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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세월이 흐른 후 (104/104)

8.세월이 흐른 후

자금성의 혼란은 빠르게 가라앉았다.

적극적으로 전면에 나선 진성왕 덕이었다.

황제라는 빈 껍질을 역천자 해무광이 쓰고 있으면서 온갖 사이한 짓들을 해왔다는 것을 그가 직접 인정한 후 수습에 들어갔기에, 황족들도 황제의 소멸을 큰 혼란 없이 받아들일 수 있었다.

하긴 증거는 차고 넘쳤다.

황귀비의 폐비 과정이나 연거푸 바뀐 동창제독, 그리고 건청궁 지하의 황궁무고를 재정비할 때 찾아낸 많은 수의 동남동녀의 주검 등 넘쳐나는 증거에 인정하지 않으려야 않을 수 없었던 거다.

새로운 황제의 자리에는 이제 겨우 걸음마를 떼는 어린 황제가 앉았다.

하지만 수렴청정은 황후를 대신해서 진성왕이 맡았다.

일련의 일로 크게 깨달은 황후가 불가에 귀의를 해 버렸기 때문이었다.

권좌란 언제나 욕망 그 자체를 대변하는 법이어서 혹여 하늘이 바뀔 것을 염려한 대신들이 진성왕의 수렴청정을 반대하고 나섰지만 용무린이 한마디 하는 것으로 간단히 진압되었다.

“나 황룡패주가 보증하지. 과거 상관세가의 일이 있었을 때 선대 황제 폐하와 약속을 했다. 무슨 일이 생긴다 하더라도 황태손을 보위에 앉히고 보살펴 드리겠노라고 말이야. 그러니 염려 마라.”

무림왕을 넘어 이제는 무신이라 불리는 용무린의 말이다.

감히 뉘라서 거부하겠는가?

“황룡패주의 말씀을 믿고 따르겠습니다.”

“황룡패주의 보증을 믿겠사옵니다.”

모두가 고개를 조아리고 얌전히 따랐다.

그렇게 황실을 정리해 놓은 후 용무린은 비룡문으로 다시 되돌아왔다.

***

오래지 않아 비룡문에 큰 경사가 생겼다.

황룡패주이자 무림왕이며 이제는 무신(武神)으로 불리는 용무린과 제갈영령과의 혼례였다.

무한 일대가 들썩였다.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유명 인사들이 혼례에 참석하기 위해 밀려들었기 때문이었다.

이제는 개방 후개의 위치로 확실하게 올라선 방건의 오지랖 덕이었다.

조촐한 혼인식을 원했던 용무린의 생각과는 달리 그가 사방팔방에 나발을 불고 다녔다. 개방과 하오문의 연락망을 이용해 전 무림에 알려 버린 거다.

그 덕에 비룡문은 축하사절로 미어터지는 중이다.

구파일방 오대세가는 물론이고 어지간한 중소문파에서도 축하 사절을 보내왔으며, 만금상단과 함께 중원상계를 장악하고 있는 나머지 6대 상단에서도 상단주와 후계자들이 직접 예물을 들고 달려왔다.

어디 그뿐이랴?

군부의 실세들 역시 다투어 무한을 찾았다.

총병관 양문광을 시작해서 오군도독부의 수뇌부들이 무한의 비룡문을 방문했고 각 성의 승선포정사에서도 축하사절을 보내왔다.

흑도나 사도에 속한 문파들도 사절을 보내왔다.

무림의 진정한 주인이 누구인지 알아차리고 알아서 기는 것이었다.

하다못해 마교에서 성녀 역할을 하고 있던 진화연마저 눈물을 펑펑 흘리며 달려왔을 정도다. 물론 진화연은 운남 오독문의 문주 이름을 앞세웠다.

“품에 안긴 아기가 없어서 다행이지 원…….”

“혹시 또 모르죠. 뱃속에 있는지.”

그 모습을 지켜보며 주약란과 양하린이 투덜댔다.

특히 주약란은 그동안 비룡문에서 생활해오며 황실에서 못이 박히게 들었던 ‘투기는 죄악이다.’ 라는 말은 아예 잊었는지 목소리가 앙칼졌고 양하린 역시 마찬가지였다.

“너무 그러지 마 동생들. 나도 있잖아. 가가께서는 더는 내 마음을 아프게 하시지 않을 거야.”

내 말이 맞지요? 하듯 제갈영령은 용무린을 향해 초롱초롱한 시선을 보냈다. 붉은 색 비단 신부복을 차려 입은 제갈영령의 눈빛은 보기보다 날카로웠다.

“다, 당연하지.”

황급히 고개를 끄덕이는 용무린의 이마에서 식은 땀 한 줄기가 흘러 내렸다.

그때 용무린을 구해줄 사람이 등장했다.

황제를 대신해 수렴청정을 하고 있는 장본인, 진성왕이 무한의 비룡문을 깜짝 방문했던 것이다.

“쉬이-. 물렀거라. 진성왕야 납신다-아.”

“진성왕야 납시오-오!”

동창의 무인들과 환관들 그리고 어림군들을 잔뜩 거느린 채 진성왕이 호탕하게 웃으며 등장했다.

“하하하. 이 좋은 날 본 왕을 빼놓고 잔치를 벌이다니!”

“왕야!”

용무린이 동그래진 눈으로 진성왕을 바라보았다.

이게 대체 무슨 난리란 말인가?

국정 챙기는 일에도 시간이 모자랄 사람이 이 먼 곳까지 깜짝 등장을 위해 친히 왕림하다니!

“내 괘씸해서 이렇게 직접 찾아왔네! 황룡패주는 혼례가 끝난 후 본 왕이 내리는 벌주 석 잔을 필히 받으라. 아시겠는가?”

파격은 그뿐이 아니었다.

용무린에게는 별 의미도 없는 족쇄를 상이랍시고 내려버린 것이다.

촤락.

황명을 내릴 때 사용하는 황색 두루마기를 펼친 후 진성왕이 크게 외쳤다.

“황명이다. 황룡패주 무림왕 용무린은 선황의 의지에 따라 황제를 옹립하고 지켜낸 대부(代父)였으니 이에 만천하에 그 사실을 공표함으로써 용무린을 친왕의 위에 옹립하고자 한다.”

황제대부이자 친왕!

평범한 인간에게 주어질 수 있는 최고의 명예와 권위가 용무린에게 주어졌다.

위로는 아직 어린 황제 한 사람만이 있을 뿐 진성왕 본인과도 수평적인 지위가 바로 황제대부이자 친왕이라는 위치였다.

“어헉.”

“화, 황제대부…….”

“친왕!”

“그, 그러면 이제 용 친왕 전하라고 불러드려야 되는 거야?”

생각지도 못했던 파격적인 후사에 모두가 놀랐다.

하지만 이내 수긍했다.

다른 사람도 아닌 용무린이라면, 그가 지금껏 무림과 나라를 위해 해온 일들을 생각하면 그깟 황제대부나 친왕의 자리도 모자랐으니까.

물론 용무린의 생각은 달랐다.

겉으로는 호탕하게 웃고 있는 진성왕의 우려와 걱정을 한 눈에 꿰뚫어 보았던 것이다.

‘나라는 존재의 의미가 그렇게 불안했던 것일까?’

나름 이해가 간다.

‘하긴, 황제를 옹립한 당사자임과 동시에 총병관을 비롯한 모든 군권을 한 손에 움켜쥐고 있으며 두렵기만 한 무림의 힘까지 일통한 것이나 다름이 없으니…….’

