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악전고투
덜컥.
용무린은 심장이 내려앉는 충격을 받아야만 했다.
‘아리만이라니!’
마교에서 말하는 어둠의 신이자 파괴의 신!
안리 만유 혹은 앙그라마이뉴라 불리기도 하는 악의 신이 바로 아리만이다.
‘그 아리만이 대체 어떻게 이 땅에 올 수 있단 말인가?’
신의 강림이 이루어지다니!
마교에서 믿고 있던 악신의 존재가 정말 실존한다는 것도 놀랍지만, 이렇듯 대놓고 강림을 할 수 있다는 사실에 다시 한 번 더 놀랐다.
‘어쨌거나, 그 정도나 되는 놈이 개입을 했으니 내 불사대천검을 튕겨낼 수 있었겠지.’
스스로를 아리만이라 밝히는 존재의 말을 듣고서야 비로소 용무린은 해무광을 속절없이 놓친 일과 불사대천검법이 막힌 이유가 다 이해가 되었다.
아리만이 씽긋 웃으며 선언했다.
“신께 경배하라, 인간아.”
피식.
한껏 긴장하고 있던 용무린의 입가에 풀썩 웃음기가 맺혔다. 계속되는 놈의 경배 요구에 한계까지 치솟던 긴장이 스르르 녹아 없어졌다.
“싫어, 인마.”
그렇게 툭 내뱉었다.
당황스러운 일이 계속해서 연이었지만 오히려 머리가 맑아졌다. ‘참나’의 각성으로 인해 숨겨져 있던 성격이 다시 빛을 발했다.
꿈틀.
예상치 못했던 반응이었던지 아리만은 굵은 눈썹을 거칠게 움직였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용무린이 계속해서 이죽거렸다.
“그거 네 놈 몸 아니야 인마. 원래 네 놈 몸인 것처럼 거들먹거리지 마. 알아들어?”
놈과의 싸움은 필연인 법.
용무린은 계속해서 놈의 속을 긁었다.
아무렇지도 않은 듯 놈이 비릿하게 웃어 보였다. 강자의 여유를 부렸다.
“네놈은 나 아리만이 천 년 만에 세상에 나와 보는 강자 중의 강자다.”
선심이라도 쓰겠다는 듯 한 가지 제안을 했다.
“나를 섬겨라. 내가 뜻을 이룬 후 마계로 다시 돌아가는 날 너는 살아 있는 이 세상의 신이 되리…….”
“됐어 인마. ‘참나’를 각성한 내가 그딴 잡소리에 혹 할 것 같으냐?”
이 세상은 본디 공(空)이고 무(無)이다.
오롯한 것은 오직 하나 ‘참나’뿐!
그것을 깨달았다는 뜻은 이미 인간계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이 스스로에게 불필요한 경험일 뿐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는 것을 뜻한다.
그저 역천의 존재에게 스러져갈 애꿎은 인명이 가여워 다시금 불필요한 경험을 스스로의 의지로 반복하던 존재에게 허튼 수작이라니!
하지만 너무 오랜만의 강림이라 감각이 떨어져서 그런 것인지 아니면 용무린의 ‘참나’를 어떻게든 검은 빛으로 물들이고 싶어서 그런 것인지는 몰라도 놈은 한 번 더 넌지시 권했다.
“이 세상에 너만 한 놈은 눈을 씻고 봐도 없는데 이렇게 일찍 죽으려하다니……. 너는 나를 당해내지 못한다. 이대로 죽을 것이다. 지금의 네 경지에 오르기 위해서는 다시 한 번 이 땅에 와 힘든 삶을 반복해야 한단 말이다. 정말 그래도 괜찮겠느냐?”
“크크큿. 반대로 네가 죽을 수도 있어, 자식아.”
용무린의 옛 기질이 완전히 되살아났다.
반인반선이 된 덕에 그동안 아주 사라져 버린 것으로 보였지만 위기가 눈앞에 나타나니 끝없는 투쟁심과 함께 돌아온 것이다.
그런 용무린을 같잖다는 듯 아리만이 비웃었다.
“푸흐흐. 아직도 인세에 머무는 반인반선 따위가 나 마신 아리만을 상대로 가당찮은 꿈을 꾸고 있구나.”
승패는 싸우기도 전에 이미 갈렸다.
그러니 해보나 마나다.
실제 싸움이 시작되면 불과 일다경 어림에 놈의 육신을 갈가리 찢어 놓을 자신이 있다.
“나 마신 아리만이 인과의 그물을 뚫고 강림하느라 불과 삼 할의 힘밖에는 사용할 수 없는 신세가 되었다고는 하지만 반인반선 따위에 불과한 너 따위 정도는 단숨에 찢어발길 수 있음을 정녕 모른단 말이냐?”
안다. 충분히 느끼고 있다.
‘그래도 상관없어.’
다시 태어나 ‘참나’ 각성을 반복하는 한이 있다 하더라도 놈 따위에게 굴복하거나 고개를 숙이고 싶은 마음 따윈 눈곱만큼도 들지 않았다.
용무린은 두 팔을 활짝 펼쳤다.
버언쩍. 버번쩌적.
양 손에 심검 두 자루가 찬란한 빛으로 솟구쳤다.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한다.’
한마디 툭 뱉었다.
“덤벼!”
어이가 없었던지 황제의 껍질을 뒤집어 쓴 아리만의 입이 슬쩍 벌어졌다.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큭. 크크흐하하하-핫!”
그러더니 이내 통쾌하게 웃기 시작했다.
트드드드.
그 웃음소리에 얼마나 강대한 힘이 실렸는지 자금성과 대지가 진저리를 쳤다.
‘아차. 여기서 이렇게 싸우다가는 애꿎은 사람들 목숨만 스러지겠다.’
자금성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숫자만 기천이다.
놈과 싸우는 것도 좋지만 그 사람들에게 피해를 끼쳐서는 곤란했다.
“걸리적거리는 것 없이 통쾌하게 싸워보자.”
휘슷.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용무린은 하늘 높이 솟구쳤다.
“푸흐흐. 좋아, 좋아…….”
뭐가 그리 좋다는 것인지 연신 웃으며 아리만이 그 뒤를 따랐다.
***
인과의 그물에 뚫린 구멍 앞.
‘저저, 어리석은 놈 좀 보게…….’
마선계에 들기 직전 해무광은 누를 수 없는 호기심에 잠시 하계에 시선을 돌렸다. 거침없이 아리만을 향해 이를 드러내는 용무린을 보곤 혀를 내둘렀다.
