이, 이게……. 으응?!”
자신이 지금 무슨 일을 해낸 것인지도 몰라 잠시 당혹해하던 용무린의 눈이 부릅떠졌다.
콰르르. 콰르르르.
금방이라도 터질 듯 꿈틀대는 진악의 구름!
그 안에서 알 수 없는 그 무엇인가가 탄생하려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역! 천! 자! 네 이노-옴!”
우르릉.
건청궁 지하에 용무린의 사자후가 울려 퍼졌다.
한치 앞을 볼 수 없을 정도로 진한 어둠이 실체를 가진 듯 크게 출렁였다.
하지만 이미 너무 늦었다.
먹장구름 저편에서 통쾌한 듯 웃음을 터뜨리는 역천자 해무광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우하하핫! 이제야말로 끝이다. 오오-옴 타아-핫!”
역천자 해무광의 두 손이 쫙 펼쳐졌다.
휘우우웅. 버번쩌저적.
보이지도 않는 그 어떤 절대적인 힘에 의해 검은 빛의 막이 둥글게 펼쳐졌다. 해무광을 에워쌓았다.
“이야아-아-하!”
버언쩍.
더는 시간을 낭비할 수 없었던 용무린은 대뜸 심검을 하나 뽑아들었다.
성큼. 굼실.
지체 없이 펼쳐지는 불사대천검법.
휘어져 감기웠다 가볍게 떨쳐내는 그 흐름 끝에 걸린 모든 것이 공간까지 통째 베어져 나가기 시작하…….
투웅. 투투투투-웅.
……기는커녕 깡그리 뒤로 튕겼다.
“이, 이런!”
용무린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방금 자신의 눈앞에서 벌어진 광경을 믿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불사대천검법이 튕겨지다니!
비홍검의 마지막 초식인 용오름하눌신폭의 파괴력을 최대한도로 압축한 후 정수만 뽑아 놓은 것이 바로 불사대천검법의 춤사위인데 그걸 튕겨낼 수 있다니!
“저, 저건 또 뭐야?”
그때 다시 한 번 믿을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쑤우욱.
해무광의 천령개를 통해 시커멓게 진악으로 물든 사람 형상의 덩어리가 빠져나온 것이다.
“푸흐흐. 잘 있거라 독고황. 결국 나의 승리다.”
진악으로 시커멓게 물든 사람 형상의 덩어리가 익숙한 목소리로 느물거렸다.
역천자 해무광이 틀림없다. 놈의 본체였다.
쿵쿵쿵.
용무린의 심장이 터질 듯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놈이 지금 무슨 짓을 벌이고 있는지 단숨에 깨달았던 것이다.
마선 등선!
믿기는 힘들지만 바로 그것이리라.
“도망갈 수 없다, 해무광!”
어림도 없는 수작이다.
이만큼 많은 악행을 저질러 놓고 어찌 저 역천의 존재가 마선계로 오르는 것을 가만히 지켜볼 수 있겠는가?
굼실. 파아아-!
다시 한 번 불사대천검법이 펼쳐졌다.
무형의 둥근 막에 쌓여 있던 놈의 본체를 향해 심검을 힘껏 내리 그었다.
버언쩌저적.
수백 수천 번의 칼벼락이 떨어져 내리듯 마선계로 등선하는 놈의 본체를 심검이 휘감았다.
투웅. 투두두둥.
놀랍게도 불사대천검법이 깡그리 다시 뒤로 튕겼다.
피쉬잇. 피쉬쉬쉿.
쿠와앙. 쿠콰콰콰-아-앙.
튕겨진 서슬에 애꿎은 건청궁만 날벼락을 맞았다.
온통 파괴되고 무너져 내렸다.
그 후폭풍이 어찌나 거세었던지 멀찍이 떨어져 있던 태화전과 교태전까지 영향을 받았고 내원의 동서 육궁의 기와까지 송두리째 들고 일어났다.
하지만 진정한 싸움은 그때부터가 시작이었다.
용무린이 펼쳐낸 불사대천검법을 튕겨내면서 마선계로 도망쳐 가던 해무광을 대신해 알 수 없던 어떤 어둠의 존재가 뚝 떨어져 내린 것이다.
쏘오-옥.
해무광을 대신해 떨어져 내린 어둠의 존재는 그대로 황제의 천령개를 파고 들어가 버렸다.
“어헉! 저, 저것은 또 뭐야?”
연속되는 기사에 용무린도 화들짝 놀라야만 했다.
해무광을 놓친 것으로도 모자라 생각지도 못한 어둠의 어떤 존재가 내려와 다시금 황제의 몸을 차지해 버릴 줄은 미처 생각지도 못했던 것이다.
버언쩍!
죽은 듯 감겨 있던 황제의 눈이 떠졌다. 검은 색의 뇌전과도 같은 빛을 뿜어냈다.
“……!”
가만히 자신의 두 손을 내려 보았다.
더듬더듬 스스로의 얼굴과 몸을 만져보기까지 했다.
씨이익.
그러더니 갑자기 활짝 웃는다.
그 미소가 어찌나 무서운지!
오싹!
용무린의 등줄기를 타고 한 줄기 소름이 쫙 돋았다.
“서, 설마 환혼대법을 통해서……?”
아찔한 상상에 용무린은 채 말을 잇지 못했다.
그것은 바로 환혼대법의 극의.
어째서 사람과 사람의 혼만 바뀔 수 있겠는가?
해무광이 밝혔던 환혼대법이란 본디 마선계로 나아가기 위한 배교 대법의 모든 것, 어차피 놈이 차지하고 있던 육체가 빈 껍질에 불과하다면 환혼대법을 통해 마선계의 존재와도 자리바꿈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쿵쿵쿵.
용무린의 심장이 터질 듯 뛰었다.
‘아니야. 아닐 거야.’
자꾸만 그렇게 되뇌었다.
우려가 진실로 나타나게 된다면 자신이라고 해도 승리를 장담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용무린은 이미 직감하고 있었다.
해무광을 대신해 황제의 육체를 차지한 존재의 힘은 강림 전부터 자신을 훨씬 더 뛰어넘고 있다는 사실을.
‘불사대천검이 막혔어.’
해무광이 본체를 뽑아 마선계로 오르려는 그때 자신은 전력을 다해 불사대천검법을 펼쳤었다.
하지만 보기 좋게 막혔다.
놈이 완전히 강림하기 전임에도 불구하고 전력을 다한 불사신공과 불사대천검을 깡그리 튕겨냈다.
꿀꺽.
마른 침을 집어 삼킨 용무린이 입을 열렸다.
묻기 싫었지만 물어야만 했다.
“너는…… 누구냐?”
눈앞의 존재가 역천자 해무광이 아닌 다른 그 무엇이라는 것을 용무린은 알 수 있었다.
해실.
황제의 입꼬리가 슬쩍 하늘로 말려 올라갔다.
그러더니 생각지도 못한 말을 불쑥 내뱉었다.
“경배하라! 천년의 세월을 뛰어 넘어 나 아리만이 이 땅에 돌아왔느니라.”
마(魔)이면서 신(神)인 존재의 귀환.
진정한 의미의 신마가 이 땅에 돌아온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