용무린이 다른 마음을 먹는 순간 나라의 이름이 바뀔 판국이니 걱정이 되지 않으려야 않을 수 없으리라.

‘내가 깨달은 참나가 어떤 것인지 모르는 사람들이니 걱정이 될 수도 있겠지.’

기분이 나쁘거나 불쾌하지는 않았다.

상대의 공연한 우려나 자신을 믿지 못해 생기는 걱정 따위로 감정이 상하기에는 용무린의 의식 수준이 너무 높은 곳에 있었으니까.

그래서 그냥 기분 좋게 웃어 보였다.

보는 이로 하여금 마음이 편안해지게 만드는 환하고 따뜻한 미소였다.

‘후우. 내가 공연한 짓을 한 게로구나.’

그 미소를 보며 진성왕은 자신의 실수를 깨달았다.

용무린은 자신을 비롯한 황족들이 걱정할 필요가 조금도 없는 존재였던 거다.

‘하긴, 사람의 몸을 빌려 강림한 마신조차 소멸시켜 버리는 존재에게 이 세상의 부귀나 영화 따위가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초탈한 용무린의 미소를 보며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용무린은 적이 될 수 없는 사람이라는 것을…….

그걸 깨닫는 순간 진성왕 역시 오롯이 잔치를 즐길 수 있게 되었다.

“와하하. 무엇하시는가, 용 친왕. 신부가 기다리고 계시질 않은가?”

“후후훗. 감사합니다, 왕야. 그럼.”

가볍게 고개를 숙여 보인 용무린이 제갈영령을 향해 돌아섰다. 가슴이 벅차오르는 듯 두 손을 곱게 가슴 앞에 모은 제갈영령이 자신을 바라보며 곱게 미소 짓고 있었다.

“아빠-아. 엄마-아. 우에엥.”

아버지 용대명의 품에 안긴 아들 용천화가 아빠 엄마에게 달려오기 위해 발버둥을 치다 울음을 터뜨렸다.

‘괜찮습니다, 아버지.’

용무린은 용대명을 향해 가만히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리곤 이내 용천화를 향해 두 팔을 활짝 펼쳤다.

“이리 온.”

와다닥.

“아빠-아!”

용천화가 위태롭게 달려와 용무린의 품에 쏘옥 안겼다.

혼례는 그렇게 용천화까지 함께 셋이서 치러졌다.

***

무한의 비룡문에서는 삼 개월을 사이에 두고 두 번의 잔치가 더 열렸다. 주약란 옹주와 총병관 양문광의 금지옥엽 양하린의 혼례가 바로 그것이었다.

당연한 일이겠지만 무한은 내내 축제 분위기였다.

용무린을 축하하기 위해 밀려드는 사람들로 인해 인산인해를 이뤘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이제는 황제대부 용 친왕의 봉토가 아니던가?

불과 일 년 사이 무한은 자금성이 자리한 북경만큼이나 큰 곳으로 성장했다.

연거푸 경사가 치러진 후에도 비룡문은 문전성시를 이뤘다. 어떻게든 용무린에게 잘 보여 출사를 하고 싶어 하거나 무림의 이권을 노리는 사람들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들 중 누구도 용무린을 만나지 못했다.

용무린은 이제 그런 세속의 일 따위는 초월해 버린 듯 내원의 자신만의 공간에서 세 부인과 더불어 가시버시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

비룡문 내원 깊은 곳.

이제는 금역으로 선포된 소담한 정원의 중앙, 흐드러지게 피어난 꽃들 사이 자라난 보리수나무 아래 용무린은 가부좌를 틀고 앉아 생각에 잠겼다.

‘놈은 반드시 온다. 대비를 해야만 해.’

악신 아리만의 귀환에 대해서는 몇몇 사람들에게만 넌지시 일러주었다.

물론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그를 상대할 능력은 지닌 것은 하늘 아래 오직 한 사람 자신뿐, 그 의무는 자신의 차지였다.

‘가장 먼저 할 일은 역시 신족통의 완성이야.’

아리만을 강제 소환시킬 수 있었던 것은 솔직히 조금은 운이 따라줬다고 봐야 한다.

마지막 회심의 한 수를 펼칠 때 신족통을 펼치지 못했다면, 그래서 놈을 불사신공의 힘으로 움직이지 못하게 꽉 붙잡을 수 없었다면…….

‘당하는 것은 오히려 나였을 거야.’

놈에게 공격을 적중시켜 타격을 입히는 것도 좋지만 먼저 순간적으로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어 공격해 오는 놈의 움직임에서 자유로워야 한다.

‘무소부재 무소불위. 참나의 의지를 내 마음대로 원하는 곳으로 보낼 수 있었으니 나 역시 내 몸을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어.’

그것이 바로 신족통이다.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게 되기까지 시간은 조금 걸리겠지만…….’

반드시 놈과 비슷한 수준으로 올라설 자신이 있다.

‘그 다음 챙길 것이 바로 공격이지.’

공간 자체를 베어내던 불사대천검이 무용지물이었다.

불사대천검조차 뛰어넘는, 악신조차 단숨에 베어버릴 수 있는 무공이 필요했다.

다행히 용무린은 그 실마리를 지니고 있었다.

‘그 마음과 의지를 검에 담아야 해.’

용무린은 아리만을 상대할 당시를 떠올렸다.

극에 달한 불사신공과 불사대천검으로도 흠집조차 낼 수 없었던 존재를 강제 소환시킬 수 있었던 힘의 근원은 바로 자비심과 측은지심이었다.

‘그 마음을 검에 오롯이 담아낼 수 있다면? 살의와 같은 부정적인 마음이 아니라 자비와 사랑을 담아 무공을 펼칠 수 있게 된다면?’

비로소 진악의 정반대에 위치한 무공이 하늘 아래 처음으로 탄생하게 되리라.

‘자비와 사랑을 바탕으로 펼쳐지는 것이니 생명에게는 오히려 득이 되겠지만 진악에게는 더없이 치명적인 공격이 되겠지.’

그것이 바로 활생검.

‘불사의 의지가 함께하니 불사활생검이라 해야 할까?’

비이유우-웅.

용무린의 손아귀에 한 자루의 심검이 맺혔다.

‘담아보자.’

심검을 움켜쥔 채 용무린은 가만히 눈을 감았다.

아리만의 진악 본체와 그 강대한 마력을 녹여 없앤 자비심을 심검에 담기 위한 여정에 돌입했다.

성공한다면?

‘아리만이 아니라 그 어떤 부정한 존재가 이 땅에 강림한다 하더라도 능히 강제 소환시켜 버릴 수 있으리라.’

그렇게 시간이 흘렀다.

투명하고 선명한 검보랏빛 마기가 가득한 공간.

잿빛 하늘 아래 끝도 없이 펼쳐진 황량한 대지, 하계의 인간들에게 악몽과도 같은 온갖 기기괴괴한 마수들이 어슬렁거리며 다니는 곳.

그곳이 바로 마계란 곳이었다.

아리만이 뚫어 놓은 인과의 그물을 무사히 통과했다면 해무광이 도착했을 이곳에는 악신으로 불리는 일곱 존재들이 다스린다.

같은 동급의 존재들인 만큼 그 수하들의 숫자나 힘 역시 대등한 상태, 하지만 그 균형이 갑자기 흔들렸다. 아리만의 부상 때문이었다.

휘하의 중, 상급 악마들은 자존심이 크게 상했다.

아리만의 부상을 틈타 하위 악마들이 자꾸만 자신들의 영역을 넘봤던 것이다.

물론 중급 이상부터는 예외였다.