바짝 땅에 엎드려 삶을 구걸해도 모자랄 것인데 감히 신을 향해 서슴없이 이를 드러낸다.
어디 그뿐이랴?
대뜸 심검 두 자루를 만들어 내더니 훌쩍 하늘을 향해 날아올랐다. 한 번 해보자는 것이다.
‘놈! 장담하건대 너는 오늘 죽는다.’
해무광은 그렇게 믿어 의심치 않았다.
용무린이 아무리 반인반선의 경지에 올랐다고는 하나, 신이라는 존재를 어쩔 수는 없는 법 아니겠는가?
‘가만, 놈이 죽잖아?!’
해무광은 슬그머니 욕심이 생겼다.
아리만이 강림하며 만들어 놓은 구멍이 스르르 닫히고 있었지만 그의 눈은 그 구멍과 하계를 바쁘게 왕복했다.
‘놈이 죽어 없어지면 바로 내가 살아 있는 신이 될 수 있을 터인데 말이야…….’
아리만은 이 세상에 오래 있을 수 없다.
신이라고는 하나 강림 자체가 인과율에 어긋난다.
‘오랜만의 외유에 신나게 하계를 엉망으로 만들며 깽판을 치고 나면 다시금 돌아가야만 해.’
그때부터 하계는 무주공산이다.
차지하는 자가 임자인 것!
스르르.
그 순간에도 마선계를 향해 뚫려 있는 차원의 문은 놀라운 속도로 좁혀지고 있었다.
‘좋아. 결심했어.’
강림한 아리만이 용무린을 처리한 후 세상을 피로 물들일 때 자신이 그 뒤를 보좌할 것이다.
‘그런 후 아리만께서 다시 마계승천을 하신다면 나는 이 세상을 즐겁게 다스리는 거야. 푸흐흐.’
생각만 해도 즐겁다.
“마선계는 놀다가, 놀다가 지치면 그때나 가야지.”
순천자 용무린이 방해를 해서 그렇지, 마음만 먹는다면 이미 언제든 마선계로 오를 수 있는 능력을 확보해 놓은 지 오래였다.
“자시 생 동남동녀의 정혈만 있으면…….”
지금처럼 힘도 없어 마신강림의 틈을 타 마선등선을 하는 것이 아니라 본신의 힘으로도 이뤄낼 수 있다.
“오냐, 이놈. 아리만께서 네 놈을 어떻게 요리하시는지 내 똑똑히 지켜보아주마.”
해무광은 마선계로의 등선을 완전히 포기했다.
시선을 저 멀리 용무린과 아리만의 전투가 벌어지는 곳으로 돌렸다.
스르르. 팟.
마선계로 향했던 차원의 구멍이 완전히 닫혔다.
그 순간,
버언쩌저적. 쿠콰콰-쾅!
용무린과 마신 아리만의 전투가 시작되었다.
***
쿠와앙. 콰아앙. 콰콰콰-아-앙!
하늘이 무너져 내리듯 연신 터지는 폭음 속에서 용무린은 어금니가 부서져라 이를 악물었다.
‘크읍! 지독하구나.’
불사신공을 바탕으로 한 불사대천검법.
공간조차 가르는 무초식의 검법이 뻗어나가기가 무섭게 더욱 빠른 속도로 튕겨졌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그 무엇으로도 뚫고 들어올 수 없을 것이라 자신했던 방어막을 뚫고 섬뜩한 기운이 피부를 훑고 지나갔다.
스각. 서걱. 피쉬쉬쉿.
용무린의 전신이 점점 더 누더기가 되어간다.
갈라진 곳에서는 굵은 핏줄기가 하염없이 흘렀고 오장육부는 진탕되어 조각조각 끊어지기 일보직전이었다.
‘과연 아리만. 신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기에 전혀 손색이 없는 존재로구나.’
버언쩌저적. 콰콰콰-앙.
스거걱. 푸스슷.
두 자루의 심검조차 놈의 힘에 베어져 흩어지기 일쑤!
“흐아압!”
그때마다 새롭게 힘을 뽑아 올려 심검을 만들어내야만 했다.
아주 죽을 맛이었다.
백회혈과 용천혈을 활짝 연 후 대자연의 기운을 송두리째 끌어당겨 쓰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놈의 힘 앞에 무력하기만 했다.
“크흐흐. 이렇게 짜릿할 수가 있나?!”
선계의 선신이나 신선들과의 신마대전을 제외하면 마계에서의 생활은 무료하기만 한 나날이다.
자신은 마계에서도 신이라 불리는 존재, 같은 위치에 있는 몇몇 악신들과는 아득히 오래 전에 맺은 계약에 의해 싸우지 않고 살아 왔다.
그러니 이 정도로 흥미진진한 전투는 정말 오랜만이었다.
“좋구나. 좋아!”
버언쩍. 번쩍. 버번쩌저적.
통쾌한 웃음과 함께 아리만이 신나게 손을 흔들었다.
그의 손끝에서 짙은 검보랏빛 광채가 쉬지 않고 뿜어져 나와 그 어떠한 보검보다도 더 날카로운 절삭력으로 용무린과 불사대천검을 한꺼번에 베었다.
쿠와아-앙! 푸스스-슷.
허무하게 흩어지는 심검 두 자루.
“이야아-하!”
버언쩌저적.
사라져 버린 심검을 대신해 용무린은 대뜸 불사신공을 운용해 두 자루의 심검을 다시 뽑아냈다.
“……!”
그 모습을 지켜보던 아리만의 눈이 가느다래졌다.
‘재미는 있는데……. 이러다가는 내가 하계에 있을 시간이 대책 없이 줄어든단 말이야.’
아리만의 눈에 용무린의 백회와 용천혈을 통해 이끌리는 대자연의 기운이 똑똑히 보였다.
마치 폭포와 같은 거센 흐름이었다.
그 흐름은 용무린의 내부로 밀려든 후 단전을 휘돌아 본연의 불사신공과 하나가 됨으로써 부족한 힘을 보조하고 있었다.
‘놈과 달리 나는 이곳으로 넘어 오며 지니고 온 힘이 다란 말이야.’
신적 존재인 자신이 인과의 그물을 찢고 이곳의 차원에 강림한 것으로 끝, 놈과 달리 자신은 이곳의 기를 끌어 모아 쓸 수 없는 거다.