태고에 맺었던 악신들의 계약도 계약이려거니와 영역을 뺏고 자시고 해봤자 선계와의 잦은 분쟁을 생각해보면 별 이득이 없기 때문이다.

아리만 역시 악신이라 불리는 존재.

부상을 입었다지만 그의 힘을 오롯이 흡수해 거듭나기 위해서는 노리는 존재 역시 모든 것을 걸어야 하는데, 그런 위험을 감수할 이유가 없는 거다.

“머저리 같은 놈.”

“천 년 전에도 지킴이란 놈에게 된통 당하고 쫓겨 오더니 또 저 모양이네.”

사탄과 바알은 악신 망신은 홀로 다 시키는 아리만을 한껏 비웃었다.

악신씩이나 되는 존재가, 피 공양까지 듬뿍 받아 무려 삼 할이나 되는 힘을 사용할 수 있으면서 강제소환이나 당해버리다니!

“하여간 우리 마계 망신은 그놈 혼자 다 시킨다니까.”

“동감이야. 힘들게 갔으면 잘 즐기다나 올 것이지, 인간 따위에게 당해 버리다니!”

“부처의 화신이라도 나타났나?”

“아니?! 그럴 리가 없잖아? 부처 그 땡중은 저 위 궁창 위에 들어 앉아 코빼기도 뵈지 않는다고.”

부처는 그들과는 완전히 다른 존재다.

평범한 인간의 몸으로 태어난 후 지극한 깨달음을 통해 마계와 동급인 선계를 거치지 않은 채 창조신이 거하시는 궁창 위로 곧장 올라가 진짜 신이 되어 버렸다.

지닌바 힘의 고하를 떠나 근본 자체가 자신들과 완전히 차원이 다른 존재가 되어 버린 것이다.

“하여간 이번에 주는 기회가 마지막이지?”

“그래. 세 번째니까…….”

사탄과 바알은 아리만이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지, 어떻게 할 것인지 누구보다도 더 잘 알고 있었다. 강제 소환 당한 직후 회복도 뒤로 미룬 채 자신들을 찾아와 하소연을 했기 때문이다.

-면목 없지만, 한 번만 도와줘라.

어차피 세 번째니 이번에도 강제소환을 당한다면 악신이라는 이름을 달고 있을 수도 없겠지.

하지만 반드시 자존심을 회복하고 싶다.

다시 내려갈 터이니 함께 인과의 그물을 찢어줘라. 너희들만 나를 도와준다면 본신의 힘 칠 할을 가지고 하계에 내려갈 수 있단 말이다.

자존심의 회복.

악신답지 않은 그 진지한 요구에, 아니 악신이기에 꼭 해야만 했던 요청에 사탄과 바알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전력으로 마력 회복중이지?”

“응. 오래 안 걸릴 거야.”

“곧 재미있는 걸 보게 되겠군그래.”

“맞아. 성공이든 실패든 정말 재미있는 일이 될 거야.”

두 악신의 시선은 아득히 먼 곳에 자리한 아리만의 대지로 향했다.

그곳에서 아리만은 지금 이 순간에도 전력을 다해 강제소환 당한 후유증을 치유하고 있었다.

***

평화로운 세월이 흘렀다.

어느덧 십 년.

그 사이 비룡문은 명실공히 천하제일가문으로 발돋움해 있었다.

용무린이 그곳에 있다는 이유만으로도 자연스레 그렇게 되었다. 만금상단의 총단이 비룡문으로 아예 자리를 옮겨 버림으로 인해 더더욱 그러했다.

용무린은 대내외적인 활동을 전혀 하지 않았다.

황룡패주나 황제대부로서 황실의 일에 개입하지도 않았고 무림맹주의 자리도 내어 놓았으며 만금상단의 일은 물론이고 어떠한 무림의 일에도 관여하지 않았다.

그저 내원의 정원 한 구석 보리수나무 아래에 좌정을 하고 앉아 한가로이 삼매에 들곤 하는 평화로운 생활을 했을 뿐이다.

물론 무림에 자잘한 분란이 생기지 않은 것은 아니다.

하지만 굳이 용무린이 개입할 필요도 없었다.

무림이란 곳은 살아 있는 생명체와도 같아서 스스로 알아서 자정작용을 했던 것이다.

힘이 모자랄 때는 비룡문이 직접 움직였다.

그것으로 끝.

공명정대한 용대명의 일처리에 선의를 가진 쪽은 기뻐했고 조금이라도 악의를 가진 곳은 단죄를 맞았다.

그 덕에 누구도 용무린이 차지하고 있는 정원을 관리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원은 날이 가면 갈수록 아름답고 풍요로워지기만 했다.

용무린이 뿜어내는 기운 때문이었다.

십 년 내내 용무린이 삼매에 빠져들었던 이유는 자비심과 사랑의 마음을 검에 담아 불사활생검으로 거듭나게 만들기 위해서였다.

그 결과가 눈으로 보였다.

성공이다.

누가 가꾸지 않았음에도 온갖 꽃들과 나무들이 활기를 내뿜고 생명력이 넘치는 이유는 바로 불사활생검이 경지에 올랐다는 명백한 증거였다.

그때 한 무리의 아이들이 손에, 손에 목검을 들고 정원에 들이닥쳤다. 이제는 어엿한 청소년이 되어 가는 용천화를 선두로 한 용무린의 아이들이었다.

“아빠 저기에 계신다!”

“아빠-아!”

“상청무상검법 초식 다 외웠어요.”

“불사신공 호심결 수련도 모두 끝냈어요.”

“놀아줘요, 아빠.”

“우리 술래잡기해요. 예에?”

구김살 없이 해맑은 얼굴의 잘생기고 어여쁜 아이들이다.

그 수가 무려 일곱이나 된다.

녀석들이 동시에 지지배배 떠들고 흔드는 통에 용무린의 삼매가 깨어졌다. 하루 내내 감겨 있던 용무린의 눈이 번쩍 떠졌다.

삼매가 깨어졌음에도 용무린의 입가에는 부드러운 미소가 절로 걸렸다.

삼매 따위 언제든 들 수 있는 수준이기에 화 따위도 나지 않았고 이 정도 방해에 주화입마에 빠질 것은 더더욱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하하하. 너희들 왔구나.”

“네-에!”

“할 것 다 했어요. 아빠.”

“놀아줘요. 네?”

흡사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 같다.

용무린의 얼굴에 맺힌 미소가 점점 더 짙어졌다.

제갈영령에게서 세 아들을 보았고 주약란에게서 아들과 딸, 양하린에게서도 아들과 딸을 보았다. 하나 같이 사랑스러운 아이들이었다.

저 멀리서 화들짝 놀라 달려오는 아내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천화야-아.”

“천명아!”

“다들 어디 있니?”

제갈영령과 주약란 그리고 양하린이었다.

그녀들도 어느덧 삼십 대가 되어 있었는데 완숙한 아름다움은 만개한 모란과도 같았다.

“어머!”

“가가! 삼매에서 깨셨어요?”

아이들의 목소리를 좇아 달려온 그녀들은 삼매에서 깨어버린 용무린의 모습에 화들짝 놀랐다. 그녀들의 상식으로는 삼매나 운공이 이렇듯 강제로 깨어지면 주화입마를 맞거나 좋지 못한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하하하. 나는 괜찮소.”

용무린이 활짝 웃어 보였다.

“정말 괜찮으세요, 가가?”

“그래도…….”

그녀들이 말꼬리를 흐렸다.

자주 보는 일상이었지만 볼 때마다 걱정스런 것이다.

찌릿! 찌리릿!

엄마들의 매서운 눈초리가 아이들에게로 향했다.

“엄마가 아빠 귀찮게 하라고 했어 안 했어?!”

“아빠가 삼매에 들거나 운공 중에 그러면 자칫 큰일 난단 말이야. 왜 자꾸 잊어 버려?”

그녀들로서는 중요한 일이었다.

아이들이 그 사실을 잊은 채 혹여 다른 어른들에게 실수라도 하는 날에는 정말 큰 사달이 나게 될 테니까.

“아빠는 괜찮잖아!”

“우리 아빠는 걱정 없어. 삼매에 들었을 때나 운공을 하고 계신 때에도 우리 목소리만 들리면 그냥 눈을 번쩍 뜨시는 걸?”

“이 녀석들이 정말!”

용천화와 용천명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제갈영령의 매서운 손바닥이 녀석들의 등짝을 왕복했다.

찰싹. 찰싹.

“앗 따가워!”

“아얏!”

그 서슬에 놀란 나머지 아이들이 삽시간에 흩어졌다.

“도망치자!”

“뛰어!”

타탓. 타다닷.

한 순간에 아이들의 모습이 사라졌다.

비천유성신법.

아이들답지 않은 놀라운 속도였다.

“거기 서지 못해?”

“잡히면 아주 혼날 줄 알아-아!”

주약란과 양하린이 짐짓 무섭게 고함을 질렀다.

특히 주약란의 목소리가 앙칼졌는데, 아들 딸 낳고 기르며 평범한 삶을 살다보니 황실에 있을 때의 진중함은 이미 오래전에 사라지고 말았다.

“호호호호.”

그 모습을 지켜보며 제갈영령이 곱게 웃었다.

용무린도 따라 웃는다.

제갈영령이 주약란과 양하린을 손짓해 불렀다.

“동생들! 아이들 쫓아냈으니 어서와. 낭군님께서 모처럼 삼매에서 깨어났으니 우리도 사랑 좀 받아보자고.”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용무린의 왼편에 앉는 제갈영령.

“오른쪽은 내 차지!”

양하린이 잽싸게 달려와 용무린의 오른편을 차지하곤 주약란을 향해 혀를 쏘옥 내밀었다.

“흥! 나는 더 좋은 곳이 있지롱!”

그에 질세라 주약란은 용무린의 무릎에 앉았다.

그것으로도 모자라 용무린의 목을 감싸 안은 채 자신의 가슴으로 끌어당겼다.

“어머머머. 이 언니 좀 봐! 오늘 밤은 내 차례인 거 몰라요? 이거 반칙이에요, 언니.”

“누가 뭐라니? 아직 낮이잖아. 흥.”

이번에는 주약란이 혀를 내밀어 보였다.

확실히 그녀에게서 과거의 모습을 찾아보기란 이제 어려운 일이었다.

그때 용무린이 점잖게 한마디를 했다.

“싫어. 오늘은 한 바퀴 다 돌 거야.”

불사신공의 막강함을 생각하면 몇 날 며칠 밤을 새도 모자란다. 솔직히 작정하고 덤벼들면 그녀들로서는 용무린의 정력을 감당할 수 없었다.

“만세!”

“당신 최고예요!”

제갈영령과 주약란이 두 팔을 번쩍 치켜 올렸다.

“너무해요 가가. 왜 내 차례에만 순회를 하시는 거예요? 다른 언니들 차례에도 순회해줘요. 예?!”

양하린이 볼멘소리를 했다.

“알았어. 자, 약속.”

용무린이 웃으며 새끼손가락을 내밀었다.

“정말이죠? 약속하는 거예요?”

“당연하지.”

양하린이 활짝 웃으며 손가락을 걸었다.

“자, 그러면 오늘은 날도 좋으니 함께 걸어 볼까요?”

제갈영령이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모두가 그 뒤를 따랐다.

용무린과 아름다운 세 아내는 오랜만에 정원을 거닐며 도란도란 대화를 나누었다.

***

어느새 밤이 다가왔다가 아쉽게 날이 밝았다.

약속대로 세 여인의 방을 순회한 용무린은 한 점 피곤함 없는 눈빛으로 다시금 정원을 찾았다.

오늘도 다른 날과 변함없는 좋은 날이었다.

용무린은 환하게 웃으며 항상 앉던 보리수나무 아래 앉아 가부좌를 틀었다.

“다시 또 시작해 볼…… 응?”

용무린의 표정이 갑자기 변했다.

쿠르르르. 콰르르릉.

하늘 전체를 통째 흔드는 그 어떤 거대한 파동을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보는 즉시 바로 알아차렸다.

“오는구나.”

북쪽 하늘 한 귀퉁이가 검게 물들어가고 있었다.

폭풍이 몰려오는 것이 아니었다.

용무린의 눈에는 시간과 공간이 뒤틀리는 사이로 번져가는 검보랏빛 마력이 똑똑히 보였다.

장담했었던 대로 오고 있었다.

아리만이…….

“가자!”

성큼.

용무린이 발을 내디뎠다.

후욱.

이제는 숨 쉬는 것만큼이나 자연스러운 신족통의 힘이 발현되었다.

발을 내딛는 순간 용무린의 몸은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어 북쪽 하늘 아래 아리만이 강림하고 있는 장소로 이동했다.

당장에라도 무너질 듯 하늘이 요동쳤다.

쿠르르르. 콰르르르.

강제로 찢겨 나가는 인과의 그물대신 비명이라도 지르듯 창공이 울부짖었다.

그러던 어느 한 순간.

버언쩌저적.

어둠 깊은 곳에서 검보랏빛 광채가 폭발하듯 일어나더니 갑자기 입을 쩍 벌렸다.

그리고…….

불쑥.

찢겨나간 인과의 그물 사이 한 존재가 모습을 드러냈다.

머리에는 두 개의 커다란 뿔이 자리하고 있었고 벌거벗은 상체는 피처럼 붉은 색이었으며 상상을 초월한 힘을 내포한 근육이 무섭게 꿈틀거리고 있었다.

바로 아리만이었다.

“왔구나.”

설마하니 용무린이 마중 나와 있을 줄은 몰랐던 것인지 눈을 동그랗게 떠 보였던 아리만은 이내 통쾌하게 웃기 시작했다.

“크하하하! 반인반선 놈아. 약속대로 내가 돌아왔다. 나 아리만이 다시 강림했단 말이다!”

쿠르르릉. 쿠콰콰콰-아-앙!

놈의 앙천광소에 하늘 한 귀퉁이가 찢겼다.

그 서슬에 구름이 둥그렇게 동심원을 그리며 사라져갔다.

찌릿. 찌리릿.

놈이 가감 없이 뿜어내는 마력이 용무린의 피부를 심검인 양 마구 찔러댔다.

***

“어헉!”

이제는 장문방장의 자리를 내어 놓은 채 장로원으로 자리를 옮긴 소림의 법정이 헛숨을 들이켰다.

“이, 이런 정도의 마력이라니…….”

휙.

법정의 시선이 북쪽 하늘로 향했다.

가늠할 수 없는 불길함으로 물든 새카만 하늘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서, 설마 그가?”

언제인가 용무린이 했던 섬뜩한 예언이 법정의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맙소사. 왔구나. 정말로 강림하고야 말았어.”

법정의 전신이 푸들푸들 떨렸다.

불사항마력의 성취가 더더욱 깊어진 그였지만, 아리만이 뿜어내는 마력은 사람의 몸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다시금 오백 명으로 불어난 불사항마승 전부와 자신이 함께 모든 힘을 쏟아낸다 하더라도 모래성처럼 쓸려 나갈 것임이 분명했다.