바꿔 말하면 일신의 힘을 다 소진하면 더는 이 땅에 남아 있을 수 없게 된다는 뜻, 본연의 힘을 써서 놈과 놀고 있는 이 순간에도 이 땅에 남아 있을 수 있는 시간은 자꾸만 줄어들고 있었다.
‘이 한 번의 재미에 내가 하계에 있을 시간을 더는 빼앗겨서는 곤란하지. 암.’
결심과 동시에 저절로 몸이 움직였다.
성큼.
아리만이 한 걸음을 내디뎠다.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후우욱.
허공에 빨려들 듯 아리만의 모습이 쭉 늘어나는가 싶더니 이내 용무린의 머리 위에 나타났다.
‘신족통!’
축지법이라 불러도 무방할 놀라운 운신법을 써서 자신의 머리 위로 자리를 옮긴 아리만을 감지한 용무린은 사력을 다해 몸을 뒤로 뺐다.
스스스파아-앙!
어찌나 빠른 속도였는지 용무린의 몸 주변에 수증기가 새하얗게 뭉쳐들었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크흐흐. 어딜 가느냐?!”
버언쩍!
아리만의 손에서 검보랏빛 광채가 폭발하듯 터져 나왔다.
쿠와아-앙! 콰아아-앙!
아리만의 손은 이미 목적을 달성했다.
정확히 용무린의 천령개 위 상단의 한 점과 발밑의 한 지점을 찍었다.
“으응?”
피륙이 찢겨나가는 듯한 압력 속에서도 잽싸게 몸을 빼냈던 용무린의 안색이 돌변했다.
이전까지와는 달리 아리만의 마력이 백회와 용천혈에 눌러 붙은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이, 이게 대체……?”
용무린의 입에서 경악성이 새어나왔다.
믿을 수는 없었지만 백회혈과 용천혈이 차단당해 버렸다.
폭포처럼 쏟아져들던 대자연의 기운이 막혔다.
백회혈과 용천혈 자체가 임독양맥을 타통하기 전처럼 막힌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멀쩡하게 잘 유통되고 있었지만 외부와의 교류는 철저히 막혔다.
‘놈의 힘이야. 놈의 힘이 혈도 겉면에 눌러 붙어서 대자연의 기운이 쏟아져 들어오는 것을 막고 있어.’
낭패였다.
그렇지 않아도 놈의 힘에 눌려 심검조차 허무하게 잘라나가고 있었는데 이제는 대자연에서조차 불사신공을 보충할 수 없게 되다니…….
그런 용무린을 보며 아리만이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크흐흐. 기대해라.”
손맛은 역시 얇게 포를 떠죽이는 것이었다.
“잘게 저며 주마.”
후우욱!
아리만의 몸이 다시금 쭉 늘어나는 듯한 환영이 일었다.
신족통. 축지법.
그 무엇으로 불려도 무방할 신법을 펼쳐 용무린의 등 뒤로 자리를 바꿨다.
피쉿. 피시시싯.
그물망과도 같은 조밀하면서도 날카로운 기운이 용무린의 등을 향해 쏟아졌다.
그 힘이 용무린은 물론이고 허공 전체를 휘감았다.
피할 곳은 어디에도 없었다.
‘이, 이런!’
솜털까지 송두리째 곤두선 용무린은 재빨리 불사신공을 하나의 막처럼 전신에 둘렀다. 동시에 심검 두 자루를 전력을 다해 휘둘러 검막까지 생성했다.
하지만 다 소용 없었다.
쿠와앙. 콰아앙. 쿠콰콰-쾅.
창공이 찢지는 듯한 폭음과 함께 용무린의 방어는 너무나도 쉽게 깨어졌다.
불사신공의 반탄강기막이, 심검 두 자루로 만들어낸 검막이 두부처럼 갈라지고 터졌다. 그 사이로 밀려든 아리만의 힘이 용무린의 등을 난도질했다.
“크허억!”
용무린의 몸이 크게 휘청거렸다.
“크흐흐. 맛이 어떠냐?”
아리만은 단번에 목을 날려버릴 수 있음에도 손맛을 계속해서 보고 싶은 것인지 용무린의 몸에 잔 상처를 계속해서 만들어갔다.
스각. 스가각. 서거걱.
그때마다 용무린의 몸에서 굵은 핏줄기가 마구 튀었다.
당장에 목숨이 끊겨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
‘이, 이대로면 필패! 아니, 죽는다!’
용무린은 사력을 다해 돌파구를 찾았다.
다행히 한 가지 가능성이 머릿속에 바로 떠올랐다.
‘놈의 움직임. 분명히 나도 할 수 있지 않던가?’
환영처럼 쭉 늘어지며 공간을 이동한 아리만의 신법은 분명히 자신이 자금성을 향해 올 때 펼쳐졌던 것과 같은 종류의 것이었다.
‘나 쯤이나 되니 환영처럼 쭉 늘어지는 것이 보였던 것이겠지.’
자신을 제외한 다른 사람들이었다면 그냥 동에 번쩍 서에 번쩍 하는 것으로 보였으리라.
‘신족통. 아니 축지라고 해야 하나?’
뭐라고 부르든지 간에 바로 그 능력이었다.
‘그걸 다시 한 번 해내야만 해.’
어떻게 그 능력을 자신이 썼는지에 대한 고찰이나 연습 따위 해 볼 여력도 없다.
‘단 한 번 찾아올 기회! 그때 해내지 못하면 끝이다.’
용무린은 몸에서 빠져나간 피로 인해 아득해지는 정신을 붙잡고 집중하기 시작했다.
버언쩍. 스가가각.
그 사이에도 아리만은 용무린의 몸을 난도질하고 있었다.
“크흐흐. 좋아. 아주 좋아.”
정말이지 끝내주는 손맛이었다.
반인반선이라서 그런지 아니면 적절한 반탄력과 버티는 힘 때문인지 놈의 피부와 근육과 뼈를 조금씩 갉아내는 맛이 아주 그만이었던 거다.
***
완전히 사라져버린 입구 앞에 뭉쳐져 있던 어둠 덩어리.
해무광의 진악 본체가 숨길 수 없는 기쁨에 마구 꿀렁거렸다.
“크하하하! 꼴좋다, 이놈! 아주 걸레가 되는 구나. 크하하하핫!”
통쾌하기 짝이 없는 웃음이다.
글자 그대로 걸레가 되어가는 용무린의 모습을 보며 해무광은 십년 묵은 체증이 한꺼번에 내려가는 시원함을 느낄 수 있었다.
“죽어라, 이놈. 그렇게 비참하게 죽는 것이 바로 네 운명이니라. 크하하하.”
새삼 마선계로 가지 않았던 일이 만족스럽다.
놈은 곧 저렇게 생을 마감할 것이고 아리만께서 지상을 피로 물들인 후 다시금 돌아가게 되면 그 뒤는 자신의 세상이었기 때문이었다.
“좋아. 그러면 이제 나는 스며들 놈만 고르면 되겠구나.”
미리 빈 껍질을 준비하고 있을 때와는 달리 시간이 아주 많이 걸리게 된다.
적당한 놈을 찾아 스며들고, 놈의 ‘참나’를 감싸 녹여 없애 자신을 자각한 후 처음부터 다시 무공을 익혀야만 하니 이만저만 불편한 일이 아니었다.
“츠읍! 저 빌어먹을 놈의 방해만 없었어도…….”
새삼 입맛이 썼다.
애써 준비해 놓았던 빈 껍질이 모두 용무린의 손에 파괴되었기 때문이다.
“내가 만들어 놓은 빈 껍질 하나만 남아있었어도 그냥 들어가서 차지만 하면 예전의 무력을 들어가는 즉시 사용할 수 있었을 터인데…….”
하지만 어쩌랴?
공들여 만들어 놓은 빈 껍질은 이미 하나도 남아 있지 않게 된 것을.
“어쨌든 좋아. 기왕 이렇게 된 것, 이번에는 인간들이 반항할 여지도 주지 않겠어.”
차지할 적당한 몸이 떠올랐다.
“크흐흐. 황태자 정도면 적당하겠지.”
현재 황제의 몸을 차지하고 있는 것은 다름 아닌 황제였다. 그러니 자신이 황태자의 몸에 스며들어가 차지하게 된다면 금상첨화다.
“크흐흐. 네놈의 죽음을 확인하는 즉시 황태자의 몸은 내 것이다.”
아리만의 뒤를 이어 황제의 위에 올라 천하를 발아래 두고 모든 악신께 한껏 피 공양을 하리라.
쿨렁. 쿨렁. 쿠르르르.
해무광의 진악 본체가 요사하게 꿈틀거렸다.
***
용무린의 상태는 절망적이었다.
잘 다져진 고깃덩어리 같았다. 쩍쩍 갈리진 곳에서 굵은 핏줄이 하염없이 흘렀다.
전신대혈이 모두 조각난 것은 말할 것도 없었고 복부에 커다랗게 난 자상 수십여 곳에 심장 어림에는 깊은 상처까지 있어 거의 죽기 일보직전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용무린은 생의 끈을 놓지 않았다.
‘부, 불사의 의지!’
오직 믿을 것은 불사신공밖에 없다는 듯 불사신공의 운용을 멈추지 않은 덕이었다.
쉬이이. 후우우욱.
백회혈과 용천혈이 막혔지만 불사신공은 생의 의지를 놓지 않는 용무린의 뜻을 따라 다른 방법을 찾아냈다.
그것은 바로 피부를 통해 대자연의 기를 빨아들이는 것이었다.
물론 백회혈과 용천혈의 커다란 통로를 이용하는 것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느리고 약한 흐름이었지만 근근이 버틸 정도는 되었다.
그 사이 용무린은 사력을 다해 건천궁 지하 황궁무고로 공간이동을 했었던 때를 떠올려 분석하는 데 집중했다.
‘간절한 의지. 아니 강력한 의지……. 아무리 생각해도 그것만이 답인 것 같구나.’
마치 불사의 의지를 깨달았을 때와 같았다.
불사신공의 요결이 다시 한 번 떠올랐다.
-형체가 없는 내공은 언제나 의지가 가리키는 대로 움직인다.
때로는 부드럽지만 때로는 칼날처럼 날카롭게 바뀌는 내공은 언제나 의지의 발현인 법.
불사를 꿈꾸라. 그리하면 불사를 얻게 되리라.
신족통을 통해 자신의 ‘참나’를 타인의 ‘참나’ 앞으로 바로 이동시킬 수 있었던 것도 자신이 발현한 강력한 의지의 힘이었다.
‘요결이나 법칙 따위가 아니야. 하늘까지 닿을 강력한 의지 앞에 불사신공이 언제나 호응을 해주었던 거야.’
지금 이 순간만 봐도 잘 알 수 있는 일이다.
불사의 의지가 아니었다면 이토록 처참하게 변한 자신이 어떻게 지금까지 살아 있을 수 있었겠는가?
또한 숨이 끊겨 동정호의 물속에 달포 넘게 있었을 때는?
그때 역시 불사의 의지를 놓지 않았기에 결국 부활을 할 수 있었다.
‘나에게 불사의 의지가 살아 있는 한, 놈은 나를 어쩔 수 없어.’
서서히 그러한 확고부동한 깨달음이 섰다.
동시에 한 가지 생각이 스쳤다.
‘내게 불사의 의지가 살아 있는 한 불사신공은 나와 함께 한다. 그러면 이전에 내가 불어 넣었던 불사신공의 힘은 사라졌을 것인가?’
아리만 아니 황제의 몸속에는 자신이 불어 넣었던 힘이 존재한다.
상관세가의 일로 인해 황제의 곁에 머물며 때때로 불사신공을 불어 넣어 주었었던 바로 그 힘!
거기에 더해 황제에게 호심결 입문결까지 가르치지 않았던가?
‘그 후 황제폐하는 하루도 거르지 않고 호심결을 갈고 닦았다고 했어.’
그로 인해 정력이 좋아졌다고 얼마나 좋아했던가?
황후, 황귀비, 비, 빈 등에게 모두 회임을 시킬 정도였다.
‘그 힘이 아리만의 마력에 스러져 사라졌을까?’
아니라고 본다.
억눌리고 억눌려 깊은 곳에 숨겨져 있을 뿐 자신에게 불사의 의지가 살아 있는 한 황제의 몸 속 어딘가에는 불사신공의 힘이 역린처럼 자리 잡고 있으리라.
‘그렇다면?’
희망이 있다.
놈의 몸에 자신이 불어 넣은 불사신공의 힘과 황제가 닦아 놓은 호심결의 힘이 아직도 남아 있다면 놈에게 치명적인 일격을 먹일 수 있다.
반짝.