지금 북쪽 하늘 전체를 뒤틀어대는 존재의 마력은 그만큼 강대했다.

“어이할꼬, 어이할꼬…….”

법정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 계속해서 염주알만 굴렸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불안해서 도저히 견딜 수 없었던 것이다.

“세존이시여. 부디 굽어 살펴 주소서…….”

법정은 간절한 마음으로 석가세존을 향해 기원을 올렸다.

그것 말고는 어떻게 할 방법이 없었던 거다.

***

비슷한 시간.

무당파의 장문도장과 화산 장문 옥진, 그리고 개방의 태상장로 화운도 아리만의 강림을 감지할 수 있었다.

그들이 천기를 읽을 정도의 기운이 있기 때문이 아니었다.

용무린을 제외하면 가장 강력한 무인들이 바로 그들, 그 수준만큼 강대한 아리만의 마력을 몸으로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세상에…….”

“이, 이런 정도의 파동이라니…….”

아득히 먼 하늘 아래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이었지만 그들은 피부가 찢기는 듯한 충격을 받았다.

대적?

생각할 수도 없다.

아리만 앞에 서는 순간 그들은 누구라도 몸이 찢어나가거나 터져 죽고 말 것이다.

하지만 아직은 희망이 있다.

자신들이 아리만의 강림을 감지했는데 용무린이 가만히 두고 보고만 있지는 않을 테니까.

“용 대협. 그대만 믿소이다. 그대만…….”

“부디 불쌍한 인간들을 위해 승리해 주시길…….”

무당의 장문과 화산의 옥진은 태상노군께 용무린의 건승을 빌었고 화운은 믿지도 않는 옥황상제를 떠올렸다.

***

“어헉!”

막 수저를 들던 용대명이 펄쩍 뛰었다.

불사신공을 깊이 익히고 있었던 만큼 그 역시 아리만이 강림하며 세상에 뿌린 마력의 파동을 잡아낸 것이다.

“이, 이것은 설마?”

감지하는 순간 바로 알았다.

자신의 아들 용무린이 그토록 기다려왔던 순간이 도래했다는 것을.

“무슨 일이에요?”

눈을 동그랗게 뜬 조연옥이 물어왔다.

하지만 용대명은 뜬 모를 이야기만 불쑥 내뱉었다.

“왔어. 놈이 강림했어.”

“예? 그, 그게 무슨……?”

조연옥이 되물었지만 대답대신 용대명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밖으로 뛰쳐나갔다.

스파아-앙.

전력을 다해 아들이 언제나 삼매에 빠져 있곤 하던 보리수나무 아래를 향해 신법을 전개했다.

“아들아!”

보리수나무 아래는 텅 비어 있었다.

이미 놈의 강림을 감지하고는 맞이하기 위해 떠나버린 것이다.

그때 보리수나무가 피워낸 꽃이 진한 향기를 뿜었다.

용대명은 문득 깨달았다.

삼매에 빠져든 것만으로도 이곳을 이토록 생명력 넘치는 곳으로 바꿔놓은 용무린이라면 제 아무리 악신 아리만이라고 해도 능히 감당할 수 있을 것임을.

“믿는다, 아들아.”

용대명의 단단한 시선이 북쪽 하늘로 향했다.

새카맣게 몰려온 먹장구름 사이 번득이는 검보랏빛 마력이 더는 두렵게 느껴지지 않았다.

***

파라라락.

용무린의 옷이 곧이라도 찢어질 듯 펄럭였다.

그것은 곧 자신의 마력이 용무린의 힘을 월등히 뛰어넘는다는 증거, 아리만이 비릿하게 웃었다.

“크흐흐흐. 시건방진 반인반선 놈. 반드시 찢어 죽이고야 만다.”

정말 자신 있었다.

십 년 전에는 인과의 그물을 뚫고 나오느라 본신의 힘 중 겨우 삼 할 밖에는 사용할 수 없었지만 이번에는 사탄과 바알의 도움으로 무려 칠 할까지 사용할 수 있었으니까.

물론 그만큼 위험했다.

칠 할의 힘을 사용할 수 있다는 사실은 마계에 있어야 할 진악의 본체 대부분이 이곳으로 넘어 왔다는 뜻이기 때문이었다.

만에 하나, 이곳에서 다시 또 당한다면 강제소환 이후를 장담할 수 없었다.

‘물론 그래도 소멸당하는 것은 아니지.’

다만, 그렇게 되면 마계로 돌아간다 해도 형편없이 줄어든 마력으로 인해 악신으로서의 지위를 잃게 된다.

‘어쩌면 사탄과 바알이 삼 할 밖에 남지 않은 나를 흡수하려 들 거야.’

마계의 마력 따위로는 더는 발전할 수 없는 존재들이 바로 악신들이다. 아득한 세월 동안 정체된 상태로 지내 온 그들에게 자신의 불행은 현재의 힘을 뛰어넘을 수 있는 최고의 기회일 것이다.

‘흥. 그건 어디까지나 내가 이 반인반선 놈에게 당했을 때 이야기야.’

당연한 이야기다. 이기면 끝이다.

칠 할의 힘을 가지고 내려왔는데 반인반선 놈 따위에게 질 리가 없는 거다.

그런데…….

오싹.

갑자기 아리만의 등골을 타고 소름이 쫙 돋았다.

‘뭐, 뭐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분명히 손가락 하나만 간단히 뻗으면 소멸시켜 버릴 수 있을 정도로 비리비리해 보이는데 왜 갑자기 자신이 추위를 탄단 말인가?

‘내 힘을 느끼지 못할 리 없을 텐데. 저놈은 왜 저렇게 여유만만하지?’

너무나도 유유자적한 용무린의 태도가 거슬렸다.

솔직히 말하면 등골이 서늘했다.

뭘까? 반인반선 따위가 대체 뭘 믿고 감히 자신 앞에서 고개를 빳빳이 세우고 바라보는 것일까?

그때 용무린이 한마디 툭 던졌다.

“덤벼.”

꿈틀.

타는 듯 붉은 아리만의 눈썹이 거칠게 요동쳤다.

“이런 시건방진!”

다시금 자존심에 생채기가 났다.

자신이 무엇 때문에 기를 쓰고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인과의 그물을 다시 찢고 강림했는지가 떠올랐다.

“말이 필요 없다, 이거지? 오냐, 좋다.”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후욱.

꺼지듯 그 자리에서 사라진 아리만이 용무린의 등 뒤에 나타났다.

“흐아압!”

콰르르르.

단숨에 으깨어 주겠다는 듯 마력을 끌어 모아 용무린의 척추를 후려쳤다.

하지만 용무린은 이미 그 자리에 없었다.

허망한 헛손질!

어느 틈엔가 용무린이 자신이 서 있던 공간을 차지하고 여유롭게 떠 있었던 것이다.

신족통.

십 년 전처럼 쭉 늘어나는 환영조차 없다.

아무런 흔적도 기척도 없이 깔끔한 발현이었다.

악신인 자신과 같은 능력이며 자신과 대등한 수준이 분명해 보였다.

“너…….”

황당한 듯 아리만이 말꼬리를 늘였다.

강제소환 당한 후 마력과 진악의 본체를 회복하는 그 짧은 사이 어떻게 신족통의 능력이 자신과 같은 수준에 올라설 수 있단 말인가?

“훗. 놀라긴…….”

거기에 더해 이제는 비웃음까지.

아득.

이를 갈아 붙인 아리만은 마음을 고쳐먹었다.