용무린의 눈에 회심의 불꽃이 튀었다.
‘응?’
아리만의 가슴에 알 수 없는 불안감이 스몄다.
‘뭐지?’
용무린의 눈가를 스쳐지나간 회심의 빛을 아리만은 결코 놓치지 않았다.
‘이놈. 뭔가 있는데?’
하긴, 무려 반인반선씩이나 되는 존재다.
그런 존재가 이렇게 찍 소리 한 번 하지 못하고 고이 죽어 줄 리는 없는 거다.
‘제 아무리 내가 아리만이라고 해도 말이야.’
아리만의 뇌리에 뭔가가 떠올랐다.
강림하고 있을 당시 공간이 열리고 환영처럼 황궁무고 안으로 진입하던 용무린의 모습이었다.
‘아하! 이놈 역시 신족통을 사용할 수 있었지?’
새삼스레 용무린의 노림수를 알 수 있을 듯했다.
반인반선의 몸, 아직은 여물지 않은 터라 그 힘을 자유자재로 사용할 수 없기 때문인지 지금껏 속절없이 당하고 있긴 했지만 어떻게든 반전을 노리는 모양이었다.
‘공간이동을 통해서 내 뒤를 노려 치명적인 한 수를 먹여보겠다는 것이겠지?’
푸흐흐. 가소롭다.
‘감히 나 아리만을 상대로 얕은 수를?’
어림도 없다.
사용할 수 있는 능력은 비슷한 것이나 그 능숙함을 비교할 수 없다. 그 차이는 절정의 무인과 삼류무인의 차이보다 훨씬 더 크다.
‘오냐, 좋다. 네놈이 하고픈 대로 해 보거라.’
놈이 펼치는 마지막 희망을 박살내리라.
생각만 해도 기분이 좋았다.
희망과 같은 의지를 박살내는 것은 악신인 자신에게는 너무나 큰 희열인 것이다.
휘슷.
아리만의 신형이 적당한 거리로 멀어졌다.
용무린에게 기회를 주기 위해서였다.
아마 용무린은 자신의 행동이 여유 혹은 조금 더 즐기기 위함으로 보이리라.
그때였다.
반짝.
용무린의 눈빛이 변했다.
‘기회다.’
기다리고 기다려왔던 기회가 왔다.
죽음까지 거부할 정도로 강력한 의지가 아리만의 내부로 스며들었다.
“일어나라 불사신공아! 찬란한 불사의 검이 되어 악신의 진악 본체를 가르라!”
아리만으로서는 생각지도 못한 외침.
“으응?”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아리만이 멀뚱한 표정을 지어 보일 때였다. 아리만의 강대한 마력에 짓눌려 황제의 몸 깊숙한 곳에 죽은 듯 숨어들었던 불사신공의 힘이 폭발하듯 솟구쳐 올랐다.
버언쩍. 콰콰콰콰콱!
용무린이 보내는 불사의 의지를 받아들인 불사신기가 검의 형태로 진화했다. 작지만 한 자루의 심검이 되어 아리만의 진악 본체를 직접 공격했다.
“우와아-악!”
상상하지도 못한 공격에 아리만이 비명을 내질렀다.
외부가 아닌 내부의 공격에 혼비백산 놀라 마력을 집중해 불사신공을 받아 일어난 심검을 파괴하려 들었다.
하지만 만만한 일이 아니었다.
어쨌거나 강림한 황제의 몸 내부에서 일어난 일이기 때문이었다.
버언쩍. 번쩍. 쐐애애액.
심검은 소검처럼 작아도 심검으로서의 위력을 고스란히 가지고 있었다. 검보랏빛 마력이 아무리 짓누르고 파괴하려 해도 당당히 맞섰다.
쿠와앙. 콰앙. 쿠콰콰콰-앙!
창공이 터져나갈 듯한 파괴력이 아리만의 내부에서 고스란히 펼쳐졌다.
굼실. 휘슷.
나비의 나래 짓처럼 부드럽지만 공간 자체를 가를 힘을 지닌 불사대천검법이 아리만의 내부를 엉망진창으로 만들기 시작했다.
“우와악.”
아리만은 연신 비명을 질렀다.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무슨 놈의 반인반선 따위가 남긴 힘이 이토록 끈질기고 지독하다는 말인가?
물론 마력의 파괴력만으로 따지자면 단숨에 놈의 심검을 부숴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게 하면 자신이 차지한 빈 껍질이 박살난다.
황제의 몸이 갈가리 찢겨나갈 것이다.
‘그렇게 되면 내가 이 땅에 있을 수 있는 시간이 확 줄어든단 말이야.’
더 정확히는 안식할 몸이 없으니 이 싸움을 끝으로 허무하게 마계로 돌아가야만 한다. 해무광이 제 마음대로 아무에게나 스며들 수 있는 것과는 대조적이다.
그것이 바로 인과율의 법칙.
악신들이 함부로 하계에 강림해 위력을 떨칠 수 없는 이유였다.
버언쩌저적. 콰콰콰-아-앙.
아리만의 내부에서 연신 강대한 폭발이 일어났다.
“크허억. 쿨럭. 쿠울럭.”
아리만은 연신 검게 죽은피를 게워냈다. 그 사이 희끄무레한 덩어리도 있었다. 내장이 조각나 입 밖으로 튀어나와 버린 것이다.
‘이, 이런 빌어먹을.’
아직도 내부를 휘젓는 놈의 심검만 없다면 자신의 강대한 마력을 이용해 복구할 수도 있으련만, 이미 다 소용없는 일이 되어 버렸다.
생각지도 못한 공격 한 번에 자신이 차지하고 있는 육신이 끝장이 나버린 것이다.
‘분명히 그 망할 놈의 기운을 녹여 없애 버렸다고 생각했었는데……. 이 몸을 복구한다고 해도 마음껏 분탕질 할 마력이 남아 있지 않겠구나.’
너무 심하게 망가진 탓이다.
아쉽지만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토록 기다려왔던 하계로의 강림이었지만 이렇듯 맛만 살짝 보고 다시 돌아가야만 한다.
‘조금 더 즐기겠다고 남아 있다가 땡중 놈들이나 도사 놈들의 힘에 쫓겨 도망치는 것보다는 그 편이 더 낫겠지.’
지금 이 순간에도 이곳을 향해 밀려드는 소림의 땡중들 냄새가 맡아지고 있다.
아주 지독하고 불쾌한 냄새다.