“오냐, 좋다. 네 능력이 태고부터 마신들과 싸워온 선계의 선신 놈들과 같다고 인정하마.”

영원히 이어질 신마대전의 대상.

필생의 숙적으로 인정한 이상 이제 놀이는 끝이다.

“전력을 다해 부숴버린다-아-앗!”

훅.

신족통을 발휘해 꺼지듯 사라진 아리만이 용무린의 사선에서 뚝 떨어져 내렸다. 그보다 더욱 빠른 속도로 마력 덩어리가 뻗어왔다.

물론 그냥 맞아줄 용무린이 아니었다.

이미 경지에 이른 신족통을 발휘해 아리만의 공격을 간단히 피해냈다.

아리만의 공격은 이번에도 헛손질로 끝났다.

하지만 아리만의 감각은 공간이동을 한 용무린의 위치를 바로 감지해냈다. 바로 공격이 이어졌다.

“거기냐?!”

후욱.

다시금 공간이동을 이용해 공격해 오는 아리만.

그에 발맞춰 용무린 역시 자유자재로 신족통을 펼쳐 내기 시작했다.

훅. 후욱.

동에 번쩍 서에 번쩍이라는 말은 이럴 때 쓰는 것이다.

용무린과 아리만은 하늘 끝에서 끝까지 이리저리 위치를 바꾸며 서로의 꼬리를 잡으려 했다. 흡사 아이들의 숨바꼭질을 보는 듯하다.

하지만 이래서야 어찌 승부를 낼 수 있겠는가?

결국 손속을 나누고 마주쳐야만 상대를 거꾸러뜨릴 수 있는 것이다.

‘부딪치기만 하면 단숨에 피 떡을 만들어 줄 수 있는데.’

아리만은 자신했다.

용무린이 자신과 같은 수준의 신족통을 사용하고는 있었지만 순수한 힘만큼은 자신이 월등히 위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 생각을 비웃기라도 하듯 용무린이 드디어 제자리에 멈춰 섰다.

버언쩌저적.

예의 심검 한 자루를 손에 뽑아 올렸다.

두 자루도 아닌 한 자루.

그 빈약함을 한껏 비웃어주며 아리만에게 쳐들어갔다.

“크하하하. 죽어라-아!”

휘우우우웅. 콰르르르릉.

강대한 검보랏빛 마력이 창공을 송두리째 찢어내며 용무린을 향해 밀려왔다.

반짝.

용무린의 눈이 시린 빛을 발했다.

‘어둠은 빛의 부재.’

악의를 뛰어넘는 법은 증오나 분노가 아닌 자비와 사랑임을 누구보다도 더 잘 안다.

그래서 그러한 마음을 검에 오롯이 담았다.

그렇게 탄생한 것이 바로 불사활생검.

‘정면에서 받아내 주마.’

비이유우-웅.

용무린의 손에 들린 심검에서 신묘한 빛과 떨림이 일기 시작했다.

그것은 바로 자비와 사랑의 빛.

그리고 생명의 파동이었다.

굼실. 휘리릭.

용무린이 생명의 춤을 추기 시작했다.

봄을 맞아 약동하는 생명력이 대지에 움트듯 생명의 힘을 가득히 머금은 심검이 나래를 폈고 부드럽게 전면을 한차례 휘감았다.

그러자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쩌어어어-억!

아리만이 뿜어냈던 진악 본체 칠 할의 힘이 집약된 마력이 너무나도 쉽게 갈라나갔던 것이다.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마력을 두 쪽 내버린 것으로도 모자라 쭉쭉 뻗어나간 생명의 힘은 아리만의 가슴에 커다란 생채기를 내었다.

쫘아악.

아리만의 가슴이 크게 벌어졌다.

커다랗게 갈라진 그 틈에서 피가 뿜어지듯 검보랏빛 마력이 뿜어져 나와 허무로 돌아갔다.

“우와아-악!”

아리만이 고통에 찬 비명을 질렀다.

그리고 절규했다.

“어떻게! 어떻게-에?!”

아리만은 현실을 믿을 수가 없었다.

그토록 오랜 세월 싸워 온 선신계의 신선 놈들도 자신의 공격을 이렇듯 손쉽게 갈라내고 상처를 입힐 수 없었는데 대체 저 반인반선의 공격은 뭐란 말인가?

용무린이 불쑥 내뱉었다.

“또 간다. 받아봐.”

용무린의 공격이 가차 없이 계속 이어졌다.

굼실. 휘슷. 버언쩌저적.

약동하듯 솟구쳐 오른 심검이 나래처럼 펼쳐진다.

그 끝에 걸리는 마력이 너무나도 힘없이 갈라지고 찢겨져 흩어졌다.

피쉿. 서걱.

심검에 걸린 자비와 사랑의 마음은 생명의 파동이 되었다. 그 힘은 마력을 찢어내고도 모자라 아리만의 진악 본체를 훑고 지나갔다. 그때마다 검보랏빛 마력이 피를 뿌리듯 뿜어져 나왔다.

“커헉. 크아악.”

아리만은 연신 비명을 질러야만 했다.

생각지도 못했던 압도적인 공격에 뭘 어떻게 해야 할는지 하나도 떠오르지 않았다.

버언쩍. 서걱. 서거걱.

“크아악. 허억.”

연신 비명을 질러대던 아리만의 전투본능이 요란하게 경고성을 발했다.

‘이, 이러다 또 당한다.’

태고부터 선신들과 싸워왔던 전투본능이 재빨리 한 가지 가능성을 찾아냈다.

이 상황에 사용할 수 있는 최고의 방법.

‘동귀어진!’

세상에, 악신이 반인반선 따위의 힘에 눌려 동귀어진 따위나 생각해야만 하다니!

기가 막혔지만 아리만은 다른 방법을 찾지 못했다.

자존심이고 뭐고, 이 땅에 다시 강림했던 목적만이라도 달성하려 들었다.

“크아아압!”

버언쩌적.

살을 내주는 대신 용무린의 뼈를 취할 생각으로 모든 마력을 집중시켜 심검의 일종인 마력의 검을 만들어 낸 후 똑같이 맞받아쳤다.

서걱.

용무린의 심검이 다시금 자신의 마력을 가르고 들어와 목 어림에 깊은 생채기를 내놓는 순간을 노렸다. 기를 쓰고 마력의 검을 뻗어냈다.

“죽어어-엇!”

퍼어억.

아리만이 만들어 낸 마력의 검이 기어이 용무린의 복부 깊숙이 꽂혔…….

파사사삭.

“어헉? 이, 이럴 수가…….”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용무린의 복부를 짓쑤시던 마력의 검이 피부에 닿기도 전에 유리처럼 부서져 버린 것이다.

담담한 눈으로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용무린이 악신으로서는 도무지 믿을 수 없는 말을 꺼냈다.

“어둠은 빛의 부재야. 자비와 사랑의 마음으로 생명의 빛과 파동 그 자체가 된 나에게 네 어둠 따위는 아무런 영향을 미칠 수 없어.”

“…….”

아리만은 입만 쩍 벌린 채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혼란하기만 했다.

‘아무리 그렇다고는 하지만, 나의 마력이라면……. 아득한 세월 동안 마계라는 세상 자체를 떠받치고 있던 어둠의 근원적인 힘의 결정체라면 저럴 수가 없을 터인데…….’

아리만 역시 용무린의 말이 옳다는 것 정도는 안다.

하지만 그것이야 어디까지나 원론적인 말이다.

그 말이 옳다면 선계의 선신 놈들과 지금껏 싸워올 수조차 없었으리라.

‘선신 놈들도 이렇게는 하지 못하는데……. 그놈들도 이 정도는…….’