반인반선이 뿜어내는 냄새만큼은 아니었지만 형편없이 줄어들게 될 자신의 마력으로는 감당하기 벅찰 정도의 힘의 파동이 느껴졌다.
‘젠장. 젠장. 젠장.’
무려 천 년 어림만의 강림이었는데 이런 꼴이라니!
자존심이 상해 견딜 수가 없다.
하찮게 봤던 반인반선 놈에게 이런 꼴을 당했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을 정도였다.
‘아니지. 천 년 전에도 지킴이란 놈에게 이런 꼴을 한 번 당하긴 했었지.’
생각해보니 그때 지킴이들이 사용하던 힘과 용무린이란 반인반선 놈이 사용하던 힘이 비슷했다.
춤을 추듯 능청이는 검법으로 보나 완전히 눌러 없앤 줄 알았음에도 다시금 폭발하듯 치솟아 오른 놈의 내공으로 보나 똑같았다.
아드득.
“용서치 않는다. 지금 당장 마계로 강제소환 당하는 한이 있더라도 네 놈만은 기필코 찢어 죽이고 만다.”
우르릉.
아리만의 외침이 하늘과 땅을 동시에 뒤흔들 때였다.
후욱.
“그거 내가 할 소리야 인마!”
불퉁거리는 용무린의 목소리가 아리만의 등 뒤에서 들려왔다.
아리만의 머리털이 송두리째 곤두섰다.
용무린의 힘이 아무리 하찮다고는 해도 지금은 생각지도 못한 심검의 공격을 내부에서 받고 있는 상황, 자칫 잘못하면 치명상을 입을 수 있었다.
‘아무리 이 시간 이후 다시 돌아가야 하는 신세가 되었다고는 해도 이기고 돌아가는 것과 죽어서 강제 소환당하는 것은 이야기가 다르지.’
지금 처한 상황도 부끄럽기 짝이 없는데 아예 져서 강제 소환을 당한다면 그 무슨 창피인가?
‘그런 경험은 천 년 전에 지킴이란 놈에게 한 번 당해 본 것으로 족해.’
결심이 섰다.
아리만은 자신의 내부를 엉망으로 만들고 있는 심검에 쏟고 있던 마력을 최소한의 것만 남긴 후 깡그리 외부로 뿜어냈다.
“크아아압!”
하지만 이미 너무 늦었다.
이 순간만을 노리며 불사신공을 모으고 또 모아왔던 용무린이 한 발 먼저 손을 썼다.
휘우우웅. 버번쩌저적.
불사신기가 폭발하듯 뿜어졌다.
하지만 용무린은 최후의 한 수라고 할 수 있던 그 힘을 공격용으로 사용하지 않았다.
‘해 봐야 소용없을 거야.’
강림하기 전부터 전력을 다한 공격을 튕겨냈던 존재다.
아무리 모으고 또 모은 힘이라지만 놈이 생각지도 못한 때에 내부에서 빛을 발했던 심검과는 그 경우가 완전히 다르다.
콰아-악!
그래서 용무린은 아리만을 꼭 붙잡기만 했다.
놈이 자신의 백회와 용천혈에 마력의 막을 덧씌워놓았듯 자신 역시 놈이 옴짝달싹할 수 없을 정도로 단단히 옥죄는 일에 전력을 기울였다.
“이놈! 뭐, 뭐하는 짓이냐?”
먼저 방어를 생각해 반탄강기와 같은 형식으로 마력을 피부 바깥에 집중시키던 아리만도 놀랐다.
‘분명 마지막 기회라는 것을 모르지 않을 텐데, 설마 이대로 죽고 싶은 것일까?’
바로 그때였다.
용무린의 진정한 공격이 비로소 시작되었다.
‘불쌍한 존재 같으니…….’
불회곡에서 갈고 닦은 방법에 마지막 희망을 걸었다.
마령인들의 의식 깊은 곳을 물들였던 진악, 그 사이한 영적 존재들을 소멸시킬 때 깨달았던 측은지심과 따뜻한 마음 그리고 세상을 사랑하는 마음을 공격초식 삼아 아리만의 의식에 투영했던 것이다.
‘아무리 진악으로 똘똘 뭉친 놈이라고는 하지만, 어떻게 악의(惡意)를 통해서만 즐거움과 행복 그리고 존재의 이유를 찾을 수 있단 말인가?’
놀랍게도 효과는 즉각적이었다.
용무린의 행동을 허튼짓으로 생각한 아리만이 피부 밖에 단단히 휘감아 둔 반탄강기 아니 반탄마력을 이용해 막 공격을 하려던 찰나, 놈의 진악의 본체가 크게 뒤흔들렸다.
“커헉. 뭐, 뭐야?”
나그네의 옷을 거센 바람이 아닌 따뜻한 태양이 벗길 수 있었듯 아리만의 강대한 마력 역시 마찬가지였다.
호승심이나 살의가 아닌 측은지심과 세상 만물을 사랑하는 용무린의 따뜻한 의지가 직접 내부로 스며들자 악신이라 불리던 존재의 마력이 맥을 추지 못하고 스러지기 시작한 것이다.
“우와악! 이, 이게 대체 뭐야?”
아리만의 입에서 처음으로 비명이 터졌다.
그것도 아주 고통스러운 비명이었다.
하긴, 자신의 존재 자체인 마력이 봄 눈 녹듯 녹아 없어지고 있으니 그럴 수도 있으리라.
‘아! 그렇구나.’
아리만의 비명소리를 들으며 용무린은 한 가지를 깨달을 수 있었다.
‘아리만. 너…… 진짜 신이 아니었구나.’
사실이었을까?
스르르. 스르르르.
아리만의 마력이 더더욱 빠르게 녹아 없어졌다.
‘진짜 신이라면 –아무리 악신이라 하더라도- 측은지심과 자비심과 세상에 사랑을 보내는 마음에 이토록 큰 타격을 받을 리 없단 말이지.’
신이라는 존재는 완전무결을 뜻한다.
눈곱만큼의 결점이라도 남아 있다면 부족한 것이 있기에 신이라고 할 수 없는 거다.
‘불쌍하기 짝이 없구나, 아리만. 신이라 자부하던 존재의 정체가 고작 진악의 힘이 조금 더 많이 뭉쳐진 영적 존재에 불과했다니…….’
용무린의 앎이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아리만의 마력이 녹아 없어지는 속도가 빨라졌다.
쏴라락. 푸스스스.
“크아아-악! 어떻게 이럴 수가……. 어떻게-에!”
아리만의 비명은 절규로 바뀌었다.
그만큼 아리만은 당황했고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세상에, 악신 그 자체인 자신의 마력이 이렇듯 무력하게 녹아 없어질 수 있으리라고 어디 한 번이라도 생각해 보았겠는가?
‘이, 이러다가는 또 다시 강제소환 당한다.’
당당한 악신의 하나로 하계에 나들이를 나왔다가 하잘 것 없는 인간의 손에 죽어 강제소환 당하는 일만큼은 더는 없어야 한다.
“크아아합!”
더 늦기 전에 아리만이 용을 썼다.
속절없이 녹아 없어지는 마력의 제어를 포기했다.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최대한의 힘을 파괴력으로 치환한 후 용무린을 향해 쏘아냈다.
“뒈져라 버러지야-앗!”
버언쩍. 투화-와-악!
쿠와아아-앙!
용무린이 단단히 휘감아 옥죄고 있던 불사신공이 순간적으로 가루가 되어 사라졌다.
그러고도 아직 여력이 많이 남아 있던 마력은 용무린의 신체마저 갈가리 찢어내기 위해 짓쳐들었다.
“크허-억.”
왈칵 덩어리 피를 쏟아낸 용무린의 몸이 들썩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꿋꿋이 버텼다.
놀라운 일이었다.
단숨에 아리만이 작정하고 뿜어낸 그 무시무시한 마력을 몸을 받아 냈으면서도 저렇듯 덩어리 피 한 번 쏟아내는 것으로 다라니.
“어떻게 버틸 수 있지?”
아직도 속절없이 흩어지는 마력으로 인해 고통스러웠지만 아리만은 또 다른 놀라움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믿을 수 없었다.
자신이 방금 뿜어낸 마력은 반인반선 따위가 버텨낼 성질의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
용무린은 한결 같았다.
언제 피를 토해냈느냐는 듯 지그시 눈을 감은 채 측은지심과 자비심 그리고 세상 모든 것을 사랑하는 마음을 계속해서 아리만의 진악을 향해 뿜었다.
‘너, 조금 강한 마력을 지니고 있을 뿐인 존재여. 너의 존재 자체가 이 우주의 섭리에 어떤 일익을 담당하고 있는지는 내가 아직 다 모르겠으나, 나는 너를 불쌍하고 또 불쌍하다고 생각하는구나.’
무극인 일원에서 음과 양이 갈려 나왔듯 아리만이라고 하는 진악 덩어리 역시 선한 의지가 생겨날 때 갈라져 나와 저 모양이 되었을 것이다.
‘선함은 그 자체로 모든 이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기에 누구나 바라마지 않는 것이 되었을 진대, 너는 정확히 그 반대에 서 있으니 어찌 힘들지 않았겠는가?’
용무린은 악신 아리만의 존재 자체를 인정했다.
아리만은 본래 그렇게 생겨 먹었을 뿐인 거다.
인간을 비롯한 모든 생명에게 딱히 악을 행사하겠다는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행동하고 있다는 사실에 측은한 마음이 들었다.
‘네 존재 자체가 본디 그러한 것, 그러니 네가 하고 있는 행동 또한 따지고 보면 자연스러운 일 아니겠는가?’
분명히 저 진악으로 똘똘 뭉친 존재도 나름의 이유가 있어서 생겨났을 것이다.
‘어쩌면 인간에게 선함이나 자비심. 혹은 측은지심 따위를 배울 수 있도록 기회를 주려고 생겨난 존재일 수도 있지 않을까?’
악이라는 존재가 있어야 선함이 빛을 발한다.
‘참나’의 깨달음 역시 마찬가지.
악이라고 명명한 일련의 일들이 없다면 그 누가 선이라는 추상적인 것을 깨달을 수 있겠는가?
‘그러니 나라도 너를 인정하고 측은하게 생각해주마. 너는 네 할 일을 다 하고 있다. 하계에 미치는 너의 악의를 비롯한 모든 영향력은 본래 그렇게 되게끔 되어 있는 것, 오롯이 너의 잘못이 아니다.’
용무린의 앎이 바른 것이었을까?
푸스스. 푸스스슷.
마력이 녹아 없어지는 속도가 폭증했다.
아리만의 진악의 힘이, 마계에서 비롯된 미증유의 힘이 실로 놀라운 속도로 흩어졌다.
“크아아악! 이럴 수는 없어. 이럴 수는 없다고…….”
아리만은 이제 용무린을 공격할 엄두도 내지 못했다.
자신의 마력이, 진악의 본체가 흩어지는 것을 괴로워하며 지켜봐야만 했다.
“이제 돌아가라, 아리만. 나는 너를 인정하고 불쌍하게 생각하지만 네가 계속해서 하계에 남아 있기에는 인간들이 받아야만 할 고통이 너무 크구나…….”
“크아아악!”
외마디 비명을 끝으로,
푸스스슷.
아리만, 황제의 빈 껍질을 차지하고 있던 진악의 존재는 하계에 남아 있을 수 있는 힘의 근원을 깡그리 잃고 강제소환당해 버렸다.
“이, 이런 치욕이! 나를, 당당한 악신인 나 아리만을 감히 불쌍하다고 생각하다니! 돌아오겠다. 반드시 돌아와 네놈을 갈기갈기 찢어 영혼까지 집어 삼켜 주리라. 아니, 네놈이 지키려고 했던 인간이란 족속 자체를 깡그리 말살해주마. 반드시-이!”
아리만의 섬뜩한 절규가 잠시 허공을 맴돌다 사라졌다.
“허어억!”
그때였다.
아득한 하늘 아래 격렬히 떨리는 검은 덩어리가 있었다.
바로 해무광이었다.
“미, 믿을 수 없어…….”
어찌나 놀랐는지 해무광은 도망쳐야 한다는 사실마저도 까맣고 잊고 있었다. 인과의 그물마저 잠시 뚫어내고 하계로 강림한 아리만의 강제소환은 그에게 그만큼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스윽.
용무린의 시선이 해무광에게로 향했다.
“너, 거기에 있었구나.”
까마득히 먼 곳에 떨어져 있었지만 용무린의 눈에는 그의 실체가 낱낱이 보였다.
추악하게 꾸물대는 진악 덩어리.
아리만과는 달리 스스로 힘에 취해 악에 오염되어 진악을 키워 온 존재.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용무린은 해무광에게 증오나 악의를 품지 않았다.