아리만이 계속해서 얼빠진 얼굴을 하고 있을 때 용무린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제 그만 가라.”

굼실. 휘슷.

불사활생검 춤사위가 다시금 펼쳐졌다.

한없는 자비와 사랑의 마음이 집약된 생명의 빛과 파동이 심검에 실려 봄바람처럼 부드럽게 아리만의 전신을 훑고 지나갔다.

그것으로 끝.

용무린은 더는 움직이지 않았다.

그때 아리만의 떨리는 시선이 용무린에게로 향했다.

“서, 설마. 붓다의 화신?”

아리만은 아득히 오래 전 엄청난 규모로 벌어졌던 신마대전 당시 중재를 위해 살짝 열린 궁창의 틈으로 부처를 직접 본 적이 있었다.

그때 분명히 느껴보았다.

부처가 내뿜는 지독한 상극의 힘을…….

‘그 힘이야. 우리 같은 마계의 존재들에게는 그 어떠한 힘보다도 더 지독하게 작용하는 그 힘이라고.’

너무 오래전에 느껴봤던 힘이라 긴가민가했지만 이제는 확실하게 알 수 있다.

용무린이 펼쳐내는 힘은 바로 부처의 그것이었다.

아니, 정확히 똑같지는 않다 하더라도 같은 계열인 것만은 틀림없었다.

피식.

용무린이 가볍게 코웃음을 치며 답했다.

“붓다의 화신은 무슨……. 그냥 인간이야 인마.”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듯 아리만의 입이 쩍 벌어졌을 때였다.

틱. 티디딕.

아리만의 전신에 하얀 실금이 이리저리 생겨났다.

갈라진 그 틈으로 검보랏빛 마력이 마구 새어 나왔다. 허무하게 흩어져 사라졌다.

‘빌어먹을. 이렇게 끝나는구나.’

아리만은 비로소 모든 것이 끝났음을 직감했다.

믿기지도 않았고 마냥 어처구니없기만 했다.

그러다 문득 떠올랐다.

‘언제고 저놈 역시 선계에 오를 텐데…….’

용무린이 부처의 화신이든 아니든 그것은 필연이었다.

‘큰일이로군.’

대비가 필요하다고 느껴졌다.

놈이 작정하고 선계에서 저 무지막지한 힘을 사용하게 된다면 어둠에 속한 마계의 존재들로서는 막을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이런 생각이 퍼뜩 들었다.

‘내가 왜? 누구 좋으라고?’

자신이 마계로 강제소환 당한 후 벌어질 일들이 머릿속에 쭉 흘러갔다.

‘내 진악 본체는 이제 겨우 삼 할 밖에 안 남았어.’

자신을 도와 인과의 그물을 찢어낸 사탄과 바알이 가만히 두고만 보고 있지는 않을 터, 십중팔구는 자신의 남은 진악 본체를 흡수해 힘을 키우려 할 것이다.

태고에 맺었던 계약 따위, 세 번의 패배와 삼 할 밖에 남지 않은 진악 본체로 인해 유명무실해질 테니 그들에게 거칠 것은 없다.

‘힘을 얻으면 하계에 보다 쉽게 내려 올 수 있겠지?’

놈들 역시 드문드문 강림한다.

수백만 인간의 피를 흘리게 만드는 대 전쟁이 바로 녀석들 작품인 거다.

‘그때가 되면 놈들도 알 수 있겠지. 이 세 번째 땅에 터무니없는 존재가 있다는 사실을.’

놈들이 자신의 힘을 흡수하든 어떻게 하든 아리만은 알 수 있었다. 어둠에 속한 그 어떠한 힘을 가지고 온다 하더라도 용무린을 감당할 수 없을 것임을.

‘푸흐흐. 그것이 나의 복수다.’

놈들에게 자신의 남은 힘을 흡수시켜 하계로의 강림을 돕는 것이 인간과 용무린에게 향한 첫 번째 복수.

그리고 자신의 힘을 흡수한 사탄이나 바알이 이 땅에 강림한 후 저 무시무시한 인간에게 당하게 만드는 것이 바로 두 번째 복수다.

“크크흐하하하. 시원하구나-아.”

퍼어어-엉!

한 차례 통쾌한 웃음을 끝으로 아리만의 진악 본체가 폭발했다. 허무하게 흩어져 사라져 버렸다. 다시금 강제소환 당해 버린 것이다.

“뭐지?”

지켜보고 있던 용무린의 고개가 갸웃 기울었다.

생각지도 못한 패배에 오만상을 찌푸려야 할 놈이 통쾌하게 웃는 것을 보니 뒷맛이 개운치 않았던 거다.

“또 오려고 그러나?”

거기까지 생각이 미쳤지만,

피식.

용무린은 그저 한 번 풀썩 웃고 말았다.

“와 보든지…….”

그 한마디를 끝으로 용무린이 걸음을 내디뎠다.

후욱.

***

비룡문으로 다시 돌아온 용무린은 더는 수련 따위를 하지 않았다.

삶의 본질, 생명의 본질, 빛과 어둠의 상성을 완전히 깨달아 그 자체가 되었기에 더는 수련 따위가 필요치 않았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용무린의 성취는 점점 더 깊어졌다.

스스로 다스려 갈무리했기에 몸 주변에 가득하던 후광도 더는 뿜어지지 않았지만 자비와 사랑으로 인한 생명의 빛과 파동은 점점 더 강해졌다.

말라 죽어가는 꽃도 용무린의 손길만 닿으면 다시 되살아나 꽃망울을 틔웠다. 온갖 새와 동물들이 두려움도 없이 몰려와 용무린의 주변을 맴돌았다.

한 번 맺어진 인연이기에 부부관계는 계속되었다.

건강하고 잘생긴 아이들이 해마다 한두 명씩 계속해서 늘어갔다.

용무린은 자신의 아이들에게 따로 무공을 가르치지 않았다. 대신 생명을 대하는 마음가짐과 삶의 본질, 그리고 빛과 어둠의 상성에 대해 강론하듯 알렸다.

아이들은 구김살 하나 없이 자라났다.

용무린의 가르침 때문인지 심성이 바르고 고와 벌써부터 대협의 기질을 보이는 아이들도 여럿이었다.

그 중에는 공자나 장자와 같은 대학자의 기질을 보이는 아이들도 있었다. 자라오며 계속해 강론 받아 온 ‘참나’의 본질을 그들 역시 느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세월이 흘렀다.

용무린의 나이도 어느덧 지천명이 되었다.

오랜만에 보리수나무 아래 가만히 앉아 선정에 들어 있던 용무린은 어째서 아리만이 그토록 통쾌하게 웃었는지에 대해 불현듯 깨달았다.

피식.

가벼운 웃음이 절로 터졌다.

“얍삽한 녀석.”

그러자니 갑자기 슬쩍 우려가 되었다.

언제가 때가 되면 자신 역시 이곳을 떠야 할 터인데, 그때의 인간들이 악신이란 존재의 강림을 감당해 낼 수 있을 것인가?

“조금 무리겠지?”

자신의 아이들이 자신이 건넨 깨달음을 모두 소화해 낸다면 모를까 어림없는 일이었다.

“내가 건넨 깨달음을 모두 소화해 낸다?”

생각해보니 그것도 만만한 일이 아니었다.

“하긴, 그리 쉬운 일이었다면 온 세상에 부처들로 넘쳐나게 되겠지.”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그래서 용무린은 한동안 고민에 빠져 있었다.

그러던 어느 한 순간 용무린이 자리를 박차고 벌떡 일어났다.