그저 측은했다.
악이라는 존재를 발판삼아 ‘참나’를 깨닫기 위해 노력해도 부족할 이 짧은 인생을 오로지 힘에 취해, 더 많이 가지기 위해, 더 큰 욕망을 이루기 위해 진악 그 자체가 되어 버리다니!
“불쌍한 놈…….”
참나가 아닌 진악의 길을 택했으니 생사윤회의 고리를 벗어날 가능성은 전무하다.
오직 한 가지 가능성이 있다면 마선 등선뿐인데 아리만의 뒤를 이어 세상을 마음껏 활보하고 싶은 욕심에 이미 기회를 놓쳤다.
또 다른 가능성은 타인의 몸에 스며들어 다시금 힘을 모아 마선계로의 문을 여는 것인데, 용무린이 그 딴 짓을 지켜보고 있을 턱이 없는 거다.
“헛된 욕심에 최악의 길을 선택하고 말았구나.”
“허윽.”
해무광이 몸살을 앓았다.
실체도 없는 진악 덩어리였지만 격렬하게 떨었다.
증오나 분노 그리고 악의가 아닌 자비심과 측은지심 가득한 용무린의 눈이 그렇게 무서울 수가 없었다.
‘도, 도망가야 해.’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이대로 남아 있다면 반드시 강제 소환 당해버린 아리만과 같은 전철을 밟게 될 것이라는 것을.
쑤와아-악!
해무광이 내빼기 시작했다.
자금성을 향해 뚝 떨어져 내렸다. 용무린이 함부로 손을 쓸 수 없을 것이 분명한 황태자의 몸속으로 스며들려는 것이었다.
하지만.
“멈춰라.”
후욱.
신족통을 발휘해 시간과 공간의 벽을 훌쩍 뛰어넘어 다가온 용무린에게 가로막혔다.
“어헉.”
단순히 가로막았을 뿐이었는데 해무광은 그대로 굳었다.
악신 아리만을 강제소환 시켜버린 용무린은 그 전과는 또 달랐다.
그 위엄과 찬란함이라니!
가감 없이 자신의 의지를 드러낸 용무린의 모습은 흡사 신의 화신과도 같았다.
‘바, 반인반선 따위가 아니야.’
비슷한 경지에 도달한 자신이었기에 그 능력에 대해서는 자신 역시 어느 정도는 알고 있었다.
‘더 높은 곳으로 나아가고 있어. 신성. 그래 맞아. 놈이 뿜어내고 있는 기운은 신성 그 자체라고…….’
그 증거가 눈앞에 오롯했다.
후광처럼 뿜어지고 있는 저 찬란한 빛을 보라.
여느 불교 탱화에 그려진 부처가 그러하듯 신비로운 광휘가 태양처럼 뻗어 나오고 있지 않은가?
‘탱화 같은 그림도 머리 부분에서만 후광이 그려져 있는데 저놈은 전신에서 빛이 뿜어지고 있어.’
더 놀라운 것은 놈의 회복력이다.
갈가리 찢기고 갈렸던 근육과 뼈와 전신대혈은 물론이고 심장에 새겨진 깊은 상처와 주요 장기마저도 어느새 복구가 끝나 있었다.
불사신공의 힘이었다.
아리만을 상대하며 불사의 의지가 궁극에까지 올라 버린 것이다.
‘도망가야 하는데…….’
그것은 마음일 뿐이었다.
용무린의 측은지심 가득한 시선이 족쇄라도 되는 것처럼 도무지 움직일 수가 없었다. 진악으로 이뤄진 본체가 자신의 의지를 따르지 않았다.
가여운 듯 가만히 바라보고 있던 용무린의 입이 불현듯 열렸다.
“너도 이제 그만 사라져라.”
투화아-악!
용무린의 전신에 둘러진 광휘가 순간적으로 확장됐다.
그대로 해무광을 집어 삼켰다.
“끄, 끄아아-악!”
해무광의 진악 본체가 처절한 비명을 쏟았다.
푸스스. 푸스스스.
아리만이 그러했듯 해무광의 진악 본체 역시 견디지 못하고 녹아 없어지기 시작했다. 아니, 아리만보다 훨씬 더 빨리 사라졌다.
“네게 한 톨의 선함이라도 남아 있다면 다시금 이 땅에 돌아오게 되겠지.”
만에 하나라도 그리 된다면 그것은 과거 놈이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어 이 사람 저 사람의 몸에 스며들어 긴 세월을 영위해왔을 때와는 완전히 달라지게 되리라.
‘그때는 지금까지 스스로가 맺어 왔던 악연을 갚기 위해 불쌍하고 불쌍한 삶을 끝없이 갚아가야 하겠지.’
언제까지?
자신이 지은 악업을 모두 갚거나 ‘참나’를 깨달아 생사윤회의 사슬을 벗어던질 때까지.
‘한 톨의 선함도 남아 있지 않다면?’
답은 이미 나와 있다.
소멸!
그것밖에는 남아 있지 않다.
푸스스슷.
어느새 해무광의 진악 본체가 완전히 사라졌다.
이제야 모두 끝인 것이다.
“모두 걱정이 크겠군.”
발아래 개미처럼 작게 보이는 자금성이 보였다.
용무린과 아리만의 충돌로 인해 파괴되고 무너져 내린 건천궁의 폐허 주변으로 사람들이 몰려나와 서서히 정리를 시작하고 있었다.
“돌아가자.”
아직 자신의 일은 완전히 끝나지 않았다.
-이, 이런 치욕이! 당당한 악신인 나를 불쌍하게 생각하다니! 돌아오겠다. 반드시 돌아와 네놈을 갈기갈기 찢어 영혼까지 집어 삼켜 주리라. 아니, 네놈이 지키려고 했던 인간이란 족속 자체를 깡그리 말살해주마. 반드시-이!
아리만의 절규가 아직도 귀에 생생했다.
‘온다고 했으니 언제고 오겠지.’
자신에게는 아니었지만 평범한 인간들에게는 악신으로 불리던 존재의 약속이다.
그러니 올 것이다.
반드시.
“또 와라 아리만. 기다리고 있겠다.”
그 말을 끝으로 용무린이 한 걸음 크게 내디뎠다.
후욱.
신족통이 펼쳐졌다.
용무린은 시간과 공간이라는 제약을 뛰어넘어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에게로 이동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