“에이, 모르겠다. 그냥 내가 다 정리해 버리자.”

적절한 수위의 악은 깨달음에 도움이 된다. 교훈으로 선함의 자양분이 되는 것이다.

하지만 강대한 악은 ‘참나’를 잊은 양민들에게 헤어날 수 없는 고통일 뿐이다.

악신이라 불리는 존재는 강대한 악이었다.

용무린은 놈들이 더는 하계에 강림할 수 없도록 연결의 고리를 끊어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자, 그러면 가 볼……. 아차.”

선계를 향해 발을 내딛던 용무린이 잠시 멈칫했다.

잊고 있던 한 가지가 떠올랐던 것이다.

“선계의 시간과 이곳 시간이 다르다고 하지?”

바둑 잠시 구경했다가 도끼 자루가 썩어 버렸다는 나무꾼 이야기도 있지 않은가? 말도 없이 가버렸다가 이대로 생이별이 될 수도 있는 일이었다.

“혹시 모르니 얼굴이나 한 번씩 보고 가야 되겠군.”

용무린은 즉시 아이들과 부인들 그리고 아직까지 정정한 아버지와 어머니에게 자신의 마음을 보냈다.

-선계에 좀 다녀올 겁니다.

마치 동네 산책이라도 다녀오겠다는 투였다.

하지만 그 대상이 선계라는 황당함에 용무린의 의념을 전해들은 모두가 황급히 달려왔다.

“아버지! 선계라니요?”

“금선탈각한 신선들이 모인다는 그 선계요?”

“정말요?”

아들과 딸들은 무슨 동화 속 이야기를 듣는 양 초롱초롱한 눈이었다.

부인들 역시 황당하긴 마찬가지였다.

“선계가 무슨 동네 이름도 아니고…….”

“그게 그렇게 쉽게 다녀올 수 있던 곳이었던가요?”

“정말 선계로 가시나요? 우리가 다 알고 있는 그 선계 말이에요?”

동그랗게 눈을 뜬 얼굴로 한마디씩 했다.

자신들의 남편이 일반적인 무인들과는 전혀 다른 초월적인 분위기를 풍긴다는 것을 잘 알고는 있었지만, 그렇다고는 해도 옆 동네 다녀오듯 잠시 선계를 다녀오겠다고 할 줄은 몰랐다.

용대명과 조연옥만이 달랐다.

말 그대로를 믿어주며 전폭적인 지지를 보냈다.

“그래. 너를 믿는다. 잘 다녀오거라.”

“건강 조심해 아들. 끼니 거르지 말고. 알았지?”

마지막은 조연옥의 말이었다.

반인반선으로서 악신 아리만까지 두 번씩이나 강제소환 시킬 능력의 소유자인데도 불구하고 어머니는 걱정이 되었나 보다.

“예, 어머니. 걱정하지 마세요.”

그럼에도 용무린은 싹싹하게 대답했다. 넘쳐나는 어머니의 사랑에 대한 보답인 것이다.

용무린은 차례차례 지금껏 맺어 온 인연들과 시선을 맞추었다.

‘참 좋은 인연들이었다.’

다시 경험하기로 결정한 것이 조금도 후회되지 않았다.

용무린은 이어 몇몇 사람들에게 의념을 남겼다.

-선계에 좀 다녀올 겁니다. 조금 늦더라도 오긴 올 터이니 무림을 잘 부탁합니다.

아직까지 정정한 소림의 태상장로 법정과 화산의 옥진도장, 그리고 무당의 장문과 개방의 화운 태상장로에게 보내는 의념이었다.

아무리 거리가 멀어도 상관없었다.

다들 잘 알아들었으리라.

‘자, 그러면 어디 한 번 출발해볼까?’

용무린은 의식의 초점을 선계로 맞추었다.

한 번도 가보지 못한 곳이었지만 가는데 아무런 문제가 없을 것임을 이미 안다.

‘마음이 가는 곳에 나도 함께 가는 거지.’

그것이 바로 신족통 아니겠는가?

성큼.

용무린이 발을 내디뎠다.

그런데…….

버언쩌저저적.

갑자기 동쪽 하늘에 휘황찬란한 광채가 일었다.

황금빛 찬란한 상서로운 빛이 동쪽 하늘 전체를 틀어쥐는가 싶더니 갑자기 하늘이 쩌억 갈라졌다.

아아아아아.

형언하기 힘들만큼 성스러운 노랫소리가 들려왔다.

그와 동시에 거룩한 어떤 목소리가 하계 전체를 떨어 울렸다.

-기다리고 있었느니라. 어서 오너라. 환영한다.

커다란 무지개가 하늘 끝에서 뻗어 오더니 비룡문의 내원, 정확히는 용무린의 발아래 와 닿았다.

“어어어?”

조금은 당황스러워하는 용무린.

‘저긴 선계가 아니야.’

자신은 분명히 선계에 의식을 맞추었다.

그런데 왜 전혀 다른 엉뚱한 곳이 열린 것일까?

게다가 용무린의 눈에는 똑똑히 보였다.

자신을 향해 염화시중의 미소를 지어 보이며 두 손을 내미는 어떤 거룩한 존재를…….

“부, 부처께서 갑자기 왜……?”

후욱.

그 말을 끝으로 용무린의 몸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그 날, 이 땅에 세 번째로 궁창이 열렸다.

첫 번째는 고타마 싯다르타가 수행을 마치고 부처가 되어 하늘에 오를 때였다. 두 번째는 이곳에서 아득히 먼 곳에 자리한 곳의 예수라는 화신이 하늘에 오를 때였고 지금이 바로 세 번째였다.

“부처님이라고 했지?”

“예, 아버님.”

“진짜 우리가 아는 그 부처님일까?”

조연옥의 질문에 제갈영령은 한참을 생각하다 이렇게 답했다.

“모르겠어요. 하지만 이미 무신이 되신 그분의 등선이시라면 부처께서 마중을 나오실 법도 하다고 생각해요.”

제갈영령의 말에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꼭 돌아와 주세요. 기다리고 있을 게요.’

제갈영령은 희미해져가는 상서로운 빛을 바라보며 용무린의 무사귀환을 빌고 또 빌었다.

신마귀환 <완결>

후기.

신마귀환의 이야기는 이렇게 끝이 났습니다.

그동안 부족한 글 읽어 주신 독자 여러분께 고개 숙여 깊은 감사의 인사를 올립니다.

사실, 솔직히 말하자면 저 뒤로도 쓸 이야기가 더 있긴 했습니다.

부처를 만나고 선과 악에 얽힌 모종의 비사가 있고 그래서 마계와도 싸우고 사탄과 바알이 날뛰는 다른 이계로도 가고…….

하지만 쓰다 보니 이건 도저히 무협이 아니더군요.

그래서 고민 끝에 반 권 분량을 그냥 날려 버렸습니다.

조금 아깝긴 하지만, 무협으로서의 신마귀환은 이곳까지가 적절하다고 판단한 것입니다.

모르겠습니다.

언제고 때가 되면 이 뒷이야기를 쓰게 될 수도…….

공연히 깨달음을 소재로 삼아 후반부에 글이 늘어지게 된 것 같아 조금 후회를 했습니다.

그래서 다음 글은 그냥 힘에 치중하려 합니다.

아마, 신마귀환보다는 훨씬 더 파괴적이고 능동적이며 호쾌한 주인공이 나올 듯합니다.

깨달음 따위 안 쓸 겁니다.

그냥 막 다 때려 부숴 버릴 생각입니다.

감사합니다.

신마귀환 12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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